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며, 십자가 정신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육체에 매어 살고 율법에 매어 살아가는 옛적으로 돌아가려는 삶을 매일 못박아야만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지침인데, 공동체에서는 일어나는 부딪힘과 어려움이 있게 됨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그냥 대강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게 되면 세상과 별로 충돌하고 부딪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늘 세상의 흐름이 내 흐름이기 때문에 세상 풍조에, 사람들에게 맞춰 적절하게 살았기 때문에 삶의 갈등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제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겠다 결단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나아간다면 반드시 이 세상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갈등하는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나 중심, 눈에 보이는 세상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되는 삶,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이런 어려움과 충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실천적 도전 과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목할 단어는 “형제들아” 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충돌의 문제는 다루기 전에 해야 될 첫 번째는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문제들과 갈등을 내 문제로 품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를 제 삼자, 소위 말하는 나와 상관없는 객체로 바라보며 손가락질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나와 무관한 자들이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이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쉽게 나와 무관한 공동체로, 대상화하고 객체화 시키기 쉽습니다. 내가 출석하고 몸 담고 있는 교회와 나를 구별하여, 나와 상관없는 교회와 같이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건 여러분들 자신이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라고 끊임없이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 공동체 안에 드러나는 문제들은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 있지 않을지 모르나, 결국 나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내가 함께 은혜를 구하며 풀어야 되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와 나를 객체화 하고 대상화해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 문제 있고 어려워하고 범죄한 교회 공동체 안에 형제 자매가 나와 무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게 바로 “형제들아” 의 선언입니다. 두 번째는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그랬습니다. 여기서 범죄한 일이란 어떤 감옥에 갈 만한 범죄들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런 범죄에 대한 얘기보다는 옆길로 넘어졌다는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전한 복음을 잘 따르다가 다시 옛날 율법으로 돌아가거나 유사 복음에 빠지는 것을 범죄한 일….이라 명하는 겁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려 그러다가 신앙생활 한껏 열심히 하다가 다시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길로 간 사람들, 육체의 소욕 주도의 삶, 율법 주도의 삶으로 넘어진 사람들이 바로 범죄한 이들입니다. 다른 형제나 자매 범죄한 일을 계속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그것을 심지어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형제 자매들의 허물이나 범죄를 계속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와 자기 교만의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컨텍스트는 그 범죄한 것이 드러났을 때…그게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폭로해 아니라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한 사람이 곁길로 나아가고 육체의 소욕으로 무너지고, 율법 주도적 삶으로 무너질 때 그 범죄한 일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고 한 사람이 잘못된 유사 복음에 빠져서 헷갈리게 되며 흔들려 넘어지는 게 교회 공동체 전체의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 공동체 영적 분위기를 다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런 문제를 책임 있게 다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렇게 형제나 자매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바로잡는다는 말은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원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치라는 의미입니다. 고장 나고 깨진 사람에게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 그게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형제 자매를 바로잡을 때는 반드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는 건 절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유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지적하고 쳐내는 것을 익숙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문제는 옳은 소리를 사랑 없이 하는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닌데 사랑이 빠진 정제와 판단으로 얘기하게 될 때 그게 상처가 되는 겁니다. 사랑이 빠진 얘기는 사람에게 회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옳은 소리를 안 들어서 교정 안되고 회복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상처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죄 가운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곁길로 나아가 무너진 사람들,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고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란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함으로 살리고 회복시키기 사모하며 바로 잡는 겁니다. 바로 잡는 목적은 재단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교정하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복음 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사랑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을 때마다 마지막은 내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점검하고 살펴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저 사람은 왜 저래… 손가락질 하기는 쉽고, 그 사람을 향하여 판단하고 분노를 쏟아내기 쉬운데, 그 사람의 범죄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베드 뉴스들을 보면서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열을 내면서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변 지체들이 범한 죄를 통해 나도 예수님 앞에 죄인임을 잊지 않으며 나에 대해서 내 자신을 주의해서 살펴보라는 것이죠. 내 자신을 주의해 살펴보면서도 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 안에서 성령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라는 겁니다. 나도 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나도 언제나 넘어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늘 조심하고 깨어 내 자신을 살펴보는 겁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이기에 교회 공동체 안의 이런 도전들과 어려움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주변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객체화 하지 않고 대상화 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그 삶에는 세상과 충돌과 부딪침과 부대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정하기 죽이기 전에 먼저 사랑으로 바로잡고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는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런 범죄를 통하여 내 자신을 살펴보며 나도 그런 시험과 범죄를 받을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늘 깨어 내 자신에게는 좀 더 치열하게, 타인에게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품으며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의 기준을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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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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