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깊이 읽지 않는 분들은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는지도 몰랐던 분들도 있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엘리사 시대의 옛날 이야기인 금도끼 은도끼 이이야기가 생각 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이런 우화와 같은 도끼 이야기를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으로 주셨으며, 엘리사의 기적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함께 마음에 새기며 은혜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엘리사가 거처하는 선지 동산과 요단강입니다. 참 선지자 엘리사에게 제자가 되겠다고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엘리사에게 찾아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며 찾아와 엘리사와 함께 먹고 자면서 숙식을 같이 하며 선지 동산에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엘리사가 거처하는 곳이 너무 좁아진 거죠. 그래서 신학생들이 너무 많으니 이제 선지 동산을 확장공사 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온 겁니다. 그래서 선지동산의 모든 학생들이 요단강으로 가서 벌목을 해 오기로 한 겁니다. 스스로 나무를 베어와서 선지동산 확장공사를 하기로 한 겁니다. 거예요 그래서 나무들을 베어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선지 동산을 확장하겠다고 모두 요단강으로 갔습니다. 요즘 시대로 얘기하면 교회가 부흥되서 너무 좁아지니, 예배당을 증축 확장한다 생각하시면 비슷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선지동산을 위해 헌신하며 좋은 의도로 하나님 영광 위해 헌신함으로 시작했는데, 그 일로 말미암아 큰 어려움이 생기는 사건입니다. 한 신학생이 나무를 베다가 너무 열심히 하는 도중에 쇠도끼를 요단강에 빠뜨린 겁니다. 쇠도끼 하나가 강물에 빠진 왜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이렇게 큰 일인가….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쇠도끼가 빠지면 Home Depot 가서 사오면 되는 구하기도 어렵지 않고 가격도 너무 비싸지 않은 물건이지만, 그 당시 쇠도끼는 지금으로 얘기하면 최신 중장비, 고가의 포크레인이 생각하시면 딱 맞습니다. 전쟁에서 사울왕과 요나단만이 철제 무기가 있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없었다고 증언할 정도로 쇠라는 것은 구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던 고가의 물이었습니다. 그만큼 쇠도끼라는 것은 당시에 귀한 도구였고 고가의 도구였고 쉽게 살 수 없는 도구였습니다. 더구나 그 쇠도끼는 너무 고가여서 차용증을 써 가지고 빌려온 것이었기에 고가의 쇠도끼를 물에 빠뜨린 신학생이 멘붕이 온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하면, 빌려온 쇠도끼를 못 찾아오면, 차용증에 빚을 고스란히 이 신학생이 지는 것이고, 그 돈 못 갚으면 그 사람이 종으로 끌려가게 생긴 겁니다. 그러니까 선지 동산을 확장한다고 헌신했다 빌려온 쇠도끼 잃어버리고 자기는 종이 될 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굉장히 큰 문제로 번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그냥 적절하게 살아가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때로는 하나님께 이렇게 자신을 던지면서 헌신할 때가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정말 헌신하기로 결정하고 내가 인생을 던졌는데 결과가 정반대의 큰 위기가 어려움에 직면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 영광위해 좋은 일을 한다고 헌신했고 정말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올인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집을 홀라당 날리고 쫓겨날 일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굉장히 완곡하게 표현됐는데 이것은 큰 절망과 탄식의 부르짖음입니다. 이거 어떻하죠? 주여 나 도와주세요…이 쇠도끼 주의 영광위해 빌려온 건데 이거 못 찾으면 나는 종이 될 판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 일인데 결과적으로는 큰 문제가 벌어진 큰 위기, 그 절박한 현장에서 엘리사가 이 신학생을 기적의 역사로 건져 줍니다. 오늘 말씀에 엘리사의 기적의 역사는 예수님이 풍랑위를 걸으시는 것보다 훨씬 더 드라마틱합니다. 엘리사가 그냥 나뭇가지를 베어 던졌더니, 그 베어진 나뭇가지를 통해 가라앉은 쇠 도끼가 공중부양 하듯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겁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놀라운 기적입니다. 이렇게 믿기 어려운 기적을 통해 쇠도끼를 잃어버린 신학생을 건져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기 원하시는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 주목할 것은 쇠도끼가 물에 빠졌다는 것은 쇠의 무게로 물에 가라앉았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물에 빠진 무거운 쇠도끼는 절대 물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될 건 이 쇠도끼가 빠지고 물위 올라온 장소인데, 그 장소가 바로 나아만의 나병이 치유 받았던 곳, 요단강이라는 데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나아만이 여섯 번 목욕할 때까지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순종으로 자기 생각을 온전히 내려놓고 의탁했을 때, 일곱 번째 기적적으로 그의 어린 아이와 같이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 요단강에서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서 던지니까 물에 빠져 가라앉은 쇠도끼가 중력을 거스르고 올라오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은혜 밖의 우리 인생은 다 죄의 중력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깊은 어둠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를 가라앉게 하는 힘이 있고 우리를 죽음과 사망으로 짖누르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스스로는 절대로 쇠도끼와 같이 무거운 이 죄의 중력을 거스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죄의 중력에 따라 우리는 가라앉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스스로 발버둥쳐도 거스를 수 없는 죄의 심각한 무게와 권세가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귀하고 비싼 도구였던 쇠도끼와 같이 존귀하게 만드셨는데 우리는 죄의 무게로 말미암아 죽음과 사망의 자리로 가라앉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죄의 무게로 가라앉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은혜의 나뭇가지로 중력을 거스르며 떠오르게 하시는 기적으로 살려 주셨습니다. 나뭇가지를 잘라 그곳에 던지니까 중력으로 가라 앉아 있던 그 쇠도끼가 떠오르는 것과 같이, 십자가를 통과하니까 죄의 무게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사망과 죽음에서 떠오르게 하신 겁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건지시기 위해 나뭇가지와 같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죄의 짓누르는 힘을 이기고도 남는 놀라운 복음의 힘, 십자가 힘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끌어올리게 되는 기적이 바로 복음입니다. 요단 강가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그분이 죄가 있는 자처럼 여김을 받으면서 세례를 받으시고 세상 죄를 모두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쏟으시며 죽으셨습니다. 우리 대신 죽음의 강에 던져 지신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죽음과 사망의 현장에서 건짐 받고 위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그림자를 오늘 말씀에서 엘리사의 쇠도끼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통해 바라보게 하시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죄의 무게로 말미암아 가라앉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이 죄의 중력으로 바닥에 가라앉아 어둠과 죽음 속에 헤메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죄는 나를 가라앉게 하는 무거운 힘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를 결박해서 그 바닥에서 어둠과 사망과 함께 주저 앉게 만드는 무서운 힘과 권세가 실체로 존재함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 죄의 무게를 넘어서서 우리를 떠오르게 만드는 십자가의 힘 기적의 힘 은혜의 힘이 우리에게 부어져 있음을 믿으십시오.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속 가라앉아 있는 우리를 건지시는 유일한 소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 무거운 죄의 무게를 넘어서는 놀라운 십자가 은혜의 힘이 나를 물 위로 떠오르게 하는 역사가 부어졌음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우리를 살리고 건지시는 유일한 길은 그 십자가 은혜를 붙들고 매달리는 것 밖에 없음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방인이자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의 인생과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 엘리사 선지자의 측근이자 유대인 사환인 게하시의 인생에 대해 증언합니다. 나아만은 이방인이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를 내려놓고 말씀대로 이루어지도록 믿음의 순종으로 반응하며 불치병인 나병이 놀랍게 치유 받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는 육신의 나병만 고침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 나병도 고침 받아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구원받는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이런 나아만의 놀라운 신앙고백과 치유 체험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고 있는 유대인 게하시는 그냥 한사람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불순종과 하나님을 배제한 악한 삶을 살아가는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게하시에게는 여러 조건들이 은혜 받을 가까운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고 그 당시 가장 놀라운 선지자 엘리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측근이었습니다. 그런데 게하시는 그렇게 가까이에서 엘리사를 통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보고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이 하나님과 그 기뻐하시는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종으로 끌려온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고 이방인인 나아만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변화된 삶으로 나아가는데, 게하시만 정반대의 삶을 향해 질주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멀쩡했고 아프지 않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영적 나병으로 마음이 문드러지고 있는 자가 바로 게하시였던 것입니다.
게하시가 탐욕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화인 맞듯이 영적 나병으로 헤매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음을 오늘 말씀은 세 가지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영적 나병 증상은 스스로 이르러…내 생각에는…에 빠지는 겁니다. 게하시 자신의 생각에는 스승 엘리사가 병 고침 받은 나아만이 가져온 선물을 받지 않고 돌려 보낸 게 말도 안되는 겁니다. 놀라운 불치병을 치유해 줬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져온 걸 받지 않는가? 내 생각에는 이건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머리로는, 논리로는 말도 안 된다는 겁니다. 내 생각에는…이 절대화되며, 탐욕에 붙들린 타락하는 내 생각에는…이 절대화되니 게하시가 했던 건 뭐냐 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내 뜻을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변질과 타락입니다.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는 길은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어떤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가 되는게 바로 심각한 영적 질환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내가 수단과 도구가 되는 삶 대신 내가 원하고 바라는 어떤 것을 위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수단화하고 도구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한다는 거예요. 실제로는 내 뜻이고 내 욕심인데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 일을 위해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고 맹세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게하시의 영적 질환 증상은 하나님 이름 걸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아요.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수가 올라가는 게 정상인데, 양심에 화인 받은 게하시는 거짓말을 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만 게하시의 거짓말은 두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먼저는 스승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을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나아만을 따라가서 엘리사가 하지도 않은 말을 하여 거짓으로 은 한 달란트를 얻어내려 합니다. 엘리사는 전혀 요청한 적이 없는데 뭐를 걸고 거짓말하는 겁니까? 스승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받아 온 것을 게하시는 자기 집에 숨깁니다. 스승의 영광을 가로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하나님 이름으로 거짓말 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삼아 얻은 것을 몰래 자기 집에 슬쩍 숨기는 것입니다. 이런 게하시의 이런 모습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도 영적으로 둔감하게 이게 어떤 문제인지 전혀 모르는 겁니다. 많은 성도들이 마음에 욕심이 나를 잡고 흔드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 이름을 걸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내 유익을 위해 뭘 해도 상관이 없는, 심지어 하나님 이름 걸고 거짓말하는 것도 상관 없는 사람들, 그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이며 심각한 영적 질환자들인 것입니다. 세 번째 게하시의 영적 질환 증상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거짓말입니다. 스승의 이름으로 거짓말하는 것도 모자라 더 나아가 스승 앞에서도 거짓말합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너 어디서 돌아 오는 길이냐고 묻습니다. 왜 이걸 물어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는 거죠. 죄 지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디 있느냐고…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그게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는 것이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게하시의 대답은 뭡니까? 저 아무데도 안갔다 왔다고 스승 앞에서 거짓말하는 겁니다. 엘리사가 어떤 사람입니까? 4장과 5장에서만도 등장하는 기적과 이사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그렇게 놀랍게 쓰임 받으며 기사와 이적을 행하는 스승 엘리사가 자신이 어디 갔다 왔을 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어리석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영적 질환에 걸리면 마치 하나님을 안 계신 분처럼 생각하면서 내가 눈속임 하고 거짓말하면 못 보실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이름 걸고 하는 거짓말도 모자라 하나님 앞에서도 철판 깔고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게 얼마나 영적으로 둔감하고 마비된 인생입니까? 엘리사가 너무 답답해서 게하시를 채찍과 같은 말씀으로 책망합니다. 너 나아만을 쫓아 갈 때 너 마음이 간거 아니냐? 다 엘리사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이 돈 받을 때야? 지금이 거짓말할 때야? 지금이 탐욕에 눈에 팔려서 무너질 때냐? 그냥 내 것에 사로잡혀서 내 욕심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하나님 이름으로 거짓말하고, 내 앞에서 거짓말 하는게 말이 되냐? 엘리사와 그렇게 가까이 있었던 사람인데,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그렇게 많이 봤던 사람인데 어떻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 수 있느냐? 어떻게 하나님 이름대로 거짓말하는 것도 모자라 하나님 앞에서도 철판 깔고 거짓말 할 수 있느냐? 이런 강력한 책망은 단순히 엘리사가 개인 게하시에게 하는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여 하시는 경고의 채찍질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영적 질환으로 나병환자 같이 마음이 문드러진 게하시와 똑 같은 겁니다. 더 나아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많은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경고의 채찍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 문제가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겉으로 아프지 않으면 아프지 않은 것으로 착각합니다. 우리의 속은 혹시 게하시와 같이 이런 영적 질환에 빠져 마음이 문드러지는 영적 나병에 걸려 죽어가는 인생은 아닙니까? 교회 문턱은 들락날락 하는데 내 탐욕을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하고 도구화 하지는 않습니까? 내 욕심에 빠져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하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양심에 화인 맞은 자가 내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회개의 자리로 부르시며 손을 내미시는데, 영적 질환을 고쳐주려고 계속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거절하며 서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심각한 영적인 질환이 게하시에게 너무나 깊게 퍼져 있었던 겁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들락날락 하지만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아프지 않은 거 같은데 속으로는 너무나 아파서 영적 질환으로 찌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에 수단과 도구가 되어야지, 내 뜻을 위해 하나님이 수단과 도구가 되는 것이 영적 타락이자 심각한 영적 질환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눈과 같이 나병에 걸린 게하시를 반면교사 삼아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영적으로 병든 인생이며 내 영적 질환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주님이 내미시는 말씀을 붙들고 회개의 자리로 돌아오며 주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번 새 출발하기 원합니다. 영적 질환으로 신음하는 내 영혼이 깨어지며 다시 민감하게 회복되며, 주님 은혜 가운데 치유 받아, 게하시 같이 무너지며 파멸로 나아가는 인생에서 건짐 받아 새 출발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에게 늘 조심해야 할 때는 큰 승리 이후, 큰 치유 체험 이후입니다. 눈에 보이는 큰 축복이나 놀라운 치유가 자칫하면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 축복이나 치유 자체에 매몰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큰 승리 자체에 취하거나, 놀라운 치유와 병고침 자체에 매몰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망각할 위험에 빠집니다. 불치병 나병으로 고생하며 살아가던 이방인 장군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어린이 같이 깨끗하게 고침받고 치유 받았습니다. 나아만에게 하늘로부터 임한 놀라운 치유 사건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나아만이 몸의 나병을 고침 받은 것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의 병도 치유 받았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더 본질적인 치유는 몸에 나병의 치유를 넘어 영혼의 나병을 치유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며 영접하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단순히 나아만이 불치병을 고침 받았다, 기적으로 나병을 치유 받았다는 것을 넘어서는 그 영혼이 건짐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병 나은 것보다 더 큰 기적은 그 큰 치유 이후 나아만이 치유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앞에 엎드려 그의 영혼의 나병이 치유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이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의 백성이 되는 놀라운 역사가 바로 오늘 말씀의 증언입니다.
첫 번째 나아만은 큰 치유를 경험한 이후, 불치병을 고침 받았다는 치유 자체에 집중하는 대신 치유해 주신 분 하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평생 못 고칠 줄 알았던 나병을 치유 받았으니 얼마나 놀라운 역사입니까? 놀랍게 나병을 치유받고 기적을 경험해서 나는 고침받았다고 감격하며 그 치유의 역사 자체에 집중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병고침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가 대단하다고 높이는게 아니라, 엘리사를 사용하신 하나님을 대단하다고 높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치유 능력의 주인 되시며 여호와 하나님만이 온 천하의 신이라는 것을 마음으로부터 고백합니다. 그게 바로 나아만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큰 승리와 치유 이후 믿음의 반응입니다. 내 삶에 큰 축복 주신 분, 내 인생의 큰 병을 고쳐 주신 분, 하나님에게 가서 엎드린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믿음의 반응인 것입니다. 까딱하면 큰 승리에 취해, 큰 치유에 취해 그것 자체에 매몰되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망각하기 쉬운 게 인간입니다. 내 삶에 큰 축복과 큰 치유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큰 치유와 큰 축복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럴 때 내 인생에 하늘로부터 부어진 축복과 치유의 역사가 하나님에게 온전히 영광 돌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내가 치유 받았고 내가 승리를 경험했음에 집중하게 되면 그 가운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나아만은 그 병이 난 후에 바로 하나님에게로 그 마음을 돌이켜 순종하며 하나님의 어떠 하심을 찬양하다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두 번째 나아만은 나병을 고쳐준 선지자 엘리사에게 예물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강권하는 나아만의 예물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숟가락 얹지 않으려 그랬고 더 나아가 그 예물은 사람에게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드려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그토록 단호하게 예물 받기를 거절하는 겁니다. 이 불치병의 치유는 엘리사가 치유한 게 아니라 엘리사를 들어 사용하신 하나님이 치유하셨다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이나 은사가 돈벌이의 도구가 되는 것은 타락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우리가 예물을 드릴 때 분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 예물이 사람들과 교회 필요를 위해 사용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 나의 예물은 하나님께 고백과 함께 드리는 겁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교회가 재정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도네이션 하듯 드리게 되면 그건 하늘 하나님과 상관 없는 그저 육의 행위일 뿐입니다. 예물은 사람에게 바치면 땅의 것이 되고, 하나님께 바치면 하늘의 것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 즉 내 삶과 예배를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에게만 드리겠다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번 째, 나아만에게 놀라운 변화는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로 나아간다는데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세상적으로 사는 것도, 우상 숭배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나아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오직 하나님에게만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이런 것들이 다 회개해야 할 것들임이 보이는 겁니다. 내 죄가 얼마나 큰 지가 선명히 보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건짐 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닫는 것, 이게 하나님을 만난 자의 놀라운 변화라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을 만난 증거, 내 영혼의 나병이 치유 받은 증거가 뭡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가 깨달아지는 것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가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그 넘치는 은혜를 붙들고 나는 하나님만 예배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가가 선명히 보여야 합니다. 동시에 그것보다 더 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도 동일한 이 두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아 회개하고 재산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억울하게 한 사람들에게 갚겠다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후 그 앞에 엎드려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서도 고백하죠. 왜냐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나면 내가 영적으로 얼마나 병든 자이며 내 죄가 얼마나 큰지가 선명히 보이는 겁니다. 그 가능성없는 나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한없이 크신 예수님의 은혜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나아만에게 두 가지의 놀라운 기적이 있었습니다. 불치병인 그의 나병이 치유받고 나았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치유와 기적은 바로 그의 영혼의 나병이 치유받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만 섬기는 자로 변화된 그 놀라운 역사가 가장 큰 기적인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과 무관한 이방인,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나병과 함께 영혼의 나병이 치유받으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까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고 하나님과 상관있는 자가 되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인지가 선명히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지었던 죄가 나에게 큰 죄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 나에게 큰 문제로 다가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 하나님을 신경 쓰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친밀해지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아만은 이 고백이 분명한 변화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큰 승리와 큰 치유 자체 매몰되어 살아간다면 우리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큰 승리 이후, 큰 치유 이후가 가장 조심해야 할 때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엎드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이고, 축복 주신 하나님, 치유하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붙들 때입니다. 큰 승리 이후에, 큰 치유 이후에 우리는 축복과 치유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축복을 주신 분, 치유를 주신 분에게 집중해야만 왜곡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으며 더 놀랍게 뻗어 나가며 쓰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서서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고, 동시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더 큰지를 깨달아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엎드리며 선명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람의 나아만 장군의 치유 사건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나아만의 불치병인 나병이 기적적으로 치유 받았다,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하다 이걸로만 끝나면 안되고 나아만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핵심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주시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 나아만에게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종이자 노예였던 이스라엘의 한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는 나병에 걸린 주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나아만 장군은 그 노예이자 어린 소녀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고 그 말에 반응하였습니다. 별이 개이며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나아만 장군이 그 어린 소녀의 말을 들었던 이유는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더 나아가 그 듣는 마음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도 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아만은 그 소녀의 말을 들었고 지금 이스라엘에게서 그 유명한 선지자인 엘리사의 집 앞에 왔습니다. 군대를 이끌고 병거를 이끌고 수많은 선물들을 이끌고 엘리사의 집에 딱 온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오는 게 당연히 당연한 반응이겠습니까? 아이고 장군님 이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하였습니다…엘리사가 얼른 나와서 고개 숙이면서 딱 맞아 줘야지요…그게 나아만이 기대했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집에 딱 도착한 나아만에게 정작 엘리사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나와서 엘리사의 말을 나아만 장군에게 전하는 겁니다. 여기서 벌써 기분이 확 상한 겁니다. 내가 누군데 감히 나와 보지도 않는 거야….내가 얼마나 멀리서 왔는데 내가 얼마나 큰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얼굴도 비춰 보지 않는 거야…나아만은 이스라엘 왕도 두려워하고 벌벌 떠는 소위 말하면 거물급 인사였습니다. 근데 하물며 엘리사 같은 선지자가 감히 나와 보지도 않고 자신에게 예도 갖추지 않는 것 자체가 벌써 머리 끝까지 화가 나는 거예요.
더 화가 나는 건 뭐냐하면 그 사자를 통해 전해온 내용입니다. 그냥 혼자 요단강 가서 물에 몸 일곱 번 씻으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어렵지 않은 명령인데 이게 자기 생각에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엘리사가 뛰쳐나와서 자신을 맞아야 하고, 내 생각에는 여호와의 이름도 크게 수십번 부르고, 주여…를 외치며 내 몸에 간절히 안수기도 하고 막 흔들고 해야 되는데 너무나 말도 안 되게 가서 그냥 물에 가서 씻으라는 겁니다. 코빼기도 안보이고 영접 안 하는 것도 화가 나는데 그냥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니…내가 생각했던 모든 기대와 생각이 산산이 무너진 것입니다. 나아만이 지금 크게 노한 이유는 엘리사가 가져온 치유의 메시지가 자신의 생각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안에 들어오며 그리스도의 빛이 내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 우리가 내려놔야 될 거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내 생각에는..”입니다. 내 나름대로의 논리와 내 생각에는 이거는 이렇게 돼야 되고 이건 저렇게 돼야 되야 한다는 그림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가 절박해서 치유를 구하면서 나왔는데도 여전히 자기 생각으로 내 병은 이렇게 고쳐져야 하고 치유는 이런 식으로 되야 한다는 확고한 그림이 있는 겁니다. 내 생각에는….이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벽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독뱀에 다 물려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뭐였냐면 그냥 높은 장대에 놋뱀을 두라 하시고, 그 놋뱀을 보는 사람마다 산다 그랬습니다. 독에 물려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도 똑같이 “내 생각에는…”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모세가 찾아와서 안수기도 하고 주여 불러주면 낫는다… 그랬으면 오히려 좋았는데, 그냥 저 놋뱀만 쳐다보면 낫는다고? 말도 안되….내 생각에는 그거 말도 안되….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놋뱀 바라보지 않고 죽었다는 거죠. 바라보기만 하면 사는데 바라보지 않고 죽었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내 생각에는….과 충돌하게 때문이죠 내 생각에는 너무 쉬워 보이고 말도 안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선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순전히 바라보고 믿고 그 이름만 의지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영접하라 거예요. 생각보다 매우 심플하고 너무 쉬워서, 복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차라리 구원을 받으려면 새벽기도 10년 개근, 봉사 만시간, 헌금 얼마…이것저것 계단과 같이 계율을 만들어 놓으면 오히려 사람들이 쉽게 나올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생각과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죠. 근데 복음이 어려운 건 내 생각과 본질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을 통하여 받는 구원이 아니라 철저하게 예수님의 어떠 하심으로 받는 일방적인 선물이라는 게 내 생각에는….과 크게 충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붙들지 않고 바라보지 않고 믿음으로 취하지 않는 것이죠.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헐어 버려야 될 걸림돌은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내 생각에는…”입니다. 내 생각에는…이 무너지지 않으면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의도적으로 나아만의 “내 생각에는…”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성도들의 “내 생각에는…”을 무너뜨리고 계심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 생각을 무너뜨리게 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우리에게 직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살고 그래야만 복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얘기라는 엘리사를 향하여 분노하고 하나님에게 분노하며 떠나기 일보 직전입니다. 분노해 가지고 이스라엘의 요단강보다 훨씬 깨끗하고 좋은 강물이 우리 동네 주변에 많은데, 엘리사가 말도 안 되는 소리하고 있다….얼른 짐챙겨라…돌아가자…명령합니다. 그 때에 감사하게도 나아만은 분노하며 돌아가려는 찰나에 결정적으로 붙들어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거절하는 찰나에 나아만에게 놀라운 역사가 임하도록 돕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바로 그들의 종들이었습니다. 그 종들이 나아만 장군을 말리는 겁니다. 장군님 요단강에 일곱 번이 아니라 700번 씻으라 했으면 안 씻을 겁니까? 이거보다 훨씬 어려운 거 하라고 해도 다 했을텐데, 하물며 일곱 번 가서 씻으라는데 왜 그거 못 하세요? 어차피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치유 받으려고 온 거 아니에요? 간곡하게 설득합니다. 감사하게도 나아만 장군은 그 종들의 말을 듣고 내 생각에는…을 내려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에 담기지 않아 충돌하고 부딪히고 화내는 그 내 생각에는…를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번을 씻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순종하는 길은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씻을 때마다 점진적으로 병이 나은게 아닙니다. 다섯 번 여섯 번을 씻었을 때까지 아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씻으면서도 계속 뭐가 꿈틀꿈틀 거렸겠습니까? 내 생각에는…이 꿈틀 거렸죠. 여섯 번을 씻었는데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거예요. 야 여기까지…그러고 철수 했으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곱 번을 씻고 나니까 일곱 번째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단강 가서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아만의 치유 사건이 복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복음 4장에서 놀랍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느니라. 왜 나아만 혼자 나병을 고침 받은 겁니까? 그가 포기한 내 생각에는…이 받아들였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이었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왕으로 주인으로 오십니다. 그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기만 하면 그 안에 거기만 하면 구원이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거절하고 등을 돌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그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과 충돌하기 때문에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복음이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말씀대로 내가 엎드리는 것이 복음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내려가는 것을 순종의 믿음이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구원 받는가 하면 순종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도 믿음의 순종의 믿음으로 일어나고 놀라운 치유의 역사도 순종의 믿음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려야 될 나의 교만한 생각, 무너져야 할 내 생각에는…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걸 내려놔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삶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내 생각에는…을 내려놓고 설득당하기를 기뻐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내가 교정되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나의 생각이 내려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순종의 믿음을 통하여 놀라운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하늘에서 우리 삶에 이루어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아람의 장수 나아만 장군의 치유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스라엘의 장군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 땅에 있는 자가 아니라 이방 땅에 이방인의 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다는 것을 통하여 이방 땅과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심을 증언합니다. 우리는 불신자나 이방 땅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거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 교회에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을 중요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은 이방 군대장관 나아만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통해, 이방인들보다 못한 이스라엘 땅과 백셩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맡기신 이스라엘의 왕이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섬기며, 하나님만 붙들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겉보기에는 아쉬운 게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을 이루고 가진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돈을 좀 더 가지면 좋겠고 명예를 좀 가지면 좋겠고 지위를 가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늘 우리의 결핍을 강조하며 살아가는데, 그에게는 돈이나 명예나 지위 부족한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측근이었고 군대에서 별 4개 장군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는 큰 용사였습니다. 겉보기로 봤을 때는 결핍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나아만에게는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의 육체의 큰 가시인 나병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대단해보이고, 지위도 명예도 돈도 아쉬울 게 없는데, 집에만 돌아오면 너무 아픈 그냥 환자의 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고치기 위해 해볼 만한 거 다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재력도 인맥도 있으니 그 당시 유명하다는 수많은 의사들을 다 찾아가 봤을 겁니다. 좋은 약이 있다는 거 웬만한 거 다 써봤을 겁니다. 그런데도 병은 나아지지 않고 호전되지 않은 겁니다. 겉보기에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거 같고 대단한 거 같은데, 자세히 알고 보면 이렇게 어두운 그림자와 아픔 가운데 신음하는 연약한 환자, 이것이 나아만 인생의 현주소였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의 현주소란 것입니다. 이렇게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데 나병으로 신음하는 나아만 장군을 불쌍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스라엘에서 잡혀 온 어린 소녀이자 몸종이었습니다. 이 어린 소녀는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절말적인 인생이었습니다. 집에서 잘 지내다가 아람 군대에 잡혀와서 하루 아침에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갑자기 노예가 된 여인, 이 여인의 인생이 얼마나 기구합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종이였으면 그냥 그러려니 포기하고 산다 해도, 작년까지 집 안에서 사랑받고 이쁨 받는 자유 소녀가 그냥 잡혀서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되었고 평생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인생에 모든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인생에 소망이 보이지 않고 겉보기에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죽지 못해 사는 인생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잡혀와서 비자발적으로 노예가 된 그 소녀에게 어떤 마음이 있었냐 하면 우리 주인 나아만 장군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았을 걸…하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 기적의 삶이 가능한 것일까요? 겉보기에는 종이고 노예였고, 상황은 너무나 비참했지만 소망 없어 보였지만, 그 여인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과 신분도 그 여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꺾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감옥에 있던 요셉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인 보디발의 아내에게 억울하게 누명 씌워서 평생 나가지 못할 감옥에 갇혔습니다. 거기에 무슨 소망이 있습니까? 그런데 요셉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있었지만 주변 사람의 얼굴빛을 살필 마음의 여유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의 치유, 그 시작은 바로 이 이름모를 이스라엘 소녀, 억울하게 잡혀와 종이 된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나아만 장군은 이 이름모를 여종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올라오는 이스라엘 선지자 앞에 가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때 나아만 장군이 이 얘기를 듣고 상상할 수 있는 일방적인 반응은 듣고 흘려 버리는 겁니다. 그 당시에 노예는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어린 소녀가 하는 말이었어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콧방귀를 끼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해볼 걸 다 해봤는데 말도 안되 소리하고 있네… 이렇게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는데 나아만 장군은 그 소녀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않고 붙든 것입니다. 노예이자 어린 소녀가 했던 말을 그는 경청하고 그 이야기에 반응을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저 얘기를 들어야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들었고, 그의 주인이었던 왕에게 얘기하면서 이야기가 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방인으로서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고민하며 거기에 대해서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치유하실 수도 있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어린 소녀이자 몸종도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고, 이방인인 나아만 장군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왕에게 부탁해서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쓰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의 반응을 보면 믿음의 반응과는 전혀 상관없는 철저하게 불신자와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한 인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하 나아만을 고쳐달라는 편지를 받고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었습니다. 이건 우리는 다 죽었다는 절망의 표현입니다. 왜 왕이 옷을 찢었는가 하면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하나님이냐? 왜 나한테 와서 살려 달라 그러는 거야…철저하게 하나님을 배제한 절망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맡기신 자리인데 그는 이 문제를 가지고 전혀 하나님에게 찾아갈 마음도 하나님에게 물어볼 마음도 하나님에게 은혜를 구할 마음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병을 고쳐달라는 편지의 진의를 의심합니다. 이렇게 고쳐 달라고 얘기 하는게 나한테 와서 시비 걸고 이래서 전쟁을 걸려 그러는 게 분명하다고 짐작합니다. 그러니까 나병에 걸려 여기까지 찾아온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도 없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없고요 하나님 앞에 나고자 하는 그 열망도 없는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왕이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커야 되고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아야 되는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불신자 나아만 보다도 못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이스라엘 왕을 반면교사 삼기 원합니다. 이 어린 소녀와 같이 타인의 필요와 눈물이 보이며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복음, 예수님 앞에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마음이 우리 가운데 회복되기 원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게 잘 사는 거 같고 결핍이 없어 보이는데, 예수님이 없어서 결핍으로 어둠움을 사는 많은 인생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면 산다는 그 간절한 마음이 회복되기 원합니다.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내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간에 내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타인의 낯빛을 살필 수 있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삶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어린 소녀와 같이 겉보기에는 절박하고 소망이 없어 보이는 눈물 나고 아픈 상황일 수 있고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 하나도 챙기기 어려운 그 때에, 내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내 상황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때문에 내 주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타인의 마음을 읽는 자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살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회복되야 산다는 것을 깨닫고 순전한 믿음, 타인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회복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4장은 엘리야 이후 그 선지자였던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여러가지 기적들을 말씀의 은혜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 기적들의 모든 배경에는 북 이스라엘이 이렇게 영적으로 어둡고 신앙의 본질에서 이탈한 불순종으로 가득한 시대, 왕이 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엘리사의 사역이 한줄기의 빛과 같이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4장 앞부분의 선지자의 아내였던 과부 가정을 기적으로 살 길을 마련해준 엘리사의 기적의 이야기와 함께 하나의 큰 연결점으로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그 땅에 큰 흉년이 든 것으로 시작합니다. 큰 흉년이란 일차적으로는 그 지역이 정말 먹을 것이 없는 기근과 고난의 어려움입니다. 마치 앞에 나왔던 선지자 가정의 피눈물의 인생, 남편은 죽고 빚만 남아 그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갈 지경이었던 빚더미의 인생이 시대 상황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큰 흉년으로 정말 먹을 것이 없는 위기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실제로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고 고민하고 그것 때문에 굶주려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흉년, 그게 일차적인 의미입니다. 동시에 이 흉년은 영적인 흉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말씀이 기갈, 말씀이 사라져서 영적으로 굶어 죽는 흉년, 백성들이 영적 양식을 공급받지 못해서 영적인 존재로 살지 않고 육신으로 그냥 짐승으로 살아가도록 방치되는 삶 그것이 바로 큰 흉년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이거 혹은 저거의 취사 선택이 아니라 상대적 절대적 의미로서 같이 붙들고 가야 되는 흉년의 의미입니다.
그 땅에 그렇게 흉년이 들었을 때 100명이 넘는 선지자들이 엘리사 앞에 왔습니다.굶주림으로 찾아온 선지자들을 엘리사가 기적으로 먹이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두 가지 기적으로 엘리사는 그들의 육신의 필요를 먹이고 동시에 그들의 영적인 필요를 먹입니다. 첫번째 기적은 국을 끓이는데 마법가루로 해독하는 기적, 두번째는 구약의 오병 이어와 같은 보리떡 20개와 한 자루의 채소로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기적입니다. 기적의 내용은 다를지라도 거의 똑 같은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부어 주시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나는 패턴이 비슷한데, 하나님께서 하늘의 복을 부어 주시기 위해선 우리들의 믿음의 반응과 내 것을 가지고 오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절대 큰 그림을 알려 주시지 않고 부분적으로 희미하게만 알려 주시지만, 그 가운데 믿음의 반응을 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기적에서 믿음의 반응은 많은 선지자들을 먹이기 위해 한 사람에게 국을 끓이라고 엘리사가 명했더니 한 선지자가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믿음으로 반응하여 밖에 나가서 어떻게든 채소를 찾아와 옷자락에 채워 돌아옵니다. 자기에게는 큰 기근 중이어서 가진 게 하나도 없기에 가서 될만한 채소를 찾고 찾아서 것가지고 왔습니다. 그게 들포도 덩굴 가운데 있는 호박이라 하는데, 그게 정확하게 뭔지 모르지만, 먹을 수 없는 채소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먹을 수 있는 버섯이 있고 먹을 수 없는 버섯이 있지 않겠습니까? 근데 먹을 수 없는 버섯 같은 것을 모아서 가져온 거예요. 왜 그 먹을 수 없는 독버섯과 같은 것을 가져 왔냐면 그 사람이 분별력이 없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구별 못해서 가져온 게 아니라, 큰 기근 중에 가지고 올 수 있는 게 그것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먹을 만한 버섯은 이미 다 가져가고 그니까 남아 있는 거라고는 먹을 수 없어 보이는 그런 독버섯 같은 것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라도 다 모아 가지고 썰어 가지고 국을 끓이는 겁니다. 먹을 수 없는 건 아는데 그것 밖에 없으니까 엘리사의 명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거라도 가지고 와서 들여서 국을 끓이는 겁니다. 근데 끓인 국을 맛보니까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라 난리가 난 겁니다. 그렇게 써서 먹을 수 없는 국,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는 국을 엘리사에게 가져가니까, 엘리사가 소위 말하는 마법의 가루를 가져와서 솥에 넣으니까, 독이 든 것 같이 써서 먹을 수 없었던 국이 해독된 겁니다. 마치 광야에서 쓴 물이 단물이 되어 먹을 수 있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쓴 국에 독이 해독되어 먹을 수 있게 되어 그 허기지고 배고파 고통 당하는 선지자들과 그 무리들이 다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놀라운 기적으로 먹을 수 없었던 쓴 국을 먹을 수 있는 국으로 해독시켜 주신 겁니다. 두 번째 기적도 비슷한데 한 사람이 처음 만든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자루를 엘리사 앞에 드립니다. 그 정도면 큰 기근 중에 자기 혼자 먹으면 가족이랑 며칠은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것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남자면 100명, 가족까지 하면 400명은 족히 넘는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거의 불가능합니다. 절대 먹일 수 없는 작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엘리사는 이 것을 무리에게 줘서 먹게 하라고 명합니다. 아니 몇 사람도 먹기 어려운 보리떡 20개를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나눠 먹으라고? 측근들이 귓속말로 이건 절대 먹일 수 없는 양입니다…이야기했을 겁니다. 그때 엘리사가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을거라 하시니 무리에게 나눠주라는 겁니다. 그 엘리사의 말에 순종해서 그냥 믿음으로 그걸 무리들에게 나눠 주든지 그건 불가능하다 여기고 포기하든지…이게 바로 믿음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부분적으로만 희미하게만 알려주고 말씀을 믿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원하는 거죠. 놀랍게도 그들은 엘리사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 무리들에게 보리떡 20개와 한 자루 채소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근 한 가운데서 그 많은 무리가 모두 먹고도 남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절대 그걸로 먹일 수 없는 작은 양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 하늘로부터 역사하시며 모든 사람이 먹고 충분히 먹고 남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패턴이 예수님이 5천명을 먹이신 패턴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믿고 그 드려진 작은 것들로 장정만 오천명을 먹이는 것이나, 엘리사가 기적으로 먹이는 패턴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첫번째 기적에서 엘리사가 라면 스프 같은 비법 가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아니라 엘리사를 통하여 하늘의 역사가 그 땅에 임하게 하신 축복이 임한 겁니다. 그 하늘의 역사와 축복이 임하기 위해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건 바로 믿음의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명령에 어쨌든간에 먹을 수 있던 없던, 있는 것을 가지고 올 수 있는 것을 그 믿음, 그것을 가지고 불가능하지만 국을 만드는 순종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엘리사의 기적은 이렇게 믿음의 반응으로 하나님께 드릴 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내가 드려지지 않은 것 가운데 그냥 일방적으로 역사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드리는 말도 안되는 작은 것을 통하여 믿음의 순종과 반응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있는 것을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그것을 통해 역사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게 바로 하늘의 축복 원리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나님 보시기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떠나며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붙들고 백성들과 무관하게 살아갔기에 백성들은 큰 흉년으로 육신의 양식 기근, 영적 양식의 기근으로 아사 직전에 빠지는 어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엘리사를 통하여 한줄기의 빛과 같은 그 은혜로 그들을 육적으로 영적으로 먹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며 나아가기 원하며 내 육신의 필요가 채워지며 내 영적인 필요가 채워지는 풍성함이 경험되기 원합니다. 말씀이 희귀하며 말씀의 흉년이 되는 이 말씀의 기근 때에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면 말씀으로 공급하시는 하늘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담기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수넴 기적의 은혜로 주셨던 아들, 그 아들에게 찾아오는 죽음과 다시 살리심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주신 아들이면 그 아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아들이 축복 가운데 놀랍게 쓰임 받는 도구가 된다…그러면 참 좋겠는데, 그렇지 않더라는 겁니다. 어린 시절 그 기적의 아들은 잘 자라났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 아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은혜 가운데 그 아이를 잘 자라게 하시는구나…고백하고 간증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의 아들에게 하루 아침에 마음이 무너지는 큰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루는 그 아이가 아버지에 와서 갑자기 “아빠 머리 아파...”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게 두통 정도로 생각하고 머리 아프면 엄마에게 가봐….말하며 엄마에게 보낸 겁니다. 그리고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는데, 머리 아프다고 온 아들이 엄마 무릎에서 한 나절 누워 있다가 죽은 겁니다. 머리가 아프다는 것은 좀 아프긴 하지만 그게 죽을 병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기적의 아들은 엄마 무릎에 있다 갑작스럽게 죽은 겁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고 매달려 얻은 아들이 아닌, 기대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내려놨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필요까지 채워 주시며 선물로 주신 아들인데, 그 기적으로 주신 아들이 자신의 무릎에 누워 죽어가는 것을 보는 이 수넴 여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 기적으로 주신 아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가다니….하나님이 먼저 나서 주시며 가장 귀한 선물로 주신 아들을 기적으로 허락해 주셨으면 이렇게 갑자기 데려가시는 것은 아니지 않나… 그렇게 기적으로 놀랍게 주시고는 이렇게 허무하게 뺏아 가시면 어떡합니까?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땅을 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숨을 거두며 죽는 아들을 바라보는 이 수넴 여인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망감이었을 겁니다. 우리 인생이 계산한 대로 모든 게 수학 공식과 같이 딱딱 맞아 들어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근데 우리 인생에는 우리 계산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공식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때로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공식을 넘어서는 놀라운 역사로 임하시기 하지만 동시에 때로는 기대하지도 못하는 공식을 넘어서는 어려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준비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수넴 여인의 마음은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상상해보면 요즘 말로 하면 멘탈이 나가는 게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멘탈이 나가는 대신, 맨붕이 와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대신, 당황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반응과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과 위기가 찾아왔는데,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이 여인을 통해 성도로서 따라가야 될 믿음의 반응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맨붕이 오거나 맨탈이 나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대신 수넴 여인은 그 죽은 아이를 엘리사를 위해 만들어줬던 방에 눕혀 놓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를 만나러 달려 갑니다. 그게 그 여인이 했던 첫번째 믿음의 반응입니다. 왜 이 아들을 엘리사가 머물렀던 그 방에다 눕혀 놓았는가?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 그거 외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나의 인생에 큰 위기와 어려움이 찾아왔을 때, 정말 상상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성도들의 믿음의 반응이란, 이 상황과 일은 오직 주님 외는 답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것을 풀어 주실 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엘리사에게 달려 갑니다. 근데 엘리사를 만나러 달려 가는데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은 평안을 비나이다 평안을 비나이다…입니다 지금 절대로 평안할 수 없는 상황인데, 계속해서 평안하다는 것을 입술로 반복되는 이유는 내가 상황에 압도당하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바로 달려가듯, 우리 인생에 절박하고 힘들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닥쳤을 때 우리는 바로 하나님에게 달려가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달려 나아가 나의 문제를 내려놓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고백하며 하나님의 이름만 붙드는 것입니다. 두번째, 수넴 여인의 믿음의 반응은 엘리사에게 엎드려 그의 발을 꼭 붙드는 것입니다. 그 무너진 마음 눈물을 심지어 남편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그 무너지는 마음을 엘리사 앞에 가서야 쏟아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달려와서 엘리사 앞에 엎드릴 때 까지는 어떤 사람에게도 그 마음을 쏟지 않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눈물과 마음을 쏟지 않고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눈물과 마음을 쏟고 그 발을 꼭 앉는 겁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마음을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쏟아야 되냐면,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쏟아야 합니다. 수넴 여인과 같이 제일 먼저 달려가는 곳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달려가야 하고, 사람들에게 내 힘든 마음을 먼저 쏟는 대신,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것이 성도의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렇게 엎드려 발을 꼭 붙드는 여인을 바라보며 엘리사는 이 여인의 상태를 정확하게 직시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괴로워 한다는 겁니다….하나님이 나에게 숨기셔서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데 분명한 건 지금 이 여인의 영혼은 너무 괴로워 마음을 쏟으며 내 발을 안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앞에 무너지는 마음을 통곡하며 쏟아내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 수넴 여인의 마음 쏟는 통곡의 이야기를 듣고 그 집으로 찾아 갑니다. 먼저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달려가 자기 지팡이를 먼저 가지고 가서 그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 명령합니다. 왜 그랬냐 하면 그 당시의 고대 근동의 문화로는 죽은 시신에 지팡이를 논다는 것은 그 시신을 매장하는 것을 보류하라는 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게하시는 착각하고 엘리사의 지팡이 자체가 어떤 능력 있을 줄 알고 착각하고 지레짐작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른 가서 그 아이의 얼굴에는 지팡이를 두었는데 실제로는 아무런 일도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지팡이를 먼저 가져다 두라 한 목적은 치료 목적이 아니라 그 지팡이가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아이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잠시 보류하라는 명령이자 요청이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방 문을 닫고 그 기적으로 태어났다가 죽은 아이와 대면하게 됩니다. 엘리사와 그 아이 둘만 남아 여호와 앞에 간절히 마음 다해 기도합니다. 어떻게 기도했는가 하면 아이 위에 올라 자기 입을 그의 입에, 자기 눈을 그의 눈에, 자기 손을 그의 손에 대고 그의 몸에 엎드리며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몸을 맞대며 하는 기도는 예전에 그의 스승이었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릴 때 했던 기도 방식과 동일합니다. 그렇게 몸을 다 포개고 기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절박한 기도인가 하면 나를 죽여서라도 이 아이를 살려달라는 생명을 거는 기도였습니다. 이 아이를 나를 죽여서라도 나 대신 살려 주세요….긴절히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놀랍게 역사하셔서 이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 기적의 아들이 다시 한번 기적으로 죽음에서 건짐을 받고, 그 가정에 평안과 복을 주시는 것으로 말씀을 결론 맺습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일어난 놀라운 역사는 엘리사의 특별한 지팡이도 아니고 엘리사 자신도 아니고 엘리사를 쓰신 하나님을 통한 역사일 뿐이었다는 것을 성경은 일관되게 강조합니다. 기적을 행한 엘리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엘리사를 사용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그 하나님께서 역사 하심만을 바라봐야 합니다. 내 계산 대로, 내 계획과 예상대로 흐르지 않는 인생임을 인정하며 예상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 일이 닥쳤을 때눈 앞이 캄캄해 져서 맨탈이 나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인생 대신, 수넴 여인과 같이 그 속에서 믿음의 반응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달려가며 주님께 먼저 마음을 쏟아내는 인생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큰 어려움과 절망 가운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주셔야만, 다시 일으켜 세워 주셔야만 살 수 있는 인생임을 인정하며 내 안에 행하신 주님의 역사를 사모하며 살아가십시오. 나를 통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통로가 되기를 사모하며 하나님만 높이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을 보게 되면 예수님을 만나는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입니다. 이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사람으로 성별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사회적 지위도 다른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의 처지와 환경과 상황에 맞게 눈높이에 맞춰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며 그들을 찾아가시고 만나시는 모습을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중요한 복음의 맥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왕기하 4장에는 선지자 엘리사를 만나는 두 여인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한 여인은 저번 주에 배운 선지자의 아내이자 가난한 과부였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여인은 완전한 대조를 이루는 부자이며 이방인 귀부인과 같은 여인입니다. 선지자의 아내이자 과부는 찢어지게 가난해서 아들 둘이 노예로 팔려가기 직전이었으며, 엘리사에게 도와달라고 그냥 손을 붙잡은 정도가 아니라 부르짖으며 애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삶의 필요가 명확했고, 살려달라고 요청이 간절하다 못해 긴급했습니다. 반면에 오늘 말씀의 여인은 엘리사 선지자에게 간절한 도움이나 필요를 위해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삶의 위기가 절박함이 가득했던 선지자의 아내도, 겉으로는 부유하고 모든 것이 채워진 것 같이 보이던 부유한 여인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자가 없음을 말씀은 선명히 보여줍니다. 엘리사는 이 두 여인의 상황과 처한 처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풀며 그들의 진정한 필요를 채워주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수넴 여인은 굉장히 부자 마님이었던 것 같습니다. 돈이 많고 넉넉하다고 마음까지 넉넉하기는 쉽지 않은데, 이 여인은 재물의 부요함이 마음의 넉넉함과 풍족함으로 이어진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자원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한번이 아니라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준비하며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다 나아가 음식만 제공한 것이 아니라 미션 센터같이 쉴 거처까지 제공해 주는 세심한 배려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엘리사에게 세심한 배려와 봉사를 하는데 아무것도 엘리사에게 요구하는 게 없었습니다. 이 수넴 여인은 도움을 받기 위해서 이런 것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엘리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며 그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심지어 쉴 거처까지 세심하게 배려하던 여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결핍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도움 받기 위해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오는데, 이 여인은 정반대로 엘리사에게 부족한 것이 없나 필요한 것이 없나….세심하게 살피면서 그를 도우며 필요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나 간절한 요청을 위해 하나님을 찾아오고 하나님께 간절하다 못해 긴급하게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보통 나에게 사람들이 잘하고 무언가를 베풀고 환대를 베풀 때는 일반적으로는 목적성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갑자기 인사 안 하던 사람이 와서 인사를 잘 하고 갑자기 밥을 사주고 뭘 잘해 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 이 사람이 혹시 나에게 부탁 할 게 있나? 혹시 내가 나를 통해 도움 청할 게 있나…이렇게 생각하게 되는데 이 수넴 여인에게는 전혀 그런 게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필요나 부탁이 있어서 엘리사 선지자를 이렇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였기 때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를 환대하고 맞아주며 세심하게 배려하며 식사와 거처를 챙겨준 것입니다. 성도로서 우리가 때로는 선지자의 아내와 같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매달려 살려달라고 간구하며 우리 필요를 도움을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선지자의 아내이자 과부와 같이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간절하게 매달려 부르짖으며 나의 필요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아야 되죠. 그런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에게 나아오는 이유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목적성과 의도성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 그저 원하는 거 없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오는 기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그냥 하나님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오는 순전한 마음, 어떤 의도나 목적 없이 그냥 하나님을 만나는 게 기쁘고, 하나님께 내가 무엇을 해 드리면 좋을까, 하나님께 내가 어떻게 하면 기쁨 되는 인생일까…를 생각하며 하나님 그분 자체를 열망하는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콩고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을 갈망하고 하나님 그분을 원하며 수넴 여인과 같이 어떤 의도나 목적성이 없이 어떤 필요가 없이 그냥 그분을 만나기 위한 갈망, 그분의 기쁨되기 위한 갈망으로 나아오는 신앙의 순전함이 필요합니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떤 도움이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가 되는 삶, 내가 간절히 원하고 구하는 것은 주님 당신입니다…라는 이런 삶의 고백을 주님은 너무 기뻐하신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 수넴 여인의 놀라운 고백이었습니다. 이렇게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엘리사 선지자 입장에서도 그런 수넴 여인의 모습이 얼마나 감사하고 특별했겠습니까? 엘리사가 보기에도 이런 수넴 여인이 베푸는 호의와 환대, 세심한 배려가 너무 고마웠던 겁니다. 그래서 네가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니까 구하거나 필요한 게 없다는 거죠. 정말 자기에게 필요가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게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는 큰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간절한 기도 제목을 위해, 아들을 달라는 기도제목을 위해 엘리사에게 환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섬기고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 자체에 만족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엘리사가 하는 일이 뭡니까? 구하지 않은 도움, 내 놓지 않은 기도제목을 찾아 이 여인에게 가장 중요한 필요를 채워주고 기도제목을 기적으로 응답해주는 것입니다. 이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자기 기도 제목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나 이것이 정말 눈물 짓고 힘든 나의 기도 제목이 들어 주세요…라고 얘기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엘리사를 향하여 바른 태도와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그 여인에게, 엘리사는 찾아서 가장 필요하고 원하는 기도제목을 기적으로 응답하며 아들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내년 이맘때 증에 아들이 있을 거야…그랬더니 이 여인이 사람 속이지 말고 놀리지 말라고 대답합니다. 이미 그 기도 제목은 포기 한지 오래고 내려 놓은 지 오래라는 겁니다. 지금은 남편이 너무 늙어서 이제 애 같기는 힘들다고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의 말 대로 그 여인의 태를 여시고 아들을 낳게 되는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구하지 않은 것까지 나보다 나를 더 세심하게 챙기면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엘리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죠 우리는 수넴 여인의 이 순전한 영성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이거 주세요 저거 주세요 부르짖으며 매달리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도 귀하지만 때로는 내가 구하는 첫 번째는 주님 당신 자체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순전한 신앙이 우리에게 더 필요한 시대를 우린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수넴 여인과 같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될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내가 쓰임 받는 도구가 될까?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그 분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며 살까? 를 고민하고 갈망하기 원합니다.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가 원하고 갈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 그분 자체임을 고백하며 그분을 만나기 위해 오고, 섬기는 것을 열망하는 영성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 입술을 벌려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나에게 필요한 것 내에게 중요한 것 나에게 있어야 될 결핍을 다 아시고 하늘의 은혜를 부어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 그분을 갈망하고 원하며 하나님을 바른 태도로 섬기며 하나님에게 나아갈 때,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필요와 결핍을 채워 주심을 믿고 고백하며 나아가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바라기는 이 수넴 여인과 같은 순전한 믿음,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만나기 원하는 갈망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 주시며 친히 채워 주시는 풍성함과 축복이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이 생기면 더 행복하고 안전하며 모든 눈에 보이는 문제들이 해결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왕이 있으면 백성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보호해 줄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근데 오늘 말씀을 통해 증언되는 뼈아픈 진리는 백성들이 고통에 빠지고 피폐한데 왕이 상관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해서 세운 왕의 현주소가 무엇인지 보았느냐? 그게 열왕기상하의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선지자의 과부와 두 아들은 삶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나는데 왕이 상관하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받은 백성의 대표입니다. 선지자의 남겨진 가족…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잘 쓰임 받은 건 좋았는데 문제는 일찍 하나님이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시고 나니까 남겨진 가족은 고통 가운데 신음하게 됩니다. 선지자가 그 당시에 뭐 남겨 준 게 있겠습니까? 재산을 남겨준 것도 아니고 뭔가 살아갈 버팀목이 될 만한 것이 남겨진 건 없어요. 대신 큰 거 하나 남겨 주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입니다. 선지자가 무엇 하느라고 그렇게 큰 빚이 있었을까….에 대해서 너무 깊이 상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다는 것을 통해 탕진해서 빚을 진 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결국 그 빚은 생활고로 인한 빚이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선지자는 큰 빚을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가족들은 큰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조금 힘든 고통이 아니라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던 게, 그 큰 빚으로 말미암아 두 아들이 노예로 팔려갈 정도로 어려운 지경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를 보호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는 건드리지 않는 게 그 당시에 하나님의 명령이었는데, 그 약자 보호법이 전혀 지켜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성이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시대에 과부가 된다는 것은 벼랑 끝에 서는 고통이었는데, 두 아들마저 빚을 못갚아 노예로 팔려갈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런 선지자 가정 하나를 통하여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고 눈물 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가를 대표 선수와 같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절박한 상황 가운데 정말 죽는 것 밖에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왕은 백성들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상관하지 않는 절박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과부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건져 주시고 살 길을 열어 주시는 기적의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그 집에 기름을 펑펑 채워 주셨다…이걸로 끝나시면 안되고 주신 말씀으로 주목하고 마음에 새길 것은 하나님이 기적으로 일하실 때 쓰시는 방식과 프로세스입니다. 부르짖음, 드림, 전적 순종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기적은 선지자의 아내가 엘리사를 찾아 부르짖는 데서 시작됩니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절박하고 긴급하게 부른다는 의미이자, 세상에서의 도움은 다 끊겨 주님밖에 소망이 없다는 고백적 표현입니다. 세상에서도 도움 얻으려 하고, 주님에게도 도움 얻으려는 사람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는 주님 밖에 답이 없습니다…라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은 하나님도 섬기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이에요. 마찬가지로 기적의 역사 첫 단추는 하나님께 나아와 부르짖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는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림…입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이냐…물으시며 그걸 드림…을 통해 일하시는 겁니다. 선지자 과부의 집에 남아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겨우 기름 한 그릇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참 이상하죠. 그 한 그릇도 채 안 되는 그 기름을 가지고 나오라…그 남은 기름을 드리라는 겁니다. 그렇게 드려진 기름 한 그릇을 통해 통한 하늘의 기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프로세스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고 간구하고 매달릴 때 하나님이 물어보시는 것은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 네가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이냐…입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없고 모든 걸 날려버린 상황인데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그거를 가지고 나와 드리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다섯 개의 빵과 두 개의 물고기가 드려짐을 통하여 시작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기적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미약한 것을 통하여 기적을 시작하심을 잊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이 기적으로 일하시는 방법 세번째는 믿음으로 전적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고, 부분적으로 희미하게 설명을 해주시고는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엘리사가 만약에 이 여인에게 기름 그릇을 빌려오는 이유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그릇들에 기적으로 기름이 다 담길 거니 가능한 많이 빌려와…알려주면 얼마나 좋아요? 그런데 엘리사가 이 여인에게 내가 이렇게 이렇게 할 거니까 그릇을 많이 빌려오라…이러지 않았습니다. 아주 애매하게 알려주고는 그냥 무조건 나를 믿고 내 말만 믿고 그릇을 믿음으로 빌려오라는 겁니다. 지금 자기는 죽기 일보 직전이고 우리 자녀는 노예를 팔려가기 일보 직전인데 나가서 그릇 빌려 오라는 게 상식적으로 마음에 부대끼는 명령입니다. 죽을 지경인 나에게 왜 나가서 이웃에게 아쉬운 소리하며 그릇을 빌려와야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가능한 기름 그릇을 많이 빌려와… 조금이 아니라 많이 빌려와…그리고는 설명이 멈추는 겁니다. 그리고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시는 겁니다. 이 여인이 과연 기쁜 마음으로 이 그릇들을 빌려 왔을까? 아니면 속으로는 불평하고 원망하며 빌려 왔을까? 성경은 증언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불평하고 원망하며 빌려왔을 확률이 많습니다. 이 여인은 기쁨으로 많이 빌려왔을 수도, 불평하며 조금 빌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그릇을 빌려왔던지 준비된 그릇, 빌려온 그릇만큼만 기적의 기름이 채워졌다는 데 있습니다. 나중에 되서야 그 그릇들을 많이 빌려 오라 한 이유를 알았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 그릇은 기적으로 기름이 채워지는 것임을….이 그릇들은 하늘의 기적으로 주시는 기름을 담는 놀라운 그릇들이었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기름 부으심이 딱 멈추는 것을 보면서 이 여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했을 겁니다…기름 그릇 더 빌려올 걸…이럴 줄 알았으면 기름 그릇 정말 목숨 걸고 더 많이 준비할 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그 종들에게 하셨던 그 명령을 생각해보면 결이 거의 비슷합니다. 집안에 결혼 잔치 중에 포도주가 똑 떨어졌습니다. 잔치가 완전히 망쳐질 위기 상황에 예수님은 그 하인들에게 그냥 빈 통에 물을 가득 채워서 연회장에 가지고 가라는 겁니다. 그렇게 가는 순간 하나님의 역사로 물이 포도주로 변할 거야…이런 이야기는 전혀 안 해 주셨습니다. 그냥 물만 가득 채우고 믿음으로 그 물통 가지고 연회장 들어가라는 겁니다. 하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안 가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놀랍게도 그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음으로 반응하며 그냥 물이 담긴 것을 가지고 갔다는 거죠. 그 믿음의 반응을 사용하셔서 그 곳에서 놀라운 포도주가 나온 겁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거는 부분적으로 알고 희미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길을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 순종의 반응을 통해 하늘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별 설명 없이 가서 기름 그릇을 많이 빌려 오라는 명하십니다.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수용되지 않고 부대껴서 투덜거리면서 가져올 수도 있고, 믿음으로 많이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 믿음의 반응으로 준비된 그릇만큼만 하늘의 기름이 채워짐을 잊지 마십시오. 그릇이 준비되는 만큼만 은혜가 담긴다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은혜일지 아무도 모릅니다.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 그릇을 채우실 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릇은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으로 채워진다는 겁니다. 모든 것을 다 알려 주시지 않고 부분적으로만 희미하게만 아는 가운데 믿음의 반응을 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믿음의 반응을 요구하신 이유는 나중에 무릎을 치며 알게 되는 것, 그것이 신앙 생활의 신비입니다. 세상 왕은 여러분들의 아픔과 눈물을 해결해 주지 않고 여러분들을 붙들어 주지 않습니다. 나의 삶이 힘들고 아프고 눈물 날 때, 절벽에 홀로 서 있는 듯한 마음이 들 때, 하나님께서 나의 살길을 열어 주신다는 이 믿음을 굳건히 붙드십시오. 준비되는 만큼 기름 받을 크기가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믿음의 순종으로 기름 그릇을 준비하십시오. 우리의 어리석음을 넘어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불확실한 가운데, 희미한 가운데 믿음의 반응으로 순종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연합군을 조직해 배신한 모압 군대를 치러 전쟁에 돌입했는데 생각하지 않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물 공급에 차질이 생겨 광야 한 복판에 물이 없어서 가축과 군인들이 모두 목말라 죽게 생겼습니다. 전쟁 시작 전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뜻을 물었어야 하는데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배제한 채 전쟁에 임하더니, 생각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 갑자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모압과 싸워보지도 않고 죽게 되었다며 하나님이 우리를 모압의 손에 넘기려 하신다…며 하나님 탓을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서 위기에는 꼭 하나님 탓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으로 교만에 빠지더니, 그 계획이 꺾이게 되니까 갑자기 왜곡되고 과장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 절박한 위험 가운데 북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반응이 전혀 달랐습니다. 물론 전쟁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하나님을 붙들었어야 하는데, 늦었다고 생각하는 이 때라도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돌아온 여호사밧 왕과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오거나 하나님 뜻을 구하지 않는 여호람 왕이 확연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 군인 모두가 죽을 위험에 빠진 그때에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아 물어봐야 한다는 것을 강력하게 제시합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해결은 결국 하나님에게 돌아가고 말씀으로 돌아가고 선지자를 찾아 도움을 구하는 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여호사밧 왕을 깨닫게 된 겁니다. 둘 다 큰 문제 있는 왕이었지만 그래도 남유다 여호사밧이 북 이스라엘의 여호람 보다는 훨씬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은 사람이 바로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렇게 자문을 구하온 왕들을 향한 엘리사의 냉정한 거절과 반응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 가소서…찬 바람이 쌩쌩 부는 대답입니다. 선지자들의 계속된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던 북 이스라엘의 왕이기에 아버지 아합의 우상이나 어머니 이세벨의 우상을 찾아가고 그 선지자들을 찾아가지 왜 나를 찾아왔냐며 매몰차게 반응하는 겁니다. 들어야 될 진리에는 귀를 막고 들어야 될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았던,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아도 문제 없는 당신의 부모가 섬긴 우상의 선지자들에게 가라고 냉정하게 선을 긋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매몰차게 내몰고 냉정하게 선을 긋습니까? 하도 불순종을 많이 하니까, 하도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들으니까, 하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사니까…아버지 아합왕도 불순종으로 전쟁터에서 죽었고, 형이자 선임 왕이었던 아하시아도 그렇게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내신 손길을 거절하고 말씀대로 병에 걸려 죽었는데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니 하나님의 답답한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뭐냐면 북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에 징글징글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영적 위기 상황이고 본질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경고합니다. 동시에 그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물이 없어 모든 군사와 가축이 목말라 죽을 지경인 그 위기에서 그들을 건져 주시고 또 한번 자비의 손길을 내밀어 주십니다.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에 징글징글 함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해주시는 것입니다. 말로는 네가 왜 왔어? 다른 선지자들 찾아가지? 이렇게 냉담하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또 한번 손을 내밀어 그들을 건져 주시고 구해주시고 살길을 만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마음을 엘리사를 통하여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불순종과 반역에 징글징글하지만, 반역과 불순종이 고착화된 그들을 향하여 이렇게 강한 어조로 책망하시고 몰아세우지만 그 마음은 여전히 그들을 돌아오기 원하시며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원하시며 그들에게 자비의 손을 내미십니다. 또 한번 엘리사를 통하여 두가지의 기적으로 그들을 건져 주십니다. 첫 번째는 목말라 죽을 위험에 빠진 그들에게 물을 부어 주시는 기적입니다. 엘리사는 바람도 비도 보이지 못하고 물 한방울 보이지 않는 그 사막 한가운데 개천에 구멍을 많이 파라고 명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물이 가득해서 너희 군사들과 가축과 짐승들이 다 마시게 하나님께서 물을 하늘로부터 부어 주실 거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약속을 믿고 신뢰하여 구멍을 판 만큼 하늘에서 물이 내려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멍을 많이 판 후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 즉 하나님께 예배 드리고 제사드릴 때, 물이 그 땅에 흘러 채워지는 기적이 임합니다. 전쟁터에서 그 물이 없어 다 목말라 죽어가는 그 절박한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현장 위에 기적이 임하게 된 겁니다. 가축도 군사들도 다 목말라 죽을 것 같은 그 절박한 상황 가운데 그들에게 생명수를 허락하여 주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셔서 그들을 물로 먹이십니다. 두 번째,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주신 기적은 모압 족속들을 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기적입니다. 모압의 손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데 하나님께서 모압을 친히 싸워 이겨 주신다 약속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기게 하시는가 하면 그 풍성하게 부어진 생명수가 흐르는 물이 피로 보이는 착각을 하게 하는 착시효과로 그들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에돔이란 말이 원래 붉다는 말로, 에서가 붉은 에돔의 조상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에돔 쪽에서부터 물이 흘러나왔는데 안 그래도 물에 그렇게 붉은 물이 좀 섞여 있는데 해가 비추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모압 군대에게 물이 피가 흘러오는 것처럼 착각하게 하신 겁니다. 기적적으로 부어 주신 생명수가 그들에게는 피로 보인 겁니다. 그걸 보며 뭐라고 생각 했는가 하면 이거는 서로가 싸워서 서로 피흘린 것이니, 이제 올라가서 싸우면 된다고 착각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모압 사람들이 스스로 이스라엘 진영으로 모두 올라왔습니다. 독 안에 든 쥐와 같이 올라와 하나님께서 모압 사람들을 싸워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덕에 하나님 도우심으로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적의 은혜이자 하나님 덕에 이기게 된 놀라운 승리였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실해서 부어 주신 기적이 아닙니다. 꼴도 보기 싫고 정말 징글징글한 불순종과 반역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 번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내리사랑, 일방적 사랑덕에 그들이 죽을 광야에서 생명수로 건짐 받고, 하나님 덕에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 왕들과 같이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끊임없는 불순종과 반역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인생이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지속하면서 모든 게 다 내 덕인 줄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망하는 백성은 항상 하나님을 배제하고 교만으로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다가 조금만 안 되면 상황을 과장하고 두려움에 압도당하며 하나님 탓을 돌리는 패턴을 반복합니다. 이런 삶을 주님께서는 청산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는 삶,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무너뜨리시고 불순종과 반역에서 돌이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아오기 원하십니다. 철저하게 무너뜨리시면서 너희는 너의 열심 덕에, 너가 잘해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덕에 사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님 덕에 살고 있다는 이 진리를 깨달을 때 우린 진정으로 겸손해지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은혜 가운데 내가 살아가면 신앙의 제자리를 찾는 것이며 망하지 않는 복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반역으로 지긋지긋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건지시고 구원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생명수를 주시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내가 누구 덕에 살고 있는지를 잊지 않으며 주님 사랑 가운데 머물며 늘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주님 은혜만을 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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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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