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남유다의 멸망의 때가 점점 가까워져 있는 풍전 등화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대기는 망한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다면, 열왕기 상하는 큰 주제가 왜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됐고 망하게 되었는가…입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이 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고 성전이 무너지게 되었는가? 에 대해 답을 경고와 같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겉으로 봤을 때는 정치적으로 힘이 없고 약해서 군사력이 강하지 못해서 망했고 애굽과 바벨론의 틈바구니 속에서 줄을 잘못 서서 망한 거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들은 다 상대적인 이유이고 본질적인 이유는 결국 북이스라엘도 남유다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불순종의 길을 계속해서 갔기 때문임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두 왕인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에 대해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데, 여호야긴의 이름은 “여호와께서 성취하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참 이름은 좋은데 이름값을 전혀 하지 못한 왕이 여호야긴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이자 그의 왕위는 백일 천하였습니다. 세 달 조금 넘게 있다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쫓겨난 왕이 되었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와 와서 포위를 당한 남유다, 여호야긴 왕은 싸우는 대신에 항복을 택하며 두손을 들었고 그 결과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만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가게 됩니다. 그렇게 백일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 물론 남유다가 힘이 없고 바벨론에게 휘둘렸기 때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여호야긴 왕이 여호와께서 보시게 악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게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남유다 안에 있었던 모든 것들은 다 처절하게 빼앗기게 됩니다. 여호와의 성전에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들을 다 약탈 당하고,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만들었던 금그릇들이 다 파괴되었습니다. 왕이 노예와 같이 바벨론에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여호야긴 왕이 백일 천하를 끝내고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는 나이가 18살이었는데, 그 후에 얼마동안 바벨론 감옥에 갇혀 있게 되냐 하면, 나중에 배우겠지만 37년 동안 갇혀 있게 됩니다. 18살에 왕이 포로로 잡혀가서 37년 동안 바벨론에서 옥살이를 하는 것 이게 바로 여호야긴 왕이 인생이었습니다. 그렇게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을 대신해 바벨론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이 바로 남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그런데 그 시드기야 왕 조차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왕인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세상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말씀에 묶이는 대신 세상에서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줄을 잘 설까 기웃거리는 왕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임계점이 되고 나니까 결국 남유다는 처절하게 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열왕기하 24장 뒷부분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런 비극적인 일들이 결국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같이 되었다는 이 결론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남유다에 경고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돌아야 된다…말씀의 기준에 불들려야지 세상에 붙들리면 안된다….눈에 보이는 세상 열강에 좌지우지 되면 안된다…그렇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남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은 전혀 돌이키지 않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불순종의 길에서 돌아서지 않은 겁니다. 그 결과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경시한 그들의 불순종이 하나님이 경고하신 대로 결과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결국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어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 차례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고 불순종에서 돌이키지 않아 말씀대로 망하게 되는 역사를 바라보면서, 이 아픔의 역사를 남의 이야기 같이 구경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경고, 우리 공동체에 동일하게 주시는 경고라는 것을 잊지 않고 말씀을 새기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로 살아야 되는 것인가? 우리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망하지 않는 비결이 무엇인가? 나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리고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붙들려 세상에 기웃거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불순종의 길에서 돌이켜 말씀을 지키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남유다의 이 처절한 멸망을 향한 질주를 바라보면서 끊임 없이 이 질문들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 앞에 나를 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너희는 남유다 같이 망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이 우리 마음에 전해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거절하게 되면서 세상에게 수치를 당하며 무너지게 됩니다. 이 엄중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에게 경고하며 깨우시는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카드놀이 할 때 조커라는 카드가 있습니다. 조커는 게임을 할 때 결정적 순간, 마지막 기회에 딱 써야 되는 카드입니다. 게임의 승부를 가르는 아무데나 쓸 수 있는 카드이기에 조커는 신중하게 있다가 꼭 필요할 때 결정적으로 써야 하는 카드입니다. 남 유다의 국가적 운명에 조커와 같은 왕이 바로 요시야 왕이었습니다. 요시아 왕이 멸망으로 질주하는 남유다를 돌이켜서 건짐을 받게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와 같은 왕이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여호와 앞에 정직하고 순전한 왕이었으며 성전 안에 모든 우상과 산당과 불순물들을 다 제거했습니다. 아주 철저할 정도로 다 제거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는 공동체로 부흥과 개혁에 앞장섰고,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유월절 예배와 제사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기반을 다 마련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부흥과 회복의 길, 축복의 길로 가기만 하면 되는데 안타깝게도 요시야는 조커와 같은 자기 목숨을 너무 중요하지 않은 곳에 자신의 교만한 생각에 갇혀 갑자기 써 버림으로써 죽어버렸습니다. 요시야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나라는 멸망을 향하여 질주하게 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요시야 왕은 자기 혈기를 부리고 자기 확신에 차서 나가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함으로서 남유다 나라 전체를 구하고 바른 길로 나아가게 할 기회를 날려버리는 겁니다.
요시아 왕의 안타까운 죽음,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는 말씀을 잘 지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 정세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강대국이었던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됐습니다. 그런데 그 강대국인 앗시리아가 갑자기 나라의 운이 다하고 지는 별과 같이 계속 내리막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또 다른 강대국인 바벨론이 세력을 키우며 점점 뜨는 별이 되어서 세계 정세가 막 변화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이 나라가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지는 별과 같은 앗수르와 손을 잡고 연합군을 만들어 바벨론을 치려고 하는 것이죠. 그게 평행 본문인 역대하에 등장하는 갈그미스 전투입니다. 오늘 말씀에 “앗수르왕을 치고자~”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한글대역에 보면 “앗수르 왕을 향하여~”로 되어 있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서는 ~향하여...가 맞는 표현이고 앗수르를 애굽이 나아가 연합군을 이루며 바벨론을 대항하려 하는 겁니다. 애굽이 그렇게 전쟁을 하러 올라갈 때 애굽 왕이 남 유다에게 우리는 너희와 싸울 마음이 없고 그냥 바벨론과 싸우려 올라가니 너는 가는 길만 좀 비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면 전쟁에 끼지 않고 조용히 비켜 줬으면 좋는데 요시아 왕이 자기 교만과 자기 생각에 갇히게 됩니다. 자신은 앗수르를 돕는 일은 숟가락을 얹는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왜냐면 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앗수르가 빨리 멸망해야 남유다는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돕는 것은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 스스로 개입하며 애굽과 등을 지는 겁니다. 그렇게 불필요한 전쟁에 요시야 왕은 휘말리게 되고 므깃도 전투에서 애굽 왕의 손에 전사하게 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허망하게 전사하지만 않았더도 요시아 왕이 훨씬 더 오래 하나님 앞에 선명하게 쓰임 받으며 남유다의 역사가 훨씬 좋은 방향으로 돌여질 수 있었을 겁니다.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전쟁에서 전사함으로 말미암아 본인에게만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남유다 전체가 풍전등화 같은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평행 본문인 역대기를 보게 되면 예레미야 선지자가요시아 왕의 죽음에 대해서 너무나 슬퍼하고 애곡합니다. 전쟁에 나가서 갑자기 전사한 왕을 보면서 그렇게 애곡하고 슬퍼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은 단순히 개인적인 연민으로 말미암아 요시아 왕이 너무 일찍 죽어서 안타깝다는 것을 넘어서 요시아 왕이 죽음으로써 곧 이 나라는 끝난다는 것을 미리 보는 애곡의 눈물입니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이 멸망을 향해 질주하며 처참하게 짓밟히게 되는 남유다의 모습을 미리 바라보면서 예레미야는 요시아 왕의 죽음을 애곡하며 가슴을 치는 겁니다. 요시아 왕이 갑자기 전쟁터에 나가 전사하니까 급히 세워진 왕이 그 아들 여호아하스입니다. 사실 여호아하스는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인 여호야김이 왕이 되었어야 하는데 너무 왕으로 될 자질이 부족한 아들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봤을 때는 형은 도저히 왕이될 수 없는 자격미달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신 똘똘하고 자질이 있어 보이는 둘째, 여호아하스를 백성들이 왕으로 세운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똘똘한 왕을 세우고 나니까 애굽이 가만 있지를 않는 겁니다. 애굽은 남유다에 어떤 왕을 원하겠습니까 그냥 길들이기 편한 왕, 애굽의 말에 고분고분하고 순종하는 왕을 원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세달 만에 내려와 여호아하스 왕을 갈아버립니다. 고작 세 달 동안 왕으로 있다가 애굽왕의 손에 쫓겨나 폐위됩니다. 그리고는 자질 미달, 함량 미달인 여호야김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버리는 겁니다. 이처럼 남유다의 상황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애굽에 지배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어 왕도 자기들 스스로 세울 수 없는 비참한 지경에 놓였습니다. 애굽에 조공을 바치며 왕도 애굽에 의해 허수아비가 세워지는 반식민지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애굽에 의해 세워진 꼭두각시 왕, 애굽의 하수인 여호야김은 11년동안 왕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여호아하스도, 여호야김도 아버지 요시야 왕의 바른 길을 가는 왕이 아니라, 아버지와 정반대의 길을 가는 왕,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남유다 전체가 풍전등화 같은 길로 나아가며 결국 멸망을 향해 돌진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요시야 왕의 전사를 안타깝게 증언하는 이유는 마지막 남은 카드, 조커와 같은 카드가 허무하게 사라져 멸망밖에 남지 않은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입니다. 남유다가 멸망에서 돌이키고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찬스, 하나님 앞에 회복받고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조커의 기회를 날려버리는 이 안타까움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마음 먹으면 주님 앞에 돌이킬 수 있고 마음 먹으면 주님 앞에 나와 은혜받을 수 있는 때가 언제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때가 바로 요시아 왕 때였다는 겁니다. 요시아 왕의 허망한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는 다시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돌이키고 싶은데 돌이킬 수 없고 그냥 멸망을 향해 질주하게 되는 마지막만 남은 안타까운 남유다의 역사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나라의 운명도, 개인의 운명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타이밍이 있고 시간이 있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키고, 기회가 있을 때 예배하고 기도하고, 기회가 있을 때 충성하는 것이 잠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의 지혜입니다. 남유다의 비참한 역사를 반면 교사 삼으며 주님이 주시는 기회에 잘 살리며 허락하신 때에 끝까지 충성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시야 왕은 온 백성들을 모아두고 하나님 말씀이 들려지게 했고 읽혀지게 했습니다. 읽혀지고 들려고 말씀은 마음에 담겨 살아 있는 하나님의 숨결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은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 말씀을 지켜 행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마음에 담아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순종으로 나아가게 되면 그때 일어나는 역사가 바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시아 왕이 이루고 있는 부흥과 개혁이었습니다. 그 개혁과 부흥은 말씀이 이루어지기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철저하게 다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앞에 두지 말아야 될 것들,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있습니다. 다 제거한다는 의미는 소위 말하는 진멸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모든 우상들을 모든 산당들을 다 태우고 진멸하는 겁니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돌이킴, 회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것 그게 다 죄라는 것을 깨닫는 게 회개입니다. 우리가 죄를 태우고 죄를 제거하고 죄를 없애며 죄에서 돌이키는 모든 것들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부흥이라는 찬양에서 우리 앞에 모든 죄들을 태우고 우상들을 태우실 성령이여 임하여 달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게 내 안에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죄들, 모든 불순물들 우상들과 태우고 무너뜨리는 회개입니다. 말씀이 말씀으로서 역사하여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는 죄에서 돌이키게 되며 불순물과 우상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요시아의 부흥과 개혁의 하이라이트가 바로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부흥과 개혁의 하이라이트는 진정한 유월절 정신의 예배로 돌아오는 겁니다. 진정한 유월절 예배란 유월절 정신을 회복하는 예배이자 하나님만을 섬기는 예배입니다. 성경은 오랫동안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봐야 될 건 남 유다 백성들은 오랫동안 유월절 제사를 드리지 않았는가? 라는 겁니다. 분명 그들은 유월절 예배와 제사를 계속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평가는 오랫동안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적이 없었다고 증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진정한 유월절 예배와 제사는 없었다는 겁니다. 그동안은 어떻게 드렸다는 겁니까? 분명히 유월절 제사와 예배가 있었는데 유월절 정신이 없이 드렸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드린 겁니다. 껍데기로 유월절 제사와 예배는 계속 행해져 왔지만, 진짜 유월절 정신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위해 드린 예배와 제사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요시야 왕이 지금 여호와만을 위해 유월절 예배와 제사를 드리기 전까지 이 순전한 예배, 유월절 정신을 붙드는 예배가 다 무너져 있었다는 겁니다. 예배가 그렇게 방치되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문제 의식을 모르고 살아 왔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을 해보면 우리도 새벽 기도도 드리고 성경 공부도 하고 주일 예배도 드리고 그동안 예배를 빠진 적 없이 잘 드려왔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예배가 늘 있어 왔지만, 하나님은 오랫동안 진정한 예배가 없었다고 평가하실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과연 여호와만을 위하여 드리는 예배인지, 유월절 정신을 붙들고 드리는 예배인지, 십자가 정신을 붙들고 드리는 예배인지, 점검하고 반성하지 아니하면 껍데기 예배는 존재하지만 하나님과는 무관한 예배,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시는 예배를 지속할 수 있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핵심은 내가 정말 하나님만을 위해 예배하고 있는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유월절 정신을 제대로 붙들고 드리는 유월절 예배와 제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들고 어린양의 보혈의 공로만 붙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기 전에 그들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애굽에 종살이하는 노예, 죄와 저주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있는 노예였습니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음을 망각하지 않고 깨닫는 게 유월절 정신입니다. 그들이 착해서, 열심히 덕을 쌓아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의 어린양의 보혈로 말미암아 심판과 저주로부터 건짐 받은 것입니다. 그게 유월절 정신의 핵심인 흠 없는 어린양 보혈의 공로입니다. 유월절 정신이 복음으로 재해석된다면 바로 십자가 정신입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 이렇게 큼지막하게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구원받고 내가 저주와 심판에서 건짐을 받은 이유는 오직 예수님 때문임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 때문이고, 예수 공로 때문이고, 예수 보혈 때문임을 철저하게 붙드는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십자가 정신의 회복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저주와 심판이 임하는 그 땅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고 구원해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살려 주셨음을 철저히 믿고 예수 공로만 붙들고, 예수 보혈만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러 나왔는데도 계속해서 내 이름을 붙들려 하고, 여전히 내 공로와 내 이름을 붙들려 한다면 십자가 정신이 빠진 예배이자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새 사람 되고 건짐 받고 구원받은 유일한 이유는 뭡니까? 예수 보혈, 예수 공로, 예수 이름 때문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나아갈 때 십자가 정신이 회복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십자가 정신을 붙들고 유월절 정신을 붙들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예배 드리고 있는가를 늘 점검하며 본질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부흥이자 변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진정한 부흥을 원하십니까? 진정한 회복과 진정한 변화를 원하십니까? 그 부흥과 개혁의 하이라이트는 여러분들의 예배입니다. 진정한 부흥과 진정한 변화를 갈망한다면 바로 이 예배가 회복되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겸하여 붙들고 섬기려 했던 세상 것들과, 우상과 잘못된 것들을 모두 태우고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만을 위해 드리는 예배가 회복되기를 간구하십시오. 그 예배를 통하여 여러분들에게 유월절 정신, 십자가 정신을 회복되어 흠 없는 어린양 되신 예수 보혈만 붙들고, 예수 공로만을 붙들고 나아오십시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드리는 예배, 유월절 정신과 십자가 정신을 붙들고 드리는 예배를 통해 오직 예수 공로를 붙들고, 오직 예수 보혈 붙들고, 예수 이름으로 나아오는 주의 백성 되십시오. 예배 때마다, 새벽기도 때마다 주님 앞에 나올 때, 자격 없는 내가 예수 공로 의지하여 나왔습니다… 자격 없는 내가 예수 보혈 의지하여 나왔습니다…그 영적 겸손함과 은혜를 구하는 태도가 회복될 때 진정한 부흥과 변화,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흘러 넘치는 은혜가 예배 가운데 임하며, 예배로부터 모든 것이 풀어지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시야 왕을 통해 이루어지는 남유다의 부흥과 변화, 개혁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시아 왕을 통하여 이루는 부흥과 종교 개혁은 남유다 전체의 부흥과 개혁이기도 하고 개인의 부흥과 개혁이기도 합니다. 부흥과 변화, 개혁을 내 삶에서 경험하며 말씀대로 조율되는 인생이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요시야를 통하여 일어나게 된 이 놀라운 부흥과 변화, 종교 개혁이 우리의 삶에도 우리 교회 공동체의 삶에도 있기를 사모하며 오늘 말씀에서 증언되는 부흥과 개혁을 위한 세 가지 중요한 단계를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부흥과 변화의 첫번째는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삶입니다. 모든 부흥과 변화, 종교 개혁의 시작은 내가 전략을 짜고 계획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가서 무엇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말씀이 읽혀 지고 들려지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부흥과 개혁을 위해 한 첫번째는 온 백성들을 모아 말씀을 읽어 무리 의 귀에 들리게 한 것입니다. 그 전에도 말씀이 성전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 안에 있는 율법책은 읽혀지지 들려지지 않고 그냥 꽂아놓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꽂아놓고만 있으니까 심지어 그 율법책이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는데 그걸 꽂아만 놓고 있으면 말씀과 무관한 삶을 지속하며 나중에는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는 지경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여러분들이 진정한 부흥을 원하십니까? 내 인생에 진정한 변화와 개혁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고 말씀이 들려지고 읽혀지는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말씀을 오랫동안 꽂아놓기만 하고, 말씀이 들려지고 읽혀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 시간 변화되고 깨어져야 할 변화의 첫번째라는 겁니다. 모든 부흥과 개혁은 개인이던 공동체이던 상관없이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역사로부터 시작됩니다. 꽂아 놓기만 한 말씀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고,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새벽 기도를 통하여 내 하루의 첫 시간에 하는 게 뭐냐 하면 말씀이 내 마음에 읽혀지고 들려지는 거룩한 습관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읽혀지고 들려진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겁니다. 개인에게 그렇게 말씀이 들려지고 읽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말씀과 같이 공동체가 말씀을 사모하며 공동체가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역사가 있을 때 그 공동체가 놀랍게 부흥하고 변화하는 놀라운 시발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순종을 통해 말씀이 나의 삶에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읽혀지고 들려진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역사를 통해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을 순종이라 합니다.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질 때 믿음의 반응이란 말씀을 지켜 행하는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순종함으로 말씀을 지켜 행할 때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부흥과 변화를 원한다면 들려지고 읽혀진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이유는 말씀을 지켜 행하기 위함 이고 순종하여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을 반석위에 지은 집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들어도 지켜 행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에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지 않는 모래성을 쌓습니다. 그런 인생에는 부흥도, 변화와 개혁도 일어나지 않고 창수가 나고 비바람이 치면 무너지기 일쑤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기에 순종하는 삶 대신 늘 불순종으로 살았음을 회개하며 내가 처음부터 돌아간다는 그 결단과 각오로 말씀 앞에 조율 받기를 사모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는 자,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이 반석위에 인생 집을 지은 지혜로운 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것을 넘어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순종의 삶, 말씀이 지켜지는 순종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놀라운 부흥과 변화와 역사를 주십니다. 세 번째는 말씀이 순종을 통해 역사하는 삶입니다. 말씀이 순종을 통해 역사하는 삶이 진정한 부흥이 개혁입니다. 오늘 4절부터 15절까지 처절한 종교 개혁은 요시야가 말씀을 붙들고 순종을 통해 역사하는 삶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시야는 성전 안에 오랫동안 자리잡은 수많은 우상들을 철저히 뿌리뽑고 있습니다. 요시야의 성전 정화는 마치 예수님이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을 떠올리듯 비장하고 처절합니다. 그러나 그 처절한 부흥과 개혁은 요시아의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서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순종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전 안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며, 순종이 물러가고 순종이 임하며, 더러움이 물러가고 순전함이 놀라운 부흥과 종교 개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읽어보면 정말 성전 안에 이런 것들도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먼저 성전 안에 우상들을 제거하고 거기에 모든 것들을 불사릅니다.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폐하게 됩니다. 심지어 성전 가운데 남창의 집을 철거합니다. 믿어지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다 어디 있었냐면 성전 안에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 가나안 종교에서 가져온 이런 잘못된 말도 안 되는 남창과 이런 끔찍한 일들이 버젓이 있었는데 이런 것들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고 분노를 격발하는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는 몰렉 제단이 있었는데, 요시야는 몰렉 제사의 길을 뿌리 뽑습니다. 세번이나 반복해서 성전 안에 있는 우상들을 헐고 불사르고 빻아 가루로 만든다는 말씀이 등장하는데, 헐고 빨아서 가루로 만든다는 건 그만큼 철저하게 뿌리뽑겠다는 강력한 의지이자 이것을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경멸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전한 예배 회복을 위해서 모든 우상들을 완전히 뿌리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로서 철저히 무너뜨리고 허무는 것을 넘어 빻아 가루로 만드는 겁니다. 성전 안에 있는 수많은 우상들과 불순물들을,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힘겹지만 철저하게 뿌리를 뽑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 이렇게 우상들이 많았고 이렇게 불순물이 많았어…라고 놀랄 정도인 이 모습이 남 유다의 예루살렘의 성전의 모습이었고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성경은 엄중히 증언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고 부흥과 변화를 이끌 때 이렇게 뿌리째 뽑는 힘겹고 철저한 작업을 통하여 나를 순전하게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고 말씀이 이루어지고 역사하는 진정한 부흥이자 종교개혁입니다. 부흥과 변화는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데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을 그냥 꽂아 놓지 마시고 말씀을 그냥 구경하지 마시고 말씀을 발견하십시오. 말씀을 꽂아 놓지만 말고,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삶으로 이끌어 가십시오.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질 때, 그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통해 부흥과 개혁의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오늘 하루 동안 나의 삶 가운데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있기를 기대하며 바라보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주신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을 지켜 행하여 말씀이 내 삶에 이루어지며 우리 공동체에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기를 사모하십시오. 들려지고 읽혀진 생명의 말씀이 말씀의 이 시간 나를 붙들고 공동체를 부풀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분명히 알려주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는 축원합니다. 요시야는 모든 환경과 조건들을 넘어서는 기적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살해당해 갑자기 8살에 왕위에 올라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왕이었습니다. 악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밑에서, 정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이런 악한 집안에서 정직할 수 없는 그런 모든 상황과 환경이 우겨 싸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시야는 기적과 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 되었습니다. 요시아 왕의 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보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하나님의 진리는 넘지 못하고 극복하지 못할 환경과 조건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건이나 환경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보게 됩니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정직하고 신실한 왕으로 평가받은 이유 하나를 증언하는데 그것이 바로 요시야 왕의 무너지고 오래된 성전 수리에 대한 열망이었습니다.
요시아의 성전 수리에 대한 열망은 단순히 성전이라는 건물이 오래돼서 수리를 좀 해야 되겠다는 열망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라봤던 것은 무너지고 오래된 성전 건물을 넘어 무너지고 오래된 보이지 않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와 할아버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이 너무나 고착화되고 일반화 되어 버려 순전한 예배가 무너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 안에서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예배가 예배로서 세워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성도들이 성도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이 안타까운 마음이 바로 요시야가 가졌던 무너지고 오래된 성전을 수리해야 되겠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걸고 아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제대로 세워야 되겠다는 열망, 성전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세워서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해야 되겠다는 열망에 마음을 쏟고 올인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시아의 모습을 정직하고 순전한 왕으로 평가하셨고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전 수리에 마음을 쏟고 있는 와중에 성전 안에서 율법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성전 수리 가운데 발견하게 된 율법책이 바로 이 종교 개혁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성전 안에 율법책 두루마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그것이 있는 것 조차 몰랐던 것입니다. 성도들은 집에 가시면 성경책 한 두권 정도는 다 가지고 계실 겁니다. 아마 어떤 분 은 열 권도 넘게 성경이 집에 있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근데 집안에 성경이 한 권 이 있든 열 권이 있던 꽂아놓고 거의 1년에 한 번을 열어보지 않는 게 대부분입니다. 성경의 기능은 그것을 꽂아놓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꺼내 보고 읽어서 마음에 새기는데 있는데 성경을 그렇게 꽂아만 놓고 보지도 않고 그냥 장식품까지 있는 성경은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전에 율법책 두루마리가 있었는데, 한 번 제대로 열어보지도 않고 오랫동안 꽂아만 둔 겁니다. 오랫동안 성전 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 읽어보고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단되었던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르니까 성전 안에 율법 책 두루마리가 있다는 거조차 잊어버리니 겁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지만 꽤 오랫동안 그것을 알지 못했을 정도로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본질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성전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들은 말씀을 경시 하고 무시했고, 그러다가 말씀이 있는 것조차 망각하는 상황에 이른 겁니다. 그렇게 읽혀지지 않고 방치되었던 율법책을 성전 수리 가운데 드디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방치돼 있던 율법책을 꺼내 읽으면서 요시아 왕의 인생이 뒤집어졌습니다.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옷을 찢고 엎드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와서 마음을 열고 듣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음성과 같이 내가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입니다.왜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성도는 성도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왜 예배가 이렇게 다 무너졌는지에 대한 이유를 율법책을 들려줌으로써 발견하게 된 겁니다. 우리 조상들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말씀에 기록된 모든 것을 순종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지 않는 것이 고착화되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동안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부인했는지가 마음으로 깨달아지니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서서 겸비해지고 옷을 찍고 통곡하는 것입니다. 성전 안에서 오랫동안 율법 책이 존재하지도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방치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임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말씀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말씀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는 그들의 태도는 하나님을 경시하고 무시하고 하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불신앙으로 나아가게 되었음을 회개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며 섬기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며 섬기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게 되는 것을 회개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선포되는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은혜가 된다는 것은 그냥 과거의 활자로 남아 있는 글씨가 아니라 그 말씀이 지금 하나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은혜 받는 것입니다. 말씀 가운데 마음에 찔림과 무너짐이 있으며 말씀 가운데 내가 엎드려질 수 있는 것이 은혜 받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말씀을 가볍게 경시하며 무시하고, 심지어 부인하고 살았던 나의 삶에 갑자기 큰 문제의식이 생기는 겁니다. 그동안 경시하고 무시하고 살았던 죄에 대해서 큰 문제의식이 생기고 죄에 대해서 심각해지며 민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결국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은 꽂아놓는 장식품이 아니라 말씀은 꺼내 읽어서 내 마음에 새길 때 생명 되는 하나님의 숨결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 주신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할 때 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바뀌며, 그 말씀이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이 될 줄 믿습니다. 꽂아놓고 방치하는 말씀이 아니라, 열어보고 마음으로 읽고 새겨서 말씀을 가까이 두고 열어보고, 말씀을 중히 여겨,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로 이어지는 놀라운 은혜의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요시아 왕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요시아 왕은 남유다 3대 왕으로 뽑힐 정도로 굉장히 중요하고 위대한 왕입니다. 사실 요시야가 왕에 오를 때는 남유다가 거의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자기 자신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기 가운데 왕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몬 왕이 배신으로 살해 당한 후, 요시아가 8살에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았고, 요시아 왕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 되었다는 것은 말로 설명이 안되는 기적입니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8살이었습니다. 그 말은 갑자기 준비없이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왕으로 앉혀 놓았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아몬 왕이 믿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왕 위에 오른지 2년 만에 살해 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살해 당한 후 아무것도 모르는 여덟 살짜리가 왕이 되었으니, 그 자리가 얼마나 두렵고 위험한 자리였겠습니까? 자기도 언제든지 아버지와 같이 죽을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매일 살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8세 소년이 어떻게 왕으로서 정치하고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고, 국가를 다스리며, 어떤 판단력과 지도력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8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가 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것은 죽지 않고 살아 남는 것이었습니다. 왕으로서 잘 감당하고 감당하지 않고는 두 번째 문제고 그가 아버지처럼 살해당하지 않고 그 왕권을 지키며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근데 놀랍게도 요시야는 몇 년을 왕에 있었냐 하면 31년 동안 있었습니다. 여덟 살에 왕이 되어 아버지 같이 살해 당하지 않고 31년 동안 왕으로 있었던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더 큰 기적은 왕이 되어 31년 동안 왕위를 지키면서 요시아는 하나님께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았다는 겁니다. 요시야의 집안환경을 봤을 때는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인 것이 아버지 아몬도 할아버지 므낫세도 모두 악한 왕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만 망나니가 아니라 할아버지도 망나니였던 집안, 그리고 준비도 안 된 여덟 살의 나이에 왕에 오른 요시야가 제대로 된 왕이 된다는 것은 가능성이 거의 0%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가정 환경과 문제들을 넘어서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요시야 왕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을 넘어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한 왕이라고 증언합니다.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신앙의 중심을 딱 잡아서 왕위를 이어갔다는 겁니다. 여덟 살에 왕의 자리에 오른 요시아 왕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도 기적입니다. 잘 준비해서 적절한 나이가 돼서 올라가는 왕이 되어도 이게 어려운데 거의 준비가 안된 여덟 살에 왕이 되어 이런 중용의 덕을 갖추는 왕이 되었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요시야가 왕이 죽지 않고 왕으로 존재했던 것 자체도 기적이고, 특히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 된 게 기적입니다. 아무리 아버지가 악하고 아무리 할아버지가 악하더라도, 그런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로 덮지 못할 환경이 없고 덮지 못할 상처가 없으며, 덮지 못할 어려움이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한 왕으로 쓰임 받은 핵심에는 바로 부서진 성전을 수리하는 열망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성전에 부서진 것을 수리하고 성전 수리를 명한 것은 단순히 겉에 보이는 성전이 손댈 때가 많고 오래돼서 수리해야 되겠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성전이 시간이 오래되고 관리가 안돼서 이곳저곳 수리를 많이 해야 되니까 성전 수리를 명했다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요시아 왕이 성전 수리에 그렇게 올인하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는가?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계속된 우상을 하나님과 겸해 섬기면서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오랜 세월이 바로 성전이 부서진 거라는 것을 그가 영의 눈으로 본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이 부서진 것도 수리해야 되지만 더 심각한 것은 보이지 않는 성전이 완전히 부서져서 지금 그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이미 어려서부터 요시야는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너진 성전을 수리한다는 것은 보이는 성전 수리를 훨씬 넘어서, 보이지 않는 성전을 제대로 수리하려 하는 열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돌보지 않은 악한 왕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이 모든 것을 단절하고 성전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세우는 것을 통하여 성전의 본래 기능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요시야 왕이 성전 수리에 마음을 쏟고 올인한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하나님의 성전 수리에 집중하는 것은 그의 종교개혁의 연장 선상에서 이 일이 이루어졌음을, 그것을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전이 성전으로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안타까움, 성도가 성도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안타까움, 예배가 예배로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안타까워하는 그 마음, 그것을 수리해야 되고 고쳐야 되고 변화시켜야 된다는 그 마음에 인생을 던진 자가 바로 요시아 왕이었습니다. 내일 말씀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배우겠지만, 그 가운데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일이 벌어져서 놀라운 기폭제가 되는 것이 바로 성전 안에서 발견된 율법 책입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변화시켰고, 남유다 나라 전체를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는 모든 환경과 조건들을 넘어서는 기적의 왕이었습니다. 8살에 왕위에 올라 살아 남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기적과 같이 살아 남은 왕이었고, 악한 아버지와 할아버지 밑에서, 정직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기적과 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이 되었습니다. 요시아 왕의 이 말도 안 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조건이나 환경을 훨씬 뛰어넘는 놀라운 역사임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겨보게 됩니다. 하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처한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어 요시야를 하나님 보시기에 귀하고 정직한 왕으로 세워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처한 상황과 환경과 조건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을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믿으며 살아가는 기적의 성도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인간의 눈으로 불 불가능해 보이는 가정 상황과 형편,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무너진 이런 집안에서도 이런 놀라운 왕이 나올 수 있다는 이 기적의 말씀을 믿음으로 취하는 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변화되지 않고 회복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이 복음의 역사를 믿고 우리는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므낫세 왕은 아버지 히스기야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55년의 긴 통치 기간동안 역사에 남을 극도의 악한 일들을 자행한 왕입니다. 아버지가 쫓아낸 산당을 다시 세우고, 아버지가 무너뜨렸던 우상들을 다시 세우며, 심지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일인 자녀들을 불로 지나가게 하는 끔찍한 몰렉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안보이고 신 것 같지만 분명히 계시고, 악행을 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게 어리석은 므낫세 왕의 모습이자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므낫세의 악행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보면 온 선지자들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비상 사태 선포의 예언은 므낫세 왕의 죄와 악행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경고입니다. 므낫세의 악행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는 어느 정도로 심각하냐 하면 이런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었던 아모리 사람들의 행위보다 더 심하였고 경고하십니다. 므낫세 왕의 악행히 얼마나 심각했는가 하면 악한 이방민족의 대표로 여겨지는 아모리 사람들의 악행보다 더할 정도로 심각했고 그로 말미암아 남유다 전체가 범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므낫세와 그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며 왕의 악행을 좌시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심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그 죄와 악행에는 반드시 영적 결과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 계시며 므낫세 왕을 통해 남유다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으실 것임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온 선지자들을 동원해서 비상 사태를 경고하는데 므낫세 왕은 하나님의 경고를 들을 마음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열왕기서 말씀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평행 본분인 역대기를 보게 되면 므낫세는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고 거부하며 계속 악을 향하여 달렸음을 증언합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므낫세 왕에게 영적 결과가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바벨론에게 므낫세 왕이 포로로 잡혀 왕이 끌려가게 되는 사건입니다. 산당과 우상숭배도 모자라 자녀를 불 위로 지나가게 만드는 이런 악행들을 일삼고도 돌아오지 않은 왕, 온 나라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악한 왕 므낫세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왕이 포로가 되어 나라를 떠나게 되었고, 임박한 죽음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히스기야 왕이 기적으로 죽을병에서 치유 받아 15년 동안 더 살게 된 후, 바벨론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줄 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그 예언이 성취되는 안타까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자기 몸에서 난 아들 중 하나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을 분명히 예언하였습니다. 그 말씀이 말씀대로 성취된 게 바로 악한 왕인 므낫세가 바벨론에게 포로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왕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면 거의 죽는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왕을 죽이고 바벨론이 원하는 허수아비 왕을 세우고 그 나라를 지배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로잡혀 결박 당해 바벨론으로 끌려 간 죽음의 자리에서, 그 환란을 당하면서 므낫세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제서야 여호와 하나님이 진정한 하나님이신 줄 깨닫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포로로 결박 당해 죽음을 앞에 둔 자리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두 손 들고 회개하고 돌아오며 하나님께 살려 달라 기도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회개하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로 나아오는 므낫세 왕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셔서, 죽은 목숨이나 당연한 포로의 자리에서 목숨을 구하고 기적과 같이 다시 돌아와 왕의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에게 포로에서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 돌아와 다시 왕위에 앉게 되고 나서는 므낫세가 정신을 차리고 완전히 변한 겁니다. 남유다 왕들은 전반전이 좋았다가 후반전이 좋지 않은 용두사미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므낫세 왕만은 정반대로, 전반전에는 악을 향하여 질주하는 왕이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노를 격발하게 한 왕이었는데, 그의 후반전은 이렇게 하나님께 정신차리고 돌아와 제대로 변화 받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환난과 어려움은 자신의 과거 죄악들을 회개하고 청산하며 주님께 돌아오는 계기로 삼아, 그의 후반전이 전혀 다른 인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므낫세 왕의 전반적인 평가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 왕으로 남게 됩니다. 왜냐하면 5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을 봐서는 하나님을 떠나고 악을 행한 시간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 전반적인 평가는 므낫세가 55년 동안 왕으로 있은 후에 왕이 된 아들 아몬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은 어떻게 아몬을 평가하는가 하면 아몬이 그의 아버지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전반적으로 악을 행한 아버지 므낫세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여, 아버지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 악을 행한 왕, 모든 우상에게 절하며 제사드린 악한 왕이 아몬이었습니다. 그렇게 악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왕, 안타까운 일을 계속하며 무너지는 왕이었던 아몬에게 2년만에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서 비극적으로 끝나는 왕이 됩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직전에 있었던 나타났던 일들, 왕궁 안에서 배신과 반역이 일어나, 신복들이 그에게 반역하여 왕을 죽이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왕을 배신과 배반으로 죽이며 힘만 있으면 그 자리를 아무나 올라가려 했던 이 무질서와 배신의 역사, 이런 망조의 역사가 지금 남유다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왕이 된 지 2년 만에 아몬은 자신의 신하들에게 배신당하여 죽임을 당하며 그 왕위에서 끝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죄와 악행을 쌓아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지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도 문제 없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을 지켜보십니다. 지금 당장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계속 쌓아두는 악행들과 죄들에 대해 영적 결과가 있음을,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므낫세와 그 아들 아몬을 통해 영적 무감각에서 깨어나며 말씀의 기준으로 돌아오기 원합니다. 또한 그렇게 범죄하며 무너지는 인생이었지만 회개하고 돌아올 때 그를 건져 주시고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붙들기 원합니다. 므낫세의 인생에 찾아온 위기의 어려움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조율되는 축복의 시간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눈 앞의 고난과 어려움이 그에게 정신 차리게 만들고 변화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축복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만드는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내 인생은 결국 축복의 인생으로 나아감을 믿으며,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형통의 복을 누리며 주님 은혜 가운데 승리할 줄 믿습니다. 지금이 깨어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라는 것을 잊지 말고,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께 조율되는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아서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인도하신 길로 나아가는 귀하고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히스기야에 이에 왕위에 오른 그 아들 므낫세 왕에 대해 증언합니다. 므낫세 왕은 먼저 남유다 역사에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당시에 55년을 사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12살에 왕이 돼서 55년 동안 왕의 자리에 있었으니까 정말 대단한 일이죠. 왕으로서 55년을 통치했으니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과 장수의 축복을 제대로 받은 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55년이라는 그 오랜 시간을 통치한 므낫세가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을 따라 갔다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고 백성들이 큰 복을 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오랜 시간 통치하면서 므낫세는 안타깝게도 남 유다 역사에 가장 악한 왕 중에 하나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남유다, 북 이스라엘 다 합쳐도 이런 악한 왕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 가장 악을 많이 행한 왕으로 알려진 왕이 바로 므낫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다윗왕과 필적할 정도로 남유다 역사에 신실하고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정직한 왕이었는데 그런 아버지 밑에서 이런 이해할 수도 받아들이리 수도 없는 망나니 같은 아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남 유다 왕의 역사를 보면 우리의 계산과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악한 왕, 말도 안 되는 아버지 밑에서 이렇게 순전하고 대단한 히스기야가 나온 것도 우리는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고요. 이렇게 위대하고 신실한 왕 히스기야 밑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악한 왕 므낫세가 나오는 것 또한 우리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듭니다. 어떻게 아버지는 히스기야왕은 아버지는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께 순전한 왕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아들, 악한 아들이 나올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계산이나 생각에는 받아들여질 수 없지만, 이 깨지고 악하고 병든 세상을 사노라면 이렇게 설명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게 필요합니다. 특별히 55년 동안 긴 세월 나라를 통치했으니 므낫세 때문에 백성들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55년 동안 하나님과 정반대 길로 하나님 앞에 악을 서슴지 않았던 므낫세를 통하여 그 개인이 영적으로 락하고 무너진 건 말할 것도 없고 남유다 전체가 망하고 무너지는 길로 질주하며 백성들은 큰 고통과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므낫세 왕에게는 오래 사는 게 복이 아니라 화인 인생이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므낫세가 왕으로 55년 동안 통치하면서 하나님 보시기 행한 악한 행동들 가운데 대표적으로 세 가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가 쫓아낸 산당들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신앙으로 회복되기 위해 아버지 히스기야 왕은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우상들을 다 무너뜨렸고 그 어렵다는 산당도 다 폐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쫓아내었던 산당들을 다시 세우는 겁니다. 왜 무너뜨렸던 산당을 다시 세우냐 하면, 그게 백성들에게 소위 말하는 민심을 얻고 점수를 따는 비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떠한가에 대해 전혀 무감각하고 둔감한 므낫세는 그저 백성들에게 점수 따고 자신의 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외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하나님만을 섬기고 언약을 갱신하기 위해 무너뜨렸던 산당도 다시 다 세우는 겁니다 두번째, 므낫세는 아버지가 무너뜨린 우상들을 다시 들여오는 것입니다. 땅의 풍요와 번영을 위해 우상들을 적극 권장하는 악행입니다. 다시 우상을 위해 제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게 되었습니다. 아세라 목상을 쌓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한다는 우상숭배는 다 무엇입니까? 이 땅에서의 풍요와 이 땅에서의 번영을 약속하는 절대 가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우상들을 도구화 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얻는 것, 그게 우상 숭배의 본질입니다. 특별히 일월 성신, 해와 달의 신은 모든 날씨를 주관한다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해와 달을 신격화해서 농사를 잘 짓기 원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가지고 우상들을 다 세우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주변의 나라들과 같이 되어 세상에서의 삶의 풍요를 위해 도구로 우상들을 의지하고 아세라와 바알을 섬기고, 일월 성신을 숭배하는 이런 타락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므낫세와 남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안 섬기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만 섬긴 게 아닐 뿐이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면서, 하나님도 섬기고 일월성신도 겸하며 섬기면서도 문제 없다 착각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겸하여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안 섬기는 거와 똑같다고 경고하시는데 이 경고를 들을 귀가 없을 정도로 나라 전체가 영적 마비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처럼 므낫세는 하나님만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섬기면서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며 섬기고 타락하는 삶으로 백성들을 빠뜨린 왕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 므낫세의 악행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인 자녀를 불로 지나가게 하는 악행입니다. 이 땅에 풍요와 번영을 위해 일월성신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가지고 와서 점을 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풍요를 누리면서 주변 나라들과 같이 보이는 우상들에게 기도하며 우상들을 기대며 살아가는 길로 이탈했으며, 하나님이 아닌 무당들에게 인생을 걸고 나라를 맡기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에서 벗어나고 이탈하여 우상숭배에 쩔어 살게 만든 것에서 넘어서, 이 땅에서의 축복과 번영을 절대 가치로 얻기 위해 했던 이방의 끔찍한 일도 서슴지 않게 됩니다. 그게 바로 몰렉 제사에서 유행했던 극단의 모습으로 자녀들을 불에 지나가게 하면서 제물로 드리는 악행을 므낫세가 일삼았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패륜이 바로 자녀를 불태워 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패륜을 저지르는 몰렉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가장 싫어하시고 분노를 격발하셨는데, 므낫세 왕 때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만을 높이기 위해 세워진 성전 안에 하늘을 위한 일월성신을 만들고, 우상의 단을 세우고, 불 위에 자녀들을 지나가게 하는 이런 악한 일을 행한 자가 바로 므낫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원히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으로 붙드는 성전 앞마당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하고 경고하는 것들을 제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이런 끔찍한 악행을, 그 오랜 세월 55년동안 왕으로 있으면서 자행했고, 그 55년 동안 남유다의 역사를 어둠과 절망의 상태로 만들며 영적인 마비 상태로 만들고, 백성들을 파멸의 수렁으로 이끈 왕이 바로 므낫세였습니다. 우상 숭배 하지 말라, 산당을 만들지 말라, 무당을 의지하지 말고 자녀를 불에 지나가게 하지 말라…하나님이 강력하게 경고하신 것들을 굳이 행하면서 망하는 길로 질주한 므낫세를 통해 경고의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경시하고 무시하면서 이 세상의 우상과 하나님을 겸하려 섬기려 하는 이 잘못된 생각이 결국 영적인 타락과 마비를 가져오며 파멸로 질주하게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방치하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노를 격발하시는 일도 서슴지 않게 되면서 우상과 무당에게 우리 인생을 맡기고 우리 자녀의 미래와 인생을 맡기는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음을 있지 마십시오. 말씀을 통해 깨어나며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고 거절하고 뒤돌아 서며 끊임없이 주님 앞으로 나아가고 돌아가며 주님의 기준을 붙들고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11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