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1장은 쓴 물을 경험하고 쓴물이 계속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 절망적이고 모든 것이 무너진 인생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아무런 소망도 없고 해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절대 절망과 낙담의 삶이 바로 나오미와 룻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10년의 이민 생활 가운데 남은 거라고는 하나도 없고,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쓸쓸히 이민 생활을 접고 돌아오게 되는 그 절망의 상황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2장에서 보아스가 등장하면서,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찾아옵니다.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 2장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되는 사건이죠. 3장은 그렇게 찾아온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하게 붙드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고 붙드는 이야기가 바로 3장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보아스와 룻 사이의 개인적인 로맨스 사건으로 바라보지 마시고, 이 보아스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삶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깨닫기 원합니다.
나오미에게 룻은 며느리였는데, 자기 딸과 같이 생각하며 주님의 축복이 누려지기를 원하며 룻에게 안식을 찾기를 구하며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나서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에게 밤에 보리 타작 마 장이 끝나고 나면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명령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었습니다. 룻이 그 모든 것을 순종하며 보아스에게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간청합니다. 이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기업 무르는 과업을 위한 결혼을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고, 더 중요한 의미는 내 인생이 이렇게 주님의 은혜로 덮이기를 원합니다…라는 간절한 믿음의 표현을 그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룻의 간청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품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이렇게 보게 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 우리 인생을 이렇게 그리스도의 옷으로 덮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의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이 바로 성도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품 안에 거하게 해 주시며, 옷을 펴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들을 덮어 주시는 것이 성도의 축복입니다.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며 보아스 에게 나아갔을 때 보아스의 입에서 놀라운 3가지의 그 축복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이 세가지를 좀 깊게 살펴 보여주고 있는데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말씀이기도 합니다. 첫번째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먼저 내 딸아…라는 말을 주목해보면, 며느리를 딸과 같이 생각하는 시어머니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죠. 마찬가지로 보아스도 룻을 내 딸아…라고 부르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부르시고 품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게 신앙입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고 부모 없이 헤매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 품에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어쩔 수 없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복 주시기 원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두번째 축복의 말은 “ 내 딸아 두려워 하지 말라.” 지금 룻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하겠습니까? 불안하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께서 “두려워 하지 말라…” 말씀해주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품 안에 들어가 마음속에 들어가 될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할 것 투성인 이 세상, 눈만 뜨면 두려운 것 가득한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 비결은 주님의 품 안에 거하는 것이며 주님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고 평안을 누리는 그 기적을 사모하며 하늘의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번 째,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기업 무를 자이시며, 참 구원자 이시며, 참 생명이자 참 빛이십니다. 영적으로 어둠 가운데 헤메고 방황하는 우리 삶 가운데 구원을 주시는 분, 참 생명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림자와 같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분 가까이 나아가며 그분을 붙드는 게 우리가 승리하는 삶입니다. 은혜를 붙들고 주님께 나아가는 삶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겁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늘의 복을 부어 주시기 원하고 따라오는 세상 복도 부어 주시기 원한다는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겁니다. 또한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 말씀이 마음에 닿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담기 원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음성을 듣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를 전적으로 붙들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로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여호와께서 복 주시기 원하심을 붙들고 이 시간 주님 앞에 간구 하고 말씀을 먹으며 승리하는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 1장 말씀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소망 없는 인생의 쓴맛과 쓴 뿌리가 올라오는 마라의 삶, 절망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2장 말씀은 그 절망과 쓴물이 올라오는 인생을 하나님이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 우연히 우연을 가장한 섭리와 같이 보아스를 통해 기대하지 않은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보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이 두 여인들에게 비춰주고 있는 것이죠. 3장 말씀은 그 은혜의 통로인 보아스를 붙드는 믿음입니다. 그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 해주시는 사건이지만 동시에 그 은혜를 붙드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함을 3장 전체에서 보게 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 나오미에게 처음으로 시어머니라는 호칭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룻기 1-2장에서 이민 생활을 접고 돌아와서는 거의 나오미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고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로 계속됩니다. 그러다가 3장 부터 시어머니라는 호칭이 등장하면서부터 나오미가 아주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되죠. 룻의 시어머니로서 룻을 중매 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전면에 등장하는 말씀이 바로 3장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딸과 같은 내 며느리 룻에게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고 너를 복되게 하여야겠다.”는 말을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그동안은 룻이 나오미의 든든한 버팀목과 안식한 곳을 제공하며 소위 말하는 봉양을 잘한 거죠. 정말 딸 이상으로 과부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정말 잘 하며 룻이 나오미의 안식할 곳과 기댈 곳이 되어 준 거에요. 룻에게 이제는 안식처와 기댈 곳을 찾아주고 너를 복되게 하는데 내가 앞장서겠다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룻을 복되게 하는 삶이란 룻을 위하여 안식할 곳을 찾아주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복 되게 되는 삶이란 안식할 곳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 안에서, 그 날개 아래서 쉼과 안식을 분명히 누릴 때 복 된 것입니다. 이 세상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넘어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분명히 믿으며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복된 것입니다. 인생을 살 때 복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이유, 복을 누리지 못하는 본질의 이유는 우리가 안식할 곳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안식할 곳은 목자의 그 울타리 아래,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인데, 그 품을 떠나서 안식과 쉼을 잃어버린 영혼들이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복되지 않고 방황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보았을 때 지금 룻에게 안식할 곳이 어디냐 바로 보아스의 품 안에 거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금 중매 하는 겁니다. 과부인 룻은 직장을 가질 수도 없고 땅을 가지고 있어도 소유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그 안식을 되찾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은 아들을 얻어서 그 아들의 이름으로 이 모든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보아스가 그 기업을 물려줄 수 있는 친족이자 안식 할 곳을 줄 수 있는 은혜의 통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 무를 자 보아스를 통하여 룻이 잃어버렸던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되찾고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안식을 누리며 복을 누릴 수 있는 통로가 열려가고 있다는 것을 나오미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날씨가 너무 더운 이스라엘 땅에는 보리 타작을 해가 지고 나서 합니다. 그럴 때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와 같이 준비하고 있으라고 조언합니다. 신랑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부와 같이, 은혜를 간구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성도들은 은혜를 이렇게 붙드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신랑 되신 예수님의 그림자로,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며, 그 은혜를 붙들기 위한 간절한 태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어야만 마라 같은 인생에서 건짐을 받아 살고, 그 은혜 안에 머물러야만 나에게 참 안식과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붙들어야 된 이스라엘의 회복,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원의 은혜를 붙드는 믿음의 모습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기대고 쉴 품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엄마 품을 잃어버리고, 기댈 아빠 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고, 안식한 하나님 날개 품을 잃어버린 채 쉼과 안식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복되지 않은 이유는 가진 게 적어서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을 덜 쌓아서도 아니라, 이 시간 내 삶의 안식할 곳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쓴 물이 올라오는 마라 같은 우리 인생에 나를 위해 안식할 곳을 구하며 복되게 하기 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나의 인생의 진정한 안식할 곳은 아버지의 날개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품 안에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고 우리의 몸이 기억하는 엄마와 아빠 품, 하나님 품이 있음을 분명히 믿을 때 그 인생이 복 된 것입니다. 그분과 함께 하며 그 분 가운데 안식함으로 내 인생이 제자리로 돌아갈 때 진정한 복된 삶이 시작됨을 믿으며, 그 은혜를 믿음으로 취하며 붙들고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오미는 자기 며느리 룻이 이방 여인 임에도 불구하고 밭에 나가 이삭을 주었는데 자기 노력 이상의 엄청난 양의 보리를 수확해 온 것을 보고 부어진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룻을 통하여 그렇게 은혜를 베푼 자가 바로 보아스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보아스를 통해 부어진 은혜를 보며 은혜 베푼 자에 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 고백들은 보아스 한 사람에 대한 고백이라기 보다는 은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고백하는 내용임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첫째로, 보아스는 살아 있는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않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오미와 룻에게도 환대하며 그렇게 자신들을 환대하는 이면에는 죽은 남편의 가문을 기억하며 환대하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즐겨하시는 분, 우리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않는 분임을 고백하며 그 은혜를 실체로 누리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우리에게 보이는 은혜와 보이지 않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그치지 않는 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돌보시며 그의 날개 아래 우리를 품어 쉬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에 머물러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 생활임을 오늘 나오미의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두번째, 보아스에 대한 놀라운 고백은 바로 “기업을 무를 자” 중에 하나라는 겁니다. “기업을 무를 자” 란 말이 참으로 중요한데 히브리어로는 “고엘”이라는 의미로, 값주고 산다, redeem의 의미입니다. 몰락한 가문의 기업을 돈 주고 사 값을 지불하는 것이 기업 무를자, 고엘입니다. 그러니까 친척 중에 대를 물어 그 가문의 기업을 세워 줄 수 있는 자 중의 하나 라는 것이죠. 레위기 25장을 보게 되면 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아주 중요한 힌트를 주게 되는데, 그 형제가 어떤 이유로든 몰락하게 되면 몰락한 가문의 땅을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엘, redeemer”가 필요한 것입니다. 가까운 친척이어야 되며 그 유력한 능력으로 그 기업의 값을 물어 지불할 능력이 있어야 되며 동시에 자원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죠. 아무리 가까운 친척 이어도,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 집안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자원하는 마음의 각오가 없으면 기업 무를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나오미의 보아스를 향한 기업 무를자, 즉 “고엘 (redeemer)”에 대한 고백은 더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죠. 이 보아스에 대한 고백은 그냥 한 인간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룻에게 연민을 갖는 한 유력한 자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고엘, redeemer로서 죄값을 치르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진짜 기업 무를 자는 우리를 값 주고 사신 redeemer,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가 치러야 되는 죄값 일만 달란트, 우리가 절대 치를 수 없는 그 값을 친히 치루시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다 찢기시고 피흘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건져내신 진정한 고엘, 진정한 메시야에 대한 고백을 그림자와 같이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입술을 통하여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놀라운 고백 후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조언합니다. 그 은혜 베푸는 자 기업을 무를 자 집에 가까이 있으라는 겁니다. 가까이 있고 떠나지 말고 그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는 겁니다. 이런 삶이 주님이 성도들이 우리들에게 원하는 삶입니다. 주님 가까이 있고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매일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곁을 떠나지 않는 것, 주님 앞에 가까이 있고, 다른 사람들을 찾아 헤매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 곁을 떠나지 않는 삶, 그게 주님의 원하시는 삶이라는 거에요. 오늘 말씀을 통해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깊은 영적 의미를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은혜 부어주시기를 멈추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이 사랑, 그 사랑 안에 살고 그 사랑만 붙들고 살아가는 삶 속에 풍성함과 충만함이 누려지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풀어 주기를 그치지 않는 분, 보이지 않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분, 우리를 그 날개 아래 품으시며 돌보시는 분, 우리 죄값을 지불하시고 사신 고엘(redeemer), 이 모든 고백들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을 드러내는 고백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래서 죄로 인해 죽어야 될 우리를 그 몸을 찢겨 죽으심으로 모든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우리를 건져 내신 분입니다. 그 기업 무를 자 이신 예수님께 가까이 계십시오. 떠나지 말고 함께 하십시오 그분 안에 거하고 붙어 사는 것, 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며 주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머무는 삶임을 믿고 주님 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 2장에서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나게 된 룻과 보아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을 통해, 보아스가 룻에게 은혜를 베푸는 환대를 통해 보이는 은혜가 있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혜도 부어 주심을 발견합니다. 특별히 보이지 않는 은혜로 우리에게 돌보시고 계심을 말씀을 통해 묵상하기 원합니다. 먼저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떡을 초에 찍어 먹으라고 지극한 환대를 베푸는데, 초를 떡에 찍어 먹는데 무슨 환대인가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 같은데 가면 빵을 올리브 기름에 발사믹이 섞인 것에 찍어서 먹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여기서 초를 찍어 먹으라는 것은 그런 특별한 소스를 기름에 섞은 것을 찍어 먹으라는 것으로, 그 당시에는 아주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방법입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지금 음식을 얻어먹을 이유도 없고 그냥 떡을 주는 것 만도 감사한데 그 떡 조각의 초를 찍어 먹으라고 제안하는 것은 보아스가 대접할 수 있는 가장 극진한 대접과 환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한 그냥 곡식이 아닌 볶은 곡식을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100년 전만 해도 쌀밥에 기름진 반찬을 먹는 게 호강이었을 정도로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이 귀했습니다. 그러니 수천 년 전에 곡식을 기름에 볶아서 준다는 것, 그것도 배부르고 남을 정도로 아주 귀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환대였던 겁니다. 이런 흘러 넘치는 보아스의 지극한 환대와 놀라운 은혜를 통해 우리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도 이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아스의 은혜는 이런 눈에 보이는 은혜를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은혜였습니다. 보이는 은혜와 함께 이런 보이지 않는 은혜가 룻에게 부어졌다는 것입니다.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은혜인지 모르는 이런 보이지 않는 은혜가 보아스를 통해 룻에게 부어진 것입니다. 룻은 알지 못했던, 룻에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아스가 베푼 환대와 은혜를 말씀은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룻이 이삭을 주울 때 책망하지 말고 룻을 위하여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라 명령합니다. 이방 여인으로서 그 땅에서 이민자와 같이 살아가면서 이삭 줍기를 할 때 얼마나 텃새가 심했고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런 일이 없도록 미리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보아스는 아예 룻이 이삭을 줍는 근처에 곡식을 뽑아서 좀 놔두라고 명령합니다. 원래 더 끝내 떨어진 것만 눈치 보며 주워가도 감지 덕지인데 곡식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라는 겁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은혜는 룻은 까맣게 모르고 있고 알 수도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주어진 이삭 줍기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임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까, 곡식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도 발견하고 생각보다 수확이 많았을 것입니다. 룻이 이삭 줍기를 했는데 수확한 양이 보리가 한 에바쯤이었습니다. 한 에바는 13리터 정도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이삭을 그냥 열심히 주어 가지고는 절대 이룰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양이에요. 룻이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얻을 수 없는 수확량이었습니다. 룻은 자신이 이방 여인으로서 그 곳에서 곡식을 줍는 것이 얼마나 텃새가 심한 일인지 모르고 아무 눈치 안 받고 하루 종일 줍게 되는 것이 은혜인지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착각에 빠지는가 하면 내가 성실히 일했고 작은 일도 최선을 다했으니까, 이렇게 우연히 곡식 단 사이에 많은 이삭들이 떨어져 있었고, 그것을 주워서 인생의 결과가 많이 있었다 고 착각할 수 있죠. 그리고 어떻다 보니까 그 길가에도 막 곡식 더미가 쌓여 있는 행운도 잡게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분에 넘치는 수확들이 다 내 열심에 산물이라고 착각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시어머니 나오미는 룻이 그 말도 안되는 양을 이삭 줍기로 가지고 올 때 저것은 룻을 돌본 자, 보이지 않는 은혜 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노력 이상의 수확이라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룻에게 열심히 성실히 일해서 곡식을 많이 주운 게 아니라 은혜 주신 분이 계셨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은혜 주시는 주님께서 보이지 않는 은혜로 도우시고 보호하시고 이삭도 미리 뽑아서 놔두시는 이런 주님의 손길이 주신 은혜,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임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이 깊어지고 성숙해진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이 하나님의 손길과 은혜를 실체로 바라보고 믿는 삶입니다. 내 인생에서 내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열심과 성실함 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의 열매들을 바라보면서 그 뒤에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깨닫는 것이 신앙이 깊어 지고 성숙해지는 비결입니다. 그럴 때 그게 내가 열심히 일하고 성실해서 나온 결과물에 전부라고 착각하지 않고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보이지 않는 은혜가 부어 졌음을 아는 게 영적 지혜를 갖는 삶입니다. 열심히 성취하는 자들이 잘 빠지는 게 뭐냐면 내가 누리고 있는 풍성함이 내 성실함과 열심의 결과와 열매라고만 믿는 착각입니다. 내가 열심히 성실히 일하다 보니 우연히 이런 기회들이 찾아오고 우연히 곡식 더미들도 떨어져 있었고, 술술 일들이 잘 풀리고 돈이 잘 벌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갈 때 술술 인생이 잘 풀리고 돈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일 때, 그 열매들이 자신의 성실함과 열심의 결과인 줄로 착각하고 과신 하다가 은혜를 망각하고 교만해 져서 조금 있다가 자빠지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좀 큰 그림과 넓은 영적 시야를 보게 되면 이 모든 게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였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 인생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누가 봐도 이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라고 알게 되는 보이는 은혜가 있습니다. 룻과 같이 메마른 황무지 같은 인생의 흉년 가운데 쓴 뿌리와 쓴 물이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지극한 환대와 사랑으로 넘치도록 채워 주시고 특별한 손님에게 대접하는 방법으로 우리를 환영하신다는 것입니다. 떡에 초를 찍어 먹듯이, 볶은 곡식을 배부르게 먹게 하시듯이, 아주 귀한 손님 대접하는 특별한 환대를 주시는 그 예수님의 넉넉한 품과 은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 보이는 은혜에 감사하고 늘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인생에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더 크게 부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알지 못하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었던 환대와 같이 보호하게 하시고 곡식 단을 일부러 내가 지나가는 곳에 뿌려 놓게 하시는 그런 보이지 않는 손길과 부어주심이 나의 인생 곳곳에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삶에 누리는 열매들이 내가 열심히 성실히 일한 결과 때문이라고만 착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있었다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에게 더 큰 은혜가 부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내 노력 이상의 수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가장 압니다. 이건 내 노력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부어 지고 은혜가 부어 지고 재물이 부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이게 내 열심과 노력의 결과물이라고 착각하거나 자만하지 말고, 내가 이 정도 열심히 해서 나온 결과라고 내 자아가 부풀려 지지 않고 나에게 은혜 부어 주시는 분 나를 돌보시는 분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은혜를 부어 주심의 결과라고 진짜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그 보이지 않는 은혜 부어 주시는 주님께 모든 공로를 드릴 때 여러분들의 인생은 더 크게 더 놀랍게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 인생의 나를 날개 덮고 품으시고 나를 돌보시는 분이 있음을 믿으십시오. 나에게 보이는 은혜와 보이지 않는 은혜를 부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실체로 믿으십시오. 성도로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라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부어지는 은혜에만 감사하는 삶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부어지는 은혜로 이 자리에 있음을 감사하는 삶입니다. 내 열심과 성실함을 넘어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보이지 않는 은혜가 나를 여기 있게 했음을 믿으며 주님을 신뢰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연히 만나게 된 보아스와 룻, 그러나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으로 섭리 가운데 만나게 된 룻은 보아스를 통하여 지극한 환대를 경험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여기를 떠나지 말라…말하고 소년들에게 이 여인을 건들지 말라 경고하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음껏 마시라고 말합니다. 룻을 향한 보아스의 환대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유력한 이중 문화 가정의 아들로서 이방 여인에게 베푸는 환대,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룻이 은혜를 만나면 입게 되는 하나님의 환대를 둘 다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보아스의 환대는 이중 문화 가정에서 자란 유력한 자가 가지는 이방 사람들에 대한 환대의 마음을 보게 합니다. 보아스의 어머니가 이방 여인이자 기생인 라합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영향으로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리 이방 여인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방여인이자 과부였던 룻에 대한 보아스의 환대는 사회적 약자이자 소외된 여인에 대한 자비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몸에 체득한 보아스로부터 특별한 환대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지금 보아스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은혜를 구하는 우리 인생의 현주소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보아스의 환대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 입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아스의 말을 인간적으로 그냥 롯에 대한 연민을 품는 이야기로 보면 안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 주시는 은혜의 말씀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이방 여인이기 때문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입는 룻, 보아스로부터 받는 환대는 개인의 환대를 넘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넓게는 이야기 뒤에 숨겨져 있는 장차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만나기를 사모할 때 예수님이 이렇게 우리를 보호하시고 환대 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쓴 물을 맛보고 쓴 물이 계속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주목하고 붙드시며,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환대하시는 그 주님의 은혜, 늘 주변인 인것 같고 이방인과 같은 그런 삶을 살아갈 때 나를 보호해 주시는 그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붙드는 것만이 내가 살 길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보아스의 환대에 대해서 룻이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룻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게 하는 태도가 무엇 인지를 발견하게 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룻이 보여준 은혜가 머물게 하는 태도는 성실함이었습니다.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작은 일에도 충성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는 태도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룻의 겸손함이 은혜를 머물게 하는 태도입니다. 겸손한 마음과 성실한 마음이 쌍을 이루며 은혜를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되고 절하며 그 은혜에 반응합니다. 얼굴을 땅에 엎드려 절 했다는 것은 룻의 겸손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그 당시 대부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 여인을 지옥의 땔감이라 부르고 인간으로 취급도 안 했습니다. 더군다나 여인이자 과부라면 얼마나 철저하게 무시하고 멸시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그런데 유력한 자 보아스는 룻에게 자격 없는 자에게 이유 없이 환대 하는 것이죠. 은혜라는 것은 이유를 모르는데 받는 사랑입니다. 나에게서 받을 조건과 이유를 아무리 찾아도 없는 uncaused로 받는 일방적 사랑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에 대해 룻은 엎드려 절하며 반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가 나에게 머물게 하는 비결은 성실함과 겸손함 이 두 가지가 날개와 같이 붙어 있을 때 쌍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은혜가 쉽게 떠나가지 않고 풍성하게 머물러 있는 비결이 됩니다. 보아스의 입술을 통해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겸비하여 엎드린 룻에게 축복의 말씀이 부어집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받으러 온 네게…” , 둘째는 “여호와께서 온전한 상 주시기 원한다/ 보답하기 원한다.”입니다.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자”라고 품으십니다. 쓴 물을 경험하고 쓴 물이 계속 올라오는 마라와 같은 세상에서 눈물과 아픔 가운데 우리는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잘하는 거예요. 인생의 흉년을 맞았을 때,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아야만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 아버지의 품안에서 내가 편안히 쉬는 은혜에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걸 말씀을 통해 발견하기 원하는 것이죠. 둘째, “여호와께서 온전한 상 주시기 원하고 보답하기 원한다.”는 겁니다. 사람의 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기 원한다는 것이죠. 내 인생의 깊은 어둠을 경험하고 인생의 실패와 쓴맛을 경험하며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주님께서 나에게 온전한 상을 주시고 하늘의 보답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쓴 물인 마라에서 단물인 엘림으로 이사가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그 주님의 품 안에 돌아가야만 나는 진정한 안식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 품에 돌아가 제자리를 찾을 때 우리에게 하늘의 보답과 온전한 상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실 때 그 은혜가 나에게 머물게 하는 비결은 뭐냐면 은혜에 내가 겸손하게 엎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나의 약점을 들고 나가며 내 자신을 바라볼 때는 소망 없음을 인정하며, 죄인으로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제자리를 찾지 못하며 헤매고 방황할 때 내가 돌아갈 제자리가 있고 내가 돌아가야 될 아버지의 품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의 날개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제자리를 찾으며 환영해 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으십시오. 내 마음과 눈을 하늘을 향해 은혜를 구하는 마음, 성실함과 겸손함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주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달려 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장 말씀은 은혜 외는 일어설 수 없는 마라의 인생, 쓴맛을 보고 쓴 물이 올라오는 인생의 그 깊은 밑바닥을 경험하고 있는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자기 스스로는 절대 빠져 나올 수 없는 앞뒤 좌우 가 다 막히고 하늘 외에는 붙들 게 없는 그 절박한 상황 가운데 룻과 나오미는 포기하는 대신에 죽기 살기로 은혜를 구합니다. 그래서 이삭을 주어서 라도 살겠다는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태도,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만나게 하신다는 게 2장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룻에게 어떻게 은혜를 만나게 해주시는가? “우연히”…”마침” 입니다. 룻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었고, 그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그 밭에 돌아왔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어떤 개연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연히 룻은 그냥 그 밭에 가게 되었고 마침 그 밭에 보아스가 돌아오고…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인과 관계와 개연성이 없는 상황을 우리는 “우연”이라고 부르고 “운”이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는 우연이고 운과 같은 보일지라도 그게 하나님의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하심과 계획하심 가운데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운이 아니고 우연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신 놀라운 섭리적 만남인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우연을 가장한 섭리로 은혜를 만나게 해주신다면, 그 은혜를 구하는 자의 삶의 자세는 어때야 하는가? 오늘 말씀은 룻을 통해 선명히 증언하는데 바로 은혜를 구하며 “하루하루는 충성되게 사는 것”입니다. 보아스에게 사람들이 룻에 대해 보고 하는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 작은 일인 이삭줍기를 성실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삭 줍기를 대강 대강 한 게 아니라 그 주어진 작은 일에 룻은 감사하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다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구하는 삶의 태도라 그러면 아무것도 안하고 하늘을 향해 입만 벌리고 있고, 기도만 하는 살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룻의 은혜를 구하는 태도는 하늘에서 은혜에 부어 주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마라와 같은 삶을 사는데, 간절히 은혜를 구하며 기도함과 동시에, 일상에서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구하는 백성들에게 은혜를 만나게 하시는 도구는 “오늘의 충성된 삶”입니다. 성경을 보면 졸다가, 잠자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거나 예수님을 대면한 사람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놀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어요. 모세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으니까?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중에 만났습니다. 다윗 또한 목자라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을 만나고요. 베드로도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는 그 삶의 치열한 자리에서 예수님이 만나 주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쓴 물이 올라오는 상황 가운데서도 은혜를 구하며 내 작은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섭리로 역사 하셔서 은혜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은혜를 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명목으로 아무것도 안하고 입 벌린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늘의 은혜를 구하기 때문에 오늘 주신 소소한 일상, 소소한 작은 일에 충성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자에게 은혜를 만나는 기회를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인생의 쓴 물이 올라올 때는 더 간절히 은혜를 구하고 매달려야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전에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입당하게 된 것도, 성도가 놀라운 은혜로 치유를 받게 된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역사하심의 결과임을 선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의 구하는 태도는 하늘을 바라보고 간절히 기도하되 나의 주어진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 작은 삶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알고 이삭을 줍는 일이라도 그것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충성되는 삶의 태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연을 가장한 섭리로 역사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은혜를 만나는 길을 주님께서 열어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열어 주시는 삶, 예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주도 하시는 그 삶이 펼쳐질 줄 믿습니다. 이 새벽에 말씀을 묵상하며 주님께 기도할 때 나의 삶에 은혜를 구하는 삶, 그 은혜를 만나게 해주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연히, 마침, 어쩌다가 만나는 것 같은 그 만남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오늘의 시간 나와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으십시오. 은혜를 구하는 성도로서, 우리 삶 가운데 이렇게 보이지 않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고 계심을 믿고 은혜를 만나게 해달라고 주님께 부르짖고 기도하며 매달리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섭리적 만남, 그 은혜가 나에게도 만나지게 해주시고 부어지게 해 주시옵소서…간구 하며 은혜를 구하는 바른 태도로 주님께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 1장은 답답하고 절망 가득한 이야기가 가득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그 남편과 아들들을 다 잃어버리고 이민 생활에서 모든 것을 날린 채 그 모압 땅에 이민 생활을 접고 쓸쓸히 고향 땅으로 돌아와 했습니다. 그들의 인생은 이제 기쁨이 다 사라진 쓴 물만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임을 탄식하며 주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려 쓴물에서 단물로 인도할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인생을 의탁하고 맡기는 이야기가 1장이었습니다. 그리고 2장 말씀에서 드디어 또 다른 주인공인 보아스가 등장하게 됩니다. 보아스는 남편 가문의 친족이자 유력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력한 자라는 것은 단순히 돈이 많고 부자란 의미를 넘어 그 집안에 하나님의 경륜을 세울 유력한 자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보아스의 어머니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 목숨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고, 붉은 줄을 매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멸망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이방 가정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멸망할 때 유일하게 구원받은 가정으로, 모든 과거를 단절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 만을 붙들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속한다는 구원이 무엇인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붙드는 신앙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여인 이었습니다. 그런 라합을 어머니로 둔 자가 바로 보아스였기에 그는 유력한 자였던 것입니다. 또한 라합은 이방 여인이었기에, 보아스 집안은 이중 문화 가정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순혈 주의가 중요하다는 그 이스라엘의 문화 가운데서 특별히 이방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거죠. 이스라엘 백성 안에 시선에 갇힌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계와 인류를 구원하시는 큰 영적 그림을 가지고 있고 자기의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하는 그 영적인 타락과 어둠의 사사 시대에 새 시대를 준비하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바로 유력한 자 보아스 였습니다. 그 유력한 자 보아스와 룻의 운명적인 만남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오미와 룻은 이민 생활을 접고 돌아왔지만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직장을 다닐 수도 없고, 나오미는 나이가 많아서 봉양을 받아야 될 입장입니다. 녹녹치 않은 그 상황에서 이방 여인이자 과부인 룻이 선택한 것은 절망하고 포기하고 좌절하는 대신 죽기 살기로 매달리며 나아가는 겁니다. 살아 보기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이삭을 주워서 라도 살아보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죽기 살기로 매달릴 때 “우연히 보아스 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간 룻이 우연히 도착한 곳이 보아스에게 속한 밭이었다는 겁니다. 겉에 보이는 상황만 봤을 때는, 룻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 밭에 도착한 것입니다. 보아스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했고, 만날 것을 기대하고 간 것도 아니고 그냥 간절한 마음에 이삭이 있는 곳을 찾다 보니까 그 밭에 도착한 겁니다. 우연히 그 밭에 가게 됐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우연히 간 게 아니라,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으로 그 곳에 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온 건 모두 주님의 은혜라 고백하는 게 뭡니까? 내가 봤을 때 모든 게 다 보여지지 않고 희미하고 흐릿하고 어떨 때는 우연히 일어난 많은 사건들의 연속인데, 인생을 돌아보고 인생을 정리 하다 보니까 그게 다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고백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까지 지내온 모든 게 주님의 은혜였다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도의 특권인 겁니다. 내가 결정한 것 같고 내가 움직인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어쩌다가 우연히 된 거 같은데 그 모든 것이 바로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어쩌다가 된 게 아니고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시는 일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성도의 고백인 거죠. 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믿음 만을 붙들고 걸을 때, 우연히 일어나고 어쩌다 일어난 것 같은 모든 사건들이 다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롭게 인도하시고 일하시고 계획하신 일이라는 것을 믿는 게 신앙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우연을 가장한 섭리가 룻에게 임하게 된 것은 이해 관계와 손익 관계를 넘어 바른 관계를 선택한 믿음의 선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게 모두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최우선에 두는 성도의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연을 가장한 섭리는 이해관계와 손익관계로만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 경험되지 못하는 신비입니다. 이런 섭리적 사관을 가지지 못하기에 우리의 만남이 그냥 이해관계와 손익 관계를 통해 모든 것이 결정되는, 욕심이 이끄는 만남, 사망과 어둠을 경험하게 하는 만남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그 말씀과 같이 우리가 모든 선택과 만남이 이해 중심과 손익 중심을 통해 결정된다면, 모든 것이 욕심을 중심으로, 내 필요를 중심으로 모든 것을 나아가게 되고, 그런 결정과 만남은 결국 무너지는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우연히 일어난 만남,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통로로 이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오미와 룻의 절망스러운 상황, 정말 모든 것이 깨지고 무너지고 붙들 게 하나 없는 인생, 쓴물을 맛보고 계속 쓴 물이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을 건지시기 위해서만 보아스를 사용하신 게 아니라 그런 쓴물이 올라오는 영적 암흑기를 지나가고 있는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시고 새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내세운 사람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준비 받은 유력한 자 보아스였습니다. 우연히 룻이 보아스의 밭에 도착한 사건을 통해 보아스와의 운명적 만남을 계획하신 것과 같이, 내 인생의 우연하게 보이는 만남과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시는 통로로 사용될 수 있음을 믿으며 나아가십시오.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 우연히 만나는 사건들이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음을 믿으며, 그것이 하나님께서 역사 하신 통로가 됨을 믿으며 오늘 하루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가 모압에서 이민 생활을 다 청산하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0년간의 이민 생활을 다 접고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아무 것도 없이 두 과부가 돌아오는 그 모습은 쓸쓸한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방인 룻에게는 그 돌아오는 길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어떻게 보면 첫 이민을 가는 듯한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복잡한 마음과 쓸쓸한 마음을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는데 그들이 직면한 것은 따가운 시선과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모습이었습니다. 온 성읍이 남편 잃고 아들 다 잃고 며느리와 쓸쓸히 돌아오는 그 두 여인을 바라보며 지금 온 지역 성읍이 수군대며 떠들고 있는 겁니다. 그들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온 동네 다 돌았고, 온 백성들이 수군 대며 다 한 마디씩 하고 있는 상황이 상상 되시죠. 그 사람들의 시선이 얼마나 싫었으며 그들의 뒷말이 얼마나 짜증 났을까….상상해봅니다. 안 그래도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빈털터리로 이민 생활을 접고 돌아오는 것 자체도 너무 힘들고 절망 스러운데, 그들을 향한 따가운 시선과 그들을 향하여 떠들며 말하는 그 가십 거리 된 모습이 얼마나 그들을 더 힘들게 했을까? 그 수많은 사람들의 그 따가운 시선, 그 수군수군거리는 그 말들이 너무 짜증 나는 것이지요.
안 그래도 지금 힘들고 어려워 온 몸과 마음이 상처받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소문 내고 싶어 근질 거리는 입,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눈과 수군대는 말들을 하기 좋아하는 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가만히 기도하는 대신 입술을 열어 전달하기에 열을 내고 쳐다보면서 수군수군 대는 것이 영적 문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서 우리 모두는 이 미국땅에 뿌리 내린 이민자들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모두 이 척박한 땅에 외국인과 주변인으로 사는 아픔과 어려움을 다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에 더 민감하게 영적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입술로 수군대며 범죄 하는 것도 주님의 은혜로 멈추게 도와 달라 기도하기 원합니다. 따가운 시선을 거두고 불쌍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입소문 내고 싶어 근질 거리는 입을 중보 기도하는 데만 사용하는 도구로, 영적으로 실천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따가운 시선과 그런 뒷말이 무성한 그 사람들을 향하여 나오미가 반응합니다. 나를 이제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란 이름 자체가 “기쁨”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마라”란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쓴 물”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을 찾다가 물을 먹었는데 그 물이 쓰다... 그래서 마라가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는 지금 나의 인생을 이제는 나오미, 기쁨이라 부르지 말고 나를 쓴 물, 마라라 부르라고 탄식하듯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기쁨의 인생이 아니라 지금 쓴 물이 막 올라오는 인생이라는 겁니다. 그 남편의 이름 엘리멜렉,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라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왕이시다...는 고백대로 살지 못하고 인생을 내 소견에 옳은 대로 결정하고 살다가 결국 어려움을 당하고 기쁨을 다 잃어버린 채 쓴 물이 올라오는 인생, 마라로 살게 되었다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수군대는 사람들을 상대하고 싸우는 대신 나오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탄식하는 거예요. 이 나오미의 탄식이 우리 인생의 탄식으로 마음에 다가 옵니다. 저와 여러분들 인생에 아마 이런 쓴 물이 올라오는 자리가 있었을 겁니다. 우리도 이 코로나 광야 가운데 2년이 넘어가면서 되는 일 하나 없고 다 무너지며 모든 것이 깨져서 쓴 물이 올라오는 마라의 현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과거로 경험했던 분도 계시고 그것을 지금 현재형으로 경험하시는 분도 계시고, 미래의 경험하게 될 분도 계십니다. 내 인생의 밑바닥에 내려가다 내려 가다 못해 그 내 인생의 밑바닥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자리, 그게 지금 나오미가 있는 그 절박한 아무런 소망도 없는 상황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탄식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의 탄식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탄식이 되어 메아리치고 있음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나오미는 하나님을 붙들고 “주님 나를 외면하지 마시고 나를 붙드셔서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는 겁니다. 되는 일 없이 다 무너지고 인생이 다 깨지고 무너진 마라와 같은 쓴 물의 인생에서 주님 나를 외면하지 마시고, 마라에서 엘림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께 나아가 탄식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매달리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매달리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끝에 보면 나오미의 눈물나는 탄식과 고백 뒤에 어떻게 보면 영화의 복선 같은 이야기로 마무리 짓게 됩니다.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보리 추수가 시작할 때였다…라는 것으로 1장이 마무리 되며 그 깊은 인생의 깊은 밑바닥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복선과 같이 보여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오미와 룻이 이해 관계와 손익 관계를 넘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선택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모든 것을 잃고 무너지고 쓴 물이 올라오는 마라 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는데,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하늘의 은혜로 건져 주시고 엘림으로 인도하실 것을 보여주는 작은 희망의 구름, 그 반전의 드라마가 룻기 2 장을 통하여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지금 마라의 현장입니다. 우리 인생이 나오미와 같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쓴 물만 올라오는 마라의 현장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 상대하지 말고, 사람들 붙들고 싸우지 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드는 저와 여러분 되기 원합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깨지고 되는 것 하나 없는 인생, 내 마음에서 내 발 밑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삶 가운데 나오미와 같은 믿음의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내 기쁨과 감사함을 다 잃어버리고 인생의 쓴 물만 올라오는 마라의 자리에서 탄식하는 그 자리에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쓴 물인 마라에서 단물인 엘림으로 인도 하셨듯이 나의 쓴 물의 인생을 단 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주님만 바라보고 붙드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손에 건 짐을 받고 인도함을 받아 나의 인생이 쓴 물 마라에서, 단물 엘림으로 인도함 받는 소망을 붙들고 주님 만을 바라보고 주님 만을 붙들고 오늘 하루 인생 힘 있게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며느리 중에 한 며느리가 모압 자기 백성 친정집으로 돌아간 후에 남겨진 며느리 룻과 시어머니 나오미가 대화하며 강권하는 내용입니다. 나오미가 며느리 들에게 나를 따라 돌아가지 말고 이곳에 남으라고 하는 것은 전적으로 며느리들을 위한 권고였습니다. 나를 따라오지 말고 너의 백성과 너의 가족이 있는 익숙한 이 땅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 깊은 수렁 속에서도 며느리를 자기의 딸과 같이 생각하는 시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동시에 그 나오미의 권고 속에 모압에서 이민 생활이 나오미에게 얼마나 힘들어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 남편도 죽고 자기 두 아이들도 다 죽은 그 척박한 이민 생활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강권하는 겁니다. 내가 너를 정말 딸과 같이 생각하는데 이민 생활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 너가 베들레헴으로 가면 너에게는 이민 생활이 시작되는 건데 내가 경험한 그 힘들고 눈물 나는 이민 생활을 네가 다시 시작해야 되는데 그러지 말고 너가 익숙한 그 너의 백성의 땅 모압의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룻이 나오미를 따라 온다는 게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넘어 그냥 가시밭길과 고난의 길이 펼쳐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이방 여인이 와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는 둘째 치고라도 과부로서 그 곳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도 시어머니 마저 죽게 되면 이방 여인인 룻은 어쩌자고 그 고생 길을 가냐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로 강하게 권고하는 겁니다
며느리를 자기 딸과 같이 생각하며 따라 오지 말라고 정을 떼는 나오미를 향한 룻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어머니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입니다.” 나에게 이곳에 머물라고 강권 하지 말고 난 어머니를 따르기로, 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기로 이미 마음이 확정됐습니다…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이 놀라운 룻의 대답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해보기 원합니다. 왜 룻이 지금 시어머니 나오미를 그렇게 따라가려고 했을까요?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룻은 지금 손익 관계나 이해 관계를 통해 결정하는 게 아니라 바른 관계를 선택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생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대부분 머리를 굴리며 계산하고 주판을 돌려보는 건 뭡니까? 이 결정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이 사람과 함께 가는게 나에게 이익인가 아닌가? 다 손익 관계과 이해 관계를 따지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를 선택할 때도 이 교회가 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고 어떤 이익을 주는가…이게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대부분의 결정 방법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르겠다는 결정은 이해관계나 손익 관계로 봤을 때는 전혀 타산이 맞지 않는 결정이었습니다. 룻은 손익관계와 이해 관계를 넘어 바른 관계성을 붙들고 선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룻은 아마 시어머니의 한결 같은 삶을 봤을 겁니다. 지금 시어머니 나오미는 인생의 가장 깊은 나락에 떨어져 있습니다. 자기 남편도 죽고 자기 두 아들도 다 죽고 이민의 땅 그 척박한 골에서 남겨진 게 아무것도 없는 절망, 이제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가려는 그 여인 그 고난과 눈물 가운데도 이 시어머니 나오미는 변함없이 한결같은 신앙의 삶을 며느리들에게 보여준 거예요. 그래서 이 며느리들을 구박하지 않고, 너희들 때문에 내 아들들이 죽었다고 원망하지 않고 이 며느리들이 나에게 선대했다고 고백하는 믿음의 관점을 가지고 산 비결을 룻은 알게 된 겁니다. 그렇게 나오미가 거룩하고 구별된 삶, 한결 같은 삶을 살아가는 비결은 그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모압 땅이 당연히 룻에게는 편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도 가까이 먹을 수 있고 친정도 가까이 있고 아는 사람도 많은 익숙한 땅이었는데, 거기에는 그들의 이방 신들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지금 어머니를 따라 가는 베들레헴 일하는 곳은 척박하고 알지도 못하는 것이며 자기가 차별과 설움을 당해야 될 지도 모르는 그런 낯선 땅인데 거기에는 어머니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곳이죠. 그러니까 룻이 선택하는 것은 이해관계와 손익 관계를 통해 ‘나의 유익과 필요를 채우는 가 아닌가’를 넘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잘 보면 며느리로서 시어머니를 쫓아가겠다는 결단일 뿐 아니라, 어머니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겠다는 것입니다. 룻의 확정된 마음은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신앙 고백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이해 관계와 손해 관계를 넘어 바른 관계를 최우선에 두는 결정을 영적인 결정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최 우선되는 선택, 나의 이해 관계와 손해 관계를 넘어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되는 결정이 바로 영적인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룻의 결단이 얼마나 확고 했는지 어머니가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주고 거기 묻힐 것이라고 말합니다. 무덤까지 같이 가겠다는 단호한 결단, 마음이 확정되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며느리 룻을 설득하는 것을 멈춥니다. 룻이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결정은 영적인 결정임을 알았고, 신앙을 따라가겠다는 결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이해관계/손익 관계와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가 부딪치고 충돌 할 때, 나는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자가 되는가, 이게 변함없는 영적인 자들의 삶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 이 땅을 산다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이해관계과 손익관계를 넘어서야 하는 삶이고, 보이지 않는 예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가 우선되는 선택을 하는 삶이자, 그 영적 선택을 통해 하늘의 은혜가 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인생의 수많은 결정에 기로에 설 때가 있습니다. 이해 관계와 손익 관계를 따져 보는 것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만, 내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에 인생을 건 선택은 그 이해관계와 손익 관계를 넘어 주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최우선에 둔 선택을 할 수 있느냐? 이것을 주님께서 저희에게 이 말씀을 통해 도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이해관계과 손익 관계를 넘어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하늘의 은혜를 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기획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붙드시고 내 인생이 예수님과의 바른 관계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 주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해 펼쳐지며 하늘의 복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살아가는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선대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는 지극한 시어머니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사실 며느리가 딸이 될 수는 없죠. 항상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그 love-hate relationship이 있기 마련이고 오죽하면 며느리를 만년 손님이라고도 말할 정도로 늘 조심스러운 관계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지금 그 두 며느리를 마치 자신의 딸과 같이 대하며 그들에게 지금 갈 길을 열어 주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오미가 힘들고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어떻게 이 두 며느리들을 자신의 딸과 같은 마음으로 선대하는지를 묵상하기 원합니다.
첫 번째, 나오미는 지금 이 두 며느리들은 남겨두고 자기만 돌아갈 결정을 합니다. 같이 유대 땅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며느리들은 모압 땅에 남아 너의 친정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것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이 두 며느리를 정말 위하는 마음으로 그러는 겁니다. 지금 이 두 며느리는 좋던 싫던 이 시어머니와 운명을 같이해야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그것을 거절하고 그들이 자신을 봉양하는 것을 거절하지요. 자신의 손익 계산과 이해 관계를 생각하면 당연히 두 며느리 들을 데려가는 게 맞는데 이 며느리들을 먼저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너희들은 이 땅에 남는게 복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이민의 땅이자 객지인 모압 땅이 와 있습니다. 남의 나라이고 10년을 살았어도 모든 게 낯선 객지이지만 며느리들에게는 자신들의 고향입니다. 말도 문화도 가장 익숙한 곳이자 친정 가족들이 다 있는 곳입니다. 그 두 며느리를 유대 땅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10년 동안의 끔찍한 이민 생활을 이 두 며느리가 남편도 없이 과부로 경험하게 하는 겁니다. 두번째, 오늘 말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바로 “내 딸아..”입니다. 따라오겠다는 그 두 며느리를 거의 밀치듯이 떼어 나면서 너희들은 며느리가 아니라 “내 딸들”임을 강조합니다. 반복적으로 얘기 있다는 것은 이게 나오미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그들은 며느리가 아니라 나오미에게는 친딸과 같은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딸과 같이 생각하고 사랑하니까 너희의 앞 날들을 위해 너희는 이 익숙하고 편한 너희 친정이 있는 이 모압 땅에 머물러야 한다는 거예요.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딸과 같은 이 며느리들의 유익을 위해서 나와 함께 가는게 너희에게 복이 아니라고 계속 설득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밀쳐 내듯이 이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지금 각자 집으로 돌아가 그냥 이 모압 땅에서 너희 갈 길을 찾아 잘 살기를 원한다고 축복하며 떠나 가기를 원하는 것이죠 세번째로, 며느리들이 자신과 두 아들들에게 “선대”했음을 고백합니다. 8절의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 한 거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 하시기를 원한다”는 이 말이 정말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실 과부가 된 나오미와 이 두 며느리는 기가 세서 남자들을 먼저 떠나게 한 흠이 있는 여인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지금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아기를 못 낳는 여인은 흠이 있는 여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불임하는 여인은 흠이 있기에 쫓아낼 수도 있었고, 아기를 못 낳는 여인은 수많은 압력과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일찍 죽으면 그 여자의 기가 세서 남자가 요절했다며 흠 있는 여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자기 남편도 죽었는데 두 아들도 손자 없이 다 죽었다 그러면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이 다 끊어지고 소망 없는 과부 셋이 남은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응어리지고 힘들고 어려운 게 많았던 과부 나오미, 이민 10 년 생활 동안 자기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다 잃은 나오미는 사실 며느리들이 이뻐 보일 리가 없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죽은 것을 며느리와 개연성의 끈을 찾으며 너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었다고 얘기하고 싶은 그 시어머니의 분노가 당연히 올라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열등감이 폭발하여 며느리들에게 쏟아부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들이 자신과 두 아들들을 최선을 다해서 섬기고 최선을 다해서 봉양하고 최선을 다해서 좋은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이죠. 두 아들 다 잃은 시어머니가 이 얘기를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평소에 인생이 잘게 때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지금은 가장 깊은 절망에 헤매고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그때 시어머니 나오미는 자기의 눈물과 아픔과 자기의 분노를 며느리들에게 전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생의 진짜 어려울 때 내 인생에 가장 밑바닥에 있을 때 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하지 않습니까? 그때 정말 나의 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 않습니까? 이게 시어머니로서의 나오미가 품은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이자 인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나오미의 선대하는 마음과 절망가운데 원망하지 않는 태도, 나오미가 가진 놀라운 며느리들을 향한 태도, 그 선대 하는 마음 그리고 며느리를 딸과 같이 생각하는 그 마음이 결국 그 깊은 수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한 준비였고, 새로운 길을 여기는 놀라운 밑그림을 주님께서 그리게 하는 도약이었음을 믿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어려울 때 인생의 큰 위기와 절망에 빠질 때 우리는 속에 있는 나의 진짜 모습이 치약이 올라오듯 올라옵니다. 우리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내 주변 사람들에게 화살을 돌리고 탓을 돌리는 인생이 아니라 내 가족이,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선대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 놀라운 기적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고백 되길 원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법적으로 맺게 된 가족이 영원한 이방인과 영원한 손님으로 남는 게 아니라 사위가 내 아들이 되고 며느리가 내 딸이 되는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경험 될 때 그 가정에 놀라운 하늘의 은혜가 부어질 줄 믿습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 눈물과 아픔을 전가 하지 않고 그들을 품고 선대 하며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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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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