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마침내 주신 그 아이 사무엘을 기도의 응답으로 고백하며 믿음으로 반응하는 한나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며 많은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목회를 통해서도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정말 인간의 방법을 넘어서 역사하신 기적을 여러번 목도했었습니다. 의사가 안된다는 병 고침을 체험하기도 하고 인간적인 방법이 모두 끊어졌는데 일이 이루어지는 수많은 역사하심을 목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하심, 그 놀라운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잘 돌아보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놀라운 기도 응답, 놀라운 기적과 치유를 경험한 후에 어떤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안타깝게도 기적만 남고 병고침만 남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병 고침을 받았고 나는 이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다…만 남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이것만 강조하게 되면 결국 본질에 이탈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지금 한나는 오랫동안 닫혀져 있던 태가 기적적으로 열렸습니다. 불임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그에게는 삶의 큰 멍이었고, 사람들과 하나님에게서도 총애를 받지 못하는 여인이라는 딱지를 받으며 살아왔었고, 가까이에서 마음을 후벼 파는 고통을 당하면서 그 인고의 시간을 지나왔었는데, 마침내 하나님이 한나의 불임을 고쳐 주시고 태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한나는 그 기적의 아들 사무엘을 통해 이제 그 서러움의 시절을 모두 날리며 강조하며 그의 인생을 새롭게 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나가 계속 강조하는 건 내가 기적을 경험했고, 기적적으로 태의 문이 열려 아들을 얻었다….는 간증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사무엘이라는 그 기적의 아들을 허락하시고 그의 태에 문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하면서 한나가 했던 고백이 뭡니까? “내”가 기적을 경험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셨다..” 입니다. 내 삶의 고백 1번은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게 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그런 한나의 마음이 남편 엘가나의 입을 통해 고백되고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한나가 한결같이 강조하고 믿었던 신앙고백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고, 내 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하나님 중심의 고백을 선명하게 붙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큰 승리와 기적 이후에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바로 한나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되는 신앙의 본질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응답 되고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후 우리는 그 놀라운 역사와 치유, 기적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그것을 베푸신 하나님에게 나의 시선이 고정 되어야만 착각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그것을 통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이렇게 하나님께 모든 중심을 드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는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를 베푸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가운데 꼭 붙어 거하기 때문입니다. 한나는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모든게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정말 원하며, 그렇게 마침내 얻게 된 사무엘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를 원하며 그 어린 아이를 성전으로 데려갑니다. 자신이 슬픔 마음을 쏟아 놓으며 간절히 기도 할 때, 기도하는 줄 모르고 술취한 줄 알고 막 몰아 부쳤던 그 엘리 제사장에게 한나가 솔직히 좋은 감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당연히 기분이 안 좋았겠지요… 그럼에도 내 기분은 내 기분이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엘리 제사장에서 자신의 귀한 아들 사무엘을 맡기는 겁니다. 제사장 엘리가 인간적으로 봤을 때는 부족해 보이고 흠 있어 보이고 지금 뭔가 맘에 안들고 미덥지 못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사무엘이 성전에서 잘 자라도록 부탁하고 엘리의 영향력과 리더십 가운데 자라도록 드리는 것이죠. 그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동안에는 끝까지 그를 향하여 바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것 만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이 쓰시는 자들이라면, 끝까지 믿고 신뢰하며 끝까지 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마음, 그런 하나님을 붙드는 마음이 한나에게 있었으며 그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이 가져야 될 마음을 믿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꼭 이 말씀을 기억하고 중보 기도할 때마다 간구 할 때마다 잊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할 진리라 생각됩니다.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고백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듣고 싶은 말은 우리의 자원하는 심령으로 억지나 강요가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전심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입술에서 “오직 여호와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를 원합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인 줄 믿습니다. 이 시간 나의 삶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열망으로, 이 고백…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지기를 원합니다…라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한나와 같이 겸손하고도 순전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며 주님께서 주시는 흘러 넘치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한나가 드디어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의 아들을 얻게 되는 말씀입니다. 긴 기다림 속에 인내의 씨앗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의 때를 믿고 신뢰하는 것은 성도로서 참 중요하지만 동시에 참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이렇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간구를 한다 하지만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협박과 강요를 하기도 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간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를 믿고 신뢰하는 기다림은 신앙인에게 있어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고백하는 매우 중요한 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구구절절 하나님께서 쓰시고 사용하시는 사람들에게 의도적인 기다림을 계속 훈련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다리며 하나님의 때를 인내하며 바라보는 그 인고의 과정을 통해 생명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으며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 방법을 통해 이루어짐을 신뢰하며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 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죠.
한나는 지금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으로서의 고통과 어려움도 힘든데, 마음을 후벼 파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탄식으로 보냈던 긴 시간들, 그런 한나에게 인간적인 방법들을 모두 막으시고 철저하게 기다리게 하심으로, 태어나는 아이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시는 아이임을 선명히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한나가 낳게 되는 아이는 오랜 기도제목의 응답으로 집안의 대를 잇는 하나의 중요한 아들로서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준비하는 데 사용될 아들로 쓰임 받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더욱이 그 아들 사무엘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세상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기다림을 통해 마침내 태어난 약속의 아들 사무엘의 이름의 뜻은 “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무엘은 여호와께 구해서 얻게 된 아들이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 간구하여 얻게 된 아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얻게 된 생명이 사무엘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한 역사를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결정하실 때 마침내 하나님의 때가 이르러 그 약속의 아들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약속의 아들 사무엘은 마침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게 마침내 태어난 사무엘이 한나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겠습니까? 그동안의 자녀를 낳지 못해 겪은 수많은 절망과 어려움을, 마음을 후벼파는 수모와 절망을 한방에 풀게 되는 기적의 아들이니 말입니다. 사무엘이 태어나서 이제 한나는 숨 좀 제대로 쉬게 되었으며, 이제 좀 웃을 수 있으며 뭔가 해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이 귀한 아들 사무엘을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듯이, 가장 귀한 아들 사무엘을 젖을 때자 마자 바로 자기 품을 떠나 하나님의 성전에서 자라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한나에게는 자기 자신보다 훨씬 소중한 아들, 마침내 얻게 된 자식 이상의 아들입니다. 그러니 성인이 될 때까지는 자신이 잘 키우고 나중에 성전에 가서 평생 봉사하게 해도 되고, 그 외에도 하나님께 이 아들을 드리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꼭 성전에 젖땐 후 바로 이 아들을 보내지 않아도 내가 가까이 두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도 섬길 수 있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을 잊지 않으며 한나는 젖뗀 후 바로 사무엘을 성전에서 자라도록 드림으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겠다고 결단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큰 뜻과 계획을 통해 하나님의 때에 주신 아들임을 믿으며, 이 아들 사무엘은 본질적으로 나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린 엄마의 결단을 통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뜻에 맞춰 성전에서 자라며 시대를 준비하고 시대를 변화시킬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 받고 놀랍게 변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기다리게 하시는 그 기다림의 의자 가운데 지치고 힘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절망하고 탄식하는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이 더디고 아무것도 변한게 없는 것 같은 긴 터널 속에서 하나님의 때를 여전히 신뢰하는 것은 내 힘을 넘어서는 기적의 믿음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다 끊어지고 내 눈과 귀를 들어 환경과 상황을 봤을 때 절대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끊겨진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놀랍게 역사 하시고 일을 하실 때가 있음을 여전히 신뢰하는 것은 결코 내 힘으로는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믿음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놀라운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때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흘러가도록 시간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상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임하시고 일하시고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될 수 있음을 믿으며, 영적으로 민감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매일 매일의 삶 속에 붙드는 것입니다. 내 계획과 내 방법, 내 타이밍을 내려놓고 주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으로 믿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질 그 기도 제목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으로 구하는 그 하나님의 향한 신뢰, 전심으로 드리는 구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하기에 기다림의 의자에 앉아 있을 지라도 기도를 멈추지 마시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의 때를 신뢰하는 큰 믿음으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 해서 그 당시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인 엘리 제사장의 영적 둔감함과 저 시골 변방의 평신도이자 여인인 한나의 영적 민감함을 함께 대조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대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영적 민감함과 둔감함 정도가 아니라, 그 집안 전체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적 상승 곡선과 버림받는 하향 곡선을 선명하게 대비하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주님 앞에 가까이 가며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각성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는 놀라운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한나와 그 모든 가족들은 제사가 끝난 후 그 가족에게 분배 받은 음식들을 감사함으로 먹고 있는데, 한나는 마음속에 응어리와 답답함, 후벼 파는 아픔이 해소되지 않아서 그 남편 엘가나가 아무리 잘해 주고 지극정성으로 위로해도 그 마음이 해갈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성전에 나와 지금 마음을 토설하기 위해, 통곡하고 기도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한나는 지금 마음이 너무나 심란한 천둥 치는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둘째 부인으로 들어온 브닌나는 자녀를 쑥쑥 낳고 있는데 자기는 자녀를 하나도 낳지 못하는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너무 심했고, 그 여인이 대적이 되어 버려서 마음에 천둥이 치는 말로 마음을 후벼 파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한나의 마음은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을 정도로 마음이 큰 상처를 받고 신음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지금 폭발하기 일보직전이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있는 여인이 바로 한나였습니다. 그런데 한나의 위대한 점은 그 마음에 원통함과 눈물이 가득했고, 사람들이 마음을 후벼 파는 그 어려운 상황 가운데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간 후에 나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한나의 위대한 점은 그 어떤 사람들에게 얘기하기 전에, 그 어떤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아 내기 전에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마음을 쏟아 놓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너무 힘들고 마음에 천둥이 치고 열 받아 원통함과 격분에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그 상태에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와 한나가 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신다는 고백입니다. 그 원통하고 격분되는 마음을 주님께 가지고 주님 앞에 마음을 쏟아 놓으며 한 기도는 나의 고통을 돌아 보시며 나를 생각해 주심을 신뢰하는 기도였습니다. 한나는 지금 마음이 슬픈 여인이자, 마음 속에 원통함과 분노가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의 여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러 나왔지만 기도와 함께 통곡과 원통함이 쏟아져 나오는 여인이었습니다. 주님을 붙들고 바라보는 삶을 사는 자만이 평탄 할 때도 주님 앞에 제일 먼저 나오고 특별히 마음이 어려울 때, 마음에 천둥이 치고 원통하고 격동 될 때 제일 먼저 주님 앞에 나오게 되는 기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렇게 마음에 천둥 치고 사람들이 내 마음을 후벼 파서 너무 아픈 가운데 절망하고 신음 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 그렇게 되면 하는 일이 자신의 격분에 못 이겨 화를 폭발시키며 그 사람하고 대 놓고 싸우는 게 일반적인 방법이죠. 혹은 내 마음을 후벼 판 그 사람이 그렇게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면 내 주변의 사람들을 붙들고 하소연합니다. 내가 이만큼 억울하고 내가 이만큼 가슴에 큰 상처를 받았고, 내 마음에 천둥이 쳐서 힘들다고 막 사람들에게 얘기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고통이 찾아오고 풍랑이 찾아오고 사람들이 마음을 후벼 파서 마음에 원통함과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이 때, 하나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나오는 자가 영적으로 민감한 자이며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연적인 결단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기적적인 은혜의 결과로 이끌림 받아야 가능한 초자연적인 삶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원통하고 격동 되며 천둥 치며 마음이 후벼 팔 때는 내 마음의 본성으로 나를 이끌려 하는 그런 강한 압력이 있기 때문이죠.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고 제일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적 민감성을 보인 것입니다. 그 마음의 어려움을 기도로 나아가는 통로로 삼은 것이 한나의 영적 상태였던 것입니다. 영적 민감함과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믿음은 그 마음속의 어려움과 원통함을 하나님께 나아가는 도구로 삼아 기도를 붙들고 하나님께 나오게 한 것입니다. 주님 앞에 기도하며 통곡과 원통함이 쏟아져 나오는 그 슬픈 여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생각해주시는 주님을 붙드는 한나를 마음속 깊이 담기 원합니다. 한나는 로얄 페밀리 집안도 아니고, 직분을 가진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시골 저 변방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 주목하는 집안이나 눈에 보이는 지위를 가지고 쓰신게 아니라, 이렇게 변방 시골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아도 이렇게 주님 앞에 속 사람이 순전하고 영적으로 민감하고도 바르게 준비된 한나를 사용하셔서 그 시대의 역사를 바꿀 사무엘을 태어나게 는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나같이 영적으로 민감한 자가 되게 도와 주셔서 나의 마음이 슬프고 원통한 과 격분 됨을 사람들에게 먼저 풀지 않고 하나님에게 제일 먼저 쏟아내는 영적 민감함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이 한나의 영적 민감함이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민감함이 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단독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성도로서 주님을 바라보며 내 슬프고 곤고한 마음,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사람들에게 먼저 쏟지 않고, 주님께 제일 먼저 쏟으며 주님으로부터 먼저 위로받고 은혜 받으며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은 하나님께서 새 시대를 여시는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에서 사용하시는 중심 되는 사람이 왕들이 아니라 바로 선지자 사무엘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의 출생은 그 당시 로열 페밀리 집안이나 제사장 집안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저 시골에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던 평신도 집안을 통해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 흐름 가운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과 한나의 아들 사무엘을 극명하게 대조하고 있는 말씀이 3장에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중심이 조율되지 않은 채 겉사람의 모습만 붙들고 서 있으면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엄중한 말씀이 사무엘상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종교 지도자인 엘리 제사장의 둔감함과 저 시골 변방의 평신도이자 여인인 한나의 영적 민감함을 함께 대조하면서 말씀의 은혜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이 두 사람의 대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영적 민감함과 둔감함 정도가 아니라, 그 집안 전체의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적 상승 곡선과 버림받는 하향 곡선을 선명하게 대비하면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주님 앞에 가까이 가며 은혜 안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고 각성하는 말씀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는 와중에, 문설주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 제사장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나와 그 모든 가족들은 제사가 끝난 후 그 가족에게 분배받은 음식들을 감사함으로 먹고 있는데, 한나는 마음속에 응어리와 답답함, 후벼파는 아픔이 해소되지 않아서 그 남편 엘가나가 아무리 잘해 주고 지극정성으로 위로해도 그 마음이 해갈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성전에 나와 지금 마음을 토설하기 위해, 통곡하고 기도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께 나오고 있는 한나와 달리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 있기는 했는데 성전 문설주 곁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엘리 제사장은 예배당 안 밖을 가르는 경계선인 문설주 곁에 있었습니다. 제사장이 예배당의 중심의 혹은 맨 앞에 앉아서 예배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나가는 문 맨 뒤에 문설주에 있었다는 것이죠. 그게 그의 영적인 지금 상황을 그대로 대변하는 겁니다. 오해 없이 들으서야 하는데 여러분 예배에 꼭 뒷자리가 은혜가 없다는 건 아니에요. 물론 맨 앞에 안된다고 마음까지 맨 앞에 있는 건 아닐 수 있어요. 물론 맨 뒤에 앉는다고 해소 마음까지 맨 뒤에 있는건 아닐 수 있습니다. 예배당의 맨 뒷자리가 은혜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늘 예배당 맨 끝 문 앞에 습관적으로 앉아있는 것은 영적 상태가 드러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가장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 있어야 할 제사장이 몸도 마음도 저 맨 문설주 끝에 있었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건 문설주 곁에 그 의자에 앉았다 했습니다. 의자는 성소 예배당 안에 놓는 기구가 아니었습니다. 의자는 예배당 안에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엘리 제사장은 그 성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문설주를 경계로 그 밖에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당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예배당 밖 복도에 앉아 있었던 거죠. 거기에 의자를 두고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자주 목격되었으면 “그 의자” 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거의 엘리 제사장 전용의자, 늘 거기 앉아 있는 것이 습관화 되었던 것입니다. 편안하게 앉아 가지고 문설주 뒤에서 예배당에 사람들 감시하고 체크하러 앉아 있는 겁니다. 누가 왔나…안 나왔나 체크하고 저 사람이 지금 뭐 하나하나 체크하고….예배자로 여호와의 성전에 오는게 아니라 감시자로 있고 자기는 의자에 떡하니 앉아 있는 이 모습이 제사장 엘리의 영적 현주소였던 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전에 몸이 가 있기는 했지만, 성전에 예배 드리러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오려는 갈망이 아니라 그냥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현장에 있는 영적 둔감함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영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영적으로 철저히 둔감해진 그의 영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적으로 둔감해진 엘리 제사장이 한나를 향한 평가입니다. 기도하며 탄식하는 한나를 바라보며, 저 여인이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안타깝고도 괴롭게 기도할까…를 생각한 게 아니라, 술 취한 줄 알았습니다. 술에 취한 것처럼… 다시 말하면 뭡니까? 지금 성전에 오지 말아야 될 사람이 온거죠 아니 술 취한 사람이 왜 지금 성전에 왔지? …라고 여길 정도로 영적으로 둔감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을 술 취한 줄 생각할 정도로 영적으로 분별력이 없었던 자가 바로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 엘리 제사장의 영적 둔감함은 결국 그 아들들의 망나니 같은 삶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집안이 결국 완전히 몰락하게 된 이야기와 다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엘리 제사장을 계속 사용하실 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촛대가 옮겨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여러분들의 예배에 대한 태도가 한 두번이 아니라 반복되는 여러분들의 태도가 습관화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는 자세와 태도가, 하나님께 쓰임 받느냐, 쓰임 받지 못하는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직분이나 나의 신앙 년수가 중요한게 아니라 지금 이순간 나는 어떤 마음가짐과 태도로 성전을 오고 가는지 정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나는 엘리 제사장 같이 문설주 저 뒤에 의자에 앉아 예배자가 아니라 관리자로 있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하향곡선을 걷고 있으며 영적으로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돌아 와야 될 사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가능하면 주님의 은혜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곳에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와야 되는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배 자리로 더 가까이 오기 위해 순전한 마음을 회복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사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하나님을 통해 이스라엘 왕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왕이 중심이 아니라 그 왕들을 이끄는 보이지 않는 선지자 사무엘이 역사를 주고하고, 본질적으로는 보이지 않으시는 왕인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사무엘상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출생으로 사무엘상이 시작되는데, 그 아버지 엘가나의 이름은 “하나님이 소유하셨다 (God possess).”의 의미이고, 어머니 한나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고 간구한다.” 는 뜻입니다. 어제 배웠지만, 엘가나의 집안은 로얄 패밀리 도 아니고, 제사장 집안도 아니었고 그저 평범한 집안이자, 예루살렘이 아닌 저 시골 변방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은 가문, 사람들의 주목받지 않는 변방의 가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시대를 바꾸는 역사를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나마음에는 큰 짐과 기도제목이 있었는데 바로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한나가 자녀를 낳지 못하니까 집안을 살리기 위해 두번째 아내 브닌나를 데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브닌나는 자녀를 쑥쑥 잘 낳는 겁니다. 그러니 한나가 집 안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압박감이라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었겠죠. 특별히 그 당시에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개인적인 흠과 불명예였을 뿐만 아니라 그 집안의 전체적인 불명예었기 때문에 그것이 한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고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1년에 한번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와서 감사드리는 제사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고 기뻐해야 하는 그때의 기뻐할 수 없는 한 여인이 바로 한나습니다.
그런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을 가진 한나, 그럼에도 남편 엘가나는 한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였습니다. 화목제를 드리면 남은 제물을 가족이 나눠 먹게 되어 있는데, 남편은 한나에게 그 제물 분깃을 2배나 주었습니다. 그 말은 남편인 엘가나가 받아야 될 분깃을 다 한나에게 나눠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엘가나는 그렇게 한나가 힘들고 어려워 하며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퍼 하니까 뭐라 위로하는가 하면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내가 낫지 않느냐…” 지금 시대에 봐도 정말 로맨티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아들 보다 나은 남편, 나를 보고 괜찮으면 얼마나 좋겠냐고 위로하는 엘가나, 지금 시대에 봐도 대단한 남편이고 참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입니다. 근데 문제는 한나에게는 남편이 그렇게 잘 위로해줘도, 아무리 남편이 그렇게 내 옆에서 함께 해줘도, 마음의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럴 때가 있습니다.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가 어려울 때 나를 위로해 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맙고 감사한데, 그들의 응원과 그들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에는 여전히 슬퍼하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 깊은 고난과 답답함이 나에게 찾아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그렇게 자기를 잘 해주고 그렇게 자기를 로맨티스트 응원해줘도, 그 모든 것들이 한나의 마음에 실제적인 눈물과 아픔을 덮어 주지 못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 번째는 한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고요. 두번째는 한나의 고통과 어려움이 영적인 것을 태어나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나의 고통이 얼마나 컸는가 하면 함께 있는 대적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하여 번민케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두번째 부인인 브닌나가 애들을 그렇게 쑥쑥 낳아도 남편 엘가나의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가 하면 오직 한나에게만 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식을 낳아도 남편의 총애를 받지 못하니까 한나를 그냥 밟는 것입니다. 대적이라는 히브리 원어 의미는 “라이벌”이라는 의미인데, 상대를 죽이기 위한 라이벌로 대적인 것입니다. 브닌나가 애를 낳지 못하여 마음이 안 그래도 힘든 한나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물론 칼을 들고 창을 들고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말을 통해 한나의 마음을 죽이려고 후벼파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그 말을 사람들의 마음에 후벼 파고 격동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어떤 말로 후벼 팠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분명히 다 짐작이 되실 거예요.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과 번민으로 마음을 후벼 파고 있는 거예요. 안 그래도 상황 자체도 너무 힘든데 주변에서 이렇게 마음을 후벼 파면 사람들의 위로로 해결되지 않는 아픔이 됩니다. 두번째,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지금 한나가 아기를 못 낳게 된 것은 그 여인이 부정해서도 아니고 한나가 저주를 받아서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큰 일을 준비하시기 때문에 지금은 성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무자한 이유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시대를 바꾸시는 역사를 준비하고 계시는 거룩한 지연 (intentional delay)이었지만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인생의 어려움이 너무 컸지만 한나의 어려움은 거룩한 어려움이었고, 거룩한 목적이 있는 어려움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하고 번민케 하는 것은, 한나의 가슴을 후벼파는 악행이고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대적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브닌나는 한나에 대한 대적의 일을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사람들의 위로와 사람들의 격려가 힘이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위로에도 마음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 그런 깊은 어려움 가운데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이 한나를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사람의 위로가 도움 되지 않아 힘들고 슬퍼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는 한나와 같은 자들에게 가슴을 후벼파는 얘기를 하지 마십시오. 그들에게 정답을 얘기한다고 함부로 그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큰 죄를 짓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남의 가슴을 후벼파는 일이 말로 가볍게 뭐라고 하는게 아니라, 대적하는 자가 본인도 모르게 되어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에도 해결되지 않는 내 마음이 있음을 깨닫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마음 챙김을 소중히 여기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새벽기도 시간을 통하여 사무엘상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 왕국 시대를 여는 말씀으로, 초대 왕인 사울과 다윗왕의 이야기가 집중적으로 증언되고 있습니다. 자기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하는 사사기라는 영적 암흑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말씀이 사무엘상 말씀입니다. 영적 어둠과 암흑의 시대란 하나님의 소견에 옳은 대로 내가 조율되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여기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다는 것은 두 가지 영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고, 두 번째는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마음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삶의 기준과 표준 되는 삶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인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교정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것이 본질인데, 내가 주인 되어 내가 내 소견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인생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 받은 자로서 주님의 명을 이루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도 내 이웃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 정도로 생각하며 모든 것이 나 위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나만을 위해 살아가니 내 눈에 옳은 대로 정의를 바꾸고, 하나님 말씀 조차도 내 눈에 옳을 때에만 받아들이고 오를 때만 수용하는 시대, 그게 영적 어둠의 시대입니다. 그 영적 어둠의 사사기의 시대가 어찌보면 이 시대의 영적 어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 깊이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내 마음대로 살고 나만을 위해서 사는 이 영적 암흑기의 터널 가운데 사무엘상을 통해 새 시대를 여시는 새로운 빛을 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영적 어둠과 절망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 하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여신다는 말씀이 바로 사무엘상 말씀입니다. 이 어둠의 시대를 넘어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로운 시대는 왕정 시대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중심이냐 하면 당연히 왕인 사울와 다윗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고 그 왕으로부터 역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역사도 태조 이성계로부터 시작되고, 고려시대의 역사도 태조 왕건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왕 중심으로 나라가 재편되고 왕이 시작되면서 나라가 시작되는데 당연한데, 사무엘상 말씀은 말씀은 눈에 보이는 왕이 중심되는 역사가 아니라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 선지자 중심 되는 나아가는 하나님의 역사, 즉 섭리사관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이나 다윗의 영웅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게 아니라 선지자 사무엘이 출생 이야기를 통하여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질적으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왕이 중심 되는 역사가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왕이신 하나님이 중심되는 역사임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항상 새로운 역사와 새시대를 여는 가장 중요한 일에 아기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모세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는 이유는 모세를 통해 새로운 시대인 출애굽을 하나님이 열고 계심을 선명히 드러내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왕이 태어나는 이야기도 다윗왕이 태어나는 이야기도 사무엘상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선지자 사무엘이 태어나는 이야기가 사무엘 상 처음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은 왕이 태어나는 이야기로 시작되지 않고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태어나게 되는 배경을 중심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마치 신약 성경에서 수많은 나라의 왕들이 등장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광야에 있었던 세례 요한에게 임한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움직이는 하늘의 역사, 하나님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힘 있는 어떠한 왕이나 지도자들을 통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왕정 시대에 사울과 다윗이 중요한 왕이고 주인공으로 말씀에 등장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더 중요한 중심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의 역사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그 새로운 역사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배우게 될 사무엘상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말씀의 시작은 장차 사무엘이 태어나게 될 엘가나라는 집안과 제사장인 엘리 집안을 대비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는 정치적 종교적 영향력을 봤을 때 그 당시 제사장 엘리 집안은 대단했습니다. 늘 사람들이 존경하는 집안이고 엘리트들을 계속 배출하는 명문 지도자 집안이고 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안이었습니다. 매년 성전에 사람들이 와서 예배와 제사를 드리니, 그 당시에 눈에 보이는 영적 중심축은 당연히 제사장인 엘리와 그 집안이라고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겉으로 보기에 대단하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제사장 집안인 엘리 집안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엘가나의 집안은 잘 알려지지도 않고 저 시골에 있고 직분도 없는 평신도에 사람들이 주목하지도 않고 뭔가 내세울 게 없어 보이는 집안이었습니다. 근데 사무엘은 누구를 통하여 나중에 태어나는가 하면 제사장 집안이자 로얄 패밀리인 엘리 집안을 통해 태어나는 게 아니라 이름 없이 저 시골 변방에 있었던 직분도 없는 평신도 집안을 통하여 사무엘이 태어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시작된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서두는 끊임없이 이 두 집안을 대조하는 것을 통하여 이 시대의 역사와 경륜이 누구를 통하여 어떻게 흐르는가를 우리에게 냉철하고도 분명하게 보여 줄 겁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정치 지도자와 왕이 역사의 중심이고 그들을 통해 역사가 움직이고 굴러 간다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큰 뜻을 바라보는 성도들은, 눈에 보이는 왕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정치 지도자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으시는 왕이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역사는 흐르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선명히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보이는 왕들을 통하여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을 통하여 움직이며 그들을 통하여 시대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통해 움직여진다는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눈에 보이는 화려한 로얄 페밀리,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제사장의 집안을 통해 사무엘이 태어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주목받는 변방의 평신도 엘가나 집안을 통해 태어난다는 이 진리를 마음에 새기십시오. 역사는 보이는 왕이나 힘과 권력을 가진 능력자들을 통하여 움직이는 세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왕이신 하나님을 통해 움직여지고 있으며,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 펼쳐진다는 것을 깨닫는 복된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권면하는 옥중서신인 빌립보서가 오늘 말씀으로 끝나게 되는데 “문안”으로 마무리됩니다. 문안이란 문안 인사로, 안녕한지를 서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인사가 “안녕하세요.”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안녕하지 못한 때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에 정말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문안 인사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한국과 비슷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었기 때문에 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나라였고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헤매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문안 인사가 “샬롬,” 평화…잘 살아 있는지를 물어보는 게 그들의 습관적인 인사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문안이란 겉으로 전쟁이 없고 어려움이 적고 문제가 적은 외적 평화가 있는 상태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외적 평화와 안녕의 상태를 물어본 거라면 지금 사도 바울은 전혀 안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니 외적 평화와 안녕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내적 평안이 외적 어려움을 통해 빼앗기지 않는 놀라운 기적의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의 “문안”은 외적인 안녕을 넘어서는 내적인 평안과 안녕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상황에 빼앗기지 않고 누리는 것과 같이 성도들이 이 내적 평화를 서로 체크하며 문안 하라는 것이죠. 안녕을 넘어서 내적인 안녕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에 처음이자 끝이라는 것을 결론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문안 하는 것을 4장 말씀 전체로 확대해 보면 주님 안에서 평안하고 기뻐한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주님 안에서 염려를 넘어서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기도 염려 충만 대신에 기도 충만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물어 보고, 주님 앞에 나올 때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로 나아오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 문안입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챙겨주시고 주님께서 내 생각을 지켜 주심을 실체로 경험하고 있는지를 묻는 게 문안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외적으로도 변화와 외적으로도 풍성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있고 적절하게 안정적인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녕을 어느정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그 외적 안녕을 넘어서 내적인 안녕을 추구하고 이 내적 안녕은 오직 내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하고 주인 되셔야 되는 것임을 끊임없이 붙들고 조율되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내적 평안의 끝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불안과 가운데 사로 잡히지 않고 죽음을 넘어 있는 천국을 바라보며 안녕한 것입니다. 분명한 초점이 내가 죽음 앞에 섰을 때 두려움, 걱정과 염려에 압도 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안녕을 누리며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성도의 차별성이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탄할 때 매일매일 서로가 문안 하며 주님 안에서 이 시간 나는 준비되어 있는 자입니까? 라는 것을 묻고 체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그 문안의 대상은 명확하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내적 안녕과 평안을 묻는 문안의 대상은 모든 이웃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내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문안 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결국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으며, 주님의 보혈과 은혜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해 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도로서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생에서 잘 살고 있고 내 인생이 안녕한지는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을 통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든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이 이루어지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만 오면 다 성도라고 불러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본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를 쫓아가는 자, 그리스도로써 내 삶의 중심과 통치와 다스림이 변했음을 고백하는 자가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백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교인됨을 넘어 마음을 담은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이 누구시며 내가 지금 예수님 자녀임을 고백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런 한량없는 은혜를 부어 주신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지막 사도 바울의 결론적인 권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이끄는 삶”입니다. 우리의 심령, 마음 깊은 곳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머무는 삶을 살기를 권면하며 빌립보서를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사실 빌립보 교회는 우리 생각에는 가장 성경적이고 이상적인 초대 교회 중의 하나 였습니다. 우리가 돌아가고 회복해야 될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적이고 가장 성경적으로 근접한 빌립보 교회도 여러가지 도전과 문제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교회 안에 세속적으로 물든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으며 내부적으로 잘못된 교리를 가리키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고 교회 안에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한마음 되지 못해서 실제로 여선 교회 가운데 서로 싸우고 갈등 하는 문제들도 있었고 외부로부터 핍박도 있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문제와 도전들을 안고 살아갔던 자들이 초대교회 성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상황 가운데서 좌절과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심령에 거하고 주장하는 게 오직 살 길임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도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교회를 섬기며 살아갈 때 우리 안에도 여러 가지 문제를 담고 살아갑니다. 내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관계적인 문제, 세상과의 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 연구소를 세울 정도로 여러 가지 도전과 문제를 직면하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늘 변하고 사람들은 늘 퇴색하고 늘 사람들은 한 자리에 있지 못합니다. 환경과 상황도 늘 변하고 낙심 하게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심령을 주장하는 것이 오직 살 길임을 믿고 붙들어야 합니다. 성도로써 우리의 삶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의 심령을 담고 주장하는 삶을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머무십시오. 자격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살 길임을 확실히 믿으십시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주장하심을 붙들고 오늘도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동역자 에바브로 디도가 자신과 괴로움과 고난을 함께 하며 함께 도운 성도들을 향하여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 있는데, 감옥 안에서 뭐가 그렇게 풍부하고 많이 있겠습니까? 그가 고백하는 풍부함이란 외적인 것의 풍부함이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마음으로 인하여 풍족함을 느끼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 선물들을 통해 성도들이 여전히 한결같이 나와 한 마음이고 함께 동역하며, 고난과 괴로움도 함께 지려 하는 그 진심을 마음으로 느끼며 풍성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을 드리는 것을 삶의 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고 받는 것을 삶의 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인생 자체가 늘 받고 받고 받고…늘 받고 달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지향하며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인생 자체가 늘 주고 베푸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지향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 생활 할 때 예수님 앞에 우리가 드리는 것을 삶의 축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미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에게 놀랍게 부어 주셨음을 알기에, 주님 앞에 “드리려는 열망”을 가지고 주님께 “드리려는 마음” 나오는 게 삶의 축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풍족함이란 물질의 풍요를 넘어 마음이 풍족히 채워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껍데기를 채우고 겉을 채우면 잠깐 반짝 풍요로운 것 같지만, 진짜 풍족한 인생은 마음이 채워지고 내면이 채워져 마음으로부터 겉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과 헌금의 의미도 동일합니다. 무엇보다도 헌금에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을 담아 드릴 때 그 헌금이 나에게는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교회 헌금통에 아무 생각 없이 마음 없이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예배 행위로서의 헌금이 된다면 내 마음이 그 헌금에 담겨야 하며 그 헌금은 “주님께 드리고 싶은 진심”이 담긴 고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드리는 헌금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분명한 확신과 실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그 헌금이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일이 되는 이유는, 그 헌금에 자신들의 진실된 마음, 하나님께 드리기를 사모하고 원하는 마음을 담아 주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헌금 생활이 영적 훈련이자 영적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받은 자임을 자각하며 나는 정말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나님께 드리려는 마음이 내 마음의 삶의 축이고 지향성인가? 그래서 돈을 들이는 게 중요하지만 돈과 함께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내가 드리기를 원하고 갈망합니다…드리기를 기뻐하고 사모합니다…라는 진심을 담아 하나님께 드리게 될 때 그 헌금이 하나님께 그게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을 담아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 대해 마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믿을 때 헌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담아 향기로운 제물로 물질을 드릴 때, 헌금이 나의 신앙 고백이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갈망을 드리는 영적 행위가 될 때 일어나는 놀라운 역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필요를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헌금을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채워 준다는 거래나 계산이 아니라 나는 순전한 마음을 담아 하나님께 일방적으로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도 동일하게 일방적으로 그리스도의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풍성한 대로 부으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내가 복을 받는다…라는 계산을 하기 시작하면 헌금을 통해 주님께 “드리고 싶은 진심과 열망”을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드리면 이만큼 내가 복을 받는다…라는 계산을 내려놓고 내가 할 일은 일방적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께 마음을 담아 물질을 드리는 겁니다. 온전히 주님께 드리고 싶은 마음을 삶의 축으로 주님 앞에 내 진심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지심을 믿고, 주님의 영광에 따라 나의 필요를 채우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삶에 하나님에게 더 드리고 싶은 마음이 나를 이끌게 되는 것이고, 드리고 싶은 마음은 흘러 넘쳐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주고 싶은 마음을 삶의 원동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며 우리를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며 주님을 온전히 모시며 이 시간 나의 삶이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을 선물로 주신 그 사랑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 몸이 찢기시고 피를 다 쏟으시며 자기 자신을 선물로 주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이미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라면 그것을 실제로 믿으며 고백한다면, 나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드리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주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살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는 인생, 그렇게 주님께 드리는 인생을 사모하고 삶의 축으로 나아갈 때, 전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필요를 풍성하게 채우시며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통하여 누린 이 마음의 풍족함을 저와 여러분들도 그리스도 이름으로 사랑을 나눔을 통해 풍성히 누리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의 표현을 표하는 것으로 빌립보서 4장 말씀에 끝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한 방향으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빌립보 교회와 성도들을 향하여 마음을 다한 깊은 감사를 감옥 안에서 전하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라는 존재는 목회자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그리스도의 사명을 붙들고 함께 나아갈 때 이렇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같이 가지게 되는 믿음의 동지이자 동역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는데, “그 괴로움에 함께 참여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잘 될 때 내 인생이 문제가 없을 때는 사람들이 곁에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괴로움과 어려움에 직면하면 많은 사람들은 나를 떠나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게 됩니다. 심지어 등 돌리고 배신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됩니다. 나의 인생의 어려움과 괴로움에 있을 때, 그렇게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고 배신하는 대신, 그 자리를 지켜주고 한결같이 서 있는 사람들이 내가 꼭 붙들어야 되는 진짜 함께할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괴로움과 어려움에 있을 때 등돌리지 않고 배신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주고 함께 한 당신들이야 말로 나의 괴로움에 함께한 진짜 성도들 진짜 동지들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위해 올인할 때, 그 사명 때문에 어려움을 직면하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힐 때, 그렇게 끝까지 한 마음으로 함께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머지 교회들과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그럼 어려움과 괴로움을 당했을 때 그냥 지켜보고 있거나 방관하고 있거나 그냥 마음속으로만 안타까워 했습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에게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거나 등돌리고 배신한 사람들도 많았고, 빌립보서 앞부분에서도 등장하지만,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 억울하게 투옥되었을 때 그 어려움을 자신들의 기회로 삼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더 상하게 하기 위해, 질투와 경쟁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열심을 내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귀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등 돌리지 않고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주며 그 괴로움과 부담과 멍에를 함께 지고 감당해준 것입니다. 그 괴로움에 그렇게 함께 괴로움과 멍에를 지어 주었기에 어려운 가운데도 희생적인 재정적인 후원을 감당했고,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왕성히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들을 드린 자들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 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냥 묵묵히 신실하게 사도 바울을 끝까지 도와주며 자리를 지킨,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진심으로 감사와 고마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에 따라 옳은 일을 할 때 사람들이 모두 지지해주고 박수 쳐주고 환영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착각 중의 착각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변하고, 너무나 쉽게 배신하고 불이익 앞에 썰물 같이 빠져나갈 수 있는 약하고 갈대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와 꼭 같이 있을 거 같고 평생 같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바람과 같이 사라지고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고 나에게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이 사람들을 사랑할 대상으로 불쌍한 대상으로만 봐야지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면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내 삶의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과 괴로움을 참여해 주고 그 자리를 지켜주는 사람들은 늘 소수, 얼마 안되는 소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익이라는 물에 흐름에 따라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고 사라지고 나에게 배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평탄 할 때 썰물과 같이 빠져나갈 자들이 누구이며 그 자리를 한결같이 지켜주며 한마음으로 서있을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분별하여 내가 정말 그 자리를 지켜주고 한결같이 서 있어 줄 그 진짜 동지들을 향하여 내 시간과 내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괴로움이란 십자가를 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 세상의 흐름과 역행 하며 거스르는 삶, 이 세상을 살지만 하늘의 뜻과 다스림을 받아가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가치가 중요하며 보이지 않는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주님이 주신 거룩한 부담을 내 부담으로 안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내 땅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을 들며 마음을 넓히며 시야를 넓혀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전파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그 현장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천국 맛보기를 맛보며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그 삶을 위해 우리에게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주신 거룩한 부담을 내게 주신 부담으로 알고 교회를 통해 주님께 신실하고 충성하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 나의 신앙 생활의 평가가 성공과 실패로 채점되는 게 아니라 신실함과 충성됨으로 평가되는 것을 알고 주님 앞에 신실하게 한결같이 서 있으며 자리를 지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야 될 칭찬인 줄 믿고 오늘 하루도 주님 은혜 가운데 복음의 부담과 괴로움을 함께 지고 가는 하루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많은 성도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말씀에 꼽힐 정도로 잘 알려져 있고 심지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이 구절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매우 유명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우리 마음에 내가 모든 걸 할 수 있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부어주는 말씀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I can do…못한다는 말 하지 말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스스로 믿는 이 시대의 도전 정신에 딱 부합되고 마음에 쏙 들어오는 말씀이기에 이 짧은 한 절을 읽을 때 우리 눈과 마음이 고정되는 부분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부분 만을 뽑아서 엿가락 같이 늘려서 강조하다 보면, 내 자신을 믿고 나의 긍정의 힘을 믿어, 내가 간절하게 믿음을 가지고 바라는 것을 내가 모두 할 수 있고 얻을 수 있다고 진리를 왜곡하고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지나치거나 빼버리고 “내가 모든 것은 할 수 있다” 는 것만 마음에 담아 강조하게 되면 복음을 부분적으로 취해서 내가 원하는 쪽으로 늘려 비 성경적인 요소로 결국 빠질 수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진리의 말씀인 성경을 맥락을 통해 큰 그림을 바라보며 말씀을 해석하고 마음에 담는게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은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 는 고백은 나에 대한 자신감이라든지, 아니면 내가 못할게 없다는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의 선언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도바울의 고백은 자신의 이 세상에서 소원 성취와 자아 실현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자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자신이 원하는 소원이라든지, 이 세상에서 부자로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처지에 있어도 주님만 바라보고 자족 할 수 있는 삶, 어떤 상황에도 원망 대신 감사와 기쁨을 살아내는 삶, 부할 때도 가난할 때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삶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더 큰 그림으로 보면 빌립보서 4장을 통해 배운, 나의 힘을 넘어서는 초월적이고 기적적인 삶을 모두 할 수 있다는 것으로 확장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영적인 삶, 모든 사람에게 넉넉히 대하는 놀라운 삶, 아무것도 근심하지 않는 기적의 삶, 염려 충만 대신 기도 충만으로 나를 채우는 기적의 삶, 풍랑 가운데서도 감사함으로 주님께 아뢰는 영적 능력의 삶, 내 인생의 풍랑과 어려운 가운데 주님의 평안이 나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는 이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방점과 핵심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방점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에 있다는 것이죠. 내 스스로 어떤 일도 모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선언도 아니고, 내 스스로 능력자가 되는 비결이 있다고 가르치는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내가 살 길은 오직 내 안에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고 그 분 안에 꼭 머물러 있고 매여 있는 것이 살 길임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처한 환경이 나를 지배하지 않는 기적을 누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그 능력이 그 환경의 어려움을 다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풍랑을 다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머무는 것이 관건이며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관건이며 그분을 붙드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씀입니다.이 세상에서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 그 어떤 것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게 없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사도바울의 겸손의 고백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마음에 담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 내 스스로 능력자가 되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주먹 쥐고 열심히 뛰는 게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집중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내가 무언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이 있음을 믿으며 그분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입니다.그래서 기복주의나 인본주의 신앙 같이 나를 중심에 두고,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거고 자아 긍정으로 나아가고 스스로 능력자가 되려 하는 모든 것들을,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나를 중심으로 말씀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을 멈추어야 합니다. 성도의 이 세상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삶의 비결,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통치와 다스림이 아닌 하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비결이 바로 내 힘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능력자가 되려고 하는게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의 힘으로 사는 것이며 그 능력 주시는 분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과 같은 삶, 초월적인 삶은 내 힘을 넘어서는 삶이고 하늘의 힘을 공급하시는 그분 안에서 내가 이런 모든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하늘의 능력 주시는 분이 계심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확신은 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분에 대한 확신이어야 합니다. 나에 대한 무한 긍정이 아니라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무한 긍정입니다. 그분의 능력 주심을 믿는 긍정이며 그 분 안에 있을 때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사시는 그 기적을 경험한다는 것에 대한 무한 긍정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은 나에게 가 있으면 안되고 능력 주시는 분에게 가 있어야 합니다. 그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나는 어떤 환경에도 내가 주님께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고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시기를 원합니다. 나에게 능력 주시는 분 예수님 만을 무한 긍정하며 그분 안에 머물러 이 세상에서 천국 백성 답게 살아가는 그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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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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