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6장 말씀은 성도로서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는 무언가를 계속 심고 거두는 것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과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선택이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국 책임을 지는 겁니다. 오늘 새벽기도 또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고, 그 선택을 통해 오늘도 무언가를 심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정의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자유를 제한 받는다 착각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깨진 마음을 가진 우리는 대부분 내가 진 짐을 서로 넘기 위해 자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본성은 끊임없이 주신 자유를 나 만을 위해, 내 육체의 소욕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아가기 위해 남용하고 내 짐을 타인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내 마음이 타락하고 깨져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의 삶은 결국 내 육신의 소욕을 만족하기 위한 방종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자유를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 계속 사용하면 결국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주신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육신의 소욕을 만족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는 억지로 끌려가 죽으신 게 아니라, 주신 자유를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나를 위해 피를 쏟으시며 고난 당해 죽으시며 주신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통과해 주신 자유를 내 육신을 위해 심지 않고 영의 일을 위해,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자발적 선택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마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유이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는 자유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마음대로 짓는 자유가 아니라 주신 자유로 죄를 짓지 않는 자유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통하여 육신의 일이 아닌 영의 일을 심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자유를 통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고 내 육체 소욕을 거슬리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심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낙심하는 마음과 포기하려는 마음입니다. 몇 번 하다 보면 자꾸 마음에 낙심이 되는 겁니다. 왜 낙심이 되냐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며 자기의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왜 나만 늘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사는가…다른 사람들은 죄 마음대로 짓는데 왜 나는 늘 죄를 짓지 않는 자유로 나아가는가….여기에 낙심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지려 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꾸 자기의 짐을 떠넘기는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호의를 베푸는데, 그 호의를 권리로 여기며 자꾸 짐을 떠넘기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마음에 좋은 일 하다가 내가 선을 행하다가 자꾸 낙심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주님 앞에 열심히 헌신하는 자들에게 늘 찾아오는 일이 낙심과 포기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미혹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할 때 포기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씨를 뿌려야 하는 겁니다. 주신 자유를 내가 썩어질 육신을 위해 심는가, 아니면 영원한 영의 일을 위해 심는가,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 심는가, 주의 영광과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심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낙심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건 포기하지 말라는 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그 페달을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통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으며 영생을 거두는 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은 주신 자유를 통하여 무언가를 심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어떤 자유의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선택에 대한 결과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심는 그 자유를 통해 언젠가는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자유를 육신의 소욕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위해 사용한다면 결국 육체를 위해 썩어질 것 만을 거둘 것입니다. 반면에 주신 자유를 공동체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내 마음대로 살아갈 자유를 제한하고 살아간다며 결국 영생을 거두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주신 자유로 썩어질 것을 뿌리는데 내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 썩지 않을 것을 심는데 잘 사용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주신 자유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심는 자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고 착각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신 자유로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심는 사명에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나아가십시오. 결국 때가 되면 거두게 될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님 앞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은 매우 강력하고 우리에게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임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나를 망치고 주변 사람들을 망치는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는 나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죄를 마음대로 짓기 위한 자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자유는 결국 육체의 소욕을 만족하는 것에 머무는 방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으로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삶,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성령 안에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기쁨 되는 삶을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성령 하나님과 발을 맞춰 가시는 그 길을 함께 따라갈까…를 고민하는 자유입니다. 성령 하나님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주도권을 기쁨으로 드리는 자유, 그리스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자유, 타인을 위해 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영적 자유함임을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부분의 참 자유에 대해서 선명하게 증언하는데, 첫 번째는 서로에 대한 자유요, 두 번째는 각각에 대한 자유입니다. 서로에 대한 자유라는 것은 바로 타인을 향한 유익을 위해, 공동체를 향한 유익을 위해 나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각각에 대한 자유는 그 자유를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겁니까? 내 짐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대신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지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향하여 사랑하며 이웃의 짐을 기쁜 마음으로 대신 지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억지로 져 주는 게 아니라, 종노릇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종노릇 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타인의 짐을 저주는 그 인생을 살아갈 때 그 가운데 참 자유함이 임하며,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늘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의 삶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서로 짐을 지며 살아가면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살리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서로 그 짐을 함께 감당하는 것, 이게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사랑으로 서로 짐을 지는 삶입니다. 물론 혼자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성경 읽고 말씀 보며 기도하면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님이 이끄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서로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짐을 져주는 것 통해 간접적으로 깨닫는 것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서로의 짐을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져주며 함께 그 자리에 버텨주며 인내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인관관계가 나의 유익과 필요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됩니다. 저 사람들을 만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플러스가 될까 마이너스가 될까를 계속 계산하면서 나에게 유익이 되고 플러스가 될 만한 사람들만 만나려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인간 관계는 타인의 유익과 필요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은 이웃의 짐을 서로 지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발전되는 겁니다. 나같이 자격 없는 자를 위해 십자가의 짐을 대신 져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 사람된 나임을 알기에 가능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서로의 아픔을 같이 지며,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 살아갈 때 그곳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서로에게 해야 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는 실천입니다. 두 번째, 각자에 대한 자유함이 있는데, 각기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겁니다. 이웃의 짐을 서로 지려고 하고, 나의 짐은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자 지라는 겁니다. 서로 짐을 저주라는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명령,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다른 사람이 짐을 져 주니까 얼씨구나 좋다 그러고 내 짐을 떠넘기고 늘 도움을 받는 것을 익숙해 하며 도움 받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자유의 남용이라는 겁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하다 보면 다리가 까지거나 걷기 어려운 상황이 된 군인들을 그 군장을 나눠서 대신 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내 군장을 대신 저주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정말 고개 숙여 고마워해 되는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는 편하게 가서 잘 됬다고 기뻐하면 뭐가 사라지는 겁니까? 주님이 주셨던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겁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타고 사랑으로 짐을 지려는 자발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서로 짐을 지어주는 자발성을 한번에 사그러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호의를 권리로 여기며 착각하지 말고 타인에게 피해가 폐가 되는 인생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체들을 사랑하기 위해 두 가지가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타인의 짐을 무거운 짐을 같이 지려 하는 자발성, 동시에 나의 짐은 타인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자발성입니다. 나의 짐을 같이 져 달라고 하지 않으면서 나는 나를 감당할 힘을 기르며 타인의 짐은 기쁨으로 맡아 주려는 이 두 자세가 같이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우리가 타인의 짐을 대신 저 줬을 때 가져야 될 생각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려운 사람의 짐을 대신 지어 주었을 때, 꼭 내가 뭐가 돼서 특별해서 그 일을 하고 내가 정말 힘이 많고 능력이 많아서 너를 불쌍한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착각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서로의 짐을 지는 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로의 짐을 지게 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이 있습니다. 내가 베풀고 짐을 져주고 도와줬다고 내가 뭔가 된 것처럼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이게 스스로 교만하여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스스로 무너지는 비결은 내가 뭔가 된 줄 알고 스스로 교만해지면 나에게서 자격을 찾다가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착각하지 않도록 늘 확인하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성도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넉넉한 마음으로, 나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고 아주 strict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에서 힘들고 어려워서 쓰러져가는 지체들을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짐을 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도움 받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며 나의 짐은 스스로 각자 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는 것을 미안해 하지 않고 일상화 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유를 잃어버리는 삶이고, 타인이 호의를 가지는 베푼 자유함을 사라지게 만드는 민폐의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각각 나의 일을 살펴서 내 선행과 도움 주는 것이 내가 타인보다 낫다는 자기 의와 교만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나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냉정하게 타인에 대해서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갈 때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내 짐은 스스로 각자 지고, 타인의 짐은 서로 나눠지는 삶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삶…내 짐을 내 스스로 질 수 있는 능력과 타인의 짐을 기쁨으로 질 수 있는 능력이 같이 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며, 십자가 정신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육체에 매어 살고 율법에 매어 살아가는 옛적으로 돌아가려는 삶을 매일 못박아야만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지침인데, 공동체에서는 일어나는 부딪힘과 어려움이 있게 됨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그냥 대강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게 되면 세상과 별로 충돌하고 부딪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늘 세상의 흐름이 내 흐름이기 때문에 세상 풍조에, 사람들에게 맞춰 적절하게 살았기 때문에 삶의 갈등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제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겠다 결단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나아간다면 반드시 이 세상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갈등하는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나 중심, 눈에 보이는 세상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되는 삶,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이런 어려움과 충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실천적 도전 과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목할 단어는 “형제들아” 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충돌의 문제는 다루기 전에 해야 될 첫 번째는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문제들과 갈등을 내 문제로 품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를 제 삼자, 소위 말하는 나와 상관없는 객체로 바라보며 손가락질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나와 무관한 자들이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이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쉽게 나와 무관한 공동체로, 대상화하고 객체화 시키기 쉽습니다. 내가 출석하고 몸 담고 있는 교회와 나를 구별하여, 나와 상관없는 교회와 같이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건 여러분들 자신이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라고 끊임없이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 공동체 안에 드러나는 문제들은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 있지 않을지 모르나, 결국 나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내가 함께 은혜를 구하며 풀어야 되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와 나를 객체화 하고 대상화해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 문제 있고 어려워하고 범죄한 교회 공동체 안에 형제 자매가 나와 무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게 바로 “형제들아” 의 선언입니다. 두 번째는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그랬습니다. 여기서 범죄한 일이란 어떤 감옥에 갈 만한 범죄들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런 범죄에 대한 얘기보다는 옆길로 넘어졌다는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전한 복음을 잘 따르다가 다시 옛날 율법으로 돌아가거나 유사 복음에 빠지는 것을 범죄한 일….이라 명하는 겁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려 그러다가 신앙생활 한껏 열심히 하다가 다시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길로 간 사람들, 육체의 소욕 주도의 삶, 율법 주도의 삶으로 넘어진 사람들이 바로 범죄한 이들입니다. 다른 형제나 자매 범죄한 일을 계속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그것을 심지어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형제 자매들의 허물이나 범죄를 계속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와 자기 교만의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컨텍스트는 그 범죄한 것이 드러났을 때…그게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폭로해 아니라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한 사람이 곁길로 나아가고 육체의 소욕으로 무너지고, 율법 주도적 삶으로 무너질 때 그 범죄한 일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고 한 사람이 잘못된 유사 복음에 빠져서 헷갈리게 되며 흔들려 넘어지는 게 교회 공동체 전체의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 공동체 영적 분위기를 다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런 문제를 책임 있게 다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렇게 형제나 자매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바로잡는다는 말은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원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치라는 의미입니다. 고장 나고 깨진 사람에게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 그게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형제 자매를 바로잡을 때는 반드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는 건 절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유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지적하고 쳐내는 것을 익숙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문제는 옳은 소리를 사랑 없이 하는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닌데 사랑이 빠진 정제와 판단으로 얘기하게 될 때 그게 상처가 되는 겁니다. 사랑이 빠진 얘기는 사람에게 회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옳은 소리를 안 들어서 교정 안되고 회복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상처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죄 가운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곁길로 나아가 무너진 사람들,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고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란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함으로 살리고 회복시키기 사모하며 바로 잡는 겁니다. 바로 잡는 목적은 재단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교정하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복음 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사랑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을 때마다 마지막은 내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점검하고 살펴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저 사람은 왜 저래… 손가락질 하기는 쉽고, 그 사람을 향하여 판단하고 분노를 쏟아내기 쉬운데, 그 사람의 범죄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베드 뉴스들을 보면서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열을 내면서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변 지체들이 범한 죄를 통해 나도 예수님 앞에 죄인임을 잊지 않으며 나에 대해서 내 자신을 주의해서 살펴보라는 것이죠. 내 자신을 주의해 살펴보면서도 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 안에서 성령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라는 겁니다. 나도 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나도 언제나 넘어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늘 조심하고 깨어 내 자신을 살펴보는 겁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이기에 교회 공동체 안의 이런 도전들과 어려움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주변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객체화 하지 않고 대상화 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그 삶에는 세상과 충돌과 부딪침과 부대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정하기 죽이기 전에 먼저 사랑으로 바로잡고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는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런 범죄를 통하여 내 자신을 살펴보며 나도 그런 시험과 범죄를 받을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늘 깨어 내 자신에게는 좀 더 치열하게, 타인에게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품으며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의 기준을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어떤 소욕을 따라 살아가느냐에 따라 육체의 일을 맺기도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도 함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들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살아가는 삶을 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머리로는 육체의 일을 맺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도로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욕망과 열망에 대한 문제이기에, 우리가 육체 소욕을 따라가지 말아야지…라고 결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육체 소욕을 따라가며 싸움에서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자는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며 살아가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5장 말씀의 결론으로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의 소욕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 위해 해야 될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매일 십자가에 나의 육체를 못 박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육체를 못 박는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꿈틀꿈틀 올라오는 자아중심성, 꿈틀꿈틀 올라오는 육체 주도적인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었다 해서 내일 육체의 소욕이 활성화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한 십자가 가운데 내가 나아가지만, 내일은 언제 그랬다는 듯이 다시 중심성이 확 올라올 수도 있는 게 나의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선언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십자가에 나의 육체를 못박는 자기 부인의 삶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이며 나의 매일매일의 결단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과 죄를 따르려는 소욕, 자아 중심적인 삶으로 살아가려는 열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나의 결단이고 나의 선택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그냥 주어지는게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내가 자아 중심성을 부인하며 육체를 정욕과 탐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거룩한 습관을 통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는 소욕, 자아 중심적 삶을 사려는 열망에서 철저히 등을 돌리고 거절하기 위한 나의 매일 매일의 결단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늘 자격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서고, 늘 주님의 공로로 살아가며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백하며 주님 앞에 철저히 나의 무능함과 자격 없음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나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율법이 나에게 공로가 되며 내 선행의 결과물이 돼서 나의 자격 있음을 증명하며 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며,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나의 자아 중심성과 자기 의를 높이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끊임없이 허물며 내 육체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삶, 그게 바로 성령 안에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행위의 율법을 얘기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길을 같이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뒤따라 가는 게 성령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이 말은 교회를 드나드는 성도들 중에도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당연히 성령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성령의 소욕과 반하여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할 때, 내 자아 중심적, 육체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성령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 받았으니까 성령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지, 성령 하나님이 나를 깨우시고 찌르시고 변화시키는지, 성령으로 내가 그 소욕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 생활에서 모든 거룩한 일들, 예배, 기도, 전도, 선교, 교회의 사역 모든 일들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을 수 있고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성령 하나님의 길을 걸으면서 하늘의 예배와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반대로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으며 땅의 예배와 육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열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구별점이 있는데 바로 어떤 영광을 구하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간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산다는 겁니다. 헛된 영광이란 텅 비어 있는 영광, 텅빈 영광입니다. 실체가 없는 영광, 잡아도 잡을 수 없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잡으면 잡을 수 없는 게 바로 헛된 영광입니다.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따라가지만 결국 잡을 수 없는 영광, 눈에 보이지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유통 기한이 있는 영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맨 끝에 남는 건 허무와 공허입니다. 그게 헛된 영광이 세상이 주는 영광의 특징입니다. 육신이 주도하는 삶, 육신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런 헛된 영광을 구하며, 인생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내가 왜 노엽게 하고 미워하고 살아갑니까? 저 사람이 천국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하늘나라의 비전이 너무 커서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열망이 대단해서? 이런 거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헛된 영광을 구하기에, 그런 것들을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거 같아서 시기하는 거고, 내가 덜 가져서 화가 나는 거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헛된 것 잠시 후 사라지는 헛된 영광을 구하고 거기에 인생을 던지면 서로 시기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다가 서로 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입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선언하며 나의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 십자가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시간,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길을 따라갑니까? 그러면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구하며, 여백을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들, 잠시 있다 사라지는 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주신 걸 잘 사용하되 거기에 영광이 있다고 착각하며 인생을 걸고 던지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 성령의 소욕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은 이런 헛된 영광을 십자가에 매일 못 박으며, 이런 것 가지고 서로 투기하고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서 시간 낭비하고 인생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이런 안개와 같은 것들에 인생을 걸지 않을 때, 사람을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고, 땅의 것을 주목하는 대신, 하늘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와 그들의 댓글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평가를 중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나에게 생명 주시는 분도 내 삶에 주체가 되시는 분도 성령님, 그 성령 하나님과 발 맞추어 보조를 맞추어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성령의 능력을 붙들며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체의 일은 15가지이고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오늘 말씀에 증언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필연적으로 육체 일을 만들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이거 아니면 저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치 자동차 악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을 수 없듯이 내 인생에 성령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령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게 되면, 반드시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이지만 아홉가지 다른 열매가 아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그 안에 아홉 가지의 다른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내와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함께 말씀의 은혜로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인내, 오래참음의 열매입니다. 참을 인…이라는 단어는 제가 군생활 할 때 연병장 큰 돌에 새겨진 한문이었습니다. 칼 도에 마음 심…이 합쳐진 단어가 참을 인…아니겠습니까? 참는다는 건 내 마음에 칼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칼을 품고 참으니 그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칼을 품고 있으니 피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 그것이 결국 병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고 참다가 불이 너무 많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내, 오래참음…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것이라는 부정적인 정서가 강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수동적인 정서, 되도록 피해야 된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바로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라는 것이죠. 왜 참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닌데 잘못 참으면 화병도 생기는데 참다가 마음에 칼을 품는 것처럼 아프고 힘이 드는데, 왜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오래 참음의 열매일까요? 사실 성도로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구하고 사모하지만, 사랑의 열매나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령의 열매로서 인내의 열매를 매우 강조한다는 것이죠. 성령의 열매로서 인내라는 것은 내가 주먹 쥐고 일방적으로 참고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와 소망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내가 마음에 칼을 품고 억지로 마지 못해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소망을 붙들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인내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기다림, 마지 못해 견디는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디며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인내이기에 오직 내 힘이 아니라 하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맺어지는 겁니다. 구약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셨던 훈련 방법이 바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한 훈련이었습니다. 나의 때와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기다림의 훈련이었습니다. 이 오래참음의 훈련에 물론 모든 사람이 패스한 건 아니지만 예외없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인내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훈련을 계속 시키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인내와 오래 참음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전까지 그동안 오래 기다리셨고,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까지 길이 참으셨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회개를 촉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여전히 재림하시기 전 길이 오래 참고 계신 겁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끝까지 기다리시며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그 오래 참으심이 결국 저와 여러분들을 이렇게 살린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인내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막연하게 오래 참는 게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견디는 놀라운 인내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심의 사랑이 내 인생 가운데 부어져 있다는 것을 믿으며 하늘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는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내가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환경과 상황이 있을 때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며 나를 놓지 않으셨던 주님의 오래 참으신 사랑을 기억하고 붙들며 놀라운 인내의 열매를 맺기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자비의 열매란 친절하고 온유함의 열매입니다. 식당에 가도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식당도 동시에 그 식당이 친절해야 자주 가게 됩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불친절한 데는 한 번 가지만 그 다음에는 잘 안 가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음식과 친절한 서비스가 항상 콤비네이션이 돼서 유명한 식당이 되는 겁니다. 자비의 성경적 정의는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게끔 쓸모 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은 성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온유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로 인도하고 품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비의 열매는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법대로 하고 정의대로 했으면 여기 살아남 자가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하심의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용서하시고 건져 주셔서 지금까지 잘 살게 된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나를 향해 바라보시는 마음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불쌍한 마음인 자비함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친절하고 자비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불신자들에게 다른 삶의 향기와 열매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의 삶이 그렇게 친절하고 자비롭고 온유함이 넘쳐났다는 것을 알있기에 예수쟁이라고 놀림을 당했을 지언정 그들의 구별되고 다른 삶은 불신자들과 그 지역을 놀랍게 변화시켰습니다. 점점 세상이 무자비해지고, 무관용의 시대가 되어 가는 이 때에 예수님이 부어 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열매를 풍성이 맺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선의 열매인데, 양선이라 말은 요즘에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어질 양, 착할 선…이 양선인데 어질고 착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언제나 좋다는 것을 고백할 때 바로 이 양선이란 말입니다. 좋다는 것이 내 생각에 좋다는 게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서 좋고 하나님 뜻에 좋은 것이 양선입니다. 내 상황이 언제나 좋은 일로 계속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추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면 두 가지가 발생하는데,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둠이 빛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나의 자격 없음과 소망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게 좋은 것, 양선의 열매입니다. 또한 나에 대한 철저한 자격 없음, 소망 없음을 고백할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둠이 물러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실 때 나는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망 없고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붙들 때 내 삶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양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전에 어둠이었다 것을 철저히 고백하는 겁니다. 동시에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이 시간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철저히 고백하는 겁니다. 인내의 열매도, 자비의 열매도 양선의 열매도 결국 나는 이 세상에서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임을 고백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스스로 빛이 없고 선이 없음을 철저히 고백할 때, 발광체인 예수님의 빛을 받아 반사체로 빛을 내는 존재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언제나 빛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빛을 담아 반사하는 삶, 그 삶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육체의 소욕으로 맺는 15가지 육체의 일을 구체적으로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 대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가슴으로 뜨겁게 믿고 머리로 바로 알고 온몸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건강하고도 건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채워지며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15 가지였는데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것은 아홉 가지의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지만 아이스크림 맛이 다르듯 아홉 가지의 다른 맛과 향이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첫 세 가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 인내와 자비와 양선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 나오는 성령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내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나오는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처음 세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말씀의 은혜로 나눠 보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고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견해가 있는데 오늘 말씀에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아가페 사랑, 즉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열매로 맺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고 일방적인 사랑이고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주는 사랑으로 맺는 열매이기에, 사랑의 열매는 오직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맺게 되는 것이지, 내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의 사랑받는 것을 항상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런 인간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사랑할 때 부족하지만 부분적으로 자녀들에게 이 아가페 사랑을 부어주며 살아갑니다. 자녀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0세에서 3세 사이 그때 모든 것을 부모들은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주는 사랑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정의된 사랑은 뜨겁거나 마음이 흔들린다거나, 매력적이거나, 이런 게 아니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 첫 번째 사랑의 정의인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이거나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부어주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매력 없다 말할지 모르나 그런 조건 없는 사랑, 일방적이고 부어주는 사랑이 우리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랑을 먹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놀랍게 변화시킨 사랑이고,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때 그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돌아가심으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전히 죄에 뒹굴고 있던 나, 사랑받을 가치나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나에게 먼저 예수님이 죽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 일방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뒤집고 그 십자가 사랑이 바로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 첫 번째인 사랑의 열매입니다. 자격도 조건도 안되는 나를 일방적으로 조건없이 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두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사랑 가운데 거하며 살기에 그 성령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우리 삶에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우리가 사랑의 열매는 열매를 맺자는 것은 구호도 아니고 맺어야 된다는 당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그 반응으로 결과로서 그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 내 삶에 하늘의 양식으로 취하고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살아갈 때, 내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희락의 열매는 기쁨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 가운데 거하면 우리의 삶에 기쁨이 흘러나오고 찾아오는 신비를 경험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과 환경이 주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될수록 점점 웃을 일이 별로 없어져서, 그 기쁨과 감탄을 찾기 위해 그렇게 여행도 다니고 특별한 데를 가보고 멀리까지 가서 한번 감탄사 내 보려고 그렇게 노력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잠시 느끼는 어떤 행복한 감정을 넘어서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감탄사가 나오는 기쁨입니다. 뻔한 인생, 메마른 인생, 딱딱한 인생에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갈 때 하늘의 기쁨이 임하게 되며, 그 끝에 희락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기 좋으셨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기 좋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토브’인데, 이건 그냥 좋다 정도가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따봉”입니다. 정말 대단해, 정말 멋지다…라는 감탄사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내셨던 기쁨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희락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의 첫 번째가 혼인 잔치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기쁨이 넘치는 잔치라는 겁니다. 일주일 내내 파티가 열릴 정도로 기쁜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감탄사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며 묵상할수록 내 인생에 감탄사인 따봉! 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깨달으면 깨닫을수록 우리는 이 기쁨과 희락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희락의 열매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희락은 하늘의 기뻐함이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기뻐함 이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살만해져서 기뻐하는게 아니라, 감옥 안에 있어도 주 안에서 그냥 기뻐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상황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 때문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상황 안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위에 있을 때나 아래에 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in all circumstances 모든 상황 안에서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물 나고 가슴 치고 힘든 감옥에 있을 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안에서 더 큰 예수님의 기쁨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기적을 누리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 기쁨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이 흘러나오는 기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렇게 따봉을 외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렇게 기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상황 가운데 기뻐하는 그 놀라운 역사인 희락의 열매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맺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뻔하고 딱딱하고 메마른 그런 일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속성인이 기뻐하심 희락의 열매, 감탄사가 나오는 기쁨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겁니다. 세 번째 화평의 열매는 바로 평화의 열매입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말보다는 좀 더 관계 중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관계의 평화로, 특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해 흘러 나오는 모든 관계의 축복을 화평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평이란 것 단순히 문제가 없어지고 전쟁이 없어지는 absence of problems이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게, presence of Jesus in the problem이 화평인 겁니다. 내가 직면한 어려움과 문제 한복판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샬롬, 화평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신 그 놀라운 역사가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화평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부어지고 흘러나오는 화평이고,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화평이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화평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며 그 평안이 나를 지배하며 흘러 넘쳐 그 평안이 삶의 밖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 가운데에서만 맺어지며, 성령의 공급하심을 통해서만 맺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맺든 성령의 열매를 맺든 둘 중에 하나를 맺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우리가 살아가면 그 인생의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꼭 붙어 하늘의 공급을 받아 살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며 성령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으며 주님이 부어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내 삶에 깊이 자리잡으며, 뿌리내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사는 삶과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삶을 대조하는 말씀 가운데, 육체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15가지 육체의 일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육체의 일은 애매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기에 우리가 분별할 수 있고 이것을 경계할 수 있음을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고 분명한 육체의 일 15가지중 마지막은 바로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과 이단은 하나의 큰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의 정의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당을 짓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대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고, 그 결과 나누어 지고 찢어지는 것이 분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되는 것보다 나눠지고 소위 말하는 끼리끼리의 문화를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나눠지게 되면 주님의 몸된 공동체는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당 짓는 것과 분열을 중요한 육체의 일로 언급한 이유는 완벽한 모델이라고 여겨지는 초대교회에서 조차도 이 부분이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다른 서신인 고린도 전서를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이기도 했음을 발견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계파 별로 교회 안에 나눠지는 당 짓는 일이 큰 문제였습니다. 게바 파가 있었고 아볼로 파가 있었고, 사도바울 파도, 심지어 예수 파도 있을 정도로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큰 도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가장 완벽한 공동체라고 여겨지는 초대 교회 조차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력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로서 이단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 다른 복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을 이단은 그 뿌리가 당을 지어 분열하게 하는 악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른 게 아니라 얼핏 봐서는 비슷한데 끝이 다른 게 이단입니다. 유사품, 소위 말하는 가짜는 얼핏 보면 비슷한데 자세히 보면 틀린 겁니다. 그래서 유사품을 주의해야 되는데 유사 복음에 주의하지 않고 빠져 큰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순전한 복음에 물타기 해서 만드는 유사품인 이단의 본질은 결국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인간의 죄성을 활성화시켜서 우리가 본능과 본성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그게 바로 육체의 일인 당 짓는 일과 분열입니다. 당 짓고 분열하기 위해서는 할 게 별로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눠지고 분열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당을 짓고 분열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아는 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면 사단 마귀가 꼼짝을 못하는데, 당 짓고 분열하게 하는 사단의 미혹 너무 쉽게 길들여지고 너무 쉽게 활성화되어 살아갑니다. 당을 짓고 분열하는 것도 이단의 문제도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죄 된 본성이 활성화된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다름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육체의 일은 투기인데, 영어로는 envy로 이것은 그냥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악으로 행동하게 하는 투기입니다. 그래서 질투와 시기가 감정에만 머무는 미워하는 감정이라면 투기는 그 악한 감정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감정을 넘어 실제로 악한 일을 행하고 도모하는 게 투기이기에 매우 심각한 육체의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투기의 대표적인 예는 야곱의 아내들이었던 레아와 라헬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서로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을 넘어 자녀를 낳는 일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라헬은 언니 레아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을 넘어 자기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얻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일이 들불같이 커졌습니다. 또 레아도 질 세라 자기의 몸종을 통해서 자녀를 계속해서 태어나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교만해지고 열등감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행동으로 넘어가는 투기는 반드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고 분열하는 것도, 투기에 빠져 미움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삶도 성령 없는 자들의 특징이며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단의 미혹에 빠지는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 이 육체의 일을 단절하고 잘라내며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술취함과 방탕함도 심각한 육체의 일로 지적합니다. 술취함이라는 술에 취해 술이 나를 먹는 상태이고, 방탕함이란 사전적 의미가 내가 하나님을 향해 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두 손을 들고 길을 바로 걸어가지 못하죠. 본인은 바로 간다고 주장하는데 비틀비틀 걸어가는 게 술 취함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방탕함은 절제하지 못해서 옳지 않은 낭비로 하나님에게 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본인은 바로 간다고 주장하는데 흔들흔들 걸리며 넘어지는 게 방탕함입니다. 그러니까 술취함도 방탕함도 본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가지고 주님께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술취함과 방탕함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걸 통해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서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시대였음을 반증합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을 유흥이나 여흥 정도로 관대하게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그래서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시대에 이 일을 육체의 일로 경계하며 그것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하는 겁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도 술취함과 방탕함에 대해 관대하고 심지어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 범죄에도 술기운에 했다고 하거나,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런 부분을 참작할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술취함과 방탕함이 이만큼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 앞에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말씀으로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 세상에 취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낭비하고 탕진하는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시대가 점점 악해져서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 가는 여러 일들이 계속 등장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예를 들면 도박이나 마약, 혹은 인터넷 보이스 피싱, 사이버 폭력 같은 문제들입니다. 성경엔 도박을 하라 하지 말라, 마약을 하지 말라, 인터넷 보이스 피싱 하지 말라는 경고가 없는 게 그 당시에는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있음을 성경은 미리 알고 사전에 이렇게 울타리를 쳐 주신 겁니다. 우리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육체의 일들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 거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이미 다 예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원하시는 것이죠. 이렇게 성경이 열거하는 육체의 일들 15 가지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우리의 삶과 매우 가까이에 있는 심각한 것들입니다. 이런 육체의 일에 우리가 빠져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심각한 결과가 찾아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가만히 있으면 나눠지고 깨지고 분열하는 일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당 짓고 분열하는 것, 투기하고 술취하고 방탕한 것이 육체의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 우리의 본성이 성령의 소욕에 정확하게 통제 받고 지배 받아야만 합니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육체의 열매인지 성령의 열매인지 육체의 일인지 성령의 일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며 육체의 일을 멀리하고 벗어나며 주님 앞에 뚜벅뚜벅 바로 걸어가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잘라내며 오직 순전 하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을 권면하며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벗어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끝은 육체 일을 맺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의 끝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으면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 되면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됩니다. 동시에 육체의 일도 성령의 열매도 헷갈리거나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 삶에 맺어지는 일과 열매를 통해 내가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는지가 아주 명확하고 분명해진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육체의 일 15가지 가운데 두번째 시간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와 분냄입니다.
첫 번째 원수 맺는 것이란 영어로는 hatred, 즉 미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 맺는 것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무엇과 연결되어 있냐면 내 마음속 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 운동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인 미움이는 겁니다. 특별히 미움이 원수 맺는 것이라고 돼 있다는 말은, 미움이 관계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나면서 내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미워 하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깨우는 힘이 되는 인생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늘 파괴적이고 부정적이 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가면 늘 관계가 깨지고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미움 가득한 말들만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원수 맺는 일에 길들여진 인생이며 육체의 소욕에 이끌림을 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사랑인지 미움인지에 따라 내 인생의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인생인지, 무너뜨리는 인생인지가 분별되고, 더 본질적으로는 이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육신의 일을 분별하는 매우 명확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원수 맺지 말고 무너뜨리지 말고 세워주는 인생, 미움이 내 삶을 이끄는 힘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일은 분쟁입니다. 분쟁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나눠져서 시끄러운 다툼을 한다는 겁니다. 독도 분쟁 그러면 일본과 대한민국이 계속 독도를 가지고 싸우는 거 아닙니까 감정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타격이 동반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그런 일본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게 당연하고 그 대상과 원수를 맺고 다툼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미움을 삶의 동력으로 사는 인생 주변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분쟁하는 인생 가운데에는 육체의 일을 주렁주렁 맺으며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와 함께 사랑했던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분쟁에서 그냥 서로 조금 세력과 파가 나눠진 거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심각하게 다투고 싸웠습니다. 요즘에도 분쟁하는 교회를 가보시면 서로 얼굴을 안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정말 대놓고 다투고 싸우며 경찰까지 부르는 겁니다. 내가 미움을 먹으며 미움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고, 계속 나누어지고 싸우게 되는 것을 심각한 영적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특별히 사단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은 항상 divide and fight….나눠지게 해서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같은 팀인데 다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인데 우리 안에서 원수 되게 만들고, 안에서 나눠져 싸우고 분쟁하게 만들어 힘을 안으로 싸우는데 다 소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성도들을 향한 교회를 향한 미혹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원수 맺는 것과 분쟁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분쟁하는 것이 성령을 탄식하게 하는 것이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육체의 일은 시기입니다. 시기란 타인과 비교하여 내가 가지지 못함으로 지니는 부러움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를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이웃이 지닌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늘 결핍의 존재, 늘 부족하고 없는 존재인 겁니다. 이미 주신 게 많은데 늘 초점이 어디 있냐면 없는 거에 있고 부족한데 있고 결핍에 있는 겁니다. 그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시기와 질투가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꾸 타인과 비교해서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란 미워하는 마음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특별히 비교를 통해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 없는 것 부족 한 것을 과장하며 살아가는 육체의 일입니다. 부족한 것, 없는 것, 결핍에 초점을 맞추어 살게 되면 결국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반대로 성령의 사람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과 결핍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미 주신 것,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를 남과 비교함으로 통해 나의 존재감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둠으로 나를 찾는 인생이 되는 입니다. 네번째 육체의 일은 분냄입니다. 영어로는 anger가 아니라 훨씬 강한 단어인 rage입니다. 운전 중에 정신없이 막 화를 분출하면서 가는 차들을 road rage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rage는 분노 폭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터트려서 그 인생을 움직이는 힘, 운동력을 삼는 인생이 분냄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고, 특별히 나름대로의 정의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분을 내고 살아가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럴 때도 화를 내고 분을 내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근원에는 바로 영적 교만이 있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이 있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움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고 그게 바로 육체의 일이라는 겁니다. 내 마음이 미움을, 나누고 싸우는 분쟁을, 없는 것에 집중하는 시기를, 분노로 폭발하는 분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게 바로 육체의 일임을 잊지 말고, 이런 것들을 허용하지 말고 마음에 머무르게 하지 마십시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손님과 같이 왔다가 떠나가게 만들어야지 이것을 내가 확 붙들고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육체의 일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는 대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힘과 능력을 운동력으로 삼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늘 성령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 것을 권면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육체의 소욕으로 맺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소욕으로 맺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있다는 것을 대조합니다. 하는 부분이죠 특별히 오늘 말씀은 육체의 소욕에 대해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15 가지 육체의 일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15가지의 육체의 일들을 들어가기 전에 육체의 소욕과 그 일들을 직면하는 성도들의 두 가지 착각에 대해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 첫 번째 착각은 성도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신앙 생활의 연수가 길어지면 내가 저절로 괜찮아지고 좋아져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착각이라는 겁니다. 신앙의 연수에 따라 우리가 저절로 좋아지고 저절로 괜찮아져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안 좋아질 확률이 훨씬 큽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이스마엘과 같은 육체 일에 빠져 오히려 스멀스멀 옛적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좋은 쪽에서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연수가 차면 가만히 저절로 좋아진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착각은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맺게 되는 육체의 일은 애매모호 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육체의 소욕이란 타락한 사람의 부패하고 악한 심성을 말하는데,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나오는 육체의 일들은 애매하고 모호하지 않고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일까 아닐까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은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겁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세 번에 나눠서 15 가지 육체의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육체의 일들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 이 다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다 성적 타락과 연결되어 있는 육체의 일입니다. 사실이 육체의 일 중에 제일 심각한 거 하나를 들자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 전에 이 세가지 성적 타락에 연결되어 있는 죄악들이 먼저 등장하는 겁니다. 이 15 가지 중에 심지어 우상숭배보다도 앞서 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의 죄를 먼저 지적한 것은 성적 타락으로부터 나오는 이 세가지 문제가 다른 것들 보다 가장 심각한 범죄이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여러 육체의 일들 가운데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을 축복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울타리 안에 머물렀을 때만 그것이 하늘의 복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본래의 목적과 용도를 오용하고 하나님의 질서와 울타리를 넘어가게 되면 음행의 죄, sexual immorality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음행의 죄를 몸 안에서 범하는 죄로 경고하였음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서 짓는데 음행은 자기 몸 안에서 짓는 죄라는 겁니다. 음행의 죄가 육체 소욕이 이끄는 육체의 일이라는 것도 잘못되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몸,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몸 안에다 짓는 죄라는데 더 심각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울타리와 질서를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육체의 소욕에 휘둘려서 나의 삶이 이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에 휩싸이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일 중에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의 끝에는 성적 범죄와 관련된 더러운 것이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더럽다는 것은 위생의 문제를 넘어 영적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별히 사단 마귀를 복음서에서 묘사할 때 더러운 영이라, 더러운 귀신이라 명합니다. 더럽다는 것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오염된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겁니다. 하나님은 성적 타락과 죄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말씀해 주셨는데 더러운 일들은 여기에 다른 말들을 계속 섞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이 세상에서 성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과 여러 관계를 맺는 것을 마치 이 음식이나 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하루 지내는 것 정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게 다 더러운 영인 사단에게서 온 더러운 일들이 되는 겁니다. 이런 더러운 일들은 필연적으로 세번째 육체의 일인 호색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호색으로 색을 밝히고 색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색은 성적 욕망이 투영된 남색이나 여색을 좋아하고 탐하는 것을 말하는 방탕한 생활을 말합니다. 성은 거룩한 것이고 깨끗한 것이고 하늘의 축복인데, 이것을 더러운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육체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피해야 될 육체의 일의 첫 번째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 부분을 우리가 늘 명심하고 마음에 새겨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가 우상숭배인데,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잘못되고 죄인 것을 분명한데 왜 우상 숭배를 육체의 일로 강조하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를 성적 타락과 범죄인 음행과 연관시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라는 거예요. 우상숭배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지 않는 영적인 음행라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핵심은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두지 않는 것이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두지 않는 겁니다.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두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겸하여 사랑하는 것을 불륜이라고 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부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른 남자와 여자를 겸하여 사랑하는 게 무슨 문제냐…정당화되지 않는 겁니다. 건강하고 거룩한 결혼 생활은 남편만 그리고 아내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겸하여 동시에 붙드는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버렸다고 계속 경고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드러내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안 섬기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게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라는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죄악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으로서 충분한 인생이 되지 않고 계속 우상에 기웃거리고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 하는 것이 영적 음행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육체의 일은 주술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술이나 무당에 굉장히 관대한 문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여기저기에이 주술의 삶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종교 행위를 통해 주술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냥 오락이나 가볍게 일상 생활에도 이 주술 행위가 굉장히 깊게 파고들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주 팔자 운명 같은 거는 뭐 가볍게 보고, 타로점을 보는 거는 괜찮고, 무당에게 찾아가 샤머니즘의 푸닥거리를 하는 것들에 대해 익숙하고 친근하며, 가볍게 여기며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주술에 관련된 것을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온 육체의 일로 여기기에 아주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 하냐면 우상숭배나 다름 없는 굉장한 잘못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입니다. 주술 또한 영적 음행인 이유는 주술을 통해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사용하려는 악한 생각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술이 육체의 일인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악한 마음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수단과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나의 결핍된 존재를 주술을 통해 채우려 하고, 하나님을 나의 욕망의 도구로 투사하는 겁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이 다섯 가지 육체의 일들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은 분명하기에 우리가 피해야 되고 멀리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통해 맺게 되는 육체의 일을 직면하는데, 그리고 그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경고인 육체의 15가지 일들을 배우며 현저한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 이런 육체의 일들에서 벗어나 멀리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도 다 성적인 범죄이고 우상숭배와 주술 또한 영적인 성적 범죄입니다. 나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이름으로 투사하는 우상 숭배도, 주술도 영적 음행임을 잊지 마시고 주님 은혜 가운데 성령으로만 사로잡혀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권면하면서 피해야 할 육체의 소욕과 갈망해야 할 성령의 소욕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하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권세이고 또 하나는 소욕입니다. 중력, 위로부터 아래로 누르는 힘이 존재하는데 그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중력의 힘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우리가 피부로 감각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체로 존재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그건 바로 권세라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인 권세, 그래서 죄 아래 있을 때 죄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이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소욕이라는 것은 갈망, desire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ask, seek and knock,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바로 소욕입니다. 갈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이끌고 우리를 지배하는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나의 원함은 결국 나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은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력이 물론 음식을 통하여 우리가 육신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소를 공급받음으로 오지만, 동시에 그 운동력은 우리의 갈망과 열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우리의 삶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든지 육체를 따라 행하든지, 이 두 가지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육체의 desire가 있고 성령의 desire가 있다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 아래 있을 때는 성령의 권세가 나를 누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을 원하면 내 안에 갈망은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을 가지면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성령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내 갈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에 욕심이 있고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며 하늘의 내 삶에 그 갈망을 두고 살아가는 게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통해 이루어지는 육체의 일이 15개로 요약하여 등장하고, 성령의 소욕을 통하여 맺어지는 열매가 그 뒤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권세와 소욕이 합쳐져 우리 인생에 맺게 되는 결과물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결국 나의 인생에 내 삶을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권세와 갈망이 합쳐진 육체의 소욕 성령의 소욕,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지고 내 인생이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함께할 수 없고 서로 반대되고 충돌하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우리는 이것을 둘 다 붙들고 살고 싶어 하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사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중심에는 한 소욕만 앉을 수 있고 운전대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내 삶을 인도하고 주도하면 육체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하고 반대로 육체의 소욕이 키를 잡고 있으면 성령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성령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된다는 거예요. 둘이 서로 대적해서 서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호 보안적으로 둘 다 붙들고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성경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둘 다 붙드는 걸 성경은 불순종, 불신앙이라 그러고 우상숭배라 말합니다. 육체란 타락한 몸, 인간 존재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산다는 것은 땅으로만 사는 거며 율법으로만 사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땅의 것에 나의 갈망과 욕심을 모두 쏟아 부으며 사는 겁니다 그런 삶이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활성화되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삶입니다. 결국 육체의 지배를 받고 율법 아래 결박되어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로마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의 열망을 통해 육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인생의 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이 활성화되어 주도하는 인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열망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과 당연히 원수가 되는 겁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으로 살면 산다고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은 바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만 바라보고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 육체의 욕심만을 구하며 땅땅….거리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서 나의 인생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육체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아들의 영이 찾아오셔서 내 삶이 성령의 소욕을 통해 하늘의 것을 욕심 내며 하늘의 것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성령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소욕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육체 소욕은 주도권을 잃어버리며 더 이상 우리가 육체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이자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뭡니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게 바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육체의 일들이 열매로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성령 아래 살던 율법 아래 살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둘 중의 하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육체로 살래?, 성령으로 살래? 이것을 도전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성령의 소욕이 이끌고 주도하는 삶,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삶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셔서 그분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육신의 소욕이 나를 주도할 수 없고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소욕이 나를 주도하고 내 인생에 활성화되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활성화될수록 육체의 소욕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육체의 소욕이 시시 때때로 찾아 오긴 하지만 손님 같이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을 거스름을 삶으로 체득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내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신 바가 되며 율법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 성령의 소욕이 나를 이끌고 주도하는 삶을 현재형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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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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