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에는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고 인생에는 춘하추동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시작이 좋은 것도 중요하지만 끝이 좋아야 인생이 좋은 건데 솔로몬은 안타깝게도 후반전은 좋지 않은 인생, 끝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지고 추락하는 인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놀라운 은혜를 그에게 부어 주셨는데 그 부어주신 은혜에 취하여 결국 그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가 되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하나님의 마음과 눈이 머무는 성전을 놀랍게 건축했습니다. 정말 멋지고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고 하나님의 성전을 제대로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려 떠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마음을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났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셨는데 그 부어주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면서 그는 하나님을 떠났다….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렸다…그것이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세 가지를 다 어겼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왕으로서 세 가지를 절대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은금을 많이 쌓아두지 말고 말과 병거를 많이 두지 말고 여인들을 많이 두지 말라…이 금지 목록을 솔로몬은 하나같이 다 어겼습니다.은과금을 너무나 많이 쌓아 두었고 말과 병거를 너무나 많이 두어서 눈에 보이는 군사력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여인들을 한두 명 둔 것도 아니고 천 명이나 두면서 결국 그가 그 여인들이 가져온 우상들에게 철저하게 결박되어 마음이 눌려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는 그런 영적 환경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그 여인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게 됐고,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보이는 우상에게 더 쏠려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직접 나타나셔서 경고를 하셨습니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된다. 너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있는데 절대 다른 신 따르지 말고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산다….경고를 두 번이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몰라서 안 지킨게 아니라 하나님이 경고하시는데도 그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죠. 어떻게 솔로몬이 이렇게 타락하고 무너질 수 있을까? 솔로몬이 무너진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같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그 어떤 것보다 내 삶의 중요한 가치로 두며 하나님께 지혜를 그렇게 구한 왕도 이렇게 어리석게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우리 신앙이 얼마나 변질되기 쉬운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와 축복들을 얻은 후 솔로몬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돌아설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특별히 오늘 말씀을 통해 솔로몬이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을 통해 우상과 다른 신들에 빠지게 되는 본질이 뭐냐면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 가치로 두는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상으로 보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만질 수 있는 형상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우상과 같이 쉽게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우리를 충분히 채우지 아니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며 눈에 보이는 것을 추종하며 눈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 줄 알고 붙들다가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고 결국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떠난 솔로몬에게 찾아온 결과는 외적인 어려움, 즉 외부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먼저는 불순종의 결과로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외적 어려움은 적군이 쳐들어오는 겁니다 외부로부터 두 그룹의 적들이 괴롭히게 되는데 에돔사람 하닷과 시리아의 왕 르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외부로부터 채찍과 가시와 올무가 그를 어렵게 만드는데 바로 하닷이 반기를 들어 솔로몬을 괴롭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닷을 키우로 보호한 사람이 바로 왕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외교력과 군사력을 통해서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고 바로왕과 외교적 관계를 가졌고 바로 왕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강대국인 바로왕과 인척관계가 되고 그 딸과 결혼을 했으니까 우리는 안전할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바로왕은 이스라엘의 대적이었던 하닷을 품고 키우고 심지어 아내도 얻어주는 것입니다. 저 강대국을 의지하면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고 우리나라가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동맹을 맺고 줄을 서는데, 그 강대국은 우리랑만 잘 지내는게 아니라 나의 대적과도 잘 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키우고 나의 대적도 키우는 겁니다. 이게 의지하는 것에 당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는 거예요. 하나님 외에 인간이 이렇게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될 때 이런 어리석음에 빠져 내가 믿는 사람에 의해 뒤통수를 밪고 배신을 당하는 일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이게 세상 나라의 특징임을 모르고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닷으로 말미암아, 다메섹으로부터 르손으로 말미암아 솔로몬과 이스라엘을 가시와 같이 찌르며 굉장히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이제 하닷과 르손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고 계속 찌르고 공격하는 외부의 어려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반전의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그 어떤 것보다 귀하게 여기며 구했습니다. 그런데 후반전의 솔로몬은 그 어떤 사람보다 어리석은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솔로몬은 세운 공로와 업적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고 가장 많은 부를 축척했고 가장 경제가 부흥했으며 성전을 봉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을 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그의 후반전 인생은 추락했고 변절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원인을 솔로몬의 불순종과 우상숭배에 두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 마음을 가만히 놔두면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을 쉽게 떠나며 불순종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래서 새벽 기도를 통하여 다시 한번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가며 말씀을 날마다 기억하며 붙들고 마음이 든든히 세워지는 영적 훈련에 나를 담금질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절대 가치로 두지 아니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절대 신으로 모시며 하나님의 힘을 절대 능력으로 붙들고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나의 힘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솔로몬과 같이 한때 잘 쓰임 받고 무너지는 인생이 되지 않고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내 마음을 챙기며 주님 앞에서는 그날까지 겸손히 주님의 은혜 붙들고 살아가는 신실한 종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11장 말씀부터 시작해서 안타깝게 솔로몬 왕은 급격한 영적 내리막길을 걷게 됩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의 길을 가지 아니하고 마치 사울함과 같이 그의 전반전과 후반전이 전혀 다른 인생이 되어 성전 완공이라는 큰 성공과 업적 뒤에 왜곡 변질 타락으로 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언약의 성취인 성전을 지어 놓고 모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수많은 복을 누리고서 그렇게 철저하게 무너지고 내리막길로 질주할 수 있을 까…이해할 수 없는 그의 삶의 과정을 우리는 바라보며 사람은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어제 아무리 좋았어도 오늘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사람이며 저번 달에 아무리 좋았어도 이번 달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고 오늘 하루를 주님 은혜 바라보며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왜 솔로몬 왕이 갑자기 영적 하향 곡선을 그리며 무너지게 되었는가….를 묵상해보면 이것이 갑자기 생긴 일이라기보다는 차곡차곡 솔로몬이 말씀을 떠나고 하나님의 지혜를 떠나 이탈하려는 여러 조짐들이 있었음을 10장 말씀에서 경고했습니다. 겉으로는 갑자기 일어난 일과 같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솔로몬은 이미 많은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런 문제들이 차곡차곡 쌓이다가 임계점이 넘어가니까 수면위로 올라가 솔로몬의 발목을 잡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런 이탈과 문제의 조짐이 있다가 결국 솔로몬이 한 번에 확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그렇게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여자문제였음을 강조합니다. 이미 애굽의 바로 왕 공주를 사랑한 것부터가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바로왕의 공주를 위해서 왕궁에 살 곳도 따로 지어주고 거기에 보호시설도 만들어주며 애굽의 문화와 우상들이 함께 들어오게 된 것이 영적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솔로몬은 바로왕의 딸 하나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외 수많은 여성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결혼이 이방 나라들과 정치적 관계로 힘과 권력을 나누는 정략결혼이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이 여인들을 모두 사랑한 것이 아니라 정략적 결혼으로 외교 정치 안보적 이해관계를 따라 결혼한 것이라고 정당화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은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요. 그렇게 말하기에는 솔로몬이 품은 여인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았는가 하면 솔로몬 왕의 후궁이 700명이었고, 첩이 300명, 천명이나 되는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원칙에 불순종함을 그대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 경고했어도 나는 직진의 인생을 살겠다… 그러면서 수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이미 솔로몬 왕의 마음이 이방의 여인들에게 빠져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부끄러운 현주소, 이것을 성경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천명이나 되는 여인들을 품고 살아간 솔로몬 왕의 본질적 문제는 단순히 많은 여인들과 결혼했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게 올무가 되어 솔로몬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만드는 영적 문제가 되어 솔로몬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로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방 나라와 서로 통혼하지 말라고 이미 여러차례 경고하셨습니다. 근데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며 이방 여인들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게 영적 문제로 변질되게 만들어 그 이방 여인들이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을 따르게 하는 것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같이 사는게 아니라 내 마음을 내어주고 나의 가장 중요한 지성소를 내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방 여인들의 마음에는 우상들이 있죠. 강력한 우상들이 솔로몬의 마음에 들어와 하나님을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데 솔로몬은 하나님도 섬기고 이방신도 섬기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같이 섬기겠다고 이러고 있는 거죠. 결국 이방 여인 한두 명일 때는 솔로몬이 자기 마음을 지켰을지 모르겠지만 천명의 여인 앞에서 솔로몬이 당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이 이 여인들에게 완전히 장악 당하고 결박 당하는 겁니다. 솔로몬 하나님께 최고의 성전을 지어 봉헌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의 성취되는 놀라운 현존을 보게 하셨습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 그 놀라운 성전을 지은 후, 솔로몬은 타락했고 하나님이 눈앞에 악을 행하며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절대 나누어지지 않는 마음이고 한 곳으로 모이는 마음인데 성전을 짓고 나서 솔로몬은 마음이 무뎌지고 마음이 나누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금하심 세 가지, 은금을 많이 쌓아 두지 말 것, 말과 기병을 많이 두지 말 것, 여인들을 많이 두지 말 것, 이 세가지를 하나같이 다 어기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은과 금을 많이 쌓아두고 그것에 취해 있을 때 이미 무너짐에 균열이 보였습니다. 애굽으로부터 수많은 말과 수레들을 수입하여 눈에 보이는 군사력을 의지하고 애굽의 힘을 의지하며 안전할 거라고 착각하는 그 모습에서 균열이 이미 더 크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해도 돌아올 수 있었고 회복할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의 기회가 있었는데, 이 천명의 여인들을 통하여 솔로몬은 완전히 무너지는 겁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떠나가고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안타깝게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이 시간 반성하기 원합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부어주신 태평성대와 수많은 축복들이 솔로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도 실패하고 사랑으로써도 실패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도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고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 위해 세운 왕이 정의와 공의를 다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결국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무너지게 되고 나라가 분열되며 점점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선물로 솔로몬 같은 사람도 무너졌는데 저와 여러분 같은 사람은 얼마나 장담할 수 없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세상에서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한 번의 무너질 수 있음을 잊지 않고 이 세상에 정신 팔고 마음이 떠나게 되면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영적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에 사로잡히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전하게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로 부름받은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그런 왜곡과 변질의 조짐들이 보일 때 늘 돌아서고 말씀으로 은혜를 구하며 회복되는 것이 결국 사는 길임을 붙들고 주님 앞에서는 귀하고 복된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바 여왕이 지혜를 사모하고 갈망해서 저 멀리 남방에서부터 찾아와 지혜를 구하고 지혜 앞에 마음을 쏟아내며 그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지혜를 가까이 두고 그 지혜를 듣는 자들이 복되다고 여호와를 송축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만큼 솔로몬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지혜가 대단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만 동시에 그 모습은 스바 여왕이 지혜로움을 그대로 드러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신에게 지혜가 없음을 알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부어주신 지혜가 있는 솔로몬 왕을 찾아왔는데, 그렇게 멀리서부터 찾아온 스바여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지혜 없어짐을 찌르는 말씀 같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은 지혜가 없음을 알고 지혜를 구하고 갈망하며 그 지쳬를 얻어 돌아갔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 왕은 지금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왕이 되어가고 있다는 경고를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면 오늘 10잘 말씀을 끝으로 11장 말씀부터 솔로몬의 영적 내리막길로 추락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정점의 인생에, 모든 것이 성공을 가는 시점에서 순종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귀한 지혜의 사람으로 살았다면 11장 말씀이 나오지 않을 텐데 하나님의 안타깝고도 아쉬운 마음으로 10장이 증언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오늘 말씀의 경고가 영적 내리막길에 가기 전 마지막 하나님의 경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좀 다른 각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에서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향하여 칭찬하고 그를 높이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심으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즉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왕으로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의 영원히 머물도록 보냄을 받은 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세운 왕인데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세우기는 커녕 무너뜨릴 수 있는 여러 위험 신호들이 있다는 것을 스바 여왕의 칭찬을 통해 솔로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건 스바 여왕을 사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찌르는 말씀을 하고 있는데 솔로몬은 영적으로 둔감해져서 알아듣지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 없는 사람은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 자리까지 세워주시고 앉혀 주신 것을 망각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행하는 왕이어야 된다는 스바 여왕의 칭찬을 뼈 때리는 말고, 자신을 깨우고 찌르는 말로 솔로몬이 받아들였으면 변질되어 무너지지 않았을 텐데, 솔로몬은 무너지지 전 마지막에 찾아온 그 선지자와 같은 음성을 듣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경고를 들을 귀가 없었고,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돌아보며 자기를 찌르는 말씀으로 받아 들일 지혜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를 붙들고 있지 않으니 마치 지혜 없는 자 같이 무뎌지고 둔감해지고 말을 못 알아 듣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오늘 말씀이 솔로몬 왕국의 대단한 능력들 놀라운 군사력 수많은 업적들을 증언하고 있는 거 같은데, 말씀의 본질은 이 모든 것들이 말씀을 이탈하고 있는 위험 징조들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경고하듯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위험 신호는 금을 많이 쌓는 위험입니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666 달란트라고 증언하는데 물론 그냥 우연이라 할 수 있지만 성경에서 숫자는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세수가 666 달란트였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난 숫자를 통해 솔로몬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은 금 666달란트로 한 것은 크고 작은 방패들을 만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이 너무 많을 정도로 흔해서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금이라는 것이 방패를 만드는데 적합하지 않은데, 솔로몬에게 들어오고 있는 엄청난 금이 결국 모든 가치의 기준을 변질시키고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절하게 쌓아놓은 금이 아니라 쓸데 없이 금을 가득 쌓아두며 쓸데없는 곳에 금을 다 바르고 있는 솔로몬의 위험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이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왕 대신 금을 붙들고 부유함과 사치에 쩔어 변질되고 병들고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솔로몬의 위험 신호는 지혜보다 앞선 재물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재산과 지혜가 세상 그 어느 왕보다 크다고 증언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건 순서인데, 지혜와 재산이 아니라 재산과 지혜…라고 증언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순서는 매우 중요한데, 신약에서 바나바와 바울, 바울과 바나바의 순서가 영적 리더십의 변형이라 변화라고 얘기할 정도로 이름의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무엇을 지적하냐면 솔로몬에게 지혜와 재산이 아니라 재산과 지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에게는 재산이 지혜보다 앞서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솔로몬이 붙들고 있는게 하나님의 지혜가 넘버원이고 그 다음 재산을 붙드는게 아니라 재산을 먼저 붙들고 그 다음에 지혜를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재산과 재물 붙들고 하나님의 지혜를 경시 여김으로 무너지고 망하게 되는 징조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지혜보다 더 우선순위에 둔 솔로몬은 어리석게도 자신을 위한 자리를 마치 황제석과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상하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은 자리 양쪽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에는 사자 하나씩 서 있는, 소위 말하는 황제의 자리같이 보좌를 만드는 것이죠. 하나님의 보좌를 그렇게 잘 만드는게 아니라 임금이 앉는 자리를 마치 저 세상에 가장 높은 황제의 자리같이 만들고 앉아 있는 어리석은 솔로몬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세번째, 솔로몬의 위험신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대신 말과 병거를 의지하고 붙드는 위험입니다. 눈에 보이는 말과 병거를 많이 두고 붙듬으로 영적으로 타락하고 무너져 가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24절부터 29절은 솔로몬이 군사력 증강을 위해 가져오는 수많은 말과 병거들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렇게 말과 병거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말과 병거가 애굽으로 부터 들여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애굽에서 말과 병거를 그렇기 많이 수입해서 들여오는 것은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경고 말씀입니다. 신명기 1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중에 왕이 세워지면 왕이 절대 하지 말아야 될 세 가지를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세가지는 바로 은금을 쌓아 두지 말고, 병마를 많이 얻지 말고,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은금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병마를 의지하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대신 아내들을 통해 우상들을 겸하여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금하신 이 세가지를 하나같이 모두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고 세우셔서 그 높은 자리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데 지금 솔로몬은 하나님 대신 은금을 너무 많이 쌓아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대신 말과 마병의 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솔로몬을 무너지게 하는 첩경이 되었고, 임계점을 넘어가며 11장 말씀에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태평 성대와 승승 장수의 높은 자리에서 지금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솔로몬, 자빠지고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기 일보 직전에 스바 여왕을 통해 하나님께서 깨우시고 찌르시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닫는데 실패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찌르시고 깨우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변의 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우리를 깨우시고 흔드십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정신 차리고 돌아온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혜가 필요 없고 은혜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어두워질 때 나는 넘어지고 무너지기 쉬운 위험한 상태임을 깨달으십시오. 교만하면 하나님이 깨우시고 찌르시는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무너집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가 지혜로운 겁니다. 은혜를 구하는 자가 결국 살아나는 겁니다. 날마다 나를 깨우시고 흔드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반응하여 오늘도 다시 깨닫고, 다시 돌아오고 다시 지혜와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0장 말씀은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와 그 지혜에 감탄하고 지혜를 부어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지혜는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의 지혜이고,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혜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본질적인 지혜이고 나에게 영생을 가져다주는 지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스바 여왕이 사모하는 지혜, 그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는 삶이 태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특별히 이 스바 여왕이 지혜를 사모하며 구하며 찾아온 그 간절함과 지혜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스바 여왕의 지혜를 향한 갈망과 사모함입니다. 스바 여왕은 참 지혜를 구하기 위해 먼 거리에서부터 마다하지 않고 솔로몬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스바는 어디인가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 있지만 대체로 스바여왕은 이디오피아 여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 이스라엘을 온다는 것은 가장 먼 나라의 대표입니다. 이집트 보다도 훨씬 남쪽에 있는 이디오피아에서 온다는 것은 far far away country, 저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남방 땅끝에서 그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지혜를 듣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그 지혜를 갈망하고 갈구하며 저 멀리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스바 여왕은 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게 되었을까요? 솔로몬도 왕이었고 스바 여왕도 왕이었죠. 솔로몬도 부자였고 스바의 왕도 부자였습니다. 솔로몬과 스바 여왕은 동일하게 모든 것을 가지고 통치하고 이 세상에서 아쉬울게 하나도 없었는데 스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스바 여왕 자신에게는 없는 솔로몬 안에 있는 여호와의 여호와로 말미암은 지혜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데, 안 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권한과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채울 수 없는 결핍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왕이어도 모든 것을 가져도 이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없는 그 마음의 지성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그 마음의 지성소엔 반드시 하나님이 채워 주셔야 되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바 여왕을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지혜를 사모하며 그 멀리서부터 오는 것을 마디 하지 않고 그 지혜를 구하며 갈망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내 인생의 결핍 내 마음의 채워지지 공허함은 오직 하늘의 지혜로만 채울 수 있음을 알고 그 멀리서부터 지혜를 구하며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두 번째, 스바 여왕은 지혜 앞에 마음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말씀은 스바 여왕이 향풍과 심히 많은 음과 금과 보석을 다 가지고 와서 지혜 앞에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했다고 증언합니다. 이 스바 여왕의 모습이 참 지혜이신 예수님 앞에 서는 우리 실존입니다. 참 진리이자 참 지혜이신 예수님 앞에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며 말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깊은 갈증과 목마름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갈증과 결핍은 내 마음을 풀어 놓지 못하고 쏟아 놓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결핍과 갈증이고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어 속에 있는 것을 다 얘기하지 못하는 갈증과 결핍입니다. 특별히 내 마음에 본질을 채우는 하나님의 말씀과 참 진리에 대한 갈증 나의 마음의 지성소를 채우고자 하는 갈증이 있는데 참 진리와 지혜를 만나며 자기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쏟아내며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지혜를 내 마음에 담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복은 뭐냐면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풀어내는 복입니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나의 속마음이자 나의 지성소, 내 마음에 꺼내 놓을 수 없었던 그 마음의 모든 것을 여호와의 지혜 앞에 참 진리이신 예수님 앞에 다 풀어내서 모두 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혜 앞에 마음을 풀어내고 쏟아 냈더니 내 마음의 채워지지 않는게 하나도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마음에 매여 있는 수많은 것들이 풀어지는 역사가 있는 거예요. 마음에 막힌 것들이 뻥뻥 뚤리는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 속에 매여 있는 것이 풀어지고 막힌 것이 뚤리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체험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내 마음에 막히고 매여 있는 것들이 풀어지는 그 역사, 그게 바로 진리와 참 지혜이신 예수님 앞에 우리가 마음을 쏟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것은 돈으로 해결이 안 되고 권력으로 해결이 안 되고 주변에 좋은 사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참 진리 앞에 참 지혜 앞에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를 간구하고 지혜 앞에 내 마음을 쏟아 낼 수 있는 삶이 바로 복된 인생입니다. 세번째, 스바 여왕의 지혜에 대한 감격과 감동입니다. 스바 여왕이 크게 감동되어 솔로몬을 칭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자신이 들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것은 소문이 반밖에 안 된다는 겁니다. 보통 소문이라는 것은 안 좋은 것이 과장되고 좋은 것은 축소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스바 여왕이 들은 솔로몬의 지혜에 대한 소문은 사실인뿐 아니라 사실의 두 배였다고 크게 감동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당신 앞에서 가까이에서 지혜를 듣는 자들이 복되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크게 감동하며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삶의 핵심이 뭡니까?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를 듣는 것이 복중의 복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가까이 앞에 모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듣는 삶이 복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걸 복으로 알 수 있는 자가 진짜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두며 그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로 채우며 그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듣는 자가 정말 복된 인생이라는 것을 스바 여왕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향한 갈망과 사모함이 바로 성도인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되는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내가 정말 구하고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이 땅의 것, 세상의 것을 넘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지혜인가? 나의 마음의 지성소를 과연 나는 하나님의 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채우고 있는가? 진지하게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내 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핍의 인생이 공허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스바 여왕은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고 모든 권력을 가진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지혜가 없었기 때문에 인생이 막히고 인생이 걸리고 갈증과 공허함과 메마름이 해갈되지 않았습니다. 스바 여왕은 그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바 여왕은 지혜가 없어서 지혜를 찾아온 왕이었지만 사실 이 여인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바 여왕을 통해 주시는 지혜를 향한 세 가지 태도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아무리 먼 곳에서라도 여호와의 지혜를 구하며 사모하는 열망이 우리에게 있기 원합니다. 내 마음을 참 지혜이신 예수님 앞에 모두 풀어내며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말하며 묶인 것이 풀어지로 막힌 것이 뚤리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복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지혜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걸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송축하는 인생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 왕의 성전 건축과 자기 왕국을 지은 이후에 나머지 업적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perspective, 관점은 뭐냐면 솔로몬이 이렇게 위대하게 이런 많은 일들을 했다는 놀라움의 긍정적 관점보다는 솔로몬은 좀 과하다, 지나치다 지금 선을 넘어섰다는 경계의 관점으로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솔로몬의 문제점, 지나치고 과해서 문제의 길로 간다고 성경이 지적하는 두 가지를 함께 말씀으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첫번째 솔로몬의 문제는 계속된 건축과 부역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자신의 왕궁을 지은 이후에도 솔로몬이 계속해 백성들을 통한 역군을 일으키는, 부역을 명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짓는 데만도 7년이 걸렸고 자기 왕국을 짓는 데는 그 두 배가 걸렸습니다. 이 정도 백성들을 돌리고 부역을 했으면 이제는 좀 백성들에게도 좀 휴식을 주고 집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되는데 또 다시 건축을 시작하는 겁니다. 솔로몬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고성과 병거성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자기가 원하고 마음에 드는 곳은 어디든지 대대적인 건축공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건축이라는 건 다 손으로 모든 것을 해야 되는 때인데, 이렇게 계속 건축을 하게 되니까 민심이 지치고 민심이 불만이 있고 민심이 돌아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사용과 이용의 수단으로 계속 쥐어짜니 나중에 폭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실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잘 이끌고 섬기기 위해 왕을 세웠는데 지금 백성을 섬기거나 지키고 보호하는 왕이 아니라 백성들을 쥐어짜는 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업적을 치켜 세우는 말씀이 아니라 지나친 부역과 건축으로 인해 결국은 백성들이 터지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솔로몬의 문제는 더 큰 문제로 하나님을 애굽과 겸하여 섬기는 문제입니다. 바로 왕이 얼마나 통이 크냐 하면 솔로몬 왕에게 시집가는 자기 딸을 위해 뭐를 준거냐면 도시 전체를 준 것입니다. 게셀이란 도시를 다 점령해서 그 도시 전체를 솔로몬의 아내가 될 자기 딸에게 결혼 예물로 준 겁니다. 아무리 혼수를 대단하게 해와도 도시 하나를 다 바치는 애굽 바로왕의 딸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걸 분별하고 조심했어야 하는데 솔로몬은 이런 통큰 혼수를 마다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굉장히 좋아한 거죠. 그렇게 예물로 도시 하나를 받고 나서 뭐를 하냐면 그 받은 도시 위해 건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바로왕이 점령해서 받은 도시이니 모든 도시가 피폐해졌을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물로 가져온 그 도시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역을 통해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바로 왕의 이름으로… 자기의 아내인 바로 왕의 딸을 위해서 … 그걸 위해서 누가 또 동원되는 겁니까? 백성들이 동원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솔로몬은 왕궁 안에 바로의 딸을 위한 곳을 따로 만들어주고 그 곳에 밀로를 건축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성전 바로 옆에 지어진 왕궁에 머무는 바로왕의 딸은, 애굽의 문화와 종교, 우상들을 다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바로의 딸을 위해 밀로, 지금으로 말하면 방어시설이에요. 거기 혹시 위험할까봐 바로의 딸을 위해 방어 시설을 다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성경이 자세하게 증언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방 여인을 사랑해 결혼했다는 문제 정도가 아니라 솔로몬의 깊은 영적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에게 더 기대하고 누구를 더 붙들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겉보기에 솔로몬은 제사를 잘 드리고 예배 잘드리며 하나님께 신실한 왕처럼 보입니다. 때마다 절기마다 와서 하나님께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겉모습의 예배와 제사를 통해 하나님에게 올인하는 솔로몬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와 예배도 드리면서 동시에 솔로몬은 누구를 붙들고 있는가 하면 애굽왕 바로를 붙들고 있는 거죠. 애굽의 바로 왕은 그 당시에 강대국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나라를 잘 운영하려면 강대국의 힘이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솔로몬이 애굽의 힘을 더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애굽의 힘을 더 좋아하고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가 나중엔 발생하는가 하면 초기에는 하나님과 애굽을 겸하여 붙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하나님보다 애굽을 더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리막길을 가게 되는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경고의 말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대표된 세상, 바로왕이 다스리는 세상은 우리에게 도시 하나를 통 큰 선물로 줄 정도로 우리를 당기는 매력적인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그 바로왕을 의지하면 우리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을 가지게 되고요. 특별히 눈에 보이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고 세상 것을 더 좋아하고 세상 것을 붙들며 살아가기 쉬운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솔로몬은 화려하게 성전을 완성했습니다. 그 안을 모두 최고급 자재들과 금으로 잘 채웠고 놀랍게 봉헌식도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성전에서 하나님만 온전히 예배하는 순전한 예배와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예배하고 애굽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의지하고 애굽도 의지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애굽도 사랑하는 자가 되면서 무너지게 될 것이라는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에게 경고하는 말씀으로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만 그런 게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도 그럴 수 있기 때문에 성경은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묵직한 경고의 말씀으로 주신 줄 믿습니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지나치면 모자란만 못하다는 말인데 영적으로 둔감해진 솔로몬은 결국 백성들을 지치게 만들고 피폐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돌아서게 만드는 씨앗을 계속 뿌리고 있음을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 주변에 붙여 주신 사람들은 사랑하고 돌보고 이끌기 위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입니다. 내가 이용하고 사용하고 쥐어짜서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필요한 수단과 도구들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들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마음에 새겨야 되는 진리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여러 가지 일들과 행사들을 교회 이름으로 합니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하나님만 섬기는 대신 하나님도 섬기는 겸하는 삶으로, 우리는 늘 왜곡되고 변질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의지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힘보다는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기 때문에겸하여 섬기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겸하여 섬기며 망하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위험할 때가 큰 성공한 직후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큰 성공을 한 직후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그 정도로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큰 성공 직후에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삶의 지혜중의 지혜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에게 가장 정점의 때, 큰 성공 직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주신 말씀입니다. 지금 솔로몬은 인생에 있어서나 나라에 있어서 정점입니다.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을 건축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자기가 이루기 원하는 모든 것을 마친 최고의 정점입니다. 사실 내 인생에 내가 이루기 원하는 모든 것을 마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자신이 이루기 원하는 모든 것을 마쳤다고 증언합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마친다고 자부할 정도로 인생의 정점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안정되고 모든 것이 성공가도를 달리고 개인 인생에도 정점, 나라의 정점을 찍은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직접 오셔서 말씀하신 이유는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친 때, 모든 것이 정점을 찍은 이 때가 솔로몬에게 가장 정신 차려야 하는 때이며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때라는 것을 경고하시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완성하고 이룬 지금 휴가도 가야 하고 이 정도면 다 됐다는 생각에 긴장이 다 풀어지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전을 완성하고 봉헌했다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룰 때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멋진 성전이 제대로 쓰임받기 위해 이제부터 제대로 다음을 향한 도약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긴장을 다 놓고 주저앉을 때가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려 넘어지지 말아야 될 때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될 때고 지금이 엎드려야 될 때이며 지금이 정신을 놓지 말아야 될 때라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결정적인 타이밍에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 결정적인 타이밍, 인생이 잘 되고 승승장구하고 모든 것이 잘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이 착착 진행되는 그 인생의 정점에 하나님은 우리를 깨우러 찾아오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의 가장 정점에 모든 것이 승승장구를 잘 가고 있을 때가 가장 넘어지기 쉬운 때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이것이 깨어있는 자들의 영적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완성된 성전에 무엇을 채우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따라오게 된다는 것을 솔로몬에게 조건적 축복을 알려주셨습니다. 보이는 껍데기인 외형적인 건물을 잘 완성한 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성된 성전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임 받도록 그 성전 안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채우고 계명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채우는 것, 보이지 않는 것들도 그곳을 든든하게 세우는 것이 계속 되어야 되는 것을 솔로몬에게 일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거룩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며 영원히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두고 그곳에 함께 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겉에 보이는 화려함,비싼 자재들과 금을 가지고 모든 내부를 장식한 것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이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은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으며 하나님의 이름과 함께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이 세운 성전이 성전되게 하고 거룩하고 구별된 곳이 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의 복은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있는 곳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저희 교회 공동체에도 성전이 성전되게 하고 예배당이 참 예배당 되게 하는 것은 겉에 보이는 화려함도 안의 장식도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두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이 항상 있게 되는 비결, 성전이 거룩하고 구별되게 하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거하며 말씀에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축복대신 저주가 찾아올 것도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말씀을 붙들지 않고 불순종하며, 하나님만 예배하는 대신 다른 신들을 겸하여 예배드리는 이런타락으로 가게 되면 이스라엘을 끊어버리고 이 화려하고 멋진 성전도 던져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겉으로 봐서 화려한 성전 같은데 그곳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 된다면 결국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비웃음거리가 되고 하나님은 던져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고,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해야 될 그 성전이 철저하게 무너지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라도 다 던져 버리시겠다는 경고는 순종하지 않을 때 언약의 복은 없다는 강력한 선언이십니다. 불순종의 결과가 이 정도로 처참함을, 이런 저주들이 임하게 된다라는 것을 잊지 말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이 경고를 통해 마음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것이 솔로몬이 왕으로서 나아가야 될 길이라는 것을 친히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너의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이 머무는 비결은 바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붙들고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말라…깨우시고 찔러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정점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룬 그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경고장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선택지를 내미시는 주님의 뜻 가운데 이 시간 바른 응답을 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우리 교회에도 내 인생에도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이 성전에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곳에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며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두는 곳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복입니다. 이 축복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한 단 한 가지의 조건은 말씀 안에 거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결국 순종이 하나님의 복이 머무는 열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예배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이 삶을 견지할 때만 그 하나님의 축복이 머물게 됨을 마음에 선명히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정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붙들고 하나님이 주시는 찌르는 말씀, 깨우는 말씀으로 붙들고, 더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머물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내 인생, 우리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되기를 사모하며 오늘도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 봉헌식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솔로몬의 기도 뒤에 모든 것을 마치고 솔로몬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장면입니다. 성전을 완공하고 성전을 드릴 때에도 왕의 이름으로만 드리는게 아니라 온 백성의 이름을 담아 하나님께 올려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전 봉헌식은 솔로몬 왕이 혼자 하나님께 드린 봉헌식이 아니라 왕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하나되는 공동체적인 봉헌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기도를 하는데 얼마나 진실되게 마음을 담아 기도했는가…54절을 보면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쳤다고 증언합니다. 솔로몬이 처음에 기도할 때는 서서 기도했는데 무릎 꿇고 두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그 기도가 얼마나 진실되고 얼마나 마음을 쏟은 간절한 기도였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마친 후에 솔로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온 백성들을 축복하며 성전 완공이 하나님께 받은 공동체적 축복이었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그걸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머물러야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는 여러 가지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세 가지를 함께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축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세 가지가 등장하는데요. 첫 번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이 축복의 본질이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조상들과 함께 계신 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떠나지 마시고 버리지 마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통해 솔로몬은 복의 핵심이 뭔지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복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누리는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축복의 본질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실체로 믿고 붙드는 것이죠.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복의 본질은 뭐냐면 지금 이 시간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실체로 고백되고 그것을 누리는 자입니다. 그게 복의 근원이고 그런삶을 형통한 삶이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언제 빠져나올지도 모르고 말도 안 되는 일도 들어간 감옥 안에서 요셉이 형통했다고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눈에 보이는 상황은 형통할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절망의 상황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요셉은 형통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사기 시대가 영적인 암흑시대 이유는 그들이 잘 먹고 잘 지냈을 수 있으나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눈에 보이는 사람의 왕을 세워 달라고 아우성 쳤기 때문에 그때가 암흑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 되시고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고백하지 못하는 시대는 영적인 암흑의 세계이며 저주의 시대라는 것을 성경이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이것이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을 꼭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함께 하심을 믿고 누리는 그 축복이 현재형으로 경험되기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삶,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두 번째 솔로몬이 백성을 축복하는 것은 말씀이 가까이에 있는 복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필요한대로 말씀을 가까이에서 취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 축복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이 성전이 나중에 변질되어 눈에 보이는 껍데기인 성전을 붙들고 그것을 절대화시키며 절대 가치를 두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성전이 모두 무너지는 안타까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성전을 성전 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리스도의 현존인 말씀이 그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에 두며 말씀이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게 축복의 본질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는 것임을 우리는 정말 축복으로 알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주일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상고하고 말씀을 붙드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고 말씀에 영향력 아래 내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 머무는 비결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이면 예배드리고 모이면 말씀 읽고 기도하는게 다 결국은 말씀을 가까이에 두고 싶은 우리의 열망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운데 이 축복의 본질인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내 마음에 새기는이 영적인 훈련을 통하여 주님의 축복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머무는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세 번째 축복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축복입니다.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행하며 그의 계명을 철저히 지킴으로 하나님만이 하나님 되시게 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경계하시고 경고하시는 건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상과 하나님을 세상과 겸하여 섬기는 것을 심지어 영적 간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철저히 배격하신 이유가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축복은 하나님이 오직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곳에서 나오기 때문이죠.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에게만 향하는 복이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넘버원이신 곳에서만 역사하시고 일하십니다.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데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직 여호와만 하나님이라는이 놀라운 고백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믿고 의지할 대상인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그 외에 다른 하나님 나는 나에게 없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순종의 삶입니다. 그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여호와께 바쳐서 완전해지는 겁니다. 내가 완전해지는게 아니라 내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면 우리를 완전하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 안에 우리는 함께 세워져가고 성장하고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세 가지의 축복을 받은 백성들의 반응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화목제 희생제물을 드리는데 백성들이 기쁨으로 마음에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께 축복을 받은 반응은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겁니다. 모든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했다는 것으로 말씀이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소가 2만 마리에 양이 12만 마리였습니다. 소 한 마리 가격이 천만원이 넘는데 2만 마리를 제물로 드렸으면 얼마큼을 드린지 아시겠죠. 기름이 너무 많아 제단에 기름을 다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하게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정말 과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쏟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거룩한 낭비와 같이 하나님께 드린 거예요. 마치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서 예수님에게 드린 그 봉헌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온전히 쏟는 예배, 다 부어도 아깝지 않은 감격이 있는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백성들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본질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임을, 축복의 본질이 말씀과 가까이 있는 것임을 축복의 본질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것임을 이 시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머물러야 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축복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가장 본질적으로 붙들고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시편의 고백이 나의 고백 될 때, 우린 진정한 복과 형통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생활에 정말 중요한 본질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실체로 누리는 삶입니다. 동시에 이 시간 주님께 드리는 나의 예배가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는 감격이 있는 예배가 되어 내 삶에 하늘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의 삶에 풍성히 경험되며 주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 건물 공사를 다 마치고 성전 내부 장식, 성전 기구들을 다 준비한 후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 안에 중심에 모셔놓음으로써 모든 성전 건축을 마치게 됩니다. 그 모든 성전 건축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하는 내용을 계속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 내용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세 가지를 주목하며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첫번째, 솔로몬의 기도는 성전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멋지게 완공했고 장식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임했습니다. 그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면 바로 내가 믿고 고백하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닫게 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된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망각하고 죄 가운데 빠지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을 바라보며 성전이 누구를 기억하게 하는가 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에게 돌아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마치 안 계신 분처럼 눈에 보이는 껍데기와 상황과 사람들에게 매몰되며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다 연약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자꾸 매몰되며 자꾸 하나님을 떠나고 범죄하고 무너질 수 있는데 그때마다 하나님 백성들이 성전을 바라보며 아 하나님이 계시지 그리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아오면 주님 그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그들에게 다시 한번 돌아와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옵소서…왕이 지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솔로몬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솔로몬 왕이 기도하는 그 내용들보다 중요한 건 그 기도를 하는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죠. 우리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은 나의 기도 열심 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간절함 때문이기도 할 수 있습니다만 본질적으로 우리 기도가 능력 있는 것은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능력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분명한 믿음의 고백 가운데 기도를 할 때 기도에 능력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신앙 생활과 기도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이고 내가 지금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믿고 바라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건 뭐냐면 우리가 잘 되고 승승장구 할 때도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고 이 모든 축복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붙드는 것이고요. 내 삶이 힘들고 어렵고 환란과 어려움을 당할 때에도 그 자리에서 성전을 기억하고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현재로 실체로 계심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팔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그 믿음의 대상, 기도의 대상이 있다는 것을 잊지않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특권인 것을 믿으며 늘 성전을 바라보며 참 성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의 긴 기도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있으며 우리에게 바라볼 성전이 있으며 우리에게 은혜를 구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기를 작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솔로몬 기도의 특징은 믿음의 대상 기도의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었다는 것과 함께 완성된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복이 있기를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이 성전을 통하여 심지어 약속의 자녀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도 주님의 은헤가 머물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두 손들고 기도할 때 그 이방인들을 마치 이스라엘백성들과 같이 품고 사랑해 주시며 그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성전은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의 성취로서 솔로몬 왕이 세운 거죠. 성전은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이 분명한데 솔로몬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경배하고 구원받아야 될 많은 이방 민족을 품고 손을 펴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성전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만 복 받지 말고 이방 사람들에게도 복이 되는 통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내려지고 맛보아지는 통로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지금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가기를…선교적 의미를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중요한 이유는 솔로몬의 기도가 눈에 보이는 성전뿐만이 아니라 장차 오실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참 성전이시기에, 그리스도 위에 보이는 성전이 세워져야 되며 그것이 절대적 가치이며 눈에 보이는 성전은 상대적 가치라는 것을 예수님이 계속 강조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성전 되셨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성전에서 영적인 반응이 있었습니다.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몸 자체가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솔로몬의 기도가 어떻게 영적으로 해석 되냐면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들을 위한 복음만이 아니라 유대인을 더불어 이방인과 온 인류를 향한 동일한 구원의 선물과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완공과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솔로몬의 기도를 통하여 장차 오실 예수님을 통해 장차 이루어질 일들을 솔로몬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지금 증언하고 있는 것임을….복음의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의 벽을 깨어 유대인들만 복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참 성전 되신 그분의 몸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는 그 놀라운 선교적 과업이 이루어지는 참 복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눈에 보이는 우리 교회 성전을 통하여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멋진 교회 건물 자체에 매몰되지 말고 교회 건물을 통해 언제나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그릇과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참 성전 되시기에 그분의 뜻인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푸르른 계절이 오는 복음의 사명을 우리가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현재화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구원받고 복 받았다는 걸로 끝나지 말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를 통해 전해지고 확산되는 그 사명을 향해 나가는 그 간절한 기도를 우리도 동일하게 드리기 원합니다. 세 번째 솔로몬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죠.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의 모든 마음을 아신다는 것이죠. 기도하며 하나님을 바라볼 때 나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간구를 들으시며 사랑으로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나아와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며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결국 복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 앞에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이 열린다는 것이죠. 이 세상 사람들이 뭐라 그러던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시는가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 그게 기도의 능력입니다. 나는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고 나는 하나님이 불쌍히 여시는 자비의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행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들으며 내 마음에 채우는 이 놀라운 영적 삶을 우리가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임을 분명히 바라보십시오. 우리만 잘 먹고 잘 지내고 복 받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방인들을 향하여 온 열방을 향하여 주님께서 축복의 통로로 참 성전으로이 세상에 오셨음을 믿고 바라보는 복음의 눈을 회복하십시오. 기도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를 발견하며 내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놀라운 믿음과 능력이 내 삶에 회복되기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소리와 환경의 소리로 내 마음을 채우는 대신, 두려움과 걱정과 왜곡된 소리를 차곡차곡 내 마음에 담아 채우는 대신,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 하나님의 행하신 놀라운 일을 기도를 통해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인지를 계속 깨달으며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심을 믿고 신뢰하며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들음을 통하여 나며 그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생명되는 말씀이 머무는 것임을 붙들고, 우리도 솔로몬과 같은 이런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소통하며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소리를 마음에 담아 내 마음이 생명과 은혜와 풍성함 가운데 거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성전 앞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기도할 때 3분을 기도하면 기도할게 없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1시간 기도 해도 기도할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분량으로 모든 것을 일반화할 순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내가 할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내용을 들어가기 전에 무엇보다 솔로몬의 기도가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주목하는게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기도가 향하는 곳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늘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서 기도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를 통성기도를 하느냐 침묵 기도를 하느냐 방언 기도를 하느냐도 아니고, 얼마나 오래 가느냐 짧게 하느냐도 아닙니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나의 기도하는 대상이 정말 하나님이냐는 것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내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 천지를 지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우리가 확신할 때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주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이 시간 내 마음을 쏟으며 기도할 수 있으며 그 기도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능력이 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늘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마음과 눈을 들어 고백하는 솔로몬의 기도에는 세 가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의 고백, 하나님을 성전에 한정할 수 없다는 고백, 나의 기도를 들으심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적 기도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기를 사모하며 솔로몬의 기도를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솔로몬의 기도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집중하는 기도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내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이 이런 분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고 경험하는 하나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고백하는 겁니다. 내 상황이 어떠하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나의 모든 것을 덮고도 남은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놀라운 힘과 능력이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믿고 고백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정말 하늘과 땅에서 가장 크고 높으신 분, 가장 놀라우시며 위대하신 하나님임을 분명히 믿고 고백할 때 기도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성경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계속 마음에 담고 새기는 것이 기도의 첫번째가 되어야 합니다. 두번째, 솔로몬 기도는 하나님께서 성전에 가둘 수 없을 정도로 크신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시는가 하면 하늘에도 담을 수 없고 땅에도 담을 수 없고 우리가 지은 이 성전에는 당연히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얼마나 위대하게 놀랍게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7년동안 최고급 자재들을 사용하여 얼마나 화려하게 지어졌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고백은 하나님을 이 성전에 가둘 수 없고 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어 봉헌한 성전은 이렇게 작은 것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알게 되는 건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를 아는 만큼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내가 놀랍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순간,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순간 그 하나님의 크심 앞에 나의 한없이 작아짐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예배 드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놀라우심, 크고 위대하심 앞에 내가 서게 되면 내가 이렇게 작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내가 이룬 어떤 업적들, 성과들, 열매가 다 하나님 앞에는 작은 것임을 늘 잊지 않는 것이 기도입니다. 세번 째 솔로몬의 기도는 우리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솔로몬이 주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첫 번째는 나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첫번째는 여러 가지가 나의 소원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이 경험되게 하시고 맛보아 알게 하시며 그것이 말씀으로 확실하여 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이것을 주세요 저것을 주세요…기도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를 절대적 가치로 두고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기도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런 기도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중요한 기도가 되어야 되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기도 첫번 째는 말씀이 확실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통하여 온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오직 하나님이심이 확실하게 하옵소서…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통하여 주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 좋은 씨앗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확실해지는 역사가 보여지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솔로몬과 같이 우리가 기도를 사모할 때 하늘을 향하여 내 손과 마음을 들고 주님의 이름이 있는 성전을 향하여 우리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향하여 성전을 향하여 여러분들의 눈과 마음을 들고 기도하기 원하십니다. 하늘을 향하여 내 눈과 마음이 들려 주님의 이름을 붙들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꾸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려고 하고 한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성전 안에 계시고 그 이름을 두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을 이 성전 안에 가둘 수 없습니다. 이 성전을 통하여 우리가 말씀을 채우고 기도를 채우며 이곳을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맛보아 알게 하시며 그 말씀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확실히 이루어지며 말씀이 확실해지는 역사가 있기 원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기도하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나의 인생을 통해 주의 말씀이 확실하게 이루어지는 귀한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나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열매맺는 귀하고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 왕은 성전을 다 지었고 내부를 다 금으로 장식하고, 성전의 모든 기구들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와 중심에 딱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 완성되고 나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가득한 성전 앞에서 하나님을 고백하며 백성들을 축복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특별히 솔로몬의 입술을 통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성전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이자 그의 이름을 두시는 곳, 이 두 가지를 마음에 꼭 새기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성전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입니다. 여기서 거하신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 집에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물러 계신다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내가 그 집을 정해서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내가 머물겠다는 것이죠. 잠깐 왔다 갔다 들리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가 교회를 그냥 왔다 갔다 들리듯이 하나님이 계시는게 아니라, 성전에 영원히 거하시고 그 자리에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물러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이 겉으로 화려하고 잘 지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은 그곳에 하나님이 의도적이고 의지적으로 머물러 계심이 되는 것입니다. 성전됨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무시는 곳입니다.
교회가 본질을 향하여 나아간다는 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의지적이고 의도적으로 머물고 싶으신 곳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머물고 계시기 원하는 곳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넘버원이 되시는 곳에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물러 계십니다. 사람들은 껍데기만 바라보고 겉모습만 바라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바라보시기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붙드는지, 하나님을 다른 겻과 겸하여 바라보고 붙드는지를 정확히 아십니다. 하나님을 곁다리로 겸하여 섬기는 곳에는 하나님이 거처를 정하시고 머무실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넘버원으로 모시는 곳, 그 중심에 하나님만 붙드는 곳에 일하시고 그곳에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무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이 머무시는 교회가 되기 원하기에 끊임없이 강조하고 붙드는 것은 늘 예수 이름만 붙드는 싸움, 하나님만 붙드는 싸움을 우리는 계속 벌이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지성소 한 가운데 주님을 모시고, 중심에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거하시는 은혜의 동산이 좋은 씨앗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에만 하나님이 머무시는 처소가 되는 것을 넘어 성경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수 있음을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을 보게 되면 우리의 몸을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전이라고 증언합니다. 우리 마음에 성령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머무는 곳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할 때 그게 가능합니까? 동일하게 내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냥 왔다 갔다 들리시는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의지적으로 내가 거기 머물고 싶다 그러시면서 내 마음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시는 처소로서 내 마음을 드리고 우리 가정을 드리고 우리 교회를 드릴 때 그곳에 바로 놀라운 천국의 맛보기에 은혜가 경험되는 기적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할 처소로 정하신 걸 확실히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서 내 마음을 정하시고 우리 가정을 정하시고 우리 교회를 정하셨음을 믿고 고백하는 성도의 확신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고 싶어… 내가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너의 집에 가고 싶어…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초대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 중심을 주님께 드림으로 성전이 성전되며 우리 가운데 본질이 회복되며 우리 안에 오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경험되는 통로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두번째,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곳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를 넘어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을 두는 곳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한 호칭이나 그냥 타이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자 권위 그 자체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그의 능력과 권위가 머무르는 곳이 어디냐면 바로 성전이 된다는 것이죠. 세상이 뭐라 그래도, 사람 사람이 뭐라 그래도 여호와의 이름이 거하는 그곳에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고 그곳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 여호와의 이름을 두실 곳으로서 성전을 삼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둘만한 곳이 되는 곳이 좋은 씨앗 교회가 되는 것이 복 중에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실 만한 곳이 될 그릇을 준비하며 살아갑니까? 그 놀라운 이름의 능력과 권위가 우리 가운데 머물러 계십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만한 곳,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두실 만한 곳이 되기 워한 그릇을 준비하고 영적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바로 마음이 딱딱해지지 않고 메마르지 않고 쪼그라들지 않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두실 만한 곳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머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를 담을 그릇이 될 때 그의 이름을 두실만한 곳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반복해 강조되는 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말씀하신 대로 그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세우시는 그 놀라운 성전의 역사가 하나님이 말씀과 언약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열매인 것입니다. 성도로서 내 인생에 가장 큰 복은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교회에 가장 큰 복은 그냥 그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것을 경험하는 것, 이것이 가장 큰 복이며 놀라운 은혜와 영광을 맛보는 비결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 우리 교회를 삼으시겠다고,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내가 너의 마음 안에 거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한다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들을 겸하여 놓는다면 그곳에 하나님은 머무실 수도 일하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지성소에 가장 중요한 넘버원으로 모실 때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높은 곳에, 가장 중요한 곳에 넘버원으로 모실 때 하나님이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머무시는 처소가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됨의 복, 그의 이름을 두시는 복을 붙들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맛보며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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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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