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는 사울왕이 죽은 직후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역사, 다윗왕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왜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었는가를 세 가지 큰 영적 반응을 통해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영적 반응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하나님께 합한 사람으로 살기를 갈망하며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다윗의 영적인 반응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끝까지 기다리는 순종입니다. 다윗은 십수년 전에 사무엘을 통하여 이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름부음 받고 나서 그에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왕관이 아니라 추격하는 사울왕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되는 혹독한 광야 생활이었습니다. 십 수년 동안 그 힘든 시간을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붙들며 다윗은 계속 빚어지고 훈련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자신을 그렇게 힘들게 하던 사울왕이 죽었고 새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제는 끝이다 이제는 이제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시겠구나…생각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사울이 죽은 후에 남쪽의 유다 지파에 있는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다윗이 세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유다족속의 지파의 왕이 되고 나머지 11지파의 대부분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왕으로서 통치하는 겁니다. 아브넬이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서 실세가 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대부분의 땅은 여전히 사울 가문에 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통일 왕국의 왕이 되기 위해 아직도 싸워야 될 것이 너무나 많고 그런 치열한 싸움은7년 반이 지속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기름 부어 세워서 왕이 되겠다고 주신 확증이 약속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데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거죠. 다윗 생각에는 당장 그 기도 제목을 내일 응답해 주셔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미루고 미뤄서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이루어지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하나님께 합한 자입니까? 그는 실수도 많았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고 마침내 이루시는 통일 왕국의 왕까지 그는 인내함으로 기다릴 수 있는 영적 반응과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도들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에 신뢰함으로 기다리는 영적 반응입니다. 기도제목들이 대부분 간절해서 우리 생각에 지금 당장 이렇게 이루어 주셔야 되겠다는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내 때와 방법으로 응답해주시는 대신 기다림의 의자에 앉게 하십니다.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영적 반응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끝까지 신뢰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기다림을 통해 훈련시키시고 낮추시고 그들을 변화시켜 마침내 주신 주신 약속의 성취로 복 주신 여러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그게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기에 믿음을 붙들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두 번째 다윗의 영적 반응은 큰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엎드렸다는 것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사람들은 대부분 교만해지고 자신에게서 원인과 공로를 찾고 싶어 합니다.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이유는 큰 승리 이후에 하나님을 잊고 교만하며 사람들에게 반응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며 무너지게 됐습니다. 반면에 큰 승리 이후에도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에게 한결같이 묻고 여쭙고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여전히 하나님보다 여전히 앞서 나가지 않는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올라 갈지 말지를 먼저 묻고 하나님이 앞서 나가시도록 하나님께 주도권을 드리는 영적 반응으로 살아간 것입니다. 큰 승리와 성공 이후 성도의 영적 반응은 하나님에게 엎드리며 하나님에게 묻는 겸손한 태도 주도권을 드리는 태도를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큰 승리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자만해서 아이성에서 대패하듯 우리에게 위기는 큰 승리 직후입니다. 성공이 이어지고 놀라운 것들이 잘 이루어지고 있을 그 때가 조심해야 할 위험 구간입니다. 그때 여전히 초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물으며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는 영적 반응이 저와 여러분들을 지키고 살리는 것입니다. 매일 삶을 살아갈 때에 인생이 잘 될 때나 어려울 때나 인생이 위로 올라갈 때나 아래로 내려갈 때나 하나님보다 앞서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께 묻고 겸손하게 견지하며 하나님에게 언제나 주도권을 드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백성, 하나님의 은혜 가까이 나아가는 영적 반응의 성도되기 원합니다. 다윗의 영적 반응 세 번째는 사울의 시신을 수습한 자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다윗이 유다족속의 왕이 되고 나니 바로 의도성을 가지고 사울왕의 시신을 장사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당신을 힘들게 한 사울왕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수습하고 장례치른 자들이 이 나쁜 사람들이라고 밀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장 처단하기 위해 잡으러 가야 된다고 다윗에게 아부성 발언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생각하고 반응하는 육적인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등장하고 있습니다. 1장 말씀에 사울왕이 전사한 게 다윗에게 좋은 소식이고 모든 소식이라고 착각하며 그 소식을 들고 온 것이 육적인 반응에 최적화된 다윗을 찾아온 아말렉 전령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른 길르앗 야베스 백성들은 나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육적인 반응에 최적화된 육의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머리를 굴리고 계산해 봤을 때 다윗은 당연히 사울왕이 죽은 것을 기뻐할 것이며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들은 다윗이 싫어하고 나쁜 사람들로 여길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윗 주변에 계속 몰려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좋은 소식일 거라고 착각하며 왔던 그 아말렉 전령을 그 자리에서 처단했습니다. 그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슬픈 소식이고 애곡할 소식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향하여 나쁜 사람들이고 처단해야 할 사람들이고 부추기는 사람들의 육적인 생각에 반응에 대해서 다윗은 철저히 영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들은 처단해야 할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여호와께 복을 받을 귀하고 복된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다윗 자신도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은혜를 갚겠다는 것이죠. 은혜를 원수로 갚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정반대로 원수를 은혜로 갚은 것, 이게 바로 영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영적인 반응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결과적으로 다윗이 사울에게도 호의적인 사람들을 끌어안으면서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됨을 녹아 결국 민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 다윗이 위대한 사람이며 왜 다윗이 하나님께 합한 자입니까? 이렇게 육적인 생각으로 보이는 것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고 반응하는 이런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가운데 그는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반응하며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가지고 결정하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식 할 때만 사울왕의 시신을 수습한 백성들은 나쁜 백성들이 아니라 복된 백성들이라는 그런 영적인 반응과 생각에 사로잡혀 살 수 있는 것이죠. 이 새벽 기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는 분명합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면서 예배당에서 말씀과 기도를 사모하기에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나고 영적 반응을 하도록 우리를 깨우시고 새롭게 하시는 겁니다. 보이는 세상을 넘어서고, 보이는 환경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삶을 넘어서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시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해석하시고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가를 늘 내 삶의 염두에 두고 살아가기를 열망하며 하늘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말렉 전령 같은 사람들이 있으며 이렇게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을 밀고하며 내 마음을 흔들고 결정이 흐리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때와 방법을 끝까지 신뢰하는 영적 반응을 할 수 있도록 성령 충만함 가운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모든 것이 잘 되고 승승 장구할 때가 조심해야 할 때이고, 기도해야 될 때이며, 하나님께 물어야 될 때며 하나님에게 엎드려야 될 때입니다. 마침내 주시는 그 은혜의 약속을 취하며 누리며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나의 삶 속에 성취되는 놀라운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승리 이후에 교만하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 앞에 물어보고 하나님보다 앞서지 나가지 않는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십시오. 바라기는 모두가 내 영이 새롭게 되고 깨어나며, 영적으로 민감해져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생각과 반응과 나를 이끌고 주님께 합한 자로 서며, 주님 은혜 공급받아 승리하며 하루를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며 쓰는 슬픔의 노래입니다. 마음을 다해 감정을 쏟으며 죽음을 애도 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사실 다윗에게 사울왕은 지긋지긋한 원수이자 밤에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게 하는, 가장 힘들게 했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이 수많은 박해를 받았고 고난과 어려움이 있었고 도망자로 숨어 지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젊은 날을 도망자로 광야에서 힘들게 만들고 끝까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장인어른이자 왕인 사울…그가 이렇게 죽었습니다. 얼마나 안도를 했을 것이며 이제는 끝났다는 평안함이 몰려 왔을지 모릅니다. 사울왕이 죽음으로 다윗에게는 고통이 멈췄고 도망자 신세가 멈췄습니다. 더 나아가 다윗의 입장에선 사울왕이 죽었다는 게 다윗의 입지를 굳히는데 너무나 좋은 소식이자, 그에게는 승승장구의 비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때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사울왕이 죽었는데 다윗은 영적인 반응을 통하여 그것을 기뻐하고 내가 살아서 잘 됐다고 나에게 좋은 소식이라고 즐거워하는 대신 슬퍼하고 그 소식을 정말 비통해 했습니다. 오히려 그 소식을 좋은 소식이라고 착각하며 가져온 아말렉 포로를 그 자리에서 처단하게 됩니다.
인생을 살 때 참 힘들고 어렵다 얘기할 때 많은 경우 감정 때문에 괴롭고 힘든 일이 참 많은 것입니다. 그만큼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진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되고 감정은 내 진짜 속마음과 속 사정이 뭔지를 알려주는 굉장히 중요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정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숨기기가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감정은 우리에게 축복이 되기도 하지만 사단 마귀가 미혹하는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이렇게 할 수 있어도 다윗의 마음 속 감정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체면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에 다윗이 겉으로는 영적 반응을 보였고 위대한 결정을 했지만 속에 감정이야 속일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겉으로는 그렇게 놀라운 얘기를 하며 결정을 할 수 있지만 솔직한 진실의 소식은 내 마음에 있는 속 감정일 수 있습니다. 감정을 쏟게 되는 당연한 애곡과 애도는 바로 다윗이 그렇게 사랑하고 지켜주었던 우정의 사람 요나단에 대한 애도였을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왕이 될 수도 있었는데, 다윗에게 하나님 역사의 추가 옮겨졌다는 것을 영적인 눈으로 봤고,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기쁨으로 포기하며 다윗이 왕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고 쏟아부었던 자가 바로 요나단입니다. 그런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었으니까 다윗은 얼마나 슬프고 애도를 했겠습니까? 가족보다 가까왔던 형 요나단, 정말 다윗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했던 귀한 사람 요나단이 전쟁터에서 죽은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고 마음을 쏟으며 애곡하는 것은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말씀은 다윗이 사울왕을 향하여 애곡 하는 슬픔이 그냥 슬퍼하는 척 하는게 아니라 당위성을 가지고 나는 슬퍼해야 된다고 주먹을 쥐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을 쏟는 슬픔과 애곡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요나단 뿐 아니라 다윗은 진심으로 사울왕을 함께 애도하며 애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왕을 애곡하면서, 예전 모습을 떠올리면서 다윗에게는 고난과 눈물, 어려움과 섭섭함, 그 모든 힘든 일들이 주마등과 같이 다 떠올랐을 것입니다. 분명히 그런 감정들이 마음속에 깊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 다윗이 사울왕을 향하여 느끼는 복잡한 마음, 기쁘면서도 슬프고, 섭섭하면서도 고맙고, 억울하면서도 감사한 이 양가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양가 감정이 다 느껴지는데 그 양가의 감정에 휩싸이지 않고 바른 감정이 자신을 이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감정을 드리는 것입니다. 종잡을 수 없는 나의 감정이 내 인생을 흔들지 않고 그 감정이 주님 앞에 다스려지는 것을 다윗의 인생을 통해 분명히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애곡하는 노래 가운데 사울을 향한 섭섭함이나 억울함 같은 것이 하나도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애곡의 노래 중에 사울 왕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많이 했는지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한 사람, 꼴보기 쓰는 사람 나를 도망자로 만든 사람 나를 그렇게 원수같이 생각한 그 사울왕을 향하여 원망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죽었다고 잘 됐다고 할렐루야 박수 치는 것이 아니라, 평소 그 사람이 얼마나 좋은 사람 있는지 높여주고 세워주며 그의 업적을 기리는 것, 이것은 바로 뒤틀리지 않았던 다윗의 상태, 마음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덮인 영적인 다윗의 기적과 같은 반응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의 감정은 솔직하게 나의 속마음을 드러냅니다. 겉으로 우리는 그냥 내 속마음과 다르게 얘기할 수도 있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영적으로 큰 사람은 그것을 솔직하게 얘기했음에도 그것이 하나님에게 합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미운 사람이 있고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고 치가 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가가 결국 우리 인생에서 내 마음에 크기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수 없으면 적어도 미워하지 않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큰 사람이 되십시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를 똑같이 미워하고 보복하고 몇 배로 갚아주는 뻔한 인생을 넘어서 내가 적어도 미워하지는 않을 수 있는 영성을 갖도록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바로 내 신앙의 리트머스 시험지이며 내 신앙의 성숙을 가르는 척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은 위대한 자이며 신앙이 성숙한 자이며 영적인 반응을 하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평생 미워하고 따라다니며 적으로 삼았던 그 사울왕을 마음 다해 감정을 쏟으며 애도한다는 것, 인간적인 생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마음을 쏟는 진정한 애곡을 통해 다윗은 사울왕과 함께 요나단을 기억하고 기리며 마지막을 영광스럽게 마무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정말 마음을 다해 진정으로 슬퍼하는 그 열망을 갖게 됐다는 것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이자 다윗이 하나님께 합한 왕이 되는 이유였을 겁니다. 개인적인 복수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며 마음을 다해 애곡하는 다윗, 그 마음이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며 영적인 마음이며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어떤 유명한 스님이 얘기했던 것과 같이 내가 내 감정대로만, 내 마음대로만 살면 인생의 하수, 내가 내 감정대로 살지 않고 감정을 잘 참고 살면 그건 중수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고수는 내 마음에 그렇게 참을 일이 점점 없어지는 인생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다윗은 지금 큰 인물이자 인생의 고수입니다.사울왕이 자신에게 한 그 힘들고 어렵게 한 모든 것들을 이 악물고 참았던 중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이 물 흘러가듯 흘려 보내며 주님의 은혜로 마음으로 훌훌 털어내며 그것을 품으며 진심으로 애도하는 신앙의 고수였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감정이 신앙과 연결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내 삶에 덮여 내 감정대로 살아가는 하수 인생을 넘어서고, 감정을 꼭 참으며 억지로 이 악물고 살며 마음에 늘 병이 쌓이는 중수 인생을 넘어서기 원합니다. 그 모든 것들이 흘러 넘쳐 내 마음이 주님의 평화와 기쁨에 사로잡혀 그렇게 참을 일이 없도록 내 감정이 상하지 않는 이 신앙 고수의 인생, 놀라운 하나님의 합한 놀라운 신앙의 깊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하의 시작은 바로 사울왕이 죽은 직후입니다. 사울왕이 죽은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가 세워지듯 사울 왕이 죽은 후 다윗 왕이 세워지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군사력으로 힘으로 왕권이 세워지는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지도자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맞춰 세워주고 계시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왕이 죽은 이후에 다윗에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불러 듣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힘이 다윗에게 옮겨갔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힘의 냄새를 맡고 몰려 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힘의 냄새를 맡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다윗이 어떻게 분별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를 갖고 믿음으로 처신하는가를 우리에게 증언하는 말씀이 사무엘하 1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다윗과 그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하셨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과 전혀 무관한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돌아간 후에 이스라엘의 패전과 사울왕이 그 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하러 달려 온 사람이 바로 도망 나온 아말렉의 포로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옷이 다 찢어진 상태로 달려온 이 전령의 모습을 통하여 너무나 큰 패전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동시에 아말렉 사람이 다윗에게 그렇게 찾아온 데는 분명한 계산과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발견합니다. 왜 아말렉 사람이 지금 그 중요한 소식을 들고 다윗에게 달려오듯 찾아왔는가? 힘의 냄새와 돈 냄새에 민감한 아말렉 사람은 다윗의 힘냄새를 맡고 찾아온 것입니다. 사울왕이 죽은 직후 이제 모든 권력의 힘이 다윗에게 모인다는 것을 간파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얻으려 하는 계산 속에 달려 온 자가 바로 아말렉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위해 이 안타까운 사건을 이용하려고 하는 악한 모습이 이 아말렉 사람을 통해 그대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달려온 아말렉 사람의 잔머리와 계산에는 다윗을 그렇게 힘들게 한 사울왕이 죽은 소식은 다윗에게 너무나 좋은 굿뉴스라고 생각한 착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전하고 사울왕이 죽은 소식이 다윗왕에게는 빨리 알려줘야 할 너무나 좋은 소식이다…본인이 생각하고 왔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윗에게 사울 왕은 늘 자신을 힘들게 했던 원수였고 자기의 목숨을 노리던 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당신을 따라다니며 죽이려 했던 자가 죽었다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하면 그것에 대한 보상과 대가가 있을 거라는 나름의 계산이 선 것입니다. 그런 계산 아래 아말렉이 포로는 기쁜 소식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거기에다 반쪽 진리를 섞어 버립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를 하면서 마치 자신이 사울왕이 죽는데 공헌을 한 것 처럼 가짜 뉴스를 섞어서 숟가락을 얻는 것입니다. 사울왕이 죽을 때 그 목숨이 여전히 붙어 있을 때 자기와 함께한 분신과 같은 경호 실장에게 자신을 먼저 죽이라고 부탁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경호실장이 사울왕을 죽이기를 두려워해서 사울왕 스스로 칼에 엎드려 죽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포로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마치 사울왕이 자기에게 죽이라고 얘기한 것처럼 거짓말을 섞고,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죽은 사울 왕을 내가 그 곁에 서서 죽였다고 거짓을 섞어 말합니다. 사울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자신의 공로를 껴 넣으며 이야기를 싹 꼬아버리는 겁니다.아말렉으로 위장된 육적인 신앙과 사단의 미혹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진리 가운데 가짜를 교묘하게 섞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가 사울왕을 죽이는데 공신이었다는 것을 거짓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진짜에다 가짜를 섞어서 내 공로가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고 계속 숟가락을 얹고 자기에게 특별 대우를 할 것처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섞어서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것이 아말렉의 특징입니다 이렇게 정직하지 못하고 잔꾀를 내며 가짜 진리 반쪽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다윗이 직면한 승리 이후에 사울왕이 죽은 이후에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 포로가 전혀 예상하지 않는 두 가지의 영적 반응을 다윗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힘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이런 아말렉 사람을 어떻게 분별하고 영적인 반응과 결정을 하게 되는지를 말씀을 통해 지혜를 얻기 원합니다. 첫 번째 다윗의 영적인 반응은 사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아말렉 포로는 기쁜 소식일 줄 알고 달려왔는데,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원수를 죽였다니 대단하다 이럴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르게 반응한 것입니다. 아무리 사울왕이 다윗을 힘들게 했어도 사울왕의 전사 소식이 전혀 행복한 소식이 아닌 이유는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이게 바로 다윗의 놀라운 영적인 반응이에요. 다윗은 내가 도망치는 현실보다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 왕이었던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게 하나님 나라의 현실인 하나님께서 기름부고 세우신 왕이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짐이 더 중요했기에 하나님이 세운 왕이 죽은 것에 대해서 슬퍼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윗이 하나님께 합한 이유이며 다윗이 영적인 반응을 하는 이유입니다. 두번째 다윗의 영적 반응은 이 사울왕의 전사 소식을 가져오며 자신의 공로를 거짓으로 얹은 이 아말렉 포로를 처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일 줄 알고 달려온 이 사람, 자기에게 공로나 자리 같은 것은 하나 줄 것으로 계산하는 마음으로 이 소식을 들고 달려온 이 아말렉 포로에게 휘둘리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왕을 내 손으로 죽였다는 거짓말과 거기에 허풍까지 얹어져서 이곳에서 자신이 잘 지낼 줄 알고 온 사람을 걸러내고 분별하는 영적인 눈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는 뭐냐면 내가 바라보는 대로 상대도 바라볼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이 아말렉 포로가 죽여야 되는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이 있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여호와의 기름 부은 자를 죽이는 자는 결국 다른 사람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며 다른 사람도 쉽게 배신할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이죠. 이 아말렉 사람은 명예를 얻으며 자리를 얻기 위해 다윗에게 달려 왔지만 그 자리는 사실 죽으러 가는 자리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다윗과 같이 힘이 생길 때가 있고 권한과 지위가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내가 좋아서 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이익과 돈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때 다 의도성을 가지고 자신의 머리를 굴리며 계산을 하며, 심지어 거짓과 반쪽 진리를 섞어서라도 자신의 공로를 얹어서 나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인생이 잘 되고 힘이 있고 권한이 있을 때 그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이런 아말렉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이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을 때 바른 결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그런 자들을 향하여 다윗과 같이 영적인 반응으로 그 가운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지혜와 분별을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합당한 다윗과 같은 삶이며 큰 승리 이후에 교만으로 무너지지 않는 비결입니다. 바라기는 다윗과 같이 영적으로 깨어 분별하며 주님이 주신 기준과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며 하나님 가운데 바른 결정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인사에 특별히 소중했던 한 평신도 동역자를 소개하는데 바로 두기고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 마지막에 자기에게 특별했던 동역자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일 중심의 사람이었고 그 사명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함께 한 동역자들을 마음 깊이 존경하고 세워주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신앙 생활 할 때 특별히 미국 이민 생활에선 그게 더 중요 할 텐데, 신앙 안에서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이런 몇 사람이 있다는 게 나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모든 사람과 그렇게 가까이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몇 명이라도 교회 안에서 이런 영적 교제를 나누고 함께 사명의 부담과 십자가의 짐을 지고 가는, 십자가 복음 가운데 영적 교제를 나누는 가까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에게 두기고는 그의 속사정과 속마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나의 속마음과 속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아내라고 할지라도 나의 속마음과 나의 속 사정을 모두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 사람은 나의 속마음과 속사정을 어느 정도만 알아줘도, 이런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때 이 험하고 깨지고 아픈 세상을 살아갈 때 힘과 위로를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겐 그런 동역자가 두기고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소중한 동역자인 두기고를 세 부분으로 소개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두기고는 사랑을 받는 형제였습니다. 두기고는 그냥 사람이 좋고 열심히 일하는 자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하나님 사랑을 공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하늘로부터 공급받는 사랑을 귀한 줄 아는 자였으며 그 사랑을 사단의 미혹으로부터 빼앗기지 않는 자였습니다. 두기고가 받은 이 하늘로부터의 사랑이란 바로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 입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하늘로부터 받은 자가 두기고였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있기를 사모하며 하늘을 향하여 마음이 들리기 원합니다. 어떤 일과 사역을 열심히 하는 것도 귀합니다만 제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이 분명한 자의식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게 하는 겁니다. 그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이 시간 나에게 차고도 넘칠 때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도 능히 감당하고, 사단과의 영 적전쟁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형제자매로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하늘로부터 나에게 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달으십시오 두 번째로 두기고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이었습니다. 두기고는 교회 생활을 하고 신앙생활을 할 때 관심사가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고 일하는 게 귀했지만, 모든 일을 할 때 본질적으로 주 안에 머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세상은 사람들 눈치 보고 이리 저리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로,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며 사람들도 가득합니다. 사람들을 위해 사람들을 바라보고 교회에서 일을 하게 되면 늘 마음이 갈대와 같이 흔들리고 결국 실망하게 됩니다. 어제까지는 그냥 나를 좋아하고 막 세워주는 거 같은데 그 다음날은 나에게 등 돌리고 나를 매몰차게 밀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 속에서, 사람 앞에 보여주기 위해 교회 일을 하게 되면 본질에서 이탈하기 쉽고, 실망과 좌절로 끝날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두기고와 같이 주 안에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리기 위해 사역과 일을 진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두기고는 너희의 마음을 위로하는 자였습니다. 두기고는 에베소 교회에 사도 바울의 소식을 배달하는 일꾼 이상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의 소식을 물론 전했고 바울의 사정을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도 했지만, 두기고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는 평신도 사역자였습니다. 교회는 마음이 위로받는 곳이고 서로의 마음을 살피고 마음을 챙기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가 서로의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생활 할 때에 마음을 챙기고 마음을 돌보는 일을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게 두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두기고와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말씀 사역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많은 새 생명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마음에 깊이 담겼던 부분이 바로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잘 가는지,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했는지 시작에는 잘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를 수 있고, 처음에 잘 안 확신이 안 설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은 언제나 부분적으로만 알기 때문에 그 확신이 희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끝에 가보면 이게 하나님의 뜻으로 가는 건지 하나님의 뜻으로 결정한 건지 아니었는지가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했는가도 참 중요하지만, 그 초심을 끝까지 변하지 않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합니다. 이 세상은 무상, 변하지 않는게 없습니다. 세상도 변하지 받는게 없고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자들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변하고 상황과 환경은 늘 끊임없이 변합니다. 그 가운데 변함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이건 기적이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에베소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초심을 끝까지 가지지 못하고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변하고 변절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엔 반짝 좋았고 처음엔 열심히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무너진, 소위 말하는 첫사랑을 잃어버린 많은 자들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베소 교회에 주신 책망이 무엇입니까? 바로 이 첫사랑을 버리는 것,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탈한 것에 대해서 책망했다는 것을 우리는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동시에 열망으로만 끝나지 않고 지금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주님 앞에서 공급받으며 살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새벽 기도를 통하여 늘 조율되며 초심으로 돌아오기를 사모하고 주님 앞에 늘 공급받으며 나의 삶이 주님의 변함없으심에 꼭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이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실체로 믿는 자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내 안에 중심으로 모시는 자들입니다. 껍데기가 아닌 마음을 담고 마음을 다하는 그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으로 살아가십시오. 혼자 열심히 신앙생활 잘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주님과 교제하는 것도 귀합니다.동시에 내 속마음과 내 속사정을 알고 나누는 이 두기고와 같은 사람이 내 주변에 있기를 사모하고, 이런 사람들을 점점 내 가까이에 둠을 통하여 내 삶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가 풍성히 담기는 것은 더욱 귀합니다. 그리하여 껍데기가 아닌 마음을 붙들고 내 속마음과 내 속사정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귀한 사람들과 함께 신앙 생활의 진수를 누리기 원합니다. 내 부족한 말과 기도를 통하여 내가 마음을 다해 들어주는 것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예수님의 사랑이 터치되는 위로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 생활,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으로 충분한 일꾼이 되십시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날, 변함없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합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 은혜를 붙들고 변함 없이 주님을 사랑했다고 칭찬받는 자, 그게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중보기도와 자신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 영적으로 중무장해서 사단 마귀의 미혹에서 승리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도들을 실제적으로 이 영적 승리를 누리기 위해 모든 기도, 특별히 중보기도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는 중보기도가 참으로 필요한데, 중보기도 할 때 내용의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닥친 문제나 어려움들, 혹은 건강을 위해 우선적으로 기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기도들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만 그것보다 더 최우선적으로 해야 될 중보기도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깨어 구하기를, 성령 충만 가운데 거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내 마음을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할 때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며 무게중심을 하늘에 두고 하늘의 복이 나에게 임하기를 간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기도하는데 중보 기도가 하늘의 복이 아닌 이 땅의 복에 무게 중심을 두고 땅을 바라보고 기도한다면 땅의 복에 갇히게 되고 그 땅에 복이 나에게 축복이 아니라 나를 교만하게 만들거나 내 눈과 길을 멀게 만드는 올무나 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도록 늘 성령 안에서 기도하기를 항상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멈추고 오직 예수님의 힘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님과 연결되어 예수님의 능력을 공급받고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는게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는 공급 받아야만 사는 존재이며 하늘의 은혜와 복을 담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성령 안에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를 위해 중보기도 하는 가장 중요한 제목은 그들이 영적으로 중무장되어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영적으로 승리하게 도와 주옵소서…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게 도와 주시옵소서…이 하늘의 은혜, 영적 은혜를 최 우선으로 구하는 중보기도가 될 때 수많은 땅의 복들 또한 풀리게 되며, 반찬과 같이 따라오게 되며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적 승리를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 첫번 째는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처한 처지를 봐서는 그 누구보다도 중보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자였습니다. 이유도 없이 억울하게 감옥 안에 갇혀 있으니까, 그것 때문에 사역이 막히고 사명이 막히는 것 같이 보이니까, 그 감옥에서 속히 풀려나 출소하게 해달라고 중보 기도를 부탁하는 게 당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먼저 중보기도 했고 자기를 위한 기도의 첫 번째도 감옥 출소가 아니었습니다. 속히 나가서 왕성히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최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는 것이죠. 대신 사도 바울의 가장 중요한 기도는 주신 말씀을 입을 열어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를 소망하는 기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주신 복이 있고, 주신 은혜가 있으며, 주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은 자, 하늘의 선물 받은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인지 구하며 붙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무엇이며 주신 은혜와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아 그것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나만을 위해 사용되지 않도록, 그 원래 목적대로 잘 사용하며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삶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최우선의 기도였습니다. 사실 감옥 안에 있어서는 주신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신 사명을 위해서라도 감옥에서 속히 나가 출소해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사명을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기도를 들어 주셔야 되고 빨리 옥에서 내 보내셨어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의 감옥에서의 출소를 빨리 허락하여 주시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감옥에 있었고 나중에는 결국 그가 감옥에서 죽게 됩니다. 겉으로 봐서는 이 사도 바울의 순수하고 순전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면서 항의할 수도 있을 정도로 절망하고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영적인 그림을 보게 되면 기도 응답이 지연되고 막힌 신앙의 깊은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생각한 복음을 전하는 방법은 자신이 밖에 나가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며 군중으로 만나며 자신의 입술을 벌려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위해 자신은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사명을 위해 1시간이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열망으로 가득한 자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사도 바울이 직접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그 방법이 아니라 감옥 안에 갇혀서 성경 말씀을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게 하신 겁니다. 에베소서가 대표적 옥중 서신 아니겠습니까? 그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쓰여진 서신들을 통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우리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효과적인 면으로 봤을 때 사도 바울이 출소 후 아무리 부지런히 나가 만났어도 몇명이나 만났겠습니까? 기껏해며 수천 명, 수만명 만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의 방법은 그가 뛰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게 아니라 진득하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경 말씀을 쓰게 하시는 것을 통해 그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히 알게 하시는 도구로 쓰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전에 이 하나님의 경륜을 다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방법이란 신묘막측하고 때로는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연히 할 말을 하는 인생이었고 자신을 담아 사명에 올인하는 인생이었기에 그런 의미에 있어서 진정한 복된 인생이었으며 정말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자였습니다. 그의 삶은 쇠사슬에 매여 있었지만 그의 인생은 절대 매여 있지 않은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는 자가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바울과 같은 인생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진정한 재미와 의미와 성장을 발견하며 나의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귀하고 복된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점점 세상은 악해지고 사단은 계속해서 성도들을 미혹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마음의 천국 맛보기, 가정의 천국 맛보기, 교회의 천국 맛보기를 누리지 못하도록 가정을 흔들고 교회를 흔들고 내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걸 사명과 기쁨으로 여기고 호시탐탐 계속 미혹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의 현주소를 정확하게 직시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의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으며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 중무장을 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은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공급받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늘 덧입을 때 능히 승리하고 이길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6가지의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등장하는데 그 중에 5가지는 다 방어 무기이고 한 가지만이 공격 무기입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배운 세 가지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신경 평안의 신발이었고, 오늘 세 가지를 더 배우려고 합니다. 네번째로 믿음의 방패입니다. 사단 마귀는 계속해서 흔들고 무너뜨리기 위해 그 불화살을 우리의 마음에 쏘고 가정에 쏘고 교회에 쏜다는 것입니다. 그 불화살은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두려움과 의심과 파괴적인 말이 대표적일 수 있습니다. 분노와 거짓을 가지고 두려움과 의심을 가지고 살게 만들며 끊임없이 말을 통하여 무너지게 만듭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며 내 속에 있는 여러 가지의 모든 감정들을 왜곡하고 과장하며, 죄책감 가운데 무너지도록, 절망 가운데 무너지도록 유혹과, 좌절 가운데 무너지도록 모든 불화살을 쏘고 있는 사단의 미혹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단의 불화살의 공격이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사단의 불화살을 능히 이기고도 남는 하나님의 방어 무기가 있는데 그게 바로 믿음의 방패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믿음의 방패로 겨우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방패로 모든 불화살을 소멸한다, 즉 능히 이긴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 불화살이 많이 날라와도 이 믿음의 방패로 잘 막고만 있으면 나를 든든히 지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충분한 소멸할 능력과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골리앗을 보며 벌벌 떨고 아무도 나와 싸우려 하지 않았을 때 다윗은 믿음의 눈을 들어 골리앗 앞에 싸워 나가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불화살을 꺼트리려면 불과 상극이 뭐냐하면 물입니다. 불화살을 소멸하는 건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을 꺼뜨리는 겁니다. 불화살을 꺼뜨리기 위해 믿음이 물에 충분히 젖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에 충분히 물에 젖어 있어야 사단의 불화살을 능히 꺼뜨립니다. 내 인생이 믿음 가운데 충분히 젖으면 믿음의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말씀을 먹으며 기도를 호흡하는 믿음 생활 속에 충분히 적시기 위해 우리가 거룩한 영적 생활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이나 세상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은혜 가운데 충분히 적셔 줘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로 충분히 젖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있다면 사단의 불화살을 능히 이기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구원의 투구입니다. 인체의 여러 장기 기관들이 다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머리입니다. 투구라는 것은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머리를 보호하는 도구입니다. 머리를 다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전쟁에 나가는 사람은 당연히 투구를 쓰고 전쟁을 하지 않아도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도 헬멧을 다 씁니다.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그 말은 반대로 사단은 교묘하게 우리의 생각을 파고들어서 항상 뭐를 흔들어 놓는다는 것입니까? 구원의 확신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죄책감과 죄의식을 사정없이 불어넣어 아주 논리적인 방법으로 틈만 나면 우리의 구원받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선물, 천국 백성됨과 하나님 자녀됨의 의식을 사정없이 흔드는 것입니다. 복음적 속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붙들고 구원의 투구를 확실히 쓰고 있지 않으면 성도들이 갈대와 같이 구원받음이 흔들리는 겁니다. 내 인생이 흔들릴 때마다 구원이 흔들리는 겁니다. 내 삶이 어려울 때마다 구원이 흔들리는 겁니다. 복음적으로 속죄 받은 의식이 약하니까…내 감정에 의지하며 어떤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지하며 복음을 이해하니까 복음적 구원이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구원의 투구라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됨이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 나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구원받은 확신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것, 이것이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사탄의 미혹을 무력하게 만들고 흔들리지 않기 위해 내 삶이 언제나 분명하게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이나 느낌을 의지하지 말고 모든 상황에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됨은 내가 누구인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누구의 소속이고 누구 안에 있는가로 결정된다는 것을 항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 유일하게 공격용 무기입니다. 주로 방어를 하며 그 미혹을 이겨야 되지만 때로는 우리가 공격을 해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선제공격을 하며 그 공격을 막아서기 위해 우리가 공격형이 돼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근데 성령의 검을 통한 공격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이 성령의 검을 공경무기로 잘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검이 되도록 그 성령의 검이 녹슬지 않도록 해야 하고 날카롭게 갈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담은 말씀이 녹슬게 되면 성령의 검으로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마귀의 미혹을 성령의 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40일 금식 후에 세 번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그 시험을 모두 물리치신 공격용 무기가 모두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게 없어도 충분히 이기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으로 이기신 이유는 우리에게 마귀의 공격을 이렇게 이겨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모델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늘 날카롭게 단련하여 말씀이 나의 심령 골수를 쪼개야 되고 말씀이 사단의 공격을 한 방에 쪼개도록 칼을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말씀을 날카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 되도록 녹슬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늘 내 삶의 성경을 읽고 말씀에 참된 의미를 상고하며 늘 말씀을 점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깨달은 말씀, 내가 붙들고 있는 말씀은 녹슬지 않고 날카로워집니다. 내 안에 심기와 피가 되고 살이 되며 내면화 된 말씀은 녹슬지 않고 날카로운 말씀입니다. 위기 때마다 생각나는 말씀은 날카롭고 녹슬지 않은 말씀입니다. 그런 말씀만이 나에게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성령의 검으로서 사단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내 마음을 무너뜨리고 흔드는 모든 것은 영적 전쟁입니다. 이 전쟁터에서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름 받았습니다. 이 영적 전쟁을 능히 이기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인 중무장을 하십시오. 하나님의 군사로 영적으로 중무장하여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복음의 신발을 신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성령의 검을 들어 나를 위해 싸워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성도들은 믿음의 방패를 서로 연결해 하나의 큰 성이 되는 것 같이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들을 성도들이 서로 연결하여 사단 마귀를 대적하는 영적 연합군을 만들고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 사단의 불화살을 능히 소멸하고도 남는 믿음의 승리를 체험하십시오. 우리가 언제나 구원의 투구를 써 가장 중요한 내 머리를 보호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되었으며 어떻게 죄 용서함을 받았는지를 분명히 믿어 확실한 구원의 은혜 가운데 거하십시오. 내가 받고 의지하는 말씀이 녹슬지 않고 날카로워지는 말씀으로 성령의 검으로 내가 붙들고 살아가십시오. 영적 중무장을 통해 능히 사단에 그 궤계를 이기며 미혹을 이기며 말씀을 붙들고 승리 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6장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내 마음을 지키고, 우리 가정을 지키고 우리 교회를 지키는 것이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를 통하여 영적 질서와 원리를 붙들고, 세우고 지키는 것이 절대 자동적으로 되지 않는 일이며 그것을 호시탐탐 무너뜨리는 사단 마귀의 미혹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맛보게 있는 세 가지의 장소,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는 것을 기쁨과 낙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합니다. 복음이 마음에 심기지 못하도록 빼앗고 구원받지 못하도록 눈과 귀를 가리며 우리 곁에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 사단과의 영적 전쟁을 내 힘으로 싸우면 백전 백패이고,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의지하여 전신갑주를 덧입으면 백전 백승, 능히 대적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가정을 세우고 내 마음을 세우고, 교회를 지키고 가정을 지키고 내 마음을 지키는 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장임을 믿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나오는 전신갑주는 그 당시 중무장한 로마 군인들의 장비 일체를 얘기하는 것으로서 이렇게 우리가 영적으로 중무장해야 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언어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전신 갑주 중에 세 가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영적 중무장인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6가지가 있는데 오늘 세 가지 그리고 내일 세 가지를 배우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살필 세 가지는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신발입니다. 첫 번째로 진리의 허리띠입니다. 군인에게 허리띠는 옷을 단단히 조여매고 우리에게 힘의 원천인 허리를 꽉 조여내는 역할을 합니다. 운동 전에 신발 끈을 다시 조이거나, 허리띠를 조이는 것은 항상 단단하게 매어 우리 힘의 원천이 한 곳으로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진리의 말씀을 단단히 매는 허리띠를 매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반복적으로 사단을 속이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사단이 성도들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흔들고 무너지게 하는 대표적인 미혹이 바로 반쪽진리인 속임수와 거짓입니다. 대강 들으면 진짜인 거 같은데 자세히 보면 거짓말입니다. 그냥 진리가 조금 포함되어 있지만 다 들어보면 반쪽 진리인 왜곡과 변질, 그게 사단이 교묘하게 쓰는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단 마귀의 속임수와 미혹을 이기는 방법은 힘의 원천인 허리를 진리로 단단히 동여 매는 것 밖에 없습니다. 모든 관계를 깨는 미혹이 속임수와 거짓이라는 걸 깨달으면 이 시간 진리의 허리띠를 단단히 매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말을 하찮게 여기고 말에 아주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며 거짓말을 가볍게 여기고 속임수를 가볍게 여기게 만듭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거짓을 버리고 속임수를 버리며 사단의 이 교묘한 미혹과 속임수를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바로 이 사단 마귀의 미혹과 속임수를 거절하고 진리의 허리띠를 매는 것입니다. 거룩한 영인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일하시기 위해서는 진실되고 참인 곳에만 거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거짓을 품고 속임수를 품고 왜곡을 품고 있는 곳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기 때문에 이 진리의 허리띠를 매야만 합니다.그것이 바로 윤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거룩한 영인 성령 하나님이 내 안에 풍성히 거하시는 비결이자 사단의 미혹과 속임수를 싸워 이길 수 있는 놀라운 방어가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의의 호심경입니다. 예전 성경 번역이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데 옛날 성경에는 흉배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흉배란 가슴과 심장을 보호하는 장비로, 지금으로 얘기하면 방탄조끼라 할 수 있겠습니다.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심장이 뛰지 않으면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심장을 보호하는 방탄조끼, 그게 의의 호심경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우리 영적인 심장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심장은 생명이 살아 있는 현장이자, 생각이 자리 잡고 내면의 감정이 자리잡은 참 중요한 곳입니다. 그래서 나의 양심과 생각과 감정을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의로 방탄조끼를 삼아야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타깝게도 자기 감정대로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문제 없다고 착각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감정과 생각이 병들고 타락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우리 감정과 생각을 사단 마귀가 계속 파고들어 무너뜨리려 하는데 그냥 무방비로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감정과 생각이 사단에게 사로잡히면 안 된다는 것이죠. 의의 호심경, 의의 방탄 조끼를 입고 있지 않으면 사단이 끊임없이 나의 생각과 마음과 감정을 흔들어서 다른 것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의롭게 하심으로, 나의 나된 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를 믿고 누구 안에 거하기 때문에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어떻게 구원받고 어떻게 의롭게 되었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려 죽으신 그 의가 나에게 덮혀 의로움을 선물로 받은 겁니다. 내 감정과 생각이 내 마음대로 가면 망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사는 대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사는지를 늘 반성하며 함부로 미련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평안의 복음의 신입니다. 군인에게 있어서 신발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데 군대에서 행군할 때 신발이 내 다리에 딱 맞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군화가 내 다리에 딱 안 맞으면 조금만 걸으면 발이 까지고 물집 잡히고 다리가 거의 엉망진창이 됩니다. 내 발에 딱 맞는 군화는 나를 움직이는 힘과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사단은 틈만나면 분노와 불안과 걱정을 나를 움직이는 힘이 되게 만들고 내가 이리 뛰고 저기 뛰며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의 공격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며 사람들과의 관계를 깨서 마음을 무너뜨리고 가정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주 작은 틈이라도 비집고 들어와 모든 관계를 깨지게 만들고 담을 세우게 만드는 것, 나눠짐, 단절 불통과 원수됨이 사단의 작품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이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군인이 군화를 신는다는 것은 아주 좋은 아스팔트 길이나 평지만 가기 때문이 아닙니다. 군화를 신고 행진할 때는 아스팔트만 평지만 가는 것이 아니라 꽃길만 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험한 산을 올라 가고, 돌짝밭을 가고 힘든 길을 가기 때문에 내 발에 딱 맞는 군화를 신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의 발걸음은 평지만 가고 꽃길만 가고 아스팔트만 가는 게 아니라 때로는 어려움을 당하고 실패와 눈물과 좌절을 겪으며 험한 돌짝밭과 높은 산의 어려운 길을 갈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알기에 우리는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이라는 거 자체가 결국 샬롬, 평화의 소식 아니겠습니까? 모든 막히고 단절된 곳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임하므로 모든 막힌 담이 헐어지며 그리스도의 힘의 능력으로 주님의 평화가 임하는 것이죠. 내 발에 평안의 복음의 신발이 신겨진다는 것은 바로 내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님의 평안이 누려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전신갑주, 영적 중무장을 통하여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십시오.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나는 성도로서 늘 주님 앞에 부름 받은 백성, 하나님의 의로 변화 받은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영적 중무장을 하고 살아가십시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기준이 내 감정과 생각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의 기쁨 되는가를 끊임없이 복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이라 믿습니다.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어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 가운데 능히 이기며 승리하는 당당한 천국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5-6장 말씀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내와 남편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종과 상전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지침을 줬던 이유가 이 모든 영역이 결국 우리가 싸워야 될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 마귀가 무너뜨리고 흔드는 세 곳이 있는데, 내 마음, 가정 교회입니다. 이 세 곳이 천국을 가기 전에, 이 세상에서 천국 맛보기,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세 곳으로 하나님이 디자인을 하셨기 때문이죠. 내 마음의 천국 맛보기, 가정에서의 천국 맛보기, 교회에서의 천국 맛보기…천국에 1/10000정도 맛보기를 통해 천국이 어떤 곳인가 조금이라도 알게 하시기 위해 만드신 이 세 곳을 사단은 끊임없이 흔들고 무너뜨리기 위해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미혹과 흔드는 것을 하도 자주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냐 하면 둔감해지고 무덤덤한 것입니다. 교회가 흔들린다…교회가 무너졌다…이게 정말 두려운 일이거든요. 그런데 교회가 무너지고 분쟁하고 서로 싸우는 일이 워낙 반복되고 흔해 지니까 이제는 그게 놀라지도 않고 무덤덤해 지는 겁니다. 가정이 흔들리고 무너지는 건 정말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흔들리고 싸우며 무너지는 일이 너무 흔하게 보니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무덤덤해 진 겁니다. 별로 큰 통곡이 없는 거예요. 성도라고 얘기하는데 내 마음이 어쩌다가 한번이 아니라 매일매일이 지옥 맛보기예요. 내 마음이 매일 죽을 맛이고 죽지 못해서 살아요. 그런데 그게 워낙 흔하니까 이제는 마음이 지옥 아닌 사람이 누가 있어….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마음이 힘들고 지옥을 경험하며 사는 것을 너무 일상화로 받아들이면서 무덤덤해 졌다는 것입니다. 안 무너진 가정이 이상하고 안 무너진 교회가 이상하고 안 무너진 마음이 이상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성도들을 향한 사단의 미혹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이 모든 것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 자체를 모르게 만드는 미혹입니다. 이 모든 게 우리가 이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순간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사단과 원수가 된 자들입니다. 그동안은 사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똑같은 방향으로 길들여져서 우리는 철저히 굴복 되어 노예와 같이 살아왔습니다. 세상과 사귀어 살며 사단이 주는 것을 전부라고 여기고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여 하늘의 백성이 되는 순간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삶의 주인이 달라지며 사단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단은 성도의 마음을 흔들고 무너뜨리려 하고, 성도의 가정을 흔들고 무너뜨려 하고, 성도들이 모이는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내 마음이 힘들고 어려워 무너지려 하고, 우리 가정과 교회가 흔들리고 어려워 무너지려 하는 것이 그냥 눈에 보이는 문제들 때문이라고만 생각하고 끝나는 것입니다. 이게 영적 문제라는 것을 보지 못하는 거예요.이것을 정말 원하고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건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성도의 다른 점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부딛히고 갈등할 수밖에 없는 영적 전쟁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두번째 미혹은 마음과 가정과 교회의 영적 전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세우려고 하는 미혹입니다. 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며 권위를 세워주며 왜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을 해야 되는가? 그냥 효를 위해서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무너지고 권위가 무너지는 것을 통해 가정을 흔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라는 것입니다. 근데 많은 사람들이 이게 영적 전쟁이라는 거 자체도 모릅니다. 또한 알아도 영적으로 철저히 둔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다 마비되어 눈에 보이는 싸움인 줄 착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어렵고, 가정과 교회가 어려울 때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그저 열심히 뛰어다니려 그러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혈과 육만 상대하고 땅만 바라보고 내 머리에서 나온 개선책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스스로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무엇을 해보려고 막 발버둥 치고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에 습관으로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우리는 땅만 바라보고 살고 사람만 바라보고 살고 환경만 바라보고 살고 문제만 바라보고 사는 거예요. 그리고 문제 해결한다고, 상황 개선한다고 혼자 열심히 뛰어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노력해요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항상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거는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거 100%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 가지고는 절대 이기지 못하고, 절대 지키지 못하고, 절대 세우지 못한다는 겁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마비되니 눈으로 안 보이니까 전혀 위기감도 없고 이게 늘 일상으로 되니까 그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겁니다. 내 마음이 무너지고 지옥을 맛보는 거에 둔감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겁니다. 가정과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어려워지는 것에 둔감해지고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둔감해지고 영적 감각이 마비되면 말씀을 빼앗기고 신앙을 빼앗기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그 결과 남편과 아내가, 부모와 자녀가 원수되고, 내 마음이 지옥이 되고 교회에서 목회자들과 성도가 원수가 되며, 먼저 믿은 자들과 나중 믿은 자들이 서로 갈등하고 반복하는 것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덤덤하게 살아가면서 그 가운데 다 흔들리고 무너지게 된다는 거예요. 정신 안차리면서 누구랑 싸우는지 모르고 누구를 상대해야 되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거죠. 말씀이 내 마음에 심기워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기를 정말 싫어해서 호시탐탐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으려는 악한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딱 움켜쥐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심겨 말씀이 나에게 내면화되고 그것이 실체화되어 나에게 힘과 능력이 되기를 원치 않는 자가 있다는 거예요. 내 마음, 가정과 교회에서 천국 맛보기를 누리는 걸 정말 싫어해서 호시탐탐 흔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악한 존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 뒤에 상황과 환경 뒤에 눈에 보이는 것 뒤에 뭐가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이 있다는 걸 모르게 만드는 미혹이 있다는 겁니다. 이게 다 영적 문제라는 것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오늘 말씀은 세 가지를 해법으로, 세 가지로 영적 전쟁을 대비하라고 권면합니다. 그 세가지는 주님 안에 머물고,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지고,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하늘을 향하여 주님 안에 머무는 겁니다. 영적 전쟁을 이길 힘과 능력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진짜 믿고 주님의 능력과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적 중무장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주님 안에서 주님의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져서 영적 중무장을 하는 것이 영적 전쟁을 대비하는 거예요. 그러면 능히 이긴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겨우 이기는 게 아니라 능히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체로 믿고 살아가려면 내가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 안에서 머물러 있고 땅만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내 마음과 눈이 열려 주님의 힘과 능력이 정말 내 능력이 되도록 공급받으며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간 내 마음이 지옥을 맛보고 가정과 교회가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을 때 그것이 영적 문제임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내가 싸워야 될 상대가 누군 지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이 성도가 살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슬기로운 가정 생활이 아니라 슬기로운 직장 생활이나 교회 생활이 아니라 내가 싸워야 될 상대를 정확하게 아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내 힘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어둡습니다. 선과 악이 분별이 안 되는 시대이자 사단의 미혹이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 가운데 있는 시대입니다. 사단은 여전히 우리를 눈에 보이는 혈과 육만 상대하게 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눈에 보이는 물질이 전부인 줄 알고 올인하게 만드는 간교한 계획을 미혹과 함께 던집니다. 사단 마귀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반복과 노출을 통하여 그 미혹을 무덤덤하게 만듭니다. 내 영적 감각을 다 마비시키고 영적으로 둔감해지게 만들며 말씀을 빼앗기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듭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무슨 힘으로 무슨 능력으로 싸울 수 있겠습니까? 이 싸움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알고, 열심히 한다고 내가 주먹 쥔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내 앞서 싸우셔야 이길 수 있는 바로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이며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을 상대하는 싸움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가정과 교회를 그리고 나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고 무너뜨리기 위해 오늘도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을 상대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존재인 사단 마귀를 상대하기 위해 이 시간 주 안에서 주의 힘과 능력으로 강건해 지며 영적인 중무장을 덧 입어서 영적 전쟁에서 능히 승리하며 굳게 세워지고 굳게 지켜지는 그 기적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오늘 말씀은 상당한 논란과 오해가 있는 말씀입니다. 두 가지의 큰 오해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오늘 말씀을 슬기로운 직장 생활 정도로 해석하는 오해입니다. 종과 주인의 관계를 요즘에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관계로 생각해서 어떻게 하면 직장 생활을 거룩하고 성도답게 잘 할 수 있는가…라는 슬기로운 직장 생활에 대한 하나의 가이드라인 정도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 부분이 물론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은 이 말씀에 깊은 뜻을 놓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슬기로운 직장 생활을 알려주는 것을 넘어 영적 전쟁의 현장으로서 삶의 터전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오해는 이 말씀을 통해 노예를 가지고 있는 걸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더 나아가 성경이 노예제도를 옹호하고 있다는 오해입니다. 곰곰히 잘 좀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핍박의 시대였고 지금 에베소에 사도 바울이 평생 산 것도 아니에요. 에베소는 사도 바울에게 선교지였습니다. 선교지역... 그는 계속 이곳저곳을 가면서 교회를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핍박과 선교지에 대해 그곳에서 잠깐 있다가 떠나는 교회는 지금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시대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될 건 지금 종과 상전의 관계를 얘기할 때 이 큰 그림은 성령 하나님이 성도들의 삶과 교회의 삶의 역사 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벽이 무너지는 기적 가운데 이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시는 기적이 뭐였냐면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 허물어졌고, 남자와 여자의 벽이 허물어졌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상종할 수 없었고 심지어 지옥의 땔감이라고 여기고 있던 이방인이 한 공간에서 한 예수님을 같이 섬긴 거예요. 그 당시에는 남자만 예배 드렸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남성과 여성이 같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그림 안에서 종과 주인이 함께 예배를 드리는 이 막힌 담이 헐어지는 기적이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놀라운 성령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남자 여자가, 종과 주인이 함께 예배 드리는 막힌 담이 허물어지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죄된 인간은 항상 나와 비슷한 사람과 담을 쌓고 싶은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나와 경제적인 상황이 비슷하고 나와 직업이 비슷하고 나와 공유할 게 비슷한 사람들하고 모이면 친하고 편하거든요. 나와 다른 사람들 하곤 담을 쌓고 싶은 것이 죄 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종이 주인과 같이 예배 드리는 것, 심지어 겸상하고 같은 자리에 있는 것도 불가능했던 시대… 같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 했더니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주인을 친구같이 막 대하거나, 오늘 말씀을 보면 성실하지도 않고 눈가림만 하고, 억지로 일하는 이런 종들이 생긴 겁니다. 그렇기에 본성을 넘어 종과 주인 사이에 담이 허물어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는 파생된 크고 작은 문제들을 바라보면서 이 문제를 봐야 합니다. 이 문제를 거룩하고 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영적 전쟁 관점에서 보여주고 증언하는 말씀이 오늘 말씀이라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서 첫번째로 성실하지 않고 눈가림만 하고 억지로 하면서 종들을 향하여 권면하는 것입니다. 순종 하라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께 하듯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순종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억지로 종이 되었지만 그 섬기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이 시간 자원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일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불성실하게, 눈 가림으로 억지로 일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마음으로 마음을 담아 섬기고 기쁨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들에게 천국을 맛보는 마음, 천국을 맛보는 가정, 천국을 맛보는 교회가 되길 원하시며 이 막힌 담들을 다 헐게 하셨는데…그렇기 때문에 너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성실하게 살고 눈가림만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살며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영적으로 좀 정리해 보면… 우리 모두는 다 종입니다. 다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우리 주인과 상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자가 저와 여러분들인 걸 믿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주인이 그리스도인데 우리는 억지로 어쩔 수 없이 종이 된 게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귀 뚫은 종과 같이 이 시간 내가 주님께 종 되기를 내가 주님을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기를 결단한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에 어떤 삶을 살아야 됩니까? 성실하지 않고 눈가림만 하고 억지로 하는 그런 삶, 죽지 못해 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나의 삶에 주님의 마음을 섬기듯이, 성실하게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이 시간 마음을 다해 하고 억지로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할 때 그 가운데 하늘의 역사와 하늘의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성도들에게 하는 미혹은 뭐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 하는데 입에서 맨날 성실하지 못하고 눈가림만 하고 억지로 하는 것 투성으로 만드는 겁니다. 더 나아가 모든 가까운 사람들과 관계가 늘 부딪히는 거예요. 왜냐하면 눈가림만 하고 억지로 하고 성실하게 안 하니까 ….눈 가림만 하고 억지로 하는 삶으로 늘 불평과 원망과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마음으로만 늘 살아간다면 주님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가, 특별히 나와 가까운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힘이 없어야 하나님하고 관계가 막히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나와 가까운 사람 사이의 관계가 다 막혀 있어요. 부부 사이가 막혀 있고 부모와 자식 간이 막히고, 내 직장 관계가 다 막혀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하고 관계가 뻥 뚫린다… 이거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이가 좋은 관계가 되기 위해 내 주변 가까운 사람 사이에 있는 관계를 올무와 같이 막히게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깨서 잠에 들 때까지 너희가 살고 있는 그 삶의 터전에서 그렇게 기뻐하지 않고 억지로 죽지 못해…하는 그 삶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꾸 막히게 되며 너희의 마음이 지옥 맛보기라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게 영적 생활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는 주인들 상전에 대한 권면입니다. 예수님 바라보듯이 종들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 당시에 로마의 문헌을 보게 되면 노예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사람 말을 알아듣고 사람의 말을 하는 짐승…그게 그 당시 노예의 정의였어요. 노예를 사고 파는 게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 자리에서 노예를 죽여도 아무도 뭐라 그러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주인과 종이 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넘어, 종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더 나아가 오늘 말씀은 종들을 주께 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상전들에게 종들에 대한 위협을 그치라고 경고합니다. 상전이 말 한마디 하면 목이 달아나는 것이 종들이었기, 종들을 위협하고 협박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한 자유인이라면 이 시간 종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너희의 영적 생활이라는 걸 잊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가 상전이고 더 중요한 건 하나님은 너희를 외모로 취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껍데기인 외적 지위, 신분, 주인됨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 너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느냐 이것만 보신다는 거예요.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너희의 종들을 대하고 있느냐…이거 본다는 거예요…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시대상을 봤을 때 이 상전들을 향한 주인들을 향한 명령은 거의 파격을 넘어 혁명과도 같은 명령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녹아질 수 없는 관계와 벽이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깨어 있는 관계가 건강하고 사이가 좋아야 하나님 하고도 사이가 좋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정에서의 관계 내가 깨어 있는 내가 삶에 있는 일터에서의 관계 내가 가장 많이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가 이 시간 좋고, 흔들리지 않고, 깨지지 않도록 이 시간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주님을 대하듯 성실하게 마음을 다하여 기쁨으로 하는 그 현장에 하늘의 복이 임하는 걸 잊지 마십시오. 이게 영적 전쟁의 현장이라는 걸 잊지 말고 내 삶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이 시간 성실한 마음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며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하는 역사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질 수 있도록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5-6장의 실천적 지혜의 말씀이 단순히 슬기로운 가정 생활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않고 말씀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동안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통하여 영적 지혜를 배웠다면 오늘은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를 통하여 이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승리하는 영적 지혜를 증언합니다. 사실 이 시대에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처럼 중요한 것이 없는데 안타깝게도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가 멀어지고 어려워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부모들의 역할이 있고 자녀들의 역할이 있는데, 딱 문제가 생기게 되면 항상 자녀들은 피해 의식의 사로잡힙니다. 자녀들은 피해자이고 부모들은 가해자라는 프레임에 딱 갇혀서 항상 아버지 때문에 피해 받고 어머니 때문에 상처받고…원인을 부모에게 돌리며 자녀들은 피해자 모드로 간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일방적 피해자라는 의식을 자녀 스스로도 갖게 되고 이 사회가 계속 그 프레임을 강조하면서 늘 부모들은 자녀에게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책에 모든 것이 나의 탓이라는 이 가해자 모드로 무거운 짐을 지우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증언하기를 자녀는 자녀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있고 부모는 부모로서의 역할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있어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처럼 건강한 질서를 이루지 못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신 말씀을 통하여 자녀들에 주신 영적 의미의무가 무엇이며, 부모에게 준 영적 책임이 무엇인가를 함께 살펴서 이것이 가정 안에서 조화와 균형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며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기 원합니다. 가정 안에서 자녀에게 주신 영적 의무는 바로 순종과 의무입니다. 순종이라는 말은 특별히 내적인 태도를 강조하고 공경은 외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순종과 공경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내면으로 바른 태도, 외적으로 바른 행동을 하는게 바로 순종과 공경입니다. 당시에도 부모를 향해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게 강조되는 시대였고, 특히 동양 국가에서는 순종과 공경은 당연히 해야 될 덕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슬기로운 가정 생활의 관점이 아니라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왜 자녀에게 순종과 공경을 그렇게 강조하셨는가…를 묵상해봐야 합니다. 핵심은 어디 있냐면 바로 “주 안에서 순종, 주 안에서 공경…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자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께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묵상해 보면 됩니다. 성경은 삼위 일체의 신비를 통해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모두 본질상 동체이시며 동등하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 예수님은 스스로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우심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도, 예수님이 억지로 돼지가 도살장에 끌려가듯이 마지 못해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꿈꾸며 자발적 순종으로 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자녀들은 이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겁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할 때 예수님이 가지셨던 자원하는 심령으로 정말 사랑해서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할 때 가정 안에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공경은 바로 부모를 무겁고 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부모를 중하고 귀하게 대하는 거예요. 가정 안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그것을 보고 배우는 자녀들이 바로 부모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체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가만히 있으면 되느냐… 아닙니다. 아버지는 반드시 예수님에게 굴복하고 순종하는 것을 삶으로 보여 줘야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순종하고 주 안에서 공경하는 자녀를 위해 아내가 남편을 주 안에서 순종하고,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철저하게 굴복 되는 순종과 복종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통해 자녀들이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법이 무엇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가정에서 영적 권위와 영적 질서를 배우는 것입니다. 가정을 통하여 사회적, 영적 권위와 질서를 체득하여야, 그곳에 하늘의 영광과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이 영적 질서와 권위가 잘 안 세워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부모님에게 계속 불순종하는 자녀가 되는 겁니다. 불순종하고 충돌하는 것을 삶의 습관으로 살아가는 자녀가 되는 거예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늘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자녀가 과연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게 굉장히 어렵다는 거예요. 머리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내 삶은 늘 불순종이 삶의 배어 있는 겁니다…몸에 배어 있는 거예요. 부모에게 함부로 하는 자녀가 하나님에게 함부로 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입니다. 사단 마귀는 어떻게 가정을 흔들겠습니까? 가정 안에 불순종의 영에 휘둘리게 만들어 질서와 권위를 다 무너뜨리는 겁니다. 늘 가정 사이에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만 있게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맨날 싸우는 게 뭡니까? 나는 피해자고 너는 가해자라는 싸움이에요. 부모와 자녀가 맨날 가해자-피해자 논리로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게 무너지면 결국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습관을 몸에 새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하나님 뜻을 거스르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 큰 영적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영적 전투의 현장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겠습니까? 십계명에서 대인관계의 첫 번째 계명이 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부모가 자식을 내리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당연하고 본능이 아니기 않기 때문입니다. 계명으로 주실 정도로 자녀가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능력을 공급받고 구체적인 노력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의 생각과 뜻을 거절하고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 되는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기에 부모 된 자로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주 안에서 순종과 공경을 가르치기 위해 자녀들에게 체득시켜 줘야 하는 것은 욕구 지연 훈련입니다. 욕구지연이란 자녀들이 원하고 갖고 싶은 것을 바로바로 채워 주는 대신, 상황과 타인을 위해 지연시키는 훈련을 가정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걸 지금 당장 주지 않으면 뒤로 뒤집어지는 아이들, 욕구 지연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인생이 모두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내 시간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내가 다 먹고 싶어도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되는구나….욕구가 필요하지만 욕구를 바로바로 채워주는 게 아니라 욕구를 지연시켜주는 훈련을 가정에서 해야 합니다. 그 욕구 지연 훈련이 잘 된 자녀들은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내 뜻과 내 타이밍이 하나님의 뜻과 시간대랑 맞지 않는구나…기다릴 수 있는 인내하며 약속을 믿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준 영적 책임은 무엇입니까? 특별히 아버지에게 그 책임을 주었는데 자녀들을 노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버지가 이럴 확률이 높은데 자녀들에게 노함이 생기는 이유는 부모가 그것을 강요하고 협박하고 찍어 누르기 때문입니다. 공경과 순종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협박하거나 찍어 누르지 않는 겁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긴 하지만 내 자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 자녀임을 늘 깨닫는 게 영적 질서입니다. 그들은 내 자녀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인격을 무시하거나 내 소유물로 여기거나 내 욕심과 판단으로 자녀들을 몰아가지 않는 겁니다.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내 마음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는 것입니다. 부모된 자로서 하나님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사랑을 가지고 주의 마음으로 교훈하고 훈계하고 양육하는 게 영적 책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 안에서 권위와 권위주의의 구별이 정확하게 되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권위는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권위주의로 가면 안 돼요. 권위와 권위주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세워주는 것이 권위입니다. 반면에 권위 주위는 내 스스로 강압과 협박을 통해 내가 이렇다고 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의 권위는 아내와 다른 가족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세워주는 겁니다. 내 스스로 내가 이렇다…라고 자꾸 강요하는 순간 가정에는 권위주의가 스며들고 노여워지는 자가 많아지는 겁니다. 건강한 공동체는 여러분 다른 사람들이 그 지도자의 권위를 세워주는 거고 안 되는 공동체는 서로가 서로를 깎아내리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는 그런 안타까운 관계가 될 때 권위주의가 판 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심령으로 서로가 서로 세워주고, 서로 섬길 때 비로소 그 가운데 영적인 은혜와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 시간 사단 마귀는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가정을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피해자-가해자 프레임을 씌워 가족 간에 원수가 되게 만들고, 영적 질서와 권위를 다 무너뜨리려 합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고 하나님 말씀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겁니다. 불순종의 영이 임하면 부모를 하찮게 대하고 경시하는 겁니다. 자녀들 중에 부모를 경시하는 자들이 있고, 함부로 하는 자들이 있어요 그건 단순한 태도 문제가 아니라 영적 문제입니다. 부모를 중하게 여기고 부모의 말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 삶이 체득된 자가 하나님도 중하게 여기고 하나님 말씀도 가볍게 여기지 않음을 잊지 마십시오. 가정이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공경을 배우는 은혜의 장소로 세워지고 가정이 든든하게 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고 주 안에서 공경하는 것은 내 영적 훈련의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녀된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공경하도록 잃고 기도하십시오. 부모된 자로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마음과 뜻으로 그들을 양육할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 받으십시오. 그래서 나의 마음과 나의 가정이 든든히 세워지고 흔들리지 않으며 무너지지 않으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오늘도 회복의 은총으로 다시 한번 세워지는 역사를 사모하십시오. 나의 마음과 가정이 순종을 배우며 주님 은혜로 풍성히 담기는 은혜의 가정, 축복의 가정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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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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