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8장에서 히스기야 왕과 남유다가 처한 상황은 앗수르의 공격 앞에 앞뒤 좌우가 꽉 막힌 상황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 군대에 속절없이 무너지며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군대는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유다로 내려와서 포위하며 포하고 너희도 제 독 안에 든 쥐다…항복하라면서 지금 당근과 채찍을 계속 주고 있는 벼랑 끝 위기 상황입니다. 앗수르의 협박을 모든 백성이 다 아는 유다말로 하는 이유는, 미혹과 협박을 통하여 백성을 흔들기 위한 심리전을 펴는 겁니다. 백성을 흔든다는 건 뭐냐면 백성을 흔들어 두려움에 압도당하게 만들고 싸울 의지를 꺾으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왕인 히스기야를 신뢰하지 않고 등을 돌려 백성을 흩트려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앗수르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출구가 보이지 않는 벼랑 끝 위기 속에 이 앗수르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는 이 협박과 미혹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도전과 유혹과 미혹과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앗수르 군대의 협박과 미혹을 통해 이 말씀을 풍랑과 어려움 속에 성도들이 직면하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의 모습으로 비추어 보기 원합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사노라면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오는데, 그 삶 속에서의 어려움은 조그만 어려움이 아니라 히스기야가 직면하는 앗수르의 어려움이자, 여리고성의 어려움이고 골리앗의 어려움입니다. 여리고 성과 골리앗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공통적으로 내 힘으로는 절대 싸워 이길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거나 작은 게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머리로 분석하고 계산했을 때는 이길 확률이 0%인 절대 불가능한 어려움입니다. 지금 남 유다가 민족적으로 직면한 어려움인 앗수르 대군에 포위 당한 어려움이 바로 이길 확률이 0%로 보이는 큰 어려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벼랑 끝 어려움에서 앗수르가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을 향한 첫번째 협박과 유혹은 앗수르에게 항복하지 아니하면 바로 성 안에 있는 너희 모두 몰살당할 것이라는 협박입니다. 너희가 가만히 있으면 우리가 성을 포위하고 공격할 텐데 그러면 성 안에는 식량이 떨어지고 식량이 떨어지고 모든 게 끊기게 되니까 너희는 대소변이나 먹고 앉아 있는 비참한 끔찍한 지경이 될 거라는 듣기에도 거북한 협박하는 겁니다. 두번째 협박은, 앗수르 대왕 말씀을 들어야 살지 히스기야 말이나 하나님 말씀이나 들어봐야 소용 없다는 협박입니다. 너는 이 세상 왕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 듣지 말고 하나님이 보낸 왕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계시면 네가 이렇게 어려운 일이 많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 대신 누구의 말을 들으라는 겁니까? 이 세상 짐승나라의 왕, 앗수르 대왕의 말씀을 들으라는 겁니다. 히스기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뭡니까? 이 어려운 풍랑 가운데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하나님만 신뢰하라….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믿어서 뭐가 변하는데? 말씀이 안 믿어지고 믿지 말라는 미혹이 계속 스며들어 찾아오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말라…대신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끊임 없이 마음 속에서 미혹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산다는 말씀, 믿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너를 건져 주신다는 말씀 믿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앗수르와 세상이 말하는 소리를 붙들어야 산다는 미혹을 끊임없이 주는 겁니다. 세번째 협박은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이 어려움에서 건져내지 못하신다는 협박입니다. 여리고와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 서게 되면 내가 아무리 머리를 쓰고 계산해보고 상황을 파악해 봐도 절대 이길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그 때, 내 마음에서는 이 미혹과 협박의 음성이 들려오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에 대항해 살아남은 민족신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면 하나님이 너를 이 세상에서 건져 주신다고 책임져 주신다고 말씀…그거 다 거짓말이라고 미혹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그런 비현실적인 신앙을 버리라는 겁니다. 이 절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지금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흔드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건져줄 수 있겠냐고 비아냥 대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건져 주시지 못해! 여호와 하나님은 너를 절대 건질 수 없다….불신하게 만드는 겁니다. 세상에 항복하고 세상에 나아오면 너희는 죽지 않아…. 지금 세상에 저항하면 허기진 배를 쥐고 배설물을 먹고 살아야 되지만 이 세상에 고개를 숙이고 항복하면 너는 적어도 잘 먹고 잘 살수 있어… 세상에 항복하고 세상에 나오는 게 내가 살 길이야…. 이것이 성도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영적 전쟁이자 삶의 도전입니다. 이 앗수르의 협박과 미혹의 소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계속 들려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일상에 찾아오는 매일의 영적 싸움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 점점 들리지 않고 믿을만 하지 않게 여겨지는 것이며, 세상이 던져주는 말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현실적이고 믿을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비현실적이고 상황 파악 안되는 말로 여기고, 믿지 못할 말, 의지하지 못할 말로 여기게 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진 미혹과 협박입니다. 눈이 있으면 제대로 보라는 겁니다. 왜 이렇게 현실적이지 못하고 상황 파악을 못하냐는 것이죠 현실적으로 잘 비교해 보면 누가 능력자인지 금방 나오는 거 아니냐…미혹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겁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며 하나님만 순전히 믿는 신앙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고 우리를 흔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미혹과 협박 앞에 마음이 우리가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요동치지 않으며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는 것이 기적입니다. 잠잠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실제로 믿으며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게 바로 기적의 삶입니다. 내가 처한 여리고 성과 골리앗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 동일하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고 일하심을 믿는 믿음을 붙드는 것이 기적의 삶입니다. 여리고 성이 앞에 있고 골리앗과 싸워야 하고, 앗수르 대군에 포위당한 것 같은 절박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서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때 우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을 믿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말고 상황 파악 잘하게 하고 현실적인 세상의 말을 들으라는 미혹과 협박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나에게 허무함을 가져오는 이 협박과 미혹 가운데,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바라보며 더욱 간절히 말씀을 붙들기 원합니다. 나의 처한 문제를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앗수르 대왕의 말로 풀려 하는 이 미혹이 현재형으로 있음을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신앙,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순전한 신앙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초현실적인 것임을 믿음으로 붙들어야 삽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이 훨씬 더 크고, 눈에 보이는 앗수르 대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훨씬 더 크심을 선명히 믿고 붙들어야 사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신뢰할 때 풍랑이 찾아오지만 무너지지 않는 자, 어려움이 찾아오지만 최후 승리를 얻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위기 가운데, 적의 우겨쌈을 당하는 어려움 가운데, 잠잠하게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말씀이 나의 성취되는 놀라운 은혜를 실체로 경험사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스기야 왕은 다윗과 견줄 정도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산당들을 더 허물었고 하나님을 의지함을 넘어 허리띠로 같이 매는 연합의 관계로 하나님과 형통함을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순종하고 놀랍게 산 왕이었다면 적어도 히스기야의 삶과 남유다의 삶에는 큰 고통과 어려움은 좀 피해가거나 면제 받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인과응보에 따른 논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왕,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많은 일들을 하고 예배의 갱신과 부흥을 열게 한 히스기야에게 꽃길까지 아니어도 적어도 이런 가시길 허락하시면 안되는 게 아닌가…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히스기야왕은 면제 당하기는 커녕 앗수르로부터 큰 어려움과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이 모든 신실하고 정직한 일들 후에 히스기야 왕에게는 큰 풍랑과 어려움이 찾아온 겁니다. 히스기야가 당하는 어려움은 작은 어려움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흔드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킨 앗수르가 남유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지금 여러 지방들이 이미 다 함락이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막 들이닥치려 하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을 멸망 당했듯이, 남유다도 멸망 당하기 일보 직전의 위기가 찾아온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했던 왕, 하나님 앞에 이런 놀라운 일들을 다 한 후에 갑자기 찾아온 큰 어려움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의 풍파와 어려움을 면제 받게 해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살지만, 살다 보면 때로는 성도들도 불신자도 동일하게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내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고 내 계산으로는 도대체 맞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신실하고 정직하고 하나님을 따랐는데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찾아 오느냐….는 질문이 계속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분명한 건 우리의 인과 응보의 계산으로는 맞지도 않고 들어오지도 않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신실하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해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아서 이런 큰 국가적 어려움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산당을 다 제거하고 우상을 무너뜨리고 예배를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큰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럴 때에는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것이 영적 전쟁의 핵심입니다. 히스기야가 갑자기 찾아온 국가적 어려움에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겠습니까? 앗수르가 그렇게 공격해 와 나라를 무너뜨리려 하는 것 자체로 놀라고 당황스러웠지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신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찾아온 이 어려움에 히스기야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경황도 없고 놀라도 당황해서 앗수르의 부탁을 들어줍니다. 그들이 요구한 과도한 조공 요구에 성전에 금을 다 벗겨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수치스러울 정도로 금과 은을 다 긁어 모아 가지고 앗수르에 조공을 바친 겁니다. 그렇게 원하는 조공 받았으며 물러가야 하고 공격 안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조공을 받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앗수르가 쳐들어오는 겁니다. 달라는 걸 줬으면 공격하지 않고 돌아가야 되는데, 조공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닌 겁니다. 또다시 쳐들어 와서 예루살렘을 포위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나서 앗수르 군대는 심리전을 펼치며 히스기야왕과 남유다 백성을 두 가지로 흔듭니다. 첫번째로는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과 개혁을 비난하고 무시합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백성들을 다시 한번 말씀 앞에 조율시키고, 산당을 없애고 우상을 없애며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한 신앙이 뭔 힘이 있냐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겁니다. 너희가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지금 너희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어려울 때 힘을 주지 않는 하나님라고 깎아 내리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신앙은 소위 말하는 현실적이지 않는 일만 가지고 백성들을 지금 힘들게 한다면서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을 흔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단행했던 여호와만을 믿는 신앙과 그 하나님만을 섬기는 순전한 여호와를 의뢰하는 신앙을 흔들고 무시하는 것이죠. 두번째로 히스기야 왕의 군사력을 무시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남유다 가운데 앗수르 대군과 싸우러 나와 말을 제대로 탈 수 있는 사람이냐 있냐는 겁니다. 너희 중에 말을 탈 사람 있으면 내가 말 2만 마리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너희 군사력이 앗수르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 너희가 아느냐는 것이죠. 그렇게 히스기야의 군사력을 무시함으로서 백성들에게 싸울 의지를 다 꺾어 버리는 것이고, 히스기야와 백성들 사이를 계속 이간질하는 겁니다. 이 앗수르 군대의 히스기야와 남유다 백성들을 향한 심리전은 지금 이 시대에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신실한 성도들을 흔드는 사단 마귀의 미혹의 패턴과 동일함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 우리 마음속에 계속 찾아와 흔드는 사단의 심리전임을 주지해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고 신뢰한다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신실하게 산다는데 왜 너의 인생에는 그렇게 어려움이 있는 거야? 왜 너는 똑같이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거야? 네가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아서든, 혹은 네가 믿는 하나님이 별로 쓸모가 없던 둘 중의 하나 아니겠어? 이렇게 흔드는 겁니다. 그리고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힘은 뭐야? 이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뭐냐는 것이냐며 계속 우리를 흔들어서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드는 게 사단의 심리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스기야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 정직하고 신실하고 하나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갈지라도 우리 삶에는 어려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공식과 계산에 들어맞지 않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 성도로서 우리는 낙심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거나 떠나갈 것인가, 반대로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도구로 삼느냐…의 기로에 서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인생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내 인생이 안 될 때 낙심하지 않는 싸움입니다. 내 인생이 잘돼서 계속 올라갈 때 이게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내 인생이 내리막길로 어려움 가운데 낙심하거나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싸움을 벌이는 게 신앙 생활입니다.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이 올라올 때 질문을 묻어두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음으로 붙드는 싸움이 신앙 생활입니다. 내 생각과 내 눈앞에는 하나님의 부재가 가득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붙드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인생의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싸움, 그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힘을 붙들고 버티는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힘이 없으면 무너지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만이 나의 되심을 정말 믿음으로 고백하며 내가 주님의 힘을 붙들고 그 고난과 어려움을 버텨내는 겁니다. 히스기야와 같이 그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게 하는 기적의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힘으로 버티며 이겨내는 그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17장 말씀은 남유다 역사에 가장 어두운 왕 아하스의 이야기였다면 열왕기하 18장은 다왕 이후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기억되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히스기야가 얼마나 대단한가 하면 우선 분량이 대단히 많이 증언되어있을 정도로 남유다 역사에 중요한 왕이었고, 영적으로도 큰 획을 긋는 중요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나님 앞에 어느 정도로 정직한 삶과 신실한 삶을 살았는가 하면 다윗왕과 견줄 정도로 위대한 왕으로 하나님께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는 그가 처한 삶의 조건과 환경으로는 절대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이런 위대한 왕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왜 히스기야가 이렇게 위대한 왕,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간 게 기적 중의 기적인가 하면, 그의 아버지는 악한왕의 대명사인 아하스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와 필적할 정도로 적극적인 악인의 대표 망나니 왕이었기 때문에 그런 아하스에게서 선한 아들이 태어나 자란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실했던 아버지 밑에 말도 안 되는 망나니 아들이 나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고, 정말 악하고 망나니 같은 아버지 밑에서 이런 신실한 히스기야 같은 아들이 나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환경 결정론에 빠져 살아갑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사람이 처한 상황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 같은 인과론에 빠져 있어서 나쁜 부모 밑에서는 반드시 나쁜 자식이 나온다는 이 공식에 눌려 살아가기 쉽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과응보적 숙명론, 환경 결정론을 계속 깨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의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으심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도전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남유다의 역사는 사람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거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이자 기적중의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관점은 히스기야가 대단한 게 아니라 최악의 가정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히스기야를 그렇게 만드시고 인도했던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적극적 악인과 필적한 아버지일지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붙들려 있으면 이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한 왕 히스기야 같은 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붙드는 소망이 되길 원하십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한 왕이 된 데에는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히스기야가 왕으로 있을 때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것을 직접 본 왕이라는 데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서 다 흩어지는 모습을 히스기야는 본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사건은 북 이스라엘에게 충격이었지만 남 유다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며 히스기야 왕은 정신이 바짝 들었을 겁니다. 망하지 않을 것 같은 북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본 겁니다. 어떻게 북 이스라엘이 저렇게 멸망할 수 있을까? 그 원인을 무엇에서 찾았냐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한데서 찾은 겁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어 우리도 하나님 말씀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 말씀을 경외하지 않으면 북 이스라엘과 같이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경각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히스기야가 다윗의 필적할 정도로 그렇게 위대하게 정직하고 모든 것을 되돌린 놀라운 왕이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정신이 바짝 들어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된다는 경각심 가운데 그가 했던 놀라운 종교 개혁이 바로 산당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남유다의 여러 왕들이 하나님 앞에 정직했음에도 끝까지 계속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대부분의 왕들이 백성들이 간절히 원하고 좋아했던 산당을 제거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대부분의 왕들이 미뤄왔던 산당들을 모두 없애는 일을 감행합니다.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 드리는 건 너무 멀고 부담스럽고 힘드니까 가까운 데서 대충 드리면 되겠다는 편의주의 실용주의와 함께 백성들의 전통에 뿌리내린 산당, 백성의 이 땅에서의 필요와 원하는 것을 잘 이루어 주는 산당,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편의를 잘 고려한 예배가 드려지는 산당을 히스기야는 과감하게 다 무너뜨리는 겁니다.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열망하며 히스기야 왕은 모든 산당들을 무너뜨린 겁니다. 산당만 부순 게 아니라 여러 우상들, 주상도 깨뜨리고 아세라 목상도 다 무너뜨렸습니다. 그 다음 나오는 종교 개혁이 아주 중요한 일인데 히스기야 왕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다 없애 버린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들려진 놋뱀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산다는 거룩한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불뱀에 물려서 다 죽어가고 있을 때 장대 위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려 은혜를 구하기만 하면, 정말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 부어주셔서 그들을 기적으로 고쳐 주시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던 역사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놋뱀을 바라보면 당연히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만 구해야 합니다. 죄라는 독에 물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그 뱀만 바라보면 살 수 있게 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보고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시대에 사람들이 그 놋뱀을 여전히 분향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첫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본질들을 외면한 채 놋뱀에 전통이라는 옷을 입혀서 그것이 거의 우상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만큼 특별한 민족이라는 자신의 그냥 자부심만 갖게 되는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신이 빠지고 내용이 빠진 상징만 남은 것이 바로 모세의 놋뱀 분향을 히스기야는 과감히 없앤 것입니다. 이런 히스기아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히스기야가 여호와만을 철저히 의지한 왕, 더 나아가 히스기야는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하나님과 허리띠를 같이 차고 꽉 맬 정도로 하나님에게 묶여 살아간 자, 그게 여호와와 연합한 히스기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절대 뗄래야 뗄 수 없는 마치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 같이 허리띠로 꽉 묶여서 하나 관계로 있는 그 연합의 놀라운 역사가 히스기야에게 경험된 것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에 히스기야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허리띠를 같이 묶는 연합,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실함 가운데는 하나님의 형통함이 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 상황이 어떠하던 간에, 내 주변 환경과 가정 배경이 어떠하던 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커서 환경 결정론을 넘어 이렇게 놀랍고 위대한 히스기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는 눈에 보이는 환경에 모든게 결정되는 인생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과 처한 상황을 뛰어넘은 인생임을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또한 우리는 자꾸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려 하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고 하는 볹성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에게서 떨어지는 게 죽음이고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게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히스기야와 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묶여 연합하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형통한 인생을 사모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이 망한 직후, 사마리아 지역에 만연한 영적인 혼란과 무너짐, 즉 종교 혼합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17장 앞부분에서는 마지막 왕인 호세아때 앗수르로 말미암아 멸망하는 가슴 아픈 이야기, 왜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문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출애굽 은혜를 망각하고 착각하여 영적 교만으로 목이 곧아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을 악을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것을 거두심으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사마리아 지역에 찾아온 영적 문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순수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옮겨다가…” 이 표현이 바로 앗수르의 민족 혼합정책, 다시 말하면 식민지 강제 이주 정책입니다. 식민지 나라들이 독립하지 못하게 하려고 민족들을 강제로 섞이게 하고 강제로 이주하게 하는 겁니다. 정복한 나라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다른 지역으로 흩어버리고, 또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정착하게 함으로서 정복당한 민족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데 다른 나라로 강제 이주를 당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갑자기 사마리아로 단체 이주가 이어져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큰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번째 문제는, 나라가 망한 직후 이방 사람들이 갑자기 대거 유입해서 북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됐는데 사람들만 들어 오는 게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종교까지도 다 가져오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갑자기 집단 이주해 들어오게 되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전혀 모르는 그 이방 민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사자를 보내 그들을 치시는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까 앗수르 왕이 그 땅에 제사장을 임명해서 이주민들에게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되는지, 하나님의 율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쳤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그렇게 이주한 이방 민족들이 자신들이 믿던 신상들과 우상들을 포기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덧씌우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하지 듣고 알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섬겼던 신을 여전히 겸하여 그들의 문화 가운데 섞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배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은 했는데 이전에 고향에서 섬기던 우상들도 겸하여 계속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가 보편적으로 만연하는 것입니다. 그 여러 우상들 중에는 심지어 하나님이 노를 발하시며 제일 싫어하시는 자녀를 불에 들어가 제물로 드리는 종교 행위를 하는 이방 우상도 들여왔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 경외하고 동시에 어디서부터 옮겨 왔는지도 모르는 이방 신들도 동시에 섬기게 되고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고 붙드는 그 분명한 이스라엘이란 정체성이 퇴색되고 왜곡되어 종교 혼합이 만연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신 언약은 뭡니까? 하나님만 경외하는 것이고 하나님만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직 큰 능력과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만 경외하고 그를 예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왕이시기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붙드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의 부르심입니다. 오직 여호와만 경외하고 여호와만 하며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앗수르에 멸망한 후 수많은 이방 민족들이 들어옴으로써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을 포기한 채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자신들이 가져온 이방 신들도 섬기는 이 종교 혼합주의에 사마리아 전체가 물들게 되어 버린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되는 말씀을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오직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신앙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변질하여 자기 편한대로 섞어서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도 의지하고 세상도 의지하는 신앙으로, 하나님도 붙들고 물질도 붙드는 신앙으로 변질되어 버린 겁니다. 북이스라엘 사마리아 지역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을 흔들어 버리고 말살시켜, 문화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뒤죽박죽 되게 만들어 버린 겁니다. 그 피해를 지금 고스라니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섬기는 것과 하나님만 섬기는 것은 겉으로 보긴 비슷할지 모르나 본질적으로 다른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예배하는 주일 예배와 여호와 하나님만 예배하는 주일 예배는 근본이 다른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북 이스라엘 전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해 수많은 이방 사람들이 안식일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제사를 드렸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에서 그들은 여호와만 섬기고 예배하는 신앙을 버린 악한 자들인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것인데 그들은 겸하여 붙들고 살아가면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착각하고 문제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멸망하기 전부터 스스로 자원해서 늘 살아왔던 패턴이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왕들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었고 늘 우상을 동시에 섬기고 종교 혼합주의를 자발적으로 스스로 해왔습니다. 북이스라엘 멸망 직후, 이방 민족의 대거 이주로 말미암아 이런 영적 혼합 주의와 종교 타락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만연해져 북 이스라엘을 전체적으로 흔들게 되어 영적 황무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라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경고하십니다. 북이스라엘 멸망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에서 이탈했기 때문임을 경고하십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좋고 편해서 스스로 그 길을 갈지 모르나 나중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섞여 버려 내 신앙이 왜곡과 타락의 흐름 가운데 떠내려가는 안타까운 북 이스라엘의 영적인 현주소가 내 신앙의 현주소가 될 수 있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순전한 명령과 음성에 우리가 순종하여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 하나님 말씀 듣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도 계속해서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에서 하나님도 섬기는 신앙으로 변질되고 왜곡되고 탈락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돌이킬 수 있을 때 돌이키며 겸하여 섬길 생각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만 예배하며 섬기는, 분명한 하나님 말씀 가운데 서 있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비극적으로 망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유와 원인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더 이상 참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악을 향한 인내를 거두게 되었는가에 대해서 판결문과 같이 엄중하게 평가하시는 말씀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망한 여러 이유들 중 두 가지를 함께 마음에 새겨 보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북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출애굽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서 뿌리내리고 오랫동안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들이 잘해서 이 축복의 땅에서 오랫동안 잘 지내고 있다고 착각하는데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원래 살았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은 내가 애굽과 노예와 종으로 살던 삶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받아 이 약속의 땅에 기적과 같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의 존재론적 본질이 되는 출애굽의 은혜입니다. 애굽의 종된 삶에서 하나님이 건지시고 구원하셔서 출애굽 시켜 주신 그 은혜로 우리 민족이 이 약속의 땅에 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게 출애굽 은혜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출애굽 은혜를 망각하고 내가 나 때문에 잘돼서 가나안 땅에 이렇게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본질이 애굽의 노예와 종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출애굽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라면, 성도들의 본질은 죄의 노예와 종된 삶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는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와 노예에서 노예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어디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까? 죄와 사망의 종살이에서 건짐을 받은 십자가 은혜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에 결박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십자가 은혜로 해방되어 죄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출애굽 은혜와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면 내 인생의 모든 관계성을 누구를 중심으로 세우게 됩니까? 하나님 중심, 천국 중심, 보이지 않는 것 중심으로 계속 관계를 설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목하고 관심 가지며 내가 모든 관계를 맺는 핵심이 하나님과 천국과 보이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출애굽 은혜와 십자가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고, 천국 중심에서 이 세상 중심으로 관계를 설정하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 중심으로 모든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망했냐 하면 이 출애굽 은혜를 망각해서, 착각함으로 망한 것입니다. 출애굽 은혜를 잊어버리니까 당연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고 하나님 자리에 자꾸 다른 것들을 올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망한 이유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북 이스라엘 백성이 망한 이유는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출애굽 은혜를 망각하게 되면 나타나는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게 영적 교만입니다. 망각은 착각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내가 어디에서부터 건짐을 받았는지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출애굽 은혜를 내 마음에 감격과 감사로 새겨 넣어야 하는데 출애굽 은혜를 망각하기에 결국 착각에 빠져 영적으로 교만해져서 목이 빳빳해지는 현상, 즉 목이 곧아져서 하나님 말씀이 안 들어오고 내 생각만 들어오고 꽉 차게 되는 겁니다. 그걸 여로보암이 행한 모든 죄라고 말하는데, 영적 교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어, 내 유익과 편의를 위해 신앙은 언제나 경시될 수 있고 무시될 수 있고 타협할 수 있는 것이 돼 버리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이 영적 교만의 길에서 끊임없이 수렁과 같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늘 악을 행하며 여로보암의 길을 행하는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길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악에 대해서 더 이상 참지 아니하시고 인내를 거두시면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북이스라엘이 하루 아침에 망했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성경은 북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영적 교만이 “점차로” 이루어졌고 “스스로” 나아갔음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루 아침에 하나님에게 돌아선 게 아니고, 하루 아침에 출애굽 은혜를 잊어버린 게 아닙니다. 점차로, 하루하루 서서히 이탈하게 되면서 결국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내가 잘못된 열망에 사로잡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그 우상을 향하여 질주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하나님을 따르는 삶 대신에 우상을 따르고 세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대신에 우상을 섬기고 살게 되었습니다. 악한 길과 죄를 버리고 떠나는 삶 대신 말씀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떠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면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본질적 이유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엄중한 하나님의 판결문과 같은 평가를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정신 안 차리면 우리가 무너질 수 있고, 망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점점 출애굽 은혜를 자꾸 잊어버리고 십자가 은혜를 망각합니다. 내가 어디로부터 왔고, 내가 어디로부터 건짐 받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리게 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이 출애굽 은혜, 십자가 은혜를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출애굽 은혜도 십자가 은혜로 망각하면 착각하고 결국 망합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따르는 삶 대신 우상과 세상을 따르는 삶으로 점점 나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삶 대신에 우상을 섬기는 삶으로 점점 나아가지 않습니까? 망각하면 착각에 빠져 영적으로 교만해지고 목이 곧아짐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서부터 건짐 받은 존재임을 망각하면 착각하여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망각하기 쉽고 착각하기 쉬운 내 인생을 십자가 은혜와 출애굽 은혜에 단단히 매어 두고 마음에 선명히 새기기 원합니다. 내가 어디서부터 왔고, 어디로부터 건짐 받은 존재인지를 잊지 않고 새기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망각하면 착각해서 망한다는 이 원리를 마음에 새겨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아가 십자가 은혜와 출애굽 은혜를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참 슬고 비극적이고 안타까운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백성, 선민이 된 이유는 그들이 특별하고 대단하고 우월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 은혜로 말미암은 선택이었고, 은혜의 도구로 열방의 축복의 통로가 되기 위해 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착각에 빠졌는가 하면 우리가 특별해서 택함 받은 줄 알고 특권 의식에 빠졌고,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겠지…하나님이 기다려 주시겠지… 하나님이 또 손을 내밀어 주시겠지…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기에 그 이름이 영원히 존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왕과 나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왕과 나라,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반역과 배신이 계속 반복되는 북 이스라엘을 향해 그 인내를 거두시고 멸망을 직면하게 하시는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분명히 길이 참으시고 인내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천국문을 활짝 열어 놓고 예수 믿고 구원받을 새생명을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영원히 참으시는 게 아니고 영원히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호세아는 배신과 반역으로 왕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마지막 왕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왕이 평화적으로 이양되는 것이 지나간 게 이미 오래 입니다. 분명히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인데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이 거룩함을 잃어버린 지 오래 입니다. 내가 원하면 저 높은 자리에 사람을 죽여서라도 올라가겠다는 배신과 암투가 반복되는 그 북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호세야는 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왕이 몰랐던 것은 이게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의 자리라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한다는 이 큰 그림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그럼에도 다른 왕들보다는 조금 덜 나빴다는 평가를 합니다. 호세아가 나름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으로 열심을 냈던 것이 말씀에 증언되는데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정치적 줄타기 하는 모습입니다. 호세아는 앗수르가 계속 동네 북과 같이 치고 괴롭히니까 앗수르 나라를 형님으로 모시며 매년 조공을 드리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호세아가 그게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왕으로 면이 서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더 이상은 앗수르에게 고개 숙일 수 없겠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본 겁니다. 국가적 어려움 가운데 호세아 왕이 하나님을 의지해 어떻게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을지…하나님에게 돌아가 하나님의 지혜와 뜻을 구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바라 봤어야 하는데 주변에 더 센 나라가 없나를 찾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버리고 택한 대상이 또 다른 강대국이었던 애굽입니다. 결국 호세아 왕이 했던 건 국제정세에 신경 서서 어디에 줄을 대야 살 수 있을까에만 머리 쓰고, 그 머리에서 나온 결과로 친 앗수르에서 친 애굽으로 노선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철저히 무관한 왕,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결정으로 파멸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친 애굽으로 정책을 바꾼 북이스라엘, 배반한 북이스라엘을 앗수르 왕이 가만 두지 않는 것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3년동안 성을 포위하고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때 호세아 왕은 내가 줄 섰던 애굽이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줄을 대고 의지했던 애굽은 아무 것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호세야 제 9년에 북이스라엘은 허무하게 앗수르의 손에 완전히 박살나며 멸망하게 됩니다. BC 722년에 북 이스라엘이란 나라는 멸망을 당해서 나라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 비극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이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주시는 엄중한 진리입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의 힘과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의지하고 있다가 하나님이 그걸 확 치우시니까 나라가 확 주저 앉고 와르르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기대고 의지하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아는 제일 좋은 방법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확 치우실 때 내 인생이 주저앉는가 주저 앉지 않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지해야 될 대상 넘버원이 되어야 하는데 북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꾸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기대하고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그것을 치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내가 기대하고 의지하는 대상을 하나님이 살짝만 밀어내도 내 인생이 팍삭 주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 주저 앉게 되는 것을 통해 내가 진짜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면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북 이스라엘멸망의 이유이고 많은 사람들이 무너지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끝났다고 보면 안되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만연한 악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함을 깨닫기 원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영적으로 아브라함 자손이 된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내 DNA가 우월해서, 내가 신앙생활을 다른 사람보다 잘해서, 내가 남들보다 좀 나은 뭔가가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신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망하는 길로 들어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을 의지하고 사람들을 의지하는 삶을 지속한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같이 파멸과 멸망으로 직면할 수 있음을 경고와 같이 마음에 새기십시오. 망하는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를 이 시간 깨워 주시는 말씀 가운데 내 인생을 두고 돌이키기 원합니다. 그저 아무런 이유와 조건 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만이,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철저히 인정하십시오. 망하는 길과 죽을 길에서 생명의 길과 진리의 길로 돌이켜 주님 앞에 다시 묶이고 십자가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요한 삶의 원리이자 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내 삶에 거두는 열매를 원인과 결과라는 공식으로 풀려 하는데 일조하는 속담입니다. 특별히 자녀들에 대해서 자녀들의 자식 농사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고 생각을 해서 콩 심은데 콩이 나와야 한다는, 즉 내가 자식을 위해 이렇게 많이 헌신하고 쏟아부었으니 그것에 맞는 원인과 결과를 통해 자식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아시겠지만 그것이 일반적으로, 혹은 상대적으로는 그게 맞을지 모르나 그 공식에 맞지 않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는 게 우리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열왕기하 16장 말씀은 아하스 왕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이 아하스 왕이 바로 콩 심은데 콩이 나오지 않는 돌연변이의 대표입니다. 아하스의 아버지는 요담 왕이었고 할아버지는 웃시아 왕이었습니다. 이 두왕 모두 인생의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인생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받은 왕들입니다. 어떻게 아하스는 이렇게 시작부터 완전히 무너질 수 있는가? 어떻게 신앙의 부모, 신앙의 조부모 밑에서 이런 말도 안되는 왕, 이런 망나니 같은 아들이 나올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좋은 부모가 있어도 자녀들이 이렇게 무너지고 심지어 악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하스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쫓아내셨던 이방신들과 우상을 다시 직수입합니다. 우상숭배를 하는데 특별히 어떤 우상들을 숭배하면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고 분향한 죄를 지적합니다. 시애틀 주변은 나무가 너무 많아서 푸른 나무에 대한 감흥이 별로 없지만 남유다 지역에는 사막과 황무지이기 때문에 푸른 나무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푸른 나무를 보게 되면 하늘의 복을 받은 나무는 그런 미신을 가지고 있다 합니다. 그 푸른 나무 안에는 풍요로움의 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서 푸른 나무는 항상 자신의 소원을 비는 믿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죠. 주변에 살고 있었던 이방 나라들이 그렇게 푸른 나무 우상을 섬겼는데, 아하스는 이런 이방의 우상들을 직수입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유다의 골짝과 동산마다 이 푸른나무 제사를 드리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아줄 수 있는 게 남유다에도 이런 우상과 산당 문제로 무너지고 안 좋은 왕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왕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최악의 행동을 하는 게 아하스 왕인데 바로 이방신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가장 악하고 영적으로 가장 타락한왕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우상숭배를 넘어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가며 불태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의 가장 끝판왕이 자녀를 불살라 자녀를 불가운데 지나가게 하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한 왕이 아하스 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아하스 왕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오늘 말씀 열왕기하에는 등장하지 않는데 평행 본문인 역대하 28을 보게 되면 전쟁에서 12만 명의 군사가 하루만에 전사하고 20만 명의 사람들이 전쟁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는데 어떻게 하루 아침에 아무리 많이 죽여도 12만 명이 한꺼번에 죽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군인 12만 명이 하루에 죽었다는 것을 통하여 이것은 사람이 죽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치신 징계의 결과라는 것을 엄중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의 악을 치시며 영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20만 명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하셨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 앞에 아하스는 정신 차리고 돌아왔으면 좋은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배제한 채, 하나님에게 돌아오거나 회개 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힘을 여전히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나라의 운명을 다 맡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하스가 하나님이 내리신 징계와 심판으로 임한 전쟁의 위기 가운데 누구에게 처음으로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는가 하면 앗수르라는 외세의 힘입니다. 남유다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데, 아하스 왕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적극적 악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힘 대신 그저 눈에 보이는 대국 앗수르의 힘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똑같이 앗수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스는 북 이스라엘의 왕들 같이 처음부터 야예 악한 길로 질주한 왕이자, 악한 여인의 대표인 이세벨의 딸 아달라와 쌍두 마차를 이루는 악한 왕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다윗 가문에 모든 씨를 제거하고 무너뜨리며 스스로 왕이 되려 했던 아달랴 만큼이나 악한 왕, 적극적으로 악의 모습에 동참한 왕이 아하스입니다. 아하스 왕은 바른 신앙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도 불구하고 남유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하고 가장 나쁘고 가장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냥 하나님 보시게 악했던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인 악한 왕의 대표로 증언됩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어 왕 본인 뿐 아니라 남유다 전체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왕이 바로 아하스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잘했어도 아무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잘했어도 인생의 일반적인 법칙을 벗어나는 악인 아하스가 나올 수 있고요, 반대로 망나니 같은 부모 밑에서 믿을 수 없게도 신실한 히스기야 같은 왕이 나오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 우리 인생의 신비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많은 예외가 존재하고 설명할 수 없는 신비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자녀는 부모의 인생 성적표가 아님을 정확하게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남유다의 반항아, 적극적인 악인인 아하스 왕을 증언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 주변에 일어날 수도 있고 내 인생 가운데 일어날 수도 있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것입니다. 콩심은데 콩이 안 나오는 인생, 아무리 좋은 부모와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어도 이런 자녀가 나올 수 있는 게 설명되지 않는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생임을 인정하십시오. 우리가 콩을 심었어도 콩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인생은 계획대로 공식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기 원합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겸손히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오며 오늘도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살아가지 아니하면 안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그렇기에 우리 인생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주님을 더 선명히 붙들고 하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자녀가 내 인생의 성적표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살아가는 겸손함과 자유함을 가지고 주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마지막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온 북 이스라엘의 국운이 다해서 거의 끝나기 일보 직전 마지막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급격히 기울어 멸망을 향해 질주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그 죄악과 잘못된 것이 한결같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어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 북 이스라엘 왕들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한결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겁니다. 이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들이 반복되다 보니 고착화되고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하여 버렸고, 빠져나올 생각 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해진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너무 일반화되고 자연스러워져서 아예 거기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쌓아두면 이렇게 비슷한 패턴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기에 죄를 지을 수 있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그 무너진 자리에서 죄가 너무 싫어서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쳐야 하고 죄와 싸우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짓고 무너진 자리에서 고착화되고 패턴화 되면 죄에 대해 무감각해고 아예 죄에 대해서 싸울 마음조차 없는 겁니다. 죄에서 빠져나오려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그냥 고착화 되어 멸망으로 파멸로 질주하는 것입니다. 이게 북 이스라엘이 망하기 직전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교회의 모습이고 망하기 직전의 개인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진 왕, 하나님과 무관한 삶으로 질주하는 대표적인 예로 말씀에 등장합니다. 지금 앗수르라는 큰 나라가 북 이스라엘을 공격하러 내려와 국가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 고착화된 므나헴 왕은 국가적 문제를 어떻게 풉니까? 큰 어려움과 고난이 국가적으로 찾아왔음에 불구하고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는 결정을 합니다. 하나님이 큰 고난과 어려움에 개입하기를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은 채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고 계산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를 스스로 골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결정, 내 스스로 계산하고 머리 굴린 결정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북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려고 므나헴 왕이 썼던 묘책이 바로 강대국 앗수르에게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는 34톤 정도 하는 어마어마한 양인데, 그 은 34톤을 모아서 앗수르 왕에게 주는 겁니다. 은 천 달란트를 뇌물로 주는 방법도 국가가 마치 조직 폭력배와 같이, 그냥 억지로 힘으로 뺏어 버리는 강탈입니다. 그렇게 강대국에 기대서 은 34톤의 조공을 바치며 그것도 강탈하여 백성들에게 뺏는 방법을 동원해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한 겁니다. 국가적인 큰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 나라를 굳게 세우려 하는 대신 강대국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그것도 백성들에게 강탈해서 모은 은 34톤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서 굳게 세우려 한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게 행동한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지적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내가 풀 수 없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온다면 그 때가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붙드는 것을 통해 일이 풀리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왕으로서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하나님을 배제하며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과 무관한 삶의 결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지금 북 이스라엘 왕은 좋은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큰 기쁨이 있어도, 큰 성공이 있어도 큰 실패가 있어도 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한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북 이스라엘이 멸망으로 치고 질주하는 마지막의 안타까운 평가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삶이 패턴화 되고 고착화되고 나니 북 이스라엘에 배신과 반역이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인 스가랴는 므나헴에게 배신당해 살해되고, 므나헴의 아들은 배신으로 베가의 칼에 맞아 죽고요. 베가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 될 호세야의 배신으로 살해 당해 죽습니다. 이런 끔찍한 반역과 배신이 한두 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아예 고착화되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배신하고 죽이는 피비린내의 악순환에 무감각해지는 겁니다. 무감각해 그래서 반역과 배신의 역사가 계속되는 것, 패턴화되고 고착화 되는 것이 나라가 망하기 바로 직전 북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야가 배신의 칼을 들어 왕을 죽이고 자리에 올라갔을 때, 이 자리가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가 될 것을 전혀 깨닫지도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 않고 망하도록 그들을 놔두실 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반역으로 그 왕의 자리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반역하고 죽이고 올라가 나는 이제 왕의 자리에서 평생 떵떵거리고 살겠다고 착각하며 앉아있는 호세아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어리석음일 수 있음을 바라봐야 합니다. 천년 만년 살 거 같이 나에게 기회가 영원히 있는 거와 같이 오늘도 살아가는데 오늘 주시는 기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오늘 주어지는 그 선택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급격히 기우는 국운,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의 마지막을 바라보면서 주시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죄에 이렇게 고착화되고 패턴화되고 무감각해질 수 있다 경고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성도에게 눈에 보이는 성공은 성공이 아닐 수 있고 눈에 보이는 실패는 실패가 아닐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공하고 나서 그 성공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떠나가게 만들면 그 성공은 결국 실패입니다. 반대로 실패와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만든다면 그 실패의 어려움은 결국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성공과 실패, 기쁜 일과 슬픈 일, 내 삶의 고난과 어려움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만 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에게 복으로 만들어 주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결정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철저히 배제하고 무관한 삶의 결정을 하게 되면 그게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하는 삶입니다. 죽은 낙엽과 같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내려가는 신앙생활, 사람과 환경을 붙들고 머리를 굴리며 하나님과 무관하게 해결하려는 신앙 생활을 경계하십시오. 이 고착화되고 패턴화 된 나의 영적 무감각을 깨고 이 경고의 메시지를 내 마음에 새기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기도하며 주님 앞에 나아 오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마샤의 아들, 역대기에서는 웃시야 왕으로 알려진 아사랴 왕에 대해 증언합니다. 아사랴 왕은 무려 52년동안 남 유다를 통치한 대단한 왕으로 그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입니다. 북 이스라엘이던, 남 유다던 모든 왕을 평가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식이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가 악한가….그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평가인 겁니다. 모든 왕들도 하나님의 백성들도 동일하게 인생 평가의 기본 공식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 어떠한가…입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살아가는 내 인생에서 고려할 가장 첫번째는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어떠한가…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늘을 향하여 내 마음이 들리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우선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고, 그 지혜가 있을 때 나의 삶이 하나님과 언제나 함께하는 형통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나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만드시고는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좋으셨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그 보시기에 아름답고 좋았던 것이 다 망가지고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도 하나님 보시기에 점점 보시기 안 좋은 영적 내리막길, 다 망가지고 깨지는 길로 질주합니다.
아마샤 왕은 일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었기에 온전함으로 나아가지 못했음을 증언합니다. 첫번째 문제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들이 산당에서 여전히 예배와 제사를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다면 왜 남 유다도 북 이스라엘도 하나같이 산당을 없애지 않았는가? 백성들이 자신들의 필요와 원함을 채워주는 산당을 좋아하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자기 마음대로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고, 내 편의대로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산당에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수단화 되고 도구화되는 것을 너무나 원하기 때문에 결국 백성들이 원하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겁니다. 산당은 제거하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별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나, 하나님 보시기에 큰 문제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아사랴 왕의 문제는 인생 후반전에 영적 교만으로 무너지는 문제입니다. 왕으로서 52년의 통치 기간 가운데 후반전은 왜곡과 변질로 무너지는 영적 내리막길의 길을 가게 됩니다. 아사랴왕의 아버지 아마샤,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도 동일하게 용두사미의 길을 갔습니다. 인생 전반전에 하나님께 순전하고 정직했는데, 후반전에 교만으로 넘어지며 무너졌습니다. 그 용두사미의 인생을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손자도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아사랴왕의 후반전을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어 별궁에 거했다는 1절로 매우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역대하 26장을 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아사랴 왕을 치셔서 그가 나병환자가 되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설정해 놓으신 바운더리와 경계를 자꾸 허물고 무너지게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제사장이 할 일을 왕이 못할 게 뭐냐며 그 질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분향하려 합니다. 제사장들이 와서 목숨을 걸고 아사랴 왕을 막아서자 그들을 밀치고 손으로 향로를 잡으려는 순간 왕의 몸에 나병이 확 퍼졌습니다. 모세 오경을 보게 되면 아론의 두 아들들이 성전에 불을 잘못 만져서 죽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하나님이 치셔서 죽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사랴 왕이 막아서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며 손으로 잡고 분향 하려는 찰나에 나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치신 징계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병은 일반적으로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린다는 것은 영적 감각이 다 무뎌지고 다 사라지는 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먹어야 될 거먹지 말아야 될 것, 찬밥 더운 , 나아갈 때와 머물 때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질서와 우선순위와 바운더리를 다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무너지게 되어 나병에 걸린 아사랴 왕은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고 그렇게 후반전은 좋지 않은 인생으로 끝나게 되는 겁니다. 아사랴 왕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무너지게 된 이유는 바로 영적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형통함과 강성함을 주셨는데 그럴 때 하나님께 더 매달리며 하나님께 겸손하게 쓰임 받아야 되는데 강성해지고 형통해지자 마음이 교만해 지는 겁니다. 나라가 이렇게 잘되는 게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잘해 가지고 내가 앞서서 헌신해서, 내 리더십이 탁월해서 이렇게 잘 됐다고 자꾸 공로를 취하려 보니까 점점 마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사랴 왕의 인생을 전반적으로 하나님 보시게 정직했다고 평가하시는 겁니다. 그런 실수와 과오, 영적 내리막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그 인생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는 겁니다. 반면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으로 평가 받습니다. 남유다 왕들은 용두사미, 즉 전반적에는 좋았다가 후반전에는 변질과 왜곡으로 무너지는 패턴이고 북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전반전부터 무너지는 한결같이 악한 패턴이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유다 왕들도, 북이스라엘 왕들도 둘 다 무너지고 안타까운 왕이지만 그나마 성경은 북 이스라엘보다 남유다가 낫다는 겁니다. 남유다가 완벽해서 나은게 아니라 북 이스라엘 왕들이 하도 악하고 안 좋으니까 그나마 낫다는 안타까운 평가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처음부터 질주하는 북 이스라엘 왕은 여섯 달만에 배신이 일어나서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게 배신을 통해 왕위에 오른 다음 왕은 불과 한 달 만에 또 다른 사람들에게 반역을 당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을 견지한 북이스라엘에 반역과 배신과 피바람이 계속 몰아치는 것입니다. 완전한 어둠과 무질서로 나라가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팍삭 주저앉고 있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증언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 이럴 수 있습니까? 왕도 하나님의 백성도 이럴 수 있기에 말씀으로 우리는 찌르시고 경고하시는 겁니다. 한때 열심히 있고 한때 주님께 순전하고 한때 주님을 바라보고 정직히 살다 인생 후반전에 이렇게 무너지고 타락하고 자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겁니다. 처음부터 아예 무너지며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삶, 전반전은 괜찮다가 후반전에 무너지는 용두사미의 삶은 우리 삶에 반면교사로 주신 경고임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처음부터 비참한 인생도, 처음에는 괜찮다 끝에 가서 비참한 인생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하루 첫 시간을 드리며 이 자리에 나올 때 하나님 보시기에 기쁘고 귀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신앙생활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한가를 최 우선에 두고 살아가시기를 살아가십시오. 이런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는 이유는 인간의 교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모든 영적 감각이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말고 영적 겸손함과 민감함을 가지고 주님이 주신 축복이 가운데 나의 인생이 끝까지 머물러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여호와 앞에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서는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반복적으로 왕의 역사를 통해 증언하는데 두 나라 공통으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멸망을 향한 내리막길로 질주합니다. 남유다는 요아스와 아마샤로 이어지는 용두사미, 즉 처음에는 하나님에게 신실했다가 나중에 변질되고 타락하는 역사가 반복되었다면 북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악한 모습으로 우상숭배와 타락에서 떠나지 않고, 결국 비참하게 끝난다는 것으로 결론짓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북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동명이인이기에 보통 여로보암 2세로 부르는데, 41년 동안 왕으로서 있으며 받은 하나님의 평가는 아주 냉정합니다. 여로보암의 이름값을 하듯이 조상 여로보암의 악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악한 왕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로보암 2세로 말미암아 경제 재건과 나라를 확장시킨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41년동안 왕으로 있으며 겉보기에는 굉장히 대단했고 놀라운 업적을 많이 세운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여로보암 2세가 따라간 여로보암의 죄는 여러 가지로 우리가 표현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추구하는 가치입니다. 왕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현실적으로 유리하면 그 유리한 길을 기쁨으로 선택하며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이 여로보암 2세의 선택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으냐 옳지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잘 지내는데 현실적으로 더 유리하냐, 유리하지 않느냐를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죠. 대표적 예로 남유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드릴 필요 없으니까 여기 가까운 곳에서 편하고 쉽고 간단하게 예배 드리라며 북 이스라엘에 산당을 만들고 우상을 만드는 것이 여로보암의 실용주의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안정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신앙은 언제든지 타협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것, 이게 북 이스라엘의 신앙 타락과 우상숭배로 변질된 여로보암의 길인 것입니다. 그런 신앙적 선택보다는 현실적인 결과가 항상 중요하게 살았던 실용주의 노선을 갔던 사람이 여로보암 2세이고, 그런 삶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고 냉정하게 평가하시는 겁니다. 사실 이 모든 업적들은 여로보암 2세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요나를 통하여 그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약속해 주신 결과였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선지자 요나에 대해서 굉장히 좀 미숙하고 불평 많은 선지자로 여기지만 사실 요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말씀을 많이 주셨습니다. 특별히 요나는 북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재건과 확장의 약속을 대언한 훌륭한 선지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 2세때 그렇게 놀라운 축복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나라가 커지고 확장하게 되는 것을 통하여 정말 원했던 것은 영적인 재건이었습니다. 경제적 안정과 재건을 넘어, 나라의 안정과 재건을 넘어 하나님만을 섬기는 시간으로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신앙의 재건을 정말 원하시는 그 주님의 마음이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 2세 때 경제가 부흥하고 이스라엘 영토를 많이 회복하게 하시며, 북 이스라엘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놀랍게 영토가 확장되며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삶이 윤택해졌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신앙의 기준이 분명히 서 있는 왕이라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고, 나같이 부족한 것을 들어서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믿으며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와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 2세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이 모든 것이 내가 대단해서, 나의 탁월한 리더십 아래 이루어진 결과라고 착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경제적 안정으로 먹고 살만 해지고 영토 확장이 형통이라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국토는 확장되고 경제는 나아져서 백성들은 살만 해졌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전혀 형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제 재건이 전혀 신앙 재건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부국강병과 경제 재건이 점점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백성의 형통은 바로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늘 누리고 살아가는 것임을 철저히 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 2세의 겉보기에 수많은 업적들과 경제 재건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인 형통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멀어지는 삶을 살아간 왕, 하나님을 바라 보지 않은 왕을 하나님께서는 왜 악한 왕으로 평가하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깨닫게 되는 겁니다. 부국강병과 영토확장, 경제 부흥이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을 떠나가게 만든다면 이것은 형통이 아니라 재앙이고 화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삶이 어렵고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도구가 되어 은혜를 구한다면 그 잠시의 어려움과 고통의 눈물이 곧 지나가고 결국 우리에게 하늘의 축복이 이어지게 하는 도구가 되는 축복이 되는 겁니다. 그런 눈에 보이는 수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 2세는 안타깝게도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삶을 살아가기를 계속하며 온 나라를 영적인 내리막길로 걷게 만들고 영적 재건을 이루지 못한 채 결국 다가올 파멸과 멸망의 길로 질주하게 하는 나쁜 왕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신 이유는 이런 똑같은 문제가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눈에 보이는 열매들이 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고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도구가 될 때만 진정한 형통입니다. 이 모든 게 내가 잘나서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철저히 고백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바라보게 될 때 그게 축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축복과 열매들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망각하게 하고 멀어지게 한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됨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씀을 마음의 거울로 삼아 그 어떤 것도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지 않도록 영적으로 깨어 있기 원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부유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나의 형통의 기준이며 나의 신앙의 기준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삶의 생사 화복이 내 삶의 모든 기쁜 일과 슬픈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가는 도구가 되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관심사와 초점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맞춰져 있으며 하나님과 함께하심이 형통임을 믿으며 주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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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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