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길을 따라 정직하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과 나라 전체의 신앙을 회복하며 갱신을 이루고 있습니다. 모든 우상들을 타파하고 무너뜨렸으며 성전을 새롭게 성결 하게 하였고 그 열망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그 율법책을 읽으며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이 율법책의 말씀이 살아 있는 실체로 들리기 시작하여, 말씀이 살아 나는 역사와 그 의미를 회복하며 온 백성들이 말씀 앞에 변화되는 그 결단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세우는 그 놀라운 은혜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성전에 숨겨져 있었던 오랫동안 발견하지 못한 그 율법책을 발견하여 읽었을 때 마치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 왔으며 그 말씀이 요시아 왕의 마음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실체로 흐르면서 하나님 말씀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 갱신과 회복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요시야 왕이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아 왕에게 주신 마음, 그 말씀을 이루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역대기에서 뽑은 것이 바로 요시아 왕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아서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의 백성됨의 정체성은 바로 유월절 정신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어디에 속박되어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출애굽을 통해 그들에게 어떤 자유와 회복을 주셨는지를 깊이 묵상하는 유월절 정신의 회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겁니다. 유월절 절기를 다시 한번 회복하여 지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자, 그 동안 우리는 세상을 대표하는 이 애굽에 종살이 하고 죄에 눌려 있으며 매여 살았음을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를 온전히 구하는 백성으로 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함을 얻게 되었으며, 유월절 어린양의 보혈로 저주에서 보호받고 새사람 되었음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 절기의 회복입니다. 어린양을 잡아 절기를 지키는 그 본질의 회복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저주와 심판이 임한 그 땅에서 보호하시고 살려 주셨듯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하고 구별된 변화 백성으로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바로 죄에서 자유를 얻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상의 심판과 통곡이 임한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으로, 그 보혈을 의지하여 그 심판과 저주가 넘어간 것 그것을 온 천하에 선포한 날이 바로 유월절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유월절 가운데 유월절 어린양을 잡았다…와 함께 어린양을 잡아먹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통하여 심판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넘어가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고, 더 나아가 그 어린양의 살을 먹음으로 그들이 은혜의 양식, 하늘 양식을 공급 받고 사는 백성들임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겁니다. 하늘 양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공급 받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고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피 흘리고, 함께 먹었다는 것이 영적인 큰 그림이 장차 오실 인류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그림자임을 안다면 더욱 중요합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그분의 십자가 사랑으로 피 흘리심이 우리 죄를 덮으시고 저주와 심판에서 우리는 보호하고 넘어가는 은혜가 되게 하셨습니다. 새 사람 되고 천국 백성 되는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고 생수를 마시며 공급 받는 천국 백성이 되어 누구나 그 온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 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고 성경은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육의 양식 뿐 아니라, 영의 양식이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죠. 요시아 왕은 8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로 왕위에 올라 18년이 지나고 나서야, 마침내 제대로 된 유월절을 지키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과 말씀을 준행의 완성으로 그 말씀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짐을 고백하며 유월절을 정신을 회복하며 유월절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주기도문의 기도와 같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선언이 지금 요시야 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릴 때, 예배를 중히 여기며 예배를 통하여 유일한 예배 대상인 하나님을 만나며 그분의 공급하심을 받을 때, 유월절의 정신이 회복되며 말씀대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 땅에 이루어짐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유월절 정신을 예배를 통해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도록,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도록 부름 받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 나를 깨닫는 것이며 나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죄 용서해 주시며 심판을 넘어 가게 하신 놀라운 은혜임을 깨닫고, 늘 어린양 보혈의 능력을 붙들고 어린 양의 힘을 붙들고, 십자가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면서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 사람 되었으며 그 보혈에 덮여 주님의 손에 이끌려 천국 가는 존재라는 것을 감격으로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를 마음에 받고 하나님의 언약을 갱신하는 것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도 됨을 잊지 않으며,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죄 용서 받고, 저주와 심판에서 벗어난 존재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 피 흘리게 하는 것을 현장 교육하듯이 현재화 하여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으며 그 끔찍한 죄를 속죄 받고 내가 어떻게 거룩하고도 구별된 자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마음에 깊이 새기는 것입니다. 성만찬의 떡과 보혈을 먹고 마심으로 나의 힘과 도움이 하늘에서 옴을 고백하며, 나는 영적 양식이 필요한 천국 백성임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의지할 생명의 양식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꼭 붙어 있는 그 놀라운 영적인 교제가 풍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천국에 속한 자로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그 피와 살을 먹고 마시며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만찬은 이 유월절 정신의 회복이자, 십자가 사랑의 회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망각하지 않고 당연히 여기지 않으며, 마음에 닿도록 현재화 하며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유월절 정신의 회복인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말씀을 이루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을 붙들고 그 본질을 붙들고 신앙 생활하기 원합니다. 내 앞에 계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어린양의 보혈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나를 어떻게 회복시켜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현재화 하기 원합니다. 그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며 꼭 붙어있어 망각과 당연함 대신, 매일 갱신 되며 그 살아있는 신앙으로 변화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시야왕 개혁이 완성되는 큰 사건인 율법책을 성전 안에서 발견 하는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그 나라에 만연하고 있는 모든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데 인생을 걸었습니다. 우상을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빻아 가루로 만들어 뿌리는 일도 서슴치 않으며 강력한 의지와 결단으로 추진하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귀하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아 왕의 그 강력한 결단과 의지가 개혁을 완성하게 하는 길로 인도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율법 책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성전해서 발견했다고 증언하는데, 이 책은 어쩌다가 우연히 발견된 게 아닙니다. 우연히 율법책을 그냥 성전에서 거닐다가 발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대한 열망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열망하는 요시야왕, 그가 오랫동안 꿈꾸고 댓가를 지불하며 실천한 그 삶 가운데 하나님의 율법책이 발견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열망을 가진 왕, 우상들을 다 제하여 버리고 성전 정화로 참 예배를 새롭게 하는데 인생을 건 요시야 왕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섭리 가운데 선물로 발견하게 하신 율법책 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된 율법책을 통해 요시야 왕이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그냥 한 율법책을 발견한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율법책을 가져와 마음을 열고 듣는 것입니다. 물론 제사장이던 누가 사람이 그 발견한 율법책을 읽었겠지만, 요시아 왕에게 그 율법 책에 기록된 말씀 들은 마치 하나님이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직접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시는 말씀으로 받은 거예요.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책을 통해 들으면서 마치 하나님이 이 시간 나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과 같이 들려오며, 그 마음에 찔림 과 무너짐으로 요시아 왕은 옷을 찢을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큰 충격이 다가온 것이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진정성 있고 겸손한 태도가 요시아 왕을 엎드리기 했고 자기 옷을 찢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시아 왕은 말씀에 대한 반응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지난 과거에 개인 뿐만 아니라 남유다 백성 전체가 가져왔던 그 변질과 타락, 우상숭배가 얼마나 하나님한테 심각한 일이고 큰 범죄였는지, 진로를 발하는 일인 지를 깨닫게 된 겁니다. 요시아 왕이 그 말씀을 들을 때 그의 심령 골수를 쪼개며 옷을 찢을 수 밖에 없었고 개인이 회개하는 것을 넘어 전체 공동체가 회개 해야 될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우리 안에 선명히 들어오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고 가볍게 여겼고 품고 살았는데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던 죄에 대해서 심각해지고 문제를 느끼며 죄가 이렇게 중 한 것인가를 깨달으며 회개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회개를 통하여 나의 죄를 다 무너뜨려 십자가 앞에 가져오는 것이 회개고요, 십자가 은혜로 그 나의 삶을 채우고 충만해지는 것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안에 흐르는 역사로 오는 것, 이게 바로 지금 요시야가 경험하게 되는 말씀에 대한 충격과 변화입니다. 요시야 왕이 어렸을 때부터 왕위에 오르고, 우상을 타파하고 성전을 정화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가지고 초점을 맞췄지만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읽음으로 말미암아 그 요시아 왕의 개혁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가는가를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시아 왕은 자신 뿐 아니라 모든 백성들의 귀에 이 율법책을 들리게 합니다. 그 말씀을 발견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씀이 읽혀져야 하고 들려져야 하고요, 그 말씀을 이루는 삶으로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게 바로 신앙의 갱신이자 부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어 심기우는 삶, 더 나아가 그 말씀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이 나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바로 살아 있는 신앙 생활의 본질임을, 교회 공동체가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심기워, 말씀으로 주신 언약을 이루는 삶으로 온 백성이 나아갈 때 여호와를 한마음으로 섬겨 그것이 여호와를 복종하고 떠나지 않는 놀라운 은혜가 경험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시아 왕의 신앙 개혁의 핵심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개혁의 핵심입니다.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나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을 때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나의 인생에 그 말씀이 담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심기우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심기워져 그 언약의 말씀이 내 삶이 이루어지는 이루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시아 왕은 남유다의 3대 왕에 뽑힐 정도로 중요하고 위대한 왕입니다. 사실 요시아가 왕이 오를 때는 나라가 거의 망하기 일보 직전이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왕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므낫세 왕이었요. 물론 인생 후반전에 돌아오게 했지만 자식들의 불로 지나가게 할 정도로 악한 왕이자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한 망나니였습니다. 그 아버지 아몬은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고 살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왕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자기가 믿고 있었던 신복에 의해 배신당하고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준비도 안 된 8살짜리 아이를 왕위에 세운 게 바로 요시야입니다. 그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올라 얼마나 불안했을지 상상해보십시오. 아버지는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해 살해 당했죠, 주변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8살 짜리 애기가 왕위에 올라 믿을 사람 없이 하루하루 살해의 위협가운데 풍전등화 가운데 살지 않았겠습니까? 8살 짜리가 무슨 경험과 판단력과 지도력을 가지고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8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아가 죽임을 당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켜서 31년 동안 왕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더 놀라운 건 뭐냐면 그 아버지는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도 배신 당하여 살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8살에 오른 요시아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겁니다. 다윗의 길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육적 부모가 이렇게 형편없고 악한 영향력을 주고 어떻게 보면 좋은 모델이 되지 못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하나님 앞에 바른 왕이 되었다는 것은 더 큰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어 8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를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하나님 눈에 보기에 귀하고 정직한 왕으로 세워주셨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이 세상의 소망이 결국 하나님께 붙어 있음,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이 하나님의 이렇게 놀랍게 변화되고 회복되며 새 사람 될 수 있다는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이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8살에 오른 요시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떻게 정직히 행했고 하나님 보시게 합한 왕이 되었는지를 두 가지 사건을 대표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남유다에 만연했던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는 것, 두번째는 성전을 거룩하고 정결케 하는 이야기입니다. 첫번째, 요시야 왕은 남 유다의 만연했던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왕이 오른 지 8년, 즉 16살의 십대에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하나님 믿는 신앙으로 회복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그 어린 나이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주 구체적으로 자기 마음에 모시게 되는 분명한 결단이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나서 왕위에 오른 지 12년 째, 요시아 왕이 20살이 되었을 때, 남유다에 만연한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이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자기 아버지도 믿을 만한 사람에게 살해되어 죽었는데, 그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온 백성들에게 이미 정착되고 뿌리내린 이 모든 우상들을 없앤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살에 이 일을 담대하고도 치열하게 이 과업을 밀어 부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강력하게 시행했는가 하면 모든 우상들을 훼파하고 다 찍어 버리고 가장 하이라이트는 부어 만든 우상들을 가루로 만들어서 무덤에 뿌렸다는 것이죠. 이 우상들을 무너뜨려 가루로 만든 사건은 모세가 돌아와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금송아지를 무너뜨려 가루로 만들어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던 사건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우상을 뿌리째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젊은 요시야 왕의 결단이었습니다. 더 이상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허락할 수 없다, 뿌리를 완전히 뽑겠다 그 강한 결단이 바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가루로 만들어 뿌려 버리는 겁니다. 두번째는 요시아는 성전을 거룩하게 하고 정결하게 합니다. 왕에 오른지 18년, 즉 26세에 그렇게 우상을 다 무너뜨린 이후에 성전을 정결케 하고 거룩하게 합니다. 8살에 왕위에 올랐지만 스물 여섯 살이면 여전히 젊고 미숙함 나이인데, 하나님 성전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수리하게 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예배드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게 되는 자가 바로 요시야 왕입니다. 그 젊은 나이 어렸을 때 준비가 안된 것 같을 때 철이 없는 그 때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순전하게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에 그의 인생을 던졌던 자가 바로 요시야 왕이었습니다. 온 백성들이 우상 대신 온전한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순전한 자로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그의 인생을 던졌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순전한 인생으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고 공동체가 된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우상들을 이렇게 철저하게 무너뜨리는 작업, 그리고 그 위에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며 성전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하는 일로 나아가는 패턴임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말씀 앞에 비추며 우리가 무너뜨려야 되는 우상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무너진 우상 위에 우리가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야 할 성전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이 요시야와 같이 기적과 같은 인생이 되기를 사모하며,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 나를 살리는 힘임을 믿으십시오. 내 삶의 우상이 무너지며 거룩하고 정결한 예배가 회복되는 본질로 변화되며 오늘 하루가 주님 은혜 가운데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33장 말씀은 므낫세 왕에 대한 악행과 후반전의 반전 인생을 그리고 있고요, 마지막 부분에 그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오른 이야기를 짧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므낫세 왕은 55년을 왕으로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므낫세 왕의 아들 아몬이 왕위에 오른 것은 22세였고 겨우 2년의 짧은 통치 기간 후 비극 적으로 끝나는 왕이 되고 맙니다. 아몬 왕에 대한 평가는 딱 두가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 모든 우상에게 절하고 제사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부친 므낫세가 행한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평가를 주목해야 합니다. 므낫세 왕은 전반전의 망나니 같은 타락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 후반전에는 반전의 인생으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돌아왔습니다. 여호와 앞에 돌아와 하나님께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로 변화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 왕은 여전히 우상숭배와 영적 타락에 대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평가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후반전에 변화된 모습으로 반전의 인생으로 돌아왔지만, 예전 영적 타락의 모습을 아들이 그대로 답습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몬 왕은 그 아버지 므낫세가 인생 전반전에 타락하고 무너졌던 그 악행을 본받아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고 절하며,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물질 가치에 매몰되어, 자신의 눈에 필요와 풍요를 채우는 그 우상들을 벗어버리지 못한 거예요
그 다음에 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 부친 므낫세와 달리 스스로 겸비하지 않고 더욱 범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는 전반전에 망나니였고, 망나니였고 여호와께 최악의 왕이었지만 스스로 겸비하며 엎드려 주님 앞에 돌아와 그의 인생의 후반전이 완전히 반전의 인생으로 돌아온 인생에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아버지와는 달리 그렇게 범죄하고 무너져 있는데도 스스로 겸비하지 않고 더욱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아몬 왕에게 회개하고 돌아 올 기회가 분명히 여러 번 있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서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말씀하신 기회들이 분명 여러 번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이 그게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지 않지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회들을 모두 날려 버리고, 듣기를 거절하고 엎드려 회개하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 돌아와 스스로 겸비 하지 않고 더욱 악을 행하며 무너지게 된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우리가 죄를 하나도 짓지 않는다는 데 있는 게 아니에요. 죄악 되고 깨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죄를 짓고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럴 때 주님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게 우리 신앙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내가 죄를 하나도 안 짓고 내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한 번도 자빠지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죄짓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넘어질 때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겸비하여 엎드리며 주님 살려 달라고 매달리는 것, 주님 앞에 다시 나와 새로운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므낫세 왕은 소망이 있는 왕이었죠. 그렇게 악하고 최악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한 왕이었으나, 결국 돌아왔고 주님께 살려 달라고 매달려 새 출발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 아몬왕의 비극은 여호와 앞에 범죄하고 무너진 것도 문제였지만, 여호와께서 기회를 주시는 데 스스로 겸비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나올 수 있는 그 돌아가는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더욱 악을 행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영적 결과가 바로 아몬왕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살해 당하고 2년 만에 왕위가 비극적으로 끝나는 겁니다. 심복은 마음을 두고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인데, 심복에게 배신 당하며 살해 당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대신 사람들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재물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재물을 하나님과 우상을 동시에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을 더 의지하며 살아 가려 그렇죠. 그러다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 사람들에게 배신 당하며 무너지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일 수 있음을 심각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죄 짓고 넘어지고 쓰러지고 자빠지고 헤매고 살아갈 때에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소리를 듣는 데에 소망이 있습니다. 스스로 겸비하여 주님 앞에 돌아올 기회를 주님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기회를 날려버리고 더욱 악을 행하며 내가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 하며 처절하게 죽어간 아몬왕의 비극을 내 인생을 통하여 반복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돌아갈 기회가 있으며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 번 새 출발 할 기회가 있음을 잊지 말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용서 받으며, 겸비하려 바짝 엎드릴 때 소망이 있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매일 매일 주님 은혜 가운데 조율 되며 주님 말씀이 나에게 돌아오는 음성으로 들려, 스스로 겸비하여 엎드려 주님 만을 꼭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히스기야와 정반대 삶을 살며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안타까운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앞에 멀어지고 심지어 자녀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끔찍한 그런 우상 숭배의 극치를 통해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 경고의 말씀을 들을 귀도 마음도 없었고 결국 불순종한 영적 결과가 찾아와 바벨론으로 결박 되어 끌려가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게 됨으로서 끔찍한 므낫세 왕이 환골탈태하게 되었다는 것, 그 어려움과 곤고함이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도구와 기회가 되었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많은 남유다 왕들이 전반전은 좋았고 후반전은 좋지 않아 무너진 왕들이 많았는데 므낫세는 정반대로 그의 전반기 인생은 완전히 망나니 인생이고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었지만 그의 후반전은 주님 앞에 돌아와 제대로 변화 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므낫세 왕은 망나니같이 하나님을 떠나 살다가 덜컥 바벨론으로 결박되어 끌려갔습니다. 본인은 이게 영적인 결과라는 것을 끌려가기 전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결박되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면서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범죄했었는지, 그 불순종의 결과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바벨론으로 결박되어 끌려가는 일이 영적인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 거죠. 그래서 그 어려움 가운데 환란을 당하는 포로됨 가운데 정신 차리고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스스로 겸비하며 주님께 매달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므낫세에게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것은 큰 위기였고 환란이자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란과 어려움을 자신의 과거, 잘못된 것을 청산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정신차리고 변화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므낫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게 포로로 잡혀갔으면 잡혀간 왕은 거의 죽은 목숨 입니다. 그 절체 절명의 위기 가운데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므낫세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목숨을 부지해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바벨론 포로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왕위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의 후반전이 완전히 달라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이렇게 므낫세 왕과 같이 이 세상에 붙들려 소망 없이 멸망으로 불나방과 같이 뛰어드는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시며 돌아오라고 계속 손짓을 하십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믿지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인생의 큰 어려움을 만납니다. 그 인생의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 인생의 어려움과 곤고함을 통해 하나님을 원망하고 더 무너지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아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예요. 므낫세의 잘못과 죄를 쌓으면 그 어떤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 중에 괴수, 심지어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는 최악의 왕이었는데, 그가 포로로 끌려가는 곤고함 가운데 스스로 낮아지며 겸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교만 가득한 사람이 포로로 잡혀 가면서 스스로 겸비하며 바짝 엎드려 주님께 회개하며 살려 달라고 매달린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서 모든 것을 전화위복의 상황으로 바꿔 주신 거예요. 내 인생의 과거가 어찌 했던 간에,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와 두 손 들고 회개하면 하나님 앞에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므낫세 회복의 말씀입니다. 그의 인생이 완전히 변해 완전히 새사람이 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온 나라에 가득했던 모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불순물들을 다 던져버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중수하고 화목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정신차리고 환골탈태하게 된 겁니다. 전반전의 참담했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역대기 말씀이 포로기 이후에 돌아온 백성들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 간 후 기적의 은혜로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 하는 동일한 결단과 동일한 헌신을 갖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이 므낫세의 반전의 역사가 분명히 크게 마음에 담겼을 것입니다. 므낫세 왕이 포로에서 돌아와 새사람이 되고 반전의 인생이 되었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 새롭게 쓰임 받아 이 황무지와 폐허의 땅에서 성전 재건의 반전을 경험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겼을 것입니다. 므낫세 왕의 반전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하나님께 우리가 겸손히 엎드려 매달릴 때 주님 앞에 돌아올 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보혈의 은혜에 덮이지 않을 죄가 없음을 분명히 믿으며, 내 삶의 여러 사건들을 주님 앞에 나오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인생의 전반전이 므낫세와 같이 완전히 무너지고 죄 가운데 헤맨 인생일 지라도, 하나님 앞에 돌아와 겸비하여 겸손히 주님 앞에 매달 때, 주님의 은혜로 새로운 반전의 인생이 펼쳐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우리도 므낫세 왕과 같이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과는 다른 반전의 인생을 사모하며 내 인생의 어려움과 곤고함이 주님 앞에 나아오는 계기가 되게 하십시오. 주님 앞에 매달리며 주님 앞에 간구하며 회개하여 내 인생의 후반전을 주님이 주시는 반전의 은혜를 경험하며 새 출발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 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므낫세 왕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므낫세 왕은 가장 오랜 기간 통치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살에 왕위에 올라서 왕으로 55년을 있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죠. 그 당시에는 55년동안 삶을 사는 것도 어려운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왕으로서 55년을 통치 했으니까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제대로 받은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오랫동안 통치한 왕이 아버지 히스기야의 뜻을 따라 그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이렇게 오랫동안 왕으로 있으며 가장 악한 왕으로 기억되는 왕이 므낫세였습니다.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정말 하나님께 사랑 받고 신앙을 바로 세우며 성전과 예배를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조율시킨, 백성들이 스스로 겸비하여 세워진 귀한 왕이었는데, 그 아들 므낫세는 그 오랜 기간을 왕으로 있으면서 아버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고 맙니다.
므낫세가 왕으로 55년을 통치 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악한 행동들 중에 대표적 세 가지가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첫번째는 바로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아버지 히스기야가 하나님만을 섬기고 언약을 갱신하면서 무너뜨린 우상들을 다시 모으고 세우는 겁니다.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했다고 구체적으로 증언하는데, 이런 우상들은 이 땅에서의 풍요를 약속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사막과 황무지에서 농사를 짓고 살아가면서 이 땅에서 풍요롭게 지내는 것을 위해 상황 윤리를 들어 모든 우상들을 가지고 온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삶의 풍요를 위해 도구로 우상들을 의지하며, 일월 성신도 섬기고 아세라 목상도 새기는 겁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풍요를 누리려면 주변에 나라들이 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우상들을 기댈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의 지금의 상황에 비교해 보면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동시에 돈 신도 섬겨야 되고 명예의 신, 권력의 신도 기대고 섬기며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미혹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므낫세가 행했던 우상숭배의 삶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삶을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삶이라고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하나님도 섬기는 삶을 성경은 타락이라 명시하고, 우상숭배라고 부르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우상숭배의 도전은 수천년 전에 우리와 전혀 상관없는 삶이 아니라 우리 현재 삶의 자리와 너무나 밀접하고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전을 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두번째, 므낫세의 악은 바로 자녀들을 불로 지나가게 하는 악행입니다. 이런 끔찍한 악행은 할아버지 아하스랑 너무 비슷합니다. 몰렉이라는 우상을 섬기며 자녀들을 불로 지나가게 하며 제물로 태우는 이런 말도 안되는 패륜을 저지르는 겁니다. 이렇게 끔찍한 패륜을 저지르는 것은 여호와의 노를 격발 하게 할 정도로 나쁜 일이었습니다. 므낫세는 아들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불러 의지하며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세번째, 므낫세의 악행은 자기 교만입니다.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목상을 하나님의 전에 세웠습니다. 성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는 곳이 하나님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붙드는 곳이 성전인데 그 곳에 므낫세 왕은 자신이 새긴 목상을 두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는 대신에 자기의 이름을 두려 했습니다. 자기 교만에 빠져 자기 이름의 기념비를 세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자기의 명예를 드높이며 자기 이름을 과장하고 내세우는 자가 바로 므낫세 였습니다. 이렇게 타락하고 무너지고 악한 므낫세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경고하셨습니다. 여러 번 경고하셨던 것 같아요. 선지자들을 통해 책망하셨고 돌아오라고 경고하셨는데 므낫세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마음도, 들을 의지도 없었습니다. 듣기를 거절하고 거부했던 므낫세 왕에게 결국 영적 결과가 찾아옵니다. 그게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므낫세 왕을 결박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아 가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므낫세 왕의 55년의 왕위는 개인에게도 백성들에게도 복이 아니라 화였습니다. 장수하고 오래사는 것 자체가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음을 므낫세 왕을 통해 반추해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오래 사는가…보다 얼마나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걸 다시 한번 반추해 보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고 하나님도 섬기려는 우리의 그 자세가 우상숭배 이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악행들을 마음에 품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영적 결과가 있게 되며 이렇게 포로로 끌려가는 끔찍한 일을 직면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므낫세의 악행을 반면교사 삶아 여호와 말씀 듣기를 거절하며 우상숭배와 교만으로 결국 무너지는 삶에서 철저히 멀어지고 회개하며 뒤돌아 주님 앞에 은혜를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으며 하나님 예배와 절기의 정신을 회복하며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받는 참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충성 되게 일한 후에 그 나라에 앗시리아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 때 낙심하지 않고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붙들며 신뢰했고, 동시에 백성들을 위로하며 두려워하고 놀라지 않도록 그들을 독려하며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안심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적군 앗시리아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군대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내려왔습니다. 그 적군에게 에워싸여 있고 우겨쌈을 당하고 있는 히스기야왕과 남유다 백성들은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렇게 우겨쌈을 당하고 포위 당한 상태에서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우리가 살면서 우겨쌈을 당하고 적에 에워 쌓여 있을 때 악한 자들이하는 동일한 패턴임을 발견하며 오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적용하기 원합니다.
앗시리아 적군은 제일 먼저 지도자 히스기야를 흔드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너희들을 꼬셔 가지고 가짜를 말하는 것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겁니다. 히스기야 말에 속지 말라..믿지도 말라…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를 의심하고 믿지 못할 존재로 만드는 것, 이게 사단 마귀가 우리를 흔드는 전형적인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앗시리아 왕은 하나님을 욕하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건져내실 수 없다…속삭이며 마음이 무너지게 만드는 겁니다. 지금 백성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우겨쌈을 당하는 상황과 에워싼 적국들 뿐입니다. 그 상황에 압도되면 상황만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런 상황에 이 악한 자들의 속삭임은 우리 마음을 흔들고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에게 배고파 굶어 죽겠다…목말라 죽겠다 그러면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만, 실제로 목말라 죽은 사람이나 굶어 죽은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대부분 불평하고 원망해서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악한 자 사단 마귀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우겨쌈을 당할 때, 마음이 하나님 앞에 낙심하도록 흔들고 원망과 불평이 쏟아져 나오게 우리를 흔듭니다. 사단은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안하시고 못하실 거라는 생각을 계속 집어넣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가려고 하면 항상 회유, 협박과 비방을 통해 영적 지도자도 하나님도 의심하게 만들고 거짓말한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낙담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들어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히스기야가 했던 믿음의 행동과 반응은 무엇입니까? 바로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혼자 기도한 게 아니라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기도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 두가지가 참 중요합니다. 히스기야는 왕이었지만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받고 그와 함께 더불어서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이렇게 우겨쌈을 당하고 적에 에워싸일 때, 혼자 외롭게 기도하는게 아니라, 나와 손 붙잡고 더불어 기도할 수 있는 영적 지도자가 함께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새벽기도회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은혜가 귀합니다. 혼자 집에서 기도할 때도 귀하지만, 이렇게 함께 모여 기도할 때 더불어 기도하는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확신과 함께 더불어 손붙잡고 기도할 때 힘있게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평소에는 침묵기도가 귀하지만, 정말 힘들게 되면 하나님 앞에 절박한 가운데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나의 눈을 들고 도움이 하늘에서 옴을 믿고 신뢰하며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그 부르짖는 기도를 히스기야 왕이 한 것입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는 그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절대 신뢰를 통해 나온 우리의 믿음의 반응입니다. 영적인 기도, 믿음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의 능력은 내가 처한 싸움이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개입하시는 싸움이 되도록 바꾸는 능력이 있음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합니다. 내가 직면한 우겨쌈, 적들의 에워쌈에 신음하는 나의 싸움을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기도는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싸움으로 판을 바뀌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겁니다. 이 전쟁이 하나님께 속하였음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결단의 기도가 되는 것이죠. 히스기야의 더불어 하늘을 향해 부르짖은 기도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한 천사를 보내어 앗시리아의 큰 용사들을 치신 겁니다. 그리고 스스로 적군들이 물러가게 하셨고 남유다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이 싸워 이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싸워 이기게 하신 기적…나의 싸움을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싸움으로 바꾼 기도의 능력이었고, 그것을 통해 기적의 역사,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긴 코로나의 광야를 살아가며 내 자신과 우리 주변에 이렇게 사방에 우겨쌈을 당하고 적이 에워싸는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럴 때 악한 자는 항상 우리를 회유하고 협박하고 지도자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떠나게 만들고 마음을 흔들고 무너지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를 속이고 있고 하나님은 믿을 존재가 안되고 하나님은 나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 내지 못한다 생각하는 그런 절망과 무너짐의 생각을 계속 심기우는 악한 존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겹겹이 고난이 찾아올 때 히스기야 왕과 같이 믿음의 반응과 믿음의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믿음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하늘을 향해 부르짖기 원합니다. 그 믿음의 기도가 내가 직면한 싸움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싸움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싸움을 만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위해 싸우시며 앞서 싸우시는 주님을 붙들어야 이 싸움이 하나님이 개입하시며 함께 하시는 싸움이 되는 것을 잊지 말고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의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인과론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설명되지 아니하는 위험하고 복잡한 일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것을 고백합니다. 오늘 말씀도 어떤 원인과 결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그런 인과론을 가지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히스기야의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강대국 앗시리아가 쳐들어 오는 겁니다. 이 모든 충성된 일들이란 히스기야가 했던 예배의 갱신과 부흥, 즉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한번 예배를 중심으로 세우고 닫혔던 성전의 문을 열고 성결하게 하고, 예배와 절기의 정신을 회복한 일들 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정직하게 쓰임 받고 하나님 기쁨되는 일들을 했으면,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길은 열어 주셔야 될 것이고, 적어도 평탄한 길 정도는 허락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 히스기야 왕 앞에 큰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직면한 어려움은 단순히 개인적인 어려움 정도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 앗시리아가 남유다로 멸망시키기 위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히스기야 왕이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어려움에 직면 했을때, 그가 보였던 믿음의 반응은 첫 번째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낙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낙심 했다거나 원망과 불평했다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마음에는 분명히 그런 것들이 불끈불끈 올라 왔을 겁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충성했는데, 이렇게 충성한 결과가 강대국이 죽이려고 쳐들어오는 위기인가? 분명히 낙심할 때가 있었고 마음속에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위대한 점은 그것이 그의 삶을 지배하도록 놔 두지 않았던 겁니다. 대신 전쟁을 구체적으로 준비하며 전쟁에 대비하며 그 모든 물에 근원을 막았습니다. 밥은 안 먹어도 물은 안 먹을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모든 물에 근원을 막아 버리는 거예요. 사막지대에 물이 없으면 공격하기 굉장히 어려운 것이죠. 인생의 풍랑과 곤고할 때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왔는가?”에 대해서 계속 묵상하면 묵상 할수록 원인과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을 찾다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다 쏟아버립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왜?” 라는 질문은 맨 나중에 하는 것이 영적인 삶입니다. 히스기야 왕 같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충성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이런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는게 인생임을 인정하는 겁니다. 인과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나에게 어떤 이유가 있어서 어려움이 찾아오는 게 아닌 경우가 대부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풍랑과 어려움은 우리가 불신앙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신앙 가운데 충실하게 나아 갈 때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에요 두번째 히스기야가 한 믿음의 반응은 두려워 떠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큰 풍랑과 국가적 위기 앞에 그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였다는 겁니다. 그 위로는 너희가 지금 소문을 다 들어서 알겠지만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강대국 앗시리아가 지금 쳐들어오고 있는데, 그 가운데 상황과 환경에 눈이 고정되어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리고 성 전투 앞에서 주셨던 말씀과 거의 유사합니다. 마음에서 지면 그 싸움은 이미 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낙심과 의심, 원망과 불평으로 차 있으면 이미 그 전쟁은 진 전쟁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영적 전쟁은 우선 마음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 마음이 무너지도록 방치하지 않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강하고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이 믿음의 은혜가 경험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에게 그러한 위기 상황 가운데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비결,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비결을 알려주는데, 바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정확하게 붙드는 겁니다. 나와 함께 하는 자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싸우심을,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심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인생의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선명하게 고백 되는 겁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분, 그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싸운다는 분명한 믿음을 붙들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며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는 겁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철저히 의지하며 나아가는 것이죠.그런 히스기야 왕이 믿음의 선포로 백성들이 마음에 안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혼란하고 어려운 삶 가운데 내 삶의 풍랑과 어려움에 찾아올 때, 안심을 주고 평안을 주는 말을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내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왜?”라는 질문을 묻어두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싸움이에요. 하나님을 신뢰하며 ”왜?”라는 질문을 가장 나중에 하는 싸움입니다. 가만히 있을 때 우리는 어려움에 처하면 자동적으로 낙심이 몰려오고, 원망과 불평의 삶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삶의 패턴입니다. 믿음을 온전히 붙들지 않으며 내 인생이 어려울 때 낙심이 가져다 주는 원망과 불평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란 인생의 고난과 풍랑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머리로 이해되지 않지만 “왜?” 라는 질문은 나중에 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을 먼저 붙들고 나아가는 간절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나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에 큰 어려움이 찾아오며 풍전등화 같은 위기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왜?”라는 질문으로 나의 인생을 힘들게 하지 말고, 낙심으로 원망하며 불평하며 나의 시간을 다 보내지 말고 믿음을 붙들고 히스기야 같은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반드시 함께 하시며 도우심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며 믿음 가운데서 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안심을 주는 삶이 위기 가운데 경험하는 놀라운 초 자연적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향한 예배 회복, 그리고 유월절 절기와 정신을 회복하고 나서 그 놀라운 힘과 에너지가 파급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언하는 말씀이 역대하 31장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셔서 많이 가지게 되었을 때 그 부어진 축복들이 마음이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대신 하나의 마음 (一心)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께서 히스기야를 통하여 부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넘치도록 풍성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드리기를 즐겨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드린 재물들이 굉장히 많이 쌓여있고 남게 되는 그런 넘치는 은혜를 경험한 상황이에요. 사실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공동체가 풍성한 복과 태평 성대 가운데 있을 때 마음이 갈라지고 나누어지는, 이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아서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고 어려웠던 케이스가 성경에는 자주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사건이 여리고 성 큰 승리 이후에 전리품을 숨겼던 아간 때문에 결국 공동체 전체가 어려움을 겪으며 그 다음 전투에서 패배하는 영적 악순환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부으심의 은혜를 경험한 초대교회에 영적인 찬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입니다. 그들은 헌금을 드린다고 했는데 온전히 드리지 않아서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심되지 못하게 만드는 그것이 초대교회 공동체 전체의 영적 문제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풍성한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잘 영적으로 잘 품고 나누며 바른 태도를 가지고 사느냐가 이 영적 축복이 지속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의 영적 지도력으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고 한 마음, 일심으로 나아가도록 지혜롭게 잘 치리했음을 오늘 말씀은 두 가지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액수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먼저 주님 앞에 온전히 드리는 과정을 선명하게 한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께 드린 것들은 구별하고 거룩하게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려 여호와의 전 안에 방을 예비해서 성심으로 그 예물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의 부어 주시는 은혜로 드려진 백성들의 자원하는 마음 표현, 그렇기에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에 대한 성별이 언제나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 보이는게 전부가 아님을 고백하는 본질이라면, 헌금이던 예물이던 일차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실체로 실제로 드리는 고백이 있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린 고백으로, 액수가 적고 많고를 떠나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배 가운데 우리가 지속적으로 훈련받고 몸에 체득되어야 하는 것은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사라는 분명한 고백, 내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라는 분명한 고백입니다. 이 고백과 초점이 흐려지면 신앙 생활이 흐트러지고 질서가 없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그냥 사람들 때문에 나와주는 게 아니고 그냥 교회가 어려우니까 내가 도네이션 하는 게 아니고 내 마음과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게 나의 예배이고 나의 헌금이 되어야 그 가운데 영적인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재물이 마음과 함께 주님 앞에 온전히 바쳐졌을 때, 나의 인생이 마음과 함께 주님 앞에 온전히 바쳐졌을 때, 그 곳에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히스기야가 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나누어지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는 비결은 그 차고 넘치는 그 드려진 것들이 성심으로 하나님께 드린 예물임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며 구별되는 과정을 통해 이것이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바쳐졌다는 분명한 의식을 깨닫게 하는 것이죠. 동시에 그것이 분명한 영적 기준을 가지고 잘 사용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말씀은 “ 주신 것을 나누어주고…”입니다. 풍성하게 남은 것들을 어떤 기준에 따라 잘 나누어 주는 과정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헌금을 우리가 잘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헌금을 영적으로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부어 주신 것을 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공동체는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영적 기준과, 하나님이 기쁘심에 사용하는 영적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것들이 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영적 기준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 영적 기준을 잘 세웠으면 “여호와 보시기에 삶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 하였으니…”라고 결론짓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할 정도로 분명한 영적 기준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 결과 부어주시는 놀라운 복 가운데서도 백성들의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고,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일심(一心)으로 묶어져 모든 일에 형통함이 부어졌습니다. 그게 바로 히스기야 왕이 가진 놀라운 영적 지도력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주님께서 부어 주신 복들이 있습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드린 예물들이 온전히 하나님께 바쳐지는 나의 고백임을, 하나님을 향한 나의 향기가 되는 이 영적 관점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동시에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으로 사용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기준을 붙들고 사용하게 될 때,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 되고 일심으로 형통함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영적 지도력으로 남유다 백성들이 누린 이 일심의 은혜로 부어진 형통함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도 풍성히 경험하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을 통하여 계속해서 신앙 부흥과 갱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닫혔던 성전의 문을 열었고 성전을 보수하고 성결하게 구별하여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갱신하며 참된 예배 회복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월절 정신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신앙의 정체성, 내가 그동안 세상인 애굽 가운데 그렇게 구속 당하고 눌리고 결박 되어 있었는데 주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였으며 어린 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의 조율과 회복을 가져왔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세상이 주지 못했던 놀라운 기쁨과 감사를 경험하게 되고 예배와 제사가 그들에게 정말 삶을 변화시키는 동력과 힘이 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삶의 원동력과 힘이 된 그 예배와 절기 회복을 통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참된 예배와 절기 회복이 가져온 영적 파급력, 영적으로 이런 놀라운 파급 효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죠. 첫 번째 일어난 파급력은 바로 그들 주변에 있었던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기 시작한 겁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난 후 영적 파급 효과가 뭐냐면 바로 그들 가운데 있었던 우상들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버리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왕이 명령을 내려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라 백성들이 예배가 회복되고 나니까, 스스로 자발적인 변화를 통해 흘러 넘치듯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동안 남유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며 겸하여 섬기면서 변질되고 무너지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 났었습니다. 한 시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문제이고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오는 잡초와 같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발적으로 백성들이 우상들을 제하고 무너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신앙이 주는 파급효과는 내 삶에 숨어 있는 우상들을 스스로 제하여 버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강압과 협박을 통해서 아니라 자발적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에…그것이 바로 유월절 정신이 회복됨으로 가져온 놀라운 영적 파급력입니다. 두번째, 자원하는 마음으로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말씀과 율법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정말 중요하고 말씀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니까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집중되며 충분히 준비된 말씀을 통하여 심령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율법에 온전히 힘쓸 수 있게 모든 것들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절기 정신 회복되면서 회복되는 게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말씀에만 전념하고 율법을 힘쓰게 하는 것을 위해 그들의 헌금을 자발적으로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말씀과 율법에 온전히 힘써야 영적 파급력이 있다는 이 선택과 집중의 결단, 비슷한 얘기가 신약 성경에도 등장하죠. 사도들이 여러가지 일로 바쁘고 분주하면서 그 가운데 결국 갈등과 문제가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에 과부 들을 구제하는 내용으로 결국 다툼이 일어나고 교회가 큰 분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성령 하나님이 주신 결정은 뭐냐면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하고 일곱 집사들을 세워 그들이 교회 행정과 다른 것들을 하게 맡기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들이 그 말씀과 기도로 전무 하는 것을 통하여 더 놀라운 부흥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히스기야 왕을 통하여 모든 백성들이 예배 회복과 갱신, 유월절 정신을 회복하면서 예배가 이만큼 중요한 것이구나…깨달으면서 영적 지도자들이 율법에 온전히 힘쓰도록 배려하고 모든 것을 마련할 수 있는 지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영적 파급 효과였습니다. 세번째, 참된 예배의 회복을 통한 영적 파급 효과는 백성들의 마음에 넉넉함이 회복된 거에요. 오늘 말씀에 강조되는 것은 그냥 힘에 부치도록 하나님께 많이 가져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에 넉넉함과 풍성함이 자발적인 헌신과 연결되었다는 것이죠. 예배를 통해 공급받는 영적인 채널이 열리면 내 마음의 넉넉한 여백이 생기는 거예요. 마음에 여백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의 여백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간이 아무것도 없어요. 돈이 많아야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게 아닙니다. 내 마음에 여백이 있고 쿠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 마음의 여백이 풍성함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즐거움으로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억지로 인색하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영적 파급 효과는, 영적으로 민감하기 위해 육적인 것에 둔감하게 되며 이 세상 것에 둔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에 너무 민감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것과 하나님 나라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천국 백성으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삶 가운데 예배의 부흥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것은 바로 이런 불순물들과 비 본질적인 것들에 너무 민감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더욱 민감하고 하나님만 더욱 사랑하는 이 영적 파급 효과가 우리 가운데 경험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내 마음의 풍성함과 넉넉함이 있으십니까? 내 마음의 풍성한 과 넉넉함이 내 삶을 통해 향기로 전해지는 자가 정말 복된 자들이며 그것은 오직 예배를 통하여만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내 삶의 예배를 통한 놀라운 영적 파급 효과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내 주변의 모든 우상들과 불순물들을 제하여 버리고 순전한 믿음으로 회복되기 원하십니다. 예배가 온전히 회복 때 내 삶의 불순물과 이렇게 우상들을 무너뜨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말씀과 율법에 집중하며 붙어 있기 원하십니다.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메마르지 않고 은혜가 머물러 있는 그 풍성함을 경험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 가운데 구원 받은 천국에 백성들이라면 내 마음에 주님이 주신 풍성함과 넉넉함이 내 마음의 여백을 주고 쿠션을 주게 될 것입니다. 삶의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주님께 자원하는 열망이 회복되는 삶, 예배를 통한 영적 파급 효과를 실체로 경험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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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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