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 왕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놀라운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비결을 안 왕이었죠. 하나님이 여호사밧에게 함께 하실 수 밖에 없었던 세 가지 이유, 함께하시는 비결은 바로 바알신과 우상을 구하지 않음, 오직 하나님만 구하며 계명을 따름, 북이스라엘의 타락한 세상 가치와 문화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하나님만을 구하고 우상들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계명을 쫓고 세상 문화를 등지고 살아가니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복이 그 나라 가운데 부어지겠습니까? 그렇게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앞에 구별되고 거룩하게 나아가니까 그에게 부어진 영적 결과와 축복이 있었는데 바로 주변 나라에서 남유다를 만만하게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주변 나라들도 보면서 두려워 떨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거예요. 블레셋과 아라비아에서 조공을 바치기 시작하고 주변 나라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 하나님이 견고하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사밧이 점점 강대해 졌습니다. 재물도 많아지고 군사력도 많아지고 힘도 강대해지고…그런데 본질은 여호사밧이 강해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여호사밧을 강하게 하고, 견고하게 하신 겁니다. 그게 영적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사밧 왕과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견고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는 이런 영적 결과, 영적인 복이 우리 가운데 실체로 경험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견고해지려 하고, 우리 스스로 강해지려고 그렇게 발버둥을 칩니다. 눈에 보이는 것 만을 구하며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물질 가치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삶 가운데, 전혀 다른 인생의 비결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매달리는 백성들에게, 동행의 축복과 함께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견고함과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강함 가운데 거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 하기 원하시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론적인 말씀으로 주시는 “여호사밧”이라는 이름의 영적 의미를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란 이름은 “여호와만이 나의 판관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내 인생에 재판관이라는 고백이 그 이름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사밧 왕은 그 이름 그대로 고백 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판단하심을 선명히 믿고 살아간 자가 된 것입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기 시작하는 데서 무너지는 것이죠. 그 죄의 본질에서 우리가 주님 은혜로 돌아가고 죄를 회개한다는 것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판단 하심을 믿으며 주님에게 주권을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창조자 되시며 나는 피조물 됨을 철저히 인정하며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인생이 잘 살았는지 잘 못살았는지 누군가는 판단 해야 되는데 누가 판단합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판단하거나, 내가 자신이 없으면 다른 사람이 판단하게 하거나…이 둘 중의 하나의 패턴으로 살아갑니다. 내 인생은 내가 봤을 때 잘 살았다 생각해서 내가 판단하는 대로 내 기준에 맞춰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거나, 그게 조금 자신 없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판단하게 맡기는 거죠. 내 생이 어떻고 내 인생이 잘 살았는지 못살았는지를 다른 사람에게 평가 기준을 맡기면 어떻게 됩니까?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되고 사람들만 의식하다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판단하려 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인생을 판단하게 하는 것도 모두 타락한 인간의 현주소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여호사밧의 은혜로 돌아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내 인생에 판관자 되심을 선명히 믿는 삶…하나님만이 오직 내 인생을 평가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삶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 인생을 평가할 수도 없고 평가가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겁니다. 심지어 내 자신이 바라보는 나의 인생에 평가도 너무나 치우치고 부분적이고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재판관 되심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갑니다. 열심히 산 게 귀하고 박수 받을 일이지만, 그럼에도 내 하루를 과연 잘 살았는지, 그 판단을 누가 하는지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한 평생 열심히 살아가는데, 내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내 인생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 그 판단을 누가 하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평가 하심을 진짜 믿냐는 것이죠. 여호사밧의 고백으로 하나님이 내 인생을 판단하시고 재판 하심을 믿는 선명히 믿는 것, 이게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내 인생을 겉으로 보이는 결과가 아닌 보이지 않는 중심으로 판단하시고 평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바라보심을 믿고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판단 받겠다...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만 바라보고 붙들며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끝자락에서 쓸 때 내 인생을 평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사왕 이후 왕위에 오른 여호사밧 왕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여호사밧은 서른다섯 살에 왕이 되어 25년 동안 왕으로 통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35살에 왕위에 오른 것은 굉장히 늦은 나이에 왕이 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왕이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후반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다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아버지가 처음에는 되게 잘 했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 이름만 의지했지만 그의 후반기는 결국 변질되고 흔들리며 무너졌던 모습을 보고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면 나는 저렇게 살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통치해야 하겠다는 분명한 결단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왕이 되고 나서 3가지의 거룩하고 구별된 모습으로 남유다를 잘 다스리게 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내야 될 다른 가치관이자 구별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바알을 구하지 않은 삶, 두번째는 오직 하나님만 구한 삶, 세번째는 북이스라엘의 변절과 타락의 문화를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하나님이 여호사밧왕에게 함께하신 비결이고,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임마누엘 하나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다윗의 처음길로 행하며 바알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바알은 돈신, 재물신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막강한 우상입니다. 이 바알신은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가 하면 우리 마음이 향하고 고정되게 만드는 것, 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사밧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바알에, 돈과 재물 신에 마음이 쏠리지 않고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사기 위해 돈과 재물신에게 구하지 않고 마음을 향하게 방치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우상들은 결국 나의 인생에 각각의 필요에 따라 존재하는 신들이지요. 예를 들면 그 고대 시대에는 태양 신도 있었고 비를 내리는 신도 있었고 수많은 자신들의 먹고 사는 것을 위해 필요한 신들을 우상으로 만들었던 게 고대 시대 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신상으로 다 만들어 놓았죠. 지금은 촌스럽게 그렇게 신상으로 만들어 놓고 우상을 겉으로 섬기는 것 같지 않지만 결국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고 바라보지 못하게 여전히 돈 신을 섬기고요 여전히 물질 신을 섬기며, 이 세상 신들을 섬기며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 나눠지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전심으로 하나님의 길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우상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마음이 향하려면, 하나님에게 마음 쏟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상들을 무너뜨려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하였습니다.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기 위해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구하기 위해 아세라 목상을 다 제하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처음 신앙으로, 본질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두번째 여호와만을 구하며 계명을 배워 지켰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길, 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내 마음을 흔들고 내 마음이 나뉘게 만드는 우상들이 있음을 직시하는 것을 넘어서는 겁니다. 내 마음이 나눠지는 우상들을 다 찍어 없애면서 동시에 뭘 했냐면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채우는 겁니다. 이 우상들을 다 없애고 무너뜨리고 늘 하나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죠. 그럴 때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인생이 되고,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가야 내 삶에 임마누엘 하나님이 실체로 경험되는 겁니다. 세번째, 북이스라엘의 문화와 행위를 멀리하며 쫓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바알을 마음에 품고, 세상 신들에게 마음을 두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상의 풍속을 쫓아 가게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을 쫓아갈 수 없는 겁니다.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북이스라엘의 타락하고 변질된 세상으로 물든 그 문화와 풍속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쫓지 않았다는 거예요. 거리를 두고 등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구하게 되면 결국 내 주변에 있는 문화의 영향에서 멀리하며 쫓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변 문화 가운데 영향 받고 추종하는 대신 초월하며 말씀이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이 비결 3가지, 이것을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 실천하여 주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풍성히 실체로 경험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임마누엘 하나님을 내 삶의 실체로 풍성히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삶 주변에 내 마음 한복판에 내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수많은 우상들이 내 마음을 흔들고, 나누어 지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돈신과 재물신에 너무 마음이 쏠리고 향해 있어, 여호사밧이 경험한 그 놀라운 임마누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채우지 않고 구하지 않고 있기에, 세상의 풍속의 우리는 젖어 살기 때문에 여호사밧이 경험한 하나님과 함께하심,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삶이 바알을 구하지 않고 주변에 두지 않고, 속히 치워버리고 태워버리도록 결단하십시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제하여 버리고 무너뜨릴 수 있어야 하나님만을 구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구체적인 실체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나눠지게 하는 그 우상들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구하며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이 세상 문화와 행위를 쫓지 않고 물들지 않는 자가 될 것입니다. 여호사밧 왕과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체로 우리가 경험하며, 주님 손에 이끌리어 이 험한 세상을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사 왕을 바라보면서 꼭 축구경기를 보는 듯 합니다. 전반 45분과 후반 40분까지 잘 싸우다가 마지막 5분을 남겨 놓고 실수해서 무너져 모든 경기를 망치는 그런 안타까운 축구경기 같은 인생이 바로 아사왕입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들고 하나님이 주신 평안을 누리며 지냈던 그 왕이 마지막 노년에 무너지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지금 치러 올라 왔는데 그 위기를 하나님에게 한 번도 상의하지 않고 그냥 자기 생각대로 자기 지략을 쓰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자기 머리를 굴려 외세를 끌어들여 아람 사람들을 동원해 북이스라엘을 견제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외세, 아람왕을 의지하게 됩니다. 말씀에 단 한 군데도 왕이 하나님을 구하거나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매달렸던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할만큼 했고 이제 왕으로서 노하우도 있으니 이 정도 문제는 이제 하나님과 상의 없이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사 왕은 늘 어려움과 위기 때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붙들며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경험했던 간증이 있는 왕이었는데 인생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상의하지 않고 외세와 사람을 의지하며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경고하는 선지자가 등장했습니다. 지금 이 전쟁이 겉으로 봐서 문제가 잘 해결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 외세인 아람 왕을 의지하고 바라봤다는 거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외세의 힘과 사람을 바라보고 붙든 이 불신앙의 모습에서 돌아와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과거 아사왕의 신실했던 때를 한번 리마인드 시켜 주는 겁니다. 구스 100만 대군을 어떻게 무찔러 이겼는지 잊어버리셨습니까? 그때 여호와만을 구하며 여호와 이름에 의탁하며 나아갔을 때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작은 위기 가운데 왜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직언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사왕이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붙들지 않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행하는 것이라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라보지 않는 태도 자체가 하나님을 망령되이 행하는 거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는다 말하면서 실제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망령되이 행하는 거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앞에 두고 하나님을 붙들지 않고 다른 것을 붙들고 사람들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든 것 자체가 하나님을 망령되게 하는 거라는 거예요. 예전에는 선지자가 와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아사왕은 겸손히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음에 담아 결단하는 놀라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우상숭배를 멈추지 않으니까 어머니를 그 자리에서 폐하면서 우상을 없애지 아니했습니까? 그 선지자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담아 지키어 그 말씀이 나에게 실체 되고 능력 되며 그것을 순종으로 이어가는 놀라운 왕이 바로 아사왕 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고 바른 소리를 전하는 선지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아사왕이 노해서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사왕의 변질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충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주일날 지금 배우는 요한복음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거절하고 충돌하고 부딪치며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는 태도와 동일한 거에요. 그 마음은 영적 교만과 영적 착각이 가득해,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서 말씀을 듣기 싫어하는 것을 넘어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가두고 잡으려 하는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 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탈하게 되고 하나님 만에 바라보는 것을 멈추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대하며 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옥에 가두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 진리를 통해 내가 변화 되기 원하시는데, 그 변화를 거절하며 여전히 어둠을 붙들고 그 진리의 말씀을 잡아 옥에 가두는 겁니다. 결국 그렇게 아사왕의 인생은 비참하게 끝나게 되는 거예요. 마지막 후반전 5분를 망치면서 인생 전체를 망친 채…. 그의 인생은 말년에 그 발에 병이 들어 초라하게 끝나게 됩니다. 앞에 35년 은 그렇게 잘하고 신실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선명하게 세워졌는데, 마지막 5년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완전히 그의 인생이 무너져 버리는 인생이 되버린 겁니다. 후반 마지막 5분을 망쳐 인생 경기 전체를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시간 내가 누구를 찾고 누구를 붙들며 누구를 섬 길가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장 중요한 결단이며 선택입니다.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 이것은 결코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자동적으로 되지 않습니다. 신앙은 절대 저절로 좋아지지 않음을 잊지 마십시오. 단순히 그냥 익숙해지는 것을 내가 신앙이 좋아지는 거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도 까딱 잘못하면 인생의 마지막에 인생 후반부에 이렇게 아사왕과 같이 내 눈과 마음이 하나님에게 향하는 것을 잃어 버리며 진리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분노하며 말씀을 옥에 가두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우리는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반 5분을 남겨 놓고 경기 전체를 망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주님 앞에 설 때까지 끝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붙들며, 끝까지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사왕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구스의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올린 후에 하나님의 사람이 주는 예언입니다. 지금 백만 대군을 무찌르고 큰 승리와 함께 돌아오는 그 군대의 사기는 얼마나 충전 했겠습니까? 그들에게 격려하고 박수 치고 정말 대단하다 잘했다…축제를 벌이며 승리 자체에 도취되어 있을 수 있는데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말씀은 어떻게 보면 찬물을 끼얹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사 왕과 그 군대에게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에 너희가 승리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들은 전쟁 중에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의탁하여 하나님이 친히 싸워 주셔서 백만 대군을 무찌르는 이런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큰 승리 이후에 까딱 하면 착각하고 망각하는 것이죠. 내가 잘해서 우리 무기가 대단해서 내가 가진 세력이 커서 이렇게 큰 승리를 이루게 되었다고 착각하며 나의 눈이 하나님만 바라보는 데서 내가 하나님만을 붙들고 있는 곳에서 다른 곳에 눈을 눌리며 다른 것을 붙들기 시작하면 망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큰 승리 이후 돌아오는 백성들에게 백만 대군을 무찌르며 큰 승리는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셨다는 것에 증거일 뿐 이라고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너희가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을 만나지만 너희가 하나님을 져 버리면 너희를 버리신다는 쓴소리를 주시는 것입니다. 큰 승리를 주신 분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으며,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절대 놓치지 말라고 어떻게 보면 경고하는 것입니다. 승리 이후 눈과 마음이 하늘로 향해 있을때만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큰 승리 이후 내 눈과 마음이 하늘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그게 하나님께 버림받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죠. 사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가 승리 이후에 안타깝게도 하나님께 등 돌리며 하나님께 시선과 마음을 두지 못한 흑역사의 연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으로 봐서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일 지 모르나 그들 내면에 영적 문제, 참 신이었고 가르치는 제사장이 없고 율법이 없은 지가 오래 되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왕 뿐 아니라 수많은 백성들이 겉에 보이는 것에 매달리고 추종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가에만 쫓아다니면서 참신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잃어 버리며 점점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기준을 잃어 버리는데 그 것을 잘못됐다고 책망하고 외치는 제사장도 없었다는 거에요. 이게 어떻게 보면 오랫동안 사사기 시대와 같은 영적 암흑기, 자신의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했던 그 영적 문제가 솔로몬 이후 나누어 진 후에도 이 문제가 지속적으로 도전과 문제가 되어왔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눈과 마음이 딴 데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게 되면 그 결과로 늘 환란이 찾아왔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바라보고 붙들지 않고, 율법과 말씀을 따르지 않을 때 모든 고난으로 우리를 요란케 하신다는 겁니다. 내 마음도 환경도 평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을 일상화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게 매일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서로 상처를 주고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환란이라는 본질은 겉으로 봐선 외적인 어려움이고 문제이지만 영적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에게 더 집중하고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향하는 기회로 선용되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잘 묵상해야 되는 게 내 삶에 찾아오는 환란과 어려움이 모두 하나님이 주신 징계나 심판이라는 얘기하는게 아니라 나의 인생에 예고 없이 찾아오는 어려움과 환란을 하나님께 내 눈을 돌리고 하나님 안에 붙드는 도구로 선용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분별하는 거예요. 나의 승리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다는 증거일 뿐이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승리도 고난도 다 하나님에게 돌아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드는 도구가 되게 만들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환란과 어려움 가운데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멀어지고, 심지어 큰 승리 이후에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고 멀어지면 어떻하느냐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결론 말씀은 “강하게 하라 너희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평화의 시기에도 어려움의 시기에도 손이 약해지지 않도록 심령을 깨우며 삶의 긴장감을 가지고 삶의 깨어 있으라는 것이죠. 큰 승리 이후에 내 눈과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하나님만 붙드는 영적 긴장감이 필요하고요, 내 인생이 어려워 환란 가운데 있을 때도 이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붙드는 이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머물 줄 압니다. 인생이 잘 될 때도 인생이 어려울 때도 늘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사왕에게 평화를 주신 놀라운 비결에 대해 배웠습니다. 아사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하며 하나님만을 구하며 말씀과 명령을 행하는 삶으로 하나님이 주신 평탄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평탄함과 평안을 누리게 되면 대부분 그 가운데 착각하고 망각하여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잊어버리는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그것이 우리 문제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아사 왕이 위대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평탄함과 평안함을 부어 주셨을 때, 그 평탄함에 빠져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만을 더 붙들고 위기의 때를 대비하며 성읍들을 건축했다는 것입니다. 성읍들을 건축하면서 아사왕은 두 가지를 반복적으로 얘기하죠. 오늘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안이 내가 왕으로서 대단해서도 아니고 군사력이 대단해서도 아니고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평탄함의 원인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구했기 때문에 주신 선물로서의 평안을 분명히 고백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가진 지도자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성공이 있고 평탄함과 평안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몇 년 지속되게 되면 나태해지고 착각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보고 붙들게 마련입니다. 이 평탄함이나 성공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영적인 위험성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사왕의 가진 놀라운 지혜를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평탄함과 성공 가운데서도 나는 한결같이 그 모든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잊지 않고 하나님 만을 구하며 찾는 것을 지속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항상 평탄 할 때 주님을 바라보며 장차 올 위기를 대비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탄과 성공이 하늘에서 부어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거예요. 평탄할 때 미래를 준비하며 어려울 때를 미리 미리 대비하는 것이죠. 그래서 평탄함과 성공이 하나님을 멀어지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붙들게 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평탄함과 성공이 하나님을 더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을 더 붙들 게 만드는 것,이것이 바로 성도의 삶의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평탄할 때 성읍을 구축하며 그 위기를 대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구스 사람들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위기 가운데 아사왕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주밖에 도와줄 이 없사오니..” 나의 도움이 주님밖에 없음을 붙들고 간구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의탁하오니…” 백만 대군이 쳐들어오는 큰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만을 의지하고 내 인생을 맡기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의 본질인 것이지요. 이 마음과 태도로 간절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붙드는 것이 위기를 빠져나올 수 있는 기도의 힘이라는 거예요. 갑자기 찾아온 위기 가운데 아사 왕과 같이 주님만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기도하는 겁니다. 그랬더니 어떤 기적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구하고 붙드는 자들에게, 하나님 이름 만을 의탁하는 자들에게 임하며 역사 하시는 겁니다. 구스 100만 대군이 도망가는 거예요. 100만 대군이 엎드러 지고 거의 다 전멸을 하게 됩니다. 군사력이 대단해서 가 아니라 지략이 좋아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친히 싸우셨기 때문에 일어난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여호와 앞에서와 군대 앞에서 패망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지는 전쟁 앞에 그 백만대군은 낙엽같이 떨어지며 패망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평탄함과 성공이 있을 때 하나님을 잊지 말고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복입니다. 이렇게 100만 대군이 쳐들어오는 어려움이 갑자기 찾아올 때도 주님만을 구하며 주님의 이름을 의탁하여 부르짖는 것이 복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믿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인생이 어려울 때도 인생이 평탄할 때도 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이 영적 진리를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나의 도움은 주님밖에 없음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주님만을 붙들고 바라보며 그 간절함, 주의 이름만을 의탁하며 내 인생을 주님 이름에 맡기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위해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을 구하며 붙드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아사왕의 승리가 과거의 이스라엘 역사 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형으로 경험하고 고백해야 되는 놀라운 영적 싸움의 승리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배우고 있는데 그 역사가 과거에 그냥 흘러갔던 역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시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임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가 오늘 이 시대에 나의 삶의 현장에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로 인하여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된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는 영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역사이기도 한 것이죠. 역대기의 역사, 그들의 하나님께 바로섬과 무너짐의 역사가 우리의 현재 역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남유다의 역사는 바로 아사라는 왕인데, 그 왕에 대한 평가는 평화를 가져온 왕입니다. 역대기에서는 북 이스라엘의 역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사실 북이스라엘 왕조들은 계속 왕들이 바뀝니다. 암투가 있고 내부적인 분쟁이 있고 쿠데타가 있고 왕들이 계속 바뀌는 혼란이 반복되면서 그 역사가 진행됩니다. 반면에 남 유다는 크기가 작았지만 북 이스라엘과 대비되게 평탄하고 평안한 역사가 지속되어 갑니다. 겉으로 봤을 땐 북이스라엘이 훨씬 땅도 사람들도 많고 군사력도 크고 가진 것도 많아 보였지만, 영적인 관점으로 봤을 때 하나님의 축복이 머무른 곳은 평안한 남유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에 그 평안함이 누려 지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사 왕이 남유다를 평안하게 다스린 비결이 무엇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두고 왕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 보기에” 민감한 삶을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게 대부분의 왕들이고 이 시대의 지도자들입니다. 민심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가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평가에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의미 없다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방점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늘 인지하고 살아가는 영의 눈이 떠 있어야 되는 것이죠. 아사왕은 하나님이 보시는 선과 정의를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것, 하나님만을 순전히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게 선이고 정의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는 선과 정의를 위해 아사왕이 했던 게 바로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이하고 주상을 훼파하며 아세라 상을 찍고 태양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붙드는 삶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다 부셔 버리고 찍어 버리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 보시기에 선이었고 정의임을 인식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선명하게 쓰임 받는 영적 지도자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아사왕이 한 것은 온 유다 사람을 명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하며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했습니다.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추구하는 거죠. 내 열망과 간절함이 주님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만을 구하며 붙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행한다 지키고 순종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 안에 거하고 살아가는 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에게 한눈팔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바로 선이고 정의이자, 율법을 따르는 삶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의 눈이 닫혀 “사람들이 보기에 어떠한가?” 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데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바라보시는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붙들어야 하는 겁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보는 선과 정의를 생각하고 따집니다. 내 생각에 내가 납득할만한 선과 정의가 늘 옳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부정적 편향이 있고 치우침이 있고 착각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 채 내가 보기에 좋은 선과 정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진리라고 착각하고 살아가죠. 그래서 어느 시대나 사람들이 자기 눈에 보기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 같은 영적 암흑기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아사왕 시대의 평안은 정치 리더십에 의한 평안도 아니고 군사력에 의한 평안도 아니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부어 주신 평안함이었습니다.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하나님만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만을 행하고 붙들고 지키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이 평안을 선물로 부어 주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만큼 큰 복이 없습니다. 아사왕과 같이 내가 감으로써 그 곳이 평안한 곳이 되는 게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화해와 회복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 개인적인 삶도 가족의 삶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삶도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누리며 오늘 하루를 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 평안함을 누리며 내 마음 속에, 가정 안에, 우리 교회 안에 그 놀라운 평안함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사 왕과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선과 정의를 행하는 기준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사왕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 옳은 선과 정의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선과 정의를 붙들고 그것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것을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로 두는 삶을 사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이 부어 주시는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의식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며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늘 민감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어떤가에 대해 늘 민감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눈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맞춰 나의 인생을 하나님이 보시는 그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십시오. 주님 앞에 주님만을 구하며 그 율법과 말씀을 행하며 지키는 자 로 살아가십시오. 이 혼란하고 분란이 많은 시대에, 하나님 앞에서의 평안함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놀라운 삶을 구체적으로 체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 두 번째 왕 아비야의 3년 동안 다스린 행적 중 단 한 가지를 증언하는데, 바로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와 함께 하시며 이것은 배반한 북이스라엘들과 배반하지 않는 남유다로 나누어지는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그렇기에 북이스라엘이 남유다에 전쟁을 걸어 오면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전쟁이니전쟁하러 오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이 말은 아비야는 되도록이면 전쟁을 안하고 피하기 원했다는 것이죠. 너희가 전쟁하지 않으면 우리가 전쟁 할 필요가 없으니까 여호와를 대적하지 말고 전쟁하지 말라…분명히 경고 했는데 이 경고를 듣지 않고 지금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복병을 두어 포위했습니다. 매복을 해서 유인해서 사람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앞 뒤에서 공격하는 것 이것은 거의 독안에 든 쥐가 되어 승리하는 겁니다. 앞에도, 뒤에도 북이스라엘의 군인들에게 포위된 남유다는 몰살할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분명히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다 죽었다고 말하며 떨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남유다 백성들과 군인들이 무엇을 했는가 하면 “자기 앞뒤에 적병을 바라보며 여호와를 붙들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제사장은 나팔을 불었다는 거예요. 독 안의 든 쥐와 같은 위기 상황 가운데 남유다는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으며 입술로 범죄하지 않으며 여호와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은 겁니다. 그러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의 큰 손이 개입하셔서 독안에 든 쥐와 같은 남유다 앞에서 북이스라엘을 쳐서 패하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붙드는 남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그 위기 상황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임하셔서 친히 앞서 싸우시고 놀라운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전쟁 하지 말하는 경고를 무시하고 수적 우세를 착각하며 그냥 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앞과 뒤를 포위해 이긴 전쟁이라 착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전쟁 중 엎드린 자가 50만명이었습니다. 80만명이 전쟁하러 내려왔는데 50만명이 죽었으니 완전히 패배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북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로보암에 대해 오늘 말씀 말미에 “여로보암이 다시 강성 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치심을 입어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배반자의 비극적 결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치심으로 죽었다 라는 것을 통하여 결국 북 이스라엘 전체 영적인 상황이 어떤 모습인가 를 우리에게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앞서 싸우신 영적 전쟁이었다는 것을 역대기는 선명하게 증언하는 겁니다. 마치 여리고성 전투에서 여호와께 부르짖고 나팔을 부니까 성벽이 와르르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과 벌이는 전쟁은 수적 열세와 매복으로 갇혀버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며, 하나님께서 유다 앞에서 그 북 이스라엘을 쳐서 패하게 하신 겁니다. 그런 놀라운 승리를 주신 이유가 하나님 앞에 구별되고 순전한 백성으로 서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쪽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쪽이 싸우는 영적 전쟁 이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큰 위기가 대부분이란 이렇게 내 손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조그만 위기들이야 내 스스로 풀리고 해결하면 되는 것 같은데 이렇게 앞뒤 좌우가 꽉 막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우리가 놓여 질 때가 있습니다. 긴 코로나의 광야 자체가 우리에게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고요 하루하루 살아갈 때 우리는 이런 우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직면하게 될 때가 있는 겁니다. 앞뒤 좌우가 다 적이고, 가만 있으면 죽을 거 같은 그 상황 가운데 남유다 백성들과 같이 우리는 입술로 원망하지 말고, 배반하지 않고 여호와를 붙들고 여호와께 부르짖고 기도의 나팔을 불기 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눈에는 이 세상에서 악인이 판치는 것 같고 악인이 늘 앞서서 이기는 거 같고 늘 주도하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우리보다 숫자가 많아 보이고 그 세상의 악한 자들과 세상의 문화는 우릴 앞뒤 좌우로 꽉 에워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기게 하시고 개입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 교회가 그리고 내 자신이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가, 나아가지 않는가에 따라서 우리 삶에 하나님이 크게 역사 하시는가 역사하지 않는가가 판가름 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최후 승리를 믿으며 늘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고 일 하신다는 것을 이 영적 전쟁의 현장을 통해 마음에 새기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대기가 증언하는 남유다의 첫 번째 왕이었던 르호보암에 대한 평가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에서 르호보암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한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르호보암은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끝까지 붙드는 찬스를 놓쳐버린 왕으로 평가됩니다. 강하고 견고할 때 여호와만을 붙드는 것을 잃어버리고 교만했습니다. 결국 축복이 그들에게 재앙이 되어 애굽이 쳐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다는 것을 영적으로 깊은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을 영적인 그림으로 봤을 때 애굽에서 빠져나오는 게, 출애굽이 구원이지요. 애굽으로부터 건짐을 받는게 구원인데, 지금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에서 예루살렘으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그 세상에 다시 끌려 다니고 침략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만 붙들고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망각하며 세상 것에 기웃거리며 다른 것을 붙들고 사는 영적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애굽이 쳐들어 와서 무엇을 빼았겼냐 하면 많은 금과 보물들, 것들을 뺏어 왔는데 특별히 솔로몬의 만든 금방패를 빼앗겠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는, 방패를 금으로 만들 정도로 그 당시에 부가 대단했다 라는 상징이기도 하고, 힘과 군사력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금으로 방패를 만들 정도로 이스라엘이 이렇게 대단해.. 우리 남유다가 이렇게 힘이 있어… 자기 힘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의지하는 상징, 군사력의 상징 이게 바로 솔로몬의 만든 금방 되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이 쳐들어와서 그 솔로몬의 금 방패를 빼앗아 가버린 거죠. 이걸 통해 르호보암은 어떤 것을 깨달았어야 합니까? 아…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데 내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붙들고 다른 것을 의지하려 하니까 경고하시는 구나…회개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와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를 빼앗긴 것을 하나님을 바라보는 회개의 도구로 쓴 것이 아니라 다시 놋으로 방패를 만드는 거예요. 지금 르호보암은 세상으로 상징되는 애굽의 침략을 받아 그 어려움에 당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와 내가 의지할 힘,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이심을 믿고 돌아오지 못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이런 르호보암의 삶의 태도를 딱 한 줄로 평가합니다.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게 가장 큰 영적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을 붙들고, 말씀만을 붙드는 삶을 포기하고, 여전히 스스로 강해짐을 추구하며,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나의 힘 그리고 경제 이런 것들을 통해 문제를 풀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부분을 악하게 평가하셨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 인생의 결론은 스스로 강하게 하여 “마음을 오로지 하여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한 악한 왕” 이었습니다. 다윗 왕이나 솔로몬 왕과 달리 르호보암은 첫 번째 악한 왕으로 평가 받는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수나 문제 있는 행동, 어떤 눈에 보이는 잘못보다도 본질적으로 왕으로서 그가 마음을 온전히 여호와께 구하지 않았다는 것, 하나님만 붙들지 아니하고 말씀만을 붙들지 아니한 것이 가장 큰 악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힘, 눈에 보이는 군사력, 눈에 보이는 물질을 의지하고 붙들며 스스로 강해지고 높아지려 한 것이 여호와를 구하지 않고 살아간 가장 큰 영적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 평가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했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고, 내가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고 내가 뭐 하고 뭐 하고…이런 것들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계속 나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 할 텐데 하나님의 딱 본질을 물어보신다는 겁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구하며 붙들고 살았느냐는 겁니다. 말씀이 나에게 힘의 원천임을 믿고 고백하며 그것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께 바른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내가 믿고 붙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드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들이라면, 군사력과 금방패 같은 것들을 말씀 대신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불신앙이자 악한 일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내가 악한 자가 되는 것은 악한 행동을 해서 악한 자가 되는 것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여호와만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붙들지 않고 살아가는 자체가 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오로지 하여 구하지 아니한 자들을 성경은 악하다고 평가함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믿고 붙들어야 되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고,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임을 깨닫고 오직 마음을 하나로 모아 여호와 만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시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과 남유다에 특별한 은혜를 부어 주셨습니다. 북이스라엘에 잘못된 인본주의적 리더십과 변질된 신앙에 대비되어 남유다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기를 힘썼기에, 견고하고 강하게 세워졌고 당연히 하나님이 그 나라를 축복해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즉 이렇게 견고하고 세력이 강해진 것은 하나님을 잘 따라가고 성전 중심,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부산물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더불어 주시는 복으로 나라가 견고하고 나라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며 하나님을 바라 봐야 되는데 인간의 약점은 많은 경우 잘되고 성공할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잘된 거 같고 내 군사력 때문에 승리하는 것 같고 강해 보이고 견고해 보이는 것이지요.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않는 것,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 것이 항상 타락과 변질의 시작입니다. 나라가 견고해지고 잘 되고 나니까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 기준만을 붙들고, 말씀 중심으로 살았으며 모든 백성들이 순전하게 여호와만 믿는 신앙 앞에 다 엎드리는 자가 되었었는데, 이제 강해지고 견고해지니까 여호와의 율법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놓기 시작하는 겁니다. 꼭 여호와 율법만 붙들어야 되나? 생각하고 다른 세상 것들을 같이 붙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점점 하나님만 붙들었던 손을 놓고 다른데 손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죠. 특별히 오늘 말씀은 왕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그 왕을 본받았음을 강조합니다. 결국 왕의 좋은 모습도 좋지 않은 모습도 백성들은 다 본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리더십의 핵심은 항상 influence, 영향력 입니다. 지도자, 앞에 있는 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항상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어야 되는 이유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지도자의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온 백성이 지금 르호보암의 좋지 않은 변질과 타락, 하나님만을 꼭 붙들고, 여호와의 율법만을 붙들고 살았던 신앙을 버리는 것을 온 백성이 그대로 본받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신 축복과 은혜가 주님을 망각하게 만들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애굽에서 쳐들어오는 겁니다. 밖에서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나라를 들어 치게 하시는 겁니다. 애굽으로부터 갑자기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선지자 스마야가 이것이 너희들의 신앙 타락과 변질의 결과임을 선포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버린 영적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만 붙들고 말씀만 붙들고 그렇게 순전한 신앙으로 살아갈 때 너희에게 복과 성공, 견고함이 부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버렸기에 너희가 지금 이런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죠. 그 이야기를 듣고 르호보암은 스스로 겸비하고,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고백하게 됩니다. 주님은 의로우시다는 고백은 주님 말씀이 100% 옳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님은 100% 옳으시기에 우리가 틀렸다고, 잘못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과 남유다는 분명히 실수 하고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망각하고 여호와를 붙드는 것을 놓쳐 버린 채 자신의 승리와 견고함 가운데 도취되어 교만 했어요. 그 결과 애굽이 지금 쳐들어와 지금 수많은 어려움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 때 바로 엎드려 여호와는 의로우십니다… 나는 죄인입니다…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100% 틀렸고 주님은 100% 옳으십니다…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린 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선 줄 알았을 때 넘어질까 조심하며 더 하나님께 엎드리고 부어주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들면 더 큰 부산물의 축복들이 따라오는데 인간은 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합니다. 조금만 잘 되고 성공하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는 삶, 하나님을 꼭 붙들고 있던 손을 놓치고 다른 것들을 붙들며 살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 삶, 예나 지금이나 이 패턴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일하게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견고하고 튼튼하고 승리를 주실 때 나 때문이라 착각하고 교만으로 무너집니다. 늘 하나님만 붙들던 손을 놓고 다른 것들을 붙들다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하나님만 붙들고, 하나님 붙들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고 그렇게 매달리며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데, 조금만 살만 해지고, 축복과 성공이 부어지면, 자꾸 나를 바라보고 하나님만 붙들고 살았던 그 간절한 신앙이 작고 다른 것들을 붙들며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험한 세상, 죄악된 세상에서 살아가며 우리는 자빠지고 넘어지고 늘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두는 것을 실패합니다. 주님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실패합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나의 삶에 있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며 의롭지 못한 자 인가를 깨달으며 오직 여호와는 의로우심을 붙들고 회개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부딪치고,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칠 때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고백하며 그 말씀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이 충돌 할 때 하나님은100% 옳으시고 나는 100% 틀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모든 것이 주님이 옳으심을 고백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는 의로우시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잘 나갈 때 성공할 때가 영적으로 더 위험한 때임을 자각하고, 더 하나님만 붙들고, 말씀만을 붙드는 하나님 중심과 말씀 중심의 삶을 지키는 싸움을 벌이십시오. 나의 성공과 평탄함이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들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임을 잊지 마시고, 내가 힘들 때나 어려울 때나 잘 나갈 때나 강할 때나 언제나 하나님만을 붙들고 말씀 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귀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분단된 북 이스라엘은 수적으로 보나 영토적으로 보거나 훨씬 더 큰 인구와 땅을 차지한 것은 분명하나, 구속사적 관점에서 다윗언약으로 대표되는 정통성은 남유다를 통해 흐르게 되고, 북 이스라엘은 그 정통에서 벗어난 변질된 신앙을 갖게 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 열 지파가 하나님에게서 떠나 성전 중심의 신앙을 버리고 타락과 변질의 길로 가고 있음을 그 지도자 여로보암을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보로암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 대신 인본주의에 뿌리내린 가치와 우선순위로 백성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으며, 그런 인본주의적 리더십 이 어떻게 결국 북이스라엘이 변질되고 정도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는가를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지도자 여로보암에 대해 짧고도 간결하게 몇가지를 증언하며 그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그 공동체를 이끄는 지도자와 추종하는 백성들의 차이였음을 강조합니다.
여로보암 리더십의 핵심은 백성들의 마음과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민심을 잘 듣고 귀하게 여기는 지도자였습니다. 지도자로서 백성들의 불만이 뭐고 필요가 무엇인지를 잘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는게 좋은 일이지요. 백성들의 뜻을 알고 원하는 민심을 알고 반응하는게 얼마나 중요한 겁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전부였기 때문에 결국 여로보암은 사람들의 필요와 뜻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움직였기에, 하나님의 뜻과 방향에는 둔감하게, 아니 하나님의 뜻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전 사역과 성전 건축은 그저 고역과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했고, 가벼워져야만 하고 피해야 하는 것으로 프레임을 만들어버렸습니다. 편하게 해준다니까 백성들은 하나님과 성전 중심의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도 모르고 열광하고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본주의적인 영적 지도력을 가지고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여로보암을 따라 북이스라엘 왕국으로의 분열이 시작된 겁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분리되고 나니 여로보암이 추구하던 인본주의적 리더십이 선명하게 정치에 드러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자신을 위해 만든 송아지 우상을 위해” “스스로 제사장을 세웠음”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게 인본주의 리더십의 결정적인 특징인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 성전 중심의 신앙이 자신을 위한 송아지 우상으로 전락하고 변질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 성전 중심의 신앙이 별로 중요한 가치가 없었던 지도자였기 때문에, 바른 신앙의 기준으로 인도하는 제사장들을 다 파면 시키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무자격의 사람들을 그냥 세웠습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 소위 말하면 그 권력에 애완견과 같이 길들여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우는 겁니다. 아무런 영적 기준과 분별 없이 왕이 스스로….이게 북이스라엘이 직면한 인본주의 리더십이 가지고 오는 영적 타락이 본질이라는 것이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보이지 않는 영적 기초를 세우는 것은 소홀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자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은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하는 것 같고 백성들의 뜻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움직이는 좋은 지도자 같이 보이지만, 결국 그 잘못된 지도자로 인해 백성들에게 제일 중요한 신앙은 헌신짝처럼 버리게 만들고 변질과 타락으로 무너지게 하는 겁니다.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하고 백성들의 민감한 소리를 듣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과 길은 무시하며 결국 신앙을 자기를 위한 우상으로 변질시키고, 그 우상을 섬기는 도구로만 만드는 종교지도자….결국 기초와 기본을 잃어버린 백성들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남북의 분열은 단순한 영토의 분열이 아니라 신앙의 분열이자 가치관의 분열이었다는 것이 역대기의 관점입니다. 그 역사를 통해 결국 하나님의 경륜과 구속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얼마나 넓은 영토가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순전하고 남아 있는 진국이 있는가…로 움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전한 남은 자들은 온 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 모든 지방으로부터 남유다 르호보함에게 돌아왔다고 증언합니다. 그 북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여로보암의 인본주의적인 정치와 리더십, 종교적인 타락을 바라보며 여호와를 순전히 구하고 예배하는 그 성전 중심의 그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 종족과 익숙한 친척 땅을 떠나 남쪽인 예루살렘으로 내려오는 남은 자들이 점점 많아짐을 증언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을 오로지 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을 구하는 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마음에 순전한 예배자로서의 정신,마음을 오로지 하며 주님을 예배하고 자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을 중심으로 모신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가 이루어지는 성전 중심 그리고 말씀 중심의 신앙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기 원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교회 안에서 인본주의적인 리더십과 지도자들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우리를 위하는 것 같고, 우리 소리를 듣고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좋아 보이는 겁니다. 나의 필요한 것을 잘 채워 주는구나…그리고 좋아하는데 결국 그 인본주의 리더십으로 우리 신앙은 다 흔들리게 되고 중한 것을 경하게 여기며 타락과 변질,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에서 인간이 본질이 되고 주체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귀하고, 눈물을 알고 그들의 필요에 민감한 것은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과 신앙은 인간이 중심되면 안되고, 내가 중심이 되면 성전과 하나님이 중심되실 수 없음을, 내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은 타락과 변질이라 경고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인과 왕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 주인과 왕이 오직 하나님이심을 선명히 고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왕이 되면 안되고 내가 주인이 되면 안되는 인생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분명한 신앙, 성전 중심의 신앙을 흔드는 모든 것들을 우리는 경계하고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 여로보암과 같은 인본주의적 지도자에게 우리는 혹 하고 빨려 들며, 결국 그것을 통하여 우리 신앙은 내가 왕이 되고 주인이 되는 변질과 타락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성전 중심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붙들고 이 세상의 잘못된 인본주의적 파도에서 본질을 붙들며 살아가는 이 귀한 영적 싸움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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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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