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왕은 계속해서 블레셋에게 큰 승리를 거둔 후에 자격지심에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블레셋을 이긴 데 있어서 자신의 공은 하나도 없음을, 자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함이 그대로 드러난 승리임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에 압도 당하며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했던 사울왕과 달리 그의 아들 요나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을 향하여 인생을 던졌고 그 요나단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을 놀랍게 무너뜨리셨습니다. 사울은 큰 승리 이후 이상하게도 그 자격지심에 빠져서 하나님의 승리 주신 영적 전쟁을 자신이 원수 죽이는 전쟁으로 격하 시켰습니다. 더 큰 승리로 나아갈 수 있는데 백성들에게 군기와 사기를 다 떨어뜨리며 블레셋을 완전히 무너뜨릴 기회를 상실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울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 전쟁을 지속할지 아닐지를 물어도 하나님이 대답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대답하지 아니 하는 이유와 원인이 일차적으로 사울왕 본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왕이 언제부터 영적으로 민감해서 하나님께 전쟁을 나갈까 말까를 물어봤습니까? 그런 적이 전혀 없던 사울왕, 하나님을 마치 안 계신분 취급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자가 바로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제단도 자기 마음대로 동물들을 막 죽인 부정한 곳에서 세우며 하나님과 제사를 경히 여기던 게 사울왕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사울왕은 백성을 향하여 무리한 명령으로 군기와 사기를 다 떨어뜨렸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하나님에게 심각하게 매달리고 붙들며 하나님께 물어 본적도 말씀에 순종한 적도 없는 사울왕이 눈에 보이는 전세가 이미 이스라엘로 기운 전쟁, 블레셋이 도망가고 있고 누가봐도 이길게 당연한 판세가 되니까 그제서야 갑자기 하나님에게 묻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속이 다 빤히 보이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대답하지 아니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 때문에 하나님이 대답하지 아니 하시는 데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이 원인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찾아보려고 맹세까지 하는 겁니다. 이 원인이 무엇인가 누구인가 찾아보고 그 자기 아들이라도 반드시 죽이게 따라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제비 뽑기를 했는데 ¼ 확률에서 요나단이 뽑힌 것입니다. 요나단이 뽑혀서 물어보니까 요나단이 왕이 어명, 금식하고 먹지 말라한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것도 부지불식 간에 그게 명령인 줄을 모르고 아주 조금 꿀을 먹었습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왕이 그 어명을 내릴 때 현장에 없었고,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불순종한 것이 아니라 부지불식간, 모르고 불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명령이 떨어진 거 조차 모르고 그것을 먹었습니다. 성경은 의도적인 불순종과 실수나 부지불식간의 불순종에 대한 분명한 예외규정을 두셔서 구제해 주셨는데, 사울왕은 그것 때문에 요나단이 죽어야 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가 자기 이름을 걸고 한 맹세 했기 때문입니다. 그 맹세는 하나님의 뜻에 조율된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맹세였을 뿐입니다. 반면에 요나단과 달리 사울왕 자신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것이 부지 불식간에 모르고 한 불순종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사무엘이 경고했음에도 분명히 불순종인 것을 알고도 의도적으로 불순종했습니다. 그런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그 아들 요나단이 알지 못하고 모르고 한 불순종에 대해서 그렇게 무자비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부지불식간에 모르고 불순종한 요나단은 죽이려고 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한 자신에 대해서는 살아 있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이죠. 요나단이 이 모든 일의 원수이자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몰아세워 요나단을 죽여야 되겠다고 지금 나오는 것이죠. 그렇게 사울 왕이 자신의 아들 요나단을 죽이려고 나오니까 들고 일어난 것은 바로 백성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인 그 왕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 했는데 백성들이 털끝 하나 상할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오늘 하나님이 주신 이스라엘의 큰 구원을 이룬 가장 중요한 일등 공신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아들 요나단이라는 것이죠. 지금 눈에 보는 정치적 왕은 사울왕이었지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믿음의 사람은 요나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서 하나님이 놀라운 승리를 주신 이유와 일등 공신을 백성들을 모두 본 것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요나단을 죽이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라며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그 백성들이 그 아버지의 혈기로 요나단을 죽이려 하는 것을 막고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였다는 게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여러분 백성들이 다 알듯이 누가 이 시간 믿음 가운데 선명하게 쓰임받고 있는지, 하나님 은혜로 쓰임 받고 있는지 사람들도 다 알아봅니다. 그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우선순위가 분명히 있는지…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는 그 사람,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승리, 백성들을 다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영적 승리를 경험한 현장에서 사울왕과 같이 자격지심에 빠져 자꾸 하나님이 주신 승리에 자기 숟가락을 올려 놓으려 하거나, 자기가 믿음으로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회개하고 무릎 꿇기는 커녕 다른 사람에게 탓하며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으려 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울왕의 모습에서 탈피하며 요나단과 같이 이스라엘이 큰 구원을 이루는 데 쓰임 받는 자가 되기를 열망하십시오. 자리와 위치가 여러분들을 쓰임 받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신실한 믿음과 순종으로 인생을 던짐으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이 여러분들을 하나님에게 쓰임받는 도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기왕 신앙생활 하는 것, 하나님께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쓰임받기를 사모하며 요나단과 같이 나아가기를 사모하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격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스스로 모자라거나 부족하다고 여기는 마음이 바로 자격지심입니다. 왕으로서 자기가 앞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며 하나님이 블레셋 사람을 앞서 싸우시는 영적 전쟁에 믿음으로 반응했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해서 사울왕 마음에 찾아온 게 바로 자격지심입니다. 반대로 그 아들 요나단은 아버지와 달리 블레셋 군대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의지하며 그 한사람이 전세를 뒤집어서 영적 전쟁이 승리하게 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케 하시며 역사를 목도하게 된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그 모든 게 왕을 통해 이루어지는 믿음의 고백과 영적 승리로 이어져야 하는데 그게 자신이 아닌 아들 요나단을 이루어 졌으니 왕으로서 체면이 서지 않고 부족함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 되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큰 승리를 경험한 직후 사울왕은 자격지심에 사로잡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자 맹세를 하게 됩니다. 큰 승리로 이끈 전쟁을 막 끝낸 군인들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어명을 내린 것입니다. 전쟁한 군인들이 얼마나 심신이 지치고 배가 고프며 힘이 들겠습니까? 잘 먹는 것이 전쟁에는 군기와 사기와 다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말씀에서 두번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였다는 말을 강조할 정도로 블레셋 사람을 치느라고 힘이 들고 피곤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그 큰 전쟁의 승리 직후에, 군대의 군기와 사기를 다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큰 승리 직후 군인들에게 잘 먹이고 사기를 북돋았으면 더 나아가서 더 큰 승리로 이어질 수 있는데,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사울왕은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기와 사기를 다 떨어뜨리고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사울왕의 자격지심으로 나타나는 다른 과오는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고 구원하게 하신 전쟁 인데 자기가 숟가락을 얹으려고 하는 시도입니다. “내가 내 원수에 대해 보복하는 때까지” 먹지 말라 명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영적 전쟁인 이 블레셋과의 전쟁을 사울왕 자신이 내 원수를 보복하는 전쟁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자기 때문에 전쟁에서 이긴 것이 아님을 본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자격지심이 전쟁의 성격을 교묘히 바꿔 버린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승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하나님을 신뢰한 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일 하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고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사건인데 이것을 사울 자신이 자기 원수를 보복하는 사건으로 변질 시키며 이 전쟁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겁니다. 내가 내 원수를 죽이기 위해 하는 전쟁이 되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이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승리라는 게 빠진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왕은 전쟁의 성격을 변질시키면서까지 자신이 승리에 숟가락을 얹으려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 하나 잘못 만나서 그의 자격 지심이 이끄는 헛발질하는 어명으로 고생하며 전쟁에서 이겼음에도 불구하고 배가 고파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헛발질 하는 사울왕의 어명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말은 선명하게 대비 되고 있습니다. 사울의 명령을 듣지 못하고 요나단은 꿀을 찍어 먹었고 먹자마자 그의 눈이 밝아졌다고 증언합니다. 그 때 백성들이 지금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어명이 떨어 졌는데 먹으면 큰일난다고 얘기하면서 아버지의 어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나단이 한 말이 중요한데, 아버지의 어명은 “백성들과 군사들을 곤란하게 하는 어명”이었다는 겁니다. 내가 꿀 조금 먹고도 이렇게 눈이 밝아지고 힘을 얻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군대가 힘이 없어서 배가 고파서 더 못 나아 가는 게 너무 아쉽고 안타까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승리의 결과를 막는 장애물이 뭡니까? 사울왕의 자격지심에 사로잡힌 어명이었다는 겁니다. 지금은 굶겨 가지고 군기와 사기를 저하 시킬 때가 아니라 그 피곤한 몸을 얼른 먹고 회복해서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 이 블레셋 사람들을 끝까지 더 쳐서 완전한 승리로 나아갈 수 있는데 아버지의 어명이 그걸 막는 장애물이 된 것임을 증언하는 겁니다. 나중에는 군인들과 백성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참다 못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전리품으로 가져온 동물들을 피째 먹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되고 나니까 사울왕이 놀라서 피 째 먹으면 큰일난다면서 동물들을 끌어다가 잡아 먹도록 장소를 지정합니다. 결국 원칙이 무너진 것입니다. 이렇게 피 째 먹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백성들이 이 정도로 배가 고팠고 허기졌다는 것을 깨닫고 어명을 번복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본인이 먹지 말라고 어명으로 협박해 놓고 결국 백성들이 다 먹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든 기회를 날린 후에…그리고 나서 더 안타까운 장면이 마지막에 등장하는데 그게 사울왕이 처음으로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는 장면입니다. 사울왕이 블레셋 군대와 큰 승 이후에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기 위해 단을 쌓았다…이런 믿음의 고백으로 쌓은 제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처음 쌓은 여호와를 위한 단,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수많은 동물들을 먹기 위해 그냥 잡은 그 현장, 모든 백성들이 배가 고파 못 참고 피 째 음식을 먹었던 그 부정한 곳에 그냥 돌을 쌓고 하나님께 제단이라고 만든 겁니다. 거룩하고 구별된 곳과는 전혀 거리가 먼 그 곳에 사울왕의 첫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제단과 제사를 얼마나 경히 여기고 하찮게 여겼는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또한 그 제단을 쌓은 후 사울의 입술로 하는 고백, 예를 들면 사무엘이 고백했던 에벤에셀의 하나님과 같은마음을 담은 고백이 일체 없습니다. 마음을 담은 고백도 없이 거룩하고 구별되지 않는 장소에서 쌓은 제단은,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스스로 드렸던 사울왕의 모습의 부끄러운 연장 선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적 전쟁을 자기가 원수 갚는 전쟁으로 바꿔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의 타이밍을 놓쳐버린 채 군기와 사기를 다 무너뜨리는 어명이나 내리는 헛발질, 그게 사울의 영적 무너짐에 전조 증상들 이었습니다. 물론 15장에 가서 완전히 무너지게 되지만 그 때까지 이런 전조 증상 들이 계속 사울에게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모자라거나 부족하게 느끼는 자격지심이 있다면 이 시간 그것을 주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승리를 내 원수를 갚는 일로 변질시키는 악한 행동, 하나님이 주신 기회과 타이밍을 놓친 채 군기와 사기를 다 떨어뜨리는 헛발질, 제단을 거룩하고 구별되게 쌓지 못한 실수로 이어지는 사울왕의 자격 지심이 이끄는 무너짐의 전조증상들이 우리 삶에 반복되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이 주신 승리에 숟가락 얹지 않고, 주님을 멸시하지 않으며 거룩하고 구별됨으로 주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늘 주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전쟁이란 한 사람으로 인하여 전세가 뒤집힌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사울왕과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셀수 없는 군인들과 주변 환경, 블레셋 사람들의 군사력을 바라보고 압도당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그 기세에 눌려 싸울 생각을 하지도 못하고 도망하고 숨었으며 남아 있는 백성들조차 흩어지려 했습니다. 그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 가운데 사울왕은 하나님의 타이밍을 신뢰하지 못하고, 결국 기다리지 못한 채 자기 스스로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울왕과 대다수 이스라엘 군인들과 달리 요나단은 믿음을 듣고 붙들고 그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뛰어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이 믿음의 눈으로 바라본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 적들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한 영적 전쟁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곳에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요나단과 그 부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인생을 던진 그 영적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앞서 싸워 주시면서 놀라운 승리를 주신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이렇게 영적 전쟁에서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기를 던진 자가 요나단 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무장한 한 사람을 통해 그 모든 전쟁에 전세가 바뀌어 버리는 겁니다. 요나단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 하시는 영적 전쟁이 무엇인가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도하게 하셨습니다. 그 막강했던 블레셋 군대가, 철기 문화의 최고의 화력을 가진 그 군대가 지금 무너지고 이리저리 흩어지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더니 사기 충만했던 블레셋 군대 안에 소동이 점점 더해지더니 서로가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며 스스로 무너지는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은 영적 전쟁이었고 그 영적 전쟁은 사람들의 힘이나 돈의 힘이나 군사력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선명히 바라보는가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울왕은 영적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실패자이며 반면에 그 아들인 요나단은 아버지보다 훨씬 나은 왕자로서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영적 전쟁을 제대로 준비한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울왕의 부끄럽게 하시며 수많은 백성들과 사울왕 앞에서 영적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목도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울왕 본인이 그렇게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신뢰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되는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기 자신과 믿음을 가지고 나아간 그의 아들이 선명하게 대비되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그 놀라운 기적 앞에서 사울은 쓰임 받지 못한 채 그냥 먼 산 바라보듯 보고 있는 거예요. 사울왕은 지금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음을 눈으로 목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자기의 연약한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 일이나 세상 일이라는 것은 모두 사람의 많고 적음, 돈에 많고 적음에 그 성패가 달리지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며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는 것이 제일 중요하기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믿음을 붙들고 나아가는 것에 따라 성패가 달림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 거죠. 그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요나단과 같이 그 믿음을 붙들고 인생을 던진 인생을 들어 하나님이 사용하시며 이렇게 놀라운 기적, 블레셋을 싸워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찾으시는 왕의 모습, 하나님께 쓰임 받는 왕의 모습은 뭡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입니다. 그런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뒤집는다는 것을 깨닫고 나아가는 그런 왕이 되길 원하셨던 것이죠. 안타깝게도 사울왕은 그 모습에서 실패하였고 그의 아들인 요나단은 아버지보다 훨씬 일취월장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전심으로 의지 하여 영적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앞서 싸우셔서 전세가 완전히 뒤집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사울왕과 많은 군대가 블레셋을 치러 올라갑니다. 상황이 이제 기울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서야 뒷북 치러 올라가는 겁니다. 사울왕이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 했을까요? 자기 아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여 신뢰하여 인간적인 눈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영적 전쟁의 판세를 다 바꾸는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서 승리를 가져오게 되었고, 자신은 부끄럽게 꽁무니만 쫓아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한 사람이 이렇게 중요한 겁니다. 한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진심과 전심으로 믿고 의지하는 결단과 인생을 던짐으로 모든 전세가 뒤집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으로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음을 성경은 선명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거둔 기적과 같은 승리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승리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음을 철저히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블레셋이라는 적군은 항상 영적 전쟁의 관점으로 싸워야만 이길 수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 눈이 블레셋 군사력과 군인 숫자에 쏠리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고정되게 된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앞서 싸워 주셔야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사울왕과 같이 전쟁터에서 싸울 사기와 군기를 다 잃어버린 채 벌벌 떨고 서 있던지, 요나단과 같이 하나님에게 눈과 마음이 고정되어 영적 전쟁을 선포하고 인생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싸우러 나가던지…그 선택지가 놓여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 사울왕과 같이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 요나단과 같이 믿음을 붙들고 선명하게 판세를 뒤집으며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갈 지를 정하라고 우리에게 선택지를 내밀고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에게 눈과 마음이 고정 되어야만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영적 전쟁임을 항시 깨달아야 삽니다. 믿음의 뒷북을 치지 마시고, 쓰임 받지 못한 채 다른 사람들 쓰임 받는 것 구경하지 마시고 요나단과 같이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그 한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인생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믿음을 붙들고 나아감으로 영적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심을 목도하며 선명하게 쓰임받는 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한 분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울 왕은 처음으로 세운 눈에 보이는 왕으로서 이 왕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기대와 우리를 인도할 것이라는 기대 가운데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그렇게 강력하게 요구해서 세워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사울왕은 그렇게 신통치 않은 왕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 블레셋과의 영적 전투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끌지 못했으며 그의 인생에 하나님이 내 편인가 아닌가에 대한 중요한 영적 시각을 잃어버린 자가 사울왕 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병력이나 군사력이나 혹은 힘에 모든 승리가 달려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자신의 눈에 보이는 힘과 능력, 사람들이 없으면 위축되고 도망하여 벌벌 떨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불쌍하고도 불순종하는 왕이 사울왕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에 대한 신뢰도 기다림도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도 없었고, 그 잘못 가운데 하나님께 회개하는 모습도 없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 핑계 대고 다른 사람을 탓하고 나는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다며 죄를 포장하고 자기를 변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와는 달리 오늘 말씀에서 요나단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기를 든 부하와 함께 블레셋과 싸우려고 건너가고 있습니다. 사울 왕 주변에는 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머물러 있었고 싸울 의욕도 힘도 다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비교 불가, 절대 열세의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과 600명의 사람들은 싸워도 백전백패라는 절망감에 사기를 다 잃은 채, 가만히 있어야 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단은, 다 벌벌 떨고 있는 그 현장에서, 아무도 안 가는 그 전쟁터로 나가 싸우겠다는 것이죠. 혼자라도 가서 블레셋을 건너가 그들과 싸우겠다는 거예요. 말씀을 보면 아버지 사울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는데 왜 아버지에게 알리지도 않고 가는가 하면 아버지의 마음은 이미 정해진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전쟁 하지 않기로 마음이 확정되었습니다.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상황과 군사력에 압도되어 그냥 백성들과 함께 벌벌 떨며 거기 있기로 마음이 확정된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기에 요나단은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두명 이라도 적진을 향하여 건너가기로 마음의 뜻을 세운 겁니다 이런 요나단의 모습은 아버지 사울왕과 극명하게 대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꾸고 그 시대의 흐름을 바꾸고 그 모든 상황을 바꾼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 이런 소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성경은 일관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600 명도 작은 인원이었습니다. 싸워봤자 이길 수 없는 인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 두 사람을 데리고 요나단은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어찌 보면 너무 무모해 보이는 도전…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시선이 멀어진 사울왕과는 달리 그에게는 환경과 상황과 사람에 민감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눈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죠. 그렇게 무모하리만큼 담대하게 블레셋의 향하여 넘어가며 싸우려고 하는 요나단의 입술에서 나온 믿음의 고백을 주목합니다. 블레셋을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라고 봤다는 거예요. 아버지 사울은 눈에 보이는 블레셋의 군사력에, 그리고 사람들에게 너무 민감하였고 거기에 모든 눈이 쏠렸던 것과 정반대로 그의 아들 요나단은 뭘 보았습니까? 블레셋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없는 할례없는 백성의 부대라는 겁니다. 그 할례 없는 자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전쟁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입에서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않다”는 놀라운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가, 하나님의 언약이 함께하는가 아닌가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고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내가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 믿음으로 나아가면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런 요나단을 따르는 부하의 고백입니다.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겠나이다.”요나단의 무기를 든 자도 솔직히 얼마나 무모하고 두려웠겠습니까? 요나단에게 가지 말라고 목숨이 위태하다고 설득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하 또한 앞서 가시면 내가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겠다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에 인생을 던지는 요나단과 그 부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블레셋과의 전장에서 하늘의 역사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블레셋 진영의 떨림이 있었고 부대도 떨었고 땅도 진동하였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은 다 뭐냐 하면 하나님이 그 전쟁에 개입하시고 역사하신 큰 증거들입니다. 그 적진을 향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고 개입하셔서 온 땅도 블레셋 군대로 심히 떠는 진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요나단과 그 부하의 믿음, 그 믿음에 인생을 의탁한 자들을 통해 전쟁의 판세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와 달리 그 아들 요나단은 이 믿음을 분명히 붙들고 그 영적 전쟁을 향하여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붙들린 창조적 소수가 그 전쟁의 흐름을 뒤집고 바꾸는 것입니다.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전쟁이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이끄시는 전쟁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주님은 원하시는 겁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냐, 힘이 얼마나 많으냐, 돈이 얼마나 많으냐, 군사력이 얼마나 크냐에 달려 있지 않고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의지 하느냐에 그 승패가 달려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믿는 것이 위기 가운데 승리하는 성도의 비결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위기 가운데 마음을 쏟으며 무엇을 보십니까? 사람들의 힘을 보십니까? 숫자를 보십니까? 그렇게 사람들과 힘과 환경에 내 눈이 가 있고 민감해지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원은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고 붙드느냐에 따라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을 싸우며 그곳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본질을 지키는 영적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 하며 그 전쟁터로 인생을 던지는 믿음의 사람, 요나단의 고백을 우리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사람과 환경에 너무 눈이 쏠리고 민감해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역사 하심을 기대하며 하나님을 향해 눈이 쏠리고 마음이 민감해서 그 믿음에 의탁 하는 창조적 소수가 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려있지 않음을 마음에 분명히 새기며 주님과 마음에 같이하여 따르기를 확정 하십시오. 주님 내 인생을 앞서 가시고 내가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겠다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을 때 주님이 우리를 통하여 역사 하시고 일하심을 믿습니다. 나와 앞서 계시는 주님을 붙들고 나에게서 일하시는 주님의 구원을 맛보아 아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의 결정적인 실수 뒤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열악했고 싸울 형편도 안됬는지를 비교하며 결국 하나님의 타이밍을 그렇게 기다리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증언합니다. 사울왕이 그렇게 조급하게 번제를 드려야 할 정도로 모든 전쟁이 준비되어 있었는가…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사실 군인 수와 군사력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면 그 전쟁이 어떤 결말로 갈 지 시작 전에 이미 판가름 난 싸움 같이 보였습니다. 마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난 것과 마찬가지로 사울왕은 지금 싸울 만할 상황도 싸울 만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사울 주변에 남아 있던 군인은 약 600명 정도였으니, 블레셋과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 절대 열세였습니다. 더구나 오늘 말씀을 보면 블레셋 군대는 그 당시 최신 무기인 철기 무기를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군대는 철기 무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오직 사울과 요나단만 철기 무기가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적군은 소총 들고 내려오는데 아군은 칼 밖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600명 밖에 안된다는 숫자에, 철로 된 칼이나 창이 없는 상황,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워봤자 백전 백패인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해보면 사울왕이 그렇게 조바심을 내며 번제를 먼저 드릴 필요가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서둘렀다고 바로 나가 전쟁을 할 수 있는 상황도 여건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전쟁을 해야 해서 그런 절박함 가운데 스스로 번제를 드린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찾아온 두려움과 불안함이 눈에 보이는 조건으로는 블레셋을 이길 수도, 싸울 수도 없는 상황 속에 압도당해 하나님을 등져 버리는 것입니다. 절대 열세에 상황에서, 눈으로 보는 전력으로는 100% 질 수 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사울이 왕으로서 했어야 하는 행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신뢰하며 은혜를 구했어야 합니다. 어차피 자신의 계획과 자신의 타이밍으로는 싸울 힘도 능력도 없었기에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타이밍을 믿고 붙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아니하고 사람들과 환경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확대 해석하며 거기에 민감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주신 규칙과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을 다 무시하고는 그 이후에도 답이 없는 상황에 직면해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등장하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완전히 버리신 것도 아니고 뜻하지 않은 승리를 주시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사울왕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놓치게 되며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지경까지 가 버리게 되는 것이 사울왕의 비극이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 전쟁이 영적 전쟁임을 마음에 새긴다면 우리에게 블레셋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잠시 살아가며 하나님의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서 우리도 블레셋과 같은 세상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나 크고 숫자도 너무 많고 무기는 최신식이고, 모든 것이 객관적으로 절대 열세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젖어들고 이 세상에 민감하고 익숙한 나의 연약한 몸이 사단의 미혹과 함께 3박자의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오늘도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에서 영적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우리의 무기는 너무 형편 없어 보여요. 말씀만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며 싸우는 것이 너무나 무력하고 무모해 보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물어보시는 겁니다.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과 싸우고 있는가?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과 싸우고 있는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존재, 이 세상 가치와 우선순위를 넘어 하늘의 가치와 우선순위를 붙드는 존재…그것은 전쟁과 같이 취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사울왕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잊어버리며 하나님께 알려 주는 방법도 잊어 버린 채 눈에 보이는 숫자들, 눈에 보이는 돈의 힘, 군사력을 비교해 블레셋과 같은 세상과 싸우려 한다면 백전 백패라는 겁니다. 그렇게 싸워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블랙셋과 같은 이 세상과 싸워야 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타이밍,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임을 확실히 선포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앞서 싸우시도록 주님 앞에 나를 드리며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싸우는 유일한 무기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겉으로 봐선 이길 수 없는 싸움 같이 보이는게 분명합니다. 숫자적 열세, 군사력의 열세가 분명하고 싸우기도 전에 승패가 결정 난 것처럼 보이는 게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블레셋 같은 이 세상에서 싸움은 나를 붙드는 싸움도 아니고 사람이나 환경을 붙드는 싸움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나 힘을 붙드는 싸움도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붙드는 싸움이라는 걸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엎드릴 때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앞서 블레셋과 같은 세상을 싸워 이겨 주신다…이것이 사무엘상에서 반복되는 영적 승리의 비결이며 사울왕은 안타깝게도 그 하나님의 원리를 저버린 채 하나님께 등을 돌리며 하나님에게서 떠나간 비극적 왕이 되 버렸습니다. 이 험한 세상 블레셋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야 승리합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사태들, 우리 능력을 벗어나는 상황과 어려움을 만날 때 앞으로도 뒤로도 나아갈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어려움을 뚫고 나가며 주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로 승리하는 천국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한 사울 왕에 대한 사무엘의 안타까운 경고입니다. 예전에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온 백성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 왔지만, 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어 블레셋 사람들을 대신 싸워 이겨 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사무엘은 그 동일한 영적 승리의 경험을 블레셋이 쳐들어오는 위기 상황 가운데 사울왕이 경험하기를 기도하며 소망 했습니다. 그래서 위기 가운데 자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고 하나님 앞서 나가지 않으며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전쟁이 되어야 승리한다는 것을 그에게 가르친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왕은 하나님 보다는 늘 눈에 보이는 환경에 눈이 먼저 가고, 사람들의 평가와 말들에 지극히 민감하였습니다. 결국은 그 영적 전쟁을 앞두고 압도되어 그 hot button 버튼을 누르게 되고 번제를 스스로 드리고 예배를 해치워 버리는 불순종을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 불순종 후에 사무엘이 단도직입적으로 사울왕에게 물어 봤을 때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해 달라고 은혜를 구하는 대신 어쩔 수 없이 드리게 되었다며 자기 변호와 핑계 논리로 일관했습니다.
회개하는 대신 블레셋 탓, 사무엘 탓, 백성들 탓을 돌리며 핑계대는 사울왕에 대해 오늘 말씀은 사무엘이 아주 뼈에 박히는 말을 합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멍청하고 어리석게 행동하였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안 계신 분처럼 여긴 행동이 망령되이 행한 본질이었습니다. 그 멍청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망령되이 행하는 삶의 본질은 “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하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함”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왕에게 하신 명령이 뭡니까?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하나님 보다 앞서 나가지 말라는 것이죠. 너가 조건이 되어서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겸손함을 들어 내가 일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담아 순종하며 그 말씀을 쫓아 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명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하나님의 그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세우고 사용하신다는 것을 지금 망각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겁니다. 영적 전쟁에서 승패 기준이 적군의 숫자의 힘 무기의 힘에 달린 것처럼 여기며 상황에 맞춰서 모든 걸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사울왕의 내부 논리는 하나님이 그 현장에 안 계시다고 고백하는 불신앙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그 압박이 찾아오는 위기의 순간에 왕으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매달렸어야 하나님이 나보다 앞서 가시며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시며 하나님이 전쟁을 이끌어 주시는데, 더 이상 예전의 small, humble, faithful한 사울왕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매달리는 대신 사람에게 매달리고 환경과 조건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민감한 대신에 사람들과 환경에 민감하게 되었습니다. 잘못된 결정과 불순종 후에도 하나님에게 회개하고 자복하는 대신에 핑계와 변명에 급급한 자가 되 버린 것입니다. 겸손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기 않았기에 더 이상 하나님이 쓰실 수 없고 일하실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겁니다. 이 모든 게 망령되이 행한 사울왕의 영적 문제였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울왕이 기다리지 못하고 스스로 나가서 인도한 번제, 제사장도 아니면서 나아가서 드린 그 죄의 본질입니다. 제사를 누구를 위해 드린 겁니까? 전쟁이 막 시작하려고 적군이 막 쳐들어 오려 하니까,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제사를 해치우고 때우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영광 돌리며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하는 제사가 아니라 흩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예배를 드린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울왕의 망령되이 행하는 삶의 본질이었습니다. 예배를 멸시하고 무시하는 자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 하는 자라는 것이죠. 예배와 제사를 하찮게 여기는 자가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자입니다. 그래서 나의 예배에 대한 태도는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고요. 나의 말씀에 대한 태도가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보고 믿는가의 태도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 있어서 망령되이 행하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는 것은 다 사울왕의 예배와 제사를 하찮게 여기는 그의 잘못된 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무엘이 경고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왕의 나라의 영영히 세우신 수도 있는데 지금 그 기회를 박차버린 거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왕으로서 이미 불합격이 되어 버린 안타까운 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을 예고 합니다. 어려움 가운데 핑계 논리와 탓함으로 회개 기회를 날려 버리지 마십시오. 겸손하게 엎드려야만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는가가 나의 최우선에 관심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고 붙드십시오. 사람들과 환경에 내 모든 정신이 가기 시작할 때 내가 영적으로 내려가고 있는 시점 임을 잊지 말며 사울의 안타까운 무너짐을 반면교사로 삼기 원합니다. 우리는 끝까지 주님 앞에 신실 하며 끝까지 겸손하며 하늘이 주신 기회를 날려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지혜로운 성도,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 왕이 범한 불순종 이후, 자기 변명과 핑계로 완전히 무너지는 안타까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small, humble, faithful했던 사울을 높이 세워 주시며 그를 통해 승리를 주셨음을 잊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을 철저히 의존하고 사람들이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만 바라보라고 당부했습니다. 모든 영적 전쟁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 의지하지 않는가로 결정된다는 것을 항시 잊지 말라고 사무엘이 신신당부 했었는데, 결정적 순간에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더 민감하게 바라보고, 상황을 더 민감하게 바라보며 불순종으로 무너졌습니다. 끝까지 기다렸어야 했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믿었어야 하는데 조급함에 자기 방식으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해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마자 사무엘이 등장합니다. 타이밍이 참 기가 막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되는 건데, 인생은 타이밍이자 때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 사울은 그 하나님의 타이밍을 놓쳐 버린 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번제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도착한 사무엘은 바로 사울왕에게 지금 무슨 일 한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 사무엘이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직면하고 바로 회개하라고 물어본 것입니다. 아…지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구나…얼른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어야 합니다. 주님 저 살려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제가 너무 마음이 조급해 가지고 기다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때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살려주세요…그러면서 매달렸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왕은 죄를 직면하여 회개하는 대신, 그 지은 죄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엎드리는 대신, 자기 죄를 포장하고 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내가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 논리를 가지고 오는 겁니다. 사울 왕은 3가지의 자기 변명과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백성들 핑계, 사무엘 핑계, 블레셋 사람들의 핑계...결국 하나님의 타이밍에는 완전히 둔감한 채,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 밖에 보지 못했고 거기에 압도당한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최신 무기와 수많은 군사력을 동원해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인 위기 상황, 그의 눈이 집중한 것은 백성들이 흩어지는 걸 본 것입니다. 그렇게 흩어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마음에 두려움이 몰려왔고, 그 모든 이유는 사무엘이 지금 기다려도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사무엘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불순종을 어쩔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고, “부득불”한 상황이었다고 변명하는 겁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 거룩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끄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의 죄를 짓고 나서 그는 핑계 논리를 대면서 자기는 쏙 빠지는 겁니다. 백성들이 자기에게서 흩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사무엘이 늦게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고,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 논리…그래서 나는 아무 잘못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어떨 수 없이 번제를 드렸다는 이 자기 변명과 핑계논리, 이게 사울왕의 완전한 비극이었습니다. 지도자는 것은 항상 책임을 지는 자리입니다. 권한이라는 것은 책임과 함께 주어지는 겁니다. 왕이라는 자리는 어깨가 무겁고 견뎌야 되는 책임의 무게가 있는 겁니다. 지도자가 책임을 지지 않을 때 백성들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비극은 공동체의 결정적인 위기 상황 가운데, 그의 눈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데 있습니다. 더 큰 비극은 결국 하나님의 때와 타이밍을 기다리지 못한 채 불순종의 죄를 범했다는 것, 그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대신 자신은 쏙 빠져나가는 핑계 논리로 책임을 회피한데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해서 무너지고 불순종했다고 회개하는 대신, 백성 탓, 사무엘 탓, 블레셋 탓을 하며 자신의 죄를 어쩔 수 없이 했다며 정당화하면서 또다른 죄로 완전히 무너지는 두번째 결정타가 되 버린 것입니다. 이 두번째 결정타로 완전히 무너지는 패턴은 너무나 성경에 익숙하게 등장하는 죄의 확산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도 똑같이 그랬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지 말아야 될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물어 보셨습니다. 하나님도 동일하게 몰라서 물어보신 게 아니죠. 물어보신 이유는 주님 저 잘못했습니다…죽을 죄를 졌습니다…라고 엎드려 회개하고 두손 들고 나올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울왕과 똑같이 회개하는 대신 자기 변명과 핑계논리를 대면서 포장합니다. 아담은 하와 탓하고, 하와는 뱀 탓을 하면서, 자신들은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기 급급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대로 빌리면 아담은 당신이 보낸 저 여자 때문에 내가 부득이 하여 선악과를 먹은 거고, 하와는 저 뱀 때문에 내가 부득이하게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핑계 대는 것과 똑 같은 겁니다. 그러면서 또 다른 죄로 완전히 무너지는 두번째 결정타가 되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죄의 확산성이자, 완전히 무너지는 동일한 패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 합니다 하나님 앞에 일차적으로는 이렇게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지 말고 끝까지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주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울과 같이 불순종으로 무너지고 넘어진 현장에서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며 돌아와야 삽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자기 변명과 핑계논리를 대고, 사람 탓, 상황 탓, 하나님 탓을 하며 자신은 쏙 빠져나오려 하는 삶, 이게 다 하나님에게 은혜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날려 버리는 두번째 죄 라는 것입니다. 그 죄로 완전히 주저 앉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의 사랑을 거두지 아니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곁길로 나아갔을 때, 우리가 죄짓고 무너졌을 때 그 무너져 있는 현장에서 변명하지 말고 핑계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바로 돌아오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 같이, 사울왕과 같이 회개로 부르시는 음성 앞에 내 죄를 변명하고 핑계 논리를 대며 하나님의 은혜를 던져버리고 저버리게 되는 비극이 찾아옴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소리에 민감하십시오. 그 부르시는 소리가 회개하며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음성임을 잊지 말고 핑계와 변명으로 완전히 무너지는 인생 대신 그 무너진 현장에서 두 손 들고 주님 앞에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로 건짐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임계점이란 말의 정의는 경계가 다다른 지점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액체에서 기체로 형 질과 모양이 변화를 일으키는 시점이 바로 임계점 입니다. 임계점에 다다른 물은 그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들리지 않았던 물 끓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참고 참다가 바로 형질과 모양이 변화를 일으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임계점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왕의 마음에 그동안 꾹 눌러 놓았던, 담았던 생각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왕의 마음속에 있었던 불신앙이 임계점이 되고 나니까 hot button을 누르게 되고 감정이 실린 행동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임계점을 넘어 가면서 마음속에 꾹꾹 눌러도 불순종의 생각이 터지면서 감정이 실린 불순종의 행동으로 나아가는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지금 상황이 매우 위급한 때입니다. 싸워서 이길 수 없을 거 같은 블레셋이 쳐들어오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데 이 위급한 상황에 사무엘이 7일을 기다렸는데도 오질 않는 것입니다.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데 사무엘이 안 와서 시작도 못하고 백성들은 막 흘어 지려고 하는게 보입니다. 그때 사울왕의 마음속에 터져 나오는 생각은 아마 이랬을 겁니다. 이렇게 우리 모두 전멸이 구나…모두 망하는 구나….더 중요한 생각은 “사무엘이 왜 이렇게 안 오는거야?” 모든 화살을 사무엘에게 돌리고 있는 생각이 막 올라오면서 뇌관을 건드린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지금 마음속에 쌓여 있었던 불신앙을 터트리게 되는 임계점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불신앙을 터뜨리는 임계점에서 사울왕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번제를 스스로 인도해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 왕이 “번제 와 화목제를 이리로 가져오라.” 명령할 때 그 말을 한 번 상상해 보시면 그 말에는 사울의 쌓아 두었던 감정이 실리는 말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무엘의 대한 원망,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 감정에 다 섞인 말과 행동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상황과 환경과 사람들에게 집중했던 사울의 진짜 속마음이 눈에 보이는 불순종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시점이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무엘 대신 스스로 번제를 드립니다. 임계점을 넘어 터지게 된 사울왕의 불순종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을 무시한 불순종입니다. 제사는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게 하나님의 기준인데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 때문에 이 원칙과 기준을 무너뜨리며 월권을 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을 이끄는 자기 변명의 논리는 뭐냐 하면 지금 내 코가 석자 인데 예배와 제사 하나하나 어떻게 다 따지냐는 겁니다. 모든 상황이 모든 것을 잘못된 원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결과 지상주의 입니다. 예배의 기준과 원칙 보다는 내가 처한 전쟁이 훨씬 더 중요하고, 내가 처한 상황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예배와 제사 대신 내 문제와 상황이 항상 압도하고 크게 보이며, 그 상황과 환경을 통해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과 방법을 신뢰하지 않는 사울왕의 불순종 이었음을 성경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불순종입니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믿음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사무엘이 왜 7일 동안 기다리라고 사울에게 명령을 했는가 하면 하나님의 때와 타이밍을 신뢰하는 훈련이었습니다. 사울은 왕이었고, 왕은 백성들을 대표하기에 위기 가운데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하나님이 먼저 보이는 것을 삶으로 훈련하고 체득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특별히 이 블레셋과의 전쟁은 영적 전쟁이었기 때문에, 영적 전쟁의 승패는 눈에 보이는 군사력이나 사람 수나 돈의 힘을 통해서 갈리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바라보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것을 철저히 믿었어야 했습니다. 사울왕은 백성을 대표하여 위기 상황에서 그 영적 원리를 붙들고 전쟁에 나아가며 주님을 먼저 바라보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훈련되어 있어야 하는 자로 세움 받은 겁니다. 그래서 온전한 기다림을 요구하며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기다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온전히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적군을 바라보고 흩어지는 백성을 바라보면서 그가 임계점에 도달하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자신이 스스로 때를 정해버렸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울왕은 사무엘을 분명히 7일 이나 기다렸습니다. 95% 기다린 것인데, 안타깝게도 마지막 5%를 기다리지 못한 겁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95% 기다렸는데, 5%를 못 기다려서 자기 스스로 플랜 b 를 만든 것과 똑같습니다. 끝까지 못 기다린 아브라함은 결국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끝까지 못 기다린 것은 못 기다린 것이라는 겁니다.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사울왕은 사무엘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플랜 B를 만들어 스스로 번제를 드리게 되고, 결국 자기가 만든 플랜 b 때문에 아브라함이 큰 어려움을 당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사울왕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못 기다려서 결국 못 기다린 자가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이 말씀을 적용해 보며 거울과 같이 비춰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차곡 차곡 쌓아둔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압력을 받게되면 임계점에 도달해 그것이 나에게 감정이 실린 불신앙의 행동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사울 왕과 같이 그렇게 감정이 실린 불신앙의 행동으로 나아가기 까지 내 삶을 방치하지 않는 게 지혜입니다. 사울왕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언제든지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감정이 실린 불신앙의 행동으로 불쑥불쑥 나올 수 있음을 잊지 말고 늘 깨어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동일하게 실수하고 자빠지는 우를 범할 수 있음을 잊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원칙이 무너지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에 새겨야 되는 영적 진리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늘 조심하며 처음부터 믿음을 붙들며 끝까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부르짖으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주님 이 약속을 지키는 은혜를 부어 주시 옵소서. 끝까지 기다리는 인내 를 허락하여 주시 옵소서. 임계점을 넘어 불신앙의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지켜 주시 옵소서. 그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담은 기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과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지 않으면 망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쫓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오직 여호와를 섬기는 백성이 되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말씀에서 사울왕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겸손히 엎드리는 초심을 잃어버린 채 무너지게 되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족하고 흠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런 부족한 사울을 택하신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사용 하시겠다는 뜻과 하나님의 은혜 밖에 없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사울의 영적 겸손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small, humble, faithful로 엎드리고 의지하며, 하나님만을 좇을 때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밖에 없고 하나님 없으면 나는 왕 될 자격이 없다고 겸손히 매달릴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권능을 주셨고 하나님은 사울에게 놀라운 승리를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2년이 채 안 돼서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small, humble, faithful한 자로 엎드린 된 사울이 2년만에 변하게 되는 거에요. 오늘 말씀은 사울 왕 인생의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무너지는 영적 실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신뢰하며 따르는 대신 불순종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무너지게 되는 배경은 블레셋 군대와 전쟁이라는 위기 상황에서였습니다. 요나단과 그의 군사들이 게릴라전 같이 블레셋의 수비대를 먼저 기습 공격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블레셋은 가만히 있다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듯한 느낌을 받은 겁니다. 멀쩡하게 있는데 너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려? 이런 분위기죠. 그래서 그 수비대를 공격했다는 명목으로 블레셋 군대가 총공세를 벌이며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는 게 지금 오늘 말씀의 배경입니다. 그런데 치러 오는 블레셋 군대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울왕에게는 2000명의 군사가 있었고 그 아들인 요나단에게는 1000명의 군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병거만 삼만…군대는 모래알 같이 많았다고 증언합니다. 군사력에 있어서 이미 비교 불가하고 싸움의 승패는 이미 정해진 싸움 같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투는 영적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이자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는 전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블레셋과 싸우러 나아갔을 때, 법궤를 마치 부적과 같이 여기며 나아갔을 때 모두 패배하고 심지어 법궤도 빼았겼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영적 리더십 아래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갔을 때, 블레셋 사람을 하나님이 우레를 보내셔서 직접 무찔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의 승패는 눈에 보이는 군사력과 숫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느냐 의지 하지 않는가가 전쟁의 승패를 가른다는 것을 계속 깨닫게 하셨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었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기름 부은 목적을 분명히 명시하셨습니다. “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그러니까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 영적 전쟁인 블레셋과의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목적이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왕은 무엇을 정확히 알아야 하겠습니까?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온다 그러면 이것은 그냥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 차렸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워야 되는 싸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믿고 붙들었어야 합니다. 마치 모세가 아말렉과 싸울 때 모세의 손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을 통하여 전쟁에 이기고 지는 것이 바뀌었던 것과 같이 지금 블레셋과 싸우게 되는 사울은 적군의 무기나 힘, 군사력을 바라보고 벌벌 떨며 대응하는 싸움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매달리느냐에 따라 승패가 달린 영적 전투임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근데 사울왕은 이것을 망각하고 보이는 것에 눈이 다 쏠려 버렸습니다. 사울의 눈이 고정되고 집중한 것은 1) 블레셋 군대의 크기와 군사력과, 2)백성들의 민심이었습니다. 수많은 블레셋 군대와 최신 무기들을 보면서 사울은 이미 마음에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모래알 같이 많았다는 성경말씀의 증언은 단순히 숫자가 많았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게 압도당한 사울의 시선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블레셋 군대를 과대 평가하고 벌벌 떨고 마음에 풍랑이 막 몰려오는 사울왕의 마음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더 크게 보여야 되는데 그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게 아니라 적들이 훨씬 더 크게 보이는 겁니다. 또한 사울의 눈을 사로 잡은 것은 백성들의 민심과 반응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벌벌 떠는 백성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다 숨거나 심지어 강을 건너 도망가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겁니다. 자신과 가까이 있어 도망가지도 못하고 있는 군인들은 모두 사기를 잃어버리고 벌벌 떨고 있는 것에 눈이 고정되는 겁니다. 블레셋 군대를 바라보고 두려움에 압도 당한 백성들의 반응을 바라보면서, 이미 마음속에 사울왕은 이미 패배 의식이 자리잡았습니다. 블레셋의 군대는 너무나 크고, 우리는 너무 약하다. 하나님을 바라볼 마음과 눈을 상실 한 채, 환경과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집중하며 민감해져 버린 사울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내일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되는 사울의 영적 실패, hot botton을 누르게 되는 전조 증상들이었습니다. 큰일이 벌어지기 전에는 이런 전조 정상들이 늘 있습니다. 이때 문제를 해결하고 빨리 돌이키면 큰 문제로 직면하지 않는 데 사울에게는 이런 전조 증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 차리고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것을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큰 문제에 직면하고 영적으로 와르르 무너지는 안타까운 일이 찾아오는 겁니다. 이런 사울왕의 영적 실패와 불순종으로 무너짐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일 수 있음을 반면 교사를 삼으며 거울과 같이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바라 봐야만 싸울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영적 전쟁이 우리 가운데 놓여져 있습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상황과 환경이 그 승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의지하느냐가 그 승패를 결정하는 것임을 항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는 상황과 환경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고 믿으며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어려움 속에 사울과 같이 상황과 사람들이 크게 보인다면, 그 때가 영적으로 은혜를 붙들어야 하는 때임을 깨달으십시오. 내 힘과 능력을 넘어, 나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넘어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전조 증상이 있을 때 속히 주님께 돌아오고 주님을 붙드십시오. 그래야 더 큰 문제를 직면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작게 보이거나 안 보이며 사람들과 환경과 적들이 크게 보일 때 그때가 이미 전쟁이 시작한 것을 깨닫고 전조 증상이 있을 때 하나님께 돌아와 더 큰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영적으로 지혜로운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겠다…는 이 비장한 고백을 통해 사무엘이 얼마나 기도의 사람이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죄 중에는 기도를 쉬는 죄도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무엘 인생 자체가 기도를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기도의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하다가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아들이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기도로 주신 아들을 어릴 때부터 엘리 제사장과 함께 성전에 살도록 바치고, 멀리서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랐습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체험하며 어머니의 기도를 먹고 자랐습니다. 그런 사무엘이 젊어서부터 노년이 될 때까지 기도를 붙드는 한결같은 사명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사무엘은 모든 직을 내려놓고 이제 모든 지위를 내려 놓는 자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하는 일 만큼은 넘겨주지 않고 계속 내가 해야 될 책무로 삼겠다는 것이죠. 중단할 수 없는 영적 사역을 내가 멈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직분과 일은 내려 놓을지 모르나 영적 사명인 기도하는 것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기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는 제일 중요한 방법이 바로 기도이기에, 기도하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비장한 고백을 우리 삶에 비추며 반성해보기 원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안하고 쉬는 것이 죄라는 것을 간과하고 살아갑니다.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알지만 기도하지 않는 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에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붙구하고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 보면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비추어보면 기도를 쉬고 멈추는 것을 죄로 선언하는 사무엘의 고백은 분명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식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사랑하는 제일 중요한 것은 음식을 나누고 같이 시간을 나누고 좋은 친구가 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사랑한다 말하고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한다 말하지만 그 사랑의 본질이 영적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그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실체로 믿고 순종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기도부터 시작해야 되고 사랑하기에 그 영혼 구원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그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에 대해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기도를 쉬게 되는 것은 결국 기도를 멈추게 되는 과정임을 발견하게 됩니다.기도를 쉬게 되면 그것을 방치하게 될 때 점점 기도가 멈추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를 멈추게 되면 하나님께 공급 받는 것을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장 말씀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약한 육신은 기도를 쉬게 되면 점점 기도가 멈추어지는 인생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렇게 기도가 멈추면 결국 시험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멈춘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신호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기를 멈춘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내가 이 자리 있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부터 모든 패망의 길로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질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기도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요 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능력이 없어도 나는 살 만하고 잘 나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 기도를 쉬는 죄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잃어버리지 않는 비결,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오직 기도의 결과라는 것을 선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경고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을 행하면 너희와 너희 왕이 다 멸망 하리라.” 악을 행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죄를 범하고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에게서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적인 신호는 뭐냐면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죠. 겉보기에는 섬기는데 마음을 다해 진심과 전심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듣고도 순종하지 않으며 듣고도 하나님을 좇지 않는 것이 악을 행하는 삶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일을 그렇게 쉽게 망각하고 무덤덤 해지며 왜 하나님을 경외하고 쫓는 대신에 마음을 다하여 섬기는 대신에 세상 것에 눈을 돌리게 되는가… 본질적 문제는 기도를 쉬고 기도가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내가 하나님이 없으면 안 뒤에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요. 그런 삶으로 이끄는 전조증상이 바로 기도를 멈추게 하는 교만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멈추게 되면 사울왕과 같이 겸손이 아닌 교만으로 반응하는 자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의 자리를 떠나고 기도를 쉬고, 결국 기도를 멈추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고 악을 행하며 왕과 백성이 무너지는 역사를 직면합니다. 우리에게 기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쉬면 죄가 될 만큼,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아니라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영적 표현이자 호흡 인 것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경외하며 마음을 다해 섬기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게 하는 모든 첩경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을 기억하며 겸손으로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만에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은혜 받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실체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자는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하나님에게 은혜를 공급받기를 사모하며 엎드리는 영적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사무엘과 같이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않으며 주님 앞에 늘 기도로 호흡하며 의지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기도를 붙들어야만 우리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망각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기를 열망하며,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섬기는 귀한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11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