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솔로몬 왕이 성전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펴고 기도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특별히 너무나 중요한 영적 인사이트와 복음의 정신을 담고 있는데 솔로몬이 바로 이웃과 이방인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뿐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들이 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그 기도를 들어 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결국 이방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며 확산될 것을 기도하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솔로몬은 이 성전에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가를 기도하며 이스라엘 백성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도 복된 성전이 될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얼마나 특별한가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와서 주의 큰 이름을 붙들고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그 계신 곳에서 부르짖는 대로 응답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곳이 된 겁니다.
신약의 개념에서 이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솔로몬을 통하여 신약에서 증언될 복음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닐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 멀리서 부터 와서 예수님을 향하여 두 손 들고 기도할 때 참 성전 되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막지 않고 그들을 용납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해 주시며 기도 응답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이 성전이 복의 통로로 열려 있도록,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하지 않은 이방인들에 대하여도 참 성전인 예수님을 향하여 나와 믿고 영접하면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던 유대인이던,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향하여 마음을 쏟고 기도하며 주님을 영접할 때 주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며 영적인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해 주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차별이 없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오는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게 성전을 짓게 하실 때 하나님이 심겨 놓으신 성전의 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기도가 역대기를 듣고 있는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상황속에서 더 간절히 울림과 매달림으로 들리고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즉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고 범죄해서 쫓겨나 사로잡혀 가는 포로들이 되었으며, 성전이 무너지게 된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지금 빗대며 하는 기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포로기 때에 자신들의 삶에 그대로 반추하는 거죠. 그들이 범죄해서 성전이 무너지고 하나님 앞에 모두 망하고 적국에 끌려가서 지금 모든 것을 잃은 이 시간, 그 먼 거리에서도 무너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도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를 돌아봐 달라는 간절한 매달림인 것입니다. 지금 포로로 잡혀와 있는 백성들이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 무너진 성전 쪽을 향하여 기도 하고 있을지라도 그 성전을 마음에 품고 기도할 때, 그 기도도 동일하게 들어달라는 간절한 부르짖음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기도는 지금 긴 코로나 광야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인터넷으로 온라인 예배 드리는 성도들이 드리는 동일한 기도이자 부르짖음입니다. 여러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계신 분들이라면 이 시간 이 솔로몬 기도의 정신을 붙들고 내가 성전을 향하여 주님께 부르짖으며 내가 성전을 마음에 품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동일하게 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이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시간 내가 영적으로 깨어 각성하며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나태해지지 않도록 늘 성전을 향하여 마음에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솔로몬이 간절히 기도했던 이 성전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포로기의 그 절박한 상황에서 무너진 성전을 향해 이 본질을 붙들고 다시 한번 성전을 재건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성전에 집착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이란 선민의식에 집착하게 되어 참 성전으로 오신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해야 지 못하고 예수님과 거절하고 충돌하고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도 참 성전의 정신을 붙들지 아니하면 동일한 실수와 변질을 경험할 수 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성전을 짓게 하시며 성전의 본질과 정신을 붙들기 원하시며 이 솔로몬의 기도를 하게 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성전은 우리 만을 위한 성전이 아니고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의 성전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 한국 사람들을 위한 성전이 아닙니다. 온 백성에게 열려 있으며 온 백성을 품고, 열방을 향해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기를 기도하고 부르짖는 하나님의 성전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복음은 차별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에게 동일하게 부어집니다. 솔로몬의 이 기도와 같이 성전의 정신을 품고, 이웃과 이방인을 위한 기도를 마음에 품고, 땅 끝을 품고 기도하는 이 중보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되기 원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아직 나오지 않는 불신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는 교회, 수많은 이방인들 향하여 늘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우리의 교회가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온라인 예배 가운데에, 새벽 기도를 통해 여러분들의 예배 드리는 현장에 임할 줄 믿습니다. 이 정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참 성전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신앙 생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는 부분입니다. 성전이 완성되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가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이 그곳에 임하며 백성들을 축복한 후 계속해서 솔로몬 왕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의 기도가 무릎을 꿇고 손을 펴는 기도였다는 것을 주목하며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손을 펴고 기도한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방향성과 지향점,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납니다. 죽을 때는 주먹을 쫙 피고 죽게 되죠. 내 자아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꼭 쥐고 있는 이 손을 펴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것을 내 손에 담기를 원하는 것, 그게 손을 펴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고 붙드는 것을 다 내려놓은 채 주님이 주시는 것을 붙들겠다고 간구 하는 게 손을 펴고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죠. 또한 솔로몬은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무릎을 끓는다는 것은 엎드림…나를 철저하게 낮춘다는 기도입니다. 내가 완전히 없어지고 낮아져 땅에 바짝 붙는 것 그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겁니다.
무릎 꿇고 두 손을 펴서 기도하는 솔로몬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로 기도를 해야 되는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왕이었습니다 그보다 눈앞에 높은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왕의 입장에서 백성들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 당시 왕은 절대 복종에 대해 명령을 가진 자였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오히려 솔로몬 앞에 무릎을 꿇고 다 복종하는 그 위치에서도 솔로몬은 하나님을 향하여 순을 들고 손을 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습니다. 솔로몬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식했기 때문에 백성들 앞에 하늘을 우러러 무릎 꿇고 손을 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 맡기며 쥐고 있는 것을 놓으며 주님을 향하여 은혜를 구하는 그 겸손한 마음, 손을 펴고 무릎을 꿇는 그 태도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올려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간구 하고 간절히 말하기 전에 우리가 주님 앞에 바른 태도와 마음 자세로 주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손을 펴고 두 가지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확실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성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그렇게 간절한 은혜 가운데 사모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성전이 이루어진 것은 그냥 겉으로 성전에 건물의 세워진 역사적인 사건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증거라는 것이죠. 말씀이 이루어지는 현장, 말씀이 확실해 지는 현장이 바로 이 성전이었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는 첫번째는 나의 기도 제목과 나의 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통해 말씀대로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라는 것이죠. 결국 우리가 간구하는 첫번째는 “말씀대로 이루어 주시옵소서” 라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지속적으로 받아야 되며 내 마음의 심기운 말씀이 있어야 되며 내가 붙드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붙들고 마음에 심은 말씀이 있어야 그게 나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냥 나의 상황과 환경 만을 붙들고 부르짖는 기도를 넘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때 훨씬 더 강력한 기도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기도는 주술이 아니고 그냥 나의 소원 성취를 위한 뚫어뻥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에서나 하는 그냥 내 소원만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시는 분으로서 그의 말씀을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 주심을, 그 말씀이 나의 삶을 통해 확정될 수 있도록 말씀을 붙들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죠 두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그 성전에 눈과 마음을 함께 두는 성전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건축한 이 성전이 겉으로 대단해 보이고 화려해 보여도 사실 하나님이 머무시기에는 너무나 미천한 곳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땅에도 하늘에도 거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겠는데 심지어 이 성전에 하나님이 머문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되고 누추한 일입니까? 고백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 성전에 머무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두리라 약속하셨다 때문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머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기 두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둔 곳에 하나님의 마음이 머물고 눈이 머문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가 간구하는 기도를 들으시는가… 솔로몬의 기도에 따르면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고 주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그 곳에서 주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이름이 머물며 눈이 머무는 곳이 되는 것을 분명히 믿고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합니다. 무릎꿇고 두손 들고 기도할 때, 주신 말씀, 붙들고 있는 말씀이 있습니까? 마음에 받아 매달리는 말씀이 있습니까? 불들고 있는 말씀, 매달리고 있는 그 말씀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주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성전이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증거가 된거 같이 나의 삶의 현장에 주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게 도와 주옵소서. 그때 더 강력한 기도를 할 수 있더라는 겁니다.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나아가는 것 이게 바로 기도의 현장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말씀을 이루며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 지는 현장에 대한 고백이자 하나님의 눈과 이름이 머무는 곳에 대한 분명한 체험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담으십시오. 그리고 그 붙든 말씀 마음에 담긴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며 말씀대로 구하십시오. 나의 기도 제목을 그냥 주님 앞에 급한 마음에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움켜지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손을 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에 더불어 이루어지는 이 놀라운 영적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전을 다 짓고 나서 솔로몬이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성전을 지은 목적인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부터 메어 가지고 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그 성전 앞에서 백성들을 축복하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백성들을 축복하기 전에 솔로몬은 먼저 완성된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고백하며 선포합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성전을 지어도 그 껍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거하시지 않는다면 사람들만 들락날락 하는 건축물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은 그냥 하나님이 잠깐 왔다 들리시는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그 곳에 집과 같이 머물러 계신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 가운데, 성전 가운데 임재 하신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대한 열망과 지향점을 가지고 눈과 마음을 들 때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그 곳에 머물러 함께 하시기를 의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고 공동체의 삶도 마찬가지고 우리 가정 생활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계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로 우리 가정에 함께 하시고 우리 교회 공동체의 함께 하시며 내 마음에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천국 맛보기를 경험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로서 내 마음을 정하셨고 우리의 가정을 정하셨고, 우리 교회를 정하셨을 때 그 곳에 바로 놀라운 은혜가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마누엘의 하나님, 그 고백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를 정말 원하고 내 마음 속에 머물기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처소가 될 때 성전이 성전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셔서 계실 처소를 보여 주시는 그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면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품고 함께 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머무는 곳이 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 우리가 성전에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할 때, 그 곳에 여호와의 이름이 머물러 계시기에 우리는 늘 여호와의 이름을 바라보며 그 이름을 붙들고 주님의 임재를 누리며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여호와의 이름은 말로 할 수 없는 능력이자, 권위 그 자체입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을 성전에 두시며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삼으셨기에, 성전이 성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 늘 의도적으로 해야 되는 게 뭐냐면,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며 우리와 함께 하시고 처소로 우리 공동체를 삼으심을 감사하는 것, 그게 바로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성전, 영원히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서의 하나님의 성전을 선언 후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백성들과 함께 지금 축복으로 풀고 있는 겁니다. 성전 건축의 그 감동, 그곳에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신 처소가 된 그 감격과 은혜를 온 백성과 함께 나누는 솔로몬의 놀라운 지도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솔로몬은 그의 백성들에게 돌려 축복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시기 원하시는데 그 축복이란 하나님이 누군가를 분명히 알며, 하나님이 영원히 거하실 처소 중심,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말씀 중심으로 살아갈 때 모든 백성들이 이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이죠. 성도로서 우리의 삶은 주님이 주신 놀라운 빛과 진리, 하늘의 복을 반사체 와 같이 내 주변 백성들에게 흘려 보내는, 복의 통로, 빛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주변에 주님을 모르는 자에게 주님의 빛과 복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될 때, 성도가 성도 되고,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이고, 그 은혜를 우리가 누리게 될 뿐 아니라 놀랍게 확산될 것입니다. 성전이 성전 되는 것은 건물의 화려함과 크기,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말씀이 그 중심에 있으며, 여호와의 이름이 머물고, 영원히 거하시는 처소가 될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와의 이름이 머무는 은혜를 붙들고, 오늘 하루도 복과 빛의 통로로 이 세상에 부름 받은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이 드디어 하나님 성전의 모든 것을 마쳤습니다. 왕에 오른 지 4년째 되던 해부터 거의 7년 동안 하나님의 성전을 다 짓게 된 것이죠. 겉으로 보기에 성전의 모든 것이 완성됐고, 그 안에 모든 기구들도 갖추어 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전이 다 지어졌으니 완공 파티하고 축하하면 되겠다….이게 눈에 보이는 것만 집중하는 자들의 특징인 것이죠. 그러나 성전이 완성되는 것은 건물이 다 지어지고 그 안의 기구들이 갖추어진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들어와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것,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은 기초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어야 되며, 성전 중심에는 항상 언약궤,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중심으로 성전이 세워졌기 때문에, 언약궤가 들어와 중심이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완성된 성전에 언약궤를 "메고 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전 다윗왕 때, 하나님의 언약궤를 수레에 싣고 오다가 낭패를 본 웃사의 사건, 쉽고 편한 인간적인 방법으로 언약궤를 들고 오다가 큰 어려움을 당한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언약궤를 메고 성전에 들어온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 나의 쉽고 편한 방법을 완전히 내려놓고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번거로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온전히 순종한다는 고백이 담긴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말씀을 중심으로 살고 그 말씀이 나에게 생명이며 내 삶과 우리 교회 공동체의 중심이라면 우리는 말씀을 충분히 먹어야 되고 말씀을 충분히 마음에 담고 소화해야 하며, 말씀을 순종의 마음으로 붙드는 이 하나님의 방법, 시간이 걸리고 번거로워 보이지만, 언약궤를 메고가듯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그 우직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복판, 성전 한복판에 언약궤가 들어가면서 주님께 제사를 드리니까 여호와의 전에 구름으로 임재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되는 완성,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광야 한복판의 성막에서 임했던 하나님의 영광이 지금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도 동일하게 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중앙에 들어가는 것,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가 가득 차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성전 한 가운데 머물 때, 백성의 삶의 한 가운데 머물 때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영광의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한 중앙에 삶의 한복판에 주님을 모시고 우리의 마음을 드릴 때, 우리 교회에 말씀을 중심으로 두고 주님을 바라볼 때 그곳에서 영과 진리의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되는 삶은 하나님을 찬송할 수 밖에 없으며 그 말씀이 중심이 된 삶 가운데에 우리가 예배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임재 하시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배우는 유대인들의 종교 생활의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중심에 두지 않고 껍데기인 눈에 보이는 성전, 눈에 보이는 어떤 형식을 붙들고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며 모든 관심이 눈에 보이는 건물, 눈에 보이는 형식과 사람을 의식하는 종교 행위가 본질을 대체해 버렸다는 것이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신랄하게 지적하셨고, 너희가 심지어 영적인 어둠이고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성전에 본질이 빠지게 되면 그 자체가 우상이 될 수 있고 결국 우리를 신앙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할 때나, 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되면, 건물이 다 지어지면 끝지고 사역이 잘 이루어지면 끝났다고 생각하며, 우리끼리 박수치고 우리끼리 자축합니다. 화려하게 보이는 건물, 화려하게 보이는 어떤 프로그램이 하나님의 말씀 중심에 있지 못하게 하고 본질을 이탈하게 만든다면 그건 무너져야 된다….본질을 담지 못하는 그릇은 깨져야 한다는 것, 그게 바로 예수님의 강력한 도전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성전을 7년 동안이나 지으며 그렇게 화려하고 멋지게 지은 이유는 놀라운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니라 그 건물 중앙에 위치하게 될 하나님의 언약궤 때문에, 말씀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는 영광스러운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가 신앙이 타락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껍데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성전이 지어졌다고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곳에 말씀을 중심으로 두어야 그곳에서 예배 드릴 때 우리는 마음 한복판에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누리는 진짜 성전됨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다는 것은 내가 개인적으로 좀 뜨거워지고 감동 받고 눈물이 나왔다…훨씬 이상입니다. 내 삶의 한 복판의 말씀을 중심에 두며 우리 교회 공동체의 성전에 한복판에 말씀을 두고 살았을 때 그곳에서 예배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풍성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씨앗교회 예배당에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말씀을 중심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풍성히 누리는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에 놀라운 예배와 삶을 저와 여러분들이 풍성히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성전을 세우면서 함께 준비하는 성전 안의 기구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로 큰 의미가 없어 보이고 빨리 빨리 지나가면 좋은, 큰 은혜를 받기 어려운 본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전에 관심을 갖게 되면 성전 안 구석구석에 나의 관심이 생긴다는 것이죠. 저희가 성전을 입당하고 나니까, 처음에 슥 둘러 봤을 땐 모르는데 성전 안에 필요한 비품들이 계속 생기는 겁니다. 하나하나 챙겨 가는 데도 아직도 구입하고 갖춰야 할 것들이 계속 생깁니다. 그런 것들이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데 교회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생기게 되면 아 이런 것이 필요하겠다…이런 것이 우리 교회 성전에 정말 중요하겠다… 이런 것들이 점점 보이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교회를 손님 같이 오게 되면, 예배당을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필요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교회를 왔다 갔다 하지만 교회 건물 구석구석에 나의 손과 땀이 스며 있지 않기에, 어떤 필요가 있는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역대하 4장 말씀에 이렇게 시시콜콜, 구체적으로 이런 성전 안의 물건들을 다 기록한 이유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데 있어 백성들과 솔로몬 왕이 가졌던 관심과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전 안에 이런 구체적인 물건들과 기구들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을 사랑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면 예배당에 필요한 곳들이 보이며 채워져야 될 곳이 보이고, 해야 될 일들이 보이는 것이죠. 그것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기쁨으로 섬기는 구나…알게 되고 하나님의 성전을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쓰임 받는 놀라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주신 우리 교회 성전이 여러분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구석구석 우리 손과 땀이 닿으며 그 필요들이 점점 채워지는 은혜의 장소 되기 원합니다. 두번째로 묵상하기 원하는 것은 “솔로몬을 위하여” 일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이방 사람들을 들어 하나님의 성전 건축에 함께 참여하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분명히 건축에 자질이 있었고 스킬이 있었고 대단한 능력자들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기술로는 Top이었던거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방인들의 마음 속 진정한 동기까지는 바꿀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지금 나와서 일하는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 때문에 일하는 건 아니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이방인들이 일하는 내적인 동기는 뭐냐 하면 “솔로몬 왕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보상이 있으니까, “돈 받으니까” 일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성전 건축에 협조하면서 보상을 받는게 문제 있는게 아니라 그 보상을 위해서만 일하고 보상을 주는 솔로몬을 위해서만 일하는 게 성전 건축에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열심히 성전을 위해 일하지만 그들 안의 다른 내적 동기가 성전 건축 전체의 내적 동기를 흐리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의 목적과 동기를 흔들리지 않고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반복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 성전 건축함을 강조하고, 규례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계속 강조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를 동기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성전 건축이 지속됬을 때 우리 내적 동기를 바라보시는 주님께 영광 돌리며 세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세속화라 말하고, 교회의 가치와 우선순위가 세상으로 확산되는 것을 복음화라고 말합니다. 결국 우리에게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심지어 교회 성전을 건축하면서도 세속화가 되느냐 복음화가 되느냐의 가치관의 싸움이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일을 할 수 있고, 비지니스의 관계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가치관과 내적 동기, 물질만을 위해 일하는 그 우선순위가 교회 안에 점점 들어오게 되면 교회가 그냥 비즈니스 같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손님이 되어 가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서만 일하고 돈을 위해서만 일하는 것, 그게 바로 세속화라는 거예요. 불신자들의 삶을 이끄는 세상 가치관이 우리 교회의 핵심 가치와 정신을 흔들지 않도록 세속화에 우리는 늘 경계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사람을 위해 일하고 돈을 위해 일하는 이 가치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변화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그 교회는 생명력을 가지는 것입니다. 말씀의 규례를 따라 여호와를 위해서 살아가는 그 삶의 방식이 오히려 그 사람들을 변화 시키는 은혜를 경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렇게 인생을 쏟아붓고 살아 가십니까? 솔로몬과 같은 boss를 위해? 어떤 보상을 위해? 그렇게 쏟아붓고 살아가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이런 보상들은 따라오는 것이고, 나는 여호와의 영광과 이름을 위해 나의 인생을 쏟아붓고 살아가는 인생이십니까? 겉으로 보이기에는 사람 때문에 일하고, 돈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나,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나 세워지는 건물에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세워지는 겉보기엔 에 차이가 없는데 그 안의 보이지 않는 가치와 내적 동기는 어마어마하게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껍데기로 승부 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안에 본질과 내용으로 승부를 거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세우는 이 내적 동기, 복음의 본질과 정신을 흔들림 없이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인생을 쏟아붓는 자가 되시며 주님의 영광 가운데 선명히 쓰임 받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왕 4년에 드디어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에 맞추어 세워지는 구체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가는 여러 모습들을 증언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세워지는 모습이 모두 솔로몬의 머리에서 나와 세워지는 게 아니라 아버지 다윗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주신 설계도에 따라 그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에 따라 성전이 세워지듯,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설계도에 따라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에 따라 세워지는 것, 이것이 개인의 삶이 세워지는 방법이자, 공동체인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전이 지금 세워지는 구체적인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어떻게 잘 실행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고 있는데 그 세워지는 성전 앞에 두 기둥을 세웠다는 부분입니다. 이 두 기둥은 성전의 프레임으로서 세우는 기둥이 아니라 성전 앞에 눈에 보이는 상징으로 세운 것이죠. 건축물의 기초로서 기둥이 아니라 맨 앞에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보고 기억하라고 문 앞에 크게 기둥을 두 개 세운 겁니다. 그 두 기둥의 이름이 굉장히 의미심장하고 영적인데, 오른쪽에 있는 기둥 이름이 야긴, 왼쪽 기둥이 보아스 입니다. 야긴이란 “He establishes…하나님이 세우신다.” 는 의미, 보아스는 “In him…하나님의 능력/힘 아래서…”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면서 오른쪽 기둥을 바라보며 늘 무엇을 생각하고 묵상 해야 합니까? 이 성전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내 인생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성전을 오고 가면서 내 인생의 설계도가 하나님에게 있으며 하나님에 의해 세워져 가는 인생임을 계속 묵상 하는 겁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내가 내 인생을 스스로 세우려 하다가 무너지고 자빠지는 거예요. 개인의 인생도 하나님의 성전도 사람들이 세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열심과 노력을 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세워져 가는 것을 경험하는 것,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왼쪽 기둥의 보아스를 바라보며 In Him…하나님의 능력 안에서…내 인생도 성전도 세워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지 말고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아 붓지 말고 그것들을 인생의 지향점으로 두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내 힘을 붙들고 세상 힘을 붙드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어야 되는 거예요. 주님이 세우심을 경험하기 위해 나의 중심과 지향점이 내 자신에게서 하나님 에게로 옮겨가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의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고 내 인생이 세워지는 겁니다. 이 성전은 너희들의 힘으로 짓는게 아니라 자재와 돈과 어떤 물품들로 짓는게 아니라 나의 힘으로 세워지는 것이다…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힘으로 세워지는 성전…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세워지는 성전, 이것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만들었던 게 성전 앞에 두 기둥이었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간다는 것은 우리에게 영감으로 주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 나를 보내신 뜻이 있음을 믿으며 그분의 뜻에 따라 그 분이 설계하신 인생의 설계도에 따라 나의 인생이 세워지는 것을 바라보며 고백하는 것이죠. 그래서 내 인생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설계도를 따라 하나님의 계획에 맞춰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내가 세우는 게 아니라 세워져 가는 거에요.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공부 잘 해서 내가 탁월해서 내 인생이 세워지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보이지 않는 중심에, 하나님의 계획과 설계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주도 하시며 내 삶을 세워 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인간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세워 가려고 발버둥치는 인생, 하나님으로 인해 세워져 가는 인생, 성전이 지금 하나님의 설계도에 맞춰 세워져 가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인생을 바라보고 살아야 될지를 분명히 도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좋은 씨앗 교회는 아무런 조건과 대가 없이 성전을 선물로 받는 기적을 경험한 백성들입니다. 이거 누가 하신건지 우리는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전을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거에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다 이루어 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예배당을 들락날락 할 때마다 하나님이 세우신다…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우신 현장이다…이것을 늘 마음에 새기고 기억해야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의 두 기둥을 기억하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은혜를 붙들고 우리 교회를 이렇게 세우신 것과 같이 나의 인생도 이렇게 세우신다…그분의 능력을 붙들어야 그분의 이름을 붙들어야 우리가 살 수 있다…이 고백을 선명히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지는 인생,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세워지는 교회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주도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세워지는 놀라운 간증을 풍성히 경험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역대하 3장 말씀부터 성전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다윗이 성전을 짓기로 마음에 품었던 그때부터 밀리고 밀려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나서도 4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성전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때보다 훨씬 더 천천히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때와 스케쥴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인내로 붙드는 것입니다. 나의 때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으며 신뢰하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솔로몬 왕 4년에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시작되는데,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인 모리아 산입니다. 모리아 산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발견하고 깨닫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기초인 이 모리아 산은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을 담은 산입니다. 첫번째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산이 모리아 산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지 못하고 플랜 b 를 만들어 이스마엘을 낳게 되고 그런 실수와 실패를 통과하면서 마침내 하나님의 때에 100세에 얻게 된 아들이 바로 이삭이었죠. 하나님이 100세에 기적으로 얻은 약속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한 산이 모리아 산입니다.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그 명령을 아브라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고 순종해서 아들을 데리고 가서 실제로 그 이삭을 바치려 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갑자기 개입하셔서 예비된 어린양을 대신 바치게 되었으며 여호와 이레를 고백하게 했던 산이 모리아 산입니다. 사실 모리아 산에서 약속의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한 하나님의 뜻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놀라운 그림자입니다. 이삭은 실제로 죽이지 않고 죽이려 그럴 때 멈추라고 했지만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멈추지 않고 실제로 그 아들이 피를 흘리고 몸이 찢기며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죽으신 것입니다. 모리아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십자가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도구이자, 그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이미 구약 성경 가운데 드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을 다 담아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모리아 산 위에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통해 성전이라는 건물 자체 껍데기 보다 더 중요한 진짜 성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건물로서의 껍데기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이심을 계속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을 통하여 모든 대속 하시고 은혜의 보좌에 나올 수 있는 놀라운 기초를, 모리아 산 위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통해 이미 밑그림을 그리신 것입니다. 구약이 모리아 산에 세워진 눈에 보는 성전 중심의 종교였다면 신약에서는,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붙든 교회가 참 성전이 되고 그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 성전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 그분 자체가 참된 성전이라는 것이죠. 이 놀라운 모든 영적 밑그림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통해 신비가 드러나듯 알려주시는 겁니다. 두번째 모리아산 위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영적 의미는, 실패와 불순종의 현장 위에 은혜 만을 붙들고 세워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리아산은 여부스 사람의 타작 마당 근처인데 이게 역대상 21장에 나오는 다윗의 최대 실수 현장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인구 조사를 해서 전염병으로 칠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떼 죽음을 당하는 실패와 무너짐의 현장이 바로 이 모리아 산입니다. 예루살렘 모리아 산 위에 세워지는 성전은 아버지 다윗이 가장 영적으로 실패하고 무너지며 그것 때문에 백성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전염병으로 죽어 간 그 실패와 눈물과 회개의 현장 위에 은혜만 붙들고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짐을 고백하는 겁니다. 실패와 불순종의 현장, 백성들의 통곡의 현장 위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통해 오직 우리는 두 손 들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야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함을 마음속에 새기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며 “대단하다, 놀랍다, 화려하다,” 이렇게 끝나는 게 아니라 불순종과 실패의 현장 위에 세워졌음을 잊지 않고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붙들지 아니하면 이렇게 다시 한번 실패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늘 마음에 새기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고백하게 만드는 곳이 바로 모리아 산 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 좋은 씨앗 교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모리아산을 기초로 건축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겉으로 보이게 화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흘려진 모리아 산 기초 위에 새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을 부름 받으며 이 시간 서 있는 겁니다. 그냥 우연히 사람들이 돈 모아 가지고 세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좀 모여서 세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고 이끄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분명한 기초로 세워졌다는 분명한 자의식이 있을 때 우리 교회가 성전의 기초인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참 성전 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만이 참 성전 되는 기초를 분명히 깨달을 때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늘 깨지고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다윗 왕과 같이 실패와 실수로 무너집니다. 그 실패와 눈물과 무너짐의 현장 가운데 교회의 기초를 세우신 그 하나님의 큰 뜻을 기억하며 교회의 평가는 성공도 아니고 대단한 교세도 아니고 뭔가 보여지는 어떤 업적도 아닌 우리의 실패와 좌절과 눈물과 우리의 부끄러움을 품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세워진 교회 라는 것을 잊지 말고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 만에 붙들고 예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이 시작하려 하는 성전 건축은 그냥 본인 결심과 리더십으로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방법으로 세워지는 거룩한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다윗은 조건적으로 훨씬 좋은 것들을 많이 준비해 가지고 본인 스스로 성전을 지으려고 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막으신 이유는 환경과 조건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기다리기를 명령하셨습니다. 솔로몬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준비 지키고 그 때 하나님께서 큐 사인을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영적인 일인 성전이 세워지는 것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추진하게 될 때 이게 영적인 일인가 아닌가를 알게 되는 시금석은 우리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재고 따져서 그 모든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 괜찮으면 우리의 시간을 그 상황과 조건에 끼워 넣습니다. 환경과 조건과 상황들에 돌아가는 것에 따라 나의 시간을 맞춰 그것이 추진하는 것을 적합한 때라고 생각을 하는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큐 사인을 보내실 때에만 추진되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결국 우리 눈에 보기에는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데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를 중심으로 일을 추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지금 당장 움직여야 될 거 같아도 하나님의 사인이 없으면 그때는 웅크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 이게 영적 지혜를 갖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며 일하시며 성전을 지으신다는 사인 중의 하나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통해 성전에 도움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방 사람들을 성전 건축에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세우는 성전 건축에 놀랍게도 이방인들을 통하여 도움을 받고 그들이 일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우리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들,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일일 진행되게 하게 만드시는 놀라움을 보여주십니다. 불신자들이자 이방인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데 관심이 있고 함께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할 때 이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일임을 아는 증거 중에 하나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의외의 사람들을 통해 일이 진행될 때,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것이구나.” 생각해도 틀리지 않는 겁니다. 이런 예상하지 않는 도움들을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주도하신다는 것을 고백하게 만든다는 거에요. 겉으로 봐서는 우리가 계획하고 주도하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이 이끄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주도하신다는 더 놀라운 증거 중 하나는 이방인들이 그렇게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돕는 이유의 본질입니다. 그들의 말 속에 솔로몬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 왕을 강조하고 있죠. 즉 이방 사람들이 솔로몬을 기쁨으로 도와주겠다는 이유는 솔로몬 때문이 아니라 솔로몬의 부친 다윗왕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왕 아들이 부탁하니까, 아버지의 후광으로 그 이방 사람들이 그렇게 큰 도움을 주게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결국 솔로몬 왕이 착각하지 말아야 되는 것은 내가 대단하고 위대해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의외의 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 덕에, 아버지 후광으로 내가 이렇게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구나… 아버지가 성전 준비를 위해 많은 것들을 이미 계획하셨던 것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이렇게 순조롭게 되어 지는구나… 라는 겸손의 영성을 지속하면 솔로몬이 놀랍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솔로몬과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은혜와 부어지는 축복이,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을 통한 의외의 도움으로 일이 풀려가는 것을 보면서, 내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대단하고 내가 열심있고, 뭔가 잘 살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인생이 영적 하항 곡선의 길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하늘의 복이 머무는 이유도, 일들이 순적하게 잘 진행되는 이유도, 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에, 하나님 자녀됨의 권세로 하나님의 후광을 입고, 하나님 이름 덕에 그나마 내가 이 험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이렇게 기준 붙들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며 고백하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내 인생의 잘되는 이유, 내 인생의 복이 부어지는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라 나의 하늘 아버지 때문인 것을 잊지 않는 것, 마음속에 진리로 새기는 것, 이것이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되는 영적 진리입니다. 솔로몬이 세우는 하나님의 성전은 건물을 세우고 짓는 것을 넘어 본질적으로 삶과 예배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세워지는 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전제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고 바라보며 세워지는 하나님의 일에는 예상하지 않은 의외의 사람들을 통해, 심지어 불신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사용하시고 그들을 들어 이 하나님의 일에 놀랍게 동참하게 하시고 도움을 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지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때에 맞춰 모든 일이 결정 되야지 상황과 환경을 통해 모든 일이 결정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됩니다. 내가 땀 흘려서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고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붙드는 신앙고백 위에 나의 인생을 세우십시오. 그런 인생에 놀라 은혜가 부어 지며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그 가운데 머물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 됨에 권세를 붙들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드디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 하기를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다윗 왕은 오랫동안 성전 건축을 위한 준비의 밑그림에 모든 준비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의 아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다윗 생각에는 본인이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환경도 다 조성되어 주님께 성전을 봉헌하는 것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그 다윗의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조건은 완벽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일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이 주도하심이 성전 건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결심은 그냥 솔로몬 본인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바라보는 영적인 사건입니다. 결심은 솔로몬이 했습니다만 그 모든 것을 이끄시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그 결심 뒤에 하나님의 때에 성전 건축이 드디어 시작되는 것임을 말씀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강조된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된다는 솔로몬의 고백을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결심한 것이 강조된 것이 아니라, 이 성전을 건축 하는 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한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두 번 이나 동일하게 반복되어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 건축이 이루어 질 것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준비시키시는 분도 하나님, 성전 건축을 시작하시는 분도 하나님, 성전을 세우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이끄시는 분도 하나님, 성전이 세워지는 모든 결과도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 시작을 결심한 것은 솔로몬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솔로몬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드디어 일을 시작하시게 되었다는 영적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호와를 위해서 봉헌하는 성전 건축을 결정하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건축 하는게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께 드려 드리는 도구의 역할임을 강조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짓기 시작하지만 그 여호와를 위한다는 말 자체도 참 경망스럽다는 겁니다. 내가 누구 간 데 어찌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한다 말하냐는 겁니다 (6절). 나는 그냥 하나님께 드려지고 쓰임 받는 도구일 뿐이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솔로몬의 분명한 겸손의 표현이죠. 그렇기에 나를 위해서도 아니고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서만 한다는 고백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것은 개인적인 업적이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예배가 세워지는 것이며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이 세워지는 것이 성전이 세워지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은 외형의 건물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바로 세워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향한 바른 가치관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의 신앙이 재건되면서 성전이 세워져야 이 일이 영적인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화려한 성전이어도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고백이 없다면 바로 세워진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솔로몬은 이 성전이 세워지기를 사모하였습니다. 동시에 이 역대하가 쓰여진 삶의 자리는 포로 후기에, 폐허와 잿더미 가운데 다시 무너진 성전을 재건축 하려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현장 가운데 그들의 고백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무너진 절망과 폐허 가운데에 성전을 다시 세우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 성전을 세워 가는 과정에 그들은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 쓰임 받는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기뻐하고 감사할 때, 하나님이 이 성전을 세우시고 주도하심을 고백하는 그들의 발버둥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말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 그렇지만 결국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해서 한다 말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지 않고 나의 이름이 높아지기 원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쁨과 감사는 내가 여호와를 위해 무언가를 해서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 자체가 나에게 귀한 인생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가진 겸손이자 우리가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어야 될 겸손의 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전은 여호와를 위해서 드리는 성전이다. 이 성전은 사람들이 세우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세우시는 성전이다. 이 성전의 성전됨은 건물 자체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성전과 함께 세워지는 신앙고백이다. 그 성전이 지어 가면서 모든 백성과 솔로몬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 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 성전은 그냥 껍데기에 불과하다…이 분명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과 우선순위를 견지하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어떤 일을 결심하던 그 일이 여호와를 위하여 하는 일이 되기 사모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감사하는 일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왕이 온마음을 다해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고백으로 일천 번제를 드리고 나니까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네가 원하는 거 구하라는 것이죠...그럼 들어 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천 번제를 이렇게 드려서 정성이 갸륵해서 원하는 소원을 얻은 게 아니라 일천 번제를 드리는 동기가 달랐습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간절한 필요나 자신의 소원을 구하면서 일천번제를 드린게 아닙니다.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구하는게 본질적으로 달랐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의지하여 내가 이 모든 사람들을 지혜로 통치할 수 없으니까 주의 백성을 위해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를 나에게 부어 주옵소서…라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에게 순전한 마음과 전심을 가지는 신앙 생활은 내가 인생의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그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는 것입니다. 갈급한 결국 나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며 영적인 은혜를 내 육적인 물질적 필요 보다 먼저 두는 이 놀라운 우선순위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최우선으로 구한 것을 하나님은 굉장히 기뻐 하셨어요. 재물을 구하고, 영광을 구하고,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고, 장수를 구하고… 이게 다 세상에서 나의 육적인 필요들입니다. 왕으로서 나에게는 돈과 능력도 있어야 하고 영광도 있어야 되고 군사력도 있어야 하고…왕으로서 이건 굉장히 필요한 겁니다. 그런데 이런 육적인 필요, 물질적인 필요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은 기뻐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가 영적인 필요와 하나님을 향한 지혜를 먼저 구한 것을 굉장히 기뻐하셨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선 성도로서 우리가 영적인 존재임을 깨닫고 내가 육적인 필요와 물질적인 필요 에 매몰되지 않기 원하세요. 내가 가장 원하는 갈망, 나에게 가장 원하는 필요, 나의 간절한 소망이 먼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되고, 내 영적인 필요와 갈급함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주신 것과 함께 더불어 그 외의 모든 것들도 함께 부어 주셨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축복이 뭐냐면 솔로몬이 구한 영적 필요와 갈급함에 대한 기도제목은 당연히 부어주셨고, 동시에 그가 구하지 않았지만 그의 삶에 정말 필요한 부와 재물과 영광도 더불어서 반찬과 같이 딸려서 다 주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우리에게 영적인 필요를 먼저 구하고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는 것은 바로 이 육신의 필요에 대한 것은 하나님이 더해 주시는 복이라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찬과 같은 복들, 따라오는 복들에 매몰되어 Main Dish를 잊어버리면 결국 신앙의 본질이 흔들리게 된다는 거예요. 주님의 기쁨되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십니까? 솔로몬과 같이 영적인 필요와 갈급함, 하나님의 지혜를 나의 육적 필요와 갈급함보다 위에 두고 우선순위에 두십시오. 이 세상에서의 복, 물질적 필요는 다 따라오는 복들/ 반찬과 같은 복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솔로몬이 하나님의 지혜를 제일 먼저 구한 것을 그렇게 기뻐하신 것같이 여러분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세트 메뉴에 따라오듯…반찬들이 따라오듯…영적인 필요를 먼저 구하면 육적인 필요는 따라 오는 이 원리를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세트 메뉴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분명한 우선순위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 안에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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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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