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엘리 제사장이 영적으로 둔감하고 어두워져서 마음 준비가 안 된 채 비극적인 소식 3가지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대패해서 3만명이 전사했고, 자신의 두 아들이 전장에서 죽었으며,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 큰 충격으로 의자에서 자빠지며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무명의 며느리, 둘째 아들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애기를 낳다가 죽는 비극적 장면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다가 죽는 죽음은 엘리 제사장의 죽음과 큰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름도 등장하지 않는 이 무명의 며느리가 등장하는 이유는 그 어둡고 영적으로 둔감해진 집안에서, 하나님에게 촛대가 이미 옮겨진 망한 집안에서 그나마 가장 영적으로 깨어 있었던 여인,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며느리였기 때문입니다. 비느하스의 아내였던 이 며느리는 비극적 소식을 듣고 갑자기 몸이 아파서 해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나쁜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서 갑자기 아파서 애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 충격은 엘리 제사장이 받았던 충격과 결이 다릅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둔감한 엘리 제사장은 이런 일이 올 거라는 것을 설마 하고 준비되지 않은 채 충격을 받은 것이고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는 이 집 안에서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서 이런 비극이 언젠가는 올 거라는 것을 이미 마음에 짐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치 태아가 통증을 통해 해산에 날이 오는 거와 같이 이 집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렇게 떠나고 모든 것이 무너질 날이 오는구나…라는 것을 마음에 이미 염두하고 있다가 그 소문을 들은 충격인 것입니다. 그렇게 갑자기 아파서 해산을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며느리는 아기를 낳다가 비극적으로 죽게 됩니다. 해산 중에 죽어가는 며느리에게 도와주는 여인들이 “두려워하지 말라…네가 아들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는 본능과 본성이 있는데 어머니는 자녀가 태어날 때 하나님이 주시는 본성으로서 기뻐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태어나고 있는데 그 어머니가 대답하지 도 않고 관념 하지도 않았다는 거에요. 다시 말하면 아들이 태어났는데 하나도 기쁘지 않았고 마음에 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살 이유가 뭐야…이게 뭐가 기쁜 일이야…그러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앉아 있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해산을 하는 중에 죽어가면서 자기를 대신하여 태어난 아들을 바라보며 유언과 같이 남긴 말이 특별히 우리가 마음에 담아야 될 이야기입니다. 그 여인이 죽어 가며 유언과 같이 자기 아들의 이름을 짓는데 그 아이 이름이 “이가봇”이었습니다. 이가봇이라는 아이 이름의 뜻이 뭐냐 하면 오늘 성경에도 나오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집안에서 떠났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이스라엘에서 떠났다…이게 고통의 이름 이가봇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얘기하죠.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항상 영적으로 어둠과 무질서가 찾아옵니다. 사사기 시대의 특징인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하고 살아가는 이런 영적 무질서와 어둠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것입니다. 자신의 집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버린 불행한 사건을 이 여인의 입술을 통하여 절규와 같이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죽어가면서 알았습니다. 우리 집안의 가장 큰 비극은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것은 아기가 태어나는 것 같이 그 동안 쌓여 있는 것에 대한 결과일 뿐이라는 것도 알았어요. 법궤를 빼앗기기 전부터 이미 이렇게 말씀을 떠나고 예배를 멸시하는 일들은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마지막 열매로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긴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우리가 삶의 한복판에,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적용을 해보면 우리 교회 공동체와 우리 가정과 내 자신에게 가장 큰 비극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입니다. 그 비극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고 건물만 남아 있고 사람들만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채 사울왕은 한참 동안 왕 노릇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채 엘리 제사장 과 그 가문은 한참동안 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광은 이미 떠난 지 오래이고 그 껍데기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열매의 비극을 조만간 맞이할 뿐입니다. 가정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채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채 어머니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위기는 돈의 위기가 아니라 집의 위기가 아니라 자녀의 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가정이 가장 큰 위기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가정에서도, 우리 교회에서도 “이가봇”이 일어나도록 가만두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도록 방치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갑니까? 엘리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가 없을 때, 예배와 제사를 멸시할 때,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을 평가하고 말씀을 평가할 때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무질서 해지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갑니다. 말씀을 떠나고 기도가 떠나갈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갑니다.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 “이가봇”을 경험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께 조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며 기대해야 합니다. 언제나 주님 보다 앞서지 말고, 주님 위에 올라가지 않으며, 주님의 중심 되심이 뒤로 밀리지 않도록, 언제나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가정,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간 신앙 공동체가 제일 큰 비극이라는 것을 깨닫고 영적으로 깨어 있으며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돌아가며 늘 주님 안에 머물러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에게 비극적인 패배를 당한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면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 주겠지…라는 착각 가운데 회개 하지 않은 채 부적과 같이 가지고 나와 블레셋과 전쟁을 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게 패배했습니다. 그 비극적인 소식을 엘리 제사장에서 전하러 오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인 전령이 달려오는데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쓰면서 오고 있습니다. 분명히 전쟁에서 무슨 큰 일이 있으니까 전령이 저렇게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쓰고 달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이 소식은 좋지 않은 소식, bad news라는 것을 누구나 아는 것이죠. 그렇게 달려오는 것만 봐도 복된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다 감을 잡을 수 있는 것이죠.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쓰며 달려오는 전령을 바라보며 가져올 슬픈 소식에 사람들을 다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그 전령이 들고 오는 bad news를 들으려고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기다리는데 단 한사람만 여전히 착각 가운데 혹시 좋은 소식이 아닐까 하고 기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있었습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바로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왜 엘리 제사장만 그 모든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가 하면 그 눈이 어두워서 그 전령이 옷을 찢고 재를 무릅쓰고 오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고령의 나이에 시력이 그렇게 나빠져서 지금 얼마나 나쁜 소식을 가져오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의 눈이 그토록 어둡지 않고 적어도 이 전령이 좋은 소식을 가져오지 않는 거라는 것을 알았다면 충격이 덜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지금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시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여전히 마음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지고 나가 전쟁 했으니 전쟁에서 분명히 이겼을 거라는 그 아들들의 생각과 똑같은 착각을 가지고 지금 전령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엘리 제사장의 모습은 단순히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반복 되어 얘기하지만 영적인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그림 언어입니다. 그가 영적으로 얼마나 둔감하고 어두웠으면 지금 상황 파악 자체가 거의 되지 않는 겁니다. 그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 놓고 그렇게 3만 명이나 전장에서 죽게 만드는 그 원인을 제공하게 된 지도자의 무지, 그 지도자의 영적 둔감함이 이런 결과가 있게 되었다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엘리 제사장 앞에 전령이 달려 와서 보고를 하는데 그 보고는 3가지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가서 싸웠지만 대패해서 3만명이나 전사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전장에서 동시에 죽었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법궤도 적군 블레셋에 빼앗겼다는 것이죠. 엘리 제사장은 상상하지 못한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3만 명이나 전사한 것도 충격이었고, 그 전쟁에서 자신의 두 아들이 모두 죽게 된 것도 더 큰 충격이었고, 가장 큰 충격은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겨 블레셋에게 탈취 당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니까 엘리 제사장은 거의 숨이 멎을 듯한 충격 가운데 그 인생이 끔찍하게 마무리되게 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졌다는 것과 함께 이 의자는 엘리에게 매우 중요한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자로서 성전 한 가운데 나아가지 못한 그의 영적인 하향 곡선과 둔감함, 예배자로 서지 않고 관리자와 감독자로 저 뒤에 앉아 있던 영적 나태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의자에 앉아 있던 엘리 제사장입니다. 그 의자에 앉아있다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빼았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놀라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는 비극으로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두 아들도 비참하게 죽고 그 영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도 비참하게 죽는, 심판에 직면하여 그 집안이 모두 몰락하게 되는 끔찍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목이 부러져서 의자에서 자빠져 죽게 된 엘리 제사장의 영적 상태를 “ 나이가 많고 둔함”으로 결론맺습니다. 여기서 둔하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좀 뚱뚱하다는게 아니라 영적으로 둔감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흐려지고 나중에는 아예 보이지 않는 어두움으로 닫혔고, 영적으로 감각을 다 잃어버리고 둔감해진 제사장이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 넣고 전쟁의 큰 패배를 직면한 영적 책임을 그대로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부적처럼 여기며 회개와 자복 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 없이 가지고 나아 빼앗긴 이 비극적인 일을 가져오게 되는 영적 책임을 지는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는 엘리 제사장의 모습은 단순히 그 사람 개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영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영적 어둠의 시대, 영적으로 둔감하여 상황을 분별하지 못하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모습, 그 모습이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자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잠시 살아갈 때 내 영적 시각이 흐려지고 어두워지지 않도록, 영적으로 둔감해지지 않도록, 늘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깨어 주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비참한 인생으로 결론 될 수 있음을 반면교사 삼아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며 하나님께 나의 인생이 늘 조율되어 주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겸손함을 붙들 때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앞서 일하시는 놀라운 말씀의 힘입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를 위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지 않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 하면서 자기들의 실패와 무너짐을 회개와 돌이킴의 기회로 삼는 대신, 하나님의 언약궤를 부적인양 들고 나와 마치 하나님이 기적과 같이 대신 싸우시고 그 블레셋 군인들이 다 바람에 쓰러지게 하는 신비한 물건인 냥 착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지극히 육신적인 생각인데다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고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전락시키는 아주 끔찍한 일이죠. 그렇게 부적과 같이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을 나가니 저 언약궤만 있으면 우리는 백전백승이다…착각하며 마치 전쟁에 이긴 것처럼 지금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소리가 땅을 올리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회개와 돌이킴이 없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취사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을 도구로 쓰려 하는 부적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들의 함성과 사기 충만은 속은 텅 빈 강정과 같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는데 그들이 말씀을 떠났는데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하나님 앞에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전쟁을 하라고 하신 것도 아닌 전쟁에 나아가면서, 이미 큰 패배 이후에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궤만 들고 나가면 무조건 이기고 무조건 도와주실 거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동일하게 이스라엘 백성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고 우리가 말씀을 떠나고, 우리가 기도를 떠나고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는 것을 떠났는데 내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 오니까 하나님이 무조건 도와줄 거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부적과 같이 미신과 같이 앞세우며 그냥 막연하게 하나님이 대신 싸워 주실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 회개와 돌이킴도 없이, 그냥 그 죄 묻은 손으로 그 악한 모습으로 그냥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 모습,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금 영적 현주소 이며 우리의 영적 현주소 일 수 있음을 하나님은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사기 충전한 모습을 보며 블레셋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그들을 잠시 벌벌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대의 바램과 달리 오히려 이 하나님의 법궤를 들고 온 것이 블레셋 군대를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더 열심히 목숨 걸고 싸우도록 똘똘 뭉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언약궤가 앞에서 다 싸워 이겨 줄 거 같이 착각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블레셋과의 전쟁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전쟁에서 전사한 이스라엘 군인 들이 3만명이 될 정도로 아주 처참하게 대패를 하게 됩니다. 막상 전쟁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기대와는 달리 처절하게 블레셋 군대에게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사장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도 그 전쟁에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그렇게 그들이 믿었던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 군대에게 빼앗기는 최악의 결과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지 않는 이런 악한 영적 지도자가 그 시대의 영적 공동체를 얼마나 어렵게 하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법궤를 부적과 같이 들고 나가서 착각한 결과는 3만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죽게 되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큰 영적인 그림과 영적 현실의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 뜻에 따라 엘리 제사장의 가문과 그 아들들을 심판 하시겠다는 그 심판의 도구로 이 전쟁을 사용 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엘리와 그 집안을 모두 무너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게 하신 심판의 결과였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말씀 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서 멀리 떠나 살면서, 나의 껍데기의 신앙 생활이 나를 지켜주는 도구가 될 것처럼 막연하게 기대하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미신화하고 우상화 하는 것이 신앙 타락임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에는 분명히 능력이 있지만 십자가라는 껍데기, 그 나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내 신앙 고백과 마음을 담아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십자가가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본질과 고백이 빠진 상징은 아무런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본질과 선명한 고백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진실하게 서며 말씀이 나를 변화 시키며 말씀 앞에 하나님의 뜻을 늘 물으며 하나님 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 세우시는 사무엘과 하나님께 버림받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선명하게 대비하며, 사무엘에게 영적 주도권이 완전히 넘어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함께 하심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사람들도 다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청산하며 새 시대에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현직은 여전히 엘리와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성전에서 지위를 가지고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분과 자리와는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모든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탕으로 그 직분과 지위가 사용하는 도구가 될 때 쓰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껍데기인 지위와 직분을 가지고 일하려 하면 이렇게 홉니와 비스하스처럼 결국 이렇게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나타내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란 결국 하나님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 숨이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되며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드러내신다는 겁니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사무엘을 통하여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해지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시기 시작한 겁니다. 말씀으로 계시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시대가 말씀이 희귀한 시대였고 그것을 보는 시대가 말씀이 왕성한 시대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지 말고 말씀을 말씀으로 바라보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며, 말씀이 일하게 하심을 사모하며 나아가는 자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영적으로 새로운 재편과 새로운 시대를 준비할 때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더욱 드러내시며 나타내신다는 겁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민감하고 주도권을 가진 사무엘과 여전히 영적 어둠 가운데 헤메는 홉니와 비느하스가 파멸의 길로 달려감을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하는데 그 전쟁에서 4000명이나 전사하며 패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아주 큰 패배를 경험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두 손들고 회개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왜 우리를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게 했는가”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습니다. 회개 대신 모든 문제를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워서 우리가 한번 싸워 보면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육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죠. 역사를 보게 되면 언약궤를 통해 기적을 경험하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큰 승리를 거뒀던 일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언약궤를 앞세워서 요단강을 마른 땅과 같이 걸었고, 언약궤를 앞세워 여리고 성에서 함성만 지르고 그 성이 다 무너진 그런 기적들을 경험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약궤 자체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언약 궤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로 믿고 의지하며 거기에 인생을 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앞서 싸워 주셨다는 증거였을 뿐입니다. 그들이 말씀을 정말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데 언약궤 자체가 능력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언약궤 자체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거죠. 홉니와 비느하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자기가 기준이며 자기만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지금 무너지기 일보직전인 그런 삶 속에서 언약궤를 마치 우상과 같이 미신과 같이 사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과 하나님 말씀을 향한 분명한 의탁 없이 우상같이 언약궤를 대치해 버리는 것이죠. 마음의 헌신이 없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믿는 것 없이 그냥 언약궤를 앞서서 이겨 보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는 겁니다. 언약궤 자체를 앞세워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려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을 하며 자신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자가 바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으며, 사무엘과 결정적으로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에게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며 새로운 말씀에 역사를 이루시며 왕성히 일하기 시작하셨는데, 동시에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상과 같이 여기며 지극히 육적인 생각을 통해 회개와 돌이킴 없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 없이 그저 미신과 우상으로 변질시키는 신앙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는 어느 시대로 지금 가고 있습니까? 신앙이 변질되어 내가 원하는 것을 그냥 취하려 하는 인간적인 생각, 회개와 돌이킴 없이 우상으로 만드는 지극히 육적이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자신도 망하고 공동체 도망하는 이 안타까운 비극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이 시간 계시하시고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나타내지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나타내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말씀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며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영적으로 깨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는 말씀을 붙드십시오.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는 태도, 말씀 앞에 엎드려 말씀이 일하게 하심을 사모하는 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심을 붙드십시오. 그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며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은혜가 여러분들이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밤에 말씀으로 사무엘을 찾아 오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을 통해 말씀하신 그 이상을 받고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과 대화 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후 사무엘은 잠을 설치고 밤을 꼬박 새며 누워있었을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그렇게 가까이 가게 오셔서 직접 말씀 하심도 충격이었고,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복 되고 나누기 귀한 좋은 소식이 아니라 자기가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엘리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었기 때문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까지 누워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주신 말씀을 엘리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사무엘, 아마도 충격과 두려움에 덜컥 겁이 났을 것입니다. 나이도 어린 사무엘이 그 까마득한 선생이자 제사장에게 들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 어린 사무엘이 큰 어른이 제사장 엘리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 경고와 심판을 얘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아침이 되자마자 엘리 제사장이 사무엘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불러다가 하나님께서 너에게 말씀하신 것을 나에게 숨기지 말고 다 얘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사실 이 상황이 제사장에게는 매우 비참한 모습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이 먼저 말씀하셔야 하는게 응당 당연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 하시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대언하는 자가 제사장인데 거꾸로 지금 엘리가 그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요청 하고 요구하는 굉장히 마음 아픈 상황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촛대가 그를 떠나서 이제 형식과 명목상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지만 그는 영적으로 눈이 멀고 흐려져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 하시지 않는 자가 되어 버린 영적 둔감함, 대신 이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물어보며 대언하도록 요청하며 듣는 이 안타까운 상황을 성경은 가감 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엘리 제사장이 요청하니까 사무엘이 그 두려워하는 마음을 넘어 하나님께서 말씀하게 하신 것은 세세하게 조금도 숨기지 않고 대언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사무엘에게 들은 후, 엘리 제사장의 반응입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에 대한 심판, 무슨 일이 있을지에 대한 말씀을 다 들은 후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다…”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거의 자포자기의 선언입니다. 사실 사무엘의 입술을 통해 증언된 이 하나님의 경고는 엘리 제사장이 처음 들은 경고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 제사장에게 찾아와서 동일한 경고를 했습니다. 이렇게 두번이나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사무엘을 통해 경고를 들으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주님께 두손 들고 회개하고 자복하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게 마지막 기회니까 더 늦기 전에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손길로 받아 들였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마지막으로 찾아온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날려 버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타깝게 마지막으로 손을 내미시는데 그 마지막으로 내 미신 손을 거절 하는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경우가 복음서에서도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번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나를 배반하고 팔 자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한두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렇게 반복 하신 이유는 가롯유다가 그 경고를 듣고 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새출발 하기를 원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지막 만찬에서도 다시 한번 경고하시며 돌아오기를 손 내미셨는데, 안타까운 것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경고의 말을 듣고도 끝까지 돌아서기를 거절하고 회개하기를 거절한 채,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는 인생으로 끝나게 된 거죠. 마찬가지로 지금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마지막 돌아올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며 돌아오기를 거절한 채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하게 되는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이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 끝부분은 엘리 제사장의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자포자기 하는 모습과 대비되며, 사무엘은 영적으로 세워지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 데신 사무엘이 쓰기 시작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의 흔히 보이지 않는 그런 영적 암흑 시대를 청산하고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선명히 들리고 이상이 보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고 계신 겁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사무엘과 함께하시고 사무엘을 선지자로 세우신 것은 온 백성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세우신 선지자구나… 라는 걸 사람들도 알게 된 것이죠. 영적 주도권이 완전히 엘리 제사장에게서 사무엘에게 넘어온 것입니다. 여전히 겉보기에는 엘리가 제사장이고 두 아들들이 제사장 직을 감당하고 있지만 이미 영적 주도권은 다 상실한 채 곧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무엘은 지위와 위치에 상관없이 그 어두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들리게 하며 이상이 다시 보이게 하는 데에 놀랍게 쓰임받는 자가 되어 앞으로 치고 나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회개하지 못한 채 완전히 무너짐과 사무엘의 세우심을 말씀을 통해 바라보며 이 시간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무너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 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나에게 주시는 새 출발 할 수 있는 기회,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을 붙드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거절하기를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회복 불가능하게 완전히 무너지는 인생이 된다는 것을 경고와 같이 마음에 새기십시오. 이 말씀을 반면교사 삼아 엘리의 무너짐이 아니라 사무엘의 세우심이 나의 인생에 실체가 되어, 내 인생이 주님으로 인해 세워지고, 우리 가정과 교회가 주님으로 인해 세워지는 역사가 풍성해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무엘이 있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부르는 줄 알고 나아 갔지만, 그것이 몇 번 반복 되고 나서야 엘리 제사장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심 음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사무엘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사무엘에게 말씀하심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시며 두번씩이나 부르셨습니다. 알아 듣지 못하니까 제대로 알아들으라고 두 번씩 반복하며 이렇게 부르신 것이라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데 사실 이렇게 하나님께서 2번을 부르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막 죽이려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 부르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도 “모세야 모세야…” 두 번 부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부르시는 사무엘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결정적인 역사적 전환점과 시대를 바꾸는 부르심이자 하나님의 긴급하고도 중요한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고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는 자들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 말씀을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취사 선택하는 자기 중심의 영적 암흑 시대에는 아무리 말씀이 들려줘도 실제로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런 시대를 이제 청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지금 두번이나 중요하고도 긴급하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무엘과 같이 주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는 태도를 가지는 자들을 통해 말씀이 들리며,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와 엘리 가문을 심판하실 이야기를 사무엘에게 말씀 하고 계십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을 대표하고, 제사장으로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대변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제사장의 영적 하향곡선과 둔감함, 예배자로 성전에 서지 못하고 저 뒤에 관리자와 감시자로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엘리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체적인 영적인 문제였으며, 그런 영적 지도자 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망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죠. 이런 시대를 자르시고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새로운 시대를 사무엘과 함께 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엘리 제사장 집안을 심판 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이 심판에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근본적인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는 죄를 계속 범하는 것입니다. 그게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 죄에서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모르고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게 죄인지 모르고 하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의 죄는 이게 죄라는 것을 뻔히 아는데 그 죄를 그대로 계속짓고 회개하지 않으며 쌓고 있는 겁니다. 알면서도 돌이키지 않았고 묻혀 살고 있으며 그 죄에 빠져 나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두번째, 아들들의 죄를 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런 영적 둔감함으로 살아가니까, 그 아들들이 지금 저주를 자청하며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말할 수 없는 악행을 버리고 있는데도 그의 아들들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금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멈추도록 징계 하지 않았다는 의미와 함께, 그렇게 악행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사장 직을 금하지 않았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 정도 악행을 저지르면 당장 그 제사장으로 섬기는 일을 멈추고 금하게 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서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도록 해야 되는데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이 저주를 자청하는 악행을 벌이며 예배와 제사를 멸시하며 심지어 성적으로 방종하고 있는데도 계속하도록 놔두었다는 것이죠. 금해야 하는 것, 딱 멈췄어야 되는 것을 그냥 놔두고 방치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영적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을 엄중히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은 방관 할 수 없고 더 이상은 묵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두 번이나 사무엘을 불러야 할 정도로 긴급했던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변화, 과거의 시대를 단절하고 새 시대를 여는데 결국 이 어린 사무엘을 사용하시게 됨을 마음속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동시에 끝까지 쓰임 받았어야 되는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버림을 받게 되는 엄중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반면교사를 감시 원합니다.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며 바른 태도로 받으며 말씀이 나의 귀에 울리도록 두지 아니하면, 내 육신의 소욕이 엘리의 두 아들과 같이 나를 이끌고 주도하며 타락하고 무너질 수 밖에 없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런 자녀들을 영적으로 바로 이끌지 못하고 죄를 금하지 못하게 한 아버지에게 영적 책임을 엄중히 묻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주님 앞에 끝까지 쓰임 받으며 영적 책임을 지며 나아가는 귀한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영적 시대상이 어두워지고 흐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며 이상이 잘 보이지 않는 캄캄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음을 배웠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등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희미하나마 여전히 살아있으며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께 영적으로 깨어 민감하게 준비한 어린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계시고, 오늘 말씀은 마침내 그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찾아 부르시는데, 언제나 하나님께서 먼저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먼저 찾으셨고, 광야에서 소망도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80세의 모세를 먼저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먼저 찾아가시고 먼저 부르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찾아오셔서 먼저 말씀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음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를 찾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기 원하심을 선명히 믿고, 주님 앞에 나가는 그 영적인 민감하기 기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아직 준비가 완전히 되지 않은 소년인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말씀하심을 마음에 깊게 담기 원합니다. 어떻게 보면 미숙한 게 여전히 많은데 왜 사무엘에게 오셔서 말씀하시고 부르시는가….물론 사무엘이 잘 준비된 그릇이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민감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더이상의 엘리 제사장과 가문을 사용하실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미 영적으로 눈이 어둡고 흐려져 하나님이 더 이상 말씀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 이렇게 어린이 말씀하셔야 할 정도로 시대가 말씀이 희귀하며 이상이 잘 보이지 않는 영적 어둠의 시대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얼마나 답답하셨다면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 오셨으면 어린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그렇게 그 집 안에 대해서 말씀하시는가를 마음에 담고 이 말씀을 좀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그를 사용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그게 하나님이 부르시는 말씀인 걸 몰랐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자신을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며 달려갔습니다. 두 번이나 똑 같은 일이 반복되며 자리에 눕는데,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 엘리에게 사무엘이 찾아가니까, 그 때 엘리는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이 부르심 것을 깨달았던 엘리 제사장은 아마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들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이렇게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경험이 얼마나 오래전 이야기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오래된 추억이 되어버린…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것이 최근에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무엘은 엘리를 통해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또 하나는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히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는 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정답을 알려줍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어떤 것을 얘기 하셔도 이 종 마음 다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씀을 판단하고 말씀을 경시하던 시대, 하나님 말씀을 말씀대로 듣고 엎드리는 이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어둡고 흐려진 엘리 제사장에게 말씀하기를 포기하시고 대신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고와 같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인 태도는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며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 태도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말씀을 말씀으로 받을 준비된 자에게, 전심으로 말씀을 듣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의 은혜를 부어 주시고 말씀이 생명의 소리로 들리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올바른 태도가 회복되어 되어 우리의 삶 가운데 왕성하게 주님의 말씀이 역사하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나타나 말씀 하시기 전에 영적 시대상을 우리에게 짧고도 묵직하게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그 시대가 영적으로 매우 어두운 시대라는 것을 두 가지로 증언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 당시에 말씀이 희귀했다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안 나타났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느라고 하나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굴복하지 않고 엎드리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려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시대, 내 소견에 옳을 때에만 하나님 말씀이라고 착각하는 그런 교만한 가운데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잡지 않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말씀으로 받지 않고 듣지 않으니, 말씀으로 마음을 품지 않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바르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두번 째,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는 시대였습니다. 이상이란 하나님의 비전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 보여 주시는 일들이 흔히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일과 프로그램은 보이지만 그 가운데 정말 깊은 곳에서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고 고백하게 하는 이상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니 그 보이는 것 넘어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의 비전을 쫓아가는 일이 점점 없어지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꿈과 비전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비전이 없는 백성들은 방자히 행하고 결국 망한다고 성경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서 주시는 꿈과 비전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이상이 보이지 않고 철저하게 이 세상에 길들여져 살아가는 영적인 어두운 시대가 바로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때였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철저히 길들여지며 순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잃어버린 시대 그것이 바로 엘리 제사장 시대의 영적인 상태였음을 아주 중요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바로 엘리 제사장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이 표현이 단순히 엘리 제사장의 시력이 나빠졌다는 것 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나이가 많아 분명히 시력이 떨어지고 있었겠죠.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아주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핵심은 그 시대에 영적 어둠의 시대상을 엘리의 시력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눈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은 영적 눈이 흐려지고 멀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백성을 대표하는 엘리 제사장이 이렇게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흐려진 이유는 그가 성전에 있었지만 예배 자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를 서는게 아니라 성전에 있지만 그는 관리자로 감독자로 서 있는 것이죠. 영적 시력이 멀어 가고 있는 그 제사장의 영적 하향 곡선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모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말씀에서 대비되는 부분은, 엘리 제사장의 영적 시야가 흐려지고 어두운데 자기 처소에 가서 누워 있다는 것과, 영적으로 깨어 민감한 사무엘은 여호와의 전에 누워 자는 것입니다. 제사장임에도 눈이 멀어서 영적으로 깨어 기도할 때와 누워 잘 때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반면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전 안에 있는 숙소에서 머물러 자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영적 민감함이 엘리 제사장의 영적 둔감함과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컴컴한 영적 암흑의 시대에 말씀의 결론은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 백성이 다 영적으로 어둡고 흐려지며, 제사장 마저 이렇게 흐려지고 어두워진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등불은 희미하게 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대다수가 이미 영적으로 꺼지고 흐려진 것 같고, 99% 가 다 무너진 것 같은데 갖고 하는 거 같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전히 사무엘과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희미하게 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분을 보고 전체를 재단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이 소망의 말씀입니다.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심각하게 일반화 시키지 마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고,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성소에 누워 영적으로 민감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준비하는 영적 파수꾼들이 여전히 살아있기에 그런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믿기 원합니다. 그 시대만이 아니라 지금이 시대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이며 하나님의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진실하게 반성해 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으며,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바른 태도를 제대로 가지고 말씀이 내 마음에 심겨지고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내 생각과 소견에 따라 말씀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영적으로 메말라 가고 있는지…. 말씀을 말씀 자체로 수용하며 말씀을 말씀 자체로 대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영적으로 점점 어두워지고 흐려지는 시대, 말씀이 희귀하며 이상이 잘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과 어둠의 시대이기에 우리는 더 절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음을 믿기 원합니다. 다수가 흐려지고 어두워질지라도 내가 사무엘과 같이 영적으로 민감하여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더 가까이 나오며 하나님을 더 민감하게 바라보는 깨어 있는 성도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여러분들을 때문에 하나님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여전히 말씀이 들리고, 이상이 보이는 이 역사가 계속될 줄 믿으며 오늘도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을 배웠으며 그 십자가 속죄의 은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죄 씻음 받고 용서함을 얻게 되는 놀라운 은혜, 그리고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사단 마귀가 여전히 뛰어다니는 것 같지만 곧 예수님의 발등상과 같이 완전히 밟혀 최후 승리 가운데 우리에게 곧 찾아오실 예수님을 기대하는 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증언, 확증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시는 게 바로 이 십자가 사랑과 십자가 보혈의 은혜의 참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그 예수님 보혈이 나의 심령에 뿌려져 그 성령 하나님께서 그 십자가 사랑을 확증하고 하시며 확실히 믿게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에 있는 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는 자가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 죄가 기억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해결되고 치워져서 깨끗해진 자가 되었으며 천국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가게 된 자라는 것을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실히 증언하신다는 것이죠. 그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매일 우리가 망각하지 않고 그 은혜를 기억하며 살게 되며 그것을 실체로 믿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성령 하나님께서 증언하시는 죄 용서의 확증이 있습니다. 내 느낌과 내 감정으로 용서 받은 것 같고 구원받은 거 같고…라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약속을 붙들고 확증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고 그 성령 하나님께서 내주 하심으로 이것을 내 삶의 고백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죠. 이 십자가 보혈로 이루신 구원의 선물을 받아 영접하여 그 속죄의 대한 분명한 확신, 예수님 때문에 내 죄가 용서 받고 내 심령이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분이 바로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 라는 것은 바로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들어온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 가운데 우리가 십자가 은혜를 확증하며 살게 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세번째, 성령 하나님께서 확증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십자가 사건 후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과 법을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구약은 그림자이고 신약은 참 형상이라는 것을 배웠는데요.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과 약속을 돌판에 새겨서 주셨습니다. 잊어버리지 말라고 돌판에 새겨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육신의 행위에 두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림자였고 신약에 와서 이제 그림자가 아닌 참 형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는데, 하나님의 법과 약속을 돌판에 새기는 삶이 아니라 이제 마음판에 새기는 삶이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주신 법과 약속을 마음 판에 새기고 생각에 기록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돌판에 새겨진 약속이 구약의 그림자이고, 마음판에 새겨진 약속이 신약의 새로운 성도들의 언약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에게 늘 마음판에 새기도록 인도하시고 확증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내 안의 피가 되고 살이 되도록, 나의 생각이 성령 하나님의 통제와 다스림 가운데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대하며 그 말씀을 내 마음판에 계속 생기는 겁니다. 십계명도 껍데기로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중요한 건 나의 속사람으로 지키는 거죠. 할례도 겉으로 보이는 의식으로서 할례가 아니라 마음에 두는 할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정결 예식도 겉으로 내가 깨끗해지는 것이 구약의 중요성이었다면 이제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내 마음속이 깨끗해져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보지 않는 내 마음과 생각이 주님과 함께 조율되며 말씀을 마음에 지속적으로 새기며 내 마음판에 말씀을 두고 살아가도록 나를 이끄시는 분, 그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당구를 좋아하시는 지 모르겠습니다만 당구를 치게 되면 당구에는 점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50이 있고 어떤 사람은 500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당구에서 하수들은 당구 공을 치는데 공이 가는 길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쳐야 되는 게 길이 전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조금 당구를 치는 사람들은 공이 가는 길이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근데 조금 친 사람은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보이는 그 길 대로 치지 못하는 자가 조금 치는 자입니다. 당구에서 고수가 된다는 것은 길이 보이는 것이고, 그 공이 가는 길이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힘조절과 정확한 타구를 가지고 그 공을 길이 보이는데 로 가게 하는 능력이 있는 자가 바로 당구를 잘 치는 고수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십자가 사랑으로 내 인생의 가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네 인생의 가는 길과 방향이 달라진 자들입니다. 그동안은 어떻게 사는 것이 복된 일이며 죽음 이후에 천국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삶이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길이 무엇인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가야 되는지 깨닫게 된 거죠. 그런데 그 길을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알려주심 길을 따라 가야 되는데 그 길은 내 힘과 능력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힘을 의지 하여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내 삶으로 익혀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주도하시며 나아가는 길로 초대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인생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내 삶의 내 마음을 챙기시는 분이 계시며 내 생각을 지키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마음 지키시고 생각을 지키시는 그분을 붙들고 그 말씀과 언약을 내 마음판에 새기며 주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내 눈을 열어 주시며 마음을 열어 주시며 거룩함을 얻게 하셨음을 믿으며 그 성령 하나님의 확증 하심과 인도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두고 생각에 기록하며 살아가는 신약의 성도로 살아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의 제사와 율법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그림자와 실체의 대비로, 현상과 참 형상의 모습으로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 보여주는 표지판과 그림자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사건이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 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바꾸는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인류를 향하여 그들의 죄를 씻고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 그 모든 것을 위해 단번에 제물이 되신 한 몸을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며 단번에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불쌍하다고 그냥 생각만 해 주신 게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만 주신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나의 모든 죄를, 그리고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대속하고 죄값을 치르신 놀라운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이죠
이번 주간 내내 우리가 그렇게 묵상하는 십자가 사랑은 단번에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신 놀라운 우주적 사건을 우리는 마음속 깊이 새기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죄를 위하여 저를 포함한 온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해, 그 몸을 드려 단 한 번의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음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번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그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몸과 흘리신 보혈을 통하여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다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의 말씀이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였습니다. 내가 이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온 인류를 향한 구원 계획을 다 이루신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인 죄 문제를 해결 하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는 놀라운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그 십자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를 위하여 단 한번의 영원한 제사의 제물이 되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 그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증언합니다. 이 거룩함이란 천국에 들어갈 정도의 거룩함입니다. 구원을 타력 구원이라고 하는데 내 스스로 노력해서 가는 구원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건짐을 받아 가는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의롭다 함을 얻었고 거룩함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내가 스스로 거룩해 지는 게 아니라 내가 거룩한 단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하며 내가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얻어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하게 나아가게 된 것이지요.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몸을 주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해결 하심을 통해 한번의 제사로 모든 사람들의 죄를 씻으시고 영원히 온전하게 하셔서 구원의 선물을 천국에 갈 수 있는 모든 길을 주님께서 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거룩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거룩함을 얻었다.”는 말을 꼭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구원함을 얻고, 죄 용서함을 얻고, 거룩함을 얻어 모든 것이 하나의 은혜 이며 십자가 사랑 이라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며 풍성하게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의 신앙 생활입니다. 그리고 나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무덤에 묻히고 부활 하신 후에 승천 하셔서 우편에 앉으셨다는 고백합니다. 지금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가만히 그냥 앉아서 구경 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편 보좌에 앉으셔서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밥을 올려 놓는 상을 밥상이라 그러고, 책을 올려 놓는 상을 책상이 부릅니다. 여기서 이 발등상이란 말은 발등을 올려 놓는 상으로 높은 책장에 올라갈 때 밟고 올라가려고 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 마귀가 예수님의 발 밑에 밟혀 처절하게 발등상 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시간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초림과 재림 사이의 바로 그 사이에 잠시 시간이죠. 그게 얼마가 될지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시간인데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다시 오실 재림 사이에 그 시간을 지금 잠시 살아가며 예수님께서는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나의 나 된 것, 나의 영혼이 온전하게 된 것, 내가 거룩하게 된 것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였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그 분만을 바라보며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나의 죄는 담당 되었고 나의 죄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치워지고 해결 됐으며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형벌을 받으셨음을 마음 다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지신 주님의 십자가이고, 그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 내가 누구를 바라보는가 에 따라 나의 신앙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바라보고 그 분을 붙들고 의지하십시오. 내가 변화되고 새 사람되고 , 거룩함을 얻어 영원히 온전함을 얻게 된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임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가 예수 십자가를 붙들고 주님 만을 바라보는 귀하고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아카이브
10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