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이 인도함을 받아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초대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사울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영적 변화에 대해서 말씀으로 증언하고 계십니다. 먼저 사무엘은 그렇게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구별한 후에 사울에게 한 내려가서 기다리라 당부합니다.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말고 가르칠 때까지 기다리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당부하고 사무엘과 헤어진 직후 사울에게 일어나는 놀라운 두 가지 변화를 오늘 말씀을 증언하고 있는데, 바로 새 마음 주심과 새 능력 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세우신 후에 그냥 보낸 게 아니라 새 마음과 새 능력이라는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이 사무엘을 떠난 직후에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 새 마음이란 사울이 마음에 그냥 새로운 다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새롭게 변화 시켜 주신 하늘에서 선물로 주신 새로운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변화,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주신 새 마음이 부어진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나름 착하게 성실하게 잘 살았습니다. 아버지에게 충성 되며 집안에 충성된 아들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 오라 명하신 명령을 끝까지 지키려고 노력했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통해 자기가 노력한 결과와 눈에 보이는 자기의 집안을 세우는 것만 바라보며 그것이 전부인 줄로 살았던 것이 사울의 인생이었고, 그의 집안을 위해 자신만을 위해 살았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거룩하게 구별된 이후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은 살아가야 될 이유와 목적이 달라지고 훨씬 커진 것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나의 집안을 위해서만 살아갔던 사울의 최고 관심사에, 암나귀들의 잃어버린 행방들에 모든 마음을 쏟았던 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영적 시야가 들어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나를 위해 나의 집 안을 위해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큰 뜻을 마음에 최고 관심사로 두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를 위해서 살았다면 앞으로는 하나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된 것, 그것이 바로 사울이 받았던 하나님으로부터 주신 새로운 마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 새로운 마음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던 착각, 나 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전부인 줄 착각의 삶을 넘어 하나님의 뜻과 나라,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살아가는 영적 큰 그림이 내 마음에 심기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나 하나 잘 먹고 잘 살고, 우리 가족 잘 먹고 사는 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마음을 주시는 거죠. 이 모든 것들을 하나의 도구이며 과정일 뿐이며 내 인생은 하나님 아버지의 큰 뜻과 계획 가운데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내 인생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고 쓰임 받는 기쁨과 감격을 바라보는 이 새로운 마음을 주님께서는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며 은혜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새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울에게 부어진 새로운 마음이며,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도 동일하게 이 마음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감동, 즉 하늘에서 능력이 부어진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던 삶을 넘어서는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을 품게 되니까, 그 명에 합당한 능력을 하늘로부터 부어 주신 것입니다. 왕으로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주님의 뜻을 붙들고 의지하여 살아가는 길은 결코 너의 힘이나 노력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시면서 이제부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힘을 붙들고만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그냥 말을 할 때도 내 말이 그냥 평범하게 나가지 않고 말에 감정이 확 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다 경험하실 겁니다. 내 말에 감정이 실려 나갈 때…. 대부분의 그 감정이 실리는 말은 파괴적인 능력이 있어 다른 사람에게 마음에 비수를 꽂거나 상처를 주는 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내가 말을 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실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실리게 되면 그것은 새로운 힘이 되며 놀라운 역사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사울이 하나님의 영의 크게 감동하여 예언을 했다고 증언하는 겁니다. 그 예언은 사울이 잘 준비해서 전한 말이 아니라 사울을 도구와 그릇으로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말과 함께 나가는 것이죠. 사울의 입술에 하나님의 능력의 힘이 실리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삶은 참 중요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성실하고 충성 되게 최선을 다한 일이 참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도로서 우리는 나의 힘과 노력을 넘어서는 하늘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뜻이 열매 맺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 내가 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게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의미 없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본질의 정의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착한 사람이 되고 성실한 사람이 되고 노력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서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본질은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을 받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권능과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힘을 의지하며 나의 노력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을 새롭게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능력과 힘을 주시는 것은 나 때문에 주시는 게 아니라 나에게 맡겨진 사명 때문에 주시는 거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돈을 주셨습니까? 더 많은 힘과 권력을, 더 많은 영향력을 주셨습니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 때문에 주신 게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사명 때문에 주신 것을 잊지 말고, 그 목적대로 잘 쓰임 받도록 늘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가십시오. 그때부터 사람들도 사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부어 주시는 새 마음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이 부어 주시는 새 능력과 권능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마음은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하늘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게 만드신 목적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는 내 힘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내 노력에 열심의 결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권능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제와 하나님이 주신 명을 붙들고 새로운 마음을 받으십시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그 새로운 권능과 힘을 붙들고 오늘 하루 주님께 뜻을 붙들고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사울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기름 붓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이 됩니다. 사실 왕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왕되심을 거절하며 왕이 없는 백성과 같이 되기 원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불순종에 근거해, 눈에 보이는 왕을 다른 나라와 같이 세워 달라고 요구했지만, 하나님은 허락해 주셨고, 대신 사람들이 원하는 왕이 아닌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를 거룩하게 구별됨을 통해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기름 부었다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이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은 바로 날을 세워 주시는 분이 인간이 아니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이 자리까지 오도록 세워 주시는 분이 사람들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기를 원합니다. 나를 세우시는 분, 내 가족과 교회를 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실체로 고백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그렇게 기름을 부어 구별한 후, 사울에게 3가지 징조가 있을 것을 사무엘이 알려줍니다. 첫 번째는 그렇게 마음을 쏟아 찾으려 했던 암나귀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러 오게 된 동기는 그 잃어버린 암나귀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 마음에 가득했던 것, 마음에 최고 관심사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시킨 사울에게 바뀌어지는 것이 바로 주된 관심사,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바뀌게 된다는 것을 징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걸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야 되는 게 내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집안에 어떤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내 마음에 가득 찬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것들, 내가 손해 보고 잃어버린 것들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가운데 바라보고 품고 있는 것들이 변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내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주된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서고, 나의 것을 넘어서서 모든 일을 섭리 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과 보이지 않는 하늘 나라의 일을 품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자아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마음에 품고 살아야 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징조는 3명에 벧엘로 올라가는 순례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뵙기 위해 예배의 장소로 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떡 두 덩이를 받는 것입니다. 벧엘은 돌베게를 베고 자던 야곱이 천국의 계단을 보았던 곳이고, 그곳에 하나님의 집인 벧엘의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그 벧엘로 하나님을 뵙기를 사모하며 예배드리고 제사드리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통해 지금 사울에게 뭘 알려주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제부터는 네가 마음에 품고 모든 것을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하나님 앞에서 왕으로서 통치해야 쓰임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소중하지 못한 채, 사람과의 관계를 붙들고 가면 너는 망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왕으로서 너가 붙들어야 될 것은 바로 예배임을, 예배로부터 나오는 하나님과의 관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백성들과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어야 될지를 고민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함을, 예배와 제사를 중심에 두는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징조는 그런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이 크게 임하게 될 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에 꼭 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어야 하늘의 힘이 부어져야 감당할 수 있는 직책이 왕이라는 자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어 받아 세움 받은 왕이라는 직책은 자기 힘으로 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에 붙들려 하늘의 힘으로 감당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은 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권능은 원하는데, 종종 하나님 뜻 가운데 서 있는 것이 선명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내 뜻보다 우선 하는 결단에 소홀합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최우선 순위에 두며, 하나님의 일을 나의 일보다 우선하는 것에 흐릿합니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만나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올라가는 간절함이 흐릿해지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주신 말씀,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기회를 붙들어서 쓰임받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그냥 때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기회와 하나님이 주신 타이밍이 있음을 믿으며 그 기회를 붙들고 살기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때에 맞춰서 살아가는 자는 내 시간과 내 방법을 내려놓고, 내 인생이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짐을 발견하며 늘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때와 하나님의 기회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고 체험하며 살아가며, 하나님 영에 인도함을 받아 살아가는 되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마음에 품고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이 나를 이끌고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인도하시고 세워 주시는 기회와 때가 있음을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과 사울이 역사적으로 만나는 순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전혀 모르는 채 그저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기 위해 시작한 이 여행 끝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놀라운 만남인 사무엘과의 만남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그 만남은 우연히 어쩌다가 마주친 만남이 아니고, 개인적인 만남도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역사 흐름을 새롭게 만드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으로서의 만남이었습니다. 사실 사울은 지금 사무엘을 앞에 두고 선지자 사무엘이 어디냐고 물어볼 정도로 사무엘 얼굴조차 모르는 초면이었습니다. 그렇게 얼굴도 모르던 사람과의 우연히 어쩌다가 만난 그 만남이 놀랍게 준비되고 인도된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이 선견자라는 것을 소개한 후 너가 “너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내게 말하리라.” 증언합니다. 사울을 오랫동안 기다린 사무엘은 사울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바뀔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이란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사무엘을 찾아오도록 이끈 사울의 마음에 주된 관심사는 아버지의 잃어버린 암나귀들에 대한 행방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그게 지금 사울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을 살며 마음에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어떤 것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내 마음의 주된 관심사가 눈에 보이는 나의 어떤 것을 찾아 헤매는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될 사울의 마음속에 있는 주된 관심사가 그 눈에 보이는 잃어버린 암나귀들에 대한 관심을 넘어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심기우게 될 것을 알려줍니다. 사울에게 보다 중요한 일이 있음을 알게 해주며 보다 중요한 사명을 주된 관심사로 살아가게 될 것을 알려 주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과 시몬 베드로가 만났을 때 너가 지금까지는 어부였지만 앞으로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과 맞닿아 있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사무엘은 사울의 마음에 있는 주된 관심사는 내려놓고 걱정하지 말라 알려줍니다. 그 암나귀들이 마음에 주된 관심사가 아니라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갈 지도자로서 하나님이 주신 관심, 너의 마음에 지금 품어야 할 중요한 것들을 내가 알려 주겠다는 것이죠. 우리 신앙 생활의 핵심이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속 주된 관심사가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 뜻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내 나라의 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암나귀와 같이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모든 마음이 쏠려 있는 나의 인생에서 새로운 것을 바라보며 더 큰 영적 시야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를 마음을 품고 살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 구도자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축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너의 마음에 가득 차 있는 암나귀들에 대한 고민, 마음속에 지금 가장 큰 관심사를 내려 놓고 나의 얘기 잘 들으라는 겁니다. 너는 지금 나한테 암나귀의 행방을 찾으러 왔는데,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거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말이죠. 그 사무엘의 말에 사울은 겸손함으로 바짝 엎드려 반응했습니다. 우리 집안은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이고, 우리 가정은 그 중에도 가장 미약하다는 거죠. 즉 내가 아무런 자격 없는 사람입니다…. 나같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하십니까…라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고백하는 그 겸손함과 똑같은 겁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겸손하게 엎드린 사울을 높여주는 사무엘을 보게 됩니다. 그 자리에 30명 가량 손님이 있었는데 사울을 식사 자리에서 수석, 가장 높은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리고 특별하게 미리 주문한 넓적다리와 거기에 붙은 기름으로 된 식사를 먹게 합니다. 엎드리고 겸손하게 있는 사울에게 특별한 요리를 준비해 주고 수석에 앉혀 주는 사무엘의 모든 행동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그렇게 높여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인 셈입니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과 사울은 지붕에 올라가서 담화를 했는데, 아마 오랫동안 얘기 했을 겁니다. 그 지붕이라는 것은 우리와 같은 지붕이 아니라 한국의 옥상과 같은 평평한 곳입니다. 사울이 사무엘과 독대하며,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사울의 머리에는 하나도 없었던, 계획하지 않은 모두 우연과 같이 일어난 만남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를 놓고 기다리고 준비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으며 겸손히 엎드리면 엎드릴 수록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워 주시고 높여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을 향한 이 놀라운 영적 겸손과 반응이 결국 인생 초반에 사울이 놀랍게 쓰임 받게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엎드리면 엎드릴 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워 주시고 높여 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철저히 무능합니다…나는 소망 없는 죄인입니다…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리면 엎드릴 수록 주님께서 높여 주시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높여 세워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겸손해야 된다고 작정해서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겸손한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내가 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가까이에 살면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데 내가 높아질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살아 갈 때 내 영적인 상태가 겸손함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상에서의 예배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있으며 그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있음를 고백하며 마음 다해 주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성도의 삶을 살 때 그게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쏟으며 주님을 향해 예배할 때 나는 교만해 질 수 없는 것이죠. 그 영적 겸손이 나를 살리는 거며 그 영적 겸손으로 나아가는 예배를 통하여 나에게 새 힘을 주는 것이며 그 본질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예배자의 인생을 놓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이렇게 겸손하게 반응하며 엎드려 나는 자격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며 엎드리십시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관심과 더 중요한 일들을 보여 주시며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 은혜가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아요 댓글 달기 공유하기 어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울과 사무엘을 만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 집안에 암나귀들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포기하고 가려 할 때 사환이 뜻밖의 제안을 하고, 자기가 가진 은을 내어 드리면서 라도 사울을 설득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설득되어 지금 그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을 찾아가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사무엘을 찾아 가는 길에도 우연을 가장한 섭리는 계속되는데,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물을 긷는 소녀들을 만납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만나게 된 그 소녀들을 통해 사무엘이 지금 어디 있는지에 대한 너무나 귀한 정보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이 오늘 성에 들어왔다는 것도 알려주고, 지금 가면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줍니다. 그렇게 소녀들의 고급 정보를 듣고 종종 걸음으로 사무엘을 만나러 가는데, 마침 산당으로 올라가려 하는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했듯이 마침 그때 그 자리를 지나가게 되는 것이죠. 어쩌다 마주친 소녀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는 사무엘, 이 모든 것들이 겉보기에는 우연이고, 어쩌다가 일어난 일들입니다. 사울의 시선에서는 분명히 그럴 수 있고 사람의 시선에서는 분명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시선에서 봤을 때는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계획하심 이었음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와 묵시에 대해서 주일 말씀을 통해 잠깐 배웠지만 눈에 보이는 그냥 흐르는 시간에 역사와 상황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 뒤에 보이지 않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끄시는 그 보이지 않는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여정에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되어 우리 눈에는 우연의 연속과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의 섬세한 인도하심과 섭리로 사무엘을 만나는 자리까지 나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되어 놀라운 역사의 축을 만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과연 나에게는 무슨 일을 하시며 어떤 섭리를 이루시는가를 영적으로 깨어 민감하게 바라보며, 나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인도하심과 이끄심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갈 때 나와 동행하시며 함께하시는 주님 은혜를 꼭 붙들고 나아가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실체로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사울을 만나게 될 것을 미리 고지 해주시는 부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성도들의 자세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중요한 건 사무엘이 알려 달라고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알게 하셨다는 겁니다. 너에게 사울이 라는 사람이 찾아갈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주셔서 사무엘에게 들리게 하셨고, 알게 해 주셨습니다. 성경을 우리는 계시의 말씀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는 만큼 알게 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민감해진 다는 것은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그 뜻을 분별하며 늘 하나님 말씀 알기를 사모하며 들려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그 말씀을 들을 귀와 들을 마음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예레미야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 하게 되는 이유, 계속 선지자들이 예언을 하고 경고에도 돌아오지 않는 이유가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귀가 할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며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순종으로 나아가는데 그들이 귀를 막고 불순종으로 지금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들리게 해 주셔도 귀기울여 들으려 하지 않고, 듣기를 거절하며 귀가 할례 받지 않듯이 막혀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시간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사무엘과 같이 주여 말씀 하옵소서…주의 종의 듣겠나이다…사모하며 나의 마음을 쏟아 귀를 열고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겸손한 마음, 말씀을 수용하는 태도, 영적으로 민감하며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쏟는 갈망으로 주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부어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그 진리,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그 뜻,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그 계획을 품고 우리 삶이 주님의 뜻 가운데 선명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삶이 그냥 이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내 눈에는 보이지 않고, 내 눈에는 그냥 부분만 보이고,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나는 일이라고, 그 눈에 보이는 현상과 상황 뒤에 있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이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믿음을 가지고, 우리는 인내하며 이 하나님의 뜻에 인도함을 받으며, 주님의 이끄심을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사건들이 모두 하나님의 큰 그림 가운데 해석되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함을 받으며 그것이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 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을 만나게 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을 만나 첫 번째 왕으로 세우는 장면은 그동안의 사사 시대를 정식적으로 종결하고 이제 왕이 다스리는 시대로 움직이게 되는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하나님을 버림으로 여기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왕이 없다고 착각했으며 다른 나라들과 똑같은 왕을 세워야 본인들이 살 수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는 것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초대 왕으로 세움 받는 사울이 어떤 집안의 배경인지를 소개하는데, 사울의 집안은 베냐민 지파였고 아버지는 유력한 사람, 사울은 준수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합니다. 유력하다는 것은 부유하고 재산이 많다는 것을 포함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는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준수하다는 것은 사울의 외모와 신체 조건이 전쟁을 하기에 좋았다는 의미도 포함되지만, 단순히 좋은 신체 조건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기에 좋을 재목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왕으로 세움 받은 이유는 외모나 외적 조건이 준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쓰시겠다는 뜻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사울에게 발견되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마음 자세는 바로 겸손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있었던 사울의 겸손한 마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자로써 그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택하여 쓰신 데는 사울의 집안, 혹은 사울 본인의 외적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택하셔서 사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뜻 외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사울이 사무엘에게 인도함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게 만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는 그 집안에 생긴 예상치 않는 문제, 두번째는 사환의 예상치 않은 제안입니다. 먼저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사건을 통하여 시작됩니다. 암나귀를 한 마리 잃어버리면 그건 도망가거나 아니면 목자가 잘못해서 길을 잃은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암나귀 하나가 아니라 복수로 여러 마리를 잃은 겁니다. 즉, 집안에서 혹은 종들이 뭘 잘못해서 잃어버린 게 아니라 누군가가 암나귀들을 빼앗기 위해, 우리를 열어 놓거나, 일부러 흩어지게 만든 거죠. 그러니까 나쁜 의도로 어떤 사람들이 그 집안에 있는 암나귀들을 도망가게 만든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약탈 당한 거나 마찬가지고 도둑 맞은 거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명을 받고 사울은 사환 한 사람을 데리고 그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아 헤메는데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까지 왔는가 하면 이제는 돌아가야 되겠다 생각을 하게 되는 시점까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기를 걱정 할 것을 생각해서 이게 암나귀들 찾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 가려고 하는데 그때 함께 갔던 사환이 제안을 하는 겁니다. 그냥 가지 말고 근처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찾아가서 우리의 갈 길을 물어보면 좋겠다는 거죠. 이게 지금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들을 찾지 못한 것, 그리고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사환이 뜻밖의 제안을 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울에게는 전혀 계획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사울의 눈에는 다 우연히 찾아왔지만, 그 하나하나가 연결되어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지금 사무엘에게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몰랐지만 사환의 갑작스런 제안은, 이 큰 그림을 봤을 때는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걱정 하시니까 돌아가야 되겠다는 마음의 결심이 선 사울을 설득하는 사환의 열심히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드릴 예물이 없어서 망설이는 사울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드릴 수 있으니 만나자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환은 사울과 사무엘이 만나는 것도, 사무엘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는 자, 그저 하나님께 잘 쓰임 받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뜻이 사울의 사환을 이렇게 놀랍게 쓰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울이 쓰임받게 되는 이유도, 사울의 사환이 쓰임받게 되는 이유도 어떤 조건들이 쓰임받게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시겠다는 뜻이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능력이 특별하고 내가 외적으로 어떤 조건이 많아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쓰임받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하나님이 나를 쓰시겠다는 뜻이 쓰임받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는 데 있어 나에게 찾을 만한 이유와 조건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붙드는 겸손함을 견지할 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끝까지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께 쓰임 받아 살아가는 것도, 원인과 이유는 나에게 하나도 없음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이유가 나에게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꼭 붙어 살아가는 자가 될 때 내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쓰임 받는 신비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우리가 만나는 사건들을 통하여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하게 하는 섭리 가운데 놓여 있음을 깨닫고, 주님 앞에 귀하게 나아가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내가 그 말하는 사람 말을 들을 마음이 없게 되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입술을 통하여 마지막 경고로 돌이키기 원하시면서 주시는 말씀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8절까지 많은 분량을 담아 너희가 지금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너희들이 지금 왕을 원하는 데 이런 일들이 분명히 생길 거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을 담아 구체적으로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문제라는 것을 사무엘의 입을 통해 백성들 귀에 전합니다. 또한 그 왕 때문에 너희들은 결국 다 망할 것이고 그 왕으로 인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이정도 강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적어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한번 다시 생각해보거나 자신들의 결정을 조금 미루는 신중함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귀를 못 알아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고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무엘의 강하 경고가 끝나자마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면 “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입니다. 다시 한번 재고 해봐…다시 한번 내 말 듣고 심사숙고해봐…그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아니요”라며 듣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조언 필요 없고요, 내가 가는 길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틀렸다며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거에요. 왜냐하면 그들의 답은 정해져 있었고 귀를 막혀 있고,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확대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생명 듣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늘 소망 붙들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도…열방과 같이…우리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열방과 같이” 되기를 소망하며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의 하나님 백성됨의 정체성을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 앞에 왕이 없다고 항의하며 우리 왕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왕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에 드러난 착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왕이 우리 앞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얘기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 빼앗긴 하나님의 법계를 돌아오게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통회 하고 자복하고 앞에 나가 대신 싸워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들의 왕 아니십니까? 자기들 눈앞에 체험했고 눈앞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경험했고, 전적인 은혜로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목도했음에도,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세우는 왕이 우리를 위해 싸울 거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불순종의 문제라는 것은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고백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안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심을 믿고 고백하며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서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으심을 거절하며 듣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내 결정이 옳고 내가 가는 길이 옳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옛날에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전이자 신앙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여기까지 도우셨는데,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왕으로 계신데, 마치 왕이 없는 사람들같이 헤메며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그 눈에 보이는 왕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나를 지키고 내 앞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하나님께 아우성 치며 하나님이 틀렸다고 소리치고 있는 그 불신앙의 모습이, 혹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닌가…말씀을 통해 반성하고 비추어보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출발점을 다시 한 번 잘 세우기 원합니다. 이 시간 나를 다스리고 통치 하시는 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까? 나는 마음에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계십니까? 그 예수님 만이 그리스도로, 왕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십니까? 그러지 않으면 내 삶에 왕이 없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가며,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내 왕으로 대치하며,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며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으로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에서 돌아 서십시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에서 빠져 나오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기준 삼아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으려는 불순종을 거절하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이 출발점을 놓쳐버리면 여러분들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붙들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심을 믿으며 하나님 기준 아래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우리 기대와 달리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전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망나니가 되는 안타까운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이 영적 지도자로 함량 미달이 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찾아와 왕을 요구하는 장면이 오늘 말씀입니다. 만약에 당신 아들들이 당신같이 깨어 있는 영적 지도자라면 상관 없겠는데, 도저히 우리를 이끌 영적 지도자는 되지 못할 그릇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달라…그들의 요구는 겉보기에는 이해도 되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 뒤에 감추어진 그들의 속마음과 본심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면, 미스바 집회에서 모인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함께 모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어디로 나아가면 되겠습니까….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미 답을 정하고 사무엘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자신들의 뜻을 잘 따라가며 자신들을 기쁘게 할 왕을 세우게 해 달라는 것이죠. 마치 사사 시대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백성들을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 그 마음에 기뻐하지 않고 섭섭했던 이유였습니다. 물론 자기 아들들을 그렇게 안 좋게 이야기하고 자격이 안 된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이어도 아비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무엘의 섭섭했던 본질의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뻐하지 않고 반대했던 본질을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해 왕을 세워 달라는 그 요청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무엘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거나 감정적으로 부딪치지 않고, 그 기뻐하지 않는 마음 화나는 마음을 가지고 제일 먼저 여호와께 기도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도 나이가 많아서도 한결같이 사무엘은 어떤 것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고,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는 것을 삶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 받으면 그 열 받은 감정에 따라 모든 것이 주도되며 폭발되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은데 사무엘은 지금 감정이 올라오고 있음에도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기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열받을 때 사람들을 먼저 찾아 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먼저 찾아 가십니까? 사람들에게 쏟아 내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아내고, 사람들에게 찾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찾아가는 자가 영적인 자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제일 먼저 쏟아내는 영적인 자가 되길 원합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내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불순종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핵심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왕의 세워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을 버리는 불순종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금 왕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이 언제나 있으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에게서 건져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며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고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자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은 왕이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온전히 왕 되시는 것을 거절하고 언제나 왕으로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심각한 문제는 왕을 세워달라는 이유가 “다른 나라들 같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 됨을 버리고 “다른 나라와 같이” 되려고 하는 불순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나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이 딱 갖춰지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왕으로 계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식하지 않고 왕으로 모시지 않는 데 그들의 가장 큰 영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착각하고 왕이 없다고 착각하는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마치 왕이 없는 자같이 살아가며 다른 열방과 같이 우리도 왕을 세워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거절하는 불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된다고 착각하는 것, 그래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선명하게 지적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요구하는 게 얼마나 큰 불순종 인지 모르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편에서 있는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 시간 내 안에 그 왕이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고백하며 실체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게 나의 신앙 생활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계신데도 내가 하나님이 없고 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내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왕이 계신데, 이미 왕이 우리 가운데 좌정하시고 계신데 왕이 없다고 아우성치며 왕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는 다른 나라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내 마음을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계신데 우리에게 왕이 없고 주인이 없다고 얘기하는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불순종 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 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내 마음에 온전히 왕으로 계신 주님을 모시며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7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고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부르짖는 백성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주신 승리 앞에 어떻게 보면 신앙의 회복과 영적으로 다시 한번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우리가 보게 되었는데요. 8장 말씀은 안타깝게도 그 영적인 선순환과 상승 곡선이 쭉 뻗어가지 못하고 밑으로 꺾여 내려가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위대한 선지자이자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자식 농사는 제대로 짓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를 낳기는 쉬워도 사람 답게 키우는 게 어렵다고 그러는데, 사실 낳는 것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머니 주일에도 배웠지만 뼈20개가 동시에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어머니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는 것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희생으로 태어난 자녀가 정말 사람 답게 하나님 자녀 답게 크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무엘이 얼마나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습니까? 전에 있던 엘리 제사장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한 선지자였습니다. 사사 시대의 어두움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하나님께 묵직하게 쓰임 받은 선지자가 사무엘입니다. 백성들은 그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기대도 분명히 컸을 겁니다. 그 자녀들이 적어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아버지 사무엘과 같이 잘 자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 두 자녀의 이름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데 그 아들들의 이름도 참 좋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를 가진 “요엘,”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 라는 의미의 “아비야” 둘다 이름이 참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귀한 이름을 받고 사무엘의 자녀들이 크니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자라났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까 당연히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도와서 하나님의 사역을 같이 잘할 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삶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고, 선명하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주님 앞에 쓰인 받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따라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그것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타락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 사무엘 아들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아버지의 모범과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고 완전히 망나니로 나아가는 것이죠. 어떻게 사무엘이라는 그 위대한 아버지 밑에 자녀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모두 이렇게 망나니가 될 수 있는가? 참 이게 이해할 수 없는 반전이자 아픔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고 수많은 악행을 벌이며 그렇게 무너지고 망나니가 된 건 그 아버지의 영적 어둠과 둔감함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최고의 지도자이자, 영적 거성인 사무엘의 두 아들들이 마치 영적인 어둠과 둔감함의 대표였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견주어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을 선뜻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전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무엘은 모든 것엔 하나님께 쓰임 받았는데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무엘은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위대한 영적 거성인 사무엘의 실패한 자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자신과 우리의 삶을 잘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 영적 거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아니고 둘 다 그 자식들은 아버지를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나아가는 열매는 꼭 부모의 노력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지 많은 않음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 결과가 꼭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사무엘도 하나도 아닌 두 아들 모두가 이렇게 무너지고 망나니가 될 수 있다는 성경의 엄중한 평가를 통하여 우리가 자녀양육에 최선을 다 해야 되지만, 좋은 결과이던 나쁜 결과이던, 결과에 있어서 인과론을 넘어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도전임을 깨닫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꼭 붙들고 자녀와 함께 시간을 내서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잘 키우는 것에 많은 것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양육,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도 전혀 예측 불가합니다. 우리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는 것,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 안에 계신 분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실제로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키우고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그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겸손히 붙들기 원합니다. 사무엘도 그렇게 실패할 수 있었는데 우리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자녀에 대한 어떤 결과도 모두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그 미혹에서 자유하기 원합니다. 자녀를 신앙 안에 잘 자라게 하는 책임이 부모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잊지 마시고 가정에서 이 신앙 교육을 최우선에 두고 삼으십시오. 우리 가정이 자녀들이 신앙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잘 배우고 자라는 귀한 은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정을 세우고 자녀들을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길 촉구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제거하며 그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예배 하는 백성으로 돌이켰습니다. 더불어 온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한마음으로 부르짖으며 통회와 자복으로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백성으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대신하여 싸워 무찔러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은 그렇게 싸워 주심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 다 막아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워 이기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기고만장 하고 착각했었습니다. 이제는 회개와 자복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 주시는 것을 넘어 친히 무찔러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호되게 당한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는 경계를 넘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은 그들의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온다는 것을 실체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땅들과 성읍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되찾아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이 갑자기 강해져서 회복된 게 아니라 여호와의 강한 손이 블레셋을 대신하여 싸워 주신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예배하는 백성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결과였습니다. 사사기의 영적 어둠의 시대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이 우상들을 모두 제하여 버리며 하나님을 뒷전으로 두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며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며 섬기는 자로 회개하고 자복하며 두 손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붙드는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회복시켜 주시고 놀랍게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 즉 여호와의 능력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적을 막아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통치 하시는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백성이 누리게 되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였습니다. 사무엘이 살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와 축복이 임했습니다. 겉보기엔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써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게 쓰신 겁니다. 즉,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통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동안 평화와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누리는 복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리더십으로 해마다 많은 지역 지역을 다니면서 순회했습니다.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돌보고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 할 것을 계속 가르친 것입니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곳이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있는 곳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영적 지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사무엘은 자신이 있는 가정과 고향에 단을 쌓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예배를 주도하고 예배 본질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는 예배 에게 모든 것을 집중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타락한 예배였으며, 겸하며 섬긴 예배였으며, 능력이 상실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무시하며 자기의 편리 대로 드리는 그냥 때우듯이 예배와 제사였습니다. 새롭게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해주며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전심을 향해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제사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제단을 쌓는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회복은 결국 예배의 회복에 있음을 선명히 제시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게 마음이 향하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두 손 들고 나올 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백성이 누리게 되는 축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을 막아 주시며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그 어려움에서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회복해야 될 본질임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이 사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곳이 될 때, 그 땅에 하늘의 평화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로 쓰임 받은 사무엘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통로가 되고 그릇이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늘도 하나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도록, 마음껏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를 열망하고 사모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는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기 원합니다.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의 회복을 통해 주님께서 온전히 나를 다스리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이 시간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에게만 마음을 쏟으며 예배가 회복되는 부흥을 사모하십시오. 내 마음에, 우리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회복되며 오직 주님의 그 오른 팔을 붙들고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쓰임 받으며 주님께서 일하시는 귀한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리더십 아래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전심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영적으로 충만함이 경험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함께하셔서 먹고 마시며 축제가 이루어지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은데 그렇게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들이 보고 쳐들어오고 있는 겁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 드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주님을 바라보는데 블레셋 적이 몰려오는 것이죠.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아가는데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있는데 내 인생의 배가 흔들리는 겁니다. 특별히 이십 년 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쟁의 상처와 패배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이나 크게 대패 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했으며 법궤도 빼앗겼던 아픈 기억, 그러고도 20 년 동안 그들에게 압제를 당했으니 그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블레셋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상황 가운데 직면한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미스바 사건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 반응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예전에 홉니와 비느하스를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부르짖지 않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여 그들의 육신의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과 같이 생각하며 전쟁에 나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들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전쟁을 앞에 두고 강력한 적이 쳐들어오는데 두려움이 찾아왔으나, 두려움에 압도 당하거나 두려움이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놔두지 않고 그들은 누구를 바라봤는가 하면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신실하게 나아가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예배 드리고 있는데 인생의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적이 쳐들어 올 때 동일하게 두려워하는 감정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풍랑을 만나거나 적이 쳐들어올 때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 자체를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내 마음의 주저 앉게 만들고 나를 이끌고 주도하도록 방치하면 안되는 겁니다. 손님과 같이 왔다가 빨리 빨리 내보내야 되는 것이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두려움에 압도 당하지 않고 끌려 다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것을 사무엘에게 요청했습니다. 풍랑 가운데 지금 그들이 해야 될 가장 첫번째가 주님을 향하며 매달리는 기도를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기도인 쉬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로 위기 상황 가운데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믿으며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이후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적이 쳐 들어 오는 긴급한 상황에 사무엘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분 1초 가 아쉬운 그 긴급한 상황에 사무엘은 번제를 대충 드리지 않고, 온전한 번제를 그 위기 상황 가운데 드린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올 때 흠 없는 수소로 드려야 되는 그 번제를 자기들 마음대로 그 끌고 온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면서 그들은 제사와 예배 잘 들었다고 착각했던 그 모습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사울왕을 통해 배우겠지만 전쟁 앞에서 스스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서 그 제사를 무너뜨리며 결국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모습과도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 위기 상황 가운데 영적 지도자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주님 앞에 제일 먼저 드리는 겁니다. 온전 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때우듯이 대강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나의 전심을 드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법도에 맞는 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수많은 제사들과 예배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이 전쟁의 위기 앞에 드리는 사무엘의 번제를 온전한 번제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제사들과 예배들이 겉으로는 행해졌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온전한 제사들과 예배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제사 다운 제가, 예배 다운 예배가 희귀해지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에서도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주님께 드리며 그 어떤 것보다 제사와 예배로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닫고, 그 예배와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위기 가운데 누구를 바라봐야 되는 지를 정확하게 기준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이스라엘을 앞서 스스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위기 상황 가운데 풍랑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야기, 그게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일하심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내리셔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신 겁니다. 자신들이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앞서 싸우셔야 이길 수 있음을 평상시에 고백한 게 아니라 위기 상황 가운데, 적들이 쳐들어 오고 있을 때 고백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번제를 주님께 드리고 마음 다해 주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 하시며 그들 앞서 싸우기 시작하신 겁니다. 법궤를 들고 나갔느냐 않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전쟁의 현장에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한 예배와 함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주님을 온전히 붙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치셔서 블레셋 군대가 다 떠나 가게 된 겁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오늘 결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벤에셀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길 원합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여기까지 주님께서 도우셨고…인도하셨고…함께하셨다. 이 에벤에셀의 고백이 나의 삶을 통하여 고백 된다면 그 삶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인생이겠습니까?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수치가 찾아오고,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붙들면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동일하게 일하심을 믿습니다. 성도들은 내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을 목도하는 감격과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감격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에벤에셀을 고백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에벤에셀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저의 삶에 여러분들의 삶의 고백으로 증언되는 선명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아카이브
12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