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말씀의 후반부는 잿더미와 절망적인 상황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에는 아무것도 변화할 수 없는 것같은 절망과 크게 보이는 것은 그저 사람들, 환경과 내가 처한 현실 밖에 보이지 않는 그 답답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어떻게 세워 주시고 회복시키 주시는가?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가를 깨워 주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존재감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바로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구하고 따르는 것이 재색 명리를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따르며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나를 너무 이 세상에 쉽게 내어주지 않는 자들, 나는 하나님의 의를 따르며 하나님을 찾아 구하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게 살 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여호와를 앙망하며 여호와의 팔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신줄을 놓거나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자꾸 눈에 보이는 세상만을 앙망하며 세상의 팔에 의지하여 살아가려 하는데, 그때 정신 차리고 하늘을 바라봐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세상이 아닌 하늘을 앙망하며, 세상의 힘과 팔을 의지하며 사는 대신 하나님의 팔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자꾸 상황과 사람들과 눈앞의 현실만 것만 커지고 하나님이 점점 작아지는 우리들에게 너가 누군지를 정확하게 깨달으라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신 후 오늘 말씀은 소망과 희망,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를 취하며 살아가는 두 가지 비결을 제시하는데 첫번째는 들을지어다, 두번째는 생각할지어다…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귀 기울여 들어야 될 것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들을지어다…주의하라…귀를 기울이라….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는 강력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데 어떻게 들어야 되냐 하면 주의하고 귀를 기울여서 들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간 생명이자 능력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간 하나님의 호흡이자 계시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라는 겁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양식입니다….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 말씀을 주의하며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주목하여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생명과 능력을 취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살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 봐야 산다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는 정말 연약하고 작고 부족한 존재임을 하나님 창조를 통해 생각해보라 명하십니다. 먼지와 같고 진흙과 같은 나의 인생을 태어나게 하시고 작품으로 만드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생각하여 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통해 내가 이렇게 놀라운 작품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구나… 놀라운 하나님의 숨결로 지어진 존재가 나구나…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를 들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의 이야기들을 기억해보라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떻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셨습니까? 약속은 받았는데 100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습니다. 마치 굳어버린 것 같은 아브라함의 몸 가임기가 훨씬 지난 사라,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을 다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직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그 말씀이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생각하여 보라는 거예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은 아브라함 처한 상황과 같이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0%인 상황입니다. 인간적인 모든 가능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삶의 자리이자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에게 불가능한 상황에서 약속을 이루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해보면, 내 눈앞에 현실과 상황을 넘어서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는 역사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생각할수록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하나님이 커 보일수록 현실에 매몰되지 않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작아지고 상황과 사람들이 점점 커지면 커질수록 억울한 일만 생각하고 분한 일만 생각하다 상황에 사로잡혀 압도 당하여 살다가 무너지는 겁니다. 그런데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보면 난공 불낙과 같은 여리고성과 같은 바벨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바벨론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하늘의 연기같이 사라지고 땅에 옷같이 헤어지며 하루사리 같이 죽는 것같이 망한다는 역사가 있으리라….이것을 믿음으로 취하며 붙들게 되는 겁니다. 그걸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공의가 영원히 우리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떡인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이고, 세상 소리만 귀 기울이는 자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주의하며 귀 기울이는 자로 사는 삶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잿더미와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십시오. 나는 성도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들어야 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자꾸 상황과 사람들, 눈 앞에 현실만 크게 보일 때 나라는 존재를 깨워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나를 던져야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 말씀을 내가 붙들고 나의 존재감을 말씀 가운데 비춰보는 거야 말로 내가 깨어나는 비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 인생이란 여러분 결국 내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있는 만큼 결국 내가 내면이 단단해지고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그 묵직함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주의하며 귀를 기울이십시오.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그 하나님이 하신 일이 오늘이 시간 나에게도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며 고백하며 나아갈 때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그 생명을 취하며 그 하늘의 은혜와 능력을 풍성히 공급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 이사야 50장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는데 불완전하고 불순종하는 종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완전한 종이자 순종의 종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해 대조하고 있죠. 그래서 앞부분은 불완전한 종으로 불순종으로 충돌하고 부딪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질책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고 뒷부분은 그런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완전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에 대한 순종과 겸손에 대한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대조의 말씀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찌르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이런 불순종으로 늘 충돌하고 부딪히고 죄악 가운데 헤매는 그런 종으로 살지 말고 이런 죄에서 돌이켜야 너희가 산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모습이었는가…불완전한 종이자 불순종의 종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땠냐 하면 승승장구하며 좋은 일이 있으면 모든 이유와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 합니다. 반대로 바닥을 치는 어려움과 힘든 일이 찾아올 때면 늘 그 이유와 원인을 외부에서 특별히 하나님에게서 찾으려 했던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내 앞에 찾아오면 갑자기 하나님 이런 일이 왜 나에게 벌어집니까…라고 반문하는 것이죠. 잿더미가 된 나라의 멸망과 포로 생활의 고통 중에 외부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원인과 이유를 찾으려는 이런 마음이 그냥 본능적으로 든다는 것이죠.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였던 반응이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나라가 망하는 참담한 상황 가운데 그들이 가졌던 생각은 뭐냐면 아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듯이 우리를 버리셔서 우리가 이렇게 망한거구나….하나님에게 원망과 불평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버려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막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나름 기도하고 나름 매달렸는데 우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셨고 침목하시면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고 내팽개치신 분으로 여기며 하나님에게 모든 핑계를 대려고 하는 그런 불안전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의 죄와 불순종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난과 모든 것이 무너진 절망과 포로된 가운데 그 이유와 원인을 하나님의 탓이라고 말하며 하나님께 돌리는 겁니다. 그들의 죄악과 불순종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실제로 그들이 큰 어려움을 당하자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은 것처럼, 버린 것처럼 하나님 탓하고 앉아 있는 모습… 이게 불안정한 종 이스라엘의 모습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응답이 뭐라는 겁니까? 내가 너희를 잊은 적도 없고 내가 너희를 버린 적도 없다는 것이죠. 어떻게 내가 너희를 버리고 어떻게 내가 너희를 잊느냐…선언하시며 너희는 죄 때문에 망하고 팔렸다는 거죠. 그들이 그렇게 망하고 포로로 끌려간 것은 너희들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이 너희를 버려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백성 사이를 이혼증서를 쓰듯 이혼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혼하듯 갈라놓게 만든다는 겁니다. 지금 너희에게 닥친 모든 일들은 다 너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한 것임을 정확하게 직시하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는 것이죠.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동일한 책망과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잊지 않으시며 분명히 도와줄 마음도 있으시고 보호하려 하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원하지도 구하지도 않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불순종과 죄에 빠져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종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내가 원하는 길을 살아가면서 죄악과 불순종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닥을 치는 어려움을 당하거나 큰 일을 당하면 갑자기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내가 하나님께 뭔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린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것, 이것이 부족하고 불안정한 종 이스라엘의 모습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도우러 왔는데 사람들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할 자가 없으니 어찌 됨이냐…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직면한 어려움은 너희의 죄 때문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부르심도 도움의 손길도 거절한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와야 회복과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겁니다. 그런 불완전하고 불순종하는 종 이스라엘과 대비되는 완전한 종이자 순종의 종 메시야를 닮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스승에게 들은 말씀 그대로 잘 듣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럴 때 내 삶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중심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삶에서 순종의 삶으로 예수님의 완전하신 종의 모습 안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귀가 열리며 말씀을 내가 딱 붙들고 나아갈 때 결국 나의 중심과 마음이 바뀌게 되며 내 인생이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능력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을 우리가 나의 삶의 한 복판에서 발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잊지도 아니하시고 버리지도 아니하심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부르심에 반응하지 않고 그의 도움을 거절하며 살았던 불순종의 삶,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았던 죄의 삶을 인정하며 회개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기 원합니다. 나의 영적 현주소를 정확하게 직시하며 회개함으로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올 때 우리에게 새출발의 역사가 있으며 완전한 종이신 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우리에게 열릴 줄 믿습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불순종과 죄된 삶을 직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순종의 길로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9장 앞부분을 통하여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종의 모습과 십자가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걸 배웠습니다. 종으로 낮아지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며 십자가를 통과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이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그때에 고난의 중 메시아 예수를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 이것이 큰 주제입니다. 그런데 신약의 그리스도 관점으로 이사야의 예언을 바라본다면 바벨론에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구원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구원을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온 백성과 방언, 모든 민족과 열방을 향하여 열리는 회복과 구원인 것이죠. 종의 모습으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고난을 통과하심으로 온 민족과 열방의 구원과 회복을 이루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시는 놀라운 역사를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한 모든 자들에게 오늘 말씀에 약속으로 주신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임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하나님이 이 놀라운 회복과 구원의 계획을 모른 채, 바벨론 포로 중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혹시 우리를 잊어버리신 것이 아닌가… 라는 그런 깊은 절망과 고민을 가지고 살았음을 고백합니다. 바벨론 포로에 끌려가며 나라가 다 무너지고 잿더미가 된 그 상실감과 절망 가운데 그들의 마음에 깊이 담긴 상처는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셨다는 절망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고 쓰임 받는 종도 아니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 버리셨고 잊어버리셨다는 절망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다 잊어버리셨다는 생각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선언하십니까? 절대 너희를 잊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아이 엄마됨을 포기하는 그 엄마의 마음과 같이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잊지 아니하십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마음에 새겼다 선언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릴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을 결코 잊지 아니하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너무 사랑하시기에 손바닥에 새기면서 기억하시기에 잘못된 길로 가는 그들을 깨우시며 경고하셨습니다. 그리로 가면 심판의 길이고, 그리로 가면 죽음과 사망이야…끊임없이 책망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책망과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경시한 채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계속 살았던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결과, 그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결국 파멸과 무너짐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포로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잊어버려서 망하고 포로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속된 인도하심과 사랑의 책망을 거절하고 죄의 길로 질주한 결과하는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선명히 약속하시는 겁니다. 나는 너희를 결코 잊지 않고 너를 위해서 긍휼을 베풀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회복과 구원을 약속해 주신다는 겁니다. 장차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임을 약속해주시는 것이고, 그때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오늘 말씀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를 삼켰던 자들이 모두 떠나갈 것이라…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자녀를 내가 구원할 것이라….이처럼 너희를 기억하고 잊지 않으며 긍휼을 풀어서 너를 회복과 구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거죠. 여호와는 내 구원자요 내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 줄 알라는 겁니다. 포로로 잡혀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 메시야를 보내주심으로 이루실 이 약속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회복과 구원의 계획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회복과 구원에 대한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잊지 않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인 우리들도 잊지 아니하시고, 우리들도 똑같이 사랑하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놀라운 긍휼을 베푸시듯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긍휼을 얼마나 베푸시는지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본질적인 탄식과 절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어버리신 것이 아닌가에 대한 고민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혹시 잊지 아니셨을까…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히 믿음으로 붙들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손바닥에 새기시며 결코 나를 잊지 아니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잃어버릴지 모르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주심으로 우리를 회복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바로 나의 구원자 되시고 구속자 되신 하나님, 나의 전능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붙들게 되기 원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 시대의 모든 열방이 어떻게 회복되고 구원되는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발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구원 계획과 역사를 우리가 마음에 새기며 우리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며 힘있게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9장 말씀은 종의 노래라고 알려진 네 편의 시 중에 두 번째 입니다. 종의 노래로서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림자를 명확하게 증언하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이 종의 노래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여러 시선과 관점이 가능하겠지만 종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집중적으로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께서 직접 종으로 지으신 자, 하나님의 영광을 속에 드러낼 자라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무너진 그의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회복과 구원을 주시는 방법, 그들을 일으키시고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세우시는 방법은 바로 약속의 메시아를 보내시는 일이었습니다. 그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놀랍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메시야는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속에 드러날 자인데 그 영광이란 하나님의 속성이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장 빛나고 가장 아름다운 그 놀라운 영광을 하나님께서 장차 오실 예수 안에서 드러나게 하시고 보여주시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실 그 영광이 바로 종으로서 오시는 영광이라는 겁니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심으로 보여주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이 되심으로 보이실 영광이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보이실 영광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계속 반복되는 건 장차 오실 약속의 메시야가 종으로 오심, 종이 되심에 대한 선언입니다. 종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고 이스라엘을 일으키시며 그들을 세우신다는 겁니다.
사실 메시야가 종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이사야서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기대하고 상상한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며 기다리는 메시야는 왕으로 모실 메시야, 큰 장수로 오실 메시야로 카리스마로 압도하며 모든 사람들이 그 앞에 엎드리는 하늘의 힘으로 무장한 강력한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고 상상했습니다. 자신들을 바벨론의 포로에서, 나중에는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왕, 모든 전쟁에서 이길 큰 장수로서의 메시야를 기대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과 의를 드러낼 메시야는 종으로 오시는 메시야라고 분명히 선언하시는 겁니다. 종으로 오셔서 종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고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이런 메시아의 모습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도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영광을 하나님께 여전히 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왕과 같은 메시야만, 큰 장수와 같은 메시야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신 종으로서 오시는 영광,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은 구하지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습이 약속으로 오실 메시야가 이루시고 드러내실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는 겁니다. 종이 되심으로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광이야 말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진짜 영광이고, 십자가를 통과하시며 드러내시는 영광이야 말로, 그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높이 들리시는 하늘의 승리를 그대로 보여주시는 진짜 영광이라는 겁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는 말씀대로 오시고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시기 위해 종의 모습으로 오심으로, 십자가를 통과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길 원치 않으시며 스스로 낮아지며 가장 낮은 이 땅에 아기와 같은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가장 약한 어린 아이로 오셔서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대와 상상을 완전히 뒤집은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종의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구원하시며 승리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시는 방법이 약하고 연약한 종의 모습으로, 힘이 없어 보이는 십자가를 통과하시며 스스로 죽으심으로 이루시는 영광이었습니다. 종으로 오신 예수님,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은 인기나 화려함도 없고 주목할 것도 없어 보이는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말씀을 이루고 성취하신 겁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이 가져 오시는 영광을 거절하고 충돌하고 부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영광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하늘의 영광을 부인하며, 종의 영광과 십자가의 영광을 외면하며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화려하고 대단한 영광, 힘과 권력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찍어 누르는 영광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착각하며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성도라면서도 기대하고 상상하는 영광, 여전히 추구하고 원하는 영광은 오직 눈에 보이는 대단함과 화려함과 세상이 말하는 카리스마로 무장한 영광만을 구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 아래 크기 싸움을 벌이고,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싸움만을 벌이고, 큰 힘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이 영광이라 착각하고 크고 화려한 성공 뒤에만 영광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겁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은 부활은 없고요, 종으로 내려가고 낮아지지 않고는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하늘의 영광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종으로 내려오신 영광,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이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방법임을 진짜 진리로 붙들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예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들이 되 버리고 마는 겁니다. 약속으로 오신 메시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시며 종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을 놀랍게 드러내신 분입니다. 그 메시아가 가져오실 영광인 십자가의 영광과 종의 영광을 정말 우리 마음에 믿음으로 취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분명 믿고 살아간다면 내가 기대하고 상상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내려 놓고, 말씀이 계시하고 약속하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정말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준비하는 자가 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통해 계시된 메시야를 기대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가져오실 하나님의 영광은 종의 영광이고 십자가의 영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텐데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영광은 십자가를 통과하여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이고 종이 되셔서 낮아짐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임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통과한 영광, 종으로서 낮아지는 영광을 통해 하나님이 높여 주시고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나는 하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시는 방법으로 종이 되셔서 낮아짐으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영광임을 잊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붙들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8장은 앞부분에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건져 주셔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시는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마치 그들이 이쁨 받을 만하고 그들이 뭔가 잘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포로됨에서 풀어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손에서 구해주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오직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근거해서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전적인 은혜일 뿐임을 강조하는 게 48장의 주제이자,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대한 분명한 고백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절대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지 끝까지 잊어버리지 아니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48장의 약속을 나의 분명한 믿음의 선포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왜 그들을 잊지 않고 포기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그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하나님의 언약으로의 초대,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내가 하나님과 맺은 약속 가운데 있는 존재임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죠. 야곱아…이스라엘아…부르시는 표현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와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표현입니다. 언약에 근거한 구원 회복을 너에게 부어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 안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인생의 처음과 마지막 되시는 겁니다. 그 언약에 기초하여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내 인생이 시작된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 인생의 끝은 하나님이 본향으로 부르심으로, 내 숨을 거두어 가심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모르게 되면 우리는 내 인생의 시작이 나인 줄 착각하고 내 인생의 끝이 나인 줄로 착각하며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살아가려고 하다가 무너지고 망하는 겁니다. 이처럼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믿고, 처음과 마지막 되시는 하나님과의 언약 가운데 내가 놓인 자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눈앞에 처한 상황, 문제, 어려움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과 내가 맺은 언약이 먼저라는 것을 잊지 않고 분명히 붙들며 살아가는 겁니다. 또한 부르심에 대한 들음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가르침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는 것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듣는 것, 그게 신앙 생활입니다. 그 하나님의 가르치심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목할 것은 그 모든 가르침은 “내게 유익하도록” 가르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이유는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삶이 풍성해지고, 하늘의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원리와 다스리는 원리가 있는데 말씀의 가르치심을 듣고 주의하여 마음에 새길 때, 말씀으로 조율되어 나아가고 우리의 삶에 복이 있고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부어지는 인생의 유익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시는 말씀을 내가 주의하여 듣게 되면 나에게 임하는 게 하늘의 평강입니다. 평강은 바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하늘의 축복이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나와 진짜 함께하시기에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는 겁니다. 내가 하루를 살아도 주님의 풍성한 은혜 가운데 하늘의 복이 임하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유익하도록 가르치시는 말씀에 귀기울이며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다스리시는 질서에 조율되고 순종하며 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다스리시는 질서에 조율되고 순종하지 않고 부딪히고 충돌하면 살아가긴 살아가는데 하늘의 풍성한 복이 임하지 않고, 놀라운 하늘의 역사가 내 안에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메마르고 풍성하지 않으며 하늘의 복을 누리지 못하는 본질적인 문제는 뭐냐면 내가 뭐를 하는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실패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강조하시는 겁니다.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하지 않고 듣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악인은 단순히 악한 행동을 한 자만이 아니라 하나님 밖에 있는 자, 하나님 말씀과 무관한 자이자 듣지 않는 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망각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 주시는 평강이 내 안에 없을 때는 내가 듣지도 보지도 못하며, 기쁨과 평안이 사라지고, 내 입술에 찬양이 사라지고, 메말라지고 인생의 샘이 막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평강이 없는 인생입니다. 언약으로 여전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나의 유익을 위해 가르치시는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럴 때 내 눈이 열리고 내 귀가 열리며 내가 사슴같이 기뻐 뛰놀며 내 입술이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내 삶에 생수가 터지며 광야에 강물이 흐르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가르치시는 말씀을 유의하여 내 마음에 주님의 약속을 새길 때 하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 인생에 여전히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영원히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는 그 하나님을 붙들고 하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는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은 상황이나 환경이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시는 평안이 아니라 나와 함께하심으로 주시는 절대 평강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불안해 보여도 아무리 이 세상에 문제가 많아 보여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기에,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기에 하늘의 평강을 빼앗기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나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절대 잊지 아니하시며 여전히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7장까지 말씀은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망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예언해 주셨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께 잠시 쓰임 받는 도구임을 잊어버리고 그들이 교만하여 스스로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착각하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멸망시키시는 심판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는데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입니다. 그 믿을 수 없는 약속을 이루시는 방법은 이방인이자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를 통해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을 떠나 배반하고 불순종해서 망하고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잊지 아니하시고 그들에게 다시 한번 포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수 있는 기회,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구원과 회복의 은혜 앞에 사람들은 계속해 원인과 결과를 따지려 하고 까닭과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분히 회개해서 이제 돌아올 만해서, 혹은 이제 하나님께 이쁨 받을 만해서 하나님께서 구원의 기회를 주신다고 스스로에게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 본인들이 이제는 잘해서 하나님의 기준 커트라인에 넘어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구원과 회복을 주시는 것이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오늘 48장 말씀은 그런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시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구원과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이유는 너희가 잘하거나 무언가 이쁨 받을 만해서 주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에게 이유나 원인이 있는 거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십니다. 그래서 48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질책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너희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회복에는 너희에게는 까닭과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인정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백성이라 그러면서도,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면서도 그들에게 뭐가 없다는 겁니까? 진실이 없고 공의가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기억한다 그러면서 정의롭지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공의롭지도 않게 살아간다는 겁니다. 이런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였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말한대로 그 믿음이 따라가지 못하고 행동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 모습들, 사실 그것이 우리들의 영적 현주소라는 겁니다.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그들은 배교하고 불순종하고 심지어 우상 숭배하는 자들이라고 철저하게 그들의 죄를 드러내십니다. 말도 안 되는 죄가 가득하고,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고 교만한 모습, 이게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바벨론 사람들이나 이방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하나님 말씀에 귀를 안 기울이고 죄악에 빠져 살아가며, 정의와 와 진실함이 없는 삶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가능성 없고 구제불능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구원과 회복의 길을 주시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떠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통해서 구원과 회복의 은혜를 전적으로, 일방적으로 이유와 까닭없이 부어 주시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속성으로부터 나오는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하나님이 듣게 하시고 하나님이 홀연히 즉 인간의 생각과 방법을 완전히 뛰어넘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행하셔서 그 구원과 회복의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왜 이렇게 됐는지, 어떻게 이렇게 이루어졌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역사를 너희가 보게 될 거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에 하나님의 어떠하심 외에는 이유와 원인과 자격과 조건이 하나도 없음을 잊지 말라… 그게 오늘 말씀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듣게 하시며 말씀을 이루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바벨론의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역사가 주신 하나님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불순종과 죄악으로 모든 것이 망하고 무너진 잿더미, 대부분 사람들이 종으로 끌려간 바밸론 포로 생활, 그렇게 신음하는 하나님 백성들을 여전히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바벨론에서 포로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니다. 우리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내 이름을 위하여 내 영광을 위하여 다 하나님의 속성과 연결된 거죠.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나를 위하여 이 구원과 회복의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한 거예요. 전적인 하나님의 이름 전적인 하나님의 영광 전적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래서 우리의 어떠함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뭔가를 잘해서 남들보다 탁월한 선행을 해서 우리의 정의와 공의가 대단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저와 여러분들을 회복하시는 것도 아니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하나님의 영광 위해, 하나님 이름을 위해, 하나님 그분 자신을 위해 하나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한번 회복과 구원의 길로 열어 주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과 회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내가 구원 받음에 있어서 내 스스로에게 원인과 이유나 자격과 조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시고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과 은혜가 나를 구원받게 하시고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셨다는 것을 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착각에 빠지지 말고 깨어나 정신 차리라는 겁니다. 우리가 좀 잘해서, 우리가 좀 우월한 DNA가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께 이쁨 받을 만해서…. 이렇게 나의 어떠 하심에 근거하여 구원과 회복의 주신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에 묶여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리 내가 못나고 아무리 흔들리고 자빠지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잊지 아니하시며 사랑하시고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손길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철저히 믿는 겁니다. 은혜를 알면 알수록, 이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에는 감사가 흘러나오지만, 이 은혜가 사라지는 만큼 우리는 감사를 잃어버리고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아니하시며 끝까지 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를 구원하시는가…..나에게서 이유와 원인을 찾으려는 시도, 나에게서 까닭을 찾으려는 모든 것들을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어떠 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음을 인정하고 그분에 엎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 될 믿음의 반응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그분의 일방적인 사랑, 그분의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전적인의 은혜만이 이 시간 나를 회복시켜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약속에 묶여 살아가는 존재가 나라는 것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47장 말씀은 46장과 동일하게 앞으로 일어나게 될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잿더미 위에 있는 지금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는 전혀 믿을 수도 없고 가능성이 거의 0%에 가까운 완벽한 대국이자 제국인 바벨론의 멸망 소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무너진다는 약속의 성취로만 이루어지는 하늘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나만이 유일한 여호와이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믿음만이 하나님이 하시는 이 놀라운 일을 믿음을 취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바벨론이 언젠가 망하게 되는 것을 믿음을 취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말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제 말씀이 바벨론이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무너진다는 이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믿으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권면이었다면 오늘 말씀은 바벨론 자체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바벨론은 그 당시에 완전한 승리를 상징했고 대영제국과 같이 해가 절대 짓지 않는 나라처럼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잠시 사용하시는 도구로 이룬 대국인데, 세상에서 제일 부강하고 대국이 되니까, 세상의 모든 중심이라고 착각하는 바벨론이 언젠가 하나님의 손에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치시고 무너뜨리는 그 날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고 다른 신과 비교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바벨론을 향하여 선포하시는 말씀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바벨론 멸망을 향한 질문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하나님이 바벨론을 치시고 무너뜨리는 날에 하루 아침에 처참하고도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 1-5절은 어떻게 바벨론이 무너지는가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을 무남 독녀와 같이 소중하게 여기는 처녀딸로 비유하고 있는데, 그렇게 소중한 외동딸 같은 바벨론이 보좌에서 내려와 곱고 아름다운 옷에 티끌을 뒤집어 쓰고 앉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맷돌을 간다고 증언하는데, 그 당시 맷돌은 가장 천한 노예가 했던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치마가 드러나고 속살이 드러나고 부끄러운 것이 보이고 수치가 하루 아침에 망하고 멸망하는 바벨론의 모습을 엄중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흑암으로 돌아가라 선언하시며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그동안은 이 온 세상에 마치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았는데, 다시는 보좌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다시는 높은 자리 올라가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게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바벨론 제국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대국 바벨론이 하나님이 치시니까 하루 아침에 팍삭 주저 앉아 멸망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은 바벨론이 왜 무너지게 되는가? 왜 이렇게 바벨론이라는 그 큰 제국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되냐는 것이죠. 바벨론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의 이름을 스스로 이렇게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영영이 여주인이 되리라….내 마음에 이르기는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이게 다 바벨론이 그 시대에 가지고 있었던 착각들입니다. 바벨론에게 하나님께서는 온 나라들을 평정할 정도로 큰 힘과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잠시 사용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힘과 능력을 잠시 받은 일종의 도구에 불가했던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 백성들을 책망하시고 꾸짖기 위한 도구였던 바벨론이 스스로 교만해 져서 스스로 중심이 되고 스스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착각에 까진 겁니다. 그래서 내가 구원자다 내가 하나님이라 선언하고 교만에 쩔어 살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했는가….마치 그들이 능력과 힘이 있어서 남유다를 제압한 줄 착각하며,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함부로 대하며 멍에를 무겁게 지우며 학대한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여주인이 될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바벨론이란 제국은 절대 망하지 않는 제국, 언제나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될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바벨론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일이 앞으로 일어나게 될 거라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교만에 빠져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착각하는 바벨론….그 바벨론 제국을 하나님께서는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시는 겁니다. 한 날에 하루 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자녀와 남편을 하루 아침에 잃는 거 같은 그런 비참한 운명에 하루 아침에 처하게 된 거라는 겁니다. 이렇게 큰 제국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망하는 것은 어쩌다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바벨론이 스스로 교만을 빠져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모든 왕국들의 여주인이 되려 하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착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절대 망하지 않고 영원한 제국이 될 거라고 착각한 바벨론은 하루 아침에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착각하는 바벨론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고 진정한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시는 겁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시 사용하셔서 놀라운 능력와 힘을 부어주 시며 도구로 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 능력을 넘어 일이 너무 잘되고 잘 풀릴 때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내 능력 넘어 승승장구하고 위로 올라갈 때 하나님이 날 도와주셔서 그러는 것임을 잊지 않고, 아 하나님이 뭔가 나에게 맡기시는가보다…생각하고 엎드려 겸손하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승리하고 사는 겁니다. 그러지 않고 승승장구하고 잘되고 위로 올라갈 때에 마치 내가 다 잘해서 이루어진 것처럼 착각하고 일이 다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착각하며 하나님을 붙들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교만으로 결국 거기서부터 결국 내 욕심과 야망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고 한 방에 확 무너지는 겁니다. 바벨론의 멸망을 통해 나를 반성하고 비춰보는 반면 교사로 삼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잠시 쓰신 도구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내가 잘해서 된 줄 알고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며 착각했기에 바벨론은 하루 아침에 완전히 망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착각하며 내가 모든 것을 붙들고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가 모든 것을 이루는 자라고 생각할 때 그 바벨론의 속성에 빠져서 결국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푸라기 같이 다 불에 타버리고 순식간에 다 타버리는 하루 아침에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바벨론의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벨론의 멸망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착각하지 말고 교만하지 않으며 내가 주인 되려 하지 않는 처절한 싸움을 벌이기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만 온전히 영광 돌리며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임을 잊지 않는 도구됨을 잊지 않고 엎드리는 것만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들어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을 망각한 채, 내가 잘해서 된 줄 알고, 나 때문에 된 줄 착각하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망합니다. 우리의 교만을 내려놓고 늘 겸손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에게 모든 이유와 영광을 돌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잿더미 위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그 처참한 현장 가운데 하나님을 통하여 먼 훗날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해주고 계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처한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모든 것이 무너진 나라, 그들을 무너뜨린 바벨론은 세계 최대 강국이 되어 그 어떤 나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나라가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겁니까? 세계 최대 강국 바벨론이 하나님의 손에 무너지게 된다는 약속의 예언을 주시는 거죠. 사실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선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거의 가능성이 0%에 가까운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이 들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지금에 보이는 현실만을 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 보이자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바라보라는 것이죠. 현실을 통해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언약을 붙드는 신앙이라는 겁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함을 내가 어떠함을 붙드는 대신, 하나님의 어떠하심 붙들고 믿음으로 취하며 기대할 수 있는 구원과 소망과 다시 일으켜 주시는 메시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믿을 수 없는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통해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정확하게 알고 붙들라는 겁니다. 너희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진짜 알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실체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통해 일어나게 될 일을 보게 될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죠. 말씀을 통해 주신 이전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놀라운 사건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실 약속을 믿음으로 취하라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때의 방법으로 반드시 건지고 구하신다는 그 분명한 믿음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으로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을 초월하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며 이 바벨론이 멸망할 것을 분명히 붙들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보호 되심을 믿고 고백하며 다시 일어나라….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이자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품고 구하며 심지어 업고 다니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면 태어나면서부터 노년이 되어 백발이 될 때까지 너희를 안고 다니고 품고 다니시는 분이 바로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그냥 뜬구름 잡듯이 받아들일 수 있는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사랑하심을 이처럼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알려준 말씀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피부에 와닿게 표현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백발이 되기까지 너희를 업고 키우고 품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그 하나님이 나의 생사 화복을 주관하시고, 나를 품고 안으시며 구원해 주실 거라는 것을 분명히 믿을 때,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되어 절망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실로는 절대 바벨론이 무너질 수도 없고 무너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이 현실 가운데 하나님이 그의 일을 이루어짐을 믿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이 역사가 이루어짐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바벨론이 그렇게 무너지는 과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가를 증언하는데 바로 교만과 우상숭배입니다. 교만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바벨론이 그렇게 무너지게 되는 것임을 명확하게 지적하시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고…이게 모두 우상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람들을 위해 신을 만들고 그 만들어진 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는데, 그런 우상들은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함을 선언하시며 우상의 한계와 허상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우상의 허상과 한계가 분명함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대체물과 유사품인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고 거기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 안에 있는 본연의 문제인 불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책임지고 살아야 된다는 불안과 걱정이 결국 우상을 만들어내고 우상을 섬기기도 하고 의존하게 된다는 겁니다. 실제로 의지하는 우상은 아무런 힘도 능력도 실체도 없는데 그 우상이 우리를 구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기대며 의지하며 오늘도 거기에 엎드리는 것이 바벨론이 멸망하게 된 이유라는 겁니다. 바벨론이란 나라 자체가 겉으로 봐서 거대한 대국이고 어떤 나라도 이길 수 없는 대단한 나라 같지만 허망한 우상과 같은 나라가 바로 바벨론의 실체임을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바벨론은 한 때 크고 대단했다 우상숭배로 그렇게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 허상과 같이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뻥튀기 같은 나라가 바로 바벨론, 실체가 없고 능력도 없고 결국은 한 나라가 일어났다 한 나라가 끝나는 게 하나님의 손길에 한 번에 무너지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그들이 섬기는 우상들과 함께 무너지는 바벨론을 보면서 눈에 보이는 우상들에게 인생을 걸고 기대며 거기에 무언가를 붙들려 그러는데 하나님은 너희를 품고 구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며 하나님과 비교할 존재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확히 믿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세워지는 신앙이 되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반드시 시행되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나를 안아 주시고 나를 품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 45장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이루시는데, 그 모든 일들이 내 머리와 생각에 다 담길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와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가 해야 될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섯번이나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다섯번의 반복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누구시며 내가 하나님만 믿고 붙드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심을 믿고 붙드는 신앙입니다. 저 멀리 하늘에 계신 분인데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게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즉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게 계시지만 분명히 내 안에 함께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고백하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내 시선 밖에서 내 생각 밖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며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며 그 하나님을 분명히 붙들고 나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만 믿는 신앙입니다. 보이지 않으시지만 나와 함께하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 거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의 대용품과 유사품을 만들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치하며 살게 되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수욕을 당하며 된다고 성경은 엄중히 경고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과 대체하려는 인생의 끝이 이렇게 비참해진다는 겁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견고하게 지으셨음을 믿는 신앙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이란 뭐냐면 하나님만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혼동하게 창조하지 않고 견고하게 지으셨다는 분명한 믿음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혼동과 무질서에서 질서를 주신 창조이며, 사람이 살만 하게 견고하게 지으신 창조라는 겁니다. 살만하게, 견고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믿는 고백은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혼동과 무질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견고하게 지으시고 질서 가운데 지으셨음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세상에 살만하게 만드셨고 견고하게 나를 만드셨음을 믿으며 무질서가 아닌 질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분명히 믿는 겁니다. 세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나에게 듣게 하시는 분이고 알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죠. 내가 무엇을 듣고 무엇을 아느냐에 따라 내 인생의 길과 방향성이 결정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는 분이 계시며 그것을 알게 하는 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이 신앙 생활의 기초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지혜를 구하는 것도, 이 세상에 갈길을 아는 것도 나를 듣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고 믿는 신앙입니다. 그분의 듣게 하심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며 그것을 통하여 보지도 못하고 만질 수도 없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뜻 가운데 거하는 것이 은혜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네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은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고백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공의를 베푸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도 오는 구원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오는 구원을 믿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만 오는 공의를 믿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공의를 행하셔서 공의로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자체가 공의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공의와 구원을 베푸시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섯 번째,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은 하나님께로 돌이켜 구원을 받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받음을 분명히 믿는 신앙에 기초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주시는 구원은 하나님에게 돌이켜 구원을 받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라는 겁니다. 돌이킨다는 말은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란 내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삶을 회개하며 나의 삶을 방향을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겁니다. 회개함으로 주님께 돌이켜서 구원을 받는 겁니다. 동시에 나의 공로가 아닌 오직 예수 공로로, 내 이름이 아닌 예수 이름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가 받는 선물임을 알게 되는 겁니다. 공의도 구원도 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이 짧은 말씀 가운데 다섯 번이나 반복되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선언을 통해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자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계속 붙들고 찾으려고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믿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며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내 안에 있음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공의를 행하시는 분, 구원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이 없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의 손을 놓지 아니하시며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나를 살리시며 나를 붙드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듣고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회개함으로 돌이키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음을 믿으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들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시는 분,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분, 여호와 하나님만을 분명히 믿고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사야서 45장 전체 주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주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선언하시며 그 하나님의 주권을 순종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합니다. 어제 1-7절 말씀은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시아 왕인 바사왕 고레스에게 기름 부으심으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대해서 증언했고 오늘 말씀인 8-13절은 토기장이와 토기의 비유로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충돌하고 부딪는 것을 얼마나 하나님이 심각하게 생각하는가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멸망 당했습니다. 그들의 멸망은 겉으로 봐서는 군사력이 약했고 강대국 사이에 정치적으로 줄을 제대로 서지 못한 것을 이유와 원인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그들이 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게 죄짓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망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고 회복하시는 방법도 사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일하심을 통해 회복하시고 세우시는 방법도 우리가 상상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 전혀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않는 방법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옳음이 있고 정의가 있습니다.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의와 선과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의와 불의, 선과 악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의를 행하셔서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게 선이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게 의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내가 생각하고 정의하는 선과 공의를 바라보며 그건 공의가 아니고 그것은 선이 아니라고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는 겁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늘 상처받았다 그러는 거죠. 왜 하나님은 내 기준으로 내가 생각하는 공의와 선과 옳음을 행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에….그런 질문에 대한 본질적인 불순종이 뭐냐면 그 선과 악, 의와 불의를 누가 판단하겠다는 겁니까? 내가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옳고 그름을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대해 거부반응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내 경험과 생각으로 만들어진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옳음, 선, 공의에 딱 갇혀 있는 겁니다. 그걸 벗어나거나 넘어서면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도 내 경험과 생각 안에 들어오셔야 하고, 하나님의 선과 정의, 옳음 또한 내 경험과 생각 안에서만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하고 충돌하고 부딪히는 겁니다. 우리 믿음이 흔들리고 난파하고 신앙에서 계속 이탈하는 자들의 특징은 늘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에 대해서 늘 충돌하고 부딪히는 자들입니다. 내 경험과 생각 안에 들어오는 것만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대해서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는 겁니까?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같이 미물이라는 거예요. 정말 미천하고 작은 존재라는 것이죠. 그런 우리가 토기장이 조물주 하나님에게 충돌하고 부딪히고 다투는 자가 되면 뭐라고요? 9절 말씀을 보면 화 있을 진저….저주를 부르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조물주이자 창조주인 하나님께 다투고 부딪히고 충돌하는 질그릇 조각은 망하는 길로 질주하는 인생이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왜 내가 생각하고 내가 정의하는 옳음을 안 행하시고 공의를 행하지 않으며 왜 하나님 내 기준에 맞게 일하지 않으세요?...라고 말하며 충돌하고 부딪히면 화를 부르는 인생, 저주를 부르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런 인생은 자기를 낳아준 부모 엄마 아빠에게 뭐라 그러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까? 나를 왜 낳았냐는 겁니다. 왜 나를 태어나게 해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이렇게 부모에게 충돌하는 자들이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자, 저주를 부르는 인생인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거기서 조물주인 토기장이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고 내 경험과 생각에 갇혀 내 나름대로 정의한 공의를 가지고 하나님과 화내고 싸우면 화를 부르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맨날 나만 쳐다보고 있기에 내가 힘이 없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내가 힘이 있으면 되는 줄 알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다 그런 비슷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힘이 있어도 안 되는 일이 너무 많고요, 내가 힘이 없어도 되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일이 되고 안되고의 결정적 요소가 아님을 경험할 때가 너무 많은 겁니다. 내 힘과 능력의 유무가 일이 되게 하는 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 그 주권적인 역사가 일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건 내 기준과 생각으로 정의된 옮음, 선과 공의에 대한 정의를 내려 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언제나 옳다는 것을 믿으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언제나 선이고 공의임을 믿으며 하나님의 권위 아래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내가 판단하고 내 기준으로 옳음과 선과 공의를 행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겁니다. 내 머리와 내 생각과 내 기준과 내가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날지 담기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인정하며 고백으로 엎드리는 겁니다. 미물인 나의 머리에 이해가 안 되고 동의가 안 돼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며 내 머리에 담기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공의, 선, 옳음이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엎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정의에 담기지 않을 지라도, 심지어 충돌할 지라도, 하나님의 손안에 모든 공의와 선하심과 옳음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과 옳으심이 있다는 것을 내가 믿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믿음이란 내가 중심이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판단자가 되어 내가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선과 악을, 공의와 불의를 판단하는 자가 되지 않는 거예요. 그 판단자는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내가 엎드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게 믿음입니다. 조물주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믿음이 시작되는 거예요. 내 경험과 생각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설명되지 않고 내 이해를 넘어서는 일들을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는 무엇을 고백하게 됩니까? 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내가 경험과 생각으로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기에 옳고 하나님이 하시기에 선이고 공의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함 믿음이 있을 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오늘도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우리 머리에는 담기지 않는 일들인데, 내 시선 밖에서도 내 생각 밖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피조물로서 우리는 질그릇 조각 중 하나일 뿐, 조물주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가 나아가는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경험과 생각에 담기지 않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날 때에 하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지 말고, 하나님의 주권에 순종함에 엎드리며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에 조율되어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2월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