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있으면 그 누구보다 중보 기도를 받아야 되는 입장입니다.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이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을 위해 합심해서 중보 기도하는 게 당연합니다. 병원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병원 안에 있는 환자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투옥된 데서 풀려나 하나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해 달라고 중보기도 요청을 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중보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것도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냐면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며 중보기도 하는 겁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보다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 더 기쁘고 감사한 삶,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 더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이 놀라운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신비 그 자체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기도는 크게 두 가지 중보 기도를 하는데, 첫 번째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는 것, 두 번째는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누리는 신령한 은혜를 설명한 후에 그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께 연결되어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도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고 중보기도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져 예수님을 더 알게 해달라는 겁니다. 안다는 것은 머리로 말하는게 아니라 전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지혜와 계시의 영이 부어지면 성경 말씀은 그냥 글씨나 책이 아니라 말의 숨으로 생명과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통과해 그리스도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 신앙 기초는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하게 아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인식하느냐가 신앙의 기초이자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내가 알고 싶다고 알아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한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셨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라는 방법 외에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기에, 계시의 영을 부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혜를 알게 해달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죠. 우리가 간절하게 말씀을 알고 싶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며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 제가 알겠습니다…라는 겸손한 태도로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셨고, 하나님이 먼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먼저 알려주시는 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것을 고백하며 지혜와 계시의 영이 나에게 부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에베소 교인들을 향한 중보기도는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마음에 보이지 않는 눈이 있다는 것이죠. 그걸 영안이라고도 하는데, 닫혀 있는 내 마음속 영의 눈을 열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면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을 놀라운 진짜 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열리게 됩니다. 보이는 것들 넘어 감춰진 것을 볼 수 있는 시각,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천국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 눈에 보이는 물질 가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열리는 겁니다. 그 영안이 열리면 예수님이 누구 시며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의 눈이 열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예수님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며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누리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이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 하심의 역사, 영어로는 illumination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마음의 눈이 열리면 세 가지를 알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기업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되며, 그분의 능력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우리 삶 가운데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뭡니까? 나는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아 왕의 명을 따라 이 세상에 왔다는 믿음입니다. 또한 소망이라는 것은 언제나 미래형입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는 현실이 있습니다. 근데 현실에만 안주하고 현실에만 매몰되는 자가 아니라 현실을 초월해 보이지 않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 놀라운 은혜가 바로 마음의 눈이 열렸을 때 가능하게 되는 신비입니다. 소망이 없게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냐 하면 철저하게 우리는 이 세상에 매몰되어 땅의 현실만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그냥 결박되어 살아가고 소망이 없이 현실만 보며 살아가기에, 이 세상 외에는 소망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눈이 밝혀져 부르심의 소망을 붙들고 현실을 초월하며 현실 너머에 있는 놀라운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게 됩니다. 소망의 능력은 우리가 현실에 메이도록 하는게 아니라 이것을 돌파하고 초월하며 미래에 있게 되는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기업 영광의 풍성함이 보이게 됩니다. 이 땅에서만이 아니라 나는 천국에서 하나님께 받을 기업, 즉 받을 유산이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있는 자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겁니다. 더 나아가 마음의 눈이 열리면 놀라운 능력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지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내 능력이 얼마나 큰 지를 계속 과시하며 내가 능력자가 되기를 계속 원하는 삶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능력자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치관에 매몰되어 삽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능력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시는 예수님 능력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내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자로 변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제부터는 내가 능력이 얼마나 크고 높은 지를 뽐내고 그것을 가지고 내 인생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 얼마나 지극히 크신가를 바라보며 내 인생을 평가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그 간절한 두 가지 기도의 제목이 저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 제목 되기 원합니다. 내가 간구 하는 가장 중요한 기도 제목은 가족들이나 자녀 기도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더 많이 알기 원합니다 더 가까이, 더 깊이 알기 원합니다…주님을 아는 지식을 구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커져 지혜와 계시의 영을 달라고 구하며 그 하늘나라의 비밀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원합니다. 또한 내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이 시간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능력이 지극히 크심을 알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려야 신령한 복을 진짜 복으로 알게 되고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그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에베소서 1장 말씀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넘어 교회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성도가 교회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도전하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의 고백이라는 본질을 붙들고 교회론의 기초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성도로 우리를 부르시고 그 안에서 눈에 보이는 복을 넘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부어 주십니다. 8-14절에는 우리에게 부어 주시는 세 가지의 신령한 복이 더 등장하는데, 지혜와 총명을 부어 주시는 복,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는 복,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복입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에게 부어지는 신령한 복은 바로 지혜와 총명을 얻는 복입니다. 지혜란 머리가 좋고 똘똘한 게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시는 지혜, 즉 하나님께 속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지혜를 부어 주시는 것이죠. 인생의 지혜는 뭡니까? 눈에 보이는 물질 가치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눈에 보이는 육신의 강건함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전인적으로 아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 넘어 다가오는 천국을 붙들고, 물질 가치를 넘어 영적 가치를 붙들고 나의 인생은 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 인생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죠.
내 인생의 계획은 그런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 주시지 않으면 하늘의 지혜를 붙들지 않으면 나를 향한 계획이 뭔지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펼쳐지고 움직이는 비밀이 있기에, 그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지혜와 총명을 부어주면서 알게 하신 겁니다. 아 내 인생이 내 뜻과 계획 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구나…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돌아가는구나…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나의 인생이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 속에서 움직이고 돌아가게 됨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의 인생을 잘 살기 위해 하나님 뜻이 무엇인가를 알고 발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내 인생을 주님 은혜를 바라보며 주님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내 왕이고 내 삶과 온 세계의 중심이자 온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시고 내 인생을 움직이시고 돌리시는 분임을 깨닫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사는구나…라는 발견하는 자들이 복된 인생입니다. 새는 하늘에서 살도록 만드셨고, 물고기는 물에서 살도록 만드셨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도록 하나님께서 지음 받고 만드신 것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창조 계획과 뜻 가운데 있는게 복된 인생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삶 가운데 내 인생이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움직이고 돌아간다는 것을 믿으며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총명을 붙들어 그 뜻의 비밀을 내가 발견하고 그분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머물며 주님을 늘 붙들고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신령한 복은 바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기업이란 상속자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여러 서신에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말씀도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고 하나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고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죠. 나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얼마나 크고 엄청나고 위대한지, 내가 하나님의 상속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상속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내 삶이 주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 그게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인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건지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시며 상속자 되게 하셔서 그 모든 일을 주님의 뜻 가운데 인도하신 은혜를 기억하며 내 인생이 주님의 영광되며 주님의 찬송 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조금 더 잘 살고 조금 더 잘 되고 조금 많은 돈 버는 것을 통하여 내 삶의 가치와 삶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하나님의 기업이자 상속자가 되어 영광과 찬송 되는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깨닫는 것, 그게 성도들이 누리는 신령한 복입니다. 세 번째 하늘의 신령한 복은 바로 성령의 인치심을 받게 하는 복입니다. 인치신다는 것은 인감도장을 찍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인, 왕의 도장을 찍어 확증하시는 게 바로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받게 되는 놀라운 신령한 복을 다 나열하신 후, 이 모든 것을 확실히 보증한다 약속하시며 성령의 인치심을 주시는 겁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망 없고 눈에 보이는 가치의 매몰되며 사람들이 철저히 세속화되고 우상화 된 도시였습니다. 그런 도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그리스도 밖에서 그리스도 안으로 이사 가게 하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놀라운 신령한 복을 누리게 한다는 것을 깨닫고 붙드는 것은 기적이자, 성령 하나님의 부어진 역사였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감도장을 받은 자들입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마음에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어 성령의 인치심을 받는 겁니다. 성도로서 내가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예수님 안에서 믿어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존재와 삶의 가치를 발견하는 겁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보혈로 나는 천국 가는구나…그렇게 나는 모든 것을 은혜로만 살아야 되는구나…성령 하나님의 인감 도장이 있기에 확실하구나…이 정체성이 굳건 해지면 굳건해 질수록 내 행동과 삶이 그것의 일관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구원받고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는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고,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며 우리를 구원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 새사람 된다는 것이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복, 신령한 복이라는 것을 성령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십니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놀라운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늘의 신령한 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으로 돌아감을 믿으며 이 시간 그 모든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하늘의 신령한 복 가운데 거하십시오. 내가 하늘 자녀이자 상속자임을 믿으며 감격과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찬송되는 존재로 살아가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존재임을 믿으십시오. 바라기는 우리가 이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그 실체를 경험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에베소서는 성도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변화 받은 거룩하고 신실한 존재됨을 통해 진정한 교회 됨을 살아낼 것을 권면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도됨의 본질을 붙들고 살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축복,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옴을 통해 받는 복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예수님 믿음으로써 받는 복이 무엇인지, 예수 믿고 받는 복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 집이 부유해져서 잘 되고 자녀들이 잘 되고 병이 났고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한 복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 누리게 되는 복들은 내가 그냥 원하는 복일 수도 있고, 소위 말하는 반찬과 같은 복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복의 본질은 아닐 수 있음을,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는 복의 본질을 “신령한 복” 이라고 의도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세상에서 health and wealth gospel을 넘어 하늘의 신령한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게 되는 예수 믿고 받게 되는 신령한 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에베소서 1장 말씀은 여러가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게 되는 신령한 복을 증언합니다. 첫 번째 신령한 복이 바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신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신 놀라운 신비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중심이고 내가 모든 것의 시작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내 인생은 내 계획과 내 뜻대로 움직이고 돌아가야 된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나로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모든 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믿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존재, 하나님이 나를 보내심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고 하나님이 나를 계획하셨고 하나님이 나를 예정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령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내 시각에서 봤을 때는 모든 게 전적인 은혜이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그것을 택하시고 예정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임을 사도바울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교회 목회할 때 성도 한 분이 1954년에 한국 전쟁 고아 두명을 입양해 키우셨습니다. 갈 곳이 없는 그런 전쟁 고아들 소망이 없는 자녀들을 입양해서 미국에서 키워 주신 것입니다. 그 분에게 심방 가면 늘 한국전쟁과 한국전쟁 이후에 한국의 상황을 많이 이야기해주시곤 했습니다. 그 입양된 자녀 중에 한 분을 제가 몇 번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미 환갑이 넘은 머리가 하얗게 되신 할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겉 모습은 완전 한국 사람인데, 한국어를 하나도 못하는 그냥 인사말 정도 하는 분이셨는데, 그 부모인 우리 교인에게 얼마나 감사하며 그 양 부모로 말미암아 내가 이렇게 잘 지내게 되었고 축복 받았다고 고마워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한국에 있었던 그 전쟁 고아 두 명이 우리 교회 성도에게 입양되는 것은 자녀들의 능력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 부모의 전적인 선택으로 미국에 오게 된 것입니다. 즉 누구에게 입양이 되느냐에 따라 그 어린 고아들의 인생이 바뀌어지게 된 것이죠. 이 모든 게 삶으로 고백 되는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하심입니다. 이 놀라운 신비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부어지는 신령한 복의 첫 번째입니다. 두번 째 신령한 복은 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로 변화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전쟁 고아와 같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것, 천국 백성으로 변한 것은 전적인 하나님 은혜입니다. 나같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나를 조건 없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은혜는 신학적인 교리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고백 되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령한 복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알고 깨닫고 발견하는 자는 은혜 충만과 평안 충만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 되게 하신 신비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부어주는 놀라운 신령한 복입니다. 세번째 신령한 복은 은혜의 충만함과 풍성함으로 주신 죄사함, 즉 속량의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우리에게 부어진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를 삶으로 고백할 때, 내가 예수님 믿기 전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내가 전쟁 고아와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나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속량, 즉 죄용서함을 주셨습니다. 우리 스스로 하나님 자녀 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가 속량,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당해야 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치르시고, 나를 건져 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복 받았음을 믿으십니까? 내가 받은 예수 믿고 받은 복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지내고 우리 자녀들이 좋은 직장 가고 건강하고 장수하는 것을 넘어선 신령한 복이 분명히 있음을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부어 주시는 그 신령한 복을 진정 사모하고 열망하십시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택함 받고 예정 받은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보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붙드는 겁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얻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보혈로 내가 죄사함, 속량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신령한 복들을 우리가 마음에 새겨 내가 예수님 믿고 복 받는다는 복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늘 깨닫고 예수님 믿음으로 받는 그 복을 붙들고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감옥 안에서 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지혜와 권면을 준 말씀인데 특별히 교회가 무엇이고 그리고 너희 자신이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성도들이 교회됨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강조하는 서신입니다. 교회의 존재는 바로 성도들 자체가 교회가 되는 것임을 잊지 말고 내 자신이 교회 됨을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무엇인가를 넘어 교회가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붙들고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몸 된 교회로서의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것이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에베소는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큰 애정이 있었던 도시 중에 하나로 3년이나 그 곳에 있으면서 선교 여행 중에 특별히 두란노라는 곳에서 날마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소중한 열매를 맺은 곳으로, 참 마음이 많이 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에베소라는 도시 자체는 사업은 번창하고 경제적으로 풍성 했을지 모르나 영적 환경은 굉장히 악하고 어렵고 힘들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척박한 곳에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으로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며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 됨을 회복할 수 있을지를 권면하면서 쓴 서신이 에베소서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에베소서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혼탁해지고 변질되어 교회의 본질에 대한 기대가 많이 사라진 이 시대에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이며, 내 자신이 교회로서 분명한 뜻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로서 우리에게 공동체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됨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서론인 1절 말씀은 사도 바울 자신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에베소서 뿐 아니라 모든 서신에서 거의 비슷하게 사도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분명한 고백을 하는데, “하나님의 뜻” 그리고 “보냄을 받은 사도”입니다. 사도라는 말 자체가 보냄을 받았다는 말인데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사도…이것이 사도 바울의 흔들리지 않은 자아 정체성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누군가에 대한 분명한 정체의식을 흔들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이 세상이 어쩌다 나온 게 아니라 이 세상에 우연히 나온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복되다는 것은 내가 이 세상에 온 분명한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히 그냥 던져진 존재가 아닌, 내 선택이나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세상에 내가 왔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게 내 정체성의 기초인 것입니다. 그 보내심을 받은 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온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의 명을 받아 이 세상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명을 받아 왕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내 삶의 정체성임을 깨닫고 그분이 다시 부르시면 모든 것을 홀연히 털고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본향으로 돌아가는 인생, 이것을 정확하게 아는 자가 복된 인생입니다. 그렇게 자기를 소개한 후 성도 됨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자들 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그 예수 생명으로 태어난 자들이며 예수 생명으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며, 예수님 손에 이끌려 천국으로 가는 것을 분명히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 안에서 신실한 자들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성도이며 그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이 정체성이 약하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 가운데 나를 이 세상에 보냈다는 보내심의 정체성이 약합니다. 내 뜻을 통해 돌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통해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정체성이 약합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 그분의 보혈로 말미암아 변화된 존재라는 정체성이 약한 겁니다. 우리와 달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나를 세우셨다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옥중에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붙들 수 있었습니다. 성도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하게 그분의 은혜를 바라며 그분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 삶 가운데 부어지는 놀라운 기적이 바로 은혜 충만과 평강 충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에베소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서신을 시작할 때 거의 똑같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성도의 삶 가운데 흘러 넘치는,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먼저 그 누구보다도 은혜를 통해 변화된 인생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간증이기도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이 자신의 삶을 통과해 고백 되는 것입니다. 은혜 충만과 함께 부어지는 게 평강 충만입니다. 평강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내 삶에 붙들어야 될 가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갈 때 내 삶에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이 임하며 나는 환경과 조건과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내 복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는 것을 붙드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너무 민감하지 않으며 환경에 너무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탁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나를 덮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은혜 전에 율법을 가지고 살았던 자였습니다. 늘 모든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했고 남들보다 나은 순수 혈통 바리새인에 가말리엘 문하생이었고, 거기다 로마 시민권까지 가진 모든 것을 갖춘 자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은혜를 강조하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노력한 대로 결과가 있고 율법을 잘 따라야 당연히 점수가 높은 사람이 구원 받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고꾸라졌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자신의 생각과 논리,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집는 어떤 놀라운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헛된 믿음과 잘못된 생각과 가치관이 모두 무너지며 사도 바울의 인생에 새롭게 찾게 된 게 뭡니까? 나는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었다…나는 그리스도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자였다는 것을 그의 삶을 통과하는 진리로 처절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 같은 존재를 예수님이 택하셔서 이방의 사도로 세워 주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격도 능력도 없는데 바로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는 겁니다. 대부분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복된 인생이 된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죽음 바로 직전에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내가 노력하고 수고해 내가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요. 신실하게 예수 생명 가운데 거하며 내가 돌아갈 본향이 있음을 정확하게 붙들어야 성도로서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붙들어야 할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갈 때 여러분들의 인생이 복 될 수 있습니다. 나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성도로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신실한 자임을 믿고 그분 안에 있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깨닫고 붙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언제나 복병이 있으며 돌발 상황이 있습니다. 인생의 복병과 돌발 상황을 만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나를 잡아 문제에 압도 당하는 대신 문제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병과 돌발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세상에 좌지 우지되지 않으며 세상에 내 중심을 빼앗기지 않는 자가 됩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충만, 평강 충만을 가지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분에게 보내심을 받은 자 답게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오늘도 예수 생명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결론으로, 사울왕과 그 가문에 비극과 파멸입니다. 어느정도 끔찍한 비극으로 비참하게 끝났냐 하면 사울 왕과 그 세 아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다 성읍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사울왕의 머리가 베어졌습니다. 그의 갑옷이 다 벗겨졌습니다. 그의 갑옷은 그 당시 블레셋의 신전인 아스다롯에 전시품이 되었고, 사울왕의 시체를 성벽에 못박아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능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울 왕과 그 가문의 비참한 멸망이 아니라 거의 이스라엘 백성과 공동체의 비참한 비극임을, 그 원인은 본질적으로 불신앙의 결과라는 것을 우리에게 철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와 똑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달라고 그렇게 소리쳤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불충분하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만 붙들고는 못 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같이 든든한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살겠습니다…라고 그렇게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 사울왕을 세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원한 눈에 보이는 왕을 세운 결과가 바로 비극과 파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한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 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절하고 눈에 보이는 사람을 왕으로 세운 처참한 결과가 이렇다는 것을 무섭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우리는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동일한 불순종을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붙들고 예수님만 왕으로 모시고는 못살겠습니다. 그걸로 나는 불충분합니다. 예수님 말고 눈에 보이는 내가 붙을 수 있는 무언가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나에게 왕으로 세워 달라…요구하고 조릅니다. 말씀이 불순종이라고 경고하고 성령 하나님이 탄식하심으로 경고해도, 끊임없이 우리는 예수님 외에 다른 왕들을 계속 세우려고 합니다.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그것이 나에게 마치 왕인 양 나의 전부인 양 붙들고 올인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인생의 끝은 비극과 파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적 싸움이라는 것은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내 중심에 두고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가 아니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모시고 왕으로 붙들고 살아가는가에 싸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울왕과 그 가문,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극적인 이야기로 모든 것이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맨 끝에, 사울왕의 비극과 파멸의 이야기 맨 마지막에 길르앗 야베스 백성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꼭 부록과 같이 등장하는데 이 길르앗 야베스 백성의 이야기가 주는 중요한 영적 지혜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울이 왕 됐을 때 암몬 족속으로부터 소위 말하는 협박을 당하게 됩니다. 암몬과 싸울 능력이 없는 지라 길르앗 야베스는 처음부터 우리는 항복하겠다고… 우리가 종 되겠다고 두 손 들었습니다. 그런데 항복을 선언했으면 싸우지 말아야 되는데 항복했는데도 밀고 내려오는 겁니다. 항복해도 너희들 내가 다 죽이겠다는 것이고 멸절 하겠다는 겁니다. 그때 사울왕이 거룩한 의분을 가지고 부하들을 설득해서 불의한 백성과 싸워 길르앗 야베스 백성을 구원시켜 주었습니다. 그게 사울왕 초기에 하나님의 기쁨 되는 일을 한 몇 가지 업적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사울왕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무너져서 이렇게 비극적으로 파멸하고 끝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길르앗 야베스 백성들이 듣게 된 겁니다. 그 비극적 파멸의 소식을 듣고 길르앗 야베스 백성들은 사울왕에게 진 은혜와 빚을 갚은 놀라운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울왕의 비극을 듣고 그들이 한 행동이 뭐냐면 먼저 일어나서 밤새도록 블레셋 적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벽에 걸려 못 박혀 있던 사울왕의 시체를 수습해 돌아와서 불태워서 장사하고 7일을 슬퍼하며 금식 했다는 거죠. 블레셋 적진의 땅에 들어가서 시신을 수습해서 훔쳐 온다는 게 목숨을 걸어도 하기 힘든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울 왕에게 입었던 은혜를 기억하며 목숨 걸고 성벽에 못 박혀 전시된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해 오고 장례 치른다는 것으로 사무엘상이 끝나는 겁니다. 사울왕의 그 비극적 이야기에 조그만 희망의 불씨를 심겨 두시고 사무엘 하로 들어가게 하신 겁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만나고 바라보는 몇 가지를 보고 나면 그냥 쉽게 모든 것이 끝났다고 그냥 책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가지의 상황이 스캔되면 이거 끝났다…다 망했다…나는 다 죽었다…우리 집은 끝났다 내 사업은 끝났다… 쉽게 결정 내리고 쉽게 다 포기하고 끝내 버리고 싶어 합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이기에 우리 마음은 항상 문제와 어려움을 과장하고 부풀리어 낙심과 절망에 사로잡혀 있기 쉽습니다. 객관적이라고 스스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눈과 마음은 늘 주관적입니다. 늘 절망적이고 안 되는 쪽을 더 강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붙들며 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전부라고 바라보면서, 절망과 낙심을 마음 속에 가득 채운 채 살아가기 쉽습니다. 내 눈에 소망이 보이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내 마음을 다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소망의 눈이 가려지면 우리의 마음은 현실에만 지배 받게 됩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현실은 중요하고 직면해야 되지만 현실 밖에 보이지 않는 인생은 비참한 인생입니다. 나의 눈이 소망이 없이 현실에만 매몰되게 되면 당연히 내 삶이 땅의 문제에 목숨을 걸고 매몰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내 삶이 끌려 다니며 이리저리 치이며 살게 됩니다. 그 실패와 낙담만이 가득한 그 상황 속에서 내 눈을 들어 보게 되면 절망과 탄식만이 가득하고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끝난 게 아니라 그 끝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희망의 불씨가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선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절망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붙들기 원하시는 은혜가 뭐냐면 내 눈에 보기에 다 끝난 거 같은데 내 눈에 보기에 전혀 소망이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은 작은 소망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도록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사라진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 항상 소망의 불씨를 살려 두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절망 가운데 우리 눈이 집중돼야 되는 것은 바로 그 작은 소망의 불씨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사울왕의 죽음의 현장에서 꺼지지 않는 소망의 불씨가 그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살아가지만 그 현실을 넘어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 원하십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가올 세상이 있음을 믿으며 천국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지배당하지 않게 하시며 주님이 심겨 주신 소망을 바라보고 붙드는 성도가 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땅에 속박과 땅의 현실을 뛰어넘어 하늘의 현실을 소망으로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상의 마지막 장이자 결론 말씀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원했던 눈에 보이는 왕, 사울 왕의 그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은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떠나 영적 하향곡선을 계속 그리고 있었습니다. 심장이 없는 왕 같이 껍데기로만 있었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만 반복적으로 하다 결국 무당을 찾아가며 완전히 파멸의 인생으로 회복 불가능한 인생이 되어버린 사울 왕은 그 모든 뿌린 것을 거두게 되는 안타까운 비극으로 죽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오래전에 이미 떠났지만 사울을 지금까지 살려 주신 이유는 그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진정으로 회개하고 엎드리기만 하면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는데 사울 왕은 끝까지 그 모든 기회들을 거절하고 파멸을 향해 질주하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며 비극적으로 죽어버리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대패하게 되는 사울왕과 그의 군대를 보게 됩니다. 사울왕은 블레셋과 싸울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무너지고 패한 이유는 물론 군사력이 약해서도 있었지만 사울왕은 그가 가진 힘과 군사력을 주적을 향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평생 원수로 스스로 삼아버린 다윗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탕진했기에 진짜 싸움인 블레셋과의 전쟁에서는 완전히 망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 하나 잘못 세워서 사울 왕만 죽은 게 아니라 그 많은 백성들이 함께 죽게 되는 비극을 보게 됩니다.
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완전히 대패하게 되면서 먼저 사울의 아들들이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그 유명한 다윗의 친구 요나단도 죽고 나머지 두 형제들도 한 날에 죽는 비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남은 사울왕이 죽는 장면을 성경은 증언하는데 이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 죽기 직전에 어떻게 보면 사울왕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식하는 대신 사람들을 의식하며 비극적으로 죽기 때문입니다. 사울왕이 지금 화살을 맞고 피를 많이 흘리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그러자 사울과 함께한 호위 무사에게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우니 나를 찌르라고 명령합니다. 죽음 앞에서 정말 두려워해야 될 건 뭐냐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야 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회개 했어야 되는데 끝까지 죽음 앞에서 조차도 사람들을 의식하며 사람들에게 모욕 당하는 게 두려워서 신경 쓰고 있는 겁니다. 사울 왕의 비극은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이미지 걱정하면서 두려워하고 죽었다는데 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회개하며 주님을 바라보며 죽었으면 마치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은 강도 한 사람이 구원 받았듯이 소망으로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음 직전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면 나를 기억만 해달라고 말하며 강도가 건짐을 받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이 있게 되지 않습니까? 그 예수님 옆에 있는 강도와 같이 죽기 마지막 직전까지 사울 왕은 기회가 있었는데 끝까지 사울 왕은 하나님 생각하지 않고 죽게 된 것이 가장 비참한 비극의 결말이었습니다. 사울 왕도 그 세 아들들도 병기든 자도 그의 모든 백성들도 모두 한 날에 전쟁터에서 다 죽는 비극으로 끝납니다. 블레셋 전투에서 한 날에 사울 가문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 비극은 마치 엘리 제사장과 그 자녀들이 한 날에 모두 죽은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무엘상4장을 보면 전쟁에 나가서 엘리의 아들들이 죽고,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이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비극적으로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도 한 날에 죽었고, 사울왕과 그 세 아들들도 한 날에 전쟁터에서 비극적으로 죽었습니다. 영적 지도자와 왕의 비극의 결말을 동일하게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와 같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며 결국 너희를 보호하고 너희를 지켜주는 왕이 아니라 너희 이렇게 죽이고 너희를 힘들게 하며 너희를 망하게 하는 왕이라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온전한 왕이시고 유일한 왕이심을 고백하지 않는 가운데 눈에 보이는 인간의 왕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백성들을 어렵게 하며 백성들을 이렇게 망하고 죽이는 왕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고로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 왕의 위대한 점은 그가 실수나 실패나 무너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실패와 무너짐의 현장에서 정신 차리고 주님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새 출발하는 기회로 삼았다는데 있습니다. 사울왕의 비극은 그런 기회들이 숱하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 기회들을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기회로 삼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이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끝까지 신실 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내 인생 끝에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지, 하나님께 어떻게 평가 받는지가 인생의 결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은 여전히 우리에게 돌아갈 기회가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새 출발할 기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숨이 붙어 있는 순간까지 하나님께서는 나를 끝까지 붙드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사람들만 생각하고 사람들만 두려워하는 비극적 인생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가올 천국을 사모하며 주님의 손에 이끌리어 천국으로 가는 것이 가장 복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오래 살까를 고민하는 것을 넘어 내가 어떻게 살까를 고민하며, 더 나아가 내가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하여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축복의 죽음으로 죽음 이후에 영원한 천국을 바라며 죽음 앞에서 주님과 함께 손 붙잡고 나아가는 축복의 해피엔딩이 저와 여러분들 인생의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정신을 바짝 차려 자문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갈 길을 보여 주셨고 속히 아말렉을 추격하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길거리에서 쓰러져 있는 애굽 소년을 외면하지 않고 구하고 먹이는 것을 통하여 우연히 만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여 만나게 하신 섭리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애굽 소년을 통해 아말렉의 위치를 알게 되고 다윗은 그 아말렉을 쳐서 빼앗아간 모든 것들을 찾아옵니다. 그래서 그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계기로 다윗은 삼았고 모든 어려움과 빼앗긴 것을 되찾아오는 전화위복의 승리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큰 승리로 전화위복이 되고 나니까 다윗에게 돌을 들어 죽이려 했던 다윗의 사람들이 갑자기 이제 다윗에게 갑자기 아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모든 승리는 다윗의 승리였고 다윗의 전리품이었습니다…그러면서 다윗에게 막 아부하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죠. 사람이 참 간사하다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평생 함께 할 것 같이 다윗을 향하여 그렇게 변심하고 그렇게 등 돌리고 돌을 들어 죽이려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다윗에게 아부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인간의 죄성이라는 것이 그 사람이 좀만 약해지면 공격하고 밟으려고 하고 그 사람이 좀 강해지면 그 사람한테 비굴하게 엎드리는 존재라는 겁니다. 이런 인간의 악한 모습을 적나라 하게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음을, 결국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 큰 승리 이후에 다윗이 듣기 좋은 말로 아부하며 다윗의 전리품을 합리적으로 강조하면서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라 증언하지만 사실 그들은 다윗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간신배들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조언했던 게 뭐냐 하면 여기 200명은 나가지 않고 싸웠고 400명만 나가서 싸워 아말렉과 승리했으니까 우리가 승리를 통해 얻은 전리품은 전쟁에 참여한 용사들에게만 주고 여기 남아 있었던 자들에게는 아내와 자녀들만 나눠주자는 겁니다. 전리품은 목숨 걸고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만 갖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를 가져 나온 겁니다. 다윗의 위대하나 점은 이 의견이 다윗의 귀에 듣기 좋은 얘기였지만 전쟁의 승리도, 전리품들도 모두 다윗이 잘 싸워 얻은 결과라고 몰아가는 간신배들의 소리임을 분별했던 것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이유가 뭡니까? 그 큰 승리와 성공이 다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내 노력의 결과물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믿지 않으려 하지만 주변에서 계속 이렇게 듣기 좋은 소리로 얘기하는 겁니다. 이건 다윗의 전리품이고 당신이 잘 싸워서 이긴 결과이기에, 모든 공로는 당신이라고 주변에서 계속 말을 하니까 그 말을 믿고 싶은 것이며 그 말을 사실로 자꾸 취하려 하는 인간의 본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갑자기 아부하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자들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들, 불량배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이 다윗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며 아부하고 굽신 거리는 자들을 내 옆에 가까이 둬야 되는 자가 아니라 바로 조심해야 하는 사람들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 다윗의 위대한 점은 전화 위복으로 큰 승리를 경험한 이후 자신에게 등돌렸던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칼을 들어 보복할 수도 있었습니다. 한번 배신하고 등돌렸던 사람들은 언제 다시 배신할지 모르니 하극상을 벌여 나에게 돌을 들었고, 나에게 반기를 들었던 이 모든 역적들을 다 쳐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목숨을 다 살려주고 보복의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여전히 나의 형제들로, 동지들로 받아주고 품어주는 겁니다. 더 나아가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도 고마워해야 되는데 놀라운 영적 결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전리품을 모두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전리품이라고 열광하는데 다윗은 이 모든 승리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돌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승리임을 잊지 않고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군대에게 손에 붙이게 하셨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승리이며 이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400명에게만 주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아말렉에게 빼앗은 악한 제물을 흩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가도록 아낌없이 같이 분배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승리가 하나님이 주신 승리임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의 전리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로 주신 결과물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내 전리품이 아니라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승리임을 알 때 큰 승리와 성공 이후에 착각하며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의 반대자들을 치지 않고 품어주는 다윗의 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었고,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내 공로를 앞세우지 않고 전리품을 함께 나누는 것을 통해 다윗은 후에 놀라운 왕이 될 수 있었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십시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같이 품고 나아가는 것,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자들, 나에게 등 돌린 자들을 보복하지 않고 품는 통 큰 지도자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사람들의 영적 리더십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전화 위복의 승리와 성공을 주신 주님을 끝까지 붙들고 모든 영광을 주님께만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드디어 제정신이 번쩍 들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엎드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상의하지 않고 블레셋 땅으로 넘어와서 도망자 신세를 면하려 했던 인간적인 생각, 어떻게 블레셋과 잘 해보면서 그 자리에 있으려는 모든 생각을 하나님은 무너뜨리시고 자신과 평생 함께 할 것 같았던 사람들이 등 돌리고 배신하며 돌을 들고 죽이려 하는 상황으로 다윗을 몰아가셨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정신이 바짝 들어서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있고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막다른 골목의 위기에서, 돌로 자신을 죽이려 하는 배신의 위기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다시 한번 선명히 붙드는 계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 내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 나에게 가장 큰 실수였다는 것을 깨닫고 그 절망의 상황 가운데 주님에게 물어보는 것을 통해 문제 해결의 시작을 열게 됩니다. 우리 인생에도 돌발상황과 어려움이 찾아오고, 이렇게 우겨 싸는 상황과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놓인 것 같이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 눈앞에 캄캄해 지고 분노가 올라와서 오히려 더 충동적인 결정을 하며 무너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 막다른 골목의 다급한 상황 가운데 정신이 들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기회,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될 영적 진리는 나의 위기 상황과 돌발 상황, 막다른 골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기회, 하나님께 돌아가는 기회를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여쭤보니까 바로 답을 주셨습니다. 주님 앞에 바른 반응을 통하여 돌아온 다윗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 하나님의 다시 한번 다윗에게 말씀하시며 갈 길을 밝히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응답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의지하여 그 아말렉을 찾으러 달려갑니다. 그 당시에 지도도 없고 gps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아말렉을 찾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라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 아말렉을 뒤쫓아가는 길을 막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 추격하려고 달려가는 길에 놀라운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되는데 길가에 배고파 정신을 잃은 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말렉을 뒤쫓아 가야 하기에 절박하고 일분 일초가 아까운 상황입니다. 아내들과 자녀들이 다 사로잡혀갔고 아말렉을 빨리 가서 지금 뒤쫓아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상황이고, 내부적으로도 그 두목이었던 다윗을 죽이려 했던 마음이 상하고 갈라진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때 알지도 못하는 다른 사람을 돌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내 코가 석잔데 내 문제가 이렇게 큰데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기에 그냥 지나치는게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배고파 쓰러진 애굽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나와 무관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다윗에게 데려와서 떡을 먹이고 살렸다는 겁니다. 영어로 하면 sowing the seeds in the time of my greatest needs…인 겁니다. 내 코가 석자고 내 문제도 너무 큰데 그때 다른 사람을 향하여 축복의 씨앗을 뿌린 것이죠 여기서 주목하며 마음에 새길 것은 사흘을 굶은 아말렉 종을 통해 증언되는 아말렉 문화의 특징입니다. 자신은 아말렉 사람의 종이었는데 병드니까 주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아말렉 사람들의 특징, 사단의 하수인 아말렉 문화의 특징은 사람을 물건과 같이 도구화 하는 겁니다.물건과 같이 쓰고, 필요없게 되면 병드니까 버려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아말렉 문화를 그대로 답습한 이 세상의 가치와 문화가 무엇입니까? 비인간화.. 나와 무관한 자들과 같이 여기고 사람들을 수단으로 도구로 사용하는 개념으로 한정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도구나 수단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사랑할 대상으로 바라보시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무관한 존재로 여기지 아니하십니다. 약한 자들과 아픈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약한 자들을 품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아말렉의 문화를 경계하고 싸우며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복된 삶임을 성경은 일관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그 사람을 지나쳐서 가는게 당연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육의 눈으로 봤을 때는 우연히 만난 소년이었고 그냥 버려진 소년이었지만 영적인 눈으로는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알고 보니까 나중에 정신 차려 보니까 그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그들이 그렇게 찾고 뒤쫓아가 전쟁해야 하는 아말렉의 위치를 알려 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관 없어 보이는 길가에 그 배고픈 객을 외면하지 않고 그에게 떡을 주고 물을 주며 살리고 돌본 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잡는 놀라운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이 물건과 같이 쓰다 버린 병든 애굽 소년을 거두고 외면치 않고 그를 먹이고 정신 차리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적의 위치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문제와 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그 어려운 이웃을 향하여 손을 내밀었던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 사람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의 실타래를 풀기 원하십니까? 내 인생의 그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기를 사모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으십니까? 정신 차리고 그 어려운 상황에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으로 시작하십시오. 그 문제 해결의 첫 단추는 먼저 주님 앞에 물어보고 주님이 원하시는 결정을 하기 위해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하십시오. 주님 앞에 엎드리며 무릎 꿇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길을 신뢰하며 말씀으로 내 심령에 주님의 인도하심에 귀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붙드는 것을 엉킨 실타래의 첫 단추가 되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다윗에게 소망이 다시 찾아 온 것이고, 어떤 답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믿으며 붙드는 새출발이 우리 삶에 열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연을 가장한 사람들을 예비하십니다. 우연을 가장한 환경을 예비하십니다. 나에게 만나게 하신 그 사람을 통하여 그 직면하게 된 환경을 통하여 믿음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겪는 큰 어려움과 위기에 대해서 30장 말씀은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하나님께 상의하지 않았고 흔들리는 마음이 가는 대로 인간적 결정을 한 다윗은 블레셋 땅에 두 번째 도망가서 피하게 됩니다. 사울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이 너무 길어지고 힘들어 지니까 도망자 신세 잠시 면한다고 블레셋 땅에 가서 피하고 거기서 좀 쉬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곳에서 1년 반을 있으면서 사울의 추격은 잠시 피할 수 있었지만 블레셋 땅의 왕을 꼭 주인처럼 자기는 그 왕의 종처럼 살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싸우지 말아야 될 동족을 치러 가는 블레셋과 연합 전선을 해서 싸우려고 나아갑니다. 그런데 어제 말씀에서 배웠듯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막으시고 보호하셔서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도록 막아 주시고 빼내서 돌아가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까딱 잘못했으면 그 전쟁터에 휘말렸을 텐데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그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막고 피하게 하셔서 서로 동족끼리 죽이는 그런 끔찍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고 나니까 일어난 큰 사건이 바로 30장 말씀입니다. 곁 길로 가던 다윗에게 GPS와 같이 re-route해주셔서 전쟁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빼 주셔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아말렉 사람들에게 공격을 받아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다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살고 있었던 땅은 다 불탔고 자녀들과 아내들은 다 사로잡혀 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블레셋과 합류해 전쟁에 나아가서 서로 동족이 칼부림하는 데에서 단순히 건져 주시고 보호해 주신 것뿐만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블레셋에 나와 함께 전쟁하고 치고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려주신 겁니다. 전쟁 안하고 돌아왔는데도 이런데 하나님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특별히 다윗의 그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공격한 자들이 바로 아말렉이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여러 군데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항상 앞에서 대놓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노인들과 연약한 여인들을 공격하는 야비한 민족이었습니다. 정정당당하게 앞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몰래 뒤에서 싸우고 쳐들어와서 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녀들과 아내를 다 데리고 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하는 자들이 바로 아말렉 사람들입니다. 남자들이 다 떠난 마을에 와서 여인들과 자녀들을 다 사로잡아가는 악한 자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렇게 마을이 다 불타고 아말렉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과 아내들을 다 사로잡아 간 것을 보면서 다윗과 함께한 사람들의 두 가지 반응이 등장합니다. 첫번째로, 온 백성이 목놓아 울었습니다. 기가 막힌 상황 앞에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그냥 힘들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찾아 올 때 이렇게 울 힘이 없을 때까지 통곡하는 겁니다. 두번째로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힘들고 너무 슬프니까 지금까지 함께 했던 지도자 다윗을 돌로 치려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아주 절대 절명의 위기에 빠진 겁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모든 마을이 불탔고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혀간 외적인 문제와 함께 자기 백성들이 자기를 지금 돌로 쳐 죽이려는 내부적 위기까지 한꺼번에 찾아온 겁니다.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을 피한다고 블레셋으로 도망와서 이렇게 있는 것이 쉬는 거라고 생각했고 문제가 없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상하지 못한 더 큰 어려움과 문제를 직면하게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블레셋 땅에 피하러 가고 그곳을 가서 세상을 힘입으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결과였는지를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지금 다윗과 그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과 지금 함께한 600명의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다윗과 평생 함께할 아둘람 굴의 용사들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다윗을 찾아와 다윗을 두목으로 모시고 목숨 걸고 함께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이었습니다. 당신이 가는 곳에 나는 목숨 걸고 같이 가겠다고 평생 함께하기로 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생의 동지들이 지금 다윗을 배신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줄 것같이 충신으로 왔던 그들이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사람들은 평생 같이 하고 내 동지라 믿었던 충성된 사람들이 등 돌리고 배신하면 그때 오는 충격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 사람들은 배신하지 않고 나와 평생 같이 갈 것 같은 그 사람들이 등 돌리고 배신하고 돌 들어 죽이려 하는 다급한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때 모든 걸 포기하고 내려 놓으며 그냥 다 끝냈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의 평생 동지들이 돌로 쳐 죽이려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의 위대한 반응이 등장합니다. 목숨을 잃을 절대 절명의 위기, 그 다급한 상황 가운데 정신이 버쩍 들어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막다른 골목에서 내 사람들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평생 함께 할 동지라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돌을 들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상황에 직면하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정신 반짝 차리며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돌아서서 두 손들고 하나님에게 힘입고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게 다윗의 위대한 점이며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왕의 모습입니다. 우리 인생이 평탄할 때 하나님을 힘입고 하나님을 통하여 용기를 얻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자꾸 사람들과 상황에 기대고 힘을 얻으려 하는 모습, 힘이 있는 사람들에게 피하려 하고 용기를 얻으려는 모습으로 방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가야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이제 죽을 상황이 되어야 하늘 바라보고 엎드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존재들 이구나…눈에 보이는 상황을 힙 입고 인간을 의지하려 하면 이런 어려움을 당함을 반면 교사로 삼으십시오. 그렇기에 동시에 그러지 못할지라도 이렇게 넘어지고 위기가 찾아올 때 정신 차리고 주님 앞에 두 손 들고 돌아와 주님에게 힘을 얻고 용기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블레셋 땅을 두 번이나 넘어가 하나님이 아닌 블레셋 왕에게 피하고 힘입으려고 했던 다윗의 인간적인 생각과 결정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이런 처참한 결과를 통해 선명하게 말씀을 붙드십시오. 인생이 그렇게 크게 다급할 때에 주님께 돌아와 하나님 여호와를 힘 있고 용기를 얻는 기적으로 여러분들을 다시 세우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을 발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27장 말씀에서 두 번이나 실수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다윗의 모습을, 28장 말씀은 무당에게 찾아가는 사울왕의 파멸과 무너짐을 배웠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큰 승리 이후에 다윗에게 영적 침체가 찾아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뜻을 구하는 대신에 하나님에게 기대지 않고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도망자 신세를 면하겠다고 블레셋 땅으로 망명을 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블레셋 땅에 가서 잠시 사울왕의 추격을 피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싸워야 할 주적인 블레셋 왕을 주인으로 모시며 스스로 종이 되어 굴욕 당하게 되고, 거짓말로 둘러대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부끄러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다윗의 인간적 결정으로 찾아온 어려움의 피크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말씀인데, 바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블레셋 군대와 합류하며 이스라엘을 치는 군대에 함께 가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동족과 전쟁을 해서 동족을 죽여야 되는 전쟁에 따라가는 중인 것입니다. 그렇게 동족과 동족 사이에 피를 흘려서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는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과 결정으로 블레셋으로 도망간 결과 이런 말도 안 되는 난감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죠
지금 블레셋 군대는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진을 치고 전쟁할 준비를 다하고 있는데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싸울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왕이 자신의 평생 원수를 다윗에게 초점 맞춰 다윗을 쫓아다니느라고 정신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적인 블레셋을 추격하고 싸우는데 전혀 준비가 되지 않고 진짜 주적인 블레셋이 내려오는데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블레셋과 전쟁 직전인 이스라엘 군대가 머무르는 곳이 어디냐 하면 바로 이스르엘 샘 곁입니다. 이 샘은 예전에 기드온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물을 먹었던 그 300 용사를 뽑은 장소입니다. 그 300명과 함께 나가서 싸워 놀라운 승리를 주셨던, 그 놀라운 기드온의 승리를 경험한 곳이 바로 이스르엘 샘입니다. 그 기드온이 경험한 놀라운 승리를 간구하며 혹시 이 샘의 물을 바르고 나가면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지 않을까…미신과 같이 부적과 같이 그 샘 곁에 진을 치고 있는 거십니다. 이스라엘 군대들은 그냥 미신과 부적같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드온에게 주셨던 그 기적을 달라며 그 샘 곁에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왕에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갔고 무당을 찾아가 완전히 무너지며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하나님이 이끄시는 승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대비가 되지 않은 겁니다. 이처럼 전쟁 전세 자체가 거의 블레셋이 일방적으로 이길 될 정도로 모든 구도가 굳혀져 버렸습니다. 뚜껑만 열면 거의 블레셋이 백전백승을 하게 되어 있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동족을 죽이는데 같이 합류할 수밖에 없는 이런 진퇴양난의 빠지게 된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하시어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다윗은 큰 실수를 했고 잘못된 인간적인 결정을 했지만, 다윗과 사람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시고 인도하여 주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다윗에게 열어 주시는가 하면 블레셋 지도자들이 불만을 갖게 만드십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함께 전쟁하려는 걸 보면서 나가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예전에 사울왕과 함께하던 사람들 아니냐고, 물론 망명을 왔지만 언제든 배신할 수 있는 자들이니 함께 전쟁에 나갈 수 없다며 막아서는 겁니다. 블레셋 아기스왕이 다윗 편을 들며 망명한 이후에 나에게 충실했고 아무런 흠이 없으니까 전쟁에 같이 나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어명으로 말해도 소용 없는 겁니다. 전쟁 중에는 왕이 명령하면 웬만하면 다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앞두고 왕이 어명을 내렸는데도 블레셋 사람들이 노를 표출하며 왕의 명령에 막 따지며 절대 데려가면 안된다고 막아서는 겁니다. 분명히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고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는 인간적인 실수로 말미암아 나가면 안 되는 전쟁에 나가야 되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 실수를 넘어 다윗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블레셋 왕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듭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에게 거슬러 보이지 말고 그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는 명을 내립니다. 더 나아가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그곳을 떠나게 하십니다. 그렇게 딱 피할 길을 열어준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개입하심과 인도하심이 아니었으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블레셋과 함께 원하지 않는 전쟁에 나가 동족 이스라엘을 피 흘리며 죽이며 하나님이 슬퍼하실 일로 마무리될 수 있는 큰 위험에 빠졌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영적 침체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사랑하셔서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전쟁에서 떠날 수 있도록 피할 길을 인도하여 주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분노나 다윗을 절대 전쟁에 함께 데려가면 안 된다고 왕의 어명을 거역하게 만드는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어쩌다가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실수하고 넘어진 다윗에게 피할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과 연약함으로 나온 인간적 결정은 덮으면 덮을 수록 일이 커짐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이유는 연약함과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일하심을 믿기 때문이며, 피하고 떠날 길을 마련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루시고 일하시는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곁길로 갈 때마다 늘 우리에게 gps와 같이 re-route를 해주시면서 바른 길로 끊임없이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가 되시기를 믿음으로 사모하십시오. 내 실수와 실패를 넘어, 곁길로 가는 내 인생에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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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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