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 하는 사울왕, 다윗을 살리려 하는 요나단 사이에 서 있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보면 주변에 사울왕과 같이 이유 없이 핍박하고 오해하며 말도 안되는 어려운 일을 당하는 때가 있지만 동시에 그 어려움과 핍박 가운데 요나단과 같이 이렇게 우리를 피하게 하시며 도와 주시는 사람도 동시에 붙여 주시는 신비를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랑한다는 말, 요나단이 다윗을 향한 그 사랑이 얼마나 무겁고 묵직한 일이며 얼마나 그것이 큰 일인가에 대해서 함께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을 두번이나 강조하는데 지금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호하고 지켜 주기 위해 자기 집안과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자기 집안을 등돌리고 있는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요나단에게 보게 하신 영적 큰 그림과 시각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이 어디로 향해 가는지를 이미 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버지 사울에게는 더 이상은 없음을, 하나님께선 이제 다음 왕으로 다윗을 세우셨음을 이미 요나단은 다 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쉽고 단순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거는 사랑이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사랑을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같이 그를 사랑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내 생명 만큼이나 다윗을 사랑으로 지키고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랑한다…는 것은 요나단에게 있어서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단의 사랑은 다윗이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왕이 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지금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자신을 던지는 사랑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요나단이 아버지에 이에 그 왕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큰 경륜 아래 순종하며 자신이 아니 다윗을 세우는데 올인하는 겁니다. 이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사랑은 계속해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깨닫게 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랑을 받은 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가를 마음 속 깊이 담게 합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한 것 같이 우리를 사랑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한다는 그 사랑을 지키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던졌고 피를 흘리시고 몸이 찢기시면서 그 사랑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죽으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요나단의 너와 나 사이에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다는 고백을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들 가운데 하나님이 가운데 계시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주님과 동행 한다는 것은 내가 만나는 사람 사이에 하나님이 선명히 계시는 겁니다. 내가 만난 환경 앞에, 내가 만나는 축복 앞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내가 만나는 어려움 사이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언젠가 직면하게 대해 죽음 앞에 하나님이 계시는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으며 나의 생명을 사랑함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마음 다해 고백하며 나아오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가벼운 사랑이 아니라 내 생명을 사랑함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묵직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본질은 뭐냐면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이 예수님 이심을 고백하며, 내 인생을 통해 예수님이 높아지고 예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세워지는데 나를 던지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있어서 나를 이루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든든히 세우는 삶을 넘어, 이 시간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과 같이 예수님은 흥하여 지고 나는 쇠하여 지는 삶을 기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 있어서 내가 이 시각에 세워지고 흥하게 하는 것이 정말 예수님인지, 아니면 내 자신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거울에 비추어보기 원하시는 겁니다. 내 인생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 지는데 내가 애를 쓰는 삶을 살아야지, 예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예수님을 통해 나를 세우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든든히 세우는 데 애쓰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랑이 진심이고 진짜인지 솔직하게 물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부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내 몸이 건강할 수도 있고 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상대적이고,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하여 오직 예수님이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높아지고 세워진다면 나의 삶은 주님 안에서 귀하고 복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생명 던진 십자가 사랑을 정말 믿는다면 내가 그 십자가 사랑의 수혜자임을 분명히 믿는다면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의 응답하며 나의 생명을 사랑한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생명같이 사랑한 십자가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로잡는 삶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고백하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그 고백이 가벼운 일이 아니고 묵직한 일이며 나의 생명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고백이 담기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말씀에 보게 되면 가끔씩 생선 가시와 같이 소화하기 어려운 말씀, 납득이 되지 않고 읽으면서도 마음에 부딪치고 충돌하는 말씀들이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너희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을 위해 때로는 어머니와 아버지와도 등을 돌려야 하는가…고민되는 말씀인데, 오늘 말씀에 요나단의 모습을 통해 예수님의 이 가시와 같은 말씀의 구체적 예로 바라보게 됩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왕을 향한 그 태도와 마음이 예수님의 말씀과 정확하게 잇대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를 물론 사랑하고 공경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아버지와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깊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요나단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 사울왕과 하나님의 나라 가치가 부딪쳤을 때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택하는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 말씀의 요나단입니다.
지금 다윗은 왕이 지명 수배 내려서 도망자가 되어 숨어 있으니, 죽음과 자신이 종이 한 장이 차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붙잡혀 죽을 운명이라며 두려움이 찾아온 자가 다윗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요나단은 하나님이 주시는 눈을 가지고 다윗을 격려하고 세워 줍니다. 내 아버지 사울이 너를 그렇게 죽이려 해도 너는 결코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너가 죽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보호하시고, 그럴 때마다 이 요나단이 너를 목숨 걸고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여기서 다윗을 위해 목숨걸고 돕는다는 것은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아버지 사울을 배신하면서 도와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과 경륜의 수레바퀴 속에서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면서까지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겸손함, 영적으로 민감하게 듣는 자, 영적인 눈이 열린 자의 모습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으로 민감하여 영의 눈이 열린 요나단이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 사울과 자신의 온 집안에 대해 보고 있는 굉장히 아픈 3가지 영적 현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아버지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함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마음 아픈 영적 현실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셨던 것 같이…즉 지금은 내 부친 사울왕과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음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셨음을 정확하게 안 것입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의 함께하심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 아버지 사울왕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죠. 두번째, 하나님의 영광이 현재는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영적 현실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왕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자가 이제는 사울왕이 아니라 다윗임을 이미 요나단은 본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누구라고요? 아버지 사울이 아니라 바로 너, 다윗이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얘기고 또 마음 아픈 이야기겠습니까? 가만 있으면 저 자리에 올라 갈 사람이 바로 요나단 인데, 아버지 뒤를 잇는 내 자리인데, 하나님 앞에서 왕의 자리를 포기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백하는 겁니다. 다음에 왕이 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 다윗이라고…이게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 모릅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친히 너와 함께 하시고 너의 원수를 칠 것이다 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굉장히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 하는 말이자 행동인 겁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호하시며 치실 다윗의 대적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집안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을 여호와께서 이렇게 치실 거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사울왕과 이 집안은 완전히 무너지고 그 자리에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함께 하며 새로운 것을 시작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죠. 이 말을 요나단의 입에서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고 어떻게 보면 너무나 위험한 일입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가족 이어도 반역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목숨 내놓고 하는 얘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영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보게 하시는 가슴 아픈 영적 현실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집안을 하나님께서 치실 때가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무슨 부탁을 하는 겁니까? 그래서 겉으로 와서 세자 저하, 다음 왕 후보인 요나단이 다윗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다윗의 대적들을 하나님이 치실 텐데 그때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내 가족 좀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윗이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하기도 어려워 곧 죽을 거 같은 풍전 등화의 상황인데, 영적으로 민감한 요나단은 이미 풍전 등화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아버지 사울왕과 온 집안이 다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우리가 모두 끝나지 않게 나의 후손을 지켜 달라고 삶이 보존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죠. 나중에 다윗은 요나단과 한 이 언약을 목숨 걸고 지킵니다. 그래서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죽이지 않았고, 남은 가족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주는 다윗 왕이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지 말고 요나단과 같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눈을 갖기를 소망하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가족은 소중하고 귀하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 안에서 우리 가족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소망 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실체로 믿고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지명수배라는 말은 피의자를 검거하기 위해 전국 수사 기관에 범인을 추적 체포 인도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A 급 지명 수배자가 있는데, 아무런 이유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검거에서 체포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무섭고 위험하게 생각하는 사람 피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A급 지명 수배자입니다. 지금 다윗은 사울왕에 의해 왕이 추격하는 자가 되었고 전국에A급 지명수배가 내려진 자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면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애매하게 억울하게 A급 지명 수배자가 되어서 하루 아침에 왕의 사위에서 도망자 신세가 된 게 다윗입니다. 지금까지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는 계획을 아주 조직적으로 실행했었습니다. 먼저 가까이에서 창으로 던져 죽이려고 하는 살인 미수를 두 번이나 행했습니다. 다윗의 집에 까지 와서 침상 채 들고 가 죽이려고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배웠지만 사무엘에게 도망가 있는데 그 고향인 라마까지 군대를 세 번이나 보내고 나중에는 본인이 스스로 찾아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막으셔서 그들의 손과 발, 입을 다 봉하셨습니다. 이 정도 됬으면 사울왕이 정신 차리고, 내가 아무리 죽이려 해도 죽일 수 없구나…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막으시는구나….맞아 나에게 원수는 다윗이 아니라 블레셋과 아말렉이었지.. 정신 차리고 돌아왔으면 사울왕에게 소망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울왕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유 없이 애매하게, 억울하게 A급 전국 지명수배자가 되어 도망자가 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아가 너무 괴로워서 마음을 토로하고 쏟아내는 장면이 오늘 말씀입니다. 내 죄악이 무엇이며 왜 너희 아버지가 내 생명을 찾는지, 나는 왜 지금 죽을 위험에 처해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소연 합니다. 요나단에게 마음을 토로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삶에 이유 없이 애매하게 찾아오는 고난, 이해할 수 없는 시련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다윗과 마찬가지로 이 깨지고 아픈 세상을 사노라면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 이유 없이 당하는 오해 같은 것들이 우리 삶에 찾아올 때 답답하고 힘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다윗의 토로함이 우리의 마음이고 우리의 절망이자 답답함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나단의 입에서 다윗을 향한 위로하는 모습입니다. 이 요나단의 위로의 말이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자, 왕의 아들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왕이 될 사람인데 그 왕의 아들 됨을 스스로 버리고 낮은 자가 되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함께하는 자가 됩니다. 물론 요나단이 겸손해서도 있었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민감하게 바라보면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뜻을 이루는 자로 인생을 던진 자가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하는 이 위로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행해 주시고 지켜 주시고 건져 주시는 소망의 메세지임을 거울과 같이 간접적으로 보게 됩니다. 요나단의 입술에서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 나오는 두 가지 말을 마음에 새기며 이 시간 주님이 주시는 음성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위로의 말은 결단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다윗 생각과 느낌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것 같고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로 있는 것 같은 목숨이 위태한 상황인데, 결단코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소망의 메시지를 주는 겁니다. 나는 거의 죽음이 문턱에 왔고 이러다가 꼼짝 없이 잡혀 죽임 당하는게 거의 확실하다고 다윗 스스로 믿고 있는데 그런 다윗을 깨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선명하게 다윗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을 거 같고, 사망의 내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느끼는 죽음의 위협 가운데 “결단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소망의 메시지, 예수님의 위로의 말씀을 받기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자 기르시는 양이기에 목자가 목숨을 걸고 지키고 보호하는 자임을 선명히 믿고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사는 것입니다. 내 느낌에는 죽음이 문턱에 있을지라도 결단코 죽지 않는다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을 신뢰하고 붙드는 은혜가 부어지기 원합니다. 두 번째 위로의 말은 “내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절망 가운데 답답함을 토설하는 다윗에게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동일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자는 구하고 두드리고 찾으면 그것을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간 그 요나단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는 위로의 말은 내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신음할지라도, 그 가운데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시기 원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 때 길이 열리고 새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그거를 이루리라 약속하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번 일어설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다윗이 그 입술에서 “ 은혜받은 줄을 안다…”는 고백이 터져 나옵니다. 이유 없이 고난 당하고 억울하게 오해받고 도망자가 된 다윗, 그 메마른 땅에서 “나는 은혜받은 자”라는 고백, 주님의 은혜받음이 다시 한번 현재화 되며 고백으로 흘러 나온 것입니다. 사막과 같은 마음에 은혜의 샘이 터져 흐르게 된 것입니다. 이유 없이 고난 당하고 애매한 오해를 당하며 힘들지만 왕으로부터 추격 받는 지명수배의 인생이지만, 결국 나의 인생은 하나님께 은혜 받음을 압니다…고백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끝까지 은혜를 구하는 자로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다윗의 인생이 흘러 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우리는 이유 없이 까닭 없이 고난과 시련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게 없는 것 같은데 도망자가 되고 나를 추격하는 자가 있으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나를 그렇게 죽이고 힘들게 하는 사람, 나를 추격하는 자들 가운데 나를 피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분명히 믿고 바라보십시오. 죽을 것 같은 상황속에서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시며 나를 도와 주시고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나에게 위로의 말씀으로 일어나게 하시는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명으로 내 마음에 취하십시오. 사막과 같은 삶, 그 어려움 가운데 내가 은혜 받은 자로 주님의 피하심과 도우심을 붙들고 그 어려움을 통과하며 이기는 기적을 현재형으로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정상적 판단이 마비되어 자신의 주적을 잊어버린 채 모든 에너지를 다윗을 향하여 쏟고 있는 사울왕의 위협에서 도망나와 다윗은 사무엘에게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인데, 다윗이 절체 절명의 위기 가운데 제일 먼저 생각나 도망간 곳이 사무엘이 머물고 있는 라마였다는 것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보통 인생이 어려울 때 제일 먼저 전화하거나 제일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자 가까운 사람입니다. 갑자기 인생에 풍랑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몰려올 때 그렇게 제일 먼저 떠오르고 전화하고 싶은 사람에게 도망가고 피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그 위기 가운데 제일 먼저 생각나고 달려간 곳이 바로 하나님 사람이자 선지자인 사무엘이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무엘이라는 사람에게 갔다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에게 피한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사무엘에게로 도망가는 그 모습을 떠올려 보면 그 도망가는 과정 내내 다윗의 입에서는 내가 하나님에게로 피하고 도망간다는 고백을 반복했을 것입니다.
시편을 보게 되면 다윗은 하나님에게로 피했다는 고백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피했다는 그 시편의 고백은 그의 삶에서 나온 어려움을 통과한 삶의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에게 피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에게 피하는 열망을 가지고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나를 끊임없이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넘어 뜨리고 죽이려는 사람이 있기에,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지고 피하며 도망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위기와 어려움에 딱 직면 했을 때 나는 과연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에게 달려가고 피하고 있는지 주님께서 물어 보고 계십니다. 결국 우리에게 영성 이라는 것,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가 평소에 잘 지낼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비바람이 치고 풍랑이 찾아오고 어려움이 찾아올 때 내가 누구를 향하여 달려가는가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윗과 같이 어려움과 풍랑 가운데 하나님이 제일 먼저 생각나고 하나님에게 달려가고 피할 수 있다면 믿음의 사람이고 영성이 있는 성도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이렇게 지금 다윗이 사무엘에게 도망가고 피했다는 소식이 사울왕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분노조절 장애에 악한 영에 사로 잡힌 사울은 또 다른 일을 계획하는데,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에까지 사람들을 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다윗을 죽인다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하며 전국 지명 수재명을 내려 군대를 보내 당장 잡아 왕궁으로 끌고 오라 어명을 내린 겁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불안 했을까요. 온몸이 떨리며 불안함에 그 마음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실 다윗만이 아니라 사무엘 또한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왔을 지도 모릅니다. 다윗에게 몰래 기름을 부었다는 것을 알게 되기만 해도 자신도 함께 잡혀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만큼 지금 사울왕의 군대가 오는 것을 사무엘은 큰 위협으로 느꼈을 겁니다. 다윗이 위협으로 느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겁니다. 마치 야곱이 에서를 기다리는 두려움으로 얍복강가에서 밤새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했던 모습과 같이 사울왕이 오고 있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어명을 받고 다윗을 잡으러 온 자들이 사무엘의 고향 라마에서 하나님의 신에게 감동하여 예언을 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이 무슨 예언을 했고, 어떻게 예언을 했는지에 관심이 많습니다. 근데 중요한 것은 어명을 받고 잡으러 간 사람들이 다윗을 잡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가지고 온 목적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예언을 하게 된 겁니다. 그렇게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니까 사울왕은 다윗을 잡아 오라고 두 번째, 세번째 군대도 보냅니다. 그런데 두번째 세번째 군대도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채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강권으로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 길을 강권적으로 개입하셔서 막으셨다는 것입니다. 세번째 군대를 보냈는데도 다윗을 잡아 오지 못하니까 이번에는 자신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다윗이 있는 곳까지 쳐들어 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에게 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습니다. 다윗을 잡으러 혈안이 되어 왔다가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막으셔서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권세 앞에 수치를 당하면서 벌거 벗은 채 누워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을 잡기 위해 온 사울의 군대가 세번이나, 그리고 사울왕 자신이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고 그 길을 개입하셔서 막으시는 이 모습은 마치 무엇과 비슷한 가 하면 다니엘이 사자굴에 게 던졌을 때 그 사자 굴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막으심과 비슷합니다. 다니엘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에서 다리오 왕에게 하나님이 천사들을 보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음으로” 사자들이 나를 해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사자굴에 던져졌으면 당연히 죽을 수 밖에 없고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사자들의 입을 봉하사 사자들이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하신 겁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을 해하러 온 군대가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그들의 손과 발이 결박되고 입이 봉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언하게 하심으로써 다윗을 털 끝 하나 상하지 않게 주님이 보호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피한 다윗을 이렇게 놀랍게 보호 하신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와 풍랑 속에 던져질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이 생각나고, 하나님에게 달려가 피하는 그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기 원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피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하나님에게 달려 갈 때 하나님께서 내 원수의 손과 발을 묶고 그 입을 봉하여 주시는 기적의 보호하심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평소에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열망하며 내가 주님을 향하여 달려가며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님께 피하는 이 다윗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분노조절 장애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계속 받아온 화가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우발적이거나 작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며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게 바로 분노조절 장애입니다. 말 한마디로 서로 칼부림이 나기도 하고, 본인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아주 사소한 사건을 직면할 때 우발적으로 폭발하여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게 대표적 예입니다. 이런 분노 조절 장애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람 사회를 충동 사회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울왕의 모습은 전형적인 분노조절 장애의 모습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다윗을 평생 원수로 삼았던 그 마음에 시기, 질투, 분노가 악한 영의 미혹을 틈타게 했고, 결국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살기에 자기 스스로 그것을 통제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딸 미갈은 아버지가 지금 제 정신이 아니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자기 남편인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혼신을 다합니다. 다윗을 잡으러 온 전령들을 보면서 다윗을 창문을 내려 몰래 도망가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한 행동이 뭐냐면 바로 위장 전술이었습니다. 다윗이 도망가는 시간을 벌기 위해 미갈은 두가지의 위장을 합니다. 첫 번째는 다윗이 집에 있는 것처럼 침대에 염소 털을 옆은 걸 머리에 씌우고 의복으로 입혀 그가 지금 누워 있는 점 것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했습니다. 두 번째, 다윗이 아파 병들었다고 둘러대는 것입니다. 이런 미갈의 모습을 통해서 미갈은 지금 다윗과 정략 결혼한 게 아니라 정말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 사울은 사실 미갈을 미끼로 이용했습니다. 다윗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죽이기 위해서 미끼로 결혼이라는 것을 썼는데 자기의 계획과 달리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 손에 죽지 않고 돌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결혼시켰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계획과는 달리 미갈과 다윗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심지어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서도 목숨 걸고 남편을 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갈이 그렇게 다윗이 병 들었다고 얘기하면 며칠 후에 다시 올 수도 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사울왕은 분노조절 장애의 모습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다윗이 병들어 누워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지금 당장 죽여야 한다는 분노에 사로잡혀 침대 채 내 앞으로 데려 오라고 어명을 내립니다. 침상 채 내 앞에 들고 오면 내가 지금 죽여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판단을 상실해 버린 분노 조절 장애인 사울왕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게 됩니다. 아주 사소한 거에 지금 분노 버튼이 눌러진 것이죠. 거의 이성을 상실하고 미친 사람과 같이 되 버린 사울왕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을 왕으로 두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이런 왕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그 아들 요나단과 미갈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어찌 보면 요나단과 미갈이 끊임없이 다윗을 보호하려고 하는 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개입과 손길이 있었지만, 동시에 지금 아버지가 비정상이라는 것, 지금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그 자녀들은 다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게 됩니다. 그렇게 침상 채 들고 오라는 그 말도 안되는 어명을 받은 신하들이 자기들에겐 선택권이 없으니까 침상 채 다윗을 메고 가겠다고 침대 방에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다윗은 이미 도망가고 그게 다 위장이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사울왕의 그 모든 분노 다윗을 향한 분노가 누구에게 향하겠습니까? 그의 딸인 미갈에게 다 향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분노하며 하는 말을 주목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이처럼 나를 속여…” 딸이 이렇게 자기를 속이고 배신했다는 것이죠. 지금 내 편 되지 않고 다윗 편들었다는 겁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자,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의 특징이 모든 사람들을 니편 내 편으로 나눈다는 겁니다. 지금 사울이 그렇게 화가 난 건 자기 딸 조차도 자기 편이 아님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더 중요한 말이 나오는데 “ 내 대적을 놓아 피하게 했느냐..” 다윗을 내 대적으로 표현한 겁니다. 다윗은 자신의 사위이고,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신인데, 눈이 가리워져 다윗을 내 대적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사울왕의 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고 그의 딸인 미갈은 다윗을 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구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끝까지 살리시려고 애쓰시는 겁니다. 분노에 휩싸여 통제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판단이 흐려지면서 거의 미친 사람과 같이 다윗을 죽이는 데 혈안이 된 사울왕의 이 비참한 모습, 그 인생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계속 구렁텅이로 저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안타까운 모습을 마음에 반면교사로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있어서 분노 조절 장애가 언제나 찾아 올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사소한 것으로 분노는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음을 잊지 않고 주님 앞에 내 무거운 감정의 짐을 내려놓고 풀어놓기 원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건지시고 살리려고 애쓰시고, 내 주변 나를 살려고 요나단과 미같같은 사람들을 보내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그렇게 보호하시고 살리시려고 그렇게 마음을 쓰시고 애쓰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분노나 미움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내 삶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19장 앞부분에서 사울왕이 그의 아들 요나단의 얘기를 듣고 정신을 차리며 그의 입으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하나님 앞에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 하는게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 시작은 다윗이 그렇게 돌아와서 주적인 블레셋과 또 싸워 큰 승리를 이루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인 주적 블레셋과 싸워 놀라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주적인 블랙과 싸워 놀라운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면 왕으로서 당연히 그 승전 장군과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해야 합니다. 사실 사울왕이 나가서 싸워야 되는 전쟁 인데, 사울왕은 자신이 싸워야 할 주적이 누구인지를 망각한 채 살아가기에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전혀 기뻐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 원수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신 영적 전쟁의 승리,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데도 왕으로서 하나도 기쁘지 않은 겁니다.
하나도 기뻐하지 않는 것을 넘어 사울왕은 하나님 앞에 한 맹세를 스스로 깨 버리는 살인미수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러 있지 못하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힌 사울왕은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기뻐하지 않고, 손에 살상 무기인 단창을 들고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수금을 치며 찬양하는 다윗을, 자신을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기 위해 연주하는 사울을 단창으로 찍어 죽이려고 던졌습니다. 그의 단창은 얼마나 세게 던졌으면 지금 벽에 박혀 버렸습니다. 그 살인 미수는 사울왕의 마음속에 분노와 미움이 사단에게 틈을 주면서 악령이 사울에게 접한 결과라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죽이려는 마음은 악한 영에 사로잡힌 분노와 미움이 움직이게 한 힘인 것입니다. 사울왕의 모든 관심은 이 다윗을 죽이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도 지킬 수 없는 사울 왕, 그렇게 돌변하여 무너지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울왕의 영적 하향곡선을 다시 한번 보게 됩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중의 어려움에 직면한 것입니다. 내부의 적이 있고 외부의 적이 있으며, 내부에 어려움이 있고 외부의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밖에서는 지금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인 주적 블레셋과 싸워 이겨야 하고, 안에서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녀야 되는 어려움에 직면한 것입니다. 밖에서는 적들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안에서는 왕이 자기의 목숨을 노리는 그런 위기 상황에 직면한 게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어려움은 다윗에게만 있었던 어려움이 아니라 초대교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외부에서는 로마의 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하며 성도들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동시에 내부에서는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떠나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로 가는 것 때문에, 유대 공동체에서 자신들을 핍박하며 목숨을 노리는 이중고의 어려움에 직면했었습니다. 사명을 붙들고 살아감에도 이렇게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바로 다윗이었고, 초대교회 성도들이었으며,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중고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떠나지 아니 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단창에서, 그 살인 미수에서 다윗을 보호하시고 건져 주셨습니다. 사울의 그 단창을 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며, 벽에 박힌 사울의 창은 악한 영에 사로잡히 사울왕의 처참한 영적 현주소인 것입니다. 아무리 죽이려 해도, 하나님과의 맹세를 깨면서도 죽이려 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해 절대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창이 벽에 박혔을 때, 자신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다윗을 바라보며 정신이 확 돌아와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맹세해 있는데 그 맹세를 또 깨 버렸네…회개하며 돌이켰으면 소망이 있는데 사울왕은 회개와 돌이킴 대신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렇게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니까 이제는 대놓고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죽이라는 어명을 받고 전령 들이 다윗의 집에 간 겁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헤어날 수 없는 어둠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울왕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이런 사울왕의 의도를 이미 간파한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인 미갈이었습니다. 미갈은 아버지 사울이 지금 정신이 없고 악한 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남편 다윗을 죽이려는 데 혈안이 돼 있다는 것을 이미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밤에 지금도 피하지 않으면 당신은 내일 죽을 목숨 이라는 것을 알고 몰래 피신 시키는 겁니다. 창에서 달아 내어서 다윗을 도피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사울왕의 딸이자 아내인 미갈을 통해 다윗을 사울왕의 손에서 보호해 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다윗을 죽이지 않는다고 맹세 있지만 그 맹세를 지킬 힘이 사울에게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마음에는 맹세 했고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고 지킬 것 같았지만 사울의 마음은 이미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그 맹세를 지킬 힘이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 결단과 의지를 의지하면서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붙들고 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한 약속과 맹세를 지킬 수 있는 힘이 나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나의 마음이나 내가 하는 결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가야 합니다. 사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맹세했어도 그 맹세를 지킬 힘이 나에게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고 내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만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에게 내부의 어려움과 외부의 어려움이 계속 찾아왔습니다. 끊임 없이 힘들게 하고 죽이려는 사람으로 인해 곤경에 빠집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살리려 하시고 도우심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 은혜 가운데 거하며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붙들고 주님 안에 피하며 주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의 악한 영에 사로잡혀 점점 어둠을 향하여 나아가는 안타까운 모습과 영적으로 민감한 그 아들 요나단이 대비되어 보여집니다. 사울왕은 영적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가 싸워야 될 주적인 블레셋을 망각하고, 블레셋과 싸워 이기기 위해 왕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잃어버린 채, 자신의 시기,질투, 미움에 사로잡혀 같은 편이자 전쟁의 일등 공신인 다윗, 악한 영에 시달릴 때 수금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다윗을 주적으로 삼으며 평생 원수로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처음에는 속 마음을 숨긴 채 비밀 스럽게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그게 안되니까 블레셋의 전장에서 죽게 하려는 악한 계획을 세웠고, 자기 딸도 이용하고, 신하들도 이용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이용하여 죽이려 했는데 다 실패합니다. 그것도 안되니까 이제는 대놓고 공개적으로 요나단과 신하들 앞에서 다윗을 죽이라고 명령 합니다. 모든 신하와 요나단에게 다윗은 내 원수니까 지명 수배자로 잡아와서 죽이라고 왕의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이 모든 것들이 도를 지나쳐 악한 마음에 사로잡혀 통제 불능의 상태인 사울왕의 비참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줍니다.
이런 아버지가 너무나 안타깝고 너무나 부끄러운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아들 요나단 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왕의 자리에 있지만 하나님의 영이 떠나 악한 영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죽일 이유가 하나도 없는 다윗을 평생 원수로 삼으로 분노 조절 장애 환자와 같이 무너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아버지가 죽이려는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고, 동시에 아버지를 죄악에서 돌아서게 하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먼저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결심이 섰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다윗에게 이 소식을 알려 줍니다. “내 부친 사울이 너를 죽이기로 꾀했다..” 고 말하면서, 지금 다윗을 죽이려는 분이 누구냐 하면 부끄럽게도 내 아버지야…라고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이유도 없이 너를 죽이려 하는 분이 바로 왕이신 내 아버지야….라고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겁니다. 사울왕의 딸 미갈이 분노에 사로잡혀 있는 아버지의 손에서 다윗을 구하기 위해 위장과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살려 준 것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이지 않은 아버지의 손에서 다윗을 구하기 위해 요나단은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다윗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자가 요나단 이었습니다. 동시에 요나단은 그 부끄럽고 안타까운 아버지 사울왕에게 목숨을 걸고 소위 말하면 직언을 하는 겁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기 원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에….아버지에게 목숨 걸고 요나단이 드리는 직언의 핵심은 다윗은 아버지 사울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전쟁에 나가서 우리의 주적 블레셋을 싸워 이긴 선한 장수이고, 다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을 죽이려는 것은 무고한 피를 흘려 범죄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악한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울왕은 다윗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 하에 점점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짓는 범죄에 대해서 둔감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아버지 사울 왕을 깨우고 죄의 길에서 건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요나단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사울 왕은 아들 요나단의 목숨을 거는 직언을 통하여 정신이 확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맹세를 했는가 절대 다윗이 죽임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선언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사울왕이 맹세를 하는 겁니다. 1절에서 분명히 모든 신하에게 다윗을 죽이라고 어명을 내렸는데 이제는 다윗이 절대 죽임을 당하지 않을 거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요나단과 같은 마음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다윗과 같은 사람에게 죽지 않기 위해 사울의 손에서 구하려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사랑하는 아버지 사울과 같은 사람이 죄에 빠져 멸망으로 달려 갈 때 그 길에서 건져내려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을 깨우 듯 온 마음을 다하여 진짜 복음을 말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민감했던 요나단이 했던 놀라운 일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있고 가족 중에는 사울왕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사랑하기에 그가 죽지 않게 살릴려고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할 때가 있고, 너무 사랑하기에 죄와 사망에 빠져 있는 그를 건지려고 우리 인생을 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요나단과 같은 삶으로 부름받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주변 사람들을 건지고 주변 사람들을 깨워 주시며 본질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붙들려 살지 아니하면 이렇게 마음에 악한 영이 자꾸 틈타게 되며 미움과 시기와 분노를 타고 들어오는 인생 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을 바라보고 예수님만 믿고 붙드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사울왕이 자기 스스로 다윗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블레셋을 이용해서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는 계략을 세운 것을 배웠습니다. 그 악한 음모를 위해 자기의 딸을 이용했고, 신하들을 이용했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면서 하나님을 이용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겸손하게 거절하는 다윗을 향하여 사울왕은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단 한 가지만 원한다고 다윗을 팔을 잡아 당깁니다. 그 한 가지가 뭐냐면 블레셋 사람들 100명의 용사를 죽여서 그 성기의 표피를 가져오는 것, 그걸 유일한 왕의 사위 되는 조건으로 삼겠다는 겁니다. 자기 딸과 결혼 하려는 미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백 개만 가져오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왕의 사위가 되게 해줄게… 라고 딱 미끼를 던지는 것입니다. 그 속마음은 다윗이 블레셋과 나가 목숨 걸고 싸우도록 만드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는 악한 생각입니다.
다윗이 이 생각을 좋게 여기고 블레셋과 나가서 싸우려고 합니다. 다윗을 전쟁에 내몰아서 실제로는 죽이려 하는 이 사울의 악한 생각을 다윗을 몸소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 입장이 바뀌어 그 자신이 똑같이 하게 되는 악한 생각이자 영적 실수가 됩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전쟁터에 있는 우리아에게 집에 들어가라고 몇 번 권고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도 충신이어서 전쟁 중에 집 안에 들어가기를 거절하고 문 밖에서 아내와 동침하지 않고 있는 그 우리야를 결국 죽이려고 악한 음모를 세우게 됩니다. 전쟁을 보내서 우리아를 맨 앞에 세우는 어명을 보내 그 전쟁터에서 죽게 만드는 겁니다. 그 방식이 오늘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 했던 음모와 똑 같은 것입니다. 사울왕에게 혹독하게 당했던 다윗이 나중에 똑같은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악한 생각이고 이 악한 생각은 악한 영이 던져주는 미끼를 덥석 무는 영적으로 악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또한 정신 바짝 차리지 아니하면 이런 악한 생각에 사로잡혀 악한 영이 던져 주는 미끼를 확 붙들고 무너질 수 있다 경고하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다윗은 그 큰 계획은 알지 못한 채 사울왕의 악한 음모에 빠져 죽는 사지의 현장으로 가게 됩니다. 일대 백으로 싸우는 것은 거의 죽는 싸움이라고 생각한 사울왕, 어떻게 한 사람이 100명 을 다 죽일 수 있을까…다윗은 분명히 죽겠구나…기대했던 사울왕…다윗을 죽이려는 그 악한 마음을 하나님은 놀라운 반전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사울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다. 100명 만 죽여서 100명의 양피를 가져오라 했는데 다윗은 2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와 사울 왕에게 바친 겁니다. 그러고도 다윗은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겁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한 용감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울왕은 소름이 돋았을 것입니다. 사울왕이 창을 들어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는데도 다윗은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고 딸을 이용해서 미끼로 1대 100으로 싸우는 전쟁터에 내보냈는데도 죽지 않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지만 그 이용하려는 그 딸을 결국 다윗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그 딸을 미끼로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데 다윗은 죽지 않았고 결국 자신의 계획과 달리 다윗은 사울의 정식 사위가 된 것입니다. 그 모든 본질은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기 때문에 사울왕은 더더욱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왕은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고 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자기와 함께하지 않는 하나님의 빈자리를 발견한 사울,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으면 다시 살 수 있는데 사울은 더 어둠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빛을 거절하고 더 갚은 어둠을 붙드는 영적 결과가 나타나는데 바로 다윗을 평생의 대적으로 삼은 겁니다.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왕은 다윗을 더욱 두려워 하면서 다윗을 평생의 원수로 삼고 남은 일생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지금 왕으로서 사울이 싸워야 할 주적은 블레셋 이고, 주변에 수많은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스라엘의 주적들과 싸울 생각은 안하고 자기에게 충신인 다윗을 평생의 원수로 삼아 모든 것을 쏟아붓고, 눈과 마음이 흐려져 주적을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비극의 밑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 왕과 같이 악한 영에게 사로잡히면 우리의 눈과 마음을 가려서, 진짜 싸워야 할 사단 마귀를 주적으로 놓지 않고 내 주변에 같은 편인 동지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싸우려 하고, 가족들과 싸우려 하며, 이런 내 편의 사람들을 평생 동안 내 대적으로 만드는 이런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게 다 악한 영에 사로잡힌 역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증거는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분별하는 겁니다. 성도들이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내 옆에 있는 목사님이나 장로님이 아니고, 내 집 안에 부모 형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영이 던지는 미끼를 덥석 무니까 평생의 원수를 같은 편에서 찾으며, 서로 싸우는 겁니다. 장로님들과 싸우고 목사님들과 싸우고 서로 싸우고 교회가 싸움 판이 되어버리고, 부모와 자식들이 싸우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며 가정이 싸움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평생 원수로 싸워야 할 대상을 교회 안에서, 집 안에서 찾으려 한다면, 영적 시야를 잃어버리고 갇히게 만드는 악한 영의 미끼를 덥석 물은 역사임을 정확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평생 싸워야 할 원수, 우리의 주적은 블레셋과 아말렉, 사단 마귀이며 공중 권세 잡은 자들입니다. 싸워야 할 주적과는 싸움을 포기하고, 싸우지 말아야 될 아군과 서로 싸우는 이 말도 안되는 일들이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깨어 기도하기 원합니다. 주적인 블레셋 대신 다윗을 평생 대적으로 삼은 사울왕의 비극이 우리의 현주소가 되지 않도록 악한 영의 미끼를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붙들려 쓰임 받는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시기, 미움과 질투에 사로잡힌 사울에게 악한 영이 강하게 임하면서 그 손에 살인 도구인 창을 들고 있었고, 다윗을 죽이고 싶다는 마음의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인 미수의 실행에 옮기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창을 던졌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을 죽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자 사울에게 찾아온 것은 극도의 두려움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죽이려고 마음을 먹어도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창을 두 번이나 던졌는데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시고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동시에 자신에게는 함께 하시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한 겁니다. 그리고 나서 사울왕은 노력 해도 내 손으로 죽일 수 없으니까 소위 말하는 꼼수를 쓰는 겁니다. 악한 계획을 세워 다윗을 죽음의 구석으로 몰아 넣으려 하는데, 바로 자기 딸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자기 딸들과의 결혼을 이용해서 다윗을 블레셋의 손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 딸을 아내로 줄 테니, 블레셋과 나가 싸우라는 겁니다. 블레셋과 싸워 이기고 싶은 열망 때문에 아니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다윗이 죽기 바라는 열망 때문에…다윗에 대한 미움, 질투와 시기가 얼마나 컸으면 자기 딸들을 미끼로 삼는 겁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의 사위가 될 조건이 이미 충족했습니다. 왜냐하면 골리앗과 나가 싸워 이기는 자에게 현상금과 함께 자신의 사위가 될 조건을 사울왕 스스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 골리앗과 싸워 죽였으니까 당연히 사울의 사위가 되어야 하는데, 마치 사울왕 자신이 호의를 베푸는 것처럼 자신의 큰 딸을 미끼로 사용합니다. 내 딸이 행복하기 위해서 내 딸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다윗에게 아내로 주는 것이 아니라 사울왕의 본심은 다윗을 죽이기 위한 미끼로 자신의 딸을 이용하는 악한 계획입니다. 블레셋 군대와 나가 싸워 너의 용맹함을 보여주면 사위가 되게 해줄 테니 나가 싸우라는 겁니다. 그러면 전쟁터에서 블레셋 군대의 손에 다윗이 죽게 될 거라는 잔머리를 쓰게 되는 겁니다. 자기는 소위 말하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악한 계획을 세우게 된 거예요. 이런 사울왕의 모습이 바로 악한 영에 사로잡혀 눌려 있는 비참한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에 사로잡혀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한 다윗을 죽이기 위해 자기 딸을 미끼로 이용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마음… 그런데 사울왕의 이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족이 될 수 있냐며 완곡하게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포기하지 않고 두번째 음모를 이어갑니다. 다윗을 사랑하고 있는 둘째 딸을 또 다시 이용하는 것입니다. 딸을 그에게 주어서 다윗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는 꼼수를 쓰는 겁니다. 이렇게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는데 혈안이 되어 두 딸을 다 미끼로 이용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이용하고 파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믿으며 나가 싸우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울왕이 다윗에게 나가 싸우라는 이 전쟁의 진짜 속마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 나가서 죽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런 악한 의도와 계획에 하나님의 이름을 서슴없이 이용하는 겁니다. 다윗을 죽이기 위한 전쟁터에 보내면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는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이건 마치 뭐와 똑같은가 하면 창세기에서 야곱이 그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이용한 것과 똑같습니다. 이삭이 야곱에게 네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해서 음식을 만들어 왔느냐고 물으니까, 야곱이 얼굴에 철판 깔고 대답하지 않습니까? 여호와께서 순적하게 사냥하게 해 주셔서….엄마가 잡아가지고 만들어서 가져 와 놓고서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자기의 거짓말에 하나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한 야곱의 속임수나 사울 왕이 하나님을 이용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악한 의도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행하는 악행인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하들도 이용해서 다윗에게 왕의 사위가 되는게 가하다며 설득하게 만듭니다. 신하들을 이용해 의도를 감추고 비밀스럽게 몰래 소문을 내는 것이죠.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인데 지금 왕이 너를 기뻐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울왕의 사위가 되는 것 왕이 기뻐한다는 겁니다.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악한 영에 사로 잡히니까 자신의 두 딸을 미끼로 이용하는 것도 모자라 신하들도 이용하고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이용하면서 자신의 악한 계획의 도구로 삼는 겁니다. 이 모든 게 성경은 그의 악한 생각 뿐만 아니라 그 악한 생각을 타고 온 악한 영이 힘있게 내린 영적 결과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음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싸우라 한 주적을 잃어버리고 내 미움, 시기 질투에 사로잡혀 내 스스로 원수를 설정하고 내 원수를 죽인다는 명목으로 내 딸들을 미끼로 이용하고, 신하들을 이용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도 이용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도 아닌 내 욕심, 내 욕심도 아닌 내 죽이려는 악한 생각을 위해 이렇게 주변에 가족들을 이용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려는 이 모든 일들이 악한 일 이자 악한 영이 미혹에 끌려 다니는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울왕을 반면교사 삼아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내 주변 가족들을 이용하지 않고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주변 사람들은 사랑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과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다윗의 극렬한 대조와 대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란 항상 같을 수 없고 늘 변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매일 변하는 무상의 존재인데 그렇기에 좋게 변화되던지, 좋지 않게 변화되던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점점 좋아지든지 점점 나빠지던지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죠. 사울왕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 점점 나빠지고 하향곡선을 그리는 대표가 되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의 그 빈 마음에 오늘 말씀에 보면 악한 영이 힘 있게 내렸다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그 악한 영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릴 때 무엇을 타고 들어왔는가 하면 바로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타고 들어왔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그가 싸워야 될 주적이 아닌데 정작 싸워야 할 주적인 블레셋과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다윗의 향한 질투와 시기와 미움이 사울왕의 마음을 사로잡고 머물고 그를 압도하게 되면서 악한 영이 타고 들어오기 좋아하는 마음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시기나 질투, 미움이 악한 영의 역사 라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차곡 차곡 쌓고 마음에 그것을 품고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마음에 악한 영이 타고 들어가기 좋은 마음 상태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 미움을 동력으로, 인생을 움직이는 힘으로 살아간 사울왕에게 바로 악한 영이 자리잡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죠
악한 영이 사울왕에게 힘있게 내리니까 그 시기 질투 미움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사용하는 사울왕의 마음과 결합한 악한 영이 사울왕을 완전히 무너지게 만들고 괴물과 같이 돌변하게 만드는 끔찍한 일을 보게 됩니다. 예전에 사울왕은 다윗이 수금을 타면서 찬양하면 그 마음이 상쾌해지고 깨끗해지고 악한 영이 떠나는 역사 가 있었는데 점점 그 악한 영이 힘있게 내리게 되니까 아무리 다윗이 수금을 연주해도 이번에는 그 악한 영에 사로잡히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사울에게 악신이 힘있게 내리면서 그의 손에 들려 있었던 것은 바로 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 악한 영이 힘있게 내린 사울왕의 손에는 살인 도구인 창이 있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는 다윗의 손에는 찬양 도구인 수금이 있는 것입니다. 찬양 도구인 수금을 연주하는 다윗과 살인 도구인 창을 손에 들고 있는 사울왕의 이 선명한 대비를 우리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시기 질투 미움인 사울왕은 창을 들고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반면, 나를 움직이는 힘이 사랑과 기쁨인 다윗은 주님을 찬양하며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인 수금으로 사울을 위해 연주하고 있는 다윗을 죽이려는 생각을 했고 그 죽이려는 생각을 악한 영에 사로잡혀 실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들고 있던 창을, 살인 무기를 두 번이나 던진 것입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겠다고 벽에 박아야 하겠다는 그런 악한 생각을 이미 하도록 악한 영이 힘 있게 내린 것입니다. 한두번 생각한 게 아니겠죠. 거의 그 생각에 지배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게 임계점에 이르니까 그 생각이 터져서 시기 질투, 미움이 사울 왕을 움직이는 힘이 되어 그것을 행동으로 실행한 것입니다. 살인미수….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손에 들고 있던 창을 던진 것입니다. 사울왕은 시기 질투 미움을 마음에 차곡차곡 품고 악한 영이 틈타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버렸고 거기에 악한 영이 힘 있게 내리니까 자기에게 그렇게 잘하고 충신이었던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살인 미수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던진 이 창을 다윗은 두번이나 피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다윗이 두 번이나 피했다는 것은 다윗이 날렵해서 운동신경이 좋아서 잘 피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울왕이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그 가까이에서 창을 던져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죽이려 해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다윗을 보며,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심을 더 선명히 깨달으면서 사울왕의 마음에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도 죽일 수 없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울왕의 시기 질투, 미움은 두려움으로 바뀌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 미움을 틈타고 들어온 악한 영이 결국 사울왕의 인생을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두렵게 만드는 겁니다. 왕이 신하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싸워야 했던 주적인 골리앗을 두려워 하는 겁니다. 사울왕은 백성들도 두려워하는 인생이었습니다. 백성들 눈치 보느라고 하나님의 명령도 거역했습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늘 두려움에 압도 당하여 살아가는 것이죠 그러니까 사울왕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겁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두려움에 압도 당하여 계속 살게 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이 영이 떠난 증거이며 악한 영이 사로잡혀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손에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의 수금이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들을 죽이려는 창이 손에 있습니까? 내 마음의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계속 품고 있으면 그것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어버리고 그런 마음에 악한 영이 틈타기 좋은 환경이 되어버려 결국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드는 이 패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마음에 차곡차곡 쌓고 그것을 내 삶의 동력으로 살아가는 삶이 악한 영이 틈타기 좋은 영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영이 틈타고 들어오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것을 조심하며 늘 나의 마음의 짐과 감정의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는 것, 내가 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비결이자 바로 영적 분별력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작 두려워 할 하나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주변의 충신인 다윗을 두려워 하는 이 안타까운 사울왕의 모습이 나의 모습 되지 않기를 기도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내 마음에 쌓고 그것을 두려움으로 바꾸는 이 영적 악순환이 사단의 미혹이자 악한 영이 틈타는 역사임을 잊지 말고 내 삶이 정말 두려워해야 될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 명령을 불순종하는 것을 알고 심각하게 그분 앞에 엎드려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환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주변의 거인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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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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