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로서 새벽마다 은혜 주셨던 사무엘상하의 긴 여정을 끝맺는 마지막 말씀입니다. 다윗 왕이 인구조사를 한 거 자체가 문제 있는게 아니라 그 인구조사를 하는 동기와 의도가 잘못됐고 하나님께 악한 일이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쓰신 글을 보니까 인생에는 드러나는 삶과 드러내는 삶이 있다는 겁니다. 드러나는 삶은 자연스럽게 그냥 향기와 같이 축복이 되는데, 자꾸 내 스스로 드러내는 삶을 내려고 하면 인생이 자꾸 추해진다는 것입니다. 내 믿음과 신앙도, 내가 받은 축복과 열매도, 조용히 은은하게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되는데 이것을 자꾸 드러내려고 그러고 내세우려 그러면 부작용이 생기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인구를 조사하면서 군대 숫자를 세는 것이 목적임이 드러났으며, 결국 그것이 그에게 자랑거리가 됐고 과시하게 됐고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군대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인생이었던 다윗이 주님이 없이 사는게 아니라 돈이 없이는 못살고, 군사력 없이는 못살고, 사람들 지지 세력 없이는 못 사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구조사로 인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나 혼자 열심히 잘하면 혼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었고 패망이었고 망하는 지름길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왔지만 그 죄의 결과를 직면하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왕으로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 자리인지를 그대로 보여주면서, 다윗의 잘못된 선택으로 백성들이 처절한 대가를 받게 됩니다.
죄의 결과를 치를 세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얘기합니다. 7년 기근, 세달을 쫓겨 도망다니는 삶, 삼일간의 전염병이었습니다. 여기서 앞에 두 가지는 다윗왕이 이미 삶 속에 경험했던 것입니다. 온 나라가 3년 동안 기근으로 큰 고생을 하고 끔찍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아들 압살롬이 반역해서 피난 가고 쫓겨가는 그 고생을 하게 되었죠. 이것을 통하여 알려주시는 중요한 영적 진리가 뭐냐면 다윗왕이 과거의 경험했던 기근의 어려움도, 피난 가는 어려움도 모두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관련된 영적 문제였다는 것을 정확하게 다시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선택한게 사람의 손에 당하는 어려움 대신, 하나님의 손에 당하는 어려움인 전염병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나서 3일 동안 전염병이 돌아서7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7만명 사망이 얼마나 끔찍한 상황인지 피부에 와닿지 않으실 텐데요. 지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1년 이상 전쟁을 하고 있는데 두 나라의 사망자 모두를 합친 숫자가 7만명 조금 안됩니다. 그러니까 1년 동안 두 나라가 지금 전쟁하면서 죽은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3일 동안 죽었으니까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겁니다. 여기서 이해가 되지 않고 또 갈등과 고민이 되는 것은 왜 다윗왕의 잘못된 선택으로 온 백성이 그렇게 고통당하는가… 그게 바로 지도자라는 자리에 무거운 책임입니다. 1년 동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수많은 군인들이 그렇게 죽는 이유도 결국은 따지고 보면 푸틴이라는 지도자의 잘못된 선택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백성들을 구렁텅이에 빠뜨릴 수도 있고 백성들을 살릴 수도 있는 할 수 막중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끔찍한 전염병으로 수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다윗이 했던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려 살려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겁니다. 자기를 살려달라고 기도한게 아니라 나를 죽여서라도 백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한 것이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엎드리오니 나를 죽여서라도 저 백성들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여 죽어갈 때 동일하게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모세는 본인이 지은 죄 때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 백성들을 살려주지 않으면 생명책에서 자기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잘못하고 무너졌을 때 즉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실패가 많았고 실수가 많았고 죄짓고 자빠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 현장에서 즉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알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매달릴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중보 기도가 더 깊어지는 건 뭐냐면 나만을 위해 내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넘어서는 기도를 하는 자입니다. 나를 넘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나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 내가 죽어서라도 다른 사람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는 놀라운 중보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쳐서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중보기도가 결국 백성을 살리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간절한 중보기도와 함께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을 담은 간절한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를 드리는 곳이 어디냐면 여부스 사람의 타작마당인데, 이 곳이 예전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 산이었습니다. 그곳에 여호와를 위해서 쌓고 예배를 드릴 때 의도적으로 대가를 지불하면서 모든 걸 다 값을 주고 삽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공짜로 대가 없이 드리는 게 아님을 몸소 실천합니다. 그리고 나서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심으로 끔찍한 전염병 재앙이 멈추었다는 것으로 말씀이 결론 맺어집니다. 재앙이 끝나게 되는 결정권이 어디 있었냐면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기도를 들으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결국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에 그 재앙이 끝이 끝났다는 것으로 사무엘하가 결론맺게 됩니다. 이걸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영적 진리가 뭐냐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하나님의 들어주심을 철저히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 다윗의 살 길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의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 저와 여러분들이 살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철저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결정하는 건 내가 아니고, 눈에 보이는 세상 사람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풀어가시는 분도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심을 철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게 되어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서 사람들을 붙들고 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망각하지 않고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결론입니다. 나의 인생은 내가 좌지 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좌지우지하시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의 말에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인생이 좌지우지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내 인생의 문제는 내가 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풀어가십니다. 이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유일한 살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천국으로 나를 데려가심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의 마지막 장입니다. 23장까지 보면 다윗은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정리해서 내가 무엇을 이루고 내가 무엇을 세우고 내가 무언가를 성공한 이야기가 아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구원한 이야기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호한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고백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자기 인생을 해석하고 은혜로 마무리했습니다. 또 이렇게 나의 왕으로서의 섬긴 시간은 내가 잘나서 올라간 자리고 아니고 내가 이룬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높이 세워 주신 자리이며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고 구별되게 맡기신 자리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으로 고백하며 끝납니다. 이렇게 23장으로 딱 마무리되면 좋을 거 같은데 왜 굳이 24장 말씀을 마지막에 둠으로써 이 말씀을 통하여 아름다운 결말을 맺지 못하게 만드는가라는 고민이 들기도 합니다. 마지막은 좀 아름다운 결말로 끝났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는데24장은 아름다운 결말이라기보다는 참 끔찍하고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결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윗왕이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나라 공동체가 큰 고통과 아픔을 경험한 이야기가 사무엘하 마지막인 24 장의 이야기입니다. 인생의 말년에 다윗이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하게 된다는 것으로 결론 맺어지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의 결말을 바라보며 다윗왕이 인구 조사한 것이 이렇게 큰 문제인가, 그렇게 잘못된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 마음에 이해되지 않는 고민과 질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것에 하나님이 그렇게 노를 발하실 정도의 큰 죄인가….사실 인구조사 자체를 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인구조사 자체가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이 결코 금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질적 문제는 인구 조사를 했다라는 것에 있는게 아니라, 그 인구조사를 한 목적과 동기와 의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구조사라는 자체 문제라기보다는 그의 마지막 말년에 인구조사를 하게 되는 동기와 의도와 목적이 하나니미 앞에 불순했다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의 노를 발하게 하는 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1절 말씀 보게 되면 다윗왕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사단이 눈을 가리게 만들어 인구 조사를 악한 의도와 동기로 추진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면서 일이 일어났다라는 것, 즉 영적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인구조사를 하는 목적과 동기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나를 세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구원하신 그의 고백과 전혀 맞지 않는 나쁜 의도, 즉 자기 공로와 교만, 자기세를 과시하고 의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그 군대 장관이자 신하인 요압은 간파했어요. 다윗왕의 인구 조사 계획을 막으며 이건 잘못된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며 탄원합니다. 그런데 사단의 미혹에 빠진 다윗왕은 그의 눈이 철저히 가려져서 그 인구 조사 계획을 밀어부칩니다. 오히려 요압의 조언을 철저히 무시하고 빨리 진행하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이게 바로 지금 다윗의 잘못된 동기와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죠. 이때 요압의 말을 들었으면 그가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이스라엘 공동체가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신하들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9개월 넘게 인구조사를 하게 되면서 그가 가져온 데이터가 무엇이었는가를 통해 다윗왕의 의도와 동기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결론으로 가져온 인구조사 데이터가 뭐였냐면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80만명이고 유다 사람 군대가 50만명이었다는 것입니다. 남자가 몇 명, 여자가 몇 명, 아이가 몇명을 조사한 게 아니라 결정적으로 무엇을 알기 위한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군인수, 군대 수가 얼마인지를 파악하는게 인구조사의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 안에 백성이 얼마 있는지를 인구조사한게 아니라 사실 인구조사를 빙자하여 군대 조사를 한 것입니다. 군인들 숫자와 군사력을 센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군사가 얼마나 많은지, 내가 얼마나 막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지 세면서, 이 나라의 군대가 이만큼이야…. 이 정도 군대가 있어…자기 교만에 빠져 군사력을 과시하는 거죠. 더 큰 문제는 그렇게 드러내고 과시하는 것을 넘어 다윗왕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군사력을 의존하고 의지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악한 일로 바라보신 이유이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였고, 다윗왕이 싸운 전쟁들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셔야만 이기는 싸움들이었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이길 수 있는 전쟁들이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바라보며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살았던 자가 다윗이데 그의 말년에 한 순간에 이렇게 무너지는 겁니다. 이 나라 군대가 이 만큼이고 이 정도 군대가 있으니까 우리는 안전할 거야….그 눈에 보이는 군사력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군사력이, 군대 숫자가 결국 내 말년에 내가 이룬 자기 자랑과 자기 교만이 되고 그것을 과시하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구조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인구 조사를 통해 모여진 데이터 뒤에 숨겨진 악한 의도와 동기…다윗의 자기 교만과 자만,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력을 과시하고 자랑하며, 의지하려는 그것이 악한 거라는 것이죠.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하나님이 싸워 주셔서 이긴걸 그렇게 많이 경험하고도 인생 말년에 군사력을 드러내고 군대 숫자를 드러내고 자랑하며 걸림돌이 되듯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숫자를 참 많이 셉니다. 그 숫자는 겉보기에는 객관적인 정보이기도 하지만 그걸 통하여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는가를 그대로 드러내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돈이 얼마인가를 세면서, 통장 잔고를 보면서 그저 돈을 객관적으로 세는 것 같이 보이나, 그걸 통해 돈을 점점 의지하고 돈을 자랑하고, 돈의 액수에 따라 내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의지하는 모습이 활성화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성도 수를 세는게 하나도 잘못된 게 아닙니다. 교회에서 당연히 주일날 얼마나 왔는지 누가 안 왔는지 세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성도 숫자를 세는 건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세느냐에 따라 그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악한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머릿수를 세면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큰지 교세를 자랑하면서 교인 숫자인 세력화가 되는 거죠. 교인 수와 헌금 액수가 자랑거리가 되고 결국 교회가 더 의지하는 게 되버리는 겁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되는데 자꾸 숫자를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해야 하는데 자꾸 숫자를 더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교세를 의지하고 건물 크기를 의지하고 돈을 의지하기 위해 숫자를 세고 있다면 하나님께 등 돌리는 것이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큰 시험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구 조사 뒤에 숨겨진 악한 의도와 동기가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숫자를 세는데 그게 인구 조사가 되었던, 교인 숫자가 되었던, 돈이 되었던간에 하나님을 더 바라보고 의지하기 위해 세는 거라면 문제가 없는데, 그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방해가 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붙들게 만들면 결국 이게 결국 하나님께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세를 과시하고, 돈이 모여 있는 힘을 자랑하고, 건불의 크기를 자랑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언제든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력을 의지하고,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사람 수에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돈과 건물을 의지하며 영적으로 무너지는 것, 그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겁니다. 반석인 베드로가 걸림돌 되는 거 한 순간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놀랍게 고백한 다윗 왕이 걸림돌이 되듯 이렇게 자빠지고 무너지는게 한 순간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방에 무너지는 실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은 나의 일상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동기와 목적을 잘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주님의 몸으로서 역할을 잘 감당한다는 것은이 다윗이 범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숫자를 세며, 무언가를 세고 모으면서 하는 모든 행위들의 동기와 목적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삶에서 이렇게 한순간에 떨어질 수 있음을 잊지 않으며 매일 아침마다 조율하며 아침마다 늘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영과 새로운 은혜를 공급받으며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늘 주님과 연결되어 바른 의도와 동기로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숫자 세다가 숫자를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멀어지지 마십시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붙들고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너지고 걸림돌과 같이 떨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잊지 않으며 이 시간 나의 동기와 목적이 주님 앞에 합하며, 주님 앞에서의 삶을 경주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23장에서 다윗은 인생의 마지막 말을 남기며 인생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 인생을 돌아보며 왕으로서의 자기의 삶을 돌아봤을 때 왕이라는 높은 자리까지 이끌고 나에게 큰 복을 주시며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하나님이 높이 세워주신 그 맡겨진 자리에서 내가 겸손히 최선을 다하며 충성하는 삶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 이후 오늘 23장 뒷 부분 말씀은 다윗과 함께 싸운 용사들, 목숨 걸고 함께 했던 다윗의 장수들 이름, 즉 동역자들의 이름을 기록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다 통합하며 별과 같이 빛나는 나라를 이끌 수 있었는 비결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인도하심,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결과였습니다. 동시에 이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통해 증언하는 것은 다윗과 함께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인생을 바쳤던 신하들과 충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나라가 든든히 세워졌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왕 밑에 이렇게 목숨 걸고 일하고 함께한 충신들, 동역자들이 있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일일이 이 충성스러운 장수들과 신하들의 이름을 기록하며 남김으로, 그들의 목숨 건 헌신과 함께함을 통하여 이렇게 다윗이 왕으로서 놀라운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그들의 노력을 치하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얼마나 다윗에게 충성했었는가의 예가 말씀 앞부분에 등장합니다. 다윗이 도망자로 유랑할 때 목이 너무 말라서 내가 물을 어떻게 하면 먹을 수 있을까 그랬더니 다윗이 먹으려는 그 물을 위해 목숨 걸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해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 올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다윗에게 충성하고 다윗에게 목숨을 건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겁니다.목숨 걸고 가지고 온 물을 보면서 다윗은 감격하며 차마 이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임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져온 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이 목숨을 걸고 가져온 그들의 피, 혈수라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세금을 혈세라고 하지 않습니까? 백성의 피로 만들어진 세금…그래서 세금을 마치 자기 돈인냥 마음대로 펑펑 쓰는 위정자들을 향하여 국민들이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다윗왕에게는 정반대의 마음이 있었는데, 자기와 함께하는 그 충신들과 부하들의 노력과 땀, 인생을 거는 모든 것들이 핏값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다윗왕이 수많은 전쟁에서의 승리하고 영토가 확장되는 열매에 있어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 이기게 해주신 기적인 선물임에 동시에 함께 싸워주고 목숨 건 이런 충성스런 장수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공로를 그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왕은 동역자를 기억하고 함께 세워주는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굵직하게 쓰임받았던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쓰면 늘 마지막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나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도 않은 이름들을 편지 말미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쓰는 이유가 뭐냐 하면 복음의 열매들은 나 혼자 이룬게 아니라, 이렇게 예수님이 붙여 주신 동역자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을 통하여 함께 이루어 간 것임을 기억하고 공로를 그들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라는 그 유명하고 위대한 사도, 선명하게 쓰임받은 한 사람 뒤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동역자들이 함께 사도바울을 목숨 걸고 도우며 헌신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잘나서 내 혼자 이룬 성과와 열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수많은 동역자들과 함께 이룬 열매라는 것을 기억하며 그들을 기억하는게 사도 바울의 서신 결론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여러 충신들과 장수들 이름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사람이 헷 사람 우리야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우리야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 순서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야는 다윗에게 충신이었고 다윗에게 인생 걸고 목숨을 바쳤던 장수이자 부하였습니다. 그 충신의 아내를 간음 했고, 그것도 모자라 다윗은 우리야를 간접 살인을 해서 그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적군의 손에 죽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다윗이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왕은 그 모든 부끄러운 죄악들을 망각하지 않고 늘 은혜에 빚진자로 살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갔기에 다윗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능하면 전쟁터 최전선에 싸우러 나가려고 그렇게 발버둥 치며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야의 아내 바세바와의 간음이 다윗이 나가야 하는 전쟁에 나가지 않고 왕궁에서 늦잠자고 늦은 오후에 일어나 성문을 거리고 왕궁을 거닐다가 일어나게 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인생을 마무리하고 왕의 삶을 뒤돌아보면서 그 햇살한 우리아를 가장 마지막에 이름을 넣으며 기억하는 것은 끝까지 하나님과 우리야에게 잘못했던 죄를 망각하지 않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다윗의 간증이기도 하다고 믿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동시에 나와 함께한 동역자들, 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동역함으로 많은 열매을 맺어 왔음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왕과 마찬가지로 내 삶에 주신 성공과 열매들도 주변에 동역자들의 헌신이 목숨 건 헌신이자 피를 갈아 넣은 충성의 결과로 함께 한 결과임을 망각하지 말고, 모든 승리와 열매에 이 동역자들의 헌신이 있었음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또한 이 세상을 사노라면 세상에 밀려나지 않고 밀어내야 되는데 밀려나며 힘겨워 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질 때가 있으며 죄에 젖어들며 죄 가운데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 회개하며 돌아와야만 삽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늘 은혜에 빚진자로 산다는 것은 그때 내가 지은 죄를 잊지 않고 망각하지 않으며 그 주신 은혜를 현재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한번 실수했고 넘어졌지만 그것을 반복하지 않는 인생 그 죄악을 잊지 않는 인생, 주님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회개하는 마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 믿음의 반응이 다윗왕을 변화시켰듯이 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하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에서 다윗왕의 마지막 말이라고 제목이 되어 있는 말씀을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다윗의 인생을 정리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봤을 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고, 자기보다 높은 지위가 없고,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기 능력과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높이 세워진자,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자로 고백합니다. 내가 높아진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높게 세워 주신 것 뿐, 나에게 높아진 원인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 높은 자리에 내가 능력이 있어 올라가게 되었다며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고백입니다만 다윗은 인생을 마무리하며 그 높은 자리에 내가 올라간 것이 아니라 나를 높여 주신 분이 있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왕의 자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거룩하고 구별된 자리임을 알았습니다. 그 왕의 자리가 나에게 내가 획득하거나 노력의 산물과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맡겨 주신 자리라는 것을 아는 순간 다윗은 늘 겸손하고 늘 하나님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직책을 하나님의 뜻에 맞춰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자리는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왕의 직책을 수행해야 하며 늘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살아남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는 자리였다라는 것을 그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높아지려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인생이 있다라는 것을 깨닫고 우리가 바르게 선택하는 것이죠. 그 선택에 따라 내 인생이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되기도 하고 나 중심으로 정리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짧은 인생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될 것이 있는데 나의 인생이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룬 여러 업적들과 성취들이 있으며, 내 피나는 노력으로 가게 된 자리와 지위가 있습니다. 그 자리와 지취가 내 노력과 열심의 결과물이라고만 착각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지혜이며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물론 그 자리에 올라가기 까지 피나는 노력이 있었고 나의 눈물이 있었고 헌신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된 절대적 결정요소는 하나님이 나를 높여 세워 주신 결과라는 것을 철저하게 붙드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인생은 내가 높아지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하고 내가 사다리로 올라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여 주실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며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 세워주신 자리임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맡겨주신 자리임을 분명히 알아야, 그 자리에서 교만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빨리 떨어지지 않고, 자리에 연연하지 않게 됩니다.하나님이 맡겨 주신 자리라는 것을 알고 잠시 있다 떠날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충성을 다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내가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 거룩하고 구별되게 세우시니 자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은혜 중심으로 살아가고 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두번 째,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되는 인생은 하나님 말씀이 나의 혀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말하는 대부분은 나에 대한 것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것들입니다. 내 입술을 통하여 늘 나에 대해서 얘기하거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인생을 돌아보면서 자기 인생을 정리할 때 여호와의 하나님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말씀이 내 혀에 있을 때 복되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말에는 창조적인 힘도 있고 파괴적인 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살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나를 죽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말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파괴적인 능력 대신 나를 살리는 창조적인 능력으로 말이 사용되려면 내 혀에 하나님의 말씀이 머무를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나의 입술에 주로 나에 대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만 가득하다면 그 입술은 파괴적인 입술로 갈 확률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죠. 내 인생에 진정한 복은 바로 내 입술에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주야로 묵상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그 말씀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며 내 입에 머무는 것이 가장 큰 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단순히 글씨가 아니라 말숨, 생명의 숨결이 나에게 임하며 그 말쑴이 나에게 임마누엘 나와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으로 역사하고 내 삶에 체험될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입에 혀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고 사귈 때 나의 입에 하나님 말씀이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인, 사악한 자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난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악하다는 건 단순히 도덕적으로 나쁜 행동을 많이 했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과 연결 되기를 거절한 자, 하나님께 등 돌린 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결국 나 혼자 열심히 일하며 내 삶이 나 중심으로 정리되는 인생이 사악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 악한 삶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악한 삶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정리되지 않는 것이 악한 삶입니다. 의인이고 선한 자가 되는 비결은 내 삶이 도덕적으로 흠이 없고 탁월해서가 아니라, 내 노력과 열심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늘 하나님께 연결되어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not I but Christ…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이것을 망각하게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은 어려웠고 문제가 찾아왔고 그 나라가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것을 사무엘 상하는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의 위대한 것은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악,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 영적 큰 그림 속에서 왜 다윗 왕이 하나님께 합한 자로 살게 되었는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나의 맡겨진 자리는 내가 올라가서 이런 성취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거룩하게 맡겨주신 자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서 있는 자리는 하나님이 높이 세워 주신 자리이며 하나님이 거룩하게 기름 부으신 자리라는 것을 알고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워 주신 자리, 하나님이 맡겨주신 자리임을 잊지 않고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시선을 의지하며 겸손히 엎드려 그 맡긴 바 자리에 사명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선과 악의 기준을 선명히 붙들고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그 자체가 바로 악한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와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 영원한 언약이 나를 건지시는 이야기 나를 구원하시는 이야기 나를 복 주시는 이야기 나의 소원을 이루는 이야기로 내 삶에 펼쳐졌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과 연결되며 주님과 함께 나아갈 때 의인의 삶 그리고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 말씀이 내 입술에 머무는 것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이라는 것을 선명히 믿으십시오. 나의 입술에, 나의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머무는 것이 가장 큰 복임을 붙들고, 임마누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말씀에 창조적인 능력 그 말씀의 치유하는 능력을 현재형으로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22장 말씀은 다윗의 인생을 뒤돌아보며 정리하는 시편이자 고백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업적도 많았고 이룬 성공도 많았고 무언가 내세울 것이 많았던 굵직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구원한 이야기가 나의 인생이다라 고백합니다. 주어가 언제나 하나님이 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한 업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이야기가 나의 인생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중심으로 정리되어 나의 인생을 뒤돌아 봤을 때 나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리되는 인생은 정말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오늘 말씀에 긴 고백과 같은 시편 속에 두 단어를 주목하며 다윗의 하나님 중심으로 정리된 인생을 살기 위해 두 단어를 마음속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번째는 떠나지 않는 것이고 두 번째는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정리 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것이 바로 떠나지 않는 것이고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를 떠나지 않는 것인가 하면 바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해석되고 정리되는 것이 신앙 생활을 잘하는 것이고, 그런 삶은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는 우리의 고백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떠나지 아니하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냐 떠나지 않느냐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보게 되면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인생을 의로움, 선으로 표현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인생을 불의, 죄악으로 표현합니다. 29절을 보게되면 흑암으로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과 악, 의와 불의, 빛과 어둠은 다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떠났는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성도로서 내가 의인이 되는 것은 의로운 일을 해서 의인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을 붙들고 떠나지 않기 때문에 의인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서 있기 때문에 의인이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이고, 내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물론 결과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고 악한 짓을 한 것이 악한 자일 수 있지만 악한 자의 본질은 하나님을 떠나는 자,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에게 연결되지 않고 단절된 자가 악한 자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붙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자가 불의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의 대표로 누가 나오냐 하면 교만한 자가 나옵니다. 교만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자리에 내가 올라가며 하나님과 아닌 나를 바라보고 살아간 자가 교만한 자죠. 그런 교만한 자는 철저히 낮추신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선함도 의로움도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죠. 우리가 선과 악, 빛과 어둠, 의와 불의에 대한 분명한 차이를 알아서 내가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이 고백과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해석되게 만들고 결국 숭리하는 인생을 살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자들의 특징은 버리지 않은 겁니다. 무엇을 버리지 않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의 도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지혜가 사라지며 어둡습니까? 왜 갈길 몰라 헤매며 영적 분별력이 사라지고 영적으로 둔감해집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여호와의 도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면 필연적으로 어두워집니다. 어둡다는 것은 하나님의 빛이 없다는 의미도 있고, 영적 분별을 못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한치 앞에 인생길도 잘 모르는 영적 어두움에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생명과 같이 지키며 그것을 붙들고 절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는 붙드는 인생은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수많은 적으로 둘러싸인 이 험한 세상, 미혹과 유혹에 매일매일 넘어질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고, 보호함을 받고 승리를 경험하는 유일한 비결은 하나님 말씀을 버리지 않고 붙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버리지 않고 붙드는 인생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 하나님이 나의 힘의 능력이 되심을 실체로 경험하며 그분과 동행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십니다. 새벽기도를 통하여 고백하는게 무엇입니까? 저는 주님을 떠나지 않겠습니다…주님을 바라보고 꼭 붙들고 살아가겠습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살아가겠습니다…그 고백이 나를 선한 삶, 의로운 삶, 빛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피한다는 본질적인 결단으로 내가 악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행동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모양이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이 시간 우리는 꼭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기 원합니다…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선과 의이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진리입니다. 결코 말씀을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도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이 나에게 빛이 되며, 등불이 되며, 구원이 되며, 요새가 되며, 방패가 되며 피하는 바위가 되며 능력되는 고백이 나의 삶을 통과한 고백이 될 때 다윗과 같이 하나님 중심으로 인생이 정리되는 놀라운 은혜의 삶이 될 줄 믿습니다. 나를 건지고 구원하신 이야기, 나를 인도하고 보호하신 이야기가 나의 인생의 요약임을 고백하며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왕의 승전가라는 부제가 있는 시로 모든 어려움을 통과한 이후에 모든 상황이 정리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의 모든 승리들을 한편의 시로 요약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향하여 다윗 자신의 사랑을 제대로 고백하고 있는 사무엘하 안에 시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 이 말씀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다윗의 승전과 업적을 요약하는 시에서 주어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다윗은 이룬 것도 많고 업적이 굉장히 많습니다. 말씀의 부제는 다윗의 승전가라고 정해져 있을 정도로 다윗왕의 승리와 공과 업적을 말한다면 수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그의 인생을 요약하는데 그의 업적이나 그의 공로나 그가 이루어 놓은 것을 앞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자신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신 역사로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인생은 나 다윗이 위대해서 왕으로서 뭔가를 이루었고 뭔가를 해냈고 이런 놀라운 것들을 성취했다는 자기 기념비를 남기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왕으로 삼아 주셨고 어려움에서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신 이야기가 내 인생이다…라고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순종의 태도가 다윗왕은 실수와 넘어짐도 많이 있었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합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습니다. 우리보다 재산이 훨씬 많았고 우리보다 가진 것이 많았고 우리보다 이룬 업적이 훨씬 많았던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것을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았고 자신의 업적과 공로와 내가 이룬 것들을 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건지시고 구원하신 그 여호와 종심의 시각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수와 넘어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위대한 점이며 하나님께 끝까지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반면에 사울왕은 어땠습니까? 사울왕은 처음엔 좋았다가 성공과 승리가 반복되니까 변질되었고, 자기의 이름을 드높이려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내 공로, 내 업적, 내 이름을 강조하고 붙들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무너졌습니다. 다윗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던 아들 압살롬, 그도 또한 자기 이름으로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무언가를 이루면 자꾸 내 업적과 성공을 남기려고 기념비를 세우려고 합니다. 그런 인생을 넘어서는 이 다윗의 위대한 영적인 반응을 우리는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합한 천국 백성이 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의 인생을 하나님을 주어로 모시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한 역사라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고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역사임을 선명히 붙드는 것입니다. 인생은 결국 여호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신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하신 이야기가 내 인생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어가 돼서 내가 무엇을 이루고 성취했다는 나 중심의 기념비를 세우며 나의 이름을 높이려하는 인생을 넘어서며 다윗의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두 번째 다윗에게 배우는 중요한 영적 반응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내 인생을 통과하며 체득한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게 되면 다윗의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9가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높은 망떼 피난처 나의 구원자…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이 9가지의 고백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 강조되는 말씀의 포인트는 뭐냐면 “나의 하나님”으로서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피할 바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피할 바위가 되는 겁니다. 그냥 방패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방패이신 하나님 고백되는 겁니다. 나의 구원의 뿌리,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9가지는 단순히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시적인 표현이나 어떤 의미적인 고백만이 아니라 다윗의 삶 한복판을 통과하면 고백된 나의 하나님의 고백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의 속성이 다윗 자신의 인생을 통과하여 열매를 맺으며 고백하는 나의 하나님이 되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에 박제된 하나님 내 머리로 그저 동의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삶의 한복판에 함께하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모든 굴곡과 경험 가운데 하나님이 나를 방패로 보호하시고, 구원의 뿔로 나를 지키시며 나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나의 높은 바위가 되시고 나에게 피할 바위가 되신 이 삶의 경험을 다윗이 계속 고백의 언어로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중심의 역사를 바라보는 다윗의 놀라운 영적 반응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쉽지 않은 인생길을 살아갔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증언합니다. 사망의 물결, 음부의 한복판에서 굴곡된 인생을 살았기에, 그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구구절절 드러내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고통과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을 다윗은 경험한 거고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계기로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과 역경을 통과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고 의탁할 때 성경에서 고백한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정말 나의 반석이십니까? 하나님은 나를 건지신 분이 되는 겁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원수의 한 가운데서 나를 건지시고 나를 보호해 주시며 나의 피난처가 되시며 나를 위협 가운데 건져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살아가십니까? 다윗은 자신이 아무리 왕이어도 하나님 앞에 아무 쓸모없는 존재임을, 아무런 힘없는 겨와 같은 존재임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이 영적인 겸손이 다윗을 하나님께 합한 왕이 되게 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에 왕으로서 다윗의 고백은, 내가 강조된 인생이 아니라, 내가 이룬 무언가를 기념비처럼 세우는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서 나를 건지시고 나를 구원하신 이야기, 여호와께서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지켜 주신 이야기로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다윗왕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돌아봤을 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 찬양으로 정리되고 마무리 되는 것이 복된 인생임을 주님이 깨닫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삶 한 가운데서 이 보이지 않는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다윗의 고백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길 주님을 원하십니다. 나의 인생 한 복판을 통과하며 고백된, 성경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놀라운 경험과 고백이 있다면 신앙 생활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요약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무엇을 성취하고 남겼는가에 업적이나 승리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일하신 놀라운 사건들을 기억하는 하나님 중심의 시각으로 나의 인생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정리와 요약은 내가 무엇을 하고 이루고 성취한 성공이 강조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자녀 삼아주시고,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신 이야기가 내 인생의 이야기임을 붙드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에 정리하고 뒤돌아볼 때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 주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그 진실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 원합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나와 동행하신 역사이며,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보호하신 역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뒤돌아보고 요약하면서 이런 고백이 있을 때,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에게 합한 백성이 될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놀라운 고백이 내 삶 한복판을 통과하며, 일상생활의 모든 것 가운데 나의 하나님을 발견하며,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을 갈망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평생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블레셋의 거인들을 죽이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믿음으로 블레셋과 같은 거인들과 영적 싸움을 싸운다는 것임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끊임없이 힘들고 어렵게 만든 족속입니다. 다윗이 맨 처음에 전쟁터에 들어가게 된 것도 바로 블레셋의 골리앗과의 싸움이었고, 사울왕과 아들 요나단이 죽게 된 전쟁 또한 블레셋과의 전쟁터였습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블레셋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계속 괴롭히고 침략했으며, 겉으로봐서는 이스라엘이 절대 이길 수 없는 거인과 같은 나라였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인 블레셋과의 전쟁은 늘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거인 블레셋과의 4번의 전투를 반복적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겉으로 봐서 거인이고 용사 같은 블레셋과 4번이나 전쟁을 다윗왕과 그 군대는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겉으로 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 거인과 같은 블레셋과 4번의 전쟁을 모두 이긴 비결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과 철저한 순종입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은혜 가운데 철저히 순종하고 의지할 때, 다윗과 그 군대는 승리할 수 있었음을 강조합니다.
어떻게 블레셋과의 네 번의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는가? 첫번째 승리 비결은 내가 싸우는 대신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이 싸워 주셔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가 싸웠을 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다윗왕은 내부의 반란과 반역을 해결하고 정리하느라 온 힘을 쏟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내부 반란을 정리하고 나니까, 세바의 반역이 있었고, 그 이후에 기브온 백성들의 원한으로 말미암아 3년 내내 기근이 들어 온 백성이 큰 고생을 했습니다. 이런 여러 내부 문제들을 풀고 해결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밖에서 또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거인 블레셋 군대의 위협이 그들에게 또 찾아온 겁니다. 안에서는 분열하고 밖에서는 쳐들어오고 이런 내우외환의 어려움이 계속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우외환의 어려움이 계속되면서 다윗왕은 심신이 지쳤으며 매우 피곤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다 포기하고 내려 놓고 싶을 정도로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치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왕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시 한번 거인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나아갑니다. 뒤에서 작전 명령만 내린 게 아니라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나가 앞서 싸웠습니다. 밧세바의 그 간음사건을 계기로 아무리 나이가 들어 육신이 연약해지고 피곤해도, 왕으로서 전쟁터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왕은 겉으로 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거인과의 싸움이 블레셋 전투였기에, 내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뛰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해야 이길 수 있는 믿음의 싸움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골리앗과 싸울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거인 골리앗만 보고 벌벌 떨면서 이미 전의를 다 상실하고 압도 당했지만, 오직 다윗만은 골리앗 뒤에서 앞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전쟁을 했습니다. 노장이 된 다윗왕은 지금도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면서 이 영적 전쟁의 원리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상 가치관과의 싸움, 사단이 던져놓은 미혹과의 싸움은, 내가 나의 힘으로 싸워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거인과의 싸움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내가 싸우면 백전 백패입니다. 거인 블레셋과는 내 힘으로 내가 싸워 가지고는 절대 이길 수 없다….그래서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싸움을 개입하시고 이끄시도록,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되어야 이길 수 있음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세상을 상대할 때 늘 우리는 밀리는 싸움을 합니다. 세상의 중력과 압력에 밀려 낑낑대는 것을 습관화 하면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한 다윗과 그 군대는 네번이나 거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완승했습니다. 즉 밀리는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그들을 밀어내는 싸움을 했고,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거인보다 더 큰 하나님을 바라보고 더 큰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한복판에 모시고 싸울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승리 비결은,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돕는 손길을 옆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보시면 4번의 블레셋과의 전쟁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등장합니다. 그렇게 전쟁터에 나갔다가 다윗왕이 거의 전사 할 뻔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는데, 그 위기 가운데 부하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여서 그 위험을 벗어나게 됩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사할 수 있는 큰 위기를 만나지만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여 어려움에서 빠져나오고 살아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는 십브게가, 손가락과 발가락이 6개 있는 거인과 상대할 때는 요나단이 그 거인들을 죽이게 됩니다. 4번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각각 다른 사람들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지킬 사람들을 다윗왕에게 붙여주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붙들고 싸울 때 이렇게 믿음의 사람들을 옆에 붙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여 주시며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의 특징은 우리에게 감당한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붙여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여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이 친히 앞서 싸우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 주시고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번째 승리 비결은 순종과 믿음이 먼저임을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마치 자동문과 똑같습니다. 자동문은 그 앞에 가기 전까지는 절대 열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이 자동으로 열리면 그 순종의 자리에 가겠습니다 그러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앞에 먼저 가라는 것이죠 그러면 막힌 문이 열리는 겁니다. 즉 믿음과 순종이 먼저라는 겁니다. 우리는 길이 열리면 순종하겠습니다… 무언가가 보이면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는데 하나님은 먼저 순종하여 그 앞에까지 가라는 것이죠. 그러면 그 문이 열리는 겁니다. 이 순서가 바뀌면 절대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영적 은혜를 우리가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고, 자동문이 먼저 열리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내가 믿음과 순종으로 걸어가겠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간 비결도 홍해가 짝 갈라져 마른 땅이 생긴 다음에 그들이 걸어간 게 아니라 먼저 모세와 그 제사장들이 순종으로 바다에 다리는 내 딛는 순간 그 바다가 마른 땅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비결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순종의 믿음을 먼저 요구하셨습니다. 죽음의 바다에 배 밖으로 나와 인생을 던지는 결단입니다. 배 밖으로 인생을 던지면 죽는데 예수님만을 의지하여 자기 인생을 던졌을 때 주님께서는 그에게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 자동문이 열리기 전까지 그 앞으로 나아가는 순종의 결단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문을 여시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내시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싸워 이기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신다는 겁니다. 반복되는 거인 블레셋과의 영적 싸움에서 내 힘으로 내가 싸우는 것을 내려놓고, 늘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싸움이 되어야 승리함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시기엔 시간 중요한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는 믿음과 순종이 나를 살리고 공동체를 살립니다. 정말 하나님만이 나에게 힘이고 살길이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이 순종의 믿음이 있을 때 이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가 블레셋과 같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믿음으로 순종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인생을 던지는 결단이 승리로 이끔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말에 반응하며 사람들의 말에 널뛰기 하듯이 춤추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나의 인생을 걸 때 거인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에서 백전 백승하는 놀라운 승리를 저와 여러분들도 현재형으로 경험할 줄 믿습니다. 전쟁터와 같은 인생의 한복판에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여 승리하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며 이 모든 싸움이 하나님께 속한 전쟁으로 만드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두 종류의 큰 원한이 다윗이 통치하는 온 나라 전체에 3년 기근이라는 큰 우환과 어려움을 가져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압살롬의 반역을 진압하고 또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다시 한번 통일 왕국을 잘 세워가는 회복의 과정 가운데 있는데 전혀 생각하지 않은 복병으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는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도 3년 동안 비가 오지 않으면 큰 어려움이겠지만, 그 당시에 3년이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나라 전체를 송두리 채 흔드는 위기였습니다. 지금 같이 냉장고나 저장 시설이 없기 때문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은 그 다음 해에 온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해도 아니고 삼 년이나 그렇게 기근이 들었기 때문에 나라 전체가 가난에 허덕였고 심지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던, 나라 전체 경제가 무너지는 위기였을 것입니다. 아마 다윗왕은 이 기근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다 해봤을 겁니다. 그런데도 여러가지 방법과 어떤 특효약도 먹히지 않는 것이죠. 세번째 해까지 기근이 계속되게 될 때야 다윗이 깨달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여호와께 부르짖은 겁니다. 3년 기근은 영적 문제이고 우리가 풀 수 없는 하나님이 막으시고 하나님이 내리시는 무언가에 메시지라는 것을 깨닫고 다윗 왕이 하나님께 매달린 겁니다. 바로 매달렸으면 어쩌면 이 기근이 좀 더 짧게 왔을 수도, 3년이나 온 백성이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인간적으로 세상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고, 죽을 고생할 것은 다 하고 나서 마지막에 상처투성이가 돼서야 모든 가능성을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에게 매달리고 엎드린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간구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3년 동안이나 온 나라에 기근이 있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기브온 백성들의 원한, 사울왕 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깨고 억울하게 기브온 사람들을 집단 학살 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 하게 될 때 기브온 족속과 화친조약을 맺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사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이며 마치 멀리 있는 백성인 것처럼 위장하고 왔는데, 알고 보니까 그들은 가나안에 가까이 있었던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온 족속의 위장과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평화조약 맹세였기 때문에 그들을 진멸하지 않았고 그들을 하인들과 같이 데리고 있으면서 그들을 살려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통일 왕국을 이루고 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었던이 평화조약을 깨고 기브온 백성들을 무참히 살해했던 것입니다. 기브온 백성들을 무참히 죽였다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었는데 그 언약을 위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를 위반하며 끔찍하게 집단 학살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는 3년 기근으로 그들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실을 듣고 나서 다윗 왕이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한 잘못도 아닌데 왜 그것 때문에 나와 우리 백성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당해야 되는가… 또 왜 전임자 사울왕의 문제였는데 왜 그걸 내가 풀어야 되는가? 분명 다윗왕 자신은 아무 잘못 안 했을 수 있고 모두 사울왕 잘못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왕의 자리 지도자의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 예전 문제도 지금 풀어내고 책임져야 될 위치가 지도자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옛날 문제가 지금 현재 백성들과 공동체의 고통을 가져오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나와 상관없을지라도 그것을 책임지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 길을 찾고, 풀어내고 해결하는 것이 지도자인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요. 그건 내가 한게 아니에요… 그것은 나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도자의 자격이 없는 겁니다. 지도자의 덕목은 내가 개인적으로 잘못한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것이 전임자 때 있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길을내며 풀어내는 자리인 것입니다. 다윗왕은 그런 불평을 전혀 하지 않고 지도자이기에 이 모든 문제를 책임지는 자세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그 사울 왕 때 있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즉시 피해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원한이 하늘에 닿아 생긴 기근 문제를 푸는 첫 단추는 바로 피해자인 기브온 사람들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깬 그 죄로 인하여 받은 고통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피해자에게 가서 피해자의 소리를 들어보니 이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브온 백성들의 원한은 돈으로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크게 받은 상처 어려움을 돈으로 쉽게 해결하고 덮으려고 그러는 사람들입니다. 피해자들에게 이 정도 돈 받으면 되고 해결되는 거 아니냐고 그냥 무마하려는 이런 생각이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 문제를 잘 풀려면 피해자와 어려움을 당한 자의 소리를 들으며 이것을 돈으로 그냥 해결하려는 일방적인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돈의 보상을 넘어 피해자들은 그들의 소리가 들리고 진정한 사과로 그들의 마음이 위로받는 것입니다. 기브온 백성들은 돈으로 보상받고 싶지 않고 사울 집안에 일곱 대표를 뽑아 여호와 앞에서 처단하면 공동체 가지고 있었던 이 원한이 좀 풀리겠습니다…그렇게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그것을 허락해서 사울왕의 자손 가운데 7명을 뽑아 그들이 대표로 집단 학살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목매 달아 죽도록 내어 준 것입니다. 이걸 통해서 기브온 사람들의 오랫동안의 응어리와 원한은 풀리고 일단락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기브온 자손의 원한을 풀어준다는 명목으로 죽은 사울왕 자손의 7명은 또다시 억울함의 원한이 맺힌 것입니다. 자식들이 직접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장본인도 아닌데, 예전에 있었던 것을 연좌제와 같이 이유 없이 끌려가서 목매달아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은 풀렸는지 모르나 또 다시 사울왕의 자손에는 원한이 쌓이게 된 것입니다. 아야의 딸 리스바의 통곡과 아들들의 시신을 지키는 모습이 바로 엄마로서 당한 원한을 대표합니다. 엄마가 억울하게 죽은 아들들의 시신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임하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했다는 말은, 움막치고 그 시신을 밤낮으로 지키며 통곡하며 애곡했다는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원통한 애곡 이야기를 다윗왕이 듣게 되면서 사울왕의 시신과 그 아들 요나단의 시신도 제대로 장사지내지 못했었는데, 이 두 시신을 가져와서 죽은 7명의 사람들과 함께 정성스럽게 장례를 치러주고 잘 묻게 합니다. 그렇게 사울왕 집안의 원한도 풀어주고 잘 예우하면서 마무리 하니까 그 후에 바로 이스라엘 땅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기브온 지파의 원한만이 아니라 사울왕 후선의 원한도 풀어지고 나니까 기근의 문제가 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문제들을 직면하며 살아가게 되는데 어떤 문제는 우리 스스로는 풀 수 없는 영적 문제라는 것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공동체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문제들 가운데, 어떤 문제들은 하나님 앞에서 풀려야 하는 영적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순종하고 주님께 나아가지 아니하면, 내 힘으로 해보려고 이리 저리 뛰게 고생을 고생대로 다하고 결국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을 깨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아니하시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여기지 않으며 우리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생명과 같이 지키며 살기 원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주신 약속인 언약은 영원 불변하는 보증의 약속임을 선명히 믿기 원합니다. 지금도 원한으로 억울함으로 모든 것이 막혀 인생의 기근으로 은혜의 통로가 막혀 신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을 풀어내며 하늘의 단비가 그들에게 임하며 그 모든 은혜가 풍성히 임하는 그 귀한 통로로 저와 여러분들이 선명히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에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박해가 굉장히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보다 훨씬 더 흔들고 어렵게 하는 것은 내부에서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분열입니다. 분열이 훨씬 더 교회를 어렵게 만들지 오히려 외부의 박해나 어려움은 교회를 든든하게 하며 더 주님을 바라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음을 역사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주님의 몸된 교회의 모형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지금 다윗왕의 실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갈라지고 분열하여 서로 갈등이 폭발하여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는 끔찍한 역사는 영적 문제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압살롬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긴 했지만 분명히 하나님과 다윗왕에게 대항한 반역자였습니다. 그 반역의 수장인 압살롬이 전쟁에서 죽었는데 다윗 왕은 불리한 상황에서 목숨 걸고 전쟁에서 수고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나라를 든든히 세우며 민심을 바로잡고 하나로 통합하는 것에 마음을 쏟는 대신, 자기 아들이 죽었다는 슬픔 가운데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은 것 때문에 슬픔에 매몰된 다윗왕을 바라보며 결국 그 전쟁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이 패전병과 같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은 읽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품지 못한 대가로 나타난 결과가 뭐냐면 바로 압살롬의 반역 이후에 또 다시 등장한 세바의 반역입니다. 유다 지파와 나머지 사이가 갈등하고 반복하는 것이 폭발하게 만드는 세바의 반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세바의 반란을 또다시 진압하기 위해 요압이 군대를 데리고 와서 그 군대를 통하여 세바와 세바가 갇혀 있는 성을 모두 진멸시키고 무너뜨리기 직전에 상황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인생을 대비시키고 있는데 문제를 증폭시켜 터지게 하는 사람, 문제를 잠잠하게 만들고 길을 내는 사람입니다. 반역자 세바와 같이 같이 문제를 증폭시키며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서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폭발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문제를 작은 문제로 잠잠하게 하여 하나되게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만 가면 큰 문제가 작은 문제가 되고, 문제를 잠잠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겁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우리가 알 수가 없고 성경에서 단지 그냥 지혜로운 여인이라고 등장합니다. 요압과 그 군대는 세바라는 반역자를 죽이기 위해서 그 성을 다 헐어버리고 그 성에 있는 동족들을 대항해 전면전을 벌이려고 준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바라는 반역자 때문에 같은 민족이 서로 적이 되어 싸우는 것도 모자라 성벽을 다 허물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이려는 전면전을 벌이기 일보직전인 것입니다. 같은 형제자매가 적이 되어 전면전을 벌이며 싸우면 결국 승자가 없는 모두 패자가 되는 안타까운 결말이 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그 성 안에 이름 모를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이 위기를 작은 문제로 만들며 풀어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먼저 이 지혜로운 여인은 군대장관 요압을 직접 독대합니다. 그 당시에 여인이 상대편 군대 장관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군대 장관을 만나야 하고 독대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가 서로에게 멸망하는 일이다…그러니까 우리가 동족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이 시간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지혜롭게 풀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독대해야 된다는 것을 안 것이죠. 이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과 독대하면서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냐며 핵심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겁니다. 물론 세바가 반역한게 많지만, 그 한 사람 죽이겠다고 이렇게 군대를 이끌고 와서 같은 동족이 살고 있는 어머니 같은 성을 무너뜨리고 그 모든 백성들을 멸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을 지혜로운 여인이 정확하게 지적하니까 요압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죠. 나는 결단코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삼키고 멸하려고 하는게 아니다…라고 분명히 얘기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멸하려고 하거나 몰살 시키려고 전쟁하는게 아님을 강조하며 요압은 반란의 머리인 세바만 주면 그냥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반란자 세바 한 사함을 죽이기 위해 전면전을 준비하며 동족이 서로 죽이는 이 끔찍한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지혜로운 여인이 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성벽에서 세바의 머리를 베어서 주겠다고 요압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어떻게 칼을 가지고 세바를 죽여 머리를 벨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 여인이 한 행보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 여인이 사용한 건 칼과 창의 무력이 아니었습니다. 그 여인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가지고 모든 백성에게 말하며 백성들을 설득한 거죠. 백성들을 마음을 읽고 설득해서 그들이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게 만든 겁니다. 세바가 반역을 일으켰던 방법은 악인의 꾀였습니다. 악인의 꾀를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 문제를 증폭시키며 반란하는 자들로 돌아서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왕은 지혜가 마비되어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하나되게 하는 것에 실패해서 반란이 일어나게 자초햇습니다. 원래 한 백성이었고 한 형제자매였는 서로가 원수가 되어 싸우고 서로 죽이는 이런 악순환이 반복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영적인 책임을 왕인 다윗에게 엄중히 묻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두 남자들과 정반대로 이 여인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설득하며 큰 문제가 잠잠해지고,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 길을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유 없이 같은 민족이 피를 흘리며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세바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끝나게 된 것입니다. 이 혼란하고 어두운 시대, 사람들마다 문제를 증폭시키며 폭발시키는 것을 일상화하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는 영적 지도력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악인의 꾀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문제를 증폭시키며 화를 폭발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싸우지 않아야 될 사람들과 싸우고, 심지어 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적을 만들어 분열하는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붙들고, 지혜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문제를 증폭시키지 않고 풀어내는 기적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악인의 꾀에 물들지 않고 이 여인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말하고, 지혜로 살아가는 삶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하심과 인도하심 그리고 싸워 주심으로 압살롬은 전쟁터에서 상수리 나무에 걸려 죽었으며 모든 반란이 진압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본인의 아들 압살롬의 죽음에 너무 슬픈 감정이 매몰되어 빨리 수습해야 되는 민심을 읽는데도, 그 민심을 붙드는데 실패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이 피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길에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계속되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의 가문에서 다윗 왕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주도해야 된다며 주도권 싸움에서 승기를 잡으려 하고 나머지 지파들은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가 숫자가 훨씬 많은데 우리는 뭐냐…그러면서 갈등하고 분열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으로서 빨리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고 수습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그들을 품었어야 되는데 슬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이 모든 일을 그냥 방치했습니다.
그렇게 갈등하고 반복하는 일이 결국 방아쇠를 당기듯 하나의 큰 사건으로 터지게 되는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인데 바로 세바의 반역입니다. 유다 지파와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 사이에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분쟁하던 사이에 베냐민 지파의 있었던 불량배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울왕의 지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베냐민 지파는 기본적으로 다윗 왕가에 대해서 안 그래도 삐딱한 시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나면 다윗왕의 흠과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데, 수습되지 않는 민심과 백성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방치하여 부글부글 끓고 있는 백성의 마음에 세바가 불을 지른 것입니다. 이새의 아들에게는 받을 유산이 하나도 없으니까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자 그러면서 반란을 부채질하는 겁니다. 그동안 참고 참았는데 왕이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그러면서 분노를 이용하여 안그래도 위태위태 했던 유다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갈등을 폭발시키고 사람들의 마음을 확 돌아서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게 세바가 반란을 선동하며 마음의 불을 지피자 유다 지파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바를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만 지금 다윗왕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복귀하고 나머지 모든 지파들은 이 베냐민 지파 불량배인 세바를 따라 떠나 버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두 동강 나기 일보 직전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내분을 터지도록 방치한 것입니다. 또 비슷한 다윗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바로 압살롬의 반란 진압후 남아 있었던 후궁들을 처리하는 문제였습니다. 다윗왕이 급하게 도망가고 피난 가면서 왕궁을 지키라고10명의 후궁들을 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10명의 후궁들이 힘이 있습니까? 군사력이 있습니까? 압살롬이 군사력으로 짓밟고 오니까 그냥 다 밟힌 겁니다. 그리고 압살롬이 끔찍하게도 폐륜의 일을 저지르며 그 후궁들을 백주대낮에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억지로 동침하였습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10명의 후궁들을 다윗왕이 돌아와서 처리하는 방법이 책임회피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후궁 10명에게 왕궁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묻거나 아니면 그 압살롬에게 그렇게 겁탈당한 것에 죄를 묻기 전에 소위 조선시대에 말하는 홍제천에 은혜가 있어야 했지 않겠습니까? 많은 여인들이 이유도 없이 잡혀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년이라 그랬는데, 나라가 약해서 자신의 힘과 지킬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짓밟힌 그 젊은 여인들에게 정죄의 화살을 쏘기 전에 왕은 홍제천의 은혜를 주었습니다. 홍제천에 그 몸을 씻으면 넓은 마음으로 어떤 것도 다 용서받아 새사람이 된다는 은혜를 선포하여 수많은 여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 홍제천에서 몸을 닦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후궁 10명에게 필요한 건 다윗왕의 넓은 마음으로 받아주는 홍제천에 은혜였습니다. 후궁 10명에게 그 홍제천의 은혜를 줬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고 품지 못했던 다윗왕은 이 후궁들의 마음도 품지 못한 채, 이들을 평생 가두어두고 밥만 주며 생과부로 살게 만들면서 그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은 것이죠. 그렇게 후궁들을 처리하게 되니까 백성들의 마음이 왕에게서 떠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다윗의 실정은 요압이 아닌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운 결정입니다. 왜 아마사를 요압 대신 군대 장관으로 세웠는가? 전쟁의 공로로 봤을 때는 요압이 훨씬 더 그동안 많은 일을 했는데 다윗왕은 의도적으로 요압 대신에 아마사를 세웠습니다. 그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요압이 다윗 왕이 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을 죽였다는 데 있습니다. 분명히 왕이 죽이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전쟁에서 이기는 명목으로 압살롬을 죽였기에, 요압을 군대 장관으로 세우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이 간과한 것은 요압이 다윗 왕의 약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 왕은 흔들고 다윗 왕의 약점을 붙들고 다윗 왕에게 넘어서는 반항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할 때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 나가 죽이라는 편지를 요압에게 썼기 때문입니다. 그 편지가 공개되면 다윗왕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겁니다. 요압은 말은 안 했지만 그 편지로 인해 다윗왕의 약점을 이미 쥐고 있는 것입니다. 군대 장관인 요압이 다윗에게 대항하고 반항하고 함부로 하는 반역의 모습이 등장하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왕이 자기 대신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우는 것에 큰 반감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요압이 어떤 일을 합니까? 아마사를 군대 장관으로 세운 다윗에게 항명하면서 군대장관 아마사를 죽여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친척 관계였지만 주도권과 정치적인 이해와 권력에는 죽일 수 있는 존재죠. 그러니까 요압이 꼭 압살롬과 같은 존재입니다 나의 권력을 위해서 내 친척을 죽이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사를 죽인 요압의 청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시신을 몰래 옷으로 가리는 이야기가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그 모습은 무엇을 떠오르게 만드냐 하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남편 우리야가 전쟁에 나가 홀로 죽게 만들면서 이 모든 것을 잘 마무리 하려 했던 그 속임수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옛날 죄악된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요압이 그렇게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죽였을 때도 다윗왕이 세운 군대 장관을 죽였을 때도 다윗왕이 그를 처단하지 못하는 겁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진압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으로 복귀됐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백성들을 품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며 백성들은 분열하고 갈등으로 폭발했습니다. 후궁들을 제대로 치리하지 못하고 그들을 품지 못해서 그 가운데 원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요압은 다윗왕이 세운 군대장관 아마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윗왕에게 풀어야 될 짐으로 찾아오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다윗왕이 압살롬의 반란 진압 후 바로 백성들의 마음을 읽고 품고 백성들을 화해시키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책임으로 엄중히 묻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오케이면 상황은 종료된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지 않아도 하나님은 분명히 보시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왕의 어려움을 바라보며 반면교사로 삼아, 백성의 마음을 읽고 살피고 품는 영적 리더심을 가지고, 은혜로 모든 어려움을 치리하며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데 쓰임 받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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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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