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얘기해도 내가 그 말하는 사람 말을 들을 마음이 없게 되면 말귀를 못 알아 듣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입술을 통하여 마지막 경고로 돌이키기 원하시면서 주시는 말씀에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18절까지 많은 분량을 담아 너희가 지금 눈에 보이는 왕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너희들이 지금 왕을 원하는 데 이런 일들이 분명히 생길 거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움을 담아 구체적으로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문제라는 것을 사무엘의 입을 통해 백성들 귀에 전합니다. 또한 그 왕 때문에 너희들은 결국 다 망할 것이고 그 왕으로 인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이 너희에게 응답하지 않으실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이정도 강하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적어도 하나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한번 다시 생각해보거나 자신들의 결정을 조금 미루는 신중함이 있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귀를 못 알아 들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었고 들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무엘의 강하 경고가 끝나자마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면 “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입니다. 다시 한번 재고 해봐…다시 한번 내 말 듣고 심사숙고해봐…그 하나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아니요”라며 듣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사무엘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 말씀 듣기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조언 필요 없고요, 내가 가는 길이 옳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틀렸다며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얘기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기로 작정한 거에요. 왜냐하면 그들의 답은 정해져 있었고 귀를 막혀 있고,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확대 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생명 듣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늘 소망 붙들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을 거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한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우리도…열방과 같이…우리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열방과 같이” 되기를 소망하며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의 하나님 백성됨의 정체성을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 앞에 왕이 없다고 항의하며 우리 왕을 세워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왕이 아니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에 드러난 착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왕이 우리 앞서 우리를 위해 싸울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안타까운 얘기인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블레셋의 손에서 건져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그 빼앗긴 하나님의 법계를 돌아오게 만드신 분이 누구십니까?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통회 하고 자복하고 앞에 나가 대신 싸워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 그들의 왕 아니십니까? 자기들 눈앞에 체험했고 눈앞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를 경험했고, 전적인 은혜로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목도했음에도, 하나님이 아닌 우리가 세우는 왕이 우리를 위해 싸울 거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적인 불순종의 문제라는 것은 성경은 분명히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신앙고백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시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안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심을 믿고 고백하며 우리가 하나님 편에서 서 있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옳으심을 거절하며 듣기를 거부하는 겁니다. 내 결정이 옳고 내가 가는 길이 옳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은 옛날에 이야기만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전이자 신앙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여기까지 도우셨는데,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왕으로 계신데, 마치 왕이 없는 사람들같이 헤메며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그 눈에 보이는 왕이 나를 편안하게 하고 나를 지키고 내 앞에 나가서 싸워야 한다고 하나님께 아우성 치며 하나님이 틀렸다고 소리치고 있는 그 불신앙의 모습이, 혹시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아닌가…말씀을 통해 반성하고 비추어보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의 본질과 출발점을 다시 한 번 잘 세우기 원합니다. 이 시간 나를 다스리고 통치 하시는 분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까? 나는 마음에 왕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계십니까? 그 예수님 만이 그리스도로, 왕으로 고백하며 살아가십니까? 그러지 않으면 내 삶에 왕이 없는 것처럼 내 마음대로 살아가며, 다른 사람을 기준으로 바라보며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내 왕으로 대치하며, 자기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며 열심히 뛰어다닐 수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들은 정말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마음으로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에서 돌아 서십시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는 불순종에서 빠져 나오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기준 삼아 눈에 보이는 것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 놓으려는 불순종을 거절하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자입니다. 이 출발점을 놓쳐버리면 여러분들은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붙들고, 하나님은 언제나 옳으심을 믿으며 하나님 기준 아래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우리 기대와 달리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전혀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망나니가 되는 안타까운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들이 영적 지도자로 함량 미달이 된 후,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찾아와 왕을 요구하는 장면이 오늘 말씀입니다. 만약에 당신 아들들이 당신같이 깨어 있는 영적 지도자라면 상관 없겠는데, 도저히 우리를 이끌 영적 지도자는 되지 못할 그릇이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해 달라…그들의 요구는 겉보기에는 이해도 되고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그 왕을 세워 달라는 요청 뒤에 감추어진 그들의 속마음과 본심입니다. 정말 이스라엘 장로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이면, 미스바 집회에서 모인 그 은혜를 기억하며 함께 모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어디로 나아가면 되겠습니까….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미 답을 정하고 사무엘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자신들의 뜻을 잘 따라가며 자신들을 기쁘게 할 왕을 세우게 해 달라는 것이죠. 마치 사사 시대에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백성들을 다시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이 그 마음에 기뻐하지 않고 섭섭했던 이유였습니다. 물론 자기 아들들을 그렇게 안 좋게 이야기하고 자격이 안 된다 그러니까 그게 사실이어도 아비로서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사무엘의 섭섭했던 본질의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기뻐하지 않고 반대했던 본질을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위해 왕을 세워 달라는 그 요청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무엘의 위대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거나 감정적으로 부딪치지 않고, 그 기뻐하지 않는 마음 화나는 마음을 가지고 제일 먼저 여호와께 기도하며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젊을 때도 나이가 많아서도 한결같이 사무엘은 어떤 것도 기도보다 앞서지 않았고,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는 것을 삶으로 실천한 것입니다. 우리는 열 받으면 그 열 받은 감정에 따라 모든 것이 주도되며 폭발되는 악순환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은데 사무엘은 지금 감정이 올라오고 있음에도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기도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열받을 때 사람들을 먼저 찾아 가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먼저 찾아 가십니까? 사람들에게 쏟아 내기 전에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아내고, 사람들에게 찾아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찾아가는 자가 영적인 자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제일 먼저 쏟아내는 영적인 자가 되길 원합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내며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불순종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겁니다. 그러시면서 핵심을 말씀하셨는데, 그들의 왕의 세워 달라는 요청은 하나님을 버리는 불순종 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금 왕이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습니까? 왕이신 하나님이 언제나 있으셨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 왕에게서 건져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셨으며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며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고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살아가는 방식이자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신들은 왕이 없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의 온전히 왕 되시는 것을 거절하고 언제나 왕으로 함께하셨던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심각한 문제는 왕을 세워달라는 이유가 “다른 나라들 같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의 정체성은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인데 하나님의 백성 됨을 버리고 “다른 나라와 같이” 되려고 하는 불순종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나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이 딱 갖춰지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이미 왕으로 계신 하나님을 왕으로 인식하지 않고 왕으로 모시지 않는 데 그들의 가장 큰 영적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착각하고 왕이 없다고 착각하는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마치 왕이 없는 자같이 살아가며 다른 열방과 같이 우리도 왕을 세워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는 불신앙이며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거절하는 불신앙이 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된다고 착각하는 것, 그래서 거룩함과 구별됨을 버리고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자체가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선명하게 지적하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지금 요구하는 게 얼마나 큰 불순종 인지 모르는 것이죠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을 누구로 이해하는가? 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편에서 있는가…입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면 이 시간 내 안에 그 왕이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고백하며 실체로 누리며 살아가는 것, 그게 나의 신앙 생활입니다. 그런데 내 안에 분명히 계신데도 내가 하나님이 없고 왕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내가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이미 왕이 계신데, 이미 왕이 우리 가운데 좌정하시고 계신데 왕이 없다고 아우성치며 왕이 없는 자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고는 다른 나라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내 마음을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에 왕으로 계신데 우리에게 왕이 없고 주인이 없다고 얘기하는 그런 삶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불순종 인지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 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내 마음에 온전히 왕으로 계신 주님을 모시며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7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쳐 주시고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부르짖는 백성에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주신 승리 앞에 어떻게 보면 신앙의 회복과 영적으로 다시 한번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우리가 보게 되었는데요. 8장 말씀은 안타깝게도 그 영적인 선순환과 상승 곡선이 쭉 뻗어가지 못하고 밑으로 꺾여 내려가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위대한 선지자이자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자식 농사는 제대로 짓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자녀를 낳기는 쉬워도 사람 답게 키우는 게 어렵다고 그러는데, 사실 낳는 것도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머니 주일에도 배웠지만 뼈20개가 동시에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어머니가 자녀를 태어나게 하는 것도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큰 희생으로 태어난 자녀가 정말 사람 답게 하나님 자녀 답게 크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무엘이 얼마나 훌륭한 영적 지도자였습니까? 전에 있던 엘리 제사장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한 선지자였습니다. 사사 시대의 어두움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하나님께 묵직하게 쓰임 받은 선지자가 사무엘입니다. 백성들은 그 사무엘의 아들들에 대한 기대도 분명히 컸을 겁니다. 그 자녀들이 적어도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었던 홉니와 비느하스와는 질적으로 다르고, 아버지 사무엘과 같이 잘 자라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 두 자녀의 이름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데 그 아들들의 이름도 참 좋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의미를 가진 “요엘,”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시다.” 라는 의미의 “아비야” 둘다 이름이 참 훌륭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귀한 이름을 받고 사무엘의 자녀들이 크니까 얼마나 큰 기대를 가지고 자라났겠습니까? 그래서 그 아버지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까 당연히 그 아들들이 아버지를 도와서 하나님의 사역을 같이 잘할 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버지 사무엘의 삶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고, 선명하게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이 주님 앞에 쓰인 받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따라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당한 이익을 챙기고 그것으로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타락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 사무엘 아들들에 대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아버지의 모범과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가지 않고 완전히 망나니로 나아가는 것이죠. 어떻게 사무엘이라는 그 위대한 아버지 밑에 자녀들이 하나도 아니고 둘 다 모두 이렇게 망나니가 될 수 있는가? 참 이게 이해할 수 없는 반전이자 아픔입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고 수많은 악행을 벌이며 그렇게 무너지고 망나니가 된 건 그 아버지의 영적 어둠과 둔감함의 결과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최고의 지도자이자, 영적 거성인 사무엘의 두 아들들이 마치 영적인 어둠과 둔감함의 대표였던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와 견주어 별반 차이가 없었던 것을 선뜻 이해가 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전이지만, 분명한 것은 사무엘은 모든 것엔 하나님께 쓰임 받았는데 자식 농사에는 실패한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사무엘은 하나님께도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 위대한 영적 거성인 사무엘의 실패한 자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우리의 자신과 우리의 삶을 잘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무엘은 분명히 위대한 영적 지도자이자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 영적 거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아니고 둘 다 그 자식들은 아버지를 따라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식이 나아가는 열매는 꼭 부모의 노력에 대한 결과로 나타나지 많은 않음을 우리는 겸허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양육하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그 결과가 꼭 내가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 사무엘도 하나도 아닌 두 아들 모두가 이렇게 무너지고 망나니가 될 수 있다는 성경의 엄중한 평가를 통하여 우리가 자녀양육에 최선을 다 해야 되지만, 좋은 결과이던 나쁜 결과이던, 결과에 있어서 인과론을 넘어서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신앙 안에서 자녀를 잘 기르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도전임을 깨닫고 주님 주시는 은혜를 꼭 붙들고 자녀와 함께 시간을 내서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잘 키우는 것에 많은 것을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 양육,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도 전혀 예측 불가합니다. 우리 자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는 것,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내 안에 계신 분이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실제로 믿고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키우고 양육하고 돌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그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겸손히 붙들기 원합니다. 사무엘도 그렇게 실패할 수 있었는데 우리도 실패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자녀에 대한 어떤 결과도 모두 부모의 책임으로 돌리려 하는 그 미혹에서 자유하기 원합니다. 자녀를 신앙 안에 잘 자라게 하는 책임이 부모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음을 잊지 마시고 가정에서 이 신앙 교육을 최우선에 두고 삼으십시오. 우리 가정이 자녀들이 신앙의 우선순위와 가치를 잘 배우고 자라는 귀한 은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며 가정을 세우고 자녀들을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길 촉구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제거하며 그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만을 예배 하는 백성으로 돌이켰습니다. 더불어 온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한마음으로 부르짖으며 통회와 자복으로 회개하는 백성에게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백성으로 그들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대신하여 싸워 무찔러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은 그렇게 싸워 주심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경내에 들어오지 못하였고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의 사는 날 동안 다 막아 주신 것입니다. 예전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싸워 이기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기고만장 하고 착각했었습니다. 이제는 회개와 자복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보호하시고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 주시는 것을 넘어 친히 무찔러 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호되게 당한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는 경계를 넘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은 그들의 힘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온다는 것을 실체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땅들과 성읍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되찾아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회복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이 갑자기 강해져서 회복된 게 아니라 여호와의 강한 손이 블레셋을 대신하여 싸워 주신 결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며 예배하는 백성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결과였습니다. 사사기의 영적 어둠의 시대를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본질은 바로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려는 이 우상들을 모두 제하여 버리며 하나님을 뒷전으로 두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며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며 섬기는 자로 회개하고 자복하며 두 손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붙드는 하나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회복시켜 주시고 놀랍게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손, 즉 여호와의 능력을 상징하는 여호와의 손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시며 적을 막아 주시는 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이 통치 하시는 나라의 모습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백성이 누리게 되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게 하시는 것이죠. 이 모든 것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새로운 영적 지도자가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였습니다. 사무엘이 살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 이스라엘에는 평화와 축복이 임했습니다. 겉보기엔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이지만, 실제로는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써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게 쓰신 겁니다. 즉, 말씀이 강조하는 것은 영적 지도자 사무엘을 통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온전히 다스리시는 동안 평화와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누리는 복을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겁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영적 리더십으로 해마다 많은 지역 지역을 다니면서 순회했습니다. 순회하면서 백성들을 돌보고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 할 것을 계속 가르친 것입니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이곳이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림이 있는 곳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영적 지도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사무엘은 자신이 있는 가정과 고향에 단을 쌓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예배를 주도하고 예배 본질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는 예배 에게 모든 것을 집중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타락한 예배였으며, 겸하며 섬긴 예배였으며, 능력이 상실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무시하며 자기의 편리 대로 드리는 그냥 때우듯이 예배와 제사였습니다. 새롭게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해주며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여 여호와를 위하여 전심을 향해 마음을 드리는 예배와 제사만이 우리가 살 길임을 제단을 쌓는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분명히 알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회복은 결국 예배의 회복에 있음을 선명히 제시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상을 버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게 마음이 향하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두 손 들고 나올 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는 백성이 누리게 되는 축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을 막아 주시며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그 어려움에서 보호하여 주신다는 것을 삶의 현장에서 고백하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회복해야 될 본질임을 마음 속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마음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 공동체가 그리고 이 사회가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곳이 될 때, 그 땅에 하늘의 평화와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로 쓰임 받은 사무엘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도록 통로가 되고 그릇이 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오늘도 하나님은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다스림에 통로가 되도록, 마음껏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기를 열망하고 사모하며 주님 앞에 부르짖는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기 원합니다.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예배의 회복을 통해 주님께서 온전히 나를 다스리시고, 우리 가정과 교회를 온전히 다스리시는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이 시간 주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에게만 마음을 쏟으며 예배가 회복되는 부흥을 사모하십시오. 내 마음에, 우리 가정과 교회에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회복되며 오직 주님의 그 오른 팔을 붙들고 그 은혜 가운데 우리가 쓰임 받으며 주님께서 일하시는 귀한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리더십 아래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전심으로 돌아와 회개하고 영적으로 충만함이 경험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으로 함께하셔서 먹고 마시며 축제가 이루어지고,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였다… 이렇게 마무리되면 좋은데 그렇게 모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적들이 보고 쳐들어오고 있는 겁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 드리고 신앙을 회복하고 주님을 바라보는데 블레셋 적이 몰려오는 것이죠. 하나님께 순종하고 나아가는데 인생의 풍랑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가고 있는데 내 인생의 배가 흔들리는 겁니다. 특별히 이십 년 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쟁의 상처와 패배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두 번이나 크게 대패 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사했으며 법궤도 빼앗겼던 아픈 기억, 그러고도 20 년 동안 그들에게 압제를 당했으니 그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블레셋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상황 가운데 직면한 첫 번째 감정은 두려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미스바 사건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 반응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예전에 홉니와 비느하스를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부르짖지 않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여 그들의 육신의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과 같이 생각하며 전쟁에 나아갔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그들이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전쟁을 앞에 두고 강력한 적이 쳐들어오는데 두려움이 찾아왔으나, 두려움에 압도 당하거나 두려움이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놔두지 않고 그들은 누구를 바라봤는가 하면 하나님 여호와를 바라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 신실하게 나아가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앞에 온전히 마음을 쏟으며 예배 드리고 있는데 인생의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오거나 적이 쳐들어 올 때 동일하게 두려워하는 감정이 몰려올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풍랑을 만나거나 적이 쳐들어올 때 두려움이 찾아오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 자체를 외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내 마음의 주저 앉게 만들고 나를 이끌고 주도하도록 방치하면 안되는 겁니다. 손님과 같이 왔다가 빨리 빨리 내보내야 되는 것이죠.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두려움에 압도 당하지 않고 끌려 다니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쉬지 말고 부르짖으며 기도할 것을 사무엘에게 요청했습니다. 풍랑 가운데 지금 그들이 해야 될 가장 첫번째가 주님을 향하며 매달리는 기도를 실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기도인 쉬지 않고 부르짖는 기도로 위기 상황 가운데 반응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믿으며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 이후에 찾아온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데 적이 쳐 들어 오는 긴급한 상황에 사무엘이 제일 먼저 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온전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1분 1초 가 아쉬운 그 긴급한 상황에 사무엘은 번제를 대충 드리지 않고, 온전한 번제를 그 위기 상황 가운데 드린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올 때 흠 없는 수소로 드려야 되는 그 번제를 자기들 마음대로 그 끌고 온 암소를 잡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번제를 드리면서 그들은 제사와 예배 잘 들었다고 착각했던 그 모습과 대조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사울왕을 통해 배우겠지만 전쟁 앞에서 스스로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가 제사장 역할을 감당해서 그 제사를 무너뜨리며 결국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모습과도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 위기 상황 가운데 영적 지도자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주님 앞에 제일 먼저 드리는 겁니다. 온전 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때우듯이 대강 드리는 번제가 아니라 나의 전심을 드리는 하나님의 기준과 법도에 맞는 번제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동안 수많은 제사들과 예배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이 전쟁의 위기 앞에 드리는 사무엘의 번제를 온전한 번제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제사들과 예배들이 겉으로는 행해졌지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온전한 제사들과 예배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정말 제사 다운 제가, 예배 다운 예배가 희귀해지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기 상황에서도 사무엘은 온전한 번제를 주님께 드리며 그 어떤 것보다 제사와 예배로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닫고, 그 예배와 함께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두려워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위기 가운데 누구를 바라봐야 되는 지를 정확하게 기준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이스라엘을 앞서 스스로 일하시기 시작하시는 겁니다. 위기 상황 가운데 풍랑 가운데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이 응답하신 이야기, 그게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일하심으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내리셔서 전쟁에서 패배하게 하신 겁니다. 자신들이 싸워 이기는 게 아니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앞서 싸우셔야 이길 수 있음을 평상시에 고백한 게 아니라 위기 상황 가운데, 적들이 쳐들어 오고 있을 때 고백하게 됐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나가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번제를 주님께 드리고 마음 다해 주님을 바라보고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역사 하시며 그들 앞서 싸우기 시작하신 겁니다. 법궤를 들고 나갔느냐 않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전쟁의 현장에 주님께서 일하시도록 온전한 예배와 함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주님을 온전히 붙들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치셔서 블레셋 군대가 다 떠나 가게 된 겁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오늘 결론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에벤에셀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에벤에셀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길 원합니다. 나의 인생 가운데 여기까지 주님께서 도우셨고…인도하셨고…함께하셨다. 이 에벤에셀의 고백이 나의 삶을 통하여 고백 된다면 그 삶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인생이겠습니까?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수치가 찾아오고,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들이 하나님을 붙들면 두려움이 떠나갑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동일하게 일하심을 믿습니다. 성도들은 내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을 목도하는 감격과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감격의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에벤에셀을 고백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에벤에셀을 경험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저의 삶에 여러분들의 삶의 고백으로 증언되는 선명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시면서 미스바 성회, 미스바 집회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부흥회와 회개를 위한 특별한 집회에 많이 붙이는 이름이 바로 "미스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케 하며 영적으로 크게 각성하게 만드는 모임이 바로 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미스바에서 모이게 된 집회 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적으로 험한 수치를 당해 왔습니다. 그 험한 수치는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대패 했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심지어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사건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보는 이 현상들을 넘어 가장 심각한 수치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간 수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간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수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는데 하나님만바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 가며 하나님의 임재가 떠나간 상태, 그 자체가 바로 수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법궤를 부적과 같이 이용 대상으로 바라보다 큰 코 다치고 그 법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셔서 그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취급하며 번제를 자기 마음대로 드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러고도 20년을 계속 미적 거리고 있었던 것, 그 모든 것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수치였습니다.
그렇게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사무엘이 드디어 일어나 새로운 시대를 열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촉구했습니다.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과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항하며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길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껍데기로 드리는 예배와 제사는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다른 것과 겸하여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면서도,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지 않으면서도 문제 의식이 없었습니다. 분산된 마음들로 인해, 겸하여 섬기려는 태도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영적 대각성의 시작은 바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돌아보는 겁니다. 내가 겉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교회를 들락날락 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나는 과연 전심으로 주님 앞에 마음이 향해 있는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이며 하나님 만을 예배하는 자인지를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회개와 결단으로 자기 주변의 우상들을 다 제하여 버리며 여호와만을 섬긴다는 그 모습이 나가니까 사무엘이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아 놓고 대각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은혜로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먼저 해야 될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결단과 우상을 제하여 버리는 결단을 선행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은 사무엘의 도전에 반응하며 온 백성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 하였습니다. 먼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다는 것은 내 마음을 온전히 주님께 쏟아 붇는다는 고백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금식 이라는 것은 내가 그동안 이 세상 을 통하여 먹을 것을 얻었던 모든 것들을 멈추고 나의 갈망이 오직 주님께만 나아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시간이 하루에도 몇 시간 되지 않습니까? 모든 식사를 멈춤으로서 그 시간동안 다 기도 한다는 거예요.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았던 내 삶을 금식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전적 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금식하며 주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두 모여 그렇게 금식하면서 간절하게 마음을 쏟으며 백성 차원에서 모든 백성이 기도한 건 내 소원을 들어 주시 옵소서 기도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자녀 잘 되게 해 주시 옵소서…기도하는 게 아니라 전적으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범죄했음을 마음을 쏟아 놓으며 회개하는 것입니다.모든 사람들이 모여 한마음으로 마음을 쏟으며 금식하며 주님 우리가 주님 앞에 범죄하였다고 진정한 마음으로 마음을 토설하는 곳에서 하나님이 역사하는 것이죠. 그 회개와 영적 대각성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린지라…사무엘이 미스바에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으로 온전히 영적 지도자로서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고, 이것은 본질적으로 사무엘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전히 다스리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 나와 전심으로 회개하며 돌아서며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며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는 이 회개와 영적 대각성을 통하여 그 놀라운 하나님의 다스림에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이키는 길이었고, 그것이 진정한 영적 대각성이자, 하나님이 새롭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새 시대를 여는 문이었다는 겁니다.이게 바로 그들에게 다가온 새 시대의 부흥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영적 대각성과 회개의 집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심각하게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며, 영적 대각성을 위해 주님 앞에 금식하며 마음을 쏟으며 나를 치며 내가 주님 앞에 범죄했다고 통회하는 기도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미스바에서 주신 은혜와 부흥을 체험하기를 사모하기에 회개 기도와 영적 대각성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여 마음을 쏟아 놓으며 금식하며 주님 앞에 이 만큼 철저한 죄인입니다…간절히 기도하며 용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아오는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야 합니다.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며 오직 하나님에게로 마음을 향하며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단하는 회개와 영적 대각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겠다고 결단하며 주님께만 마음이 향하는 결단을 통해, 이렇게 회개로 주님 앞에 나오는 영적 대각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시고 새로운 movement를 여시고, 새로운 다스림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역사 하시며 새롭게 다스리시는 그 영적 부흥이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 교회 공동체이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는데, 흠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리는 대신 편의주의에 빠져 가까이에 있는 흠이 있는 암소를 드리며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보지도 만지지도 허락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법궤를 구경거리가 난 듯이 사람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자 벧세메스 사람들이 깜짝 놀라 여호와의 궤를 감당할 수 없어 또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오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는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 놓았습니다. 사람들 마음의 중심, 예배와 제사의 중심, 나라의 중심에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여전히 제자로 가 제자리로 가지 못하고 이렇게 산에 사는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듯 변방에 놓여 있는 안타까움을 보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법궤가 무려 20년을 이 산속의 한 개인의 집에 방치되게 됩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있었던 겁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와 두려움 가운데 벌벌 떨며 20년을 보냈는데 그들의 영적 상황이 어땠냐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드리는 겉모습은 있었지만, 하나님만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는 그런 혼합주의 신앙이 일상화 되었습니다. 블레셋으로 부터 침략의 위협, 학대와 어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예배하고 제사 드리지 않으며 하나님을 그냥 겸하여 섬기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며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그런데 그 2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홉니와 비느하스로 대표되는 그 과거의 영적 암흑기를 단절하시고 새로운 지도자인 사무엘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를 여시는 그 전환기를 여시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새로운 영적 리더인 사무엘을 통하여 다음 세대가 일어나며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백성들을 새 시대로 이끌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가는데 육적인 생각과 잔꾀를 부리게 되며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흠이 있는 암소를 제물로 드리면서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던 그런 영적으로 깊은 어두움 가운데 있었던 시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20년만에 깨우는 겁니다.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촉구하며, 너희가 몸과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이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결단은 너희가 지금 겸하여 섬기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대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겸하여 섬기는 삶이 만연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것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이 세상에 방식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냐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주일은 교회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 하지만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이 세상에 이방 신들과 세상이 주는 것들에서 우리가 철저히 순응하면서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께 전심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 이방 신들과 세상이 주는 것들을 제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비결 첫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겸하여 섬기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수많은 우상들이 있습니다. 돈 신이 있고 명예 신이 있고 권력의 신이 있고 수많은 그런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과 겸하려 섬기고 같이 붙들고 가려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우리 가정과 교회의 삶 속에서 풍성히 역사 하지 못하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리에 올라 가려는 것,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려는 것,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것이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잡초와 같이 올라오는 이 이방 신들과 하나님의 자리를 탐하는 수많은 것들을 제하여 버리는 분명하고도 단호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두번째 결단은 마음이 주님에게만 향하고 주님만을 예배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면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항상 향하게 되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하나님 백성다움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고 하나님을 예배한다 말하지만, 우리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이 향하며 세상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귀하게 여기면서 예배하게 되면 하나님을 예배하면서도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다루고 경시 여기는 자들을 심판 하신 이유는 그게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이자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는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대신, 다른 곳에 마음이 쏠려 있으면서 하나님도 겸하여 예배하려는 혼합주의였으며, 그들의 마음은 예배 가운데 온전히 주님께 향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하며 다른 것들을 향하여 나아가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는 위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향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향할 때,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고 하나님만 섬기는 자가 되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고 일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선명하게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다 끊어버리고 청산하며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언자와 같이 선언하는 겁니다. 전심으로 너희가 하나님께 돌아오려 거든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모든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께 향하여 주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라... 감사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무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제하고 거기서 고개를 돌리며 겸하여 섬기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기 시작했고 마음이 오직 하나님을 향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기를 결단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말씀을 붙들고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영적으로 준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따르며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시며 새로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려는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내 마음이 온전히 주님만을 향하며 주님만을 예배하며 섬기는 자로 살아가기를 결단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감격스러운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빼앗겼던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백성들이 얼마나 기뻐 했겠습니까? 벳세메스 사람들이 궤가 돌아오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것으로 그 감격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유를 하고 있는 어미 소 두 마리가 끌고 가는 하나님의 법궤, 울면서 본인들이 원하는 길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이스라엘 지경에 하나님의 법궤를 도착하게 하신 것입니다. 상상해보면 지금 분위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감격과 축제 현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지경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왔으니 온 백성이 축제를 벌이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지경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바라보며 해피엔딩이 될 것 같은데 오늘 말씀은 그 축제 현장에 거의 찬물을 끼얹는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함께 기뻐하고 바라봤던 벧세메스 사람들이 그 법궤를 보았다는 것 때문에 5만 70인 을 죽이신 것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70명을 죽이셨다 되어 있고, 어떤 사본에는 50070명을 죽이셨다고 되어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그 축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5만명 정도이고 그 중에 70명을 치셨다고 해석합니다.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열어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 현장에 찬물을 확 끼얹으신 겁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서 축제를 벌이고 있는 그 현장이 하나님이 치시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들어오는 그 축제 현장에서 이렇게 찬물을 끼얹으셨는가? 그렇게 어미소들 에게까지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주도하심으로 그 법궤를 이스라엘 지경으로 오게 하셨는데,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시면서까지 경고하신 영적인 문제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축제의 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두 가지 이유는 모두 본질적인 결론을 가져오는데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의 제사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에 돌아왔으니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을 당연한 일 이자 좋은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기쁘고 좋고 감격해도,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기준에 따라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제사 규정을 기억하실텐데, 번제를 드릴 때나 하나님께 소를 드릴 때는 반드시 흠이 없는 수컷을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흠이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라고 분명히 명령하셨고 기준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와서 하나님께 지금 번제를 드리려면 어떻게 드려야 됩니까? 흠 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번제를 드리는가 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온 소를 잡아 번제로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 소는 아직 수유를 하고 있던 어미 소, 즉 암소였습니다. 또한 법궤를 메고 오는 동안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오는데 흠이 하나도 없을 리가 없습니다. 소들이 당연히 몸에 흠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흠이 있는 암소를 번제로 드리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규정이나 하나님의 명령하신 그 기준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거죠. 수컷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도, 흠 없는 소를 드리라는 하나님 명령도 그냥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를 그냥 때우듯이 드린 겁니다. 두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법궤를 마음대로 열어본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막 열어서 볼 수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명령하셨습니다. 아론의 제사장 직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그 안을 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겉모습도 보면 안되고요. 언약궤를 만지면 다 죽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하나님의 법궤가 돌아오니까 구경거리가 난 것처럼 사람들이 막 와서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궤 앞에 엎드리고 회개하는 대신 뭐 구경거리가 난 듯이 사람들이 모여 들어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오만 명이나 모인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 실제로 가까이에서 하나님의 법궤를 70명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큰 영적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에게 엎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법궤를 마치 부적과 같이 여기면서 그들은 참패를 당했고 그들은 그렇게 비참한 결과를 직면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일하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그 법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고 있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정신을 못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들 마음대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계를 법궤로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과 명령을 무시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의 이 악한 행동을 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기고만장한 블레셋 사람들을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인 하나님의 손이 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하고 독종으로 그 사람들을 고통 가운데 헤매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인 이 하나님의 법궤를 함부로 대하고 마음대로 대하는 벧세메스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준과 제사의 기준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렇게 70 명을 심판하셨으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바로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아… 우리가 뭐 크게 잘못했구나….이거 하나님께 회개해야 되는 시간이구나…엎드렸어야 합니다. 거기 레위인들이 분명히 있었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지금 흠없는 수소로 번제를 드려야 되는데 흠이 있는 암소로 드리면서 하나님 멸시한 것을 모르느냐…경고했어야 합니다. 절대 보지 말아야 될 하나님의 법궤를 보아서 지금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우리가 회개해야 된다 이렇게 나왔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그 자리에 레위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 규정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거기 암소가 있으니까 그 암소 잡아서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면 되지…라는 편의주의로 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백성들의 반응은 심판 가운데 울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회개나 반성은 전혀 없이 이럴 거면 하나님 누가 하나님 앞에서 서겠냐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이런 벧세메스 사람들과 같이 때우듯이 드리는 예배, 편의주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는 예배와 제사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 지 반성하기 원합니다. 예배와 제사 드리는 것이면 충분하지...그렇게 하나하나 다 기준에 맞춰서 하냐고 결과 지상 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규정과 기준은 무시한 채 그냥 나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을 치신 것과 마찬가지로 벧세메스 사람들을 치셨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버려야 될 사고방식이 있음을 분명히 경고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제사를 드린 게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의 편리한 대로 드리게 됐다는 것, 결국 그런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는 태도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자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함부로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지키는 자들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겉으로는 예배 드리고 제사 드린다고 그러지만 하나님의 뜻과 기준과 명령을 함부로 여기며 나아오는 것을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라며 싫어하십니다. 흠 없는 수소 대신에 그냥 가까이에 있는 흠이 있는 암소 아무거나 드려도 된다고 편리한 대로 드리며 나아오는 제사를 하나님이 싫어하심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대강 때우듯 드리는 태도와 편의주의를 버리고 온전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나서 기고만장하여 착각했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싸워 이긴 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이겼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 블레셋을 향하며 착각을 깨 주시며 여호와의 법계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시며 스스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곤의 목과 손목을 자르시고, 블레셋의 온 지경에 독종의 심판으로 치셨습니다. 그러면 빨리 정신 차리고 아 우리가 잘못했구나…인정하고 항복하며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으면 고생을 덜 하는데,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듯이 블레셋은 7개월을 버티었습니다.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하늘을 부르짖음이 올라가고 있음에도 그들은 7개월을 버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졌다고 승복하기 싫었으며, 우리가 잘못했습니다…항복합니다…이 사실을 인정하고 끝까지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버티고 고집 부리다가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결국 7개월 만에 빼앗아온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보내야 된다는 것을 결정하며 두 손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옮을 끝까지 증명하려 하고 고집 부리다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은 두 손 들고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배우며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지를 깊게 묵상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렇게 7개월을 버티다 여호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아 온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돌려보내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복 선언을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 보내면서도 끝까지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심판의 결과로 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완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법궤를 돌려보내는데 이걸 가지고 끝까지 테스트를 해보는 겁니다…정말 우리가 7개월 동안 고생한 것들이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그 심판의 손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은 우연히 생긴 일이었는지…하나님의 능력의 손으로 독종의 심판으로 그렇게 고생했지만 진짜 이것이 하나님에게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 시험의 방법이 뭐냐 하면 바로 법궤를 나르게 될 어미 소들의 반응과 행동을 통해 결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아직 젖을 먹이며 수유를 하고 있는 어미 소 두 마리, 자신의 새끼들에게서 떼어 놓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난 지 얼마 안되는 송아지들이니 동물이어도 얼마나 자신에 새끼들에 대한 애착이 강합니까? 그런데 젖도 안뗀 새끼들에게서 이 어미 소 둘을 떼어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게 하는 겁니다. 그 어미 소 두 마리가 수레를 끌고 가는데 뒤돌아보지 않고 길을 벗어나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면 그게 하나님이 역사 하셔서 심판하신 증거라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건 거의 답을 정해 놓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본성을 이기는 동물이 어디 있습니까? 엄마로서 아직 수유를 하고 있는데 자기 자식과 떨어져 있고 싶은 동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자기 자식에게 돌아가고 싶고 새끼 젖 먹이고 싶은 게 본성이지요. 이 블레셋 사람들의 시헌 문제는 마치 뭐랑 똑같냐 하면요…아기가 엄마가 한편에 처음보는 사람이 맞은 편에 서 있는데, 아기가 엄마에게 가면 우연히 일어난 일들이고, 아기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가면 하나님이 역사하신 심판이라 믿겠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무엇입니까? 끝까지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아닌 우연히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악한 마음입니다. 무슨 마음이 다 드러나는 겁니까?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그들의 고집과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지금 그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 보내면서까지 그들은 끝까지 버티고 고집 부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역사와 일하심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고생했음을 부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악한 의도로 하는 테스트와 시험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다. 그 놀라운 일이란 수유를 하던 어미 소들에게 그들의 본성 넘어서도록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젖을 여전히 먹이는 어미 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법궤를 끌고 가면 당연히 가지 않고 멈추어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나아갈 길로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당연한 본능이지요.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이 어미 소 두 마리가 바로 행하여 흔들림이 없이 그냥 쭉 직진해서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 새끼들 있는 곳으로 향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바로 나아갔습니다.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어미 소들이 “울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갔다는 것입니다. 어미 소들이 왜 울었겠습니까? 이게 자기 본성을 거스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본성으로는 당연히 자식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고 가야 하는데 갈 수 없으니까 우는 겁니다. 이 부분에 잘못된 해석이 뭐냐면 어미 소들이 하나님께 헌신 되었기 때문에 자기 본성을 넘어서서 그렇게 바른 길을 나아갔다….해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이 어미 소들과 같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가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어미 소들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육신의 본성으로, 어미 됨의 본성으로는 당연히 자식 새끼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가지 못하게 막으시는 겁니다. 근데 왜 그들이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직진하여 나아갔습니까? 하나님이 막으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미로서 본능을 넘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가도록 하나님이 역사 하시고 이끄시는 겁니다. 심지어 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막고 역사 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의 악한 의도로 하는 이 시험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사건이 돼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께 늘 순종하고 바른 길로 인도함을 받는 구도자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지만 이렇게 블레셋의 백성들과 버티기와 고집을 부릴 때가 많고, 하나님에게 항복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악한 본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계속 테스트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악한 본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시기 위해 사람들을 들어 쓰시기도 하지만 이렇게 미물인 동물들을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성으로 만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으로만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하심과 이끄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본성을 거스르고 내가 원하는 것을 거스르며 사는 삶이 때로는 우리에게 부대끼며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 나아가는 그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울면서도 좌우로 흔들리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으며 주님 앞에 따라가는 그 소명의 길을 오늘도 나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에 주님께서 역사 하시고 주관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만만하게 봤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그들의 신인 다곤의 목과 손목이 잘려 나가며 하나님의 궤가 가는 곳마다 재앙과 심판이 일어났습니다. 말할 수 없는 독종 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여호와의 법궤를 일곱 달이나 그 땅에 있게 했습니다. a 라는 도시에서 b 도시로, b 도시에서 c 도시로 옮겨가면서 모든 도시들을 쑥대밭을 만들고, 이건 누가봐도 여호와의 손이 치시는 재앙이라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블레셋 사람들은 일곱 달을 꿈쩍 않고 버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이스라엘과 싸워 완전히 큰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는데,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이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끝까지 믿고 않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블레셋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블레셋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신을 자신들이 이겼다고 하는 그 착각을 붙들고 끝까지 선언하고 싶은 것입니다. 일곱 달을 그렇게 고집스럽게 버틴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패배했습니다…하나님께 항복합니다…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렇기 버티는 일곱 달 동안 수 많은 백성들은 독종에 걸려 죽어 나가며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우리의 고집이라는 게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패배하고 항복합니다…그러면 일이 쉽게 풀리는 데 끝까지 우리는 내 뜻이 맞았습니다…나의 길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라는 것을 하나님에게 증명하려고 버티고 고집을 부리는 만큼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쓸데 없는 고집 있는 사람을 지도자로 모시게 되면 그 밑에 백성들이 이렇게 고생하고 죽어 나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빨리 하나님 앞에 항복 선언을 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거구나… 하나님의 손이 지금 나에게 경고를 주시는 거구나… 빨리 깨닫고 그 발 앞에 엎드려 항복 선언하는 겁니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버티고 고집을 부리고 싶어 끝까지 항복하고 엎드려 굴복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끝까지 대항하며 자신의 옮음을 증명하려고 버티다 이렇게 생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집 부린다고 그게 됩니까? 그렇게 고집스럽게 버티고 그렇게 수 많은 것을 통해 미루고 밀어도 결국 안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거역하고 나아가겠습니까? 블레셋은 일곱 달을 버티다가 고생할 거 다 하고 나서야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한 것입니다. 이렇게 버티다가는 우리가 다 죽겠다는 것을 알고 두 손 들고 항복하며 정말 이스라엘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능력을 고백하며 결국 법궤를 돌려 보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아 이거 안 되는구나 더 이상은 안 되는구나…하고 그들이 사람들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착각했을 때는 그냥 여호와의 궤를 아무 생각없이 뺏어서 가져왔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지를 알게 되니까 지금 보내야 되는 것은 결정 됐는데 어떻게 보내는지를 몰라 벌벌 떨며 점성가들까지 붙러 하나부터 끝까지 물어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냥 빈손으로 보내면 안 되고 속건제를 드려야 하고, 형상을 만들어 여호와께 영화를 돌려야 한다는 등 이것저것 조언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만만히 봤다가 큰 코 다친 블레셋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물음에 자세가 있어야 했었고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이런 물음의 자세가 있었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한 위기와 심판 가운데 그렇게 하나하나를 물어보는 그들의 질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둔감함을 대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 축복과 은혜의 도구인 하나님의 법궤를 두고도 그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 갈 길에 인도함을 받지 않은 이스라엘의 영적 둔감함을 질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속건 제물을 드려야 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형상을 만들고 바치며 뭔가 배상을 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려고 하는 이 모든 이유는 뭐냐면 그렇게 하면 혹시 하나님의 그 위대하시고 놀라운 손을 너희와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조금 약하게 치지 않을까…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적들이며 이방인들인 블레셋은 큰 어려움과 심판을 당한 후 적어도 하나님을 존중하고 두려워할 줄 알고 그 하나님의 손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대하고 큰 길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손을 들어 하나님께서 블레셋 땅을 치셔서 내린 심판은 예전에 애굽 사람들과 바로 왕을 치셨던 여호와의 손을 떠올리게 합니다. 언제까지 그 여호와의 손의 강하게 치심이 계속되는가 하면 완악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이 무너지기 전까지…계속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애굽 사람과 바로 왕의 마음이 강팍하고 완악해서 하나님이 심판을 계속 내리시는데도 버티다가 점점 강도가 세지는 그 열가지 재앙을 다 맞고 나서야 두 손 들고 항복하듯이, 블레셋 사람들이 그렇게 버티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강해지는 것을 모르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치시고 심판하심은 여호와의 놀라우심을 드러내며 마음의 완악함과 강팍함을 치시는 징계이자 심판임을 왜 모르고 버티냐는 것입니다. 버티면 버틸 수록, 고집을 부리면 부릴 수록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심판은 점점 강해지고 항복하고 두손 들 때 까지 계속 되는 것을 왜 모르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하고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강팍해지고 완악해져서 쓸데 없는 고집을 부리고 버티는 사람들을 결국 항복하실 때까지 계속 치십니다. 그것이 끝나는 제일 빠른 방법은 내가 빨리 항복하고 두손들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일곱달 동안 버티며 고집을 부린 블레셋 사람들의 어리석음으로 그 고생하지 말고, 완악하고 강팍한 마음으로 버티다 10가지 재앙을 다 맞고 나서야 두 손 들었던 바로의 어리석음으로 고생하지 말고, 지금 주님 앞에 돌아서시고 주님 앞에 항복하십시오. 이 시간 나의 옳음을 증명하고 여전히 나의 길이 맞다고 하는 그 고집스러운 버팀을 주님은 결국 꺾으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면 그 강팍하고 완악한 마음이 무너지기 전까진 하나님의 손이 치시는 심판이 떠나지 않는다는 이 경고의 말씀을 잊지 말고 지금 이 순간 돌아서서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행복 하십시오. 주님이 언제나 옳으시고 내가 틀렸음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엎드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