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권면하면서 피해야 할 육체의 소욕과 갈망해야 할 성령의 소욕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하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권세이고 또 하나는 소욕입니다. 중력, 위로부터 아래로 누르는 힘이 존재하는데 그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중력의 힘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우리가 피부로 감각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체로 존재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그건 바로 권세라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인 권세, 그래서 죄 아래 있을 때 죄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이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소욕이라는 것은 갈망, desire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ask, seek and knock,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바로 소욕입니다. 갈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이끌고 우리를 지배하는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나의 원함은 결국 나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은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력이 물론 음식을 통하여 우리가 육신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소를 공급받음으로 오지만, 동시에 그 운동력은 우리의 갈망과 열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우리의 삶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든지 육체를 따라 행하든지, 이 두 가지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육체의 desire가 있고 성령의 desire가 있다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 아래 있을 때는 성령의 권세가 나를 누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을 원하면 내 안에 갈망은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을 가지면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성령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내 갈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에 욕심이 있고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며 하늘의 내 삶에 그 갈망을 두고 살아가는 게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통해 이루어지는 육체의 일이 15개로 요약하여 등장하고, 성령의 소욕을 통하여 맺어지는 열매가 그 뒤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권세와 소욕이 합쳐져 우리 인생에 맺게 되는 결과물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결국 나의 인생에 내 삶을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권세와 갈망이 합쳐진 육체의 소욕 성령의 소욕,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지고 내 인생이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함께할 수 없고 서로 반대되고 충돌하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우리는 이것을 둘 다 붙들고 살고 싶어 하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사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중심에는 한 소욕만 앉을 수 있고 운전대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내 삶을 인도하고 주도하면 육체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하고 반대로 육체의 소욕이 키를 잡고 있으면 성령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성령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된다는 거예요. 둘이 서로 대적해서 서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호 보안적으로 둘 다 붙들고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성경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둘 다 붙드는 걸 성경은 불순종, 불신앙이라 그러고 우상숭배라 말합니다. 육체란 타락한 몸, 인간 존재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산다는 것은 땅으로만 사는 거며 율법으로만 사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땅의 것에 나의 갈망과 욕심을 모두 쏟아 부으며 사는 겁니다 그런 삶이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활성화되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삶입니다. 결국 육체의 지배를 받고 율법 아래 결박되어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로마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의 열망을 통해 육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인생의 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이 활성화되어 주도하는 인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열망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과 당연히 원수가 되는 겁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으로 살면 산다고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은 바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만 바라보고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 육체의 욕심만을 구하며 땅땅….거리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서 나의 인생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육체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아들의 영이 찾아오셔서 내 삶이 성령의 소욕을 통해 하늘의 것을 욕심 내며 하늘의 것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성령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소욕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육체 소욕은 주도권을 잃어버리며 더 이상 우리가 육체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이자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뭡니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게 바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육체의 일들이 열매로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성령 아래 살던 율법 아래 살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둘 중의 하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육체로 살래?, 성령으로 살래? 이것을 도전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성령의 소욕이 이끌고 주도하는 삶,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삶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셔서 그분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육신의 소욕이 나를 주도할 수 없고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소욕이 나를 주도하고 내 인생에 활성화되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활성화될수록 육체의 소욕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육체의 소욕이 시시 때때로 찾아 오긴 하지만 손님 같이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을 거스름을 삶으로 체득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내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신 바가 되며 율법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 성령의 소욕이 나를 이끌고 주도하는 삶을 현재형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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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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