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한글 사도신경에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심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영어 사도신경이나 다른 대부분 나라들의 사도신경에는 거기에 뭐가 들어가 있냐면 지옥에 내려가셨다…descended into hell이라는 고백이 들어가 있습니다. 한글 사도신경에만 그 부분이 빠져 있습니다. 음부에 내려가신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왜 한글 사도신경에만 빠져 있는가?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부분입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초기 사도 신경에는 이 부분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논란과 또 하나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지옥에 대한 직접적 언급을 하지 않으려는 문화적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저희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건물 엘리베이터에 4층이 없었습니다. 1, 2, 3층 다음에 5층이었습니다. 4층이 없는 이유는 죽을 사…한문과 동일한 발음이니까 건물에 부정탄다고 4층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이런 우리만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선조들은 지옥이라는 말 자체를 거론하고 꺼내며 말고 하는 것을 피하고 언급하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도신경에는 지옥에 가셨다는 고백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오늘은 가려져 있기도 하고 논란이 많은 이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음부”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적어도 세 개 이상이 존재합니다. 첫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구약 성경에도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로 완전히 죽은 상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하데스”입니다. 하데스는 영어로 hell, 지옥을 직역한 단어라고 보면 됩니다. 세번째로 음부를 가리키는 단어는 “게헨나”가 있습니다. 게헨나는 지옥/음부에서 영원히 받는 고통과 형벌을 강조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적어도 이 세 단어가 음부/지옥을 칭하는 단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이 음부에 내려가셨다, 지옥에 내려가셨다 부분이 신앙고백으로 있는가….에 대해 주목하기 원합니다. 그리고 더 본질적으로는 왜 예수님은 죽으신 후 거기에 내려가셨는가…대해서도 주목하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명확한데 천국이 상징이 아닌 실체인 것과 마찬가지고 지옥/음부가 상징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포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여전히 천국과 지옥을 선과 악의 상징으로만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 천국도 분명한 실체이고 지옥도 분명한 실체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음부에 내려가시는 것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죽음 이후에 어떤 길을 가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이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생은 단순히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살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영원히 살지 않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던 믿지 않던 우리는 영적 존재임으로 영원히 삽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디서 영원히 사느냐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있고 음부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는…영원히 지옥에서 사는 자가 아닌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는 선언입니다. 영원히 살긴 사는데 천국이 아닌 곳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바로 멸망입니다. 누가 복음 16장을 보게 되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천국과 지옥을 분명한 실체로 우리에게 소개하시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통해 성경은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 어떤 인생이 펼쳐지는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지는 죽어 천사에게 들려 아브라함에게 올라갔고, 부자는 죽어, 장사 지낸 후에, 음부에서 고통받는다고 증언합니다. 죽음 이후에 거지 나사로와 같은 길이 있고 죽음 이후에 부자와 같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죽으신 이후 가신 여정은 부자가 가는 그 길을 그대로 가시며 몸소 체험하신 겁니다. 예수 이름 없이 순종과 영접 없이 우리 인생이 끝나면 어떻게 된다는 겁니까? 죽어서 장사 지낸 후에 음부에 가서 영원히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부활하시기 전까지 이 음부에 내려가시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죽음이후에 분명한 이 두 실체가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것은, 지옥/음부가 실체로 존재한다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게 합니다. 지옥은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 어둠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전서에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는 이 말씀이 사도신경의 고백에 매우 중요한 말씀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냥 죽었다가 살아나셨다는 것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죽음의 권세, 사망의 권세, 어둠의 권세를 깨고 이기신 승리하신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 이름을 베드로라 명하게 하셨고, 그 반석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겠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고백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곳이 되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음부의 권세”가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믿음의 고백 위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듯이, 성도로서 우리가 그리스도 몸된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며 그 위에 세워집니다. 그 예수 이름 위에 세워진 나의 인생이기에 음부의 권세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내가 거기에 결박되지 못하는 놀라운 역사를 주님이 약속하신 겁니다. 어둠의 권세와 죽음의 권세가 나를 흔들 수는 있어도 나를 지배하지 못하고 나를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 베드로전서 3장에 무슨 얘기가 등장하면 노아의 방주 사건을 증언합니다. 노아 시대에 임박한 심판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방주에 탄 8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물심판으로 멸망 당했습니다. 그 때 멸망 당한 사람들이 노아 시대부터 지금까지 이 음부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지옥은 한번 지옥불에 들어가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그곳에서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사는 곳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겁니다. 또한 노아 시대의 그 불순종은 과거의 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계속 일어나는 현재 형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예수 이름으로만 죽음 이후에 영원히 거할 거처가 바뀐다는 것을 선포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시하고 경시하며 귀 기울이지 않고 불순종한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농담으로 여기고 옛날 이야기로만 여기며 실제로는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름을 믿지 않으면 죽어서 영원한 지옥에 가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도 계속 어둠의 권세, 죽음의 권세, 음부의 권세에 결박되어 눌려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옥으로 내려가고 있고, 음부의 권세에 결박되어 있다는 이 선언을 우리는 중요하게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그림 언어로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이자 베드로가 풍랑 위를 걷는 기적의 사건입니다. 베드로에게는 물이 참으로 중요한 고백의 모티브인데, 물은 세례를 의미하고 그 세례를 내 옛 자아가 물에 완전히 들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의 방주도 결국 물을 통과하는 심판이고, 방주는 그 물 심판 가운데 건짐 받은 구원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은 기적은 단순히 물 위를 예수님 바라보고 걸었다는 기적의 사건을 넘어, 물 심판에 빠져 죽어야만 하는 나를 건지시고 예수 이름 바라보고 물 위를 걷게 되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에게 있어서 물은 심판이자 동시에 구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풍랑 가운데 나타나셔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물 심판과 음부의 권세가 예수님을 삼키지 못하고 그 위를 걸어가시는 겁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나를 바라보고 배 밖으로 나와 물 위를 걷게 하셨습니다. 몇 걸음 가다가 풍랑을 바라보니까 두려워서 물에 빠졌습니다. 그렇게 빠지는 베드로를 잡아 주시며 건져 주시며 말씀하셨어요. 믿음이 적은 자여…왜 의심하느냐….그게 바로 물 심판과 지옥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는 죄인 된 나를 건져 주시는 예수님, 음부의 권세가 예수님 권세 아래 굴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기적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풍랑을 꾸짖으시니 물이 잠잠해 지는 것도 음부의 권세를 다스리시는 주님의 놀라운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취할 때 물 위를 걷는 기적, 심판 위를 걷는 기적, 그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기적을 저와 여러분들이 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이 아니라 실체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농담으로 여기며 경시하고 불순종하면 망하는 인생이 됩니다. 복종하고 순종하며,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죽음 이후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자들이 있으며 복종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음으로 죽음 이후 음부에서 고통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모두 다 심판의 물에 빠져 영원한 형벌 가운데 고통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심판의 풍랑 가운데, 심판의 홍수 가운데 주님이 건져 주셔서 구원받은 존재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 심판 가운데 우리를 건져 주셔서 우리에게는 그 심판이 뭐가 되는 겁니까? 구원이 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붙들 때 우리가 풍랑 위를 걸어갈 수 있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음부의 권세에서, 죽음과 어둠의 권세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감격으로 떨림으로 선포하는 우리의 고백이 되는 겁니다. 그 영원한 거처가 결정되는 것은 죽음 이후가 아니라 죽음 이전 이 세상에 결정됩니다. 단번의 죄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음으로 이 땅에서 영접하고 하느냐 고백하지 않느냐에 따라 여러분들의 영원한 거처가 달라지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음부의 권세, 어둠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그 예수 이름을 붙들고 심판에 빠지지 않고 건짐 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임을 분명히 믿고 이미 승리한 인생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고난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 장사 지내심, 음부에 가심, 이 네 가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못박혀 죽으셨다는 것으로 고백이 끝날 수 있는데, 장사 지내심을 구채적으로 고백 하는데는 중요한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죽으신 후 장사 지냈다는 것은 예수님이 완전히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전히 죽어야 할 나를 위해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고, 그 시신을 무덤에 두었다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죽음과 죽음의 권세, 어둠과 어둠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사흘 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의미가 바로 죽음과 죽음의 권세를 깨시고 어둠의 권세를 깨시고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는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바로 가지 않고 사도신경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시고, 음부에 가신 후 부활하심을 매우 중요한 의미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달려 죽으신 곳도, 무덤이 위치한 곳도 동산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 동산이 가지고 있는 깊은 영적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완벽한 공간으로 에덴 동산을 만들어 인간을 두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아담과 하와는 그 완벽한 곳인 에덴동산에서 쫓겨남으로 본향을 잃어버린 인간이 유리하고 방황하면서 타락과 변질의 역사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내신 곳이 모두 동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잃어버리고 쫓겨난 에덴 동산의 회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치루신 은혜가 있는 곳이 동산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바로 이 잃어버린 동산의 회복에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 치르는 현장에는 어제 배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함께 또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에게 배반하거나 도망가거나 숨었습니다. 혹은 어리석은 결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 예수님 앞에 용기를 내어 당당히 예수님께 나아왔던 자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였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3장에 등장하는데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찾아왔다는 의미도 있고 인생의 가장 어두울 때 찾아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해서 보이지 않게 조용히 믿어야 되기 때문에 밤에 찾아왔던, 인생의 어려움과 깊은 고난의 어둠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왔던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생사 화복이 다 있는데 그 생사 화복 자체가 복과 화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그 생사 화복이 예수님을 찾아오게 만드는가 아닌가에 복과 화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낮이던 밤이던,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예수님을 찾아오게 만드는 도구가 되었다는 게 복인 것입니다. 내 인생의 생사회복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도구와 기회가 되게 만드는 게 복된 인생이자 형통한 인생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누구에게도 들을 수 없었던 생명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너의 인생 본질적인 문제는 거듭남에 달려 있음을,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며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핵심을 짚어 주십니다. 육신의 자연적인 출생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거듭남을 통해 네가 믿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고 천국 백성 되는 놀라운 복이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 3장은 니고데모가 거듭났는지 아닌지, 변화했는지 변화하지 않았는지를 증언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하루 아침에 뒤집어 진건지 점진적으로 변한 건지 모르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했는지는 모르나 분명히 니고데모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난 거듭난 제자가 되었음을 증언합니다. 거듭난 제자로서 니고데모는 결정적 순간에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을 찾아오는 용감한 제자가 됐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예수님께 용기 내어 찾아와서 가져온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몰약입니다. 몰약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동방 박사들이 가지고 왔던 것, 황금과 유향과 몰약, 그 중에 하나입니다. 몰약은 고대에 향수나 의약품으로 쓰이는 것으로 에센셜 오일 중에 최고급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귀한 몰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시신에 부은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을 통해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값비싼 향유를 부으며 곧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던 여인의 헌신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인이 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것이 낭비라고 막 몰아 세웠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이 나에게 곧 찾아올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여인이 부었던 그 비싼 향유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았듯이, 동일한 마음으로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을 부으며 장차 있게 될 부활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 앞에 나아온 참 제자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점점 어두워 가고 소망이 사라지는 것 같고 제자들과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모두 숨고 도망 간거 같이 보이는 어둠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떠난 것 같은 십자가 앞에서도 예수님을 찾아간 제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도, 니고데모도 더 이상 숨어서 몰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질 정도로 나는 예수님과 한 편입니다…나는 예수님과 함께 함을 선명히 고백하는 놀라운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찾아온 거와 마찬가지로 나의 인생이 모든 사건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는 도구와 기회 되는 인생이 복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니고데모와 같이 인생의 깊은 어둠 속에서,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내 인생의 십자가가 예수님을 찾아오는 도구와 기회 되는 인생이 형통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에 펼쳐지는 여러가지 사건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고 예수님께 나아오는 도구와 기회가 되도록 나의 인생을 드리며 끝까지 주님 앞에 충성된 하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난 후에 시신을 장사 지내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고난주간 때마다 십자가 사건을 계속 마음에 묵상하고 있는데,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십자가 앞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믿음의 선택입니다. 성경은 십자가 앞에서 대부분은 빌라도와 같은 잘못된 선택, 부끄러운 선택을 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 잘못이 없으며 억울하게 잡혀 왔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아내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앞에서 어리석은 선택을 하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판결을 하게 됩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은 선택들도 있습니다. 앞에서는 예수님과 목숨을 걸고 함께 할 것 같이 호언 장담했지만, 실제로는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다 숨고 도망갔고 배신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런 어리석은 선택과 불신앙의 선택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선택을 오늘 말씀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통해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전면에 나와서 목숨과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깨지고 병들고 아픈 세상에서 인생을 살다 보면 큰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발견하는 것은, 진짜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것 같이 생각되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숨어 버린다는 겁니다. 저 사람은 제일 먼저 와서 나를 도와 줄 것같이 기대고 믿었던 사람들이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고, 심지어 그 사람들이 배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내가 전혀 머리에 두지 않았던 사람들, 생각지 않은 의외의 사람들이 나에게 손을 내며 도움을 주는 일들을 큰 어려움 가운데 경험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은 사랑할 대상이지 믿고 의지할 대상이 아니라고 경고하시는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그 사람들, 나를 어려울 때 도와줄 것 같은 그 사람들에게 실제로는 제일 상처를 많이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게 인생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순과 같은 모습이 십자가 사건 앞에서도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같이 목숨 걸고 죽을 것 같았던 사람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배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사람입니다. 이런 전혀 의외의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게 됩니다.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을 보게 되면 아리마대 사람 예수는 부자이자 예수님의 제자라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그는 공의회 의원이자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부자일 뿐만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보게 되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이 두려워 조용히 믿던 신앙인임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분명했는데, 눈에 띄면 잃어 버릴 게 너무 많고 사람들에게 주목받으면 자기 위치에 어려움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예수님을 믿긴 믿지만 조용히 숨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 지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사 복음서에 모두 등장하는 내용이고 사도신경에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장사 지내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숨어서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믿는 게 그의 인생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는데 십자가 앞에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놀랍게 변하고 뒤집어 진 것입니다. 빌라도는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잘못된 선택을 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 배신하고 숨어 버렸는데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 앞에서 정반대로 믿음의 결정과 결단을 통해 역사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어떻게 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 앞에서 극적으로 변화했는가에 대해서는 증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십자가 사건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에게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 것이 분명함을 증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그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로 말미암아 놀라운 믿음의 결정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몰래 조용히 보이지 않게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목숨과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전면에 나오는 예수님의 놀라운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십자가 앞에서 에수님에 나아와 목숨을 걸고 전면에 나와서 위험을 감수하는 두 가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한 겁니다. 지금 분위기는 몸을 바짝 사려야 되는 분위기입니다. 모든 대중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고 종교 지도자들이 수를 써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직후이기에, 그럴 때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선다는 것은 잃어야 할 것이 많았고 목숨을 거는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 빌라도에게 나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나는 예수님과 한 편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걸 통하여 성경은 아주 극명하게 빌라도의 십자가 앞에서의 잘못된 선택과 아리마대 사람의 십자가 앞에서 믿음의 선택을 딱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놀라운 믿음의 선택은 바로 그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껏 장사 지내는 겁니다. 지금 로마 군인들이 다 쳐다보고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말했던 수많은 무리들이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홀로 피투성이가 되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시신, 정말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겁니다. 시체를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나중에 죽을 때 쓰려고 했던 새 무덤에 주님을 모시고 장사 지내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열광하고 환호 할 때, 예수님이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행했을 때 예수님과 함께하고 내가 한 편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에게 떠나갔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아우성 친 십자가 앞에서, 죽으셔서 시신이 된 예수님에게 나아가 나는 예수님과 한 편이라고 말하며 그의 제자라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 시신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 곁에 마지막까지 함께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시체가 된 예수님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루며 나는 예수님과 한 편입니다, 나는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 있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선언하며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고난주간을 지나가면서 마음에 진지하게 물어보기 원합니다. 나는 십자가 앞에서 어디에 서 있는가….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은 십자가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디에 서 있습니까? 빌라도와 같이 양심과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어리석은 선택과 판결로 나아갑니까? 말로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것 같았는데 십자가 앞에서는 다 숨어버리고 배신하는 선택으로 나아갑니까? 아니면 그냥 대중의 편승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그런 무리들의 선택입니까? 아니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같이 십자가 앞에서 위험과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과 한 편임을 선포하며…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함을 선택하십니까? 이 말씀을 통해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믿음의 선택으로 나아가기를 초대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빌라도의 선택이 아니라, 제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선택이 저와 여러분들의 선택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번 고난 주간 새벽기도 시간에 사도신경을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셨음을 고백하고 나서 그 많은 공생애 사건들을 다 뛰어넘고 바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심을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가운데서 하신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많은 주옥 같은 천국 복음 가르침과 이사와 기적들이 복음서에 등장되어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다 패스하고 바로 십자가로 넘어간다는 것이죠. 이걸 통하여 두 가지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데, 첫번째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여러가지들이 있지만, 그것이 꼭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 중요한 것의 기준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에 인생을 집중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두번째 지혜는 예수님 공생애의 모든 것들은 결국 십자가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적과 기사들도, 제자들을 부르신 것도 모두 이 십자가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가게 될 천국을 위한 준비 과정이며 천국을 위한 예행 연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내 인생의 목적이 사명과 조율되고 천국에 조율되어 본질에 인생을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고난 주간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지혜라 믿습니다.
사도신경에서 예수님의 탄생 이후 십자가로 직행하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만큼 중요한 사건이 없음을 마음에 새깁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사명, 십자가를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셨음을 콕 집어서 고백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 고난 받으셨습니다. 먼저는 오늘 말씀에도 등장하듯이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통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을 통해서도 고난 당하셨고 무리들을 통해서도 고난 받으셨으며,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고난 받으셨습니다. 그련데 왜 사도신경은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님이 고난 받으셨다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을까요? 빌라도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면도 있고 자기 변호를 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사실 본디오 빌라도는 사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죄가 없으니까 풀어 줘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석방시키기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을 다 빼놓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증언하는 게 너무하다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 증언하는 이유는 빌라도가 로마로부터 그 자리에 임명 받은 재판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의 나라와 세상 나라를 대표하는 로마의 재판관으로 중요한 판결을 내리는 빌라도이기에,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법의 이름으로 판결 내린 자였습니다. 결정적으로 그의 아내로 사람을 보내 예수님은 옳으신 분이기 해를 가하지 말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잘못 없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그렇게 꿈에서 나타난 것 때문에 상관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판결하고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던 빌라도는 바른 판결 대신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빌라도는 상황이 어찌되었던, 자기 마음과 뜻이 어떠했던, 결정적으로 결과는 그의 선고를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위치에서 결정되는 모든 것들은 핑계 댈 수 없고 책임임을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계속해서 자기가 그 책임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회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내가 예수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 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서 책임회피를 하려 합니다. 정말 중요한 바른 판결을 해야 하는 위치에서 백성들에게 그걸 물어보는 겁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을 씻으며 예수님의 피와 자신이 무관하다고 책임회피를 합니다. 백성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통해서, 손을 씻을 것을 통해서, 이게 잘못되면 내 책임이 아니라 백성들 책임이라며 떠 넘기려 하는 겁니다. 문제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빌라도의 이런 책임 회피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도자 위치에 서고, 특별히 결정하는 위치에 서는 사람들은 때로는 외롭고 고독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임이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이죠. 어리석은 빌라도와 비슷한 사건이 며칠 전에 러시아에서 일어났었습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에게 미국이 정보를 분석해서, 조만간 테러가 있을 수 있으니까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정보를 줬다는 거죠. 그런데 푸틴 대통령이 뭐라고 결정했는가 하면 이건 미국이 러시아를 흔들기 위한 나쁜 의도다… 잘못된 정보라고 몰아 세우고 무시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안되 1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사망하는 끔찍한 테러가 일어난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면 지도자의 우매함이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그 백성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데 지금 빌라도는 그 결정적인 책임을 자신에게 있음을 부인하며 계속 책임 회피하며 결국 그 우매한 판결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만드는 직접 가해자가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불명예의 이름으로 매 주일 전세계의 성도들을 통해 계속 저주의 이름으로 고백되는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신 예수님, 그 고백의 본질은 본디오 빌라도를 집중하고 바라보는 대신 우리를 위해 아니라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우리 또한 빌라도와 같이 책임회피 하며 마치 빌라도에게만 책임이 있고, 나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는 태도를 보이면 안된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예수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로 인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오셨음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게 사도신경의 고백입니다. 사도신경을 통해 매주 고백하는 신앙 고백, 우리가 선포하는 믿음의 고백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나로 인해 당하신 고난이자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허락하신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에 인생을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나의 인생에 맡겨진 책임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빌라도가 아니라 나를 위해 고난 받으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주목하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묶여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무너뜨리는 사단의 공격은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공격 (Trial) 이 있고, 간접적인 공격인 미혹 (Temptation) 이 있습니다. 채찍과 당근이라고 생각하시면 딱 맞겠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대군의 직접적 공격에 벼랑 끝에 서게 되었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고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개인적으로 죽을병에 걸려서 큰 어려움에 빠졌지만, 절망과 원망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엎드려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로 하나님께서 15년 인생을 연장해 주시는 놀라운 치유와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히스기야는 너무 잘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다윗 왕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남유다에서 가장 위대한 왕 중의 하나로 성경은 평가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찾아온 미혹에서 히스기야는 안타깝게도 걸려 넘어지는 모습을 오늘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공격에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아갔고 자기의 죽을 병으로도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아가서 하나님이 역사하심과 하나님이 치유하심 모두 경험했는데 여기서, 미혹에서 무너지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 할 때는 정신이 확들 정도로 긴장감이 생겨, 하나님에 나아가 그렇게 의지했던 히스기야가 바벨론이라는 미혹과 유혹에는 긴장감이 없이 마음이 풀어져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너지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이라는 것이죠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편지와 예물을 이유 없이 보냈겠습니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큰 선물을 보내면 좋다고 덥석 받으면 안되고 좀 의심해보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게 선물이 아니라 뇌물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봐서 똑 같은 선물일지 모르나 선물과 뇌물은 결정적인 차이가 있으며, 뇌물에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는 겁니다. 바벨론 왕의 사신들이 가져온 예물은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었고, 미끼 같은 당근이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긴장감이 없이 마음이 풀어져서 이게 뇌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바벨론의 사신이 가저온 예물은 히스기야를 교묘히 공격하는 또 다른 패턴인 미혹이었는데 거기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무너진 것입니다. 성경은 선물을 가져온 바벨론 사신들에게 모든 것을 보일 거 안 보일 거 구별하지 못한 채 다 보여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왜 히스기야 왕은 바벨론 사신들에게 a급 군사 기밀을 공개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보였을까요? 여기에는 자기 과시와 교만이 있는 거죠. 내 나라가 이렇게 대단하고 이렇게 가진 게 많다고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그 자랑의 본질에는 “내 죽을 병이 나았다” 는 그 사실을 자랑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벨론 사신들은 히스기야 왕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까 기적으로 치유 받은 것은 몰랐는데, 히스기야 왕이 얼마나 그걸 자랑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놀라운 은혜로 나 같은 죄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하나님에게 그 모든 것을 돌렸어야 하는데 내 죽을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만을 강조하는 겁니다. 치유자 하나님이 빠진 채 내가 치유 받고 내가 기적으로 건짐을 받았다는 것만 강조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에 대해 거룩한 분노가 있었고 하나님을 자랑하는 데 앞장섰던 자가 히스기야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이름과 내 치유와 내 군사와 내 보물들이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병 고쳐 주심이 아니라 내 병 나음이 자랑거리가 되었기에 자기 교만에 빠져 내 나라의 보물들, 내 나라의 군대 내 창고의 모든 것을 다 활짝 열어 자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대단하고 이만큼 힘이 있고 내가 이만큼 부강하다고….죽을 병에서 건짐 받고 선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끝에 가서 자빠지는 인생이 되 버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바벨론의 사신들과 같이 끊임없이 우리를 흔드는 미혹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과 역경과 직접적인 공격에는 믿음으로 반응하여 승리하다가, 인생의 승승 장구 속에 조용히 찾아오는 미혹 앞에 사정없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영적 긴장감이 풀어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 게 당근에 사정없이 무너질 수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바벨론 사신의 미혹에 그 당근을 덥석 물고 하나님에게 나오는 대신에 나를 자랑하며 내 치유 받음을 자랑하는 자가 되 버린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바벨론의 당근에 영적 긴장감이 다 풀어진 히스기야의 자기 교만과 자기 자랑 때문에 치명적 결과가 찾아오게 됩니다.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준 거 다 바벨론에게 털리고 빼앗기게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몸에서 난 아들 중에 한 사람은 바벨론에게 사로잡혀 환관이 된다는 겁니다. 결국 남유다는 누구 때문에 국운이 기울어서 바벨론에게 망한다는 겁니까? 히스기야 왕 때문에….망한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비극의 소식을 들었으면 예전 히스기야 같으면 하나님 앞에 당장 나아가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한 번만 기회 주시옵소서…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기도했을 겁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내가 사는 날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나니까 하나님은 선하시다…대답하고 끝입니다. 자기 아들이 사로잡혀서 바벨론 왕의 환관이 되고 이 나라의 모든 것이 바벨론에게 빼앗긴다는데, 그게 나 때에는 일어나지 않으니 상관없습니다…이게 말이 되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죽을 병에서 건져 치유하시며 15년의 삶을 연장시켜 주셨을 때는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나아와 예배하며, 성을 다시 지키고 세우기 위해서, 그 사명을 위해 15년의 삶을 기적으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결론은 히스기야가 기적으로 15년을 더 살고 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좀 더 냉정하기 말하면 차라리 15년 전에 죽었으면 더 좋았을 인생이라는 겁니다. 15년을 더 산 게 히스기야 에게는 복이 아니라 화라는 겁니다. 15년을 기적으로 더 살아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 인생을 살며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는 앗수르 군대의 직접적인 공격만 있는 게 아니라 바벨론 사신의 미혹으로 흔드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바벨론의 미혹으로 오는 당근에 무너지고 어떤 사람들은 앗수르의 공격으로 오는 채찍에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는 대신에 자꾸 나를 자랑하게 되고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게 되고, 내 치유 받음, 내 축복받음, 내 신비체험이 자랑거리가 되어 무너질 수 있는 겁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치유, 하나님이 부어 주신 축복, 하나님이 부어 주신 신비체험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화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영적으로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마음이 풀어지지 않으며 인생이 잘 나갈 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인생의 고난과 역경 가운데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이 초심을 잃지 않게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게 만드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주신 사명 가운데 늘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데 앞장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히스기야가 남 유다에 찾아온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보였던 믿음의 반응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남 유다에 찾아온 큰 위기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잘 마무리 된 후 히스기야 왕 자신에게 찾아온 큰 위기와 어려움을 증언합니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에게 필적할 정도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으며 하나님께 충성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온 나라가 벼랑 끝에 서는 큰 위기가 찾아오더니, 그 어려움이 물러가고 아니까 이렇게 회복되기 어려운 죽을 병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놀라운 믿음을 가진 왕, 하나님과 연합하며 하나님의 형통한 은혜를 누리는 왕이었는데 그의 인생에 찾아온 것은 꽃 길이 아니라 가시밭 길이었습니다. 신실함과 충성됨에도 불구하고 큰 위기와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왔었습니다. 그 풍랑과 어려움 가운데 그는 무너지지 않았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앗수르 군대가 물러가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끝났습니다. 그렇게 국가적인 어려움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끝나고 나면 좀 쉬게 해주고 히스기야에게 평탄한 길을 좀 걷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어려운 국가적 위기를 풀고 나니까 찾아온 건 죽을 병입니다. 나라의 벼랑 끝 어려움과 고난이 끝나고 나니까 히스기야 자신에게 큰 고난과 어려움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이사야 선지자에게 듣고 있는 히스기야 왕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 말도 안되는 상황을 직면하면서 히스기야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곰곰히 묵상해 봅니다. 아니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섬기고 충성하고 정직한 왕, 유월절 정신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참 예배를 회복하려고 했던 그 신실한 히스기야 왕에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계속 닥치는지… 왜 국가적인 어려움이 그렇게 닥치고 그게 끝나니까 이제는 죽을 병에 걸리다니요. 그렇게 정직하고 신실하고 충성된 그 히스기야 왕에게 너는 곧 죽을 거라는 것을 굳이 이사야를 통해 예고까지 하시는 게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 말도 안되는 삶의 자리가 히스기야가 직면한 삶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신실한 성도들에게 닥치는 삶의 자리입니다. 인과 응보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고 머리 속 계산으로는 도저히 맞지 않는 하나님의 정직하고 신실한 성도들에게 닥치는 어려움과 고난, 기막힌 어려움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있을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깨지고 아프고 눈물나는 세상을 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의 반응은 원망과 낙심입니다. 아니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오지?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사람들을 향한 원망이 밀려옵니다. 마음이 낙심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하고 내려 놓으려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놀라운 믿음의 반응이 뭐냐 하면 죽을 병에 걸린 그때에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것이죠. 낯을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죽을병에서 걸린 그가 했던 것은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내 몸이 죽을 병에 걸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는 겁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진심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여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한 것을 기억해 달라며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통곡의 눈물과 함께 드리는 마음 쏟는 기도였습니다. 상황 중심의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의 반응이었고, 그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합한 자로서의 믿음의 반응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위대하고 그의 믿음이 대단한 이유는 그의 삶에 어려움과 고난을 하나님이 다 피하게 해 주셨다는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히스기야의 신실함과 정직함은 그 인생에 찾아오는 설명되지 않는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믿음의 반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데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어떤 방법론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가는 것, 이게 기적이며 놀라운 믿음의 반응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과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이 계산된 대로 쫙쫙 잘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계획과 계산대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설명되지 않는 삶의 자리에서 신음할 때,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반응이 바로 형통한 삶입니다. 놀라운 것은 히스기야의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겁니다. 원망과 낙심 대신 하나님을 향하여 제일 먼저 은혜를 구하며 가까이 나와 하나님 앞에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드린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응답을 주셨는데 너의 기도를 들었고 내 눈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병에서 건져 주시고 15년을 더 살게 해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뜻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이신가?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는지 아닌 지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면서까지 불쌍히 여기신 사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요나 선지자를 통한 니느웨 백성의 멸망 예고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 말씀을 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 성의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반응하며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고 회개하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의 뜻을 돌이키셨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심판을 원하지 않으시는 자비하심이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셨고 히스기야 왕을 향한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히스기야의 정성이나 열심이, 눈물과 마음을 쏟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변경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게 했다는 생각은 위험한 해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가 너무나 정성과 마음을 쏟아서 그를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불쌍히 여기심을 통해 치유 받았으며, 더 나아가 죽을 병을 고쳐 주심을 통해 그 나라가 다시 한번 돌아오고 회복하기 원하시는 주의 뜻이 담겨 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죽을병에서 건져 주시고 15년 연장의 삶을 선물로 허락하시면서 네가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고 이 성을 보호한다는 치유의 목적성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병에서 히스기야를 고쳐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한 목적성이 있었고 이걸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사용하시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 히스기야와 같이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심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게 기적입니다. 원망과 낙심으로 주저 앉는 대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하며 마음과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도들은 문제나 고난과 어려움이 피해가는 인생이 아니라 눈물과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반응하는 기적을 누리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의 증거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기적, 눈물을 쏟고 마음을 쏟으며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를 고치시듯 우리의 병을 낫게 하시며 그 기적을 통해 이루실 분명한 목적성이 있음을 믿음으로 붙들기 원합니다. 눈물과 마음을 쏟으며 간절히 은혜를 구하는 기도, 주님의 뜻을 붙들고 응답 받은 히스기야의 놀라운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히스기야가 남 유다에 찾아온 절대절명의 위기 가운데 보였던 믿음의 반응을 배웠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찾아가거나 보이는 어떤 힘을 찾아간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절망에 압도 당하는 대신 선지자 이사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열망했습니다. 위기 가운데 이런 믿음의 반응은 절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기적이자 초자연적 은혜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이나 환경은 전혀 나아지거나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앗수르 군대는 남 유다를 포위하고 있었고,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앗수르 군대에서 마지막으로 남 유다에 최후통첩을 보내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항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놓지 않으면 너희는 모두 다 진멸 당할 것이다…라는 마지막 최후통첩을 히스기야가 받게 됩니다. 이제 온 나라가 진멸할 위기, 마지막 항복을 종용하는 최후 통첩의 압박과 협박 속에, 히스기야의 결정에 따라 백성들이 모두 멸망하느냐 아니냐의 기로에서 있는 절대 위기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마지막 최후 통첩의 소식을 가지고 히스기야는 또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벼랑 끝에 서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 진짜였던 이유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믿음은 껍데기 믿음이 아니라 진짜 믿음이었던 것이 이런 벼랑 끝에 서 있는 위기 가운데 온 나라가 진멸하고 항복해야만 하는 압박 가운데서도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최후통첩을 펼쳐놓고 히스기야는 이 상황에서 나를 도와 주시고 남 유다를 도와주세요….라는 탄원 기도가 먼저가 아니었다는데 있습니다. 그가 처한 위기를 놓고 기도하는 게 첫 번째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묵상하는 기도가 첫번째였습니다. 나라가 진멸될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그가 했던 첫번째는 하나님이 누구인가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신 참 하나님입니다…고백하는 겁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떠한지를 쏟아내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어떠신 분이신지를 고백하는 기도를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그 하나님이 우리를 앗수르의 손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믿음의 기도에는 분명한 순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기와 어려움과 급한 일이 있어도 그냥 살려주세요…도와주세요 기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먼저 고백하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붙들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건져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이런 믿음의 기도는 결국 내가 처한 상황의 전쟁이 이 분명한 기도의 순서를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는 전쟁이 되도록 하나님을 초대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현실은 히스기야와 남유다는 이길 능력도 힘도 없는 전쟁 앞에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군사력으로는 100%질 수 밖에 없는, 이길 수 없는 전쟁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믿음의 기도는 남유다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으로 만드는 기도입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고 홀로 영광 받으셔야 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저 앗수르 군대를 주님께서 친히 싸워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온 천하에 선포해 주시옵소서. 이 전쟁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는 구원의 싸움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이 싸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만 천하에 선명하게 보여 달라는 이 놀라운 믿음의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어려움과 기 가운데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의 반응,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 어려움과 위기 상황을 토해 내며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기도하는 믿음의 기도, 하나님을 전쟁에 친히 초대하는 믿음의 초대….그럴 때 앗수르와 치루는 전쟁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전쟁이 되며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싸움이 되며 내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시는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기도를 히스기야가 모든 민족이 말살 당하기 일보 직전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히스기야의 믿음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로 절대 이기기 불가능한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이기는 남유다를 보게 됩니다. 하루 아침에 하나님께서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치셨습니다. 지금 남한의 현재 군인 수가 60만 조금 넘는다고 하는데, 수천년 전 당시에 하루에 18만 5천명이 다 죽은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도 결국은 말씀대로 하나님의 손에 죽게 됩니다. 모두 하나님의 역사하심 외에는 설명되지 않은 놀라운 승리이고 그것은 단순히 남유다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하여 주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입니다. 내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싸움, 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끄시는 전쟁이 되도록 믿음의 기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죠.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이 되고 그 승리는 누구의 승리가 되냐면 하나님의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위기와 역경 가운데 히스기야가 했던 믿음의 기도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붙들어야 되는 믿음의 기도라는 겁니다. 이 믿음의 기도가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던 비결이고 여리고성이 무너졌던 비결이고, 히스기야가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는 비결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직면하는 불가능한 상황 그냥 희박한 확률의 상황이 아니라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0%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그 구원의 손길이 나의 일상의 삶에서의 직면하는 전쟁에서도 이렇게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심을 고백하는 놀라운 역사가 되는 겁니다. 벼랑 끝에서 당황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붙들고 나아가는 삶이 기적입니다. 상황이 변하지 않았는데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벼랑 끝에서 처한 전쟁을 하나님이 이끄시는 전쟁으로 내 인생을 걸고 맡기는 삶이 기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과 믿음 생활은 내 힘으로 수행하는 자연적인 생활이 아니라 하늘의 힘을 붙들고 나아가는 초자연적 믿음 생활입니다. 큰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붙들고 살아갈 때만 위기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주신 말씀을 붙들고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될 믿음의 기도라는 겁니다. 위기 상황을 먼저 묵상하는 게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묵상하는 겁니다. 상황을 놓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먼저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정말 홀로 영광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평소에도 하나님을 늘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인생의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먼저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역사하심 외에는 설명되지 않은 놀라운 그 전쟁의 승리를 경험하여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지며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손길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만이 높아지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앗수르 군대의 협박과 위협 가운데 절대절명의 위기를 직면한 히스기야왕이 보여줬던 영적 반응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군대로부터 너와 너의 나라는 망하기 일보직전이라는 모욕을 들었습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을 이간질 하려고 히스기야 왕의 말을 믿지 말라고 백성들을 선동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히스기야가 인생을 걸고 추진했던 종교개혁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 쓸데없는 것이라며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모욕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모욕적 이야기를 듣고 히스기야왕은 자존심이 너무 상했을 겁니다. 속으로는 화가 터져서 손이 다 떨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견디기 힘든 모욕과 국가적 위기 가운데 감정을 터트려 일을 그르치는 대신 제일 먼저 한 일이 재를 뒤집어쓰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간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얼마나 설명이 안되는 놀라운 믿음의 반응인지 모릅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앞뒤 좌우가 꽉 막힌 외통수 속에 사람들은 눈이 캄캄해 져서 왜곡된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던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나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려는 게 대부분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미 앗수르에게 멸망을 했습니다. 그 대군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남유다가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히스기야 왕은 눈 앞에 캄캄해 질 때 허둥대며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나 힘을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여호와의 전에 올라갔다는 겁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렇게 순전하고 놀랍고 대단했던 왕이었던 이유는 모든 본질을 꿰뚫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반응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 마음을 쏟아 놓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번째로, 내 스스로도 견디기 어려운 자존심 상하는 모욕도 힘들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자신이 당한 모욕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한 것에 대한 영적 반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하…도 모르는 앗수르 군대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이 그렇게 화가 나서 하나님에게 달려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영적 반응은 앗수르 군대로 말미암아 내 자존심이 짖밟혀 힘들고 내가 모욕당하는 것도 억울하고 눈물 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 나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내가 힘들고 어렵고 내가 모욕당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내 자존심이 꺾이는 걸 가지고 그냥 못 참아서 감정이 폭발하며 어쩔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모욕당하는 것에 우리는 별로 화가 나지도 마음이 어렵지도 않다면 이게 영적 문제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모욕당하는 것이 내 자존심이 꺾이고 힘들고 어려운 것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이고 아픔임을 체득하는 것이 바로 영적 반응입니다. 내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영적 반응입니다. 큰 풍랑과 어려움이 나에게 찾아올 때, 그 풍랑과 어려움이 나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는가, 혹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드는가…이것이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는 갈림길입니다. 큰 풍랑과 어려움 속에, 적들이 우겨 싸는 압박 가운데 눈앞이 캄캄 해지고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과 같은 암담함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감각과 느낌을 다 내려 놓고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며 하나님의 성전으로 달려간다면 그것이 바로 놀라운 믿음의 반응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름을 붙들고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의 성전에 내 풍랑과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이건 내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믿음의 반응이고 내 안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분명히 믿는 믿음을 가지고서만 보일 수 있는 영적 반응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인생이 잘 나갈 때도, 인생이 어려울 때도 모두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가 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반대로 믿음 없는 삶이란 인생이 잘 나갈 때는 교만해서 하나님을 떠나고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는 낙심하고 원망해서 떠나갑니다. 내 인생이 잘 나갈 때는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고 인생이 안될 때는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믿음 생활은 결코 자연적으로 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이 아니면 안되는 초자연적 삶입니다. 두 번째 히스기야 왕이 보인 영적 반응은 선지자 이사야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충고를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찾아와 눈 앞에 캄캄해지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질 않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위대한 점은 앗수르가 포위해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큰 위기 속에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샤야를 통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고, 또한 앗수르 왕은 하나님께서 처리하셔서 죽게 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은 전혀 바뀐 게 없습니다. 여전히 힘들고 어렵고 여전히 앗수르 군대의 압박과 위협을 견뎌야 했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나서도 계속해서 문제와 어려움은 더 커져만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을 주셨지만 눈에 보이는 상황은 변한 게 없는 겁니다. 주신 말씀 때문에 갑자기 그 다음날 모든 상황이 바뀌는 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상황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덥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주어진 겁니다. 내 변한 상황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주시면 말씀을 누구나 붙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눈에 보이는 상황은 그대로…여전히 죽을 것 같은 상황과 압박이 가득한데, 여전히 앗수르 군대는 위협하고 당장 죽을 거 같은데 그 변화되지 않는 상황에서 말씀만 주셨고 그 말씀을 붙들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주신 말씀을 붙들고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 하늘의 힘을 버티고 인내하며 주님께서 역사하심을 믿고 구하며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반응입니다. 히스기야의 놀라운 믿음은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신 말씀을 먼저 붙들고 믿었다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 모든 환경과 상황을 변하게 하시고 그 변한 상황과 함께 말씀을 주실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에게 주셨던 것은 변화된 상황이 아니라 그냥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나 믿고 마음을 담대히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저 앗수르 왕은 죽게 된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상황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겁니다. 여전히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앗수르 군대는 당장 남유다를 삼킬 것 같은 전혀 변하지 않는 상황 가운데 이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라는 것이 히스기야에게 주었던 도전이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도전입니다. 상황과 환경의 변화는 말씀을 믿고 붙들어서 그 말씀 가운데 일어섰을 때 하나님이 그 다음에 보여 주신다는 겁니다. 먼저 말씀을 믿어야 그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여주시면 상황이 바뀌면 그때 말씀을 믿겠습니다… 생각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는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 먼저말씀을 믿으라는 겁니다. 상황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주신 말씀만으로 네가 새 힘을 얻고 말씀에 의지하여 일어서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후에 역사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들이 풍랑과 같이 찾아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가운데 답이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와 같이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그 믿음의 영적 반응이 내 삶을 통하여 펼쳐지도록 주님께 은혜를 구하며 믿음을 붙들기 원합니다.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철저히 의지하고 내가 나를 붙들고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우리가 그 삶을 살아낼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가며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 피할 수 없는 풍랑 속에서,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히스기야왕과 같이 내 자존심과 내 이름이 모욕당하고 먹칠 당하는 것에 대해서만 분노하는 것을 넘어서 살아계신 하나님 이름이 모욕당하고 먹칠 당하는 것에 대해 반응하는 거룩한 분노가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 원합니다. 또한 상황과 환경이 변하지 채 말씀을 먼저 주실 때 그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는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주신 그 말씀에 나를 의지할 때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 말씀 가운데 나의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믿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힘을 얻고 담대한 믿음으로 두려워하지 않으며 최후 승리를 믿는 그 영적 반응이 내 삶의 반응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18장에서 히스기야 왕과 남유다가 처한 상황은 앗수르의 공격 앞에 앞뒤 좌우가 꽉 막힌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군대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유다로 내려와서 포위하며 포하고 너희도 제 독 안에 든 쥐다…항복하라면서 지금 당근과 채찍을 계속 주고 있는 벼랑 끝 위기 상황입니다. 앗수르의 협박을 모든 백성이 다 아는 유다말로 하는 이유는, 미혹과 협박을 통하여 백성을 흔들기 위한 심리전을 펴는 겁니다. 백성을 흔든다는 건 뭐냐면 백성을 흔들어 두려움에 압도당하게 만들고 싸울 의지를 꺾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왕인 히스기야를 신뢰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백성을 흩트려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벼랑 끝 위기 속에 이 앗수르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는 이 협박과 미혹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도전과 유혹과 미혹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협박과 미혹을 통해 이 말씀을 풍랑과 어려움 속에 성도들이 직면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모습으로 비추어 보기 원합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사노라면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오는데, 그 삶 속에서의 어려움은 조그만 어려움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직면하는 앗수르의 어려움이자, 여리고성의 어려움이고 골리앗의 어려움입니다. 여리고 성과 골리앗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내 힘으로는 절대 싸워 이길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거나 작은 게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머리로 분석하고 계산했을 때는 이길 확률이 0%인 절대 불가능한 어려움입니다. 지금 남 유다가 민족적으로 직면한 어려움인 앗수르 대군에 포위 당한 어려움이 바로 이길 확률이 0%로 보이는 큰 어려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벼랑 끝 어려움에서 앗수르가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을 향한 첫번째 협박과 유혹은 앗수르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바로 성 안에 있는 너희 모두 몰살당할 것이라는 협박입니다. 너희가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텐데 그러면 성 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식량이 떨어지고 모든 게 끊기게 되니까 너희는 대소변이나 먹고 앉아 있는 비참한 끔찍한 지경이 될 거라는 듣기에도 거북한 협박하는 겁니다. 두번째 협박은, 앗수르 대왕 말씀을 들어야 살지 히스기야 말이나 하나님 말씀이나 들어봐야 소용 없다는 협박입니다. 너는 이 세상 왕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듣지 말고 하나님이 보낸 왕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계시면 네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 대신 누구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까? 이 세상 짐승나라의 왕, 앗수르 대왕의 말씀을 들으라는 겁니다. 히스기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뭡니까? 이 어려운 풍랑 가운데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라….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믿어서 뭐가 변하는데? 말씀이 안 믿어지고 믿지 말라는 미혹이 계속 스며들어 찾아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말라…대신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끊임 없이 마음 속에서 미혹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산다는 말씀, 믿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건져 주신다는 말씀 믿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앗수르와 세상이 말하는 소리를 붙들어야 산다는 미혹을 끊임없이 주는 겁니다. 세번째 협박은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내지 못하신다는 협박입니다. 여리고와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 서게 되면 내가 아무리 머리를 쓰고 계산해보고 상황을 파악해 봐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그 때, 내 마음에서는 이 미혹과 협박의 음성이 들려오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에 대항해 살아남은 민족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이 너를 이 세상에서 건져 주신다고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미혹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비현실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겁니다. 이 절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지금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흔드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건져줄 수 있겠냐고 비아냥 대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건져 주시지 못해! 여호와 하나님은 너를 절대 건질 수 없다….불신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에 항복하고 세상에 나아오면 너희는 죽지 않아…. 지금 세상에 저항하면 허기진 배를 쥐고 배설물을 먹고 살아야 되지만 이 세상에 고개를 숙이고 항복하면 너는 적어도 잘 먹고 잘 살수 있어… 세상에 항복하고 세상에 나오는 게 내가 살 길이야…. 이것이 성도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영적 전쟁이자 삶의 도전입니다. 이 앗수르의 협박과 미혹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계속 들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일상에 찾아오는 매일의 영적 싸움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점점 들리지 않고 믿을만 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며, 세상이 던져주는 말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믿을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비현실적이고 상황 파악 안되는 말로 여기고, 믿지 못할 말, 의지하지 못할 말로 여기게 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미혹과 협박입니다. 눈이 있으면 제대로 보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 현실적이지 못하고 상황 파악을 못하냐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잘 비교해 보면 누가 능력자인지 금방 나오는 거 아니냐…미혹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만 순전히 믿는 신앙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 우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미혹과 협박 앞에 마음이 우리가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요동치지 않으며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 기적입니다. 잠잠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실제로 믿으며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게 바로 기적의 삶입니다. 내가 처한 여리고 성과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믿는 믿음을 붙드는 것이 기적의 삶입니다. 여리고 성이 앞에 있고 골리앗과 싸워야 하고, 앗수르 대군에 포위당한 것 같은 절박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말고 상황 파악 잘하게 하고 현실적인 세상의 말을 들으라는 미혹과 협박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에게 허무함을 가져오는 이 협박과 미혹 가운데,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히 말씀을 붙들기 원합니다. 나의 처한 문제를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앗수르 대왕의 말로 풀려 하는 이 미혹이 현재형으로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순전한 신앙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것임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삽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훨씬 더 크고, 눈에 보이는 앗수르 대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훨씬 더 크심을 선명히 믿고 붙들어야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신뢰할 때 풍랑이 찾아오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 어려움이 찾아오지만 최후 승리를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 가운데, 적의 우겨쌈을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 잠잠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말씀이 나의 성취되는 놀라운 은혜를 실체로 경험사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과 견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산당들을 더 허물었고 하나님을 의지함을 넘어 허리띠로 같이 매는 연합의 관계로 하나님과 형통함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고 놀랍게 산 왕이었다면 적어도 히스기야의 삶과 남유다의 삶에는 큰 고통과 어려움은 좀 피해가거나 면제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응보에 따른 논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왕,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예배의 갱신과 부흥을 열게 한 히스기야에게 꽃길까지 아니어도 적어도 이런 가시길 허락하시면 안되는 게 아닌가…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스기야왕은 면제 당하기는 커녕 앗수르로부터 큰 어려움과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 모든 신실하고 정직한 일들 후에 히스기야 왕에게는 큰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온 겁니다. 히스기야가 당하는 어려움은 작은 어려움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흔드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 앗수르가 남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지금 여러 지방들이 이미 다 함락이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막 들이닥치려 하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 당했듯이, 남유다도 멸망 당하기 일보 직전의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했던 왕, 하나님 앞에 이런 놀라운 일들을 다 한 후에 갑자기 찾아온 큰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풍파와 어려움을 면제 받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성도들도 불신자도 동일하게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고 내 계산으로는 도대체 맞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따랐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 오느냐….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의 인과 응보의 계산으로는 맞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신실하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해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이런 큰 국가적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다 제거하고 우상을 무너뜨리고 예배를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때에는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영적 전쟁의 핵심입니다. 히스기야가 갑자기 찾아온 국가적 어려움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앗수르가 그렇게 공격해 와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 자체로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 어려움에 히스기야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경황도 없고 놀라도 당황해서 앗수르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들이 요구한 과도한 조공 요구에 성전에 금을 다 벗겨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치스러울 정도로 금과 은을 다 긁어 모아 가지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친 겁니다. 그렇게 원하는 조공 받았으며 물러가야 하고 공격 안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공을 받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달라는 걸 줬으면 공격하지 않고 돌아가야 되는데, 조공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 겁니다. 또다시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나서 앗수르 군대는 심리전을 펼치며 히스기야왕과 남유다 백성을 두 가지로 흔듭니다. 첫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과 개혁을 비난하고 무시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백성들을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조율시키고, 산당을 없애고 우상을 없애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신앙이 뭔 힘이 있냐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어려울 때 힘을 주지 않는 하나님라고 깎아 내리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신앙은 소위 말하는 현실적이지 않는 일만 가지고 백성들을 지금 힘들게 한다면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을 흔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단행했던 여호와만을 믿는 신앙과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전한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을 흔들고 무시하는 것이죠. 두번째로 히스기야 왕의 군사력을 무시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남유다 가운데 앗수르 대군과 싸우러 나와 말을 제대로 탈 수 있는 사람이냐 있냐는 겁니다. 너희 중에 말을 탈 사람 있으면 내가 말 2만 마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군사력이 앗수르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너희가 아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히스기야의 군사력을 무시함으로서 백성들에게 싸울 의지를 다 꺾어 버리는 것이고, 히스기야와 백성들 사이를 계속 이간질하는 겁니다. 이 앗수르 군대의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리전은 지금 이 시대에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흔드는 사단 마귀의 미혹의 패턴과 동일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마음속에 계속 찾아와 흔드는 사단의 심리전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신뢰한다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신실하게 산다는데 왜 너의 인생에는 그렇게 어려움이 있는 거야? 왜 너는 똑같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거야? 네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아서든, 혹은 네가 믿는 하나님이 별로 쓸모가 없던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 이렇게 흔드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뭐야?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뭐냐는 것이냐며 계속 우리를 흔들어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게 사단의 심리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하고 신실하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갈지라도 우리 삶에는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공식과 계산에 들어맞지 않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 성도로서 우리는 낙심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거나 떠나갈 것인가, 반대로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도구로 삼느냐…의 기로에 서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내 인생이 안 될 때 낙심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내 인생이 잘돼서 계속 올라갈 때 이게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내 인생이 내리막길로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이 올라올 때 질문을 묻어두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붙드는 싸움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생각과 내 눈앞에는 하나님의 부재가 가득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싸움, 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힘을 붙들고 버티는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이 없으면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되심을 정말 믿음으로 고백하며 내가 주님의 힘을 붙들고 그 고난과 어려움을 버텨내는 겁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기적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버티며 이겨내는 그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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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bruary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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