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에서 다윗왕이 하나님 법궤를 가져오는 좋은 일을 잘못된 방법으로 하며 실패하고 무너진 사건을 배웠습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통해 사람들 민심에 민감하며 하나님이 마음과 눈에는 얼마나 옳은지는 둔감한 채, 세상 방법을 쉽게 가지고 와서 하려 했던 것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왕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는 것이 중요한 삶의 원리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14장 말씀은 13장의 실패의 모습을 넘어 정신차려 하나님과 상의하고 뜻을 구하는 것보다 앞서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승리와 영광으로 나아가게 되는 말씀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높여주는 가운데 교만하지 않는 다윗왕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승승 장구하니까 사람들이 사신들을 보내고 돈이 모이고 힘이 모이고 있습니다. 본인이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석수를 보내고 목수를 보내고 성전을 위한 자재인 백향목을 보내는 것을 보면서 주변사람들이 다윗왕을 칭송 했을 겁니다 이건 다윗이 잘해서 이런 것들이 오는 것이다. 다윗이라는 위대한 왕이 있어서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일이 생긴다. 틀린말이 아니지요…그리고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위가 높아지고 인기가 높아지며 가만히 있어도 목이 곧아지고 우쭐해지는 상황에 다윗왕이 서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다윗이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됩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인기가 높아지고 재물이 모이고 사람들이 칭송하고 하는 모든 게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이스라엘 왕으로 삼아 나를 사용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사람들이 환호해주고 박수쳐 줄때, 성공할 때 무너지기가 쉽습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며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 일이 좀 풀리고 잘되고 사람들이 박수치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인기가 올라가면 사울 왕과 같이 내 기념비를 세우고 나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변질되며 무너지는 게 많은 사람들의 패턴입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이 패턴을 벗어나 끝까지 믿음의 가치와 겸손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을 놓치지 않았던 거예요. 이런 일이 있을 때 내가 잘나서 그런 게 아니다…분명히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자기 인생을 돌이켜 내가 이 자리에 왜 있고 내가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 나는 왕이 될 조건이 하나도 없고 실수도 많고 부족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사람을 왕으로 삼으신 것이고 그걸 통하여 그의 나라가 높임 받으시기 원하심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들림을 받고 높임을 받기 위해 나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나같이 부족한 자를 왕으로 세우신 것이다…라는 그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런 겸손하고 한결같은 태도와 자세,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전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사랑하시고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두번째 등장하는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13장에서 실패를 만회하는 변화된 태도와 자세를 발견합니다.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블레셋을 싸워 이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을 이기는 방법인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 가 반복됩니다. 블레셋과 전쟁할 때 다윗의 군대가 물론 힘이 세고 전략이 좋아서도 이겼겠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다윗왕의 태도가 바뀐 것이죠. 사람들을 찾아가 사람들을 묻고 겉의 힘과 군사력으로 싸우는 전쟁을 하는 게 아니라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묻는 겁니다. 다윗왕은 법궤를 가져오면서 실패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확히 인정하고 무릎 꿇고 하나님께 경외 하며 나아가는 그 초심을 잊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레로 쉽게 가져오려 하다가 무너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조율 되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블레셋과의 전쟁을 하게 되는 겁니다. 전쟁이라는 그 치열하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눈에 이 전쟁이 옳은 것인지 하나님의 뜻에 기뻐하시는 일인지 제일 먼저 묻는 다윗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겁니다. 이게 다윗 왕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역사에 있어서 항상 돌아가야 할 기준을 제시하는 위대한 왕이 된 이유기도 합니다. 다윗이 완벽해서 아니라 실패가 없어서 가 아니라 그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언제나 하나님에게 합한 자 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합한 자로 살아 갔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다윗왕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윗 왕을 바라보며 우리가 신앙 생활에 바른 자세와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습니다. 그 태도가 작아 보이지만 태도가 가져오는 결과는 어마어마하게 다르다는 겁니다. 내가 예배를 드릴 때 주일 성수를 할 때 봉사할 때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대단해서 특별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 나를 지키신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인생이 잘 될 때 우리에게 큰 복들이 모일 때, 사람들의 박수와 재물과 인기가 모아질 때 다윗왕과 같이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도구로 삼으신 것을 깨닫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이 겸손한 마음을 갖도록 기도하십시오. 그게 저와 여러분들이 끝까지 쓰임 받는 비결이며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임하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이 정신을 잃어버리고 내 자신이 강조되는 순간 우리는 변질되고 이탈되어 결국은 영적 하향곡선을 그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먼저 찾고 주님께 먼저 물어보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지 늘 체크하며 바른 자세와 태도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내 삶에 깊숙히 개입 하시며 하나님이 놀라운 역사와 일하심으로 내 삶의 승리와 기적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하나님에게 합한 마음 하나님의 향한 순전한 마음이 있을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가 떠나지 않는 겁니다. 이 태도가 있는 자가 하나님께 끝까지 쓰임 받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자가 되는 거예요이 영적인 선순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어 다윗 왕과 같이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은총이 떠나지 않는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굵직굵직한 다윗 왕과 같은 믿음의 영웅들, 주인공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친숙한 익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잘 모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하나님을 섬긴 조연들, 우리 생각에는 조연이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주연과 같이 동일하게 큰 사람인 수많은 숨겨진 사람들이 성경에는 지속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다윗 왕의 큰 그림 가운데 가려져 있는 한 사람, 숨은 진주와 같은 사람을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증언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오벳에돔입니다. 우리가 특별히 관심 갖지 않으면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이름이고, 오벳에돔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 익숙하지 않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벳에돔이 성경에서 참으로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의 하나가 뭐냐면 성경에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이름인데, 그 때마다 오벳에돔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오벳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 증언합니다. 또 역대상 26장에도 오벳에돔이 등장하는데 그 때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복 주신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그러니까 오벳에돔 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 사람이라는 수식어 있을 정도로 성경에서 그의 이름 뒤에는 하나님이 복 주신 이야기가 꼭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오벳에돔이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누리는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하나님이 복주시는 특권 속에 살게 되었는가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지금 다윗왕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어쩔줄 몰라 하는 상황, 그 상황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다가 사고가 난 직후입니다. 사실 사사기 시대에 하나님의 법궤는 하찮게 여겨지며 거의 창고 같은데 방치되듯이 무시 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과 중심에 두지 아니하고 눈에 보이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영적 암흑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귀하게 여겼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오랫동안 창고에 방치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아주 푸대접을 받은 영적 암흑기의 특징이지요. 그러다가 다윗왕은 그 동안 잊고 방치되고 푸대접 받았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좋은 뜻이고 좋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그의 순전한 열망이었죠. 다윗왕은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위해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오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동기는 순수 했는데 방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군인들과 정치 지도자들과 먼저 상의하고 정치적 의도를 비치고, 사람들의 의중에 왔다 갔다 하고, 메고 와야 할 하나님의 법궤를 쉽고 편한 방법, 블레셋 사람들이 쓰는 방법인 수레에 끌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법궤를 함부로 만져서 사람이 죽는 일이 벌어지는 사고가 났고, 그 가운데 다윗은 지금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웃사의 저주를 보며, 다윗왕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쩔줄 몰라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법궤를 보관할까를 고민하다가, 다윗성으로 매어 들이지 못하고 그 대신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하나님의 법궤를 임시로 보관하게 됩니다. 사실 오벳에돔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법궤를 잘못 움직이는 순간 온가족이 몰살 할 수도 있다는 그 두려움이 가득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오벳에돔은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법궤를 집으로 모셔오는 순종과 신실한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왜 굳이 우리집에서 그 위험천만한 하나님의 법계를 맡으려 하는가? 그런데 오벳에돔은 그런 두려움을 떨쳐내고 다윗왕의 명령대로 여호와의 궤를 자신의 집에 안전하게 인도하게 되는 것이죠. 잘못 만지거나 스치기만 해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 있는 그 위험한 법계를 그는 집안으로 가지고 왔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법계를 두려움을 넘어 순종하는 마음으로 정성껏 잘 간직해서 가지고 온 거죠. 그걸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임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 오벳에돔의 마음을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결국 이것을 통해 내면의 하나님을 향한 그 순전한 마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마음, 하나님을 정성을 다해 모시려는 오벳에돔의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보셨다는 것이죠 특별히 웃사가 갑작스럽게 죽은 말씀과 오벳에돔의 모든 집과 소유에 복을 내리셨다는 말씀이 아주 극명하게 대조가 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법궤와 말씀을 어떤 태도와 자세로 바라봐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원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고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른 태도와 자세로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두기를 거절하며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냥 수레로 쉽고 편하고 빨리 끌고 와서 내가 원하는 식대로 하면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며 결국은 어려움에 처하는 많은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복을 우리가 정말 구한다면 정말 사모 한다면 내 마음이 하나님 그 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바른 태도와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내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방법과 뜻을 따라 가며 복 받을 마음의 태도가 있어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그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을 주기 원하셔도 우리가 거룩함으로 준비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복이 우리 가운데 머물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원하시며 말씀에 기준을 붙들고 바른 태도로 하나님을 붙들고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하늘의 특별한 복이 임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벳에돔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와 자세로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머무심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에 우리의 소유에 풍성히 임하는 그 삶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우리 가정에 머무는 것을 통해 이 오벳에돔이 누렸던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과 역대하는 다윗 왕조의 다윗 언약을 회복해야 될 본질로, 우리가 초대교회를 회복해야 할 원형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그 소망을 붙들고 과거의 다윗 왕조를 복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왕에 대한 실정이나 실수가 많이 생략되어 있고 다윗왕의 영광을 회복하기 원해서 좋은 면들을 부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상 13장 말씀은 다윗 왕의 실정인 베레스 웃사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냥 넘어가도 되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다윗 왕조의 실패와 실패를 증언하는 것을 통해 어떤 목적의 의미를 되새기기 원하는가? 이것이 바로 저와 함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눌 큰 그림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몇 가지 결정적 실수가 등장하게 됩니다. 먼저 다윗왕이 하나님의 법계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려는 그 생각 자체는 굉장히 좋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방치돼 있고 우리는 하나님의 법계를 가까이에 두고 중심에 두고 살아야 될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법궤를 가지고 오는 것 자체는 좋은 일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적은 좋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나 의도가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나가는 실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번째 실수는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이야기를 먼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정치 지도자들과 군인들 하고 먼저 상의했다는 것입니다. 1절 말씀을 보면 군인들과 정치인들과 이 일을 먼저 더불어 의논하고 있습니다. 모든 물밑 작업은 정치인들과 그리고 군인들과 먼저 의논을 한 후 제사장들에게는 그냥 통보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을 통하여 다윗 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 아무리 의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정치적인 의도를 깔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윗 왕의 결정적 실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옮겨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고 있다는 그림을 보이는 것을 오늘 역대상 말씀은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죠. 좋은 일을 하는데 정치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비슷한 실수가 그 다음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4절 말씀을 보면 뭇 백성의 눈에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따라갑니다. 백성들에게 굉장히 민주적인 모습으로 지금 다윗 왕이 다가간 겁니다. 왕인데 자기 혼자 결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상위에서 결정하는 것 어떻게 보면 절차상으로 문제가 없고 굉장히 이상적인 왕의 모습과 같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역대상은 이것을 지금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는 거예요. 민주적인 절차가 잘못돼 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게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다윗 왕의 마음에는 사람들의 민심에 민감한 사람 중심의 왕이 되고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 백성들의 눈에 그 일이 족히 어겨 진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눈에 좋게 여겨 지는지 아닌 지는 고려하지 않고 민감하지 않은 상태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관점과 눈이 더 민감하게 나아가는 이 영적인 모습을 우리가 놓쳐버리면 결국 사람들의 민심에 민감하며 사람들의 의견에 왔다 갔다하며 사람들의 눈에 좋게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소가 되는 겁니다. 지금 그것이 바로 다윗왕의 두번째 실수였습니다. 세번째 실수는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데 수레에 운반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반드시 메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나 메는 것도 아니고 아주 구별된 사람에게만 맬 수 있도록 민수기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6-7절을 보면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오는 겁니다. 그 당시 수레를 이용하는 것은 이방 종교에서 쉽게 했던 방법들입니다… 왜냐하면 편하니까요 간편하고…그러니까 비 인격적인 존재인 그 우상들을 싣고 다니는데 무겁고 힘들고 그 당시 땅이 또 메마르고 덥지 않습니까…그러니까 수레가 얼마나 옮기기가 편해요. 일도 간편하고 그러니까 수레로 그냥 짐 싣고 다니듯이 쉽고 편안하게, 세상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고 하나님은 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세상적인 방법으로 쉽고 편한 방법으로 법계를 가져오면 안되는데 그냥 생각없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겉으로 보기 문제 없으니까 새 수레에 싣고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는 겁니다. 그러다가 9절 말씀 보면 결국 이런 실수들이 다 모여서 터지는 사건이 일어나는 겁니다. 타작 마당까지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편하고 쉽게 오다가 타작 마당에 땅이 고르지 않으니까 소들이 막 뛰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흔들리니까 그 흔들리는 궤를 붙잡았다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치셔서 죽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관심이 없고 인간적인 방법과 사람들의 민심에만 민감했던 이 모든 것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터지게 된 사건이 바로 이 웃사의 사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에 손을 대서 죽게 되는 이 비극의 사건, 베레스 웃사를 통해, 지금 다윗 왕은 정확하게 진리를 깨달았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죠. 하나님의 일을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구나…정치적으로 사람들에게 왔다갔다 해선 안 되는구나…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면 안 되는구나…내가 왕이 됐다 고 내 마음대로 내 생각대로 사람들이 다 좋다 그러면 되는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거죠. 하나님이 어떻게 좋게 여기시며 하나님의 눈에 이것이 좋은 방법인가 를 내가 상의하지 않았구나..라는 것을 다 깨닫게 되며 하나님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도, 잘못된 방법으로 추진하면 어려워 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지혜, 하나님의 눈에 좋게 여기시는지 민감하게 바라보는 지혜, 하나님과 상의하는 이 겸손한 마음을 붙들고 나아가는 이 마음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을 알려주며 역대상은 이 성전 건축이라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눈에 좋게 여기시는 기준을 분명히 붙들고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좋은 대로 가면 안되고,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가면 안되며 오직 하나님의 눈에 기뻐하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성전이 재건되야 하는 것을 현재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는 이런 좋은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과 상의하지 않고 하나님의 눈에 좋게 여기시는 지 둔감한 채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박수 치면 만사 ok라고 여기는 착각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며 하나님과 상의하며 하나님의 눈에 좋게 여기시는 이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하나님의 일을 끝까지 하는 주님의 귀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 군대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데 특별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다윗을 배신하지 않고 오히려 다윗에게 더 가까이 왔던 은인과 같은 군사들, 공신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13년의 광야 생활을 통해 다윗에게 오직 하나님만 왕으로, 목자로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다윗을 연단시키셨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배운 아둘람 굴과 함께 대표적 어려운 시절이 바로 오늘 말씀의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입니다. 사울왕이 하도 죽이려고 쫓아오니까 블레셋으로 도망가는 시절이었습니다. 가장 인생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그 어두운 터널에 시간에 다윗에게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데요. 바로 그 도망자로 지명 수배가 내린 다윗을 따르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생긴 겁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도망자의 신세였고, 왕의 지명수배를 받은 다윗을 따른다는 것은 반역죄인이 되는 것임에도, 다윗과 함께 하며 자신의 안전과 목숨을 포기하면서도 그를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다윗이 도망자 신세로 숨어 있을 때는 조직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금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기 목숨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었는데 말입니다. 그 시간을 통하여 다윗과 함께 목숨 걸고 싸울 사람들을 붙여 주셔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들을 통해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도구로 쓰임 받도록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사람들이 정말 썰물과 같이 빠져나갈 때가 있습니다. 내 인생이 좀 잘 될 때, 돈이 좀 있고 지위가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내가 좋아서 오는 것 같지만 나를 보고 오는 게 아니라 내 돈과 명예, 지위를 바라보고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 인생의 어려움과 위험이 찾아오면 사람들은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가 등돌리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 인생의 어려움이 있을 때 나에게 끝까지 남아 있고 나에게 함께 손 붙잡고 가는 그 사람이 누군가를 분명히 분별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다 생각을 합니다. 사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되고 나서 몰려드는 사람들은 다윗이 왕이 됐으니까 쫓아오는 사람들입니다. 왕이라는 힘과 권력을 바라보고 당연히 왕의 편에 서야 내가 잘 되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착각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을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장 비참하고 도망자 시절이었던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 나와 함께 했던 그 사람들, 나를 버리지 않고 나의 손을 꼭 붙들었던 그 사람들이 진짜라는 것을 분명히 안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나에게 등을 꽂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다윗은 분명히 알았던 것이죠.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된 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 다윗을 따르고 목숨 걸고 한마음으로 지켰던 그 피의 동지들의 명단을 말씀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2절에서 7절까지의 사람들은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따르는 사람들 중에 베냐민 지파가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란 바로 사울왕 출신 지파이자, 고향 사람들입니다. 사울이 지금 왕인 시절에 지역 출신 왕 대신 도망자 다윗을 목숨걸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으로 베냐민 지파라면 당연히 사울왕 편에 서야 되는게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 편에 서는 것이 안전하고 이익이 되며 그 편에 서는 것이 소위 말하면 주류가 되는 법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베냐민 지파 사람들 중에, 그 왕을 배출한 지파 사람들 중에 다윗에게 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위험을 감수하고 공동체에서 왕따가 될 것을 각오하고 다윗을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 수많은 다윗의 군대 명단 들 다윗이 도망자이며 지명 수배자로 목숨이 위태한 그 상황 가운데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것을 역대기가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당시 사울은 왕이었으나 그 지파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왕이었음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민심을 품지 못하며 그의 왕권은 땅에 떨어져 사람들이 존경하지 않고 사람들이 욕하는 왕이 되어 버린 거예요. 또 하나는 같은 지파이자 고향 사람인 사울왕을 버리고 다윗을 따라올 정도로 다윗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백성들은 본 거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을 분명히 본 거예요. 다윗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리더십을 가졌고, 하나님에게 합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결국 역대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로 하나님에게 합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리더십을 가져야만 하나님이 주도하시며 성전 재건의 꿈을 이루게 하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때에 이렇게 한 마음으로 위험을 함께 버텨주는 동지가 있다는 것, 내 인생이 어렵고 힘들 때도 내 손을 놓지 않고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나에게 있다는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이 수많은 다윗의 군대의 명단을 바라보며 다윗의 위대한 점, 다윗을 하나님이 놀랍게 사용하시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의 태도 때문에 즉 다윗이 하나님 편에서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가 하나님 편에 온전히 서 있었고 아둘람 굴에서도, 시글락에 숨어 있을때도, 왕이 되었을 때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합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였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방법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상황과 환경은 변합니다 사람들은 내 주변에 왔다갔다 합니다. 내 삶의 어려움만 생기면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사항과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나에게 말씀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동시에 내가 어려울 때 내가 고난의 있을 때 나에게 함께 서있는 그 사람을 꼭 붙드십시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이며 나와 함께 갈 피의 동지들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태도가 하나님께 쓰임받는 비결임을 믿으며,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말씀이 이루어지는 꿈을 꾸며 사명을 위해 오늘도 믿음의 여정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사건은 다윗 개인의 어떤 능력으로 왕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진 사건임을 배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 하신 말씀이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대상에서 다윗이 왕이 되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며 그것을 현실화한 그 역사를 통해 지금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속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말씀을 붙들고 성전을 재건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는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심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는 이 수많은 개국 공신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운 지도자로 다윗을 강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강하게 하신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해 함께 하는 사람들을 붙여주신 것이죠.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하는 수많은 용사들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죠. 오늘 말씀의 수많은 사람들의 명단은 단순히 다윗을 도왔던 개국 공신들의 명단을 넘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 사용된 놀라운 손길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많은 개국공신들을 언제 붙여 주셨는가하면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입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바로 왕이 되게 하지 아니하시고 13년 동안 고난과 역경을 통과하게 하셨는데 도망자로서 숨어다니던 현장 중의 한 곳이 바로 아둘람 굴입니다. 13년의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허락하신 이유는 아둘람 굴 속에서 도망자로 숨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마음을 열고 목숨 걸고 따라 가는 사람들을 붙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힘껏 도와 나라를 얻게 되는 수많은 용사들을 대부분 어디서 얻게 되는가 하면 이 아둘람굴의 고난과 역경의 시절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둘람 굴에서 도망자로 숨어 지내며 그 철저한 밑바닥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 왕으로 세우기 위해 함께 일할 조력자 들을 붙여 주셨고, 그들을 통하여 목숨걸고 다윗을 도와 일하는 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그에게 허락하신 것이죠. 그런 의미에 있어서 아둘람 굴과 광야에서의 13년은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정체되고 무의미한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봤을 때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고 철저하게 일이 진행되는 시간이었고,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에 그림대로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다윗의 눈에는 전혀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뜻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머리로 이해되지 않아도 내 눈에 증거가 없을 지라도 그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신뢰하고 철저하게 엎드리며 목자 되시며 왕 대신 주님을 붙들었기에 이 놀라운 일들이 말씀대로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 아둘람 굴에서의 용사 들이 얼마나 다윗에게 충성 했는지, 또 다윗은 그 가운데 얼마나 하나님께 합한 마음을 가진자였는지를 17절부터 19절까지 증언합니다. 다윗이 너무 목이 말라 물을 먹고 싶다고 그러니까,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돌파해 목숨걸고 물을 가져올 정도로 충성했습니다. 그만큼 다윗에게 충성된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목숨걸고 물을 가져 왔으면 다윗이 수고했다고 격려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 물을 마시면 되는데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었습니다.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져온 이 물은 피나 마찬가지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이 마시기를 거절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리는 것입니다. 이게 다윗의 위대한 점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던 것입니다. 나의 부하들이 목숨걸고 가져온 물이기 때문에 내가 먼저 이렇게 나를 위해 벌컥벌컥 마실 수 없다 고백 하며 그것을 여호와께 드린 것입니다. 그걸 통해 부하들이 얼마나 감동 했겠습니까?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 왕이 있구나! 하나님을 이렇게 생각하는 왕이 있구나! 나는 저런 우두머리를 위해 목숨 걸어야 되겠다 그게 다 아둘람 굴에서 형성된 개국 공신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빚으시고 그에게 팀을 만들어 주시며 목숨을 건 그 부하들이 다윗과 함께 싸우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에 쓰임 받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하여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며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말씀이 나에게 현실로 능력으로 이루어지기를 믿고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온전히 다스리시고 통치하기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삶 가운데 큰 구원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이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께 합한 마음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일하시며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일을 위해 놀랍게 사용되는 것에서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고 있다 라는 그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놀라운 삶의 의미이자 가치인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통하여 역사 하시며 내 인생의 갈증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갈증,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갈증을 붙들고 나아가는 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합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들이 모아 지며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붙들고 이 시간 주님 앞에 모이는 백성들이 되기 원합니다. 다윗을 힘껏 도와 함께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게 되는데 쓰임 받은 인생이 되듯이 나의 인생이 그렇게 쓰임받기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말씀대로 이루어 지는데 내 삶이 쓰임 받으며 내 삶이 드려지는 그 기쁨을 우리가 사모하며 드리며 하나님께 합한 자 의 삶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지금 왕으로 세워지는 시점에,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은 바짝 엎드리며 바로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우셨다..는 겁니다. 내가 준비돼서 왕의 자리를 성취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없는 나를 세우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며 여호와께서 나의 온전한 주권자가 되심을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고백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윗왕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 다윗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왕되심과 목자되심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말씀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이새의 집에서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실제로 다윗이 왕이 된 것은 13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왕의 기름부음을 받은 직후 다윗에게 펼쳐진 인생은 왕궁으로 영전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철저하게 낮아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광야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장인이자 왕이었던 사울왕의 지명수배를 당해 죽이려고 쫓아오니까 도망자 신세가 되어 굴에 숨어버리는 이런 말도 안되는 고난이 그에게 찾아온 거예요.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대로 된다고 약속하셨고 사무엘을 통해 왕으로 기름을 부어 주셨는데, 눈앞에 펼쳐진 삶은 왕과는 정반대의 삶인 광야로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13년 동안 분명히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 말씀대로 된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졌지만 그의 눈에는 아무 증거가 보이지 않고, 인내로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눈물의 시절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도망자 신세로 수많은 난관과 어려움을 경험하면서, 다윗에게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철저하게 신뢰하고 믿는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그를 변화시킨 것이죠. 13년의 광야 생활과 기다림을 통하여 그가 바라 보고 붙든 것은 오직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목자로 모시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13년동안의 광야 훈련을 통하여 다윗이 고백한 놀라운 고백이 오늘 말씀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간다”는 고백입니다. 그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만 그가 강성해진다는 것을 13년의 광야 생활을 통하여 철저하게 몸으로 고백하고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의 힘의 근원은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에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에게 점점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을 꼭 붙들면 붙들수록 내가 강해지는 이 놀라운 체험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아 최종적으로 그 말씀이 이루어졌을 때 다윗은 백성들의 목자와 주권자가 되는 특권을 누리기 전에 그의 삶에 먼저 하나님이 내 왕이시고 목자이심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자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의 결론인 말씀대로 되었더라… 는 삶의 고백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훈련을 위한 광야 생활에 한복판에 있을지 모릅니다. 내 눈에 보이는 아무 증거가 없어도 시간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지체될 때에도 그 말씀만을 믿고 가는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다윗에게 주셨던 그 놀라운 언약을 우리에게도 주시며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약속이 말씀대로 된다 라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이 시간 주님의 방법과 시간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다윗을 훈련시킨 방법이자 저와 여러분들을 훈련시키는 방법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광야 생활 가운데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증거가 없을 지라도 이 시간 하나님이 철저하게 내 삶의 왕이자 목자 되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꼭 붙들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에 내가 점점 강해지는 이 놀라운 경험을 내 삶의 간증과 고백으로 채우십시오. 때가 찰 때 하나님이 여러분들 놀랍게 들어 쓰셔서,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이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될 줄 믿습니다. “말씀대로 될지어다..” 라는 그 약속이 내 삶 속에 온전히 임하여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주님이 내 삶의 왕과 목자되심을 선명하게 고백하며 오늘도 믿음의 여정을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의 멸망과 죽음 이후 드디어 다윗이 왕이 되는 장면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는 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이 있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이 왕이 되게 하셨음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 말씀에 다윗은 왕으로서 백성들의 목자가 되고 백성들의 주권자가 되는 특권이 주어진 겁니다. 당연히 왕이니까 다윗은 백성들의 목자가 되고 백성들의 주권자가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이 왕의 특권 가운데 말씀이 철저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그 삶에 하나님이 목자 되심을 다윗의 삶에 고백하게 하신 후에, 그 결과로써 그를 왕으로 세우며 백성의 주권자와 목자로 이끄는 그런 영적 리더십을 갖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지금 왕으로 세워지는 시점에, 처절하게 고백하는 것은 바짝 엎드리며 바로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우셨다는 겁니다. 내가 준비돼서 왕의 자리를 성취한 것이 아니라 왕으로서 하나님이 부족하고 자격없는 없는 나를 세우셨다는 것이죠.
선지자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기름부을 때, 이새의 집에서 아버지는 여러 아들들 중에 다윗을 후보자로도 세우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봤을 때 자격 미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아들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아버지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이 다윗이었으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세워 바로 왕으로 기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윗에게 철저하게 고백하게 하신 것은 나의 능력과 나의 힘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되시고 내 주권자 되셔서 나에게 왕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겸손하게 백성들의 목자와 주권자가 되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며 주권자가 되심을 다윗은 그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의 인생을 통하여 말씀으로 증언하셔서 우리에게 배우게 하시고 우리 삶 가운데 철저하게 이것을 고백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내가 잘나고 내 능력 때문에 내가 그 지위와 자리에 올라갔다 착각하는 순간, 성공 이후에 사울왕과 같이 자기 기념비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다가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지위가 높아지면서 우리가 해야 될 특권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능력과 힘으로 내가 쟁취한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그 자리를 선물로 주시며 맡겼다는, 하나님 은혜를 바라보는 시각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그 자리에 세우셨음을 믿는다면, 내 삶이 먼저 하나님을 왕과 목자로 철저하게 고백하는 반응이 있어야만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맡겨진 지위와 사명을 잘 수행하게 되는 영적 선순환 가운데 내 인생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는 현장에서의 처절한 고백, 모든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직분이자 자위라는 철저한 은혜에 빚진자 의식을 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내 삶에 하나님을 온전히 왕과 목자로 모실 때, 내 삶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삶에 놀라운 영광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 모든 일들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눈에 보이는 이유가 있고 보이지 않는 숨겨진 이면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이 전쟁에서 세 아들과 함께 모두 죽고 그 시신이 능지처참 당하는 비극의 역사에 대한 평가입니다. 겉보기에는 블레셋에게 전쟁에서 패배한 왕으로 죽은 것 가지만, 보이지 않는 숨겨진 이면의 이유가 있는데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하신 영적 사건의 결과라는 것을 엄중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울왕의 몰락과 비참한 죽음은 단순히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 져서 죽은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블레셋이라는 도구를 들어 사울 왕을 치셨다는 것이 바로 역대기의 영적 해석입니다. 사울왕이 심판을 받아 죽게 만든 하나님 앞에서의 세 가지의 큰 범죄를 증언하는데 첫 번째 범죄는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죠. 말씀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불성실하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데 불성실 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생명으로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삶의 기준으로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게 사무엘상 13장에 전쟁 직전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기다리라 말씀하셨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 말씀에 범죄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또한 사무엘상 15장에서, 아말렉과 전쟁에서 큰 승리 이후, 분명히 진멸하라 명령하신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지 않고 자기 눈에 자기 생각에 좋은 것들은 놔두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바로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영적 인생이 무너지면서 인생의 위기 가운데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런 우상에게 기대며 물어보는 것이죠.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 말씀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삶을 인도하도록 드려야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나니까 결국 그의 영혼은 메말라 죽어 갔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신다는 느낌이 없으니까 결국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 여인 앞에 목숨걸고 매달리며 삶을 보장받으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큰 범죄이자 사울왕의 영적 무너짐이지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이렇게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가는 모습,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에 인생을 걸고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를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세번째 이유는,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범죄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 앞서 나아가려는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큰 범죄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나라입니다. 왕으로서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서 나가면 안 되고 하나님께 물어봐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뒤따라 가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야 될 책무를 가진 자가 바로 사울왕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왕으로서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문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뒤따라 갈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앞서 나아갔습니다. 사실 이 세가지의 범죄는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과 묻지 않는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죠. 말씀을 삶의 핵심적인 가치로 두지 않으니까 하나님께 물어 볼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에게 물어야 될 것을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가짜인 신접한 자에게 가서 인생길을 물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르침을 받아야 될 사람이 신접한 자에게 가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께 묻지 않은 범죄가 신접한 자에게 가서 가르치기를 청하는 범죄를 만들게 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범죄가 말씀을 지키지 않는 범죄로 연결된다는 겁니다. 전반전의 small, humble, faithful했던 그 사울왕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후반전은 자신의 인생에 기념비를 세우고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아니하며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며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왕권을 넘겨주게 되었다는 이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을 평가하실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내 삶의 기준으로 붙들고 지키는가를 무겁게 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별로 큰 문제가 안될지 모르나, 하나님에게는 큰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붙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지는가를 이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사울왕의 비극적 죽음을 영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함을 통해 후대 백성들에게 분명한 기준을 삼으려 하는 하나님의 뜻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육체적인 어려움이나 어떤 경제적인 문제, 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과 잘못된 태도인 교만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물어보는 겸손함이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우상과 눈에 보이는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나의 가르침을 구하고 그 곳에 인생을 탕진하게 되는 이런 망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고 순종하며 살았는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며 살았는지를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하나님의 가치를 붙드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이 큰 범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묻고 자문을 구해야 되고, 하나님 앞서 나가지 말고 항상 하나님의 길을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비극적 죽음을 우리는 삶의 교훈을 삼아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이면의 깊은 원인을 찾아보는 영적 시각을 통해 나의 인생 평가가 주님 앞에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 이라 평가받는 믿음의 여정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1장부터 9장까지 긴 족보가 끝나고 오늘 말씀부터는 사울왕의 이야기로 역사가 시작됩니다. 사울왕의 역사는 죽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신앙과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데 있어 다윗 언약을 중심으로 족보와 역사를 재해석하기 때문에 모두 다윗왕을 중심으로 그려지고, 그 그림 안에 사울왕 이야기는 다윗의 등장을 위한 서론 정도로 짧게 서술됩니다. 특별히 사울왕의 죽음을 제일 먼저 역사로 증언하는 것을 통해 다윗 등장을 위한 서론일 뿐 아니라, 사울왕 개인이 죽는 비극적인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망하고 무너지는 모습이었다는 것을 복기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울왕은 길보아 산에서 도망하다 엎드려져 죽었다고 증언합니다. 도망하다가 엎드려져 죽임 당하는 인생, 이게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특징이며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결국 망하게 되는 패턴이었다는 것이죠. 비극적으로 죽어간 사울왕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비극적으로 바벨론에게 멸망 당했음을 기억하고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인생 전반전과 후반전이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기억합니다. 한때 겸손했고 한때 신실해서 놀랍게 쓰임받은 사울왕, 그런데 인생 후반전에 가서 영적으로 무너지며 자기만 비참하게 죽은 게 아니라 자기 세 아들도 함께 전쟁터에서 죽는 비극으로 몰락하게 되는 것이죠. 그 당시 전쟁이라는 것은 장기와 비슷해서 군사가 몇 명 죽었고 피해가 얼마였고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편 왕을 죽이느냐 생포하는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립니다. 그러니까 적군이 사울왕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이죠. 안타깝게도 죽음 앞에서도 사울왕은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고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주여 나를 도와 주옵소서…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그렇게 회개하며 인생이 마무리되었으면 좋은데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대신, 사람을 의식하고 죽어갔습니다. 죽기 직전 함께한 자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 부탁한 이유가 뭐냐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나를 찔러 죽일까 봐…나를 모욕할까봐… 그게 사울왕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사람들한테 모욕 당하고 창피 당하는 것이 가장 두려웠기 때문에 죽여 달라는 것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고 끝까지 사람들만 두려워하다 사람들에게 모욕당할거 신경쓰다 비참하게 죽게 된 자가 바로 사울왕이었습니다. 사울왕의 비극적인 죽음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두려워한대로 할례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죽은 시신이 처절하게 모욕당합니다. 사울왕의 시신이 잘려 목이 다곤 신전에 달리는 것이지요. 죽어 그의 시신이 목 베임을 당하는 것도 모자라 우산 신전 앞에 목이 달리는 치욕과 몰락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사울왕의 비극적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할 때 모습이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다 돌아와 예루살렘의 폐허와 잿더미 위에 서서, 70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하며 무너진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사울왕의 비극적 죽음으로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다, 불순종과 우상에 빠져 살다 이렇게 망하게 되었고 성전을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한 날에 죽으며 치욕의 과거를 오버랩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개인의 역사도 국가의 역사도 시작이 분명 중요하긴 하지만, 결국은 끝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영적 진리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비극적인 죽음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어떠했는가…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가를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 사울왕의 비극적 죽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이며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생의 특징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화려해 보고 돈이 많고 성공한 것 같아도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결국 그 끝에 가서는 도망하다가 죽고 엎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도망하다가 죽고 엎드려진 비참한 인생, 아들들과 모두 한 날에 전쟁터에서 죽은 비참한 인생, 죽을 때도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하고 두려워하며 죽어간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고 죽음 직전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서 있어야 신실한 자로 은혜를 마무리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끝까지 쓰인 받으며 하나님 앞에 겸손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결단하십시오. 신앙생활은 시작이 중요하지만 결국 내 인생의 끝에 서서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하는 나의 신앙에 있음을 기억하며 끝까지 주님 만을 바라보고 붙들며 살아가는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세요.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의 족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레위 지파의 성전에서 하고 있는 다양한 직분들에 대해서, 그리고 사울왕의 족보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를 군사력과 힘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이라 영적인 눈으로 회개하며 고백합니다.또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서 70년동안 방치되고 버려진 예루살렘 땅을 바라보며 죄와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땅이 안식을 하게 된 시기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폐허가 되고 버려진 땅과 같은 버려진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그들은 하나님의 안식의 때라는 영적 해석을 하는 겁니다. 이제 안식을 충분히 한 그 예루살렘의 땅,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죄의 때가 벗겨진 그 땅에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재건하겠다는 마음으로 지금 그들의 역사를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죠. 같은 폐허와 잿더미를 바라보면서도 이렇게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새롭게 해석하는 눈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재건의 힘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33절 말씀의 “골방에서 자기 직분에 전념했다.”는 말씀을 주목해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성전을 섬길 때 레위 사람들이 골방에서 주야로 자기 직분에 전념하듯이 섬겼음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성전되게 하기 위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자기 일에 전념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사명을 다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의 사역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든든히 세워졌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밤을 지새며 아침마다 문을 여는 책임이 있었던 직분, 어떤 자들은 기구를 맡아서 수요 대로 내오고 빼는 직분, 어떤 사람들은 성소의 기구들과 포도주와 향품들을 맡은 직분, 어떤 사람들은 전병을 굽는 직분 등등, 성전 안 레위 사람들의 역할들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이렇게 보이지 않는 구체적인 일들을 함께 감당해야 하는 것이죠. 과거에 하나님의 성전에서 레위 사람들이 다양한 직분을 맡았던 것을 복기하며, 지금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울 때, 그렇게 보이지 않는 다양한 직분들과 역할을 감당해야 성전이 든든하게 세워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골방영성…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때 이렇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의 일에 전념하며 보이지 않는 기도와 찬송의 헌신이 성전을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영적 진리로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뒷부분에 등장하는 사울왕의 족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울왕의 족보는 8장에서 이미 등장했는데 다시 나오는 이유는, 다음 말씀에 이어지는 사울왕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고요, 또 하나는 사울왕의 인생이 이렇게 골방에서 사역과 기도에 헌신하지 못하며 무너진 예로, 반면교사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small, humble, faithful하게 골방 정신을 가지고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했었는데, 결국 뒤에 가서 골방정신을 잃어버리고 기념비를 세우고 사람들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등돌이며 버림받는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과정에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 반짝 잘하다가 뒤에 가서 무너질 확률이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에 사울왕의 족보를 이 시간 다시 한번 반면 교사로 복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자리인 페허와 잿더미가 된 예루살렘에서 이 성전을 다시 재건하는 사명이 보이지 않는 다양한 직분들의 헌신을 통해 세워지는 꿈을 함께 꾸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려 할 때, 눈에 보이는 폐허와 잿더미라는 상황과 환경에 눈이 다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죄와 불순종으로 물들었던 땅이 안식한 기간이라는 영적인 해석과 눈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을 붙들었던 그들의 처절한 고백과 회개를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세우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고 무릎 꿇으며 영적인 일에 집중하고 전념했던 그들의 헌신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보이지 않는 다양한 곳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헌신했던 그들의 모습이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모습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며 겸손하고 작은 모습으로 하나님께 의지 할 때만 하나님께서 주도 하시는 성전재건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신앙을 재건하고 성전을 재건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양한 직분을 맡으며 골방에서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찬송하는 천국 알곡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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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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