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왕의 역사를 통해 증언하는데 두 나라 공통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멸망을 향한 내리막길로 질주합니다. 남유다는 요아스와 아마샤로 이어지는 용두사미, 즉 처음에는 하나님에게 신실했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타락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면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악한 모습으로 우상숭배와 타락에서 떠나지 않고,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이기에 보통 여로보암 2세로 부르는데, 41년 동안 왕으로서 있으며 받은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여로보암의 이름값을 하듯이 조상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악한 왕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로보암 2세로 말미암아 경제 재건과 나라를 확장시킨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41년동안 왕으로 있으며 겉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했고 놀라운 업적을 많이 세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따라간 여로보암의 죄는 여러 가지로 우리가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유리하면 그 유리한 길을 기쁨으로 선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여로보암 2세의 선택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잘 지내는데 현실적으로 더 유리하냐, 유리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죠. 대표적 예로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 없으니까 여기 가까운 곳에서 편하고 쉽고 간단하게 예배 드리라며 북 이스라엘에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것이 여로보암의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안정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은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게 북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과 우상숭배로 변질된 여로보암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선택보다는 현실적인 결과가 항상 중요하게 살았던 실용주의 노선을 갔던 사람이 여로보암 2세이고, 그런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시는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업적들은 여로보암 2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하여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약속해 주신 결과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선지자 요나에 대해서 굉장히 좀 미숙하고 불평 많은 선지자로 여기지만 사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재건과 확장의 약속을 대언한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때 그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나라가 커지고 확장하게 되는 것을 통하여 정말 원했던 것은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건을 넘어, 나라의 안정과 재건을 넘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시간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신앙의 재건을 정말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이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 때 경제가 부흥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많이 회복하게 하시며, 북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랍게 영토가 확장되며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삶이 윤택해졌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신앙의 기준이 분명히 서 있는 왕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나같이 부족한 것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믿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와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대단해서, 나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이루어진 결과라고 착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으로 먹고 살만 해지고 영토 확장이 형통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국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나아져서 백성들은 살만 해졌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형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제 재건이 전혀 신앙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부국강병과 경제 재건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형통은 바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늘 누리고 살아가는 것임을 철저히 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 2세의 겉보기에 수많은 업적들과 경제 재건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형통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간 왕, 하나님을 바라 보지 않은 왕을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국강병과 영토확장, 경제 부흥이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재앙이고 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삶이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도구가 되어 은혜를 구한다면 그 잠시의 어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곧 지나가고 결국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이 이어지게 하는 도구가 되는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를 계속하며 온 나라를 영적인 내리막길로 걷게 만들고 영적 재건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다가올 파멸과 멸망의 길로 질주하게 하는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이런 똑같은 문제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가 될 때만 진정한 형통입니다. 이 모든 게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게 축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열매들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한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의 거울로 삼아 그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유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나의 형통의 기준이며 나의 신앙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삶의 생사 화복이 내 삶의 모든 기쁜 일과 슬픈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초점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형통임을 믿으며 주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14장 말씀은 남유다 요아스 왕이 가까운 신복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는 것을 증언합니다. 아버지의 과오를 뒤로하고 라도 가장 가까웠던 신하들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봤으니, 아마샤의 마음 상태는 얼마나 불안했을 지 상상해봅니다. 아버지가 살해 당한 후 그렇게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서 왕의 자리에 올라간 아마샤는 감사하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됩니다. 마치 그의 아버지 요아스가 전반기에는 한결같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며 나아갔던 것과 똑같이 하나님께 신실하고 정직한 왕으로 평가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 보시게 정직하게 행하기는 했는데 온전한 마음으로 가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긴 했는데, 조상 다윗과 같지는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기는 하나, 전심으로, 온전하게 다윗과 같이 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지요. 전심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온전히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예 악한 왕이면 기대도 안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데 완전히 전심으로 온전히 나아가지 못하는 그 안타까운 모습이 아마샤왕, '분명히 하나님 앞에 괜찮은 거 같은데 뭔가 2% 부족했다는 진한 아쉬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다윗과 같이 정직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 말은 다윗과 같이 완벽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다윗의 인생을 우리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게 오답이라는 것을 분명합니다. 다윗과 같이 전심으로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며 가는 삶이란 승리해도 하나님만 바라고 나아오고, 실수해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삶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흠 없고 문제 하나도 일으키지 않으며 완벽한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시각에서는 그런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밑에 감추어진 뿌리, 마음의 중심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다윗은 언제나 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합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식하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잘 나가며 성공할 때나, 실패하고 넘어질 때나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문제를 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완벽하고 흠이 없는 삶을 넘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다윗과 같이 정직한 인생입니다. 승리해도 실수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아오고, 자빠지고 실수해도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겁니다. 나의 승리도 나의 실수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이 바로 다윗과 같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면 우리 신앙생활이 자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한다거나 껍데기를 가지고 신앙의 모든 것을 재단하려고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좋은 신앙 생활을 넘어 하나님 바라보시기 좋은 신앙 생활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중심을 하나님께 두며 살아가는 삶, 바로 다윗의 순전함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아마샤 왕이 그의 인생 전반기에 하나님에게 정직한 왕으로 평가 받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사건 하나를 증언합니다. 그게 바로 왕으로서 감정대로 보복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 순종한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 요아스왕이 측근에게 살해 돼서 왕 위에 올랐습니다. 자신도 언제나 살해될 수 있다는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 마침내 나라가 그의 손에 안정적으로 모든 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왕으로서 자신의 위치가 확고해졌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과 권한이 생겼습니다. 그 때 감정을 실어서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모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한대 쳤으면 한 대로 갚아주는 게 아니라 열 대로 갚아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반역한 사람들에게 삼족을 멸한다….즉 삼대를 죽이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 왕은 자기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 가장 가까이에서 아버지를 섬기다가 배반하여 죽인 그 배신자들만 법에 따라 죽였습니다. 가족들에게 연좌죄를 물어 삼대를 멸한다거나, 감정으로 보복하지 않고 당사자만 죽이고 나머지는 살려줬다는 겁니다. 이유는 단 하나, 모세의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으로서 드는 감정에 따라 보복하는 게 아니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법이 정한만큼만 처단한 겁니다.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지켜낸 것,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아마샤 왕은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힘과 권한이 있었고 아무도 뭐라 그럴 수 없는 왕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버지가 그렇게 살해당한 것이 아들인 본인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멍이 되었겠습니까? 억울하게 살해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며 보복의 감정이 확 올라오고, 이 배반자들의 씨를 진멸하고 다 말려야 된다는 좋은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하나님 말씀 아래 내려놓고 그 당사자들만 딱 처단한 겁니다. 되로 준 것을 말로 갚아야 한다는 나의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감정에 따라 보복하지 않고 말씀이 멈추라 하신 곳에서 순종하며 딱 멈춰선 것을 하나님께서는 높이 평가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삶이란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이고 말씀이 허락한 데까지만 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다윗과 같이 더 전심으로 온전히 나아가기 원하시는 마음이 녹아 있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신앙 생활이 사람들 앞에서의 보여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중심을 붙드는 삶을 살아가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나의 인생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인식하고 의지하고 바라보며 나의 삶에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오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신앙 생활이 하나님을 의식하고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 다윗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한 인생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내 마음대로 내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내 힘을 마음대로 쓰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기까지만 가서 내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정확하게 기준과 질서를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영적인 일임을 잊지 마십시오. 심지어 그게 내 감정이 폭발하는 보복 일지라도 말씀이 멈추라 하신 지점에서 멈추고 내려놓는 순종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말씀으로 나를 되새겨보며, 말씀의 기준으로 내 인생을 묶으며,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며 온전히 나아가는 그 열망이 우리 가운데 선명히 회복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엘리사 선지자의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와 엘리사는 가장 유명한 선지자들로 이 두 선지자만큼 이렇게 굵직한 인생을 산 하나님의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그만큼 엘리사와 엘리야가 위대하고 유명했다는 말은 반대로 그 시대는 참으로 어두운 시절이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 시대에 놀랍게 쓰임 받던 엘리야도 하늘로 올라가고, 그의 제자였던 엘리사도 이제 죽을 병에 걸려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죽은 사람도 살렸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며 말씀을 놀랍게 대언하며 살았던 광야의 예언자 엘리사, 영원히 생명력 있게 쓰임 받으며 함께할 것 같았는데 때가 되니까 엘리사도 죽을 병에 걸려 결국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 놀랍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사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듯 잠시 쓰임 받고 떠나는 겁니다. 엘리사와 같이 이렇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한때 쓰임 받고 그 다음 사람에게 바통을 연결해 주는 것을 잊지 않는 게 지혜입니다. 이 세상에 잠시 살아가며 내가 잠시 쓰임 받으며 잠시 하나님의 손에 놀라운 역사의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고 쓰임 받을 그 때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쓰임 받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된 엘리사, 죽을 병에 걸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엘리사에게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는 왕이 엘리사 선지자의 임박한 죽음을 보며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이스라엘의 병과 마병이여…통곡했다는 겁니다. 이 부분은 참 요아스 왕에게는 특별한 반응인 게, 만일 하나님께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었다면, 하나님과 동행하며 선지자 엘리사와 가까이했던 왕이라면, 엘리사 선지자의 임박한 죽음이 그에게는 큰 슬픔으로 다가왔고 이렇게 통곡하는 게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아스 왕은 분명히 하나님 보시기 악한 왕이었다고 정확하게 평가받았던 왕이라는데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곁길로 간 왕이었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는 과거 스승이었던 엘리야 선지자가 하늘로 바람 타고 승천할 때 그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는 겁니다. 그런 악한 왕인 요아스가 왜 엘리사 선지자가 죽을 때 그렇게 찾아서 눈을 흘리면서 그렇게 특별히 애통해하는가…굉장히 특별한 의외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악한 요아스 왕은 엘리사 선자가 죽는 앞에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며, 병거와 마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요아스가 갑자기 하나님께 돌아서서 회개하고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겁니다. 단지 요아스 왕이 지금 너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아스 왕이 통치하고 있을 때 북 이스라엘은 거의 군사력이 바닥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때로부터 요아스때까지 아람이 거의 동네북과 같이 북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동네북처럼 공격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 몽고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듯, 그렇게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의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몇 번을 공격하고 나서 아예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게 주변 나라로부터 내정간섭을 당하니까 요아스는 왕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합니까? 그런데 싸워야 되는데 요아스는 지금 너무 힘이 약한 겁니다. 군사력이 너무 바닥이고 싸워야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그나마 그에게 소망으로 가지고 있었던 건 엘리사 선지자가 하늘로부터 마병과 병거로 자기 나라 북이스라엘을 지켜준다고 생각했는데 그 엘리사 선지자마저 지금 떠나려고 하니까, 두렵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슬퍼서 눈물을 흘린 겁니다. 그러니까 엘리사 선지자가 죽어가서 슬퍼하는 게 아니라 엘리사가 죽은 후에 직면할 자신의 처지와 북 이스라엘의 처지가 너무 한심하니까 이 악한 왕도 그렇게 찾아와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이렇게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악한 왕 요아스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불쌍히 여기며 은혜로 회복할 기회를 한번 더 주십니다. 지금 엘리사는 죽을 병에 걸려 자기 몸을 건사하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힘들었을지 모르는데 정말 모든 힘을 모아 마지막으로 왕에게 유언과 같이 얘기하는 겁니다. 그 몸을 일으켜서 왕에게 나를 잡으라 말하고, 화살을 보여주며 이 화살은 여호와의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임을 알려줍니다. 악한 왕임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있는 왕임 불구하고 너와 북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능력 구원의 화살이 되어 너를 다시 한번 도와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놀라운 약속을 엘리사가 죽기 직전에 요아스 왕에게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시고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그렇게 악한 왕이지만 요아스가 엘리사에게 찾아와 은혜를 구할 때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외면하지 아니하시며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전적인 하나님의 긍휼하심 입니다. 그 화살을 붙들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해서 아람과 싸워 이기게 하실 것을 약속의 말씀으로 주신 겁니다. 그러면 요아스 왕이 말씀 앞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겠습니까? 주님 말씀하시면 나는 그대로 순종하겠습니다…주님만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이런 수용하는 마음과 간절한 순종이 그의 반응 이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아스가 그 믿음의 온전한 순종과 간절한 반응으로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거기서 땅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을 내가 얼마나 믿고 신뢰하며 그것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갈까 대한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그런데 땅을 치라 그랬는데 몇 번 안 친 겁니다. 힘이 닿는 만큼 쳐야 되는데 죽을 힘을 다해 쳐야 되는데 그냥 몇 번 하다 만 겁니다. 그랬더니 죽을 병에 걸려 임종을 앞에 두고 있는 이 엘리사 선지자가 말할 힘도 없는데 버럭 화를 내는 겁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화를 젖먹던 힘을 다 짜내어 화를 내는 겁니다.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라 그리하면 왕이 아람을 멸하기까지 힘을 주셨을텐데…왜 반만 치고 끝납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의탁하지 못해서 딱 반만 가니까 거기서 멈춰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 악한왕 요아스 앞에서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망하는 것을 끝으로 엘리사는 죽게 됩니다. 그게 엘리사가 했던 사역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죽을 병에 벌려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자로서 끝까지 잘못된 지도자들을 통하며 화를 내며 그들을 교정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겁니다. 결론은 엘리사가 말한 그대로 아람 군대를 요시아왕은 딱 세번만 이기게 된다는 것으로 말씀이 끝납니다. 그 막강한 아람 군대에 요아스는 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적과 같이 그들을 세 번이나 쳐서 찌르는 역사가 있었던 것이죠.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인생을 던졌다면 그는 여섯 번 일곱 번 계속해서 진멸할 때까지 승리할 수 있었는데, 하나님을 향한 반쪽 믿음으로 말미암아, 딱 거기 까지가 승리의 전부였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이 말씀대로 펼쳐지는 것을 위해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선지자들을 계속 보내시어 이스라엘 왕들을 책망하며 바른 길로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에게 놀랍게 쓰임 받았던 엘리사도 때가 되니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됐던 것처럼 우리 또한 잠시 이 세상을 살고 잠시 쓰임 받다 떠날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떠나가고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영원히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진리임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나의 인생을 던지며 쓰임받는 잠시의 시간에 온전히 순 종하여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 지는데 진정한 갈망과 열망으로 선명히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후와 정반대의 길을 가게 되었던 예후의 아들이었던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였던 요아스에 대하여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은 예후로 의해 모든 것이 변하고 완전히 새로워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 받으며 예후는 아합 가문은 철저히 진멸하고 바알 우상들과 선지자들을 모두 무너뜨리며 새롭게 북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완전히 뒤집어지며 통째로 변화되는 것을 통하여 이제 이 나라가 새롭게 되며 새 출발 할 것 같은 큰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모습으로 북 이스라엘이 탈바꿈 되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후 이후 그 아들이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 정말 그렇게 몰라보게 달라졌는가? 정말 그 나라가 그렇게 새롭게 되었는가? 안타깝게도 결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후 이후에 그 아들 여호아하스가 새로운 왕으로 바뀌자마자 옛적 모습으로 뒤돌아가게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여호아하스의 의미가 “여호와가 붙들었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얼마나 이름이 좋습니까?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아버지 예후의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허무하게도 정반대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죄를 떠나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렸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름값 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붙들리는 대신 죄에 붙들려 타락했던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여호아하스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아람 군대라는 경고의 채찍을 보내셨습니다. 그 경고의 채찍을 통해 정신차리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기 원하시는 아비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쳐들어왔고 북이스라엘은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공격과 수치를 당했는가 하면 마치 조선시대에 몽고가 세운 청나라로부터 받은 공격과 수치와 비슷합니다. 조선 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몽고가 청나라를 만들고 조선을 쳐들어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자 호란으로 승리하고, 왕이었던 인조가 땅에 머리에 피가 날 정도로 대고 그렇게 비참하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청나라가 승리 후 돌아가서 끝난게 아니라 계속 조선의 조정에 내정 간섭을 하게 됩니다. 자꾸 이래라 저래라 위에서 자꾸 지시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람 군대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해 승리한 이후,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바로 내정 간섭을 심하게 하며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힘들고 어려웠던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던 여호아하스가 하나님에게 도와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또 하나님은 그를 불쌍하게 보시고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원자를 북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아람의 공격과 수치에서 벗어나도록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를 체험했으면 여호아하스 왕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회개하며 이름값 하는 삶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조율 받는 인생으로 하나님에게 붙들려 사는 삶을 살아가고, 아버지 예후의 모습으로 돌아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기회를 더 주시고 은혜로 건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에게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죄에 묶여 떠나지 아니하고 심지어 우상과 아세라 목상을 그냥 두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번 큰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고 구해 주셨는데, 그 놀라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 붙들려 사는 삶 대신 여전히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삶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주셔서 그 죽을 위기 가운데 아람의 손에서 건져 주셨는데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가 완전히 그들을 박살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이번엔 아람 군대가 북이스라엘을 완전히 초토화 시키는 것입니다. 비행기 다섯 대, 탱크 10대 정도만 남기고 모두 박살이 나는 큰 패배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후의 손자이자 여호아하스의 아들이었던 요아스가 등장하는데, 그 또한 역시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따라가는 삶을 답습했습니다. 아버지 여호아하스의 안 좋은점을 그대로 닮아 따라하는 겁니다. 아버지도 아들도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죄에 뒹굴며 사는데도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고 아무런 불편함이 없는 인생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는 죄악의 삶을 되풀이하는 악순환이 북 이스라엘 왕들에게서 다시 한번 삶의 패턴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죄에 붙들려 죄에서 떠나지 못한 왕이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 예후의 손자 요아스였습니다. 예후가 이루어 놓았고 닦아 놓았던 모든 개혁과 새로운 물결이 끊어지고 예전 모습으로 회귀하는 안타까운 모습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 묶이는 대시 죄에 묶여서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는 대신 죄를 따라가는 이 악한 모습으로 왜 자꾸 회귀하고 돌아가려 합니까? 인간의 마음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붙드는 대신 나를 의지하고 붙드는 삶의 필연적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옛날 이야기로 끝나면 안되고, 우리 또한 이런 똑같은 패턴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정말 이제는 새롭게 나라가 다시 새 출발 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실망스럽게 옛적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여호아하스와 요아스, 북이스라엘 왕들을 바라보면서 사실 이게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타락한 죄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정신 못 차리고 가만히 있으면 죄에 묶여 떠나가지 않고, 죄에 머무르며 죄를 따라가게 됩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은, 죄에 묶여 머물러 있는 것을 거절하는 삶이고, 죄를 따라가는 대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이란 죄에 붙들리지 않는 삶입니다. 죄 문제를 그 어떤 것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삶입니다. 이 시간도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고,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죄에 붙들려 사는 삶을 청산하고 주님께 붙들려 사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죄에 붙들리고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나의 인생을 바라보며 처절히 절망하며 이 시간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기 원합니다. 여호아하스와 요아스를 반면교사 삼아 죄에서 떠나가며 단절하며 죄에 붙들리는 대신 하나님께 붙들려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과 같이 살아남은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는 40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하였습니다. 그의 전반기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행했습니다. 그 하나님에게 정직하고 신실했던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너무 낡고 초라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성전을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특별히 요아스 왕에게 성전은 그냥 신앙을 재건하는 하나님을 향한 봉헌의 의미를 훨씬 넘어섭니다. 요아스가 태어나서 한 살에 도망가 일곱살이 될 때까지 어린 시절을 성전에서 보내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마음의 고향이자 자기를 살려준 특별한 장소이기에 그 성전에 대한 애착이 남유다의 다른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특별함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 되고 나서 요아스 왕은 성전 중수하고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이게 됩니다. 성전을 수리하는데 있어 모든 결정과 헌금 사용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진행되어, 성전을 잘 수리하는데 사용됐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 정직하게 행하게 되는 참으로 중요한 업적이었다고 증언합니다.
동시에 이 말은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요아스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실패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은 이후에 요아스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 후반전에 무너지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요아스 왕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중에 큰 화근이 되는 것이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일입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은 백성들의 일상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그 산당들을 놔뒀다는 것인데, 그것이 결국 무엇으로 변질되는가 하면 우상숭배의 현장으로 왜곡되고 변질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강조하셨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되는데, 이 분명한 기준 앞에 그가 끝까지 온전히 전심으로 순종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야다 제사장이 죽은 후 결국 이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것 때문에 나중에 백성에게도 왕 본인에게도 바른 길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큰 문제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삶의 스승이자 멘토였던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요아스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왕이 되었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셔서 이 자리까지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영적 감각이 무뎌지니까 내가 잘해서 왕이 되고 내가 잘해서 이 나라가 잘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성전 수리했던 요아스가, 인생의 후반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펼쳐 보려는 겁니다. 하나님을 부각하지 않고 나를 부각하려고 하니, 내가 대단해 보이는 것을 부각하는 산당을 통해, 바알 우상숭배의 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중수하고 재건하고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신앙을 더 분명히 세우기 위한 고백으로 나아가게 했어야 하는데,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요아스 왕은 이 본질을 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끊임없이 강조했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종으로 나아 갔어야 하는데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성전은 수리되어 겉모습을 괜찮게 세워졌는데, 실제로 보이지 않는 성전은 점점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은 멋지게 세워졌는데 보이지 않는 성전은 무너져서 그 틈으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성전을 재건했던 놀라운 업적을 뒤로 한 채, 요아스 왕 통치 후반에 산당을 중심으로 해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들이 확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 열왕기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평행 본문인 역대기를 보게 되면, 이렇게 변질되고 내리막길로 질주하는 요아스 왕을 건지시기 위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보내, 하나님의 말씀을 들리게 하고 다시 돌아오도록 경고합니다. 그런데 요아스 왕은 이미 들을 귀를 상실해서 자신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고 평생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여호야다의 아들 선지자를 죽여버립니다. 그러니까 요아스 왕의 후반전에 안타까움은 그렇게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이상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말씀을 들을 귀가 없어진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리까지 내가 너무 높아진 겁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과 내리막길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변질되고 무너진 요아스 왕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그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살해 당하며 그 인생이 비참하게 끝나게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정말 칼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인생을 살려서 성전에서 그렇게 숨겨서 7 살까지 키웠고 거룩한 쿠테타 이후에 드디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40년을 통치했는데 그의 말로는 결국 가까운 심복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끝나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결론은 인생을 어떻게 끝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유일하게 남은 다윗 혈통으로 기적과 같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결국 은혜를 원수로 갚는 대표적인 왕이 돼 버렸고, 그의 인생 결론은 용두사미로 끝나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높는 대신 보이는 우상을 붙들고 나를 높이고 참 신앙에서 이탈하는 요아스 왕, 그래서 그의 인생 후반전은 완전히 변질되고 타락하는 내리막길로 가게 됩니다. 처음이 아무리 좋았어도 우리의 끝이 이렇게 무너지면 심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첫사랑을 기억하고 나를 끊임없이 돌아오기 원하시고 교정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들려질 때 외면하지 않고 말씀을 듣고 엎드릴 때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며, 보이는 성전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성전을 끝까지 지키며, 끝까지 주님을 향하여 순전하며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의 손에 모든 다윗의 씨앗이 진멸당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남은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 요아스는 극적으로 피신해서 성전에서 6년 동안 숨겨 몰래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거룩한 쿠테타를 통해 아달랴는 죽게 되고 7살된 유일한 다윗의 혈통 요아스가 왕위에 올라 새 시대가 열리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정말 꺼지기 일보직전인 다윗 가문의 혈통이 일곱살 된 요아스가 살아남아 왕이 됨으로서 다시 한번 불이 붙어서 소망의 불을 다시 연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7 살짜리가 왕이 된다는 것은 이래저래 죽을 수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기도 합니다. 왕으로서 감당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고 이 아이가 죽기만 하면 모든 게 끝나기 때문에 그런 요아스를 잘 보필하고 끝까지 그가 잘할 수 있도록 도은 사람이 바로 제사장 여호야다입니다. 여호야다가 없었으면 요아스는 살아남지 못했고 왕이 되지도 못했으며 그 시대에 그렇게 쓰임 받지도 못했을 겁니다. 일곱살의 왕위에 오른 요아스는 이런 여호야다의 든든한 후원 덕에 40년 동안 남유다의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 눈에 보기에는 모든 게 끝난 것 같고, 소망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그런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을 이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혈통이 내려가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꺼져 가는 등불을 살리듯 여러 우여 곡절과 기적을 통과한 하나님의 역사 하심 이었음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실 요아스가 일곱살에 왕이 되며 마지막 남은 다윗 왕가의 혈통이 계속 계승되는 이야기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환경과 매우 유사합니다. 이 세상은 불법과 악한 여인인 아달리 같은 세상의 문화와 흐름이 너무 강력해서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게 없고 우리 스스로는 지켜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어둡고 절망스러운 때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를 구하시고 건지시는 분이 계시다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고 내 스스로는 버틸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호해주시고 지켜 주셔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성도로서 우리가 여전히 서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위태로운 상황에서 남유다는 마지막 남은 유일한 다윗 혈통 요아스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계승하게 되듯이 복음에 이르는 말씀을 통해 기적과 같이 나를 세우시는 놀라운 은혜를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남유다를 40년동안 통치한 요아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등장하는데,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모든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한 왕이었다는 것을 좋은데, 거기에 전제조건이 붙은 게 뭐냐면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을 동안에… 하나님 앞에 좋았다는 겁니다. 그만큼 여호야다가 요아스 왕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겁니다. 영적인 멘토이자 스승이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인 여호야다가 그를 가르치는 동안에는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를 교훈하고 가르치며 나를 바로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는 것이 얼마나 복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나의 미성숙의 시절에 나를 이렇게 바로 잡아주고 나를 깨우쳐줄 그런 영적인 스승과 어른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복 중의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아스 왕은 제사장 여호야야로 말미암아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하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 안에 바르게 잘 자라 하나님 앞에 남유다를 잘 통치했다는 것이죠. 요아스가 인생의 전반기에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바로 그의 성전 수리를 향한 열망을 증언합니다. 요아스 왕이 하나님께 신실한 왕으로 쓰임 받았다는 증거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마음의 뜻이 성전을 다시 한번 수리하고 변화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솔로몬 시대에 세워졌던 성전이 너무나 시간이 오래 흐르고 나서 방치되어 예전에 그 모습이 사라진 채 이곳 저곳이 낡고 부서져 초라하다 못해 안타까운 상태였습니다. 잘 고쳐지지 않아 흉물과 같이 방치되어 버린 성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왕으로 있는 동안 이 성전을 잘 수리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신 겁니다. 그래서 성전 수리하는 그 뜻을 그가 품고 구체적으로 세운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성전 수리에 대한 일을 추진하려고 보니까 제사장들에게 그 일을 맡겼는데 그 일이 잘 진척되지 않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건축이나 건물 수리의 전문가들도 아닌데다가 그 책임에 대해서 오랫동안 방임하고 있었기에 성전 수리의 길이 지지부진한 겁니다. 그래서 요시아 왕이 무슨 명령을 내리냐 하면 제사장들이 직접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은 제사 업무에만 집중하고 헌금에 대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게 대서 일이 원활하게 추진되도록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드려진 헌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성전 수리의 일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게 제사장들은 제사장 본의 일을 감당하면서, 구체적 실무는 전문가들에게 맡기면서 그 일이 속히 추진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일은 사도행전이 있었는데 초대교회가 은혜롭게 잘 성장하고 부흥하는 가운데 교회 안에 구제 문제로 분란과 다툼, 어려움이 생겼습니다. 그 일로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는데 그때 초대교회가 기도로 한 결정은, 사도들은 그 일을 더 잘해야 한다고 책임을 모는 대신, 책임을 배분하고 나누는 결정입니다. 사도의 일을 정확하게 구별해 말씀과 기도에만 집중하게 하고 실무적인 일들은 집사들을 세워서 그들에게 새로운 일을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리와 집중의 원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한 이 동일한 원리를 가지고 선명하게 일하게 된 것입니다. 요시야는 그 낡아진 성전을 보수하고 바꾸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의 성전도, 마음의 성전 속에 자리잡은 나의 낡은 신앙도 새롭게 된다는 것을 믿으며 성전 수리에 뜻을 두고 추친 하면서 하나님께 기쁨 되는 인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고 세우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성전이 새롭게 수리되며, 마음이 새로워짐을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며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망과 순전한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 것이고 그것이 요시야 왕이 하나님께 정직하다 평가받는 본질적 이유였습니다. 마지막 남은 작은 촛불 요시아를 통해 왕위가 계승되어 다윗의 혈통을 이어가는 기적을 바라보면서, 성도들이 성도로서 삶을 살아가며 그 신앙이 계승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다 꺼져가는 것 같은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선 그 약속을 이어 가시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세워 가심을 신뢰하십시오. 그런 요시아 왕이 있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동시에 그를 가르치고 보호하며 바로 잡아줄 영적 스승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도 그런 영적 스승을 가까이 두기를 열망하고 그런 스승을 찾아 가까이하며 신앙 생활하기 원합니다.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는 열망은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내 마음속 성전을 새롭게 수리하는 열망이었음을 잊지 말고, 내 마음이 새롭게 수리되고 내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새롭게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달랴라는 여인 하나가 남유다 전체를 영적으로 파괴시키고 영적 파탄이 오게 만들었는지를 성경은 경고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자기 남편도 비극적으로 죽고 자기 아들도 1년만에 죽었는데 슬퍼하거나 애곡하는 기색이 전혀 없이 오히려 숨겨 놓은 본색을 드러내며 나머지 왕족의 씨을 다 말리며 자기 손자들을 다 죽이고는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이 악한 여인 아달랴입니다. 정통성 없는 북 이스라엘 이세벨의 딸이자 스스로 불법적으로 자리에 올라 남유다를 완전히 장악한 악한 여왕이 되어 6년이나 남유다를 완전히 영적으로 무너지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은 이세벨과 그 딸인 아달랴를 단순한 한 개인의 일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력의 대표로 바라보고 있고,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악한 여인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황폐하게 만드는가를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들어 쓰시며 지나치리 만큼 바알 우상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진멸하며 제거하는 일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땅인 아달랴와 결혼한 철저한 대가를 남유다는 혹독히 치르며, 피비린내 나는 가족 학살을 통해 다윗의 씨가 완전히 말라 모든 것이 끝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딱 한 아기, 1살된 요아스를 살려서 성전에 숨겨서 6년을 잘 키운 상태에서 7년째가 되는 해의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악한 여인 아달랴가 불법적으로 왕위에 올라 여왕 행세를 하는 7년 째, 제사장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말씀을 의지하여 용기를 내는 겁니다. 그 목숨을 걸고 용기 내는 것은 지금 아달랴 여왕은 불법으로 스스로 올라간 정당성 없는 여인이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다윗 자손 가운데 남유다 왕위를 이어 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 따라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 다윗의 혈통에서 장차 약속하신 메시야 예수님이 태어 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남은 아이 하나를 지키는 것이, 그 남은 아이가 왕을 계승하는 것이, 바로 제사장이 목숨 걸고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제사장의 선포였지만, 사실 아달랴에게 완전히 찍히기를 각오하는, 목을 내 놓는 반란을 일으키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아달랴 입장에서는 펄쩍 뛸 말인데, 자기 생각에는 모든 다윗의 씨앗을 다 진멸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남아 있는 다윗의 후손이 있다는 선언이자, 아달랴 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목숨 건 용기었던 것입니다. 아달랴 여왕에게 그동안 숨겨 놓은 다윗의 씨앗이 남아 있다는 선포이자,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아달랴 여왕은 불법임을 선포하는 그 놀라움….하나님의 시각에서는 제사장 여호아야는 용기를 낸 개혁과 바른 길에 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눈에 봤을 때는 그저 목숨을 걸고 기존 정권에 대항하는 반란밖에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사장 여호야다는 이 하나님의 질서를 남유다에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인생을 던졌고 목숨 걸고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게 됩니다. 그 성공의 이유는 목숨을 건 결단을 놀랍게 쓰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전 안에는 무기도 있었고, 호위하는 군인들, 특히 뜻을 같이하는 부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전에 다윗 왕가의 왕실 호위병들이었기에,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 그 바른 길로 나아가는데 쓰임받겠다는 열망으로 이 일에 함께하게 됩니다. 이렇게 여호야다를 중심으로 한 이 반란이 기적과 같이 성공하며 아달랴 여왕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세우며 일곱살이 된 그 아이를 왕으로 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 가문의 씨가 모두 말라 버려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질 것만 같은 풍전 등화의 위기 가운데, 제사장 여호야다를 들어 쓰시며 목숨 걸고 남은 아기를 지키게 하셨고, 불법으로 왕의 자리에 올라간 아달랴를 처단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향한 반란이 성공될 때, 아달랴가 했던 말 “반역이다…반역이다”를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반역은 본인이 제일 먼저 저지른 장본이었는데 말입니다. 악한 자로서 자기 손자들의 다 죽이면서까지 다윗 가문에 씨를 말리며 왕위에 올라온 반란의 주범인 아달랴 여왕이야 말로 반역 중에 반역이었는데, 막상 자기가 쫓겨날 때가 되니까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반역이라고 외치는 이런 말도 안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반역이다…반역이다… 소리를 질렀지만 결국 아달랴는 왕궁에서 칼에 죽임을 당하는 비참하게 인생으로 끝나게 됩니다. 이처럼 아달랴 여왕이 칼에 죽음으로서 소위 말하는 거룩한 쿠데타가 성공 하게 됩니다. 이처럼 꺼져가는 등불인 다윗 자손 하나를 지켰고, 그 어린 소년을 왕으로 세움을 통해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한 번 세우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위를 다윗 가문으로 세우는 정통성의 회복일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 있었던 바알 우상을 철저 깨뜨리는 성전 정화이자 부흥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하여 다윗 왕가가 사라지지 않고, 그 씨앗이 보존되어 나중에 말씀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일곱살 아이를 왕으로 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곱살 짜리 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사장 여호야다가 과도기에 정권을 가지고 있다가 요아스가 좀 장성하면 왕을 물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야다는 거룩한 반란이 끝난 후 굳이 일곱살 된 왕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겁니다. 여호야다는 자기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왕이 돼야 된다고 떠미는 그때에 스스로 왕이 되기를 거절하며 일곱살 된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는 겁니다. 이 말은 자기 스스로 왕위의 욕심을 갖기 위해 이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고백하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치 세례 요한과 같이 자기는 한때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 있다가 소리와 같이 사라지는 자로 내가 머물겠다는 그 뜻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적 질서를 다시 세워짐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씨가 계속 전승되게 되며, 그 결과 온 백성이 즐거워하고 온 성이 평안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보면 이세벨과 그 딸 아달랴 같은 자들이 불법으로 왕위에 올라 권세를 휘두르는 어둠과 타락의 시대입니다. 이 어둠과 타락이 고착화 되면 이게 문제라는 건 알지만 문제를 고칠 능력도 그리고 그거에 대한 용기도 없이 그 영적 파탄의 시대를 그냥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때로는 목숨 걸고 용기를 내야 할 일이 있음을 깨워 주십니다. 이런 불법과 어둠과 타락이 가득한 때에 한 사람이 말씀에 목숨을 걸고, 한 사람이 말씀에 용기를 내어 나아갈 때 역사의 흐름이 바뀌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동시에 여호야다의 유일한 관심은 다윗 왕가의 씨가 끊어지지 않으며 그것을 복원시켜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데 쓰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 왕이 되려고 욕심을 내지 않았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렇게 자기 것에 욕심내지 않고 하나님이 뜻이 이루어 지는 데만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기꺼이 낮아진 자를 놀랍게 사용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여호야다와 같이 준비되며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 걸고 용기 내는 자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 암흑과 어둠의 시대의 역사를 바꾸시기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말씀에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는 인생이 되어, 이 어둠과 타락의 시대에 주님의 영적 질서와 기준을 다시 회복하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데 우리 인생이 선명하게 쓰임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하시야의 어머니인 아달랴의 악행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를 풍비박산으로 만든 아달랴의 악행은 한 개인의 일탈과 끔찍한 일로 보는 것을 넘어서 악한 세력이 다윗 가문에 씨를 말리는 영적 전쟁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 이스라엘에는 예후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아 아합 가문과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처단하고 진멸하는 일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신속하게 모든 것이 정화되며 하나님의 심판 이후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는 은혜가 북 이스라엘에는 있었습니다. 그런 때에 남유다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다윗 가문의 씨가 말라 버리기 일보 직전의 큰 위기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아합 가문과 바알 선지자들이 진멸을 당하고 있는데 반대로 남 유다는 다윗 가문이 악한 세력의 대표인 아달랴로 인해 진멸을 당해 지금 꺼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겁니다. 남유다의 정략 결혼으로 왕가에 들어오게 된 아달랴는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었습니다. 특별히 성경에서는 아달랴가 이세벨의 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세벨도 아달랴도 그냥 악한 여인 정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의 대표로 등장합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악하면 북 이스라엘도 남유다도 영적 파탄을 가져오게 되고, 다윗 가문의 씨를 다 말려서 하나님 언약의 통로가 막혀 나중에 장차 오실 예수님이 그 씨로부터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이 단순히 아달랴가 정권에 욕심이 있어서 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끔찍한 악행 정도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오시지 못하게 막으려는 악한 세력의 끔찍한 전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가 얼마나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악한 여인이지를 성경은 선명히 증언합니다. 자기 남편도 비극적으로 죽었고, 자기 아들 아하시아 왕도 북이스라엘 왕과 함께 같은 날 비극적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 어미로서 인간이라면 슬퍼해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 왕이 죽을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모든 자손들을 모두 처단했습니다. 남유다 왕인 자기 아들이 1년만에 객사에서 죽은 것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왕궁에 남아 있던 모든 왕족 후손들, 즉 자신의 손자 손녀를 다 죽이는 겁니다. 할머니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자기 손자 손주들을 자기 손으로 다 죽이는 만행은 사극이라고 생각해도 상상이 안되는 끔찍한 피바람이 왕궁에 불어 닥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달랴라는 존재는 이세벨 못지 않고 어찌보면 이세벨 다 더 끔찍하고 악한 여인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아달랴의 끔찍한 만행은 단순히 한 여자의 악한 기행이 아니라 사단 마귀를 대표하는 악한 세력이 다윗 가문의 약속의 자손들을 진멸하고 그 씨를 말리는 영적 만행인 것입니다. 그 아달랴의 만행과 피바람 속에 모든 왕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중에 1살짜리 아이요아스를 고모가 몰래 빼내어 구출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어가는데 그 한 살 아기를 빼내서 몰래 숨기고 그 아이를 여호와의 성전으로 피신시키는 겁니다. 목숨을 걸고 그 1살짜기 아기를 숨기고 목숨을 걸고 그 아이를 여호와의 성전에 6년 동안 숨기는 겁니다. 아시아의 누이이자 고모인 여호세바가 없었으면 다윗의 가문의 씨는 모두 말라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왕위가 계승되지 아니하고 더 이상 그 다윗 왕가를 통하여 장차 예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꺼져가는 등불을 하나님께서는 끄지 아니하시고 이 한살짜리 아이를 살리심으로 희망의 불씨를 살리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 6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남유다의 여왕으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 한살 짜리 아이 요아스가 목숨을 건지고 성전에 6년 동안 자라는 동안이 악한 여인 아달랴가 여왕으로 등극해 남유다에 깊은 암흑시대를 맞게 하는 것입니다.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여왕은 유일하게 이 아달랴가 여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관점은 이 아달랴를 여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윗 가문의 자손도 아니고 정통성도 없고 그리고 자기 본색을 드러내 다윗의 가문에 씨를 말린 악한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과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로 대표되는 이런 악한 세력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며 흔드는 전략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과 결혼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과 결혼하여 세상의 기준에 물들어 젖어 살게 만드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포기하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 망각한 채 그저 나 혼자 건사하기도 어려운 인생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복음의 씨앗을 다 말려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일들을 계속 방해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북 이스라엘과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정략 결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를 가져왔는가에 대해서 성경은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세벨과 아합이 결혼한 것도, 그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남유다의 왕이 결혼한 것도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세상과 결혼한 겁니다. 세상에게 자신을 다 내어준 결과가 바로 뭐냐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을 세우신 남유다와 다윗의 씨가 진멸 당하기 일보 직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포로기 이후에 에스라가 시대에도 귀환한 사람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것을 왜 그렇게 심각한 영적 타락으로 받아들였는가를 말씀을 통해 이해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에스라가 성전을 재건하여 지을 때도, 나중에 느헤미야가 성벽을 지을 때도 계속 등장하는게 그 성전을 세우고 성벽을 세우는 것을 방해하는 방해 세력입니다. 개인적으로만 방해하는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방해하면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 신앙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고 흔들고 훼방하는 세력으로 등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이 모두 악한 자와 악한 세력에 의해 계속되는 하나님의 언약 신앙을 방해하고 흔드는 훼방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다윗 왕조가 이미 끊어진 거 같이 씨가 다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멈춰선 거 같고 이미 그 불은 다 꺼져버린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절박한 위기 가운데서도, 소망이 없어 보이는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1살 아기를 살리시며 그 아기를 통해 다윗 가문을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계속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방법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는데 스스로 그 자리에 올라가 왕이라고 떵떵거리고 있는 악한 여인 아달랴의 모습이 하나님의 뜻과 일을 방해하려는 악한 세력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 일들을 방해하고 흔들고 훼방하는 이런 악한 세력,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세력이 보이지 않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꺼질 거 같은데 꺼지지 않는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지속되며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처한 상황들이, 내 주변에 소중한 사람들이 때로는 이렇게 꺼져가는 등불과 같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성취하시고 이루심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절망과 낙망을 넘어서 소망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신 예후에 대한 인생 평가입니다. 사실 열왕기서 전체가 계속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시는 왕에 대한 평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걸 통하여 우리 인생 또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평가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평가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삶이 없습니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고, 하나님 앞에 audit 받아야 하는 인생임을 잊지 않을 때 인생을 함부로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매우 좋습니다. 예후에 대해서 너의 인생 참 잘살았다….말씀하시며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일했고 하나님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는 신실한 자였다는 평가입니다. 영적으로 파탄의 지경에 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한 하나님의 심판을 이루시는데 선명히 쓰임 받은 도구,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것을 다 행한 자가 바로 예후였습니다. 예후의 담대함으로 말미암아 남유다의 왕과 북 이스라엘의 왕이 심판으로 하루에 죽게 되었습니다. 아합의 70명 아들들이 모두 하루에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남유다 아하시야 왕 형제들 42명도 모두 죽게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모아서 처단했고, 바알 산당 허물고 그 자리를 화장실로 만들었습니다. 바알이 주는 것들은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것을 선포하며 예후를 통해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고, 이런 종교개혁을 담대하게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4대, 약 100년 정도를 가장 장수를 누리는 그런 왕조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후가 안타깝게도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 마이너스가 있었다는 것도 동시에 평가하십니다. 전반적으로 하나님께 칭찬받고 정직하고 행하며 바알 우상을 제하는 귀한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건 참 좋았는데 온전하지 못한 하나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북 이스라엘을 시작하게 한 여로보암의 죄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한 것입니다. 바알 우상은 그렇게 철저하게 다 무너뜨리고 진멸했는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못한 겁니다. 금송아지 신앙은 사실 북이스라엘을 지탱하는 힘이자 정체성이기도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예배를 제대로 드리려면 아무래도 남쪽으로 내려가 예루살렘 성전을 가야지, 거기서 예배 드리는 게 진짜 예배지…라는 그런 마음의 열망이 늘 있었습니다. 그런 백성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만든 게 자체적으로 예배 드리는 처소들이고, 그 안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여 드리는 예배와 제사 대신 쉽고 편하고 간단하게 드리도록 대체물을 만들었고, 백성들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북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신앙이었습니다. 사실 바알 우상이나 금송아지 우상이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 할 정도로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며 집착하게 만들고, 거기에 절대 가치를 두는 위험성을 가지는 이런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 얄팍한 영성에서 떠나지 않다는 겁니다. 그게 만약에 없으면 나라 자체가 흔들린다는 불안함 때문에 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는 멀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많은 업적과 하나님 앞에 신실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 예후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평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했고 결국 예후는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행한 것 같은데, 전심 즉 내 온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키며 말씀을 붙들고 살진 않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도 열심도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과는 차별되게 예후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갈망과 열심을 하나님께서는 들어 사용하신 것이고, 예후는 하나님께 선명히 쓰임 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나아가지 못했냐는 전심으로는 나아가지는 못한 겁니다. 열심은 분명히 있었으나,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예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예후는 그렇게 전심을 다해 이루지 못했고 그것을 하나님은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는 겁니다 말씀의 통해 주시는 예후에 대한 평가를 마음에 새기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어야 된다…여기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어하는 열심과 갈망,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고 그 뜻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는 갈망과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없는 사람들은 먼저 이 갈망과 열심을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갈망과 열망을 힘써 나아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되도록 늘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있고 열심은 있었는데, 전심으로 하나님을 따라 행하지 못하고 아쉽게 끝난 인생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힘써 나아가야 할 삶의 내용입니다. 안타깝게도 바알을 멸하고 다 무너뜨리고 모든 것을 다 진멸한 거 같은데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한 예후, 열심은 있었지만 전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예후의 신앙이 가져온 결과가 뭐냐 하면 자꾸 북 이스라엘이 전쟁에 휘말리고 나라의 영토를 점점 빼앗기게 되는 겁니다.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땅을 잘라내기 시작하심…이라고 증언하는데, 하나님이 땅을 잘라냈다는 건 나라 영토를 빼앗기게 하시는 겁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금송아지를 떠나지 못한 결과가 주변 나라들이 계속 공격을 하며 땅을 빼앗기게 되고,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황폐해지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기뻐하는 삶에 내 인생이 집중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를 늘 깨닫고, 하나님과 같은 방향과 같은 목적지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고, 살아가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잘 행하며, 특별히 하나님 마음에 있는 것을 행하며 살아가는 인생, 이런 삶을 사모하시면 좋겠습니다 나의 인생이 하나님에게 카운트 되는 시간, 하나님 앞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간에 더 인생을 쏟는 지혜로운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먼저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갈망이 사라졌다면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갈망이 분명한 인생이 되기를 간구하십시오. 더 나아가 내가 평생 힘써 나아가야 될 삶의 내용은 바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열심을 넘어 전심으로 나아가는 그 복된 인생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내용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시며 아합의 집안에 대한 심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왕과 북 이스라엘 왕이 심판 받아 한날에 죽었습니다. 아합의 부인이자 악한 여인의 대명사 이세벨이 심판을 받아 창문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말씀을 통해 아합의 70명 아들들이 모두 목베임을 당하며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게 심판하신 거 같은데 이것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남유다 아하시아왕의 형제들을 심판하시고, 아합의 잔당들을 심판하시고, 그 다음에 바알 선지자를 진멸하며 심판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지나치리만큼 계속 죽고 진멸하심이 이어지는 이유는 아합 집안의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죄가 이만큼 심각한 일이라는 것과 함께, 그들의 죄는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남유다 아하시아 왕의 형제들이 심판 받습니다. 남유다 왕 아하시아의 형제들이 지금 북 이스라엘 사마리아에 왔습니다. 찾아온 이유가 이미 심판 받아 죽은 아합의 70왕자들을 만나러 남쪽에서 단체 방문 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시아 형제 42명이 예후의 손에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그들이 심판 받아 죽은 이유는 정치적 계산을 통해서 북이스라엘과 맺은 정략 결혼을 해서 북 이스라엘에 해로운 불순종의 죄가 남유다에 다 흘러들어 남유다도 영적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을 엄중히 물으시면서 남유다 아하시아 왕의 모든 형제들도 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은 운명을 같이하는 겁니다. 좋은 운명도 나쁜 운명도 한배를 타고 가는 게 결혼이요. 그래서 결혼을 성경에서는 영적인 일이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고 정략 결혼과 같은 결혼의 문제를 계속해서 구약에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아합의 70 왕자들을 죽인 것도 모자라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다 씨를 말리는 겁니다. 아합에게 속한 사람들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는 겁니다. 진멸하듯이 모든 것을 싹 쓸어 버리시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남겨두면 그것이 이스라엘을 또 한번 무너뜨릴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민족 전체를 영적으로 파탄 나게 한 책임을 물으시며 이렇게 엄중히 심판하시는 겁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아합 집안을 심판하는 도구로 예후를 쓰고 계시고, 그 예후와 함께 솜을 잡고 여호사밧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것들을 정화하는 도구로 쓰임 받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라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되는 인생입니다. 언제 어떻게 쓰임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늘 쓰임 받기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후를 하나님께서 쓰신 이유가 여러가지 있을 겁니다. 그에게 지혜도 있었고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담대하게 추진하는 용기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넘어 이렇게 쓰임 받기 위해 준비된 예후의 마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 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예후에게 준비되었던 것은 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을 남에게 보라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분명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의 첫 시간을 드리는 새벽 예배를 지키며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나올 때 내 마음에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이 불타기를 원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쓰임 받고 싶습니다… 주님 손에 내가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 원합니다…사모하는 그 열심이 나를 사로잡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쓰임 받고 싶어하는 열심과 갈망을 반드시 선용하신다는 겁니다. 두번째로 남아있는 바알 선지자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며 모두 진멸하는 이야기가 길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바알 우상이 옛날에 나와 상관없는 우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있는 여전한 큰 영향력을 주는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바알 우상은 쉽게 말해서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물질을 절대 가치에 두고 하나님과 천국을 상대적 가치에 두는 삶입니다. 내가 정한 절대 가치를 위해 두고 하나님을 필요한 존재로 끌어다 쓰는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게 바알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바알 숭배를 겸하며 양다리를 거치는 겁니다. 이 세상의 번영과 성공과 물질에 절대 가치를 두고 하나님 나라와 뜻은 상대화 시키며 도구화 시키는 것을 우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 바알 우상은 우리 삶 가운데서도 심각하게 직면하는 도전입니다. 그 바알 우상숭배는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통해 북 이스라엘에 들어왔고, 정략결혼을 통해 남 유다에 들어와 온 민족을 무너뜨리게 만든 겁니다. 여호와를 섬긴다 그러면서 바알 우상에 기웃기웃 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심지어 수많은 여호와의 종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알 우상을 굉장히 성경은 심각한 죄로 여기며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아주 철저하게 배격하며 진멸하고 무너뜨리는 얘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로 철저하게 배격하며 진멸합니까?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단해 진멸했고, 바알의 신당에서 목상을 불사르고 바알의 신당을 다 헐어버렸습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큰 승리 이후 모든 바알 선지자들을 진멸한 게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잡초와 같이 금방 바알 신앙이 올라와 이렇게 많은 바알 선지자들이 다시 양산되었고, 백성들을 영적 파탄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바알 우상에 절절 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바알 산당을 다 허물고 심지어 그 자리에 화장실을 만드는 겁니다. 바알 우상이 주는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겠다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을 뿌리 뽑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처절하고도 철저한 심판을 통해 죄에 대해 분명한 경각심을 갖기 원합니다. 또한 저와 여러분들이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남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 잘못된 우상숭배를 정화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나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 늘 준비하며 예후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을 위한 나의 열심이 나의 인생을 이끄는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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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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