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은 자기 비움으로 낮아짐과, 죽기까지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자들의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 자신과 디모데의 모델을 배웠고, 오늘 말씀은 마지막으로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삶과 사역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에바브로디도는 성도들을 정말 사랑한 목회자였습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돌보기 위해 에바브로 디도를 보냈는데, 사도바울을 돕다가 큰 병에 걸린 겁니다. 그런데 자기의 병들었다는 것을 성도들이 안 것을 깨닫고 심히 근심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큰 병에 걸리면 내가 병에 걸렸다는 것 때문에 심히 근심합니다. 그게 일반적인 반응이고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에바브로 디도는 자신이 큰 병에 든 것 때문에 근심 한 게 아니라 자기의 병든 것을 성도들이 듣고 아파할 것 때문에 근심할 정도로 성도들을 마음 다해 사랑한 것입니다. 이렇게 간절히 사모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에바브로 디도였습니다.
두번째, 에바브로디도는 그 큰 병에 걸린 후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는 기적의 사람입니다. 에바브로 디도가 사도바울을 돕다가 병에 걸린 것은 그냥 단순히 감기 정도 걸린 게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큰 중병 이었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정도로 심각한 중병이 걸린 그를 하나님께서는 기적의 치유하심으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에바브로 디도를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시며 치유하심과 역사 하심을 선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우리의 인간의 수단을 넘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먼저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구하는 자들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와 치유와 기적을 부어 주시며 건져 주실 때가 있습니다. 에바브로 디도와 같이 나의 일에 가장 중요한 구하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그리스도를 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그것을 놓고 근심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의 이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다하지 더 돌보지 않는 그런 헌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은혜와 기적과 역사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자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세번째, 에바브로 디도는 믿음 안에서 나의 형제로 고백합니다. 그냥 피를 나눈 혈연의 가족 관계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형제와 영적 자매를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에바 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에게 피보다도 더 진한 영적 형제였습니다. 신앙생활 혼자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혼자 주님 붙들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여 주신 이유는 교회의 지체가 되기로 함께 부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함께 섬기며 형제 자매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주님의 은혜를 함께 붙들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같이 나누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거스르고 역행하며 왜곡된 이 세상 속에서 물들고 길들여 지기를 거절하며 함께 싸우며 바른 길과 기준을 조율 받으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같이 하며 함께 신앙을 나누는 영적 형제와 자매를 만나고 함께 성장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에바브로 디도를 향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고백합니다. 수고하고 군사 되었다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을 다 뒤로 하고 주님이 주신 사명에 군인과 같이 목숨 걸고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목숨 걸고 앞으로 나갔던 자가 바로 에바브로 디도였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것입니다. 자기 혼자 뛰는 자가 아니라 자기 혼자 군인된 자가 아니라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되어 뛰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함께”의 정신을 붙들고 그리스도 보다 앞서지 않는 군사가 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붙들린 동역자라는 것이죠. 우리는 수고 하고 열심 있고, 예배에 생명을 거는 이런 말을 잘 쓰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함께 목숨 걸고 함께 군사가 되고 함께 동역 하며 함께 열심히 수고하는 것에 우리는 약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며 그리스도가 인도하심에 따라 그 안에서 함께 수고 하고 함께 열심을 내고, 그리스도 안에서 군사 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열심과 수고, 나의 군사될 정도로 목숨 거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시도록 나를 드릴 때, 그리스도께서 일을 이루시고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드러나는 그리스도의 향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삶과 사역을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겸손히 낮은 마음으로 그 성도들을 섬기며 간절히 사랑하는 삶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틋하고 간절하게 사랑하며 신앙 생활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에 올인하고 헌신하면서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기 원합니다. 에바 브로디도와 같이 우리의 열심과 수고, 우리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땀과 헌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의 정신을 통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나를 내려 놓으며 주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십시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수고하며 함께 군사 된 자로 주님께서 마음껏 쓰시도록 우리 자신을 드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 지시고 낮아 지셔서 죽기까지 순종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지 못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이 주님의 마음을 담고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기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2장 첫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 사랑을 보여주고, 그 다음 사도 바울 자신의 예수님의 본을 따라 가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의 가장 귀한 동역자 중에 하나인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디모데 또한 예수님의 본을 잘 따라가는 성숙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제자임을 강조합니다. 디모데를 통해 예수님의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그 모습이 무엇인가를 함께 말씀을 통해 상고 하기 원합니다. 디모데는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의 본을 따랐는가 하면 첫번째로 뜻을 같이하고 진실히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추천하고 사람을 믿는다고 했을 때 그 사람 자체를 믿기도 하고요 그 사람의 능력을 믿기도 합니다. 디모데 라는 사람 자체도 좋았고요. 그리고 그 사람의 능력도 굉장히 좋았다는 겁니다. 디모데는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고 사도 바울과 뜻을 같이 하는 자였습니다. 한 마음과 한 뜻 한 방향으로 팀웍을 이루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마음과 한 뜻이 안되면 같이 일할 수 없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주님의 성도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뜻을 같이 하고 그 영적 지도자와 뜻을 같이 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뜻에 우리가 조율되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의 방향성이 바뀌어진 자가 저와 여러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서 뜻을 같이하고 주님과 같은 방향으로 조율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신앙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디모데는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자랐습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에는 도전이 있고 문제가 있습니다. 19절에도 20절에도 “너희의 사정”이라는 말이 반복해서 나오는데 너희의 사정이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직면한 도전, 예수님의 모범인 아래를 지향하는 것을 따르지 않아서 교회 안에 갈등하고 어려움이 있었던 사정을 얘기합니다. 그 교회 사정을 알고 해결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사람인 디모데를 지금 보내는 것이죠. 여기서 진실히 생각한다는 것은 그냥 대강 보는게 아니라 껍데기만 보는게 아니라 객체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사건과 상황을 그 안으로 들어가서 깊이 보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그냥 몰아세우고 책망하기보단 먼저 그 상황을 있는 모습 그대로 깊이 있게 바라보는 진실히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보던 사람을 볼 때 그냥 껍데기만 볼 수 있습니다. 근데 껍데기만 보고 그냥 끝나는 것이 아니라 멈추고 그 사람과 상황을 자세히 집중에서 보면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깊은 곳까지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말하는 그 뒤에 있는, 상황 뒤에 있는 뿌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껍데기를 넘어 그 사람 안 깊이, 그 상황 안 깊이 들어가 진짜 마음을 바라보고 진실이 생각하는 것 이것이 중요한 성도의 삶에 자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디모데는 자기 일을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먼저 구하는 자였습니다. 나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앞세우고 그리스도의 뜻을 앞에 두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구한다는 말은 추구한다, seeking…지향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심지어 많은 교회를 나온다는 사람들도 예수님에게 나오고 예배를 나오는데 자기 일을 구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나옵니다. 교회에 나오는데도 실제로는 자기의 일을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 나오는 겁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않고 영적 지도자와 함께 한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교회에 나와 헌신과 열심이 있는데 실제로는 자기 일을 최우선에 두고 예수님이 자기 일을 위해 필요한 자들로 오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을 반찬과 같이 생각하고 자기 일을 추구하는 것을 메인 디시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반면에 디모데는 자기 일을 먼저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신앙생활에서 지향 하고 추구하는 바가 그리스도를 최우선에 모시며 그리스도의 일을 최우선에 두고 예수님에게 나왔다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담아 살아가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일을 먼저 구하고 추구하고 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와 같이 개인적인 욕망을 떼어버리고 내 생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 내 마음의 자리 잡아 예수 그리스도 일을 먼저 구하는 자들을 예수님은 원하신다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디모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다른 것은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기 인생에서 복음을 위해서 땀흘리고 수고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삶의 가치로 붙들고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추구하고 지향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이니 당연히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는데 자연스러웠습니다. 사람들이 보던 보지 않던, 주님을 바라보며 기복이 없이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며 자기 일에 수고하며 복음을 위하여 땀흘리는 자, 그게 디모데를 통해 배워야 하는 성도의 자질입니다. 그런 복음을 위한 수고들을 통하여 하늘 문이 열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선명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하나되어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 시간 나의 삶이 디모데와 같이 이렇게 주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되며 주님과 같이 낮아지며 주님의 생각으로 채워지는 자 되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디모데와 같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른다는 것은 그 분과 뜻을 같이하며 그분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자입니다. 또한 상황을 보게 되던, 사람들을 보게 되던 중요한 것은 멈추고 그 상황과 사람을 대강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깊숙히 들어가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주님 앞에 부어져야 하는 중요한 영적 자질이라고 믿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최우선적으로 구하고 디모데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디모데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 주신 말씀으로 담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실 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 즉 구원 받은 자 답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영적 근육과 맷집이 단단해 지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증언합니다. 바로 흠이 없고 순전한 삶을 살게 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역사하시고 행 하시며 그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구원받은 자 다움의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나는 열매가 바로 흠이 없고 순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흠이 없고 순전하다는 것은 어떤 것도 섞이지 않았다, 타협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우유가 있는데 100% 우유와 물을 반 탄 우유는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을 수 있지만 순도/ 순전함에 있어 큰 차이가 있습니다. 물탄 우유는 순전한 거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처럼 흠이 없고 순전한 것은 물 타지 않고 희석되지 않은 것,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고 역사 하시며 하늘의 힘을 부어 주실 때 우리는 섞이지 않고 희석되거나 물 타지 않은 하나님 자녀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그러졌다는 것은 깨지고 왜곡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본질에서 이탈되고 깨지고 왜곡되어 있습니다. 거스른다는 것은 역행해 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역행 하며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 길에서 벗어나고 역행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모든 소망을 두며 물질 가치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섞일 수 있고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하나님의 흠 없고 순전한 자녀로 살도록 힘주시고 능력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없고 순전한 자녀로 살게 되면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 발광체가 아니라 내 안에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반사체로서 빛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거스르지 않으며 나아갈 바른 길이 무엇인지 빛을 비추며, 왜곡된 이 자리에 이 세상에서 제 자리로 돌아가며 바른 기준을 붙들고 조율되는 삶이 무엇인지 빛을 비추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 없고 순전한 자녀로 빛을 나타낼 때 드러나는 게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말씀입니다. 그 생명을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거 이지만 예수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심판의 증거임을 선명히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날,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함이라 증언합니다. 곧 만나게 될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는 심판의 증거가 아니라 구원의 증거가 되어야 하며 그 예수님 앞에 열매 맺은 자랑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매 맺은 자랑, 주님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잠시 살다 돌아왔는데 열매 맺는 것이 이것입니다….그 자랑이 바로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일꾼들의 자랑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나에게 다섯 달란트 주셨는데 주님이 나에게 두 달란트 주셨는데 이 세상에 파송되어 사는 동안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를 더 남겼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이 있는 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추구하는 기쁨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며 그 하늘의 기쁨 때문에 내 인생을 그렇게 전제와 같이 쏟아부어도 피곤하지 않은 삶, 목숨을 바쳐도 상관 없는 삶을 사는 겁니다.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될 때 정말 놀라운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의 소망을 두고 시간을 쏟아붓는 곳이 어디입니까? 어그러지고 역행하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열매를 맺는 곳에 우리의 인생을 쏟아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결국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부어지는 힘으로 살아가며 내 안에서 역사 하시며 일하시며 함께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살아갈 때 이 어그러지고 왜곡되며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물 타지 않고 섞이지 않은 자녀로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사명자로 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고 피곤하지 않고, 생명이 살아나는 그 가치 있는 일에 나의 인생을 투자하고 쏟아 부을 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며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 어둡고 어그러진 세상 가운데 빛을 비치며 생명의 말씀을 비추며 살아가는 성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별과 같이 빛나는 성도가 될 줄 믿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이 열리는 기쁨을 사모하며,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것이 있는 성도, 예수님이 오심을 구원의 증거를 믿고 살아가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 말씀을 통하여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순종하시는 낮아지심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며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삶의 핵심은 바로 한결같이 항상 복종하는 삶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항상 복종하여”가 뒤에 나오는데 헬라어 성경에는 “항상 복종하여”가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교회 안에서 항상 복종하며 살라는 겁니다.이런 강조를 통해 지금 빌립보 교회 안에 항상 복종하지 않는, 소위 말하는 영적 사사시대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어 그들의 눈 앞에 없습니다. 성도들의 믿음이 흔들릴 수 있고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이 약해질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짐을 본받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주장을 하고 자기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교회 안에서 갈등과 분열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일꾼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일대로 행동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서, 하나 되지 못하고 교회 안에 순종의 덕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가운데 빌립보 도시가 가지는 로마의 힘과 권력을 지향하는 문화가 철저히 물들어 교회 안에서도 힘과 권력이 추종하며 세상에 문화와 가치관이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도전 가운데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순종하심을 본받아, 너희들이 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복종하며 자신을 낮춰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말씀에 동일한 도전을 받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규모와 조건, 환경이 좋아도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선명히 나타나기 위해 그리스도를 머리에 두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는 순종의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부름을 받아 살고 있기에, 내가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에 맞지 않아도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믿고 나아가는 것, 그것이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삶이자, 그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이끄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그런 삶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말을 내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오해할 수 있는데, 이 말은 “구원을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써 하늘의 통치와 다르심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이루라”는 말이 work out이라고 되어 있는데, work out은 운동 중에서도 보통 근육 운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근육이 계속 반복하여 자극하고 운동하지 않으면 힘을 받지 않는데 work out을 하게 되면 근육이 반복하면서 운동하면 딱딱해지면서 근육이 활성화되지요. 그래서 근육의 튼튼해 집니다. 구원을 이룬다는 건 뭡니까?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근육을 많이 생기게 하는 겁니다. 영적 근육이 많이 생겨 튼튼해져서 내 안에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 이 선명하게 드러나셔서, 구원받은 자로서의 변화된 삶, 하늘의 통치와 다르심을 받는 영적인 근육과 맷집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것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이 더 선명하게 이끄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구원받은 자로써 온전히 살아 내는 삶, 신앙의 영적 근육이 활성화 되는 work out의 삶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구원을 이루라”는 말에는 “구원받은 것을 선명히 드러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불편하고 박해와 핍박을 받는 요소가 됐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크리스챤 입니다…내가 교회 다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선명하게 고백하면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심지어 핍박과 죽임을 당하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밖에 나가서 구원받은 것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주님으로 성도입니다…라는 것을 선명하게 고백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박해와 불이익이 많았기 때문이죠. 그런 상황 가운데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 만을 주님으로 모시며 산다는 것을 숨기지 말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와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시대에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크리스찬 입니다…. 라고 선명히 고백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박수 받는 일이 아니라 편견과 불이익을 당하는 시대가 점점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세상에 나가서 내가 크리스찬입니다… 라는 걸을 숨기고 조용히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교회에서도 자정하고 변화되는 분명한 노력이 있어야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며 구원 받은 자라는 것을 숨기지 않고 선명히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도전이며 결단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구원을 이루고 구원의 work out을 통해 영적인 근육과 맷집을 만드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 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 가운데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고 역사하시고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이렇게 나의 영적인 근육을 계속 튼튼하게 만드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내 삶에서 역사하십니다.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십니다. 하늘의 에너지를 공급하고 힘을 공급하며 하늘에서 부시는 그 은혜 가운데 역사하십니다. 주님 앞에 자격 없는 자로 엎드리지 아니하면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순종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우리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 앞에 무릎 꿇고 복종하며 순종하는 자로 그 겸손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때 두렵고 떨림으로 내 삶의 구원을 이루시며 영적 근육과 맷집을 만드시며 나에게 온전히 변화된 자로 살아낼 수 있는 힘을 공급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선명히 역사 하실 줄 믿습니다. 이 시간 내 안에 함께 하시고 행하시고 공급하시는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님 은혜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에 아주 충성이 지극했던 도시였습니다. 로마에 지나칠 정도로 자부심이 있었던 도시로서 힘과 권력을 추종하고 위로 올라가는 것을 열망하는 로마 문화에 아주 길들여져 있었던 도시 가운데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는 자칫 잘못하면 힘과 권력을 절대화하는 로마 문화, 위를 지향하는 문화에 휩쓸릴 수 있는 위험이 굉장히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런 교회를 향하여 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은 너희가 빌립보에 살고 있어도 그 문화에 물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다른 삶의 가치, 즉 겸손함과 낮아짐과 밑을 지향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2장 말씀을 통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우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시며 순종하신 그 철저히 낮아지심과 자기 비움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건지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낮아짐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주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신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낮아지고 겸손하게 빈 마음으로 처절하게 낮아지기까지 순종하신 것을 통해 모든 죄 값을 치르게 하시며 그 끝에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주사 모든 만물이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문화에 젖어 사는 대신 그렇게 그리스도를 모델을 삼아 살아갈 때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굴복하고 예수님 밑에 모두 무릎을 꿇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릎을 꿇음으로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그분의 종임을 고백하게 하시는 거죠. 우리는 성도가 된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나의 친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뚫어뻥 정도로만 나에게 필요할 때 내가 쓰는 이용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예수님 앞에 내가 철저히 굴복하고 순종하고 엎드리는 것이고 무릎을 꿇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수님 앞에 항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앞에 항복하고 백기를 들고 나는 자격 없는 자로 주님의 건짐이 간절히 필요한 자라는 것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죠. 그 모든 무릎 꿇게 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지극히 낮아지며 내 모든 것을 꺾고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순종하게 될 때 그 예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를 주님이 높여 주시는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이 가져다 주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우리가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무릎을 꿇으면 꿇을수록, 그 앞에 나아가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놀랍게 세워 주신다는 것이죠. 반대로 빌립보 교회가 처한 그 문화와 같이 로마의 문화를 가지고 힘과 권력을 붙들고 위를 지향하며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올라가려는 인생을 꺾으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올라가고 스스로 위를 지향하려고 발버둥치고, 스스로 나를 중심으로 살려 하는 모든 사람들을 꺾으셔서 그들에게 겸손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론의 말씀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것을 아주 간결하게 증언하고 있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바로 그것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주님을 의탁하는 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겁니다. 주님이 주인 되시고 나는 주인의 명을 따라가는 자로서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할 때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며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거절하는 겁니다. 힘도 권력도 돈도 내가 가진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을 거절하며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며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내가 믿음 붙들고 신앙 생활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자신의 믿음의 열심이나 강도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나의 열정과 헌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바라보고 붙드는 믿음의 대상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선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주로 신하며 내가 그분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만드시고 높여 주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삶 성도의 삶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도 빌립보교회 삶의 자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문화가 돈을 신으로 숭배하고 내 스스로 나를 드러내는 시대를 살고 있으며 눈에 보이는 가치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힘과 권력과 위를 지향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그 문화를 숨쉬며 살아갑니다. 이런 삶과 문화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이기에 이 시대의 문화를 넘어서 예수님이 주시는 그 겸손과 낮아짐의 은혜, 내 삶을 주님이 높여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기적입니다. 이 세상 문화에 젖어 우리가 스스로 힘과 권력을 절대화하며 높아지려 하지 말고, 위를 지향하는 삶을 살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까지 겸손히 기다리고 엎드리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은 내 힘으로 불가능한 성도가 살아가는 신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으로 낮아 지셨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 주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스스로 이름 내고 기념비 세우려는 삶, 스스로 나를 증명하려는 삶, 스스로 위를 지향하여 살려는 삶을 멈추고 이 시간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며 무릎 꿇고 엎드리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께서 세워 주시고 높여 주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오늘 하루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가슴으로 품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교회, 은혜에 동참하는 열심히 많은 교회,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그런 귀한 교회였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귀하게 여기기에 권면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썼다는 것을 2장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런 많은 장점과 사랑 가득한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이 들어야 되는 권면은 교회 안에서 하나됨 이었습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 하나됨을 향하여 나아가야 되는 것을 강조하는데, 핵심은 바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해야 한다.” 는 겁니다. 그것이 성도들이 신앙 생활 할 때도, 교회에서 사역 할 때도 붙들어야 할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뜻을 합하여….한 마음을 품어….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회가 그만큼 하나 되지 못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에 그렇게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했는지는 증언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갈등과 반목이 있었고 교회 안에 마음에 불일치가 있었습니다. 이 하나 되지 못하는 약점 때문에 주님께 끝까지 선명하게 쓰임 받는 데 어려움이 있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을 같이 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어떻게 성도들이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데 마음을 같이 하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죠. 성도 모두가 무슨 일을 하던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 뿐이라는 것입니다. 생각, 문화와 가치의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성도를 하나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인으로 모신다는 이 분명한 기준 외에는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초대 교회나 지금의 현대 교회나 사람들은 참 다양한 생각과 가치를 가지고 찾아오고요, 요즘엔 참 다양한 상처들을 가지고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이런 수많은 생각과 가치의 다양성, 문화와 상처의 다양성을 가지고 모여 있는 성도들 가운데 우리가 한 마음을 가지고 같은 사랑으로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는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습니다. 그 기적은 오직 한 가지로만 가능한 기적인데 그게 바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꼭 붙어 있으며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 외에는 하나 되고 한마음을 가지고 뜻을 합쳐서 가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다름과 다양성의 가치를 넘어 한 마음과 한 뜻을 갖는 이 귀한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머리 되시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을 것을 권면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게 되는 약점 중 하나가 성도들이 다툼과 허영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말로는 주님의 일을 하는데 실제로는 자기를 드러내며 자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죠. 빌립보 교회가 생기게 되는 배경을 사도 행전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루디아라는 여인이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어서, 그 안에는 다른 교회들 보다 유난히 여성들이 많았고 여성들이 리더십을 가지고 이끌었던 교회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열심 있는 여성 일꾼들 사이에 하나 되지 못하는 약점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사역이 아니라 누가 맡았는가에 따라 일이 되고 안되고가 결정되는, a 라는 사람이 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a 라는 사람이 안 하면 안 하고, 이게 바로 사람 중심의 사역입니다. 그 사람이 일하지 않으면 안 돼…. 이 교회에서 내가 없으면 안돼…라는 자기 이름을 가지고 자기 이름 때문에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 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심 사람의 이름 내고 사람이 드러나는 그런 다툼은 결국 공동체가 하나 되지 못하고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주님의 일을 신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주님의 일이 경쟁이나 다툼이나 허영이 아닌 내가 주님 앞에서 쓰임 받는 다는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을 하던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높이라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 바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를 낮추는 거고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한테 나를 맞추라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에 대해 내가 맞춰주는 삶이 겸손입니다. 겸손하게 일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 보고 자꾸 나길 나에게 맞추라고 강요합니다. 이건 우리의 인간의 죄성을 가진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겸손하게 일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할 때 그리스도가 중심 되시고 선장 되시고 이끄시는 것을 믿으면, 이런 나의 본성과 나의 본능을 넘어서 겸손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방에게 내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안에서 너와 나의 다른 점을 찾는 것,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 사이에 다른 점을 찾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우리 본성이 그런 것을 찾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다른 점들 가운데 공통점을 찾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을 자들에게 주시는 은사라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 본성을 넘어 상대방에게 자신을 맞추며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성도의 삶을 다른 사람의 일을 돌보는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주의 생각을 넘어, 상대방을 낫게 여기고, 주님 위주의 생각으로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고, 모든 일을 추진할 때, 교회 안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유일한 해법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할 때 주님보다 앞서지 않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일하는 것을 놓치며 어려움을 직면합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마음과 뜻을 같이 품지 못하는 이유가 이렇게 다툼과 허영으로 일을 하기 때문이며 주님의 일 자체에 몰두하여 나를 드러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보다도 사역 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 우선순위를 놓치지 않고 나아갈 때 우리는 빌립보 교회가 경험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은혜의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을 하던 다툼과 허영으로 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 내 안에 이루시는 주님의 역사에 결과라는 것을 믿고 주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바라기는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렇게 한 마음과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는 그리스도 안에서 경험하는 기적을 늘 일상으로 누리며 신앙 생활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빌립보라는 로마 문화에 쩌들어 문화의 한복판에 있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런 로마 문화에 물들지 말고 그리스도에게 붙어서 그리스도에게 물들어 살아가는 삶을 살기를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로마 문화라는 것 자체가 지향성을 위로 올라가는 것이 극대화 된 바벨탑을 지향하는 문화입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힘이 전부이고 권력이 전부이고 돈이 전부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꽉 잡아야 되고 그 기회를 움켜 잡아야 되고, 약한 자는 강한 자를 섬기는 게 당연한 문화, 그러니까 강한 자가 돼야 되고 힘 있는 자가 되어야 되는 그게 바로 로마 문화입니다. 그 로마 문화에 쩌들어 사는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믿으러 교회에 왔지만 여전히 빌립보 도시가 주는 문화에 쩔어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권고하는 겁니다. 너희 마음에 로마의 문화를 품지 말고 황제의 마음을 품지 말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는 것이죠. 그런 우리를 향하여 낮은 곳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로마 문화에 쪄들어 사는 성도들을 건져내어 그리스도에게 물들어 사는 삶이란 바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자기 비움과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 즉 하나님과 똑같으신 동일본질, 예수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기독교 이단들은 예수님을 동일 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로 여겨 왔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그냥 성품을 닮은 인간같이, 피조물같이 여기는 많은 이단의 가르침을 경계하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하죠.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이시자 예수 하나님이신 동일본질이라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그 동일 본질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않고 자기를 비우시고 낮아지신 겁니다.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내려오시는 거죠.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낮아짐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이 죄인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 높고 완전하신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정말 놀라운 자기 비움의 모습인 것이죠. 두번째,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죽기까지 복종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 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짐과 자기 비움은 어디까지 내려가셨냐면 사람이 되신 거로 끝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되셔서도 낮추고 낮추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겁니다. 자기 비움과 아래를 지향하는 낮추심의 결정체는 죽기까지 순종하심 입니다. 복종하셔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셨다는 것이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하여…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위로 갈 수 있는데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아래를 지향하고 밑으로 내려 가는데는 목적이 있는데 바로 사랑하기 위해서…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분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모든 게 이해가 되고 다 마음으로 수긍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기에 그것을 순종하고 복종하신 겁니다.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순종 하며 자기를 모두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마음에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다는 것은 바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아래를 지향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 눈과 마음이 천국과 하늘을 향해 열려 있으면 이 땅에서 예수님과 같이 아래를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 복음이 주는 신비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문화도 로마 문화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물질 가치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살아가며 위를 지향하며 이 세상에서 힘과 권력과 돈을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로마 문화에 물들어 우리의 본성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은 지향성 자체가 이 세상에서 높아지려는 열망입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물질 가치와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삶이기에 이 땅에서 높아지는 것에 모든 것을 쏟아 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도 아닌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려고 발악을 하며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열망과 지향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의 문화죠 자꾸 위로 올라가서 하늘에 닿으려고 하는 그 교만, 내가 이 인간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그 교만으로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는게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은 이 세상에 가치와 우선순위와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짧은 기간에는 부딪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큰 그림을 봤는데 내가 20년, 30년 신앙생활 하는데 한 번도 세상 문화와 부대끼고 불편한 적이 한 번도 없다…그랬으면 여러분들은 신앙 생활을 지금 잘못하고 있는 걸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향하는 방향이 다르고 방향성이 다르며 품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거스르는 문화이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되면 반드시 부딪치고 불편한 부분들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내 안에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자기 비움, 그리스도의 죽기까지 복종하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결코 우리의 노력으로 열심과 결단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하늘 문이 열려 하늘에서 주시는 은혜가 담겨야 되는 일이며 내 안에 예수님을 온전히 모셔 예수님이 내 삶에 일하시고 역사 하실 때 경험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고 뛰어다니는 그 모습을 넘어 내가 어디를 바라보며 누구를 붙들고 살아가는가를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게 신앙 생활인 걸 잊지 말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황제의 마음을 품는 대신, 바벨탑의 열망을 품는 대신, 우리 안에도 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마음을 품고 이 시간 주님께서 역사 하시며 일하시는 이 놀라운 신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굳건한 믿음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굳건한 믿음을 강조하는데 첫 번째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 두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한다는 게 무엇입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팀이라는 분명한 자의식에서 출발해서 복음을 위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협력하는 겁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belong, 소속되었다는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인도함을 받아 몸의 지체로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에 협력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불신자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시는 능력입니다. 복음 자체에 사람을 변화시키며 회복시키고 치유해 주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복음이 능력 되는 도구가 되기 위해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자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One Team Spirit으로 똘똘 뭉칠 때 복음이 확산되고 새 생명이 건짐을 받는 능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영적 지도자가 있습니다. 그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뭉쳐 One Team Spirit으로 사명 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이 교회의 본질임을 지금 사도 바울은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을 향해 영적 지도자와 함께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두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게 될 때, 구원 받는 자와 구원 받지 않는 자가 정확하게 갈린다는 이 분명한 의식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종말론적인 사명과 분명한 의식으로부터 출발 하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복음에 협력해야 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히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만나던 재림을 통해 만나던 둘 중에 뭐가 먼저 올지는 모르나 분명한 건 예수님이 속히 오신다는 거죠. 예수님이 오시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멸망의 증거가 되는 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육의 사람들, 아래에서만 난 자들은 어둠을 붙들고 복음을 거절한 자로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이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이고, 영의 사람들, 위로부터 난 자들은 예수님이 오심이 구원의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천국 백성이 된 자들에게는 그게 천국으로 가는 환승역이 되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것이 심판의 날이 되는 것이죠. 그들에게는 멸망과 심판의 증거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렇게 갈라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죠. 천국 열차가 떠날 시간이 속히 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부지런히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를 소개하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 구원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강하고 담대하게 전하면 전할수록 우리에게 직면하는 건 세상 사람들의 무시와 충돌, 그리고 핍박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이루기 위해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 전할수록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것은 꽃길이 아니라 뭐라는 겁니까? 가시밭길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선명하게 구원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라고 선포할수록, 잃어버린 영혼을 건지는 일에 올인 할수록 교회와 성도들은 꽃길이 아닌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이유가 바로 그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다가 가시밭길을 가고 있는 증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되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어떤 처지에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 어떤 싸움이 놓여 있는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건 초대교회 시대건, 심지어 지금도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지금 죄로 깨져 있고 무너져 있고 타락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를 벗어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와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도 않을 뿐더러 믿기를 거절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물질 가치에 모든 것을 걸고 비슷하고 적절히 사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물질 가치를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된다는 것을 진리를 직면하기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대로 살려 하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면 단기간에는 뭐 그런 핍박과 어려움과 고난이 없을 수 있지만 오랜 기간으로 봤을 때는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부딛힘과 거리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세상 사람들과 아무런 부딛힘과 거리낌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잘못 길을 가고 있는 걸 수도 모릅니다. 눈에 보는 이 세상에 자기들과 똑같이 타락하고 자기들과 똑같이 세상에 목숨 거는 자들을 좋아하지, 이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가면 갈수록 우리는 충돌하고 부딪치고 거절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 즉 우리가 왜 교회에 모여 있고 우리가 왜 존재하며 우리 교회가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는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천국 갈 수 있는데 당장 지금 갈 수 있는데 지금 가지 않고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의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며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십시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되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사람이라도 더 건져 주님의 복음으로 변화되어 천국 백성 되는 그 일을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부름을 받았으며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삶을 살게 되면 반드시 부딛히고 충돌하는 고난이 찾아오고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기 때문이고, 이 세상이 이끄는 힘과 다른 방향의 힘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충돌하고 부딪히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그것을 준비하며 복음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아는 믿음 가운데 살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잠시 산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언제든 부르시면 떠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자로 살고, 또한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 앞으로 살게 될 천국이 훨씬 더 좋은 곳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분명히 드러내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데 내가 여기 있는 것보다 천국 가는 게 훨씬 좋다는 고백입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누리게 하신 많은 복들이 있습니다. 하루 하루 이 세상에서도 감사하며 기뻐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잠시 있다 떠날 곳이라는 것을 놓치지 말고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소망을 두고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이라도 당장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게 더 좋은 일이라는 이 고백이 사도 바울의 고백 만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허락하신 삶을 끝내고 우리가 가야 될 곳이 훨씬 더 좋은 곳임을 믿는 삶,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을 믿음의 실체로 바라보고 그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자가 천국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현주소가 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실체로, 믿음의 대상으로 믿고 십자가 은혜를 경험한 자들의 고백은 이 세상은 언젠가는 떠날 텐데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떠날 텐데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지금 여기보다 훨씬 좋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 만을 다 붙들고 소망을 두고 죽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생이 아니라 죽음은 우리의 인생의 끝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환승역 임을 분명히 믿으며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천국에 있는 게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분명한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이 사도 바울의 간결하고도 분명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실체적인 고백이 될 때 우리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붙들고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내 눈과 마음은 하늘을 향하여 다가올 천국을 준비하며 오늘 하루를 꾹꾹 눌러 기대하는 마음으로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 될 줄 믿습니다. 그렇게 천국을 지금이라도 당장 그리스도와 함께 가는데 훨씬 더 좋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금 죽지 않고 여전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갈 수도 있고 당장 천국 사면 더 좋은 일이지만 지금 내가 이 세상에 좀 더 있어야 되는 이유가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이 가득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 충만” 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천국 가기 전 올인 해야 할 부르심과 사명이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의 사명입니다. 즉 천국에 돌아가기 전 이 땅에서 맡기신 그리스도의 사명,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열매 맺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천국 가는 게 훨씬 더 좋은데 너희를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하려고 여기 잠시 동안 있다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같은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변화되는 믿음의 진보를 보면서, 그 가운데 부어 주시는 영적 기쁨 충만을 위해 여전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나 죽으나 모두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내 인생은 이미 정해졌다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죠. 믿음이 진보한다는 것은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왕성하고 선명히 이끄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 분을 더 선명히 바라보고 의탁하는 삶, 되는 삶이 줘 내가 그리스도 안에 철저히 자격 없는 자이자,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사랑을 받고 지금도 살고 있음을 믿으며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는 자가 바로 믿음의 진보가 있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퇴보란, 하루 하루 살기는 사는데 그리스도에 대해서 점점 멀어지는 겁니다. 내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에게 내 마음과 시선이 가는 대신 분산되고 흩어지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의탁하지 않고 자꾸 내가 이 세상에서 빌붙어 살려고 살아가는 삶, 내가 자격있다고 착각하고 의인이라고 착각하는 삶, 그게 바로 믿음의 퇴보의 삶입니다. 환경과 조건이 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조건을 넘어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누구를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는가 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크고 대단하다는 것은, 내가 믿는 믿음의 크기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바라보는 믿음의 대상을 명확하게 바라보는 게 큰 믿음이자 믿음의 진보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 믿음의 진보를 이룬다는 것은 내가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 선명히 더 분명히 더 가까이 나아가 붙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감옥에서 죽어서 천국 가도 그리스도께 영광이고 그러지 않고 더 이 세상에 좀 더 살아도 복음의 사명에 올인 하며 복음의 그 놀라운 파급력을 경험하며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보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된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왜 지금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습니까? 여전히 숨 쉬고 존재하며 살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시고 그 하나님의 뜻이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에게 보내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내가 아직 숨 쉬고 살아 있고 건강하게 있는 동안 나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시고 싶으신 열매 맺고 싶으신 하나님의 뜻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가지 않고 100년 정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렇게 보내신데에는 그 분의 부르심과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을 위해 그 사명을 수행하려고 이 세상에 주님의 뜻이 열매 맺는 삶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 잠시 존재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내 눈과 마음이 하늘을 향해 고정되며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르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살다 때가 되면 나는 죽어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며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돌아가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나 죽으나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의 큰 축과 방향성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불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선명히 바라보는 믿음의 진보를 위해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믿으십시오. 이 시간 주님 이 명하신 그 뜻을 이루는 삶으로 매진하여 부름 받은 자로 충성 다하고 살다가 때가 되면 여기보다 훨씬 더 좋은 천국으로 이사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가장 성경적 본질에 근접한 교회라고 믿는 초대 교회들에 사도 바울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라이벌들이 있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투옥된 어려운 상을 자신들의 기회를 삼고 바울을 더 괴롭게 하기 위한 잘못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열심을 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괴로워하지 아니하며 어떤 동기로 했던지 전해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면 나는 상관 없다고 훌훌 털며 그 모든 것을 선교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환란과 어려움도, 주변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도 이렇게 넉넉히 이기며 선교적 의미로 해석하며 이런 놀라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 비결을 오늘 말씀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죠. 성령의 도우심이라는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 성령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삶을 이 세상에 살아 갈 때 내가 아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도하시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에게는 소망이 없고 어떤 구원 받을 조건도 없다는 것을 늘 뼈저리게 느끼며 사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자격 없는 나 자신을 고백하게 만드시는 분이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 하시는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감옥 안에 있으면서도 나는 죄인이고 자격 없는 자임을 나는 철저하게 무능한 존재임을 고백하게 만드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내 인생의 소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것, 이 진리를 실체로 알게 해주시는 분, 또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감옥 안에서도 그는 전천후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었고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가운데도 그 마음이 매몰되지 않고 그 삶을 선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놀라운 비결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끝까지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낙망하지 않고 평안할 수 있도록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다는 것은, 배가 잘 정박하기 위해 배보다 더 단단한 곳에 묶어야만 흔들리지 않는 것과 같은 원리로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강하고 단단한 곳에 내가 잡혀 있어야 내 마음과 인생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크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 성령님에게 우리가 꼭 붙들려 있어 그 분의 도우심 가운데 있을 때 이런 사도 바울의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이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주님께 꼭 묶여 있으며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면서 고백하는 두 가지가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데, 둘 다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첫째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원한다는 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존귀 해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기에 살고 죽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한 삶을 산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인생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 부끄러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우리가 부끄러워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이 우리를 보내셨을 때 우리에게 이거 이거 하기 원하시는 명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명을 붙들고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우리가, 그 당연히 해야 될 것들을 하지 못하고 돌아왔을 때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서 느끼는 감정이 부끄러움이라는 것이죠. 사도 바울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담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이 맡기신 일은 결과와 열매가 어찌 된 것과 상관 없이 무슨 일이든 내가 사명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고 올인 했다…는 그 전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적어도 사람들 앞에는 모르겠지만 예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이렇게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두번째 사도 바울의 고백은 너무 유명한 말씀이지요. “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Christ is in me…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신다는 거죠.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지금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기 원합니다. 이 시간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 로 함께 하시고 지금 살아 계십니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다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내 힘으로 살아온 삶을 포기하고 이제 주님이 내 안에서 함께하시고, 내 삶을 이끌고 가심을 믿고 고백하십니까? 그게 바로 위로부터 태어난 자이며, 바로 거듭난 자이며,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천국 백성으로 하늘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임마누엘로 함께하시기에 죽는 게 손해 보는게 아니라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보면 to die is to gain…죽는데 남는 거다/얻는 것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는 것도 주님의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이고 내가 죽는 것도 주님의 유익을 위해 있는 것인데, 내가 감옥 안에서 혹시나 죽는 때가 오더라도 그 죽는게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는 것임을 믿기에 나는 죽는 것도 손해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래서 죽음을 회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죽음의 때에 그 죽을 자리에서 당당하게 죽겠다는 이 용기와 담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라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내 삶을 이끌고 오심을 믿고 경험한 자이기 때문이죠. 이 시간 내 안에 살아 역사 하시는 그 예수님을 바라 보시고 믿고 그분 가까이 나아가기 원합니다. 우리도 잠시 세상을 살아가는데 남은 인생 가운데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이고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 사명 가운데 해야 될 일을 하며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 되길 원합니다. 또한 신앙 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이것저것 한다고 계속 뛰어다니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삶에 찾아오셔서 내 삶의 핸들을 운전 하셔서 온전히 내 안에서 주인 되시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예수님 안에서 열심이 아니면 예수님 안에서의 헌신이 아니면 그것이 결국 나를 무너뜨림을 분명히 자각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내 힘이 아니라 내 열심히 아니라, 나를 이끄시는 그 예수님이 주시는 힘을 통해 내 삶이 인도함 받았음을 믿고 이 시간 겸손히 내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 나의 운전대를 넘겨 드리며 의탁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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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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