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7장을 통해 드러나는 놀라운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같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상 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순간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사건이죠. BC와 AD를 나누는 그것은 온 우주를 변화시키는 사건이고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신 후의 그 삶은 놀랍게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큰 사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이 모든 이 세상 역사와 온 우주 역사의 중심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 가운데 또 가장 중요한 중심을 꼽는다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온 우주의 중심인 예수님, 그 예수님의 삶의 한 중심인 십자가 사건이 나에게 그리고 온 세계에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는가를 현재화하며 마음에 새기는 것이죠.
죄라는 것은 우리를 결박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꽁꽁 묶어서 죄가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겁니다. 내가 그게 잘못된 것을 알고 내가 그걸 하는 것을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 이게 바로 죄라는 거예요. 오늘은 그 죄가 우리를 결박하는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바로 죄가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억지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32절 말씀에 보면 구레네 사람 시몬의 이야기가 짧게 등장합니다. 길가다가 운없게도 로마 병정의 눈에 띄어서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진 장본인이지요. 왜 성경은 의도적으로 십자가 사건 중에 구레네 사람 시몬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는가? 물론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까 그렇게 증언하기도 했겠지만, 성경은 이 부분에서 알려주고 싶은 영적인 진리를 품고 있는 것이지요.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는 것을 증언하면서, 죄의 속성이 무엇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죄는 우리를 결박해서 꽁꽁 묶어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가야 되는 길 대신 죄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는 것이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가는게 아니라 원하지 않는 곳을 억지로 질질 끌려가는 거에요. 그래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지는 것에 의도적으로 강조되는 말이 뭐냐면 “억지로 지워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가게 했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죄 라는 건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억지로 끌고 가는 악한 권세와 힘이 있습니다. 자유를 빼앗겨 죄의 종노릇 하는 인간들을 죄는 계속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가고 억지로 끌고 가는 거예요. 지옥에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가 선택해서 가보니 지옥이다…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경말씀을 보면 죄가 쌓이고 쌓이면 죄가 무거워져서 죄가 끌고 가는 곳에 억지로 끌려 간다는 거예요. 지옥으로 가면 안된다는 걸 알아요. 지옥으로 그런데 질질 끌려 들어가는 겁니다 억지로 지우며 끌려가는 거에요. 억지로 원하지 않는데 우리를 그쪽으로 질질 끌고 가는게 그것을 거절할 힘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죄라는 것이 무서운 게 뭐냐면 죄에 익숙해지면 잘못된 길인 것을 아는데도, 죄가 끌고가는 원하지 않는 곳으로 계속 억지로 끌려가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억지로 질질 끌려가며 부정적인 정서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져 버려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져서,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고,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달고 살아도 아무런 변화 없이 그냥 사는 겁니다. 죄의 속성이 우리를 결박해서 우리를 원하지 않는 곳으로 오늘도 질질 끌고 간다는 거예요. 그 질질 끌려가는 곳이 원하지 않는 곳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부정적인 삶에 익숙해져서 그것을 풀어 버리지 못하고 죄가 끌고 가는 곳에 늘 후회하며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몸에도 여러분 우리가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는 큰 문제가 되는게 있습니다. 콜레스테롤 같은 것도 그렇고 당도 그렇지요… 당이나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게 평소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근데 계속 쌓이고 쌓여 임계점 이 지나게 되면 그 거지 내 몸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이 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우리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죄를 품고 죄를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죄가 무거워져서 그 죄가 나를 억지로 질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구레네 시몬에게 십자가를 억지로 지게 했다는 말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를 억지로 지게 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한다는 거예요. 자유함이 없고 내가 죄의 결박되어 억지로 끌고 가는 인생이 끌려가는 인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이게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살아야 되요. 이 모든 결과가 죄에서 온다는 것을 십자가를 통해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의 죄의 결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죄의 결과가 이렇게 나에게 자유를 잃어버렸고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내 인생을 잡고 질질 끌려가고 억지로 끌려 하게 만드는 이런 삶을 만든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십자가는 이 죄의 결박과 억지로 원하지 않는 곳을 끌고가는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부른 찬양이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주의 보혈…보혈의 능력” 아니겠습니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조의 결박에서 풀게 하시고, 우리를 억지로 끌고 하는 그 힘에서 해방시키는 겁니다.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보혈은 놀라운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해방시켜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 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이 모든 죄의 능력을 무력화시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 그 모든 것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해방으로 온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혈의 능력, 십자가를 통하여 이 결박을 풀고 억지로 끌려가는 힘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게 된 거죠 그래서 내가 인생에서 자유함을 잃어버리고 늘 내 삶이 두려움도 걱정도 죄책감도 중독도 끊어 버리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데 그곳에서 행한 하지 못하고 있다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생이 가고 있다면 이 시간 그 문제가 영적문제라는 것을 발견하고 나의 죄를 주님 앞에 나아가 십자가 밑에 풀어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이 시간 주님의 능력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다시 한번 시간 자유함을 얻어야 합니다. 이 시간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나오십시오.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가서 그 십자가의 은혜만을 붙드십시오. 그 결박을 끊고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 때 죄의 결박이 끊어지며, 죄가 억지로 끌고가는 그 힘들이 무력화되며 자유함과 회복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그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품으십시오. 이 시간 십자가 아래서 죄의 능력이 무력화되며 해방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실체로 능력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고난 주간 동안 마태복음 27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그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사건을 함께 묵상하기 원합니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이 하나 있다면 그 역사의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BC와 AD로 나누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신 후로 이 세상 역사는 큰 흐름이 나누어집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이 세상에 우주적이고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온 인류 역사를 나누는 절정과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구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우주적인 사건이며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세상 역사와 온 우주 역사의 중심을 나누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면, 예수님의 생애를 봤을 때 그 생애의 가장 중심이 무엇일까…를 살펴 본다면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오심이 이 세상에 역사에 가장 중심이고 변화의 핵심이었고 그 예수님의 인생의 가장 중심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죠.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고 마음에 망각하지 않고 현재화시킨다는 것은 그냥 개인적으로 십자가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만을 마음에 새기는게 아니라, 이 세계와 우주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가장 중요한 핵심인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주간 동안 이 십자가 사건을 슬로우 모션과 같이 확대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과 예수님이 돌아가신 바로 직후에 이 상황을 깊이 묵상하여 마음에 담기 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5일간의 이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그런 general statement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해결하신 우리의 죄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죄가 어떻게 해결되어 내가 변화되었는지를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우리 죄의 첫번째 모습을, 결박이라는 모습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묶고 결박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희롱을 다 한 후에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결박해 끌고가는 말씀이 굉장히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결박 당해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십자가에서 지신 죄의 속성 중에 하나가 우리를 묶는 죄의 결박이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지만 물질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영적 세계를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셨고, 자원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이죠. 그 자발성 그 선택 가운데 우리는 자유와 믿고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 그게 결국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맞게, 나 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바로 내 인생의 이 자발적인 선택을 통해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배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그 놀라운 은혜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죄가 우리에게 들어오고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 이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지유를 빼앗겼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결박 했다….말합니다. 죄가 나를 결박해 죄가 우리를 꽁꽁 묶은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를 꼼꼼 묶어서 죄의 종노릇 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직전, 이렇게 결박 당하여 끌려 나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죄의 속성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 죄의 속성을 온몸으로 감당하신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결박 당하심을 묵상하며 자유를 빼앗기고 결박당해 온 몸이 묶여 죄의 종 노릇하게 만드는 것, 이게 지금 우리가 직면한 죄의 속성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는 내 인생의 본질적인 자유를 잃어 버리며 죄의 종노릇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 죄에 결박 당해 묶여 있는 우리의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고 메마르게 하는지 깊이 십자가 앞에서 묵상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죄의 결박이 무엇입니까? 무엇에 그렇게 자유함이 없고 무엇에 그렇게 눌려 있으며 무엇에 그렇게 꽁꽁 묶여 있습니까? 대표적인게 두려움에 묶여 있는 삶 아니겠습니까? 세상 살면서 두려워 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도로서 두려워하며 살고 싶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는 다 두려움에서 자유롭고 싶죠.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을 살고 싶어합니다. 걱정 없는 세상을 살고 싶어 하고 두려움을 끊어 버리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죠.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고요 두려움 매이지 말자고 주먹쥐고 결단합니다. 그런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밤에 잠이 들 때면 두려워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걱정 충만 하게 해서 나의 내면을 괴롭게 하며 심지어 잠을 못 자는 불면증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뭐냐면 죄의 결과인 결박인 것입니다. 두려움에 우리가 결박되었기 때문에 묶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두려워 하지 않겠다…두려워하지 않아야 된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아도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빠져나오지 못하는 거예요. 이게 묶여 있는 결박의 특징입니다. 나의 결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경은 뭐라고 했냐면 우리가 죄에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자유를 빼앗기고 내면이 괴로워지고, 내가 원하는 나와 실제로 내가 살아있는 나가 너무나 다른 이 모습을 바라보며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나 스스로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능력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에게 실망하며,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와 같이 늘 자신을 학대하게 되는 것이죠.결국 자유라는 것은 뭐냐면요 내가 안 할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지는게 자유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면 두려워하지 않아야 될 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 결단과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걱정 하지 않아야 될 때 걱정하지 않는 자유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죄에 빠진 우리는 이 지유함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에 의해 결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서 나의 죄를 해결 하셨다는 고백이 상징이 아니라 실체와 능력으로 나에게 다가오려면 나에게 실체로 다가 오려면 그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해결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믿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시간 십자가를 바라보며 죄의 본성을 바라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밖에서 죄의 결박되어 있음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이 시간 두려워 하고 싶은데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걱정에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돈에서 자유하고 싶은데 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이 모든게 죄의 결과인 결박에 있다라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죄와 사망의 법에 눌려 결박되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빠져나오지 못하며 결박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나의 모습입니다. 죄의 결박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 죄의 종노릇 하며 자유함을 잃어버린 모습, 저와 여러분들의 현 주소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그 결박을 푸시고 해방하시고 자유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이 놀라운 사실을 정말 믿으십니까? 십자가가 나의 묶여 있는 결박을 풀어버리며 나에게 자유함을 주는 것을 진짜 믿으십니까?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지금 이 시간 십자가 능력 앞에 나아가 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해결 하신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저의 와 여러분들이 누려야 하는 십자가 은혜 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십자가는 단순히 상징입니까? 그냥 1년에 한 번씩 묵상하는 어떤 그냥 절기 입니까? 아니면 십자가가 여러분들에게 구체적 능력이고 실체 입니까?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푸신 그 자유함을 주시는 십자가 에게 나아가십시오. 그 십자가 앞에서 그 모든 결박이 풀어지는 자유, 이 놀라운 실체와 능력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입다의 비극적인 서원의 결과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방 문화와 우상 숭배에 젖어 하나님을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하며 한 경솔한 서원의 결과로 무남독녀의 딸을 그 전쟁의 승리와 바꾸는 그런 끔찍하고도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입다에게는 그 사건이 평생 마음에 지울 수 없는 멍과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외동딸을 가슴에 묻고 그 깊은 상처와 아픔이 결국 폭발하는 입다의 모습, 전의 사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더 큰 비극으로 완전히 폭발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바로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들을 무참히 죽여버리는 사건입니다. 사실 입다가 폭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자들은 에브라임 사람들이었습니다. 입다가 큰 승리를 거둔 이후에 와서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왜 전쟁 나갈때 우리 부르지 않았느냐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 때에도 비슷하게 시비를 걸며 문제를 일으킨 깐죽이들 이었습니다. 그때도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며 화를 내고 크게 다투었음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런데 지금 입다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그 강도가 훨씬 심하죠. 자신들을 전쟁에 부르지 않았다며 극단으로 가서 불을 질러 버린다는 겁니다. 그냥 단순히 불만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입다와 그 가족을 향하여 협박을 하는 거죠. 지금 입다는 터지기 일보직전 아니겠습니까? 소위 말하면 딸을 잃어버린 것 때문에 울고 폭발할데를 찾고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게 절망스러운 그때 폭발하기 일보직전 이 입다에게 와서 불지르겠다면서 이렇게 협박을 하는 겁니다. 입다의 대답과 반응을 보면, 분명히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울 때에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에브라임 사람들은 머리로 계산 막 해보고 승리를 할 자신이 없으니까 전쟁에 안나왔습니다. 그런데 승리를 하고 나니까 갑자기 입다를 견제 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갑자기 불지르겠다고 협박하니….지금 입다는 딸 잃어버린 것도 지금 아파서 주체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확 터져버리는 겁니다. 특별히 입다의 그 소위 말하는 뚜껑을 열리게 한 말이 뭐냐면 입다와 그 가족을 도망자들로 폄하한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입다는 도망자로서 큰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서 서자로 태어난 출생 때문에 우리집 식구가 아니라며 그 모든 형제들에게 서 쫓겨서 도망자로 살았죠. 젊은 시절 받은 상처와 아픔…그 눈물과 절망들이 거기에 자신의 외동딸이 서원으로 인해 희생된 것까지…그러니까 입다가 여기에서 완전히 터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에브라임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데 42000명을 죽입니다. 강을 건널때 지방 사투리를 정확하게 쓰는지를 확인해 그들을 잡아 요단강에서 다 죽여 버린 겁니다.입다의 딸이 희생된 것도 말이 안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었지만, 입다가 이렇게 폭발해서 같은 동족인 에브라임 사람들을 42000명이나 죽여버리는 끔찍한 비극은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입다는 이렇게 비극적으로 그 상처를 폭발시키며 수만명의 동족을 무자비하게 죽이며 그들을 쫓아 가서 잡아죽이는 이런 일로 사사 일을 마무리 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히브리서 11장에 보게 되면 믿음의 영웅의 이야기들이 인물들이 기록되는 데 거기 입다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입다를 믿음의 영웅으로 히브리서는 증언하고 있는가? 입다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고 본받을 게 거의 없어 보이는 사람인데 이런 부족한 사람을 성경은 믿음의 사람 이름에 올려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입다가 대단한게 아니라, 그런 입다를 사용하신 하나님이 대단하다는 것을 성경이 증언함을 바라봐야 합니다. 입다같은 자를 믿음의 사람으로 쓰신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장의 큰 그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바라보며 믿음의 사람을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그 인물의 뛰어남이 아니라 그 인물들에 부족함입니다. 얼마나 자격이 없고 얼마나 연약하고 얼마나 흠이 많은 자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사용하시고 그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불순종하는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주님의 은혜 그것을 붙들고 나아갈 때 우리가 주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부족한 나를 품고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그분 안에서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영으로 입다와 함께 하셔서 암몬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주신 직후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읽으면서 시험받는 성도들도 있는 생선의 가시와 같은 말씀이자, 많은 해석의 논란이 있는 어려운 말씀입니다. 입다하면 자신의 무남독녀 딸을 제물로 바친 끔찍한 사사로 각인되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방관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까지 마음에 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지금 입다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전쟁에서 승리해,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그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때였습니다. 그 승리와 감격의 때, 모든 것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참담한 순간이 동시에 찾아온 것입니다. 큰 승리 이후 감격해 집에 돌아가는데 자신의 외동딸이 소고를 잡고 제일 먼저 나와 축하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외동딸이 제일 먼저 나올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성경은 “보라…”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며, 닥치게 될 비극적 사건을 바라보게 합니다. 입다는 지금 옷을 찢으며 그 딸을 바라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미안하다…죽을 죄를 졌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딸을 향하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고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자라 말하는 입다를 바라보며 어떻게 저렇게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끝까지 인식하지 못하는지 안타깝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입다는 지금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서원했으니까 능히 돌이키기 못한다는 말합니다. 두 가지면에서 입다의 마음이 잘못된 마음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일관적으로 증언하는데 여호와의 영이 입다와 함께 하고 임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싸워 이겨 주신 승리이지,서원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거래가 성사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입다는 여전히 서원 때문에 이기게 되었고, 내가 승리를 얻게 되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서원을 돌이킬 수 없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서원을 부득이 돌이킬 수 있는 방법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레위기 17장 해보게 되면 서원을 했다가 형편이 되지 않을때 서원을 부득이 돌이키는 과정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서원을 했으면 분명히 지켜야 했지만, 취소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이 시간에 하나님께 엎드려 살려 달라 그러던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대신 그 서원을 되돌릴 수 없다고 딱 단정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서원을 되돌리면 승리도 되돌려진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과연 입다는 정말 딸을 번제로 드렸는가? 정말 실제로 사람을 죽여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는가?...참 어려운 질문이고 이것에 대하려 오랜 세월 동안 여러 해석과 논란이 있습니다. 첫번째로, 입다가 실제로 산 딸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렸다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입다가 번제물로 드린다고 말한 서원과 37절과 38절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함에 있습니다. 두 달 동안 딸의 친구들과 함께 슬퍼한 이유가 그렇게 억울하게 희생되어 죽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입다가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해 딸을 번제로 실제로 드려 바쳤다고 해석합니다. 두번째, 이런 해석에 반대하는 학자들도 제법 많습니다. 그들은 입다가 실제로 번제로 바쳐진 게 아니라 사무엘과 같이 처녀로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았다고 해석합니다. 그 근거는 한글 성경에는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로 번역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에는 “죽음”이라는 말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보면 “weep with my friends, because I will never marry.” 이라 되어 있습니다. 즉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한게 아니라 “결혼을 평생 못하기 때문에” 애곡했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해석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속성, 즉 하나님께서는 우선 사람을 번제물로 태운 것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방 종교의 인신 제사를 극도로 경계하셨으며 레위기 27장을 봐도 인신 제사를 철저하게 금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태운 번제물을 향기로운 제사로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렇기에, 친구들과 함께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처녀로 지내는 것을 애곡했다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남자를 알지 못하고 결혼하지 않고 평생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 바쳐진 자로 살았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현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은 이해가 안 될 수가 있습니다. 아니 뭐 결혼안하고 혼자 평생 사는게 이렇게 애곡할 일일까…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히브리 여인들에게 인생에 두 가지 큰 슬픔이 있는데, 하나는 시집을 못가는 슬픔이고, 또 하나는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게 가장 슬픔입니다. 더군다가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데릴 사위를 통해서라도 어떻게 가문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지만, 입다의 집안은 이제 대가 끊기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의 딸이 제물로 드려지듯, 그 평생의 삶이 바쳐진 자의 인생을 처녀로 살게 되었다는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입다가 경솔하게 세상 문화와 이방 종교 가치에 물들어서 하나님과 협상하려 하고 거래를 하려 했던 그 잘못된 서원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이 되었든 간에 입다의 딸은 그의 인생이 아버지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희생된 불쌍한 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승리를 거래하려 했고 협상을 하려 했던 그 마음의 참담함 결과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협상하거나 통 큰 거래를 해서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임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그 하나님 중심의 삶, 그 분에게 꼭 붙어 있는 하나님의 의존성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전적인 선물의 결과임을 잊지 마십시오.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입다의 모습임을 잊지 말고 나의 생각과 나의 결정하는 방법을 주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살아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릭하세요. 오늘 말씀은 드디어 사사 입다가 암몬군대와 싸우기 직전, 이제 곧 결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죠.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여서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셨습니다. 사사 옷니엘도, 기드온도 전쟁에 나갈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그들이 적들을 무찌르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자신에게 임한 것을 입다도 분명히 알았을 겁니다. 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이 나와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체험했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붙들고 친히 싸우시는 주님 붙들고 하나님을 뒤따라 나가 영적 전쟁을 하면 되는데 입다는 어떻게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합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는 일을 하는데 바로 하나님과 협상을 하듯이 끔직한 서원을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면 내가 승리 이후 첫 번째 영접하는 자를 태워서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것이죠. 그냥 서원이 아니라 끔찍하고도 극단적인 서원입니다.
왜 입다는 이런 말도 안되는 서원을 하게 되는가? 아마도 입다가 그 인생을 살면서 가져왔던 상처와 아픔, 서자로써의 힘들었던 삶의 그늘에서 그 원인을 좀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신의 약점이 있고 집에서 쫓겨 났던 아픔, 기댈 때 없는 사람들이 모여 야인으로 살아온 입다에게 유일하게 지금 기회가 찾아왔고 이 전쟁을 무조건 잊어야 한다는 그 압박과 책임이 너무 컸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그 절실하게 승리가 필요하니까 그 승리의 절실함을 위해서 그가 사람들에게 했던 협상이라는 방법을 하나님께도 쓰는 겁니다. 입다는 집에서 쫓겨난 후 어려워지니까 찾아온 이스라엘 장로들과도 협상을 하면서 말로 정확하게 주고 받을 것을 미리 얘기하죠. 암몬 자손과 싸울 때도 그냥 먼저 나가서 싸우는 게 아니라 먼저 협상을 하지요. 말로 정확하게 모든 것들을 다 깔아 놓는 겁니다. 입다는 큰 용사로서 전쟁만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지략이 있었던 협상의 달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입다가 그렇게 사람들에게 썼던 협상가로써의 전략을 하나님에게도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겁니다. 입다의 서원이란 뭐냐하면, 내가 이만큼 통 큰 것을 걸 테니까, 하나님도 나에게 큰 것을 걸어서 나에게 승리를 주시라고 거래를 하고 협상을 하는 겁니다. 통큰 협상, 통큰 거래를 통하여 큰 승리를 하나님을 통해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통큰 거래를 앞에 두고 협상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특별히 여기서 주목해야 되는 것은 입다가 하나님을 협상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제안한 통큰 거래의 내용인 사람을 번제로 드리는 것입니다. 신명기 12장 31절 같은데 보면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사람을 바치는 것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고 그것을 가증한 행위로 금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입다는 하나님이 금지한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이것을 통큰 협상의 도구로 하나님 앞에 사용하려고 했는가? 입다의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는 이 생각 자체가 어디서부터 왔냐 하면 이방 종교에 물든 생각에서 왔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당시에 모압과 같은 가나안 땅의 종교에서 많이 했던 수법이 자녀들을 번제로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신을 내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아이를 드리는 게 가장 효과가 있다 믿어서 아이를 끔찍하게 번제로 드린 일들이 종종 있어 왔습니다. 열왕기하 3장 26절과 27절을 보면 모압왕이 자신의 그 몰려있는 전세를 역전 시키기 위해 왕위에 오를 왕자를 번제로 드리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큰 위기 가운데 극단의 끔찍한 사람의 번제를 드림으로 타개 하려 하고 우상신과 협상하려 하는 이방 종교들이 있었습니다. 입다는 이런 가나안 종교와 이방 사람들의 가치관에 너무나 익숙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승리해야 되는 이 전쟁을 위해 여호와의 영이 임하였으니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나아가는 영적 전쟁의 원리 대신,하나님에게 인간적으로 통큰 거래를 하려 하고 협상을 하려고 끔찍한 서원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성경적이지도 않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방법이고, 이방 종교의 방법으로 하나님 하고 거래하려는 하는 시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입다에게 큰 승리를 허락하셔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전쟁에서 큰 승리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잘 말씀을 읽어보면 압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보다는 입다의 실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말씀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본인의 잘못된 생각과 가나안 종교의 영향에 물들었던 입다는 하나님과 통 큰 거래를 한답시고 이런 말도 안되는 서원을 가지고 하나님하고 거래를 시도한 것을 부각하는 것이지요.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 하나님을 협상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이 입다의 모습은 철저하게 가나안의 문화와 우상에 물들어 버린 입다의 생각에서 나온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입다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전히 세상 문화와 가치에 철저하게 길들여지고 물드는 삶이 내 행동과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자각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해서도 아니고 내가 하나님과 뭔가 통 큰 거래를 해서 아닙니다. 하나님은 협상의 대상도 통큰 거래의 대상도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무릎꿇고 경배하고 하나님을 따라 갈 일만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사기 11장은 유명한 사사 입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사 입다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의 영적인 분별력과 하나님의 큰 은혜를 주시기를 원합니다. 먼저 사사기 11장 말씀은 입다의 출생 배경과 그 아픔과 상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입다는 “큰 용사,” 전쟁에 앞서 싸울 수 있는 용맹스러운 장수였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첩의 아들, 서자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비멜렉과 출신 배경이 굉장히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집안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았던 서자, 출신으로는 출세도 집안에서 유업도 받을 수 없었던 태생적 아픔을 가지고 있었던 자가 입다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이런 출신적 약점을 알고 먼저 선수를 쳤죠. 어머니 아들들인 그 모든 왕자들을 한 번에 다 죽여버리고 끔찍하게 쿠테타를 일으켜 본인이 왕의 노릇을 하게 되는데, 입다에게는 정반대로 집안에서 먼저 선수를 치게 됩니다. 집안에 다른 아들들이 너는 서자 출신이니 우리집 사람 아니라며 입다를 쫓아낸 것입니다. 깨진 가정의 아픔과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 자란 아비멜렉의 모습도 참 안타까운 일이고, 입다의 모습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정 안에 하나님께서 질서를 주시고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주님을 중심에 두고 한 몸을 이루며 살라는 것이 하나님 뜻인데, 깨진 인간은 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벗어나 이렇게 잘못된 가정을 통해 상처를 계속 만들어내고 그 상처들은 결국 누가 받냐하면 자녀들이 다 받는다는 거예요. 성경이 이런 부분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이 안타까운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벗어난 인간들이 당하는 결과와 그 대가가 무엇인가를 가감 없이 우리에게 증언하며 경고하는 것입니다. 태생적으로 아픔과 상처를 품고 태어나며,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자라게 되는 이 아픔의 사이클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의 1세대가 되기 원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1세대가 되어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 안타까운 아픔과 상처들을 되물림 하지 않고 우리 자녀들이 축복 가운데 주님의 창조 질서 안에 풍성히 잘 자라도록 그들을 키우고 양육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그래서 입다는 그렇게 상처와 아픔 가운데 집에서 쫓겨남을 당하죠. 그러고 나니 “잡류”가 그에게 몰려와서 입다와 함께 출입했다고 증언합니다. 성경의 번역이 참 중요한데 “잡류”라는 번역은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번역이란 생각이 듭니다. “잡류”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량배, 깡패, 폭력을 사용하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브리 원어의 일차적인 의미는 그런 깡패나 불량배를 의지하는게 아니라, “힘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 “밑바닥 인생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기댈 곳이 아무것도 없고 빽이 아무것도 없고 이 세상에서 밟히면 밟히는 사람들, 그래서 “잡류”라는 말보다는 “세상에 기델데 없는 사람들”이 입다에게 몰려와 그와 함께 공동체를 만들고 따라다니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아둘람 굴에 모였던 사람들 그 당시에 힘없고 빽 없고 상처와 아픔이 가득한 민초들이 다 거기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결국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가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중요한 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한 것과 비슷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여기서 입다가 서자라는 이유로 집에서 쫓겨나고 아무런 상속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그 도망자의 신세가 됬는데,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없고 기댈데 없는 사람들이 입다 에게 모여들기 시작한 겁니다. 입다를 통하여 이 세상에 깨지고 아픈 자녀들, 상처로 고통당하는 수 많은 자녀들이 있음을 압니다. 그 자녀들의 깨지고 아픈 상처를 바라보며 우리 부모세대가 하나님의 원리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지 못했음을 회개하며, 늘 주님 앞에 창조의 원리와 질서를 붙들고 주님이 허락하신 자녀를 잘 키우며 양육하기를 기도하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 상처와 아픔 가득한 입다를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아니하시며 사용하시며 힘들고 어렵고 아픈 자들이 모여들게 하심으로 그를 사용하시는 놀라운 섭리를 바라보며 내 안에 있는 상처와 아픔과 어려움이 나에게 쓴 뿌리가 되지 않고 독이 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품고 섬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기적을 간구하고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와 아픔 자체에 머무르지 않으며 그 상처와 아픔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귀한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중요한 고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기 위해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을 속성으로 이해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우리를 언제나 사랑하시는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 이런 고백들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이 하나님의 속성과 맞지 않고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런 큰 의문을 갖는 하나님의 모습이 오늘 말씀의 등장을 합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는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신 장면이죠. 언제나 죄를 회개하고 찾아오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고 계신 자비로운 하나님 이신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를 다시는 구원하지 아니하리라…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다시 구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실까….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속성과는 맞지 않고 부딛히는 부분이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의 배경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들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부모로서 가끔씩은 자녀들에게 충격 요법을 줄 때가 있습니다. 하다하다 안되면 예전 어른들은 자녀들에게 충격 요법을 쓰지요. “야 너 그럴꺼면 집에서 나가라.” 그 말은 부모가 자녀가 진짜 쫓아내고 싶어서 그러는게 아니라 지금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걸 통해 자녀는 아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구나 라는 걸 깨닫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빌고 잘못을 구하는 것을 부모는 원하는 것이지, “그럴꺼면 집에서 나가라” 그랬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전 집에서 나가야 되겠군요…그러고 뚜벅뚜벅 나가면 부모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비슷한 충격요법을 쓰시는 겁니다. 더이상 너희를 구원하지 않겠다…는 충격 요법을 통해 이제 너희가 갈때까지 간 끝까지 가서 더 이상 무너질 수 없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경고하시는 말씀이죠. 완전수이자 충만한 수인 7까지 등장하며 성경은 의도적으로 우상에 빠질대로 빠져 완전히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가 되 버린 게 이스라엘 백성의 지금 영적으로 무너진 상태라는 거예요. 그래서 돌아 오면 바로 용서해주시는 그 패턴을 넘어서 강한 충격 요법을 사용하시는 거죠.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마음에 큰 근심을 가져오는 백성이 되 버린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과 달리 “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이 부분만 딱 떼서 탁상 공론과 같이 하나님의 속성과 너무 다르다…이해 안된다…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갈때까지 다 간 백성들, 이제 충만하게 이 우상숭배가 갈때까지 갔으니까 이제 내가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그 하나님 마음에 본심은 뭡니까? 이제 너희는 정신차리고 돌아 와야 돼. 이번에 안 돌아오면 큰일 나는 일이야…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소망이 있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충격 요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얼마나 이 마음을 이미 상황을 안타깝고도 심각하게 바라보고 계신가를 발견해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그 놀라운 경고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이 확 들었습니다. 너희를 다시는 구원 하지 않겠다는 그 하나님의 경고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은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옵니다. 우리가 범죄 하였다고 회개하며 자기 가운데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다시 섬겼습니다. 늘 이 세상을 살다보면 기준이 흔들리고 중심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하는 성도들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돌리고 멀리 떠나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세상에 빠져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근심하게 합니다. 그게 바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없고 그게 이 시대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은 경고하는 것이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근심하게 만드는 성도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충격 요법을 사용해야 하는 백성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기쁨을 드리지는 못할 망정 하나님의 마음에 큰 근심을 주는 자가 되지 않기 원합니다. 주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며 내 앞에 모든 우상들을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기준에 다시 한번 조율되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아비멜렉 후에 등장하는 두 사사, 돌라와 야일에 대해서 증언합니다. 소사사라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작아서가 아니라 사사기에 등장하는 영적 순환 패턴을 모두 증언하지 않는 사사들을 소사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사명은 결코 작지 않았고 그 짧은 말씀 가운데도 우리는 묵직한 영적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번째 사사인 돌라의 사역은 딱 한 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돌라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니라…” 성경에는 사사 돌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비멜렉이 죽은 후, 그 상처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회복하게 하는 평화의 밑그림을 그렸을 것으로 해석합니다. 아비멜렉 시대는 연산군과 같은 공포 정치의 시대,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이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비극적으로 세겜 사람들이 불타 죽고 아비멜렉도 맷돌에 맞아 죽는 그런 피비린내 나는 공포와 깨진 마음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사사 돌라는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겁니다. 그 공포 정치가 끝나고 나서 깨진 마음 모든 것이 무너진 그 마음들 전쟁과 같이 상처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그들을 품어 지며 그들은 하나 되게 만든 것입니다. 이 치유와 회복이 돌라의 놀라운 사명이었고 그 모든 일을 한 줄로 요약해 이스라엘을 구원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23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안을 누린 다음 사사인 야일이 등장합니다. 사사 야일의 사역 또한 한 절로 묵직하게 증언됩니다. 어린 나귀를 탔다는 것은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작은 차를 타고 다닌 겁니다. 겸손하게 섬기는 마음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그 성읍들을 맡겼다는 말씀을 통해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기억하며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그 신앙을 제대로 전수하며 마음에 새기는 일에 특별히 힘을 쏟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사 야일은 22년 동안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자녀들에게, 백성들에게 그것을 전수하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사 야일이 죽은 후에,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무너집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단순히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고 무너졌다…이렇게만 증언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우상 신들에게 무너지고,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다 빼앗겨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등돌리며 섬기던 7가지의 다양한 우상들과 가나안 신들이 등장시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우상에 완전히 빠진 것을 강조합니다. 히브리 완전수인 7을 등장시키면서,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완전히 우상에 젖어 되게 된거죠. 가나안 땅 우상들에게 완전히 무너지며, 완전히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게 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들과 눈에 보이는 신들을 좇아 가면 지금 행복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며 쫓아가는 것이죠. 스스로 문을 열고 마음을 열고 우상에게 모든 것에 정신을 팔려 스스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반복된 불순종이 완전히 늪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영적 원리가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을 들어 그들을 치시는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억압과 곤고 가운데 신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떠나면 더 행복하고 더 잘 살 것 같고 이 세상에서 더 풍요로울 것 같았는데 그들에게 찾아온 것은 억압이었고, 더 심각한 곤고 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빠지며 어둠에 빠져 갈 때 나타나는 영적 결과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유로와 보이고 겉으로 보기엔 풍요로 하고 있는데 속사람과 내면은 공허하고 힘들고 피폐하며 억압과 곤고라 찾아오며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또다시 무너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손가락질 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이 우리 가운데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또다시 하나님에게서 등 돌리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또다시 이 세상에 우상들을 추종하는 그 부끄러운 패턴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선명하게 믿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 보이지 않는 죽음 이후의 영생이 나에게 실체로 다가와, 그 보이지 않는 곳에 나의 시선과 마음을 두며 망각하지 않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잊지 않고, 이 패턴을 벗어나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아비멜렉이 서자의 아들로써 정당하지 않은 방법, 끔찍한 방법으로 69명의 왕자들을 한 날에 한 바위에서 모두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세겜 사람들을 동원해서 폭력과 패거리 정치를 이용하여 왕 같은 행세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결코 좌시하지 않고 그것을 못본체 하지 않으셨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폭력과 우상숭배와 맞잡은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을 하나님이 어떻게 심판하시는가가 오늘 말씀을 통해 결론적인 말씀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서로 필요에 의해 손은 잡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 배신하면서 칼을 맞댄 사람들, 아비멜렉이 자기를 배신한 세겜 사람들을 얼마나 잔인하게 죽이고 공포정치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망대에 있는 1000명의 남녀를 밑에서 불질러 모두 불태워 죽였습니다.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냥 인정사정없이, 끔찍하게 죽이는 겁니다. 꼭 조선시대의 연산군과 같이 공포 정치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세겜사람들을 처참하게 짓밟고 불태워 죽인 그 아비멜렉 또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쳐 두개골이 깨져 죽게 됩니다. 그리고도 자기 마지막에 그 두개골의 깨져 죽으면서도 여자한테 죽었다는 소문 듣기 싫어 다른 청년을 통하여 자기를 죽여 달라고 부탁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비극적으로 죽게 되는 것이죠. 그냥 보이는 눈으로 봤을 때는 아비멜렉이 정말 운 없게, 저 위에서 어떤 여자가 던진 맷돌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다…이렇게 끝날 수 있는데 오늘 말씀 사사기는 그렇게 아비멜렉이 비참하게 죽은 것도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손에 비참하게 죽어간 것도 우연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이죠. 아비멜렉에게서 나온 분노의 불이 세겜 사람들을 태웠고 그래서 세겜 사람들이 망대에서 불에 타서 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세겜 사람에게서 나온 불이 아비멜렉을 태워 맷돌로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이 행한 악행을 세겜 사람들을 통하여 심판 하셨고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아비멜렉을 통하여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결국은 마지막에 이런 끔찍한 비극으로 끝나게 만든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판하신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는 것, 그게 결론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만 살아가는 영적 암흑기를 살아가는 사사시대의 사람들에게,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자기와 왕이 되기 위해 형제들을 모두 한 날에 죽이는 악을 범했고 그 결과 자신도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심판의 도구가 되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 망각할지 모르나, 실제로 사사 시대 에도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에 언제나 이루어져 가고 있음을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사 시대에 같은 영적 암흑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살아가야 될 중요한 삶의 가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온전히 받는 백성이 되는 것임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아비멜렉이 있습니다 정말 말도 안되는 세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변환경을 봤을 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거와 같이 느껴지고 보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수많은 부조리와 비리 들과 문제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지금 당장 고치고 해결하시지 않고, 당장 심판 하지 않으심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며 신음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판치는 것 같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이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의 공의와 다스리심,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믿는 믿음을 갖기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악행하고 잘못한 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을 심판 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앞에서 행한 악한 것에 대해서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그것을 지나가지 않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내 눈에 지금 그것이 보이지 아니할 지라도 내 느낌에 그것이 지금 일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을 지라도 이 말씀을 믿으며 사사 시대와 같은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심판을 믿으며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을 끝까지 믿는 믿음의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첩의 아들인 서자 아비멜렉이 왕자 70 명 중에 한 명을 빼고 모두를 하루에 한 바위에서 다 죽여버리는 왕자의 난을 벌이고 나서 왕이 됩니다. 그 끔찍한 피의 살인에서 유일하게 피해서 목숨을 건진 왕자가 요담인데 남아있는 유일한 왕자로서 그리심 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전하는 이야기가 오늘 말씀입니다. 그리심산은 에발산과 더불어 축복과 저주를 얘기했던 대표적 산인에 그 곳에 올라가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것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지요. 정통성을 가지고 옳은 방법으로 왕이 되지 않고 끔찍한 살상과 우상숭배 그리고 지역 감정을 조장해 왕자의 난을 통해 왕이 된 아비멜렉을 풍자합니다.
나무들이 왕을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를 찾아가서 왕이 되어달라 부탁합니다. 그런데 세 나무들이 모두 거절을 합니다. 세 나무 모두 왕이 되는 일을 “나무들 위에 우쭐댄다.” 라는 의미심장한 풍자를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긴 사명을 버리고 나무들 위에 올라가 우쭐대지 않겠다는 겁니다. 오직 왕이 되실 분은 하나님 인데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절하고 백성들이 자꾸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왕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묘사하는 겁니다. 그들의 왕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여호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사람의 왕을 쫓아다니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겜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신랄하게 비꼬는 겁니다. 그렇게 왕되는 것을 거절하는게 정상적인 나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정상적인 나무인 가시나무는 이 요청을 덥석 받아들입니다. 사람들 위에 우쭐대고 싶은 것이지요. 그리고는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고 말합니다. 나무들 위에 우쭐거리면서 한 약속이 너희는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거예요. 가시나무는 그늘이 없습니다. 그늘도 없는데 내 그늘에 와서 피하라….이건 말도 안되는 일이지요. 백성들을 호도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것이죠. 그 다음 더 놀라운 것은 피하지 아니하면 그게 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라 협박합니다. 아비멜렉으로 풍자된 가시나무가 바로 우상숭배와 폭력에 기반한 잘못된 권력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지금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웠는데 그 아비멜렉은 왕을 세우는 게 바로 뭐냐면 그늘도 없는 가시나무 에게 와서 그늘로 피한다는 잘못된 약속이고, 이렇게 불이 나와서 너희를 다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모두가 같이 망하는 길이라는 거예요. 더 나아가 얼마가지 않아 서로가 서로에게 불을 던져서 서로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경고합니다. 폭력을 기반한 방법으로 잘못된 방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힘으로 뺏은 권력은 그 안에 힘으로 서로 싸우다가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죽이고 서로 망하게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불의한 이익과 폭력, 피 흘림을 가지고 나온 그 불법적 연대는 반드시 얼마 지나지 않아 깨지게 된다 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이 시간 우리가 깨어 분별해야 할 속임수가 무엇이며 잘못된 말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원합니다. 가시 나무는 그늘이 없는데 그 그늘에 와서 피하라는 그 잘못된 허황 된 약속을 진짜라고 믿고 착각하며 추종하는 것이죠. 무지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그 영적인 은혜를 떠나게 되면 말도 안되는 이 속임수에 빠지게 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영적으로 무지 해지는 자들에 특징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불이 나와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며 서로 피를 흘리며 서로 지옥을 경험하며 함께 망하는 길 이것이 바로 사단이 조장하는 방법이며 사단이 믿음의 백성들을 흔드는 방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 위에 우쭐거리려 하지 말고, 우매한 무지한 모든 것들을 버려버리고 주님이 주신 지혜를 붙들고 늘 주님이 주시는 방법 가운데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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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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