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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이 우리에게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나 고백을 넘어 내 현재 삶에 놀라운 능력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옛 아담과 새 아담, 즉 첫 번째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두 대비를 통하여 우리에게 선명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 그리고 첫 사람과 둘째 사람, 다 이게 동일한 비교입니다. 부활 신앙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은 우리가 옛 모습인 첫 사람 아담에서 새 사람인 마지막 아담으로 변화시켜 주는 능력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신 십자가 복음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며 그 십자가에 내 인생을 의탁하고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바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담과 하와의 그 아담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과 주의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즉 아담은 흙이라는 재료와 하나님의 숨결인 생기가 들어가 생령이 된 것이죠. 그런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러 영적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었죠. 그래서 더 이상 신령한 사람이 아니고 육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죄로 말미암아 영적 기능이 완전 마비되며 그저 땅에 속하고 흙에 속한 고등동물, 고기덩어리와 같은 육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인간의 끝은 결국 죽음이고 심판이고 멸망이 되는 것이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우리를 건져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두 번째 인간이자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변하고 우리의 신분이 변하며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신 놀라운 역사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시는 영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이 주시는 살려주는 영이라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다시는 아담의 죄와 사망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살려 준다는 것은 부활을 말하며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는 것은 우리를 부활케 하신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 그리스도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의 공로와 보혈을 의지하여 그의 살려 주시는 영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 첫 번째 아담으로 인한 나의 옛 자아(old being)는 모두 죽고, 새로운 자아(new being)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겁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면 나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더 이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놀라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이 시작된 겁니다. 땅만 바라보고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육의 존재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의 존재가 되며 영적 가치와 하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놀라운 변화를 분명히 믿게 하는 것이 부활 신앙의 능력이라는 겁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다고 선언합니다. 첫 사람은 바로 첫 아담으로, 그는 죄로 말미암아 땅에서 나서 흙에 속한 자, 땅에 속한 자, 육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저 땅 소속, 흙 소속, 이 세상 소속으로 살다가 죽는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나신 분이십니다. 하늘 소속에서 이 땅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 오셔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그의 생명은 땅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실 때 우리의 죄도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며, 이걸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담의 죄를 모두 갚으시는 게 십자가 사건이고 아담의 모든 결박을 풀어 잠자는 자의 첫 열매로 우리에게 다시 살려 주시는 영으로 오신 게 부활 사건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 육의 사람인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예수 안에 들어옴으로써 신령한 자가 됐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부활만이 하늘에 속한 새 소망을 선물하고 하늘에 속한 새 몸을 선물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놀랍게 보여 주는 것이죠.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내 마음에 모시는 순간, 하늘로부터 난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경험하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 부활의 능력으로 생명을 주시고 살려 주시는 영으로 우리에게 동일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바로 승천하시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의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보이신 몸을 부활체라 그러는데 그 부활체가 우리의 몸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는 것을 복음서는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식사도 하시고 생선도 드시는 그런 비슷한 몸이었는데, 동시에 예수님의 몸이 보이다가 안 보이고 보이다가 사라지는 전혀 다른 모습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보기에 겉모습이 예수님의 옛날 모습과 비슷했지만 실제로 부활체가 그런 유사함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점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그 부활체의 모습이 마지막 부활에 참여한 후 받을 죽음이 없는 영화로운 모습,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은 말씀대로 임하는 현재의 능력임을 믿고 살아가기에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가치를 바라보며 하늘의 현실을 실체로 붙들며 살아가고, 마지막 때에 우리는 하늘에 속한이의 형상을 입을 그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어둠과 음부의 권세를 깨고 무덤에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것처럼 그 부활 신앙이 내 인생을 어둠이 가지지 못하고 죽음이 가두지 못하는 빛과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산소망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늘의 소속이 분명한 자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여 변화된 자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부활을 선포하며 그 부활 신앙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자 우주적 사실로서의 고백 이상의 선포임을 마음에 새기기를 원합니다. 2000년 전에 그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고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그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부활 신앙이 나에게 소망되며 능력 되는 은혜를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변화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배우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 소속이 바뀌고 신분이 바뀌는 겁니다. 죄의 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의 존재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우리의 신분이 종에서 자유임으로 땅에 속한 자에서 하늘에 속한 자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다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아니라 땅만이 아니라 천국이 있으며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취하며 그 하늘의 현실을 실체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겁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서의 나의 육신의 모습, 죄로 말미암아 영적 기능이 마비되어 이 세상과 보이는 가치만 바라보고 살아가던 내가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으로 받고 생명을 받아 신령한 사람, 영의 사람, 하늘의 소속이 된 자유인이 된 놀라운 역사를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능력입니다. 부활신앙이 나의 산 소망된다는 고백은 하늘에 속한 자로 주와 함께 죽음을 넘어 승리하는 놀라운 역사를 주시며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는다는 놀라운 약속을 실체로 누리며 소망으로 품으며 살아가는 자가 된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살려주는 영,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으로 다시는 아담의 죄와 사망의 유산을 물려받지 않도록 해 주셨음을 분명히 믿고 오늘을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말씀대로 이루어질 미래의 산소망을 붙들고 현재를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말씀은 우리에게 부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장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너무나 소중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 부활의 놀라운 소망 가운데 사도 바울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죽은 자가 어떤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늘 하는 고백 중에 하나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성도가 죽은 후에 다시 부활하는 것은 영적으로만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이 신비의 고백, 그 몸이 다시 산다는 고백을 근거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몸의 부활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진리에 대해 말씀의 은혜를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는 몸에 있어서는 육의 몸이 있고 영의 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몸에는 육의 몸이 있고 영의 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영어로는 Natural Body, 육의 몸이 있고, Spiritual Body, 영의 몸이 있다는 겁니다. 부활 신앙을 고백할 때는 바로 이 죽은 후에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우리가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이 세상에 계시는 것을 통하여 부활체, 즉 영의 몸이 어떤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잠시 보여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분명히 돌아가시기 전의 몸과 비슷한 몸을 가지고 계셨어요. 그런데 비슷하긴 했지만 전혀 다른 몸을 가지고 계셨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가 안 보이기도 하고 벽을 뚫고 들어오시기도 하는 영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죽음 후 다시 살아날 때 그냥 우리의 영이 둥둥 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의 몸을 가지고 다시 부활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 주신 겁니다. 그래서 몸에는 육의 몸이 있고 영의 몸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육의 몸이 죽어야만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영의 몸으로 다시 부활하고 살아난다는 데 전제 조건이 바로 육의 몸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육의 몸이 죽어야 영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씨 뿌리는 비유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씨앗이 살아나려면 씨가 반드시 죽어야 되는 것처럼 현재의 육의 몸이 죽어야 다시 영의 몸으로 살아난다는 겁니다. 씨가 죽어야 식물이 살듯이 사람은 죽어야만 다시 산다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육의 몸, 현재 육체가 죽어야만 되고 현재 육체를 벗어나야만 영의 몸을 입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육의 몸은 죽고 영이 새로운 몸인 영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부활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삶은 그 육신이 죽고 벗어나는 것을 이미 경험하고 고백하듯이 날마다 내가 죽는 삶을 살아간다고 고백하는 것이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중요하지만 이 육의 몸에 목숨을 걸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육의 몸은 결국 죽어 썩어 사라져야만 우리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옛 자아와 나의 육의 몸이 죽음을 경험함으로 그 죽는 자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부활하는 것은 반드시 죽어야만 사는 길이라는 것을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이 부활은 육의 몸이 죽어야만 한다는 이 분명한 기초 가운데 우리가 서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육의 몸과 영의 몸에는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는 겁니다. 육의 몸이란 썩을 것, 약한 것, 욕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우리 육의 몸의 특징은 뭡니까? 썩는 겁니다. 결국 우리의 육의 몸은 죽어 이 땅에서 썩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동시에 우리 육의 몸은 약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몸이 아픈 곳이 없는 것은 육신이 약해지는 자연적인 증상입니다. 좀 덜 아프고 더 아픈 사람의 차이가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는데 육신이 더 강건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약해지기만 하는 게 아니라 또 우리 육의 몸은 외부의 유혹에도 약합니다. 그래서 자꾸 세상 것에 끌려가게 되고 잘못된 것에 방황하게 되는 그런 몸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우리 육의 몸의 특징은 영광스럽지 못한데 계속 끌려다니게 되는 겁니다. 육의 몸은 땅의 영광, 땅에서 화려해 보이는 것에 자꾸 끌려다니는 것이 욕된 것이라는 겁니다. 하늘의 영광을 심지 않고 땅의 영광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욕된 것이라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몸, 육의 몸은 썩어지는 것이고 약한 것이며 영광스럽지 못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육의 몸이 죽고 우리가 부활해서 영의 몸을 덧입게 될 때 그 다시 태어나는 몸은 어떤 몸이라는 겁니까? 썩지 아니할 몸, 강한 몸, 영광스러운 몸이라는 겁니다. 썩을 육의 몸을 심어, 썩지 않을 영의 몸을 입는다고 선언합니다. 약한 육의 몸을 심어 강한 영의 몸을 입는다고 선언합니다. 욕된 육의 몸을 심어 영광스러운 영의 몸을 입는다고 선언합니다. 육의 몸은 약하고 미혹에 취약한데 영의 몸은 강하다는 겁니다. 강하기 때문에 생로병사를 넘어서고 세상의 미혹을 넘어서는 그런 강한 몸을 갖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영광스럽지 못하고 욕된 몸이 아닌 아주 하늘의 영광을 담는 놀라운 몸이 된다는 겁니다. 그게 육의 몸이 죽어 다시 태어나게 될 영의 몸을 입은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부활 신앙은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고백이 되는 겁니다. 현재 입고 있는 육신의 몸은 죽고 썩어 사라질 것이고, 그것을 벗어야 영의 몸을 입고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는 이 놀라운 부활의 신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겁니다. 다시 태어나 썩어지지 않고 강하고 하늘의 영광을 담는 놀라운 영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몸에는 육의 몸과 영의 몸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있는 게 아니듯 몸에는 육신, 육의 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육의 몸은 결국 썩어질 몸이고 약한 몸이고 영광을 담지 못하는 몸이지만, 영의 몸은 썩지 않을 몸이자 강한 몸이고, 하늘의 영광을 담는 몸임을 잊지 마십시오. 육의 몸이 죽어야 영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씨가 죽어야만 열매는 맺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몸을 벗어야 영광스러운 영의 몸을 입고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썩어지고 약하고 욕된 육신의 몸에 너무 목숨을 걸지 않기를 원합니다. 썩지 않고, 강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그 놀라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미는 부활의 신비를 마음에 품고 소망하며 보이지 않고 영원한 것을 주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 신앙이 성도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삶의 기초인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부활 신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죽음 이후의 삶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관점의 문제이며 시각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의 눈이 열린 자가 있고 영의 눈이 닫힌 자가 있습니다. 영의 눈이 닫힌 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줄 알고 죽음은 끝이라고 여기며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는 거 같은 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는다는데 제일 불쌍한 사람은 예수를 믿는데도 이 땅밖에 보지 못하고 이 땅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이유가 그저 이 세상에서 유익과 좀 더 잘 살기 위한 수단과 도구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영의 눈이 열리게 되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죽음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부활 신앙을 소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본질은 이 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바로 영원한 삶을 위해 주와 함께 동행하는 것임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인 사람과 이 세상과 더불어 다가올 천국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사람은 우선 순위와 가치관이 다르고 바라보고 주목하는 게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의 신앙생활의 본질이 어디이며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를 분명히 하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생활하면서 불쌍한 자가 되기 않기 위해 속지 말아야 하고 깨어 정신 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의 본질은 구원받는 것이며 그 구원의 핵심은 내가 바로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 주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부활 신앙에 있다는 것이죠. 부활 신앙을 믿지 않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은 끊임없이 어떤 삶을 살겠습니까? 위험을 최대한 회피하고 그저 안전한 데 머물러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반면에 부활 신앙을 분명히 믿는 자들은 이 세상에서 복음을 위하여 주의 나라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쓰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들면, 그는 몇 번을 두들겨 맞았고 어디를 가나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으며, 끝까지 그는 고난의 삶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언제나 위협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았던 이유의 본질은 이 세상의 삶을 넘어 천국이 있음을 분명히 믿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부활 신앙의 분명한 성도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부활 신앙이 분명한 자의 고백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선언하는 삶입니다. 나의 옛 자아가 매일 죽고 나를 중심에 두려는 모든 것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에 속하여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삶을 사는 삶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고 날마다 자기를 내어주는 삶을 살았고 자신의 육체와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리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방법을 붙들고 살아갔던 자입니다. 반대로 이 부활 신앙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람의 방법과 나의 유익을 위한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날마다 내가 죽는 삶 대신에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유익만을 구하며 이 세상에서 마치 천년만년 살 것같이 착각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부활 신앙이 없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리스도와 소속되어 살아가는 삶을 산다는 것은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입니다. 그리하여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것이며 내 유익을 넘어서며 인간적인 방법을 넘어서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런 삶은 오직 분명한 부활 신앙의 고백이 있을 때 가능한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부활 신앙이 분명하지 않고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자들은 어떤 삶을 살까요? 먹고 마시는 삶에 인생을 탕진하고 이 세상에서 방탕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내일 죽으니까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놀고 먹고 마시고 나를 위해서 향락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부활 신앙 없이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삶입니다. 주일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미혹에 빠진 게 바로 버가모 교회였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걸림돌과 같은 미혹이 바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내 삶을 더럽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착각하는 방종입니다. 내 구원은 영적 구원이니까 내 육신의 행실로 더럽혀져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런 잘못된 이단의 가르침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부활 신앙을 저버리고 속은 자들이며 깨어 있지 못하고 사단의 미혹에 빠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활신앙이 분명한 성도들은 그런 삶에 속지 아니하고 깨어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이 분명하다면 먹고 마시는 삶, 더럽히며 행실을 마음대로 하며 방탕한 삶, 죄를 짓는 삶에 빠지지 말아야 하고 거기서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데 죄를 지으며 더럽히며 먹고 마시는 방탕 가운데 빠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떡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떡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우리는 어둠의 빛이 임하는 부활 신앙으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분명히 믿는 신앙을 확실히 하는 예수 안에 있는 예수 소속의 성도로 우리는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나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위험을 무릅 쓰고 안전지대를 벗어나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그냥 위협을 최대한 회피하며 그냥 편안하고 안전하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날마다 죽는 삶을 경험하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유익만을 구하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의 삶은 경건한 삶입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주의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십니까? 아니면 내일 죽을 거니까 먹고 마시며 선한 행실을 더럽히며 방탕한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부활 신앙은 나의 일상의 삶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바꾸는 매우 중요한 삶의 지침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 분명히 하며,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분명히 믿어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주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며, 날마다 내가 십자가에 죽으며, 깨어 주님을 바라보며 속지 않는 인생 되어 부활 신앙안에 믿음이 든든히 세워져 가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통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 부활의 사건이 우리에게 하나님 사건이며 역사적 사건이며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우주적이고 역사적이며 하나님 사건인 그 예수 부활의 사건이 우리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온 세계와 모든 열방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예수 부활은 바로 미래의 산소망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예수 부활로 인하여 우리에게 산 소망이 주어졌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산소망이 주어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Typology 유형론을 가지고 옵니다. 이 유형론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부활하신 사건이 첫 번째 아담이 가져왔던 것들을 되돌리는 사건임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이미지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들어왔다…이것이 창세기 말씀입니다. 첫 번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우리에게 모두 들어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선명히 선언하는 것이죠.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진흙과 함께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생기가 불어넣어져 영적 존재가 되게 하시며 인간을 만물의 영장 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른 피조물과 차별성을 갖는 특별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인간이 죄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 창조받을 때의 원래 나다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함으로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 사망이 들어왔다는 건 뭐냐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깨지고 분리되는 것을 통하여 그 영적인 존재로서의 인간 본질이 다 무너지고 깨진 것이죠. 아담이 죄를 지어서 사망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은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가 들어오게 된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었는데 그저 고등동물같이 고깃덩어리같이 살게 된 것은 그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온 결과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하나님과 단절되고 분리되어 아담 안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영적으로 죽게 되고 죄의 권세와 사망의 권세, 음부의 권세에 결박되어 눌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분리되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로 살아가며 죽음은 끝이라고 여기고 살게 되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 결박되어 살아가는 고깃덩어리 고등동물이 된 것이죠. 그래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이 죽음의 문제를 넘어설 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게 모든 인류가 처한 영적 문제라는 것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기에 오신 분이 바로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어 분리되었고 모두 죽게 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인류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르시고 죽은 자의 부활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셔서 모든 인류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을 주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이 우리에게 산소망이 되는 본질적인 이유는 그저 나 하나 살리시고 구원 하셨다는 이 개인적 고백을 넘어 모든 인간이 아담 안에서 모두 죽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는 첫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이 예수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천국에 갈 준비를 하는 가장 중요한 건 예수 안에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분명히 속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 내가 지금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인지가 분명한 것이 천국에 갈 준비를 하는 겁니다. 내 죄를 내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내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어요.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깨끗해지고 죄사함을 받으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하게 되는 부활의 소망을 현재형으로 붙드는 것뿐입니다.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로 내가 분명히 서 있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새 삶을 얻느니라….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은 살리시는 영, 생명을 주는 영, Life-giving spirit이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구약의 예언서 가운데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마른 뼈와 같이 우리는 다 죽은 존재인데 그 마른 뼈들에게 생기를 얻어 다시 살아나라는 그 역사, 그리스도의 영이 닿는 곳마다 다 살아나고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 이게 장차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려주시는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은 살리시는 영이며 생명을 주는 영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됨을 분명히 믿고 산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게 저와 여러분이 예수만이 그리스도이고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만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자가 되는 이유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인류가 죄와 사망의 권세에 결박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그 이름을 믿기만 하면 그 이름을 영접하기만 하면 그리스도에게 소속되기만 하면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됨을 분명히 믿는 것, 이게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 부활을 믿는 신앙, 분명한 미래의 산 소망을 붙든 우리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쉼표이지 결코 마침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게 되는 겁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음을 분명히 믿으며 죄와 사망의 권세와 결박에서 풀어진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나에게 소망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나에게 소망은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이며, 나에게 소망은 그리스도에게 소속되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걸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 거하는 것이 바로 미래의 산 소망인 예수 부활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분명한 신앙고백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새 삶을 얻은 이 분명한 고백이 나의 믿음의 고백이 되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시며 잠자는 자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부활을 나의 미래의 산소망으로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복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가장 중요한 복음 핵심은 Christ is risen! 예수 부활하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부활 신앙을 말씀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건으로 믿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 바로 초대 교회입니다. 복된 소식인 복음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세상에 오셨고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실체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부활 사건은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이자 우주적 사건이자 하나님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 신앙은 내 감정과 느낌과 나의 이해를 넘어서 이 분명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근거로 하고 기초로 하는 하늘의 소망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 되는 것이죠.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게 아니라 오랫동안 언약으로 주신 그 약속이 성취된 사건, 말씀대로 일어난 사건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 사건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부활 사건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가 하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발견하듯이 그 당시에도 이미 부활의 신앙을 상징이나 의미 정도로만 새기려 하는 부활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부활 신앙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활은 내 머리로 이해되지도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며 부활을 거절하거나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게 지금의 문제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상황에서도 이미 발생한 문제였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당시에 성경에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하는데, 사두개인들의 특징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부활을 부인하고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 자들, 내 머리와 논리에 담겨 받아들여야 믿겠다는 이런 생각들이 이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물 위를 걷는 기적도, 물을 포도주로 만드시는 기적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기적도 다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것을 당연히 믿을 수 없는 거죠. 또한 초대교회 당시에 있었던 대표적인 이단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현설인데,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것을 부인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그 몸으로 쑥 들어가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에 쑥 빠져나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논리가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피 흘리고 고통당하며 그렇게 죽어가는 것도, 죽으신 후 부활하신 사건도 내 머리와 논리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논리를 내세우며 1번, 2번, 3번으로 부활을 증명하려고 그러지 않습니다. 대신 이 부활 사건은 하나님의 사건이고 우주적 사건이며 역사적 사건임을 선명히 선언하며 내가 마음에 새기는 믿음과 순종의 대상이지 증명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모든 전파하는 것도 믿음도 다 헛것이고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구구절절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 사건이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건이 아니고 우주적 사건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이 아니면 여러분들 지금 새벽 기도하는 거 다 헛것입니다. 여러분들 말씀 붙들고 신앙생활한다는 거 다 헛것이고, 복음밖에 있는 자들을 구원한다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거 다 헛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저와 여러분들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을 믿지 않는 자가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대로 창조되었음을 믿겠습니까? 예수 부활 사건을 믿지 않는 자가 이 시간 예수님이 말씀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예수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겠냐는 거예요. 내가 정말 믿고 싶은데 믿을 수 없는 게 아니라 너희가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믿고 싶지 않으니까 안 믿는다는 거예요. 믿을 마음이 없으니까, 죽은 자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선언한다는 거예요. 부활은 가짜이고 부활은 증명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런 일들이 계속 벌어지게 되더라는 겁니다. 예수 부활 믿기를 거절하는 자들은 믿을 마음이 없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부활 사건을 믿는 것은 말씀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말씀대로 인간이 되어 오신 하나님이시며 말씀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하나님의 사건 전체를 믿는 고백이 되고요.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이 전체를 부인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 부활을 분명히 믿지 않고 고백하지 않으면 우리 신앙이 헛된 것을 넘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인생이라는 것을 결론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데, 바라고 구하는 게 다만 이 세상뿐이라면 정말 불쌍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다시 살리시는 걸 분명히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는 자는 바라는 게 다만 이 세상뿐일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삶을 넘어 천국의 삶이 있음을 상징이 아니라 실체로 믿고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예수 믿고 변화되는 가장 중요한 본질은 내가 붙들고 바라는 게 이 세상의 삶뿐인 삶을 넘어가는 기적입니다. 예수 부활 사건을 믿음으로 보이는 것은 다 흘러가고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이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왜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지 압니까? 바라고 구하고 붙드는 게 이 세상의 삶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구하고 바라고 붙들고 움켜지는 게 이 세상밖에 없고 눈에 보이는 것밖에 없는 것이, 본질적 문제라는 겁니다. 그런 자들은 부활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분명하지 않으면, 예수님께 헌신하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헛되 보이고 이 세상 것을 붙들지 않는 것이 불쌍해 보인다는 겁니다. 예수 부활 사건을 말씀대로 이루어진 하나님 사건, 하늘의 사건, 우주적 사건, 역사적 사건으로 믿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기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을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은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약속대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 놀라운 은혜로 잠자는 우리를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실 예수 이름의 능력 예수의 권세가 나에게 있음을 믿으며 오늘 나는 바라고 구하고 붙드는 것이 이 세상뿐인 삶을 넘어선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내가 바라고 구하고 붙드는 게 오직 이 세상의 삶밖에 없으면 제일 불쌍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구하고 붙드는 게 이 세상의 삶을 넘어서 영원한 것이 있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부활신앙을 분명히 하며 이 세상에서 헛된 신앙과 불쌍한 신앙으로 살아가지 마시고 분명한 믿음과 신앙 가운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이 세상의 삶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삶이 있음을 분명히 믿고 바라고 구하고 붙드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장이라고 알려져 있고, 14장은 은사장으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의 참 보물과 같은 말씀들을 고린도전서에는 품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우주적이고 역사적이며 언약적 사건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놀랍게 선포하면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놀라운 사건을 바라본 증인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증언했습니다. 부활 후 예수님께서는 열한 제자에게 보이셨고 500명의 형제에게도 보이셨고 나같이 미천한 자에게도 보이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 부활 신앙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셨다는 사실만 믿는 게 아니라 그 예수님이 하신 일이 바로 나를 구원하시고 생명 주기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임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그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생활과 영적 환경이 무엇인가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근거로 한 영적 생활은 바로 나 자신이 지극히 작고 자격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는 영적 겸손입니다. 그 놀라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 나를 바라보니까 나는 지극히 작고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는 자라는 것을 절감하는 것, 이게 영적 겸손입니다.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내 자격과 조건은 모두 무너뜨리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영적 겸손입니다. 예수를 믿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착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으며, 나에게 소망을 두지 않는 게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이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자가 천국 간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나에게는 구원받음에 아무런 자격도 조건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신앙 생활 제대로 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로 자기가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여겼고 사도로 불림을 받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격과 조건이 없는 자라고 철저히 고백하며 살았습니다. 그 본질적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라는 것을 평생 마음의 짐으로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에게는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왜 약속대로 부활하셨습니까? 나에게는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자격도 없는 것이죠. 이것을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게 영적 겸손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이 영적 겸손의 태도가 있는 겁니다. 부활 신앙을 철저히 붙들면 붙들수록, 내가 작은 자이며, 자격도 조건도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깨닫게 합니다. 반대로 내가 자격이 있고 조건이 있고 내가 이렇게 받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면 겸손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자가 되는 겁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연수가 길어지고 깊어질수록 나에 대한 소망을 내려놓고 나는 자격도 조건도 없음 작은 자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당연함을 넘어서는 영적 겸손을 견지하며 신앙 생활 하기 원합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이 증언하는 부활 신앙을 기초로 할 때 나오는 영적 환경은 바로 은혜의 환경이라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 유명한 고백과 함께 10절 한 절에 은혜가 세 번이나 등장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수고하고, 내 수고도 내가 한 수고가 아니라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철저히 고백합니다. 겸손과 은혜, 이게 부활 신앙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 본인의 고백을 통하여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혜로 영적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환경에 나를 둔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고 한결같은 그 사랑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안에 있을 때 자유로운 거지, 물밖에 나오면 조금 있다 숨 막혀 죽게 되는 것처럼, 성도인 내가 은혜의 바다 가운데 있을 때만 자유로운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면 영이 아닌 육이 활성화되며, 육적으로 민감한 삶이 되어, 영적인 것이 모두 마비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경시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바다에 내가 있으면 끊임없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전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을 내가 취하며 맛보며 누리며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영적으로 눌리지 않고 결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영적으로 민감해지고 영적으로 깨어나며, 그 은혜의 바다 가운데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 환경을 은혜로 두고 사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 겸손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의 자격 없음 조건 없음을 바라보며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자를 살리시 고 건지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의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사랑을 바라보며 내가 은혜 가운데 뛰놀고 살아가는 영적 환경에 나를 두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삶에 집중하게 되는 게 무엇입니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부름받은 증인의 삶이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전파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무엇에 집중하게 되는지 압니까? 내가 한 일에 집중하게 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게 모든 내 삶에 관심이 되어 버리고 내 생각의 전부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한 일, 내가 이룬 일, 세상에서 일어난 일에 압도당해 그 안에 결박되어 살아가는 겁니다. 부활신앙을 철저히 붙드는 성도는 이것을 넘어서 어떤 삶을 사도록 부름받았습니까?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넘어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목하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내가 한 일을 넘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일어난 일을 자꾸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고 내가 한 일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집중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영적 겸손과 은혜의 삶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영적 훈련을 한다는 것은 나를 이 은혜의 환경 가운데 두는 의도적인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환경 가운데서만 마음껏 헤엄치고 뛰놀 수 있음을 분명히 알고 은혜의 영적 환경을 조성하십시오. 내 마음과 생각을 자꾸 세상에 빼앗기지 말고 세상에 일어나는 일 내가 한 일에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하나님이 하늘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고 살아가기를 소망하고 열망하십시오. 하나님이 과거에 어떤 일을 하셨고 지금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며 앞으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에 집중하며 관심을 가지며 주목하는 삶, 바로 영적 겸손과 은혜의 환경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유일한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붙들고 그의 은혜를 의지하여 가는 것이죠. 나의 나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내 모든 삶의 수고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다…이 고백이 사도 바울의 고백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실체적인 고백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약속대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사망 권세를 깨고 나를 부활하신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주님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너무 작고 자격도 조건도 없는 정말 소망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영적 겸손으로 엎드리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와 그가 하신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영적 선순환이 우리 삶에 풀어지며 영적 겸손과 은혜의 영적 환경 가운데 나를 두면서 오늘도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3장은 사랑장, 14장은 은사장, 15장은 부활장…모두 보석과 같이 귀한 말씀들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가장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선포되는 말씀 한 군데를 뽑으라 하면 고린도전서 15장을 꼽을 정도로 15장은 부활장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그리고 성도들이 붙들어야 할 절대 가치와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과한 모든 것이며 또한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명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을 하나의 핵심으로 말한다면 바로 그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나름대로의 부분 진리들이 있고 부분적인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의 공통적인 그런 요소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죠. 그런데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라 하면 바로 인간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다른 종교와의 차별점, 그리고 기독교를 기독교로 되게 하는 핵심이 뭐냐?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도록 이끄는 그 놀라운 복음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15장에서 집중적으로 부활에 대해 증언하며 강조하는 겁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굳게 지키고 분명히 믿지 않으면, 그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선명히 붙들지 않으면 우리 믿음의 기초가 헛된 것이라고 강조하는 겁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음을 믿는 고백과 그분이 약속대로 다시 사셨음을 믿는 고백, 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축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어쩌다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죽으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약 내내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로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는 놀라운 우주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치르시는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다 찢어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관계가 다 예수 이름으로 해결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오래전부터 예언된 언약의 성취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요나의 예를 들면서 자기가 죽었다가 부활할 것을 이미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나가 불순종으로 도망가다가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에 들어가 3일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그 요나의 사건을 예를 드시며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고 마태복음 12장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흘 후에 다시 요나가 나온 것처럼 인자도 사울 후에 부활하리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의 요나 사건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예표로 주신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복음서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사건도 십자가의 사건도 성경대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며 일어난 하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모든 구원의 선물을 완성하신 후에 바로 승천하신 게 아니라 40일 동안 부활의 증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의 증인들을 남겨 두시기 위해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것을 보이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강조합니다. 수제자 게바를 위시해 11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다른 500형제들에게 일시에 보였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등장하는 제자들은 사실 증인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그들은 하나같이 숨거나 배신하거나 도망간 자들이죠. 그러니까 증인으로 내세우긴 참 부족한 자들입니다. 사실 증인으로 가장 중요하게 먼저 나와야 할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배신하지 않고 한결같이 자리를 지킨 여인들이죠. 복음서들은 공통적으로 여인들이 먼저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도 바울 시대에는 여자의 증인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 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여인들에 대한 증거들을 다 빼고 이 부끄러운 제자들과 남자들만 전면에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목도했던 자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이름 모를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신앙과 말씀의 기둥은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집니다. 구약의 모든 이야기들은 옛 언약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성취하시는 그 언약을 위한 밑그림 작업이고 그림자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약속대로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은 우주적 사건이자 역사적 사건이자 실체적 사건이라는 것을, 또 약속과 성경대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초대교회의 초석은 바로 이 예수 부활의 증인들로부터 시작한 겁니다. 배신자, 겁쟁이, 숨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바라보고 직면하면서 놀랍게 변했고, 성령의 충만하신 역사 가운데 그들이 완전히 뒤집어진 겁니다. 마지막으로 나 같은 사람에게도 보이셨다는 것이죠. 부활하신 주님을 머리로만 안 것이 아니라 직접 대면에서 알고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뒤집는 능력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했다는 것이죠. 자기 자신의 간증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이고 능력이며 교회를 존재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역사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이 메시지 하나를 붙들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교회가 된 역사였다는 거예요. 초대교회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Christ is risen…예수 부활하셨다..인 이유입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의 선포가 초대교회를 탄생하게 했으며, 복음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한 핵심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부활의 신앙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과 핵심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인이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선명히 믿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분명히 믿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모두 감당하셨다. 약속대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영생을 주셨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계시며 지금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의 문제가 온전히 해결되었으며, 죽음이 끝이 아니라 우리 죽음은 환승역임을 분명히 믿고 예수 이름으로 영생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바로 부활의 증인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의 성도의 고백되기 원합니다. 그 고백 위에 지금 이 시대에도 그 부활의 증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교회라는 존재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기초로 삼고, 기독교 신앙의 흔들리지 않은 복음인 십자가와 부활이 내 삶에 분명한 고백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방언의 성경적 사용에 대한 결론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가 풀어졌던 많은 성도들, 특별히 여자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분명한 권면을 결론의 말씀으로 주고 있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내 유익과 자랑을 넘어 교회에 덕을 세우며 주신 분의 뜻대로 잘 사용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겁니다. 품위가 있다는 것은 은사를 사용하면 할수록 주변 사람들과 교회에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되는 것이고, 질서 있다는 것은 은사를 사용함에 무질서를 넘어 하나님이 주신 질서와 영적 우선순위가 깨지지 않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만과 자기 유익을 세우려 하면 망하게 되고 반드시 다른 사람과 교회의 덕을 세우며 질서와 품위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방언만 하면 갑자기 자기가 마치 신령한 자가 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소위 말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내가 은사를 받아서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정확하게 기억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이 말씀이 한 번에 딱 해석이 잘 안 되는데 원문을 가지고 직역을 해 보면 이런 말씀이에요. 지금 편지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권면은 단순히 개인적인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시는 분명한 명령임을 믿느냐는 겁니다. 이 사도 바울의 권면을 주의 명령으로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그 또한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본인들은 은사가 있다고 여겨 교만과 자기 덕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영적 교만을 허물어 주기 위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주의 명령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누구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에게 인정 못 받게 되겠죠.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시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명령으로 여기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인정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 또한 너희 인정 안 하신다는 겁니다.하나님 말씀을 주의 명령이라는 분명하고도 겸손한 태도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태도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경시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가 은혜를 받은 말씀, 내가 좋아하는 말씀은 있는데, 그것을 취사선택해서 그것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나에게 힘이 되고 나에게 위로가 되고 내가 좋아하는 말씀이 있는 게 왜 잘못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만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여기며 다른 것들은 다 배제하고 나아가는 삶, 이런 취사선택의 말씀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고 무너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새벽 말씀 같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이런 말씀이 가시와 같이 해석이 어렵고 불편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내가 평가하거나 재단하려고 한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게 되면 갑자기 스스로 신령한 자가 된 것 같이 착각하며, 그런 체험과 경험을 절대 같이 두며 심지어 말씀의 통제를 벗어나 말씀 위에 올라가서 자빠지고 넘어져 결국 사단의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하다…스스로 신령하다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이단, 삼단에 그렇게 잘 빠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통제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질서 가운데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체험과 경험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내 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이유입니다. 이 본질적인 성경적 우선순위와 적용을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신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꼭 들어야 할 권면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 누구에게 인정 못 받게 되는가 하면 함께 신앙생활하는 지체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하고 활기차게 살 수는 있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사느냐 아니냐는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괜찮은 사람일 수는 있는데,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말씀에 묶여 사는지 아닌지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다 주변 사람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좋다고는 인정할지 모르나 그 사람의 신앙은 인정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겁니다. 마치 스스로 신령한 자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 가운데 굴복하지 않고 말씀보다 내 이성이나 내 경험이나 내 체험을 계속 더 우선순위에 두고 절대 가치에 두면 주변 사람들이 다 안다는 거예요. 저 사람에게 말씀은 별거 아니구나. 저 사람은 말씀의 사람은 아니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 가운데 굴복하지 않는구나. 이거 다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주변에 함께 있는 지체들이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선 좋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좋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본질은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이죠. 그 신앙이 진짜인 자들을 사람들은 찾고 그 진짜 신앙인 자들이 계속 세워져 나가는 곳이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중요한 건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 방언으로 인해 문제가 있습니다. 방언의 무질서와 덕을 세우지 못한 이런 문제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방언 말하지 마…이건 안 된다는 겁니다. 은사 사용으로 문제가 생겨서 어떤 교회들은 방언을 금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로 주신 방언을 말하는 것은 문제와 무질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덕이 좀 세워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금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걸 성경적 원리로 잘 개선해 가지고 이제 다시 조율되면 되는 것이지, 그것 때문에 방언을 금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동시에 방언을 금하지 말되 예언하기를 더 사모하라는 겁니다. 은사보다 방언보다 말씀을 더 사모하라는 겁니다. 체험과 은사를 향한 그 사모함이 말씀을 사모함보다 넘어서면 우리는 망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분명한 말씀의 통제를 받는 은사가 되기를 구해야 합니다. 늘 내 체험과 경험만 사모하지 말고 제일 먼저 사모해야 할 건 하나님 말씀, 우리 삶의 절대 방점은 말씀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임하기를 사모하며 그 예언의 말씀을 먹고 내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의 말씀이 꿀송이보다 단 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내가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품위와 질서가 생기며 교회의 덕을 세우며 이걸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앙생활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령의 선물로 주시는 방언의 은사,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금하지 않고 그것을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항상 말씀에 분명한 통제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의 사람이 1번이고, 그 말씀을 통과한 기도로 말씀을 붙든 은사가 풀어져 하나님 앞에 폼이 있고 질서 있고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것을 주님의 명령으로 믿으며 내 머리에 담기지 않고 수용되지 않을지라도 그 말씀을 내가 굴복하고 그 말씀에 언제나 말씀이 옳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말씀의 사람입니까? 특별히 내가 영적이라고 생각하고 믿음이 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꼭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1번 되셔야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취사 선택하고 이게 옳다 그르다 판단하고, 말씀을 취사 선택하기 시작하면 결국 하나님께도 인정받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말씀의 권위 앞에 엎드리며 말씀이 하나님 명령이자 하나님의 말의 숨결임을 믿으며 그 말씀을 먹고 순종하며 그 말씀을 향한 사모함과 갈망이 나에게 절대 기준과 가치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의 명령과 말씀으로 대하며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순종하며 엎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성령의 은사를 사용할 때 주님이 주신 그 뜻대로 때로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대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교회의 덕을 세우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고 또 여자 성도들에게는 가장 거북하고 불편한 말씀으로 꼽히는 그런 대표적인 말씀인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여러 가지 해석과 적용을 통하여 여러 교단과 교파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을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논란이 되고 상반된 해석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이런 말씀은 불편하고 거북하다며 빼어 버리고 성경을 취사선택해서 읽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의미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고, 말씀을 시대 상황과 맥락에 맞춰 해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먼저 이 말씀은 여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면 안 되고 그냥 잠잠히 무조건 침묵을 지켜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1장에서 분명히 여자 성도들을 향하여 심지어 기도도 하고 말씀의 강단을 세우는 그런 파격적인 일에 대해서 권면한 말씀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사회에 어느 곳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남자와 여자는 분명한 계급적인 차이가 있는 그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여인들을 대표 기도와 강단에도 세웠다는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이 모든 여자들은 교회에서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권면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별이 없고 종과 주인 사이에 차별이 없음을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차이가 없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선포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면 이 말씀 자체가 일반적으로 우주론적으로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해야 되고 침묵해야 되고 어떤 발언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이 말씀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교회의 상황과 배경하에서 이 말씀을 바라보는 것과 말씀의 큰 맥락 속에서 해석하는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합니다. 먼저 14장 전체 말씀이 방언의 은사에 대한 큰 주제를 다루고 있기에, 잠잠하라는 권면은 방언 사용에 대해 여인들은 남용하지 말고 절제하며 침묵할 때는 침묵하라는 해석이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그 당시에 고린도 교회 상황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마찬가지로 여성도들이 훨씬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여성도들이 과거에만 많은 게 아니라 지금도 일반적인 교회를 보면 여자 성도들이 많습니다. 왜 여자 성도들이 많은가 하면, 여자 성도들이 남자보다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에 더 민감하기 때문입니다. 여자만 아이를 갖고 생명을 잉태하는데 그 아이의 생명이 껍데기의 육신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영이자 육인 존재를 품고 그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도구로 쓰임받는 게 여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실 때부터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영적으로 민감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고 기도를 사모하고 은사를 사모하는 분들을 보면 여자 성도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교회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주도적으로 많았던 곳은 군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군대 교회만 남자가 많고, 일반적으로는 어느 교회나 여자 성도들이 더 많습니다. 동시에 고린도 교회는 여 성도들에게 성령의 은사가 충만했던 교회였습니다. 그 당시 여성들은 발언권도 없었고 참정권도 없었고 증언으로 채택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냥 사회에서 오늘 말씀과 똑같이 그냥 잠잠하고 오직 복종하며 있었어야 했던 것이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 여인들에게 유일한 해방구, 탈출구, 그들이 존재 그 모습 그대로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곳이 어디였냐 하면 교회였습니다. 오직 교회에서 복음으로만, 십자가 사랑으로만 그런 일들을 허용하고 허락한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많은 여성들도 있었고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경험한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여인들에게 교회가 유일한 탈출구, 해방구였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반작용들이 고린도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 대표적인 게 바로 14장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방언의 은사의 문제입니다. 여자 성도들 가운데 방언의 은사에 너무 심취하여 방언을 받은 것을 절대 가치에 두기 시작하고 그것 때문에 예배 질서와 예배 자체가 드려지지 못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자꾸 중간에 끼어들고 특별히 예배 중에도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함으로서 예배 중간에 끼어들고, 대표 기도 중에도 방언으로 막 기도하면서 그것이 자기의 교만과 자랑이 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3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라 강조하는 겁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고린도 교회는 방언으로 말미암아 무질서와 화평이 깨지는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은사는 있는데 교회가 화평이 깨지고 예배의 질서가 무너지고 방언이 교회에 덕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사도 바울이 강조했던 건 방언은 항상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방언은 교회의 공동체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항상 영적 질서를 따라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적 질서와 권위를 따르지 않는 일들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강한 어조로 권면한 것으로 해석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여기서 여자는 보편적인 모든 여자를 말한다기보다는 고린도교회 성도 가운데 특별히 은사가 풀어지는 것을 통하여 교회에 덕과 화평을 무너뜨리고 무질서에 빠져 있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방언으로 자기 교만과 자랑거리가 되며 교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는 이 여인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거예요. 요한 복음에서 유대인들이란 인종적인 이스라엘 사람 모두를 의미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 대항하고 거절하고 충돌하는 어둠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결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예배 중에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예배 중에는 순서를 맡은 자들이 성도들을 대표해 말을 하는 것이지, 회중석에 앉은 사람들이 갑자기 손 들고 끼어들어 막 얘기하면 예배의 질서가 다 깨집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서는 자꾸 예배 중에 벌떡벌떡 일어나서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막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고 그들 대다수는 여자 성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들이 예배 중에 질서를 깨며 끼어들어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 36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예배 중에 무슨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습니다. 소위 말한 직통 계시를 받았다고 이런 얘기들을 예배 중에 큰 소리로 말하는 겁니다. 은혜를 받으려고 모였는데 예배 중에 여러 여인들이 막 손 들고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벌떡벌떡 일어나는 겁니다.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면서 막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예배 질서를 깨고 분란을 일으키며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한 일들이 빈번해진 겁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더구나 없었기 때문에 이런 영적 혼란이 가중되는 겁니다. 이런 배경하에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권면합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민감하고 영적 은사를 사모한다는 여인들이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며 공동체의 덕을 세우지 못하며 화평을 다 깨며 무질서하게 만들어 교회 문제를 일으키는 그들을 향하여 여자들은 교회에서 잠잠하라…권면하는 겁니다. 여기서 잠잠하라는 건 뭡니까? 말할 때와 침묵할 때를 알아서 절제하라는 거죠. 그들의 방언의 은사를 그들이 소위 말하는 좀 영적으로 깊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려는 절제하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에 덕이 세워지도록, 교회 공동체에 질서와 화평이 생기도록, 절제하고 침묵할 때는 침묵하라는 겁니다. 공적 예배 가운데 함께 모여 있을 때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화평과 질서를 잊어버리지 말고 절제하라는 게 바로 잠잠하라는 겁니다.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이 말씀의 배경 또한 은사를 좀 받았다는 여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나오냐면 계속해서 자기 영적 지식을 교만으로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판단하려고 하고, 영적인 사람과 아닌 사람을 본인들이 판단하면서 이걸 가지고 교회에서 소위 말하는 소모적인 논쟁을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는 주인과 종은 여전히 분명한 계급이 있었고 경계가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 주인과 종이 모든 담을 허물고 함께 예배 드렸지만 그들의 일상 생활에선 주인과 종의 구별은 여전히 명확했기에 사도 바울은 종에게 주인을 향해 복종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 모두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며 형제자매가 됐지만 그 사회는 여전히 그 구별이 분명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전도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교회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도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종들에게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하듯, 그들은 복음 안에서 분명히 하나가 되고 형제자매이지만, 부인은 남편에 대한 분명한 질서 가운데 순종하라는 겁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순종하고 복종하며 남편에게 물어보는 이것이 그 당시의 사회 질서였고 그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화평과 평안과 질서를 가지고 나아가야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배경하의 이 말씀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중요한 교회의 사명은 예수 생명을 모르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우린 놀라운 자유를 누리며 하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붙들고 자유를 누리되 그 자유가 하나님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화평을 깨는 덕을 무너뜨린 대로 간다면 그것은 남용이 되며 그것은 부작용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난제가 있고 가시와 같이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늘 존재합니다. 이 말씀들을 함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내가 중심이 되어 옳다/틀리다를 판단하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영적 겸손이 있기 원합니다. 말씀으로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그 당시의 상황과 맥락을 이해하며 그 말씀을 말씀대로 풀어가려는 그 부단한 노력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부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고, 함부로 말씀을 취사 선택하거나 배제하지 않는 말씀을 붙들고 해석하며 말씀을 통하여 여전히 난제를 통하여 가시와 같은 말씀에도 은혜를 받으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은 방언의 은사와 사용에 대한 성경적 기초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굉장히 소중한 말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가 충만한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미성숙하며 교회가 분쟁과 분열을 계속하는 모순이 있었습니다. 그런 문제의 본질 중에 하나가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주신 분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언의 은사가 내 개인적으로 은혜 받는데는 굉장히 좋았는데 함께 모여서 예배 드리는데 이것이 교회 무질서를 가져오고 교회 안에 계층을 나누게 되며 특별히 자기 자랑이나 교만으로 과시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며 교회 안에 분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런 문제에 빠지지 않고 성경적 원리로 방언의 은사를 잘 사용하는 전제 조건이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에 덕을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주변 사람들의 덕을 세우면서 방언의 은사가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공예배로 모여 있을 때 그 예배에는 중요한 순서들이 있지 않습니까? 찬송, 즉 경배와 찬양이 있고, 가르치는 말씀인 성경 봉독 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의 말씀인 설교 시간이 있고, 방언과 통역하는 이런 예배의 여러 가지 요소가 있을 텐데, 그 예배의 모든 순서와 방언의 은사를 교회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겁니다. 아무리 풍성한 은사가 있고 내가 은혜를 받는다 할지라도 공 예배 가운데 그것이 무질서하게 사용되면 예배에 폐가 되고 방해가 되며 교회에 덕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잘 사용하는 두 가지의 실천적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차례와 순서를 지키면서 방언 기도를 하라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를 사용할 때 차례와 순서를 따라하라고 명할 정도로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공예배 중에 방언의 은사가 순서와 차려도 없이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며 무질서하게 남용되었습니다. 대표 기도를 하러 올라왔는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 기도로 하는 겁니다. 혼자 기도할 때야 은혜 받으니까 좋은데 교인들을 대표해서 대표 기도를 하는데 방언 기도를 하니까, 대다수의 성도들은 무슨 기도를 하는지 모르고 소외 당하는 겁니다. 그것도 한 사람만 하는 게 아니라 방언 기도로 대표 기도하니까 여기저기서 갑자기 차례와 순서도 없이 방언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교회가 질서가 없어지고 이것이 공예배 가운데 은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덕이 안 되는 겁니다. 더구나 그 당시 고린도 교회는 분열과 파벌이 많아져 있었습니다. 전임 목사파, 후임 목사파, 베드로파, 예수파 등으로 막 나눠져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 계파에 따라 또 이 방언의 이해와 색깔도 다르고 방언의 목소리도 다른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는다는 명분 아래 경쟁하듯이 내가 더 영적이라는 것을 자랑하면서 방언기도를 쏟아내는 이 무질서가 교회의 공예배 가운데 만연했던 것입니다. 이런 영적 혼란과 무질서 가운데 사도 바울이 정확하게 지침을 제시합니다. 공예배 중에는 반드시 차례와 순서를 따라 하라는 거예요. 지금이 방언 기도를 할 때인지 안 할 때인지, 내가 말할 때인지 잠잠해야 할 때인지, 나아갈 때인지 물러갈 때인지를 분별하며 주변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회의하면 본인만 얘기하고 본인만 손 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나만 말하면 된다는 마음에 배려가 없는 것이죠. 내가 두 번 말했으면 옆에 있는 분이 말할 수 있게 기회를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남을 위한 배려도 덕을 세우기 위해 차례와 순서가 있음도 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게 되면 무질서해지고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스럽지 못한 은사 사용이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고 흔드는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서는 질서가 있어야 하고 교회에서는 차례와 순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고 권면하는 겁니다. 나에게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있는데, 그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교회에 덕을 세우고 있는지에 대해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신 은사가 나에게 은혜가 되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 내 유익을 넘어 주변 사람과 교회의 유익과 덕을 세우는 데 잘 사용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반드시 통역을 세우라는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때 방언의 기도는 회중석에 앉아서 혼자 기도하는 게 아니라 대표 기도 순서를 맡았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는 상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대표 기도로 올라와서 굳이 방언 기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누구를 세우라는 겁니까? 옆에 통역을 세우라는 겁니다. 대표기도라면 회중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 기도는 교인들을 대표해서 하는 기도인데,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를 한다면 이거 안 된다는 겁니다. 회중석에서 같이 통성 기도할 때 기도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기도할 때, 그렇게 방언 기도하고, 대표성을 가지고 순서를 맡아서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를 전하는데 성도들이 못 알아듣는 말로 전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그것이 은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대할 때도 대표성을 가지고 대표 기도를 할 때도 중요한 것은 내가 은혜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아니라 교인들을 대표해서 내가 기도하고 있느냐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덕을 세우는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게 덕을 세우지 못한다면 잠잠하라는 겁니다. 통역이 없는 방언 기도를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자기와 하나님께, 즉 개인적으로 기도하고 교회에서는 잠잠하라는 겁니다. 내가 받은 방언 은사가 성령님으로 받은 은사라는 것이 분명하면 그분의 뜻에 맞춰 그분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방언,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방언,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는 방언을 사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소음이고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 겁니다. 방언이라고 얘기한 것이죠. 나만 은혜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넘어서 내 주변 사람들도 같이 은혜를 받고 교회의 덕을 세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방언의 은사는 교회의 덕세움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질서 가운데 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방언의 은사는 항상 예언의 은사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이 영적 질서와 우선 순위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사 사용은 기록된 말씀. 성경을 벗어나지 않고 말씀의 권위 아래 통제를 받으며 바른 질서와 우선순위 가운데 은사가 발휘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비롯한 공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되며 잠잠할 때면 잠잠하고 말할 때는 말하고 나아갈 때는 나아가고 물러설 때는 물러설 줄 아는 분명한 영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방언의 은사가 나에게 은혜가 되며 주변 사람과 교회에 덕을 세움으로 성령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은사를 통하여 주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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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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