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람왕 벤하닷이 32명의 왕들과 연합군을 구성해 사마리아 북 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왔습니다. 겉으로 보는 싸움의 전황은 북이스라엘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군사력에서 너무 큰 차이가 나니 눈에 보이는 현실은 100% 질 수밖에 없는,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아가 혼자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는 모습과 거의 흡사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겉보기에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 내가 가진 카드는 그냥 죽는 거밖에 없는 그런 절대 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이 갈멜산에서 그렇게 놀랍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은 아합왕을 포기하고도 남습니다. 그 정도면 북 이스라엘을 포기할 만 하고, 그 정도면 아합왕은 안되는 왕이라고 포기할 만 한데,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아합왕과 북이스라엘을 깨우시고 찌르시고 기회를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너희가 섬길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기 원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아합왕이 처한 그 위기 상황 가운데 놀랍게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내주십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 백성들과 아합왕의 상황은 이제 죽는 것 밖에 없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데, 그 때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오는 것입니다. 아람왕과 연합군이 밀고 내려오는 전쟁, 말이 전쟁이지 일방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전쟁인데,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선지자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입니다.
네가 큰 무리를 보느냐…전쟁하려고 밀고 내려오는 10만명이 넘는 저 큰 무리가 보이냐… 눈에 보이는 현실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이러 오는 10명 이상의 대군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위기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그들에게서 너희를 건지시고 그들을 이기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그걸 통해 아합왕과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 내가 여호와인 줄을알라..” 선포하시는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과 군사력을 봤을 때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에 지금 어떤 결정적인 변수가 등장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개입하신다는 결정적 변수가 등장한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인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결정적인 변수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아합 왕에게 기적의 승리를 주실 것이며, 그것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자기 계시로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합왕이나 북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선지자를 보내달라고 구했거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게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합왕은 위기 가운데도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선지자를 아합왕에게 보내시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을 여전히 사랑하시기에 아합왕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시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상황에서 구하고 붙드는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 알고 나의 구원자이심을 알고 바라보는 겁니다. 나의 일상의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여호와 하나님 되시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되심을 계시하시기에 그걸 알고 민감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실 이 모습은 엘리야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이미 하나님이 아합왕에게 보여주셨던 자기 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한 명과 450명이 싸워서 어떻게 한 명이 이길 수 있겠습니까? 겉으로 보는 상황과 조건으로는 엘리야가 이길 확률이 거의 없었는데, 결정적 변수는 홀로 선 엘리야에게 하나님이 계셨고 여호와의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변수가 결국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고,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넉넉히 싸워 이기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람 군대와의 전쟁에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걸 통해 이 전쟁이 영적 전쟁이 되며,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전쟁이 되며 이것을 통하여 너희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시는 말씀이 바로 성경 말씀 아니겠습니까?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과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 계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는 건 말씀을 통하여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자기 계시하신다는 겁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내면화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고 알게 되면 바로 오늘 말씀,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말씀하시는 이 놀라운 사건이 내 삶에 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하여, 내가 처한 상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계속 나를 깨워 주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는 그 뜻을 발견할 때 여러분들은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아는 것만큼 내 인생에 중요한 게 없으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시는 그 은혜를 통하여 내가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전쟁에 사용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각 지방에 흩어져 준비되어진 리더 232명과 백성들 7000명을 사용하십니다. 중앙과 대도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아합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나 바알 우상에 쩔어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지방에서는 여전히 하나님을 믿고 바알에 무릎꿇지 않는 순전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탈진과 슬럼프로 헤매는 엘리야를 깨워주시면서 하신 말씀인 7000명의 남은자들입니다. 내 눈에 보기에는 이 세상이 다 썩은 거 같고 다 하나님을 떠난 거 같고 다 바알에게 무릎꿇은 거 같은데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렇게 남은 자로 새벽을 깨우는 자들이 많이 있고, 여전히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순전한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 땅이 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각 지방에 숨어서 여전히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고 바알에게 입맞추지 않은 7천명의 남은 자들을 붙듵고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 전쟁을 이끄시는 겁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이 이끄시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게 하시겠다는 것이죠. 아람왕과 32명의 다른 연합군의 왕들이 전쟁중에 술판을 벌이고 취해 있었습니다. 군대가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전쟁 중에 술판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람왕은 그 전쟁터에 와서 술판을 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이만큼 북이스라엘을 우습게 보고 이만큼 무시한 거예요. 이것은 100%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이미 마음을 놔버린 거죠. 그렇게 적을 무시하고 우습게 보며 있을 수 없는 일인 전쟁터에서 술판을 벌이게 되는 아람왕의 나태함이 바로 하나님이 이 전쟁에 개입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 결과 당연히 이길줄 알던 그 전쟁에서 아람왕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섭게 도망가고 처참히 패배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전쟁의 결과는 아람 사람을 쳐서 겨우 이긴게 아니라, 크게 이기게 됩니다. 영적전투에는 패턴이 거의 비슷합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 변수는 하나님이 함께하심, 그 결과 하늘로부터 임하시는 능력으로 놀라운 영적 승리를 허락하게 하심…이걸 통해 내가 여호와임을 아합왕에게, 북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명히 드러내시는 겁니다.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아합왕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여전히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깨우시며 기회를 주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할 때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소망이 있을 줄 압니다. 삶에 직면하는 수많은 전쟁들이 있지 않습니까? 살다 보면 수많은 전쟁들이 우리 가운데 펼쳐 지는데 그 모든 전쟁을 내 힘으로 내가 해결하는 전쟁을 넘어 영의 일로 만드는 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직면하는 모든 전쟁을 영적 전쟁으로 바꾸는 비결은 하나님이 이끄시고 개입하시도록, 내 삶의 중심과 number one의 자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삶의 모든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이끄시는 영적 전쟁이 되는 비결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통과한 순종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내 삶의 모든 일들을 영적인 일로 만들고, 내 삶에 직면하는 모든 전쟁들을 영적 전쟁으로 만드는 놀라운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 삶의 모든 전쟁에서 나 혼자 내 힘으로만 싸우고 버티지 말고 하나님이 이끄시고 개입하시는 영적 전쟁이 되게 하십시오.내 삶에 승리 비결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알고 믿으며 내 삶의 모든 일이 하나님이 이끄시는 영적 일이 되는 것임을 믿으며 오늘도 승리하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해 아합왕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놀랍게 보여주셨습니다. 갈멜산에서 850대 1의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불로 임하시고 물로 임하시며 바알은 다 우상이고 허상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며 모든 허상의 모래성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엘리야를 통하여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다 처단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고 임하셔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선명하게 보이셨으면 아합왕은 주님께 회개하고 돌아왔어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렇게 놀랍게 증거하시는 역사 속에서도 아합왕은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8장의 갈멜산 역사를 목도한 후19장은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한 엘리야, 20장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은 아합왕을 증언합니다.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그렇게 놀랍게 증거하시는 역사 속에서도 19장 말씀을 통해 배웠지만 엘리야는 위로 올라가는 대신에 밑으로 내려가서 탈진하며 우울증에 빠지며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 놀라운 갈멜산 큰 승리 이후에 오히려 엘리야는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지 못하고 마음이 다 무너진 것입니다.
19장이 엘리야의 그런 무너짐을 증언하고 있다면 20장 말씀은 그 놀라운 갈멜산의 놀라운 임재와 역사를 목도하고도 아합왕은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와 모든 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놀랍게 역사하시며 보여주셨습니다. 물의 역사와 불의 역사로 계시하시면서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붙들도록 백성들을 깨워 주셨고 더 이상 미적거리는 신앙,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신앙을 벗어나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바알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죠. 그러면 아합왕은 적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두 손 들고 와서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갈멜산에서 불을 내리시고 비를 내리시고 놀라운 은혜를 주셨는데 여전히 아합왕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이게 많은 마음이 죄로 굳어진 인간들의 현실이고 아합왕의 영적 현주소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놀라운 표적이나 역사를 보여주면 하나님을 믿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크고 더 놀랍고 더 센 표적과 역사를 보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실제 현실은 갈멜산에서 그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어도 아합왕 같이 회개하지 않고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겁니다. 놀라운 역사와 임재를 목도하고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고 살아가며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무너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아합왕 같은 자는 포기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북 이스라엘같이 완악한 백성들을 마음을 접고 포기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여전히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고 북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아니하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도망가고 여전히 불순종하고 등돌리고 있는 아합왕에게 하나님께서는 또 한번의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아합이 처한 전쟁의 위기 속에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선명히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아합왕이 대단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대단해서입니다. 아합왕은 갈멜산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한 후에도 여전히 무너지고 바알을 숭배하고,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에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합왕을 다시 한번 깨우시며 돌라올 기회를 주시는가 하면 바로 아람왕과의 전쟁을 통해서입니다. 북쪽에 있는 아람왕 벤하닷이 모든 군대를 모았고, 32명의 왕/군주들과 연합군을 이루어 북이스라엘을 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나라들이 연합군을 조직해 내려오는 것은 국가적으로 굉장한 위기입니다. 아합왕은 아람의 전쟁 야욕으로 말미암아 큰 위기에 빠진 겁니다. 이 상황은 마치 얼마 전에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영적 전쟁을 했던 1대 850과 거의 비슷한 상황인 것이지요. 한 사람이 어떻게 850명과 싸워 이깁니까? 겉으로 보이는 상황으로는, 눈에 보이는 현실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죠. 상황으로는 마찬가지로 아람왕이 본인의 군대와 서른 두 나라의 왕들과 연합군을 조직해 전쟁을 걸어오는 모습은 북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겉으로 봐서는 결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아람왕이 전쟁에 돌입하기 전, 쳐들어오기 전에 아합왕에게 최후통첩, 한번에 기회를 주는 거죠. 너희가 나와 우리에게 다 항복하고 엎드리면 우리가 전쟁 안 걸고 그냥 조공 받아가고 중요한 것 뺏어가고 돌아갈게….전쟁은 안 일어나지만 아주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목숨은 사는데 굴욕적인 패배가 되는 겁니다. 아람왕이 전쟁 안할 조건을 제시하는데, 너의 은금과 아내들과 자녀들 다 조공으로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런 굴욕적인 최후통첩을 받은 아합왕…이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겉으로 보는 상황과 환경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아람왕이 걸어오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아합왕을 경고하며 깨우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시며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건 뭐냐면 그렇게 전쟁의 위기 속에서 아합왕을 하나님을 찾거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이름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엎드리거나,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아와 지혜를 구하는 모습이 일절 없습니다. 대신 스스로 머리를 굴려 상황 파악해보고 계산해보고 나서 그냥 군말없이 아람왕 앞에 굴복하려 합니다. 왜 굴복하겠냐고 말했냐 하면 아합왕의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보니까 군사력과 규모를 비교해 보니까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과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결론이 난 겁니다. 그래서 그 아람왕을 “내 주여” 라고 고백하며 “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런 고백을 누구에게 해야 되는 겁니까?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해야 되는 고백이죠. 내 주 하나님이여,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하나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하지 않고 세상 왕에게 굴욕적으로 하나님에게 해야 할 고백을 하고 있는 아합왕의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대하듯이 바짝 엎드리고 조공을 수용한 아합왕을 아람왕이 만족했으면 좋는데 만족하지 않고 한 술 더 뜨는 겁니다. 원하는 거 다 가지고 가세요,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바짝 엎드렸는데, 너희가 주는 거 내가 조공으로 받는게 아니라 내가 들어가서 원하는 거 다 뺏어 오겠다는 것입니다. 조공 주는 것 받는게 아니라 노략질하러 들어가 내가 뺏어오겠다는 겁니다. 아합왕이 이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고 판단이 되어, 그들의 최후통첩을 거절하고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아합왕을 깨주시며 돌아올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갈멜산에서의 놀라운 역사를 통하여, 아람왕의 전쟁 협박을 통해서, 계속 깨우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아합왕은 갈멜산의 놀라운 역사를 목도할 때 하나님께 회개하며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바알 선지자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목도했고, 모든 바알 선지자들이 처단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바알이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합왕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지금도 아람의 군대가 전쟁을 걸어올 때, 그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너는 지금 상황을 보면 안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돌아와야 되고 이 전쟁은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어서 나에게 돌아와야 사는 전쟁이라는 것을 계속 깨우쳐 주시는데 아합왕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 큰 위기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도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머리로 상황을 굴려보고 계산해보고 안 되니까 아람 왕에게 엎드리고 마치 하나님을 대하듯이 비굴하게 다 바짝 붙어 있는 그 모습, 그게 하나님께 등 돌리고 지금 여전히 무너져 있는 아합왕의 현주소입니다.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만 붙들고 악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죠. 그런 아합왕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끊임 없기 기회를 주시듯, 그런 우리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끊임없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끊임없이 돌아올 길을 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지금 나를 여기 있게 만든 것입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대단해서 이렇게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놀랍고 대단한 사랑과 은혜가 지금까지 나에게 부어지기에 내가 이 만큼 살아가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 발견하며 지금 이 순간 놀랍고 대단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운데 머물며 하나님을 선명히 바라보며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탈진과 슬럼프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 때, 우리가 붙들어야 되는 것은 놀라운 기적과 역사보다는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탈진와 슬럼프로 주저 앉은 엘리야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말씀하시며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지금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목도하고 객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함께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내 상황과 처한 형편밖에 보이지 않고, 눈앞이 캄캄해져 있는 엘리야를 향하여 하나님은 두 가지 말씀으로 깨워주셨습니다. 첫째는 너 혼자 남은게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나님께 목숨걸고 헌신이 유별난 자가 나 혼자 밖에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여러 사람이 남아 있고 그들을 찾아 기름부어줄 사명이 엘리야에게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두 사람은 왕으로 기름 붓고 한 사람은 선지자로 기름 부으라 명하십니다. 특별히 세 사람을 엘리야의 손을 통해 기름을 붓게 하시는 사명을 통해 엘리야가 지금 혼자 남은 게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목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너밖에 보이지 않고 너만 남은 거 같은데 이렇게 헌신된 차세대 리더가 이렇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서 네 눈으로 목도하고 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탈진과 슬럼프에 빠져 눈앞이 캄캄해질 때 우리를 객관화 시키도록 계속 찔러 주시고 우리를 깨워 주신다는 것이죠.언제까지요? 하나님의 시각으로 나를 바라보고 내가 처한 상황을 바라볼 때까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인생이 보여지고 내 주변의 상황과 환경이 보여질때까지….그래야만 탈진과 슬럼프를 빠져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주신 말씀은 이렇게 세 명만 있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7000명의 남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혼자 남았다고 착각하는데 너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7천명의 남은자가 있다는 겁니다. 눈 앞이 캄캄해진 엘리야는 자신 밖에 보이지 않기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7000명이나 되는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남은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이유는 열명의 의인이 없어서 망했는데, 반대로 말하면 열명의 의인이 이 땅을 망하지 않도록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야의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바알에게 무릎꿇고 모두 바알에게 돌아선 거 같이 나 혼자 남은 느낌이 들지만 실제로는 한두 명이 아니라 7천 명이나 되는 남은 자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계속 나 혼자 남았다 그러는데 너 혼자가 아니라 7천명의 사람들이 지금 남은 자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엘리야가 탈진과 슬럼프를 털고 일어나 새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때로는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나 혼자만 열심을 내는 거 같고 나 혼자만 예배드리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하면 지치고 탈진하고 마음이 무너집니다. 나 밖에 헌신하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나 밖에 예배드리는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그렇게 내 눈 앞이 캄캄하고 마음이 무너질 때 하나님은 결코 너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조금만 떨어져 주위를 둘러보면 믿음의 눈으로 예수님이 보이고, 믿음의 눈으로 이 남은자들이 보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함께할 위대한 남은 자들이 언제나 예비되어 있다는 것이죠. 전세계 흩어진 많은 곳에서 여전히 지금도 수많은 주님의 교회에서 이 세상에 무릎꿇지 않고 세상에 입맞추지 않는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그 남은 자들이 결국 이 시대를 망하지 않게 하는 자들이고, 이 시대를 바꾸는 중심이 된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사는 겁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사는 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릎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남은 자로 살아가는 사명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는 거 같고 모든 사람들이 다 돌아선거 같고, 모든 사람들이 이 세상에 길들여져 세상에 무릎 꿇고 세상에 입맞추고 살아가는 거 같은데 실제로 이 세상에서 여전히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새벽을 깨우며, 예배로 깨우며 기도로 깨우며 세상에 무릎꿇지 않고 이 세대에 입맞추지 않은 남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새벽을 깨우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며 왜 늘 거룩하고 구별되며 순종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갑니까? 이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이 세상에 입맞추지 않는 삶, 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는 자가 되며 천국을 바라보고 사단이 벌벌 떨며 무서워 도망가는 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입맞추지 않는 남은 자로 살아갈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힘을 받고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세워 기름 부으러 떠납니다. 엘리사는 매우 부유한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한게 소가 24마리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소 한 마리가 지금 시세에도 1000만원은 하는데 자기가 그냥 데리고 나온 소만 24마리니까 굉장히 부자인 겁니다. 그런 엘리사에게 엘리야가 가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엘리야를 따르기 위해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소의 기구들을 불사르고, 소 두 마리를 백성들에게 삶아서 먹인 후에 결단하고 엘리야를 따라가죠. 이걸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마음을 깨우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 혼자 밖에 안 남았다 그랬는데 이 수많은 돈을 다 던져버리고 모든 것을 불태우고 즉각 따라 이 엘리사를 봐라…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겁니다. 이걸 통하여 엘리아는 탈진을 벗어나고 슬럼프를 벗어나고 다시 한번 힘을 얻고 일어나 놀랍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하늘에 들려 올라갈 때까지… 고요한 가운데 말씀하시는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취해야 다시 살아납니다. 나의 처한 상황과 형편만 바라보고 몰두해서 나만 남아 있고 나만 어렵고 나만 힘들다라고 생각에 빠질때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기 원합니다. 보이는 것에 압도당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수천명, 수만명의 남은자들이 여전히 순전하고 거룩하게 준비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바알에게이 시간 입맞추지 않은 남은 자로 살아가기를 부름 받았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땅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만 천국에 소망을 두고 천국 바라보고 천국을 향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입맞추지 않은 남은 자로 천국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남은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직 나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힘으로만 가능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인생과 내가 처한 상황을 바라보며 탈진과 우울과 슬럼프를 벗어나 새 힘으로 일어서며 끝까지 선명하게 주님 앞에 쓰임 받으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탈진하고 슬럼프에 빠진 엘리야, 큰 승리 이후에 그렇게 마음이 무너진 엘리야에게 바른 훈계와 바른 교훈을 주시기 전 먼저 그를 재우시고 먹이시고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충분히 재우시고 충분히 먹이시고 충분히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른 소리도 바른 가르침도 이렇게 온전한 회복과 쉼이 있은 후에 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죠. 너무 조급하게 힘들고 아파하며 마음이 무너진 사람에게 정답을 던져 주려고 하는 조언을 해주려 하는 우리의 조급함을 내려 놓고 먼저 먹이고 재우고 충분히 어루만진 후에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이 영적 기다림과 분별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충분히 재우시고 먹이신 후 드디어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부르시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엘리야야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이 말씀을 하시기 전 이렇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엘리야 내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이 말씀은 단순히 장소의 의미만이 아니라 지금 너가 왜 이러고 있느냐에 대한 자신을 돌아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어 있던 아담을 향해 “아담아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듯이, 엘리야에게 동일하게 물으시는 겁니다. 너가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될 사람인데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고 사명을 향해 달려가야 되는데 내가 모든 사명을 버리고 지금 너가 너의 모든 형편에 압도 당하여 왜 이렇게 죽기를 구하며 무너져 있느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엘리야는 대답하는데 그 대답 속에 왜 그렇게 엘리야가 영적으로 탈진하고 슬럼프에 빠지며 우울증에 빠졌고 지금 죽기를 구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대답에는 자신의 열심이 방점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히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특별했고 유별났다는 것입니다. 항상 나의 열심과 나의 무엇을 한 것이 강조될 때 이렇게 확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물론 놀라운 선지자고 위대한 선지자입니다만 그가 놀랍고 위대했던 이유는 그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를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함이었고 그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과 능력이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갈멜산에 임한 불의 기적과 물의 기적은 엘리야의 열심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개입하신 하늘의 은혜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그릇과 같이 도구와 같이 쓰임 받은 자가 엘리야인데 마음이 무너지고 탈진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일하심과 능력과 역사하심은 보이지 않고 오직 나의 열심만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했는데 내가 하나님께 이렇게 유별나게 잘 섬겼는데 그렇게 되니까 마음에 공허함이 찾아오고 무너지고 이세벨의 카톡 메시지에 그렇게 탈진에 빠져 버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낙심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탈진하고 무너지기 위해 우리가 특별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 바라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대신 나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냥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 눈이 보고 싶은 대로 가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엘리야의 대답 속에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 뭐냐면 오직 나만 남았다는 착각입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탈진과 우울증에 빠진 이유는 나는 그렇게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히 유별났고 또 그렇게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둘러보니 오직 나만 남았다는 것이죠.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에게 찾아온 것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겁니다. 좀 뒤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다 사라지며 나만 남았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니까 시야가 좁아져서 나만 이렇게 열심히 하고 나만 목숨 걸고 충성하고 왜 나만 유별나게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생각하니까 당연히 그 구조 가운데 우울하고 슬프고 괴롭고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형편에 집중하게 되고 자신의 목숨을 잃을까봐 벌벌 떨게 되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가게 되는 겁니다. 사실 아합왕도 이세벨도 오랫동안 엘리야의 목숨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엘리야는 아합왕의 위협 가운데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언제나 이런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유독 지금이 순간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는게 그렇게 크게 다가오고 그렇게 큰 문제가 되며 그것이 자신을 압도하는 그런 탈진과 슬럼프와 우울을 찾아오게 만드는가… 그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내 자신에게 매몰되어 있고 나만 남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변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오직 자기밖에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그 탈진과 무기력과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내리십니다. 지금 자기밖에 보이지 않고 눈앞이 캄캄해진 엘리야에게 나가서 하나님 앞에 서라…즉 엘리야 자신을 하나님 앞에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진 엘리야를 데리고 나와 하나님 앞에 서게 하는 겁니다. 너는 원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던 자야…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통해 하늘의 은혜를 공급받은 자야…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그를 여호와 앞에서 서게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엘리야 앞에 임하시고 역사하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중요합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놀라운 역사를 먼저 보여주시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크고 강한 바람이 부는데 그 놀라운 바람 가운데 하나님이 안 계셨습니다. 바람 후에 땅이 진동하는 지진이 있었는데 그 지진 가운데도 하나님이 안 계셨습니다. 그 지진 후에 놀라운 불이 임했는데 그 불 가운데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뭐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 임재에 놀라운 역사의 모습이죠. 성령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신다 그러면 이 셋 중에 하나 아니겠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 그 가운데 흔들리는 지진, 그리고 놀라운 불…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 감각적이고 시각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역사인데 그 속에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세가지 놀라운 모습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화려하고 대단하고 놀랍게 역사하실 것 같은 그 하나님의 모습 가운데 하나님은 실제 안 계셨다는 겁니다. 그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 가운데 안 계셨는데, 그 후에 세미한 소리에 하나님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때로는 바람과 지진으로 때로는 불과 같이 놀랍게 역사할 때가 있습니다. 갈멜산에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 때고 분명히 불의 놀라운 역사로, 물의 놀라운 역사로 하늘로부터 임하셨습니다. 내가 위로 올라갈 때나 갈멜산 같은 영적 승리를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그런 방법으로 임하실 때가 많습니다.반면에 인생이 바닥으로 내려가고, 인생이 힘들고 탈진하여 죽을 것 같은 터널을 통과할 때, 엘리야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는 그런 큰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였음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기적을 붙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일상에 찾아오시는 세미한 말씀, 그동안 늘 있어 왔는데 내가 깨닫지 못했던 그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지금 터널 한 복판에서, 깊은 수렁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탈진하고 자빠져 있는 엘리야에게 가장 필요한 하나님의 임재, 그가 붙들어야 될 하나님의 임재는 그가 잊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세미한 음성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수렁에 빠져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엘리야를 그 세미한 말씀이 살린다는 겁니다. 매일 내 삶의 바람이 임하고 지진이 임하고 불이 임하는게 아닙니다. 그건 아주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사건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이고 임재입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우리 삶에 경험됩니다.그런데 매일매일 주시는 주님의 세미한 음성과 말씀 또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을 듣지 못하면 내가 주님을 만났는데도 여전히 힘들고 내 삶에 믿음의 기복이 너무 큰 거예요. 엘리야와 같이 저 위에 올라갔다 땅에 떨어지는 이런 경험을 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될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세밀하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매일 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젖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그 세미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고 놓치고 무감각하게 살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저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모든 것을 놓고 싶고 죽고 싶을 때, 나밖에 보이지 않고 상황 밖에 보이지 않아 앞이 캄캄해질 때 세미하게 주시는 말씀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삶 가운데 매일매일 세미한 말씀을 귀담아 들을 때가 있고, 그 세미한 말씀을 붙들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상황과 형편에 집중하여 오직 나만 남았다 생각이 들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상황에 눈앞이 캄캄할 때,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불러 세우시는 주님의 그 놀라운 계획하심에 내 인생을 맡기십시오. 늘 주셨던 그 말씀이 세미한 음성으로 마음을 치시며 그 세미한 말씀을 붙들었을 때 저와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회복이 은총이 있을 줄 믿습니다. 그 세미한 말씀을 들을 때 엘리야와 같이 다시 살아날 것이고,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놀라운 역사를 여러분들이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엘리야와 같이 세미한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회복과 돌파가 일어나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풍성히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불의 기적과 물의 기적으로 놀라운 영광와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갈멜산의 영적 전투는 역시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이고 쓰임받는 위대한 선지자라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되는 놀라운 천국 맛보기 경험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엘리야가 큰 승리 이후 한번에 마음이 무너져 영적 탈진과 우울증으로 로뎀나무에 죽기를 구하며 주저 앉아 있는 것 또한 엘리야의 실존입니다. 마찬가지로 갈멜산에서 엘리야 같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천국 맛보기 경험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면 동시에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는 그냥 죽었으면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로뎀나무의 엘리야도 나의 실존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다보면 산꼭대기에 있고 천국 맛보기를 경험하는 좋은 때만 기억하고 그때만 나의 인생인 것처럼 착각하고 꾸미며 살아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지만 이 험하고 악한 세상 병든 세상을 살아가기에, 죄성이 있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갈멜산의 놀라운 영적 승리만 있는게 아니라 주저 앉아 죽고 싶은 탈진한 모습 또한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때로는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정말 딱 죽었으면 좋겠는 로뎀나무의 경험이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엘리야가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영적 탈진과 슬럼프가 온 것은 어떤 큰 일 때문이 아니라 이세벨이 보낸 카톡 메세지 때문이듯, 정말 작은 일이 나의 마음을 크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요.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마음이 쉽게 무너지고, 탈진과 슬럼프에 헤매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자신에 대해 너무 실망할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이 신실한 성도가, 나같이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자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일로 내 마음이 이렇게 쉽게 무너질까? 내가 어떻게 이런 작은 일로 영적 탈진과 슬럼프가 와서 죽고 싶은 마음이 가득 할까?
말씀이 우리에게 엘리야의 이 두 모습을 다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갈멜산에서의 엘리야도, 로뎀 나뭉메서의 엘리야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 생활이라는 겁니다. 엘리야 같이 위대하고 놀랍게 쓰임받는 선지자도 이렇듯이, 우리 인생에는 이런 두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라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너무 큰 기대하지 말고 탈진하고 슬럼프에 빠진 때 이상한 일 만난 것처럼 놀라지 말고 그런 나를 인정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그 무너진 현장에서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것입니다. 로렘 나무에 주저 앉은 내 존재를 부인하지 않고 나를 미워하지 않고를 받아들여야 산다는 겁니다. 특별히 나의 인생에도 그게 중요하고, 내 주변에 타인의 인생에도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잘 쓰임받고 헌신하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깊은 어두움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내 자신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로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은 우리가 그 로뎀 나무에 계속 주저 앉아 있으면 안된다는 것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지만 때로는 우리 마음에 영적 탈진이 찾아오고 슬럼프가 찾아올때, 그 영적 탈진과 우울증의 상태로 계속 내가 있도록 놔두는 것 또한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되 어떻게 하면 그 영적 탈진과 슬럼프, 우울감을 벗어날 수 있을까? 죽고 싶은 내 마음에서 벗어나는 비결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천사를 엘리야에게 보내 주셔서 하신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그 세 가지는 우선 재우심, 우선 먹이심, 어루만지심…입니다. 첫번째는 일단 재우는 겁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탈진하여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에게 옳고 그름을 먼저 얘기하는게 먼저 쉬게하고 자게 하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 천사가 찾아와 두번이나 엘리야를 푹 자게 하심을 강조합니다. 너 같은 선지자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크리스챤이 어떻게 마음에 죽고 싶은 생각이 드냐…바른 이야기를 해주기 전에 우선 먼저 푹 재우셨다는 겁니다. 엘리야를 혼낼 게 없어서 나무라지 않으시고 안 혼내신게 아니라 먼저 해야 될게 있다는 것이죠. 영적 탈진이나 우울증에 빠졌을 때 내가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런 깊은 지옥 맛보기의 경험을 하고 있을 때 해야 될 첫 번째는 먼저 쉬게 하고 재우는 겁니다. 영적 탈진이나 우울증에 걸리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고 싶은 마음에 밤에 잠이 안 와요. 위축되고 무너진 생각이 너무 많아 가지고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너무 실망하고 좌절해서 내 모습을 인정할 수 없어서 잠을 잘 수가 없죠.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겁니다.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나로 하여금 우선 자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쉬고 자야 하는가 하면…충분히…자고 일어나 또 잘 정도로…뭘 따지고 바라보고 평가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안에서 푹 쉬고 자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는 일단 먹이는 겁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 머리에 불에 구운 떡과 한병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또 잠에 빠진 엘리야를 위해 두번째 식사를 준비해서 일어나 또 먹이십니다. 두번이나 그 말씀이 반복됩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박박 아게 돌아갈 때는 먼저 먹고 먼저 재워주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내 주변에 이렇게 힘든 사람들에게 우리가 먼저 해줘야 할 것은 먼저 먹이면서 쉬게 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밥을 사주는 것을 통해 쉼과 회복을 경험하며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잇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돈을 쓰는게 바로 탈진과 슬럼프에 절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새 힘주는 축복의 식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이름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좋은 얘기를 들어주고 그들에게 공감해주는 것이 이처럼 놀라운 회복의 힘이 있는 겁니다. 세번째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입니다. 이렇게 먼저 재우고 먼저 먹이심을 통해 하나님의 천사가 엘리야를 어루만져주시는 겁니다. 탈진하고 우울감에 빠져 죽고 싶은 엘리야에게 먼저 먹이고 먼저 재우시며 어루만져주신 겁니다. 충분히 먹이고 충분히 재우면서 그를 토닥토닥 해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탈진하여 슬럼프로 죽고 싶다고 주저 앉아 있을 때,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천사를 보내주셔서 회복의 은총을 주십니다. 아합왕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내주셔서 살리셨듯이, 이세벨이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살려주시는 겁니다. 우리에게는 때로는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간절히 필요하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영적으로 탈진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베드로를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수제자는 커녕 예수님을 믿기도 어려운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찾아가셔서 하신 순서도 똑같습니다. 아무 얘기하지 아니하시고 숯불에 생선을 구워 주셔서 베드로를 먼저 먹이십니다. 옳은 이야기 혼내실 이야기는 나중에 해시고 먼저 먹이시면서, 함께 하시며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시며 베드로를 어루만져 주시는 겁니다. 그 은혜가 베드로를 살렸고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신 것입니다. 그 모든 동기는 뭐냐면 우리를 향하여 여전히 바라보시는 주님의 따뜻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기로 작정하신 놀라운 사랑의 모습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여러분들이 갈멜산에서 영적인 승리를 경험하고 천국 맛보기를 경험할 때도, 로뎀 나무 밑에서 힘들고 어려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주저 앉아 있을 때도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내일 예수님을 배반하고 다 떠날 사람들이어도, 어떤 조건을 두고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먼저 무조건 사랑하신 그 예수님의 사랑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분명히 책망을 하시고 깨우시는 바른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런데 그 전까지 먼저 재우시고 먹이시는 겁니다. 먼저 충분히 어루만져 주시는 겁니다. 어려움과 아픔 가운데 정말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에게, 위로한답시고 옳은 이야기와 정답을 먼저 말 하면 마음에 더 상처와 어려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믿음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라…왜 그거 하나 못이기냐…의지 부족이다…이런 이야기들은 그 사람을 찌르고 두번 죽이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말들은 언제 해야 되냐면 충분히 어루만져 준 후에, 충분히 쉬고 먹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는 겁니다. 옳은 소리를 바른 타이밍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성도의 지혜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갑자기 찾아온 영적인 탈진과 우울증으로 마음이 무너진 엘리야를 회복시키시는 이 방법을 마음에 새기며 내 인생에 주님의 어루 만지심과, 충분히 쉬고 먹이시는 그 사랑이 우리 가운데 경험되어 새 힘으로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하고 사주며 그들을 어루만지는 것을 통하여 그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새 힘이 전달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원합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의 어루만져주심, 먹이시고 쉬게 하심을 통해 힘을 얻고 다시 일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귀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20대 젊었을 때는 여러 음악인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큰 콘서트나 공연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그런 콘서트나 공연을 한 직후 음악인들이 굉장한 공허함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공연이나 콘서트 이후에 찾아오는 그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그렇게 폭음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큰 승리 이후에 그 승리가 더 우리를 채워주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좋은 디딤돌이 되면 좋은데 많은 경우에는 큰 승리 이후에 사람들이 공허함에 빠지고 낙심하게 되고 탈진하게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큰 승리 이후가 축배를 들고 즐거워 할 때가 아니라 사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조심해야 될 때입니다. 큰 승리가 우리에게 매우 좋은 일이지만, 동시에 매우 위험한 때라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것은 중요한 영적 지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선지자 중에 가장 큰 선지자라고 할 수 있는 엘리야의 큰 승리 직후 찾아온 영적 탈진과 우울증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장인 18장을 통해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놀라운 큰 승리를 보았습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홀로 붙어서 그 바알 우상이 허상인 것을 드러내며 모래성과 같이 백성들의 착각을 다 무너뜨리며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모든 승리를 주시는 참 신임을 선포하며 갈멜산에서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영적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알 선지자들을 모두 죽여서 진멸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회색지대 잊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 선포하며 백성들이 모두 변화받는 듯했습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 주시는 그 기적까지 완성하는 것을 통하여 비를 멈추게 하시는 분도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까 갈멜산은 엘리야에게 있어 물에 기적이 임한 현장이자 불의 기적이 임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 승리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18장 마지막에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이 주신 힘을 의지하여 놀랍게 뛰어가는 모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그렇게 18장에서 놀라운 갈멜산 영적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면, 19장에서 그 다음 이어서 놀라운 일이 계속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오늘 말씀은 거의 반전 중에 반전입니다.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 그 위대하게 쓰임받은 선지자 엘리야가 그 큰 승리 이후에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고, 영적 탈진과 영적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엘리야가 영적 탈진과 우울에 빠지게 된 계기는 아주 큰 어려움이나 큰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trigger point, 그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은 뭐냐면 이세벨이 보낸 카톡 메세지였습니다. 내가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너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모두 처단했지? 그 죽은 사람들과 같이 내 손에 곧 죽을 줄 알아….이렇게 이세벨이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세벨의 카톡 메시지 하나에 갑자기 엘리야 마음이 무너지며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했고, 갑자기 탈진과 갑자기 영적 우울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큰 승리 이후에 조심하지 않고 영적 공허를 가만 놔두면 이렇게 된다는 겁니다. 작은 카톡 메시지 하나에, 사람의 전화 한통에, 수군수군거리는 한 마디에 내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큰 승리 직후 마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 철저히 의지하지 않으면 영적 공허 가운데 이렇게 사단이 틈타서 한 번에 무너지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엘리야 같은 그런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어떻게 탈진하고 우울할 수 있을까? 성경은 이 부분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증언하는데 그럴 수 있는게 인간이라는 겁니다.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고 탈진한다면 좌절한다면 저와 여러분들 같은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죠. 큰 승리 직후 그렇게 이세벨의 카톡 메세지 하나에 마음이 무너지고 나니까, 세 가지 일이 엘리야에게 찾아왔습니다. 첫번째는 “그가 이 형편을 보고..”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현실에만 집중하고 매몰되어 있었던 자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영적 현실에 집중하기 바빴지 다른 눈에 보이는 현실이나 형편이 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세벨의 카톡 메시지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무너지니까 갑자기 자신의 형편에 시선이 집중되는 겁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난 지금 이세벨에게 곧 죽게 되겠네….갑자기 내 형편과 내 현실에 집중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그 하나님이 주시는 형편 영적 현실의 절대 가치를 두고 살았던 자인데 갑자기 영적 우울과 탈진이 찾아오니까 눈에 보이는 자신의 형편 절대 가치를 두면서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가 왜 탈진에 빠지고 영적 우울감에 빠지며 마음이 무너집니까? 갑자기 모든 시선이 내 형편과 세상 형편에 집중하고 내 형편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한 형편이나 현실은 모두 상대적으로만 중요한 현실이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형편에 절대 가치를 두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 같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현실과 형편에 마음을 쏟지 않고 모든 시선이 눈에 보이는 현실과 형편에 쏠리게 되면 탈진과 우울감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엘리야에게 찾아온 건 자기의 생명을 위해 모든 사명을 내려놓고 도망친 것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아합왕에게 쫄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가 일대일로 독대했던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아합왕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를 목숨 걸고 가감없이 선포했던 선지자였습니다. 1대 850의 영적 전투에서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생을 던지며 그 영적 전쟁에 탱크와 같이 돌진해 나아갔던 자가 엘리야였습니다. 근데 영적 탈진이 오니까 어떻게 되냐면 자기 생명을 위해 모든 사명을 내려 놓고 도망하는 겁니다. 갑자기 내 생명이 중요해지며….내가 이세벨에게 죽으면 어떻하지….위축되어 내 생명을 위해 벌벌 떠는 자가 됐습니다. 교회에서도 보면 열심히 잘 사역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열심히 잘하다가 갑자기 다 내려 놓고 안 하겠다는 겁니다…그리고는 숨어버리고 예배에도 안 나옵니다. 그게 다 뭐냐면 마음이 무너진 영적 탈진이고 우울 증상입니다. 엘리야와 같이 갑자기 내 형편과 눈에 보이는 현실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이거 한다고 밥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이러면서 내가 살려면 하나님이 주신 사명 모두 다 내려놓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영적 탈진과 영적 우울증에 빠지면 이렇게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 내려놓고 도망갑니다. 세 번째로 엘리야는 죽고 싶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엘리야의 영적 탈진과 우울증은 심해서 나는 죽고 싶다고 로뎀 나무 밑에 누워버렸습니다. 영적 탈진과 우울증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 은혜를 기억하는 대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기억하는 대신 나는 죽는게 좋겠다고 아우성치며, 지금 당장 내 목숨 가져가 달라고 하소연 합니다. 이세벨에게 죽으니, 나는 죽고 싶습니다…난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겁니다. 죽고싶다고 하나님 앞에 말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얼마 전까지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고 갈멜산에서 큰 승리를 경험했던 엘리야입니다. 주님 날 죽여주옵소서…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엘리야는 지금 죽고 싶은 겁니다. 사명으로 놀랍께 쓰임받던 그 힘은 다 어디가고 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거예요 구약 성경에서 엘리야 같이 놀랍게 쓰임받은 선지자가 어디있습니까? 이렇게 놀랍고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큰 승리 직후에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깊이 묵상하며 엘리야의 그 무너짐과 영적 탈진과 우울증이 나의 자화상일 수 있음을 거울과 같이 바라보고 적용하지 원합니다. 영적으로 탈진하고 영적 우울증에 빠져 자기 환경에 매몰되고 그 형편을 가지고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도망가며 죽고 싶다고 지금 하나님께 발버둥 치고 있는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저와 여러분들의 자화상일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혹시 마음이 무너지고 영적으로 탈진이 오거나 우울한 증상이 있습니까? 내가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지 말고 엘리야도 그런데 나도 그럴 수 있다라고 겸허히 인정하기 원합니다. 나도 마음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고, 이렇게 넘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특별히 큰 승리 이후 하나님이 주신 큰 승리 이후에 조심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쉽게 마음이 무너지고 넘어질 수 있음을 정확하게 붙드십시오. 하나님을 바라보고 철저히 엎드려야 되는데 큰 승리 직후 가장 중요한 게 내 마음 관리인데 그 마음을 가만 놔두고 공허한 상태로 두게 되면 거기에 이세벨의 카톡과 같은 사단의 미혹이 우리 마음을 한꺼번에 확 흔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미리 대비하고 조심하십시오. 큰 승리 직후 엘리야가 무너졌던 그 패턴을 마음에 새겨 엘리야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우리가 주님 앞에 영적으로 대비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엘리야와 450명의 바알 선지자 사이에 갈멜산 영적 전투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바알 선지자만 450명이지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합치면 1대 850의 싸움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을 봤을 때는 엘리야가 이길 확률이 거의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이 영적 전쟁을 당당하게 쫄지 않고 떨지 않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을 향하여,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제 바알 우상을 섬기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경고하며 이 영적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먼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이 불을 내려 달라고 하루종일 기도 했습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고, 그게 안되니 자해를 하고 피를 흘리고 미친 듯이 광란의 기도를 드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루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450명 바알 선지자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는 풍요와 번영을 주는 신이라고 여겼던 바알 우상이 얼마나 허상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이시며 그들의 기대와 허상을 모래성 허무듯이 다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렇게 바알 우상을 향한 기도가 빈 수레로 끝난 후 드디어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응답을 요청하기 전에 엘리야가 제일 먼저 했던 것은 바로 무너졌던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이 여호와의 제단이 왜 무너졌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 이 바알 우상을 섬기고 겸하여 붙들고 회색지대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를 드린다 말하지만 마음은 세상과 바알의 다 빠져 있을 때 여호와를 향한 제단은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면 하나님의 제단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무너진 제단이라는 것은 보이는 제단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제단도 모두 포함합니다. 3년간의 기근을 통하여 그들은 말씀에 기근을 경험했고 여호와의 제단이 이렇게 무너졌는데도 애곡하지 않는 영적 파산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지금 그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회색지대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목도하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은혜를 사모하지 않고 말씀에서 떠난 결과가 이렇게 여호와께 쌓는 제단이 무너진 거구나…무너진이 제단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직면하고 깨닫게 합니다. 동시에 백성들과 함께 그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제일 먼저 수축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방법인데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수축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무너졌던 그 모든 관계를 먼저 회복하며 제단을 수축하는 겁니다. 무너진 제단을 수축하며 하나님의 관계가 다시 세워지는 그 모든 과정은 우리 힘으로 수축되는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그 이름을 의지하며 세워지는 겁니다. 반대로 말하면 오랫동안 바알 우상에 마음을 다 빼앗기며 하나님에게서 등돌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여호와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멀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여호와의 힘을 의지하는 방법, 여호와의 이름을 붙드는 방법을 알려주는 겁니다. 바알 우상에 빠져 무너진 신앙을 다시 세우는 것은 여호와의 힘과 이름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너진 제단을 다시 수축하고 나서 엘리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데 그 제단에 송아지의 각을 뜨고 물을 계속 붓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붓냐면 그 물이 주변 도랑을 다 적실 때까지 흘러 넘치도록 붓는 겁니다. 하늘에서 불이 임해서 송아지를 태우려면 가장 바짝바짝 메마른 곳에 불이 잘 붙지 않겠습니까? 3년 기근 상태이니 wild fire같이 불이 붙기 시작하면 확 타오르듯이 모든 땅이 바짝 메마른 상태입니다. 송아지를 제물로 각을 떠서 바쳐서 제물로 하늘에 불이 임하려면 가능한 마른 상태를 유지해야 잘 붙을 땐데 엘리야는 정반대 행동을 하는 겁니다. 불이 붙지 않을 조건을 만들듯이 모든 곳을 물로 흠뻑 적셔 놓는 겁니다. 이것을 통하여 불가능 가운데 이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정반대 환경, 불이 붙기에 가장 좋지 않은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상황을 모두 불가능한 상태로 돌려놓고 그 흠뻑 젖은 제단과 물 도랑 앞에서 엘리야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는 그냥 불이 임하게 도와 주시옵소서…바알과 싸워 이기게 해주세요…정도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기도하는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이 땅에 선포하는 기도였습니다. 기도의 핵심은 바로 바알 우상이 허상이라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살아 계신 하나님인 이스라엘 중에 선포하며 드러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간절히 드리는 우리 기도는 나의 필요와 소원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는 나의 기도이지만 결론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오직 참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이심을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내 상황에 문제가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풀리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게 하옵소서. 그게 말씀을 근거한 기도이자 엘리야의 기도인 것입니다. 그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은 즉각적인 불로 하늘에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늘의 불은 그 모든 것들을 한 번에 태우시고 도랑에 물도 다 햝을 정도로 완전히 태워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선명하게 선포하며 영광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신 사건이죠. 갈멜산에 임한 불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과 온 세상에 주인이심을, 우리가 진정 믿고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불이었습니다. 그걸 통하여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하나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불을 목도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고, 엘리야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처단하였습니다. 그 백성들을 영적으로 살리기 위해 바알 선지자들을 다 처단하는 겁니다. 백성들을 어둠의 구렁텅이로 끌어가고 있는 그 바알 선지자들을 다 진멸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에 하늘의 불로 응답하셔서 갈멜산에서 놀라운 승리를 이렇게 완성하신 겁니다. 세상에 마음 다 빼앗긴 증거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이름을 멀리한 결과로 우리 마음에 결핍과 기근이 있고 메마르고 황무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들지 못하고 하나님과 세상을,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며 무너진 나의 제단을 목도하기 원합니다. 무너진 내 마음 속 제단을 목도하며 다시한번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고 회복하길 주님을 원하십니다. 세상을 의지하고 기대고 바알을 의지하고 기대했던 우리 삶을 청산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다시 한번 그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에서 참된 예배자로 회복되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며 세워 가는 것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또한, 엘리야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기 원합니다. 그냥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필요한 걸 채워주시고 내 소원을 들어주세요… 기도하는게 아니라 나의 필요와 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며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가 믿을 뿐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붙들고 살아야 될 백성임을 선명해 보여주시기를 기도하는 겁니다. 그걸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임하셔서, 우리 안에 모든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태우는 놀라운 갈멜산의 부흥을 경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 갈멜산에서 영적 전쟁 승리, 그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도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악한 왕인 아합은 3년의 기근 원인이 자기에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엘리야에게 책임회피와 핑계 논리로 전가하려고 했습니다. 그 엘리야의 깨우고 찌르는 진리에 귀를 막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듣지 못하는 아합에게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과 갈멜산에서 그 유명한 영적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참 하나님이 누구시고 참 의지할 신이 누구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나기 위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영적 전투를 하는 겁니다. 동시에 엘리야는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에게 깨우고 찌르는 말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바알을 섬기는 것도 아닌 이런 회색 지대에서 이렇게 어정쩡하게 신앙생활하지 말고 하나님을 섬길 거면 제대로 결단하기를 촉구합니다. 여호와와 바알을 겸하여 붙들고, 실제로는 바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백성들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중 생활 청산과 결단을 촉구한 후 엘리야는 계속해서 백성에게 1:850의 영적 전쟁의 현실을 직시하게 합니다. 엘리야 혼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싸우는 겉으로 보는 현실, 눈으로 보는 현실로는 게임이 되지 않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등장했지만 사실 450명이 아니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 400명을 합치면 850명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세벨에게서 녹을 먹고 자라는 종교 공무원들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세벨의 말에 껌뻑 죽고 거기에 길들여져 있는 종교 지도자들 그 850명과 엘리야가 지금 영적 전투를 벌이는 것을 직시하라는 겁니다. 1:450이던 1: 850이던 이미 결정난 싸움이자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현실은 마치 여리고성 전투와 똑같고, 다윗과 골리앗의 전투와 똑같이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이 엘리야가 직면한 1대 850의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싸움이 이렇게 늘 말도 안 되는 싸움, 내 힘으로는 100% 이길 수 없는 싸움 가운데 서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겉으로 봐서는 절대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싸움을 혼자 싸우는데 23절 이후에 보게 되면 모든 그 영적 전투의 원리와 주도권을 엘리야가 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송아지의 각을 떠 가지고 거기에 믿는 신의 이름을 불러서 불러 응답하는 신이 진짜 하나님이다…라는 그 영적 전투에 원리와 룰을 설명해주면서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엘리야는 지금 쫄거나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그 영적 전쟁에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담대하게 바라보는 엘리야의 놀라운 삶입니다. 그 영적 담대함의 핵심은 바로 내가 믿고 의지하는 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있습니다. 내가 부르는 대상이 누구인가라는데 있다는 겁니다. 기도에서 통성 기도도 중요하고 방언 기도도 중요하고 침묵 기도도 다 중요합니다. 이것은 뭐고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닌 방법론의 문제이고, 이런 방법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질문은 기도할 때 내가 누구를 향하여 누구의 이름을 붙들고 하느냐 하는 것이죠. 내가 하는 기도가 정말 예수님의 이름을 붙들고 예수님을 향하여 내 마음을 쏟는 기도일 때만 진정한 의미에 기도입니다. 아무리 크게 외치고 아무리 오랜 시간 방언 기도를 하고 아무리 겉으로는 대단해 보여도, 예수 이름을 붙들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건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기도인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입술을 통하여 우리에게 정확하게 직언해주시는 겁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불러야 산다…여호와의 이름을 향하여 인생을 걸어야 산다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의 이름만을 부르며 여호와의 이름에만 인생 걸며 기도하고 살겠다 결단하면 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주도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비결이자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인 겁니다. 엘리야는 얼마나 담대한지 사람이 많은 바알 선지자들에게 먼저 기회를 줍니다. 그래서 450명의 바알 선지자가 먼저 그들의 신에게 기도합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방식이 네 가지가 등장하는데 첫 번째는 제단 주위에서 뛰놀았고, 두번 째는 큰 소리를 불렀습니다. 450명이 뛰놀면서 큰 소리로 기도하니 대단해 보였고 무언가 있어 보였을 겁니다. 그런데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광신과 자학의 모습으로 기도가 나아갑니다. 세번째로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며 기도하고, 그렇게 해도 안 되니까 네번째로 미친 듯이 떠들며 기도했습니다. 광신의 기도, 바알 기도의 특징은 겉으로는 대단해 보였고, 겉으로는 시끄러웠고 겉으로는 무언가 있어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겉은 화려한데 속은 텅 빈 것이 바알 기도의 특징입니다. 특별히 우상이나 잘못된 광신의 특징은 항상 이렇게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학대하고 자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바알 숭배 기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하기 위해 이런 학대와 자해를 했던 또다른 우상 숭배가 있는데 바로 몰렉이라는 우상입니다. 몰렉의 제사는 자기의 기도가 절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했던게 뭐냐면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쳤던 겁니다.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자기의 몸을 자해하는거나 그 어린아이를 제물로 드리는거나 결이 똑같은 겁니다. 항상 학대하고 자해하고 찌르며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며 자기의 뜻을 관철하려고 하는게 사이비와 우상의 특징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게 결론입니다.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복의 은혜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3년의 기근을 지나고 내가 비를 내릴 것인데, 그 비를 내리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회복을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동시에 그 약속은 바알 우상은 허상이고 아무것도 아닌 껍데기라는 것을 드러내는 약속이시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450명이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 주변에서 뛰놀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몸을 피흘려 자해하며 미친 듯이 떠들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고 응답하지 않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풍요와 번영을 약속한다고 착각하는 바알 우상의 모래성을 철저하게 허무시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임하시고 역사하시면, 우리 생각에 풍요와 번영을 약속할 것 같은 돈신, 명예신, 권력신들이 얼마나 허상이고 안개인지를 그대로 보여주시며, 그런 착각들을 다 모래성 같이 허물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쓸데없고 무의미하며 이런 것들이 너희에게 아무런 역사를 주지 않는 것들이라는 허상을 계속 보여 주시는 겁니다. 그 사건들을 통해 진짜 믿을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다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 주시는 것입니다. 3년의 기근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에게 돌아오지 못했고 바알 우상을 버리지 못했던 그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무지함을 반복하지 않고, 아합왕과 같이 핑계 논리와 책이 회피로 무너지지 않도록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의 허상을 통해 우리에게도 말씀은 도전하는데 하나님 없는 850보다 하나님 붙든1명이 더 강하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압도당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이렇게 엘리와 같이 담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면 할 수록 나를 붙들어 주고 지켜줄 것 같이 생각 되는 세상 신들을, 풍요와 번영을 줄 것 처럼 붙드는 그 모든 것들을 주님은 흔드실 것이고, 주님은 무너뜨리실 겁니다. 그때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오직 믿고 의지할 분이심을 깨닫고 그 이름을 붙들면 여러분들이 살게 된다는 겁니다. 내 삶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모든 신들을 버리며 여호와의 이름만을 붙들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드디어 엘리야와 아합왕이 대면하는 역사적인 장면입니다. 엘리야를 만나는 아합왕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합왕은 엘리야를 만나자 마자 그런 기회를 다 날리고 악한 왕의 진면목과 적반하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섬기라고 세워 주신 거룩하고 구별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은 하나님에게서 떠나 바알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으면서 무너졌고, 백성들을 생각하고 섬기는 마음이 다 사라진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3년 동안 기근으로 온 나라가 고통 가운데 빠져 있고 백성들의 신음 소리와 고통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그 기근 가운데 고통당하는 백성들의 신음 소리나 탄식을 들을 귀가 없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백성들의 신음 소리나 고통보다는 자기 집안에서 기르고 있는 말과 나귀들이 더 중요했던 왕이 아합왕이었습니다. 3년 기근의 모든 원인을 제공한 악한 왕, 백성들이 죽어 나가도 꿈쩍하지 않았던 악한 왕, 아합이 엘리야 앞에 와서 그 모든 문제 원인을 엘리야에게 돌리는 겁니다. 그 모든 원인을 제공한 자,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바로 너라는 겁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자기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숭배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일어났고, 백성들에게 마음이 떠나 있는 악한 왕이라는 것을 전혀 바라보지 못한 채 엘리야에게 모든 탓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핑계 논리고 책임 회피하는 악한 왕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이죠
이것은 영적 지도자뿐 아니라 비단 세상의 지도자에게도 정말 자격 미달의 모습입니다. 영적 지도자도, 세상의 지도자도, 리더가 된다는 것은 책임을지는 자리입니다. 책임을 지고 백성들을 사람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잘 인도해 나가는 것이 리더의 자격이고 책임 있는 지도자의 자격이고 왕의 자격인데 지금 아합왕은 적반하장으로 모든 책임을 엘리야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민족적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자기는 잘못 없다는 것이고, 남 탓으로 일관하는 악한 지도자의 진면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아합 왕의 이런 모습이 우리와는 전혀 무관하고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죄에 뒹굴고 헤맬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았을 때 우리 또한 이런 책임회피와 핑계 논리로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탓하고 사람 탓하고 환경 탓하고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 하는 이 악한 아합의 특성 습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솔직히 직면해야 합니다. 그렇게 책임 회피와 핑계 논리에 빠져 자기 방어에 급급한 아합왕을 향하여 엘리야는 빙 돌리지 않고 정확하게 찌르고 깨우는 직언을 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기 때문이니 지금 정신 차리라는 겁니다. 잠언이란 말이깨우고 찌르는 말인 것처럼 지금 엘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아합을 찌르고 깨우는 겁니다. 3년 동안 전 나라에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은 것은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에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결과라는 것을 왜 모르라며 정신차리라고 깨우는 겁니다. 이 기근은 당신 책임이고, 당신의 죄 때문이고, 당신의 우상숭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의 풍요와 번영을 약속하는 우상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영적 문제로 인한 결과라는 것을 정확하게 찔러 줍니다. 왜 당신은 그것을 보지 못하느냐라고 정확하게 아합왕을 향하여 직언하는 것입니다. 이 3년의 기근과 고통은 물의 기근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말씀의 기근임을 바라보는 영적 시작, 그 기근의 본질 문제는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아합왕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임을 바라보는 영적 시각이 있어야, 이 문제를 영적으로 해결하고 하나님과의 막히고 꼬인 관계를 푸는 것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가 생기는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아합왕에게 이 엘리야의 직언과 찌르는 말이 안 들렸다는 것이죠. 마음을 닫고 귀를 닫고 있으니 들리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모든 탓을 엘리야에게로 돌리며 책임회피와 핑계 논리로 발버둥 치는 안타까운 왕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아합 왕에게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들을 갈멜산에서 그 유명한 영적 전투를 신청합니다.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아세라를 섬기는 400명 그리고 바알을 섬기는 450명을 다 데려와서 영적 전투를 한번 해보자는 것이죠. 참 하나님이 누구시고 참 믿고 의지할 신이 누구인가를 만천하의 정확하게 드러내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엘리야가의 영적 전투를 신청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선 이미 엘리야에게 이 3년의 기근을 끝내고 비를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비는 그냥 내리게 되는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선포하며,이 바알과 아세라가 얼마나 무능한 허상이자 우상인지를 드러내시면서 북 이스라엘의 그 가뭄을 해갈 하실 것을 다 보여주시는 겁니다. 동시에 엘리야는 백성들을 향하여도 정확하게 깨우며 찌르는 말로 경고를 합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극은 3년 동안 기근과 고통 가운데 죽을 만큼 힘들었음에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는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바알 신앙을 붙들고 겸하여 섬기고 있었다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 대부분이 아합왕과 차이 없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며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이거는 바알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기며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백성들을 향하여 엘리야는 어정쩡하게 믿지 말고 회색 지대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은 결단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과 바알 우상 사이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과 이 세상이 약속하는 허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중적인 삶을 청산해야 될 때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한마디도 못했다는 것은 그 엘리야의 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것이죠.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회개하기 나오는 것을 통해 모든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그 은혜가 있다는 것이죠.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 앞에 나의 책임을 절감하고 회개하는 도구가 되면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땅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는 시각과 하늘에서 보이는 것, 즉 뒤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늘 영적으로 깨어 은혜를 바라보고 살기를 사모하며 구하기 원합니다. 회색지대에 머뭇거리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신앙이 아니라 기근과 고통을 3년 동안 당했으면 이것은 영적인 문제이며 영적인 말씀의 결핍이며, 이 기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돌아가기 원하신다는 그 영적 뜻을 발견하고 이 시간 결단하고 청산하기 원합니다. 이 시간 신앙 안에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분명히 믿고 바알을 포기하는 분명한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는 회색지대에서 나와 분명하고 선명하게 주님을 믿고 따르는 고백과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3년 동안 기근으로 북 이스라엘 전역에 모든 것이 메말라가고 있는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의 다시 비를 내려 주실 것을 알려주시는 말씀이자, 엘리야로 하여금 아합 왕을 찌르고 깨워주시 위해 만나게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만남의 길을 열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종 오바댜를 만나게 하십니다. 오바댜가 아합왕의 명령을 받아 물을 찾으러 다니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와 오바댜를 만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엘리야가 오바댜를 만나게 되고, 그 만남을 통해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나아가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계속 말씀을 통해 강조되듯이 비가 내리지 않는 3년 동안의 기근은 그냥 단순히 물이 없는 기근이 아니라 말씀이 말라버린 기근이었고,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그대로 드러난 현주소였습니다. 3년의 긴 고통의 기근이 지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비를 내리시겠다고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아사 상태인 북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비를 보내 다시 소생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똑같냐 하면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는데 그 죽은 아들을 엘리야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낸 것과 동일합니다. 그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고 다시 살아나는 그 모습이 북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 언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 완전히 영적 기근으로 죽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은혜로 단비를 주셔서 그 기근에서 이스라엘을 살려 내신다는 약속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풍요와 번영을 준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인생을 걸었던 바알 우상은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허상임을 그대로 드러내시는 겁니다. 바알 우상은 비를 멈추게 할 능력도 없고 그 비를 내리게 할 능력도 없는 허상이었던 겁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비를 멈추게도 하시고 비를 다시 내리게도 하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 손안에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엘리야가 오바댜를 만나자 마자 아합왕에게 가서 명을 전하라 부탁합니다. 엘리야가 여기 잘 살아 있다고 말하라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보이기 위해서 아합 왕에게 가겠다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오바댜는 깜짝 놀랍니다. 엘리야의 명령을 결국 자신을 죽이는 명령이자 결국 엘리야도 죽게될 명령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해가 되는 반응이고 어떻게 보면 엘리야 선지자를 위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게 되면 그동안 아합과 이세벨이 얼마나 쥐잡듯이 엘리야를 찾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왕이 전 지역에 사람들을 보내 엘리야를 죽이려고 쥐잡듯이 찾았으나, 하나님이 숨기시는 곳에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도 엘리야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금 와서 엘리야가 여기 있다 그러면…어떻하냐는 겁니다. 지금 아합왕은 당신을 죽이려고 혈안인데 왜 지금 당신이 살아 있다고 왕에게 고합니까? 그걸 아는 순간 당신은 죽음입니다….이야기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지금 내가 아합왕에게 엘리야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얘기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영이 또 엘리야를 사람들이 찾지 못하는 안전한 곳으로 숨길 텐데 그러면 나는 거짓말한 자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당신 엘리야도 반드시 죽을 것이고, 나 또한 죽는 겁니다….그러면서 오바댜는 엘리야에게 하소연 하듯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아합왕이라는 악한 왕 밑에서 신하로 얼마나 고생하며 살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래도 내가 100명의 선지자를 살리기 위해서 목숨 걸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발버둥친 사람인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소연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만난 것은 만나지 않은 거로 하면 좋겠습니다…라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는 거예요.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아합왕의 손에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고 자신도 아합왕의 손에 죽기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오바댜에게는 하나님의 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그 명령을 받은 엘리야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도 수용하기 어려운 겁니다. 그런 오바댜에게 엘리야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너 생각에는 내가 아합왕 만나러 가면 바로 죽음을 당할 걸고 생각하지만 그대로 나는 간다는 겁니다. 나는 아합 왕 앞에 더이상 숨지 않고 진짜 아합왕을 만나러 간다는 겁니다. 아합왕을 독대하러 그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 때문에, 엘리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서 아합 왕 앞에 독대하러 가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때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해서 엘리야는 그 음성을 듣고 오늘 아합에게 가겠다는 거예요. 3년동안 비를 멈추게 하신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 비를 다시 내리게 하실 분도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심을 아합 왕 앞에 선포하고 드러내러 가는 겁니다. 내 생각과 느낌, 내 힘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절대 갈 수 없는 그 길을 목숨을 걸고 두려움과 불안을 내려 놓은 채 엘리야는 지금 하나님의 명령에 순명, 그 명령의 순종하며 묵묵히 나아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이 내 생각이나 나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에 민감하게 하나님의 타이밍에 반응하여 살아가는 자들은 내 인생에 모든 것이 나의 힘으로 되지 않음을 고백하며 내 힘을 빼고 하나님의 힘을 내 안에 담아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타이밍에 내가 반응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갈 때 그곳에서 하나님의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이런 삶의 극심한 기근, 영적인 기근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믿고 그 하나님의 타이밍에 민감하게 반응하십시오. 비를 멈추게 하시는 분도 비를 내리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임을 믿고 의지하며 내 어깨에 힘을 빼고 주님의 힘이 내 안에 담기도록 영적인 겸손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타이밍에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게 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명에 순종하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타이밍에 일하실 것입니다. 가장 어두운 때에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듯이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때 가장 좋은 타이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며 가장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는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이 내 인생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그것을 통하여 내 어깨에 힘이 빠져서 주님께 두 손을 들고 나아가 주님의 힘만을 의지하는 자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그 순종의 삶, 순명의 삶이 엘리야의 삶이었으며 오바다의 삶이었으며 저와 여러분들의 삶 되길은 주님이 원하십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주님의 때와 타이밍에 민감하여, 믿음으로 반응하고 내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순종과 순명의 삶을 통해 주님께 선명하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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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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