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에 배신 당하고, 아들의 칼을 피해 도망갈 때, 정신이 번쩍 들어서 그동안 그가 놓치고 있었던 하나님 앞에서의 광야 정신을 회복하는 이야기입니다. 배신과 반역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 잘 아는 사람에게 당하게 됩니다. 특별히 아들이나 딸이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배신할 때 그 부모가 당하는 마음의 상처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을 겁니다. 그냥 쓰리고 아픈 정도가 아니라 평생에 멍이 될 정도로 자녀들이 부모를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은 큰 상처와 멍이 됩니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왕에게 불순종과 반역과 배신하는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 우리가 얼마나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배신하는가를 바라보는 거울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등 돌리고 떠나가고 하나님께 도망가며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자리를 계속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시지 않은 제물을 계속 탐하려고 하는 불순종, 심지어 안 되면 반역과 배신을 일으켜서 라도 그것을 취하려고 하는 압살롬의 모습이 바로 우리 모습임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이렇게 문제에 직면하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게 되는데 다윗왕에게 광야 정신을 깨우는 세 가지를 함께 말씀으로 새기며 우리가 이 광야 정신을 회복하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첫 번째, 다윗왕이 정신이 바짝 들면서 회복된 광야 정신은 바로 위기 가운데 순간적인 판단력이 민첩하게 회복된 것입니다. 전령이 와서 다윗에게 헤브론에서 일어난 반역과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 돌아갔음을 보고합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다윗은 하나님께서 찌르시는 말씀으로 정신이 확 든 것이지요. 예전에 광야에 있을 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영적 민감함과 민첩함 위기에 바로 반응하는 그 정신이 확 살아난 것입니다. 만약에 둔감한 다윗의 영적 상태로 있었으면 전령의 보고를 듣고도 아마 이렇게 얘기했을지도 모릅니다. 내 아들은 분명히 서원한 거 지키러 헤브론에 갔는데 좀 기다려 보지… 혹은 예루살렘과 헤브론은 거리가 있으니까 좀 지켜보자… 이렇게 얘기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둔감해졌던 영적 감각이 딱 살아나면서 순간적인 판단으로 지금 당장 도망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압살롬은 치밀하게 이 반역을 4년 동안 준비해서 백성의 마음을 다 사로잡아 갔다는 것도 깨달았고, 자신은 둔감해져서 백성들의 마음이 나에게서 돌아서고 있는데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민첩하게 판단하게 돼서 즉각적으로 피난을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다윗 왕이 평소에 이렇게 속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 있었으면 압살롬이 이렇게까지 반역 하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겁니다. 형 암논을 죽였을 때, 치리하지 않고 죄에 직면하도록 이끌지 못한 영적 둔감함이 이런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다윗은 그동안 그렇게 무뎌졌고 둔감해졌던 영적 감각이 아들이 배신하고 등 돌리고 나니까 확 살아나서 즉각적인 바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딱 찔러 주시며 찌르시며 그를 깨워 주시는 것이죠 두 번째, 다윗왕이 정신이 바짝 들면서 회복된 광야 정신은 위기 중에도 백성의 마음을 얻는 넉넉한 마음의 회복입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다른 사람들을 먼저 배려하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 광야 정신의 회복입니다. 갑자기 왕이 준비되지 않은 채 피난 가려고 하니 얼마나 경황이 없겠습니까? 그것도 아들의 반역을 피해 도망가니까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합니까? 이런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다윗 주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군대는 다 어디 갔는지 오늘 말씀은 의도적으로 블레셋과 가드 이방인들의 군인들만 다윗 주변에 남아 있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그 위기 가운데, 눈앞이 캄캄해 질 수 있는 그 절박한 상황에 내 문제에 압도 당하지 않고 이방 군인들을 향해 나는 지금 도망가서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나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며 배려하는 겁니다. 지금 다윗왕 자신의 코가 석 자이고 넉넉하지 않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데 누구를 배려하고 있습니까?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있는 것이죠. 내 마음이 넉넉하고 마음에 여유가 있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게 아니라 내 코가 석 자이고, 마음에 여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품을 수 있는 그 기적의 마음이 바로 광야 정신이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의도적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자이고, 다윗 왕은 그 위기 가운데 백성의 마음을 얻고 있는 자라는 대조입니다. 백성의 마음은 얻는 것이지 훔치는 게 아닌데 압살롬은 훔쳐서 그들을 지금 속이고 있는 것이고 위기 가운데도 다윗 왕은 지금 백성의 마음을 얻고 초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에게 찾아온 광야 정신은 왕궁을 떠나서 광야로 나아가는 겁니다. 왕궁에 있었던 다윗이 이제 광야 길로 가게 됩니다. 상황적으로 환경적으로 봤을 때는 너무나 안 좋은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고 창피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광야로 나아가며 믿음의 반응을 보입니다. 광야길로 나아가면서 그동안 내가 얼마나 잘못했었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둔감했었는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일을 이렇게 방치했는지… 압살롬의 마음에 불이 왕궁에 붙을 때까지 나는 왜 방치했는가를 철저하게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예전에 다윗이 도망자로 헤멜 때 광야 정신이 광야 정신이 그의 삶을 이끌었었습니다. 아둘람 굴로 피신 했을 때 그를 따라오는 사람들을 거두고 외면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품고 아둘람 공동체를 이뤘던 옛적 모습이 광야 정신 이었습니다. 지금 왕궁에서 살면서 영적으로 둔감해진 다윗왕은 오랫동안 이 광야 정신을 잃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등의 칼을 딱 꽂으니까 그동안 그 잠자고 있던 광야 정신이 딱 회복되는 겁니다. 그가 원해서 가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도망가지만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광야 정신을 회복하며 그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다윗왕은 더 강해집니다. 위기 가운데 그는 잃어버렸던 광야 정신이 돌아옵니다. 위기 가운데 그가 놓치고 있었던 그 영적인 민감성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하나님께 합한 자라고 부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완벽해서도 아니고 실수와 문제가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기 가운데 깨어나며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었고, 위기 가운데 말씀의 반응했으며 위기 가운데 광야 정신으로 돌아가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광야 정신을 회복하는 은혜의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일이 터져야만 정신 차리고 돌아오는 대신, 평상시에 일상의 평탄함 가운데 나를 깨우는 영적인 훈련으로 광야 정신을 무장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가 나의 둔감해진 영을 깨우며 민감해지는 성도가 되며, 마음에 여유가 없고 넉넉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코가 석 자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품고 살아가는 광야 정신이 나에게 회복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될 광야 정신이 무엇인가 말씀에 깊이 새기며 말씀이 시간 나를 찌르고 나를 깨우며 나에게 광야 정신을 회복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15장 말씀은 압살롬이 안타깝게도 아버지 다윗왕에게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이야기입니다.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압살롬을 통하여 단순히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역하는 것을 넘어, 압살롬이 바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우리들의 모습임을 깨닫고 깊이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 7년을 비대면 아들로 기다리다가 마침내 다윗 왕을 만난 이후, 죄에 직면하고 회개하고 영적 다르심으로 치리하기를 실패한 이후에 일어납니다. 압살롬에게 바른 길과 영적인 다스림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죄에 대해 가볍게 여기고,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은 자리를 탐하여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는 반역과 불순종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있었던 분노의 불과 권력을 지향하는 불이 화학 작용으로 일어나 폭발하여 압살롬 마음의 불이 이제는 왕궁을 태울 차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있어 주도 면밀하고 치밀하게 나아갔던 세 가지의 반역과 불순종의 모습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첫 번째, 압살롬의 불순종과 반역은 자기를 위해서 사람들을 모으고 군대를 세우는 것입니다. 집에서 훈련시킨 군인, 가신 혹은 호위병이라고도 하는 군대를 사적으로 세우는데 그 목적이 철저히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한국에 깡패들 보면 꼭 혼자 다니지 않고 뒤에 똘마니들을 같이 데리고 다닙니다. 마치 자기가 왕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가 바로 깡패들인데 압살롬이 하는 행동이 다 이런 깡패 흉내 내면서, 자기가 이 지역에서 넘버원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 시각 효과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얻고 세우는 것인데 하나님께 불순종과 반역 하면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나의 사람들을 자꾸 세우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의 인생을 살지 아니면 나만을 위해 살지가 결정되어야 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오직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나만을 위해 힘을 모으고 나만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고 군사력을 모으는 압살롬과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끊임없이 많은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자기를 위해서만 살고, 자기의 사람들을 세우고 자기의 군대를 늘리며 나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것, 그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과 반역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압살롬의 반역과 불순종의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순리와 정도로 얻어야 하는 것이지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거나 뺏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얻는 대신 압살롬은 백성의 마음을 훔치고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지금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도둑질 하느냐 하면 왕에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재판을 들어줄 사람을 왕이 세우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가는 대신 나 압살롬에게 오라고 미혹하고, 내가 다 해결해 주겠다고 흔드는 것입니다. 왕에게 나아가야 될 사람들을 가로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나에게 있게 만드는 것이 불순종과 반역입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도둑질하는 일을 4년이나 하면서 민심이 자신에게 쏠리도록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본인이 왕인 것처럼 본인이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처럼 만들어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도둑질하는 겁니다. 이 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가야 되는 마음이 있고 열망이 있는데, 이 세상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빼앗고 있습니다. 네온 사인의 수많은 광고들, 홍수와 같이 몰려드는 세상의 미혹들을 보십시오. 다 마음이 가야 될 곳에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가도록 내 마음을 빼앗는 것들입니다. 빼앗긴 마음은 나중에 결국 반역과 불순종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번째, 압살롬의 반역과 불순종의 모습은 하나님의 이름을 대면서 거짓말 하는 악행입니다. 권력을 향하여 얼마나 이렇게 비정상적인 것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며, 민심이 본인에게 나아오도록 다 가로채고 나서 드디어 불순종과 반역의 일을 벌입니다. 압살롬이 헤브론에 가려는 목적은 아버지 다윗왕에게 반기를 들기 위한 반역인데, 하나님과 서원한 일을 하려고 한다며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거짓으로 서원 하는데 전혀 문제의식이 없는 것입니다. 형 암논을 살해한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 했어야 하는데, 죄를 가볍게 여기도록 방치하니까 심지어 하나님 이름 대고 거짓말을 하는데도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고 하나님 이름으로 속여도 상관없는 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압살롬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며 자기를 위한 도구화 시키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자리로 자기 마음대로 올라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왕권을 올라가 아버지 다윗왕의 등에 칼을 꼽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게 분명한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든 기뻐하시지 않던. 압살롬은 상관이 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내 뜻에 내가 가는 길에 하나님이 맞춰줘야 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자처럼 살아가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대고 거짓말을 하는데도 아무런 마음의 자책이 없는 영적으로 화인 맞은 자가 되 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아버지 다윗왕의 영적 둔감함입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불순종의 속마음을 바라보지 못하는 다윗의 영적 무지함입니다. 자기 아들이 하나님에게 서원할 자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데, 아들의 마음속에 권력을 향한 불이 일고 있음을 읽었어야 하는데 아버지 다윗왕은 영적으로 둔감해서 압살롬에게 헤브론으로 평안히 다녀오라….그냥 가라는 거예요. 압살롬은 전혀 영적인 자가 아니었는데 서원 한다는 아들을 의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 지금 본인에게 민심이 떠나가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전혀 읽을 수 있는 영적 민감성이 다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영적 둔감함이 다시 한번 압살롬에게 죄와 반역의 연결 고리로 이용 당하는 겁니다. 아버지로서 지도력과 영적인 다스림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니까 자식들이 계속해서 아버지를 죄의 연결 고리로 이용해 먹는 겁니다. 이 압살롬을 통하여 드러나는 인간의 불순종과 반역의 모습을 마음 깊이 새기십시오. 우리는 마음을 훔치는 자가 아니라 마음을 얻는 자입니다. 나를 위해서 힘을 세우고 군대를 세우고 사람을 세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우고 하나님의 군대를 세우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 욕심을 위해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 것이 얼마나 큰 반역이고 불순종인지 깨달아 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도록 말씀의 빛을 비추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학자들 중에 압살롬을 상처 입은 아들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원래 괜찮은 아들이었는데 아버지 다윗이 잘 치리하지 못하고 잘 관리하지 못하고 특별히 아들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빗나갔다는 겁니다.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너무 컸는데 그 아들을 인정해 주지 않아서 결국 비뚤어진 아들이 되어 나중에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고 해석하는 겁니다. 압살롬의 모든 일탈과 잘못들이 마치 아버지 잘못인 것처럼 몰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좀 부분적으로만 지엽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란 생각을 합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잘못 되는데 아버지 다윗의 잘못과 실수, 잘못된 치리와 아들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단순히 말씀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자녀 교육의 문제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전체적인 큰 그림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압살롬과 다윗의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증언하면서, 압살롬 인생을 이끼는 치밀한 권력 지향적인 욕구가 이 모든 문제들을 뿌리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자리를 자기가 스스로 올라가려고 탐하는 압살롬의 모습은 악한 인간의 모습을 대표하는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압살롬은 외적으로 봤을 때 사람들에게 매력 있고 끌리며 호감을 가게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사람들을 끄는 외적 매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름다운 외면과 달리 그의 내면은 완전히 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압살롬의 마음에 자리잡은 악한 생각은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아도 내가 원하면 왕의 자리 내가 올라간다는 교만입니다. 그 악한 마음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은 자리를 자기 스스로 올라가 왕이 되려고 하는 그 모든 권력 지향적인 욕구입니다.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치밀하게 권력 지향적으로 살면서 모든 사람을 도구로 삼고 심지어 걸림돌이 되면 가족도 죽여도 되는 인생, 내가 원하면 어떤 사람도 나를 가로막을 수 없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권력 지향의 욕구가 가득한 자가 바로 압살롬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권력을 위해서는 모든 것도 할 수 있는 사람, 형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심지어 나중에 아버지를 향하여 등에 칼을 꼽는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 악한 생각이 압살롬을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이런 내면의 모습은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고, 사람들을 도구로 삼으며, 항상 초 강수를 두는 극단적인 행동을 반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적어도 세 네가지 사건들을 통해 압살롬의 극단적 행동으로 이끄는 깨지고 망가진 내면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합니다. 첫번째, 압살롬은 자기 딸 이름을 다말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보통은 아들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이 그 당시에 일반적인 일인데, 아들 셋의 이름은 하나도 없이 딸의 이름이 다말임을 성경이 증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딸의 이름이 다말이라는 것을 성경이 의도적으로 증언하는가 하면 딸의 이름이 압살롬의 내면을 드러내는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딸의 이름을 다말로 지은 압살롬을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친오빠가 동생을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 딸의 이름을 여동생 이름과 똑같이 지었을까…여동생을 향한 오빠의 사랑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권력 욕구를 감추기 위해서 딸 이름을 다말로 지은 것이지요. 여동생 다말의 욕보인 암논을 죽이게 된 본질적 동기는, 동생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원래 죽이고 싶었던 사람을 동생 사건을 이용해 제거하는 것 뿐입니다. 압살롬은 자신이 왕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암논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오래전부터 있어 왔었고, 여동생을 빌미로 이용하여 그것을 좋은 기회로 삼은 것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신은 여동생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저 형을 죽였다고 자기를 정당화하고 포장하기 위해 자신의 딸 이름을 다말로 짓는 겁니다. 자기 여동생의 이름으로 두는 것입니다. 이게 압살롬의 치밀하고도 권력 지향적 모습이자, 초강수를 두는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두 번째 압살롬의 초강수는 요압의 밭을 불태우면서 의견을 관철시키는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7년동안 비대면으로 다윗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속에 불이 올아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돌아오는데 주선했던 요압을 만나기 위해 몇 번 전갈을 보냈는데, 요압이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전갈을 보냈는데 만나 주지 않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까 또 다시 압살롬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초강수를 드는데 바로 요압의 밭에 불을 질러 버리는 겁니다. 불을 지르고 나니까 요압이 그제서야 찾아오는 거예요. 이렇게 압살롬은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기 목적을 이룬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압살롬의 내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하는 극단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을 지르면서라도 원하는 것을 얻는 압살롬의 초강수는 사실 압살롬의 마음에 지금 이렇게 불이 타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언어이기도 합니다. 세번째, 압살롬의 초강수는 자신이 죄가 있으면 죽이라는 선언입니다. 요압에게 나를 왜 여기 데려왔냐고 따지는 겁니다 나에게 길을 놔줬으면 끝까지 중재를 하든지 하라고 압박합니다. 이제는 내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이게 그의 목적이죠.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말하면서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선언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냐 하면 나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는 사람의 말이죠. 나는 죄 없으니까 아버지가 날 치실려면 치시라는 초강수인 것입니다. 압논을 죽인 것은 피해자인 우리 집안에 원수를 갚은 것 뿐이고, 모든 왕자들을 다 죽일 수 있었는데 암논만 죽였으니까 나는 정당하다는 겁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는 대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대신 나는 죄가 없다고 착각하며 오히려 큰 소리 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압살롬의 극단적인 성향이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초강수를 두는 그의 지나친 권력욕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요압이 중재해서 결국 다윗이 압살롬을 만나게 되는데 아무런 영적 다스림을 보여주지 않은 채 만난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에게 죄에 대해 직면하게 한다든지,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던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죄가 있으면 죄값을 받게 하던지, 죄에 대한 치리나 다스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과 입을 맞추는 것을 통하여 아버지 다윗은 그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일차적으로는 아버지의 인정에 목말랐던 압살롬이지만 본질적으로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는 왕의 권력에 가장 목마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권력에 대한 잘못된 목마름이 온 집안에 불을 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왕의 자리에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는 이런 악한 습성을 가지고 있는 압살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직면하고 회개하는 대신, 죄를 덮어버리고 문제 없다고 소리치는 압살롬의 모습이 나의 부끄러운 현주소임을 바라봐야 합니다. 자기의 목적으로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초강수를 두면서 파멸을 향해 나아가는 그 무너진 내면이 나의 내면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고 세우시지 않는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면 망한다는 것을, 죄를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아니하면 무너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다는 속마음을 읽고 과부 여인을 동원해서 다윗왕의 마음을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다는 것은 단순히 도망간 아들이 보고 싶다는 그리움을 넘어서는, 나를 이어 왕이 될 후보 중에 가장 유력한 사람이 아들 압살롬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하고 길을 찾는 대신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알아차린 요압이 다윗의 마음을 열어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이야기 같이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알고 보니까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다윗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윗 왕이 눈치채자 과부 여인의 속내가 들어가는 핵심을 드디어 정확하게 말합니다. 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십니까…왜 압살롬을 집으로 돌아오게 안 하십니까…이 여인의 말에는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압살롬을 다윗이 쫓아낸 것이 아니라 압살롬이 형을 살인하고 스스로 도망갔다는 것을 왜곡하는 겁니다. 본인이 잘못한 것을 알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아버지 다윗 왕 앞에서 도망간 것입니다. 그렇게 죽을 죄를 졌으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의 용서를 구하면서 죄에 대해 직면해야 하는데, 압살롬은 지은 죄에 대해 직면하지 않고 회개 없이 그냥 도망갔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죄를 짓고 나서 도망가거나 숨거나 아닌 척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핑계를 대는 그 뻔한 모습을 압살롬이 보인 겁니다. 그런데 마치 다윗 왕이 막은 것처럼, 쫓아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반쪽 진리인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전혀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비슷한 얘기를 해서 다윗을 책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영적으로 잠자고 둔감한 다윗에게 찌르시는 말씀으로 진리를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이 여인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그냥 다윗 마음속에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일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속에 있는 것을 꺼내 주는 사람의 뜻과 계획만 있는 것입니다.
요압이 왜 이 여인을 다윗에게 데려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게 하고 압살롬을 데려오게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다윗왕을 깨우도록 하게 시키셨는가? 나에게 맡겨 나서게 하시는 일인지, 뒤로 물러나야 할 일인지…전혀 하나님과 상의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정치적으로 그림을 보니까 다윗왕 다음에는 이 압살롬이 왕이 될 확률이 제일 높은 것이 빠삭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차기왕 후보로 압살롬이 1번이라는게 가장 유력해 보이는 것이고, 그 왕의 후보를 내가 데리고 오는데 다리를 놓게 되면 결국 그게 나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게 할 거라는 것을 머리를 굴려서 사람의 뜻으로 이 여인은 고용된 것 뿐입니다. 이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뜻이라든지 하나님의 방법이라든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려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요압이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했다는 마음을 읽고, 거기에 자기의 공을 얹어서 그냥 사람의 뜻으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이 여인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요압의 정치적 계산 대로, 이 여인을 통하여 결국 다윗의 마음을 흔들게 됩니다. 다윗왕은 이 모든 게 요압이 시킨 거라는 것을 갑을 잡고, 압살롬을 데려와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데려오도록 허락합니다. 결국 속마음이 압살롬에게 마음이 향했는데 혼자 가기는 쑥스러우니까 뒤에서 등 떠밀어 가지고 압살롬을 데려오는 그런 모양새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돌아왔습니다. 어렵게 압살롬을 데려왔으면 그 다음에 무언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렵게 데려온 거는 자기 뜻대로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데리고는 왔는데 아버지를 볼 수 없는 비대면 아들이 되게 명하는 것입니다. 사실 압살롬은 데려오면 안 되는 아들입니다. 왜 데려오면 안 되는 아들이냐 하면 압살롬은 단순히 그냥 살인한 것이 아니라 왕자를 살인한 살인자였습니다. 왕의 아들을 살해한 자를 다시 왕으로 세울 수 있을까? 그걸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다윗은 아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고 잘못을 직면해서 죄를 용서를 구하지도 않고 그냥 도망가 버렸어요. 그게 다윗이 압살롬을 왕궁에 받아줄 수 없는 본질적 이유였습니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왕궁의 정통성이 무너지며 하나님이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지 않으실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나는 세우고 싶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이 아들을 세우지 아니하실 것을 이미 다윗은 알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는 아들은 왕으로 세우면 안 되고, 마음도 압살롬을 향하면 안 되었는데, 결국 자신의 마음이 향한대로 압살롬을 데려온 것입니다. 왕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실 것을 알면서도 압살롬을 자기 마음에 원해서 요압을 통해 데리고 왔어요. 그러면 책임을 지고 결단을 하고 영적 다스림을 보여줘야 하는데, 데려왔는데 자기 얼굴은 보이지 않게 하는 겁니다. 다윗은 정확하게 둘 중에 하나의 영적 지도력을 보여 줬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아예 압살롬을 데려오지 말든지, 아니면 압살롬을 데려왔으면 아버지로서 아들과 재를 무릅쓰고 죄에 직면하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과 길을 구하던지….이 둘 중에 하나를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하나님 앞에서 직면하고 회개할 기회를 박탈하고, 아버지 앞에 죄를 직면하고 죄를 회개하여 새출발 할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겁니다. 다윗은 그 아들 암논이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도 화만 내고 영적 다스림으로 치리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압살롬이 살인죄를 저질렀을 때도 다윗은 슬퍼만 하고 영적 다스림으로 치리하지 않았습니다. 그 도망간 압살롬을 데려왔는데, 하나님 앞에서 새 출발할 수 있게 도와주는 영적 다스림이 없는 것입니다. 데리고는 왔는데 용서는 없는 아들이 되는 겁니다. 데리고는 왔는데 마음으로 받아주지 않는 거죠. 하나님 앞에 서서, 아버지 앞에 서서 직면하고 회개와 새 출발의 기회를 줘야 되는데 그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것, 이게 다윗왕의 집안 문제에 있어 전반적인 실책이었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신 다스림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다스림의 권세로 첫 번째는 내 마음의 감정이 나를 휩쓸리지 않도록 그 감정을 다스리는 권세와 힘을 주신 겁니다. 감정과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다스림의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영적 다스림의 권세입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다스림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바로 이끌어 진리 가운데 옳고 그름을 알려주며,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분별하도록 다스리고, 죄 가운데 숨거나 도망가지 않고, 죄에 직면하며 회개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영적 다스림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왕과 같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영적으로 다스리지 아니하면 아이들은 혼란이 오는 겁니다. 데려 오기는 왔는데 용서도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란….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혼란…. 데려왔으면 그 죄를 직면하게 하든지 안 되면 아예 데려오지 말든지 정확하게 다스림의 권세를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다윗왕의 실책을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향하는 곳에 내 마음이 향하고, 주님의 뜻에 나의 뜻이 조율되며 영적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 왕은 모든 것을 다 가진 절대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대는 평화가 있고 통일 왕국으로 모든 것이 안정화되어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대단하고 화려하고 모든 능력을 가진 왕인 것 같았지만 다윗왕의 집안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문제가 계속 터졌습니다. 그 문제의 원인은 우선 본인 자신의 살인죄와 간음죄에 있었고, 결국 죄의 상처들이 자식들에게 영향을 미쳐 자녀들 사이에 간음죄과 살인죄가 일어났습니다.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어린 아들을 잃었고, 또 큰아들 암논을 잃게 되었습니다. 딸은 부끄러운 일을 당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 되었고, 압살롬은 형을 죽인 후 도망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펑펑 터지고 있고 마음이 참담하기도 하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시간을 다윗왕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들고 어려울 때 다윗왕의 마음이 향하는 자는 바로 도망간 아들 압살롬이었습니다. 물론 압살롬이 잘못하고 문제가 많이 있고 형을 죽인 후 도망갔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무엇보다도 자식에게 문제가 있을 때 부모는 그것을 부모의 탓으로 돌리려는 천성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부모의 잘못이 아닌데 꼭 나 때문에 자녀가 잘못된 것처럼 모든 것을 껴안으려는 좋게 얘기하면 사랑이고 안 좋게 얘기하면 잘못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죠. 암논이 다말을 욕보일 때도, 압살롬이 암논을 죽일 때도 결국 다윗의 명을 따라 움직이게 되었기에 다윗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결고리가 된 것입니다. 모두 아버지 다윗을 연결고리로 살인죄와 간음죄가 일어났기 때문에 지금 다윗의 마음에는 결국 이게 나 때문에 생긴 거라는 자책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마음 같아서는 지금 압살롬을 당장이라도 데려오고 싶지만 이게 왕권의 정통성이라는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세운 나라에는 정통성이 중요한 문제인데 그 압살롬은 단순히 살인을 한 게 문제가 아니라 왕의 후보인 세자를 지금 살인한 것이기에 정통성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죄를 직면하지도 않았고 아버지에게 살려 달라고 무릎 꿇고 빌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아들을 바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데려올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누가 읽었는가 하면 군대장관인 요압이 읽었다는 겁니다. 요압이 다윗왕의 속마음을 읽고 나서, 어떤 일을 벌이냐 하면 한 여인을 고용하는 겁니다. 과부인 그 여인에게 상복을 입혀서 왕에게 가서 요압이 시킨 말을 그대로 가서 하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명을 받은 대로 이 여인은 다윗왕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지금 이 여인이 다윗왕에게 하는 이야기와 예전에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한 이야기 사이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직접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을 통해 다윗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고 찔러서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또 다른 공통점은 다윗왕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남의 이야기 듣듯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도, 오늘 이 여인의 이야기도 들르면서 다윗왕은 이게 자신의 이야기인지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사람은 당장 죽여야 된다고 화를 냈었고, 오늘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세번이나 어명을 내리게 됩니다.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게 되면 마음에 닿지도, 마음을 찌르지도 않은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대할 때 남의 이야기 듣듯이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로 들리면 대단하지 않은 가벼운 이야기로 들리고, 그게 내 마음에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와 오늘이 여인의 이야기에 공통점입니다. 동시에 차이점도 있는데, 나단이 이야기를 가져온 이유는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진리 선포였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다윗왕이 죄에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리에 직면하게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 이 여인이 가져온 이야기의 목적은 다윗왕이 진리에 직면하게 하기 위함도,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다윗왕의 속마음을 대신 누군가가 멍석을 깔아주고 추진해 주기 원함을 드러내 줄 뿐입니다. 요압이 이 여인을 고용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해서도 아니고, 다윗왕을 사랑하기 때문도 아니고, 철저하게 요압 자신을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큰아들 암논이 죽은 이 시점에, 다윗 왕조의 다음 왕권을 생각해야 되는데 머리를 굴려보니까 가장 유력한 후보가 압살롬이라는 것을 요압은 읽은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을 어떻게 다음 왕으로 세울 것인가를 고민하며 차기 왕조를 고려하여 포석을 두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 여인의 이야기의 목적은 철저히 자기 성공을 위한 것이며 출세와 권력을 위한 요압의 열심일 뿐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내 마음의 속도 읽을 줄 알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입니다. 지혜롭다는 건 결국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자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정말 지혜로운 자입니다. 반면에 자기의 속마음도 읽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속마음도 읽지 못하고 하나님의 속마음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압은 다윗 왕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나의 속마음을 읽어서 이렇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줄을 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내가 힘과 권한이 있을 수록 나의 마음을 읽고 나를 위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이야기를 가지고 와서 추진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힘과 권한이 있을 때 요압 같은 자가 나의 마음을 읽으며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않고 분별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라기는 다른 사람 속마음을 읽어 이득을 취하는 인생을 넘어, 하나님의 속마음을 읽는 사람이 되어 진리가 나를 깨워주며 하나님 말씀에 늘 묶여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왕의 간음죄와 살인죄로 무너진 후, 안타깝게도 그 아버지의 살인죄와 간음죄가 자녀들을 통해 집안에 반복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을 말씀으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큰아들 암논을 통해 간음죄가 일어났고, 2년 후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압살롬을 통하여 살인죄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오늘은 압살롬의 살인 죄가 일어난 후 그 사건 마무리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겉으로는 여동생의 안갚음을 위해서, 여동생을 그렇게 상처 준 사람을 가면 두면 안 된다는 복수심으로 형 암논을 살해했지만, 사실 압살롬은 원래 암론을 죽이고 싶고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왕이 되고 싶어하는 야욕이 있었기 때문에 그 형이 있으면 자기가 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여동생 다말의 사건을 통하여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빌미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동생의 상처를 이용하여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도망갑니다. 도망간 곳은 어머니의 친정집, 즉 외가집으로 도망을 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살아남은 다른 왕자들을 다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왕자들이 돌아오는 걸 보고 왕자들도 대성통곡했고 다윗왕도 대성통곡을 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큰아들 암논이 죽은 것은 때문에 대성통곡을 하는 건지, 압살롬이 이렇게 배신을 해가지고 형을 죽인 것 때문에 통곡을 하는 건지, 아니면 모든 왕자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그나마 한 왕자만 죽고 나머지는 살아 와서 대성통곡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 세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죽은 줄 알았던 왕자들이 돌아왔을 때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며 모두 대성통곡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윗왕이 그렇게 슬퍼하고 대성 통곡하고 끝났다는 겁니다. 암논이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다윗왕은 심히 노하고 화를 내고는 끝났습니다. 징계하지도 치리하지도 않은 채, 그 큰 아들을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면하도록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 압살롬으로 향하여 복수와 분노의 칼을 더 갈게 만드는 일이 됐는데 압살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큰 형을 살인하고 도망갔는데 그냥 슬퍼하고만 있지 징계하거나 치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압살롬을 위해서 그냥 슬퍼만 하는 거예요. 다른 기준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바른 우선순위도 보여주지 못한 것이죠. 지금 압살롬은 세자를 죽인 반역에 왕명을 어긴 반역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인한 자입니다. 그러면 그 잘못에 대해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죄용서함을 받도록 도와 줬어야 되는데 압살롬이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직면하도록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암논에게서도 그 일을 하지 않았고 압살롬에게서도 그 일을 하지 않은 것이 다윗의 큰 실수였습니다. 다윗은 그저 압살롬을 슬퍼하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들들에게 죄를 위한 연결 고리로 계속 이용되는 영적으로 둔감한 왕, 영적으로 둔감한 아버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되는 건 이 세상에서 바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무엇이고 누구인가를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죄을 지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없는 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직면하여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고 죄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그 바른 기준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강함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나의 약함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강함에 연결 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것 끊임없이 고백하며 살아가는 게 하늘을 위로를 받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이것을 하지 않은 겁니다. 그냥 화만 내고 끝내고 그냥 슬퍼만 하고 끝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간 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놔두고 방치한 채, 그저 슬퍼만 하고 그리워만 하는 아버지 다윗왕의 영적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윗의 잘못된 마음을 지금 콕 집어서 얘기하면서 이게 다윗왕의 매우 심각한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오늘 말씀에 의도적으로 세번이나 압살롬이 도망한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압살롬이 세자를 죽이는 큰 살인죄를 범하고 아버지에게 반역한 대역 죄인으로서 압살롬은 도망했습니다. 1차적으로는 어디를 도망한 것인가 하면 아버지 다윗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것입니다. 근데 그건 표면적인 도망감이고 성경이 말하는 본질적인 도망은 뭡니까? 그렇게 죄를 짓고 살인을 하고 나서 압살롬은 어디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직면하여 서는 대신 하나님 아버지 낯을 피해 숨고 도망가는 그 모습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죄를 진 인간들이 하는 보편적 무너짐의 패턴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낯을 피하여 도망간 아들을 치리하거나 바른 기준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냥 슬퍼만 하고 그냥 그리워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망간 압살롬이 과연 회개를 했을까요? 절대 안 했을 겁니다. 핑계와 정당화의 논리로 아담과 하와 같이 있었을 겁니다. 나와 우리 집안은 피해자라는 논리를 가지고, 여동생의 앙갚음을 한 것 뿐이라며 자기의 살인을 정당화하고 있었을 겁니다. 압살롬은 살인 죄를 지은 후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고 죄에 직면하지도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결국은 더 큰 문제로 터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죄에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채 죄의 권세에 사로잡힌 압살롬은 나중에는 더 크게 무너지고 더 크게 집안을 풍지 박산으로 만드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암논의 간음과 압살롬의 살인을 바라보면서 다윗의 간음죄와 살인죄가 그 집안을 얼마나 흔들고 힘들게 했는지를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너희 집안에서 영영이 칼이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 말씀하신 그 경고대로 그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이 안타까운 모습을 거울로 삼기 원합니다. 우리가 압살롬과 같이 이렇게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넘어지고 무너진 그 현장에서 우리가 하는 제일 쉬운 방법은 늘 하나님 앞에서 피하고 도망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낯을 피하고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도망가는 것입니다.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하지 않고 그냥 나는 억울하다고 피해자 멘탈리티에 사로잡혀 핑계대고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파괴적이고 심각한 죄의 권세가 나에게 역사하려 내 인생을 사정없이 흔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죄에 직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은 채 숨고 도망가는 인생은 반드시 망합니다. 죄의 권세에 사로잡혀 반드시 더 큰 문제로 터지게 됩니다. 이 시간 죄를 지은 현장에서 도망가지 말고 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프고 힘들더라도 나오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나아와 회개하며 그 죄 씻음 받으십시오. 그래야 여러분들 새 출발할 수 있으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됨을 잊지 마십시오. 숨거나 도망가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주님 앞에 순전하고 깨끗한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쓰임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윗의 집안에 드리우고 있는 그 죄의 깊은 아픔에 대해서 함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하나님을 향한 범죄는 간음죄와 살인죄로 밧세바를 간음했고 그리고 남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물론 다윗왕이 직접 죽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령을 통해 전쟁터에서 죽음을 당한 우리아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이 죽인 것이라고 정확하게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다윗 집안에서 이 간음죄와 살인죄가 반복되고 있고 이 일로 집안이 큰 여러움에 처하게 됩니다. 간음죄는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범함으로, 살인죄는 바로 오늘 말씀에서 압살롬을 통해서 들어오게 됩니다. 압논이 다말을 범하는 이야기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는 이야기도 성경은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압살롬이 복수의 칼을 간지 2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여동생 다말이 부끄러운 일을 수치를 당하고 욕보인 것을 참느라 아마 압살롬은 속병 걸리고 화병이 걸렸을 겁니다. 이렇게 압살롬이 칼을 갈면서 그렇게 죽이려고 복수를 하려 하는데 2년 후에 마침내 그 기회가 오게 됐는데 그 기회가 바로 양털을 깎는 시즌의 일입니다. 그 당시에 그 이스라엘에서 양털을 깎는 시즌은 1년에 한번 있는 축제 시즌이라고 합니다 1년에 한 번씩 양들을 털을 다 미는데 그 털을 밀어서 양모로는 옷의 재료로 사용하고 그렇게 털을 밀어 주게 되면 여름철에 피부병 예방에 굉장히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양털 깎는 시즌은 1년에 한번 중요한 시즌이고 축제 기간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이 축제 기간인 양털깎는 시즌에 악한 꾀를 동원해 압논을 죽이려고 모의하는 것입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는 간음죄에도 악한 꾀가 동원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암살롬도 암논을 죽이기 위해 악한 꾀를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 양털을 갖는 축제 시즌에 지금 압살롬이 왕과 그 모든 형제들을 다 초대합니다. 그런데 다윗왕에게 압살롬의 그 말이 순수하게 들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우리가 너에게 누를 끼칠까봐 다 갈 필요가 없다…말했지만 아버지 다윗왕이 보기에도 좀 조심스러운 면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가지 않겠다고 거절하고 여기서 그냥 축복기도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나의 형 암논은 함께 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암논을 향해 나의 형…이라고 말하며 콕 집어서 암논이 함께 가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압살롬의 이 이중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분명히 다윗은 이게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겁니다. 왜 양털 깎는데 굳이 형이 같이 가야 하느냐…묻게 되는 것입니다. 2년전에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암논만 보내면 위험하다는 생각을 다윗은 분명히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실수한 건, 분명히 마음에 뭔가 불길한 조짐이 있었고 좋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간청하니까 아들 좋은 대로 그냥 들어주는 겁니다. 대신 암논만 보내는게 아니라 왕의 모든 아들들 모든 왕자들을 함께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함께 보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보낸 것입니다. 그게 다윗의 결정적 실수였습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할 때 아버지 다윗왕을 간음죄의 연결고리로 사용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압살롬은 그 형 암논을 죽이려는 계획에 아버지를 연결고리로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자녀들이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는데 이용당하는 연결 고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번 당한 걸로 충분한데 또 다시 다윗왕은 아들 압살롬에게 연결고리로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계획대로 양털깎는 곳에 함께 온 암논, 그 기회를 압살롬은 죽일 기회로 삼았습니다. 압살롬의 종들, 즉 집에서 기르고 훈련한 가신들을 통해 축제에서 암논에게 술을 거하게 먹이고 취했을 때 죽이라고 명합니다. 다윗이 우리아가 처음에 집안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 다음에 했던 악한 꾀가 바로 우리아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들 압살롬의 악한 꾀는 암논에게 술취하도록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암논은 큰아들이자 세자였습니다. 왕의 후보였기 때문에 그 세자를 치는 것은 왕에 대해서 반역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왕의 명령을 거역하면서라도 내 말 듣고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치라는 겁니다. 결국 압살롬의 말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암논은 현장에서 살해되고 왕의 모든 왕자들은 다 도망을 가게 됩니다. 1년에 한번 있는 양털 깎는 축제 시간이 피바다가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압살롬은 2년 동안 칼을 갈고 내 여동생을 욕보인 원수에 대한 앙갚음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인 표면적인 이유는 다말을 욕되게 한 날부터 원수를 갚겠다고 칼을 가른 결과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개인적 원한의 앙갚음만이 살인한 이유였을까? 압살롬이 그 형이었던 암논을 죽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왕의 후보로서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은 그 마음에 왕이 되고 싶은 야욕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생 다말이 그렇게 암론에게 부끄러움을 당한 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려면 죽이고 제거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인데, 원래 죽이고 싶어서 정적으로 제거해야 될 암론을 죽일 기회를 누가 제공해 준 겁니까? 그 여동생인 다말이 제공해 준 것입니다. 겉으로는 내가 정말 동생을 사랑해서, 내가 정말 동생의 원수를 갚기 위해 앙갚음의 복수다…말하면서 죽였지만 실제로는 동생을 이용해 내가 원래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동생을 통해 그 정적제거를 정당화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놓고 암논과 압살롬이 사랑을 얼마나 변질시키고 왜곡하는지를 잘 보셔야 합니다. 암논은 본인이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사랑이 아니라 그저 음욕을 위해 다말과 억지로 동침하는 악한 꾀를 실행합니다. 압살롬은 좀 다릅니까? 여동생을 사랑하기에 여동생의 원수를 갚는다고 겉으로는 얘기했지만 실제로 그는 원래 죽이고 싶었던 정적을 죽이는 악한 꾀를 실행한 것 뿐입니다. 다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의 모습일 뿐입니다. 간음죄와 살인죄가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통해 자행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사랑이 왜곡되고 변질되었을 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도 암논도, 압살롬도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가를 바라보게 하시는 성경의 의도와 함께 말씀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않으면 하나님께 공급받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우리가 살 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공급받는 거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앙갚음과 복수와 살인과 가늠이 가득한 다윗 집안의 비극을 반면 교사 삼아 나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서며, 죄 용서를 받아야만 사는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께 연결되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죄는 파괴적인 여러 특징들이 있는데 첫번째로는 죄를 둔감하고 가볍게 여겨서 죄를 지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죄를 지은 후에는 죄에 대해서 직면하고 책임져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잘못했다고 무릎 꿇어야 되는데 죄를 지은 후에는 책임을 회피하고 숨거나 도망가거나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죄의 파괴적인 특성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도 동일하게 그 패턴은 등장했고 아버지 다윗이 무너졌을 때도 동일한 패턴이 등장 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다윗의 장자 암논이 죄를 짓고 무너졌을 때도 그 동일한 패턴이 드러나고 있음을 성경은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차기 왕 후보이자 첫 번째 아들이었던 암논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여러 여인들이 있었을 텐데 굳이 하필이면 이복 여동생인 다말에게 반해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간교한 친구의 악한 꾀를 듣고 귀가 번쩍해서, 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래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악한 꾀를 동원해 그 다말를 억지로 동침하며 범하게 됩니다.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죄악이었습니다. 여기서 암논이 책임을 지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갔으면 죄가 확산되지 않고 더 깊어지지 않았을 텐데, 그는 멈추지 못했습니다. 그 사랑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예전에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게 무엇을 증명하는 것이겠습니까? 암논이 다말을 향해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인 짐승의 음욕이었을 뿐이라는 것이죠. 암논의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은 다말을 범하고 나서 그 사랑은 그렇게 미움으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암논이 다말을 범하는 죄를 지은 후 왜 그렇게 그 다말을 미워하게 되었는가? 여러 주석들을 찾아보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암논의 심리적인 불안 장애, 병적 증상으로 치료 용어와 심리학적인 용어를 가지고 해석해 놓은 여러 추석들이 있었습니다. 암논의 이 말도 안 되는 행동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바로 책임을 회피하는 죄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 짓고 책임지기 싫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나서 나는 죄인입니다…내가 잘못했습니다…하나님 앞에 나아가 인정하고 자복하고 죄 용서를 구하기 싫다는 겁니다. 그 아버지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밧세바를 왕권을 남용해서 집으로 데려와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회개하고 죄에 직면하는 대신, 그 간음죄를 덮기 위해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복귀 시켜 또 다른 죄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암논이 지금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다말을 쫓아내면서 또 다른 죄를 불러오는 거죠. 죄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죄를 짓는 이 패턴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죠.자신의 죄에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고 숨고 도망가기 위해서 다말을 미워하며 내 눈앞에 보이지 않게 쫓아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말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더 받게 됩니다. 다말의 입을 통해 그렇게 쫓아내며 버리고 책임 회피하는 죄가, 억지로 동침하는 죄보다 더 크다고 절규합니다. 그 절규에도 암논은 듣지 아니하고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듣지 아니하고 듣기를 거절하는 것이 영적 둔감함의 특징입니다. 계속 주변에서 하나님께서는 찌르는 말씀들을 주시거든요. 예배를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사람들을 통해 환경을 통해…계속 말씀하시는데 듣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죄를 계속 우리 마음에 심기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만들면 그렇게 영적으로 둔감해지는 일이 계속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결국 다말이 스스로 나가지 않으니까 다말을 끌어내서 쫓아내고, 문 빗장을 잠궈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암논이 가지고 있었던 사랑의 끝이었습니다. 악한 꾀를 써서 억지로 동침하여 죄를 저지르고, 책임회피를 위해 미워하게 되고, 그 여인을 끌어내서 문을 잠가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랑을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데, 암논은 정반대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례히 행하고 폭력적으로 행합니다. 상사병까지 걸려서 그 몸에 반응도 하고 몸저 눕게 만들었던 그것이 본인은 사랑이라 착각했는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직면하지 않고 책임지지 않고 회피하고 숨고 도망가는 악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친오빠 압살롬은 다말의 절규하는 모습을 보면서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파악….그리고 나서 압살롬은 마음에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찾아왔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리라, 잠잠히 있으라 위로합니다. 그렇게 예뻐하고 사랑하는 여동생 다말이 당한 수치를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올라오는데, 지금은 때가 아니니 그는 때를 기다리며 칼을 가는 것입니다. 마음에 가만히 있으라 그랬지만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복수의 칼을 가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형제들 사이에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겁니다. 언젠가는 복수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칼 가는 인생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암논을 향한 다윗왕의 반응입니다. 큰아들인데, 차기 왕 후보인데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으니 당연히 아버지로서 화가 나겠죠. 근데 중요한 건 뭐냐면 화내고 심히 노하고 끝냈다는 것입니다. 암논에 잘잘못을 말하고, 시시비비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훈계하고 죄를 처리하고 그것을 치리하는 과정이 있었어야 되는데, 왕인 아버지가 화를 내고 끝냈다는 것이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다윗 자신도 밧세바 사건을 통해 워낙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으니까 엄격하게 치리 하지 못하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암논에게 다말을 보내라고 명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 다윗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자신도 간접적인 책임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둔감해져 있는 다윗이기에 큰 죄를 지은 아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지 못한 채 화를 내고 끝나는 것입니다. 70인 역이라는 소위 그리스어로 번역된 성경이 있는데, 그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주석을 해 놨다 그래요. 암논이 장자인고로 다윗이 그를 사랑하여 암논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았다…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그가 큰아들이어서 다윗왕이 그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죄를 직면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이 왜곡되고 변질된 자녀 사랑이, 그 아들을 망치고 무너뜨리는 겁니다. 아버지 다윗의 이 책임지지 못하는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보십시오. 그 아들 암논의 이 책임지지 않는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스스로는 사랑한 거 같지만 그건 사랑한 것이 아니라 무너뜨리게 만드는 악한 일이 되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이 선명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아버지 다윗의 행동이 압살롬에게는 분노와 복수의 불을 지르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시간 죄를 무겁게 여기며 죄를 심각하게 여기며, 죄를 지었을 때 외면하고 피하고 숨는 대신에, 하나님 앞에 죄를 직면하고 용서를 구하며 서기 원합니다. 죄를 책임지실 분을 앞에 내 인생을 들고 나가 주님 잘못했습니다… 저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진실하게 섰을 때, 마음을 괴로울 지언정 그것이 사는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이 가득한 이 때에 자녀를 사랑할 때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때도 주님이 주시는 사랑 가지고 살아갈 힘을 지금 이 시간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 집안은 지금 깨지고 상처와 아픈 가운데 있다는 것을 다윗의 장남 암논의 악행을 통해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암논의 이름도, 사랑도, 친구도 다 왜곡된 모습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암논이 악한꾀를 위해 “곧 병든체 하다가….”라는 말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그는 분명히 울화가 터지기 직전의 상사병에 걸렸는데, 갑자기 일어나서 곧 병든 체 한다는 것입니다. 왜 아팠던 자가 갑자기 병든 척을 하는가? 친구의 악한 꾀를 듣고 분명히 암논은 힘을 얻은 것입니다. 분명히 아팠고 울화가 있었고 상사병이 있었는데 악한 꾀를 하려고 생각을 하니까 몸에 힘을 얻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악한 꾀를 실행하기 위해 곧 누워서 병든 체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악한 꾀를 마음에 심어 자신을 움직이는 힘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악한 것을 마음에 심어 자기를 움직이는 힘으로 쓰니 그것이 얼마나 자기에게 독약이 되고 얼마나 해약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늘 부정적인 것에 민감하고, 부정적인 정서를 나누는 것에만 익숙합니다. 가정도 교회도 건강하지 않으면 좋은 것을 나누는 데는 미숙하고, 부정적이고 나쁜 것을 나누는 데만 익숙합니다. 즉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곧 순종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하나님 말씀에는 순종하는데 늘 더디고 미루면서 나쁜 일을 할 때는 이렇게 곧 반응하는 이런 모습이, 바로 죄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악한 꾀는 우리에게 파괴적인 힘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무너뜨리는 힘을 주고 나를 죽이는 힘을 주는 겁니다. 가정을 깨고 공동체를 깨는 파괴적인 힘을 주는 것입니다.
암논은 지체하지 않고 본인이 생각하는 악한 꾀를 실행하려고 하는 겁니다. 곧 누워서 병든 체 하다가 자신의 아버지 다윗왕을 끌어 들입니다. 지혜로운 자란 사람의 행동만 보는게 아니라 행동 뒤에 있는 사람의 의도와 소위 말하는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합한 자였고 지혜로운 왕이었습니다. 보이는 겉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 뒤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 다윗왕의 모습은 전혀 그 지혜와 상관없는 자 같이 영적으로 어두운 자 같이 암논의 요청을 그냥 받아주고 있습니다. 암논의 요청은 조금만 떨어져서 생각해보면 수상한 것이 한 두개가 아닙니다. 몸이 굉장히 아프다는데 과자를 먹으면 괜찮아집니까? 몸이 아플 때 과자 먹고 괜찮은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왜 그 과자를 여동생을 통하여 만들어 달라고 하는가? 그 당시 암논은 왕자였기에 주변에 그 정도 수발 해줄 수 있는 여러 신하들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더 나아가 암논은 “그 손으로 내게 먹여주게 해달라” 고 다윗에게 요청을 합니다. 만들어주는 것도 모자라 왜 굳이 이복 여동생 다말의 손으로 자기에게 입을 벌려 먹여 달라고 하는가? 여러 가지가 미심쩍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암논의 이 시커먼 속내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 속마음을 읽지 못하고 악한 꾀를 둔감하게 넘기며 암논의 부탁을 그냥 허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범죄한 후 자기의 죄를 덮기 위해서 가져온 연결고리는 뭐였냐면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데리고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와서 집에 가서 푹 쉬라고 계속 강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죄를 덮기 위해서 마치 우리아를 통해서 그 일이 일어난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연결고리를 만들려 한 것입니다. 암논의 이런 잘못된 모습, 죄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모습과 예전 다윗의 죄가 겹쳐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인의 꾀는 자기 혼자 악한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 반드시 다른 사람을 통하여연결고리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 범죄하는 게 아니라 꼭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같이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린 채 지혜가 둔감해진 다윗왕은 스스로는 아무 일도 안 했는데 간접적으로 이 일에 연루되는 범죄의 연결 고리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가 간접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가 돼 버리는 겁니다. 혼자 나쁜 일을 하는게 아니라 나쁜 일은 꼭 함께 도모하려고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명이 떨어지니까 다말은 선택권이 없이 암논을 위해 그 앞에서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암논은 그 악한 꾀를 하나 하나씩 실행해 나갑니다. 먼저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다말 혼자 남아있게 합니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오라는 겁니다. 침실에서 너가 손으로 먹여줘야 먹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본심을 드러내서 동침하자고 잡아 끄는 겁니다. 이 암논의 다말을 향한 악한 꾀, 동침의 요구는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던 보디발의 아내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무도 없을 때 억지로 동침하기를 요구한 주인 아내의 요구를 요셉은 거절했습니다. 그 거절은 목숨을 건 거절이었고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득죄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 다말의 모습은 요셉의 모습과 동일합니다. 지금 이 일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일인지, 얼마나 왕자로서 품격을 떨어뜨리는 일인지, 얼마나 사람들 앞에서 수치스러운 일인지, 모르냐면서 암논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이게 다말에게도 암논에게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에게 마땅히 행하지 못할 것이니… 공동체적으로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겁니다. 암논은 돌이킬 기회가 있었고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런 괴악한 일을 수치스러운 일을 안 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다말이 하는 얘기를 통하여 그것을 하나님이 깨워 주시는 말씀으로 경각심을 가졌으면 암논은 무너지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악인의 꾀에 빠진 암논, 그 악한 뜻을 운동력으로 삼은 암논은 악의 길로 그대로 직진합니다. 진리의 소리 하나님이 주시는 소리를 듣기를 거절하고 억지로 동침하게 됩니다. 죄악 된 욕심을 위해 자기의 힘을 이용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무너지는 악한 자가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윗이 밧세바에게 동침을 요구할 때 밧세바가 너무나 기쁘고 감사했을 리가 없습니다.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겠습니까? 왕이시여 나는 남편이 있는 아녀자입니다. 다른 여인들이 많이 있는데 아녀자인 나에게 왜 이러시는 건가요? 얘기 안 했을까요? 분명히 설득했을 거고 이런 옳은 일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간청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들을 귀가 없었고 듣기를 거절하고 죄와 함께 한방에 무너졌습니다. 다윗의 큰 죄는 용서를 받았지만 그 상처가 그의 집안을 이렇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죠. 그 죄가 연이어서 반복되며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그 집안 전체를 갉아먹는 그 무너짐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가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나쁜 일을 하려고 할 때 힘이 나고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되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죄에 즉각 순종하고 반응하기 좋아하는 우리 죄성을 직시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끊어내며 단절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나에게 심어 즉시 순종하는 힘으로 삼기 원하십니다. 다시 한번 죄를 무겁게 여기고 심각하게 여기며 죄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아 죄에 대한 감각이 살아나며, 다윗 집안의 어려움을 반면교사를 삼아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과 말씀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합한자로 놀랍게 쓰임 받던 다윗왕은 사무엘하 11장 12장에서 완전히 한 방에 무너지는 큰 실망과 안타까움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인생의 정점에서 한 방에 무너지는 사건이 바로 다윗과 밧세바 사건이었고, 그 사건을 통하여 다윗왕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과오와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회복하게 하시고 새 출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솔로몬이라는 아들이 태어나게 하시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샬롬으로 회복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여디디야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는 상처를 남기며 다윗 집안 전체를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범죄하며 무너진 두 가지 큰 죄는 바로 간음죄와 살인죄입니다. 다윗은 그 죄를 회개하고 용서 받았지만, 그 죄의 상처는 다윗 집안 전체에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 집안에서 부끄러운 일로 계속되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다윗 집안 안에서 문제가 크게 발생하게 만드는 세 자녀가 바로 큰 압살롬과 그 여동생 다말, 그리고 그 다말을 사랑하는 또 다른 이복 형제이자 장남인 암논입니다. 완전히 새 출발하고 완전히 초심으로 모든 것이 시작됐으면 좋은데, 초심으로 온전히 돌아가지 못한 다윗은 집안에서 자녀들이 비슷한 문제로 계속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만큼 죄라는 것이 무겁고 심각하다는 것을, 죄에는 큰 상처와 아픔을 남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압살롬과 암론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 당시 배경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차기 왕자 후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암논은 큰 아들, 장자였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했냐면 차기 다윗 이후에 왕이 될 세자라고 말 치켜 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세째 아들이자 이복 동생인데, 저 형만 없으면 내가 왕이 될 수 있다며 은근히 칼을 갈고 기회를 엿보고 경쟁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암논과 압살롬, 이 두 아들은 중요한 그 당시에 왕자의 권력 투쟁과 갈등 구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 왕자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알력과 갈등과 함께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사랑하는 연애 문제가 딱 뇌관과 같이 끼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은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장남인 암논이 그를 연애한다고 성경은 증언하지만 사실 짝사랑하는 겁니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은 혼자 짝사랑하는 것을 넘어 다말의 외형적 아름다움에 빠진 음욕이었음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놀랍게도 암논이 다말의 외모에 빠져 연애하는 것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 하면, 예전에 다윗왕이 저녁에 왕궁에서 밧세바가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름다웠다고 생각한 것과 똑같은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벗고 목욕하고 있는 여인 밧세바를 바라보며 가졌던 다윗의 마음은 왜곡된 사랑인 음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암논이 이복 여동생 다말을 바라보며 가졌던 마음은 왜곡된 사랑인 음욕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그게 더 적나라하게 나타나는데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암논이 울화가 쌓여 상사병에 걸렸다고 증언합니다.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거절 당할 지 몰라도 가서 고백하면 되는데 왜 처녀인데 어찌할 수 없습니까? 이 말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 주는게 뭐냐면 다윗이 했던 범죄를 그대로 여기다가 대입시키는 것이죠. 다윗은 자신이 음욕을 품은 여인이 아녀자였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멈췄어야 됩니다. 근데 아녀자임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죄의 수레바퀴를 계속 돌려 그것을 밀고 가는 죄에 빠졌던 것이 바로 다윗이었죠. 마찬가지로 지금 암논은 왕자이자 차기왕 후보 세자이기에 사랑하는 여인을 여러 다른 경로들을 통해 충분히 찾을 수 있었고, 그것이 어렵지도 않은 위치였습니다. 그런데 굳이 자기의 이복 동생이었던 다말을 연애하고 짝사랑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사랑을 하는 모습이 다윗이 금지된 사랑을 통해 결국 간음의 죄로 나가는 그 모습과 비슷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자이자 세자인 암논이 수 많은 여인들을 두고 굳이 금지된 사랑인 다말에게 그렇게 음욕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나, 다윗이 수많은 부인들을 두고, 굳이 아녀자인 밧세바에게 음욕을 품고 죄를 향해 나아간 것이나 일맥상통한다는 겁니다. 암논이 일방적으로 사랑하는 짝사랑과 음욕이 다 합쳐져서 울화로 말미암아 상사병에 걸립니다. 울화란 화가 마음에 빡빡하게 쌓여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가 되 버린 겁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는데 왜 울화가 터지기 일보 지적이 되느냐? 바로 암논이 가졌던 사랑의 마음이 타락하고 왜곡된 사랑, 음욕에 기반한 변질된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암논이라는 이름의 뜻은 충성인데, 충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는 큰아들이 되었습니다. 충성된 아들 암논이 상사병에 걸렸는데 그 사랑은 음욕과 동일어가 된 왜곡과 변질된 사랑입니다. 이 시대가 왜곡과 변질로 망가뜨린 사랑이 추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집안에 드리운 이 어두움과 죄악의 문제, 그 본질은, 주신 것이 무지무지 많은데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안 되는 것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 다윗왕이 무너지게 되는 문제였고 그 아들 암논의 직면한 문제 였음을 성경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고 좋아하는 것들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이 있다고 그 모든 것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죄의 씨앗입니다. 우리에겐 아무리 좋아도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고 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있고 그것을 절제해야 될 것들이 있는데 이 욕심과 탐욕이 우리를 그렇게 무너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암논에게 친구가 찾아와 조언하는데 그 친구는 간교한 자였습니다. 간교하다는 건 악한 꾀를 내는데 아주 비상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암논의 이름도, 사랑이라는 정의, 친구의 정의도 다 왜곡되고 변질되고 깨져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 다 역설적인데, 충성이라는 이름의 암논은 충성과 거리가 멀고, 왜곡되고 변질된 사랑을 하고, 친구는 간악한 꾀를 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간교한 친구가 압논에서 무슨 조언을 합니까? 이복동생 다말을 꼬실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악한 꾀를 내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간교한 친구가 누구를 이용하게 조언하는가 하면 바로 그 아버지 다윗 왕을 이용하라는 것이죠. 다윗 왕의 권한과 힘을 이용해 이복 여동생 다말에게 병수발을 들라고 시키게 하라는 꾀를 내는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어떻게 범했습니까? 하나님이 백성 잘 인도하고 섬기라고 맡겨 주신 왕이라는 권한을 남용해서 그 죄를 범하게 되죠. 마찬가지로 지금 동일한 패턴이 소름 끼치도록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죄 문제가 다윗 한 사람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집안 전체 문제가 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 집안에 드리우고 있는 무서운 그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이신 주신 위임된 권한과 힘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선물을 통해 항상 범죄와 악한 일로 계속 왜곡되도록 악한 꾀를 냅니다. 그게 바로 세상에 결박되어 악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죠. 요즘에 개발된 AI 인공지능 있지 않습니까? 그걸로 좋은데 잘 쓰여지면 좋은데 벌써 부터 악한 일에 막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목소리를 변조해서 마치 자식 목소리같이 엄마 목소리 같이 변조해서 사기 치는 일들이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드론을 개발해서 가장 잘 쓰이는 곳이 사람들 죽이는 전쟁터입니다. 이게 악한 일을 하는데 이렇게 머리가 잘 돌고 비상한 인간, 빠져 있는 인간의 죄 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죄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죄의 결과는 무겁고 중하며 이렇게 큰 상처가 남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바른 정의가 왜곡되고 무너지는 안타까운 다윗 집안을 반면교사 삼아, 늘 죄를 무겁고 심각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기준과 정의를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 원합니다. 왜곡과 변질과 역설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성경적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며, 죄에 대해서 민감하게 살아가며 늘 주님 앞에 순전한 삶으로 회복되며 새 창조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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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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