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이 만약에 편지를 쓴다면 마지막에 어떤 내용을 쓰기 원하십니까? 대부분 좋은 이야기를 쓰고 결말을 맺기를 원 할 겁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가장 마지막의 결론은 “나 좀 그만 괴롭히라.” 였습니다. 나를 그만 괴롭게 하라는 것이 그의 결론일 정도로 사도바울은 참 많이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오직 주의 사랑에 매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사도바울은 복음을 향해 질주할 때마다 주변에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참 많았던 것입니다. 유명해지면 유명해질수록 주변에서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소위 말하는 유명한 사람 치고 주변에 악플과 공격과 안티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유명해지면 당연히 지고 가는 십자가가 되듯 조금 이름이 알려져 있으면 그 사람을 공격하고 괴롭게 하는 일이 참 많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마지막에 그렇게 강력하게 표현할 정도로 그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괴롭게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사도권을 가지고 괴롭혔습니다. 사도바울이 정식 사도가 아니라는 의심과 공격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한 자가 아니니까 진짜 사도가 아니라는 사도권을 가지고 흔들고 공격하는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과거를 들먹이면서 힘들게 하는 괴롭힘이 있었습니다. 너의 과거는 살인자 아니야… 스데반 집사를 죽인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무슨 네가 사도냐…하는 이런 공격과 괴롭힘이 계속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육체의 가시로 인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도 설교를 지속하지 못할 정도로 힘든 그 육체의 가시로 시비를 붙이고 괴롭게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괴롭힘의 이유를 훨씬 더 넘어서는 본질적인 괴로움은 사도 바울이 전한 순전한 복음에 계속 물타기를 시도하며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괴로움이었습니다. 이 괴로움을 사도 바울은 피하지 않고 가감없이 그대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이런 괴로움이 있었는데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런 괴로움이 없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복음을 들고 앞서 나아가고 제대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려 앞서 나가 면 항상 이런 괴롭힘과 공격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진 그 사람들을 바라보는 괴로움을 바라보면서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건 바로 할례나 무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 받은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구원의 외적 증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적 증거가 중요하다는 것을 결론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다른 복음과 유사 복음에 빠진 사람들은 구원받은 증거로서 몸에 흔적인 할례를 외적 증거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복음을 믿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너에게는 외적 증거로 몸에 흔적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몸의 흔적인 외적 증거가 바로 할례이기에, 그 할례의 외적 증거를 통해 너는 구원받은 것을 확증할 수 있다면서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계속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외침은 분명합니다. 겉으로 육체의 몸에 흔적을 받는 할례나 할례 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외적 증거가 핵심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직 내적 증거인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이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남이자 거듭남입니다. 이 내적 증거가 구원받은 증거이자 내 마음의 할례 받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겉에 몸의 흔적은 하나의 그냥 증거일 뿐이지 구원의 절대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적인 증거 없이 단순히 내 몸에 흔적으로 할례가 있느냐는 것으로 구원의 유무를 삼으려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 분명한 내적 확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이지, 그 내적 증거가 없이 외적 증거인 몸의 흔적을 찾게 되면 결국은 무너지고 다른 복음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가 우리에게 중요하지만 내가 그리스도께 내가 진정한 고백이 없는 세례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찬도, 어떤 특별한 체험도 내적인 증거가 없는 외적 증거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의 본질을 붙들고 살아간다는 것은 내적 증거인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내가 분명히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은 바로 내 몸에는 예수님의 흔적을,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담고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너희 몸에 할례의 흔적을 찾지 말고 뭐를 찾아야 된다는 겁니까? 예수의 흔적을 찾아야 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은 그리스 원어로 스티그마…라고 합니다. 내 몸에 예수님의 스티그마,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스티그마, 흔적이란 말은 그 당시 로마 시대에 짐승이나 노예는 불도장 같은 낙인을 찍어 소유권을 표현했습니다. 그 도장을 보면 이 종이 누구 소유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그게 바로 스티그마, 흔적입니다.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란 말은 예수 소속으로의 불도장이 찍힌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도장을 보면서 누구든지 저 사람은 예수 소속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드마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굉장히 괴로웠어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복음을 전한다는 것 때문에 그에게 온 것은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고 억울함을 당하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도바울은 그 괴로움을 내가 예수님의 영광의 흔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죠. 나를 위해 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내가 받는 영광의 상처다….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괴로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멈추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흔적인 스티그마를 품고 살아가는 예수 소속의 사람으로 오늘도 더 선명하게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의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신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내 삶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 주시는 그 분명한 흔적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 예수님 소속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내가 예수님 소속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영광의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으로 말미암아 찾아오는 괴로움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내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영광의 상처, 스티그마임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이웃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새생명을 세우기 위해이 시간 사랑의 아픔과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거구나….고백하며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니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살아가는 방식임을 믿으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그 십자가 능력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럴 때 내 심령에 뭐가 담기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것입니다. 내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라는 것은 죄를 마음대로 짓는 자유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니라 내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자유가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서 오직 십자가에 매어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자유입니다. 내 몸에 새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며, 내가 예수님 소속이고, 오직 십자가에 매어 살아가는 예수님의 종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심령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담기는 겁니다. 바라기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는 내적 증거가 분명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은 갈라디아서의 결론 말씀으로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 말씀을 마무리 짓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큰 글자로 쓴다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사도 바울의 눈이 굉장히 나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도 눈이 굉장히 나쁘셔서 설교문 글씨를 36 포인트로 쓰십니다. 잘 안 보니까 그렇게 설교문 글씨가 큼지막 한 겁니다. 동시에 큰 글자로 썼다는 것은 그 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마음에 새기기 원한다는 뜻일 겁니다. 그렇게 큰 글자로 강조하며 마음에 새기기 원하는 내용은 너의 인생에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큰 글자로 쓰면서까지 강조하는 중요한 도전은 내 인생에 내세우는 것과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자랑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사실 우리는 참 자랑을 하고 싶어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의 자랑하는 것이 결국 나의 우선순위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번에 선교 때 제가 들었던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었는데 한국에는 가만히 있다가 고속도로가 생겨서 혹은 아파트가 생겨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농사를 하러 가는데 농기구를 싣고 벤츠를 타고 간다고 합니다. 농기구를 벤츠에 싣고 농사 지러 가면서 그렇게 차를 자랑하고 싶은 겁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자랑거리를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그런 차 만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집을 자랑하기도 하고, 내가 가진 어떤 것을 자랑하기도 하고, 심지어 내가 이룬 어떤 업적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그게 안되면 자식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게 우리 인생입니다. 내가 내세우는 것이 나의 기념비이고, 내가 이룬 어떤 자랑이 되는 인생은 신앙 생활에서도 내가 열심히 해서, 공로를 세우려 하는 공로주의로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이루거나 남긴 어떤 것이 내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 그걸 내세우고 자랑하기 쉬운 겁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에 일어나는 안타까운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만을 붙들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회심해 교회 안에 들어왔는데 억지로 할례 받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들어온 회심자들에게 기존의 사람들이 자꾸 껍데기를 강조하는 겁니다. 너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구원을 완전히 받으려면 외적인 증거가 있어야 하기에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는 겁니다. 네가 구원받은 것을 십자가 복음에서 증거를 찾는 대신 외적으로 증거가 있어야 된다면서 눈에 보이는 소위 말하는 육체의 할례가 있어야 구원받은 게 확실하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외적 증거와 내 행위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에서 뭐를 자랑하게 되는가 하면 내가 한 일을 내세우고 자랑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오늘 말씀에서는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구원에 내가 무언가를 더해서 나의 기념비를 세우려 하는 자들이라는 것이죠.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외적인 증거만 찾는 자들입니다.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망각한 행위를 칭하는 말입니다. 할례에서 중요한 본질은 마음의 할례입니다. 마음의 할례로 내가 모든 죄와 불순물을 늘 잘라내는 심정으로 주님을 바라보면서 육체의 할례를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마음의 할례는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의 정신은 망각한 채, 껍데기인 할례 자체가 증거가 되어버리니까, 결국 그 삶은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는 껍데기를 자랑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이걸 통하여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의 의를 강화하며 내가 한 일과 흔적이 구원의 증거가 돼 버리는 겁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무력화시키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의 놀라운 고백이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됩니다. 인생을 돌아보고 나니까 나에게는 내세울 것이, 남는 게 무엇 밖에 없다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내 삶에 내세울 것과 자랑할 것이 오직 십자가가 되는 인생입니다. 내 평생을 뒤돌아 봤을 때 내가 내세우고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는 것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자가 제대로 신앙 생활 한 성도라는 겁니다. 나의 의가 아니라, 내가 한 어떤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피 뭍은 십자가 복음만이 있는 삶, 그 삶이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자라는 것을 우리에게 결론으로 주고 있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마음에 담기게 됩니다. 피라는 것은 생명이고 희생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결국 내가 받아야 될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지시고 죽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마음에 아로 새기는 겁니다. 내가 달려 죽어야 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십자가 앞에 감춰진 하나님의 능력과 뜻을 발견하는 겁니다. 나는 십자가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구나….깨달으면 바로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인생,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큰 글씨로 강조하는 핵심 질문, 내 인생에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무엇인가….마음 속에 깊이 질문해 보기 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의 자랑거리가 되면 결국 본질에서 벗어나게 됨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평생 주일 성수했다, 새벽기도 했다…평생 성가대 하고 사역을 감당했다, 나는 선교와 전도에 공로가 있다…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이런 것들이 은혜의 수단이 아닌 나에게 내세울 것이 되고 자랑거리가 된다면 그것이 십자가를 무력하게 만들고 복음의 본질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큰 글씨를 쓰면서 강조하는 겁니다. 너의 자랑거리가 결국 너의 신앙의 현주소라는 것입니다. 평생 신앙생활 하면서 내세울 게 나 밖에 없으면, 내가 한 일밖에 없으면 결국 그 인생은 육체를 자랑하려는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의 결론에 내가 무엇을 내세우고 무엇을 자랑하는가? 이 질문에 우리 모두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이 터져 나오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자입니다. 내가 정말 내세울 것은, 내가 정말 자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는 인생이 정말 복된 인생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인생의 끝에 내세우로 자랑하는 것이 내가 이룬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해온 업적이 아니라, 십자가 외에 하나도 없는 인생, 오직 십자가 은혜만 내세우로 자랑하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은 성도로서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는 무언가를 계속 심고 거두는 것으로, 다른 말로 표현하면 선택과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선택이고, 그 선택으로 말미암아 결국 책임을 지는 겁니다. 오늘 새벽기도 또한 자발적인 선택으로 이 자리에 나오셨고, 그 선택을 통해 오늘도 무언가를 심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정의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흔히 생각합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 자유를 제한 받는다 착각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깨진 마음을 가진 우리는 대부분 내가 진 짐을 서로 넘기 위해 자유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이기적 본성은 끊임없이 주신 자유를 나 만을 위해, 내 육체의 소욕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아가기 위해 남용하고 내 짐을 타인에게 떠넘기기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내 마음이 타락하고 깨져 있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의 삶은 결국 내 육신의 소욕을 만족하기 위한 방종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자유를 내가 원하는 대로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 계속 사용하면 결국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주신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고, 내 육신의 소욕을 만족하기 위한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는 억지로 끌려가 죽으신 게 아니라, 주신 자유를 사용하셔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가셔서 나를 위해 피를 쏟으시며 고난 당해 죽으시며 주신 자유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통과해 주신 자유를 내 육신을 위해 심지 않고 영의 일을 위해, 주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는 자발적 선택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신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가 아니라 예수님 마음에 맞추어 살아가는 자유이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으로 나아가는 자유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죄를 마음대로 짓는 자유가 아니라 주신 자유로 죄를 짓지 않는 자유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통하여 육신의 일이 아닌 영의 일을 심는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자유를 통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고 내 육체 소욕을 거슬리며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심을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낙심하는 마음과 포기하려는 마음입니다. 몇 번 하다 보면 자꾸 마음에 낙심이 되는 겁니다. 왜 낙심이 되냐 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며 자기의 육신의 소욕을 위해서 자유를 사용하는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데, 왜 나만 늘 스스로 자유를 제한하고 사는가…다른 사람들은 죄 마음대로 짓는데 왜 나는 늘 죄를 짓지 않는 자유로 나아가는가….여기에 낙심이 자꾸 생긴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지려 하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자꾸 자기의 짐을 떠넘기는 자들이 나오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호의를 베푸는데, 그 호의를 권리로 여기며 자꾸 짐을 떠넘기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마음에 좋은 일 하다가 내가 선을 행하다가 자꾸 낙심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겁니다. 주님 앞에 열심히 헌신하는 자들에게 늘 찾아오는 일이 낙심과 포기입니다. 그럴 때마다 오늘 말씀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게 만들고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미혹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면서 낙심할 때 포기하지 않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로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계속 씨를 뿌려야 하는 겁니다. 주신 자유를 내가 썩어질 육신을 위해 심는가, 아니면 영원한 영의 일을 위해 심는가, 내 마음대로 살기 위해 심는가, 주의 영광과 주님의 몸 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심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점검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낙심할 일이 생길 때마다, 이건 포기하지 말라는 사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계속 그 페달을 밟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통하여 성령을 위하여 심으며 영생을 거두는 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은 주신 자유를 통하여 무언가를 심는 자들입니다. 오늘도 어떤 자유의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그 선택에 대한 결과와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심는 그 자유를 통해 언젠가는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주신 자유를 육신의 소욕을 위해,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을 위해 사용한다면 결국 육체를 위해 썩어질 것 만을 거둘 것입니다. 반면에 주신 자유를 공동체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며 내 마음대로 살아갈 자유를 제한하고 살아간다며 결국 영생을 거두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주신 자유로 썩어질 것을 뿌리는데 내 자유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을 위해 사용하는 대신, 썩지 않을 것을 심는데 잘 사용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주신 자유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심는 자가 되는 선택을 하는 겁니다. 스스로 속이지 않고 착각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신 자유로 썩지 않는 영원한 것을 심는 사명에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나아가십시오. 결국 때가 되면 거두게 될 것을 믿으며 끝까지 주님 앞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그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은 매우 강력하고 우리에게 놀라운 하늘의 능력이 임하게 하지만 동시에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게 되면 나를 망치고 주변 사람들을 망치는 방종으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이 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주제를 무겁게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는 나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죄를 마음대로 짓기 위한 자유,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한 자유는 결국 육체의 소욕을 만족하는 것에 머무는 방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으로 살지 않고 성령 안에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삶, 육체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성령 안에서 자유함으로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 기쁨 되는 삶을 살아갈까, 어떻게 하면 성령 하나님과 발을 맞춰 가시는 그 길을 함께 따라갈까…를 고민하는 자유입니다. 성령 하나님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주도권을 기쁨으로 드리는 자유, 그리스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자유, 타인을 위해 내 자유를 스스로 제한할 수 있는 자유가 진정한 영적 자유함임을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부분의 참 자유에 대해서 선명하게 증언하는데, 첫 번째는 서로에 대한 자유요, 두 번째는 각각에 대한 자유입니다. 서로에 대한 자유라는 것은 바로 타인을 향한 유익을 위해, 공동체를 향한 유익을 위해 나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각각에 대한 자유는 그 자유를 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라는 겁니까? 내 짐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대신 다른 사람의 짐을 서로 지는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과 일맥 상통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향하여 사랑하며 이웃의 짐을 기쁜 마음으로 대신 지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짐을 억지로 져 주는 게 아니라, 종노릇을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종노릇 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서로 타인의 짐을 저주는 그 인생을 살아갈 때 그 가운데 참 자유함이 임하며, 성령 하나님을 통해 하늘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성도의 삶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서로 짐을 지며 살아가면서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랑함으로 살리고 다른 사람을 높여주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서로 그 짐을 함께 감당하는 것, 이게 바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며 사랑으로 서로 짐을 지는 삶입니다. 물론 혼자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혼자 성경 읽고 말씀 보며 기도하면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공동체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도록 주님이 이끄시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서로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짐을 져주는 것 통해 간접적으로 깨닫는 것을 실천하는 공간으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서로의 짐을 자원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져주며 함께 그 자리에 버텨주며 인내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이 세상은 모든 인관관계가 나의 유익과 필요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됩니다. 저 사람들을 만나면 나에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플러스가 될까 마이너스가 될까를 계속 계산하면서 나에게 유익이 되고 플러스가 될 만한 사람들만 만나려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지혜로운 인간관계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인간 관계는 타인의 유익과 필요를 중심으로 형성되고 발전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은 이웃의 짐을 서로 지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발전되는 겁니다. 나같이 자격 없는 자를 위해 십자가의 짐을 대신 져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억지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 사람된 나임을 알기에 가능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짐을 함께 지며, 서로의 아픔을 같이 지며,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 살아갈 때 그곳에서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누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서로에게 해야 될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는 실천입니다. 두 번째, 각자에 대한 자유함이 있는데, 각기 자기의 짐을 지라는 겁니다. 이웃의 짐을 서로 지려고 하고, 나의 짐은 폐를 끼치지 않도록 각자 지라는 겁니다. 서로 짐을 저주라는 것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 한 명령,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짐을 지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다른 사람이 짐을 져 주니까 얼씨구나 좋다 그러고 내 짐을 떠넘기고 늘 도움을 받는 것을 익숙해 하며 도움 받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자유의 남용이라는 겁니다. 군대에서 행군을 하다 보면 다리가 까지거나 걷기 어려운 상황이 된 군인들을 그 군장을 나눠서 대신 저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내 군장을 대신 저주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정말 고개 숙여 고마워해 되는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는 편하게 가서 잘 됬다고 기뻐하면 뭐가 사라지는 겁니까? 주님이 주셨던 자원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겁니다. 사랑으로 종노릇 타고 사랑으로 짐을 지려는 자발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겁니다. 서로 짐을 지어주는 자발성을 한번에 사그러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호의를 권리로 여기며 착각하지 말고 타인에게 피해가 폐가 되는 인생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가지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체들을 사랑하기 위해 두 가지가 분명히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타인의 짐을 무거운 짐을 같이 지려 하는 자발성, 동시에 나의 짐은 타인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자발성입니다. 나의 짐을 같이 져 달라고 하지 않으면서 나는 나를 감당할 힘을 기르며 타인의 짐은 기쁨으로 맡아 주려는 이 두 자세가 같이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우리가 타인의 짐을 대신 저 줬을 때 가져야 될 생각이라는 겁니다. 내가 어려운 사람의 짐을 대신 지어 주었을 때, 꼭 내가 뭐가 돼서 특별해서 그 일을 하고 내가 정말 힘이 많고 능력이 많아서 너를 불쌍한 마음으로 도와준다고 착각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서로의 짐을 지는 게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 감동을 주셔서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서로의 짐을 지게 된 것임을 잊지 않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이 있습니다. 내가 베풀고 짐을 져주고 도와줬다고 내가 뭔가 된 것처럼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하면 이게 스스로 교만하여 스스로 속이게 됩니다. 스스로 무너지는 비결은 내가 뭔가 된 줄 알고 스스로 교만해지면 나에게서 자격을 찾다가 주님이 주신 자유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착각하지 않도록 늘 확인하고 내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야 합니다. 주님의 몸 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성도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넉넉한 마음으로, 나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고 아주 strict하게 사용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에서 힘들고 어려워서 쓰러져가는 지체들을 바라보며 기쁜 마음으로 서로 짐을 질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도움 받는 것을 심각하게 여기며 나의 짐은 스스로 각자 질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 받는 것을 미안해 하지 않고 일상화 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유를 잃어버리는 삶이고, 타인이 호의를 가지는 베푼 자유함을 사라지게 만드는 민폐의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각각 나의 일을 살펴서 내 선행과 도움 주는 것이 내가 타인보다 낫다는 자기 의와 교만을 강화하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나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냉정하게 타인에 대해서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살아갈 때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임하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가 될 줄 믿습니다. 내 짐은 스스로 각자 지고, 타인의 짐은 서로 나눠지는 삶을 사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삶…내 짐을 내 스스로 질 수 있는 능력과 타인의 짐을 기쁨으로 질 수 있는 능력이 같이 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매일 내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되며, 십자가 정신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육체에 매어 살고 율법에 매어 살아가는 옛적으로 돌아가려는 삶을 매일 못박아야만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지침인데, 공동체에서는 일어나는 부딪힘과 어려움이 있게 됨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내가 그냥 대강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살게 되면 세상과 별로 충돌하고 부딪칠 일이 별로 없습니다. 늘 세상의 흐름이 내 흐름이기 때문에 세상 풍조에, 사람들에게 맞춰 적절하게 살았기 때문에 삶의 갈등이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제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겠다 결단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뚜벅뚜벅 나아간다면 반드시 이 세상과 충돌하고 부딪히며 갈등하는 일들이 생긴다는 겁니다. 나 중심, 눈에 보이는 세상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변화되는 삶, 육체의 소욕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이런 어려움과 충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실천적 도전 과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목할 단어는 “형제들아” 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갈등과 충돌의 문제는 다루기 전에 해야 될 첫 번째는 바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문제들과 갈등을 내 문제로 품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의 문제를 제 삼자, 소위 말하는 나와 상관없는 객체로 바라보며 손가락질만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나와 무관한 자들이 아니고,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이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는 쉽게 나와 무관한 공동체로, 대상화하고 객체화 시키기 쉽습니다. 내가 출석하고 몸 담고 있는 교회와 나를 구별하여, 나와 상관없는 교회와 같이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잊지 말아야 할 건 여러분들 자신이 교회입니다. 교회 건물이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교회라고 끊임없이 배우지 않습니까? 그러면 교회 공동체 안에 드러나는 문제들은 내가 직접적으로 관련되 있지 않을지 모르나, 결국 나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내가 함께 은혜를 구하며 풀어야 되는 문제가 되는 겁니다. 교회와 나를 객체화 하고 대상화해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 문제 있고 어려워하고 범죄한 교회 공동체 안에 형제 자매가 나와 무관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하는 게 바로 “형제들아” 의 선언입니다. 두 번째는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그랬습니다. 여기서 범죄한 일이란 어떤 감옥에 갈 만한 범죄들을 상상할 수 있는데, 그런 범죄에 대한 얘기보다는 옆길로 넘어졌다는 의미가 훨씬 강합니다. 다시 말하면 순전한 복음을 잘 따르다가 다시 옛날 율법으로 돌아가거나 유사 복음에 빠지는 것을 범죄한 일….이라 명하는 겁니다. 예수님 제대로 믿으려 그러다가 신앙생활 한껏 열심히 하다가 다시 잘못된 가르침에 빠져 길로 간 사람들, 육체의 소욕 주도의 삶, 율법 주도의 삶으로 넘어진 사람들이 바로 범죄한 이들입니다. 다른 형제나 자매 범죄한 일을 계속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그것을 심지어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주변에 형제 자매들의 허물이나 범죄를 계속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나는 옳다고 생각하고 자기 의와 자기 교만의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말씀의 컨텍스트는 그 범죄한 것이 드러났을 때…그게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누군가가 폭로해 아니라 알려지게 됐을 때라는 겁니다. 한 사람이 곁길로 나아가고 육체의 소욕으로 무너지고, 율법 주도적 삶으로 무너질 때 그 범죄한 일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이단으로 빠지고 한 사람이 잘못된 유사 복음에 빠져서 헷갈리게 되며 흔들려 넘어지는 게 교회 공동체 전체의 영향을 준다는 겁니다. 한 사람이 잘못된 것이 공동체 영적 분위기를 다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이런 문제를 책임 있게 다루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이렇게 형제나 자매가 범죄한 일이 드러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바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바로잡는다는 말은 고장 난 부분을 고쳐서 원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치라는 의미입니다. 고장 나고 깨진 사람에게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회복시켜 주는 것, 그게 바로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한 형제 자매를 바로잡을 때는 반드시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는 겁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는 건 절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온유하지 않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지적하고 쳐내는 것을 익숙합니다. 이 세상에 많은 문제는 옳은 소리를 사랑 없이 하는 겁니다. 틀린 말이 아닌데 사랑이 빠진 정제와 판단으로 얘기하게 될 때 그게 상처가 되는 겁니다. 사랑이 빠진 얘기는 사람에게 회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죠. 옳은 소리를 안 들어서 교정 안되고 회복 안 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 사람은 상처 가운데 어려움 가운데 죄 가운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곁길로 나아가 무너진 사람들, 어려움에 빠진 자들을 회복시키고 돌아올 수 있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이란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함으로 살리고 회복시키기 사모하며 바로 잡는 겁니다. 바로 잡는 목적은 재단하고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교정하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회복시키고 살리기 위함입니다. 복음 안에서 온유한 심령으로 사랑으로 바로잡는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을 때마다 마지막은 내 자신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도 시험을 받을까…점검하고 살펴보라는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의 범죄한 일이 드러났을 때, 저 사람은 왜 저래… 손가락질 하기는 쉽고, 그 사람을 향하여 판단하고 분노를 쏟아내기 쉬운데, 그 사람의 범죄를 통해 내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베드 뉴스들을 보면서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는 것을 통하여 우리가 열을 내면서 그 사람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주변 지체들이 범한 죄를 통해 나도 예수님 앞에 죄인임을 잊지 않으며 나에 대해서 내 자신을 주의해서 살펴보라는 것이죠. 내 자신을 주의해 살펴보면서도 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조심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님 안에서 성령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패턴이라는 겁니다. 나도 죄에 쉽게 빠질 수 있고 나도 언제나 넘어질 수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으며 늘 조심하고 깨어 내 자신을 살펴보는 겁니다. 내가 교회입니다. 내가 교회이기에 교회 공동체 안의 이런 도전들과 어려움들이 나와 무관하지 않은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주변 형제 자매들의 문제를 객체화 하지 않고 대상화 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가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그 삶에는 세상과 충돌과 부딪침과 부대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변에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그 형제 자매를 판단하고 정하기 죽이기 전에 먼저 사랑으로 바로잡고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는 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구체적으로 경험되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런 범죄를 통하여 내 자신을 살펴보며 나도 그런 시험과 범죄를 받을까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늘 깨어 내 자신에게는 좀 더 치열하게, 타인에게는 좀 더 넉넉한 마음으로 품으며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의 기준을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어떤 소욕을 따라 살아가느냐에 따라 육체의 일을 맺기도 하고, 성령의 열매를 맺기도 함을 증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들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며 살아가는 삶을 산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머리로는 육체의 일을 맺지 않고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도로서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욕망과 열망에 대한 문제이기에, 우리가 육체 소욕을 따라가지 말아야지…라고 결단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꾸 육체 소욕을 따라가며 싸움에서 질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자는 결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육체의 소욕을 멀리하며 살아가는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5장 말씀의 결론으로 오늘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우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 위해, 성령의 소욕이 우리 삶에 나타나기 위해 해야 될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게 바로 매일 십자가에 나의 육체를 못 박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육체를 못 박는 일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우리가 해야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꿈틀꿈틀 올라오는 자아중심성, 꿈틀꿈틀 올라오는 육체 주도적인 소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었다 해서 내일 육체의 소욕이 활성화되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기를 부인하고 온전한 십자가 가운데 내가 나아가지만, 내일은 언제 그랬다는 듯이 다시 중심성이 확 올라올 수도 있는 게 나의 인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향하여,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하며 선언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 같이 십자가에 나의 육체를 못박는 자기 부인의 삶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이며 나의 매일매일의 결단이 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내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과 죄를 따르려는 소욕, 자아 중심적인 삶으로 살아가려는 열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나의 결단이고 나의 선택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이 맺게 되는 성령의 열매는 자동적으로 그냥 주어지는게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끊임없이 내가 자아 중심성을 부인하며 육체를 정욕과 탐심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거룩한 습관을 통한 치열한 영적 싸움의 결과입니다. 십자가 정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려는 소욕, 자아 중심적 삶을 사려는 열망에서 철저히 등을 돌리고 거절하기 위한 나의 매일 매일의 결단이 나를 살리는 겁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늘 자격 없는 자로 주님 앞에 서고, 늘 주님의 공로로 살아가며 무조건적으로,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자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백하며 주님 앞에 철저히 나의 무능함과 자격 없음을 고백하며 나아가는 것이 바로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겁니다. 나의 육체가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면 계속해서 율법이 나에게 공로가 되며 내 선행의 결과물이 돼서 나의 자격 있음을 증명하며 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되며,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정도로 대단하다는 나의 자아 중심성과 자기 의를 높이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끊임없이 허물며 내 육체를 끊임없이 십자가에 못 박는 삶, 그게 바로 성령 안에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것은 행위의 율법을 얘기 하는 게 아니라 성령의 길을 같이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행하는 삶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뒤따라 가는 게 성령으로 행하는 삶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이 말은 교회를 드나드는 성도들 중에도 성령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것이죠. 많은 성도들이 당연히 성령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성령의 소욕과 반하여 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할 때, 내 자아 중심적, 육체 주도적으로 살아갈 때 성령으로 살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당연히 구원 받았으니까 성령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시는지, 성령 하나님이 나를 깨우시고 찌르시고 변화시키는지, 성령으로 내가 그 소욕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신앙 생활에서 모든 거룩한 일들, 예배, 기도, 전도, 선교, 교회의 사역 모든 일들이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지 않을 수 있고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성령 하나님의 길을 걸으면서 하늘의 예배와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릴 수 있고, 반대로 성령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으며 땅의 예배와 육의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이 정말 내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며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열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자들의 가장 중요한 구별점이 있는데 바로 어떤 영광을 구하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꾸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간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내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산다는 겁니다. 헛된 영광이란 텅 비어 있는 영광, 텅빈 영광입니다. 실체가 없는 영광, 잡아도 잡을 수 없는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만 가까이 가서 잡으면 잡을 수 없는 게 바로 헛된 영광입니다. 잡을 수 있는 것처럼 따라가지만 결국 잡을 수 없는 영광, 눈에 보이지만 잠깐 있다 사라지는 유통 기한이 있는 영광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맨 끝에 남는 건 허무와 공허입니다. 그게 헛된 영광이 세상이 주는 영광의 특징입니다. 육신이 주도하는 삶, 육신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런 헛된 영광을 구하며, 인생을 던지며 살아갑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을 내가 왜 노엽게 하고 미워하고 살아갑니까? 저 사람이 천국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커서? 하늘나라의 비전이 너무 커서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열망이 대단해서? 이런 거로 미워하고 시기하는 사람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헛된 영광을 구하기에, 그런 것들을 남들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거 같아서 시기하는 거고, 내가 덜 가져서 화가 나는 거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헛된 것 잠시 후 사라지는 헛된 영광을 구하고 거기에 인생을 던지면 서로 시기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다가 서로 망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지금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입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는 날마다 죽노라 선언하며 나의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는 이 십자가 정신을 마음에 아로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이 시간, 성령으로 행하며 성령의 길을 따라갑니까? 그러면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고 하늘의 영광을 구하며, 여백을 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에 우리는 헛된 영광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들, 잠시 있다 사라지는 도구라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주신 걸 잘 사용하되 거기에 영광이 있다고 착각하며 인생을 걸고 던지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들, 성령의 소욕에 붙들려 사는 사람들은 이런 헛된 영광을 십자가에 매일 못 박으며, 이런 것 가지고 서로 투기하고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서 시간 낭비하고 인생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이런 안개와 같은 것들에 인생을 걸지 않을 때, 사람을 주목하지 않고 하나님을 주목하게 되고, 땅의 것을 주목하는 대신, 하늘의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평가와 그들의 댓글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평가를 중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나에게 생명 주시는 분도 내 삶에 주체가 되시는 분도 성령님, 그 성령 하나님과 발 맞추어 보조를 맞추어 그분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오늘도 십자가에 나를 못박고, 성령의 능력을 붙들며 살아가는 성령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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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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