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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셉 목사의 새벽묵상

​새벽묵상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는 내 영혼을 해친다." 예레미야 44,1-10 | 11-12-2025

11/12/2025

 
오늘 말씀은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도망간 남은 유대인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인내하면서 남유다 땅에 머물러 믿음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 남은 유다 백성들은 기어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며 눈에 보이기 안전해 보이는 애굽으로 떠나버렸습니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이제 이 사람들 포기하실만 합니다. 그렇게 기어이 자기들이 원하는 불순종의 길로 가는 그들을 이제는 그냥 놔두셔도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애굽 땅에 사는 유다 모든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또 다른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도망가고 외면한 그 사람들, 기어이 하나님 말씀을 거절하고 애굽으로 나아간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는 사랑으로 그의 백성을 찾아오신다는 것을 소망으로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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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굽까지 찾아와 남은 남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보라…기억하라...입니다. 첫번째로 “보라”는 겁니다. 너희가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임한 나의 재난을 보라는 겁니다. 그 백성들이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에 내린 하나님의 모든 재난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깝게도 많은 남유다 백성들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이 작고 약해서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망했다고 하나님 탓을 한 겁니다. 무너지는 예루살렘을 보면서도 하나님 탓을 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분명히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내신 모든 재난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약하고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망한 게 아니라 너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재난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라는 것이지요.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나님 탓하지 말고 너희의 죄를 돌아 봤어야 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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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기억하라”는 겁니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이 망하는 하나님의 재난을 보면서 너희가 기억해야 될 게 있다는 겁니다. 바로 너희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불순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말씀의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이란 즉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대신에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며 하나님의 노를 격발한 악행인 우상숭배입니다. 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남유다 백성과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기어이 애굽으로 내려온 그 사람들이 그 예루살렘을 망하게 했던 그 불신앙과 불순종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애굽 땅에 내려가서도 다른 신들을 분향하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불순종으로 또 다시 애굽에서 재난을 자초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겁니다. 결국 너희 조상들이 망하게 했던 그 죄악들을 예루살렘에서도 반복하고, 망하고 애굽에 와서도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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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과 불신앙이 가져오는 참담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노엽게 하고 우리 영혼을 해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 대신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됨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나의 노여움을 일으켜…내 노를 격발하고… 내 분과 나의 노여움을 쏟아서….라는 경고를 반복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져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또한 불신앙과 불순종은 내 영혼을 죽이고 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고 쌓아두는 것이 내 영혼을 죽이는 독을 품고 있는 거와 똑같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며 자기 영혼을 스스로 난도질하고 칼질하며 해하고 있는 것이죠.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행하며 살아가야 될 하늘 백성인데 왜 너희가 불순종과 불신앙에 빠져 사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경고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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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린 재난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상황이 어렵거나 어떤 일이 생기면 늘 남유다 백성과 같이 하나님 탓하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어려움이 있는 게 아닌가 착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망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하나님 탓하고 있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의 결과임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하나님의 책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에게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 영혼을 해치고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것이 바로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제대로 신앙생활하고 믿음 생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죄에는 처절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불신앙과 불순종을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기 원하시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의 안타까운 어리석음을 반면 교사로 삼아 불신앙과 불순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섬기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정신 차리고 순종의 자리로 돌아오라."예레미야 43,8-13 | 11-11-2025

11/11/2025

 
“정신 차리다” 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1) 의식 없는 자가 잃었던 의식을 되찾는 것, 2) 잘못된 것을 깨닫고 반성하는 것, 3) 잃었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신없이 살다가 잃었던 의식을 되찾고, 잃었던 정신을 되찾아,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안타깝게도 끊임없이 정신 못 차리는 요하난과 남유다의 남은 백성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지며 멸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하난과 남아 있는 백성들이 어디로 가야 될지 몰라 방황할 때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들의 갈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들이 갈 길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을 지키며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때까지 은혜 베푸실 테니까 견뎌내라. 그 땅에 남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그것을 정확하게 갈 길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그들이 원하는 생각과 뜻이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뜻을 구하면서 내 생각과 내 뜻을 내려놓지 않고 내 생각과 내 뜻을 그저 도장만 찍어 주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남은 남유다 백성들과 요하난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귀와 순종할 마음이 없이 또 다시 불순종하는 겁니다. 이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눈에 보기에 안전해 보이고 평안해 보이는 애굽을 택하여 내려가는 것입니다. 애굽이 나에게 안전과 평안을 줄 것 같이 여겨지기 때문이고, 애굽으로 가면 전쟁이 없고 역병과 기근이 없을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뒤로 한 채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내 생각과 내 뜻을 구하며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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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장소는 애굽의 도시입니다. 예레미야는 원하지도 않는데 강제로 끌려가서 애굽에 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으로 가면 망하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선포했는데, 말씀에 불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왔고, 원하지도 않는데 예레미야를 애굽으로 같이 끌고 왔습니다. 그렇게 강제로 끌려 오듯 애굽에 같이 온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됩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다 보는 앞에서 큰 돌들을 축대 진흙으로 감추게 하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에 어떤 일을 하실지를 보이시는 상징이었습니다. 애굽 땅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며 이 심판에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게 됨을 상징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벨론 느브갓네살을 불러 오셔서 애굽 땅을 치고 죽일 자는 죽이고 사로잡을 자는 사로잡고 칼로 칠 자는 칼로 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가지 말라는 애굽으로 가서 또다시 그 비참한 비극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애굽이 평안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 땅이라고 착각했지만, 사실 그 곳은 사망과 저주의 자리가 될 거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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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온 백성이 망하고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성전이 다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이렇게 치고 죽이고 칼로 모든 것이 엎드려지는 끔찍한 일을 온몸으로 경험하고 그 참담한 비극을 두 눈으로 본 자들입니다. 그 정도면 정신을 차릴 거 같은데, 이제 정신이 돌아와서 주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갈 거 같은데, 성경이 증언하는 인간의 모습은 예루살렘이 그렇게 다 망하고 남유다가 그렇게 초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어리석음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 못 차리는 그들을 향해 아주 의도적으로 애굽 심판과 멸망에 애굽 신들을 모신 신당들이 불살라 지게 된다는 것을 두 번이나 반복해 증언합니다. 그 신당들이 불탄다는 것은 바벨론이 애굽을 공격할 때 애굽의 신들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이 부분을 두 번이나 반복해 강조하는 이유는, 요하난과 남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애굽으로 내려가서 단순히 그냥 살기만 한 게 아니라 애굽의 신들에게 우상 숭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아무런 힘과 도움도 안되는 애굽의 신에게 절하고 의지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하는 겁니다. 애굽의 신들이 우리를 구하고 보호하고 우리를 안전하게 해줄 거라고 착각하며 그 땅에 내려간 그 백성들에게 너희가 그렇게 의지하는 애굽과 애굽 신들이 이렇게 처절하게 불살라 지게 될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따라가는 그 인생의 끝,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의 끝은 결국 사망과 저주의 자리라는 것을 너희는 왜 모르느냐?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시 한번 경고하시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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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 보기에는, 겉보기에는 애굽이 평안해 보이고 안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평안과 안전이 아니라 사망과 저주가 기다리는 땅이었다는 것을 어리석은 백성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애굽을 멸망시키는 것도 겉보기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곳에 그를 사용하는 하나님의 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내가 내 종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을 불러오리니…바벨론 왕을 불러서 사용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게 신앙입니다. 정신 차리면, 제정신이 돌아오면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계심을 분명히 믿으며 보이지 보이는 현상을 넘어 그것을 주관하고 역사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신 없는 자들, 정신 못차리는 자들은 내 눈에 보이는 것과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을 바라보지 못하는 겁니다. ​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의 남은 백성들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것을 바라보고도 정신 못차리고 기어이 불순종하며 내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애굽으로 내려가는 그들의 끝은 결국 하지 않아도 되는 생고생하고 얻어맞고 깨지고 박살나서 결국 바벨론에게 붙들려 끌려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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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리석은 모습이, 이렇게 정신 못차리는 모습이 과연 수천 년 전에 어리석은 남유다 백성들만의 이야기가 되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무지하고 어리석으며 정신 못 차리고 불순종할 수 있는가? 그렇게 열을 내고 손가락질만 할 수 없는 게 그런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신 못 차리고 기어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자기 눈에 복이 좋은 대로 애굽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이죠. 불신앙과 불순종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그렇게 알려줘도 그렇게 눈으로 보여 줘도 깨닫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모습이 과거의 정신 못차리는 남유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일 뿐 아니라 여전히 정신 못차리는 우리의 현주소일 수 있음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정신 없이 분주하게 살지 말고 이 말씀을 통하여 영적 분별력을 달라고 기도하며 주의 은혜를 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엎드리고 영적으로 깨어 정신차리는 일이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정신차리고 깨어 영적으로 분별하여 눈에 보이는 애굽은 평안과 안전을 줄 것처럼 착각하지만 결국 심판과 저주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신 못 차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나아가지 말고 정신 차리고 말씀이 이끄시는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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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나를 죽이려는 자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예레미야 40,7-16 | 10-30-2025

10/30/2025

 
​어제 말씀을 통하여 예레미야 선지자가 바벨론으로 가는 꽃길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의 미래와 인생이 모두 보장된 바벨론으로 갈 수 있었는데, 바벨론에 가는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황무지와 같은 잿더미가 된 유대 땅에 남아 백성과 함께할 것을 선택했습니다. 백성들이 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를 따르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 예레미야를 매국노라고 몰아세우며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아 호의적이지도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뜻을 따라 선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오해를 받으며 박해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황무지이자 가시밭길인 유다 땅에 남아 그곳 성들과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예레미야가 사명에 따라 남기로 한 유대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특별히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그 남아 있는 백성들과 그 땅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전쟁에서 지고 나라가 망하면서 모든 것이 황폐해지고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망하고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불타고 무너진 곳에서 짧은 시간 안에 어떤 국가적인 통치나 기능이 가능할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그 남아 있는 자들은 상처와 아픔 가운데 회복을 위해 새롭게 재편해야 되는데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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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왕은 남유다와 예루살렘 땅을 점령하고 모든 것을 허물고 불태운 후에 그 남겨진 백성들을 맡아서 다스릴 수 있도록 위임해주는 사람을 세우는데 그 사람이 바로 사반의 손자 아이감의 아들 그다랴입니다. 그다랴를 통하여 바벨론 왕은 남유다 땅과 남겨진 백성들을 맡아서 다스릴 수 있도록 위임해 준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그다랴가 백성들을 모아 백성들을 마음으로 모으고 설득합니다. 갈대아 사람 바벨론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는 것이죠. 사실 이 말씀은 예레미야가 남유다가 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선포했던 내용과 거의 결이 같습니다. 바벨론은 너희를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몽둥이니까 바벨론과 대항하지 말고 죽기 살기로 결사항전으로 싸우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바벨론을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결국 복이 되는 길이 될 거라는 것을 계속 선포했었습니다. 바벨론에게 위임받은 지도자 그달랴의 설득도 비슷하게 너희들이 이 땅에서 바벨론 왕을 잘 섬기고 바벨론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하게 될 것이라 설득합니다. 너희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황폐해진 이 땅에서 포도주와 과일과 기름을 모아 저장하면서 일상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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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랴의 설득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다랴의 말대로 바벨론을 섬기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바벨론 왕의 밑에 삶을 살아가면서 많은 흩어졌던 사람들이 정상생활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다라의 말대로 그들은 굶어 죽지 않고 그 척박한 상황에서 기름을 모으고 과일을 모으며 포도주를 담그는 이런 일들 할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그달랴를 향한 호의적인 반응만 있었던 것이 아니죠. 그달랴의 설득에 대해서 여전히 충돌하고 부딪히며 소위 말하는 굉장히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던 많은 사람들도 있었음을 말씀은 증언합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그다랴의 이 설득에 냉담했고, 어떻게 보면 적대적인 세력이 점점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언젠간 저 사람을 없애야 되겠다는 그런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세력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보면 전한 내용만 결이 비슷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반응 또한 비슷한 것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을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듣지 않고 거절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믿으며 결국 그들은 멸망과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벨론이 세운 그다랴에 대해서 여전히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바라보기 때문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을 매노로라는 말로 거절하고 충돌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그다랴가 옳은 말로 설득해도, 바벨론이 세운 지도자라는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의 말을 거절하고 충돌하는 것이 애국이라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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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랴와 함께한 신하들 중에는 그런 판세를 읽을 수 있는 자들이 있었고 그다랴에서 충심으로 경고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 특별히 너의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다랴는 그 주변 신하들의 충심의 직언을 믿지 않았고 경시했습니다. 그다랴는 사람들을 잘 품고 달래고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지도자가 되려고 노력한 건 분명한데, 위가 상황 가운데 사람들이 나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긴급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래도 내가 바벨론에게 세움받은 지도자인데 나를 함부로 죽이겠어? 라고 여기며 그 조언을 경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렇게 그다라가 충심의 조언을 믿지 않고 무시하니까 또 한번 그 주변에서 간청합니다. 내가 가서 사람들 모르게 당신을 암살하려 계획하는 이스마엘을 제거하고 오겠다고 간청합니다. 지금 그다랴가 암살 당하면 안되니까…안 그래도 힘든 이 나라가 더 세워지기 어려우니까….당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이스마엘을 내가 대신 가서 죽이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한 겁니다. 안타깝게도 이 일을 행하지 말라며 그다랴는 그 충심에서 나오는 간청을 거절합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는 너무 오버라는 겁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이고, 이스마엘은 그럴 리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몰래 죽이려는 그 일을 막아버리게 되는 것이죠. 결국 내일 말씀을 통해 배우겠지만 그다랴는 암살 당하는 비극의 지도자가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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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의 마음은 모아지지 않고 흩어집니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고 백성을 하기 위해 노력한 자였지만 자기의 생명을 노리는 자가 있으며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는 자가 있으며 자기를 향하여 그런 적대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렇게 애국의 프레임에 갇혀 여러 사람들이 호시탐탐 그다랴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그다랴 자신만 몰랐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 가운데 살아갈지라도 이 세상에는 여전히 듣기를 거절하며 충돌하고 부딪히며 적대하는 세력들이 늘 있다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진리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를 향하여 그렇게 칼을 겨누며 적대적인 마음을 가지고 죽이려 하는 자들도 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변 환대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랑하되, 깨어 정신차리고 대비하는 삶,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지혜인 줄 믿습니다. 이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에, 갈라지고 나눠지고 서로 적대적으로 죽이려 하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며 품되,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깨어 기도하며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상황이 아닌 사명으로 결정되게 하라."예레미야 40,1-6 | 10-29-2025

10/29/2025

 
오늘 말씀은 전쟁이 다 끝나고 나라는 망하고 예루살렘은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게 무너진 후에 남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를 엄중히 지적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이방인의 목소리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이방인의 입술을 통하여 엄중히 지적하고 동시에 예레미야의 그들과 반대되는 믿음의 선택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방향이 결정되고 가치관이 드러나며 그걸 통하여 하나님 백성으로 삶의 기준이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 두 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의 장수이자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이방인인데 그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채찍과 같이 그들의 잘못된 선택에 대해 엄중히 지적하십니다. 첫 번째, 남유다가 망하고 무너지고 심판 당하는 이 모든 것의 실체적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곳에 말씀을 그대로 행하시며 재난을 선포하셨다는 겁니다. 표면적으로는 바벨론 군대에 남유다가 망하여 무너진 거 같지만 그건 겉보기의 상황인 거고 그 모든 것의 실체적인 주체가 누구라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란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이유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뒤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자들인데, 남유다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 말씀의 귀를 기울이지 않고 마치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군사력과 경제력이 전부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모든 일을 이루시는 실제적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못하는 잘못된 결정으로 망하고 무너지게 됐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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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선언입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하게 된 이유가 근본적으로 무엇이라는 겁니까? 군사력이 부족하고 정치적 힘이 딸려서가 아니라 남유다 백성들이 하나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고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망한 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듣지 않았기 때문이며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결과라는 겁니다. 그들의 잘못된 선택,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죄를 행하는 그 잘못된 선택이 결국 너희에게 심판과 멸망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엄중히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심판을 이루신 것이며 심판과 멸망은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결과였음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방인 사령관을 통하여 남유다 멸망의 본질적인 문제를 이렇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바벨론의 사령관을 통해서 남유다의 망한 이유를 이렇게 정확하게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방인 사령관을 통한 이런 하나님의 채찍과 같은 엄중한 평가를 듣는 예레미야는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가 본인이 여러 번 반복하여, 끊임없이 전했던 말씀의 핵심인데 결국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는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과 불신앙의 열매를 맺으며 이렇게 처절히 망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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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잘못된 선택과 정반대로 예레미야의 믿음의 선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망해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있을 때 선지자 예레미야도 사슬로 결박되어 함께 끌려갈 때에 바벨론 사령관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풀어줍니다. 석방하면서 예레미야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데 첫 번째 선택지는 바벨론으로 같이 가는 선택으로, 바벨론의 환대와 선대가 기다리고 있는 길입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에 제일 잘 나가는 나라인데 그 나라 왕이 환대와 선대를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그 인생의 모든 것이 보장된 인생, 예비된 꽃길을 갈 수 있는 선택입니다. 두번째 선택지는 모든 것이 불타고 망한 여기 예루살렘에 남는 길입니다. 바벨론으로 오는 게 싫으면 여기 남아 있으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바벨론에게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벨론에 가는 것을 선택했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게 고생 덜하는 꽃길이고 그 인생이 보장된 길이니까…당연히 바벨론의 길을 가는 것이 소위 말하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풀리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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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바벨론으로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문다고 여기 남아 있는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좋아하겠습니까? 단순히 여기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게 경제적으로 상황적으로 힘들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남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네가 말한 대로 되니까 기분 좋냐? 그러면서 남유다가 그렇게 멸망한 것을 예레미야가 입바른 소리해서 그런 거라고 그를 얼마나 아니꼬운 눈으로 보겠습니까? 예레미야를 어떤 프레임을 씌웠냐 하면 애국에 반대하는 매국의 프레임을 씌었죠. 저 매국노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 잘못 전해서 우리가 이렇게 망했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예레미야를 더 핍박하고 힘들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그냥 단순히 경제적으로 상황적으로 힘든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겪고 왔던 고난과 어려움을 계속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처지에 자기를 몰아가는 선택일 수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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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예레미야는 이곳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바벨론에 가면 왕이 선대한다고 약속했는데, 그 보장된 꽃길, 인생이 풀리는 길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에 함께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내 인생 하나를 생각하면 편하고 좋은 길, 꽃길을 선택하는게 당연한데,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 사명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길을 선택하는 예레미야를 보게 되는 것이죠. 상황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명으로 결정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고 싫어하고 핍박하고 박해할지라도 그곳이 하나님이 부르신 사명이 있기에 백성과 함께하며 그곳에서 머무는 결정을 하는 예레미야, 그것이 남유다 백성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레미야의 영적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성도란 결국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결정을 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내 결정은 나의 인생의 방향성과 길을 결정하며 내 인생의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드러냅니다. 안타깝게 남유다와 예루살렘은 잘못된 선택의 연속으로 하나님께 범죄하며 불순종 하며 심판과 멸망으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레미야는 모든 것이 보장된 꽃길 대신 사명이 이끄는 길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며 어떤 결정을 하며 어떤 길로 나아가기를 사모하는가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결정을 하며 상황이 이끄는 결정이 아닌 사명이 이끄는 결정으로 묵묵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흔들림, 무너짐, 사라짐으로 하나님만 남게 만드신다." 예레미야 39,11-18 | 10-28-2025

10/28/2025

 
​예레미야 39장은 마침내 임한 바벨론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완전히 무너지는 참담한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거두어 가셔서 더 이상 복을 내리지 않겠다 말씀하신 그 날이 정확하게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심판의 때에 등장하는 시드기야 왕과 에벳멜렉, 이 두 사람의 대조되는 운명을 통하여 그 때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길을 가야 하고 준비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39장 앞부분에서는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아가 두 눈이 뽑혀 끌려가는 장면을 통해 심판의 때에 직면한 그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시드기야 왕 개인이 아닌 남 유다 백성 전체가 그렇게 처절하게 망하고 무너지고 심판을 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이 착각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결국 바벨론에 의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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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사실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성전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져 내리는 것, 이게 말씀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 모든 것들이 다 흔들리고 변하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것, 이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우리 인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붙들지 않고 말씀을 말씀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인생에 무너지지 않고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은 결국 흔들리고 무너지고, 사라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철저히 흔들리고, 무너지고, 사라지게 하심으로 하나님만 남게 만드시는 겁니다. 모든 것들을 흔들어 버리시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남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남유다 백성과 예루살렘 성전이 처절하게 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통하여 붙들어야 하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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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통하여 이 성전의 무너짐은 장차 있게 될 종말의 때의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셨던 성전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재건해 놓은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해 다시 세워 놓은 건데 그 성전 또한 우상과 같이 되어 그 성전이 그들을 지켜주는 버팀목이라고 여기며 이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며 외형의 성전 지상주의를 붙들고 살아갔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주신 경고는 이 성전 또한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지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선언 속에서 무너지게 되는 성전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바라봐야 되는 건 절대 오지 않을 것 같지만 분명히 때가 되면 오는 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지금은 절대 무너지지 않고 사라질 것 같지 않은데, 그래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일상에 충실하게 그냥 잘 살면 되는 거라고 여기는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 마지막 때가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그때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하며 말씀을 듣지 않고 제 갈길로 가며 불순종과 불신앙에 빠져 전혀 대비 없이 준비 없이 살다 이렇게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전과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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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시드기야 왕과 달리 그 심판의 때에 구원을 받은 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왕의 내시이자 구스 사람인 에벳멜렉입니다. 구스 사람이란 유대인이 아닌 지금의 시리아 사람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왕의 내시로서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핍박하고 구덩이에 던져 죽이려 할 때, 왕 앞에 나아가 목숨 걸고 예레미야를 변호했던 사람이자 왕을 설득하여 결국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건져낸 사람입니다. 예루살렘 온 성에 재난과 심판이 내리던 그 날에 에벨멜렉에는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신다”는 그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한 남은 자가 되어 온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고 멸망하는데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도록 보호해주신 겁니다. 말씀을 거절했던 대다수의 남유다 백성들과 그들의 왕이었던 시드기아는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되는데 에벳멜렉은 남은 자로 그 심판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드기아와 남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고 듣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지고 멸망한 예루살렘 성전과 동일한 운명을 갖게 되었고, 에벳멜렉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에 무너지는 예루살렘 성전과 운명을 달리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순종과 불순종의 끝이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은 시드기아 왕과 에벳멜렉을 통하여 정확하게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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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무너지지 않고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예루살렘 성전은 그때가 되니까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멸망하고 심판받은 그 모습은 장차 있게 될 이 세상의 종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절대 무너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이 세상도 언젠가는 그렇게 다 사라지고 무너지고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망하게 되는 심판의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무시하고 경시하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와 준비 없이 그 무너지고 멸망하는 세상과 동일한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심판의 때에 종말의 때에 구원받는 유일한 비결은 단 한 가지, 내가 나를 믿었음이라….즉 하나님을 믿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 아래 있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공로와 그의 피 아래 머무는 것뿐입니다. 그날이 오고 있음을 잊지 않고 그날을 대비하며 준비하는 유일한 비결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 가운데 거하는 것 뿐이며,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살아가는 신앙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굳건히 서서, 모든 것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사라지는 그날에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약속하신 주의 말씀에 힘입어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생명과 복 가운데 거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두 손 들고 항복하면 살고 고집 부리고 버티면 죽는다." 예레미야 39,1-10 | 10-24-2025

10/24/2025

 
오늘 39장 말씀은 참 마음이 아픈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끊임없이 반복하여 주셨던 그 말씀, 그 일이 결국 그날에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남유다와 이스라엘이 이렇게 처절하게 패망하고 무너지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 날이 오기 전에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항복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회개하라…그래야 산다는 것을 수없이 말씀하셨는데 백성들은 변화도 없었고 돌이키지도 않았고 듣지도 않았습니다. 설마 그날이 일어날까, 설마 그 일이 일어날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래도 예배도 드리고 제사도 드리는데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그 성전이 무너지겠어? 즉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처절하게 무너지는 안타까운 날이 임한 것입니다. 그날에 그 일이 결국 일어나지 않다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착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그날은 오지 않고 절대 그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하고 살아가죠. 그런데 말씀으로 반복하여 알려주시는 진리는 결국 그날은 오고 그 일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의 비극은 하나님을 먼저 떠난 결과이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임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엄중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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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에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순종하는 대신 하나님 말씀에 충돌하고 부딪히며 끝까지 저항하고 버티며 고집을 부린 그 남유다 백성의 심판으로 무너지는 끔찍한 모습을 오늘 말씀은 가감 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싸우고 버티고 고집부리고 항전을 하다가 포위당한 후 1년 반 만에 결국 예루살렘 성이 함락이 되는 것이죠. 그렇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나니까 눈으로 볼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냥 두 손 들고 항복했으면 이렇게까지 진멸하고 불 태우고 모든 걸 무너뜨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그들은 거절하고 끝까지 부딪히고 버티고 저항하다가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불살라지며 모든 것이 초토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니까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착각했는데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만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져 보이지 않는 성전은 다 무너지고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도 없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고 있으며 껍데기의 제사와 예배만 드리고 있는 그 성전에 하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았고 심지어 하나님은 더 엄중하게 그런 성전을 무너져야 너희가 산다고 엄중 경고하셨지만 정작 그들은 그걸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성전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지고 초토화 되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그 성전을 버리신 것을 이 때에 깨닫게 되는 겁니다. 이 성전을 하나님은 버리셨구나… 이 성전이 무너져야만 우리가 사는 거구나…라는 것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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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초토화되고 불살라지고 모든 것이 파괴된 것을 넘어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 왕의 비극적인 모습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나라가 망했는데 백성들을 버리고 밤에 몰래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왕을 둔 백성들은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하니까? 지금 나라가 망했고 초토화 되었으며, 백성들이 잡혀가고 있는데, 왕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밤에 몰래 도망가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지도자로 왕으로 세우고 있었던 남 유다의 끝은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밤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려고 도망가는 왕… 그러다가 결국 잡혀서 다시 끌려오게 됩니다. 밤에 몰래 도망가다 잡혀서 끌려온 시드기야 왕의 눈 앞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먼저 눈앞에서 자기 아들들을 하나씩 다 죽이는 겁니다. 왕 앞에서 왕자들을 하나하나씩 죽는 것을 아버지가 보는 겁니다. 그 후에 자기 신하들도 하나하나 자기 눈앞에서 죽입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시드기야 왕의 두 눈을 뽑아버리는 끔찍한 일이 벌어집니다. 굉장히 슬프고 안타까운 비극적인 일이 벌어집니다. 왕이라는 것은 그냥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백성을 대표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시드기야 왕의 비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통해 남유다 백성 전체가 처절하고도 비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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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 비극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엄중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해야 될 왕이 이미 눈이 멀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인 것입니다. 왕으로서 봐야 될 것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못했고 시대를 읽지 못해서 시드기야 왕은 이미 앞 못보는 시각 장애인과 똑같았다는 것이죠. 그런 필요 없는 눈은 뽑아 버려야 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남유다의 비극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여 그들을 모두 구렁텅이에 빠뜨리게 한 안타까운 일이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남유다 백성은 버티고 버티다가 불태워지고 초토화되며 모든 것이 완전히 망했다는 겁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장차 오게 될 심판과 마지막 때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와 같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게 성도들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고집부리고 버틴다고 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시는 것이 말씀에 항복하고 두 손 들고 회개하면 산다는 겁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두 손 들고 항복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많은 사람들은 그 말씀을 여전히 농담으로 여기고 가볍게 여기고 듣지 않고 거절하며 고집 부리고 버티고 완전히 그 날을 무시하고 살다가 완전히 꺾여 버리고 완전히 진멸되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반복하는 그날에 그 일이 결국 일어나게 된다는 것… 이것을 엄중하게 대비한 사람과 대비하지 않고 그것을 무시하고 농담으로 여긴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갈라지게 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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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야 될 의미가 있으며 오늘을 감사하며 살아가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동시에 성도는 오늘의 충실함을 넘어 그날에 그 일이 결국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오늘을 살아가지만 그날을 바라보고 그 일을 대비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 날이 오기 전, 그 일이 일어나기 전 하나님께 두 손 들고 항복해야, 회개해야만 사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버티고 하나님께 고집부리면 여러분들만 고생입니다. 완전히 꺾여 버리고 완전히 무너지고 완전히 자빠지게 됩니다. 고집부리고 버텨봐야 소용이었다는 것을 그날이 되면 다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반드시 그날과 그 일이 오게 됨을 잊지 않으며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숨겨진 구원의 메시지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주의 백성으로 깨어 하늘을 바라보며 그날에 그 일을 마음과 삶으로 준비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가 항복하여 회개하며 그 심판의 날에 구원받고 건짐을 받는 축복 가운데 거하는 주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복과 생명을 주시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라." ​ 예레미야 38,14-28 | 10-23-2025

10/23/2025

 
어제 말씀을 통하여 진리의 말씀을 전하다가 억울하게 진흙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예레미야를 건져 준 사람은 왕이 아니었고 구스 사람인 왕의 내시 에벳멜렉이었습니다. 왕의 내시를 통해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는 그 모습은 마치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서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형들 중에 하나인 유다가 이 요셉을 죽이지 말고 노예로 팔자라고 제안하여 요셉을 죽이지 않고 구덩이에서 건져낸 사건을 연상해보게 됩니다. 그런데 시드기아 왕은 그때에 책임 회피를 했었습니다. 바른 말을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냥 나는 너희들을 거스를 수 없다며 예레미야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죽도록 거의 방치했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는 빌라도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시드기아가 왕으로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독대하며 은밀하게 나누는 대화의 내용들인데 이 또한 빌라도와 예수님이 일대일로 독대하며 그 마지막 밤을 심각하게 보냈던 대화의 내용과 너무나 유사합니다. 예레미야와 나누는 그 은밀한 대화 내용들은 시드기아 왕의 안타까운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며 왜 그가 그렇게 무책임하며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왜 진리 가운데 서지 못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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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를 통해 진흙 구덩이에서 건짐 받은 예레미야를 시드기아 왕이 다시 불러냅니다. 그리고 은밀히 비밀스럽게 독대하며 하나님이 뭐라 그러시냐….또 물어 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왜 예레미야를 또 불러서 같은 질문을 물어봅니까?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답을 하나님이 주셨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두 번 정도 정확하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했는데 왜 또 한번 나를 불러내서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주셨냐고 물으시냐고 왕을 향하여 직언을 합니다. 내가 아무리 반복하여 주신 말씀을 전해도 왕은 듣지 아니할 게 분명한데 또 왜 물어보십니까…라는 겁니다. 혹시나 하고 또 물어보는 시드기아 왕에게 돌아온 답은 역시나…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바벨론과 싸우지 말고 바벨론과 결사 항전하지 말고 바벨론의 왕의 고관들에게 항복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이스라엘을 새롭게 재편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심판의 몽둥이로 바벨론을 쓰시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왕과 이 나라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항복하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는 길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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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과 목소리에 순종하라. 그래야 생명을 보존하고 복을 받고 산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옳음이 아니라, 내가 규정한 프레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복받고 하늘에 주시는 생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내 견해와 내 생각과 내 뜻과 충돌할지라도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고 그 말씀에 엎드려야 산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시드기아 왕은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엎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아니하고 결사 항전으로 싸우게 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지 않는 불순종이며 그 결과 망하는데 처절하게 망한다는 데도 주저하고 있는 겁니다. 왜 자꾸 이렇게 우유 부단하게 결정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가? 이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처한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두려워하는 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시고 생각하시는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가에 있었습니다. 이 전쟁이 이길 가능성이 없는 전쟁이고 거의 백전 백패라는 것을 시드기아 왕은 이미 감 잡고 있었습니다. 왕으로서 이게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은 이미 머리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뭐를 두려워하는 겁니까? 항복하자니 먼저 항복한 자들에게 조롱받을까 두렵고 무시당하고 수치 당하는 게 두렵다는 겁니다. 시드기아는 바벨론 왕과 결사 항전의지로 싸우지 아니하면 어떤 왕이 되는 겁니까? 매국노와 한 패가 된 왕, 나라를 팔아버리는 왕이 되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프레임 씌워지는 게 바로 시드기아 왕이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솔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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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왕의 변명이었고 결국 남유다의 심판을 직면하게 되는 비극이 되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내놓으며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시드기아 왕이나, 애국이란 프레임을 하나님의 말씀을 매국으로 몰아가는 많은 고관들과 백성들 모두 결국 남은 게 심판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드기아 왕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던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과 동일 본체이셨는데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인간이 되셨으며 십자가에서 수많은 수치와 모욕과 저주를 다 감내하셨습니다. 가시관을 쓰시며 채찍에 맞으시며, 수많은 수치와 모욕을 온몸으로 다 당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고 건지시기 위해…시드기야 왕과는 정 반대로 그 처절한 수치와 모욕을 다 겪고 모든 것을 다 온몸으로 감당하시며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기로 결정하신 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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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떻게 보면 빌라도이고 우리가 어떻게 보면 시드기아 왕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혹시나 하고 물어도 역시나 답은 똑같습니다. 내 견해와 내 생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것 만이 복된 길이며 사는 길입니다. 내 뜻과 내 견해와 내 프레임에 다 들어맞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고 언제나 진리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엎드릴 때 여러분들은 사는 겁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여전히 내 옳음을 주장하며 내 견해와 내 프레임에 맞는 말씀만 취사 선택하며 나머지는 버리면서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힌다면, 시드기아 왕과 같이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이유들을 대며 변명과 핑계 논리로 일관한다면 결국 그것이 자신도 죽이고 백성들도 죽이며 남는 것은 심판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하라. 그래야 복을 받고 생명을 보존하리라는 예레미야의 묵직한 말씀을 마음에 새겨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늘의 복받고 생명 얻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을 없애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한다." ​ 예레미야 38,1-13 | 10-22-2025

10/22/2025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빠지고 미혹에 쉽게 넘어가 참 진리는 외면당하고 심지어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와라 그리하면 살 거라고 끊임 없이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들을 귀도 들을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은혜 가운데 거해야 하나님의 백성들인데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산지 너무 오래돼서 참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는 것을 넘어 그 진리의 말씀에 화를 내고 분노하며 그 진리와 충돌하고 부딪치고 죽이려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어제 말씀과 오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주신 참 진리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서는 뚜껑 씌운 웅덩이에 갇혔다가 왕이 꺼내 주어서 왕궁의 뜰 안에 감옥 뜰에 머물렀는데, 오늘 말씀은 다시 진흙 구덩이에 던져지는 예레미야를 보게 됩니다. 어제 말씀에서 예레미야는 사람들에게 특히 고관들에게 얻어맞고 때림을 당했는데 오늘 말씀은 때리는 것을 넘어 죽이라고 소리치는 수많은 백성들의 아우성에 직면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와 충돌하고 부딪히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집안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하는 정권의 실세를 가지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기반으로 해서 그 당시에 모든 것을 쥐락 펴락하는 정치와 권력의 실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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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백성들에게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나서 보이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잡아 가지고 왕에게 데려와서 죽여야 된다고 소리치는 겁니다.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냥 기분 나쁘고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이 참 진리를 전하는 예레미야를 죽여야 된다는 것이죠. 그 이유는 백성들에게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한다는 거예요. 백성들에게 애국을 가르치지 않고 매국을 가르치고 있다는 거에요.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진정한 평화는 뭡니까? 너희 괜찮아, 잘될 거야…등을 토닥거리는 이게 아니라 하나님께 회개하고 악한 길에서 돌이켜 그게 진정한 평화이며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애국이라는 프레임으로 가지고 정치 지도자들은 이 예레미야의 참 진리의 말씀이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찌르는 말씀이 되어 백성들에게 평안을 빼앗는 말씀이 된다고 소리치는 겁니다. 바벨론에게 안 망해도 되는데 예레미야 너 때문에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바벨론에게 자꾸 망한다고 얘기하는 하나님 말씀이 백성들과 군사들의 분위기를 깨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레미야를 잡아 죽여야 된다고 말하는 고관들의 논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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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풍전 등화와 같은 남유다 백성들이 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악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순종하면 사는데 그 마지막 카드를 버리고 어떻게 하는 겁니까?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없애려 하고 죽이려 하는 겁니다. 그들이 원하는 프레임인 애국을 가지고 참 진리를 박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충돌하고 부딪치는 것을 넘어 결 예수님을 죽여야 된다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로마와 싸워 이겨야 하는 메시야 프레임에 예수님이 들어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벨론을 향하여 결사 항전을 주장하는 게 민심을 얻는 길이며 백성들에게 박수 받는 일입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가지고 싸우자…는 이런 외침이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 말입니다. 문제는 나라를 지키는 본질은 말씀으로 돌아오는 회개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데 있습니다. 내 힘으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바벨론과 끝까지 결사항전을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거예요. 그것은 분위기와 사기를 떨어뜨리는 없애야 될 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고관들이 왕에게 큰 소리로 간청하는 겁니다. 저 예레미야를 죽여 버려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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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는 외침 가운데 두 사람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시드기아 왕의 책임회피의 반응이고요. 두 번째는 왕궁의 내시였던 구스인 에벳멜렉의 믿음의 반응입니다. 시드기아 왕은 그렇게 백성들과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여야 된다고 아우성쳤을 때 왕으로서 책임회피를 하며 결정을 미룹니다. 나는 너희를 거스를 수 없으니까 너네 마음대로 하라는 거예요. 왕이라는 자리가 책임지고 결정하여 백성들을 살리는 위치인데 시드기아는 왕으로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모습은 마치 예수님을 심정적으로는 구해 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그 당시에 민심을 두려워하여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책임회피한 빌라도와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백성을 두려워하고 그 당시에 유력한 자들을 두려워하는데 정작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만 두려워하며 이렇게 책임 회피하여 안타깝게 예레미야를 내어주는 결정을 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끔찍한 진흙 구덩이에 갇히게 됩니다. 지진이나 자연 재해가 나서 진흙 구덩이에 빠지면 거기서 못 빠져나와 죽게 되는 걸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가 빠진 진흙 구덩이는 가만히 있으면 그냥 죽는 자리에 빠진 겁니다. 잘못된 결정으로 본인도 망하고 백성들도 망하게 하는 잘못된 지도자로 그 자리에 있지 말아야 될 사람인 겁니다. 그런 시드기야 왕의 책임 회피에 경종을 울리는 믿음의 반응이 등장하는데 바로 왕궁의 내시였던 구스인 에벳멜렉입니다. 그는 내시인데 시드기아 왕에게 소위 말하는 목숨을 걸고 진짜 충언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뿐인데 자기들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다고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죽이려고 하는 건 악한 일이라고 간청합니다.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에게 행한 것은 악합니다…왕이 그 악한 일에 편승하시면 안 된다고 목숨 걸고 전하는 겁니다. 감사하게도 시드기야 왕은 에벳멜렉의 간청을 듣고 마음을 바꾸게 되어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서 건져 살리도록 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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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자들은 결국 끝에 가서는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친 것을 넘어 그 말씀을 죽이려 하고 없애려고 합니다. 말씀을 거절하고 없애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려 하는 것, 그게 바로 어두운 시대, 악한 시대, 미혹에 빠지는 시대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어렵고 시대가 어려울수록 참 진리를 말하고 전하는 자들은 예레미야와 같이 어려움을 당하고 위협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의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멸시를 당하고 거절을 당하는 것을 넘어 죽이려 하고 없애려 할 때, 시드기아 왕과 같이 책임 회피하며 나는 아무 잘못 없다며 손을 씻는 인생이 될 것인지, 구스사람 에벳멜렉과 같이 목숨 걸고 믿음의 반응을 보이며 그 진리를 건져내며 그 말씀을 다시 소생시키는 자리에 설 건지… 그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결단해야 될 믿음의 결정임을 잊지 마십시오. 에벳멜렉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는 건짐을 받고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시위대 뜰 때에 머물게 됩니다. 진흙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 진흙 구덩이에 던져진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우리는 시드기아 왕의 길이 아니라 구스 사람 이방인 에벳멜렉의 용기 있는 삶의 자세로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과 건져내며 진리를 지키는 놀라운 일에 선명히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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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 "하나님 말씀은 애국과 매국의 프레임을 넘어선다."예레미야 37,11-21 | 10-21-2025

10/21/2025

 
​남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예레미야를 통하여 찔러 주시는 말씀을 주시는데 듣지 않고 듣기를 거절하며 내 눈에 보기 좋은 길인 멸망의 길로 계속 질주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것은 바벨론에게 항복하고 싸우지 말라는 말씀이죠. 하나님의 보내신 몽둥이인 바벨론 군대와 싸우지 않고 항복하면서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 만이 살 길이라고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말씀을 그렇게 전하고 있는데 남유다를 쳐들어온 갈대아인의 군대, 그들이 바로 바벨론 군대인데, 애굽과 싸우다가 본국에 쿠테타 조짐이 있어서 잠시 떠나갔습니다. 바벨론 군대가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애굽과 남유다를 공격하는 걸 멈추고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간 겁니다. 그렇게 되자 바벨론 군대와 목숨 걸고 싸우자고 얘기했던 결사 항전을 주도했던 애국 지사들, 나라 사랑이라는 애국이라는 말로 백성들을 모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든 분노의 타겟을 예레미야에게 쏟고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나라 사랑이라는 애국적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보면 그 예레미야가 전한 말씀은 애국이 아니라 매국인 것입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의 말씀과 같이 여겨지는 겁니다. 그것을 듣기 싫어하고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 바벨론의 군대가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니까 이때다 싶어서 사람들이 막 들고 일어나 모든 타겟을 예레미야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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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국 지사의 대표가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냐의 손자요 셀레마의 아들인 이리야라 하는 문지기의 우두머리입니다. 소위 말하면 그 당시에 힘이 있고 영향력이 있는 유력한 애국 지사 중 하나인 이리야가 사람들 중에 그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 놓고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한 겁니다. 네가 우리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고 그 바벨론에게 항복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하며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렇게 전했지? 지금 갈대아 군대, 즉 바벨론 군대는 애굽이 무서워서 우리를 떠나가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떠났는데 항복하려면 너나 항복해라 이 매국노야! 그러면서 모든 분노를 예레미야에게 쏟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말씀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소위 말하는 프레임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국이냐 애국이냐….즉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다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전하는 말씀을 들어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애국이 아니라 매국이 되는 겁니다. 바벨론과 결사 항전하여 목숨 걸고 싸워야만 애국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바벨론에게 모양 빠지고 비굴하게 항복하라 말씀하신다니 이게 애국의 프레임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해야만 하는 이런 구조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프레임으로요? 애국이냐 매국이냐는 프레임으로…그게 지금 예레미야를 향하여 사람들이 분노하는 본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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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로 분노했는가 하면 예레미야를 붙잡아서 때리고 뚜껑 씌운 웅덩이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뚜껑 씌운 웅덩이란 감옥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이고 비참한 형태로, 웅덩이에 집어넣고 햇볕도 보지 못하게 뚜껑을 닫아 버렸습니다. 이게 한 개인이 예레미야에게 분노를 쏟는 게 아니라 그 당시에 패역한 남유다 백성들 전체가 애국이라는 프레임으로 말씀을 규정하며 애국에 반하는 매국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낸 것입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바벨론은 지금 잠시 떠나가지만 다시 조만간 공격해올 겁니다. 내부 문제만 좀 해결되면 다시 공격하러 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아무리 진리를 전해도 백성들은 듣지 않습니다. 잠시 떠나난 폭풍 전야와 같은 평화에 그저 환호하는 겁니다. 바벨론이 잠시 떠나갔는데 마치 자신들이 힘이 있어서 승리한 양 애국이라는 프레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말하며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한 예레미야는 매국노로 몰아세워 버리는 것이죠. 악한 세대는 내가 규정하고 정의한 가치와 프레임에 맞지 않으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거절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는 겁니다. 내가 규정하고 정의한 가치와 애국 프레임에 맞지 않은 예레미야를 때리지 않으면 안 되고 예레미야를 가두지 않으면 안 되고 예레미야를 해가 안 들도록 뚜껑을 씌워 웅덩이에 집어넣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패역한 남유다 백성들의 태도였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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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예레미야가 억울하게 매맞고 웅덩이에 갇힌 지 여러 날 후에 시드기아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끌어냅니다. 그리고는 왕궁으로 예레미야를 데려와서 은밀히 독대하며 묻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 왜 시드기아 왕은 예레미야를 구해내서 이렇게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물어보는 겁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이 봤을 때도 예레미야 선지자가 진짜 선지자라는 것이 그가 깨달아지는 겁니다. 주변에 선지자들이 없었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왕이 듣기 좋은 얘기들을 하며 수많은 좋은 얘기들을 통해 왕의 기본을 좋게 하지만 그게 진짜가 아니라는 거 정도는 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진짜 하나님과 함께하며 그 말씀을 대면하는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물어보는 거죠. 그런데 이게 처음이 아니라 시드기야 왕은 여러 번 하나님 말씀을 물어봤단 말입니다. 왜 또다시 왕은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신 말씀이 있냐고 물어보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아직 못 들었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혹시 내가 듣고 싶은 말씀을 이번에는 주시지 않았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특별히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떠나 잠시의 승리를 만끽하고 있는 이때 혹시 하나님이 다른 메시지를 주신 게 아닌가 물어보는 것이죠. 그런데 예레미야의 대답은 왕의 기분을 좋기 위해서 왕과 왕의 나라가 괜찮을 거다…이런 얘기 일절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주신 하나님 말씀은 똑같다는 것이죠. 이 나라는 돌이키지 않으면 망하고 왕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겁니다. 듣고 싶지 않은 말씀이자 원하지 않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하는 예레미야는 주신 말씀 때문에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프레임 씌워 매맞고 사람들 구덩이에 던져지더라도 전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왜곡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말씀을 전하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왕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담대한 자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우리에게 서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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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말씀은 인간이 규정한 애국과 매국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서는 진리입니다. 내가 규정하고 정의하는 애국의 프레임에 하나님 말씀이 다 담긴다면 그건 하나님 말씀이 아닌 겁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이 애국인지 매국인지의 프레임에 가두어 판단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나의 프레임을 판단하시게 해야 합니다. 나의 애국이라는 견해와 프레임을 하나님 말씀 가운데 내려놔야 되는 겁니다. 말씀의 절대 가치를 통해 애국이라는 상대 가치가 빛을 발하는 것이지, 내가 규정하는 정의하는 프레임이 절대 가치가 되어 하나님 말씀을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며 망할 징조라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 프레임을 가지면 가질수록 진짜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를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며 분노하고 화를 내며 심지어 때리고 구덩이에 가두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벌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정의하고 규정하는 프레임으로 판단하려는 이런 우를 범하면, 결국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절하면서 내 프레임을 지키기에 남는 것은 불순종과 심판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그 말씀 가운데 내가 엎드리고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애국과 매국이라는 프레임을 넘어서 우리의 그런 견해가 말씀 가운데 녹아져야 되는 것이 순종입니다. 내가 규정한 애국과 매국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며 망하는 길로 나아가는 남유다 백성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는 하나님께 눈을 돌리며 내가 가진 프레임을 말씀 가운데 내려놓고 말씀 자체에 순종하여 엎드리고 순종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벽묵상 "말씀은 안 듣고 나를 위한 기도만 하는 게 위험하다." 예레미야 37,1-10 | 10-10-2025

10/10/2025

 
오늘 말씀은 남유다 마지막 왕 시드기아 왕의 시대에 심판밖에 남아있지 않은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말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그 마지막 때에 왜 그들은 심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는 끔찍한 영적 현실 두 가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영적 현실은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데 나를 위한 기도만 하는 태도입니다. 이 두 가지 영적 현실의 예는 우리에게 주시는 찌르는 말씀이자 우리도 똑같이 이런 실수와 우를 범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첫번째 영적 현실은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지금 시드기야 왕과 신하와 백성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습니다. 뭐에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냐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기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도 한 마음 한 뜻이 된 것입니다. 왕만 하나님 말씀을 떠난게 아니고 신하들도 백성들도 다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답답한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하셔도 끊임없이 말씀을 주셔도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하여 그들은 귀를 막았습니다. 주신 말씀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불신앙과 불순종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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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말씀을 듣지도 순종하지도 않는데 나를 위한 기도만 하는 태도입니다. 모순과 같은 이중적 행태라는 것이 딱 보여지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지도 않는데 그들이 원하는 건 뭡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언가 역사하셔야 되고 무언가 일하셔야 된다는 소리 지르며 반복해 기도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셔야 된다는 이 모순적 태도가 바로 남 유다의 암울하고 답답한 영적 현실이었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의 왕과 신하 백성들의 한결 같은 이 말씀에 귀를 막고 듣지 않은 태도,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태도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셔야 된다 요구하는 기도만 하는 그들의 태도가 처한 상황과 현실을 오판하게 만든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남유다 백성들이 처한 상황,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애굽 군대가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오고 있고 갈대아 군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가 갑자기 떠나가게 되는 상황입니다. 사실 그때 갈대아인인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다가 떠나간 이유는 애굽이 무서워서 떠난 게 아니라 본국인 바벨론에 쿠테타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많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그 쿠테타를 확인하고 진압하기 위해서 잠시 떠나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갇혀 있었던 남유다의 시드기야 왕은 이것을 어떻게 잘못 오판하고 해석했냐 하면 바로의 군대를 무서워해서 애굽을 무서워해서 지금 바벨론 군대가 우리를 떠나 본국으로 도망가는구나…착각한 겁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바벨론이 세운 왕으로서 허수아비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의지할 대상을 바벨론에서 애굽으로 갈아타야 되겠다는 오판, 잘못된 결정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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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드기야 왕과 남유다 백성들을 깨워 줍니다. 애굽의 바로 군대는 결국 너희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고 이 바벨론 군대가 다시 와서 이 예루살렘 성을 쳐서 빼앗고 불사르는 것이 너희가 직면할 다가올 현실이라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지금의 현실 뒤에 곧 닥칠 현실….그러니까 애굽에 기대지 말고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 항복하며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라고 외칩니다. 그런데 시드기야 왕도 신하도 백성들도 한 마음으로 그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겁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애굽의 군대가 우리를 보호하는 거 같고 바벨론 군대는 떠나간 것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나오는 결과가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안주하여 그것에 기초하여 결정하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게 되면 모든 결정이 지금 처한 상황과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맞춰서 모든 걸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뭘 하셔야 된다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이 모순과 같은 영적 현실이 결국 그들이 마지막 때까지 돌이키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고 심판과 멸망으로 끝나게 되는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몰되어 착각한 시드기아 왕의 잘못된 결정, 상황의 오판이 결국 나라를 불바다가 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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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찌 남유다만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많은 성도들에게 직면하고 있는 영적 현실이 바로 이거 아니겠습니까? 심판에 직면한 남유다 백성들과 같이 우리는 이 모순적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을 마음도 순종할 마음도 없어요. 말씀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취하여 내 마음에 심기우는 대신, 말씀을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취사 선택하려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도 듣지도 않으면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합니다. 주신 말씀을 난도질하고 그 중에 원하는 거 몇 개만 취하고 나머지는 불에 태워 버리려 하는 이런 영적 교만에 빠져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살아가면서도 우린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막 소리 지르며 간절하게 기도는 하는데 하나님 말씀을 들을 마음도, 순종할 마음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하여 오늘도 역사하시고 일하셔야 한다는 것을 기도하며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하셔야 되는 거 아십니까? 나를 위해 이렇게 부어 주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끊임 없이 외치며 소리치며 기도하고 있는 이 모습,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돌아봐야 합니다. 정말 주님께 주님 나를 위하여 역사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십니까? 정말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며 반복하여 기도하십니까? 그런데 그 기도전에 먼저 점검해야 될 게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작정했는지….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말씀의 순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첫 번째 단추입니다. 첫 번째 단추가 잘못 껴졌는데 두 번째 단추가 제대로 끼어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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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보이는 내 눈으로만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곧 닥칠 현실을 내가 직시하고 준비하며 내가 영적으로 깨어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 백성들도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성도들도 이 본질을 잃어버린 채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셔야 한다며 소리치는 내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하여 살아갑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하여 곧 다가올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게 인간의 우매함이고 어리석음입니다. 곧 다가올 현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처한 상황에 따라 내 소견에 내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 결정하면서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나의 기도가 하늘의 은혜로 풀리기 위해선 내가 먼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며 주님께 내 뜻을 꺾고 주의 뜻과 주의 일이 이루어지는 기도를 간절히 구하며,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곧 닥칠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으로 대비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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