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예수님 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요한복음의 시각, 즉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하늘의 시각으로 말씀의 은혜를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참 빛이시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심지어 죽이려고 했습니다. 악해서 그랬고, 약해서도 그랬으며, 진리와 실리 사이에 끊임없이 저울질하며 결국 실리를 택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곁에서 자신들이 하는 일이 뭔지 모르는 로마 군인들과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한 여인들의 대조되는 모습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남기신 두 마디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말씀은 내가 목마르다…두번째 말씀은 다 이루었다…입니다. 이 두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셨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돌아가시다, 숨을 거두시다, 라는 말도 있는데 오늘 말씀에는 영혼이 떠나가시다…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이 이 두 마디를 하고 십자가에서 영혼이 떠나가시며 죽으셨습니다. 마지막에 남기신 두 마디, 그 첫번째가 바로 “내가 목마르다.”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타는 목마름으로 목마르다…말씀하신 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섯 시간 넘게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계시니까…그 고통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온 몸에서 그렇게 피와 물을 다 쏟으셔셔 목마르다… 말씀하시는 그 절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시고 있는가를 온몸으로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는 이 말씀은 단순히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당하시는 육신의 고난과 갈증, 목마음을 위해서만 하신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요한복음은 이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라는 선언이 모든 일이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말씀하셨다고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내가 탈진 직전에 있어 너무 목이 마르다…라는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내가 목마르다…는 선언의 육신의 목마름을 넘어서는 깊은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그 목마름은 예수님이 곧 영혼이 떠나가시고 바로 직면하시게 될 지옥의 실체, 즉 지옥 고통의 현장의 실체를 바라보시며 내가 목마르다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의 고백 중에 한글에서는 빠져서 고백하지 않는 영어에서 분명히 고백하는 부분이 예수님이 죽음 이후 지옥에 가셨다 (descended into hell)는 고백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 직전, 이야기 바로 앞에 영어에는 분명히 예수님이 지옥으로 가셨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게 사도신경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곧 죽으시고 장사 지내는 3일 동안 가실 곳은 바로 지옥을 통과하시는 겁니다. 지옥이라는 곳은 내가 한번 고통받고 죽어 끝나는 데가 아니라 영원한 형벌, 영벌이 있는 곳입니다. 죽을 고통이 있는데 죽지 않는 겁니다. 고통과 죽지 않음이 함께 있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이게 상징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는 말씀을 주셨는데 그게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사건입니다. 이 땅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다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와 달리, 부자는 죽음 후에 음부에 던져졌는데 그 지옥불로 인한 고통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그 고통이 커서 너무 커서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혀를 제발 서늘하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지옥에 던져진 사람들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이 바로 지옥불 때문에 경험하는 타는 목마음…이라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선언하시는 내가 목마르다…라는 의미는 바로 그 음부의 초입에서 지옥에 타는 목마음을 경험하려고 직전에 계신 선언인 겁니다. 단순히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그 끔찍한 고통만 보시면 안 되고 그거는 빙산의 일각이고 곧 예수님이 체험하시는 고통은 뭐냐면 더 비교할 수 없이 끔찍한 지옥고인 것입니다.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이 나에게 영벌 대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다 겪으시며 죽으시는 겁니다. 그 영원 형벌이 있는 지옥에 가시며 그 지옥고를 온몸으로 느끼실 것을 아시기에, 바로 내가 목마르다…선언하신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 공로 아니면 저와 여러분들에게 기다리는 것이 영원 형벌, 영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내가 목마르다…는 영적 의미는그 지옥의 고통 가운데 목마음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부활을 통하여 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영광의 성취의 목마음이라는 선언임을 알아야 합니다. 히딩크 감독이 나는 여전히 승리에 목마르다…한 말과 비슷한 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종의 영광과 십자가의 영광을 통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구원의 모든 것을 이루는 역사, 이것에 목마르신 겁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명을 다 이루었다…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간절한 목마름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시기 직전 선언하신 “다 이루었다” 말이 “I am finished.” 내가 끝냈다가 아니라, “It is finished.” 그게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이 모든 게 이루어지는 것을 아신 겁니다.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선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다 이루었다…예수님 말씀이 죽음 직전에 패배자 같이 그냥 희미한 모기 소리로, 어쩔 수 없이 내신 소리가 아니라 놀라운 승리의 선포이며 함성이었다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정말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정말 내가 해냈다 완주했다는 놀라운 승리 선언인 것입니다. 내 인생을 정말 잘 살고 제대로 살았다 평가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죽음을 앞에 두고 내가 “it is finished..”라고 말할 수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이 내 삶을 통해 풀어지고 이루어졌는가…로 평가되는 삶입니다. 가장 복되고 형통한 인생이란 하나님 말씀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고 펼쳐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내 인생이 사용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에 타는 목마음, 간절한 목마름은 그저 내 상황과 환경이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을 통해 이루어지며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쓰임 받는 목마름임을 잊지 마십시오. 영원 형벌에서 나를 건지신 그 십자가 사랑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죽음이 끝이 아닌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형벌에서 영원한 생명 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목마음을 가지고 내 죽음 앞에서 숨을 거두어 가시는 그 때, 내가 하나님 뜻 가운데 사명 잘 감당하고 주님 앞에 돌아갑니다…고백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십자가 곁에 있는 두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그룹은 로마 군인들, 두번째 그룹은 여인들입니다. 요한복음은 하늘의 관점으로 위에서 아래로 바라보는 십자가 사건을 증언하기에 이 두 그룹이 누구를 대표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에 아무런 관심도 없고 무관하게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여인들은 모두가 떠나가도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키는 주님의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이 두 그룹은 십자가 곁에서 완전히 대조되는 모습으로 서 있으며 나는 십자가 곁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기 원하는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로마 군인들은 칠 흙 같은 무지와 어두움으로 뒤덮혀 있는 인간들을 대표하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죽으시는지, 피를 다 쏟으시며 고통받으시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몸에 채찍을 맞으셨고 가시 면류관을 쓰셨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고 계시는 극도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고통을 당하시던 말던 온몸에서 피를 쏟던 말던 아무 상관 하지 않고, 거기서 웃고 떠드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들이 관심 갖는 건 전리품과 같이 죽어 가시는 예수님의 옷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옷이 별로 비싸지 않지만, 그 당시에 옷은 다 손으로 만드는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군인들에게 예수님의 걸치신 옷들은 다 본인들이 공짜로 가질 수 있는 전리품 정도로 여긴 겁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십자가 곁에서 관심 있는 건 전리품, 오직 자신의 이익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그런 안타까움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철저히 나와 무관한 사건이고 나와 상관 없는 사건이고, 그저 나의 이익인 옷에만 관심이 가득한 자였습니다. 심지어 오늘 말씀은 성경은 예수님의 겉옷만 군인들이 뺏어간 게 아니라 예수님의 속옷도 뺏어갔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장 수치스럽고 모욕스럽게 옷 하나 걸치지 못하시고, 겉옷도 속옷도 다 뺏기고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피 흘려 죽어 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요한복음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에서 로마 군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지금 예수 십자가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챙기며 기뻐하는 그들이 얼마나 하늘에 큰 죄를 짓고 있는지 그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많은 사람들,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들의 삶의 자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 흘리시고 고통 당하시는 예수님이 나에게 아무런 상관 없는 무관한 일로, 아무 관심도 없는 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둠에 뒤 덮혀 있고 눈이 가려져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나와 상관없는 일로만 여기고 이 땅에만 몰두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나의 이익이나 실리에만 관심이 있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든 말든, 고통 속에서 죽어 가시든 말든 아무런 상관없는 삶, 이것이 십자가 곁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두번째, 이 로마 군인과 함께 십자가 곁에 서 있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죽어 가시던 그 십자가 곁에 끝까지 의리를 지켰던 사람들은 여인들이었습니다. 남자들이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숨고 그저 요한 한 사람 남아 있고 끝까지 예수님의 곁을 십자가 곁을 지켰던 자들은 그 여인들이었다는 겁니다. 지금도 교회를 끝까지 지키는 분들은 남성 보다는 여성분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십자가 곁을 지키는 여인들 중에 누가 있었냐 하면 예수님의 친어머니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사실 부모에게 가장 대못이 박히는 큰 일 중의 하나는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 앞서 죽는 것도 대못 박히는 일인데, 그것도 그냥 죽는 게 아니라 이렇게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현장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담함을 넘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십자가에서 그렇게 고통당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며 “보소서 아들이니다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곁에 함께 있던 제자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유언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통하여 예수님의 인간적인 효심과 그 어머니를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어머니께는 이게 참 미안하고 죄송스러운 그 마음을 우리가 구구절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것을 훨씬 넘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넘어서서 하늘나라와 천국에서 가족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선포하시는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천국에서 재정의되는 가족이란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가족이고 사명으로 맡겨진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겁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해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천국 가서도 같이 만날 자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신앙 생활 하는 게 너무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린 이 땅에서만 만날 자들이 아니라 천국에서 같이 만날 어떻게 보면 육신의 가족보다도 더 가깝고 자주 만날 천국 가족이라는 겁니다. 교회가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둔 몸의 지체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하나님 뜻을 행하는 자로 함께 모일 영적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주목할 것은 요한이 그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때부터 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친어머니와 같이 자기 집에 모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대부분 순교했는데 요한만 순교하지 않고 끝까지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어머니를 잘 돌보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제자들은 순교하며 일찍 죽었지만 요한은 순교하지 않고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이 끔찍한 로마 군인들의 만행,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을 빼앗아 제비뽑기 하며 비웃고 있는 이 모습들이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성취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시 22,18).” 전혀 연관성이 없게 여겼던 이 시편 22편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십자가 사건 가운데 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이해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이루어 가시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십자가 곁에 어디에 있습니까? 십자가가 나와 아무런 상관 없이 무관한 사건으로 십자가에 관심도 없는 군인들과 같이 서 있습니까? 그저 내 이익만 취하고 십자가 앞에서 뭔가를 더 얻으려고 발버둥치며 좋아하는 군인들입니까? 아니면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하며 지키는 여인들입니까?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지키며 서 있는 이 여인들과 같은 충성과 신실함이 있기 원합니다. 십자가 곁에서 예수님께서 새로 재정의해 주시는 영적 가족의 개념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리스도 안에 함께하는 이 영적인 가족으로 우리가 모였다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십자가 사건을 나와 묶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 곁을 묵묵히 끝까지 지키고 서는 신실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주 고난 주간을 통하여 십자가 사건을 현재화하며 내면화하는 시간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 형을 선고받으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해골이라 칭하는 골고단 언덕입니다. 어느 누구도 가기를 꺼려하는 가장 참혹한 곳, 이 죽음의 언덕 골고다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은 사형으로 죽는 총살형과는 다릅니다. 총으로 죽는 것이 그나마 십자가보다 나은 것은 그 죽음의 고통이 한 번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형은 단번에 죽지 않고 서서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죽음 자체도 고통인데 죽어 가는 고통을 온몸으로 당하시며 서서히 죽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형을 지옥고, 지옥을 경험하는 고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하루 종일 온몸으로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다 감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 가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가장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값을 치루시며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함이라고 갈라디아서는 증언합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시고, 내 죄값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고통 가운데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온몸에 고통을 당하시며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통해 두 가지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하는데 첫 번째는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고백, 두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두 행악자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설명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십자가에서 서서히 죽어 가시는 예수님, 그 십자가 위에 죄패가 붙어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였는데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입니다. 죄패라면 반역죄, 대역죄…이런 말을 써야 할 거 같은데 빌라도는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겁니다. 그것도 그냥 히브리어로만 쓴 게 아니라, 히브리와 로마와 그리스어 3개 국어도 번역까지 해서 써 놓은 겁니다. 그것의 의도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라는 죄인이 무슨 죄로 죽었는지를 알게 하는 죄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부분을 하늘의 시각으로 분명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이유 없이 고통 당하시며 서서히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지만, 그 십자가 위해 죄패가 3개 국어로 써 있으면서 예수님의 죄목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이라는 겁니다. 그 당시 전 세계에 통용되는 로마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써놓음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모두가 알게 한 셈이 된 겁니다. 예수님은 누구시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인간의 눈으로는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의 십자가 시간조차도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 세상에 선명히 선포하는 도구로 쓰신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히브리어를 모르는 로마 라틴어와 헬라 그리스어를 아는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누군가를 선포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주일 예배를 통해 배웠지만 매주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렸던 유대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소리쳤습니다. 실제로 그들에게는 예수님도 하나님도 왕이 아니셨습니다. 이 세상의 로마 왕이 우리의 진짜 왕이라고 선포한 겁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죽어 가시는 십자가 위에서 그 죄패를 통해 진짜 왕이 누구신가를 선명히 드러내시는 겁니다. 모든 나라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되어 선포하시는 겁니다. 온 천하에 예수님이 진짜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모습으로 예수님이 온 세상의 왕되심을 선포할 거라는 것을 어떤 인간도 계획하고 상상하거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법은 우리의 생각과 기도, 우리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놀라운 하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뜻은 우리 머리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한 차원의 그림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하고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두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혼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게 아니라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과 같이 세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여기에 함께 달려 죽어가는 이 두 사람을 누가복음을 보게 되면 행악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행악자가 죽음의 언덕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이 두 사람은 2000년 전에 본인들의 죄로 말미암아 죽은 행악자이기도 하고요 동시에 모든 인류를 대표하는 두 그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두 행악자는 마지막에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다르게 결론짓게 되는데 한 사람은 영생을 누리게 되고, 한 사람은 영벌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 좌편과 우편에 달린 이 행악자들의 차이는 그들의 죄의 무게 차이나, 그들의 공로나 선행의 차이가 아닙니다. 한 사람은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향해 비방하며 소리쳤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겉으로는 구원이란 얘기를 했는데 그에게는 자기 죄의 회개도 없고, 예수님을 붙드는 믿음도 없었습니다. 단지 비방하면서 네가 그리스도라며? 우리를 구원해라고 소리치고 있었죠 반면에 다른 행악자는 죽어가면서 구원이란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겸손히 한마디를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 당신의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 붙들 죄인과 예수 붙들지 않는 죄인, 이 둘의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는 겁니다. 모든 인류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이 두 죄인 중에 한 그룹이라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어떻게 살았든 상관없이 모두 죽음의 언덕에서 죽게 되는 인생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누구나 죽음의 언덕에 와서 본인의 죄로 말미암아 죽는 존재들이에요. 우리가 지금 이 시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우리 죄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가볍기 때문이 아니고, 우리가 남들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받음, 영생 얻음의 비결은 오직 하나, 죽음의 언덕에서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전 예수님께 구원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예수 이름 붙든 것 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십자가 앞에서 딱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겁니다. 죽음의 언덕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갈 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이라고 믿으며 그분을 붙든 자, 거절하고 예수님을 붙들지 않는 자가 있을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언덕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죽어가는데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비방하며 손가락질하며 예수님에게 구원을 요청하지 않고, 내미신 손길을 거절하며 영원히 죽는 자들이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 영생과 영벌을 가르는 차이는 단 하나, 그 죽음의 언덕에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손을 내미느냐, 내미신 주님의 손을 거절하는냐에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선해서, 남들보다 죄가 가벼워서, 이만큼 괜찮게 살아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불신자들과 똑같이 죽음의 언덕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인데 우리는 예수님을 붙들고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걸 믿으며 그의 이름을 의지한 죄인인 겁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고 내가 한 일에 있는 게 아니고, 오직 예수, 죽음에서 나를 건져 주신 구원자에게 있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습니까? 오직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예수님만이 우리 왕이심을 고백하며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 죽음의 언덕에서 나를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손을 내밀며 그의 이름을 붙들어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낙원에 들어가는 자가 바로 나라는 십자가 복음을 분명히 믿고 선포하기 원합니다. 나를 죽음의 언덕에서 건져 주신 그 십자가 사랑만을 붙들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붙들고 예수 안에서 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먼저 온 몸으로 모욕과 조롱, 수치와 고통을 당하시는 현장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신앙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음을 명시적으로 고백하게 되는데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최종 판결자로서 사형 선고 십자가 선고를 한 자라는데 있습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증언하듯 빌라도는 단순히 십자가 형을 선고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기 손을 들어 직접 예수님을 채찍질한 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의 대표로 계속 등장합니다. 빌라도는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예수님이 죄가 없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냥 속으로 생각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이분의 죄를 내가 찾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 무죄인 예수님을 풀어 줘야 그것이 진리에 속한 자가 할 일인데 그는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풀어 주지 않습니다.
사실 빌라도의 편에 서서 그의 입장을 좀 대변해 본다면 바라바와 예수님을 같이 놓고 특별 사면 가운데 빌라도는 내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풀어 달라고 얘기할 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군중들은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리 바라바를 석방하고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광기어린 소리로 막 백성들이 소리를 지르자 또 한번 진리에 속하지 않은 빌라도는 예수님을 정반대로 채찍질하는 겁니다. 분명히 자기 입으로 죄가 없다 그랬고 이분에게 죄를 찾을 수 없다 선언했는데 무죄한 예수님에게 빌라도는 채찍질을 하는 겁니다. 로마의 채찍에는 쇠 같은 것이 다 달려 있어서 채찍을 맞으면 몸에 있는 살점들을 뜯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채찍질를 당하셨다는 것은 그냥 아프다 정도가 아니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뼈가 드러나는 아주 반 죽어나는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하신 겁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거반 죽은 상태가 될 정도로 채찍질을 한 장본이 바로 빌라도라는 겁니다. 또한 빌라도의 명을 받은 군인들이 채찍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힙니다. 왕은 왕관을 쓰고 왕의 의복을 입는데,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왕관 대신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의복 대신 자색 옷을 입힘으로 예수님의 왕 되심을 철저히 조롱하는 것입니다. 빌라도의 명을 받은 군인들이 예수님을 조롱과 모욕과 고통 가운데 던져 넣게 되는 것입니다. 채찍질을 머리에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온몸에 피투성이고 살점이 뜯어 나가는데 머리만 그래도 좀 멀쩡한 겁니다. 머리에는 채찍질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런 예수님의 머리에 군인들이 가시 면류관을 씌웁니다 가시 면류관을 씌워 이제 머리 위에서도 피가 철철 나고 피범벅이 되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군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소리치며 예수님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투성이가 되셨는데 어떻게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군인들의 이 말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웃는 욕이라 다른 없습니다. 계속 예수님의 얼굴을 내려치고 모욕하고 조롱하는 거예요. 죄가 없으신 만왕의 왕, 무죄하신 예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인간이 재판관이 되어 예수님에게 선악을 판결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소리치고 있는 인간들,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채찍질을 하며 가시 면류관을 씌우며 자색 옷을 입히며 따귀를 때리는 인간들, 이것을 통해 인간의 사악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시는데 군인들은 재밌다고 떠들고 있는 그 모습들…철저하게 빛과 단절된 어둠의 모습이자 거짓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고통과 멸시를 당하실 때,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나머지 제자들은 다 도망가 제갈길을 갔으며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그런 인간적인 배신도 다 당하셨습니다. 그렇게 홀로 외로이 이 끔찍한 모욕과 수치와 고통을 다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의 말씀이 있습니다. 무죄하신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자색 옷을 입혀 조롱과 멸시를 당하시며 따귀를 맞고 계신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사야 53장 말씀에 선명히 이 부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말씀이 성취되는 현장이 되었다고 증언하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냥 까닭 없이 이유 없이 그냥 개인적인 고통과 멸시와 조롱을 당하시는 게 아니라 이 말도 안 되는 끔찍한 현장에서 이사야 53장의 말씀이 성취되는 역사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의 찔림과 상함을 통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온몸으로 지고 가시는 말씀의 성취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모욕과 조롱, 수치와 고통 당하심을 그저 예수님 참 불쌍하다 안 됐다로 끝나면 안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당해야 될 것을 주님이 나를 대신하여 당하시고 계시는 그의 사랑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채찍에 맞으심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은 나음을 얻었음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가시관의 찔리심과 상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 시간 해방됨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분이 당하신 조롱과 멸시를 통하여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됨을 분명히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과 그 놀라운 역사는 우리의 머리로 다 담길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 순종의 믿음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평화를 주시며 나의 허물과 죄를 감당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주님의 온몸으로 당하시는 채찍질을 통해 내가 나음을 얻었음을 마음에 새기며 그 십자가 사랑 앞에 나를 묶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에 이어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빌라도가 개인적으로 하는 대화를 통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진리에 속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중요한 말씀은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연결되듯이 내 나라가 있기에 나는 왕이다…라는 것을 동시에 선언하십니다. 네가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이 땅의 왕이 아니고 세상의 왕이 아니라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늘나라의 왕이다…라는 것을 선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에게 예수님이 왕으로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명에 의해 태어나시고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은 바로 모든 인류의 죄를 선결제하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신다는 그 진리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진리라는 것은 구약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비밀, 즉 구원의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려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구약 성경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신실하지 않은 죄인됨을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 언약으로 묶어 주셨는데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달리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게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죄를 짓고, 결국 하늘을 잃어버렸고 언약이 다 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맺은 그 언약을 끝까지 신실하게 이루시며 지키시려고 하시는 것이죠. 무엇을 통해 완성하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 그분 자신이 진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구약을 요약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끝까지 이루시는 신실하신 그 사랑 자체가 진리이고, 동시에 진리는 그 모든 것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진리인 겁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진리에 속한 자라는 것은 예수 안에 속한 자, 하늘에 속한 자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생명에 속한 자, 빛에 속한 자라는 말과 똑같은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그분 자체가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신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참 빛이자 참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가 되어 예수님의 말씀과 음성에 귀 기울이는 하늘 나라 백성이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게 분명하십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나에게 진리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며 진리에 속한 자로서 주의 음성을 생명으로 빛으로 진리로 듣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진리에 속한 자들은 아님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38-40절까지 말씀은 그 진리에 속하지 않는 자들 거짓의 백성, 빛을 거절하는 어둠의 백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건 예수님은 무죄,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진리로 선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진리대로 예수님을 풀어주지 못합니다. 아무 죄를 찾지 못하고 무죄인 게 분명한데 예수님을 풀어주지 못하는 것이 비 진리이자 거짓의 인생 빌라도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머리를 씁니다 유월절이 오면 죄수 한 사람을 소위 말하는 특별 사면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절대 풀어주기 어려울 것 같은 바라바와 예수님을 놓고 우리 백성들에게 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이걸 통해 빌라도가 계획하는 기대는 백성들은 당연히 바라바가 아니라 예수님을 놔주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한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빌라도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고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이게 거짓과 어둠의 특징이며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이들은 예수 생명과 예수 진리 대신에 강도를 택하는 겁니다. 바라바를 풀어주라고 소리치는 이 백성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을 자기 옷을 깔고 종려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로 찬양했던 자들이에요. 그런데 그 똑같은 그 백성들이 지금은 예수님이 아니라 바라바를 놔주라고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죠.이 세상은 진리에 관심이 없고 진리를 거부하는 시대라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백성들은 열광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억지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다음날 내가 진짜 주려는 것은 그냥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라는 것을 계속 가르쳐 주시니까 그 백성들, 무리들은 아무런 미련 없이 모두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백성들은 소중하고 무리들은 귀하지만, 늘 선동당하기 쉬우며 이렇게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백성들은, 무리들은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감 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기대하면 안 되며, 너무 믿으면 안되고, 심지어 잘못된 결정을 하는 것에 놀라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그 진리를 거절하며 진리에 관심이 없는 것에 놀라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배반하고 배신하는 거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빛 대신 어둠을 선택하고, 진리를 선택하지 않고 강도를 선택하는 게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이렇게 분명히 증언하는 오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지금 이 시간 여러분들과 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게 분명하고, 진리에 속한 자인 게 분명합니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 진리에 관심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속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살아가며 그분의 음성을 진리로 믿고 살아갑니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리로 붙들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진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아무 죄도 분명히 찾지 못했는데, 무죄임에도 예수님을 풀어주지 않는 빌라도는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는 대신 바라바를 선택하는 유대인들, 그들 또한 진리에 속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예수님 대신에 강도를 택하면서 그것을 잘 선택했다고 착각하며 소리 지르고 있는 것이 세상이며 이 세상에 속한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그 모든 피를 흘리시며 인류의 모든 죄를 선 결제 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가운데로 나오십시오. 그 진리에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말씀이 진리이며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가 진리임을 믿으며 그분 안에 거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정말 불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재판을 두 번씩이나 받고 계십니다. 먼저 가야바와 안나스를 통하여 종교 재판을 받으셨고,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을 새벽에 다시 빌라도가 있는 로마의 법정으로 데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데 그들의 법으로는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대신 죽여 달라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데리고 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죽여 달라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청 뒤, 빌라도가 예수님과 따로 독대하시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이 하시는 이 대화를 통하여 요한복음은 의도적으로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 세 가지의 중요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그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말씀을 통해 내가 현재형으로 고백하기 원합니다. 첫번째 질문은, “예수님이 나에게 왕이신가?”입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이 왕이냐고 물어보는 이 빌라도의 질문은 일차적으로는 예수님에게 반역죄가 있는 지 확인하는 질문입니다. 로마 황제에게 반역하는 반역죄를 매우 엄격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그걸 물어보는 겁니다. 예수님을 끌고 온 사람들이 말하는 거 같이 네가 자칭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것을 물어보는 거죠.
주목해야 할 것은 빌라도가 이 질문을 예수님께 한 장소입니다. 빌라도가 이 질문을 예수님을 끌고 온 대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 앞에서 물어봤으면 그렇게 예수님을 취조하기 위해서만 물어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지금 이 질문을 다른 사람들이 없이, 예수님과 일대일로 독대하는 곳에서 물어봤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는 유월절에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빌라도에게 왔지만 더럽힘을 받지 않으려고 이방인인 빌라도의 관정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대기하고 빌라도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오늘 말씀은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갔고 예수님을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이 질문을 했다고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갔을 때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은 안 들어갔다는 것을 정확하게 지금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금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따로 불러서 한 대답이에요. 이 말은 대제사장들이나 유대인들이 없는 상황에서 빌라도가 일대일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에게 물어보고 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에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에게 왕이 누구시냐는 질문입니다. 너의 인생의 왕이 누구시냐는 질문을 물어보신다는 겁니다. 나에게 정말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게 내가 예수님을 진짜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나에게 왕이신가…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이 질문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왕이십니다…이것이 분명한 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분명한 신앙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너의 고백이 너 자신의 고백이냐 아니면 들어서 아는 것이냐…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어봤을 때 예수님은 대답을 하시는 대신 반문하며 빌라도에게 물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빌라도는 굉장히 놀랐을 수도 있습니다 거꾸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질문했거든요. 네가 지금 나를 유대인의 왕이라 그러는데 그게 네 고백으로부터 스스로 나온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대해 말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냐…물어보시는 겁니다. 이게 예수님을 왕으로 고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이라고 고백할 때 그 고백이 나의 고백으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을 듣고 내가 안다 그러는 것인지, 점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고백이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을 내가 하는 말인지 아니면 내 스스로 내 삶을 통과한 고백으로 아는 것인지에 따라 그 고백의 파워는 천지 차이라는 겁니다.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아는 것과 내 고백으로 아는 것은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분명히 고백한다는 것은 정보의 동의가 아니라 관계에 대한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대통령 알듯이 알면 안되고 바른 관계와 친밀감을 가지고 알아야 분명한 내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이 내 삶을 통과한 내 스스로의 고백이 되기 원합니다. 세 번째 우리가 점검해야 될 질문은 내 소속이 어디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냐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 나라 소속인지, 세상 나라 소속인지, 하늘 소속인지 땅 소속인지 분명해야 한다는 겁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정말 왕이신가…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이 고백이 우리 신앙 생활에 정말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그 빌라도의 질문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선언하십니다. 내 나라라는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분명히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져 오시는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닌 나라라는 거예요. 결국 이 세상에는 어디 소속이냐에 따라 세상 나라가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예수님이 알려 주시는 겁니다.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이 있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나는 어느 나라 국민이냐에 따라 소속이 달라지고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게 달라지는 겁니다. 이 땅을 살아가지만 세상 소속이 아니라 천국 소속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땅에 잠시 존재합니다만 우리의 소속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계신 천국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늘에 속했기에 예수님의 통치와 다스림만을 받는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이 십자가에 하신 일로 말미암아 우리 신분이 바뀌고 소속이 바뀐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이 짧은 대화를 통하여 세 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스스로 해 보기 원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은 정말 왕이십니까? 나의 고백은 스스로 한 고백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들어서 한 이야기들입니까? 그리고 나는 소속이 천국이고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백성입니까? 이 세 가지에 대한 대답이 분명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는 주의 백성 될 줄 믿습니다. 참 빛이 나에게 임하며 예수 이름 힘입어 영생을 주님과 함께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 천국 백성일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나에게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이 땅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천국 백성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나의 고백으로 주님께 드려져 그 십자가 사랑에 온전히 묶여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때 다른 사람을 가장 모욕하고 가장 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죄는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말살시키고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없는 사람 같이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것은 모욕을 넘어서 그 사람의 존재를 말살하는 큰 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께 범하는 가장 큰 죄는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예수 하나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죄입니다. 예수님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신과 같이 투명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은,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아들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죄로, 그게 인간이 하나님에게 짓는 제일 큰 죄입니다. 요한복음은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참 빛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충돌하고 부딪히며 심지어 죽이려 하는 어둠에 대해, 하늘에서 땅으로 바라보는 우주적 관점으로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가롯 유다라든지, 대제사장 안나스와 그의 장인 가야바 같은 사람들을 통해 어둠의 대표로 등장하며 예수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하나님임을 인정하지 않으며 참 빛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자의 모습을 선명히 드러냅니다.
오늘 말씀은 가야바와 그의 장인 안나스를 통하여 종교 재판을 받으신 후에 로마 법정인 빌라도 앞에 끌려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빌라도의 로마 관정으로 끌고 온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전쟁 중의 재판도 이렇게 하지 않는데, 아무리 바빠도 새벽에 법정에 끌고 온다는 건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둠의 대표인 안나스와 가야바는 그렇게 말도 안 되게 불법으로 예수님을 밤새 심문하고는 그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온 것입니다. 요한 복음은 새벽이라는 시간을 강조하는데, 거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 앞에 세우는 자들의 본질이 어둠이기에 새벽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새벽이란 말은 빛이 아직 뜨기 전, 어둠이란 말이거든요. 그 어둠이 참 빛이신 예수님을 새벽에 끌고 나온 겁니다. 또한 새벽에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온 이유는 최소한 금요일 새벽에 빌라도를 통하여 사형 선고 인준을 받아야 예수님을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고 안식일이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에까지 시신이 처리되어 마음 편하게 유월절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서둘러 그 새벽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을 끌고 간 것입니다. 그렇게 새벽에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을 끌고 가고선, 정작 유대인들은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대기합니다. 이유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해서 유월절 잔치를 먹으려고…” 우리가 코로나 때 기억하지만 바이러스가 퍼지기 때문에 실내에서 모이는 게 금지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밖에서만 모일 수 있었죠. 마찬가지로 이들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방인들이 있는 실내 건물 안에는 들어가지 않은 거예요. 그렇게 밖에서 이방인들을 만나는 건 상관 없고, 이방인들이 있는 건물 안에 들어가면 더럽게 된다고 믿은 겁니다.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를 먹으려고 이방인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고 야외에서 나오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겉으로 봐서는 율법을 굉장히 잘 지키고 신실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유대들이 하는 일은 뭡니까? 참 빛이신 예수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 빛이신 예수 앞에 나아가, 그 이름으로 죄사함 받고, 주님과 함께 유월절 잔치를 참여하는 게 참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내 어둠이 물러가고 죄사함을 받으며 그 저주가 담을 넘는 유월, Passover, 넘어가게 되는 그 기적을 어린 양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경험하는 게 참 복음입니다. 그런데 이 어둠의 세력인 가야바와 안나스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으려고 참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끌고가고 있으며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 같고 거룩해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가장 더러운 인간이자 가장 악한 어둠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딱 보기에도 벌써 이게 본인이 개입하고 싶지 않은 재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서 유대인들에게 이 새벽부터 무슨 난리냐? 이야기 하고,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선을 긋습니다. 그렇게 한발 물러서려는 빌라도를 향해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다.” 고 소리칩니다. 여기서 가야바와 안나스라는 어둠의 세력이 왜 예수님을 그 새벽에 빌라도 앞 로마 법정에 데려왔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뭐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죽이고 싶은데 예수님을 당장 죽여 없애고 싶은데 그들의 종교법으로는 그렇게 예수님을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빌라도를 개입시켜 우리 대신 이 예수님을 죽여 줘…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 예수님은 두 번의 법정에서 끌려 다니시며 이 말도 안 되는 불법적인 재판의 피고인이 되셨습니다. 가야바와 안나스 앞에, 그리고 오늘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사람들이 재판관이 되어 예수님이 이렇게 잘못했고 저렇게 잘못했다고 소리를 치고, 심지어 예수님의 따귀를 때리는 말도 안되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반역죄로 몰아가서 사형을 즉각적으로 집행하려고 하는 합법을 가장한 불법을 저지르려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참 빛을 부정하고 부인하는 것을 넘어 죽이려 하는 악한 자들의 특징, 어둠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이 불법적이고 말도 안 되는 재판 가운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고석에 잡혀 서 있습니다. 어둠이 참 빛을 향해 하는 행태가 뭡니까? 예수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가야바와 안나스가 재판관이 되어 예수님에게 이렇게 잘못했고 저렇게 잘못해서 죽어야 한다고 판결하는 것이고, 빌라도가 재판관에 되어 예수님에게 옳고 그름을, 참과 거짓을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판석이 아닌 피고석에 잡혀 서 계신 겁니다. 이 두번의 재판 법정을 통해 인간의 예수님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죄가 선명히 드러나는데, 우리가 피고석에 앉기를 거절하고 예수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재판관이 되어 앉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 예수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예수님이 이렇게 해야 된다고 저렇게 하면 안된다 판단하고, 인간이 옳고 그름을 재단하고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 것, 이것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가장 본질적인 죄라는 것을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예수님을 향한 가장 큰 죄는 예수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거부하며, 죽이려 하는 어둠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에 참여하는 유일한 방법은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이름 가운데 거하며 그의 보혈을 의지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많은 어둠은 여전히 신앙생활을 한다 그러고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피고석에 앉히고 인간이 재판장 자리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죄입니다. 감히 예수 하나님에게 예수님이 이렇게 하셔야 한다, 저렇게 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는 인간의 교만한 모습, 그것이 바로 어둠의 본질임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기 원합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은 어느 자리에 앉아 계십니까? 참 빛이신 예수 하나님이 정말 재판장 자리에 정말 앉아 계시고 내가 피고석에 앉아 있습니까? 주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고백하며 주님께 불쌍히 여김을 구하며 엎드리십니까? 예수님이 법대로 재판하는 것을 넘어 사랑으로 먼저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에 내가 지금 살고 있다는 그 간절한 십자가의 사랑을 붙드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나를 위해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잔치에 초대하시려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며, 그 십자가 사랑을 현재화 하며 내면화 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사야 64장 말씀은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과 함께 하늘을 향해 두 가지를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탄식 기도를 증언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깊은 어둠과 같이 암담하고 빠져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런 깊은 어둠과 절망 가운데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탄식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주의 강림을 간구하고 있고, 두번째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을 향하여 구하는 간절한 탄식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은 너희가 포로로 멸망 상태로 그냥 계속 있는 게 아니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회복과 구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주신 건 약속일 뿐 처한 현실과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현실은 여전히 무너지고 망해가는 어둠과 절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예루살렘이 황폐되며 찬송하던 모든 성전이 폐허가 된 상황입니다. 눈으로 볼 때 그렇게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그때에 그들이 탄식으로 간구하는 첫 번째가 바로 하늘로부터 주의 강림이었습니다.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둠과 절망의 삶의 자리와 현실에서 주의 회복과 구원의 은혜를 주시는 유일한 방법은 뭡니까? 하늘로부터 주가 강림하시는 겁니다. 주님이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임하시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강림이 이미 신약에서 예언 성취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상황을 다 알고 이 말씀을 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말씀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신하며 보게 됩니다만 이 말씀이 전해졌던 이사야 시대에는 사람들은 미래의 큰 그림을 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다림의 의자에 앉아 있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기를 구하는 이 하나님의 강림은 첫 번째로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사야 후반부 모든 예언은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이기에, 하나님의 강림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성취되는 겁니다.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게 바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신약의 사건입니다. 또한 주님이 하늘을 가리고 강림하시는 사건은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성취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과 같이 하늘을 가르고 산들이 진동하며 불이 물을 끊임 같이 강력하게 성령 하나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셔서 이 놀라운 역사가 현재화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사건이지만 이사아 선지자는 그 미래의 사건을 현재로 바라보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처한 현실에서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지 않고 계시는가? 왜 이스라엘은 여전히 어둠과 깊은 절망 가운데 망한 상태로 있는가? 주의 강림을 간절히 구하면서 그들이 돌아봤던 것은 단순히 처한 현실과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잿더미로 황폐화된 삶의 자리에서 그들은 말씀으로 자신들을 돌아봄이 바로 그 탄식하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발견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강림을 놓고 간절히 간구하기만 한 게 아니라 기도와 함께 말씀으로 자신들을 돌아보고 영적 현주소에 직면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적어도 세 가지 문제 때문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범죄함, 부정함, 결국 소멸될 인생….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말씀으로 비추어 보니 우리의 범죄함으로 주께서 진노하셨음을 돌아보게 되는 겁니다. 또한 말씀을 비추어 보니 우리가 다 부정한 자라는 것이 보이는 겁니다. 그 결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될 존재, 죽게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실이자 말씀으로 내 삶을 돌아보면 고백하게 될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말씀으로 나를 비추어 보면 우리는 죄인이고 우리는 다 부정한 자이고 우리는 결국 그 결과로 소멸하고 죽게 되었기 때문에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강림이 간절히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림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절히 간구한 두 번째가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늘을 가르고 이 땅이 임하셔서 우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고 다스려 주옵소서. 그게 오늘 말씀 뒷부분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와 진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게 바로 그들의 삶에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말씀으로 비추어진 영적 현실을 직면하며 나는 토기장이가 아니고 내가 주권자가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것은 누구 손에 있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겁니다. 특별히 그들의 주의 강림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과거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임하셨던 말씀 사건을 내면화 하고 현재화 하는 고백이라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강림을 간구하며 붙들었던 말씀은 과거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임하셨던 사건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맬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시며 십계명을 주시며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임하셨던 그 강림의 사건을 붙드는 겁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하늘을 가르고 임하셨던 하나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셨던 그 하나님의 강림을 기억하며, 이 시간 주여 다시 한번 우리에게 하늘을 가르고 임하여 주소서….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말씀을 붙들고 드리는 탄식기도 입니다.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임하여 주옵소서…지금 처한 현실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황폐해진 잿더미의 상황입니다. 지금 처한 현실은 원수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절망과 어둠의 상태입니다. 주여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셔서 이 땅에 하늘의 뜻을 풀어 주옵소서… 그게 바로 그들이 부르짖었던 탄식의 기도였습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은 내 손 안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이 죄인이자 부정한 자임을 고백하며, 곧 사라지고 죽을 존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인생의 모든 게 하나님 손에 있음을 고백하며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통치하고 친히 다스려 주옵소서…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내 손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기에 내가 살 길은 우리 민족이 살 길은 바로 하늘을 열고 이 땅에 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며 성령 하나님의 강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오심을 간구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사모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말씀으로 나를 돌아보며 나의 죄인됨과 부정함, 곧 소멸되고 죽을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하며 나의 인생을 토기장이인 주님의 손에 맡기기 원합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하늘 열고 오실 주님의 놀라운 강림과 하나님의 놀라운 통치와 다스림이 우리 공동체와 이 시대에 임하는 놀라운 역사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63장 뒷부분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탄원하며 탄식하는 기 도와 대화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뒷부분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이 말씀 이해에 중요한데 마지막 두 절에서 나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어버렸다는 것도 굉장한 충격이었지만, 더 큰 절망과 충격은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과 멸망입니다. 신앙적으로 더 큰 절망과 어려움은 절대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유린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원수가 그 주의 성소 예루살렘 성전을 완전히 유린하며 무너뜨린 것이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충격과 절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삶의 자리에서 느끼는 감정은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절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다스림도 떠나고 하나님의 이름도 사라진 거 같은 하나님의 철저한 부재와 하나님의 버리심의 절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적으로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탄식하며 부르짖는 건 반복해서 하나님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탄식입니다. 그게 11절부터 16절까지 네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탄식입니다. 백성과 양떼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그들 가운데 성령을 두신 이가 이제 어디 계십니까…탄식합니다. 광야에 있는 말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 이제 어디 계십니까….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하나님이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며 그들이 탄식하는 겁니다. 하나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아니 말씀에 그렇게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 지금 우리 삶의 자리에선 어디 계십니까?...간절하게 탄식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이자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삶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런 삶의 자리에 신음하며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버리심을 실제로 느끼는 거 같은 그 절망 가운데,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동일한 고백으로 탄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반복하며 탄식 하는 그들을 향하여 오늘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베풀었던 은총과 사랑과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온 백성들에게 베푸신 큰 은총 모든 자비와 사랑을 따라 베푸신 큰 은총 이것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을 통해 비추어 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셨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선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면 우리를 모든 자비와 큰 사랑으로 주신 큰 은총을 베푸시기를 아깝지 아니하신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환난 가운데 동참하시고 우리를 꼭 안아 주신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큰 은총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나님이 멀리 계신 거 같고 안 계신 것 같은 삶의 자리에서 탄식하는가? 그 이유는 10절에 등장하듯이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탄식 가운데 드러나는 삶의 본질적 문제는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죄 문제라는 겁니다. 그들이 반역했고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서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로 나아간 겁니다. 그게 성경이 증언하는 이스라엘 역사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왜 나를 구원해 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울부짖으며 탄식으로 주께 기도할 때 그 기도 끝에 발견돼야 되는 건 하나님의 많은 자비와 사랑으로 부으신 큰 은총입니다. 동시에 우리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은총과 함께 나의 반역과 성령을 근심하게 한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문제가 보여야 하는 겁니다. 우리의 탄식과 통곡의 자리에서 부르짖을 때, 그 기도를 통하여 발견하기 원하시는 건 하나님이 누구시고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땐 그냥 마음에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토설하며 주님 앞에 탄식하며 나오십시오. 그 탄식의 기도를 주님은 들어 주시고 기다려 주시며 그것을 허용해 주십니다. 그 탄식의 기도를 쏟아내면서 그 탄식의 끝에 여러분들은 여호와께서 베푸신 사랑과 자비와 은총을 발견할 것이며 그 기도 끝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기억하며 나의 반역과 성령을 근심하게 한 불순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내 삶의 상황에서 보이지 않고 멀리 계신 것 같은 하나님 부재의 상황 속에 탄식하며 나아올 때에 그 탄식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발견하고 내가 누군가를 발견하며 주님 앞에 내가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믿고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께 두 손 들고 돌이켜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에게 구원과 회복의 은총이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신 하나님의 은총이고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베푸실 하나님의 큰 은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찬양 고백과 같이 이제껏 내가 산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그 주님의 베푸신 큰 은총을 기억하며 주님의 자비와 사랑 가운데 조율되며 머무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회복의 말씀과 함께 동시에 등장하는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장차 에돔을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실 거라는 것을 예고하시는 경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자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 전부인 줄 알고 있을 때 이렇게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원수를 갚아 주시는 이런 모습이 등장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게 내가 정의되고 이해하는 사랑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품어주고 기다리고 모든 것을 안아 주시는 그런 모습만 있는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한 자들을 향하여 때가 되면 공의를 보이시는 것 또한 하나님 사랑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동전 양면과 같이 구원의 날은 동시에 심판의 날이라는 겁니다. 구원의 날과 심판의 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은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받는 날이고 하나님에게 떨어져 있고 하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받게 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붙들고 예수 공로를 힘입어 예수 안에 있을 때 바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마치 여리고성이 모두 심판과 진멸로 무너지고 있을 때 붉은 줄 아래 있었던 라합의 가족들만 살았던 것과 같이 내가 누구 아래 누구 공로 아래 있느냐가 결국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특별히 오늘 63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친하 갚아 주시는 분이심을, 그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이 직면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 있어서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에돔이 어떤 나라입니까? 에돔은 이삭의 쌍둥이 아들이자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들입니다. 에서의 몸이 붉었기 때문에 에돔이라는 이름 자체가 붉다는 의미를 가졌고 에돔 땅 자체도 붉은 땅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온통 빨간 땅이 바로 에돔 사람들이 살던 지역인데, 하나님이 에돔을 심판을 하시는 그날,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하면 붉은 옷을 입고 온몸에 붉은 피가 이리 저기 튄 옷을 두르고 계신 모습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옷이 그렇게 빨개질 수 밖에 없는가….하나님의 노하심으로 무리를 밟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아서 그들의 피가 튀긴 옷 때문에 그렇게 시뻘건 옷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포도주 틀을 혼자 밟으면 포도즙이 옷에 다 튀듯이 심판으로 인해 피가 이리 저리 묻어서 옷이 빨간색인 것을 넘어 시뻘건 옷이 되는 겁니다. 옷이 그렇게 시뻘건 이유는 심판하시는 중에 묻은 핏자국이라는 이 엄중한 선언, 이게 얼마나 끔찍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그림 언어라는 겁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면서 에돔을 밟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대적인 에돔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피가 낭자하는 끔찍한 심판이 임할 것을 선명히 보여주십니다. 왜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갚는 날이라고 명하시면서 그들의 피가 다 튀고 묻을 정도로 노함과 분함을 표출하시며 그들을 심판하시는가? 바로 에돔이란 나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할 때 했던 용서받지 못할 끔찍한 일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망하는 날, 특별히 남 유다가 바벨론으로 인해 망하는 날에 에돔은 상처에 소금 뿌리듯이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습니다. 사실 에돔은 조상으로 올라가면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의 후예이니 형제의 나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먼 친척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에돔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하는 날에 이스라엘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비웃고 조롱하며 저 나라 별거 아니라 그러면서 꼴 좋다고 막 비웃은 겁니다. 도망가는 백성들에게 걸림돌이 되며 아픈 상처에 소금을 막 뿌리는 자가 된 겁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도와주지 못한 망정, 망하고 힘들고 눈물나는 그 비극을 보며 좋아하고 박수치고 약을 올리며 소금을 뿌린 자들이 바로 에돔이라는 나라였습니다. 이게 얼마나 남유다 백성들에게 상처가 됐으면 바벨론에 끌려와서 바벨론에서 마음을 쏟아내는 탄식을 할 때 이 에돔 사람들 제발 하나님 가만두지 말아 주세요,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하나님 에돔을 제발 가만 두지 말아 주세요…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그 에돔을 심판해 주세요… 그게 바벨론으로부터 나라가 망한 것보다 더 화가 나고 더 마음이 아프고 더 상처가 되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탄식으로 고백한 겁니다. 그 에돔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심판하시겠다고 예고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에돔을 향한 심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울함을 대신 갚아 주시는 심판입니다. 그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은 친히 너의 원수를 내가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에돔은 나의 원수다….선언하시며 그 에돔을 향하여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면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를 친히 갚아 주시는 심판이 온 에돔 땅에 이처럼 피가 튀기듯이 임하는 겁니다. 온몸에 피가 다 튀길 정도로 철저하게 진멸하시며 밟고 그들을 향하여 심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 에돔을 향한 하나님 심판의 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되고 에돔에게는 철저한 심판의 날이 됐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면 하실 놀라운 역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믿는 분명한 신앙 고백이 뭡니까? 최종 승리와 최후 승리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 옳고 그름을 하나님이 나누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며 우리의 원수를 다 갚아 주신다…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내 원수를 갚지 못한 억울함으로 잠을 자지 못하며 그 슬픔으로 탄식하고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억울함을 풀어 주시겠다 약속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의 원수는 내가 갚아 준다… 때가 되면 에돔을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 너의 억울함을 내가 풀어 준다…약속하십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 편에서 있다면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억울함과 원한을 기억하시고 풀어 주시며 해결해 주시며 대신 갚아 주시는 그 심판의 날이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붙들고 신실하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내 기준과 내 생각과 나의 기대의 모습으로만 한정하지 마십시오. 심판을 통하여 철저하게 원수를 갚음도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 크신 하나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순종하며 엎드리십시오. 그 완전하신 하나님 사랑 가운데 오늘도 정의와 공의를 이루시며,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이루신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선명하게 그 길을 순종하며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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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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