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솔로몬, 듣는 마음과 듣는 길을 구한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과 언약의 성취를 통하여 솔로몬 시대에 얼마나 태평성대를 누리게 되었는가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말 구하고 찾았던 하나님의 지혜를 통하여 그 축복이 흘러들어 그 나라에 얼마나 많은 복들을 누리게 되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요. 단순히 솔로몬이 정치를 잘해서 나라가 평안하고 행복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약속한 그 언약이 솔로몬을 통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화려한 역사의 주인공은 솔로몬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선면히 증언합니다. 첫 번째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는 바로 인구가 모래알 같이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때 반복되었던 전쟁들을 멈추고 이제 평화의 시대를 누리며 평안이 살았다는 말씀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삶이 풍성해 지고 평안해짐을 통하여 인구가 바다의 모래밭을 많아진 것입니다. 바다의 모래알 같이 사람이 많아진 것은 솔로몬의 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주신 지혜가 그의 넓은 마음을 통해 주변을 적시는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오늘의 말씀이죠.
오래 전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바다에 모래처럼 많아질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자기 자식 하나도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눈에 믿을 수 없었던 그 약속이 솔로몬 시대에 정확하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 오래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렇게 아름답고 놀랍게 성취되는 것이 솔로몬 시대에 인구가 바다에 모래알 같이 많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인구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 나무 아래서 평안히 살았다 표현할 정도로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며 온 백성이 태평성대의 복을 충분히 누리며 살았던 것입니다. 솔로몬을 하나님께서 놀랍게 사용하셔서 하나님 언약의 성취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죠. 하나님의 약속이 때로는 오래 걸리는 거 같고 우리 원하는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여겨져 포기할 지 모르나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두번 째, 솔로몬 시대는 부국강병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늘 조공을 바치는 작은 나라, 늘 도망다니는 약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모래와 같이 많아진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의 성취로 솔로몬은 풍요로움을 누리고 주변 나라들를 압도하며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 태평성대와 부국강병의 기적은 솔로몬이 잘해서 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지혜의 결과였고, 더 큰 그림으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고 사모했고 그 지혜를 받을 준비를 하며 산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고 싶으셔도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구하지 않고 사모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담길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그 지혜와 은혜를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 지혜와 은혜가 나에게 담기지 않는다는 것이죠. 솔로몬은 이 두 가지가 다 있었다는 것입니다.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 말씀을 듣는 마음을 제일 먼저 사모했고 제일 먼저 구한 영적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 은혜와 지혜를 담을 그릇도 잘 준비해서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지혜가 그의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을 담은 솔로몬을 통하여 그를 도구로 쓰신 놀라운 역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고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담을 그릇으로 준비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정말 구하고 사모하는 열망 desire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구하고 사모하는 그 간절함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질 수 없다는 겁니다. 동시에 그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는 습기 없이 바짝 메마른 마음이나 딱딱한 마음, 작은 마음에는 담기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준비한다는 것 바로 은혜와 지혜를 받을 그릇을 준비한다는 건데, 메마른 마음 대신 촉촉한 마음, 딱딱한 마음 대신 부드러운 마음, 작은 마음 대신 넓은 마음으로 나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그릇을 준비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촉촉한 마음으로, 부드러운 마음으로, 넓은 마음으로 잘 관리하며 늘 주님을 향하여 들려 있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지혜를 우리가 풍성하게 담을 수 있고 그걸 통하여 흘러넘치며 주변을 적시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의 태평성대와 부국강병은 모두 언약의 성취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부어주신 지혜, 하나님께서 지혜를 심히 많이 주신 결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하나님께선 약속을 이루시기 원합니다. 그 언약 성취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 내 마음이 주님의 지혜를 솔로몬과 같이 열망하고 사모하며 주님의 지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말씀을 듣는 마음으로 열려 최우선으로 취하십시오.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를 나의 최우선으로 취하는 그 열망과 갈망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솔로몬과 같이 그릇을 잘 준비하여 주님의 은혜와 지혜를 담으면 담을수록 더 풍성해지는 역사가 경험되어, 내 주변이 변화되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변하며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이 내 인생을 통하여 성취되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5장 6장 7장은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는게 좋은데 5장은 성전 건축 준비, 6장은 성전 건축, 7장은 솔로몬의 왕궁 건축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 큰 그림의 첫 번째인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 준비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두 가지 중요한 영적 진리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성전 건축 과정 속에 다윗이 할 일과 솔로몬이 할 일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지금 성전을 건축 준비를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로 성전 건축 준비는 어디서부터 시작 되었는가 하면 그 아버지 다윗 왕 때부터 준비 된 일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은 솔로몬이었지만 실제로 모든 일을 준비하고 밑그림을 그린 자는 그의 아버지 다윗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은 자기 때에 하나님의 성전을 봉헌하고 싶은 열망이 굉장히 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성전 건축에 대한 열망을 드리며 완성된 성전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의 때에는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의 시대였기에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때는 아니야…라고 거절하시고 대신 너는 성전 건축을 위한 자재와 필요한 것들을 보이지 않게 다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들 솔로몬 때에 와서 평화의 때와 태평성대를 주심으로 성전 건축을 시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한다고 모든 것이 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헌신해서한다는데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때에 다윗이 해야 될 일이 있고 그 아들 솔로몬이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일과 역사들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생고생을 한 거장 기도자였습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과 들어가는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너는 들어가는 입구, 여기까지라는 것입니다. 너가 할 일은 거기서 마무리되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가나안 정복으로 들어갈 거라고 얘기하신 겁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에게 굉장히 섭섭했을 수 있습니다. 내가 평생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헌신했고 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 지금까지 생고생했는데 하나님은 거기를 못 들어가게 하시다니요….그런데 그 하나님의 계획을 순종해 모세가 역사의 뒤로 물러갔기에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은 가나안 땅에서 놀랍게 성취될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할 일이 있었고 여호수아가 할 일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할 일이 있었고 솔로몬이 할 일이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인 제가 할 일이 있고 성도들이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때에 할 것이 있고 우리 다음에 세대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충성하면서 그 큰 그림은 보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성취된다는 걸 믿으며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일을 할 때 내가 모든 것을 해야 된다는 욕심을 버리고, 내가 모든 것을 이루고 결과를 내야 된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면 내가 하려는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범위 내에서 충성하는 순종의 종이 될 때 하나님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선명하게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단지 나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는 것에 집중하며 나에게 맡기신 일에 충성 다하는 것,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입니다. 두 번째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영적 진리는 성전 건축의 준비에 있어서 좋은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준비가 이 큰 일을 이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큰 일이 추진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자재들과 준비할 모든 것들만 준비하고 준비가 다 됐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큰일은 그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계들을 통하여 일이 풀어진다라는 것을 아버지 다윗이 잘 알았습니다.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을 위해 성전 건축을 준비하게 했는데 그 준비는 건축할 수 있는 재료들과 자재들과 돈만 남긴게 아니라 성전 건축에 필요한 사람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물려주고 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니까 그 아버지 때에 친하게 잘 지냈던 히람이라는 왕이 축하 사절을 보내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하고 좋은 관계가 중요하냐 하면 성전 건축을 위한 백향목을 히람왕을 통해 다 수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면 최고급의 백향목이 필요한데 그 백향목은 이스라엘에서 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때부터 평생 좋은 관계를 가지고 지내왔기에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위한 자재인 최고급 백향목 수입을 요청할 때 아무문제 없이, 오히려 기쁨으로 허락하는 것입니다. 큰 부탁하는데 부탁 받는 사람이 이렇게 기쁘게 반응하는 것은 반드시 그 사이에 좋은 관계가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 재목인 백향목 공급을 기쁨으로 응답한 것뿐만 아니라 그 나무들을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잘 배달할 것까지도 다 생각해서 알려주는 것입니다. 히람에게 솔로몬이 요청한 건 백향목을 그냥 수입만 할 수 있게 수입 허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백향목을 공급하는 것을 허락한 게 아니라, 그것을 가장 편하고 효과적으로 운반할 수 있는 방법까지도 다 머리에 두고 호의를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트럭도 없는데 그 무거운 나무들을 어떻게 사람들이 다 끌고 오겠습니까? 이걸 바다로 뗏목을 만들어서 보내면 훨씬 더 쉽게 잘 배달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백향목들을 조달 받으십시오…라고 배달 방법을 다 알려주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가능했나.. 아버지 다윗대로부터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였습니다. 내가 큰 일을 추진할 때 사람들이 가로막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추진하는데 있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풀면서 관계를 통해 일이 풀여가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때에 가지고 있었던 좋은 관계를 그 아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고 계속해서 이어나가며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중요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들이 나아가야 될 한 걸음 더 깊은 단계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을 하는데 있어 그냥 사람들과의 관계만 풀고 사람들만 쫓아다니면 일이 풀린다고 생각하는데, 성도들의 차별성이라는 것은 그 모든 관계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붙들고 솔로몬도 성전 건축이라는 큰 일을 관계를 통하여 일을 풀어가며 그 모든 것들이 잘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성전을 이루시고 건축하시는 분이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라는 걸 믿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순위에 두고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늘 점검하고 일이 풀리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대신 관계임을 믿고 오늘도 십자가 은혜를 바라보는 것이죠.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사람들과의 관계가 풀리면 그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며 놀라운 축복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충성 다하고 순종하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 순위에 두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매우 유명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참 익숙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으로 받은 지혜가 어떤 것인지 대표적인 예로 보여주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솔로몬의 지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하나님께로 받은 그 지혜가 얼마나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하는지를 증언하는게 바로 오늘 말씀의 유명한 판결입니다. 먼저 등장인물인 두 여인을 주목하면 좋겠습니다. 이 유명한 재판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그 당시에 유명했던 자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었습니다. 누구였냐면 창녀 두 여인이었습니다. 창녀 두 여인은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지위도 낮고 소위 말하는 천민 계급이으로 가장 멸시 천대를 받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 천민들에게는 재판 같은게 필요 없는 자들로 여기고 심지어 사람으로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그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그 두 명의 창녀들이 왕 앞에 와서 발언을 할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통해 솔로몬이 어떻게 백성들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있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왕이 그 창녀들의 두 논쟁의 판결을 위해 앉아 있었다는 것을 통해 솔로몬이 그 낮은 자들을 향해서도 듣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죠. 내가 듣고 싶은 사람들 소리만 들으려는게 일반적입니다. 유력한 사람들만, 힘이 있고 높은 사람들의 말만 들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낮은 자의 소리와 작은 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 민초들의 눈물과 아픔을 들을 귀는 갖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서 높은 자들에게만 관심이 있는게 아니라 낮은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향하여도 들을 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바로 오늘 재판에 등장하는 창녀 두 여인들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는 것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두 창녀가 솔로몬 왕에게 왔는데 참 사연도 기구합니다. 창녀로 살아가는 것도 너무 힘든데 이 창녀 둘이 한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누군지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창녀라니까 그 직업을 통해 그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창녀로서 한 집에서 사는 것도 모자라 임신도 비슷한 때 해서 해산도 3일 차이로 했습니다. 사실 이게 다 마음 아프고 가슴이 찢어지는 일들 뿐이에요.직업도 그렇고 자기의 삶도 그렇고 같이 사는 것도 그렇고 같이 임신하고 같이 해산하는이 모든 것들이 기쁨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아픈 일은 뭐냐면 창녀인 그 두 여인 모두 귀한 생명을 얻게 됐는데 그 중에 한 여인의 아들이 죽은 거죠. 그리고는 몰래 죽은 아이와 그 여인의 아이가 바꿔치기 했다…이걸로 소송이 걸려 솔로몬 왕 앞에 온 것입니다. 뭐 지금 같으면 cctv가 있으니까 쫙 돌려보면 되는데 그 당시에는 cctv도 없고 모든 것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이 두 여인 사이의 크게 시비가 붙었고 지금 솔로몬 왕에게 그 송사를 가지고 온 겁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몸을 파는 여인이라는 것을 다 드러내면서까지 이것을 왕 앞에 가지고 왔다는 것은이 문제가 두 여인에게는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절대 쉽게 물러날 수 없고 이것은 죽으면 죽었지 포기할 수 없는 법정 싸움이 되서 왕 앞에 온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이 두여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답이 쉽게 나지 않는 거죠. 둘 다 들어보니까 다 반쪽에 일리가 있다는 것이죠. 부분적으로 맞아 보인다는 거예요 증거가 없이 말을 듣고 증언만 가지고는 누가 진짜 어머니고 죽인 아들이 누구고 이거 어떻게 판결합니까? 사람의 증언으로는 판결하기가 어려운데 솔로몬이 어떻게 보면 기발한 생각이랄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어떤 결론은 내리냐면 정확하게 이 두 여인을 만족시키는 방법은 아이를 잘라 반씩 나누는 거 밖에 없다고 판결을내는 것이죠 그래서 칼로 아이를 반으로 자르라고 명령합니다. 다투지 말고 공정하게 쪼개라… 어떻게 보면 이게 이 세상이 우리에게 정의란 이름으로 생명을 죽이는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이 쉽게 얘기하는게 공정하게 잘라 반씩 가지라는 건데, 그 공평이라는 이름으로 그 과정에서 아이는 죽는다는 것이죠 생명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솔로몬의 명을 듣고 두 여인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립니다. 가짜 엄마는 공평하게 반으로 나누라는 명령에 그냥 순종합니다. 저 여자의 것도 안 되고 내 것도 안 되게 반만 나누자는 것이죠. 공평이라는 것을 들고 와서 생명을 죽이자는 겁니다. 반면에 진짜 그 아들의 어머니는 마음에 불붙듯이 일어났다…증언합니다. 마음에 애간장이 타서 마음이 찢어지는 겁니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찢어지니까 내 아들이 안 돼도 되니까 저 여인에게 그 아들을 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 어머니에게는 중요한게 뭐냐면 옳고 그름보다 더 중요한 건, 이 아들이 사는게 더 중요한 겁니다. 옳고 그름도 살아 있는 생명 아래서 따지는 겁니다. 진짜 내 아들인데 내 아들이 안 돼도 상관없으니까 저 아들이 사는게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게 진짜 엄마의 마음이었습니다. 진짜 내 아들이니까 나의 옳고 그름을 포기하고서라도 생명을 살리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를 솔로몬이 발휘합니다. 진짜 엄마는 누구냐 하면 생명을 더 중요하게 여긴 저 엄마가 진짜 엄마다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솔로몬의 재판 기준은 이 아이를 살리는게 목적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본 거죠. 심지어 내 것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 되는 것을 포기함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을 살릴 수 있는 마음이 바로 진짜 엄마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듣는 마음이고 옳고 그름을 판결하는 놀라운 비결이었음을 성경이 증언하는 겁니다. 이 솔로몬의 판결을 통해 백성들이 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 속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솔로몬과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지혜가 내 속에 있음 을 믿고 확신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 지혜가 나에게 있음을 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기도를 헌신하고 말씀과 기도를 사모하는 이유도 결국 내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기를 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지혜가 내 삶을 다스리고 내 우선순위를 변화시키며 나에게 바른 길을 가는 분별력을 주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기를 사모해서 그렇게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심으로 헌신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말씀을 듣는 마음으로 산다는 건 바로 이 생명을 살리는 마음을 최우선에 두는 삶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결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솔로몬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죠. 나의 옳음과 저 사람의 옳음이 충돌할 때 서로 옳다고 주장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는 살리는 결정을 하는가…죽이는 결정을 하는가라는 것이죠. 정말 중요한 결정은 생명인데 생명을 죽이면서 공정히 반을 나누자고 나오면 그건 어떤 화려한 말로 포장을 해도 결국 가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짜 엄마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게 바로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분명한 우선 순위입니다. 그 생명을 죽이지 않는 선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겁니다. 내 옳음 때문에 생명이 죽으면 나의 옳음을 포기할 용기가 있는 게 진정한 지혜입니다.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으면 내 옳음도 포기할 수 있는 이 어머니의 마음이 진짜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합니다. 나의 옳음을 포기함으로 그 아이가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솔로몬이 하늘로부터 받은 지혜이고요, 결국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인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셨고, 세례가 필요 없는 분이신데 스스로 세례를 받으시며 죄인같이 여기심을 받았고요. 저와 여러분들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셨기에…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죄 없는 분이셨는데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 스스로 죄인으로 여김을 받으시는 겁니다. 옳음을 포기하시면서 그 생명을 살리는 그 예수님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을 성도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품어야 하는 마음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듣는 마음을 통해 높은 자들만이 아니라 낮은 자들과 작은 자들의 소리를 듣는 마음, 힘있고 유력한 자들의 소리만이 아니라 힘이 없는 자들의 소리를 듣는 마음, 중요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는 귀는 가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솔로몬과 같이 가장 낮은 자, 작은 자의 말을 듣는 마음과 귀가 열리기 원합니다.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있기를 원합니다. 그 하나님의 지혜가 내 속에 있기를 사모하십시오. 마음에 하나님이 주신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살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본질을 붙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듣는 마음,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 선과 악을 분별하며 백성들을 마음을 듣고 읽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왕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를 붙들고 바른 정치를 펼쳐나가며 그의 조직과 제도가 얼마나 든든하게 세워져 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의 긴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 덕분에 솔로몬은 적재 적소에 바른 신하들을 세울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안정적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해 나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솔로몬과 솔로몬이 세운 신하들의 명단들을 말씀으로 살피기 전에 주목해서 봐야 하는 것은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의 왕 되었다는 부분입니다. 그냥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말씀인데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시작부터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첫 번째 왕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고도 한참 있다 왕이 되었고 실제로는 7년간은 남유다 지역에만 반쪽왕으로 있었습니다. 수많은 전쟁과 우여곡절 끝에 통일 왕국을 세워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겁니다. 반면에 솔로몬은 왕으로 세워지자마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첫 번째 왕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깊이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은 왕으로 등극하게 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은 유일한 왕입니다. 왕으로 등급하자마자 온 이스라엘이 왕이 되어 죽을 때도 통일왕국의 왕으로 끝난 왕이 역사상 솔로몬 외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이후에 그 아들로 말미암아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며 분열되기 때문입니다. 온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졌고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끝난 왕이 유일하게 솔로몬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왕으로 등극하자마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첫 번째이자 마지막 왕, 유일한 왕은 솔로몬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가슴 아픈 이스라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만큼 이스라엘은 굴곡진 역사를 가졌고 그만큼 이스라엘 왕들이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세워지지 않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민낯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됐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는 그 어떤 때보다 비할 수 없는 황금기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적이고도 영적 의미 때문에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부분이 결코 가볍지 않은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이 세운 신하들, 황금기에 솔로몬이 세운 솔로몬의 캐비넷 누구였는지를 증언합니다. 솔로몬이라는 왕을 중심으로 세워진 자기의 팀 명단이 바로 신하들의 명단입니다. 왕이라는 위치는 모든 것을 혼자 할 수 없기에 결국은 사람들을 세워야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왕의 철학과 뜻에 맞는 사람들을 통하여 신하들을 세우면서 솔로몬 왕의 통치 스타일과 철학이 그대로 보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의 신하들의 명단은 왕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목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신하들의 명단을 나열하는데 순서는 그냥 무작위로 된 순서가 아니라 중직과 중요도 순입니다. 처음부터 밑으로 중요도 순으로 명단이 기록된 것입니다. 신하의 이름을 나열할 때 첫 번째로 나온 사람은 소위 말하는 권력 서열 넘버원, 가장 중요한 신하입니다. 그 첫번째 사람이 바로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 제사장이었습니다. 솔로몬이 권력 서열 1번으로 제사장을 세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정치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다윗왕 때에 신하 명단 첫번째가 누구였냐 하면 군대장관 요압이었습니다. 다윗의 최측근 신하이자 가장 중요한 실세가 바로 요압이었던 이유는 다윗의 시대는 전쟁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나라가 안정되지 않는 시대였고 왕이 됐지만 남쪽만 통치하는 반쪽 왕이었기에 수많은 전쟁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을 세우려고 마음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너의 손에 피를 너무 많이 묻혀서 성전은 너 때 지을 수 없다고 얘기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전쟁이 많았고 불안정했던 시기였기에 군대장관 요압이 권력서열 1등이가 실세였습니다. 다윗의 왕권을 위해서 그 나라를 위해 제일 중요했던 건 전쟁을 잘하는 것이었기에 군대장관이 가장 최측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이어 왕에 오른 솔로몬의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군대장관이 아니라 바로 제사장이었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가장 중요한 권력의 실세로 넣고 가장 중요한 위치에 두었다는 것은 솔로몬이 지도력을 가지고 그 체계를 예배와 제사에 최우선 순위를 두도록 조직을 개편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전쟁과 군대 중심을 넘어서 제사장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고 핵심에 두겠다는 왕의 정치 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랜 전쟁의 시대를 마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솔로몬에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예배와 제사를 최우선 순위로 두도록,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도록 그를 이끄신 것입니다. 그 결과 솔로몬 시대에는 안정이 있었고 평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신하들의 목록에서 주목해야 될 부분 중에 하나는 솔로몬이 나단 선지자의 아들들을 신하들로 중용했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의 아들들을 불러 들여 그들이 지방 관장의 두령이 되고 제사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매우 가까운 관계로 그들을 두면서 왕의 친구가 되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단 선지자는 아버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살인도 저질렀을 때 그 잘못을 목숨 걸고 나아가 회개를 촉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태어났을 때 축복했던 선지자, 솔로몬이 왕이 되는데 어미니 밧세바와 함께 큰 공을 세운 선지자 이기도합니다. 아버지 나단 선지자가 그만큼 중요한 영적 지도력을 발휘했었기 때문에 그 아들을 통해 영적 기준을 붙들고 선한 영향력을 받기 사모하는 솔로몬의 의중이 그대로 그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가 내가 어떻게 되는가를 나아갈 길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내 인생에 내가 가까이 하고 영향 받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가고 닮아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붙들고 그 기준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이런 사람을 내게 가까이 두고 살아가는 것이 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위치와 지위에 상관없이 아부 대신 정직한 조언을 해주고 아닐 때는 쓴소리를 할 수 있을 이런 벗을 가까이 두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나의 인생도 그리고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도 예배와 제사로 최우선순위와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개편하고 조직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사는 비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시간과 돈, 나의 관심이 예배에 집중하도록 조직과 생각이 개편되지 않으면 우리는 주변 영향을 계속 받으며 흘어지고 흔들리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조직을 개편하며 사람들을 세울 때 어디에 집중하고 중시하는가를 통해 백성들이 그 우선순위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솔로몬과 같이 주변에 가장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의 기준을 붙드는 자를 벗으로 삼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인생이 예배와 제사를 최우선 순위에 두는 조직과 흐름 속에 나를 두며 주님 은혜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명한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정말 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께 합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먼저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너가 뭐가 필요한지 무엇을 줄지 나에게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God’s initiation….모든 시작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하나님의 먼저 손 내밀심으로부터 시작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나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먼저 아시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또 하나 중요한 고백은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고 나는 구하는 자, 하나님께 내가 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자가 나의 인생입니다. 내 인생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을 통해 살아가는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은혜가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당연한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물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작은 아이…로 묘사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모든 것이 당연하지 않고 은혜임을 깨닫는 삶의 비결은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작은 존재로 두는 삶입니다. 솔로몬은 왕이었고, 왕은 세상에서 자기보다 높은게 없는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왕이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아이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아이로 서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큰 은혜를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은혜받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작은 아이로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로 설 때 은혜가 나에게 담기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가 없는 자의 특징은 하나님 앞에 큰 자로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목이 뻣뻣한 자로 서는 겁니다. 내 인생의 중심이 나인 것처럼 착각하며 내 인생은 내가 다 책임지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기 원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작은 자로 서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과 같이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자가 아니면 천국 못 들어간다는 것이죠. 어린아이 같다는게 바로 뭐냐면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며 겸손한 마음이며 하나님 앞에 내가 작은 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원하는게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지금 이시간 하나님께 구하는 한 가지,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한 가지를 주님께서 들어주신다 하면 구할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걸 통하여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과연 무엇인가…정말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깨닫기 원하십니다. 때로는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잘 모르기도 하고, 그 원하는 것이 잘못된 경우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찾기도 하고 세상이 원하는 것을 찾기도 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되는 것을 원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 원하는 하나를 찾기 위해 오늘도 헤매는 인생이 저와 여러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구하는 거 내가 모두 줄테니까 한 가지 얘기해라 하실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 솔로몬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했는가 하면 “듣는 마음”입니다. 그 겸손한 태도 그 하나님 앞에 작은 아이의 태도가 솔로몬에게 바른 것을 구하는 놀라운 영적인 우선순위를 주었습니다. 솔로몬이 구한 지혜란 듣는 마음이고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이고 두 번째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가운데 왕이 제대로 서 있어야 세상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죠 솔로몬이 구한 듣는 마음이란, 마음으로부터 듣는 것, 이해하기 위해 듣는 것을 포함하고 더 중요한 것은 순종하기 위해 듣는다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음으로부터 듣고 이해하기 위해 듣고 순종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을 이끄는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왕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듣는 마음을 통해 순종하고, 왕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하여 백성들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왕이 잘 듣고 순종해야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백성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백성들의 소리를 공감하고 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바른 길을 인도하며 옳고 그름의 길을 제시하여 알려주는 힘, 그게 바로 솔로몬이 구한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것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어보고 순종하는 자가 아니라 순종하기 위해 듣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듣는 마음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순종하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어보고 순종할까 말까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순종을 목적으로 들을 때 말씀이 내 마음에 생명으로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순종의 마음으로 들은 그 말씀이 나를 바꾸고 하나님의 지혜가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것을 구함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하나님 마음에 솔로몬이 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마음을 구한 솔로몬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수와 부, 소위 말하는 health and wealth를 구한다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원수의 보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첫번 째인데 솔로몬은 분별하는 지혜 듣는 마음을 구했다는 것이죠. 이게 하나님 마음에 쏙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처럼 좋고 기쁜게 있겠습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들고 내가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그 비결은 바로 인생의 방향성과 우선순위를 제대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솔로몬의 요청이 얼마나 마음에 드셨는지 구한 지혜 뿐 아니라 구하지 않은 많은 것을 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먼저 너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구해야 할 것을 제대로 구하면 나머지는 반찬과 같이 따라오는 복으로, 덤으로 주시는 복으로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는 마음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설정하면 나머지 복들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 마음에 드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을 붙들고, 정말 중요한 것을 구하고 열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고 열망해야 될 것은 바로 하나님 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 말씀을 들는 것이 나를 살리는 생명임을 믿고 듣는 마음을 구하는 지혜가 부어지기 원합니다. 그 말씀을 들음으로 그 말씀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며 순종함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며 바른 기준으로 살아가기를 열망하십시오. 구할 것을 제대로 구함으로 구하지 아니하는 다른 복들도 따라오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자는 크신 하나님 앞에 결코 큰 존재로 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원한다면 겸손하게 나는 낮추고 어린 아이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앞에 작은 아이가 되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 그분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새기며 그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늘 십자가 앞에 작은 자로, 겸손한 자로 서서 주님의 은혜가운데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누려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내 믿음이 말씀과 조율되어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내 마음과 삶에 새기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두 가지 성경적이지 않지만 우리가 믿고 있는 두 가지 개념을 말씀으로 재정의 하기 원합니다. 첫번째는 솔로몬은 초창기에는 하나님께 온전히 합한 왕이었는가? 에 대한 질문이고, 두번째는 일천번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둘 다 우리 나름의 생각으로 정의가 되어 믿고 있는데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적으로 분명한 재정의가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가 생각하는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굉장히 사랑하신 왕이자 하나님께 합한 왕이라 여깁니다. 마지막에 가서 정신을 못 차리고 좀 어려워진건 분명하지만 적어도 초창기에는 굉장히 좋았고 신실했다고 믿습니다. 솔로몬이 굉장히 초기에는 하나님께 합한 좋은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뭐냐면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것과,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굉장히 좋게 보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솔로몬을 초창기부터 분명한 문제가 있는 왕이었음을 분명히 증언하며 가감없이 그의 심각한 영적 변질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서 심각하게 지적하는 문제는 솔로몬의 결혼 문제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왕이 된지 얼마 안 되는 초창기입니다. 그런데 이집트의 왕 바로의 공주와 결혼한 겁니다. 바로의 딸과 결혼하는 것을 오늘 말씀 맨 처음에 증언하는 것은 이 부분을 성경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집트, 애굽은 바벨론과 함께 항상 하나님을 대항하는 나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애굽은 돌아가면 안 되는 나라로 떠나야 하는 나라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서 기근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피신 간 것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바로 왕의 딸을 사랑해서 연애 결혼했다 이런게 아니라 분명히 이것은 정치적인 관계로 그 정치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서 결혼한 정략 결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강대국이었던 이집트와 친족이 되어 이스라엘의 관계성을 쌓으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큰 도움을 받겠죠. 그래서 정치적으로 내가 어떻게 하면 더 안정적으로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는가를 그 당시 강대국과 결혼하는 것을 통해 이어가려고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바라보고 의지하며, 동시에 머리를 굴리며 정세를 살피며 강대국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심각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결국 솔로몬은 이것을 처음으로 시작해서 앞으로 수백 명의 부인과 후궁들을 데려오는데 그런게 대부분 사랑과는 거리가 먼 정략적인 결혼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라의 안정와 정치를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그게 결국 이스라엘 나라를 분열되게 하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다 변질시키는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맡기신 자리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왕, 하나님 지혜와 은혜를 구하는 왕이 되었어야 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 처럼 보였지만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았던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우신 왕의 자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때 사는 나라인데 강대국의 나라를 의지하며 강대국의 힘을 통한 안정을 추구하는 그 생각이 솔로몬을 망하게 하는 비결이고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변질시키고 무너뜨리는 지름길이 되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씀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솔로몬은 초기부터 하나님 앞에서는 심각한 영적 변질과 왜곡이 있는 왕,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믿고 의지하는 데서 이미 돌아선 안타까운 왕이라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솔로몬에게 분명히 잘한 일과 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초기부터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는데 실패한 왕으로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강대국을 통해 보험을 들고 강대국을 의지하며 나아가면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버리게 되고,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인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맡기신 왕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실패한다, 이것이 솔로몬의 초기부터의 평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의 잘못된 생각이 좀 바뀌어져야 되는게 바로 일천번제 입니다. 솔로몬이 제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어떻게 잘못 읽냐 하면1000번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이 그 정성에 감동 하셨고 그로인해 솔로몬이 원하는 복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일천 번제가 아니라 일천번 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하나님께 헌금을 천번 드리는 정성과 간절함으로 기도하는게 일천번제로 이해하는 겁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천번의 간절한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그 정성의 감동하셔서 마음이 열려서 내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신다…믿는 것입니다. 그 간절함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천 번 드리는게 나쁘고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그게 오늘 말씀에 증언하는 일천번제의 헌금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이 드린 일천 번제는 1000번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천 마리를 한꺼번에 태워 드린 제사였습니다. 그러니까 1천 번을 드린 게 아니라 1천 마리의 재물을 한꺼번에 드렸다는 것이죠. 그만큼 솔로몬은 모든 것을 드려 전심을 다하여 한 번에 그 모든 것을 드리는 일천 번제로 나의 모든 것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렇기에 일천 번제를 내가 천번 헌금 드리니까 천번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내 정성을 가륵히 보시고 은혜를 특별히 부어 주신다는 거는 내 개인적인 간증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오늘 말씀에서 의미하는 성경적 의미의 일천 번째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천이라는 숫자는 그 당시 동물을 셀 수 있는 가장 큰 단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천마리를 태워 하나님께 드린다는 일천 번제는 왕으로서도 내 전부 왕으로서 나의 최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드린다는 고백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과 같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제사가 바로 일천번제입니다. 일천 번제의 정신은 가장 큰 숫자의 동물을 드리면서 내 귀한 것을 모두 주님께 드리는 순전한 마음 주님을 향한 마음을을 주님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드리는 고백이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간절한 기도와 소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드린 제사가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나의 온전한 감사와 찬양의 제사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드려진 일천 번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 그 자체로 드린 일천 번제에 하나님께서는 반응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천 번제를 드릴 때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온전한 주님을 향한 마음 주님을 향한 전심이라는 것이죠. 그 솔로몬의 주님을 향한 온전한 마음과 전심에 하나님이 반응하신 것이지 그 많은 횟수를 통해 정성을 보고 하신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에 대해서 환상을 갖지 말고 정확하게 초창기부터 드러난 그의 영적 문제가 뭐였는지를 지적하는 말씀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데 늘 도전되는 삶을 매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솔로몬과 같이 자꾸 하나님만 사랑하는게 아니라 하나님도 사랑하며 강대국을 겸하여 사랑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는게 아니라, 하나님도 의지하며 강대국을 겸하여 의지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한다 말하며서, 강대국에 자꾸 보험을 들려하고, 세상도 사랑하면서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만 의지하는데 결국 어려움이 된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머리 굴리고 계산하는 신앙,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주시겠다는 그림과 계산을 내려 놓고, 순전히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해서 나의 중심을 드리는 예배, 나의 전심과 온전함을 드리는 일천번제의 정신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기 원합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 최상의 것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게 바로 일천 번제의 정신임을 잊지 말고 내가 드리는 오늘의 예배, 내가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나의 중심을 드리는 온전한 헌신이 되어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눈에 보이는 세상에 보험 들려고 하는 이런 두 마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경계하며, 일천 번제의 정신으로 늘 주님 앞에 순전하고 온전하게 내 마음을 드리며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왕으로부터 솔로몬으로 왕권이 이양되는 과정은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맡기신 자리였음에도 결코 평탄한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바로 왕이 되지 못하고 가시밭길을 갔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 중에도 어려 걸림돌들과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습니다.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렸던 다른 왕자들이 있었고, 다윗왕과 함께 했던 기득권 세력은 솔로몬이 견고하게 왕권을 확고하는데 도움을 주는 디딤돌이 아니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로 해결해야 될 숙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죽기 직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이런 기득권 세력들과 함께 그들을 어떻게 조율하고 맺고 풀며, 어떻게 정리하고 단절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유언과 같이 알려준 것입니다. 다윗에 이어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솔로몬 왕은 아버지 유언을 마음에 잘 새기며 왕권을 확고하게 하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친 어머니 밧세바의 요청도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하며 거절하며 사사로운 감정과 관계에 매이지 않는 솔로몬왕의 모습이 이런 대표적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 왕과 함께 했지만 솔로몬과 함께 하지 않으며 왕권에 걸림돌이 된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그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해지는 모든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왕이 되려 했고 자기 힘으로 그 왕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형 아도니아, 그의 어리석음으로 한번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왕이 되려고 하는 야욕으로 품어서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도니아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처럼 착각하며 그에게 줄 섰던 사람들, 솔로몬에게 대항하고 왕권을 흔들고 있는 배신자들의 대표인 아비아달, 요압, 시므이가 한 사람씩 정리됩니다. 첫 번째 배신자였던 아비아달은 파면이라는 방법으로 그 관계가 정리됩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왕이 압살롬으로 인해 피난 생활 할때 함께 했던 공로를 기억해 목숨만을 살려 줍니다. 처형하는 대신 고향으로 귀향을 보내고 제사장직을 파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아도니아의 편에 섰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그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배신자인 군대장관 요압을 정리하는 방법은 처형이었습니다. 다윗 왕과 함께했던 군대 장관인 요압은 머리를 굴리고 계산해보다가 아도니아가 왕이 될 것 같아서 그에게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아도니아가 죽고,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이 파면과 함께 귀향 같다는 소식을 들으니까 그 다음 차례는 자기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도망가서 제단에 뿔을 잡았습니다. 그 제단의 뿔을 잡으면 내가 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사실 요압의 이런 모습은 그의 군대 장관 시절의 모습과는 굉장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늘 전쟁에 앞서서 싸웠던 자였으며 다윗을 때로는 어렵게 했고 힘들게 했던 권력의 실세였습니다. 다윗이 죽기 전에 요압을 조심해야 되고 요압을 정리해야만 너의 왕권이 제대로 설 수 있다고 조언했던 이유는 다윗왕에게 굉장히 헌신되고 충신된 충성된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제어하고 컨트롤하기 어려운 자였던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충성하는 것 같은 충신이었지만 실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왔다 갔다 하는 자였습니다. 결국 자기의 권력과 이익 때문에 찾아오고 머무르는 것이며 더 큰 권력과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배신하고 떠날 수 있는 자가 바로 요압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놀라웠던 군대 장관이 마지막에 잘못된 선택으로 비참하게 그의 인생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단의 뿔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처형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배신자의 처리인 시므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시므이는 한 번의 기회를 분명히 주었습니다. 아도니아와 마찬가지로 시므이에게도 네가 예루살렘을 떠나지만 않으면 살 수 있다…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 지난 후에 시므이는 자신의 종들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위수 지역인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면서 자신이 받은 기회를 날리며 죽음을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잘못된 사람에게 줄 섰던 사람들, 계산하고 머리를 굴려 아도니아에게 줄 섰던 사람들은 이렇게 썩은 동아줄을 붙들고 섰던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음을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솔로몬의 왕권을 확고하게 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아비아달도 요압도 시므이도 이렇게 관계가 정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쫓는 자가 아니라 권력을 쫓았고 이익을 쫓았고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며 왕이 될 사람이라는 아도니아라고 줄 섰다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자, 그게 이 세 사람의 안타까운 최후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맡기신 왕의 자리는 사사로운 자리가 아니고 사사로운 관계와 감정으로 붙들리면 안 되는 무겁고 중한 자리였습니다. 때로는 냉정해야 되며 때로는 민첩하게 결정해야 하며, 맺을 것을 맺고 끊을 거는 끊어야 하고, 붙들 것은 붙들고 단절할 것은 단절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특별히 이익과 권력을 위해 사람에게 줄 서는 기득권 세력들, 머리를 굴려 계산하여 사람에게 줄 서는 사람들의 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무너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위해 이렇게 정리해야 될 사람들이 있으며 정리해야 될 관계들이 있으며 사사로운 감정과 관계로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힘과 이익을 위해 사람에게 줄 서는 인생 대신, 늘 하나님에게만 줄 서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와 사명을 가장 최우선으로, 절대적인 우선순위로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다윗에 이어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세우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올라가려고 하는 자가 있었는데 바로 솔로몬의 형이자 압살롬의 동생이었던 아도니아였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가 왕권을 물려받은 것처럼 성급하게 행동을 했고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과시했으며 자기가 다윗을이어서 왕이 될 것처럼 스스로 뻐기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일하셨으며 아도니야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다 썰물과 같이 흩어지고 아도니아는 제단에 가서 뿔을 잡아서 용서를 구하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며 겨우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동생 솔로몬의 배려로 그렇게 겨우 목숨을 건졌으면 조심하고 돌이켜야 되고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조용히 내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냥 초야에 묻혀 살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아도니아는 여전히 그 왕이 되려는 야욕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줍니다. 그런 아도니아의 꾀를 경시여기며 어리석은 요청을 하는 그의 어머니 밧세바, 친 어머니이지만 그 밧세바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는 솔로몬 왕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솔로몬이 왕권이 확립이 되는 과정이 있어서 그의 가까운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는 듣지만 않을 때는 듣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합니다.
아도니아의 그 꿈틀대는 야욕이 누구를 통해 솔로몬에게 전달되는가 하면 솔로몬의 친어머니인 밧세바입니다. 아도니아가 밧세바에게 찾아와서 한 요청이 뭐냐면 마지막 후궁처럼 데리고 살았던 아비삭을 자기가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죠. 솔직히 사람들은 민심은 다 나에게 돌아왔고 왕권은 내 것이었는데 하나님이 막으셔서 안 된 것 뿐이지 거의 내 것이 될 뻔했다고 얘기하며 소위 말하는 딜을 하는 것이죠. 통 크게 양보한 자신에게도 전리품같이 하나 달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해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마음속에 언젠가는 왕이 되려고 하는 야욕을 불태우는 거라는 것을 밧세바는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왕이 되려고 했던 형인데, 통 크게 양보해서 내 아들 솔로몬이 왕이 되게 했으니, 이 정도 요청은 들어줘야 되지 않을까… 하고 그것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아도이나의 요청을 통큰 양보에 대한 보답으로 생각하며 수용하는 밧세바의 모습에서 두 가지가 모두 드러납니다. 첫번째는 밧세바의 어리석음입니다. 밧세바의 어리석음과 무지가 아도니아가 요청하는 아버지 다윗왕의 여인이었던 아비삭과 결혼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큰일이며 얼마나 소위 말하는 악한 뜻을 품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가볍게 여겼다는 무지와 어리석음입니다. 압살롬이 구테타를 벌인 후 처음으로 했던 극악 무도한 반역이 바로 백주 대낮에 다윗의 후궁들을 범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여인들을 내가 취함으로 내가 왕이 되었다는 것을 온 백성에서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도니아의 요구가 큰 일임을 모른 것입니다. 또 하나는 밧세바의 교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밧세바는 솔로몬 왕이 내 아들이니까 내가 부탁하는 말은 그냥 토 달지 않고 무조건 다 들어줄 것으로 착각한 교만입니다. 나는 내 아들 솔로몬 왕에게 무엇을 요청해도 그 아들은 다 잘 들어줄 거라는 교만이 이런 우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 이 아도니아의 청을 들고 밧세바가 솔로몬 왕을 찾아갔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솔로몬이 어머니 밧세바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모셨는가를 알 수 있는데 어머니이 앉는 자리의 위치인데 어머니 밧세바를 왕궁에 오른쪽 상석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을 할 정도로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예를 갖추며 모시는 솔로몬 왕에게 밧세바가 얘기합니다. 형 아도니아에게 청이 하나 있었는데 그 청 들어줬으면 좋겠다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당연히 들어줬어야 될 거 같은 데 어머니 밧세바의 요청을 듣지 않고 솔로몬 왕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친 어머니의 요청이었지만 옳은 게 아니었기에 이 문제에 있어서는 일언 지하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어머니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엄마 말을 듣지 않고 거절한 이유를 정확하게 이야기합니다. 형 아도니아가 다윗의 여인인 아비삭과 결혼하려는 것은 결국 그가 통큰 양보를 한 게 아니라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임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틈이 생기면 언제든지 내가 저 왕위에 오르겠다는 야욕을 그대로 드러낸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머니의 부탁이어도 나는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하며 그 사사로운 관계를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솔로몬은 이것을 빌미로 그 아도니아를 쳐서 죽이면서 이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아도니아는 죽을 목숨이었는데 하나님께서 배려하시고 솔로몬이 배려해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왕이 되려 하는 그 야욕을 포기하지 아니하며 그 왕권은 원래 내 것이었다는 착각을 포기하지 못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될 때 나이가 젊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밧세바가 했던 공헌이 있었기에 사실 엄마 밧세바 덕에 아도니아 대신 그 자리에 왕의 솔로몬이 올랐다고 밧세바는 스스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 솔로몬 왕은 당연히 내 말을 잘 들어야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엄마 말씀도 듣지 않을 때는 듣지 않은 것입니다. 왕으로서 내가 모든 권한이 있으니 모든 거 어머니 말씀 다 들어드리겠습니다…이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왕으로서 거절할 것은 거절하는 분명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는 중요하지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거절할 수 있는 결단이 솔로몬에게는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그렇게 존경하고 예를 갖추는 어머니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바른 결정이 아니라면 단호하게 거절하는 자가 왕입니다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야만 하나님이 허락하신이 왕권을 든든하게 세우며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고 치리하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바른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워 주신 왕권은 살이 사역이라든지 개인적인 감정에 흔들리면 안 되고 언제나 하나님이 뜻과 지혜를 가지고 바른 길을 가야 되는 무거운 길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는 자리, 특별히 지도자라는 영향력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사사로운 관계와 사사로운 감정들을 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그 착각, 모든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으려는 착각을 넘어, 아무리 가까운 관계여도 거절할 것은 거절하며 포기할 것은 포기하며 정리할 것은 정리하는 것이 지혜임을 잊지 마십시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일지라도, 어머니와의 사사로운 친함과 관계를 정리하는 한이 있을지라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거절하며 단호하게 바른 길을 가는 결정이 솔로몬의 지혜였음을 잊지 마십시오. 가까운 사람들과 사사로운 관계에 매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려워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하며 하나님께 지지받는 것이 제일 중요함을 분명히 믿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그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의 죽을 날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과 같이 우리 인생도 언젠가는 이 임박한 죽음 앞에 직면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타이밍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며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나님의 때에 내 인생을 조율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입니다. 어제 말씀 묵상 학교를 통해 누가복음을 배웠는데 누가복음의 큰 주제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예루살렘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이었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여정은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길, 천국 가기 마지막 일주일 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 길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면 언젠가 우리 인생길에는 죽음을 준비해야 할 마지막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천국 가기 일주일 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찾아옵니다. 마지막 남은 일주일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할까를 지금부터 준비하며 살아가는이 마지막 순간에 대한 대비가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 인생의 마지막에 편안하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천국으로 이사 가게 될 것이며 그러지 못하면 허둥대다가 그냥 끝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천년 만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때를 살고, 언젠가는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맞춰 내 삶을 조율하고 준비하는 삶이 바로 지혜롭고 복된 삶입니다. 성도의 특권은 바로 우리가 바라보고 나아가는 초점이 천국이며 그 천국 가기 전 마지막 일주일을 주님과 함께 마무리하며 그 모든 인생에 대한 마지막 대비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음을 임박하게 남기고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게 되는데 그의 유언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첫번째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입니다. 여기서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말은 예전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죽기 전에 한 유언과 거의 비슷한 말이에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는 이 권면을 아주 짧은 말로 힘써 대장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은 견뎌야 하는 무게와 압박이 있는 자리이고, 스스로 올라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우신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세우신 자리이기 때문에 왕의 힘과 능력은 솔로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그게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강하고 담대한 비결임을 유언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맡겨지고 위임된 자리가 왕이기에 사사로운 감정이나 사사로운 관계에 매어 좌지우지되면 안 되며 늘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라봐야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으로 가는 여정으로 인생길을 살아갈 때 내 삶에 힘과 능력은 주님에게서 옴을 분명히 믿음으로 힘써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며, 강하고 담대한 인생을 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내 인생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솔로몬에게 주셨던 그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언은 말씀에 순종하고 지키라…입니다. 왕으로서 그가 해야 될 일을 여러 가지로 조언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으로 넌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이것도 조심하고 저것도 하지 말고…그런식으로 유언하는 대신 다윗은 단 한가지 절대적 기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께 순종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겁니다. 그게 왕으로서 형통한 비결이며 복된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될 건 인생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순종의 길, 불순종의 길이 있을 때 바른 영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인생길을 간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을 지키며 순종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믿음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길은 말씀 앞에 순종의 길, 동행의 길, 공급의 길이며 그 길로 가는 것만이 왕이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형통한 비결, 복된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순종 가운데 나아가는 것, 이게 삶에 절대적인 원리라는 겁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들과 관계를 어떻게 맺고, 직장을 어떻게 잡고 돈을 어떻게 벌며…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여러 가지 원리들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길에 중요한 절대적인 삶의 원리가 있는데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순종하고 지켜 하나님의 길로 행하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두 가지의 축복이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고, 내 삶을 통해 말씀을 확실히 이루어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실천적인 유언으로 왕위를 올라가게 되면 네가 단절하고 정리해야 될 관계가 있으며 은혜를 잊지 말고 지속해야 할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잊지 말고 지속해야 할 은혜의 관계는 바로 길로앗 바르실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다윗이 가장 어려웠을 때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하며 다윗에게 버팀목이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었습니다. 인생에서 놓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은 누구냐면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지지하고 지켜주고 함께 해주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이 사람들을 놓치지 말고 중요하게 붙들어야 된다는 알고 솔로몬에게 은혜를 잊지 말고 지속해야 할 관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는 대신,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내가 평생 함께 해야 될 사람들이고 그들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단절하고 정리해야 할 관계가 있는데 바로 군대장관 요압과 시므이입니다. 그들은 왕인 너를 힘들게 하고 너에게 걸림돌이 될 기득권들이기에 그들과의 관계를 정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일생동안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굉장히 힘들게 했던 기득권 세력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있을 때도 이렇게 나를 힘들게 했던 요압이었는데 너가 왕이 되면 훨씬 더 힘들게 하고 흔들 것이라는 겁니다. 왕을 흔들고 왕을 어렵게 할 기득권 세력인 요압과 시므이와 반드시 관계를 정리해야만 네가 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말씀에 순종함으로 주시는 형통의 복에 대해 깊이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형통하다는 말은 내 삶의 문제가 하나도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장기간 기간을 봤을 때, 영적 넓은 시야로 봤을 때 반드시 형통하다는 것입니다. 단기간으로 봤을 때 쪼개 봤을 때는 반드시 삶의 어려움도 있을 수 있고 다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기에 장기간을 봤을 때, 넓은 영적 시야로 봤을 때 그 길은 반드시 형통한 길입니다. 내 삶의 형통함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그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길이 단기간에는 어려울지 모르나 장기간으로 봤을 때는 언제나 옳은 길이며 언제나 바른 길이며 언제나 나를 복되게 하고 살리는 길임을 분명히 믿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그 순종의 길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에 확실히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우리의 삶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이 내 삶을 통하여 확실히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죽을 때를 알고 준비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오는 마지막 일주일을 준비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이 절대적인 삶의 원리가 있습니다. 형통하고 복된 삶의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지키고 그 길로 행하는 순종의 길입니다. 또한 힘들고 어려울 때 지지해주고 붙들어 주고 함께 해주는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붙여 주신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삶이 나에게 형통한 길이 되며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내 삶에 확실히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일 천하라는 말은 3일 동안 권력을 잡고 세상을 다스리다가 무너지는 안타까운 상황을 묘사하는 말입니다. 한국 역사에도 보면 김옥균이라는 사람이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 그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 결국 다 도망가고 흩어지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3일 천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3일 천하도 되지 않는 1일 천하, 하루 동안 권력을 잡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 같다가 모래성과 같이 완전히 무너지고 파멸하고 흩어지는 안타까운 아도니아의 무너짐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압도당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지와 바탕이 없이 사람들의 지지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지하지 않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는 아도니아가 사람들의 지지만을 얻고 그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그 모든 권력을 갖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처럼 착각했지만 하루만에 완전히 무너지고 폭삭 망했습니다. 다윗왕의 명을 받고 제사장 사독과 나단이 솔로몬을 왕으로 기름부으며 세웠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그냥 제사장이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기름을 붓고 계신 것입니다. 솔로몬을 왕으로 거룩하고 구별되게 왕으로 세우며 기름 붓는 장면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성취되며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세워진 솔로몬을 향한 백성들의 반응이 나오게 되는데 땅이 갈라지듯이 온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지지를 근본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의 지지가 반찬과 같이 따라올 때 그 만세 소리는 땅이 갈라질듯한 큰 소리였습니다. 우연히 어쩌다가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이 아니고 다윗의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통하여 솔로몬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통해 기름부으심으로 왕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찬지로 내 인생이 복된 인생이 되는 비결은 나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이루어지며 그것이 현실화 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확신하게 되냐면 아 하나님이 나를 지지하고 계시는구나… 아 예수님이 나를 정말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흔들리지 않는 반석 가운데 서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도니아와 함께 쿠데타 모임을 하고 1일 천하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지와 함께 백성들의 지지가 합쳐진 땅이 갈라질듯한 솔로몬 만세 소리를 다 들은 겁니다. 그래서 이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밥 먹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소리가 솔로몬이 왕으로 세워진 소리이고 백성들의 만세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자 어떻게 됩니까? 아도니아를 지지한다고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라 즉각적으로 썰물과 같이 빠져나갑니다.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살려고 도망갔습니다. 마치 마귀과 하나님의 빛 가운데 놀라서 도망가듯, 사람들의 지지만을 가지고 모여있든 아도니아의 모임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다 놀라 일어나 각기 놀라 자기 살 다 도망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지지함이 없이 사람들의 지지만을 가지고 세워진 모래성이 하루만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무너진 것입니다. 아도니아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그렇게 환호성을 보냈던 사람들이, 평생 나와 함께 하며 나에게 목숨 걸 것 같았던 사람들이 이렇게 썰물과 같이 빠져 나가며 모래와 같이 다 흝어지며 살길 찾아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섭섭할 새도 없이 아도니야 본인도 살 깃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의 뿔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율법을 보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도 제단에 가면 그 뿔을 잡으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은혜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반역자인 아도니야는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솔로몬으로부터 얻게 되면서 이 모든 일일 천하가 허망하게 끝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한 순간 멸망과 추락의 자리로 빠지는 아도니아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없는 삶의 특징입니다. 압살롬이란 이름은 샬롬과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이름값을 하지 못하였고, 하나님이 주신 이름과 정반대의 폭력과 쿠데타의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윗이 스스로 압살롬을 선호한 것도 있었고 아들을 잘 치리하지 못한 아버지의 문제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압살롬 자신이 이름대로 살지 못한 그의 반역과 폭력의 삶이 원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 아도니아의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주”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의 주님, 왕이라는 좋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마찬가지로 아도니아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자기 이름과 정반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인게 아니라 내 스스로 내 삶의 주인인 것처럼 내가 스스로 높이어 내 자신을 위해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 자리를 스스로 올라가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사람들에게 환심을 얻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자기를 지지하고 박수 치면 왕이 되는 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이름은 여호와는 나의 주였지만 실상은 내가 주인이었고 스스로 하나님이 맡기시지 않고 세우지 않는 자리를 사람들의 지지함만 가지고 올라가 이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아도니아와 같이 이름값 하지 못하는 인생, 이름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인생이 나의 삶이 될 수 있음을 말씀을 통해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도 모두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주라고 고백하는 아도니아를 다 별명으로 가지고 있는 자들이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도니와 같이 혹시 이름값 못하며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의 주인인데 자꾸 스스로 내가 왕이 되려 하고 스스로 높이고 사람들을 붙들고 사람들의 지지함만 있으면 된다고 착각하며 사람들 말에 민감하고 사람들 마음에 흔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단 마귀는 성도에게 계속 네가 스스로 왕이 되라고 스스로 높아지라고 계속 우리를 미혹합니다. 사람들이 지지하고 박수치면 다 된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럴 때마다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빛 가운데 거할 때 사단은 놀라서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지지가 없는 모임은 모래성과 같이 하루 아침에, 한 번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며 하나님의 지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착각하며 무너지는 이 일일 천하의 어리석은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되지 않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내 삶의 왕임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하나님 마음을 얻고 하나님의 지지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붙들고 내 삶의 진정한 주님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내 삶을 통해 그 약속이 실현되는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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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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