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8장 말씀이 구스, 즉 이디오피아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였다면 19장 오늘 말씀은 애굽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입니다. 사실 애굽은 성경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라이자, 그 당시 강대국 하면 꼭 언급되는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지금 이집트야 강대국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나, 고대시대에 애굽이라는 나라는 강대국에 꼭 언급되는 매우 중요한 나라였습니다. 고대 문명이 모두 큰 강을 끼고 시작되었는데, 애굽에는 나일강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큰 강이 그곳을 면면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나일강이 제공하는 풍성한 물은 일찍 문명을 만들었고, 그 당시에 애굽을 가장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이 애굽은 단순히 부유하고 풍요로운 강대국일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대표하는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애굽을 미워하기도 했지만 동경하기도 했으며, 떠나야 할 세상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기대고 싶은 세상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애굽을 기대고 붙들었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는 이야기가 성경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의지한다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종이 되어 430년 동안 아주 큰 고생을 하고 신음하다 그 세상 나라 애굽으로부터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출애굽을 통해 애굽을 떠났음에도 계속 동경하고 옛 노예 근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어려움을 당하는 게 광야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는 증오하고 미워하면서도, 벗어나야 하는 나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강대국이기에 기대고 싶고 붙들고 싶은 이 애증의 마음, 이중적인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바로 왕이 등장하지 않습니까? 그 바로왕은 특정한 시대의 애굽의 왕이기도 하고, 세상 나라인 그 애굽의 왕을 대표하는 과거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왕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애굽이라는 나라는 단순히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으로 예언하는 그 시대에 존재했던 애굽이라는 나라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바벨론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나라로, 하나님을 떠난 세상,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곳이 바로 애굽인 겁니다. 애굽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우상들을 가득 섬기고 있었고, 눈에 보이는 나일강이 주는 풍요로움을 신격화 하고 절대화 하며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겁니다. 오늘 이사야 말씀에 등장하는 애굽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배경은 바로 그런 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에게 나아가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께 피하여 하늘의 힘을 붙들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바벨론에 줄을 서야 할지, 애굽에 줄을 서야 할지 고민하며 세상 나라들에 기웃거리며, 세상의 힘을 업고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세상과 차별 없이 눈에 보이는 강대국의 힘을 계속 의지하며 거기서 눈치보기 작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서 또 이 애굽이라는 세상 힘을 끌어 들이려 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 남유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증언되는 세상 나라 애굽의 심판은 몇가지로 요약해서 볼 수 있는데 첫번째로,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실 때 아주 급하게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을 심판하시겠다고 경고하십니다. 빠른 구름이라는 것은 그 당시에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운송 수단입니다.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닌 그때에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구름 타고 움직이는 겁니다. 심판을 위해 가장 빠른 운송수단인 구름을 타고 하나님이 애굽에 임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애굽의 간장이 녹을 정도로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만드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시는 내용은 애굽 안에 있는 우상들을 무너뜨리시는 겁니다. 애굽에 대해 하나님이 엄중하게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 전에 하나님께서 바로왕 앞에 열가지의 재앙을 임하게 하시는데 그 재앙 하나하나가 결국 애굽 안에 있었던 우상들을 깨시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생명의 젖줄이나 마찬가지인 나일강이 말라 버리고 악취가 나게 되는 심판이 임합니다.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마르고 악취가 나는 이 심판은 마치 나일강이 피로 변하게 만드셨던 출애굽기 말씀의 열 가지 재앙을 떠오르게 하는 겁니다. 세상 나라 애굽의 본성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똑같이 하나님 대신 여러가지 우상을 붙들고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며 그 우상들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세상이고 그 세상의 길을 나아가면 결국 심판에 직면하며 다 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애굽을 심판하실 때 이렇게 빠른 구름을 타고 하나하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는 것을 통하여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세번째로,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 하실 때, 그들이 내부 총질을 하도록 만드신다는 겁니다. 독특하게 애굽을 심판하시는 방법은 애굽인을 격동하려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냥 내버려두면 서로가 싸우고 죽이며 결국 망하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애굽을 향한 심판이었다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애굽의 정신을 약하게 만들며 그들의 모든 것들을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나일강을 통한 이집트 문명과 애굽의 정신들이 다 무너지고 잃어버리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들의 삶의 기반이 다 없어진다는 거며 그들의 가치와 정신의 핵심이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시대 정신을 잃어버리고 가치를 잃어버린 채 이곳 저것 눈에 보이는 우상을 찾아다니고 그것도 안 되니까 점쟁이와 용한 무당 찾아다니는 그런 모습들이 바로 애굽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모습임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애굽을 심판하시고, 모든 경제 기반과 정신 기반을 무너뜨리시며, 황폐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겁니다. 애굽이 분명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부유한 강대국이었지만, 하나님 백성들이 그런 애굽의 삶을 본받고 애굽의 힘에 기대고 붙들고 살아가면 망하게 됨을 반복해 경고하시는 겁니다. 오히려 애굽에 있는 우상들을 깨야 되며, 그들의 하나님 없는 삶을 떠나가야 되며 세상을 대표하는 애굽에서 벗어나 영적 출애굽을 해야만 산다는 겁니다. 애굽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벗어난 세상, 하나님을 배제한 경제기반과, 하나님 대신 우상을 붙든 정신 기반을 대표하는 세상을 대표합니다. 그렇기에 애굽이라는 나라의 본성은 바벨론과 그 결이 비슷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애굽을 향한 심판은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나일강을 통한 경제 기반과 함께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은 우상들을 통한 정신 기반을 다 무너지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모든 것들, 그들의 경제 기반과 정신 기반을 다 무너지게 하심으로, 모든 것들과 탄식으로 변하며 슬픔으로 변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애굽에 임한 하나님 심판에 하이라이트입니다. 애굽을 동경하고 애굽을 기대고 붙들려 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깨우시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내 마음 속에 애굽의 나일강의 풍요가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강의 풍요를 붙들고 내 경제 기반을 세우기 원합니다. 내 마음속에 우상을 모두 무너뜨리고, 하나님 말씀 가운데 조율되어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애굽의 심판을 통해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중요한 영적 지혜입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우리 가운데 주적을 잃어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싸우며 한 형제이며 한 팀인 자들이 내부 총질하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하나님의 내버려 두심으로 임하게 되는 엄중한 심판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애굽은 따라가야 할 모델이 아니라, 따라가면 안되는 반면교사임을, 의지하고 붙들어야 할 힘이 아니라 넘어서야 할 힘임을 잊지 말고, 오직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따라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가 계속되는 연장 선상에서 구스 땅에 임하는 심판에 대한 경고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위한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계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스라는 나라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이디오피아입니다. 이디오피아는 애굽 바로 옆에 있었던 땅인데 강으로 말미암아 애굽만큼이나 풍성한 삶을 살았던 나라입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가 그렇게 잘 산다 말할 수 없지만 이 당시에 이디오피아는 굉장히 풍성하고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구스 땅이란 이처럼 풍성함과 풍요를 상징하는 나라인데, 오늘 말씀의 시작은 슬프다는 애곡으로 시작됩니다.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 날개치는 소리 나는 땅이라는 것은 바로 구스 땅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는 삶 자체의 분주한 소리입니다. 경제가 활성화되어 사람들이 일하러 다니는 소리, 풍성한 잔치 소리가 가득한 풍요의 소리입니다. 이처럼 환경과 조건이 풍요로운데, 경제가 활성화되어 날마다 날개치는 소리가 나는데 왜 그 땅이 슬프다는 겁니까? 분명한 단 한가지 이유…그 땅이 하나님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물질과 조건의 풍요로움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가 잘 돌아가는 소리만 나면, 눈에 보이는 물질과 환경만 풍요로우면 된다는 그들의 착각, 하나님과 무관하게 하나님과 상관 없이 풍요로움만 추구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 슬프다는 겁니다. 구스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는 만족을 추구하고,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삶이 직면하는 심판입니다. 마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구스 땅, 이 땅에서 풍요로움과 풍성함에 빠져 살아가는 그 끝이 결국 다 멸망하고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렇게 착각하고 잘못된 길로 질주하는 구스의 끝이 보이니까 슬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구스 땅에 임한 심판의 본질은 하나님 대신, 주변 나라를 등에 업고 문제를 타개 하려 하는 삶에 대한 심판입니다. 구스 땅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피하는 대신, 주변 나라들의 등에 업혀, 강대국의 힘을 빌려서 피하고 타개하려고 하는 삶입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였고 구스에 전쟁을 압박하고 치러 내려오려는 상황입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앗수르에 대항해서 강이 흘러 나누어 지는 나라, 즉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애굽의 등에 업히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구스가 강물이 흘러 나누인 나라인 애굽에 사신을 보내는 겁니다. 그들의 근본적 문제는 위기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압박과 압력이 밀려오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달려가는 대신, 주변 나라들에게 달려가고 세상 나라들의 힘을 의지하고 붙들려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결과 구스에게 임하는 심판의 내용이 매우 자세하게 드러나죠. 하나님 대신 붙들었던 풍성함과 풍요로움이 꽃이 떨어지듯 떨어지며, 짐승들이 약탈 하듯 사라지게 된다는 겁니다. 아무리 힘을 쓰고 노력을 해도 결국 심판의 때가 임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힘 대신, 주변 나라 애굽의 힘을 빌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 구스의 심판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처럼 구스의 심판을 엄중하게 예언으로 주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남유다가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이방 나라인 구스와 차별 없이 똑같이 망하는 길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를 전혀 비추어 보지 않고, 이 상황에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삶, 마치 하나님이 없는 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 구스와 마찬가지로 강대국 애굽의 힘을 빌려 직면한 나라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려고 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되심과 보호하심을 전혀 믿지도 알지도 못하고 이방 나라들과 똑같이 우매한 결정을 한다는데 있습니다. 구스와 같이 남유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그냥 눈에 보이는 힘, 군사적인 힘을 의지하여 문제를 타개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무관하게 그저 잔머리를 쓰고 계산하여 애굽에게 손을 벌리고 그 힘을 의지하려고 한 결과 구스와 마찬가지로 배신당하여 망하게 된다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피하며 하나님의 힘을 붙들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가져오는 힘, 세상을 의지하는 힘은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무너지게 만든다, 그게 심판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구스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 끝에 중요한 결론이 숨겨져 있습니다. 구스, 이디오피아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주셨지만, 그 심판 뒤에 놀라운 반전이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분명히 심판의 강력한 경고로 멸망하게 되는데, 그 끝은 만군의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멸망하고 종결될 거 같은데, 그 마지막 때에 구원의 날이 이렇게 임하게 된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계신 겁니다. 마지막 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때에 하나님 편에서 있지 않으면 심판이지 하나님 편에서 있으면 구원인 것과 일맥상통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구스 백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붙들고, 이 세상만 붙들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왔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이방인인 우리에게도 구원의 길을 여시고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하면 그 가운데 회복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셔서 생명의 길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마지막 때에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이 인종과 모든 국가를 초월하여 여호와께 드릴 예배를 가지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그 놀라운 회복에 함께 동참하게 하신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이사야에게 주신 예언, 심판의 메시지는 심판의 메시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과 함께 그들의 회복과 구원의 메세지를 동시에 선언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이 하나님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은 반드시 나를 망하게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이 풍성하고 풍요로운 것 자체가 문제도 아니고 죄도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풍요로움이 하나님 안에서 풍요로움과 풍성함으로 나아가야지,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과 풍성함을 추구하고 붙들면 그게 문제가 되고 죄가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과 풍성함이 하나님을 모르게 만든다면 그것들이 절대화되면서 결국 심판의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풍요로움에 빠지면, 위기와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없는 출구를 찾으려 뛰어 다닙니다. 계산하고 머리를 굴려서 주변의 힘 강대국의 힘을 빌려 내가 살려고 계속해서 정치적인 저울질을 하는 삶을 살아가다 반드시 망하는 겁니다. 또한,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온 열방이, 하나님 편에 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바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시온산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이 놀라운 초대에 감격과 기쁨으로 반응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놀랍고도 분명한 말씀을 품고 하나님을 통과한 풍요로움을 구하며, 위기 가운데 하나님에게 피하며, 마지막까지 선명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백성의 주변 나라들 중에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근 주변 나라들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경고가 계속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와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이하게도 오늘 말씀에는 아람의 심판과 북 이스라엘의 심판이 같이 등장합니다. 두 나라의 심판이 같이 등장하는 이유는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거의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다 한통속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모습도 주목하고 붙드는 것도, 마음에 품는 것도 이방 백성과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북이스라엘은 완전히 타락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함을 잃어버린 채 이방 나라들과 구별 없이 똑같아졌기에 하나님은 아람의 다메섹과 북 이스라엘을 한꺼번에 묶어서 하나같이 다 무너지고 심판 받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들이 어떻게 심판 당하는가에 대해 여러가지 말로 선명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무너진 무더기가 된다…멸절한다…추수가 다 끝난 후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황폐함이다….사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어야 합니다. 이사야 7장에서 북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주셨던 분명한 권면이 있습니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굳게 서지 못하리라….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붙들어야 개인도 나라도 굳건히 설 수 있음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굳건히 믿는데 실패하고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믿음과 멀어졌습니다. 그들은 이방 백성들과 똑같이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살았고, 똑같이 헛된 영광을 구하고 살다가 똑같이 망하고 심판 당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방 나라 아림과 똑같이 한 통속으로 취급 받으며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된 북 이스라엘의 굳게 믿지 못하는 두 가지 본질적 문제를 증언합니다. 바로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림,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음…입니다. 이 두가지 문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라 믿습니다. 굳게 믿지 못한 첫번째 문제는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는 것은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분,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고 굳건히 믿는 겁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과 똑같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을 창조하고 구원하신 하나님,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했습니다. 대신 눈에 보이는 왕이 세워달라고 아우성쳤고, 눈에 보이는 우상들에 기웃거렸습니다. 그 결과 북 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들과 똑같이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대신, 이 땅의 헛된 영광을 구하고 붙들고 살다가 망했다는 겁니다. 굳게 믿지 못한 두번째 문제는 내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는 겁니다. 마음에 두고 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고 내가 붙들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나의 힘과 능력의 반석/원천이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과 능력의 원천/반석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을 믿지 않고 산 겁니다. 대신 그들이 마음에 둔 건 눈에 보이는 우상입니다. 아세라, 태양신과 같은 우상들이 즉각적으로 나에게 힘과 능력이 될 것처럼 착각하며, 당장 내 문제를 해결한다고 착각하며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도 않았고, 내 힘과 능력의 원천/반석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도 믿지 않고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품고 마음에 두고 살아갔으며, 하나님 외에 수 많은 다른 것들을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 결과 그들은 굳게 믿지 못했으며, 안개와 같은 헛된 영광을 구하다 무너지고 망한 겁니다. 북 이스라엘 굳게 서지 못하고 이방 백성 아람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며 똑같이 무너지고 망하고 심판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엄중히 경고하신 겁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면서 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구원의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악한 영과 사단도 악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알고, 당신이 누군지 안다고 선포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성도들이 실제로 예수님이 누군지를 모르고 예수님이 누군지를 잊어버리며 살아간다면, 구원자 예수님에 대해 관심 없이 살아간다면 교회 밖에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별 없는 자가 되며, 똑같이 헛된 영광 구하다가 망하는 인생 될 수 있다는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내 능력과 힘의 원천/반석이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 잘하는 겁니다. 하나님 백성이란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인도와 보호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 내가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보십니다. 내가 갈망하고 원하는 것, 하루종일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 의지하고 붙들며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기 원하십니다. 내 힘과 능력의 원천/반석이 정말 하나님에게서 나옴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도 똑같이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같던 길을 답습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 주신 말씀이 나를 찌르고 내 영혼을 깨우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의 구원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나의 구원의 하나님이 누군가를 잊어버리지 않고 그 하나님의 속성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15장에 이어 가깝고도 먼 나라인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고와 경고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압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고 임박한 심판 가운데도 하나님을 붙드는 대신, 세상과 사람들을 붙들고 살아간 그들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이런 심판의 예고와 함께 그들에게 피할 방도를 알려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면 너희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두 가지를 알려주십니다. 첫번째, 모압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곳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와 하나님을 찾는 백성 되는 것이 사는 길인 겁니다. 이 땅 통치자에게 어린양을 드리라…는 말은 모압이 북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치던 때를 상기하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북 이스라엘 아합 왕에게 모압이 조공으로 양털을 깎아 바쳤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털을 깎아 보내는 그런 조공을 드리는 게 아니라 딸 시온산으로 어린양을 드리라는 겁니다. 이 말은 바로 어린양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겁니다. 심판을 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되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모압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돌아와 하나님을 찾고 예배는 것 뿐이라는 겁니다.
두 번째 모압이 피할 수 있는 방도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도망 올 때 그들을 보호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배경이가 하면 앗수르로 인해 북이스라엘이 망하니까, 다음 타겟인 남유다에는 많은 동요가 있었고 피난길에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 할 것 같이 많은 백성들이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앗수르를 피해 도망하는 피난민들이 모압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들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쫓겨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숨겨주고 보호하며, 너와 함께 있게 하라고 명하신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함께할 때 너희에게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알려주신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압에게 반복하며 강력하게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예전 불순종의 흑역사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모압은 가는 길을 막았고, 그들을 방해하고 저주했던 과거의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흑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앗수르를 피해 쫓겨온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늘을 만들어주고 숨겨주고 그들을 보호하고 함께 해주는 것이 모압이 심판에서 벗어나 살 길임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모압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모든 경고와 심판, 그 심판을 피할 길을 농담으로 여겼다는 겁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여기며 하나님 말씀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겁니다. 6절 말씀에 네 번 이상이나 반복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모압의 교만, 거만입니다. 이렇게 반복해서 말할 정도로 그들은 교만에 쩔어 살았고 거만함에 찌들어 산 겁니다. 모압은 임박한 심판을 앞에 두고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교만한 겁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피할 길을 알려주시는데도 그 말씀 앞에 거만한 겁니다. 교만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신 경고로 들리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의 경고와 찔림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모압 백성들이 눈에 좋은 대로 판단하고 선택한 결과, 내 눈으로는 최고라고 고른 결과가 결국 소돔과 고모라 아니었습니까? 마찬가지로 내 눈에 좋은 대로 판단한 가장 좋은 것이라는 게 결국 패망의 선봉이고 넘어지는 앞잡이의 결과를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이키지 못하고 거만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며 농담으로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겁니다. 모압의 교만하고 거만한 마음이 결국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하나님이 내미신 손길을 거절하며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백성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모압에게 이제 남은 것은 흐르는 피눈물과 멸망밖에 없게 된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그 피할 길을 거절했고 끝까지 교만해서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으니까 결국 남은 것은 무너지는 것과 멸망하는 것 밖에 없는 겁니다. 모압에게 남은 건 흐르는 피눈물밖에 없습니다. 모압이 모압을 위하여 통곡하고, 슬퍼하고 심히 우는 겁니다. 날아 다니는 새가 둥지를 잃고 흩어지듯, 모압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떠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또한 모압에게 남은 것 철저하게 무너지고 망하는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대표로 오늘 말씀에는 포도원이 등장합니다. 모압에게 있어서 포도원은 그들의 특산물이자 그들의 주된 수입이었습니다. 그 포도나무과 포도원이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 나무가 마르고, 가지가 부러지며, 포도원에 일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거라는 겁니다. 이처럼 교만과 거만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고 끝까지 마지막 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눈물과 애곡이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심판과 멸망일 뿐임을 경고로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런데도 모압은 끝까지 정신차리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못합니다. 그저 하나님을 예배하는 대신 우상의 산당에서 피가 나도록 봉사하고, 하나님의 성이 아니 자기 자신을 위해 세운 성에 나가 기도하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는 굉장한 신앙의 열심과 헌신이 있고 기도가 있는 것 같지만 끝까지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에게 찾지 않는 것입니다. 종교적 열심이나 정성, 기도에 대한 헌신은 중요합니다. 타종교를 가도 종교적인 열심이나 정성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을 잘 한다는 핵심은 나의 열심과 정성이 아니라 내 믿음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열심과 정성이 바른 믿음의 대상에게 드리는 게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종교적 결심이나 내가 하는 정성이나 헌신 자체는 아무런 쓸데 없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만큼 한다라는 종교적 열심과 정성을 끝까지 붙들었던 모압 백성은 다 소용 없는 일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심판의 예고와 함께 피할 길을 알려주십니다. 그 심판을 피할 길은 유일한 예배 대상 되신 하나님에게 돌아와 붙드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나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다 똑같고,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알려주시는 피할 길이 언제나 똑같다는 것이죠. 심판이 오기 전에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그날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찾고 붙드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돌아오는 사람들, 말씀을 듣지 않고 결국 본인이 직면하고 당하고 나서야 돌아오는 사람들, 말씀 듣고도 안 돌아오고 그렇게 직면하거나 당하고도 돌아오지 않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 15장과 내일 말씀 16장에 등장하는 심판에 직면한 모압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배운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에 대한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고는 주변 나라들이자 이스라엘과는 무관한 민족들이었습니다. 반면에 모압은 물론 이방 나라이긴 하지만 이스라엘과 아예 무관한 나라가 아니라 조상이 비슷한 형제 나라였습니다. 모압의 시초는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때 도망간 후 자기 딸들을 통해 얻은 아들들을 통해 나라가 시작되는데 그 첫째 딸을 통해 얻은 아들이 세운 나라가 모압, 둘째 딸을 통해 얻은 아들이 세운 나라가 암몬입니다. 그러니까 모압은 이방 민족이지만 저 위로 올라가면 혈연에 공통점이 있는 소위 말하는 형제 나라이자 굉장히 가까운 민족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역적으로 거리적으로 가까웠지만 모압은 가까이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으며, 신앙적으로 완전히 이스라엘과는 결이 다른 이방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 이유가 적어도 성경에는 두 세 가지가 증언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모압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롯이 대표하는 패러다임입니다. 롯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자기 눈에 제일 좋은 거라고 선택한 게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거기는 얼마 있다 망하는 곳인데, 자기 눈에는 그게 좋은 거라고 선택한 어리석음입니다. 롯의 후예인 모압 백성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눈에 좋은 것을 끊임 없이 선택하는 민족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모압 백성들의 혈통이고 이방 나라가 되는 그들의 삶의 패러다임이었다는 겁니다. 두번째는 모압의 이스라엘을 향한 악한 태도와 저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했을 때 모압은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출애굽 할 때 길을 내어 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압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저주가 먹히지 않고 오히려 그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되니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음란한 여인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패망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래서 하루 아침에 24000명이 죽음을 당한 그 사건의 중심에 모압이 있는 겁니다. 혈통의 뿌리로 봐선 어떻게 보면 형제 나라라고 할 수 있지만 모압은 역사적으로도 삶의 패턴으로도 하나님에게 점점 멀어져간 백성이자, 하나님과 무관한 나라와 이방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때가 임했을 때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는 이방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 두 가지의 큰 특징으로 나타나는데, 하룻밤에...와 엄중하게…입니다.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반복해서 “하룻밤에…”가 강조합니다. 모압 알과 모압 기르는 서울&부산, 혹은 뉴욕& 엘에이 같은 모압의 대표적 두 도시인데, 그 두 도시가 하룻밤에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가장 큰 도시들, 가장 튼튼하다고 생각한 그 요새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겁니다. 하룻밤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물론 전조증상이 있긴 하지만 예고 없이 하룻밤에 모든 게 무너지게 된 심판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번에 다 쳐서 심판하시기에 하룻 밤에 망하고 하루 아침에 황폐해질 거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모압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 그 심판이 무겁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벼운 심판은 없지만, 심판 중에도 경중이 있어서 가중처벌과 같이 가중 심판이 있다는 겁니다. 모압에게 임한 심판이 바로 그 가중 심판, 무거운 심판이라는 것을 말씀을 강조합니다. 그 심판이 얼마나 엄중했는지 2절부터 마지막까지 구구절절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압의 군사들이 크게 부르짖으며 정신줄을 놓고 혼비백산 할 정도였고, 모든 백성들이 소리 지르고 울부 짓고 있는 겁니다. 물이 마르고 풀이 시들고 거둘 게 없으며, 피가 가득하고 죽음이 가득한 땅, 그게 모압에 임한 하나님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아침에 모든 게 무너진 심판, 여러분 이렇게 중하고 무겁게 임한 모압의 심판 사이에 주목해야 말씀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사야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부르짖는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내 마음이란 일차적으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마음이자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이방 민족으로서 심판을 당하는 모압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압의 심판 한 중간에 이 말씀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아픈 마음을 가지고 모압을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과 탄식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심각한 국가적 재난, 하나님이 치시는 심각한 심판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압과 그 백성들이 여전히 찾는 존재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그렇게 당하고도 그들이 붙들고 찾는 대상은 세상이고 우상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산당에 올라가 우상을 찾고 우상에게 나아가고 우상을 붙들고 울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세상과 우상을 향하여 여전히 달려가고 붙들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중한 심판을 직면하고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정신 못 있는 그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 입니다. 이게 심판을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리는 모압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자 눈물입니다. 모압 백성만 그렇게 안타깝고 답답합니까? 우리들도 모압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경고해도 듣지 않고, 심판을 당하고 무너져도 돌아오지 않는 모압이 내 모습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 경고와 채찍 가운데로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찾는 건 사람이고 세상이며, 여전히 붙드는 것은 우상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거두지 아니하시며 답답한 마음으로 “참 너희들 안타깝다. 그렇게 당하고도 돌아 오지를 않는구나.”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답답하고 안타까우신 마음이 어디 있는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며 살기 원합니다. 우리는 내 눈에 봐서 좋은 것을 고르면 망하는 인생입니다.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고른다는 게 소돔과 고모라인 게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 때문에 삶에서 삶에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채찍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현장에서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하나님이 치실 때 얼른 정신차리고 두 손 들고 잘못했습니다…고백하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사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 앞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는 모압의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모압의 어리석음을 반면 교사 삼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며 확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경영이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조직에 관하여 의사 결정을 하는 모든 행동,” 혹은 “기업/조직의 목표 달성을 위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한 과정과 수단 전체” 입니다. 특별히 경영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바로 효율성과 효과성입니다. 효율성이란 최소 투자를 통해 가진 모든 것을 가용해서 최대 효과를 내는 것이고, 효과성이란 효과성은 그 올바른 목표 달성과 선택을 위해서 그 조직과 기업을 바른 방향으로 설정해서 이끌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세워진 설정된 목적을 이루어가는 모든 과정이 바로 경영의 큰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신다는 고백은 익숙한데 오늘 말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고백 하나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경영하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경영하고 우리 가정을 경영하시고, 우리 교회를 경영하시고, 온 우주와 세계를 경영하신다는 놀라운 고백이 오늘 말씀에 한번도 아닌 세번이나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관점을 제시하는데, 우리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을 넘어 구체적으로 우리를 경영하신다는 겁니다. 경영의 정의와 같이 가능한 인적 자원, 물적 자원을 모두 동원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신앙 고백이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일반적인 경영의 목적은 어느 기업이나 조직을 망라하고 다 이윤 창출입니다. 이익과 이윤 창출이 대부분의 기업의 목적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경영에서 목적은 이윤 추구가 아니라 거룩하게 하심이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백성들이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는게 하나님 경영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오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주변 강대국, 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고 계십니다.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앗수르를 심판하시고, 블레셋을 심판하신다는 예고가 계속 등장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이 세 나라들이 모두 하나님의 경영방침에 지금 따라가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상에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대로 가지 않는 겁니다. 그 목적이 거룩하게 하심,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심인데, 주변의 모든 나라들도 다 거룩함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하나님과 철저하게 무관하게 살며 하나님에게 불순종과 죄악을 가득 쌓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분이시기에, 그 열방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다 심판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냥 멸망시킨다가 아니라 멸망의 빗자루로 청소하신다는 표현입니다. 청소의 목적은 더러운 것들을 쓸어내어 깨끗하게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심이란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은 더러워진 이 세상을 깨끗하게 정화하시고 쓸어내시는 게 심판의 목적이라는 겁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심,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하심이 하나님의 경영 방침인데, 그렇지 않은 백성들과 나라들은 때가 차면 다 청소하신다…그렇게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겁니다. 특별히 이 경고의 말씀을 아하스 왕이 죽던 해에 주셨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 역사에 손꼽을 정도로 아주 악한 왕이었습니다. 거룩함과 거리가 먼 왕이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과 정반대에 섰던 왕입니다. 그 악한 왕이 죽던 해에 이 하나님의 경고가 임한 겁니다. 그때에는 눈에 보이는 바벨론, 앗수르, 블레셋이 망하지도 않았고,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았던 강대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이런 나라들이 일어섰다가 언젠가는 심판과 멸망으로 다 무너질 것을 예언으로 주신 겁니다. 그 이유가 뭐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이런 주변 나라들을 의지하다가 멸망할 게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 블레셋을 붙들고, 하나님 대신의 앗수르나 바벨론을 붙들다 배신 당하고 말하게 되는 역사가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블레셋은 오랜 역사 가운데 이스라엘을 힘으로 괴롭혔던 민족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유명한 사건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골리앗 거인이 바로 블레셋 출신입니다. 다윗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블레셋이 싫고 두렵기도 했는데, 동시에 그 민족을 의지하고 기대고 싶은 두 마음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블레셋을 오늘 송두리 채 심판 하시겠다 경고하십니다. 블레셋은 북방에서 오는 연기인 앗수르에게 망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블레셋을 치러 오는데 블레셋은 머리를 굴려 눈에 보이는 애굽을 등에 업고 앗수르와 싸우려 했다가 처절하게 망한 것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내가 경영한 것을 반드시 이루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온 세상을 향한 확고한 경영방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들의 심판과 경고를 미리 알려주시면서 하나님의 확고한 경영방침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라 하시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 주변 나라의 힘을 등에 업고 의지하다가 망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붙들며,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신 피난처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세상을 무서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도 말고, 등에 얻고 뭔가를 해보려고 발버둥치지 말라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피난처 되신 하나님에게 나아가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경영방침은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을 동원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신 것은 반드시 되며,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거는 반드시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건,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경영하심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경영하시는 경영 방침을 정확하게 알고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조율되어 나아가는 삶,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의 삶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인 거룩함과 무관하게 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과 무관하게 산다면 심판을 통해서라고 하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심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이사야서의 반복된 경고와 심판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역사하고 일하시고 계시며 하나님은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경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뜻과 목적을 분명히 이루고 계심을 분명히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내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알하시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긴 시간표와 넓은 영적 시야를 가지고 바라보면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경영은 오늘도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겁니다. 온 세계와 열방을 다스리시고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며, 나를 경영하시고, 우리 가정을 경영하시고, 우리 교회와 온 세상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확고한 경영 방침인 거룩하고 깨끗한 백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나오는 백성 되기를 원하시는 그 목적에 조율되고 순종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심판을 넘어 13장부터는 이제 주변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말씀을 증언합니다. 첫 번째로 그 심판을 예언하신 나라가 바로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에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였고, 어느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나라,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때가 차면 그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심판과 멸망에 직면하게 될 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우리 눈에는 믿을 수 없겠지만 장차 바벨론이 멸망하는 것 뿐 아니라 바벨론 왕이 스올, 즉 지옥으로 던져지는 심판을 예언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사야 예언의 말씀을 과거 시제로 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예언의 말씀들이 이미 다 과거의 역사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별로 놀랍지 않을 수 있는데, 이사야 말씀이 선포되는 삶의 자리에서 듣는 이 예언의 말씀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을 말씀들 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가 멸망할 수 있으며, 어떻게 이방 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수 있을까…이건 말도 안된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이 어떻게 망할 수 있을까…정말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그 미래의 일을 이미 하나님의 시각을 바라보고 이사야를 예언하고 있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자리에서 이사야는 머지 않은 미래에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멸망을 할 것, 남유다의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는 겁니다. 또한 남유다를 망하게 했던 그 대국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멸망할 것이고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이 큰 그림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을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는 것처럼 불쌍히 여기십니다.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어 밤새 씨름하며 환도뼈가 부러져 평생 절룩거리는 불편함을 통해 늘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마치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져 절룩거리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하면 포로에서 돌아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란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겁니다. 이를 통해 오늘 말씀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시각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제일 첫 번째로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으로 주시는 이유는 바벨론은 단순히 과거에 존재했던 강대한 나라를 넘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을 벗어나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짐승의 나라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은 창세기의 바벨탑으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말씀을 다 아우르는 짐승의 나라에 대표입니다. 그렇기에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은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과 회복과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바벨론이 심판 받고 망하는 날은, 이 세상 나라가 망하는 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나라가 망하는 날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고 안식을 얻는 날이자 모든 결박에서 놓임 받는 구원의 날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절대 망할 것 같지 않은 바벨론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예언은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 같고, 거대한 바벨론이 모든 것을 좌지 우지하는 거 같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통치하심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시며 멸망하게 하시는 때가 속히 온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믿음 가운데 그날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짐승 나라의 왕 바벨론왕이 어떻게 망하게 되고 어떻게 심판 받게 되는가를 두 가지로 증언합니다. 바벨론 나라가 하루아침에 심판으로 멸망하고, 바벨론 왕은 깊은 스올에 던져진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잠시 쓰임 받는 도구라는 것을 망각한 바벨론은 주변 나라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며 교만과 완악에 빠져 살았습니다. 바벨론 왕은 하나님 자리에 대신 올라가려 했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님이 있는 저 구름 위에까지 내가 올라가려고 발버둥 치는 게 바벨론 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바벨론 제국은 마치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 왕은 그 나라가 망하고 무너진 후 스올, 즉 지옥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을 3번이나 반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 왕이 죽어 스올에 던져지는 것을 준비하고, 어서 오라고 환영하고 맞는 일이 깊은 스올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이 땅에서 잠시 누린 부귀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지옥의 맨 밑의 구덩이에 떨어지고, 구더기에 깔리고 지렁이가 너를 덮는 이런 끔찍한 일이 바벨론 왕에게 벌어진다는 겁니다. 이처럼 악한 자와 악한 나라의 심판과 멸망은 단순히 그 나라가 멸망하고 무너지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구더기와 지렁이가 가득한 스올 밑으로 던져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을 선명한 예언의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지만 이 시간만을 위해 살아가는 자도 아니고 오늘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지만 미래의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 이 넓은 영적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일상과 현실은 문제와 아픔, 어려움과 질병이 가득합니다. 눈에 보이는 바벨론이 온 세상을 통치하는 거 같고 좌지 우지 하면서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지옥과 같은 현실을 매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가올 그 날을 바라보고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짐승의 나라 바벨론은 여리고 성이 무너지듯 한번에 망하는 심판의 때가 곧 온다는 것, 그 바벨론 왕은 깊은 스올에 던져지는 심판의 때가 곧 온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십시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 아래 그 때가 일어나면 마치 도적이 오듯 일어나게 될 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날을 주목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 날을 준비하고 대비하며 살아가기에,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너무 열광할 필요도 없음을 믿음으로 붙들며 사는 겁니다. 그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내 아픔보다 큰 주님의 영광, 내 질병보다 큰 주님의 영광이 임할 것을 분명히 믿고 굳건히 믿음의 길을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13장부터 23장까지 말씀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넘어 각 주변 나라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13절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을 선포하는 겁니다. 그 주변 나라와 열방의 심판 가운데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바벨론에 대한 심판 예고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선포하는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에 대한 예언은 그 당시 눈으로 봤을 때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은 얼마나 강한 국가 였는가 하면 전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아무도 대항할 수 없을 가장 부강한 나라, 모든 것을 가진 나라이자 절대 해가 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였습니다. 어떻게 저 큰 나라가 저렇게 갑자기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변방의 이름도 모를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는가….말도 안되는 일로 생각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절대 망하지 않고 절대 망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건드리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바벨론이라는 건 그 당시에 존재하던 바벨론이란 나라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바벨론은 성경 전체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짐승의 나라의 대표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더 이 영적 의미가 넓고도 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벨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를 믿는 나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 하늘 끝까지 올라가려는 짐승과 같은 인간의 열망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바벨론이 아무리 겉으로는 대단하고 화려하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큰 나라이지만, 그런 큰 강국이지만 하나님이 바람 한번 불게 하시면 추풍 낙엽과 같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는 이 말씀을 분명히 붙드는 겁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의 상황이라는 것이 얼마나 안개와 같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겁니다. 바벨론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강대국이었고 대항할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과 충돌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런 바벨론이 곧 망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을 내 눈보다 더 신뢰하며 붙드는 겁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 대신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을 진리로 붙들고 취하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린 자,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 사람들과 결정적인 차별점이 이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예언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체로 받아들이며 다가 올 그 날을 준비하는 겁니다. 반대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눈으로 바라보는 처한 상황이 절망밖에 없어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믿음의 눈을 들어 하늘의 시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절망적인 상황 뒤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회복하는 겁니다. 그 절망밖에 보이지 않는 어둠의 상황 또한 얼마나 안개와 같고 가변적인 것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늘의 시각과 하나님의 시각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의 바로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무너지기 전 여러 경고의 사인과 전조증상들이 있음을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바벨론의 교만과 악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기에,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기에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겁니다. 약한 나라를 짓밟고 죽여서 이런 큰 강대국이 됐기 때문에 약하다 여기는 나라들을 짓밟고 죽이며, 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뜻대로 자기 욕심대로 사는 삶, 소위 말하는 짐승의 본능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거기에는 교만이 가득했고 죄가 가득했고 다른 사람을 학대하고 짓밟고 억누르는 것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이 말도 다 담을 수 없는 악을 행하고 살아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습니다. 이 바벨론 제국의 멸망의 징조는 바로 죄악이 가득한 삶, 하나님 없이도 내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교만입니다. 중요한 건 이 교만과 죄악이 가득한 짐승의 나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사는 바벨론은 결국 하나님과 싸우는 일이 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영적 교만과 완악함,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는 짐승의 나라 패러다임이 바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 하는 자, 하나님에게 싸우자는 선전 포고를 하는 자들이 된 겁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무너뜨리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자리에 인간이 올라가려는 교만함,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며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완악함, 이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과 맞서는 것이며,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며 하나님께 선전 포고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바벨론을 하나님께 멸망당한 소돔과 고모라 같게 하시는 이유, 그렇게 철저히 심판하고 무너뜨리시는 이유는, 바벨론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 했으며 하나님에게 ㅆ싸우자고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론을 가만두지 아니하며 모두 무너뜨리게 되는 겁니다. 역사가 증언하듯이 바벨론이란 나라는 절대 멸망하지 않을 것 같았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았던 나라가, 얼마가지 않아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도 서서히 무너지는 게 아니라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 번에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을 경시하며 하나님 없는 자같이 살아가게 될 때 결국 그것이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며, 하나님과 싸우려고 선전포고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 바벨론이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다 여기듯이, 살다 보면 우리 생각에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것 같은 게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동산 불패 신화, 주식 불패 신화와 같이 내 눈에 보기에는 절대 망하지 않을 것 같은 게 있는 겁니다. 그런데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듯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는 게 이 땅의 것들이라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이끄시는 왕이시자 주인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고 하나님을 없는 분 취급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바벨론의 멸망과 심판의 예언은 내 눈과 생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눈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라보는 현실이 열릴 때에만 이걸 다가올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말씀이 보여주시는 하늘의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함, 죄를 짓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완악함,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며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는 바벨론은 결국 끝이 이렇게 허무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벨론 뿐만이 아니라 많은 인간의 제국과 강대국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결국 하나님을 떠난 짐승의 나라는 끝이 이렇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님이 다 무너뜨리게 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것이 있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며 여러분들을 살리기 위해 하나님은 그것을 다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삶이 하나님께 싸움을 거는 선전포고임을 잊지 마십시오. 겸손히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높이며,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말씀으로 보는 현실을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 지금까지 증언된 이사야서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이 하나님 말씀의 선포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에게 모두 큰 충격이었습니다. 왜 이런 경고와 심판의 말씀이 충격인가 하면 그들 생각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만 계신다고 철썩 같이 믿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민족이란 선민이 열방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택함 받은 우리만 잘 되면 되고, 우리나라 이스라엘만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찌르시고 깨우쳐 주신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13장부터 23장은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에 대한 심판과 경고에 대한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주변 나라들의 첫번 째 심판과 경고의 메세지를 바벨론을 향한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여겼었는데 하나님은 바벨론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열방과 민족을 위한 하나님,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명히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온 열방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단순히 남 유다와 이스라엘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온 주변의 나라들과 열방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심판이라는 것을 알도록 그들을 깨우쳐 주시는 겁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변방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의 경고는 주변 나라들이 보기에는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는 농담같이 들렸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당시 고대에 전쟁의 개념은 한 나라와 한 나라 사이의 군사력으로 서로 싸우는 것을 넘어 신과 신의 싸움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신이고 전쟁에서 지는 것은 신이라고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어떻게 보면 앗수르나 바벨론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주목받지 않는 변방의 한 조그만 나라들이었습니다. 영토로 봤을 때나 군사력으로 봤을 때나, 영향력으로 봤을 때 바벨론과 비교했을 때는 이건 존재 자체가 미미한 나라들이 바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변방의 작은 나라에서 한 선지자가 일어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감히 그 당시 최고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콧방귀도 끼지 않을 농담 정도로만 여겨질 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그들이 듣던 듣지 않던 상관하지 않고,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목숨을 걸고 선명히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변 여러 나라들 가운데 왜 1번 타자로 나온 심판의 나라가 바벨론인가? 역사적 멸망 순서를 봤을 때 바벨론이 1번이 아닌데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1번으로 제일 먼저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성경에서 바벨론이란 단어는 그 당시에 존재한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상징하기도 하고 동시에 과거에 있었던 바벨탑을 만든 인간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동시에 바벨론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미래의 큰 바벨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메시지를 받은 바벨론은 단순히 그 당시에 존재했던 한 제국만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을 반하는 제국의 상징, 인간을 중심으로 짐승의 나라의 상징이 바로 바벨론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 바벨론의 심판을 제일 먼저 이렇게 말씀으로 예언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을 중심에 놓은 짐승의 나라의 대표인 그 악한 제국인 바벨론이 상징하는 분명한 대표성 때문입니다. 그 거대한 제국 바벨론, 짐승의 나라 바벨론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는 인간들, 인간의 힘과 능력을 극대화해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 하는 모든 조직과 시스템인 겁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인간의 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망각하고 살아가는 나라가 바벨론이고, 그 나라가 위대해서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착각하고 인간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돈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고 절하며, 그 모든 것을 집중적으로 만드는 삶이 바벨론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제국을 바라보는 시각은 단순히 군사력과 경제력이 큰 강대국이라는 것을 넘어 바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나라 짐승의 나라로서의 바벨론을 지칭하는 것임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 모든 바벨론이, 짐승의 나라의 가치와 시스템이 한번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벨론에 임하는 그 날,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들이 펼쳐지며 말도 안 되는 일이 펼쳐져 그날에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서 바벨론을 치러가는 군대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을 강조하시는 “내가”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때가 임하는 그 날에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것을 말씀은 강조하는 겁니다. 짐승의 나라 바벨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받고 멸망하여 몰락하는 것은 단순히 이사야 시대의 선포만이 아니라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을 관통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늘에까지 닿으려고 쌓았던 바벨탑을 무너뜨리실 때도 한 순간에 다 무너뜨리시고 흩으셨습니다. 노아의 방주와 심판의 날에도 때가 차매 한 순간에 하늘을 여셔서 모든 것을 다 쓸어 버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날이 임할 때 바벨론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 중에 죄인들을 멸하는 일이 한 순간에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바벨탑을 쌓던 바벨론, 자기들의 힘이 최고라고 믿으며 하나님 자리에 올라간 짐승의 나라가 바벨론이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진다는 겁니다. 과거에 있었던 바벨탑도, 지금 현재에 있는 바벨론 제국도, 미래에 있을 짐승의 나라 바벨론도 다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 가운데 있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선포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와 남 유다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만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온세계와 열방을 친히 다스리시는 우주만물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북 이스라엘 잘 안되고 심지어 망하는 것도, 남 유다가 잘 안 되어 망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고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모든 열방을 하나님에게 인도하는 것임을 선명히 알려주시는 겁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아무리 거대한 제국인 바벨론도 하나님이 손에 이렇게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있음을,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다스림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뛰어 넘으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 우리 민족을 뛰어넘어 모든 열방과 나라들을 모두 다스리시고 역사의 흐름을 주관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늘 겸손히 엎드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할 회복의 날, 구원의 날에 대한 이야기가 11장 말씀이었습니다. 소망 없고 절망가운데 있는 하나님을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람, 하나님의 그들을 향한 열심이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주신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12장 말씀은 약속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통한 놀라운 회복과 구원의 날에 대해 어떻게 믿음으로 반응하고 하는가에 대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회복과 구원의 여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우리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심을 철저히 믿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격 없고 가능성 없는 우리들을 건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주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이 놀라운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자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은 그 하나님이 하신 일들에 대한 믿음의 반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나의 삶가운데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바라보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세 가지를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놀라운 일들에 대한 감사, 기쁨, 찬양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감사입니다. 오늘 말씀에 두 군데에서 감사에 대한 고백이 등장할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중요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삶 가운데 외적 환경과 조건이 내 뜻대로 잘 이루어질 때 주로 감사하고, 반대로 내 뜻대로 환경과 조건이 안 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감사는 여전히 상황적이고 조건적인 경우가 많은데 오늘 말씀에 감사는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감사입니다. 즉 내 삶에 어떤 조건과 어떤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 회복과 구원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시는 구원과 회복의 역사, 지금 이 시간 나를 인도하시고 임마누엘로 나와 함께하신 것 자체 때문에 감사로 반응하는 것, 그게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진정한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 모든 상황 아래서 감사하는 비결은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고 하는 믿음의 반응일 때만 가능한 기적입니다. 내 삶의 조건이나 상황이나 환경은 늘 변하고 흔들리기에, 모든 상황 아래서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회복해 주시고 구원해 주심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의 일상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를 찾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서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는 것은 물론 귀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나의 삶 속에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개입하시는 것에 대한 감사를 계속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감사 1번은 환경과 조건과 상황을 통한 감사가 아니라, 나를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본질이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찬양입니다.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찬양은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입술의 고백이자, 나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는 입술의 고백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찬양을 한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주목한다는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이 나의 힘 되심을 통해 내 삶에 두려움이 물러감을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하신 회복과 구원에 대한 찬양이 터져 나오게 되며, 나의 힘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사는 삶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반응으로서의 찬양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여전히 세상이 두렵고 여전히 세상이 부러운 이런 삶을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럴 때마다 상황에 몰두하여 붙드는 삶을 넘어서기 원하십니다. 세상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세상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은 바로 내 삶에 구원도, 내 인생의 힘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는 삶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되시고 나의 힘 되심을 온 마음으로 찬양하는 믿음의 선포로만 가능합니다. 내가 눈을 들어 땅만 보지 않고 하늘을 보고 살아갈 때, 상황과 환경에 압도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압도되어 살아갈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믿음의 반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 드리는 나의 믿음의 고백이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믿음의 반응은 기쁨입니다. 감사가 결국 내 삶에 기쁨으로 찾아오는 것이며 찬양이 결국 나의 삶에 기쁨으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서 주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자는 결과적으로 당연히 기쁨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의 반응을 하는 자들은 그 삶에서 기쁨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기쁨은 성령의 열매 두 번째입니다. 내가 스스로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쁨이 희락의 열매입니다. 희락, 기뻐함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넘어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주님을 바라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속에 방황할 때는 정말 이 구원의 기쁨이 뭔지 모르고 살아갔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것이 나에게 감사와 감격이 되어 주님을 찬양할 때 내 안에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감격과 구원의 기쁨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가 성도로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내 삶을 적시게 되고, 내 삶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내 삶에 기쁨의 열매는 오직 주님 주신 것이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뻐하는 힘이며 감사하는 힘이며 찬양하게 하는 힘이 되는 것, 그게 믿음의 반응입니다. 성도로서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감사, 찬송, 기쁨이기에, 내 믿음의 반응은 하나님을 향한 태도이자 마음 자세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회복하심이 선명히 보여지기 원합니다. 내 삶 속에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 하나님이 하시는 회복하심에 주목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나의 감사 제목 1번은 하늘을 향한 감사가 나의 넘버원이 되는 것이며,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넘버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심을 찬양하고,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인도하심에 대해 찬양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내 삶의 구원과 힘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찬양하는 천국 백성으로 선명히 살아가십시오. 상황과 환경이 돌아가는 것을 먼저 바라보는 대 신,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일들을 먼저 바라보기 원합니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내 삶에 감사가 메마르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양함이 끊이지 않은 것이며, 내 삶에 기쁨이 흘러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풍성히 누리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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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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