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왕이 인생 후반부에 그 인생을 쏟아 부으며 준비했던 것은 장차 있게 될 성전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세워지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장차 세워지게 될 성전을 바라보며 그 사전 작업에 최선을 다하며 다음 세대의 일들을 준비하는 다윗의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과 배움을 줍니다. 성전의 준비는 성전을 위한 재물과 자재들을 준비하는 외적인 준비와 성전 안에 섬기는 사람들을 준비하는 내적인 보이지 않는 준비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함께 준비하고, 껍데기만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을 준비하는 성전 준비를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은 보이는 건물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성전인 성도들의 영이 세워지는 것임을, 그 안에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이 세워지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은 솔로몬에게 성전 준비를 하며 성전을 지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거의 막바지 작업으로 나아가는 때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군사적인 그리고 행정적인 사람들의 조직을 우리에게 증언하면서, 군대조직과 행정조직을 체계화하고 시스템을 갖추어 성전을 세우고 짓는데 도움이 되도록 계획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 수많은 조직들이 나오고 거기에 반장들이 등장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조직하고 체계화하는 것을 통하여 다윗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하나님의 성전을 잘 섬겨야 된다는 영적 의미도 가르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성전은 한 사람이 열심히 나서서 세우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모두 한 힘과 마음을 모아 함께 일하면서 지어지는 "함께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아무리 대단해도 결국 혼자서 성전을 지을 순 없고 하나님께서는 이 성전을 준비하는 것을 통해 사람들과 함께 마음을 합하고 마음을 이르며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이 성전을 같은 마음으로 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예배당을 바라보며 이 예배당을 통하여 목회자 혼자 일하면서 세워지는게 아니라, 성도들이 목회자와 한 마음과 뜻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함께 일하면서 든든해짐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또 하나 말씀을 통해 살펴볼 것은 인구 조사를 "하지 않은 이유"와 인구 조사를 "하지 못한 이유가 동시에 등장"하는 부분을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다 하지 않는 것이니까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하지 않은 것과 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면서 큰 차이가 있음을 강조합니다.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23세 미만의 젊은 자들을 인구 조사를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23절) 이스라엘 사람을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젊은 세대의 인구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인구 조사를 하지 못한 때도 등장하는데 그 이유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이 막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자기 교만에 빠져 인구 조사를 시작했고, 측근들이 목숨 걸고 막아도 밀어 부쳤던 그 인구 조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수만명이 전염병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획한 인구 조사하기 시작하고 끝내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해서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게 하리라는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 믿음의 표현으로 인구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라면 24절 말씀은 하나님의 불순종의 결과로 하고 싶었지만 계획한 인구조사를 끝내지 못한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인구 조사를 "하지 않는 것"과 인구 조사를 "하지 못한 것"은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둘다 하다가 중간에 그만 둔 것이지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별로 없어 보이나 그 뒤에 보이는 영적인 의미는 천지 차이라는 것이죠. 첫 번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며 인구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고요. 두번째는 불순종으로 인구 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그 조사를 끝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일이나, 주님의 교회 안에서 사역하고 봉사할 때 이런 보이지 않는 요소를 통하여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겉보기에는 별로 차이가 없어도 하지 않는 것과 하지 못한 것은 큰 차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님을 바라보는 눈, 보이는 것을 넘어 깊은 곳에 영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눈을 가지고 살아갈 때 주님의 성전에서 섬기고 사역할 때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본질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며 본질을 붙들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 우리 앞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 앞에 줄 되고 변화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될 영적 진리라고 믿습니다. 보이는 건물만을 세우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도 함께 세우면서 함께 한 마음으로 주님의 성전을 세워나가는 기쁨이 맛보아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 왕이 성전을 세우는 것을 미리 준비하면서 성전 안의 섬길 사람들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2만 4천 명을 뽑아 성전을 섬기는 자로 레위인 들을 따로 구별하였고 음악으로 섬기는 봉사자들을 세우며 그들을 조직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성전 안에 문지기로 섬기는 자들을 따로 세워 구별하는 것을 증언합니다. 몸이 힘들면서도 하는 티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바로 문지기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일주일에 몇 번씩 근무를 서게 되는데 문지기인 위병소 근무는 어떻게 보면 몸은 힘든데 티가 하나도 나지 않는 일입니다. 24시간 교대 해야 되기 때문에 어떨 때는 낮에 근무를 쓰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자다 깨서 밤에 근무를 서기도 하는데 누가봐도 주목하지 않는 일입니다. 성전에는 이 문지기와 같이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문을 지키며 주목받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런 일을 감당해야 되는 봉사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은 성전 안에 사람들을 준비하며 이 문지기를 세우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미리 그들을 따로 세우는 것입니다. 남이 주목하지 않는 일인 이 문지기로 헌신하는 것이 성전을 성전 되게 하는데 너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다윗은 알고 그 사람들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세워 주신 이 성전을 통하여 주님이 주신 역사와 은혜가 풍성히 누려 지기 원하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이 성전 문지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사람들이 세워질 때 우리 교회가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되며 주님께서 영광 받으심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 이렇게 문지기와 같이 어떻게 보면 하기 싫고 빛이 나지 않지만 이런 헌신을 감당하는 귀한 자들이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의 성전으로서의 귀한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는 오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봅니다. 성도분들 중에 주중에 나와서 보이지 않게 정말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이 보지 않아도 혼자 오셔서 기도하시는 분들, 혼자 오셔서 주님의 일을 감당 하시는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통해 교회가 더 든든하게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 기쁨되며,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우리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좀 깊게 들어가 보면 다윗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겼던 성전의 문을 시킨다는 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성전의 문을 시킨다는 것, 성전 문을 지키는 이유는 들어올 것은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아야 될 건 들어 오지 말아야 되기 때문에 문을 지키는 겁니다. 성전을 거룩하고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들어올 것은 들어와야 되고 들어올 것은 들어오지 말라고 거르는 곳이 바로 문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해보면, 교회 문을 지킨다는 것은 교회 안에 들어와야 될 것만 들어오고 들어 오지 말아야 될 것은 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중요한 영적 필터가 교회 문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어떻습니까? 이 시간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내 몸을 사용하신다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거룩한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내 몸인데 내 몸에 내 마음에 들어 올 것은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 것은 들어오지 말아야 되는 영적 필터인 문지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지킨다는 건 뭡니까? 내 마음에 들어 올 것 은 들어오게 하고 들어오지 말건 들어오지 않게 하는 영적 필터를 설치해 문지기를 세우는 것, 그게 바로 마음을 지키는 겁니다. 들어와야 할 것을 들어오지 않고, 들어오지 말아야 할 것이 필터 없이 거르지 못하고 그냥 홍수같이 내 몸과 마음에 들어오면 그게 마음에 병이 되는 거고 몸의 병이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성전에 의도적으로 문지기를 두고 그 문지기를 세우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사역으로 감 당했던 이 역대상 말씀의 지혜를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성전을 성전되게 하는데 문지기가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 위해 들어올 것은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 것은 거르는 이 영적 필터인 성전 문지기를 우리 교회의 문에도, 내 마음의 문에도 세워야 합니다.우리 교회를 지키는 영적 필터인 문지기가 없다면 내가 이 시간 영적으로 깨어 거룩하게 잘 지키는 영적 파수꾼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문지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내 마음에 들어 올 건 들어오고 들어오지 말건 들어 오지 말게 하는 마음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는지 나의 마음을 말씀으로 비춰보기 원합니다. 내 마음을 지키는 이 문지기가 없다면 바로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영적 필터인 문지기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거룩하게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내 몸과 마음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해 내 마음에 영적 필터인 문지기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이 시간 나의 새벽기도를 통하여 첫 시간을 기도와 말씀으로 내가 영적으로 조율 받으며 영적 필터인 문지기로서 우리 교회를 지키고, 내 몸과 마음을 지켜 주님이 주신 영적 건강함과 영적인 은혜를 풍성히 드리며 이 험한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지금 성전 안에 섬길 사람들을 미리 조직하고 기획하는 것을 성전 준비의 굉장히 중요한 일부로 생각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재물과 재료들, 자재들과 인프라를 준비하며 성전에 세워지기 위해 보이는 것을 준비하는데 최선을 다한 다윗,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동시에 준비해야 함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섬김과 헌신이 있어야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 될 수 있음을 알기에, 성전에서 섬길 사람들을 구별하여 조직하고 그들을 훈련시킨 것이 다윗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에 하나라고 역대상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성전에서 섬기는 자들 가운데 특별히 성전 안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사람들, 찬양대나 성가대 같은 음악사역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준비를 따로 한 장을 구별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섬기게 한 사람들 중에 수금과 비파와 제금, 악기들을 통해 신령한 노래를 하도록 예배 안에 음악을 잘 준비하는 사람들 (1절)을 따로 조직하는 것을 다윗이 성전 준비에 정말 중요한 부분으로 생각하며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영적 진리가 있는데 예배 가운데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긴 광야 속에 우리가 요즘 찬양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마음껏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인지, 함께 주님을 기쁨으로 찬양하는 그 힘이 어마어마 하다는 것을 요즘같이 뼈저리게 깨닫는 때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의 예배를 준비하는 음악을 담당 않은 자들이 가져야 되는 자세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에 대해서 함께 두 가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로 오늘 말씀을 통해 증언하는 음악 사역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나의 찬양과 나의 악기가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 주님의 성전 안에서 사람들에게 노래하고 연주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나의 찬양, 나의 성가, 나의 악기가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죠. 예배를 통해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도구일 뿐이라는 것,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전을 섬기는 거룩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 음악이 예배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많은 경우 찬양단, 성가대, 오케스트라등 누가 되던 간에 음악을 통하여 하나님께 섬기는 자들의 영적인 자세가 준비되지 않고 그냥 재능을 뽐내며 섬기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음악을 연주하는 대상, 찬양을 하는 일차 대상이 눈에 보이는 회중인 경우가 너무 많은 것이지요. 내가 가진 달란트를 통해 내 찬송과 내 연주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거룩하고 귀한 일이라는 이 분명한 기초를 가지고 모든 음악 사역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모든 음악 사역의 기초입니다. 두번째, 주님의 성전에서 음악 사역의 기초는 기능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음악 사역을 하는데 잘하는 사람 순으로 세운게 아니라 제비뽑기를 통해 세웠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7-8절). 24개조로 나누어 두주씩 돌아 가면서 찬양팀, 성가대, 악기팀을 세운 것이지요. 그렇게 되니까 소위 말하는 음악적인 전문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죠. 기능적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개조로 나누어 두주씩 봉사하게 했다는 거예요. 이것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진리는 이것입니다. 교회에서 음악 사역할 때 물론 기능이 필요하고 전문성을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면 우리의 드리는 마음, 그 순전한 마음이 들어가는게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감사를 표현하고 도구로서의 찬양과 연주가 되는 것을 망각한다면 나의 음악적인 재능은 결국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방행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는 거예요. 분명히 음악적 재능이 필요하고 달란트가 필요합니다. 전문성이 필요해요. 그런데 그 달란트와 전문성이 내가 하나님께 기쁨으로 하나님을 감사함으로 드리는 찬양과 내 연주가 되는 것을 방해할 정도가 되면 그 전문성과 그 음악적 달란트를 내려 놔야 된다는 것입니다. 기능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항상 주님께 드리는 마음이 훨씬 더 중요 하기 때문이죠. 찬양이 너무나 귀하고 음악이 예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어마어마합니다. 기능적으로 좀 떨어질 지라도, 재능이 좀 부족할지라도 그 준비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더 귀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다윗은 이 성전에서 찬양하는 자들을 준비할 때 제비 뽑아 직임을 맡겼고 두주씩 돌아가면서 섬기게 한 지혜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게 찬양단이던, 성가대이던, 오케스트라이던, 모든 음악 사역의 기초는 기능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할 때 우리가 연주할 때 내 마음을 드려 찬양하고 연주하는 것인지를 보십니다. 재능과 화려함의 전문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과 눈이 어디를 향해 연주하고 찬양하는지, 그것을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지 아닐지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드리는 나의 찬양이 주님을 향한 나의 마음 되게 하십시오. 내가 드리는 찬양이 주님께 신령한 예배가 되며 신령한 노래가 되고, 내가 드리는 연주가 마음을 담아 고백하는 그 찬양으로 오직 주님께만 영광돌리며 나아가시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왕이 인생 후반전에 왕으로서 여러가지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하게 했던 사역,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을 했던 것이 장차 있게 될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두 가지로 마음을 쏟아 준비했는데, 첫 번째는 성전에 쓰이게 될 모든 자재들과 재료들을 풍성히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성전 건축을 위해 수많은 재물들, 백향목과 돌들을 풍성하게 미리 다 준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준비는 성전이 지어지고 나서 성전 안에서 일할 사람들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 큰 포인트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왕이 성전 안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을 준비시키며 어떻게 성전을 잘 섬길지를 미리 다 큰 그림으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전 봉사를 위해 준비된 레위사람들이 모두 24000명이었고, 그들을 구별해서 세우고 천명을 한 팀으로 해서 24개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까 1년에 1000명인 1조가 두 주씩 번갈아 가면서 성전을 섬기도록 조직하는 이야기가 오늘의 큰 그림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앞에 성전을 위한 눈에 보이는 일들—자재와 재물를 준비—을 준비하는 것도 귀한 일이었고, 동시에 보이지 않는 이 사람들을 미리 다 준비하고 그들을 조직하고 계획하는 것도 귀한 일임을 발견합니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동시에 준비되어야 하나님의 성전이 은혜롭게 성전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일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로 알고 하나님 앞에서 기쁨됨으로 감사함으로 이 일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24000명을 어떻게 24개조로 나누어 1년 내내 성전을 잘 섬길 수 있는가를 조직하기 전에 먼저 조상들의 기억인 아론의 아들들의 아픔의 사건을 가지고 옵니다. 레위기를 통해 배웠지만 아론의 첫째와 둘째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불을 잘못 써서 죽게 되는 사건이지요. 하나님의 성막 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정하신 불이 있었는데 그 불이 아니라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았던 거죠. 아무 불이나 자기가 편한대로 그냥 그 불을 담았다가 하나님에게 심판을 당해 죽은 사건…. 이것을 통하여 셋째 아들과 넷째 아들을 통해 제사장 직분이 계획되었음을 제일 먼저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 그 오래전 이야기를 지금 가지고 와서 제일 먼저 첫 이야기로 등장 시키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직분을 담당하며 성전을 섬긴다는 것은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무거운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지적하는 것이죠.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고 중한 일이고 이것을 잘못하면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기는 큰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에서 사역한다 하면서 너무 가볍게 하찮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는 시간에 취미생활 같이 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직분으로 섬기는 것은 거룩하고 두려운 영적인 일이며, 무겁고도 중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이 거룩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중한 일을 감당한다는 분명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성전에서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감당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자세임을 오늘 말씀은 밑그림과 기초를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람들은, 나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일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에 관심이 있어야 되는데 그러지 아니하면 나의 일을 가볍게 여기며 남이 어떻게 하는지 남이 어떤 거 하는지에 더 관심이 있게 되고요.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일에 감사하며 충실한 삶이 아니라 늘 기웃기웃 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내 삶에서 감사와 만족이 있어야 되는데 이 사명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감사하는 자로 주님의 기쁨되는 도구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냥 익숙한 가운데 그냥 내가 하는 일을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 앞에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내가 무슨 일을 맡게 되었는가를 분명히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도로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기준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 삶에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이 맡기신 일을 주님의 몸된 교회의 일원으로 거룩하게 부름 받았음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인 역대상22장 부터 29장 까지는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전건축을 위한 역사의 재해석, 그리고 성전 건축준비로 마무리 되는게 역대상의 큰 그름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다윗왕은 성전을 지을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때 섭섭해 하지 않고 다윗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뜻이 좌절된 것 같았지만 다윗이 한 것은 뭐냐면 그 남은 인생 전부를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데 쏟아부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대기적 관점에서 보면 다윗왕이 한 가장 중요한 업적, 그의 일생을 바쳐서 한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자로 세워졌다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본인은 성전을 짓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완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장차 있게 될 그 성전을 위해 본인은 성전을 건축 위한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죠. 나는 스스로 성전을 짓고 싶었지만 성전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섭섭하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있게 될 성전을 짓게 되는 것을 준비하는 것, 이것이 나의 인생에 임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그는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강조하는 것은 다윗이 그냥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시키니까 성전 건축 준비를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의 모든 정렬과 에너지를 다 쏟으며 하나님이 맡기신 성전 건축에 준비를 위한 작업을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 성전 건축 준비라는 것은 바로 성전 건축을 위해 쓰여질 재물들과 자재들을 준비하는 것이죠. 건축할 돌들을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준비하고, 백향목을 무수히 준비하면서 건축 자재들을 넉넉히 준비합니다. 또 금 10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 놋과 철을 무게를 다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재물 들을 미리 미리 넉넉하게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인생 마지막 후반부에 거의 쏟아 붙듯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장차 있게 될 그 성전 건축을 위해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하나님의 뜻에 내 인생을 조율해서 그것으로 그의 인생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찌됐던 간에 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는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씨를 뿌리고 우리가 물을 줘서 우리가 거두려고 합니다. 우리가 심은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우리가 그대로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세울 때 다윗이 해야 될 역할이 있었고 솔로몬의 해야 될 역할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배운다는 것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했을 때 내 뜻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멈추라 하실 때 멈추고 하나님이 갈아 하실 때 가는 인생입니다. 어떤 사람은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은 물을 줘서 자라게 하고 어떤 사람은 열매를 맺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그때 그 시간에 하나님의 계획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다윗을 통해 배워야 되는 중요한 영적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최선을 다하며 내 뜻을 거스르며 꺾으며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이 온전하고 완전함을 믿으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충실하게 사는 다윗과 같은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그의 인생을 쏟아부으며 장차 있게 된 하나님의 성전을 위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그 하나님의 중심으로 살아가는 다윗을 배우기 원합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신뢰하며 우리는 보이는 결과와 열매가 아닌 그것을 준비하는 자로 부름 받았을 지라도 눈물로 씨를 뿌리며, 그 씨를 뿌리고 자라게 하는 헌신으로 장차 후대에 열매를 거두는 꿈을 꾸며 충성된 종으로 주님께 칭찬받는 상급을 바라보며 오늘도 나의 있는 처소에서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최선을 다하는 삶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사단에게 충동질을 당해 크게 흔들렸습니다. 사단의 미혹에 빠져 버렸고 하지 말아야 된 인구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교만과 착각에 빠져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과 자기의 군대의 힘과 크기를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밧세바를 범한 사건과 함께 맞물려 차곡 차곡 쌓이다 폭발하는 것입니다. 측근들이 말리고 잘못됐다고 목숨 걸고 말해도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단의 충동에 빠져 한 인구 조사를 한 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중의 하나 선택하라고 다윗에게 선택지를 내미셨습니다. 삼 년 기근이나, 세달동안 적군에게 쫓기거나, 사흘동안 전염병이 생기거나….이 가운데 다윗은 사람의 손에 징계받기를 않는 것을 원한다며 하나님이 치시는 전염병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3일동안 7만 명이나 죽게 됩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왕이 사단의 충동질에 빠지면 그만큼 영적인 결과가 피폐하고 참담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이자 큰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분명히 성경이 증언하는 듯이 사단의 미혹에 빠져 충돌질에 흔들려 영적으로 완전 자빠졌습니다. 한두명이 아니라 7만명의 사람들이 3일만에 다 죽게 되었습니다. 본인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이 압박감과 자책감을 어떻게 그가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실패와 좌절과 무너짐의 현장에서 다윗은 즉각적으로 엎드리며 즉각적으로 선 되고 회개하며 즉각적으로 주님의 은혜만을 구했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며 손 들고 나오는 이 즉각적인 엎드림과 회개가 다윗을 회복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울왕도 다윗왕도 똑같이 잘못하고 넘어졌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은 완벽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실수하고 무너진 현장 가운데 즉시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은혜를 구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무너진 현장에서 금방 회개할 줄 알고 금방 엎드린 주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번 교정 되어 주님 앞에 손 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계속 핑계를 댔습니다. 계속 자기 합리화를 했죠. 회개를 통해 손들고 주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하는 대신 계속 자기의 길을 계속 가게 되며 그 무너짐의 대가를 결국 본인이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삼일 동안 전염병 가운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앙이 내릴 때 그치게 되라고 목숨걸고 간구하며 제단을 쌓는 장소가 어디냐 하면 여부스라는 곳이라는데 있습니다. 그곳은 나중에 예루살렘이 되는 곳이라는 것을 오늘 말씀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15절). 다윗이 사단의 충돌질에 빠져 7만명의 백성이 죽은 그 처참한 현장, 다윗의 처절하게 무너지고 주님의 은혜에 매달린 이 여부스에 나중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역대상은 의도적으로 지금 다윗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용서와 간구를 구하는 그곳이 나중에 장차 성전이 세워지게 될 예루살렘이라는 강조하는 것입니다. 승리의 현장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과 아픔 과 무너짐의 현장, 주님의 은혜 말고는 살 길이 없는 그 현장에 하나님은 나중에 성전을 세우시는 겁니다. 7만명의 백성들이 죽어가는 그 눈물과 아픔의 현장, 그곳에서 나를 죽여 달라고 부르짖으며 울부짓는 그 다윗의 통곡과 비통함 속에 두손들고 은혜를 구하는 현장위에 성전이 세워졌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질 때, 교만과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우는 그런 자아도취의 성전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과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세워주시는 게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세워질 성전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등돌리고 늘 무너지며 죄에 헤매는 사람들 이었는지,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지 이것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윗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변질되고 넘어지는데 그 위대한 다윗도 이렇게 실패하고 자빠지며 사단의 충동질의 흔들리는데 저와 여러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매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연약함의 틈 사이에 사단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우리는 엄중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가운데 우리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자빠지고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며 오늘도 그 진흙탕에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사단의 충동질에 빠져 무너졌을 때 선택은 내가 무너진 현장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일어날 것인가? 가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가 죽는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실패와 아픔에 현장에서 죄짓고 자빠진 그 현장에서 다시 회복하는 유일한 힘은 금방 엎드려 주님 앞에 내가 잘못했습니다… 날 살려주세요….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이 은혜를 간구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진흙탕과 실패와 좌절의 현장에서 다윗과 같이 이 시간 손들고 나와 주님의 은혜 만에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성전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 성전을 바라보며 승리와 영광을 바라보는 것도 기쁘고 좋습니다만 동시에 우리 인생의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그 고난과 눈물의 현장, 죄와 자빠짐과 사단의 미혹에 무너진 현장 가운데 두 손 들고 주님을 붙들고 나왔던 그 회개의 고백이 우리 성전에 녹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고, 죄가 점점 미워지는 힘,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님으로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삶, 주님이 함께 하시며 주님께 드려지는 이것이 내 삶의 능력으로 나오게 될 줄 믿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안타깝게도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영적 하향 곡선과 변질을 경험합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어제 말씀인 모든 부하들은 전쟁터로 보내고 자신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생의 가장 큰 잘못 중 하나인 밧세바를 범하고 남편 우리아를 간접 살인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인 두 번째 큰 실수인 인구 계수 사건을 통하여 이게 터져 버리게 되는 것이죠. 역대기의 강조점이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보니까 다윗왕의 실수나 실패가 많이 생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역대상은 다윗왕이 밧세바를 범하여 무너진 사건이나 인구 조사를 하면서 무너지게 되는 사건 모두 영적 시각으로 바라보는데 바로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해서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짐과 실패의 이면에 사단이 다윗을 흔들어 놓는 미혹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인구조사 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명령하셔서 해야 될 일 중의 하나가 인구를 사는 것이라고 규정해 놓으셨어요.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기본적으로 숫자를 세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세는 거 좋아하고 특별히 좋아하는 것은 돈 세는 거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세던 돈을 세던간데 거기에 우리의 열망이 겹치게 되면 결국 그것이 내가 얼만큼 부자인가, 내가 얼만큼 세력의 있는가, 내가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과시하는 도구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단이 다윗을 흔드는 미혹이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다윗왕은 연전연승을 했습니다. 승리를 계속 거둬 가는 중이고 그 다음에 조공도 받고 그러면서 점점 사단이 다윗을 충동하고 흔드는 겁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힘이 센지... 표면적으로는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구 조사를 하는 동기에는 자기 욕심과 자기 과시가 있었다는 것이죠 지금까지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비결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와 함께 싸워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이라는 거인을 무너뜨릴 때부터 수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 가운데 서 있을 때에도 왕이 되어서도 계속 전쟁을 치른 이 와중에도 전쟁의 승리 원칙은 늘 동일했습니다. 다윗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 적들 앞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과 앞서 친히 나가 싸우심을 통해 이긴 것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던지 다윗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이긴다는 이 영적 전투의 원리를 붙들고 지금까지 왔던 겁니다, 그렇게 신실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봤던 다윗왕이 지금 흔들어서 변질되고 있는 그 틈을 사단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닌 내 군대의 힘과 군대 숫자들에 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는 치열한 전쟁터에 가지 않고 혼자 예루살렘의 남아 영적인 나태함 가운데 보지 말아야 될 여인을 바라보다가 간음하다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왜 멀쩡한 다윗이 이제는 예루살렘의 머물면서 그렇게 그냥 거닐다가 보지 말아야 된 여인의 목욕하는 것을 보게 됩니까? 그 안에 분명히 잘못된 음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동시에 사단이 그렇게 위대한 지도자인 다윗왕을 가만두지 않는 겁니다. 다윗을 흔드는 겁니다. 하지 말아야 될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자기 세력과 자기 군대 숫자를 바라보며 내 힘의 근원이 나에게서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다윗의 실수의 그 밑바닥에는 사단이 지금 다윗을 일어나 충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다윗이 인구조사라는 잘못된 결정을 하려고 할 때 그 주변에 참모들이 본질을 알고 직언을 하며 말립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다윗왕이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겁니다. 그래서 참모들이 지금 바른 길을 목숨걸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이지만 이렇게 하시면 안되고 이렇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에 처하고 하나님께 이거는 범죄 하시는 일입니다….말을 해도 이미 사단에 충동질을 당한 다윗왕은 말을 들을 귀가 없는 겁니다. 이거 안 들으면 망하는 일인데 주변에 참모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왕이 인구조사 빨리 하라고 명령을 재촉합니다 (4절). 그리고 재촉하는 겁니다 빨리 가서 내 인구조사 명령을 지키라고….결국 그는 하나님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사람의 이야기 도 듣지 않는 이런 영적 변질의 모습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영적인 지도자에게 자문을 구했던 겸손한 모습이 사라졌습니다. 부하들과 참모들을 사랑하며 듣는 그 열린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두 사건 밧세바를 범한 사건과 인구 조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등을 돌리는 이 사건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리고 다윗이 평탄 했을 때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왕의 역사는 단순히 개인의 역사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역사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왕의 영적 하향곡선과 변질은, 왕 한 사람만 이렇게 무너졌다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동일한 도전을 늘 받는다는 것을 묵상해야 합니다. 이미 마음이 변질되어 있는 다윗의 영적인 상태, 사단의 충동질에 놀아나고 있는 다윗의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직면하는 영적전쟁의 현장도 동일합니다. 늘 우리는 이 가치관의 싸움, 우선 순위 싸움을 벌이게 되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 승승장구할 때 나 인생이 평탄 할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이 무너지고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을 조금만 놓고 있으면 사단이 우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다윗을 그렇게 흔들었던 거와 마찬가지로 사단은 우리를 충동하며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결정을 하고 일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붙드는 자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깨어 기도하며 사단의 충동 길에 내가 놀아나지 않도록 늘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윗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똑같은 실수로 무너지지 않고, 주님 앞에 겸손히 붙들려 끝까지 쓰인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18장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그 나라를 창대케 하시며 주변 나라들에게 싸워 이기며 정복하는 과정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다윗이 싸워 이기는 민족들이 한 두 민족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키고 모압을 쳐서 다윗의 종이 되게 해서 조공을 바치게 합니다(2절). 블레셋은 언제나 강대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백성들인데, 그 블레셋 사람들을 다윗이 쳐서 항복을 받고 승승장구하는 것입니다. 주변 나라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되는 이 모든 것들은 다윗이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강대국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승전보를 넘어 더 중요한 것이 이 승리들이 모두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강해서 블레셋과 모압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과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심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역대상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위해 모인 그 잿더미와 폐허 위에서 지금 과거를 복기하는 것입니다. 눈앞에는 보이는 소망이 하나도 없이 그냥 잿더미와 페허 밖에 없는 것이죠. 마음에는 눈에 보이는 환경, 폐허와 잿더미를 바라보며 이곳에 성전 세우는 일이 정말 잘 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가 가득했을 겁니다. 아니 눈에 보이는 어떤 증거라도 좀 주시든지 아니면 그 성전을 짓기 위해 기적을 좀 보여주시던지…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주변 나라들은 호시탐탐 방해하려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예루살렘에서 그들은 믿음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약속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재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들이 붙드는 유일한 한 가지, 보이지 않는 분명한 확신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 다윗과 맺은 그 언약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강조하며 페허와 잿더미에서 하나님의 언약만을 붙들고 새출발 하고 그 성전을 재건하는 믿음의 다시 한번 결단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는 말씀을 두번이나 반복하면서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와 여러분에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강조합니다. 내가 강해 승리하는 게 아니라 승리를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이기게 하시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무기들이 아니라 다윗의 강한 군대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고 이 임마누엘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잿더미에 폐허이지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나를 이기게 하신다는 이 고백이 나의 고백 될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놀라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가졌던 놀라운 신앙의 위대함이고 우리에게도 이런 삶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만 바라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은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길 것을 사모합니다. 어디로 가든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승리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다윗을 통해 다윗이 가진 순전한 태도, 다윗이 가진 마음의 열망을 먼저 내 삶에 두기 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할까를 마음에 열망으로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사모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우리에게 좌절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이 시간 주님이 주신 그 믿음과 언약을 붙드는 것이 불확실해 보이지만,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붙들 때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는 이 놀라운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하나님 중심의 삶을 붙들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든지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승리와 이김을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붙드시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 명령을 다윗 왕에게 전달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받고 다윗이 반응하는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입장에서 왕에게 이 얘기를 한다는 것은 사실 목을 내놓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선지자이지만 그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왕에게 왕의 뜻과 반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왕에게 듣기 싫은 이야기 왕이 들어야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사실 선지자 자신도 다윗왕과 생각이 똑같았습니다. 이것은 100% 하나님이 기뻐하신 일이니까 속히 왕의 생각대로 이 모든 일을 추진하기를 나단 선지자 도 원했습니다 (15절). 그런데 그날 저녁에 나단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다윗왕도 틀렸고 나단 선지자도 틀렸다는 것입니다. 나단 선지자는 본인 생각이 틀렸다는 것도 인정을 해야 되고요. 그것을 왕에게 전달해서 왕도 잘못됐다는 것을 지금 지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혹은 성경 말씀을 마음에 담아 읽을 때 언제부턴가 우리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생각하는 바를 들으면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은혜 받았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말을 다시 설교자가 전하게 되면 그게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강단에서 점점 옳은 소리와 바른 소리 대신에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계속하는 유혹과 도전 가운데 우린 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단 선지자는 왕 앞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왕이 들어야 될 불편한 이야기, 왕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교정의 말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말씀과 모든 계시대로 다윗왕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단 선지자가 목숨을 내놓고 왕의 뜻에 반하는 직언을 했을 때 다윗 왕의 반응을 주목해봅니다. 어떻게 보면 듣기 거북하고 좋지 않은 말을, 왕인 자신의 뜻과 반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믿음의 반응을 보였다는 거에요. 오늘 긴 말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다윗이 스스로를 종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왕인데, 계속해서 자신을 주의 종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이 있을 때도 세상에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왕의 위치에서도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자가 다윗이었습니다. 그냥 말로만 나는 종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마음 다해 하나님께는 바짝 엎드리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으로 세워 주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교정하고 쪼개시는 것을 기쁨으로 받고 반응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항상 주님의 기쁨 될까….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까…를 마음속의 열망으로 가지고 살았던 자가 다윗왕 이었습니다.이런 다윗의 태도와 자세를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쓰십니다. 인생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엎드리고 말씀 앞에 엎드리는 그 다윗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고 그 마음을 들어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놀랍게 사용 하시는 겁니다. 다윗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세우시며 다윗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23절) 다윗이 스스로 왕이 되어 세워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 왕과 왕국이 되는거예요 결국 우리 인생은 두 종류의 인생 밖에 없습니다. 내 스스로 세우려고 발버둥 치다 무너지는 인생, 아니면 하나님이 세워 주셔서 영원히 견고한 인생. 여러분들은 어떤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그런 삶은 쉬지 않고 나는 하나님의 종,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고 무릎 끓는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말씀으로 세워지기 위해 목회자인 제 자신부터 우리 성도 모두들이 말씀이 나를 쪼개고 말씀이 나를 변화시킨다는 말씀 중심의 삶을 우리는 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이유는 말씀이 나에게 지적하고 말씀이 나를 교정 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교정하고 우리가 말씀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교정하고 말씀이 우리를 판단하고 말씀이 우리 심령 골수를 쪼개는 이 분명한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을 때 말씀이 우리 가운데 영적 선순환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의 맛보며 그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십시오. 그래서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용기, 말씀을 그대로 듣는 용기로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이 내 인생을,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세우시는 놀라운 은혜를 우리 가운데 풍성히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에게 말씀하셔서 다윗의 순수하고 좋은 의도,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법궤는 방치돼 있는 것을 바라보며 성전을 지으려고 했던 계획에 제동을 거셨습니다. 성전을 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좋은 계획과 너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두 가지를 잊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첫 번째는 성전이라는 건물을 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신앙고백을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성전의 본질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망각하지 않기 위해 성전을 짓지 않으면 성전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다윗의 시대는 사사시대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사사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 다윗을 통해 새시대를 여시겠다는 것이죠. 사사 시대의 특징이 뭡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망각하고 하나님 뜻에 등돌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람들이 왕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 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백성들과 함께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았어요. 그러면서 왕을 달라고 왕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마음대로 행하며 영적인 암흑기를 경험한 사사시대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언제나 왕이시라는 것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전을 건축하는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도구가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두번째로 성전은 사람들이 세우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겁니다. 다윗 생각에는 지금 좋은 뜻을 품은 성전을 짓기 시작해야 할 거 같은데 하나님은 막으셨습니다. 다윗의 그 마음 자체가 귀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만, 지금 네가 할 때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다윗의 때가 아닌 너의 아들의 때에 하나님의 성전은 세워 질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12절). 하나님의 때를 인정하고 나의 때를 멈추는 것을 통해 분명한 고백을 하게 하십니다. 이걸 통해 사람의 뜻과 계획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세워지는 것이 성전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죠. 성전은 누가 짓는 겁니까? 겉으로 봐서는 사람들이 짓는 것 같고 겉으로 봐선 왕이 추진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세우시는 건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선언입니다. 성전을 하나님이 지으시면서, 건축물로서의 성전만이 아니라 이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아이덴티티, 정체성 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집을 건축하는 데 성전을 세우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세워지고 정체성이 함께 세워지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을 재건하시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왕, 하나님을 기초로 인생을 세우고 신앙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인 것입니다. 이 역대상 말씀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 와서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는 시점입니다. 그들은 무너지고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모였고 그 성전 재건의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성전 재건이라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았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폐허와 잿더미 뿐이고요 성전 계획이 자기들의 원하는 대로 딱딱 맞춰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성전 재건이 여러 번 멈춰 섰습니다. 여러 어려움과 난관이 있었고 수많은 방해와 장애물들이 있었습니다. 직장도 다 버리고 가족도 다 놔두고 여호와의 성전을 짓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데 이렇게 성전을 짓는 게 어려운 일인가? 이거 우리가 잘못하는 거 아닌가? 여러 생각들과 나눠지는 마음들이 있었습니다. 이 무너진 잿더미 위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여전히 일하시는가? 이 본질적 고민을 붙들고 주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 말씀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전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전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백성들과 어디든지 함께 계시는 분이었다는 고백, 포로로 잡혀갔던 그 상황에 도 여전히 우리를 떠나지 않았던 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게 아니라 언제나 왕이셨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주도하시고 세우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을 다시 한번 영적으로 재해석하며 구속사적 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영광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은 영원히 견고할 것을 약속하십니다 (14절). 그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인생은 영원히 견고할 것을 약속으로 받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이 견고한 비결은 오직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세우셨을 때 입니다. 내가 세우려고 노력할 때 결국 내 인생이 무너지는 것이고요. 우리 교회가 영원히 견고한 비결은 뭡니까? 오직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세우셨을 때입니다. 교회를 우리 스스로 세력 오를 때 교회는 무너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의 삶을 세우시고, 교회의 삶을 세우시고 나라와 민족을 세우십니다. 눈에 보이기에는 사람들이 뛰고 일하는 것 같고 사람들에 의해 세워지는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통해 그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 인생이 세워지고 우리 교회가 세워짐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이 세우시는 인생만이 견고하고 하나님이 세우시는 교회만이 견고함을 분명히 믿고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세워져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사용되는 귀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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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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