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입니다. 십자가 복음의 생명과 자유가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에 결박되어 살아가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선포하는 안타까운 서신입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스스로 내가 무언가를 해서 구원받을 만하게 만드는 것을 열망하며, 율법을 지킴을 통해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얻는 유사 복음이 몸에 딱 맞는 옷과 같이 여겨지는 겁니다. 그래서 은혜로 주신 십자가 복음 대신 자꾸 율법을 붙들고 내가 무언가를 해서 얻는 결과나 보상이 구원이라고 착각하는 이것에 자꾸 휘둘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냐, 율법이 먼저냐…라는 것을 통해 선명한 복음을 제시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두 개를 동시에 붙드는데 절대적으로 중요한게 있고 상대적으로 중요한 게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한 영적 진리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의 필요가 중요하지만, 그것은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이기에, 분명한 우선순위와 영적 질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고, 율법은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임을 붙드는 우선순위와 영적 질서를 지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절대성을 붙들고, 율법을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정확한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갖지 아니하면 신앙의 혼란과 왜곡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중요하고 절대성을 갖는지 설명하기 위해 바울은 사람들과의 약속을 먼저 얘기합니다. 사람들도 약속하면 약속을 지키는 게 당연하다는 겁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약속하면 약속을 안 지키는 사람은 신뢰가 없는 사람이고 그 사람하고는 지속적인 관계가 어렵습니다. 왜냐면 약속을 하면 지키는 게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약속도 그렇게 잘 지키고 당연히 지켜야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사이에 하신 약속은 얼마나 잘 지켜지겠느냐는 겁니다. 또한 약속이라는 것은 두 사람이 하는데 한쪽에서 약속을 못 지키면 그 약속은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약속은 쌍방이 지켜야만 되는 게 약속이기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이 지켜 지려면 양쪽이 다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인간은 그 하나님과 한 약속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는데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고 계속 깨며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약속은 당연히 파기되고 깨져야 되는데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겁니다.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이 영원 불변하는 이유이고, 그 본질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값없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이 사랑과 은혜 자체이며, 절대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그의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아니라 그의 믿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약속을 깨는 불순종,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앙의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해 아들 이삭을 주신다는 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 된 이유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열심이고 하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죽이라 명령하신 사건은 누구를 예표하는 것인가 하면 장차 오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이 하지 않고 오직 한 사람인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라고 강조합니다. 이삭의 모리아산 사건은 하나님이 구약의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신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됨을 증언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어쩌다 우연히 오신 게 아니라 아브라함과 맺으신 이 언약을 영원 분별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브라함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하여 언약이 성취됐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인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구약은 그림자와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그 가운데 보조 도구로서 율법이 등장하게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주신 이 복음의 절대성, 십자가 복음의 절대 가치를 상대적으로 중요하고 보조도구인 율법이 영적 질서와 우선순위를 흔들면 안되는 겁니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 즉 모세가 받은 시내산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을 반찬과 같이 섬기는 보조 도구라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보조 수단인 겁니다. 그렇기에 율법은 거라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하나님의 언약에 걸림돌이 되면 안 되고 십자가의 복음에 걸림돌이 되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절대적인 가치인 하나님의 언약과 십자가 사랑을 자꾸 밑으로 내려놓고 익숙하고 편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율법을 절대적 가치로 두려고 했다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보조도구 율법이 자꾸 위로 올라와 영적 질서가 무너지게 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이 언약을 막아서는 걸림돌이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처한 영적 문제이며 이 시대 많은 성도들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되는 영적 문제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영적 습관들을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영적 습관이 그리스도의 언약과 은혜와 사랑을 막아서는 걸림돌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유익한 영적 습관들이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을 얻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면 이게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내 소중한 영적 습관이 타인은 사람을 비판하고 정지하는 수단이 되면 십자가 복음에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내 영적 습관들은 십자가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보조 도구로서만 되게 하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그 거룩한 영적 습관들이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주신 십자가 복음을 은혜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기만을 붙드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구약, 옛 언약이 성취된 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십자가 복음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게 구원받았습니까? 언약의 신실하심으로 그 아들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언약이 이루어져서 소망이 생기고 구원이 완성된 겁니다. 이 놀라운 구원,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겠습니다…고백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결과로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의 자유이고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복음을 말씀 그대로 수용하고 따르며 받아들이십니까? 우리와 맺은 언약을 영원 불변하도록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과 은혜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무조건적으로 값없이 주어져서 그리스도를 통과해 예수 안에 있는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그 놀라운 십자가 복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은 구원받은 겁니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을 아는 보조도구로만 정확하게 한정하여 무조건적인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실하신 은혜를 붙들고 나의 나된 것은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신뢰하며 따라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십자가 은혜를 강조하며 반복해서 등장하는 말이 저주라는 말인데, 저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마음에 새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주라는 말이 부정적 의미에 좋지 않은 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정의가 참 다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저주라는 의미의 본질은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명기 21장을 보게 되면 나무에 달린 자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 바로 저주받은 자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사람의 시체를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형을 당하고 나면 시체를 다시 나무에 매다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그 처형당한 사람의 죄가 너무나 크게 되면 그 죽은 시체를 매달아 사람들에게 전시함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저주받은 시체라는 것을 경고했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일정한 기간 둠으로서 시체가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끔찍하게 변하는 나무에 달린 시체를 바라보며 저주받은 인생의 끝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선언합니다. 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냐 하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의롭다 존재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율법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 스스로 의로워지고 구원받을 만하게 만들려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버림받음, 저주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고 죄를 드러나게는 하지만, 율법이 우리 죄를 속할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의로워질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무도 없으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인생 저주받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란 나를 대신해 저주 받으신 사건입니다. 나의 죄를 대신해서 내가 달려야 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의미와 함께, 내 죄로 말미암아 받아야 될 저주, 하나님께 버림 받아야 하는 저주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나무에 달린 저주받은 인생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 지으시며 십자가에서 이렇게 절규하셨습니다.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그 절규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저주 받으시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저주를 받고 버림을 받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그냥 물과 피를 쏟으시며 고통 가운데 돌아가신 것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아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도 버림받는 그 저주는 내가 받아야 될 저주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살리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써 그 저주를 다 온몸으로 받으신 겁니다. 죄의 무게는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치루어야 될 대가가 있으며, 죄는 받아야 될 저주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는 심각한 권세가 있어서 우리를 결박하고 옥죄는 힘과 압력이 있습니다. 죄를 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든 자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저주 받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살리고 건지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내 죄값을 다 치르시고 내가 받아야 될 저주를 온 몸으로 감당하시고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나를 건지시기 위해서,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친히 감당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데, 죄 없는 어린 양 되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아 저주받은 자로 죽으신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계속 반복되는 저주라는 말을 풀어주는 신비, 바로 “믿음으로 말이암아…”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받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값이 해결되며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며 하나님의 자녀 되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임하며 모든 결박이 풀어지며, 모든 저주가 풀어집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에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어느 나라를 가던 박물관에는 아주 유명한 미술 작품이 있습니다. 너무나 위대한 조각상들이 있습니다. 그 귀한 미술 작품에 내가 뭘 좀 도와준다고 붓을 가지고 가서 덧칠을 하려 한다면 그건 잡혀갈 일이고, 큰일 날 일입니다. 그 미술 작품에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면 좋을 거 같다며 붓을 들고 거기다 덧칠하는 순간 그 모든 미술 작품들은 망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감옥 가는 일이자 절대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박물관에 그 유명한 미술 작품들도 그렇게 덧칠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심지어 감옥 가는 범죄라는 것을 아는데, 많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는 너무 쉽게 덧칠하려고 하고, 얼마나 위험하고 큰 잘못인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래야 된다… 내 느낌과 감정에 이렇다… 나의 입장에선 이렇다… 너무나 쉽게 순전한 십자가 복음에 덧칠하고도 그게 얼마나 복음을 망가뜨리는 일 인줄 모르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 놀라운 십자가 복음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빼는 것을 사도 바울은 허용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십자가 복음 자체가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놀랍기 때문이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예수님이 바로 나를 의롭게 만들어 주신 겁니다. 나를 위해 친히 하나님께 버림받으시고 저주받아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저주 받아 죽으시면서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만 내가 그분 안에 있음으로 의로워지는 겁니다. 반대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는 안 된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나의 죄값을 치르시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시며 내가 받아야 될 저주 하나님께 버림 받음을 친히 다 감당하신 놀라운 역사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늘 내가 죽어야 할 자리였으며, 내가 하나님께 버림 받아 저주받아야 할 자리였음을 잊지 않는 것이 십자가 복음의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덧칠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큰 잘못이며, 얼마나 복음을 망가뜨리는 일인 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순전한 복음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 믿는 것이 너희가 복 받는 비결이라는 것 구원받는 비결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순전한 복음만을 붙들고, 나를 저주에서 건지신 십자가의 은혜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려 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죄사함 받아 하늘의 복을 얻으며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는데 십자가 복음을 뒤로한 채 내가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꾸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두려하는 다른 복음/유사 복음을 향한 경계와 책망을 가감 없이 증언합니다.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이 계속 주장하는 논리는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천국 백성 된 건 맞는데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과 같이 너희의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는 것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구원이 완성된다고 잘못된 가르침으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미혹하고 흔드는 이 다른 복음을 철저히 깨기 위해서 율법과 이스라엘의 뿌리가 되는 조상인 아브라함을 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이방인들은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롭다 한 것이 뭐 때문이라는 겁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여 주신 겁니다.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에 주셨던 이 은혜, 의롭다 칭하며 여겨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거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그렇게 뽑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신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다.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의 진수를 알게 하시니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왜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셨습니까?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이 복의 통로가 되 서 주변 민족들이 이스라엘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이스라엘 백성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그들을 먼저 복을 주시고 그들을 먼저 택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알게 하신 겁니다. 이게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착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다른 민족들을 향하여 복의 통로가 되기 위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벽을 치고 담을 치며 스스로 우월해서 하나님 백성 된 줄 착각하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뽑으신 본질인 복의 근원과 통로됨을 싹 잊어버린 채 그들 스스로의 특권 의식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특별하고 그들이 대단하고 그들의 DNA 달라서 그렇다고 착각한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맡기신 온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먼저 세워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 만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이방인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여기며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 착각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통해 변화되었음에도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인의 혈통으로 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오랜 전통적 이해 가운데 유대 배경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자녀됨은 아브라함의 자녀됨이고,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회심해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 겁니다. 여기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이 복음의 진수를 다시 한번 증언하는 겁니다. 그런 잘못된 가르침, 다른 복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교정하며 복음의 진수를 가르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혈통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것을 육적 아브라함 자손 됨으로,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아브라함 자손 되는 것을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거라고 정확하게 구별합니다. 이방 회심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거는 혈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이란 율법을 지켜서 얻는 보상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가 누구냐면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거예요. 혈통으로 이루어지지도 절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오직 개개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 고백하는 믿음으로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된 놀라운 축복이 임한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피한방울 아브라함과 섞이지 않았지만 혈통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음으로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너희가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 되느냐?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게 아니라 영적 아브라함 자손 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이방 회심자들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 되는 것임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에게,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율법준수나 행위를 절대 조건이나 자격으로 세우면 안된다는 겁니다. 유대교 배경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이방 회심자들에게 율법 준수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을 향하여 자꾸 육적 아브라함 자손이 되게 만드는 잘못된 왜곡과 변질의 다른 복음을 양산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먼저 복을 주시고 그 아브라함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구원을 얻기 위한 복의 통로로 세움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 됨의 본질이 뭔지 모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영적 아브라함 자손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본질적인 복의 목적, 내 주변 민족과 사람들에게 복을 흘려 보내는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잊지 말고 사명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살아가는 것, 이게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자손 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의 목적임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 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진정으로 뭐가 복인지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복이 복인지 모르고 살았는데 우리에게 가장 큰 복이 뭡니까? 이제 우린 영적 아브라함 자손 된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가 흐르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 이것이 제일 큰 복이라 걸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을 알게 되었으니까 더 이상 어리석게 살면 안 된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끝나는 이런 어리석은 인생 되지 말아야 하며, 영적 아브라함 자손 되었는데,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려고 율법의 행위를 통해 조건이나 자격을 찾으려는 이런 어리석은 인생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영적 아브라함 자손된 내가 자꾸 육적 아브라함 자손이 되려고 율법을 지키려 하거나, 행위를 통해 자격과 조건을 얻으려는 모든 어리석은 시도를 내려놓으십시오. 그 비밀을 알았고 그 놀라운 은혜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제 붙들 것은 십자가 복음 하나면 충분한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도 내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붙들고 내가 어떻게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되었는가를 분명히 믿으며, 그 큰 복으로 믿고 누리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내가 바라고 붙드는 것은 오직 십자가 복음이며 나의 믿음 생활은 세월이 지나고 갈수록 의지할 것은 예수 밖에 없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선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리석은 인생은 나 다움의 삶을 살지 못하고 계속 내 인생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귀가 얇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요. 다른 사람의 말에 내가 미혹 당하고 갈대와 같이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하는 사람들은 참 인생이 힘들고 어렵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 성경에 정확하게 뿌리내려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하는데, 하나님 말씀대신 자꾸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거나, 사람들의 말에 내 믿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 미혹을 당하고 신앙 생활이 힘들고 어렵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그대로 가감 없이 표출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어리석도다…” 말할 정도로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겁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분명한 십자가 복음, 순전한 복음을 주신 그대로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른 사도 바울, 이방인의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보냄 받은 메신저로 그는 순전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하나도 빼거나 더하지 그대로 전했고, 그 순전한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성령을 받으며 그 인생이 새롭게 시작하는 놀라운 역사들을 보고 그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을 분명히 듣고 믿고 고백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과하며 모든 것이 변했고, 성령의 충만함 경험했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떠난 지금 미혹의 빠져서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사정없이 믿음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여전히 눈앞에 밝히 보이는데 거짓 선지자들의 꾀임을 당해 갈지자로 흔들리며 복음의 기초에서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어리석은 미혹에 빠지게 만든 그 다른 복음의 핵심은 뭡니까? 갈라디아서에서 계속 강조하지만, 다른 복음/유사복음은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인정하긴 인정하는데, 십자가 복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게 유사복음과 다른 복음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고 구원받는 거 맞고 죄 용서 받는 거 맞는데 그 구원이 충분하지 않기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할례도 행하고 안식일도 준수해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겁니다. 그리스도 십자가만으로 구원이 완성되는 게 아니다….는 가르침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 마음이 흔들려 버리고 사람들의 말에 빠져 어리석음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심정으로 사도 바울은 두 가지의 질문을 그들에게 던집니다. 너희들이 정말 지금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두 가지를 정확하게 스스로 자문해 보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믿음으로서냐? 성령을 받은 것이란 처음으로 그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첫사랑의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죄사함 받은 때, 거듭남의 때를 바로 성령을 받은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니까 너희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 받은 그 모든 은혜가 율법의 행위로냐 아니면, 믿음으로냐…를 묻는 겁니다. 너희가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공로를 쌓고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받은 보상이 구원이냐? 아니면 예수님이 너희 불쌍히 여겨 구원받게 해주고 죄사함 받게 해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느냐?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성도들이 주변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고 사단의 미혹에 휘둘려서 십자가 복음만 붙드는 것이 충분하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십자가 복음 하나만 붙드는 것은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갈대와 같이 흔들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우리에게 선명히 주어졌는데 십자가를 붙들지 않고 계속 내 공로나 행위, 할례나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구원받음의 조건이나 자격을 따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벌써 어리석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성령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를 보여주셨는데, 그게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우리 안에 역사하신 성령 하나님,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이 세상에서 나의 힘과 능력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힘과 능력을 붙들고 살고, 내 뜻과 내 계획이 아닌 보내신 그 뜻을 계획을 이루며 살아가는 사명자로 살아가게 됐는데 그게 다 율법의 행위로서냐, 아니면 믿음으로 받은 거냐…정확하게 자문해보라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도 성령의 열매도 다 성령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내가 한 열심과 노력의 결과나 보상으로 주신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특별한 은사를 받으셨습니까? 그게 여러분들의 열심과 노력의 결과나 보상으로 생각하는 순간 지금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 유사복음에 빠지게 되는 어리석음에 빠진 것입니다. 내가 어떤 공식을 가지고 이렇게 하니까 놀라운 은사를 받았다… 이게 바로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한 다른 복음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주도의 선물일 뿐입니다. 내가 어떻게 함으로써 일어나는 보상이나 대가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경고 말씀은 분명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내려 하지 말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아 예수 이름을 영접해 죄사함을 받은 놀라운 십자가 복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까딱 잘못하면 그 끝에 남는 건 내 율법만 남고, 내 이름과 행위만 남는 육체로 끝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게 어리석은 인생이고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는 안타까운 인생인 겁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값을 치르신 십자가 복음이 이렇게 있는데 왜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려 그러느냐…이런 말도 안 된 일이 너의 인생 결론 되게 하지 말라…강력 경고하는 겁니다. 구약의 여러 왕들 역사는 그 왕 개인의 역사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여러 왕들의 특징이 뭐냐면 바로 용두사미…입니다. 처음에는 신실하고 좋았는데 나중에 가서 완전히 악하고 무너지는 왕, 전반전에는 너무 좋았는데 후반전에 완전히 무너지는 여러 왕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전반전은 성령으로 시작했다 후반전은 육체로 끝나는 거예요. 그 패턴이 계속 반복되며 이스라엘의 역사는 내리막길로 결국 파멸과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 말씀을 비추면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마치는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 원인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도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성령으로 시작했다 육체로 끝나버리는 이런 용두 사미와 같은 그런 어리석은 인생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갈라디아 교회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초대교회와는 비교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며 사단의 미혹에 휘둘려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끝내려고 합니다. 예수 십자가를 부인하는 건 아닌데 그거 하나로 충분하지 않다고 계속 다른 것을 같이 붙으며 순전한 복음을 왜곡 변질 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으면 성령으로 끝내는 인생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렇기에 내가 어떻게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 되었는가….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분명히 믿음으로 이 기준을 명확하게 해야 합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내가 선행을 해서 내가 얻은 공로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일 뿐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겁니다. 내가 철저하게 하늘의 능력과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싸움, 나를 끊임없이 내려놓으며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십자가 복음만을 붙드는 싸움을 벌이며 성령으로 시작한 나의 믿음 생활이 성령으로 끝나고 마무리 되도록 그 처절한 싸움을 오늘도 벌이십시오. 이것을 붙들고 오늘도 싸워가는 삶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내 신앙 생활이 성령으로 끝나기를 사모하며, 내 인생 끝에 남는 것은 구속한 주만 보이는 역사, 십자가 복음 하나만 남는 그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의 결론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믿고 붙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와 능력인지 고백하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율법과 복음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붙드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불교와 무속 종교의 영향을 받아서 자력 구원에 대해서 끊임없이 끌리는 그런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력 구원이란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함으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내가 구원받을 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이룸으로써 구원에 대한 자격과 조건을 얻으려 하는 이 모든 것을 율법에 대해서 내가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구원받을 만한 단계까지 스스로 이루어가는 계단식의 구원을 우리는 천성적으로 좋아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길 좋아하고 구원의 여정을 계단과 같이 나누길 좋아해서 고수와 하수를 나누길 좋아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계속 자력 구원에 대해서 끊임없이 끌리고 끊임없이 그걸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가야 될 길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성경은 율법에 대해서 내가 의롭게 될 만큼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선언한다는데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분명한 선언인데, 성경 말씀보다 내 느낌과 내 생각과 내 견해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여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해 내가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서 구원받을 만하게 되려고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요구를 이루려 하는 삶에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여인이 남편의 생전에는 남편의 법에 매인바 되지만 남편이 죽게 에서 벗어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율법이라는 남편이 죽으면 그 율법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나의 옛사람, 즉 율법의 요구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는 그 율법에 대해서 나의 옛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내가 율법의 행위로 율법의 그 조건을 다 지켜 끊임없이 무엇을 이루려 했던 그 율법에 대해서 내가 죽지 아니하면 복음에 대해서 살 수 없는 겁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마음속으로 무엇을 요구하는가 하면 마치 간음 현장에서 끌려온 여인을 돌로 치라고 외쳤던 사람들의 함성과 같이 끈임없이 네가 구원받을 만한 자가 되고 구원받을 조건을 네가 스스로 증명하라고 미혹합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나서 예수님을 판 게 잘못 됬다는 것을 깨닫고 그 돈을 다시 들고 옵니다. 그때 종교지도자들이 유다에게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그 죄는 네가 감당하라는 겁니다…그 죄는 네 책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돈을 다 던져버리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게 되는 것, 그게 율법의 요구라는 겁니다. 율법은 네가 진 죄를 네가 스스로 책임지고 해결하라는 압박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율법의 요구는 끊임없이 나를 돌로 쳐야 되고 내가 책임져 감당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겁니다. 율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죄를 깨우쳐 주는 법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죄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율법은 죄를 깨우치게 하고 죄를 드러나게 합니다. 그런데 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는 것이죠. 율법은 내가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가 깨닫는 절망의 도구인 거지 그 율법을 내가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 하는 사다리로 생각하게 된다면 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해서 죽지 아니하면 그 안에서 소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돌아가셨다는 것을 우리는 정확하게 내 삶과 어떤 연관이 있는 분명히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2천년 전에 죽으신 그 십자가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게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냥 피상적으로 저기서 돌아가셨구나…가 아니라 내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되는 겁니다. 율법에 대해서 의를 이루려 하는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마음에 고백하는 건, 저 십자가의 자리가 내가 죽을 자리였다는 것을, 율법의 요구가 죽어야 되는 자리였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내 대신에 예수님이 죽으셨고, 율법의 요구가 예수님과 함께 죽으신 겁니다. 네가 지은 죄는 네가 스스로 책임지라는 율법의 요구가 십자가와 함께 죽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것이고, 율법의 요구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NIBC, not I but Christ의 삶,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이 놀라운 삶이 펼쳐지는 겁니다. 나를 주어로 내가 무엇을 이루려 했던 그 모든 것들은 다 죽고 이제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 되셔서 사시는 겁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건, 이제 내가 믿는 구석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죠. 나를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내가 행한 일을 믿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을 믿으며 나의 사랑을 믿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만을 믿는 믿음입니다. 나는 율법에 대해서, 율법의 요구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은 자로 살아가십시오. 십자가에서 나의 옛 자가 죽었음을 철저히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어 살게 됨을 철저히 고백하십시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믿고 고백해야만 100% 십자가의 은혜로만 내가 구원받았음을 믿는 십자가를 통과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하는 미혹에 흔들려 옛날로 돌아가려 한다면, 율법의 요구를 통하여 내가 구원받을 만하게 되고 구원과 자격의 조건을 나로부터 찾으려 한다면 여러분들을 위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헛되 죽으신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가 선명하게 복음의 능력으로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나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고요 나의 그 절망의 모습은 오직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살아가게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통과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은 사망에 속해 있던 나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으로 다시 위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철저히 고백하십시오. 이 세상에 매어 있고 죄에 매어 있고, 죄의 결과와 율법에 매어 사망과 죽음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건져 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우리에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매며 십자가에 매어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 선명한 십자가 복음을 붙들고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열심이나 정성, 헌신의 깊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과 내용입니다. 내 믿음의 열심이나 정성, 헌신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점검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신앙생활의 열심과 정성과 바른 태도는 다 이미 주신 주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의 반응일 뿐이지 그게 절대 자격이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신경에서 배웠던 분명한 신앙 고백이었고 우리 믿음의 대상 되신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순전한 복음에 대해서 선명히 붙들 것을 강조하고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흔들리지 않고 분별하며 살아야 되는 것을 갈라디아 교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우리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나를 의롭게 만드는 비결, 구원의 선물을 받는 비결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기에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십자가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 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것은 나를 믿는 삶에서 예수님을 믿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고, 나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며 오직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는 삶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켜 구원 받을 만하게 자격을 삼는 자력 구원을 철저히 포기한채 나는 철저히외부로부터 다른 분으로부터 건짐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나를 건져주신 예수님만 붙드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철저히 내려 놓아야 하는 자력 구원과 예수님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타력구원에 대해 정확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선언합니다.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어야 천국에 가고, 죄가 해결돼야 문제가 해결되야 천국에 갑니다. 죽음 이후에 심판이 아닌 영생으로 가는 비결은 나의 죄 문제가 해결돼야 되는데 많은 자력 구원의 종교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킴으로 내가 구원받을 만하게 의로울 만하게 되는 내가 그 단계를 스스로 올라가는 것을 목적으로 추구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쓸데 없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내가 나를 의롭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복음의 출발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율법의 행위로도 내가 나를 의롭게 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스스로 내가 구원받을 만하게 의로울 만하게 율법을 지켜서 나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상태 영적 상태는 물에 빠져 익사하기 일보 직전이기에 내가 아무리 허우적대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점점 물에 빠져들어갈 뿐인 절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인간도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나의 영적 상태에 대한 철저한 절망의 상태를 인식하고 자각하여야, 나에게 구원은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되는 상태라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사는 비결입니다. 내 힘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오는 힘을 통해 내가 건짐을 받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오직 나를 건져 주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임을 믿음으로 영접해 구원의 선물을 얻게 되고 의롭다 함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전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주신 선물입니다.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가 바로 십자가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구원에 있어 나를 자랑할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고 내가 무엇을 이루었고 내 열심이 무언가를 자격과 조건을 만든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를 붙드는 것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며 자력 구원을 철저히 포기하고 타력구원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우리 율법의 행위로서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붙드는 게 순전한 복음으로 내가 의로워지고 구원을 받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내가 믿음으로 받아 영접하는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스스로 자격과 조건을 얻으려는 내 행위를 철저히 포기한 채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믿음의 대상으로 붙들고 나아가는 삶, 그게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걸 예수님의 의의 옷을 입는다, 그분의 보혈의 아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의롭다고 인정받고 천국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율법의 행위로서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 갈 수 있는 길임을 고백하는 다른 표현입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내가 선명히 붙들고 예수님만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붙들고 그분을 구세주로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며 엎드리는 삶, 그것이 바로 순전한 복음에 정확하게 붙들려 살아가는 주의 백성입니다. 이것이 분명해야 하며 이것이 흔들리지 말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결론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꾸 옛날로 돌아가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자꾸 내가 무언가를 해서 나를 구원받을 만하게 만들고,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만들려는 모든 시도를 다 무너 뜨러야 한다는 겁니다. 내 열심과 정성과 노력 자체가 내가 구원을 위한 조건과 자격이 되려 한다면, 내가 구원받을 만하는 자가 되는 조건이 된다면 그거 다 허물어 된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율법을 지킴으로 내가 의로워지고 구원받을 만하고 구원받을 조건을 이루려 하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분명하지 않으면 그 분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선물로 받은 것임을 철저히 믿는, 그 분명한 기초 위에 내 신앙이 서지 않으면, 내 믿음의 열심과 정성은 다 헛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첫 단추를 제대로 잘 껴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어떻게 의로워지고 내 죄가 어떻게 용서 받았으며,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습니까? 이걸 분명히 하는 게 믿음 생활입니다. 이게 분명하지 아니하면 저와 여러분들은 옛날로 돌아간다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선물을 은혜로 받아서 죄 용서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으며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나를 믿는 게 아니라 그 선물 주신 예수님 만을 철저히 믿는 겁니다. 나의 노력을 믿는 게 아니라 나의 열심과 정성을 믿는 게 아니라, 내 믿음의 대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철저히 믿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유일하게 믿고 붙드는 대상이 예수 그리스도만 되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철저히 절망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만 소망을 두는 겁니다. 신앙의 근거를 나에게 두지 않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에 두는 것, 이 땅에 두지 않고 하늘에 두는 것, 행위나 껍데기에 두지 않고 내면의 중심에 두는 것, 이것이 우리 일상 속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고백 되기를 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순전한 복음에 사로잡혀 구원의 선물이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선물임을 철저히 믿고 붙들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충분함을 믿으며 나의 믿음의 대상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베드로를 사도 바울이 책망하는 장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은 정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 베드로의 위상이라 것은 거의 뭐 지금 교황이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중요했고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베드로의 신앙고백 이에 주님의 교회를 세운다고 주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사도 베드로를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라고 해고 과언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가장 큰 어른이자 기둥과 같은 상징적 존재가 바로 사도 베드로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바울이, 그것도 살인자라는 과거가 있는 바울이 이렇게 상징적 존재인 사도 베드로에게 감히 말할 수 없는 책망을 그렇게 담대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를 향한 책망은 그 당시 상식으로 봐도 문화도 봐도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 대선배를 신참으로 막 들어온 바울이 야단을 치고 책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말도 안되는 일이고 겁을 완전히 상실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예의도 없고 경우도 없고 자기 파악도 안 되는 이런 개념 없는 책망을 감히 사도 베드로에게 했다고 비난 받을 수 있음에도 이런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더라도 사도 베드로에게 말할 것을 말해야 되는 거룩한 부담감이 사도 바울에게 가득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도 베드로에게 그렇게 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걸고 공개적인 책망을 해야 될 정도로 큰 문제였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상식과 문화와 경우를 깨면서까지 사도 바울이 사도 베드로를 책망한 그 내용은 무엇이며 원인이 무엇입니까?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선교 기지로 세워진 안디옥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있던 사도 베드로가 이방 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잘 감당해서 크게 부흥하고 있었던 이방인의 첫 교회인 안디옥 교회를 심방 차 방문한 겁니다. 안디옥 교회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잘 부흥되고 탄탄하게 믿음의 길을 지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교회 안에 이방인으로서 회심한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의 문화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없었는데 사도 베드로는 기쁜 마음에 안디옥교회 성도들인 이방 성도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겁니다. 그러다가 야고보와 유대교 배경의 다른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니까 그들을 보고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다가 사도 베드로가 회심한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 교제하는 데서 일어나 자리를 떠나서 물러간 것입니다. 이 부분을 사도바울은 지금 강력하게 책망하고 지적하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어른이자 상징적 인물이기에 그가 하는 어떤 것들도 다 초대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방인들의 구원의 문제는 사도행전의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되었기에 첫번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이미 일단락되었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안식일 준수와 음식 준수와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계속 내걸기 시작한 것이 큰 문제가 되어 사도행전 15장을 보게 되면 예루살렘 공의회가 열립니다. 그 모임에서 베드로 사도와 함께 여러 사도들이 공식적으로 결정한 게 뭐냐면 이방인들에게 유대인들처럼 할례나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한 이 구원에 대해서 자꾸 덧씌우고 물타기를 하려는 시도들을 공식적으로 멈추게 한 역사적 결정이었고 이 결정을 주도한 자가 바로 사도 베드로였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 이나 짐승의 보자기가 내려 오는 환상을 보여주시며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고 깨끗한 것이며 그것이 신앙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직접 알려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법적으로 자유함을 선포하고 환상으로 세 번이나 보여주시며 그를 교정해 주셨는데 정작 사도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에 와서 이방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식사교제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 겁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주님의 몸된 교회 한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식탁 교제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같이 먹던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떠나버리게 되고 바나바 또한 그에게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말로는 할례와 안식일, 음식 규례를 안 지켜도 됐다고 공포를 했지만, 환상으로 분명히 가르쳐 주시며 교정하셨지만, 사도 베드로의 일상의 삶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함께 식사 교제하는 것도 안되게 되는 이 이중적인 모습의 잣대를 지금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경우 없다는 소리를 듣고 비난 받을 것이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사도 베드로를 강력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대신 사람들 눈치 보고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어 있는 사도 베드로를 향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아직도 복음 안에서 자유 하지 못해서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여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에 교제하는 것도 피하고, 그리스도 안에 하나된 공동체에서 남의 눈치를 보고 슬금슬금 피할 정도로 묶여 있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왜 억지로 이방인들에게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 그러느냐고 단호한 태도를 가지고 공개 석상에서 지적하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깊이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첫째로는 초대교회 거장이자 큰 기둥이었던 사도 베드로도 이렇게 연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가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복음의 진리를 정확하게 선포했으며 환상을 통해 그에게 교정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해 사람들에게서 자유하지 못하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통해 겸손하게 우리의 연약함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였고 기둥이었지만 동시에 여전히 부족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 인생 또한 그런 모습임은 겸손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도 베드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 큰 사도였다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사도 바울과 같은 자가 사도 베드로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공개적으로 책망하면 그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찍힐 대로 찍혀서 이미 손을 봤을 거고 그 공동체에서는 이미 끝이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사도바울의 그 경우 없어 보이는 책망에도 불구하고, 그를 찍어내지 아니하고 그를 품고 같이 동역하며 나아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높은 지위에 상징적 인물이었던 사도 베드로는 비난과 책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통큰 마음과 반대자를 품을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조직을 살리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 이런 세상의 구조가 아니라 어디 너 같은 자가 나에게 지적을 하고 있냐고 찍어내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그 진정한 용기와 분명한 동기가 하나님에게서 나왔을 알고 사도 베드로는 사도 바울을 품고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나아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대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며 통 크게 그 책망을 받아들이고 나아가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사도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의 눈치도 보지 않고 주님의 뜻이 맞다면 그것을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그런 대담함이 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물이자 거성인 사도 베드로를 수많은 비난을 감수하고 라도 책망한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복음 안의 자유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사는 대신 사람들에게 매여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사도 바울의 이 책망, 예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아가지 못하는가…반성하며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렸다면 옛날로 돌아가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참 자유는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에게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며 하나님 외에는 어떤 누구에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통해 누려집니다. 나의 복음 안에서 정체성이 주님 안에서 변화된 자유임을 깨달으며, 율법과 사람들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풍성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음에는 내용 자체인 메시지와 전하는 메신저가 있습니다. 언제나 변함 없는 복음의 메시지가 메신저를 통하는 어떻게 잘 전달 되느냐에 따라 은혜의 복음이 선명한 능력으로 전달되기도 하고 왜곡과 변질이 되기도 합니다. 순전한 복음 진짜 복음을 있는 그대로 메신저가 잘 전할 때 놀라운 은혜가 되며 교회가 복음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반대로 복음을 잘 전하지 않고 복음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일, 복음을 임의적으로 덧칠하거나 바꾸는 이런 일들이 늘 문제가 되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 비판하고 경계하고 있는 다른 복음, 유사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의 메세지가 변함없이 분명한데 그것을 전하는 메신저들로 말미암아 원래 복음의 의미가 왜곡되고 변질될 때 성도들의 영혼을 죽이는 악한 일이 된다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의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보혈로 충분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참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게 만들며, 다른 것들을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어 이방인들의 발목을 잡으려 하는 유사복음/다른 복음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력한자들은 그 당시에 이미 예루살렘에 있는 이름 있는 사람들, 즉 초대교회에서 먼저 교회에 나와 믿고 있던 유대 기독교인들입니다. 교회에 먼저 터를 잡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유력한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외모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가 아니라 중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분명한 믿음 대신에 먼저 온 유력한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입니다. 참 자유함 가운데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 생활을 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 말 대로 해야 되나 이 사람 말 대로 해야 하나….계속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유함을 주시는 복음이 자꾸 속박 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생활이란 내가 외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겉모습의 신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끊임 없이 겉모습으로 보이는 행위가 신앙의 잣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는 분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이방인 회심자들이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정결 음식을 지키는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되는 것을 구원받기 위한 조건과 자격으로 만드는 모든 것을 경계하면서 신앙의 본질은 결국 겉으로 보이는 껍데기나 외모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이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일날 예배 드리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헌금 들이고 선교하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결정 되는 게 아니라 본질적으로 내 안의 중심에 예수 생명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내가 온전히 예수 이름 예수 보혈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이것이 신앙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이 본질을 벗어나지 않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또한 이 본질과 중심을 붙드는 싸움은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옴을 분명히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의 인생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심이 분명하다면, 내 인생의 가치는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에 부합되게 나아갈 때 내 인생의 참 가치와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마이크는 목소리를 증폭하기 위해 만든 것이죠. 그래서 마이크를 마이크의 용도대로 잘 사용할 때 마이크라는 물건의 가치가 드러나듯이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기에 그 하나님의 만드신 뜻대로 내 인생이 나아갈 때 나의 인생에는 가치와 의미가 발견된다는 겁니다. 내 인생에는 나를 만드신 분의 뜻이 분명히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베드로 사도를 통해 맡기신 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잘 전하는 사명을, 사도바울에게 맡기신 복음은 이방인들을 위해 잘 전하는 사명을 주셨음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진리 가운데 자유하는 것은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맡긴 사명과 일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을 때 하나님의 만드신 목적대로 잘 사용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로서, 맡기신 그 사명과 일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 사명과 일을 통하여 나의 견해와 입장이 아닌 오직 복음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잘 전달하는데 집중하게 될 수 있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발견한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그 사명과 부르심에서 분명히 발견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무할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나를 만드셨음을 깨닫고, 거기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사명과 뜻에 내가 조율되어 나아갈 때 나의 삶에 가치과 의미가 발견됨을 사도바울은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만드신 분의 뜻에 맞게 내가 나아갈 때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비교할 필요도 없고 서로 경쟁할 필요도 없고 말씀 가운데 하나님이 부르신 그 사명을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라는 겁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바울의 맡기신 사명이 다르듯, 부르신 시간과 부르신 대상이 다르고 그것을 통하여 비교할 필요도 경쟁할 필요도 없이 각각 하나님께서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가치는 그냥 돈 버는데 있는 게 아니라 부름을 받은 데 있음을, 그 부름에 순종하여 나아갈 때 나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소명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 부르심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내 능력과 힘에 맞는 일 대신 하늘의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감당한 힘과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듯,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간 성도로 살아가게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성도들을 각각에게 맡기신 뜻에 조율되어 살아갈 때, 만드신 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통해 내 삶의 가치와 의미가 발견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뜻 가운데 내가 서 있음을 분명히 알 때 내 인생은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인생의 가치와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인 그 부르심에 나의 인생이 조율될 때 진정으로 발견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주님 안에서 진정으로 발견하게 될 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 은혜 가운데 남과 비교하지 않으며 당당하게 살아가게 되며, 내 삶이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내 주변 사람과 비교를 통하여 가치와 의미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만드신 분의 뜻이 이루어짐을 통해 가치와 의미가 발견됨을 잊지 마십시오. 오직 내가 주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를 깨달으며 주님이 부르신 그 길을 당당하게 흔들리지 않으며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주는 순전한 복음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참 복음을 제대로 알고 누리는 것, 유사 복음과 다른 복음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것, 그래서 성도들이 다른 복음에 빠지지 않고 따라가지 않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매우 중요한 복음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참된 복음을 계속 알고 그 순전한 복음 위에 굳게 서기 위해선 말씀을 기준으로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을 구별하고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순전한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인생을 걸고 이방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새생명을 전하는데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유함으로 어떤 조건도 자격도 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방 땅에 수많은 회심자들이 나오며 수많은 새생명들이 태어나 예수 복음을 따르는 신자가 되었는데 문제는 여전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초대교회는 유대교 방식으로 복음을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복음으로 주신 참 자유를 누리는 대신 거기에 율법이라는 큰 짐을 이방 회심자들에게 지우려 하는 다른 복음, 유사복음에 젖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회심하여 모든 것이 변한 후에 여러 번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번에 올라오는 예루살렘에 올라온 목적은 바로 이 순전한 복음과 율법의 관계는 더 정확히 하며 사도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해결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문제가 갈라디아 교회뿐 아니라 이방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이기에 혼자 올라온 것이 아니라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올라왔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붙들고 내가 나의 인생을 드리면 충분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 가운데 전해졌는데, 거기에 자꾸 유대인의 방식인 할례를 받게 하거나 안식일을 지키게 하는 이런 짐들을 계속 지우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 말은 헬라인에게 즉 이방인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 기독교인들은 디도와 같은 이방 회심자들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려 압박하는데, 할례를 받지 않아도 상관 없다는 것을 디도를 함께 데려옴으로서 증거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이기 때문에 외적으로 유대인 방식의 할례를 받지 않아도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받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항상 가짜는 가만히 들어오고 다른 복음은 유사 복음도, 이단과 사이비도 가만히 들어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 분명히 알곡만 심었는데 자고 나니까 가만히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 복음을 부정하지 않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해 분명히 고백합니다. 문제는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는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방식으로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이렇게 다른 복음을 주장하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많았든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 회심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거니까 당연히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준수해 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며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압박하며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하나로 충분한데 그 충분한 구원 대신에 자꾸 유대인 방식으로 믿으라고 이방인들을 압박하는 겁니다. 문화적으로 유대인의 방식으로 믿어야 된다고 이렇게 압력을 주는 거짓 형제들, 이게 갈라디아 교회에는 매우 중요한 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흔들며 짐을 지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율법의 요구를 구원의 조건으로 만드는 이런 일들이 가만히 들어온 유사 복음이고 가짜 복음이라는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오직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이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복음을 주셨는데, 이 순전한 복음을 내려놓고 종과 같이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고 다른 복음으로 성도들을 걸려 넘어지게 한다고 경고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의 열심과 믿음의 정성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대상과 믿음의 내용이 나의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이 있고 얼마나 정성을 가지고 헌신하는가는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고요 첫번째로 중요한 것은 그 열심과 헌신이 누구를 향한 믿음인가? 그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여러분들의 인생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주신 복음은 뭡니까? 우리의 믿음과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게 복음의 진리 핵심입니다. 그 복음의 진리에 정확하게 붙들려 있어서 어떤 다른 것도 복음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정확하게 믿으며 억지로 다른 짐을 지우면 안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자유를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고 앞으로도 달려갈 것임을 증언합니다. 그렇기에 내가 달음질 한 것과 내가 달음질 할 것이 헛되지 않게 하는 삶을 사모한다고 고백합니다. 과연 나의 인생은 무엇을 위해 달음질 해왔고 달음질 할 것인가…우리에게 찔러 주시는 말씀으로 주시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무엇을 위해 달려왔으며 앞으로 무엇을 위해 달려가실 인생입니까? 저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것이 변한 성도라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내가 믿는 신념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나를 달려가게 만드는 기준과 운동력이 되길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내가 무엇을 위해 달리는 인생인가 대한 분명한 해답이 있는 자임을 고백하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달려온 여정도 앞으로 달려갈 여정도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복음으로 주신 구원의 자유함을 누리며, 순전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예수님만 믿고 나의 삶을 경주하겠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살아가는 자가 바로 구원받은 자의 자유함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기 위해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복종하지 않고 스며들지 않고 경계하고 돌아서야 함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열심과 겉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헷갈리지 않아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열심이나 겉으로 보이는 행위나 방식이 우리에게 구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과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구원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믿음의 근거를 찾고 구원의 근거를 찾는 주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거 외에는 어떤 것도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두지 않는 순전한 복음 가운데 우리가 확실히 서 있을 때 바로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나 지금 이 시대에나 계속해서 유사 복음과 다른 복음이 조용히 스며들어 성도들을 미혹하고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참된 복음을 제대로 알고 다른 복음을 구별하고 분별하여 엉뚱한 가짜를 따라가지 않으며 순전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서 있기를 사모하십시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순전한 복음이 사도 바울이 달음질 했던 본질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달려가야 될 본질임을 믿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참 자유함의 복음, 그 순전한 복음의 진리 가운데 굳건히 서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의 확성기와 같은 말씀으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친밀감을 누리며, 내적으로 충분한 은혜와 준비를 한 후, 삼년 만에 드디어 이방인의 사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만남을 통하여 그의 내면을 다진 후에 3년만에 이제 쓰임 받기 위해 초대교회의 본산 예루살렘에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로 이루어진 사도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 사도들과 초대 교회들이 사도바울을 향하여 호의적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동지였던 스데반 집사를 쳐죽인 살인자였다는 삐딱한 시선과 사도 바울이 정말 변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합쳐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살인자라는 과거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이 쓰실 수 있는가에 대한 불만과 여러 색안경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야고보 사도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와 그 지역 성도들에게는 변화된 사도바울이 환영 받지 못하는 자였다는 겁니다.
그것 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얼마 잊지 못하고 떠나야만 됐습니다 오늘 말씀 21절을 보게 되면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라고 증언하는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이방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변하여 복음의 증인이 된 사도 바울을 배신자로 여기고 죽이려 했기 때문에 피신 가고 도망간 것이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가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결과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핍박 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자가 되었고, 그리고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환영 받지 못하는 이런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낙심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내적 준비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그가 변화되어 분명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증인인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려고 사도가 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의지해 사도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실망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대쪽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유대인들을 통해 배신자로 낙인 찍혀 살해 위협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끊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보름 동안 있으면서 사도들에게 별로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살해 위협 가운데 시리아 지역으로 피신 했을 때도,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지는 사명자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부름 받음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 지역으로 피신 갔을 때 사도 바울을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진이 없었으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생겼고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한 변화된 이야기는 이방 땅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그렇게 핍박하던 자가 변하여 복음을 전한다…. 우리를 죽이려 했던 그가 이제는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 돼서 우리보다 더 앞장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이 이미 퍼져 있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얼굴은 모르는데 그의 변화된 이야기를 통해 신앙에 힘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방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보게 된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이 봤을 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구나…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신 것이구나….확신하는 간증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사람들과의 만남을 다 멀리 하고, 예수님만을 만나고 예수님과 친밀함을 가지며 웅크리고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그 사이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며 사도 바울의 변화된 인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알게 하셨고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게 하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분명하게 변한 나 같은 인생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사용되는구나…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지 자발적으로 가든지 비자발적으로 가든지 좋은 일로 가든지 슬픈 일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 께서 보내신 그 사명, 즉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데 올인해야 되겠구나…라는 분명한 외적 증거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향하여 나의 인생을 던질 때 사람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자도 아니고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는 자도 아닌, 오직 십자가 은혜에 매여 주님을 바라보고 이 사명을 감당하리라…분명한 다짐을 하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의 송두리째 변화된 인생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했고, 사람들에게 핍박 받고 살해의 위협까지 당하는 오해와 억울함이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사도 바울이 바라보고 붙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명히 붙들고 있기에 사람들이 삐딱하게 말하고 색안경으로 평가하고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들이, 마음에 멍이나 상처로 남지 않고 나에게 흘러가는 물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도 기적과 같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말로 주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생명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도의 방법은 나의 변화된 삶, 나의 고백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도 내 삶의 일상도 다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주어가 아닌 예수님이 주어 인생으로 변화된 나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살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 생명의 길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을 우리는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에 오늘도 나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 계신 예수를 전하는 삶, 예수 생명을 선명히 전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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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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