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다윗왕의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는 순전한 모습을 넘어 사람들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는 선한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은혜를 갚으려는 선의를 악의로,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는 악한 사람들의 모습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모든 것이 안정화되고 승승장구하는 최고의 왕에 올랐을 때,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했고, 하나님께 기쁨되기 원하는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은 흘러나와 자신이 어려웠을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도 잊지 않고 기억하였습니다. 사실 다윗왕과 같이 부러울 게 하나 없는 왕이 되면, 그렇게 성공하고 위에 올라가게 승승장구하게 되면 자신의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때, 어려웠던 때를 쉽게 잊어버리고 망각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그 자리까지 올라갈 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움 받은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도 사람들을 통해 받게 된 은혜도 너무나 쉽게 망각하고 너무 쉽게 당연하게 여긴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빌려준 사람은 그 기억을 평생 잊어버리지 않는데 돈을 빌린 사람은 쉽게 잊어버리는 게 인간의 죄성인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을 통해 치유와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 은혜를 기억하고 돌아와 감사를 드린 사람은 별로 없었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다윗왕의 위대한 점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주셨던 은혜들도 잊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자신이 힘들고 어려웠던 그 고난의 시기에 하나님을 통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여러 사람들을 잊지 않고 그 은혜를 계속 갚고 기억하는 이야기가 말씀에 계속 등장합니다. 저번 주에 배웠던 요나단의 아들이자 장애인인 므비보셋을 찾아 왕궁으로 불러 왕의 식탁에 초대하고 평생 함께 식사하는 특권을 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특권을 준 것은 다윗이 어려웠을 때 자신을 도운 요나단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은혜를 베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에서 아람왕이 사망하자 어려웠을 때 자신을 도운 것을 기억하고 은혜를 갚고자 조문 사신을 보내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윗왕의 예전 은혜를 기억하고 보내는 호의에 대한 반응입니다. 다윗왕이 어려웠을 때 받은 은혜를 기억하고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데 그 호의를 오히려 악으로 갚는, 선의를 악의로 갚는 자가 등장하는데 바로 암몬 자손의 왕 하눈입니다. 예전 어려웠을 때 호의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며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은혜를 베푸는데 그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악으로 갚으며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하눈왕의 아버지가 다윗이 어려웠을 때 도움 준 것을 기억하고 은혜를 갚을 선한 마음에 문상을 보냈습니다. 진심으로 애도하고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서 자기 사람들을 보내는데 이런 다윗의 순수한 마음으로 보낸 문상, 과거 은혜를 기억하는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선의를 악의로 매도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눈 왕 주변에 있는 신복들 때문이고, 그들의 구부러진 마음으로 전하는 잘못된 조언들 때문입니다. 다윗왕의 이름으로 조문 온 사람들을 향해 저들은 우리 땅을 엿보고 탐지해서 쳐들어오려고 하는 스파이들이라 몰아세웁니다. 어떻게 이렇게 선의를 악의로 해석하고, 같은 일을 보고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가…. 마음이 삐딱하기 때문이며 마음이 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눈왕의 비극은 자기 주변에 이렇게 굽어진 마음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두었다는 것이고 그런 구부러진 마음의 속에서 나오는 참모들의 말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곡되고 부풀려진 말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잘못 해석한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을 하나 이렇게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늘 삐딱하게 말하고 꼬아서 말하고 항상 그 의도를 의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심하게 굽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한 다윗의 조문이 비극으로 끝나게 되며 선의를 악의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집니다. 다윗의 조문단들을 잡아 수염도 깎고 엉덩이도 까고 목숨만 살리고 큰 모욕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수염을 다룬다는 것은 종이 된다는 상징이기도 했고 사람의 목이 잘리는 것보다 더 수치스럽게 여기는 게 엉덩이를 보이는 것인데, 엉덩이를 다 까며 왕의 사신을 그렇게 철저하게 망신을 주고 쫓아내는 겁니다. 다윗 왕의 사람들을 그렇게 모욕하고 망신주는 것을 통해, 다윗왕을 그렇게 철저하게 망신 주고 모욕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면 내 인생이 잘 되고 성공했을 때, 나 혼자 잘 나서 이 자리에 올라왔다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일 뿐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 사람들의 은혜와 그들의 도움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하고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십시오. 동시에 이 세상에는 내가 아무리 선한 일로 좋은 의도로 이렇게 은혜를 갚고 선의를 가지고 베풀었지만 이렇게 선의를 악의로 매도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 마음이 비틀어진 사람, 마음이 구부러진 사람들은 이렇게 선의를 악의로 바라보고 매도하는 일들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말고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는 지혜를 말씀을 통해 배우기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주변에 이렇게 분별없이 구부러진 것을 말하며 늘 부정적인 것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곁에 두게 되면 우리도 분별력이 이렇게 흐려질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고, 내 주변에서 내가 어떤 소리를 듣고 어떤 말들을 내 마음에 이 시간 쌓고 있는지를 반성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신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들이 보내준 도움을 잊지 않고, 늘 은혜와 감사를 흘려 보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왕의 사울 가문의 남은 자들을 향한 영적 반응을 은혜로 나누기 원합니다. 말씀에서 두 번이나 다윗왕은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왕이 두번이나 묻는 이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게 사울왕의 사람들을 모두 처단하고 씨를 말려야 새로운 왕조에 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사극들을 보게 되면 그 전에 있었던 왕가의 모든 사람들은 삼족을 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어떤 씨앗도 남기지 않고 다 없애기 위해 삼족을 멸하는 것이 아주 끔찍한 방법이 아니라 일반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그래서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말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게 왕조가 바뀌게 되면 일어나는 대표적인 일들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전사한 후에 다윗은 바로 통일 왕국의 왕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유다의 왕으로 7년 넘게 있으면서 북쪽은 사울의 아들 한 사람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미완성 왕국으로 있다가 마침내 통일 왕국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남은 사람이 있다면 허수아비 왕이라도 세우며 반역할 수 있기에 그 불씨를 없애는게 당연했기에 사울의 남아 있는 자들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들은 죽은 목숨인 것처럼 알고 이곳저곳에 숨죽이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왕의 질문,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라고 물어본 이유가 육적 이유가 아니라 영적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그 남아 있는 사람들의 씨를 말리고 처단하고 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요나단을 기억하고 은총을 베풀기 위해 찾는 것입니다. 사울의 남은 사람들을 찾는데 그 동기와 이유가 전혀 달랐던 다윗왕의 모습이 바로 영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의 신앙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다윗은 모든 것이 안정된 인생의 정점에 있고 모든 사람에게 칭송 받는 왕이 되었을 때 제일 먼저 자신을 생각하는 대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될까를 제일 먼저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순전한 마음이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동시에 다윗은 그 인생의 정점에서 왕으로 부러울 것이 없는 그 최고의 자리에서 예전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은총을 갚기 위해 사울 가문의 남은 자들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예전에 있었던 요나단과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은혜 베푸려고 한다….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제스처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기를 원했다는 것이 다윗왕의 위대한 점이었습니다. 알아보니까 누가 죽지 않고 남아 있었냐면 요나단의 아들 중 한 사람, 다리 저는 자인 므비보셋 이었습니다. 육적 반응을 하는 신하들은 다윗왕에게 뭐라고 계속 조언했겠습니까? 저 자는 결코 살려두면 안되옵나이다….장애인이어서 싸울 수 없는 자였지만, 허수아비 왕은 충분히 될 수 있으니 결코 살려두면 안됩니다….다 처단해야 합니다…그렇게 얘기했을 겁니다. 그래야만 다윗의 왕가가 흔들리지 않고 든든할 거라고 얘기했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영적인 반응을 하려고 그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데리고 옵니다. 다윗왕을 통해 왕궁으로 호출을 받은 므비보셋의 느낌은 어땠을 것 같습니까? 두려움에 압도되어 나는 이제 죽었구나…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끌려 왔을 겁니다. 이게 다윗 궁에 들어가면 처단당하고 나의 인생은 끝이다. 아마 인생을 다 정리하고 가족과 이별의 인사를 하고 왔을 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고 므비보셋 자신도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려고 들어갔는데 다윗왕으로부터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대답을 듣게 됩니다.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내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내게 은총을 베풀리라.” 놀랍게도 무서워하지 말라는 거죠. 죽이는 대신 반드시 내가 은총을 베풀 거라는 겁니다. 죽으러 온 자리이고 죽어야 마땅한 므비보셋을 다윗왕은 목숨을 살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은총을 베풀어 주는 것이죠. 그 기적과 같은 이유는 단 한 가지, 요나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은총을 베푼다는 것은 단순히 목숨만 살려주는 것을 얘기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죽지 않고 목숨만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베푸는 은총은 단순히 목숨만 살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 할아버지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밭을 다 돌려주겠다는 겁니다. 또한 죽어 마땅한 자인 그를 왕자처럼 대해 주겠다는 겁니다. 왕자 중 하나처럼 왕의 상에서 먹게 초대한 것입니다. 이 다윗왕의 영적 반응과 므비보셋을 향한 이 말씀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게 되는 은총이 무엇인가를 그대로 알려주는 복음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죽어야 당연한 죄인이에요.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죄인의 괴수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느냐? 당연히 죽어야 되는 나에게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선포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들 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되고 죽는 게 당연한 나, 죽음의 자리에 있어야 될 나를, 누구 때문에 살려주는 겁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으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살려 주시고 은총 주신 분이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인 걸 철저하게 믿는 게, 우리가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음입니다. 더 나아가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푼 다윗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가 뭐냐면 단순히 우리를 죽지 않도록 건져 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회복시켜 주시며 하나님의 상에서 함께 식사하며 교제하고, 마치 죄가 없는 의인처럼 하나님의 왕자처럼 여겨 주시며 우리에게 회복의 은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의 이 놀라운 은총에 엎드려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고백합니다. 철저히 자격 없음, 철저히 나에게 공로 없음 철저히 나에게는 원인이 없음을 고백하며 전적인 왕의 은총입니다…엎드리는 겁니다. 이 므비보셋의 고백,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임을 마음 다해 고백하는 게 십자가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만약에 내가 구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원인이나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은총이 뭔지를 모르는 자가 되는 겁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원인도 이유도 조건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며 므비보셋과 같이 주님의 은총에 감격함이 엎드리는 것만이 이 한량없는 은혜를 받아 내 마음에 품는 있는 비결입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한 자인데 반드시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인하여 내게 은총을 베풀리라 말씀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 시간 손을 내미시는 그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만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왕의 므비보셋을 향한 영적인 반응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주시는 놀라운 십자가 은총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활동을 하실 때 늘 식사를 하실 때 자격 없어 보이는 자들을 초대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그런 자격 없는 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셨습니다. 철저히 자격 없음을 인정하고 엎드린 탕자와 같은 자들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고 왕의 식사 자리에 함께 참여하게 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가 부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간 우리에게 회복되야 할 십자가 사랑이며 십자가 은혜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반드시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희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너는 항상 나의 상에서 함께 먹을지니라.. 너는 더 이상 죄의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나의 아들이고 나의 딸이다… 그 은총을 붙들고 살아갈 때 저와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소망을 붙들고 천국을 바라보는 은혜의 백성이 될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자격 없는 나, 죽어 마땅한 나를 구원하신 그 예수님 안에 머물며 그 은총을 기뻐하고 감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 8장 뒷부분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허락하신 영적 전쟁들의 승전보를 계속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이 자신의 때와 방법을 주장하여 이렇게 전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을 먼저 세웠다면 어땠겠습니까? 하나님이 심겨 놓으신 축복의 땅들을 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며, 여러가지 도전들과 외세의 어려움 가운데 그 나라는 금방 어려워 졌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을 꺾으시고 지금은 성전을 세울 때가 아니라 먼저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더 해야 되는 때라는 것을 알게 하시면서 오히려 다윗을 통하여 더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실 8장에 등장하는 여러 나라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침략하고 힘들게 했던 강대국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순전한 다윗의 마음을 붙들고 일하시니까 다윗과 이스라엘이 오히려 그들을 싸워 이기고 그들이 종이 되는 놀라운 역전의 현상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강대국들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는 객관적으로는 모든 것이 우세했지만 다윗의 철저하게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붙들고 의지하며 나아가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어디를 가던지 이기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소식이 주변 나라들에 퍼져 가니까 다윗왕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찾아오고 무릎을 꿇으며 모든 것을 바치려는 백성들도 등장하게 됩니다. 요람이 금그릇들과 놋그릇들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왔는데, 다윗왕은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에게 다 드렸습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그것을"…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도"…드렸음을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그 말은 여러 전쟁에서 승리 후 얻게 된 모든 귀한 전리품들을 이미 하나님에게 드렸고 요람이 가져온 은 그릇과 금 그릇과 놋그릇도 여호와께 다 드린 겁니다. 자기가 취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드린 것을 통하여 이 승리의 공로와 원인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다윗의 신앙 고백이자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앙 고백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하늘로부터 부어 주시는 놀라운 은혜가 다윗 가운데 계속 머물며,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계속 승리를 주시는가…이유는 분명합니다. 사울 왕이 무너졌던 것을 기억해보면 몇 번의 승리를 경험하고 위에 올라가고 자기가 잘 되고 나니까 하나님께 모든 공로를 드리는 대신에 자기 자신에게서 승리의 원인을 찾기 시작했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 승리가 마치 내가 대단해서 내가 잘해서 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말에 민감하며 눈에 보이는 것에 민감한 자가 되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축복이 더 이상 사울 가운데 머물 수가 없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셨지만 사울 왕이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못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다윗왕은 지금 큰 승리가 계속되고 승승장구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모든 승리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대신 철저하게 하나님에게 모두 돌리며 철저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승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승리는 내가 잘해서 생긴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것이며 그래서 내가 높아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게 본질임을 철저히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흘러 넘치는 은혜가 떠나지 않는 비결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철저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바른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공의가 사람들에게도 흘러나가 공의로 다스리게 됩니다. 하나님에게 바른 관계가 있는 지도자는 사람들에게도 공과 의를 가지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는 것은 반드시 바른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게 아니라 바른 관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왕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지도자, 하나님과의 바른 영적 질서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안에 머물러 있는 왕은 결국 그 백성들을 공의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바른 관계가 있지 않은 왕은 사람들을 불의로 다스리고 사욕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백성들을 어둡게 만들고 백성들을 흩어지게 만들고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봤을 때 아 저것은 다윗 왕이 하나님을 정말 높이는 거구나…정말 하나님에게 공로를 돌리는 거구나…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거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면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큰 축복과 더 큰 승리와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실 수밖에 없는 것이죠. 다윗은 늘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고백하며 하나님 만을 붙드는 능력이 있었기에 다윗왕이 어디를 가더라도 이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를 계속 쓰시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인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머물러 있는 인생, 하나님의 축복과 승리가 머물러 있는 인생이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나의 능력 없음을, 나의 무능함을 철저히 고백하며 하나님만을 붙드는 것이 진정한 능력임을 잊지 마십시오. 승리 가운데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공로를 돌리고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이 나를 더 높여 주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 가운에서 떠나지 않는 비결은 내 인생이 잘 되고 승리할 때 철저하게 모든 원인과 영광을 주님께 돌리며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고백이 되는 인생입니다.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가 내 인생의 질을 결정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지 마시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하는 인생은 흔들릴지 언정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의 인생에서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이기게 하심을 철저히 붙들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싸우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십시오. 모든 승리와 모든 성공은 하나님이 주신 성공이고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며 주님의 은혜가 계속 머무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 즉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놀랍게 싸우시며 승리를 주시는 말씀을 함께 은혜로 나누기 원합니다. 인생의 정점과 나라의 정점이 있을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기쁨 될까를 고민하며,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 좋은 생각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궁에 편하게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천막에 있는 것이 마음에 큰 부담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뜻과 생각을 가졌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의도와 생각은 좋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멈추게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 왕국의 확장을 증언하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여전히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땅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지금 정점에 있는 것 같고 모든 나라가 안정화된 거 같고 이제는 이만하면 다 끝난 거 같은데, 그래서 성전을 지으면 좋을 때인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다윗을 통해 해야 될 일들 싸워서 얻어야 할 축복의 땅이 많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은 안주하여 성전을 지을 때가 아니라 치열하게 여전히 영적 전쟁을 해야 될 때라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축복의 땅은 엄청 많았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서 조금 차지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냥 안주하고 이 정도면 됐다고 싸움을 멈추고 거기에 동화되고 적절하게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싸우고 더 나아가서 차지해야 될 곳이 많이 있는데 그들은 주저하고 그냥 쉬고 안주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왕의 눈에는 모든 나라가 통일됐고 안정화됐고 이제 모든 것이 정점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셨다는 것이죠. 아직은 안주하고 멈출 때가 아니라 축복을 취하며 여전히 치열하게 영적인 전쟁을 해야 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긴 시간 동안 이루어진 여러 전쟁들을 압축해 놓은 오늘 말씀의 전쟁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축복의 약속이 이 영토의 확장과 함께 구체적으로 다윗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여러 가지 증거로 함께 바라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전쟁은 블레셋과의 전쟁인데,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에 존재였습니다. 골리앗이라는 거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자체가 이스라엘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거인과 같은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청동기 문화에 있을 때 벌써 그들은 철기 문화로 넘어갔기에, 모든 것에 있어 비교 불가의 나라가 블레셋인데 이제는 모든 것이 바뀌어 블레셋에게 항복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다윗을 통하여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의지하여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놀라운 승리였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전쟁은 모압과의 전쟁으로 사실 모압이란 나라는 이스라엘과 상당히 관계가 좋았고 괜찮았던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사울왕에게 쫓겨 다니는 도망자 신세였을 때 다윗의 가족들을 모압에 보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다윗의 증조 할머니 룻이 모압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압 왕이 외면하지 않고 다윗의 가족을 잘 돌봐 주었습니다. 우리나라와 터키가 뭐 지금 형제의 나라라 말하는 것 처럼, 서로 돕고 돕는 그런 관계로 모압과는 그런 끈끈한 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모압과 전쟁을 했냐 하면 다윗과 가까이 지내던 모압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들어서서 이스라엘을 배신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기니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과 전쟁을 하게 되어 많은 땅을 승리로 얻게 됩니다. 특별히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렸다는 말이 등장하는데 그 당시에 적극적으로 전쟁에 가담한 사람들은 죽이고 단순 가담자들은 살려주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전쟁은 소바왕과의 전쟁으로 아람이 연합군대로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를 치러 내려 왔습니다. 그 연합군과의 전쟁에서도 놀랍게 승리를 하게 되고, 그렇게 승리를 하고 나서 그들이 했던 일이 뭐냐면 적군의 말들의 힘줄을 끊는 것입니다. 전리품들인 군마들은 그것을 잘 모으면 다음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는 전쟁에 큰 자산인데 왜 이것을 다 끊게 됩니까? 필요한 것만 놔두고 나머진 다 잘라 버리는 이유는, 필요 이상 가지고 있으면 마병의 힘이 우상이 되어 그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게 되는 위험성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눈에 보이는 군마의 힘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 믿게 되고, 병과 말을 확보해야만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철저히 의지하지 않게 될 수 있기에, 그것을 과감하게 거절하는 신앙고백이 다윗과 이스라엘 군대에 있었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병거와 마병의 힘과 숫자가 우리의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라는 걸 고백하면서 딱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발목에 힘줄을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이것이 다윗의 신앙 고백이자 말씀의 결론입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도 승리했던 비결은 그의 군사력도 아니고 그의 지략도 아니고 그가 가진 어떤 힘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하셨다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전투에 모든 핵심, 승리하게 된 본질은 바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성도의 거룩하고 구별된 삶이 드러나는 영적 전쟁이 현장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이 군마와 같이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나에게 승리와 힘을 준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곳이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살아가는 자라는 것은, 움직일 때와 멈출 때를 분별하는 것과, 내 생각과 뜻을 굴복시켜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평안하고 안락한 세상을 사는 것 같지만, 더 이상 싸울 거 없는 정점에 있는 것 같지만, 아직 하나님께서는 주시고 싶은 것이 많기에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전쟁을 치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모든 영적 전투의 상황과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고 오늘 이겼다고 해서 내일 이긴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언제나 겸손하게 깨어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치열하게 싸워야 될 때에 싸움을 멈추고 안주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계획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우리 가운데 담기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나를 세워주고 나에게 승리를 주는 본질은 이런 눈에 보이는 병과 마병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어떤 재산들이나 세상에 어떤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는 것이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입니다. 그래서 병거를 너무 많이 두지 말고 세상에 힘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필요 이상 두지 않고 다 끊어버리는 이 다윗의 고백과 결단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중심에 모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기게 하심을 승리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윗과 같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는 그 은혜를 우리도 누리고 경험하기 원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의 힘이며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붙들고 살아가는 삶, 하나님을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중심에 놓고 하나님의 손을 잡고 나아가는 믿음과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지금이 머물고 안주 할 때가 아니라 싸워야 될 영적 전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분별하여 나를 지켜주고 나를 붙들어 주고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그 놀라운 영적인 승리를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형으로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명령을 다윗왕에게 전하는 말씀과 그 말씀을 받고 나서 다윗 왕이 반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은 권력과 힘이 있는 자들에게 듣기 싫은 올바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로서 그 당시 최고 권력자 다윗 왕에게 왕의 생각이 잘못됐고 왕의 방법이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입장에서 왕의 생각과 뜻과 반하는 이야기를 전한다는 것은 사실 목을 내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건강한 나라에는 선지자와 왕 사이에 창조적 긴장이 있었습니다. 왕의 주변에 늘 듣기 좋은 이야기들만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기에, 쓴소리 없는 왕은 영혼에 당뇨병이 걸려 본인도 국가도 어렵게 한다는 것을 하나님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왕일지라도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들만 취하는 게 아니라, 듣기 싫은 쓴 소리라도 선지자를 통해 그것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깨닫고 취할 때, 그가 흔들리지 않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왕이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왕의 뜻과 반하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나단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 선지자 본인의 생각도 틀렸다는 것을 고백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다윗 왕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왕의 좋은 뜻대로 하라고 나단 선지자도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나단 선지자가 생각해도 이것은 100%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속히 왕의 생각대로 모든 일을 추진하기를 나단 자신도 원했던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여 주신 말씀은 다윗 왕도 틀렸고 나단 선지자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 의도와 생각은 굉장히 귀했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가진 귀한 의도와 생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웅크리고 기다려야 되는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의 메세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은 매우 다르기 때문에 지금은 아님을 인정하고 기다리라 말씀을 들은 다윗왕의 반응을 주목하기 원합니다. 이 얘기를 들으면서 다윗이 화를 내거나 마음에 상심하거나 어떻게 내가 이렇게 좋은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냐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 나단 선지자가 가져온 하나님의 말씀에 다윗 왕은 아멘으로 엎드렸습니다. 오늘 말씀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다윗이 스스로를 종이라고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교정되고 변화되는 하나님의 종일 뿐임을 진정으로 고백하였습니다. 내 좋은 의도와 뜻이 하나님 앞에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심하거나 분을 내지 않고, 그 당시 최고 실세인 왕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쓴소리를 아멘으로 받아 순종하고 엎드리는 영적 겸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했을 때 하나님이 언제나 옳으심을, 내 때와 하나님의 때가 충돌했을 때 언제나 하나님의 때가 옳으심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삶, 인생의 정점에 있고 나라의 정점에 있었던 다윗 왕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거나 혹시 성경 말씀을 마음에 담아 읽을 때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생각하는 바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은 게 내 심령 골수를 하나님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반복되어 말씀을 통해 설교자를 통해 들려지게 되면 은혜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생각과 반하거나 내게 듣기 싫은 말씀을 듣게 되면, 은혜가 떠났다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강단에서 점점 옳은 소리와 바른 소리 대신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려는 유혹과 도전 가운데 우리가 서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왕과 선지자 사이에 창조적 긴장관계가 없게 되면 어떻게 되냐 하면 왕은 적절하게 선지자들을 잘 돌보고 음식 잘 먹이고 그러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왕의 귀에 듣기 좋은 이야기만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굽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선명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하신 이야기를 왕이 들어야 될 불편한 얘기들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쓴 소리 없이 내 귀에 듣기 좋은 달달한 소리만 듣게 되면 영혼의 당뇨병에 걸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말씀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듣고 싶지 않은 말씀과 내 뜻이 거절되는 말씀이라도, 결국 그 하나님의 쓴소리가 내 영혼을 건강하게 만들고 싱싱하게 만드는 약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쓴 소리를 아멘으로 들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되며 선지자들은 주신 말씀을 정확하게 전하며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뜻과 생각이 거절된 후 다윗왕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종의 집에 하늘의 복을 주며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눈에 보이는 복이 아니라 신령한 복 하늘의 복을 다윗은 정말 사모했고 정말 최우선으로 구했다는 것이죠. 내가 제대로 되기 위해 내 인생이 제대로 살기 위해, 이 나라가 든든히 서기 위해 정말 필요한 복은 보이지 않는 복인 하늘의 복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붙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원히 서 있는 나라가 될 때 이스라엘은 복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다윗의 이런 태도와 자세를 하나님께서는 매우 귀하게 보시고 놀랍게 쓰셨습니다. 인생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엎드리고 높은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의 종으로 철저하게 고백하며 엎드리는 이런 다윗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고 그 마음을 들어 풍성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엎드리고 말씀 앞에 굴복되는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다윗 왕가가 스스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왕,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나라,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왕국이 될 수 있도록 그를 놀랍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생밖에 없습니다. 내 스스로 내 인생을 세우려고 발버둥치는 인생, 하나님이 세워 주시며 영원히 견고한 인생…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들은 어떤 인생을 사십니까? 인생의 정점에서 사람들이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들만 쏟아 낼때, 쓴 소리를 들을 귀를 닫지 않고, 그 쓴 소리가 내 영혼의 당뇨병에 걸리지 않게 하는 양약임을 아는 자가 복이 머무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것이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복이 나를 세우고 계시고 나를 든든하게 지켜 주심을 철저히 믿는 자가 복이 머무는 인생입니다. 인생의 정점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심을 철저히 인식하고 그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태도,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이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말씀이 나를 변화시킨다는 말씀 중심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며 말씀이 지적하게 하시며 말씀이 나를 교정하게 하시며 말씀이 나를 이끌게 하심을 믿으며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들으며 그 말씀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판단하고 말씀이 우리를 교정하고 말씀이 우리를 이끄는 이 분명한 태도와 자세를 가질 때 말씀을 통하여 하늘의 복이 우리 가운데 머무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영원히 견고한 인생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을 맛보며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용기, 말씀을 그대로 듣는 용기가 가득하고, 말씀이 나를 지적하고 교정하는 역사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 영원한 복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머물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어제 말씀을 통하여 나단 선지자와 다윗 왕이 귀하고 기특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 영적인 겸손을 가지고 인생의 정점 가운데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고 호강할까를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을 고민했던 다윗의 그 순전한 태도와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굉장히 귀했고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니까 나단 선지자도 다윗 왕 안에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이 굉장히 좋았고 그 뜻에 따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 여겼기에,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 선지자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 속에 있는 순전한 의도와 마음은 귀하지만 지금은 성전 지을 때가 아니라며 하나님이 막으시는 겁니다. 다윗의 태도와 자세가 틀려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와 사람의 때가 다르다는 겁니다. 다윗이 웃사의 저주를 통하여 뼈속깊이 배운 게 뭐냐면 아무리 좋은 계획과 의도도 그 방법이 잘못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하나님 성전을 건축한다는 좋은 계획과 아무리 좋은 뜻과 의도를 가졌어도 하나님의 때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의도와 좋은 생각을 가졌다 해서 항상 옳은 게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의 때와 조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인생의 정점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기쁘게 할까….하는 생각에서 나온 성전을 지으려는 그 마음 자체는 굉장히 귀한데 지금은 하나님의 때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추진하지 말고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왜 지금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때가 아닌가라는 것에 대한 두 가지의 이유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이유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이는 성전을 세우기 전 보이지 않는 성전을 먼저 세울 때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이란, 하나님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 신앙 고백을 먼저 세우고, 그들이 지금 기억하고 붙들어야 될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을 세우는 것보다 먼저 세워져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너져 있는 신앙고백을 먼저 세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너진 신앙 고백, 무너진 보이지 않는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왕이심을 고백하는 신앙 고백이 무너져 있고,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는 신앙 고백이 무너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왕이셨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입히셨으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왕이셨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 없는 백성같이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인도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왕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고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야 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 되심을 거절한 결과가 바로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왕이 없는 것처럼 살아왔었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왕이십니까? 우리 교회에, 우리 가정에 하나님은 정말 왕이십니까? 그리고 왕이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심을 실체로 믿으십니까? 지금 이 시간 기도하는 예배당에 하나님이 임재 하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정말 믿느냐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왕이 아니신 분처럼 살았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지 않고 함께 계시지 않는 자들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무너진 신앙 고백을 그냥 놔둔 채 보이는 하나님의 성전을 제일 먼저 세우게 되면 찾아오는 위험함이 뭐겠습니까? 아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둘 위험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전을 세우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해야 될 가장 중요한 일은 뭐냐면 이스라엘의 정말 하나님은 왕이신가…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그들과 함께 하셨음을 실체로 믿는가…이 분명한 고백을 먼저 세운 후에 보이는 성전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죠. 보이지 않는 성전이 먼저 세워지고 보이는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거예요. 이 분명한 신앙고백을 붙들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도구로서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성전에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나의 왕은 언제나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지…이 분명한 신앙 고백을 기억하고 현재화 하는 은혜가 있을 때 성전이 축복의 통로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미루신 이유는 성전은 사람들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실 거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는 그 마음은 기쁨으로 받으시겠다는 거예요. 대신 성전은 나의 계획대로 가시겠다 말씀하시며 성전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다는 걸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물론 사람들이 열심히 뛰어서 성전을 건축 하겠지만, 성전을 본질적으로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세운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운 성전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나아가는 것이죠. 우리가 성전을 세우는 게 아니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우시고 지키시고 견고하게 하심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도구로써 우리는 도구의 역할을 순종 하며 충실하게 할 뿐이며 그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견고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지켜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세우는 게 아니고, 우리 가정과 사업장을 내가 세우는 게 아닙니다. 세우시는 분도 하나님이고, 지키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견고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믿고 고백하는 것, 그게 우리의 놀라운 신앙 고백이 될 줄 믿습니다. 다윗왕이 얼마나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습니까? 나단 선지자가 얼마나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선지자였습니까? 그 두 사람도 지금이 하나님의 때라고 당연히 믿었던 성전 건축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면 하물며 저와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게 살아간다는 건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인식하고 그분 앞에 나아갈 때와 멈출 때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한 삶입니다. 내 인생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세워지는 비결이 뭡니까? 오직 하나님이 나의 교회를 세우시고 나의 가정을 세우시며 나의 삶을 세우심을 믿으며 세우시고 붙드시고 지키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며 단단히 주님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언제나 하나님은 왕이신가?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가? 정말 나를 세우시고 지키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분이 왕이신 하나님이신가? 나의 가정을 우리 교회를 세우시고 지키시고 견고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을 믿고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만이 견고해지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과 교회만이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 신앙 고백이 나에게 든든히 세워질 때 우리의 삶에 주님의 역사가 풍성히 임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고 순종 하며,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뜻 가운데 놀랍게 사용되는 귀하고 복 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정점이 있을 때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생각하는가가 신앙생활에 내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는 본질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다윗이 왜 하나님께 합한 자이며 하나님께 합한 마음과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쓰임 받는 비결을 함께 은혜로 나누기 원합니다. 지금 다윗이 왕이 된 후 통일 왕국이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게 통일되고 마무리되고 평화의 시기로 올라간 인생의 정점, 이스라엘 나라의 정점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도, 이 통일 왕국을 세우는 과정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망자로서 수많은 시간을 보냈고 고난의 행군 가운데 눈물젖은 빵을 오래 먹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았습니다. 사울왕이 죽은 이후에도 통일왕국이 바로 평정된 것이 아니라 7년 반 동안 남쪽 유다의 왕으로서 여러 전쟁들이 계속되었습니다. 통일왕국이 되고 나서도 블레셋과도 싸우고 여러 주변 나라들과도 싸우는 과정을 통과하여 마침내 모든 것을 세우고 안정화 단계에 왔으며 그가 그렇게 소원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가져오는 일까지 다 마무리 짓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궁에 거하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냥 잘 지은 궁에 거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이 모든 게 마무리 되었고, 통일 왕국이 안정화되고 모든 것이 정점에 있는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마침내 고생해서 드디어 이제 저 성공의 길에 올라갔고 정점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모든 것을 이룬 것 같고 이제 숨 돌리고 이제 긴장을 풀고 즐기기만 하면 될 거 같은 그 인생의 정점, 하이 포인트에 있을 때 여러분들은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때 어떤 생각을 하냐면 지금까지 이제 고생했는데 이제부턴 좀 내 마음대로 즐겨야지, 이제부턴 떵떵거리면서 살아야지 그동안 번 거 잘 쓰면서 제대로 살아 봐야지…수고한 나에게 펑펑 쓰며 나를 위해 살아야지….모든 게 나에게 집중되며, 나를 위해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를 생각하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정점에 올랐을 때 특징입니다. 그걸 뭐라도 그럴 수 없는 게 오랫동안 수고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좀 숨 좀 돌리고 떵떵거리고 좀 당당하게 나를 위해 즐기고 나를 위해 마음껏 쓰고 좀 호강하며 지내는 거 이게 잘못된 것도, 틀린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위대한 점은 뭐냐면 그런 평범한 인생을 넘어서 비범한 인생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윗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잘 되게 되었다며 그를 위대한 왕으로 높이고 승승장구하던 그때, 다윗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어렵고 고난의 길을 갈 때는 절박하니까 하나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게 오히려 쉽게 가능 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과 사랑이 커지는 게 어떻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모든 것을 평정하고 나서, 성공하고 인생의 정점의 자리에 있을 때 나를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자, 기적의 삶입니다. 그 인생의 정점에서 하나님을 망각하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감사할까를 제일 먼저 생각한 다윗의 순전한 태도와 자세를 하나님은 매우 기쁘게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이 왕의 자리까지 올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신 축복을 내가 지금 누리고 있습니다…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과 공로를 돌리는 이 순전한 마음이 한결같은 자가 바로 하나님께 합한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그의 인생의 정점에 있었을 때도 다윗에게는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하늘의 은혜와 복이 부어져서 높이 올라가고 잘 되게 되면 대부분은 그 부어 주신 근원이신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인생 정점에서 성공과 자기 일의 업적 자체를 붙들고 무너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울왕이 대표적인데 놀랍게 부어진 성공과 복 앞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복 주신 분에게 등 돌리고 살아가서 결국 그 영광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 하늘에서 부어지는 복과 성공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는 대부분 사람들, 자기 호강하고 자기가 잘 살면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 인생의 정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달리 다윗은 은혜로워진 승리를 경험한 이후에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망이 여전히 식지 않았고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변질의 위험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의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최고 전성기에 있을 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잘 지낼까, 어떻게 하면 내가 호강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떵떵거리고 살지를 관심 두는 것을 멈추고 의도적으로 하나님에게 먼저 관심을 두었던 것이죠. 나에게 집중하는 게 아니라 나에게 복 주신 하나님에게 집중하면서 바라 보니까, 나는 궁궐에 백향목으로 만든 궁궐에 있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저 천막에 있는게 정말 마음으로 죄송한 겁니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 된다고 압박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윗의 자발적인 마음 자원하는 마음 가운데 나온,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할까를 마음에 둔 그의 순전한 태도였습니다. 이게 다윗이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되는 비결이었고, 하나님에게 온전히, 끝까지 쓰임 받았던 비결이었습니다. 다윗 인생에는 실패와 문제가 여러 번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거둬가지 아니하시고 그 축복을 머물게 하신 비결,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왕으로 남게 하신 이유가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과 태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다윗의 또 위대한 점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왕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진 거룩한 부담감을 나단 선지자라 상의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인생의 정점에 통일 왕국의 왕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왕에게 다 엎드리고, 왕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혼자 결정 해도 상관 없고 다윗이 이렇게 한다고 반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그냥 결정하지 않고 나단 선지자와 상의하고 자문을 구했다는 것이죠. 이게 다윗이 왕으로서 인생의 정점 가운데 보여준 영적 겸손함 입니다. 신앙생활을 좀 열심히 하고 잘하는 사람들 특별한 체험을 받은 자들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함정이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가 제일 대단해 보이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음성 특별히 들었다는 것이고, 특별한 성령 체험 했다, 나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나 영적 권위에 굴복하거나 말씀 앞에 엎드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만 하나님이 역사하는 줄 알고,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자신에게만 특별한 체험이 있는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으로 하는 교회의 신앙생활을 하찮게 여기고 교회에서 영적 지도자를 무시하고 가정에서 남편에게 주신 가장됨을 무시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다윗과 같은 인생의 정점에서 영적 생활의 정점에서 잃어버리지 않았던 영적 겸손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영적으로 겸손하다는 것은 나에게 주신 놀라운 특별한 은혜가 내 옆 사람에게 동일하게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세워주신 영적인 권위에 복종하며 중요한 결정 전에 영적 지도자에게 물어보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순전한 생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영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과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인생이 잘 나갈 때도 심지어 왕이 되어 모든 것을 가진 그 정점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다윗의 비결을 마음 속에 담기 원합니다. 인생이 잘 나가고 승승장구하고 문제가 없고 인생의 정점 없을 때 모든 것이 안정기에 접어든 인생의 정점에서 자신이 제일 먼저 생각나고 편안하게 자기를 위해 누릴 거 누리며 호강하면서 잘 지내는 것에 모든 것을 쏟는 그런 평범한 인생을 넘어 다윗과 같은 비범한 인생으로 그 정점에서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자가 되십시오. 복 주신 분은 하나님임을 잊어버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기쁨 될까를 고백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 합한 자로 주님의 기쁨 되고 더 큰 은혜로 우리에게 부어질 줄 믿습니다. 다윗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민감함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숙이고 영적 지도자 나단에게 자문을 구하는 영적 겸손의 태도가 다윗의 탁월한 점이며 하나님께서 이 점을 매우 기쁘게 높이 사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영적 교만함으로 무너지지 않고 영적 겸손함으로 사람에게도 순전하고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께 끝까지 풍성하게 쓰임 받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아래 언제나 머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려 하는 좋은 마음과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방법으로 웃사가 죽는 큰 사건을 통해 타산지석으로 삼아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을 통해 추진하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 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렇게 인간적인 쉽고, 편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그것을 심각하게 처리하심을 뼛속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오벧에돔의 집에 있었던 법궤를 드디어 가지고 다윗성으로 옮겨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마치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아간의 잘못을 처단하고 모든 것을 정리한 후에 다시 한번 아이성을 치러 올라가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다윗 왕은 비장한 마음으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번 그가 그렇게 원했던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래서 실패를 넘어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방법을 철저히 지키는 다윗 왕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번이나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법궤 운반의 책임을 이번에는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수레로 편하고 쉽게 가져오려 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지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불편하고 번거로워도 철저하게 주님이 명하신 방법으로 궤를 메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요구하시는 방법은 때로 이렇게 불편하고 번거롭고 어떻게 보면 돌아가는 길 같이 보이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가져오려고 하고 편하게 부담없이 가져 오려 하는 자세,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가져오려 하는 이 태도 자체가 하나님을 하찮케 여기는 자세이자 태도임을 뼈속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철저하게 굴복하여 하나님의 궤를 힘들어도 불편해도 번거로워도 메어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이 법궤를 가져오는 것 또한 블레셋과 전쟁을 하듯 내면의 영적 전쟁 일부임을 정확하게 깨달아 주님만의 의지하며 주님의 뜻 가운데 나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마침내 들어오는 하나님의 궤를 바라보며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심으로 기뻐하였습니다. 온 백성들이 너무 좋아서 기뻐 춤을 추었고, 다윗왕 자신도 얼마나 좋았냐면 다윗왕이 하나님 앞에서 뛰놀고 춤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춤추며 기뻐하는 모습, 하나님 은혜 안에서 기뻐 뛰노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왕인데 그래도 사람들 앞에 백성들 앞에 체면을 지켜야 되는데 이 시간 다윗은 그런 체면 같은 거, 사람들 시선 신경 쓰지 않는 것이죠.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왕이라는 신분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뛰놀고 춤추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왕이 된 것, 통일 왕국이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높아진 것, 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는 왕이 될 조건도 없고 실수도 많고 부족한 사람인데 나 같은 사람을 왕으로 삼으신 그 하나님 은혜에 감격하는 겁니다. 그 마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그 하나님 앞에 은혜에 감격하여 기뻐 춤추며 뛰놀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런 다윗의 순전한 모습, 하나님을 향한 열망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결국 다윗왕 자신을 살리고 모든 백성들을 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은혜 안에 춤추며 기뻐하고 뛰노는 것을 통해 이 시간 우리들의 주님을 향한 감격과 열망이 되기를 사모해봅니다. 사실 성도로서 우리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연히 주일 성수 해야 됩니다.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피곤하고 바쁨에도 하나님을 위해서 주일 성수 한다고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가 주일 성수를 지키는 게 아니라 주일 성수가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은혜 가운데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 성수의 예배를 지키는 게 아니라 주일 예배가 내 인생을 지켜주는 복이 되는 겁니다. 나의 그 구별된 시간과 나의 구별된 예배를 통하여 그 예배가 나를 살리고 나를 지키고 나를 보호하는 겁니다. 이 험한 세상에 혼탁한 세상에 어두운 세상에 내 영혼을 깨우고 신앙의 기준을 바로 세워지고 지켜주는 게 바로 주일 성수입니다. 새벽 기도의 은혜가 뭡니까? 내가 새벽 기도에 헌신하는 게 귀합니다. 새벽에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루에 첫 시간을 드리며 헌신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게 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새벽 기도를 지키는 게 아니라 새벽 기도가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결국 나를 지키는 도구가 되고 나를 살리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믿을 때 그 새벽 기도가, 그 주일 예배가 나의 기쁨과 감격의 통로가 되는 것이죠. 이걸 깨달을 때 의무와 책임감을 넘어 주일 성수가 새벽기도가 하나님의 은혜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다윗과 같이 기쁨과 감격으로 예배 자리에, 기도의 자리에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감격과 기쁨을 혼자 나누기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들어올 때 그렇게 은혜 안에 춤추고 기뻐한 후 그 감격을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떡과 고기와 포도주 포도 한 덩이씩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걸 통하여 온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뛰노는 은혜의 도가니가 되기를 다윗은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다윗도 기뻐 춤추며 은혜 안에 뛰놀고 있습니다. 온 백성도 기뻐 춤추며 뛰놀며 은혜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만이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한 유일한 한 사람이 바로 미갈입니다. 오히려 다윗이 이렇게 은혜 안에 뛰놀며 기뻐하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업신여겼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체면도 다 팽개치고 왕이 저럴 수 있는가….그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탕자가 돌아와 아버지와 온 백성들이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큰 아들만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밖에서 화가 나 있는 모습과 흡사합니다. 미갈이야 말로 이 시간 우리가 조심해야 될 대표적인 모습이 아닌가 마음에 새겨봅니다. 우리가 다윗과 온 백성들과 함께 주의 은혜 가운데 기뻐 뛰며 즐거워 할지, 미갈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뛰놀지 못하고 은혜 안에 뛰는 자들을 멸시할지…이 시간 결단하기 원합니다. 다윗과 같이 사람들 앞에서의 삶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오심을 기대하고 바라며 은혜 가운데 기뻐 뛰놀며 하나님의 큰 은혜 가운데 머물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법궤를 경하게 여기며 벌어진 웃사의 죽음과 중하게 여기며 부어진 오벳에돔의 축복에 대해 대비하고 있습니다. 다윗왕이 하나님의 법궤로 말미암아 큰일이 벌어진 이후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경하게 여기며 수레에 싣고 옮겨오다가 사고가 나서 소위 말하는 멘붕이 온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그저 편하고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가볍게 대하다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궤를 중하게 대하면서 오벳에돔 집안은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오벧에돔하면 하나님께 복받은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있을 정도로 그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복 주신 이야기가 꼭 따라오게 됩니다. 그가 그렇게 복 주신 사람의 대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을 대하듯이 무겁고 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어려움, 하나님으로부터 큰 축복을 가르는 두 이야기를 통해 성도로서 나아가야 될 바른 태도가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죽은 웃사의 비극, 본질적으로 다윗왕의 큰 실수가 뭐였냐면 좋은 의도에 좋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수도를 정하고 통일 왕국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큰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궤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던 것이죠. 오랫동안 백성들에게 외면당하며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수도 한 복판으로 모셔오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수 있을까…매우 좋은 의도였습니다. 문제는 뭐냐면 그것을 가지고 오는 방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는 방법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는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편하고 쉽게 수레를 사용했으며 그 법궤를 함부로 만져서 사람이 죽는 큰 사고가 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동기가 좋고 아무리 의도가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 태도가 하나님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악한 일이 되 버린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노하심에 지금 다윗 왕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려운 마음을 달래고 지금 그 하나님의 궤를 오벳에돔의 옮겨가는 것입니다. 사실 오벧에돔의 집안 입장에서 봤을 때는 이것은 굉장히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바로 얼마 전 하나님의 궤를 잘못 만져서 웃사가 저주를 당하는 것을 익히 들어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를 잘못 움직이는 순간 온 가족이 몰살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가득할 수 있는 상황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벧에돔은 그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법궤를 자기 집으로 모셔오는 순종과 신실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내고 여호와의 궤를 다윗의 명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을 철저히 지키며 자기의 집에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죠. 마치 하나님을 모시듯이 중하게 여기며 오벧에돔이 하나님의 법궤를 얼마나 잘 옮겨왔으며, 얼마나 바른 태도를 가지고 대했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궤를 중히 여기며 바른 태도로 섬기는 것을 통해 오벧에돔에게 하나님의 큰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보면 아주 의도적으로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셨음을 두 번 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오벧에돔의 내면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마음, 하나님의 궤를 중히 여기며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 모시려는 그의 마음과 태도를 하나님이 기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법궤를 경히 여기며 웃사가 갑자기 죽은 말씀과 중히 여기며 오벳에돔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성도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태도와 자세로 바라봐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에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원하며 하나님 축복 가운데 있기를 원한다 간절히 부르짖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른 태도와 자세로 붙들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중심에 두기를 거절하며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그대로 고집하며 수레로 쉽고 편하게 빨리 끌고 와서 내가 원하는 식대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나의 방식을 고집하고 내 뜻과 나의 때를 주장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이 담기지 않거나 멀어지는 일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 그 자세와 태도에 따라서 오벧에돔과 같이 놀라운 축복을 받기도 하고 웃사와 같이 저주를 받기도 함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두려움을 넘어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집으로 모신 오벳에돔의 그 바른 자세와 태도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사모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면 내 마음이 하나님 그 분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른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선다면, 오벳에돔에게 부어진 하늘의 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지고 담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복을 구하고 사모한다면 하나님을 정말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기를 사모한다면 간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대하듯이 바른 태도와 자세로 중하게 여기며 내 뜻과 방법을 내려놓고 나아갈 수 있어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바른 태도로 하나님을 붙들고 정성 하나님을 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복을 부어 주시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벧에돔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바른 태도와 바른 자세로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이끄시고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그 한량없는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오벧에돔의 집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집과 모든 소유가 하늘의 복을 누리는 그 복이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교회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머무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임하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바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머무는 것을 통하여 이 오벧에돔이 누렸던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시며 오늘도 승리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된 승승장구와 평탄함 속에 발생하는 찬물을 끼얹는 사건을 통해 다윗의 실수와 문제를 우리 삶에 적용하도록 영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통일 왕조 이후에 승승장구하고 모든 것이 정리된 후에 하나님의 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려고 생각을 가졌습니다. 다윗 왕이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기특하고 좋은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궤는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하듯이 중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하나님의 궤는 사사기 시대부터 저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고 백성들에게서 경시되어 왔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서 하나님의 궤를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대신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니 하나님의 궤를 창고 같은 곳에 두며 삶의 중심에 모시지 못했습니다. 사울왕이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궤를 마치 부적이나 우상과 같이 여겨서 믿음이 없으면서도 그냥 그것을 앞서 나가서 싸우면 이길 거라고 착각해서 전쟁이 들고 나갔다가 빼앗기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되찾아왔어도 여전히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며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의 궤가 백성들의 신앙 중심에 서 있지 못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대하듯이 제대로 모시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가 저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에 모시고 중심에 두고 살아야 될 백성들의 신앙에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에, 통일 왕국이 안정되고 나서 그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 오려고 한 것입니다. 이 생각이 얼마나 기특한 생각이고 굉장히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왕의 의도와 생각은 굉장히 좋았고 하나님께 귀했는데 그 좋은 하나님의 일을 추진하는 하는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목적은 좋았지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가 된 것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는 방법이었습니다. 옮길 때는 분명히 하나님의 궤는 메어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반드시 메어 오도록 명하셨고, 아무나 매는 것도 아니고 구별된 사람들을 통해서만 멜 수 있도록 민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딱 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번거롭고 복잡하고 불편한 방법임에도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윗왕의 명을 받아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는데 메어오지 않고 새 수레에 싣고 왔다는 것입니다. 수레에 싣고 오는 방법은 당연히 편하고 쉽고 간단했고, 그 당시 주변 나라들의 이방 종교들에게서 개발되어서 널리 사용하던 방법이었습니다. 바퀴가 있으니까 편하고, 이동하기도 번거롭지 않고 여러 가지가 일사천리 잘 되는 쉽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편하고 간단하게 하는 이방종교의 방법을 아무 생각 없이 차용해서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온 것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방법, 복잡하고 번거롭고 불편하지만 율법을 따르는 방법이 아니라 세상에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된다는 것을 성경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어떻게 보면 성도로서 우리가 정반대의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타종교인 이슬람 사람들은 코란을 굉장히 신성히 여겨서 코란을 찢거나 코란을 머리에 베고 자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을 매우 심각한 불경죄로 여깁니다. 천주 교회에서는 성만찬에 쓰는 성체와 포도주를 신성하게 여겨서 함부로 대하면 큰일 납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신성시 되는 게 미신과 왜곡의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건 그렇게 말씀을 대하는 태도와 성만찬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개신 교회의 도전과 문제는 너무 많은 성도들이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하찮게 여기고 경시 여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경죄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던지고 찢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성경을 그냥 다른 좋은 문학 책 정도로 여기며 중하게 여기는 태도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결정적인 문제가 뭐냐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나의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직결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하게 여긴다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길 수 없기에 이게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쉽고 그리고 가볍게 여기는 그들의 마음의 내적 태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다윗왕과 백성들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갑자기 문제가 발생했는데, 타작마당에 갔는데 수레를 끌고 온 소들이 뛰는 겁니다. 소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궤가 흔들려서 넘어지려 하니까 급한 마음에 웃사가 그냥 경황이 없이 넘어지려는 하나님의 궤를 손으로 딱 붙잡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쳐서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다윗 왕이 굉장히 좋은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궤를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방법이 잘못되었기에, 하나님의 궤를 경시하는 방법이었기에 이렇게 큰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그 하나님의 궤를 이렇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쉽고 편안한 방법으로 가져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심각한 죄로 바라보신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부어 주신 순전하고 귀하고 기특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가 이렇게 좋겠다는 마음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 좋은 계획과 마음의 뜻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는 것이 영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계획과 생각이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닌 내 편한 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을 밀어 붙이게 되면 영적인 일이 육의 일이 되며, 하나님께 기쁨이 되지 않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보여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나아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이 실수를 우리 마음에 새겨서 하나님이 주신 기쁜 생각과 뜻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는 지혜를 붙들고 주님께 쓰임받는 도구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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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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