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장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변화된 성도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자, 성도다운 삶을 살자는 큰 그림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변화된 성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살아내는 각론에는 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인 실천에 대해서는 우리가 행하지 않고 삶에 적용하지 않은 채 그냥 머무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변화 받은 성도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 태어난 자로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 지를 잊지 않고 말씀이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되며 체득 되기 원합니다. 사랑 받는 하나님 자녀다움의 삶이 무엇인가에 대해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을 본받아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받은 자 십자가 사랑의 수혜자로서 우리가 성도 천국 백성 답게 산다는 건 바로 하나님을 본받고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는다는 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모델로 보고 예수님을 따라가며 본받는 자로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죠.
사랑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모든 내적 동기가 사랑으로 행하는 겁니다. 내가 똑같은 일을 해도 그것을 사랑으로 할 수도 있고 미움으로 할 수도 있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할 수도 있고 억지로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같이 살아간다는 건 내가 하는 모든 삶에 있어서 사랑이 내 삶의 내적 동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삶이 사랑하기 위해, 사랑을 운동력으로, 사랑을 내적 동기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악의를 아시면서 그들을 많이 질책하셨고 심하게 혼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좋아 보이는데 그들의 속마음은 악한 의도 나쁜 의도를 아주 잘못된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악한 의도로 하지 않고 선한 의도로 하며 미움을 동력으로 하지 않고 사랑을 동력으로 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이웃들을 사랑하며 내 자신을 돌보고, 나와 무관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을 붙들며 사는 삶이 바로 성도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 멀리 할 것을 멀리하고 이름도 부르지 말라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피해야 되는 것이 있는데,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을 피하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사도바울이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가 위치한 에베소라는 도시가 음행과 더러운 것과 탐욕이 판치는 도시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타락한 도시 한복판에 교회가 세워졌고 그 문화를 숨쉬고 살아가고,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는 가운데 성도들이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지만 여전히 음행 가운데, 더러운 것 가운데, 탐욕 가운데 삶이 무너지는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강력하게 경고하냐 하면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는 겁니다.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이라는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도, 떠올리지도 말라며 아주 강력한 단절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 안에 이 문제로 교인들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교회의 큰 도전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로서 기름 부으심과 성령의 능력을 공급 받고 살아가는 비결은 우리가 깨끗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금 그릇, 은그릇이 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거기다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기 때문입니다. 음행, 더러운 것과 탐욕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그 더러운 그릇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길 수 없고,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실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모든 이유의 본질은 내가 무언가를 하는 조건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내 삶에서 일하시게 하는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거룩하고 구별되게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깨끗한 그릇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며 성령 하나님이 나를 통해 선명히 일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 우리의 입술이 향기가 나게 하는 삶입니다. 말의 힘을 직시하는 것이 사랑받은 자녀다움의 삶입니다. 말에는 창조적 힘도, 파괴적 힘도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틈만 나면 입으로 더러운 것이 올라온다는 것을 항상 인지하고 조심하는 것이 사랑받은 자녀다움의 삶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을 피하고 감사하는 말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도록 조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조심하고 경계하는 말이 뭡니까? 헛된 말,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실체가 되어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 계속 올라오게 되면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나의 내면을 형성하고 결국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말이 뱉어지는 순간 말을 통하여 실체로 역사하기도 하며 악한 영이 역사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헛된 말,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더러운 말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들을 실체가 되게 하는 파괴적 능력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앉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꺼내면 안 되고 누추하고 어리석고 희롱하는 말들은 우리가 절대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관계 안에서만 그것을 넘어가는 일을 하지 않도록 끊어내며 그것을 늘 주님 사랑 가운데 주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성도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성도로서 능력은 나의 능력이 아니고 주님이 공급하시는 능력이고 그 공급하시는 능력을 받기 위해 우리는 거룩하고 구별된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구원받은 자 답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 비결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 삶의 모든 보이지 않는 내적 동기가 사랑이 되게 하십시오. 음행과 모든 더러운 것과 탐욕은 이름도 부르지 말고 멀리 하십시오. 말의 힘을 직시하고 말하는 것을 정말 조심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말과 주님이 주시는 창조와 치유와 은혜의 말을 통하여 내 삶이 거룩한 말 깨끗한 말 은혜로운 말 통하여 그 말이 내 안에 생각 알게 되며 실체가 되며 내 인생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되게 하십시오. 일상생활을 살아갈 때에 우리 삶의 모든 동력과 나를 움직이는 힘이 늘 사랑이 되도록 점검하며 하늘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공급 받으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주님 은혜 가운데 2022년 이 한 해를 잘 마무리 하시며 2023년 새해를 은혜 가운데 준비하며 주님의 자녀답게 사랑 받은 성도 답게 우리가 하루하루의 인생을 꾹꾹 눌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성도들이 말씀을 기초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야 될까를 실천적으로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바로 하나됨과 거룩함….이 두 가지를 붙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시는 신비를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삶이고,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성도로서 거룩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버릴 것을 버려야 되는데 바로 거짓을 버리고 분노가 쌓이지 않도록 털어내는 것입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을 버리라고 강조합니다. 거룩함을 위해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입으로 더러운 말을 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속에서 더러운 것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나를 더럽게 한다고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명확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짜 부정하고 진짜 나를 더럽게 만드는 것은 겉에 보이는 내가 만지는 것이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입으로 나오는 것이 나를 더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 더러운 말을 쏟아내는 사람은 결국 마음에 쌓인 게 더러운 자라는 것입니다. 말은 나의 마음에 쌓여진 분노와 함께 엮여서 터져 나오게 되면 아주 심각한 무기가 되고 성령을 근심하게 하고 사탄에게 틈이 틈을 주는 그런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의 거짓말을 버리라는 권면과 오늘 말씀의 입으로 더러운 말을 버리라는 걸 보면 이것이 그 당시에 이방인들과 불신자들에게 만연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오염된 말이 그렇게 만연했고 실제로 에베소 교회에서 이런 세상에 영향을 받아서 말을 통하여 범죄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문화 가운데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살 때 두 가지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게 다 말에 대한 것입니다. 더러운 말을 막 함부로 얘기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삶을 일상화로 살고 있었던 그 시대상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에베소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동일한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짓말에도 경중을 찾아서 가벼운 거짓말은 그냥 일상화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내 입에 욕을 달고 살아가는 것, 더러운 말을 쏟아내며 살아가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삶이 저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문화 아니겠습니까?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들은 그 거짓말을 버려야 되며 그 더러운 말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영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죄로 말미암아 말이 타락되고 오염된 결과임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 버려야 되고 입으로 더러운 말 버려야 한다…오죽 강조했으면 입 밖에도 내지 말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에는 사람들을 세워주고 사람들을 위로하며 은혜를 끼치며 사람들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글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숨이 있어서 생명의 말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말씀이 되어 육신이 되어 그것이 나에게 흐르게 될 때 내 삶을 통하여 나오는 말이 바로 덕을 세우는 말과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신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근심한다는 이 말이 바로 슬픔을 갖게 한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나의 삶을 통해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현재형으로 현존하심이 분명한데, 마치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안 계신 것처럼 말하고 안 계신 것처럼 행동할 때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거예요. 내 입술에서 왜 더러운 말이 계속 쏟아져 나옵니까?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거예요.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 좌정하고 계신데도 성령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거나 무시하거나 그분을 없는 분처럼 여기며 살아갈 때 성령 하나님이 슬퍼하신다는 거예요.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난 것도 모르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도 모른 채 성령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분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늘 깨닫고 실체로 믿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보혈을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았음을 성령의 도장 찍는 확증하시는 은혜로 늘 망각하지 않고 현재화하고 내면화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더 나아가서 악의, 악한 의도를 버리는 것이 거룩한 삶임을 강조합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악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화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떠들고 비방하는 삶이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다 말과 관련된 것으로, 내가 하는 말 그 밑에 담긴 깊은 의도가 무엇인지 주님은 보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복음서에 보게 되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많은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 질문들이 진리가 궁금하건, 진리를 더 알기 원해서 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고 흠잡기 위한 악의를 가지고 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시며 내가 예수 생명으로 산다는 것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의 모두 악의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의와 함께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겉으로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걸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악의는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행동만 보고 껍데기를 바라보지만 주님은 우리 속에 있는 중심과 보이지 않는 의도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행동이든 말이든 멈추라고 성령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니까? 내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더러운 말이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늘 성령 하나님께 드려서 내가 하는 말이 덕을 세우고 선한 말을 하고 은혜를 끼치는 말이 되도록 항상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더러운 말을 버리고 대신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오직 덕을 세우는데 쓰임 수 있는 선한 말을 하는 도구가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말을 은혜롭게 하며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증거가 뭐라는 겁니까? 내가 하는 말을 통하여 은혜를 끼치며 덕을 세우는 자가 되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대신에 내 안에 여전히 살아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붙들고 동행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오셨고 그분이 우리 가운데 거하심을 믿는 삶을 사모함으로 살아가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낳은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알게 해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십시오. 거짓말과 분노를 버리고, 더러운 말을 버리고, 모든 악한 의도를 버려 성령 하나님을 슬프게 하지 않으며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는 삶,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에서 성도의 말씀이 적용된 삶의 구체적 실천을 강조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됨을 경험하고,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들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임을 강조합니다. 오늘은 그 거룩한 삶의 실천적인 부분의 연속으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거룩을 이루며 성령 충만함을 이루는 삶의 첫 번째가 바로 거짓을 버리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로 사는 것은 내 입술에서, 내 삶에서 거짓을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인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시는 증거는 거짓을 버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인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실,참인 곳에 거하는 것입니다. 거짓을 품고 있는 곳에는 성령님이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를 품고 있는 곳에서는 거룩한 영인 성령님이 거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삶,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삶을 위해 우리는 거짓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여러 곳이 오염됐지만, 환경도 오염이 되고 관계도 오염이 되고 수많은 것들이 오염이 됐지만 그 중에 대표적인 게 우리 말이 오염되었습니다. 죄의 결과 거짓의 말을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거짓을 품고 살아가는 것을 아무런 심각성을 모르고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 말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고, 말에는 아주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산다는 것, 거룩한 영인 성령 하나님이 내 삶에 풍성히 임한다는 것은 반드시 거짓을 버리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고 내 삶에 참됨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은 내가 그냥 정직하게 살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영인 성령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시며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 거짓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을 버리는 삶과 함께 두 번째 버려야 될 것은 분노를 버리는 겁니다. 분노나 화라는 감정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우리에게 분노라는 감정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감정이고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적당한 방어기제로서 분노라는 감정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절대로 분노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화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분을 낼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문제는 분이나 화를 내긴 하는데 하루가 지나도록 분을 자꾸 품고 차곡차곡 쌓게 되면 자꾸 죄를 짓는 도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분노를 품게 돼서 그것이 내가 죄를 향하여 달려가는 운동력이 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거룩한 영인 성령 하나님이 내 가운데 거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놀랍게 쓰고 싶어도 내가 분을 품고 있고 죄를 향하여 내 몸이 자꾸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면 그 사람을 쓸 수 없는 겁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고 있으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일하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분을 차곡차곡 품는 삶을 방치하게 되면 오늘 말씀의 경고와 같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쌓여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게 만들면 그것이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담을 수 없는 그만큼 이상이 넘치게 되면 분통이 터지게 되는 거예요. 분통이 터지게 되면 그것은 항상 죄로 이끌고 그것이 항상 마귀에게 틈을 주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 엄청난 분노의 힘을 가지고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으로 삼아 나도 죽이고 내 주변 사람들로 다 죽이는 악한 힘으로 사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 어떤 티핑 포인트, 임계점이 넘어서면 마귀가 틈을 비집고 들어와 내 삶을 내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분노에 이끌려 거의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분노는 이처럼 엄청난 힘, 그것도 매우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파괴적인 힘이 나를 죽이고 주변 사람들을 죽이며 사단에게 틈을 주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 있으며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을 사모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내 마음에 분노가 찾아올 때 그걸 빨리빨리 털어내고 그것을 내보내야만 내가 건강해질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으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인생임을 언제나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원하십니까? 거짓을 버리고 참되고 진실한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분노를 털어내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화가 마음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그것을 당연한 일상의 삶이라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과 다른 거룩한 삶으로 부름받은 성도들은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통제를 벗어나 쌓여 있는 모든 분노의 감정들은 사단에게 틈을 주는 인생됨을 잊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새 사람 된 성도로서 이 문제는 무겁고 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분노를 나를 움직이는 힘, 운동력으로 살면 안 되고 분노를 차곡차곡 쌓으면 항상 사단의 미혹거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 분노와 화를 쌓이기 전에, 가능하면 하루가 지나기 전에 십자가 앞에 털어내십시오. 내가 하는 많은 일들 가운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복되며 다른 사람을 축복의 통로로 살며 주님께 기쁨 되는 선한 일을 의도적으로 많이 할 때 나의 손과 발에 주님의 은혜가 덮이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는 귀한 도구가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삶을 통하여 진리의 영 성령 하나님이 나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사모하십시오. 바라기는 거룩한 삶이 추상화되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적용되어 예수님의 향기가 삶 속에 드러나는 귀하고 복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새 사람으로 변화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증언하고 있는데 그 첫번째는 하나됨입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시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경험하고 누리고 체험하는 신비가 성도의 삶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남편과 아내가 하나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한 분이시며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는 놀라운 신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됨과 함께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것은 거룩함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실천적 적용이자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적용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이 세상에 밀리지 않는 성도의 삶입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영적 미성숙자들은 이 세상에 밀리고 이 세상에서 요동하고 늘 삶에 기복이 있습니다. 그런 미성숙자, 영적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이 되는 표징입니다. 또한 옛 사람인 이방 사람과 같이 살지 않는 것이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여기서 이방인 이라는 것은 이미 신약에서는 소위 말하는 혈통이나 핏줄의 개념을 넘어 섰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영접한 자들이 혈통에 상관 없이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이며 영적 유대인들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모든 자들이 영적 이방인들입니다. 혈통으로 비유대인들을 의미하는 이방인이 아닌 영적 이방인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불신자들이 이방인들입니다. 불신자들 같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차별성을 가지고 다르게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받은 자들이 성도입니다.
불신자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영적 이방인들의 보편적 삶의 특징이 등장하는데 먼저는 마음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망하다는 건 내 인생을 뒤돌아 봤을 때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고 텅 비고 공허하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물질과 쾌락을 삶의 도구가 아닌 삶의 목적으로 두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끝에 경험하는 게 뭡니까? 마음이 허망하고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고백한 것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인생이 실제로는 텅 빈 인생이었다는 것, 그게 마음이 허망한 인생입니다. 마음이 허망한 것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의 특징임을 마음에 새기며, 마음에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허망한 삶을 청산해야 하는 것이 성도들의 구별되고 거룩한 삶입니다. 두번째,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방인들의 특징은 총명이 어두워진 자입니다. 총명이 어두워졌다는 건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라는 지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이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와 육신의 건강, 눈에 보이는 일에 계산적으로 주판을 돌릴 순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나 영적 가치나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강건함 같은 것은 전혀 보지 못하는 자들이죠. 아무리 머리는 똑똑하고 계산은 잘해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가질 수 없는, 총명이 어두운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치 외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 외에는, 눈에 보이는 껍데기 외에는 모든 것이 총명이 어두워진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총명이 어두워진 자 같이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영적 가치를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성도의 거룩한 삶입니다. 세 번째, 이방인들의 삶에 보편적 특징은 감각이 없는 자들입니다. 어떤 감각이 없냐하면 영적 감각이 없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영적으로 얼마나 해로운 일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자가 영적 감각이 없는 겁니다. 오직 이 세상 것에만 민감하고 육적 감각만 활성화되어 살고 영적으로는 감각이 없이 둔감한 삶이 바로 영적 이방인들의 삶입니다. 영적 감각 없는 자들은 자기가 방탕하고 방임하며 더럽고 욕심으로 행하는데 그게 문제가 되는지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다 무뎌진 사람들, 영적 감각이 없는 자들은 그런 방탕한 삶과 이 세상에 올인 해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시선 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 같이, 마치 불신자 같이 영적 감각이 없는 자같이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삶을 청산하고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살게 될 때 영적 감각이 살아가며 영적으로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로서 어떻게 이런 삶을 청산하고 거절하며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렇게 무너지고 자빠지며 흔들리고 기복이 있는 삶을 청산하고 거절하고 싶습니다. 불신자들 같이 영적 감각이 무뎌지고 총명이 어두워지며 허망한 자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변화를 내가 원한다고 결단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가 변화의 핵심인 것입니다. 바로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처럼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가르침을 받고 그분 안에 머물러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진리가 나를 사로잡으면서 그 진리가 나를 변화시킨다는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 분명한 결단을 사도 바울은 촉구하고 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날 구습, 이방 사람들과 같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과 같이 살았던 그 옛 습관에 길들여진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지고 활성화된, 육신의 일에만 감각이 살아있고 민감했던 그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겁니다. 개선하는 게 아니라, 수선하는 게 아니라 벗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겁니다. 옛 옷을 벗어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나의 심령이 새로워지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의와 진리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덧입는 것입니다. 이방인같이 불신자들 같이 허망한 마음으로, 총명이 어두워짐으로, 영적 감각이 다 죽은 자 같이 살아가지 마십시오. 오직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으며 그분의 이름을 붙들고 옛 옷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되어 새 옷을 입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시는 놀라운 신비를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경험하는 것이 말씀을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런 삶을 우리가 살아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영적 어린아이, 영적 미성숙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그런 영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이 우리 삶의 여정이고 가야 될 길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어린아이 같음…이라 그러면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너희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어린아이와 같이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 말씀하실 때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그 마음에 수용성과 의존성을 온전히 갖는 것을 얘기하는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오직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그분을 향하여 철저한 의존성과 수용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게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로서 바로 영적 미성숙을 의미합니다. 영적 어린 아이는 영적 미성숙을 얘기하는 것이죠. 온전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영적 어린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으로 미성숙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배운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에 요동하며 흔들리는 영적 어린아이, 영적 미성숙의 특징을 두 가지로 무엇인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세상 유혹과 속임수의 자꾸 밀리게 됩니다. 영적 미성숙자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립니다. 이 세상에 성도가 같이 있으면 성도가 농도가 높아서 이 세상이 변해야 되는데 세상의 농도와 영향력에 반대로 내가 젖어 들게 되는 삶, 세상 영향력이 스물 스물 나에게 들어오는 자들이 바로 영적 어린아이입니다. 세상 우선순위에 밀리는 겁니다…세상 가치관에 밀리는 겁니다. 내 신앙이 단단하지 못하고 미성숙하다는 증거는 이 세상 풍조에 내가 밀리는 겁니다. 세상 속임수와 유혹에 자꾸 내가 빠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 살아갈 때에 시험과 유혹, 거짓말과 속임수에 빠져 오늘도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물질 가치가 전부인 줄 알고, 겉에 보이는 껍데기가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에 밀리는 영적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청산하기 원하는 것이죠 두 번째 영적 어린아이의 특징은 바로 이 세상에 요동하는 자들입니다. 신앙이 갈대와 같이 자꾸 기복이 있고 흔들린다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이 한결같고 묵직한 분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신앙이 갈대와 같이 요동하고 흔들리고 들쭉날쭉 한다는 것이죠. 감정에도 기복이 너무 심하고 말에도 기복이 너무 실하고 오늘과 내일의 기복이 너무 심한 겁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헌신하고 열심을 내는 충성도 기복이 너무 심합니다. 이번 달에는 그냥 모든 것을 걸 것처럼 열심히 충성하다가 다음 달 되면 모든 것을 놔 버립니다. 이런 사람이 갈대와 같이 요동하고 흔들리는 자, 안정성이 없는 미성숙한 들쭉날쭉한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런 영적 미성숙의 삶, 영적 어린아이의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야 합니다. 영적 어린아이와 같이 이 세상에 밀리고 이 세상에서 요동하고 기복 있는 삶을 살지 않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충만해지는 것 뿐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란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전체 큰 주제가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입니다. 즉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을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주님을 위해 섬기는 행동과 하고 싶어하는 내 삶의 태도가 하나가 되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신 남편과 아내가 온전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성령 하나님께 사로잡히면 사로잡힐수록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는 신앙 생활의 신비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미성숙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특징이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따로, 아는 것 따로 입니다. 믿는 것 따로, 삶에 적용 따로가 되는 것이죠. 겉과 속이 늘 다른 겁니다. 주일의 삶과 평일의 삶이 늘 다른 것입니다. 그런 나눠짐과 단절의 삶 가운데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됨의 역사로 믿는 것과 아는 것을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온전한 분량까지 자란 장성한 자들은 기복이 줄어들고, 흔들리는 게 줄어들고 그 다음이 세상과 부딪혔을 때 이 세상에 밀리지 않고 세상을 밀고 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나를 드림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 때까지 자라는 겁니다. 껍데기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속사람이 단단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장성한 분량까지 이른다는 게 바로 머리이신 예수님 에게까지 자라는 것임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난다는 말은 바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만을 붙들고 살아갈 때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역사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왕이시자 머리이신인 그리스도가 내 몸을 지배하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며 그 머리에 명령을 따라 머리가 이끄는 대로 몸이 나아가는 겁니다. 왕이시자 머리이신인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며 그 머리에 명령을 따라 남편과 아내, 자녀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머리가 이끄는 대로 나아가는 겁니다. 왕이시자 머리이신인 그리스도가 교회 전체 몸을 지배하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며 그 머리에 명령을 따라 모든 지체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머리가 이끄는 대로 몸이 나아가는 겁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대로 하며 가고 싶으신데를 가며, 그리스도가 원하고 관심 있는데 교회의 눈과 마음이 가는 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역할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미성숙한 어린아이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자라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원하시는 뜻과 방향과 길을 향하여 가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자라게 하고 세우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며 목적이라는 것이죠. 반대로 사단의 교회를 향한 미혹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없는 분처럼 착각하며 지체들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겁니다.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지 않는 몸이 되버리는 겁니다. 그리스도 대신 서로의 이익에 매달리며 지체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자라지 못하게 되고 몸이 세워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영향을 받고 다스림을 받는 대신 이 세상에 철저히 영향 받고 결박되어 살아가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무한 양성 하는 게 사단이 제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서 몸이 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고 그 명령 아래 유기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 사명으로 나아가며 그리스도의 몸이 자라며 그리스도의 뜻이 세워지는 것을 위해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으며 그분이 제일 기뻐하시는 자로 살아가기를 작정하며 그분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겁니다. 교회가 이 세상에 세워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로이 시간 존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뜻이 세워지며 몸이 자라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주인 되시며 주님 안에서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되는 신비를 내 삶에서 우리 교회에서 누리게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이 세상에 밀리거나 이 세상에 요동하고 기복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사랑 안에 지어지고 세워지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에 대한 부분입니다. 누구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각각의 은혜를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도 선물이고 십자가 은혜도 선물이고 내가 구원 받는 것도 선물이죠. 더 나아가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선물입니다. 나의 시간도 나의 가족도 나의 집도 나의 모든 달란트도 다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심지어 복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조차도 그리스도의 선물이라고 고백하며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선물임을 고백하는 게 성도의 놀라운 삶의 비결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각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것은 결국 그 선물을 받지 않은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예외 없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리스도의 선물에 분량에 따라 그 선물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각 사람이 적어도 한 달란트는 받았다는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받은 은사와 선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은혜의 선물에 분량대로 주셨다는 것은 그 선물과 은혜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빠지지 않고 줬는데 그 받은 은사와 선물은 각각 다르다는 겁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받았는데 그 은사와 선물은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에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주인이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런 사명을, 어떤 사람은 저런 사명을, 어떤 사람은 좀 큰 사명을 어떤 사람은 작은 사명을 다 다르게 맡겼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음을 강조합니다.
사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게 이 세상에 가치관입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비교하게 만듭니다.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 삶에서 생존을 위해서 버티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좀 나아 보이면 교만해 보이고 다른 사람보다 떨어지면 열등해 보이는 이런 삶을 끊임없이 살게 만드는데 내가 가진 분량과 선물과 은사를 다른 사랑과 비교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비교의식에 사로잡히면 늘 질투하고, 늘 비교하고, 늘 경쟁하며 교만과 열등감이 사로잡혀, 사람에게 민감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며, 사람들의 비교에 민감한 육적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단지 버티기 위해 서바이벌을 위해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넘어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보냄받은 자임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 하나님의 민감한 자가 된다는 것은 이 비교의식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다른 것들을 가졌기 때문에 비교하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은사 중심 성령 하나님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나와 남의 은사와 가진 것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뭐를 비교하냐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할 뿐입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 선물 받은 자로서 주님의 뜻 가운데 경주함을 살고 있는가… 나의 어제와 나의 오늘을 비교할 뿐이지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삶에서 자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시는 비결은 뭡니까?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선물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이 시간 그 선물을 발견하며 그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에게 주신 은사와 선물을 잘 발견하는 것, 동시에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손과 발이 서로 비교하고 눈과 귀가 늘 서로 비교하고 살아간다면 거기서 하나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손은 손 대로 귀한 거고, 눈은 눈대로 귀한 거고 발은 발대로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다르게 주셨구나…내가 가진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내가 가진 분량대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품고 내가 그것을 잘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하나가 되며 성령이 하나 되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 자체가 주님 안에서 걸작품이고 충분히 독특하고 충분히 의미 있다는 것을 발견하며 그리스도 몸된 교회인 교회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비교 의식을 다 내어 맡기는 것, 이것이 교회 안에서 하나 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께 받은 그 분량대로 받은 선물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으며 받은 은혜를 잘 가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살아가며 삶이 주님 앞에서 귀한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해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나오는 놀라운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것임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선물에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운다는게 뭡니까? 단순히 사람이 좀 많아지고 규모가 커져서 교회 건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그리스도의 통제와 다스림을 받지 않으면 그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게 아닙니다. 항상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으면서 성장하고 자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가 온전히 머리 되신 머리에 통제와 다스림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되는 게 뭡니까? 바로 주님께 받은 선물을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성도들에게 사역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부르심과 받은 일에 합당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은사이고, 그게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사와 선물을 나의 이익과 나를 위해서 나를 세우기 위해서 쓰는 순간 왜곡과 변질이 일어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과 은사와 역사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서, official use only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일을 잘 하고 있다는 증거는 그 일을 하면 할수록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며 내가 드러나는 게 아니라 머리 이신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 성도들이 하나되고 온전해지는 겁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에 부르심의 일에 합당하게 더 올인하게 되는 것 입니다. 개인의 삶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서 일과 마음속에 내가 정말 그걸 하고 싶다는 열망과 기대가 한 방향으로 같이 가는 것입니다. 내 태도와 내 행동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억지로 그 일을 떠맡아서 하는게 아니라 마지 못해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 섬기고 싶다…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고 부르심의 일에 합당하게 일하고 싶다…는 이 열망과 행동이 같이 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나의 안과 나의 밖이 하나가 되어 일하는 역사이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받은 은사와 재능과 능력을 나를 세우며 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몸된 교회를 위해 세우는데 잘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놀라운 역사와 기적을 우리의 교회 공동체 안에 경험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통해 선명히 맛보게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교회가 하나됨을 이루며 세상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는 주님의 몸으로 든든히 세워지는데 귀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4장 말씀은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가…라는 교리의 기초 위에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알려주는 실천, 삶의 적용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되시고 내가 예수님 자녀라는 것을 삶에 실천하며 드러나는 놀라운 신비와 기적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하나됨입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실체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됨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든 역사하심을 다 모아 가지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4절 말씀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 되게 하심, 5절 말씀은 성자 예수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심, 6절 말씀은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심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이 하나됨이 어려우면, 하나되게 하심이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임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다 반복하여 강조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가운데 모시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되고, 그리스도를 머리에 모시고 교회 지체들이 하나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시는 신비와 역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되게 하심의 증거로 몸도 하나, 성령도 한 분, 부르심에 한 소망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몸이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몸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되게 되는 기적이 뭐냐 그 비결이 성령 한 분을 의지할 때, 다가올 천국의 소망을 한 마음으로 바라볼 때, 서로 지체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교회 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체 의식이 회복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의지하며 성령 하나님에 매어 살아갈 때 한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 되게 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몸은 손가락 하나가 아프면 손가락만 아픈 게 아니라 모든 몸이 다 그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아프면 잘라 버리는 게 아니라 당연히 그 손가락을 감싸고 보호하게 되죠. 그 손가락이 나을 때까지 같이 기다려주고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서로 지체로 연결되어 있으면 한 몸이 기뻐하고 한 몸이 아파하며, 서로를 도와주고 품어주고 하나 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사람들과 다른 것을 찾는 것에 익숙하고 다른 것을 부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게 되면 하나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모두를 하나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장에 바벨탑 사건은 인간의 교만이 하늘 끝까지 올라가 우리가 하늘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모든 시도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는 언어가 하나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교만을 무너뜨리시고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늘까지 닿으려는 이 교만을 꺾으시고 흩어지게 된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오순절 역사에 일어났던 방언의 역사가 이 흩어진 언어들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가 되는 기적입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으로 생전 배워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모국어를 막 하면서 소통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 성령의 놀라운 방언의 역사였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만으로 점철된 바벨탑 사건을 완전히 뒤집는 사건이 되는 것이죠. 말과 마음이 통하지 않아 온 지면에 흩어졌던 바벨탑 사건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시는 역사 가운데 놀랍게 회복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의 증거는 바로 성령님이 하나가 되게 하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몸된 교회가 하나 된다는 것은 이렇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문자적으로 다른 랭귀지를 사용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사람마다 생각과 가치관으로 형성된 다 다른 모국어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이 안 통하고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령 하나님의 그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가 되어 마음이 열리고 말이 통하며 마음이 접촉되는 역사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소통의 역사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며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머리로 고백하는 게 아니라 내 삶의 고백과 실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나아가는 한 소망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다가올 천국과 본향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한 소망, 죽어가는 영혼들을 천국 백성 만드는 그 한 소망 안에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소망을 붙들 때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로 그분을 믿는 한 믿음 아래 성도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늘 깨닫는 게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나는 것이 세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우리가 하나 되었음을 한 소망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성만찬도 예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됨을 깨달으며 한 떡을 떼며 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우리에게 주시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주셔서 하나 되게 하신 것처럼 한 떡을 떼고 한 잔을 마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사랑 안에 하나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도 성만찬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그 하나됨을 늘 새롭게 확인하며 그 하나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삶으로 실천하며 적용하며 살아간다는 건 온 세계까지 갈 필요 없고요…우선은 우리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 아래서 하나 되고 분열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를 한 몸으로 통일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시고 왕으로 모시고 남편과 아내가 하나님 안에 엎드려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경험하며, 가정에서 하나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이며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를 머리와 왕으로 모시는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성령의 역사로 한 몸인 교회에 속한 우리가 한 천국 소망을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삶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만으로 우리 힘과 능으로 하나되자고 구호로 외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녹여 주시고 역사하시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 하나됨이 일어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 되게 하신 은혜를 지키는 것이 성도의 사명임을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하나됨이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이탈될 때 우리는 비참해지고 나다움을 잃어버리며 결국 죄 가운데 헤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주신 하나됨을 누리며 지키는 자가 되십시오. 성령 하나님의 하나 되게 하심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하나되게 하심을 사모하십시오. 나에게 이 시간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에게 역사하시는 놀라운 증거되기를 사모하며 남편과 아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그 신비를 누리십시오. 바라기는 나의 일상의 삶에서 가정과 교회, 나의 마음속에서 성령 안에서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날마다 누리며 성령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놀라운 은혜를 지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말씀은 교리, 특별히 교회론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내가 교회됨의 본질을 붙들며 무엇을 어떻게 믿을까에 대한 교리에 대한 말씀이 끝나고 4장부터는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는 대부분 이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앞부분은 누구를/무엇을 믿을까 하는 교리 부분이고 뒷부분은 실천과 적용에 대한 부분이죠. 로마서도 교리부분 나의 믿음에 대해서 11장까지 기초로 증언하고, 뒷부분 12장부터 그 믿음으로 변화 된 성도들이 어떻게 살고 그 믿음을 적용하며 살아갈까를 증언합니다. 순서가 언제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가 첫 번째가 아니라 누구를 무엇을 믿어야 될까…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보이는 쪽으로 실천 전에 그 실천을 붙드는 믿음이 먼저라는 것이죠. 그래서 성도는 본질적으로 내가 어디에 기초를 두고 누구를 믿고 살아가는가를 먼저 생각하고 먼저 고민하고 그 기초에 의해서 내가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순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오늘 말씀은 성도로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권면합니다. 성도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뭡니까?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차별성입니다. 이 세상에 껍데기에 매몰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갇히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 바로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입니다.
이 충격적인 말씀의 핵심은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권면한다는 것이죠. 그 권면은 바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옥 안에 갇힌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더 기쁘고 더 평안한 겁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더 중보 기도를 많이 하고 제대로 살라고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복음의 삶은 사도 바울의 분명한 정체성,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내 갇혀 있는 상황이 나의 삶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나는 어쩌다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나는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왔으며 그 보냄을 받은 왕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명을 받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 그게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 다운 삶입니다. 나는 왕의 사람으로 왕의 명을 받아 이 세상에 온 자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는 삶, 그분이 부르시면 언제나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 그게 바로 성도의 정체성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 세상에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 성도로서 죄악에서 사망에서 건짐을 받은 자, 허물과 죄로 죽 우리를 구원해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입니다. 이 부르심을 분명히 붙들고 사는 삶이 결국 이 세상에서 내가 바로 그 부르신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왕의 사람이니까 그분의 명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으로 나의 부르심이 있고 내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정체성을 잊지 말고 나의 하루하루의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자로 보냄 받은 일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그것에 맞게 살아가는 겁니다. 왕의 사람으로 보냄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늘 조율되고 늘 하나님 앞에 붙어 있어야 되는 기준입니다. 사람들이 뭐라 그러던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은 왕의 사람들입니다. 보냄을 받아 왕의 일을 하기 위해 저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가장 최우선 순위가 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 내가 성도로써 이 정체성을 가지고 주님의 부르신 일을 합당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갖춰야 될 자격 조건이 무엇인가? 그게 2절에 등장하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 가운데 용납함” 입니다. 하나님의 명을 받아 일할 때 이 네 가지를 마음속에 붙들고 열매로서 우리 삶에 향기로 드러날 수 있게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모든 겸손…. 겸손으로 알기 위해선 겸손의 반대말을 알면 쉽습니다.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인데, 교만은 나를 절대화하며 내 자아를 부풀리며 자꾸 위로 올리려는 모든 시도가 교만입니다. 그러면 겸손은 뭐겠습니까? 나를 끊임없이 객관화시키며 나를 끊임없이 상대화 시키며 나를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선 존재로 깨닫는 것, 이것이 겸손입니다 그래서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풀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상대화하고 객관화하며 나를 자랑하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 자가 겸손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견지하며 나는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 아니면 진노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가망성 없는 존재임을 끊임없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겸손한 것이 성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를 두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늘 상대화하고 객관화하며 주님 은혜 가운데 낮아지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 바로 겸손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 겸손함이 있을 때 우리는 부르심에 맞는 일을 합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온유…온유라는 것은 성격이 부들부들한 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유는 영어로 얘기하면 controlled power, 힘이 있는데 통제되고 절제된 힘을 갖는게 온유입니다. 자기를 잘 통제하며 그 힘이 낭비되지 않으며 꼭 적재적소에 필요한 곳에 사용 되는게 바로 온유, 힘을 주님이 원하시는데 집중해서 쏟아 부을 수 있는 자들이 온유한 자입니다. 반대로 자기 통제를 잃어버려서 모든 에너지와 힘을 낭비하게 되는 삼손 같은 자가 대표적으로 온유하지 않은 자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데 내 힘과 에너지를 다 낭비하는 삶이 온유하지 않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부르심이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 힘과 능력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말씀 가운데 통제되고 절제되는 온유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래 참음….성경에서 인내란 단어와 오래 참음이란 말이 나오는데 비슷한 의미이지만 특별히 오래 참음이라고 말할 때는 사람들에 대해 인내할 때 오래 참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대인관계에서 사람들에게서 오래 참는 겁니다. 자기 분을 내지 않고 부딪치지 않는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구체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이해하며 참아주는 게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이고, 그렇게 오래 참았을 때 우리는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용납….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는 것입니다. 나와 의견이 다를지라도 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를 수용해 주는 것이 바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고 오래 참고 용납하는 삶, 이 모든 것들은 내 안에 맺어지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 되신 것을 믿고 힘써 지킬 때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온전히 매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온전히 메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게 되며 우리 삶에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용납의 열매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를 두고 살아가는 자인 성도로서 보냄을 받은 자로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한 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기적의 삶,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성하게 드러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러기 위해 늘 평안에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서로 다른 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 비슷한 점 공통된 점을 찾아 하나됨으로 주님 은혜 가운데 놀랍게 쓰임 받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한 두 번째 기도인데, 그 기도 가운데 맥과 같이 흐르는 두 단어, 풍성함과 충만함에 주목하기 원합니다. 충만함과 풍성함이라는 것은 넘치고 넘쳐서 아무리 빼다 써도 거기에 메마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전 한국에 약수터 같은데 가보시면 알겠지만 아무리 물을 거기서 많이 떠다 먹어도 밑에서부터 흐르는 샘 때문에 그 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약수 물과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중보기도는 마르지 않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속사람의 강건함을 위한 기도이자, 마음에 담겨 있는 가장 큰 그림이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그 마음은 거의 메말라 피폐해 지는게 당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수감 중에도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고 있기에 감옥 안에서 더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중보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메마르고 쪼그라들어서 풍성함과 충만함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내 것에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큰일 나는 줄 알고 내가 조금만 흔들려도 내 인생이 무너지는 줄 알고 벌벌 떠는, 모두 풍성함과 충만함을 잃어버린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거 조금 손해본다고, 내가 조금 흔들린다고 없어질 것 같이 큰일나는 자들, 우리 존재가 없어지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함과 풍성함이 날마다 더해지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힘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기에 넘치도록 주시는 풍성함과 충만함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돼도 사랑의 크기를, 그 풍성함과 충만함의 크기를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도 측정하기 어려운데, 하나님의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어떤 기술로도 잴 수도, 측량할 수도 없는 그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충만하심을 내가 정말 누리고 붙들며 살아간다면 그 인생이야 말로 진정한 꽉 찬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길이도 높이도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 충만함과 풍성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내 마음에 충만하게 임하고 담기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충만해져야 내가 풍성해야 내 주변 사람들에게 흘려 보내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찔끔찔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찔끔찔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인생이 아니라 날마다 충만하고 풍성한 은혜가 내 마음에 담기며 그 충만함과 풍성함을 붙들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우리가 살아갈 때, 주변 성도들을 위해 해 줘야 할 간절한 중보기도 제목이 이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충만함이 나에게 충만함으로 나에게 풍성함으로 누려지게 도와 주시옵소서.내 인생이, 내 주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풍성하심과 충만하심으로 꽉 찬 성도가 되기를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풍성함과 충만함을 누리기 위한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는데 그 기도 제목은 다 어디를 향한 기도냐 하면 속사람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육신, 겉 사람의 강건함과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게 참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속사람의 능력으로 강건함이 있어야 우리가 충만함과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나의 속사람이 내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건해지시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나의 내면의 속사람이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기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풍성함과 충만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두번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를 중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충만하고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선 항상 내 마음에 예수님이 계심을 현재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모여서 함께 기도할 때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뭐냐면 나에게 함께 하시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이 시간 우리 가운데 계심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사랑 가운데서 기초이신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분에게 계속 내 인생이 뿌리박을 때 바로 그분의 풍성함과 충만하게 하심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계시고 내 인생이 그리스도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될 때 우리는 말씀과 기도가 내 인생의 앞서 나아가는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 전투를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군대를 앞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앞세워 제사장이 제일 먼저 앞으로 나가 여리고 성을 계속 도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을 돈다는 것은 성 밖에 있으니까 그 성 안에서 사람들을 쏴 죽일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고 그 군대가 봤을 때는 무모하고 의미 없는 일 같이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아무 말 하지 않고 성 주위를 계속 돌라고 하셨는가? 그곳을 매일 돌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그들의 앞서 그들의 길을 내시는 것을 믿음으로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싸우는 게 아니라 그들 앞서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길을 내시고 하나님이 대신 싸우는 충만하고 풍성한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충만하시고 풍성한 하나님의 능력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위해 중보기도 하고, 말의 권세로 그것을 말해주는 공동체가 돼야 됩니다. 만날 때마다 서로를 향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충만하고 풍성하심으로 채워질 줄 믿습니다…주님의 충만하심의 연결되어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이렇게 서로 위로하고 축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공동체, 이것이 우리가 세워 가야 될 주님의 몸 된 교회이자 신앙 공동체임을 믿습니다.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가는 이 때에 우리가 주님 앞에 말씀과 기도로 나의 인생을 앞서 가시는 주님께서 일하심을 현재형으로 경험하며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사도 바울의 기도를 우리에게 말씀으로 주심을 통하여 우리가 성도로서 허락하신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데 내 마음도 삶도 주님이 주시는 충만함과 풍성함이 내 삶에 맛보아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기도하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 하나도 건사하지 못하는 메마르고 쪼그라 드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풍성하심과 충만하심이 나에게 임하기를, 내 삶에 흘러 넘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감옥에서 분명한 사명감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기에 중보기도가 정말 필요한 사람은 감옥 안에 있는 바울 같은데,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중보 기도 하며 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누가 누구를 위로해야 합니까? 당연히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이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성도들을 위로합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낙심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성도들에게 낙심하지 말라는 거죠.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힌 것은 낙심 거리가 아니라 걱정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도 너희에게도 영광이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비와 비밀의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 사도 바울이 놀랍게 변했으며 그에게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신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 안에 분명히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놀랍고 신비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 내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 사울은 그 어떤 사람보다 큰 사람이었고 그 어떤 사람들보다 다른 사람들을 하찮게 보며 정죄하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자였습니다. 이방인들은 사람으로도 여기지도 않았고 구원의 가능성은 0%라고 생각했던 자가 바로 과거 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바울은 자기가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가 되는 은혜를 경험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송두리째 뒤집어진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진 비밀의 경륜이 그리스도의 풍성함으로 드러났고 사도 바울은 유대인이라는 바운더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 이 놀라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놀라운 내적인 변화,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나를 바라보는 눈이 변한 겁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복음이 유대인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비밀과 사랑의 수혜자가 되는 것을 이 세상에 전하는 사명자가 되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구약 시대에 동안 여호와의 구원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었고 언약도 이스라엘 안에만 있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놀랍게도 모든 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모든 복음과 구원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모든 민족에게나 이 구원의 선물이 흘러가게 된 것이고, 이 놀라운 신비와 경륜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 땅에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사명을 위해 세워지는 곳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새로 탄생하며 새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 구원 받는 자가 날마다 더하는 역사를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라는 걸 사도 바울은 깨달았고 그것을 위해 그는 목숨을 거는 자가 된 것입니다 교회 안에 예전에는 어떤 지역 출신의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이북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사람들만 모이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특정한 학교를 중심으로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어떤 특정한 부를 가지고 어느 수준이 돼야 모일 수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복음의 놀라운 가능성을 계속 막는 것입니다. 소통이 단절된다는 건 뭡니까? 귀담아듣지 않는 거예요. 마음으로 듣지 않으면 소통의 단절이 일어납니다. 벽과 담이 차곡 차곡 쌓이게 됩니다. 남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그 이야기를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마음이 있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내 얘기가 벽에 부딪치지 않고 들리는 곳이 되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비결입니다. 담을 쌓고 나누고 차별하고 서로 공격하고 싸우는 죄의 파괴적 힘이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다 무너져 어떤 것으로도 막히지 않고 나누어지지 않는 곳이 우리 교회가 되고 우리 가정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사모하기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획하고 예정된 게 뭡니까? 교회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모든 담들이 녹아지고 허물어지는 역사입니다. 이스라엘에만 갇혀 있던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열리면서 교회가 탄생했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담을 끊임없이 허물어뜨리는 것입니다. 복음을 가두려는 모든 시도를 믿음으로 무너뜨릴 때 우리는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며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복음이 모든 열방이 구원을 얻을 때까지 그리스도의 푸르른 계절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흘려 보내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회 안에서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가? 유대인도 이방인도 차별 없이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력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 그러면 계속해서 우리는 막힌 담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허물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막힌 담이 그리스도 이름으로 허물어져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들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관계를 깨며 원수가 되고 담을 쌓고 살아가는 게 죄의 속성입니다. 죄는 단절과 분열을 늘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데, 그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으로 온전히 오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 담이 무너지며, 부모와 자녀 사이에 담이 무너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미국 안에서 이민교회로, 한국 사람들이 한국어를 편하게 쓰는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우리 마음은 늘 선교적으로 이 세상을 향하여 열려 있는 교회가 되어 함께 상속 되고 함께 지체가 되며 함께 약속에 참여하게 되도록 부르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계속 막힌 담을 허물면서 우리 교회는 부자들도 있고 어려운 사람들도 있고 가방 끈이 긴 사람도 있고 짧은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들도 있고 저런 사람들도 있고 그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담대하게 나아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 바로 선교적 교회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사람도 이방인이 되지 않고 외인이 되지 않고 그리스도 이름 아래 녹아 믿음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나눠지지 않고,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나눠지지 않고,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눠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이며 한 형제자매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역사임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선명하게 고백하며 살아내는 귀하고 복된 교회를 세우고 지키고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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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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