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 신세로 제 코가 석자인 다윗이 왕의 마음을 가지고 블레셋에게 모든 1년 추수와 농사를 다 빼앗기고 굶어 죽게 된 그일라 백성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위치가 노출됨에도 불구하고, 주변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내려가서 블레셋 백성과 싸워서 그일라 백성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면 그일라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생명의 은인 아니겠습니까? 당연히 다윗에게 고마워하고 목숨 걸고 충성할 거 같은데 갈대와 같이 실망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그일라에서 구원받는 백성 중에 하나가 사울왕에게 다윗이 여기 있다고 고자질을 하는 겁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가지 않아도 될 곳, 목숨 걸고 구해줬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은 가서 사울에게 고자질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의 반응을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실소를 넘어 절망스러운 모습입니다. 사울왕은 이미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서 떠난 자였습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말도 안되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가족들을 끔찍하게 몰살하고 진멸한 자가 바로 사울왕 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일만 계속하고 있는 사울왕의 입술에서 하나님이 다윗을 내 손에 붙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죽이는게 하나님 뜻이겠습니까? 철저히 자기 뜻이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악한 계획일 뿐이지요. 하나님을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 이름만 자기의 필요를 위해 쓰는 악한 행동의 전형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지금 빌려다 쓰고 있는 것이죠.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을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 정도로 여기는 겁니다. 이 모습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때 행하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사울이 다윗이 있는 그일라로 잡으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다윗은 마음이 다급해 졌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울왕이 정말 나를 잡으러 내려 옵니까? 물으니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내려올 거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다음은 참 마음 아픈 질문인데 다윗이 두번째로 그일라 백성들이 우리를 사울 왕의 손에 넘겨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나와 우리 사람들을 위해 함께 보호하며 싸울 것 같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일라 백성들이 너를 사울왕에게 넘겨 줄 것을 알려주신 겁니다. 그일라 백성들은 참 배은망덕한 사람들이지요. 목숨걸고 자신들을 구해준 다윗에게 목숨걸고 충성하며 보호해주는 대신, 결국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왕에게 다윗을 넘겨줄 백성들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있지만 그일라 백성들은 다윗과 다윗의 백성들을 지켜줄 능력도 없었던 것이죠. 이게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목숨 걸고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지켜주고 보호하면 그도 참 나를 고마워하고 똑같이 목숨 걸고 나를 위해 같이 내 편에 서 줄 거 같은데,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악하기도 하고 약하기도 해서 정의를 따라 진리를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익과 불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이중성이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 나는 목숨 걸고 희생하면서 그를 도와줬는데 그들은 나를 배신하는 이게 우리의 아픈 세상이고 많은 사람들의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다윗은 그일라 사람들을 목숨 걸고 구해주고 자신들의 위치가 노출되었고, 사울왕이 추격하게 되어 결국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가야 하는 비참한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사람이 600명이 되어 떠났다고 증언합니다. 아둘람 굴에서 400명이었는데 200명이나 더 많이 다윗에게 찾아왔고 함께하는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은 아니었지만 실제적으로 백성들을 품고 보호하는 진정한 왕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계속 붙여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도망해 십 황무지 수풀에 숨어 있는데 목숨 걸고 다윗을 찾아온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요나단입니다. 그일라 백성들은 목숨 걸고 다윗을 보호하고 함께하기를 포기하고 배신했는데, 요나단은 목숨 걸고 다윗에게 온 것입니다. 근데 요나단이 다윗에게 목숨 걸고 찾아온 것도 귀했는데 그가 다윗을 위해 한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한 것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help him find strengths in God, 다윗이 하나님 안에서 힘을 찾도록 도와줬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도망자로 숨어 있는 다윗을 목숨 걸고 찾아왔던 진짜 친구이며, 배신하고 돌아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좌절하고 있는 그 상황에 하나님 안에서 새 힘을 발견하고 찾도록 도와주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진짜 믿고 의지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뜻과 계획에 하나님을 너무나 쉽게 끌어다가 이야기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관련 없는 자기 뜻을 관철 시키면서, 누가 봐도 악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와 정당화하고 수단화 하려는 이 잘못된 패턴을 우리는 정확하게 직시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목적, 최우선으로 모시지 아니하면, 우리도 사울왕과 같이 하나님을 나를 위한 수단과 도구로 끌어다 쓰려 하는 악한 모습이 있을 수 있음을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또한 신앙 생활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에게 실망하고 좌절할 때, 함께 하나님 안에서 새 힘을 찾도록 도와주고 함께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되 너무 믿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내 생각과 달리 목숨 걸고 도와주고 보호해도 많은 사람들을 뒤돌아 서고 떠나고 등을 돌리게 되어 마음이 무너집니다. 사람들은 실망하게 하고 배신하고 사람들은 떠나갈지라도 이 시간 나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 만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지금 다윗은 본인도 절박한 상황입니다. 전국 지명 수배령이 내려져서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가족이 도망자로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아둘람 굴에 숨어 있고 더 이상은 도망할 곳이 없는 어떻게 보면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지금 자기 코가 석자인데 누구를 생각하고 있겠습니까…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기에 자기의 형편과 처지 외에는 생각할 것이 없을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지금 온 가족이 도망자 신세를 당하고 있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만도 벅찬 상황입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4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아둘람 굴로 몰려들었습니다. 자신의 문제도 감당하기 힘든데 환란 당한 자, 빚진 자 아픈 자들이 모두 찾아와 다윗에게 도움을 구하며 순종하는 자들로 나아갔던 것이죠. 더 나아가 오늘 말씀에 보게 되면 다윗이 그 절박한 상황 가운데도 백성들의 어려움을 마음에 품고 고민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일라 사람들에게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해 와서 타작마당을 탈취했습니다. 타작마당을 탈취한다는 건 추수를 위해 모든 곡식들을 모아둔 그 마당을 지금 빼앗기고 있는 것이죠. 일년 농사 추수한 것을 다 쓸어가 겨울을 헐벗고 굶주리게 되 버린 그일라 백성들에 소식을 듣고 마음에 큰 부담으로 고민하는 겁니다. 자신의 코가 석자인 그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이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그때 하나님께 물어본 겁니다. 내가 지금 그일라 백성을 도와야 되겠습니까? 이게 바로 다윗의 위대한 점이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도 너무 크고 힘든데 자기 일도 너무 버거운데, 다른 백성들의 눈물,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서 관심 가지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마치 요셉이 주인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혀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절망 가운데도 감옥 안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빛을 살필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쓰시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상황과 어려움을 넘어, 자기 일만으로도 숨에 턱턱 막히는 상황 속에서도 다른 사람을 도와줘야 되고 구해줘야 되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갖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여쭈었더니 하나님이 가서 그일라 백성들 구원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다윗 주변에 참모들이 다 나와서 말립니다. 다윗의 핵심 측근들이 다 일어나 반대하는 이유는 아주 명확했습니다. 우리가 그일라 백성을 위해 블레셋과 나가서 싸워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는 둘째 문제라는 거예요.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도 있는데 문제는 지금 우리는 도망자 신세이고 사울에게 위치가 노출되면 안 되는데 우리가 블레셋과 나가 싸우게 되면 우리 위치가 사울왕에게 다 노출되고 결국 그것은 우리를 다 죽이는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절대 지금 나가면 안 된다고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한결같이 반대하는 것이죠. 다윗이 측근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반대하니까 큰 고민에 빠집니다 내 마음에는 저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해야 되겠다는 거룩한 부담감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이렇게 측근들이 반대하고 그 반대 이유도 분명히 나름 합리적이니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냥 놔두면 내 종족 그일라 백성이 1년 내내 농사한 거 다 빼앗기고 굶어 죽을 거고 나가 싸우자니 나의 측근들이 반대하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다시 한번 하나님께 자문을 구합니다 . 두 번을 물었는데 하나님이 동일하게 대답하신 거예요. 블레셋에게 나가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측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목숨을 걸고 일어나 그일라 백성들을 구하려 블레셋에게 나아갑니다. 사실 잘 생각해보면 백성들이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굴욕을 당하고1년 양식을 다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움직여 보호해야 되는 것은 왕의 책무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건 사울왕이 지금 해야 되는 일입니다. 사울 왕이 백성들을 살피며 백성들을 돌봐야 되는 일이죠. 그런데 사울왕의 마음에는 백성들을 어떻게 살필까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도울까…라는 마음이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의 마음에 가득 찬 것은 오직 하나 내 원수인 다윗을 어떻게 죽여야 할까 고민하며 모든 것을 거기에 쏟아붓고 있는 겁니다. 그 사이에 백성들은 이렇게 1년 농사를 다 빼앗기고 굶어 죽게 생겼는데도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하고 버림받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에게 자신의 인생도 코가 석자이고 어려운데 일어나서 그일라 백성을 나가서 구원하라고 말씀하셨을까? 왜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셨을까? 다윗은 왕은 아니었지만 백성들을 지킬 의무도 없었지만 결국 진짜 세우신 하나님의 왕은 다윗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는 지금 직책으로는 왕은 아니지만, 이렇게 도망자로 코가 석자이지만, 실제로는 네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펴야 되며 그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되는 왕이기 때문에 너는 나가 싸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위험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이 다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목숨을 걸고 그 일라 백성들을 위해 나가 싸워 그들을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진짜 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백성들을 향하여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왕의 일에 인생을 거는 자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그일라 백성들을 구원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우리 인생이 다 바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바쁘게 돌아가 내 문제와 내 일만 처리하기에도 너무나 바쁜 것이 우리 하루하루의 일상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각자의 삶에도 숨이 턱턱 막혀 살아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왕의 사람들로서 나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내 주변의 백성들을 돌보고 살피며 그들의 형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나 혼자 만을 위해 살거나, 내 문제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그 문제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를 넘어서 나의 백성들을 바라보는 이 영적 시각을 가지고 그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이 다윗과 같이 힘들고 어렵고 수많은 일들로 나의 인생도 코가 석자인 그런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나의 신분은 왕의 백성이며 왕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 세상에 파송된 왕의 백성이기에 하나님이 주신 그 거룩한 시선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돌보며 빛으로 인도해야 될 거룩한 책무가 있는 자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문제, 상황, 어려움을 넘어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을 살피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시편 52편 말씀은 저희가 배우고 있는 에돔 사람 도액이 사울 왕에게 가서 제사장이 다윗을 도와주고 보호한다는 밀고와 그로 말미암아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이 몰살을 당하는 끔찍한 그 사건을 배경으로 쓰여진 시편입니다. 제사장의 온 집이 모두 몰살하며 소위 진멸함을 당하는 그런 끔찍한 일이 바로 다윗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겼다는 자책감과 함께 도엑이 행한 만행에 대한 다윗의 분노와 무너지는 마음을 토설하며 주님 앞에 쓴 시편입니다. 그래서 시편 52편에 계속 등장하는 포악한 자는 1차적으로 에돔 사람 도엑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영적인 의미로는 도엑을 통하여 드러나는 악한 영의 역사,결국 사울 왕이 그렇게 무너지게 만드는 사단의 특징인 미혹자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 포악한 자는 악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악한 계획을 지금 세우고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간신배와 같이 사람들을 죽이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스스로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포악한자의 혀는 바로 악을 꾀하는 날카로운 칼과 같은 혀라고 노래합니다. 그 혀는 말을 하면 할 수록 주변 사람들을 찌르고 죽이는 살인 도구가 됩니다. 대표적인데 바로 도엑이 그 간사한 혀를 잘못 놀려서 제사장 85명과 그 온 집안을 몰살하게 한 사건인 것입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자들은 간사한 인격을 가지고 입술로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자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나의 입술과 혀가 이 시간 누구의 기쁨 되는가가 내 영적인 현주소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포악한 자의 악한 모습은 선보다 악을 더 사랑하고, 진리보다 거짓을 더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죄성을 가졌다는 말은 죄악된 마음의 편향성으로 악을 더 사랑하며 거짓을 더 기뻐하는 욕망입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을 즐기고 그것을 부끄러워 하는 대신 자랑하는 것이 바로 포악한 자입니다. 악을 사랑하며 거짓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것이 악한 영의 역사이며 그것이 도엑을 통하여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울왕이 진짜 싸워야 되는 주적인 블레셋이나 아말렉과 싸우는 것을 포기하며 자기의 눈에 사로잡힌 다윗을 평생의 원수로 삼으며 하나님이 금하신 제사장을 죽이며 진멸하는 끔찍한 일을 하게 됬는가? 결국 그의 눈이 선보다는 악을 사랑하며 진리보다는 거짓을 사랑하는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을 향하여 칼로 죽이는 이런 끔찍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선보다 악을 사랑하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엑과 같은 포악한 사람을 조금 안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뿌리째 뽑을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세번째, 포악한 자들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포악한 자, 악한 자는 하나님을 나의 힘으로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고 거절하고 거부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자신을 움직이는 힘으로 삼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재물이나 능력을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울왕의 삶, 그런 사울에게 기생하는 간신배인 도엑이 관심가지는 삶이란 철저히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눈에 보이는 재물과 눈에 보이는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며 살게 만드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것에 나의 모든 소망을 걸고 눈에 보이는 것을 힘 자기를 움직이는 힘의 원동력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악한 자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제물과 힘을 붙들고 끊임없이 모래 위에 인생을 높이 세우려 하는 겁니다. 그런 삶들은 결국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기에 참보다는 거짓을 선보다는 악을 사랑하게 되며 나의 힘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죽이는 것을 서슴치 않는 포악한 자가 되는 겁니다. 불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의지하지 않는 겁니다 입술로 뭐라 말하던 하나님이 내 힘이 되지 않고 하나님이 내 삶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지 않는 자들이 바로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이라는 것은 그냥 피상적인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동의 정도가 아니라 나의 인생의 힘이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철저히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에 나를 움직이는 힘이 하나님에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의지하는 삶에서 건져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역사 입니다. 이 세상을 사노라면 이런 에돔 사람 도엑과 같은 악한 자가 판치며 계속 물을 흐리게 되는 끔찍한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귀한 혀와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대신 이렇게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 무기가 될 때 도엑과 같은 포악한 자가 되는 것이며 결국 사단의 기쁨되며 사단에게 쓰임 받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다윗의 신음소리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인을 멸하시고 땅에서 뿌리를 뽑아 버리실 것을 확신하십시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은 알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의 수난의 종지부를 찍으실 것이며 반드시 도엑과 같은 악인을 다스리시고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분명히 역사 속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런 핏소리들,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들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 믿음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부터 우리 신앙의 기초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이며 이 시간 다윗이 시편을 통하여 고백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임재하심 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심판이 악의 종지부를 찍으심을 믿는 믿음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의 신실하심 아래 주의 이름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 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사장들과 그 가족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사건을 증언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주적으로 삼고 평생 원수를 삼아 하나님의 영이 떠나 악한 영의 사로잡혀 살아가는 영적 하향곡선이 오늘 말씀을 통해 급격히 꺾여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늪으로 질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다윗이 사울의 위협 가운데 하나님의 제사장에게 피한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장에게 피한다는 것을 넘어 하나님에게 피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에게는 백성을 대표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왕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을 몰살 시키는 끔찍한 사건은 제사장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대적하는 대적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영에 완전히 사로잡혀 더이상 빠져나오지 못한 늪으로 들어가는 사울왕의 끔찍한 모습입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을 죽이려 한 죄목은 바로 다윗과 한 통속이 되어 다윗을 도왔고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세우신 제사장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바른 기준을 세우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머물기를 원했는데 사울왕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이 자신의 뜻 가운데 있지 않으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려 하는 겁니다. 다윗을 평생 원수로 정해놓고, 하나님이 세운 하나님의 제사장들조차도 자신들이 죽여야 하는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고 사단에게 완전히 결박되어 끌려 다니는 사울왕의 끔찍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이 명령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하들은 수행하기를 두려워하고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세우신 제사장들을 죽인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알았기 때문에, 지금 사울왕의 제사장들을 죽이라는 어명이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덮어 씌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왕의 어명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죽이길 주저했습니다. 이렇게 온 신하들이 한 마음으로 주저하면 사울왕이 정신 차려서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구나 깨닫고 돌아왔으면 희망이 있는데 안타깝게도 그는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미혹자이자 간신인 에돔사람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을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이 사울왕의 끔찍한 명령의 결과를 보십니까? 주목할 것은 그날에 에봇입은 제사장 85인을 죽였고, 어른들을 포함해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다 칼로 쳐 죽였다고 증언합니다. 어른들만 죽인게 아니라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어린 아이들과 소와 나귀, 양들을 다 죽이는 것, 이게 바로 진멸입니다. 도엑이 제사장들을 죽이는 방법은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주적인 아말렉 민족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그 방식으로 사울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도엑이 제사장들을 죽이는 방법은 단순히 제사장들만 죽인게 아니라 그 온 집안을 피비린내 나도록 진멸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적인 아말렉을 향하여 하나님의 원수들을 향하여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사울왕은 그때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온전히 진멸하는 것을 실패하고 불순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말렉이 아닌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들을 향하여 사울왕은 철저하게 진멸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죽이는 겁니다. 진멸하고 죽여야 할 주적 아말렉 대신, 절대 죽이면 안 되는 하나님 제사장들을 진멸하는 이런 끔찍하고도 말도 안되는 일을 사울왕이 저지른 것입니다. 사울왕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며 파멸과 멸망을 향하여 질주하는 모습, 악한 영에 완전히 사로잡힌 끔찍한 모습은 성경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역사를 통해 계속 반복되어 왔습니다. 세계 역사를 보더라도 가장 끔찍한 전쟁의 역사는 모두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럽에서는 100년이 넘도록 종교의 이름으로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웠던 부끄러운 흑역사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뭡니까? 바로 우리가 싸워야 될 주적을 잃어버린 채 우리 안에 스스로 적을 설정하고 한 팀 되어 사명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며 하나님의 사람을 서로 진멸하는 일에 쓰임 받은 비참한 전쟁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사단 마귀만 좋아하는 일 만들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잃어버리고, 진짜 진멸하라는 아말렉 대신, 기독교인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전쟁하는 사울왕의 모습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나의 분노와 질투가 사단에 사로잡히게 되면 함께 가야 할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주적으로 삼으며 이렇게 한 팀인 사람들을 처단하고 하나님의 사람을 죽이는 이런 끔찍한 일을 할 수 있는 게 인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싸워야 될 주적을 알지 못하고 내가 설정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데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버리는 비참한 인생, 그 배후에는 바로 사단의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죠 이 사울왕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 되지 않기 위해 이 시간이 말씀을 반면교사로 삼아 마음에 꼭 새기기 원합니다. 악한 영이 우리 삶에 개입하며 우리를 흔들며 결박할 때 나의 삶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며 진멸해야 할 주적 아말렉 대신, 하나님이 세운 사람들을 진멸 하려는데 모든 것을 다 쏟아 붓는 끔찍한 일을 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눈과 귀가 닫히면 간신들이 앞에서 판을 치게 되고, 그 결과 진실되고 참된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피해망상으로 제사장들을 학살하고 진멸하는 이 끔찍한 사울왕의 모습이 나의 모습되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깨어 기도하기 원합니다. 늘 하나님의 말씀에 조율되어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기준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분노와 질투가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이 오래 방치되게 되면 결국 피해 망상증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나를 대적하고 모든 사람들은 나를 등지고 있고 나는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피해 망상에 빠지게 되는데, 오늘 사울왕의 모습이 전형적인 피해 망상에 빠진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에게 악한 영이 힘있게 임하며 미움과 분노, 질투심에 사로잡혀 자신을 움직이는 힘으로 살게 되는 안타까운 모습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대적하고 공모하고 있다는 불신과 피해 망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령으로 주신 진짜 싸워야 될 주적, 아말렉이나 블레셋은 안중에 없고, 백성들을 살리거나 돌보는 마음은 다 사라진 채, 사울의 눈에는 오로지 자신이 평생의 원수로 찍은 다윗을 죽이는 것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 게 없는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윗을 따라 공모하고 나를 적으로 삼아 반역하는 자들로만 바라보는 이 피해 망상으로, 판단력이 흐려지고 모든 것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이런 사울의 모습을 단순히 개인적인 일탈이나 무너짐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의 사로잡혀 완전히 결박되어 끌려 다니는 영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울왕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단창임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에게 손에 들린 단창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영적 전쟁을 벌이는 사명의 도구가 아닌 늘 주변에 하나님이 붙여 주신 귀한 사람들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죽이려 하는 살인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사울은 두 번이나 이 단창을 들어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었고, 심지어 자신의 아들인 요나단을 향하여도 단창을 들어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그 살인 무기가 되어버린 단창을 손에 들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노와 질투를 폭발 시키며 또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말입니다. 사울왕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말은, 내 주변에 모든 사람들이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다윗과 함께하고 있다는 피해 망상에 빠지니까 나를 대적하기 위해 너희들이 다 모여서 지금 공모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도 자기를 배신하는 배신자가 되었다고 몰아세우는 겁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언약을 맺었지만 신하들을 선동해 가지고 아버지 사울을 치려고 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끝까지 그의 목숨을 바쳐 서라도 아버지와 결국 함께 했던 충실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자신의 아들도 다윗과 함께한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대적으로 프레임을 씌워버리고, 나를 죽이려 하는 원수의 부류라고 딱 몰아버리는 것입니다. 피해 망상에 빠져 자기 주변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고 모두 의심하며 심지어 자기 아들인 요나단이 자기를 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는 사울왕, 뿌리깊은 불안으로 그의 심령이 모두 흔들리고 있는 사울왕에게 몰려드는 것은 충신이 아니라 바로 간신과 파리떼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도엑은 간신이자 기회주의자입니다. 이죠 그 불안과 피해 망상증에 있는 사울 왕에게 찾아와 귀에 듣기 좋은 얘기, 사울의 분노와 질투와 미움을 폭발 시키는 이야기만 계속 듣게 만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다윗을 도왔고 음식을 주고 골리앗의 무기를 주었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불을 지르는 겁니다. 도엑은 사울왕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꼼짝 못하게 만드는 미혹자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꼭 하와에게 찾아온 뱀과 같은 그런 역할로 간신과 악한 자의 모습으로 도엑은 사울왕에게 오고 있는 겁니다. 도엑의 미혹하는 말을 듣고 마음에 분노의 불이 붙어 사울왕이 제사장 아히멜렉을 소환합니다.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제사장은 하나님이 세운 거룩한 사람입니다. 사울왕의 제사장을 대하는 태도는 교만에 안하무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에 대한 태도는 결국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드러내는데 지금 사울왕의 이런 모습은 하나님에게서 얼마나 멀어졌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제사장을 몰아세우는데 여기서 지금 사울이 하는 말은 반쪽 진리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준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런데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그 사실에다가 자기만의 과장된 해석을 하게 되죠. 그게 바로 너가 이새의 아들 다윗과 공모했고 나를 대적했고 다윗이 오늘이라도 매복해서 나를 칠 가장 좋은 시간을 하나님께 물어봤다는 겁니다. 사울왕의 피해망상에 근거한 상상의 나래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워 주신 사실을 잃어버려서 내 나라가 되고 내가 왕이 되며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어 버리는 착각이 영적인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람 제사장 아히멜렉이 목숨을 걸고 사울 왕에게 직언합니다. 다윗은 왕의 원수가 아니라 평생 죽여야 하는 대적이 아니라, 모든 신하중에 충신이고, 당신의 사위이자 호위 대장임을 왜 모르십니까….간곡하게 말하는 겁니다. 사울왕은 이 충신의 얘기를 들었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고 회복의 길이 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런 충신의 얘기를 듣기를 거절하고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기로 결정한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파리떼와 같은 간신 도엑의 말에만 귀가 쏠려 버린 겁니다. 그것이 사울왕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울왕, 나의 열등감이 폭발하며 분노, 질투가 나를 사로잡아 나를 움직이게 힘이 되어버린 사울왕을 바라보며 인생의 반면교사를 삼기 원합니다. 그렇게 내가 잘못된 길로 나아갈 때 파리떼와 같이 나에게 찾아오는 간신들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귀에 듣기 좋은 간신의 말이 나를 죽이고, 마음이 아프고 불편하지만 들어야 하는 직언이 나를 살리는 것을 잊지 마시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며 든든히 서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은 인간적인 방법으로 적국인 블레셋으로 정치적 망명을 하면서 너무나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이끌려 사람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게 되니까 블레셋 적진에 가서 미친 사람과 같이 연기하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고 결국 그곳을 떠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 방법을 의지하며 적진에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했던 다윗은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 수치와 부끄러움의 장소를 떠나는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지만 동시에 다윗에게는 아둘람 굴은 더 이상 갈 데 없는 마지막 배수진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이 저 깊은 곳으로 숨어 들어가는 곳이 바로 굴입니다. 다윗과 함께 다윗의 온 가족들도 함께 아둘람 굴로 도망하게 됩니다. 이새의 집안에 여러 형제들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형제들과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가족들이 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다윗과 함께 아둘람 굴에 도망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선 시대도 마찬가지지만 나라의 역적은 삼족을 멸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람만 죽는 게 아니라 그 집안의 삼족을 다 멸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지금 사울 왕에게 지명수배를 받았다는 것은 그 집안도 나라 반란죄로서 모두 지명 수배자로 올라간 것이죠. 그래서 다윗으로 말미암아 온 가족들도 모두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 다윗에게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배수진을 치며,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는 배수진을 치며 아둘람 굴로 도망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둘람 굴에서 장차 왕이 될 다윗을 철저하게 밑바닥부터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왕궁에서 훈련시키는 게 아니라 광야에서 밑바닥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훈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을 시키는 곳이 바로 다윗에게는 아둘람 굴의 광야였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만 이런 훈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사람 모두에게는 광야의 여정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도 큰 총리 대신으로 나라를 살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되기 전, 긴 광야의 시절이 있었습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노예로 팔리고 주인의 부인에게 모함 당하고 나갈 수 없는 감옥에 갇히고 그 수많은 어려움의 광야 가운데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던 것이 요셉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켰던 모세 또한 놀랍게 쓰임 받기 전 40년의 미디안 광야 시절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왕궁에서 모든 것을 다 훈련 받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내 모셔서 미디안 광야에서 철저히 낮아지게 하셨고 작아지게 하셨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40년, 그의 어깨 힘을 빼는 40년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에게 이 아둘람 굴에서의 시간은 어깨에 힘을 빼는 훈련 시간이었고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고 의지하는 철저한 밑바닥의 인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훈련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잊혀지는 훈련,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바라보는 훈련을 다윗에게 아둘람 굴을 통하여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그 아둘람 굴에서 자기 하나 인생 건사하기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자기 가족들 모두가 도망자 신세가 되어 함께 도피하고 있는 것도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런데 아둘람 동굴에 숨어 들어온 다윗에게 함께 따라 들어오는 무리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 쫓기는 사람인 다윗에게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두 명이 모여든 게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400명 정도나 모였다고 증언합니다.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닌 400명이 지금 도망자 다윗이 숨어있는 아둘람 굴에 함께 모여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은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 다윗과 같이 막다른 골목에서 있는 인생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찾아온 겁니다. 사람들이 밟으면 잡초와 같이 밟히는 인생, 세상에서 너무나 힘든 일을 많이 당해서 생명을 쥐어 짜는 듯한 어려움을 당한 자들이 지금 다윗에게 찾아와 아둘람 굴에 함께 피한 것입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다윗을 찾아온 것이지만 결국 다윗과 함께하는 하나님을 찾아온 백성들이며 세상에서 거절 당하고 상한 마음을 하나님은 받아 주실 거로 생각하며 찾아온 백성들인 것입니다. 도망자로서 다윗은 자기 인생도 하나 건사하기 힘들고 자기 때문에 부모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형제자매들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 조차도 너무나 힘든 상황입니다. 자신의 문제로도 이미 머리 끝까지 꽉 찬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환란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원통한 자들을 계속 보내주시는 거죠. 다윗이 막다른 골목과 같은 아둘람 굴에서 배수진을 치고 하나님 만을 의지하고 피할 때 400명이나 되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그들의 원통함과 수치스러운 마음과 빚진 마음을 고백하며 그들이 다윗을 그 삶의 대장으로 모시게 되며 다윗을 충실하게 섬기는 일꾼들이 된 것입니다. 이 아둘람 굴에 모인 400명의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될 때까지 함께하는 동료들이자 목숨 걸고 함께하는 충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공포의 외인 구단 같이 다윗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충성하며 다윗과 함께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문제로도 꽉차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고 막다른 골목에 함께 서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부르짖는 아둘람 공동체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등장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피신한 부모님들을 어디로 모시고 가냐면 모압땅의 왕에게 나아갑니다. 왜 다윗은 그 부모를 이방 땅인 모압 왕에게 맡겼을까요? 아버지 이새의 증조할머니가 누구냐 하면 바로 보아스와 결혼한 모압 여인인 룻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지금 모압 땅으로 부모님을 모시고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연이 있었기 때문에 모압 왕은 기쁨으로 다윗의 부모를 받아 주고 보호해준 것입니다. 룻과 보아스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희미한 것이나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이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보고 나니,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다 퍼즐이 맞춰지는 것입니다. 왕에게 지명수배 당해 도망자 신세가 된 다윗, 아둘람 굴에까지 쫓겨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이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있는 다윗에게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은 여전히 일하고 계시며 하나님은 그를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셨음을 말씀을 통해 깨닫기 원합니다. 인생의 길이 막히고 사람이 날 버리고 거절할 때, 언제나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아둘람 굴의 훈련 시간을 지나가기 원합니다. 내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섭리와 인도하심이 나중에는 퍼즐이 맞추어지듯이 알게 될 것을 믿으며 주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훈련을 하셨던 곳임을, 사람들에게 잊혀지고 하나님에게만 선명히 기억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주님의 훈련 장소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펼쳐져 있는 아둘람 굴의 광야 가운데 사람들에게 잊혀질지라도 오직 하나님에게 기억되는 성도로 이 시간 훈련 잘 받아 주님이 원하시는 때 주님이 원하신 방법으로 선명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는 다윗이 큰 실수를 범하며 그로 인해 수치와 어려움을 당하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사람들을 통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 하다가 큰 부끄러움을 당하는 모습을 말씀을 통해 나누기 원합니다. 큰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인 제사장에게 가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습니다 거룩한 떡을 먹고 골리앗의 칼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이 거룩한 떡을 먹었다는 것은 그렇게 힘든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하심과 먹이심이 그에게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골리앗의 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도와 주시면 사울 왕의 그 어떤 위협과 어려움도 다윗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며 나아가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골리앗의 칼을 들고 거룩한 떡을 먹고 하나님에게 피한 것 같았던 다윗은 그것을 끝까지 지속하지 못했고, 대신 어디로 갔는가 하면 적국인 블레셋 땅 가드 왕에게도 나아갑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히 피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대신 어찌보면 정치적 망명과 같은 인간적 방법을 취하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생각에는 적국에 가서 정치적 망명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르지만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실수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지금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있는데, 블레셋의 장수였던 골리앗의 칼을 들고 적국 가드왕에게 가서 도움을 구하는 거죠. 다윗 조차도 사울왕이 너무 힘들게 하고 전국 지명 수배로 압박을 가하니까 두려움에 압도당해 이렇게 사리분별이 안 되는 안타까운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적국으로 라도 도망가면 사울왕이 나를 추격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드 왕에게 신변을 부탁하는 것이죠. 그렇게 지금 적국으로 가서 망명을 통해 도움을 구하며 지금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보고 풀어보고자 하는 다윗의 실수를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을 붙들고 자기 익숙한 땅을 떠나 나왔지만 그 땅에 기근이 드니까 하나님과 상의 없이 애굽으로 내려가 애굽에서 큰 어려움을 당하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다윗이 먹은 음식은 거룩한 떡이었고 다윗의 손에 쥐어지고 있는 것은 골리앗의 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피하려고 정치적 망명을 선택한 다윗은, 결국 큰 어려움에 직면하며 인생의 흑역사와 같은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근데 자기 계획대로 됩니까?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는 거죠. 그렇게 가자마자 사람들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있는 다윗을 알아보는 것이죠. 어 저 사람 골리앗 죽인 사람 아니야?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던 그 사람 아니야? 다 알아보는 거예요. 사울왕을 피해서 사람들을 의지해서 정치적 망명을 갔던 다윗은 결국 거기서 또 다른 어려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울왕을 두려워했듯이 얼마 안가 다윗은 결국 그 지역에 있는 가드 왕도 심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울왕이 두려워서 정치적 망명을 선택해 적국에 갔는데 그 적국의 왕도 심히 두려워하게 된 거죠.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윗,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골리앗을 싸워 이겼던 그 놀라운 승리를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도 이렇게 두려움에 압도 당하니까 하나님과 상의하며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는게 아니라 자기 눈에 지금 분별을 잃어버리며 잘못된 결정을 계속 하고 있는 겁니다. 두려워해야 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게 아니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계속 두려워하며 압도당하는 것이죠. 사울왕을 두려워하고 가드 왕을 두려워하고 두려움이 이끄는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이 큰 곤경에 빠지게 되며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 결과 부끄러움과 수치를 온몸으로 당하게 되는 겁니다. 다윗은 결국 그 블레셋 땅 가드 왕 앞에서 정말 부끄럽고 모욕적인 일을 당하게 되는데 갑자기 적국의 땅 블레셋에서 미친 사람인 것처럼 연극하는 겁니다. 미친 체하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정신 나간 사람인 것처럼 연극해서 자기 목숨 부지해 보려고 다윗이 이런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골리앗을 무찔렀던 영웅이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승리했던 그 영웅이 지금 적국에서 미치광이 연극을 하며 침을 질질 흘리며 연극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또한 사람들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수치였는지 상상해보십시오. 그 당시에 미친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위대한 다윗이 미치광이로 취급받고 거기서 부정한 자로 취급받아 쫓겨가게 되는, 그래서 자기의 목숨을 겨우 부지하는 이런 불행하고도 창피한 일이 다윗의 인생의 벌어지게 된 것이죠. 다윗 같은 사람도 그런 믿음의 사람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도 이렇게 실패하고 실수하고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자주 더 많이 자빠질 수밖에 없는가를 말씀으로 좀 묵상해 보게 됩니다. 사람들과 환경이 주는 두려움에 압도 당하면 정작 두려워해야 할 분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대신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그 두려움에 압도당한 잘못된 결정이 꼭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는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의 문제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두려워할 분을 두려워해야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두려운 사람에게서 부터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 할 분인 하나님을 온전히 두려워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 가운데 그 두려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고, 두려운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열망이 내 눈을 가릴 때, 하나님을 붙드는 기적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떡을 먹고 내 손에 들려 있는 골리앗의 칼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해야만 우리가 모욕과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그 보호의 자리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며 끝까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인도함을 받는 그 기적의 삶을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도망자 신세로 전국의 지명수배 받은 다윗의 안타까운 현 주소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무너져 도망가야 되는 신세가 된 것이 다윗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적 영웅이었고 또 왕의 사위가 되었고 왕의 총에 받는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사울왕의 주적이 되어, 지명수배자가 되었고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다윗의 모습은 야곱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하루아침에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갈고 쫓겨나 도망자 신세가 되어 어디로 갈지 몰라 정처 없이 헤매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다윗이 처한 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갑자기 인생이 무너져 내리고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것들이 확 돌아서서 내가 갑자기 홀로 남겨지고 버려진 것과 같은 신세가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누구에게 달려가는가…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어려움과 도망자 신세 가운데 어디로 달려 갔는가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제사장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저번에 어려웠을 때도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에게 피했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어려움과 절박한 위기에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피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사람에게 피하고 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에게 피하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윗은 사람들에게 피하고 의지하는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전에 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먼저 구한다는 마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을만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나를 지킬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은 나를 죽이려고 달려오는 이런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나는 누구에게 달려가고 있는가를 마음속에 묵상하기 원합니다. 내가 의지하고 붙드는 것이 무너졌을 때, 위기와 어려움의 풍랑을 만났을 때 내가 하나님에게 먼저 달려가 도우심을 먼저 구하며 하나님에게 피하는 자가 되기를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움을 찾으러 간 제사장 아히멜렉은 그 다윗이 반갑지만은 않았습니다. 다윗을 도와주고 숨겨주는 것이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사실 놀라면서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다윗을 도와주면 자기 신변에 위협이 생길 수 있는 일임을 딱 알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사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어려움 가운데도 다윗에게 선대하고 다윗을 돕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더구나 허기진 다윗을 위해 남아 있는 음식이 여호와께 물려낸 진설병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식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정신은 사람을 먹이고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다윗이 음식을 달라는 것은 단순히 한 두끼 정도 굶어서 음식을 달라는 게 아니라 며칠을 굶어 아사 직전의 허기진 상태였던 것입니다. 굶어 죽기 진정의 그 사람들을 거룩한 떡으로 먹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거룩한 떡을 통하여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을 먹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허기짐을 해결하고 나서 다윗이 또 하나 부탁한게 있는데 무기를 하나 달라는 겁니다. 얼마나 다급하게 왔으면 다윗이 싸워야 될 무기도 챙기지 못하고 몸만 빠져 나온 겁니다. 그만큼 절박하고 급박하게 빠져나온 것이죠. 그런데 제사장 주변에 무기가 있는 거 유일하게 하나 있는데 바로 골리앗의 칼만 있는 겁니다. 절체제명의 위기 가운데 다윗은 제사장으로부터 거룩한 떡을 먹고 새 힘을 얻고,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영적 전쟁에서 이겼던 골리앗의 칼을 지금 손에 쥐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하는 힘이 필요하고, 칼이나 창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승패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시고 함께 해 주시면 사울왕의 그 위협에서도, 골리앗의 위협에서 건져주셨듯이, 건져 주심을 믿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양을 칠 때 곰과 사자의 위협에서도 하나님이 건져 주시고 지켜 주심을 경험했고 골리앗의 위협에서도 건져 주시고 지켜 주심을 경험했던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골리앗의 칼을 취하면서 사울왕의 위협과 어려움에서도 이 골리앗의 칼을 들고 나아가며 주님이 주시는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면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심을 다시 한번 깨닫고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렇게 갑자기 모든 것이 무너지며 도망자 신세가 되며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절명 위기 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윗과 같이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피하십시오. 하나님에게 먼저 달려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거룩한 떡을 먹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사람들이 주고 세상이 주는 떡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떡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격려받고 위로받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내 인생은 결국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보호하심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골리앗의 칼을 기억하고 나를 보호해 주시는 건 사람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라는 것을 믿고 그분의 힘과 능력을 붙들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시작하는 새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십시오. 다윗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동일하게 현재형으로 경험되며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군 생활 할 때 경계근무를 서면 꼭 외워야 하는 암구호 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군대 다녀오신 분들을 아실 텐데 암구호는 경계 근무 시에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는 방법입니다. 멀리서 잘 안 보이니까 “토끼” 그러면 바로 “사자” 이렇게 답을 해서 서로 암구호를 통해 아군인 것을 아는 것입니다. 암구호는 보안 사항으로 매일 바뀌어서 근무 교대를 할 때에 반드시 암기하고 나가야 했습니다. 경계 근무 시 이 암구호를 잘못하면 큰 일이 나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다윗과 요나단은 둘만이 아는 암구호를 가지고 지금 화살을 쏘러 약속 장소에 나왔습니다. 아버지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한다는 마음 확정되어 변할 수 없고 이것 때문에 다윗이 이제는 성 안에 들어오면 안 되고 도망가라는 신호를 암구호와 같은 둘 만의 언어로 알려줘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둘이 약정 한대로 그 암구호를 하기 위해 들판으로 나가 화살을 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화살을 쏘는 것과 그 화살을 주어오는 것을 봐서는 아무도 그게 무슨 일이고 왜 그 일을 하는게 앓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직 숨어있는 다윗과 그 화살을 쏘는 요나단만 알고 있는 비밀 신호였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이 비밀신호를 연계해주는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요나단에 데리고 나온 작은 아이입니다. 그 작은 아이가 요나단의 명령을 받아 화살을 주어 오는 것에 따라 다윗이 성 안에 들어올 수 있는지 아니면 성 안에 들어오면 절대 안되고 당장 도망가야만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작은 아이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 일을 순종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화살을 주어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을 수행하고 있는 일인지, 그 일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른 채 화살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만일 이 작은 아이가 말한 대로 순종하지 않았다면 다윗이 이 암구호를 정확하게 알 수 없었을 것이고,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냥 주인이 시키는 명령에 순종했고, 그것을 통해 암구호의 정확한 메세지가 전달된 겁니다. 작은 아이는 전혀 알지 못했지만, 다윗과 요나단 입장에서는 말한 그대로 순종 하는 게 목숨을 바꾸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왜 이걸 하라는 지도 모른 채 그냥 주인으로 부터 맡겨진 일을 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가 한 일이 뭔 지 모른 채 본인의 일을 감당하고 주인에게 순종한 채 큰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작은 아이의 순종을 묵상해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한 순종이 마치 이렇게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들에 순종이 많음을 발견합니다. 내 인생의 일어나는 일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는 일들이 때로는 우리가 모든 그림을 알지 못한 채, 이해가 되지 못한 채 이 작은 아이와 같은 순종을 요구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 여정을 갈 때 순종이 어려운 이유 중에 하나가 이 순종을 왜 하는지,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걸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순종하라 하시니까 이게 어려운 겁니다. 그냥 저기 있는 화살을 있는 그대로 주어 오라는 겁니다. 근데 그 화살을 주어 오는 게 역사를 바꾸고 중요한 일인지 전혀 모른 채 순종하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그냥 예수님이 명령하시니까 신뢰하고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일을 하게 되는지, 이 순종을 통하여 무슨 결과가 있는지 하나님이 왜 이 일을 순종하라 그러시는지 끝까지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아름다운 삶을 산다는 것, 주님이 나의 길을 인도하신 다는 것을 믿고 나아간다는 건 그 앞에 가는 길이 희미하고 내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작은 아이와 같이 나는 알지 못하나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순종합니다…라는 그 믿음을 통해 나중에 그 일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할지라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알아서 일하시고 큰 그림 가운데 역사 하심을 믿습니다 그렇게 암구호를 통해 나는 지금 도망가야 하는 때라는 것을 알게 되고 다윗과 요나단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고 헤어져야 하는 마지막 만남임을 직감합니다. 그래서 서로 부둥켜 안고 한참을 웁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 요나단이 나눈 두 가지의 축복의 말을 마음에 담기 원하는데, 첫번째는 평안히 가라…는 겁니다. 지금 다윗은 절대로 평안히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왕이 자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있고 지명수배를 받고 도망가는데 어떻게 평안히 갈 수 있겠습니까?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평안히 갈 수 없는 상황 투성이입니다. 내 삶에는 문제 투성이고 아픔 투성이고 불확실한 것 투성인 데 주님은 평안히 가라는 것이죠. 그래서 이 평안히 가라는 것은 결국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에서만 가능한 기적의 평안인 겁니다. 주님의 이름 붙들고 주님과 함께 평안히 가라는 권면입니다. 내 환경이 우겨쌈을 당해도, 어려움과 불확실이 가득해도, 주님 붙들고 주님과 평안히 나아가는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그 상황을 넘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덮이게 도와 주옵소서… 그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두번째, 여호와께서 영원히 너와 나 사이에 계시다…는 축복입니다. 우리 인생이 평안이 갈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이 영원히 내 사이에 계시는 겁니다. 부부 사이에 하나님이 영원히 계셔야 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영원히 계셔야 하고, 나와 이웃 가운데 영원히 계셔야 하는 겁니다. 그래야 그 삶 가운데 진정한 사랑도 진정한 축복도 진정한 평화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복의 개념은 내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이 내 사이에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고 모를 지라도 이 작은 아이와 같이 순종하고 나아갈 때,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시선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임을 잊지 마십시오. 고백을 담아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가 이 작은 아이와 같이 알지 못하나 쓰임받는 인생 되게 하시고 깨닫지 못하나 아멘 으로 나아가는 인생 되게 도와 주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주님 안에 있는 놀라운 진정한 관계가 내 안에 회복되게 도와 주옵소서. 진정한 관계는 하나님의 안에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것을 잊지 마시고 내 삶이 주님이 주시는 평안함, 하나님 안에 있는 놀라운 회복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가 정말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결심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로 인해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 왕과 다윗 문제로 크게 충돌하게 됩니다. 다윗은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죽음과 자기 사이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여기는 죽은거나 다름없는 위기 상황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를 끊임없이 지키고 도와주려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입니다. 사울왕과 함께 식사 자리가 약속되어 있는 그 자리에 이틀 연속 다윗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아들 요나단에게 묻습니다. 왜 다윗이 이틀 내내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느냐고…사울 왕은 물론 궁금해서도 물어봤습니다만 속마음은 다윗을 죽여야 하는데, 죽여야 되는 다윗이 식사 자리에 안 나온 이유를 묻는 겁니다. 식사 자리라는 곳은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교제하는 행복한 자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울 왕은 그 식사 자리에서 다윗 죽일 생각만 가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는 다윗을 찾고 있는 사울왕 마음 속에 이 악한 의도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사울왕에게 요나단이 대답을 합니다. 이러 이러 해서 지금 제사가 있어서 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노라고….그런데 그때 사울왕이 요나단에게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반응, 정상적이지 않은 반응 하게 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리고 패역 부도한 계집의 소생, 즉 창녀의 자식이라며 말에 담을 수 없는 욕과 폭언을 친아들 요나단에서 퍼붓습니다. 아버지로서 상상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는 겁니다. 지금 다윗을 죽이기 위해 식사 자리에 나오기만을 벼르고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죽이려는 기회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아들 요나단에게 지금 화를 폭발하고 있는 것이죠. 한 번 폭발한 그 화는 수습이 안 되고 들불처럼 번져서 자신을 태우고 아들 요나단을 태우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완전히 산산조각난 사울왕의 모습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완전히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 사울왕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요나단에게 화를 퍼부으면서 사울왕의 입술에서 나온 두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나 대신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큰 실수와 수치라는 겁니다. 너 개인적인 수치만이 네 어미의 수치가 되는 것을 모르냐고 몰아 세웁니다. 사울 왕은 요나단이 아버지인 자기를 선택하지 않고 다윗을 택한 것을 알고 있었고요 그것이 말할 수 없는 섭섭함과 분노와 찾아온 겁니다. 두번째,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너와 내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현재 사울과 이스라엘이 든든하게 서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윗 때문이 아니라 사울왕 자신 때문이었습니다. 사울과 사울왕의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는 본질은 그가 하나님에게 불순종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영이 더 이상 그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은혜로 맡기신 나라와 백성들을 마치 내 나라인 것 처럼 착각하는 교만과 함께, 든든히 나라가 서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망각하며 모든 것을 다윗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이유를 자신이 아닌 다윗에게 찾고 있는 겁니다. 이게 전형적인 악한 영이 심겨주는 생각이자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울이 무너지고 있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식사 자리에 없는 그 다윗을 끌어오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죽어야 될 자라는 겁니다. 여기서 사울왕의 본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죠. 왜 이틀 동안 다윗이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은 것이 그렇게 분노가 치밀게 했는지…다윗을 죽이기 위해 칼을 갈고 있고 식사 자리에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죠. 같이 밥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모든 것이 정상적인 판단을 벗어나 버린 아버지 사울왕과 요나단이 크게 충돌하게 됩니다. 다윗이 죽을 죄를 진 것이 뭐가 있냐며 다윗을 두둔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때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사울이 더 극단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단창을 던져 죽이려 한 것입니다. 분노가 이끌고 움직이게 하는 사울왕은 아들 요나단을 향해 살인 미수를 범하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울에게 요나단이 바른 소리를 하면 사울 왕이 정신을 차리고 돌아왔습니다. 아 내가 그러지 말아야지 …내가 치우쳤지 잘못했지 그리고 돌아왔는데 이제는 완전히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결박되어서 요나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자기 아들 요나단도 단창을 들어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는 인생이 돼 버린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려는 마음이 확고해진 아버지 사울왕을 보면서, 요나단을 향하여도 단창을 던지려는 정신줄 놓는 행동을 하니까, 요나단이 화가 나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마음의 감정을 오늘 말씀에 이렇게 결론 짓고 있습니다. “그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화가 났고 “다윗을 위하여” 슬퍼했다.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매우 실망했고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분노와 실망의 본질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다윗을 욕되기 하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윗을 위하여 슬퍼했다는 것이죠. 사울의 악한영에 사로 잡혀 돌아올 길이 없이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 모습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아들에게 분노를 폭발하며, 입에 답을 수 없는 욕을 퍼부으며, 친아들을 향하여 단창을 던지는 미치광이가 되 버린 사울왕을 마음 아프게 바라봅니다. 나라가 든든히 서 가지 못하는 본질 문제인 자기 자신을 직면하지 못한 채, 이 나라가 마치 내 나라인 것 처럼 착각하고 모든 원인을 다윗의 탓으로 돌리며 살아가는 그 불쌍한 인생…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주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분노하고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가…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했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지, 아니면 내 자신이 욕먹어서 그렇게 화를 내는지…솔직하게 물어보기 원합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슬퍼하는지를, 내 자신 때문에 슬퍼하는지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요나단과 같이 이런 진정한 사랑 가운데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 때문에 내 마음에 화가 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슬퍼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요나단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심을 마음에 새기며, 주님을 위해 슬퍼하며 주님의 이름이 욕먹을 때 화가 나는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1월 2025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