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다니엘의 기도에 대하여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다니엘은 여러 가지로 대단했는데 먼저 10대 때부터 왕의 부름을 받아 일해왔는데, 그 정권이 바뀌고 왕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직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 왕이 그 모든 신하들은 물갈이 되는게 당연합니다.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는 민주당 사람들이 다 일을 하는 거고 그러다가 공화당이 되면 공화당 사람들로 다 물갈이 되는게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다니엘이 얼마나 대단했냐 하면 민주당 사람들에게도 공화당 사람들에게도 다 신임을 얻어 왕이 바뀌어도 그 자리를 지키게 했고 다니엘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은 거의 기적과 같은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성실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 성실했고 하나님 앞에 진실한 자로 살았던 자가 바로 다니엘입니다. 그런데 왕이 바뀌어도 한결같이 계속 쓰임받는 다니엘을 사람들은 좋아했는가? 그렇지 않았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어 한 자리를 계속 지키며 뭔가 탁월하고 다른 삶을 살게 되면 사람들이 저 사람 정말 대단해…존경하고 좋아할 것만 생각하지만 대다수는 그런 삶을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이 죄악된 인간들의 현주소입니다. 그걸 존경하고 대단하게 여기는게 아니라 그걸 시기하고 질투하고 굉장히 못마땅히 여기는 겁니다. 왕이 바뀌어도 한결같이 그 직을 감당하며 그가 하나님 앞에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어 그렇게 깨끗하게 지내는 다니엘을 시기하고 깍아 내리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가득한 것입니다.
다니엘의 기도는 몇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 번째 다니엘의 기도는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고 다니엘을 기도했습니다. 마음의 고향이 예루살렘이듯 우리 인생의 고향은 하늘나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기도라는 것은 내 마음의 창을 하늘을 향하여 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고 그의 마음의 창을 하늘을 향하여 조율하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놀라운 기도가 되는 비결 중에 하나는 기도할 때 마음의 창을 하늘을 향하여 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땅의 것만을 위해 내 소원과 기도제목만을 위해 기도하는게 아니라 눈과 마음을 하늘을 향해 열고, 천국을 바라보며 하늘 아버지에게 기도드릴 때 기도의 본질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통해 내 마음의 창이 하늘을 향해 열리는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향하여 내 마음의 창이 열려서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마음에 임하기를 원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창을 하늘을 향하여 열고 하늘에 조율되어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은혜받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다니엘의 기도는 전에 하던대로 드리던 기도였습니다. 즉 몸에 체득되어 있는 하루 세번의 기도, 습관을 쫓은 기도였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정해진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은 그의 삶에 인이 박힌 습과이자 거룩한 삶의 패턴이었다습니다. 다니엘은 매일 그 거룩한 삶의 패턴을 좇아 전에 하던대로 습관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습관을 쫓아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삶에 기도가 능력이 되는 것은 갑자기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지는 은혜로 기도하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50% 이상은 우리 몸에 새겨진 습관을 좇은 기도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게 하셔서 기도하게 될 때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순간은 내가 반복해서 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나의 습관의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몸에 체득된 기도, 그 습관을 좇은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은 통로가 되고, 그것이 나를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새벽기도가 거룩한 습관이고 정해진 시간에 말씀을 읽는 것이 거룩한 습관이고, 마음을 하늘을 향하여 열고 기도하는 것도 거룩한 습관입니다. 내 몸과 마음에 습관화되어 내면화되어 전하던 대로 늘 그 루틴으로 하나님께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는 이 다니엘의 기도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번째, 다니엘의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였습니다. 감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시고 소원을 들어주신 감사를 넘어 본질적으로 하나님 그분 자체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내 기도 제목을 묵상하는게 아니라 내 소원을 묵상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붙들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나의 이런 저런 형편을 놓고 기도하는 것이 틀린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본질적으로 기도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늘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며 하나님께 늘 힘들게 만드는 불쌍한 사람인데 한결 같은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감사기도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통해 일하심을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생을 통해 일하시는 것을 감사했고요.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게 습관을 쫓아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다니엘이 기도였고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니엘의 기도를 말씀은 “뜻을 정한 기도”라고 증언합니다. 다니엘은 하늘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기도했고, 뜻을 정하여 하루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했고, 뜻을 정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통해 뜻을 정하여 믿음을 지키는 기도를 했습니다. 언제부터 그 기도의 뜻을 정했는가 하면 다니엘서 1장 8절을 보게 되면 다니엘이 세 친구들과 함께 왕의 음식을 먹는 것을 거절할 때부터였으니 10대때 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6장은 나이가 굉장히 많이든 때라고 알려져 있으니 10대에 뜻을 정한 것을 그의 인생의 노년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 뜻을 정한 기도를 다니엘은 오랜 세월 한결 같이 지켰고 오늘 말씀을 보면 목숨 걸고 지키는 겁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는 신하들은 다니엘의 놀라운 삶의 비결이 하나님을 향한 기도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니엘의 기도를 방해하고 막는 이야기, 그 기도를 통해 다니엘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을 시험하기 위해 다니엘의 기도를 막으려고 임금에게 조서를 내려 왕의 도장을 찍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말라는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이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뜻을 정한 기도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나의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 뜻을 정한 기도 때문에 그 인생에 큰 위험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기적적으로 건짐을 받고 살아났습니다. 기도의 사람 다니엘을 하나님께서 사자굴에서 건져 주신 것은 물론 놀라운 기적이 분명합니다만 그것이 가장 놀라운 기적은 아닙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한 기도로 믿음을 지키는 것 자체입니다. 사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다니엘과 같이 기적적 건짐을 받기 보다는 스데반과 같이 하나님이 건져 주시지 않고 믿음의 순교자로 끝난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다니엘과 같이 사자굴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을 극소수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적적 개입과 건져 주심 없이 그냥 피흘리고 사자해서 순교하며 죽어간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 놀라운 역사의 핵심이 아니라, 뜻을 정한 기도를 통해 평생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켰다는 것이 놀라운 역사의 핵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 인생에 다니엘의 사자굴 경험과 같이 기적이 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근데 그런 놀라우신 개입과 역사 없이 기적이 풀어지지않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기적으로 개입하시느냐 아니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께 뜻을 정하여 기도하며 평생 그 뜻을 정한 기도를 통해 내 믿음을 지키는 싸움을 벌이는게 기적이고, 하늘을 향하여 내가 인생을 걸고 기도하는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게 기적입니다. 이 시간 주님을 향하여 뜻을 정하셨습니까? 그 정한 뜻은 평생 여러분들이 함께 가지고 가야 하며 내 믿음을 지키는 기적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내가 뜻을 정한 기도로 믿음을 지키는 것이 것이 기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십시오. 이미 정한 뜻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내 삶에 지켜 나가십시오. 그 지켜 나가는 기도, 하나님의 뜻을 붙들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쓰시고 역사하시고 일하실 것입니다. 그 뜻을 정한 기도를 통해 믿음을 지키는 여러분들을 귀하게 여기시며 천국에서 큰 자로 높여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다니엘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가 되어 뜻을 정한 기도로 믿음을 지키는 놀라운 기적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느혜미야의 기도는 나의 형편을 넘어서 타인의 형편과 하나님 백성의 형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해주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느혜미야는 왕궁에서 고위 관료로 아쉬운게 없이 잘나가던 소위 말하는 모든 것에 결핍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야 이민 2세대로, 부모세대는 원하지 않는데 이곳에 끌려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데 2 세대로 그 땅에 잘 정착해서 주류 사회에 잘 뿌리내리게 되었고, 왕궁에서 일하고 살 정도가 된 것입니다. 왕의 술관원은 왕의 술 따르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라 매일매일 왕을 독살할 위험이 있으니까 그 술을 늘 점검하는 실세였습니다. 그 정도로 왕이 가장 신뢰하고 믿을 만한 측근으로 왕에 들어가 살게 된 자가 느혜미야였습니다. 그러니까 왕궁에서 거하는 실세 느헤미야의 개인적인 형편을 봤을 때는 별로 결핍이 없고 문제가 없고 왕궁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평생 그냥 모든게 보장된 인생, 고속도로같이 뻗은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삶에 만족하고 내 형편에만 관심을 두고 살았으면 느헤미야의 간절한 기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위대한 점은 아무런 결핍과 문제가 없는 본인의 형편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의 형편, 특별히 600 마일이나 떨어진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에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예루살렘과 그 남아 있는 백성들의 형편에 귀를 기울이니까,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큰 환란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런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을 때 이런 소식을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처참한 현실과 형편이 느혜미야의 마음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형편을 듣고 나자 느혜미야는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저 사람들 안 됐네…나는 궁에서 잘 살고 있는데 저 사람들 고생하네… 이러고 끝난게 아니라 마음을 쏟으며 울고 슬퍼하고 작정하여 금식하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형편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저 멀리 떨어져 하나님 백성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땅 예루살렘을 위해서 오랫동안 울고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느혜미야가 기도의 사람이 된 이유이며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는다는 것은 나의 형편을 넘어서는 타인의 형편, 하나님 백성들의 형편에 관심을 갖게 될 때 기도의 사람으로 쓰임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에 열심을 낸다 하면서도 오직 내 형편과 내 가족의 형편 안에 기도가 갇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인 느헤미야는 자기 형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귀 기울이고 마음을 쏟은 것은 타인의 형편, 하나님 백성들의 형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시간 내가 어떤 소식에 귀기울이고 있고 마음을 쏟고 있는가…를 돌아볼때 내 신앙 생활의 현주소가 드러납니다. 내 코가 석자여서, 내 일이 너무 바빠서 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내 형편에만 집중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주시는 기도의 역사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내적인 부흥과 심령이 변화하며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변화하는 초석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의 형편에 대해 마음 쏟으며 관심갖고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형편을 넘어서 타인의 형편과 하나님 백성의 형편에 대해 관심갖고 마음을 쏟으며, 귀기울이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늘 조율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형편을 넘어서 타인의 형편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형편, 선교지의 형편, 하나님 백성의 형편에 관심갖고 마음을 쏟고 귀를 기울일때 느혜미야의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느혜미야는 하나님 백성의 형편을 듣고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간절히 3가지를 놓고 기도합니다. 회개의 기도를 했고, 하나님의 위로를 붙들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첫번째가 회개기도입니다. 타인의 형편에 마음이 쏠려 기도할 때에 그들의 형편만을 놓고 기도하기 쉬운데 느혜미야는 제일 먼저 회개기도를 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타인의 형편을 놓고 기도할 때 우리가 해야 될 첫번째 기도는 회개기도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막힌 것을 회개하며 거룩한 그릇으로 쓰임 받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을 허무는 회개 기도가 첫번째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을 방치한 것을 회개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망각하고 잊어버린 것을 회개하는 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의 위로함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 사실 느혜미야 전체 주제가 하나님의 위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느혜미야 이름 자체가 여호와는 나의 위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위로함을 붙드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형편을 알고 나서 이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 주변에 이웃의 형편을 놓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선교지의 어려움의 형편을 놓고 기도할 때 먼저 하나님의 위로함을 붙드는 기도를 해야 되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 형편에서 내가 할 수 있는게 없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안 되는 상황이라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느혜미야의 기도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기도였습니다. 상황을 붙들고 기도제목을 붙들고 기도했던게 아니라 상황과 기도제목을 도구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확실히 붙들고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기도하는 것이 느헤미야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붙들고 상황과 환경이 변하도록 하는 기도가 바로 느헤미야의 기도였습니다. 나의 형편을 넘어서는 기도를 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내 형편에는 문제가 없고 잘 지내며 평탄한데 나의 형편을 넘어서 타인의 형편과 하나님 백성의 형편에 마음을 쏟는 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마음을 쏟는 중보기도를 사모하십시오. 회개 기도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붙드는 기도,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이 드는 믿음의 기도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형편에만 관심 가지지 말고 내 주변의 형편, 특별히 타인의 형편과 주님의 몸된 교회의 형편, 하나님 백성들의 형편에 관심을 갖고 귀기울이는 성도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타인의 형편을 듣고, 주님의 몸된 교회의 형편을 듣고, 선교지의 형편을 듣고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붙드는 기도에 집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동시에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의 위로이며 하나님의 위로가 가장 놀랍게 역사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믿고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하심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이루시며 무너진 성벽들을 재건하며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도구로 선명하게 쓰임받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난해하고 어려워 신비롭기까지 한 욥기의 기도에 대해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욥기가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는 성경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욥기에서는 왜 욥이 그렇게 이유없는 까닭없는 고난을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나 해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빈 공간으로 만들어 앞으로 계속 두고두고 우리가 고민해야 될 숙제임을 증언합니다. 잠언과 전도서는 결이 굉장히 다른 성경 말씀입니다. 잠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놀라운 진리는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 난다는 conditional blessings의 원리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진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 축복 많이 주신다…는 이 원인과 결과로서의 삶의 원리가 잠언을 통해 우리에게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과 달리 전도서는 소위 말하는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인과응보의 일반적인 삶의 원리로는 해결되지 않고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모순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예외적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지혜로 알려줍니다. 분명히 콩을 심었는데 콩이 안 나고 이상한 게 나오고 나는 씨만 심었는데 가라지만 무성하게 나오고 나는 열심히 산 거 같은데 계속 내 삶에는 쓴뿌리만 계속 올라오는 이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 욥과 같이 탄식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의인이고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 하나님과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온전한 욥의 인생은 탄탄대로가 열려야 하고 뻥뻥 뚫리는 인생이 되야 당연할 거 같은데 욥의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며 죽음의 고비가 한꺼번에 그에게 닥쳐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갑자기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한꺼번에 자녀들이 한 사람도 아니고 모두 몰살 당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욥 자신도 병에 걸려서 끔찍하고도 혐오스러운 병에 신음하게 됩니다. 욥의 인생에 찾아온 이런 말도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고 까닭이 없어 보이는 이런 고난을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이유는 욥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성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아무런 이유와 원인 없이 겪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고 직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게 우리의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욥이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이 설명을 한다고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욥의 부인인데, 욥의 부인은 하나님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게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선택지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고난 속에 힘들면 그냥 하나님 저주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을 원망하다 안 되면 하나님 저주하고 죽음을 도피처로 삼아 죽어버리는 겁니다. 죽음을 내가 선택하면 그 고통이 끝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이 욥의 부인과 같은 선택지를 계속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인데 끝까지 욥의 설명될 수 없는 고난을 인과응보라는 자기들의 논리로 계속 설명하려는 겁니다. 까닭없이 욥이 고난을 당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거지… 그러면서 계속 너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집요하게 파고들며 압박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설명되지 않는 고난 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대표적인 반응들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든지 아니면 끝까지 나에게서 원인을 찾아 그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계속 나를 힘들고 하던지….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에서 욥이 마음을 쏟아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간절히 기도하는데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계시고, 뒤로가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토해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계신다면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인생에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애틀에는 비가 많이 옵니다. 비가 많이 오면 해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해는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는데 그 사이에 먹구름이 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해가 숨어있고 가려져 있다고 느끼는 해의 부재….그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욥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 걸 분명히 아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려진 환경과 고난의 먹구름으로 말미암아 비로 말미암아 그 한결같으신 해와 같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 가운데 찾아올 때 원인/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고난이 우리를 엄습할 때 우리눈 앞을 캄캄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거와 같이 착각하게 만들며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 거예요…하나님 계시다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성경은 그렇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토하는 것을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평을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하나님 외에는 도움이 없다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품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욥의 기도는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기도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같은 그 갈길 몰라 헤메는 때, 내 논리와 생각으로는 담기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자신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삶이 너무 힘들면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내 인생길을 나도 모르고 헤멜 때, 고난과 역경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때에 나는 갈 길을 모르나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하는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거 같은데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아신다는 것을 기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번 째 욥의 기도는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같이 되어 나온다는 기도입니다. 순금이란 불순물이 모두 제거된 상태의 금입니다. 내 삶이 단련되어 순금과 같이 내 삶에 찌거기들과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선명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하고 나와의 관계만 남는 것입니다. 그 불순물이 제거되며 순금과 같이 나아오게 될 때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 창조의 신비를 욥이 직면하게 되면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 외에 아무런 원인과 결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왜 시작됐는지 내 인생이 왜 시작됐는지 원인과 결과가 나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거 외에는 이 세상이 시작된 것도, 내 인생이 시작된 것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로 설명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내 인생이 존재함을 믿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듯이, 내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도구가 되느냐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끝까지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이것에 제일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게 내가 정금같이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불순물이 제거된다는 것은 나에게 원인을 찾으려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오직 나와 하나님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이 결론적으로 나는 주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본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그걸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갑절로 회복하여 주신다는 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이 원인과 이유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답이 없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좋은 일들도 마찬가지고 나쁜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에 이유와 원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가 없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거면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느냐…물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길을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얼른 뛰어가서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고 묻는게 부모입니다. 근데 아이가 커서 열살이 넘었는데 애가 넘어졌다면 달려 가서 부모가 세워주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줍니다. 그건 바로 아이가 넘어졌을 때 기다려 주고 지켜봐 주는 겁니다. 스스로 일어나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이렇게 컸습니다 얘기할 수 있을 때 까지 지켜 봐주기만 하는 겁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넘어지자마자 얼른 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시고 괜찮냐고 물어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더 큰 사랑을 주실 때가 있어서 내가 넘어졌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반응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계신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으로 지켜보시고 바라보시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시며 박수 쳐주시는 그 큰 사랑이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전히 우리의 삶은 해답이 없는 미궁의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슬픔이 찾아오는지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오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계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고 나의 가는 길을 주님이 아심을 고백하며 내가 순금과 같이 나오는 이 욥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엘리야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하는데, 엘리야는 이세벨을 위시해 바알 선지자 450명을 대항해 영적 전쟁을 벌이는 현장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을 봤을 때는 엘리야가 이길 확률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한명이 450명과 맞짱떠 싸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사람의 힘이나 환경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이 영적 전쟁을 당당하게 쫄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먼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종일 기도했습니다. 큰소리도 기도하고 안 되니까 자해를 하면서 피를 흘리면서도 기도했고, 미친듯이 광란의 기도를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걸 통하여 는 바알 우상이 허상임을 드러내며 그들의 기대를 모래성같이 무너뜨리셨습니다. 이제 엘리야의 차례가 되어 기도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전에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무너진 제단을 돌로 다시 쌓는 겁니다. 그 무너진 제단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으로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바알우상을 겸하여 섬기며 그들의 우선 순위는 다 세상에 뺏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제단이 그렇게 다 무너진 거죠. 엘리야는 그 무너진 제단을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다시 수축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무너졌던 관계를 다시 수축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으며 그릇이 잘 준비되어야 하나님이 쓰시기 쉬운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로 돌아간다는 것도 언제나 패턴이 똑같습니다.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는 것이며 무너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항상 나의 이름이 아닌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엘리야가 기도 전에 했던 건 뭐냐면 제단 주위에 물을 가득 부어서 상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제물을 다 태우려면 바짝바짝 말른 상태에서 훨씬 불이 잘 붙는게 당연합니다. 지금 3년 동안 기근이 있었으니까 모든 곳이 불만 임하면 모든게 다 활활 탈 조건들이 된 거 같은데 지금 엘리아는 정반대 행동을 하는 겁니다. 오히려 물을 부어서 불이 잘 안 붙게 만드는 것이고 야예 흠뻑 젖게 만드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상황을 정반대로 가장 좋지 않은 환경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이렇게 직접 물을 붓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하나님께가 간절히 기도하는데 상황이 정반대로 흐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데 기도 응답이 안 될 조건으로 점점 상황이 정반대로 가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만이 일하시는 조건을 만드는 하나님의 역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제물에 불이 붙기 위해서는 더 바짝바짝 말라야 될 거 같은데 오히려 물이 부어지고 흠뻑 젖는 불가능한 상황이 만들어질 때, 그런 상황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기도 응답 안 하시려는가 보다…포기하는게 아니라 반대로 이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것일 수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붙드는게 필요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상황을 불이 붙을 수 없는 정반대의 환경으로 만든 후 드디어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제목은 바알과 싸워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하늘에서 불이 임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입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기도는 자신의 기도제목 대신 네 가지의 기도를 합니다. 첫번째 기도는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신 것을 드러내소서…두번째 기도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알게 하소서…세번째 기도는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을 오늘 알게 하옵소서….네번째는 백성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게 하소서….하늘문을 여는 기도를 합니다. 엘리야의 간절한 소원, 이 제물에 불 임하게 도와주옵소서… 바알과 싸워 이기에 도와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는데 그는 그렇게 직접 기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기도원리는 나의 기도 제목만을 붙들고 나의 필요와 소원을 위해서만 기도하는게 아니라 기도를 당구로 얘기하면 직접 공을 치는게 아니라 쿠션을 돌려가지고 치듯이 기도하는 겁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신 걸 알게 하시고, 내가 하나님의 종인 걸 알게 하시며 말씀이 말씀대로 이것을 행하는 이많은 역사가 있게 도와주옵소서…하늘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도 원리는 내 기도 제목과 소원만을 구하는 땅의 기도와 육의 기도가 아니라, 하늘의 기도와 영의 기도가 되야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땅의 기도란 기도 제목이 오직 나 자신을 위해, 내 필요와 소원만을 위해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냥 내 필요를 채워 주옵소서… 내 소원을 들어 주옵소서…내가 원하는 간절한 상황 해결 해주옵소서…만 기도하면 육의 기도와 땅의 기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가 정말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가 되는 기도가 되려면 나의 소원과 필요에 머물면 안 되고 그 간절한 나의 기도가 하늘의 뜻을 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기도, 내가 하나님의 종인 것을 드러내는 기도,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포 하는 조건으로서의 기도가 돼야 되고 내가 구하는 소원이 내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기도가 되어야 하고,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선포하는 선포의 기도가 되도록 기도할 때 그 똑같은 기도 제목이지만 그것은 하늘의 기도이며 그것은 영의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걸 통하여 결과는 뭡니까? 폭발적인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이 응답하셔서 모든 제물과 제단을 다 태우시며 불로 임하신 것입니다. 동시에 백성들이 마음을 되돌이켜 하나님께 회개하는 역사가 있게 되었습니다.이게 바로 하늘의 기도이며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영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중요한 영적 진리를 새기기 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도 제목과 소원들, 그 자체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이는 기도 제목을 통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기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됨이 드러나는 기도,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짐을 구하는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기도로 부르짖기 전에 마음속에 먼저 가져야 할 열망은 무너진 예배 제단의 회복입니다. 내 마음에 무너진 예배 제단이 회복되기 원합니다….저 사람의 마음에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면 좋겠다… 저 공동체에 무너진 예배가 회복되면 좋겠다… 그 무너진 예배가 다시 한번 회복되는 것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바탕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무너진 제단을 여호와의 힘과 이름을 의지하여 다시 세워지는 간절한 열망으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기도와 같이 나의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의 기도, 하나님의 이 나라가 세상에 침투하는 기도가 되기를 갈망하고,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이 내 마음속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 공동체에 임하는 역사가 있기를 간구하며 기도하기 원합니다. 나의 기도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붙드는 기도가 될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우리 가운데 임하심을 체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북 이스라엘인 사마리아가 어떻게 앗시리아에게 망하는지를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그 망하는 것을 반면교사 삼아 어떻게하면 망하지 않을 지, 어떤 것이 지켜져야 할 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하나님 앞에 고민하고 간구했으며, 그 결과 종교 개혁을 이루었던 유명한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신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열망하며 종교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신실한 히스기야왕에게 생각하지 않은 청천 병력과 같은 소식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네가 곧 죽게 된다라는 것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헌신하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남유다를 새롭게 갱신하며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죽게 된다니…참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이 아프고 힘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게 이렇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흘러가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천년만년 살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이렇게 정리하고 떠나야 되는 인생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러면 하나님 제가 이정도 살았으면 됐습니다 그러면 말씀대로 죽음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지 않고 그는 은혜를 구하며 더 살게 해달라고 특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기서 히스기야가 이렇게 기도한 이유가 단순히 좀 더 오래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왕으로서 주님 제가 아직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라는 것을 놓고 그 인생의 공공성을 놓고 기도한 것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지금은 죽기 싫어요…하나님 좀 더 살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 제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남유다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더 이루어야 될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히스기야의 기도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통곡으로 기도했다는 겁니다. 먼저 낯을 벽으로 향한 기도가 어떤 기도인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얼굴을 벽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을, 모든 방법들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진심으로 믿고 나아가여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세상의 가능성들을 끊고 하나님 한 분 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벽 가까이 서서 기도할 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무것도 있지 않습니다…내가 하나님만 바라봅니다… 고백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 얼굴을 벽으로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벽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과 비슷한 기도가 뭐가 있냐면 기도원에 가면 개인 기도실이 많이 있는데, 안에서 문을 잠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안에서 문을 잠그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시면 저는 이 방에서 한걸음도 나가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그런 절박함을 가지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벽을 향하여 기도했다는 것은 왕이지만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과 나만의 문제라는 것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벽에 얼굴을 향하며 히스기야는 진실과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순종했음을 기억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도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본질은 바로 진실과 전심으로 사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함과 전심으로 살고 진실함과 전심으로 행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내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가며 내 뜻과 계획 이루어지고 펼쳐지기 위해 올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지기 위해 내 삶을 던지는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히스기야가 그것을 놓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제가 그동안 그냥 나만을 위해 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보시기에 선할 정도로 주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지기 위해 심과 진실로 내가 행하며 살았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특별히 내가 인생에 공공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내가 나만을 위해 사는게 아니라 내가 존재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이 이루어짐을 통하여 복받고 천국에 인도함 받을 사람들이 있다라는 것을 깨달으며 벽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나 고쳐 주세요…주님 더 살고 싶어요…라는 기도를 넘어서 내 인생을 통해 내가 아직 주님의 뜻이 펼쳐지고 이루어지는데 해야될 일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그게 히스기야가 했던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히스기야의 기도에 금방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의 기도를 들었고 너의 눈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낫게 한다고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신 낫게 됨은 죽을 자가 죽어야 되는 자리에서 15년을 더 살게 된 겁니다. 죽어야 되는 그 자리가 있는데 죽어는 자리에서 15년을 더 하나님이 살게 해주신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부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히스기야에게 하나님께서 죽어야 될 자리에서 치유와 회복을 통해 15년을 더 살게 하셨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히스기야가 죽을 자리에서 15년을 더 살게 하신 것은 히스기야 개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히스기야를 통해 히스기야가 기도한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남유다를 더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개인의 응답이 아니라 왕으로서 남유다 전체 백성의 역사를 이룰 응답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더 이루시기 위한 응답이었습니다. 너는 지금 차분히 너 자신과 나라를 돌아보며 너가 지금 내면에 돌아오고 정신 차야 될 것이 있음을 잊지 말고, 너의 삶에 공공성이 있음을 잃어버리지 말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죽을 자리에서 15년을 더 살게 하시는 치유와 기적을 허락하셨다면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주신 이 특별한 이유와 의미를 마음에 새겼어야 합니다. 우리가 한나의 기도를 통해 배웠지만 놀라운 기도 응답이 있고 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먼저 하는 것이 서원 기도인 것 처럼,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히스기야는 먼저 준비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간절한 기도, 죽을 자리에서 나를 건져 주셔서 몇 년을 더 살게 하시는 그 치유의 은혜가 부어졌을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를 믿음의 반응으로 보였어야 되고 그것을 결단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히스기야는 기도 응답받아 15년을 더 산 것이 히스기야 개인에게도 남유다 백성들에게도 복이 아니라 화였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기적의 생명연장을 체험한 후 펼쳐진 히스기야의 이야기들은 왕으로서 맡겨진 공공성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는데 쓰임받는 15년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랑하고 자기 업적 자랑하고 창고를 적군에게 다 보여주면서 교만하게 살다 결국 훌러덩 나라를 다 빼앗기게 되는 모든 원인을 제공하는 왕이 되었다… 그게 바로 열왕기하 20장의 결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런 위험성을 알고도 히스기야에게 한번 더 기회를 주셨고 생명의 연장을 해주셨으며 죽을 병을 고침을 받았어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그 놀라운 기도 응답후 치유 역사를 체험 후, 믿음으로 반응하는데 실패한 왕이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로 말미암아 남유다 전체에 화가 임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부르짖는 기도도 배웠고 통곡 기도도 배웠고 선포의 기도도 배웠는데 오늘 히스기야의 기도와 같이 이렇게 내가 벽을 향하여 얼굴을 가까이 대고 주님 앞에 독대하며 내 마음을 쏟아내는 기도를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내가 하나님 앞에 정말 벽을 향하고 하나님 앞에 독대하며 통곡하며 내 마음을 쏟으며 히스기야의 기도가 우리에게 회복되기 원합니다.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담으면서 때로는 내가 이해할 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죽어야 될 자리에서 죽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죽을 자리에서 기적과 치유로 조금 더 살게 된다면, 그건 내가 고침 받았다는 간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은 반드시 나에게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간을 철저하게 살아가야 되는 하나님의 시간으로 내 흐름이 맡겨져야 되는 공공성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삶의 삶의 궤적과 시간을 살아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들은 그 죽을 자리에서 죽게 하시고 천국에 데려가시는 나를 특별하게 치유로 이적으로 더 살게 하신 데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지는데 나를 더 사용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이걸 잊어버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땡큐… 로 끝나거나, 나 기도 응답 받았네 나 치유 받았네…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대신 내가 강조되고 나의 치유가 강조되면서 히스기야와 같이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내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건으로 살아가며 내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으로 살아가며 내 뜻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살아가는 전혀 질적으로 다른 그 인생을 살아가기 원합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펼쳐져야 되는데 내가 쓰임받는 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서 배우고 있는데 오늘은 다윗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시편의 많은 부분은 바로 다윗의 기도입니다. 특별히 오늘 시편 3편은 다윗이 인생을 살아가며 가장 위기이자 어려운 때, 참담한 상황에 놓였을 때 쓰여진 탄식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윗은 그 인생 자체가 평탄하지 않은 광야를 통과한 삶이었고, 젊은 시절 사울왕으로 인해 도망자로 10년 넘 광야를 전전하며 광야에서 연단받고 훈련받았습니다. 그런데 시편 3편에 등장하는 광야 생활은 그때와는 비교되지 않게 더 어렵고 힘들고 참담한 상황인게 광야로 쫓겨났다는 것도 어렵지만 쫓겨난 이유가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배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광야로 두 번째 쫓겨 갔다는 것도 참담하지만 예상하지도 못한 아들의 배신과 반란으로 광야로 쫓겨난다는 것은 정말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며 참담하고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이 혼자 일을 벌인 게 아니라 그 아들과 합세해서 자기 등에 칼을 꼽는 신하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이죠. 몇 달 전까지 몇 주 전까지 나한테 충성을 다할 것 같았던 그 신하들이 갑자기 나의 등에 칼을 꼽는 배신자가 되어 아들과 합세하여 자기를 쫓아내는 이 말도 안 되는 참담한 상황을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이 있지만, 가장 정말 견디기 힘들고 어려운 것은 가까운 사람들이 배신하는 어려움입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배신해서 내 등에 칼을 꽂으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다 잃어버리고 사람들 자체에 대해서 혐오를 느끼게도 됩니다. 자기 아들을 자기 아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배신했는데 자기를 배신하지 않을 자가 누구인가… 생각하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죠. 이런 절박하고 참담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고 광야로 도망가면서도 배신의 분노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참담한 가운데 다윗이 했던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은 그의 삶이 대단하고 완벽하고 흠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는 인생이 잘나갈 때도 하나님을 붙들고 부르짖었고 인생이 이렇게 바닥을 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을 붙들고 부르짖는 기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참담한 상황과 어려움이 오히려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나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는 삶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별히 시편 3편의 다윗의 기도를 부르짖는 선포의 기도라고 합니다. 그동안 배웠지만 기도에는 어려 종류가 있는데, 부르짖는 기도, 눈물을 쏟는 통곡의 기도, 서원하는 기도등이 있는에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기도는 선포의 기도입니다. 인생의 가장 참담한 상황과 불가능의 상황에서 다윗이 드린 선포의 기도가 왜 중요한가에 대해서 세 가지로 살펴보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선포의 기도는 나를 깨우는 아주 강력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강력한 능력이 있냐면 내가 상황 중심으로 내가 압도당하고 거기에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기도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정말 어렵고 참담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그러지 않습니까? 눈앞이 캄캄해진다 건 내가 상황에 매몰되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도 눈앞이 캄캄해져서 내 주변에 대적들만 많아 보이고, 사람들이 나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귀에 들리는 말은 뭐냐면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하나님도 포기한 사람이다…이런 소리만 들립니다. 선포의 기도는 이런 내 영혼을 깨워주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술을 통해 믿음으로 선포함으로써 이렇게 상황에 압도당하는 내 영혼을 깨우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기에 말씀은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적어도 여러 일곱 개 정도의 선포 기도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 나오는 선포가 뭡니까? 여호와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다! 지금 다윗의 처지는 아들에게 배신 당하여 쫓겨나가는 도망가는 참담하다 못해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고개 못드는 다윗의 머리를 드리는 여호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머리를 들어주시는 분이다…이것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느껴져서 선포하는게 아니라 내가 그것이 믿음으로 취해야 되는 불가능한 상황이기에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선포 기도는 눈앞이 캄캄해진 나를 깨어나도록, 나를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각성시키는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두 번째 선포의 기도는 내 삶에 염려와 두려움을 밀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황에 압도당하고 참담한 상황이 되게되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걱정과 근심이 쓰나미와 같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걱정과 두려움은 내 상황을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이 사로 잡힌다고 어차피 불가능한 상황이 해결되지 않아요. 걱정을 밤새 해 가지고 상황이 변하면 밤새 두려워하고 염려하면 됩니다. 그런데 밤새 두려워하고 염려해 그 불가능한 상황을 변화시킬 능력은 어차피 없는 겁니다. 내가 그 감정이 압도 당하면 내 마음만 갉아먹는 것이지 그 걱정과 두려움이 내 상황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단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백해 무익한 두려움과 염려를 내 마음에 계속 심기웁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우리 마음에 염려와 두려움의 씨를 뿌리는 이유는 걱정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기도를 안 하기 때문입니다. 걱정이나 기도, 두려움이나 기도는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것이지 염려와 걱정 두려움을 붙들면서 기도가 동시에 나오지 않습니다. 선포의 기도는 염려와 두려움을 밀어내고 염려와 두려움은 기도를 밀어낸다는 것입니다. 선포의 기도가 두려움과 염려를 밀어내게 하든지 내 두려움과 염려가 기도를 몰아내고 밀어내게 하든지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이 어려워지면 당연히 두려움과 염려가 기도를 밀어내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잠수를 타고 교회도 안 나아오고 신앙생활을 다 접어버리고 그냥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립니다. 선포의 기도를 통하여 염려와 두려움을 밀어내는 이 놀라운 역사를 주님은 경험하기 원하시지, 우리가 염려와 두려움이 기도를 밀어내고 물러가게 하는 역사를 경험하게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뭐냐면 선포 기도의 능력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은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깨우기 위해 선포하는 거예요. 염려와 두려움에 계속 밀려오는 상황 가운데 있으니까 내 염려와 두려움을 밀어내기 위해 선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선포기도의 능력은 상황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처한 상황을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윗의 선포 기도에 항상 강조가 어디 있냐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다… 여호와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상황에 압도당하고 상황 자체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다윗이 상황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 성도들을 미혹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인생을 바라보도록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줄 알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인생이 어렵고 참담한 상황에는 바로 상황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모든 것을 바꾸어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그런데 선포의 기도는 이런 나를 깨워서 상황 중심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기적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고 진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순종하며 여러분들이 기도하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가진 특권은 어떤 상황에서 내 목소리로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는 특권입니다. 부를 수 있는 여호와의 이름이 있고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천만인이 나를 진치고 대적하는 것을 눈에 보이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현실은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에 그걸 넘어서서 두려움이 밀려가는 것이 영적 현실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게 이처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할 수 있는게 많이 없다는 것을 절박하게 고백하며 내 힘이 아닌 하나님의 힘으로 여기까지 살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죠. 선포의 기도를 통해 내 마음에 정말 두려움이 밀려가는 경험, 천만인이 나를 지쳐도 내 삶에 두려움이 밀려가는 그 역사를 체험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믿음의 선포로 상황 중심으로 상황을 보는게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기적,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내 자신에게 선포하는 기도로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한나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데, 한나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간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한나의 기도를 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간구하는 자로 서기 때문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세 가지의 영적인 큰 진리를 함께 마음에 새겨보기 원합니다. 첫 번째, 한나의 기도는 괴로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한나의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든 상황, 마음에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그를 하나님에게 기도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한나에게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장 큰 고통과 괴로움은 바로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게 지금도 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예전에는 그 고통이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여인이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흠일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영적으로 큰 흠과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영어로는 특별히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을 barren…메마른 여인이라 하는데 태가 말랐다는 것입니다. 농사로 비교하면 땅이 옥토가 아니고 땅이 기름지지 않다는 말과 똑같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여인의 밭이 옥토가 아니라 메말라서 아이가 안생긴다 여겼습니다. 아이 낳지 못하는 여인은 저주 받은 여인으로 몰아갔고,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은 증거로 여겼기에 한나를 마음에 고통과 괴로움이 가득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한나와 함께 또 다른 여인이 등장하는데 두번째 부인 브닌나입니다. 결국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째 부인이 집에 들어 온 겁니다. 문제는 한나와 달리 이 두번째 여인이 쑥쑥 아기를 잘 낳는겁니다. 그러니까 한나가 더 비교되고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고 늘 어깨가 쳐지고 위축되었습니다. 더군다가 두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브닌나가 한나를 향하여 격분하게 하고 괴롭게 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안 그래도 비교 당해 힘들고 위축된 한나에게 소금을 계속 뿌리고 너 같은 여인은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아.. 너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여인이야.. 너는 존재할 이유가 없어…별의별 소리를 다 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한나의 마음을 너무 힘들고 괴롭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 기도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한나가 가지고 있었던 괴로운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나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계기는 결국 현실에 갈급하게 부르짖는 문제와 결핍입니다. 아무 문제가 없고 아무런 갈급함이 없고 아무런 결핍이 없다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내가 괴로운 마음과 결핍으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나를 볼 때, 상황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이 갈급함과 결핍의 마음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을 하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계속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괴로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을 기도하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사인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에게는 특별히 괴로운 마음으로 다가오는 일들이 있다면, 그건 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도하게 이끄시는 신호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한나에게 주셨던 이 괴로운 마음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서 기도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한나의 기도는 통곡하는 기도였습니다. 지난 며칠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배운 기도는 대부분 부르짖는 기도였습니다 조용히 기도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목소리를 높여 기도하는 부르짖는 기도인데, 한나의 기도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바로 통곡하는 기도입니다. 이 험하고 아픈 세상 속에서 신앙 생활 하다보면 이런 비슷한 경험들이 있으시라고 생각을 합니다. 부르짖는 것도 넘어 하나님 앞에 주여… 이름만 부르면 눈물이 쏟아지며 통곡하게 되는 그 기도… 그게 지금 한나가 드리는 기도였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롭고 힘드냐 하면 부르짖는 것도 할 수 없어서 그냥 울부짖어야 되고 통곡해야 되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위로해도 한나에게는 위로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 남편 엘가나가 잘 위로해주고 아내 편에 서서 정말 사랑한다고 격려해도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아무리 주변에서 좋은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주고 격려해줘도 내 마음은 여전히 헛헛하고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겁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주변 사람들이 위로해 주고 함께해주고 응원해 주는게 물론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걸로 해결되지 않고 해갈되지 않는 내 마음의 헛헛함이 우리 가운데 계속 남아 있는 겁니다. 이 상하고 아픈 마음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풀어지고 하나님을 통해서만 채워야 되는 마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필요한 부분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 통곡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와 한나와 같이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통곡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한나는 그저 개인의 고통과 아픔을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한나는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부정해도 아니고 한나가 저주를 받아서도 아니고 한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큰 일을 준비하시기 위해서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나라를 세우는데 큰 지도자가 될 사무엘이 태어날 그릇으로 한나를 준비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랫동안 한나의 태를 닫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나는 이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만약에 이걸 알았다면 훨씬 덜 고통과 괴로움 속에 기도했을 수도 있고, 더 기쁨으로 인내하며 버텼을 수도 있는데 인간의 관점에서는 전혀 이 그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일들이 한나의 개인적인 한계와 고통을 가지고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큰 그림을 다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내 개인적인 한계와 고통을 가지고 주님 앞에 통곡하며 눈을 쏟아 기도하게 될 때, 내가 볼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더 큰 계획과 경륜이 녹아 있음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계획을 준비하시는 걸…우리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큰 계획을 준비하는 걸… 중요한 것은 그걸 몰라도 내 문제와 고통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통곡하며 기도하나,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 그것이 하나님께 쓰임받는 도구가 되는 것이 통곡하는 기도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세번째, 한나의 기도는 서원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서원에 대해서 좀 오해하고 있는데 서원이 하나님께서 이렇게 들어 주시면 내가 이렇게 하겠다는 조건을 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한나가 드린 서원의 의미는 기도 응답된 이후에 나의 반응을 믿음으로 먼저 고백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응답하실 기도에 나의 반응을 먼저 얘기하는 겁니다. 안타깝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을 해주시고 나서 뭐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땡큐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합니다. 언제까지 아무것도 안 하냐면 다음에 문제가 생길 때까지 아무런 믿음의 반응이 없는 겁니다. 그렇게 기도 응답을 잃어버리는게 대부분이에요.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는데 그 은혜 받고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이게 없으면 응답받고 아무 일도 안 하고 그 응답이 오히려 복이 아니라 화가 되어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한나는 지금 기도 응답 전에 먼저 그 응답에 대한 믿음의 반응을 서원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응답 이후에 나의 반응을 먼저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며 믿음의 반응을 먼저 고백하는 서원기도입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붙들고 나는 이렇게 살겠습니다… 이 결단이 있는게 우리에게 필요하는 겁니다. 한나처럼 기도할 때 먼저 믿음의 반응을 먼저 보일 때, 그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믿음으로 응답받고 반응하며 나아갈 때 여러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들이 풀어지며 역사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괴로운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통곡하며 드리는 기도, 서원으로 드리는 기도, 이 한나의 세 가지의 기도를 마음에 품기 원합니다. 나를 볼 때, 상황을 볼 때, 세상을 볼 때 찾아오는 갈급함과 결핍을 가지고 그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특별히 나의 입술을 열어 내 주변에, 전 세계에 고통을 품고 괴로운 마음으로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놀라운 은혜를 삶을 통하여 기도 응답 받게 될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에게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내 삶에 있는 문제와 어려움을 붙들고 기도하지만 이걸 통하여 더 큰 계획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큰 뜻이 녹아 있음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마음을 쏟고 통곡하는 기도의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그냥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시고 그걸 통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준비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오늘도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놀라운 역사를 본 거와 같이 나의 개인적인 아픔과 고통을 통해 시작하는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더 큰 계획과 지경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나의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 부르짖으며 통곡하는 기도를 통하여 내 삶에, 우리 교회에, 이 세상에 놀라운 역사가 기도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이 풍성하게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우리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기도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믿음의 사람들의 기도를 통하여 함께 은혜를 나누고 함께 우리의 삶에 새겨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삼손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세 가지로 나누려 하는데, 삼손의 비참한 현주소, 삼손의 마지막 간절한 기도, 하나님의 기도 응답입니다. 삼손은 성경에서 태어나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몇 안되는 놀라운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사명과 특별한 힘과 능력을 덧입고 나실인으로 구별되게 태어난 자가 삼손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특별한 힘과 능력을 사명에 쓴게 아니라 힘자랑 하는데 썼고 여자들에게 다 낭비하였습니다. 결국 눈이 뽑히고 머리털이 잘리고, 결박되어 블레셋의 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 더 비참한 건 뭐냐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삼손만 조롱과 웃음 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조롱과 웃음 거리가 된 것입니다. 삼손만 욕먹는게 아니라 삼손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이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우리들이 정신차리고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되는이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불순종해서 무너지면 나만 욕먹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욕 먹으며 나만 조롱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두 눈이 뽑히고 결박되고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삼손은 정신을 차립니다. 눈이 잘 보이고 능력과 힘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이 보이지 않아서 자기 마음대로 살고 탕진하다가 눈이 뽑히고 머리털이 다 뽑히고 결박되고 나서야 정신 차리고 돌아와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발견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삼손만 그런게 아니라 이것이 안타까운 인간의 실존인데, 내가 평탄하고 내가 힘이 있고 내가 모든 것이 잘될 때 하나님 맡기신 사명을 깨달아 알고 달려나가면 선명하게 쓰임 받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삼손과 같이 두눈이 뽑히고 결박되고 조롱과 비웃음을 당하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갔을 때야 정신을 차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눈이 있고 힘이 있을 때는 영의 눈이 닫쳐 버렸고 자기의 눈이 뽑혀 버리고 힘이 다 빠졌을 때 그제서야 영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안타깝게 너무 늦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두 손 들고 회개하게 오는 것, 이게 삼손의 현주소였고 많은 사람들의 현주소입니다. 그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머리털이 밀리고 두 눈이 뽑히고 결박되고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된 그때에 삼손은 마지막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삼손은 간절히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하였습니다. 내 인생이 간절하고 절박할 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을 때 아무런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삼손과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의 이름을 간절히 붙들어야 하는 것이죠. 마지막 한번 기회를 더 달라는 삼손의 기도는 첫 번째로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해 달라고, 생각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나를 기억하시고 나의 이름을 기억해 주시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로 살아갈 때 그들이 부르짖은 기도 또한 우리를 기억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어가는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했던 기도도 동일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임할 때 그냥 나를 기억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동안 삼손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이제 드디어 제대로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는 것을 아는 것만큼 중요한 것임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심을 믿고 의지하는게 가장 중요한 기도의 능력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내가 나를 생각하고 기억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생각하시고 기억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내 이름을 기억하시기 내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도 이 시간 주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주님 나를 기억해 주시옵소서… 내 이름을 기억하여 주시고 나의 상황을 기억하여 주옵소서…그 간절한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고백 되기 원합니다. 삼손의 두 번째 기도는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동안 삼손은 내가 가진 그렇게 놀라운 힘과 능력이 내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줄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내 힘과 능력이 나의 어떤 것을 통하여, 나의 어떠함을 통하여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며 사는 것, 그게 우리 모두의 착각입니다. 나의 어떠함을 통하여 내 특별한 머리털로 인해 내 힘이 나오고 내 능력이 나온다고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삼손은 그렇게 살아오다가 두눈이 뽑히고 머리털이 밀리고 결박되고 조롱을 당하고 나서 그가 깨달은 거죠. 내 힘이 나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거구나…내가 여기까지 온게 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구나…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능력이었구나… 깨닫고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은 주님 앞에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해 주시옵소서…부르짖는 것입니다. 내가 머리카락이 길어서 내 가방끈이 길어서 내 가정환경이 좋아서 내가 뭐 특별히 뭐해서 내가 그렇게 힘이 있고 능력이 있고 잘 산 것으로 착각하는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모든게 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고 하나님이 맡기신 힘이었고 것을 깨닫고 의지하는 기도를 드러야 합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내가 지금까지 살았구나… 내 어깨에 힘을 빼고 주님께서 나를 강하게 하사…이 고백이 있을 때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능력이 담길 줄 믿습니다. 나의 힘을 빼고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간절히 의지하는 그 기도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기도이며 삼손이 했던 간절한 기도입니다. 삼손의 세 번째 그의 기도는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그냥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을 갚겠다는게 아니라 내가 싸워 이겨야 하는 인생의 주적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그동안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이 싸워야 될 주적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여인과 놀아나고 블레셋 여인에게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을 다 탕진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삼손이 삼손이 드디어 내가 싸워 이겨야 할 주적이 블레셋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원수 블레셋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그것을 삼손은 맨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거예요. 삼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해야 될 간절한 기도는 내가 싸워 이겨야 할 주적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단 마귀라는 것을 잊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싸워 이거야 될 주적이 있는 것을 계속 깨우시고 깨닫게 하시는 손길이 있습니다. 그 주적을 싸워 이기기 위해 하나님이 맡기신 그 힘과 능력을 철저히 의지하며, 그 사단 마귀의 궤계를 폐하고 그 미혹에 빠지지 않으며 사는데 내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뭡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간절한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최후의 축제를 즐기고 있고 무방비 상태 있던 그 원수 블레셋 사람들에게 대 재앙을 가져 온 겁니다. 삼손은 그동안 살았을 때 블레셋 사람들을 죽인 거보다 죽을 때 한번에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을 정도로 원수를 갚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며 그들과 함께 죽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삼손 인생의 결론입니다. 마치 탕자가 하나님께서 맡기신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돼지 쥐염 열매 마저도 먹을 수 없게 되니까 그제서야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모습과 똑같습니다. 삼손 인생은 거의 99% 무너지는 인생이었고 실패한 인생인데, 그의 죽음 직전에 하나님 바라보고 믿음으로 돌이키며 기도와 결단을 통해 죽기 직전에 주님 앞에 돌아와 모든 것이 회복되는 놀라운 인생이 된 것입니다. 내가 언제나 하나님께 기억되는 인생으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붙들고 하나님의 사명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성도의 길임을 깨닫기 원합니다. 내가 이 시간 살아 있는 이유, 내가 살아 숨쉬며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힘 주심 때문에 능력 주심 때문임을 잊지 않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기억되는 인생,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조율되는 인생으로 살아갈 때 내 삶이 소중하고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삼손이 아니라 삼손을 끝까지 붙드시고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 힘으로 살지 않게 도와주시고 내 어깨에 힘 빼게 하셔서 나로부터 비롯된 힘이 아니라 주님으로 비롯된 힘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기도해야 사는 겁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도와주시고 철저하게 주님의 능력만 붙들고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 삼손의 기도를 붙드시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강조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께 기억 되며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철저히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모세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와 권능, 함께하심의 역사를 가장 구체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아마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그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눈으로 목도한 백성이자,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의 기적을 목도했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매일 체험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놀라운 체험을 가진 사람들은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이 정도로 놀라운 체험을 갖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역사하심을 맛보았으면 언제나 하나님 바라보고 붙들고 살았을 거 같은데 출애굽기 32장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무너지는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고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밑에서 백성들은 이렇게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을 만나러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증에 빠져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불순종에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 평가하셨습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말은 애굽의 바로 왕을 묘사할 때는 쓰는 말로 교만하다는 의미이자, 주인이 부리는 짐승이 불순종하고 주인에게 반항하고 고집 피우는 모습이 목이 뻣뻣하다 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전적인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아 여기까지 왔는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고집 피우고 목이 뻣뻣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왜 이들은 그렇게 많은 이사와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를 목도하고도 이렇게 불순종하고 이렇게 목이 뻣뻣한 백성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인내로 기다렸어야 하는데,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증 때문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만드는 영적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목이 뻣뻣한 백성들은 하나님을 나와 같은 형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조급한 마음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드는게 인간의 본질적인 타락이자 영적 교만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이해하거나, 하나님을 나와 같이 만드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뭐냐면 마음이 변질되고 타락함입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마음이 변질되고, 타락하고 변질된 마음은 이런 말도 안되는 불순종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영적 조급함에 빠져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고집 부리며 목이 뻣뻣해져 마음이 높아지며 영적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악한 백성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남은 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진멸하고 모두 쓸어 버시는 것밖에 없는 그런 안타까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중보기도하는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 32장입니다. 성도이지만 중보기도를 아예 안 하는 사람들도 있고 기도를 하긴 하는데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 끝나는게 대부분입니다. 그런 기도를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라 하는데 긍정적 의미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존하는 기도라 그럴 수 있지만 부정적 의미는 나만을 위해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내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은 기도를 넘어서게 되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그것이 더 확장되면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 전 세계를 품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내 기도 내용이 결국 내 기도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위해 몸부림치는 기도를 하는게 아니라 멸망하고 지금 무너져가는 백성을 위해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모습을 증언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하여 응답받는 통로가 되는 세 가지 비결을 함께 마음에 담아보기 원합니다. 모세의 중보 기도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상기하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붙들고 기도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도할 때 보면 주님 이게 내 문제입니다… 내 기도 제목입니다…상황 중심과 기도제목 중심으로 쏟아내듯 기도합니다. 즉 나의 어떠함을 놓고, 주변 사람의 어떠함을 놓고, 상황과 문제를 먼저 놓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응답받는 중보 기도의 시작은 나의 어떠함을 붙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 통해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 붙들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게 중보기도의 시작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긍휼과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전적인 선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부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 긍휼을 간절히 구하는게 모세의 중보기도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어떠함과 나의 필요와 나의 상황을 토해 내기 전에 먼저 주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중보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붙들고 중보기도로 간구하기 원합니다. 두번째, 응답받는 중보기도의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이것이 백성들에게 문제입니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라고만 기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들과 맺은 언약과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중보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그 언약과 약속을 기억하시고 나의 기도 들어달라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나와 주님이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지속적으로 읽고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언약과 약속이 무엇인가를 알 때 그 약속을 붙들고 선명하게 주님께 중보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기억하여 주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주님께 기도하는 중보 기도의 원리라는 겁니다. 세 번째 응답받는 중보기도의 특징은 생명을 거는 중보기도입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는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말할 정도로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말할 정도로 퇴로를 다 차단하고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생명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나를 죽여주시고 이 백성을 살려주시옵소서…부르짖는 중보기도입니다. 생명걸고 기도하는 비슷한 기도를 엘리야가 했죠. 엘리야가 사르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죽은 아들의 몸에 자기 몸을 포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는 뭘 의미하면서 기도인가 하면, 내가 죽고 대신 이 아들을 살려 달라는 생명 거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자기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모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사랑스럽고 모세를 잘 따라서 이렇게 생명 걸고 중보 기도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만 충돌하고 범죄한 게 아니라 모세에게 범죄하고 모세에게 충돌하고 부딪히고 틈만 나면 불평한 백성들입니다. 지도자를 따르지 않고 계속 불평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이 백성들을 위해서 생명 걸고 기도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백성들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생명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모세의 세 가지 중보기도의 비결은 마음에 새기며 주님 앞에 나아가기 원합니다. 결국 우리 인생이라는 것은 내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약속과 언약을 기억하고 붙들고, 그 언약의 능력에 힘입어 그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원합니다. 나의 어떠함이 아닌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붙들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모세의 중보기도와 같이 나와 내 가족을 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들을 품고, 하나님의 뜻과 선교를 품고 기도하는 그 깊고 넓은 기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불교에도 기독교에도 다 수도원 전통이 있습니다. 불교도 사찰에서 수도하는 많은 수도승들이 있고, 기독교 전통에도 수도원에 많은 수도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불교의 수도승들은 사찰에서 대부분 공동생활을 합니다. 다 같이 모여서 자고 같이 모여서 밥 먹고 모든 것을 같이 하는 공동생활을 한다 하면 기독교 수도원 전통은 철저하게 수도사들이 혼자 지냅니다. 각자의 방이 있어서 혼자 성경 읽고 혼자 묵상하고 혼자 자는 생활을 합니다.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렇게 혼자 사는 것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계속 하나님 앞에 두는 싸움을 평생 벌이는 것이 기독교의 수도원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살다 보면 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직면하게 되는데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환경과 상황이 급작스럽게 변화할 때 우리는 참 힘들고 어려움을 느끼고요. 또한 내가 의지하고 믿는 것이 사람이든 대상이든 그것이 갑자기 사라지는 변화를 경험할 때 우리의 인생이 참 힘들게 됩니다. 그렇게 인생이 참 힘들고 어려울 때 내가 그동안 의지하고 붙들었던 것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들이 훨씬 더 많았음을 발견하는 것이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야곱은 그동안 자기 인생에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고 믿는 구석이 훨씬 많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몰랐던 자가 아니었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따른다 말하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나님 외에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지하며 그것으로 문제를 계속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자가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은 형이 와서 죽이려 그러니까 가족들을 먼저 보내기도 하고 그 다음에 머리를 굴려 자기 재산을 둘로 나눠도 보고, 한쪽이 공격당하면 한쪽이라도 얻으려고 계산도 해보고, 형 에서에게 구제 받아보려고 선물을 보내 기름칠도 해봤습니다. 그리고 너무 무서워서 밤에 강도 건너 봤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다 해봤는데 결국 두려움과 불안이 없어지지 않고 커지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이 상황까지 직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야곱이 홀로 남았다는 것은 참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상황에 혼자 남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 그동안 야곱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계획과 머리 굴리는 것을 다 내려놨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가족도 보내고 사람들도 다 보내고 혼자 남아서 그동안 내가 머리 쓰고 굴렸던 모든 계획과 생각들을 다 내려놨다 이게 바로 야곱이 홀로 남았던 시점인 것입니다. 결국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어디까지 갔냐면 자기 혼자 남는 순간까지 도달한 것입니다. 저는 군대에 들어갈 때 이걸 좀 경험하게 됐습니다. 결국 내가 혼자 가야 되는 길이 있구나 또 제가 전신마취하고 수술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수술할 때도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도 결국 내가 혼자 들어가야 되는게 수술대구나…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사랑하고 나를 지지해도 어느 순간에는 혼자 들어가야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야곱과 같이 이런 홀로 남는 시점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나의 계획도 나의 모든 생각도 다 내려놓고, 심지어 나의 가족들도 다 떠나보내고 혼자 남는 겁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결국 내가 혼자 져야 하는 짐이 있고 혼자 가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도 함께 갈 수 없는 길이 있습니다. 내가 혼자 서야 되는 때가 있고 혼자 남아야 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에는 이런 결정적인 순간, 홀로 남아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시점이 있다는 것을 미리 깨닫고 살아가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그래서 내 인생을 계속 하나님 앞에 홀로 두는 연습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이 세상 것들을 붙들고 의지하는 대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붙드는 단독자로 서게 되는 훈련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의지하는 것들을 다 내려놓고 인간적인 계획을 다 내려놓고 사람들과 심지어 가족들도 다 떠나보내고 지금 하나님 앞에 혼자 서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성경은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선 기도를 밤새 씨름하는 기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밤새 씨름하는 기도를 할 수는 없으나, 때로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잠깐 앉아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밤새 씨름하는 기도를 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할 때가 있듯이 때로는 우리가 밤새 씨름하는 기도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얍복강에 있을 때, 내가 의지하는 것들이 다 사라질 때, 결국 내가 혼자서야 할 때 그때에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야곱과 같이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는 기도입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야곱과 같이 홀로 남아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며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니까 소망이 없고, 환경을 보니까 절망할 수밖에 없고, 내일 아침이면 형 에서의 손에 죽음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 가운데, 야곱의 밤새 씨름하는 기도가 얼마나 절박했고 간절했는지를 선명히 증언합니다. 어느 정도로 야곱이 간절하게 매달리고 부르짖고 기도했냐 하면 하나님의 천사가 허벅지 관절을 쳤는데도 불구하고 놓지 않는 겁니다. 옛날 성경에는 환도뼈라고 되어 있는데 이 허벅지 관절이 어디냐면 정확하게 얘기하면 사타구니입니다. 사타구니가 굉장히 민감한 부분인데 사타구니에 힘줄이 나가면 대부분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아이고 나 죽겠네…그러고 그냥 떼굴떼굴 구르겠죠. 그런데 야곱은 사타구니 힘줄이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그 손을 놓지 않는 겁니다. 주님 저 이 손을 놓지 않겠습니다…주님 나를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저 이거 못 놉니다…그게 힘줄이 끊어져도 놓지 않는 야곱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그 축복 받지 않으면 전 죽습니다...라는 간절함이죠. 그만큼 생사를 걸고 지금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이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저는 이곳을 나가지 않겠습니다…밤새 씨름하며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가 야곱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나의 사건이 되어 내가 곧 죽는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거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내가 곧 죽는다는 것을 내가 사건화하고 내면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 앞에 홀로 나아가 간절히 붙들고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 없으면 죽는 것을 다 알지만 때로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내 혼자 하나님 앞에 서서 정말 나는 하나님 앞에 축복이 없으면 죽는 존재는 것을 깨닫고 밤새 씨름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축복 주시지 않으면 저 이거 놓지 않겠습니다… 내 뼈가 부러지고 내 힘줄이 나가도 절대 놓지 않겠다는 이 간절함이 필요합니다.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에 모든 의지하는 것을 다 내려놓고 나서 하나님께 그렇게 간절히 씨름하며 밤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이 질문을 야곱은 오래전에 아주 중요한 순간에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 털을 붙이고 변장하고 음식을 만들어 갔을 때 아버지 이삭을 통하여 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때 야곱은 뭐라고 대답했냐면 저는 당신의 아들 에서…라고 말했습니다. 야곱인데 그렇게 변장하고 털을 붙이고 서서 에서로 평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에서 같이 살아야만 자기가 죽지 않고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고 생각하며 가면 쓰고 산 것입니다. 나다움을 잃어버린 채, 에서라는 가면을 쓰고 살아야 나는 축복받고 승리하는 줄 알고 지금까지 살았던 것이죠. 우리도 야곱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나다움을 잃어버린 채 가면을 쓰고 이 세상에 힘과 능력을 쫓아 오늘도 열심히 달려 살아가는게 우리 삶의 실존일 수 있는 겁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 야곱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철저하게 엎드리며 “ 주님 저는 야곱입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야곱인데 나다움을 잃은 채 가면 쓰고 에서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야곱이에요라고 고백하는 겁니다. 야곱의 이름이 뭡니까? 발꿈치를 붙드는 자, 속이는 자…주님 나는 속이는 자고 늘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붙들고 산 주님 앞에 죄인입니다. 나는 주님의 은혜 없으면 무너지는 가능성 없는 자…이렇게 절망하고 신음할 수밖에 없는 부족한 종 야곱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직면하고 가면을 벗어버리고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리는 놀라운 고백이죠. 그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야곱에게 임했습니다. 그 밤새 씨름하는 야곱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 응답은 갑자기 상황이 확 바뀌는게 아니라 야곱의 이름이 바뀌는 축복입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이름이 바뀌는게 아니라 그의 인생의 방향성과 우선순위가 송두리째 바뀌는 순간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그의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내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다는 의미 보다는 struggle with God and overcome…,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그 상황과 환경을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내 인생에 넘을 수 없는 문제와 어려움이 있는데 그것을 나 혼자 씨름하는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기도로 씨름하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기도를 씨름하면서 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넘어선다… 이게 이스라엘이라는 영적 의미입니다. 야곱은 힘줄이 끊어져서 평생 절둑 거리며 살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영광의 상처가 됐고 평생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는 더 이상 에서가 아닌, 더 이상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살아가는 축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혼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 새벽 기도의 시간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시간, 환경과 상황을 다 내려놓고 내가 의지하는 모든 계획과 뜻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동일한 사건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이 시간 손들고 옵니다…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주님의 은혜 아니면 저는 죽는 존재, 축복해 주지 아니하시면 저는 죽는 존재임을 고백하며 간절히 매달리고 밤새 씨름하며 주님 이름을 붙드는 기도를 하십시오. 하나님이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어보실 때,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고,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저는 주님의 은혜 없으면 죽는 존재입니다…난 이렇게 연약한 존재,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고백하며 진실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인생이 놀랍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서 밤새 씨름하는 기도를 통해 이름이 바뀌며 하늘의 축복이 임하며, 하나님과 더불어 상황과 어려움을 놀랍게 넘어서는 은혜가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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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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