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아라비아에서 하나님의 확성기와 같은 말씀으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친밀감을 누리며, 내적으로 충분한 은혜와 준비를 한 후, 삼년 만에 드디어 이방인의 사도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일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만남을 통하여 그의 내면을 다진 후에 3년만에 이제 쓰임 받기 위해 초대교회의 본산 예루살렘에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로 이루어진 사도들을 만나러 갔는데 그 사도들과 초대 교회들이 사도바울을 향하여 호의적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합니다. 왜냐면 예루살렘의 가장 중요한 동지였던 스데반 집사를 쳐죽인 살인자였다는 삐딱한 시선과 사도 바울이 정말 변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합쳐서 거리를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렇게 살인자라는 과거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예수님이 쓰실 수 있는가에 대한 불만과 여러 색안경이 사도 바울을 그렇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큰 마음 먹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지만 야고보 사도 외에는 다른 사도들을 만나 보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와 그 지역 성도들에게는 변화된 사도바울이 환영 받지 못하는 자였다는 겁니다.
그것 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얼마 잊지 못하고 떠나야만 됐습니다 오늘 말씀 21절을 보게 되면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라고 증언하는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이방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간 게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모든 것이 변하여 복음의 증인이 된 사도 바울을 배신자로 여기고 죽이려 했기 때문에 피신 가고 도망간 것이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가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새 사람이 된 결과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배신자로 핍박 받고 목숨이 위태로운 자가 되었고, 그리고 예루살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환영 받지 못하는 이런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낙심하지 않게 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깊은 교제와 내적 준비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그가 변화되어 분명한 사명으로 부름 받은 복음의 증인인 사도바울은 어디를 가나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은 증거가 되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려고 사도가 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의지해 사도가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실망할 필요도, 낙심할 필요도 없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대쪽 같은 믿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에 어려움을 당할 때도, 유대인들을 통해 배신자로 낙인 찍혀 살해 위협을 받고 도망 다니는 신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를 가나 끊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보름 동안 있으면서 사도들에게 별로 함께하고 싶어 하지 않는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도망자 신세가 되어 살해 위협 가운데 시리아 지역으로 피신 했을 때도, 그가 머무는 곳에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만 전해지는 사명자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명하게 전하는 부름 받음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방 지역으로 피신 갔을 때 사도 바울을 얼굴을 보고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사진이 없었으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생겼고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에 대한 변화된 이야기는 이방 땅에서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그렇게 핍박하던 자가 변하여 복음을 전한다…. 우리를 죽이려 했던 그가 이제는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 돼서 우리보다 더 앞장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다…는 이 놀라운 소식이 이미 퍼져 있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얼굴은 모르는데 그의 변화된 이야기를 통해 신앙에 힘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방 지역 교회의 성도들을 보게 된 겁니다. 이 모든 것이 사도 바울이 봤을 때 뭐냐면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는구나…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하신 것이구나….확신하는 간증이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3년 동안 사람들과의 만남을 다 멀리 하고, 예수님만을 만나고 예수님과 친밀함을 가지며 웅크리고 그의 내면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그 사이에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며 사도 바울의 변화된 인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심을 알게 하셨고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게 하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분명하게 변한 나 같은 인생을 통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며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사용되는구나…사도 바울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들을 기대하지 않으며 어디를 가든지 자발적으로 가든지 비자발적으로 가든지 좋은 일로 가든지 슬픈 일을 가든지 어디를 가든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 께서 보내신 그 사명, 즉 이방인의 사도로서 예수 복음을 전하는데 올인해야 되겠구나…라는 분명한 외적 증거가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주님을 향하여 나의 인생을 던질 때 사람들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자도 아니고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는 자도 아닌, 오직 십자가 은혜에 매여 주님을 바라보고 이 사명을 감당하리라…분명한 다짐을 하게 된 겁니다. 사도 바울의 송두리째 변화된 인생은 사람들에게 환영 받지 못했고, 사람들에게 색안경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했고, 사람들에게 핍박 받고 살해의 위협까지 당하는 오해와 억울함이 가득하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들이 그에게 문제되지 않았던 것은 사도 바울이 바라보고 붙들었던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명히 붙들고 있기에 사람들이 삐딱하게 말하고 색안경으로 평가하고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들이, 마음에 멍이나 상처로 남지 않고 나에게 흘러가는 물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 놀라운 역사가 우리 삶에도 기적과 같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성도로서 우리는 말로 주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 생명을 나눠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전도의 방법은 나의 변화된 삶, 나의 고백 자체가 바로 그들에게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도도 내 삶의 일상도 다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내가 주어가 아닌 예수님이 주어 인생으로 변화된 나의 삶을 통하여, 이 세상을 살지만 천국을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것을 주목하는 나의 삶을 통하여, 예수 생명의 길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그 길을 우리는 순종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에 오늘도 나는 절망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살아 계신 예수를 전하는 삶, 예수 생명을 선명히 전하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에서 늘 좋지 않은 삐딱한 시선으로 오해 받고 꼬리표를 달고 다니듯 비판 받고 지냈는데,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이 어떻게 사도가 될 수 있느냐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또 하나는 그의 과거, 즉 초대교회의 신실한 집사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살인자라는 이 꼬리표가 그에게 늘 달렸습니다. 그의 과거 때문에 사도 바울에 대해서 평생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우리 앞에 나와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팔짱 끼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사도바울을 괴롭혔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부끄럽고 내놓고 싶지 않은 과거를 나누면서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는지를 진솔하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이 good news라는 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상태가 얼마나 처절한 절망이었는지에 대한 bad news를 철저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Bad News를 모르는 상태로 good news를 알 수는 없는 겁니다. 그 꺼내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의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의 Bad News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모든 것이 변한 Good News를 간증과 같이 전하는 고백이 오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진정한 복된 소식인 십자가 복음을 증언하기 위해, 그의 숨기고 싶은 과거, 정말 하나님께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그 부끄러운 과거를 진솔하게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그의 예전의 모습을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하려는 데 앞장선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그의 유대교를 향한 열심은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고 전통에 대한 열심이 대단했습니다. 종교에 매우 열심인 사람이었는데, 문제는 그 열심은 바른 열심이 아니라 잘못된 열심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제대로 되지 않은 종교적 열심은 사람들을 죽이는 열심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덤덤하게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드러내면서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바라보며 저들은 우리 조상들이 지켜온 전통을 무너뜨리는 나쁜 사람들, 죽여야 될 사람들도 프레임을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의 이름으로 열심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자가 바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사도 바울이었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일 때 사울이 죄책감이 있었겠습니까? 돌로 쳐 죽겠는데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어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얼굴이 천사같이 변했던 스데반 집사를 죽이면서 눈 깜짝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게 잘못된 종교에 열심히 가져오는 폐해라는 겁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이는데 죄책감은 커녕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자가 바로 예수님 만나기 전 사울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열심이 본질을 이탈하게 되면 항상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됩니다. 그런 부작용은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고, 부끄럽게도 기독교 역사에도 있었고 다른 여러 종교에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현재에는 여러 이슬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종교 폭력들이 다 그런 것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의 열심이 왜곡되고 변질되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되며 죽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이 시대는 돈과 맘몬이 신의 자리에 올라간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특정 종교를 갖지 않지만 돈을 신으로 섬기면서 돈을 위해서는 사람을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이 종교의 자리에 올라가서, 돈을 얻는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도 동일한 이치입니다. 이처럼 잘못된 종교적 열성과 열심과 사람들을 살리는 도구 대신, 사람들을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처절하게 소망 없던 살인자, 잘못된 종교 열심에 사로잡혀 있던 그에게 찾아온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복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알기도 전에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를 택하여 부르셨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지만 이미 하나님의 은혜는 그에게 있었다는 겁니다. 자유게 하시고 의롭게 하실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갈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그의 삶에 이미 씨앗으로 뿌리고 계셨다는 겁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아주 유명한 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이게 복음의 핵심이자 사도 바울의 산 간증인 것입니다. 여전히 죄에 뒹굴고 있고 예수님을 찾지도 않는데 구원의 선물을 먼저 완성하신 겁니다. 나를 어머니의 태중에서 먼저 정하시고 나를 구별하 이 사명을 위해 이미 준비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게 됐고 그걸 통하여 모든 것이 뒤집어지고 바뀌면서 인생을 거는 한 가지 복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을 그가 온몸으로 깨닫게 된 겁니다. 이방인의 사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거에 대한 분명한 부르심의 확신이 생긴 겁니다. 나의 그 부끄러운 과거를 다 덮고도 넘는 주님의 흘러 넘치는 은혜가 나에게 임했기에, 예수 보혈 붙들고 완전히 뒤집어진 인생이기에, 내 남은 삶은 주님께서 부르신 사명, 바로 이방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인생을 걸고 올인하게 된 겁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있었던 뜻과 계획이며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는데 내가 부름 받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 모든 것이 변하고,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사명을 받은 후 한 첫번째 일이 무엇이었는가를 마음에 새기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당장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뛰어 나가도 될 사람이 됐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당장 가서 일하고 사역하고 그래야 될 거 같은데, 이방인들을 찾아가 내가 이렇게 변화되었다고 간증하며 뛰어 나갔어야 되는데 사도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는 바나바가 데려올 때까지 3년간 아라비아와 다소에 머물며 웅크리고 철저하고도 친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광야에서 만나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광야를 비자발적으로 들어갑니다. 어쩌다 보니까 내가 광야로 떠밀려 갑니다. 이런 비자발적인 광야 생활에는 늘 불편과 원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발적으로 광야에 들어가,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만나며 그분과의 친밀함을 누리며 웅크리는 겁니다. 광야라는 곳은 아무것도 없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성기로 들리는 곳임을 온몸으로 체득한 겁니다. 그래서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역이 중요한 게 아니라 풍성하고 충만한 주님과의 친밀함과 교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먼저 충분히 경험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은혜 받은 자가 해야 될 첫 번째라는 거예요. 큰 은혜 받은 자가 내적 준비 없이 뛰어다니고 갑자기 모든 일을 다 맡아서 하다가 탈진하고 변질되고 무너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은혜 받고 내가 뜨겁습니다…그럴 때일수록 일에 뛰어다니지 마시고 일과 사역보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가 충만해지고 풍성해지고 친밀해지는 데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과 친밀함으로 나아가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새벽 기도가 자발적으로 광야에 나오는 시간입니다. 남들은 자고 있을 때 깨어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광야로 나와 예수님과 독대하고 만나는 친밀한 시간입니다. 자발적인 아라비아 사막의 경험이 누려지는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주님과 독대하며 주님과 친밀함으로 내면을 든든히 세우는 시간입니다. 일상에도 이렇게 내가 자발적으로 광야로 나오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하는 특별한 일상 속에서의 영적 훈련들과 습관들이 다 그런 겁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그 어떤 모든 것들이 다 여러분들이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한 해 일주일간의 구별된 선교 여행이 바로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내가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현장을 함께 목도하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Bad News가 있어야 Good News가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은 후가 분명한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 원합니다. 그 부끄러움과 수치를 넘어 주님이 주신 은혜만을 강조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부끄러움과 연약함과 가리고 싶은 과거를 다 덮고도 남은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 나에게 부어짐을 삶으로 체험하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예수님이 부어 주신 은혜 가운데 선명히 붙들려 조율 받으며 주님의 사랑 가운데 오늘도 친밀함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들이 생각하는 복된 소식을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작게는 H 마트에 쿠폰이나 큰 세일하는 소식이 있어도 좋은 소식이라고 주변에 막 전하려고 하고, 코스트코에서 좋은 물건이 나왔으면 이것을 알려 주려고 좋은 소식이라고 전하기도 합니다. 또 우리 동네에 맛집이 새로 생겼다고 하고 어디 있는지 알려주려고 하고, 여행을 갈 때 어디를 가면 좋은 지 알려주려 하는 유튜브 채널이 많을 정도로 나름의 좋은 소식들을 주변에 계속 전하면서 살아가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어떤 좋은 소식을 듣고 주변에 전하고 살아가는가가 결국 인생에 있어서 내 삶의 방향성을 제시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듣고 전하는 복된 소식, 복음을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사도 바울이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는 복된 소식은 어디 가면 집을 잘 사고, 어디 가면 돈을 더 잘 벌고….이런 세상적인 것에 대한 복된 소식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을 걸고 전하려는 복된 소식은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그의 인생을 뒤집었으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사명에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전하는데 올인하고 그것을 절대적 가치로 두고 살아간 자가 사도 바울입니다.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전한 복된 소식, 복음은 사도 바울을 완전히 변화시켰고, 만나는 사람들을 변화시켰으며, 그 시대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인생을 걸고 전한 복된 소식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떠난 후 유사복음/다른 복음을 듣고 젖어 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의 내용이 비슷했지만 결정적으로 끝에 가서 달랐습니다. 그런데 많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했던 순전한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에 젖어 살아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전해진 것이 아님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합니다. 순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시작됨을 믿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한 구원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무언가를 더하고 빼려는 것, 거기에 어떤 다른 자격이나 조건들을 넣으려 하는 것은 모두 순전한 복음에 왜곡과 변질을 가져오는 다른 복음이 되어 버립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충분한 구원, 그 외에 어떤 것도 필요 없는 구원을 흔드는 큰 문제가 되어 버립니다. 나의 구원에 인간의 어떤 것도 자격과 조건이 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으로 충분하다…이 순전한 복음에 무언가를 더하고 빼려는 그 시도 자체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우리가 확인하고 마음에 새겨 되는 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왜 진짜 복된 소식인가는 거예요.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한 일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다 정확하게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무엇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고 영접 하는 게 왜 구원받는데 충분한가? 그 외에 다른 것은 왜 필요하지 않은가? 이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는 자들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인간에서 기원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고 사람의 지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데서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들에게 배우거나 받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오늘 말씀에서 강조하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배우거나 받는 것, 이게 바로 유대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의 방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까지 그가 평생 동안 했던 그의 종교 방식은 바로 사람에게 받거나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한 랍비를 통해 받거나 배우는 게 그가 유대교를 통하여 했던 가르침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사람에게 배우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예수님이 알려주는 만큼 알려 주시는 만큼 알게 되는 신비입니다. 내가 열심히 공부한다고 내가 노력한다고 내가 업을 쌓는다고 공로를 쌓는다고 그 결과로 알게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만큼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아는 신비, 그 주도권이 예수님에게만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만이 원인이고 이유이고, 예수님 만이 바로 신앙의 원인이고 이유이고 핵심임을 고백하는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전하는 순전한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향한 이 분명한 확신과 열정, 다른 복음으로 변질되고 왜곡되는 것에 대한 불타는 안타까움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나에게 예수님이 정말 복된 소식인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이 정말로 나에게는 복된 소식인가? 그 복된 소식을 전하는 부르심이 나에게 분명히 있는가? 를 진지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를 통해 내가 구원 받았다는 이 놀라운 고백도 내가 은혜를 받을 만해서 내가 노력해서 받을 만한 성적이 되서 받은 게 아니라는 겁니다. 십자가 은혜는 내가 그 어떤 걸로도 자격과 조건이 안 된다는 철저한 자격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선물로서 주신만큼 받는 것이고, 구원받은 기적 뿐 아니라 나의 삶의 모든 게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받은 선물이기에, 주신만큼 받는 것입니다. 구원도 예수 그리스도의 통하여 일방적으로 은혜의 선물을 주신 것이고요 내 일상의 축복도 모두 주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이기에 주님이 주신만큼 기쁨으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향해 주시는 구원과 약속들이 이루어지고요.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만큼 알게 되고, 알려 주시는 만큼 깨닫게 되는 선물 받은 삶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시작과 끝은, 모든 주도권은 예수님에게 있음을 철저히 믿으며, 예수 보혈이 나를 건지고 천국으로 인도하기 충분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에 속한 자인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놀라운 복음의 신비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변에 무슨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십니까? 오늘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전하며 살아가십니까? 우리는 성도로 부름 받아 이 세상에서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간다 고백하는데, 일주일 내내 우리가 전한 복된 소식은 그저 땅에 있는 것이 전부하면, 그게 내가 전한 복된 소식의 전부라면 우리는 나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가 예수님이 복된 소식인 걸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예수 이름으로 구원 받음이 나에게 복된 소식이라는 것을 흘러 넘치는 감격이 되지 못한다면, 결국 내가 전하는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아니라 다른 걸 전하다가 끝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 분명한 확신, 내가 전하는 복음의 1번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복음이라는 이 분명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면서, 나에게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이 감격이고 힘과 능력인지, 내가 전하는 진짜 복된 소식의 첫 번째인지….조율하기 원합니다. 이 땅의 것과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사소한 것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복된 소식으로 내가 깨달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기 원합니다. 내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것이 감격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할 때 그 복된 소식을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 복된 소식으로 구원받은 자, 그분의 주도권 안에 엎드리는 주의 백성으로 예수 십자가 은혜를 복된 소식으로 알아, 복음을 전하는 선명한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가 본인이 전했던 순전한 복음이 물타기를 시도해서 자꾸 왜곡과 변질이 되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유사 복음과 다른 복음에 자꾸 갈라디아 교인들이 흔들리고 젖어 들어 본질에서 이탈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마음이 무너져도 다른 복음을 좀 조심해라 분별해라…좀 신사적으로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경고 말씀은 굉장히 셉니다. 센 정도가 아니라 이게 좀 너무 격해서 극단적인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꼭 이렇게 강력하고도 극단적인 언어를 써야만 됬을까? 여기서 저주라는 말은 condemned이니까 저주 대신 정죄를 받을지어다…로 완곡한 해석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영어 성경에는 한글에는 없는 eternally가 분명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이것을 직설적으로 번역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영원히 정죄받을 지어다…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이건 한글 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센 경고 말씀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심각하게 극단적 표현을 서슴지 않으면서까지 강력 경고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다른 복음은 끝이 조금 다른 미미한 차이가 아니라 구원과 영생의 관련 있는 본질의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에 대해서 구약 성경을 통해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만 섬기고 예배하는 자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부인한 건 아니었는데,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 여긴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취한 방법은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세상과 우상을 겸하여 예배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예배 드리고 세상도 예배하고, 하나님도 붙들고 우상도 붙들었던 것입니다. 이걸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이며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고 굉장히 심하게 질책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당하게 고개 빳빳이 들고 대들듯이 대답합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섬기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게 뭐 그렇게 큰 대수입니까? 그게 그렇게 큰 문제입니까? 아니 하나님 왜 이렇게 빡빡하게 그러십니까?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늘 한결 같은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찌르는 말씀으로 강력하게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예배하지 않는 거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예배하지 않는 거라는 것임을…..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의 강력한 경고도 동일한 선상에 있습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은 예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거나 십자가 복음을 부인했다면 유사 복음이나 다른 복음에 사람들이 빠져들거나 미혹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데, 문제는 그걸로 충분하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믿기는 하는데 그걸로 구원받는 게 충분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할례를 받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율법을 지키는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이나 자격으로 같이 붙드는 겁니다. 왜 많은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으로 자꾸 이탈하게 되는가 하면 이 차이가 뭐가 큰 문제이고, 뭐가 큰 대수냐고 가볍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부인하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양념과 같이 뭐 좀 더 치는 게 그렇게 큰 문제가 되겠냐는 착각에 빠진 겁니다. 사도 바울은 강력 경고하며 강조해서 얘기하는 것이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겁니다. 다른 복음에 빠지고 젖어들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 받는다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만 붙들지 않으면 그 복음은 가짜라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똑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고백하고 수용하고 있는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게 예전 초대교회도 문제였고 지금이 시대에도 계속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도전이자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섬기는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로 보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일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중의 삶은 좀 빡빡하게 하시지 말고 좀 놔두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는 것을 선명하게 붙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드는가의 싸움입니다. 여기에 다른 것을 추가하고 첨가하거나 다른 것을 자격 조건으로 두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불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결론짓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중에, 사람을 먼저 인식하고 의식하고 사람의 기쁨 되기를 먼저 구하는 삶이 자연스럽고 익숙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얻기 원하고요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원하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사람보다 먼저 붙들고 그분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절대 가치로 두고 사는 존재라는 겁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는 게 필요 없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게 잘못됐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고 좋게 하는 것이 삶의 절대 가치가 되는 순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 모두도 이런 유혹에 늘 빠지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신앙 생활할 때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사람들에게 훌륭하다는 소리 듣고,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칭찬받는 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그 사람들의 박수소리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의 넘버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자, 예수님의 칭찬을 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피곤한데 왜 새벽기도에 왜 나오셨습니까? 나오신 여러 가지 동기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우리가 선포하고 붙드는 이유는 오직 하나,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고 주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입니다. 사람에게 기쁨 구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기쁨 구하기에 내가 이 자리에서 있다는 것을 선명히 고백하며 붙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사람들과 만나는 교제가 기쁘고 다른 것들이 따라와야 하는 겁니다. 이 우선순위와 영적 질서가 뒤바뀌게 되면 계속 헷갈리게 되고 계속 본질에서 이탈하게 된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만 선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 100% 다른 건 없어요… 다른 건 어떤 것도 자격이나 조건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 하나로 충분한 구원, 예수 보혈 하나로 충분한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충분한 구원을 선명히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이라는 겁니다. 예수님만 섬기고 예수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들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단단히 붙들려 살아가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예수 이름 외에는, 예수 보혈 외에는 다른 것을 전하지 않겠다, 다른 것을 자격 조건으로 두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한 기준 아래 살아가십시오. 예수님을 기쁘게 하며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주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계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유사 복음, 가짜 복음이라 할 수도 있고, 속된 말로는 짝퉁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진짜 가짜를 육안으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가짜가 유행합니다. 가품을 정말 너무 똑같이 만들어서 차이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정말 미세한 부분의 차이로 진품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명품이면 명품일수록 가짜가 많이 나오고 유사품이 많이 나옵니다. 마찬가지로 순전한 진짜 복음이 있는데 복음이 명품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꾸 유사복음, 가짜 복음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유사복음이나 가짜 복음은 사람들이 대충 봐 가지고는 차이를 잘 모르도록 비슷합니다. 그래서 가짜에 속고 유사품에 마음을 쏠리게 하는 이런 다른 복음이 너무나 빨리 갈라디아 교회에 퍼져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는 겁니다. 순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부터 시작되고, 악한 세대에 결박되어 소망 없는 나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인정, 나는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부터 복된 소식이 열립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건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며 그분의 죽음은 단 한 번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다 덮고도 남은 충분한 복음의 은혜임을 감격으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 복음의 선물을 감격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며 그분께 영광 돌려 내가 예수 이름과 예수 공로 살아가는 존재가 되고,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순전한 복음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인생을 걸고 전한 이 순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이 자꾸 교회 안에 들어와 젖어들고 물타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건 복음을 아예 믿지 않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를 믿긴 믿는다는 겁니다. 아예 나는 예수 십자가를 믿지 않는다 그러면 다른 복음을 분별하는 게 쉽습니다. 그런데 이 다른 복음 유사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기는 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논리를 가져오는 겁니다. 자격 없는 나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혜가 불충분하다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다가 플러스 알파를 계속 더하는 겁니다. 특별히 이방 기독교인들, 유대교 배경이 없었던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으로 새 사람이 되는데 십자가 복음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받기 위해서는 율법도 지키고 착하게도 살아야 되고 안식일도 할례도 지켜야 되고 이런 것들을 자꾸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른 복음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게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거 맞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부족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게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나…. 우리같이 할례도 하고 율법도 지키고 안식일도 지켜 되는 것이라는 이 구원받을 자격을 논하고 구원받을 조건을 더하는 이 다른 복음이 자꾸 갈라디아 교회에 젖어들고 먹혀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특별히 이 유사복음, 다른 복음이 이렇게 빨리 갈라디아 교회를 변질되고 왜곡되게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사도 바울은 충격을 받은 거 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순전한 복음이 쉽게 변질되고 왜곡되는 대해서 너무 놀란 것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민감하고 눈에 보이는 행동을 따라 나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을 늘 좋아하는 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원인이 전적인 예수님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꾸 구원받은 자격을 따지기를 좋아해서 구원받을 만한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좋아합니다. 구원의 공로와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그런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충분하다는 이 순전한 복음 대신에 거기에 내가 십일조 드리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헌신하는 것이 구원의 양념이 되고 자격조건이 되는 것을 너무 좋아하기에 자꾸 유사복음, 다른 복음을 만들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초대교회 갈라디아 지방에만 있었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우리가 계속 경험하게 되는 큰 도전이라는 겁니다.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우리가 순전한 복음에 자꾸 물타기를 하고 왜곡과 변질로 나아가기 쉬운 겁니다. 우리 죄성은 구원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 하고 구원의 자격조건을 내가 한 무엇으로부터 찾고자 하는 열망이 계속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 같아요. 그 정도 차이를 가지고 뭐 그렇게 심각하게 그러는가… 그 정도 차이가 뭔 그리 큰 문제인가? 그런데 그 정도 차이가 뭔 문제인가가 아니라 큰 문제이며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라는 것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증언하는 겁니다. 우리는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언제든지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을 만들어 왜곡과 변질로 물타기를 하기 쉬운 존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하고 나에게는 어떤 이유와 원인도 자격 조건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지 아니하면 우리도 갈라디아 교회에서 만연했던 그 유사복음, 다른 복음에 젖기 쉽습니다. 유사 복음 가짜 복음은 구원으로 이르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예수님 90% 나 10%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복음이 변질되면 구원이 사라지고 많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복음은 하나밖에 없는 겁니다. 예수님 100%... 예수님에게 구원의 원인이 있음을 믿고 고백하는 100%...밖에 없는 겁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유사 복음, 가짜 복음은 진짜가 아니고 구원으로 이끄는 복된 소식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내가 천국 가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십자가의 능력 외에는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붙들고 흔들리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순전한 복음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왜곡과 변질로 된 다른 복음을 붙들고 복음에서 이탈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른 복음은 없다는 사도바울의 이 분명한 외침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나에게는 구원받음의 이유와 원인이, 자격과 조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기 원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여러 영적 습관들이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처럼 만들려 그러면 우리는 은연 중에 우리가 다른 복음을 만드는 것이고, 복음의 물타기를 하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왜곡과 변질로 나아가는 이런 유사복음, 다른 복음은 우리와 비슷하고 좋아하고 하늘에서 온 천사같이 느끼는 우리에게 매력적인 것이기 때문에 늘 깨어 경계하며 분별해야 합니다. 내 어떤 행위도 내 어떤 공로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십자가 은혜만이 100% 구원의 원인임을 선명히 믿으십시오. 순전한 복음에 덧칠하지 말고 구원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십시오 가장 순수한 복음이 변질될 때 가장 추해지고 왜곡되며 이것을 통하여 구원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유사 복음과 다른 복음을 경계하며, 100% 예수님의 공로로, 100% 예수 보혈로, 100% 예수 이름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진정한 복음 순전한 복음을 자꾸 왜곡시키고 물타기를 하는 다른 복음에 대한 경계와 경고를 담은 서신입니다. 진정한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사도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갈라디아서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들이 뭐라 그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근거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는 게 진정한 복음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 성도가 붙들어야 될 그 기준으로 순종해야 하는 진정한 복음을 증언합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기 전에 사도바울은 순전한 복음, 진짜 복음이 무엇인가를 딱 두절로 매우 간결하고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탁해야 할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가? 첫 번째, 진정한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으로 시작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복음의 시작입니다. 나의 모든 삶에 있어서 시작은 하나님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따라 시작된 것이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복음의 기초입니다. 복음도 인간의 뜻과 계획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을 위해이 세상에 보내진 계획으로 복음이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두번째, 진정한 복음은 죄로 말미암아 악한세대에서 결박되어 있음을 자각하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져 악한 세대, 절망의 세대, 멸망의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데 영원히 함께하고 싶으신데 함께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죄로 말미암아 우리가 악한 세상에 결박되어 묶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함께하고 싶으신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죄 문제 때문이죠.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져버리고 하나님과 대면하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습니다. 악한 세대 속에 빠져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 인냥 절대가치를 두고 삶의 목적을 거기에 두며 나를 중심으로 내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찾으려 하고, 이 세상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발버둥을 치니까 점점 이 악한 세상에 묶여 버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안개와 같은 것들 땅에서 올라오는 안개와 같은 것들로 나 인생을 적시려 하니까 절망과 공허함에 결박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고 구원을 받아야 되는 존재인 걸 망각하고 우리 스스로 자꾸 우리를 구원하려 하고 건지려 발버둥 칩니다. 그렇게 자력 구원을 위해 발버둥 치면 칠수록 죄로 말미암아 악에 결박되어 있고 죄의 권세에 더 눌려버리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분명히 붙드는 게 진정한 복음에 있어서 너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부터 시작된 복음, 나의 영적인 상태인 악한 세대에 결박되어 묶여 있는 나를 인정하는 복음….나를 향한 철저한 절망과 예수님을 향한 철저한 소망이 복음인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여전히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내가 악한 세대에 결박되어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면, 십자가 구원이 나에게 선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bad news를 철저히 자각해야 복음에 대한 good news가 나를 건지는 것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에게 돌아갈 수 없는 존재,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는 존재, 즉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겁니다. 우리는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존재이며 반드시 타력 구원,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되는 존재임을 철저히 인정하는 데서 구원의 문이 열립니다. 세번째, 진정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내 인생은 구원이 절실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건지고 구원할 수 없으며 철저히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외부로부터 건짐 받지 못하면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밖에서의 우리의 실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고 가만두지 아니하신 겁니다. 그런 우리를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셔서 그 죄 문제를 푸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 가운에 이루어지는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 가운데 우리를 건지시기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는 게 순전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신 겁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죽으신 이유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은 전적으로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흠없는 어린양으로 자신의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모든 죄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대속하고 자기 몸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게 십자가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살리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으로 살고 있고 은혜 가운데 선물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음에 근거는 나의 신실함이 종교적인 헌신이나 열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신실함과 헌신과 열심이 있어야 됩니다만 이것은 구원의 조건이나 원인으로는 절대 등장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조건과 원인은 오직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것입니다. 나의 뜻과 계획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있는 겁니다. 나의 신실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있는 겁니다. 나의 열심이나 헌신, 노력이나 공로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원인이나 조건이 되지 아니한다… 이것이 바로 순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만 구원받은 것을 아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니까?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찬송하는 거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는 거밖에 없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는 것을 고백하는 선언입니다.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존재가 바로 나이니 겁니다. 나의 나된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깨고 내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내내 이제는 예수 영광, 예수 이름, 예수 보혈, 예수 공로만을 줄기차게 외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 시간 우리가 순전한 믿음과 순전한 복음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사도 바울의 이 간절한 외침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가 구원 받는데 나에게서 이유와 원인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나의 공로 나의 열심이 하나도 이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으로 주신 구원의 선물받은 존재임을 믿고 고백하며 나의 가능성을 모두 내려놓은 채 오직 주님만 철저 의지하며 그의 이름 가운데 내가 거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순전한 복음, 진정한 복음에 빚진자로 살아가는 살아 가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이걸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게 바로 우리가 내일부터 배우게 될 다른 복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시작됨을 부인하거나, 나의 철저한 절망의 상태를 부인하거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붙드는 것을 부인하는 게 다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복음에 물타기를 하며 왜곡되고 희석되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경계하고 경고하고 있는 다른 복음인 겁니다.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나의 계획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으로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믿으십시오. 나의 인생은 그리스도 없이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악한 세대에 결박되어 건진 받아야 되는 철저한 절망의 상태임을 인정하십시오. 나의 노력이나 공로, 열심이나 선행으로 내가 구원받을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건짐을 받아야 되는 존재라는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볼 때 굿뉴스가 나에게 임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내가 살게 되었고 그분의 피 흘리심으로 내가 나음을 얻게 되었음을 철저히 믿으십시오. 순전한 복음, 진정한 복음에 내 인생을 뿌리내려 복음을 알고 복음 가운데 살아가며 그 복음의 능력을 삶으로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터키 중부 지방에 해당되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쓴 사도 바울의 서신입니다. 그 갈라디아 교회가 주님의 사명을 잘 감당하다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있었는데 그 문제는 사도행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순전한 복음을 전해서 갈라디아 지역에 교회들을 세웠는데, 그가 떠난 이후에 그 안에 유대교 배경의 그리스도인이 순전한 복음에 자꾸 물타기를 하는 것것이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부인하는 건 아닌데 십자가 복음으로 충분히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는 게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안식일도 지켜야 되고 할례도 행해야 되는 이런 것들을 구원의 조건들로 만들어 놓으면서 교회를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이방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유대인이 먼저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자꾸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쫓아와서 사역을 방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세우는 교회들을 자꾸 다른 복음으로 흔들어놓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깎아내리면서 이방 그리스도인, 예수님을 믿고 찾아오는 이방 성도들에게 복음에 걸림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참담한 소식을 들으며 사도바울이 마음이 무너지고 절박한 마음으로 갈라디아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굉장히 전투적이고 말이 직선적이고 셉니다. 그만큼 급한 마음으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을 통하여 십자가 복음만으로 충분한 복음, 본질에 충실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알게 하시는 귀한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사도바울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비판하던 것을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번째는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인 살인자라는 과거이고 두번째는 사도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예수님 살아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니니까 사도 바울은 진짜 예수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꼬리표와 비판이 늘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갈라디아서 처음을,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라고 선포하며 시작하는 것은 이런 사도성에 대한 비판과 비난에 대한 그의 분명한 고백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당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난 사도가 아니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투표로 된 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라는 것을 내가 분명히 믿는다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을 향한 그 뜨거운 사랑과 헌신에 도움이 되는 대신 오히려 끊어 버리려 하고 걸림돌이 되려 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분명한 선포를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면 사람들이 비판을 하든 비난을 부인을 하던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게 사람으로부터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성도로서 우리 삶의 방향성은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옴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참조는 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나는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명자,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보냄받은 자로서의 삶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나의 삶의 방향성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뭐라 말해도,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해도 그건 다 상대적이고 흘러가는 것들이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는가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부터 나의 인생에 분명한 방향성이 시작되는 겁니다. 보내심과 부르심….그것은 단순히 목회자의 목회 여정뿐만 아니라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가는 내 삶의 방향성에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의 여정은 결국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게 사도 바울의 분명한 삶의 확신과 방향성이었고,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도전하는 분명한 삶의 확신과 방향성이 되기 원합니다. 나는 이 세상에 어쩌다가 우연히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셔서 이 세상에 온 존재라는 분명한 보내심, 이 세상에서 나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뜻과 계획 아래 살고 있다는 분명한 부르심, 그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믿으며 살아가는 자들이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들의 삶임을 믿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을 받은 성도로서 교회를 이루어 이 세상에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것이 무엇인가? 그게 3절에 나오는 하늘에서 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럼 성도의 삶에 부어지는 은혜와 평강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은혜와 평강은 갈라디아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등장하는 서두 축복인사이기도 할 만큼 중요합니다. 은혜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과하면서 주신 선물입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주시는 그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유도 없이 자격도 없이 조건도 없이 내가 그 십자가 은혜를 선물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자가 된 거죠. 아무 자격도 조건도 되지 않는 내가 그 큰 구원의 선물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게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것을 알면 내 인생은 다 하나님이 자격 없이 일방적으로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물 줘서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죠. 내가 죄에서 구원받고 건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 된 것이 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선물, 내 인생을 복 가운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 내가 살아 숨쉬는 것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삶의 고백으로 누리는 게 은혜의 삶입니다. 내가 여전히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불어넣어 주시는 숨결이 선물과 같이 여전히 나에게 불어넣어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나의 숨쉬는 순간은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선물 받아 사는 존재 임을 알고 깨닫는 것이 은혜 받은 자의 삶입니다. 그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삶에는 부어지는 게 평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 샬롬을 빼앗기지 않게 되는 본질은 나의 삶에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선물 받아 사는 존재임을 알기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나의 인생을 책임져 주심을 믿을 때 평강이 임하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어서 내가 내 인생을 다 책임 지지 않아도 되는 인생, 나는 믿고 맡길 분이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찾아오는 게 하늘의 평강입니다. 나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심을 믿는 삶, 책임져 주시는 분이 있음을 믿는 삶 속에 평강이 임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믿을 때, 삶에서 직면하는 골리앗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골리앗 뒤에 계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평강이 나를 덮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받고 회복된 관계로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아갈 때에 내 매일의 삶은 주님의 힘으로 살아가게 되고, 내 삶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보호함을 받으며 인도함을 받으며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삶을 누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입니다. 진정한 자유함을 주신 십자가 복음만을 선명히 붙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달으면서 함께 갈라디아서의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보내셨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나의 인생의 기초를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에 놓으며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내리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보내심과 부르심 앞에 내 인생이 있음을 믿으며 살아갈 때 나의 인생에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이 임합니다. 나의 나 됨은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십자가 사랑 붙들고 평강을 현재형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말씀은 북 이스라엘도 남유다도 다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폐허가 되며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무너지는 엄청난 비극을 겪게 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짓습니다. 그렇게 망한 나라에서 필요하고 쓸만한 사람들은 포로로 붙들려 다 잡혀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 별로 도움이 안된 사람만 남겨졌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지고 망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다 깨뜨렸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긴 불순종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하나님의 손길로 그들이 잘 지낸 건데 그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두시게 되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그들에게 닥쳤고 결국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지 모르나 분명한 오늘도 주님의 보호하심의 손길 아래 있는 자들이고,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무는 은혜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부으시는 은혜에 무감각해져서 하나님께 불순종으로 계속 치닫게 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손길이 멈추게 되면서 망하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절망과 폐허 속에서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있는 안타까운 비극의 이야기, 그 절망과 가운데의 한줄기의 소망의 이야기를 동시에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첫 번째는 남유다 백성들이 그렇게 멸망하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음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두 손 들고 돌아와 회복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바벨론은 남아 있는 백성들을 다스릴 지도자로 그달리야를 세웠는데 백성들이 그를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있을 때 그 앞에 있었던 지도자들을 다 뭐라고 친일의 앞잡이라고 생각했었던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의 앞잡이로 보이는 그달리야를 좋아할 리가 없고 감정적으로 막 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달 지나지 않아 그달리야를 살해하고 많은 사람들이 애굽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이 모든 사건에서 하나님에게 회개하거나 돌아서는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은혜를 붙들며 다시 시작하려는 이런 마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감정에 격분해 그냥 바벨론이 세운 그달리야를 앞잡이라고 죽이고 그들이 선택한 건 뭐냐면 무서워서 애굽으로 도망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여전히 애굽을 쫓아가며 감정으로 바벨론이 세운 사람을 죽고 죽이는 이런 악순환만 계속되는 겁니다. 예레미야 44장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듯 지금 애굽으로 도망간 사람들은 다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한 자며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나아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애굽으로 도망간 자들도 동일하게 애굽 땅에서 엎드려질 것을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온 나라가 다 망하고 예루살렘이 불타고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졌음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여전히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전히 하나님께 순종으로 회개하며 우리를 살려 달라고 주님을 부르짖고 붙들지 않았다는 겁니다. 동시에 그 다 무너진 것 같은 절망 속에서 한줄기의 소망의 이야기도 결론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호야긴 왕은 백일 천하로 왕의 자리에 있다가 바벨론에게 사로잡혀서 18살의 나이에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많이 흘러서 바벨론의 그 위대했던 느브갓네살 왕도 죽고 그 다음 세워진 왕에 의해 37년만에 특사로 풀려나게 됩니다. 18살에 옥살이를 시작해 55세에 풀려 나온 겁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 않지만 그가 하나님을향한 믿음과 열망이 회복되지 않았으면 37년 동안 옥살이 중에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고, 더군다나 이렇게 기적과 같이 풀려나지 않았을 겁니다. 여호야긴 왕은 긴 옥살이 가운데 그의 인생이 하나님께 순전한 자로 분명히 변한 겁니다. 여호야긴 왕이 풀려나는 이야기를 증언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망한 잿더미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으로 꽃이 피는 이야기가 열왕기서의 결론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37년 만에 감옥에서 석방된 여호야긴 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겁니다. 영원히 망하지 않을 것 같은 큰 제국 바벨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게 되고, 그 바벨론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서게 하십니다. 그 페르시아 때에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이 포로로 잡혀왔던 남유다의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 때 첫 번째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는 무리를 이끌었던 자가 스룹바벨인데, 이 스룹바벨이 누구냐 하면 바로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습니다. 이처럼 우리 눈에는 이런 하나님의 경륜이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절망과 잿더미 가운데 이미 한줄기에 소망으로 여호야긴 왕을 남겨두시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며 그의 손자를 통하여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폐허와 절망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만 바라보고, 무너진 성벽과 잿더미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폐허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으로 계속 역사가 흘러가게 하셨고 그걸 통하여 계속 구원의 역사를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결론으로 주셨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 눈에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넓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을 통하여 또 다른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었다는 것을 믿음으로 취하기 원합니다. 개인도 공동체도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무너진 거 같은 잿더미가 되는 폐허와 절망의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회복해야 될 첫 번째는 하나님께 먼저 돌아가고 나아가는 겁니다. 철저하게 완전히 무너진 그 잿더미에서, 폐허와 절망의 현장에서 여전히 주님께서 비추시는 소망의 빛이 있음을 믿음으로 붙드는 겁니다. 일이 너무 잘 풀린다고 성공한다고 교만할 필요도 없고 일이 너무 안 되고 무너진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는 것은 모든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폐허와 절망 속에서도 한 줄기 소망을 남겨 주셨던 주님의 은혜가 나의 삶에도 동일하게 임함을 붙들기 원합니다. 그래서 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내가 모르는 소망을 예비하시고, 회복의 길을 준비하심을 믿으며, 내 모든 삶에 주님의 소망은 끊어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선명히 붙들며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한번 일어서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선시대 역사를 보게 되면 이미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의 명분만을 중시하고 떠오르는 새로운 나라인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무시하면서 자극하다 결국 병자호란으로 큰 국가적 어려움을 당하게 만든 조선의 대신들이 있었습니다. 왕을 잘못 보좌했고, 왕에게 왕에게 잘못된 판단을 이끌어 무너지고 있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나라를 적대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그들은 결국 나라를 어렵게 만들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유다 시드기야 왕 주변에는 이런 신하들이 득세해서 똑같이 왕이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해서 이미 기울어가고 있는 애굽과 가까이하고 바벨론과 등을 지게 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만듭니다. 이런 보이는 이유와 함께 성경은 남유다의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런 정치적인 이유와 영적 이유 중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이유를 먼저 바라보고 거기에 무게를 두며 그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시각입니다.
남유다가 멸망함과 동시에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멸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많은 남유다 사람들이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어떤 희망과 신기루를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나라는 망할지 언정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착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냐 하면 남유다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순전한 예배에서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성전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이 붙들었던 희망은 예루살렘 성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니까 어떤 상황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문턱을 그냥 드나들면서 심지어 교회를 나오지 않으면서 내 가족이나 친척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으면 막연히 나는 망하지 않을 거야, 나는 천국 갈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것이죠. 그들은 멸망을 당하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지켜준 거로 착각했던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완전히 불타 무너졌습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끝까지 붙들었던 희망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고 있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 유다 백성들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불타고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성전이 존재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 드리고 내 마음을 드릴 때 보이는 성전이 의미가 있는 겁니다. 우리에게도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이 우리에게 예배를 마음껏 드리는 귀한 공간이지고 귀한 장소임에 분명하지만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성전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이 껍데기의 예배당은 의미 없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예배당이 세워진 위에, 보이는 예배 세워져야 의미가 있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예배당은 다 무너지고 신앙은 다 무너져 있으면서도, 예배당을 들락날락 하며 나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남유다 백성들의 착각이었고 많은 성도들의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분명한 관점은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성전이 무너졌다면, 눈에 보이는 화려한 성전은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성전은 보이지 않는 이미 무너진지 오래니까 보이는 성전도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정화하면서 성전이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 대신에 장사하는 곳과 강도의 소굴이 된 것을 참지 못하시고 채찍을 들어 모두 정화하시며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성전을 허물어 버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지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6년 동안 지은 이 성전을 어떻게 예수님이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짓는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전의 본질이 바로 보이지 않는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성전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세워져 있으면 보이는 성전은 저절로 세워진다는 겁니다. 반대로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 그 껍데기의 예배당과 성전을 붙들고 있으면 필연 보이는 성전도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그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셨고 영광을 거두셨다는 겁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그 예루살렘 성전이 돌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불타 없어지며 무너지게 만드신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남유다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소망을 모두 허무시면서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불타고 돌 하나 남기지 않고 성벽이 모두 무너지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성전만 불탄 게 아니라 성전 안에 많은 소중한 것들이 모두 약탈당합니다.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귀한 것들을 다 훔쳐갔습니다. 이미 예전에 유다의 금은 보화들을 많이 가져갔는데 이번에는 특히 놋으로 된 많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성전 안에 있었던 돈이 될 만한 거 쓸만한 걸 다 가져가는데 특별히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예배할 때 쓰이는 도구였던 것들을 모두 약탈해 가서, 그걸 부시고 녹여서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데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구별된 성물들과 놋들이 다 약탈당해 바벨론의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데 쓰임 받는 참담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완전히 무너지게 만드시고, 완전히 망하게 하신 겁니다. 이 참담한 예루살렘 성전의 불타 사라지고 무너지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남유다 백성과 이스라엘이 왜 망하게 되었는가? 눈에 보이는 이유로는 정치적인 능력이 없었고 군사력이 약했고 강대국에 휘둘리는 한 나라였기 때문에 망했습니다. 더 본질적인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은 이미 보이지 않는 성전을 무너뜨렸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을 다 포기해 버린 지 오래였습니다. 그 결과 보이는 성전 또한 이렇게 참담하게 무너지게 되었다는 게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단순히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에 망하지 않을 거라고 착각한 것은 다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단순히 교회를 나오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예배당에서 예배 드리기 때문에 내 삶은 아무 문제가 없고 망하지 않을 것이라 착각하는 것을 다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아니하며 보이지 않는 성전을 통해 주님을 예배하지 않으면서 껍데기를 붙들고 괜찮겠지 착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은 다 무너지게 된다… 이게 성경의 결론이라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금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는지….하나님은 엄중히 물어보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반면 교사로 삼고 경고로 삼아 우리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고 무너지지 않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신앙을 견지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유일한 예배 대상 되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그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워 나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며 예배 드리는 그 진정한 신앙의 여정으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하루하루 승리하며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다보면 설마 그런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 됬던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떠나도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절대 망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특히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나서 남유다는 멸망을 피해간 것을 바라보면서 그런 착각이 더 확고해져서 하나님께 선택 받은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착각 속에 살고 있던 남유다와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끝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남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보면 끝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참하게 모든 것을 준비없이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끝이 있고 나라에도 끝이 있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끝이 있는데 마치 끝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다가 갑자기 찾아온 마지막에 우리는 늘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 왕입니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이 세운 허수아비 왕입니다. 여호야긴 왕을 백일 천하 만에 끌어내리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간 후바벨론이 허수아비로 세운 왕이 바로 시드기야왕입니다. 그러면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과 좋은 관계 속에 조율을 잘 하면서 후일을 도모 했어야 하는데, 그는 정반대로 또 다시 애굽에 기웃거리게 됩니다. 예레미야 37장을 보게 되면 선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례미야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에게 남유다가 살 길을 제시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에게 회개하는 심정으로 돌아와 바벨론 왕과 군대에 항복하고 조율하는 것이 남유다가 사는 길이라고 경고했는데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길 거절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여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게 됩니다. 대신 애굽 왕인 호르바 사람에게 사자를 보내서 우리를 도와 달라며 말과 군대를 요청합니다. 시드기야가 이렇게 어려운 상황 가운데 왕이 되었는데 정신차리지 못하고 이전 왕들과 같이 하나님 앞에 계속 악을 행하며 불순종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보이는 세상의 힘을 붙들고 계속 줄타기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입장에서는 허수아비 같이 세운 시드기야가 그렇게 반역해서 애굽의 편을 들고 애굽에게 군대를 요청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이 작심하고 이 배신자를 치러 올라오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1년 반 가까이 예루살렘 성을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포위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1년 넘게 포위하고 있으니 안에 백성들은 먹을 것이 떨어져 다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기근이 얼마나 심했는가 하면,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돌아가면서 삶아 가지고 먹는 이런 끔찍하고도 처참한 일이 그 성 안에서 벌어지게 될 정도로 백성들이 그 가운데 얼마나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결국 1년 반 만에 성문이 뚫리게 되고 성벽이 파괴되게 됩니다. 그때가 언제냐 하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정확하게 143년 지난 후이며, 남유다가 바벨론에 이렇게 처참하게 멸망하는 겁니다. 또한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은 도망가다가 결국 바벨론 군사들에게 잡히고 맙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되냐하면 그 아들들을 먼저 시드기야 왕 앞에서 하나 하나씩 죽입니다. 끔찍하게 그 아들들이 죽어가는 모습들을 다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창을 통해 시드기야 왕의 눈을 뽑아 버립니다. 그리고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죽입니다. 이게 남유다 마지막 왕의 비극적인 결말이었습니다. 이 비극적 말씀을 통해 우리가 열왕기 상하의 전체적인 큰 주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기 원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하게 되었는가?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처절하게 무너지게 되었는가? 기억하시겠지만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왕인 하나님을 모시는 대신에 다른 나라와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이 있어야 다른 나라 같이 그 왕이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고 인도하고 구할 거라고 아우성을 쳤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왕을 찾은 그 끝에 결말이 바로 오늘 남유다의 멸망이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왕은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파멸과 멸망으로 이끄는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의 결말이 이런 패망과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시지 않고 눈에 보이는 왕이, 눈에 보이는 힘과 권세가, 재물과 권세가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구할 거라고 착각한 하나님의 백성의 결말이 바로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전쟁의 패전으로 남유다가 망하게 된 결과이며 더 나아가 이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결과로 남유다가 이렇게 철저하게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엄중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시는 이유는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버리고, 대신 보이는 세상의 힘과 능력을, 눈에 보이는 왕이나 세상 권력이 나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구할 거라고 착각하며 동일하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왕과 권력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돈과 물질을 붙드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드는 것보다 훨씬 더 지혜로운 삶인 것처럼 착각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너무 나약해 보이는 성도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붙들고 있으면 그게 나를 붙들고 지키고 보호할 거라고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의 결말은 뭐라는 겁니까? 파멸이고 멸망이라는 겁니다. 남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철저한 불순종의 결과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지 아니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지 아니하면 그 끝의 결말은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안타까운 마지막 멸망 이야기를 통하여 내 인생에는 끝이 있음을 알고 늘 조심하며 잠시의 삶을 늘 주님께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새벽에 이렇게 나와 첫 시간을 주님께 드리면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그 열망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고 눈에 보이는 사람과 힘을 붙들고 살려 하는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조율되어 내 삶의 진정한 왕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도 남유다 백성과 같이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뒤로 한 채 눈에 보이는 왕과 세상 힘과 권력과, 물질을 붙들고 그것이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건질 거라 착각하며 멸망과 파멸로 끝나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눈에 보이는 세상을 왕으로 모실 때, 말씀에 붙들리는 대신 세상에 붙들리며, 결국 시드기야 왕과 같이 사슬에 묶이고 눈이 뽑히며 어디로 끌려가는지 모르기 끌려가는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언제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주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명히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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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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