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4장 말씀을 통해서도 족보의 이야기가 계속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이름 중에 유일하게 눈에 확 띄는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기도가 등장합니다. 바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아마 역대상에 등장하는 족보는 잘 몰라도 야베스의 기도를 아시는 분들은 많이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 야베스의 기도를 가지고 책을 썼는데 그 책이 한국에서 굉장히 유명해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베스의 기도란 책을 좀 읽어 보면 부제가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라고 되어 있어서,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사서 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내 인생에 기적을 경험하는 기도원리로 적용하는 것이 너무 치우쳐 있고 비약되어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는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동의 되지 않는 내용들이 분명히 있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야베스의 기도는 그렇게 책으로 낼 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족보에 한가운데 유일하게 야베스의 기도가 들어가 있다 생각합니다.
역대상의 기나긴 족보를 통해 사람들의 명단이 계속 나타나고 있는데 왜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 야베스의 기도를 짤막하지만 소개하고 있는가?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베스의 기도는 족보 한 가운데 위치한 유일한 기도로서 야베스 개인의 기도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기도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야베스 한 사람의 개인적인 기도생활이 아니라, 야베스로 대표되는 포로기에 귀향하여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는 공동체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의 뜻은 “수고로 낳았다”는 뜻인데 좀 더 직설적으로 번역하면 고통 이란 뜻입니다. 즉, 고통과 고난 속에 태어났다는 것으로, 그 존재 자체가 고통과 고난 그게 바로 야베스라는 의미입니다. 야베스의 이름을 통해 야베스란 개인이 이렇게 고통과 고난 가운데 태어났음을 대표하기도 하고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자체가 바로 고통과 고난을 대표하는 삶이 아닐까 묵상해봅니다. 그 당시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와서 지금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황무지와 폐허 가운데에 서있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 그 삶이 바로 수고로 낳은 야베스, 고통과 고난의 야베스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민족 자체가 고통과 고난 수고로 나온 그 야베스의 그 모습을 그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 공동체 뿐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숨쉬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 또한 이 고통과 고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을 돌이켜보면 여기저기에 고통으로 얼룩져 있고요 그리고 아픔으로 찌들어 있습니다. 긴 코로나 광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입술에서 고통과 신음에 소리가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고통과 고난이고 우리의 삶 자체가 야베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야베스는 그 모든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랬습니다. 그렇게 고통과 고난 중에 태어난 야베스는 귀하고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고통과 고난을 대표하며 그렇게 힘든 삶을 살아가지만 그는 어떤 형제들보다 하나님의 눈에 귀중하고 존귀한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헤매며 포로로 잡혀가고 그러다가 지금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려는 그 현장에 그들의 삶은 고통과 고난으로 가득 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눈에는 그들이 귀하고 존귀한 자로 서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익숙한 땅을 떠나 지금 폐허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인생을 던진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의 삶의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눈에 귀중하고 존귀한 자라는 분명한 믿음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 지금 야베스의 기도를 하는 겁니다. 그들이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어 하나님에게 귀중한 자, 존귀한 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는 것은 그들의 살고 죽는 정체성의 문제였습니다. 폐허인 예루살렘 앞에서 선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렇게 하나님의 눈에 존귀하고 귀중한 백성으로 성전을 재건하게 되는 힘이 원동력, 그 비결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인 셈입니다. “내게 복을 주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란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통해 복을 주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구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의 뜻에 따라 주시는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고백, 복은 하나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께 복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 받는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하늘의 복도, 이 땅의 복도 주님께서 주시는 복 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주시는 만큼 받는게 복이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내게 복을 주시는 주님이 복 주시는 분임을 믿으며 주님을 바라보고 매달리는 게 기도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주님의 복은 지경을 넓히며 나를 도와 환란을 벗어나고 근심을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삶의 간구입니다. 자신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였고 하나님의 복이 나의 복되게 해달라는 그 간절한 비전을 붙들고 살아가는 거예요.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복 가운데 하나님의 복을 내 복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이며 그것이 지금 페허와 황무지에서 근심과 환란에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이라 사명을 세우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이 우리에게 실현되기 원하며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복이 되기 원합니다….그 하나님의 복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 복이 되기를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이죠. 이 간절한 기도가 야베스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되기 원합니다.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 인생 가운데 우리를 귀중하고 존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믿음으로 바라보기 원합니다. 모든 복이 주님 손에 있음을 인정하며 주님 앞에 무릎 꿇기 원합니다. 주님의 복이 나에게 임할 때 내가 환란을 벗어나고 근심이 없어지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의 손이 나를 도우시고 이끄시기에, 주님의 은혜가 나의 환란과 근심을 덮으시기 때문에….황무지와 페허 가운데 근심이 없어지고 환란을 벗어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복이 나의 복 되기 원합니다. 주님의 복을 붙들고 이 시간 나의 지경을 넓혀지며 주님이 도우셔서 보이지 않는 나의 성전, 나의 신앙이 다시 재건 되며 나의 삶이 놀라운 은혜로 채워지는 그 야베스의 기도가 우리의 삶의 간증과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1장이 전체적인 인류의 족보이고 2장이 이스라엘과 아들들에 족보였다면 3장은 다윗의 아들들, 특별히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에 분단된 이후 남유다의 왕들에 대한 족보입니다. 솔로몬은 밧세바를 통해 태어난 아들이자 첫번째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밧세바는 간음을 통해 데려온 여인이고 전남편의 과거가 있는 하나님의 왕실과 언약을 세우기에는 흠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밧세바를 통하여 솔로몬을 태어나게 하셨고 다윗을 이어 왕이 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 이후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에 이스라엘의 남유다의 아들들에 대해서 그 왕가의 혈통들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버티다 버티다 다윗 언약을 지켜내지 못하고 결국 기울어졌고, 영적으로 타락하며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에게 남유다가 망하면서 다윗의 가게가 끊어집니다. 왕족이 끊어지며 나라가 완전히 망하게 됩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고 포로 생활 중에 성전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페르시아에서 특별한 귀한 명령을 내려준 것입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들이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마음의 고향인 예루살렘 성전을 대거 재건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포로기 가운데 재건 하게 됩니다. 그렇게 공동체 회복을 보장받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우려 하지만, 그들에게 왕을 세우는 것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 그 무너졌던 남유다 왕국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그들은 신분적으로 포로들이었고 여전히 그들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민족 일 뿐 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오늘 말씀의 족보는 남유다의 왕의 계보가 그들에게도 이어지도록 그 역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으로 시작된 남유다의 왕의 족보는 16절의 시드기야에서 멈추게 되지요. 시드기야 왕때에 남유다는 끝이 났고 완전히 망했습니다. 그런데 17절에 이어서 포로로 잡혀가는 아들들의 이름을 얘기하는 거죠. 그래서 포로 중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들의 리더인 스룹바벨까지 이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룹바벨 과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결국 다윗 왕국은 끝났고, 남유다는 망했고, 나라는 세울 수 없고 왕위를 계승할 수 없는데, 페르시아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지금 돌아와 성전을 세우면서 우리의 역사의 뿌리와 신앙의 뿌리가 남유다에게 연결되어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페르시아 제국에 여전히 속국이고 나라를 세우지 못하지만, 우리는 영적으로 그 남유다에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하고 있다는 정통성을 붙들고 그 족보와 혈통을 통해 이 자리에 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영적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상황은 황무지와 폐허였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받았지만 나라는 세울 수 없는 식민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진 것이 아니라 남유다의 족보를 통하여 계속 영적인 은혜는 계승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일어서는 소망과 희망을 붙드는 간절함이 이 족보에 녹아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룹바벨 과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지금 남유다의 왕들 족보에 자신들을 연결 시키면서 우리가 이렇게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는 데 하나님이 주신 다윗 언약을 회복하는 그 꿈을 붙들고 우리가 이 성전을 다시 세우는 것임을 영적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바라본 것이죠. 그래서 이 족보의 이름들이 저희가 발음하기도 어렵고 개인적으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이어지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말씀으로 읽음으로, 족보에 녹아져 있는 이 간절한 마음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때로는 우리가 영적으로 고아같이 느껴지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며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이 하나님의 언약이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족보의 말씀을 보며 우리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이 시간 서있다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 영적인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이 시간 나에게 흘러 들어가 있으며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께서는 다윗 언약을 회복시킨 그 은혜를 동일하게 나같은 주심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하나님께 교정되어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여전히 현지 형으로 우리에게 임한다는 것을 이 족보를 통해 발견하고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영적인 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 시간 나는 고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족보와 혈통에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주님의 백성이며 그 은혜와 사랑이 이 황무지와 페허와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여전히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은혜로 우리 가운데 다가옴을 믿으며 이 새로운 영적인 재편의 시대에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다시 한번 일어서며 영적인 자녀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상 2장 후반부에 나오는 족보와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 솔직히 그냥 생략하거나,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이 유다 지파의 족보 이름들인데 161명이나 등장합니다. 성경 말씀이 잘 알려지지도 않고, 발음도 어려운 이런 사람들의 이름을 이렇게 시시콜콜히 족보로 기록해 생명의 말씀으로 증언하게 하시는 분명한 영적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에게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나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들이고, 더 크게는 하나님의 나라 일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유명한 사람들, 큰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선에는 중요한 사람들이고, 그들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과 역사는 지속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역사는 세상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렇게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사람들을 통해 일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대상을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자리가 바로 이렇게 희미하게 꺼져가는 포로기의 상황이었음을 주목해서 읽으면 이 족보들이 은혜가 됩니다. 예를 들면 오늘 말씀에는 갈렙의 자손에 대한 족보와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 중에 특별히 저희가 주목하기 원하는 사람은 바로 해 쓰면 하는 사람은 바로 헤스론의 아내 아비야입니다. 아비야의 이름은 '하나님은 내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정의 대들보 역할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붙들고 그 험한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와 집안의 가정으로 여기며 그 가정을 잘 건사 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또한 오늘 말씀에는 아들이 없이 죽은 여러 가정의 족보들도 이어집니다. 그 당시 아들이 없다는 것은 족보가 끊길 위험, 축복의 계보가 끊어질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이요. 이렇게 족보가 끊기고 하나님의 대가 끊길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통하여 그 심해져 가는 그대를 계속 이어가게 하셨다는 것이죠. 또한 이렇게 아들이 없이 위태위태하게 족보가 이어지는 말씀들을 반복하는 것을 통해 지금 역대상이 쓰여지는 삶의 자리, 이스라엘이라는 그 민족 정체성과 신앙 정체성이 이미 사라 진것과 같은 절망, 아들이 없이 죽는 그 대가 끊기는 위기의 상황을 지금 그들은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족보에서 아들이 없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족보는 계속 되어가는 과거의 역사를 현재화하며,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사로잡히지 않고 소망을 바라보는 절규이자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와 폐허에 서 있는, 아들이 없이 죽어가며 대가 끊기는 것 같은 절망 가운데 있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새 역사와 새출발을 하게 하시며 그 희미해져 가는 불빛 가운데 끄지 아니하시며 그 불을 살리시고, 믿음의 언약을 이어가심을 믿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반복되는 아들이 없이 죽었고 아들이 없이 죽었고…가 반복되는 족보를 통해 영적인 넓은 시야와 큰 그림을 바라보며 소망을 붙드는 은혜의 도구로 족보가 증언됨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유명하고 대단하고 큰 사람들을 통해 이어진 것이 아님을 묵상합니다. 내가 알지도 못하고 유명하지도 않은 그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시선에는 중요한 사람들이도 큰 사람들임을, 그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이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의 시선에 중요하고 귀한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천국에 큰 자가 되며 귀한 자가 되는 꿈을 붙들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으면서도 그리고 포로에서 돌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놓지 않고 그 희미한 촛불과 같은 자신들의 처지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고 새출발하는 간절함을 족보로부터 찾았음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이렇게 아들이 없이 죽는 과 같이 소망이 끊어지고 희망이 사라지는 그 안타까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됨을 믿으며 주님이 주신 소망을 붙들고 다시 한번 희망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특별히 잘 알려지지 않고 어떻게 보면 음지로 떠밀린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과 야곱의 아들 에서의 족보를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두 사람의 족보는 어떻게 보면 아름다운 조건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계보에서 벗어난 자녀들의 족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마엘과 에서의 족보를 증언하는 이유는, 그 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부족한 사람들을 여전히 사용하시고 품으시고 기회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 부족한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품으시고 일하심을 묵상하고 기억하는 도구로 이 족보를 우리는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스마엘과 에서의 족보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영적 지혜를 줍니다.
이스마엘은 먼저 태어난 아들이었으나 서자였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자손의 영적 계보는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통해 내려갑니다. 이삭이 하나님이 언약을 약속하신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그 어머니였던 몸종 하갈은 쫓겨나갑니다. 창세기 21장을 보게 되면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사막으로 쫓겨나 헤메다, 물이 떨어지고 죽기 일보직전 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아들을 저 멀리서 떨어져서 보며 서럽게 울면서 광야에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그 하갈의 가슴치는 통곡을 하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실수 로 잘못된 결정을 통해 태어나게 된 이스마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스마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하갈의 통곡 소리를 외면 하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은혜로 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의 어머니이자 몸종이 하갈의 탄식 소리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증거가,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이스마엘도 기억하고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가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의 족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에서의 족보도 동일합니다. 사실 원래 큰 아들은 에서였으나 하나님의 영적 언약의 계보는 이삭을 통해 그 다음에 야곱으로 내려갑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기고 장자권을 팔아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에서는 비운의 아들과 같이 성경에 남게 되는데, 그리고 창세기의 역사에서는 조용히 사라지는 듯 했으나 오늘 역대상 족보를 통해 에서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합니다.연약하고 불순종했던 아들 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셨음을, 에서를 통해 이런 자손들이 계속 흘러 나왔음을 족보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에서에게 이런 자녀를 허락하시며 후손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 그것을 말씀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게 족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불순종의 결과로 나온 이 아들도, 장자권을 경홀히 여기며 던져버린 아들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거두시고 사랑으로 품으셨음을 족보를 통해 바라보게 됩니다. 이스마엘 후손과 에서의 후손 족보를 통해 인간이 실수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것을 책임 지시는 분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묵상하게 됩니다. 역대상에서 긴 부분 우리에게 보여주는 족보는 그 사람들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부르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 라는 것을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 기념비를 만들고, 기념비를 높이 세우기 위해 족보를 만들기 원합니다. 수많은 교회에서 그렇게 역사를 많이 편찬을 합니다. 우리는 역사가 이렇게 위대하고 역사가 좋다고….기념비 세우기 위해서…여러분 그런 역사 가운데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 될 관점은 우리에게 이렇게 훌륭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있었고 우리에게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자랑거리 역사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을 여전히 들어 쓰시며 연약하고 부족한 교회를 통해 일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기억되는 도구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강조해야 될 것은 나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나의 위대함이 아니라 말도 안되는 나의 인생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은 나 같은 사람을 통하여 이 세상의 역사를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계획을 이끌고 가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죠. 때로는 내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거기서 끝나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시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심을 이스마엘과 에서의 족보를 통해 발견하기 원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갈 때 내가 강조해야 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 이끄심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바라보며 주님을 뒤따라가 가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족보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시작을 아담으로부터 긴 세월의 족보를 증언하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황무지와 같이 포로에서 돌아온 그 어두운 상황 가운데 “나는 여전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인가?” “나는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 가운데 서 있는 후손 인가?” 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무너져 있는 그들에게 선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상황은 식민지이고 포로이며 황무지와 같이 모든 것이 무너진 어두운 상황이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언약과 약속이 여전히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황무지와 같은 상황 가운데 너희의 뿌리는 하나님이고 하나님께서 너희를 지으셨고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너희에게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여전히 꿈꾸기 원하신다는 것을 족보를 통하여 깨닫기 원한다는 것이죠.
오늘의 족보는 노아로부터 시작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까지 이어지는 족보입니다. 노아에게는 셈, 함,야벳이라는 아들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들의 모든 자손에 대한 족보들이 이어집니다. 노아의 시대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인류가 심판과 멸망을 경험한 세대라는 것이죠. 노아 시대는 죄가 관영에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보실 수 없는 시대였기에, 모든 생물들을 홍수와 함께 심판하셨습니다. 노아 방주 안에 있었던 가족들과 동물 외에는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은 자들인 노아의 가족들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이죠. 노아 후손들에 대한 족보를 구체적으로 증언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물심판 이후의 노아 가족을 통해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과, 지금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상황이 너무나 닮은 곳이 많기 때문이죠. 하나님 심판이 임해 모든 것이 무너졌고 삶의 터전도 나라도, 정체성도 무너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아 시대에 홍수의 심판을 복기하며 노아가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대를 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주셨다는 그 과거를 마음에 품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서 있는 잿더미와 폐허의 상황이 바로 노아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모든 것이 사라진 그 바닥으로부터 새로운 역사와 시대를 품었던 자리와 동일함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새시대를 여신 것과 같이 포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동일하게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역사를 열기 원하신다는 뜻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 그 자손들의 구체적인 이름들은, 홍수 심판 이후 새 시대와 새 역사를 이루셨다는 말씀이 언약으로 성취된 구체적 증거들인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이 족보들을 바라보게 되면 새로운 관점과 은혜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노아 이후 조상의 역사,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나의 선조들의 이름을 한사람 한사람 복기하면서 우리는 새로 출발한다…는 그 영적인 각성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다시 배우겠지만 역대기에는 이스라엘 왕들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한 것이 많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그 실수들과 어려움을 넘어 새소망과 새 희망, 새 언약이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강조점으로, 그 관점을 중심으로 씌여진 성경이 역대기이기 때문입니다. 역대기의 모든 역사적인 관점은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 주시며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역사와 시대를 출발하게 하시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돌아온 이후에 이 족보를 복기하고 읽으면서 우리에게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품고 새 시대의 새 소망으로 새 나라를 이루기 원하신다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시간 긴 코로나의 광야 한복판에 서서 노아의 그 홍수 시대에 모든 것이 쓸려 간 심판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것을 잃고 방황하며 포로로 끝려갔다가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온 그들, 잿더미와 폐허 위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지금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코로나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에 분명히 코로나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여러가지 일들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알지 못하나 분명히 알고 있는 한가지는 이 황무지와 같이 폐와 같이 모든 것이 바뀌니 코로나 광야 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며 희망을 주시며 이 시대의 새 출발과 새 역사를 우리를 통해 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긴 광야 가운데 우리 또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이라는 것을 붙드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나를 정의하며 절망과 낙심으로 내 인생을 정의하며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영적 이스라엘로 새 출발과 새 시대를 준비해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영적으로 준비되며 나의 마음을 준비하는 그 은혜가 임하길 원합니다. 그래서 역대기를 통하여 그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이 다시 한번 회복되며 황무지와 같은 이 상황 가운데 상황이 나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이 나를 정의하는 그 믿음의 백성으로 다시 일어나는 은혜가 이 새벽 시간에 역대상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 새벽기도 시간에 역대상 말씀을 통해 새로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저희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속 순서대로 지금 구약 성경의 말씀을 한 말씀 한 말씀을 은혜로 나누고 있습니다. 사사기를 끝냈으면 룻기로 들어가는게 당연할텐데 왜 역대상 말씀으로 들어가는가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역대상의 말씀을 배우게 되는가에 대해서 나누며 큰 그림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지금 저희는 긴 코로나의 광야를 여전히 지나고 있습니다. 팬데믹이 1년넘게 이어지면서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팽배하고요. 앞으로도 이 코로나가 얼마나 저희를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어렵게 할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에게 있는 공통적인 질문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가에 대한 물음입니다. 즉 여전히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소망을 주시며 우리를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 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무엘상하 와 열왕기상하, 역대상하는 비슷한 왕국의 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어제 개론 시간에 배웠지만 그 관점이 굉장히 다릅니다. 사무엘상하& 열왕기 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한 직후에 쓰여진 책으로써 그 큰 주제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하게 되었는가?” 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물지 못하고 망하게 되었는가를 구속사적인 관점으로 쓰여진 책이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와 우상 숭배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등돌린 불순종으로 인해 것으로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망하게 되었다는 이유를 복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망했는가?...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망했다” 고 고백하는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하고 그들의 역사를 통렬하게 바라보는 성경이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인 것입니다. 반면에 역대상&역대하는 삶의 자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긴 포로기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왔습니다. 이제 멸망한 지는 좀 오래 됐고 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포로생활 중에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 왔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황무하고 모든 것이 무너져 폐허가 된 땅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폐허가 된 예루살렘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여전히 소망이 있는가?” 우리는 더 이상 나라가 없이 정처없이 떠다니는 우리에게, 모든것이 무너진 이 폐허의 땅 가운데, 우리 가족은 그리고 우리 민족은 정말 하나님 안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탄식으로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와 달리 역대상& 역대하는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소망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는가를 가지고 그 과거의 왕국의 역사를 복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역사를 보는데 그 관점과 큰 본 질문이 다른 것이죠. 역대상1 장의 시작은 긴 족보로 시작을 하는데 그 족보 중에도 특별히 아담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를 잃어버렸고 정체성도 잃어버렸습니다. 긴 포로 생활 후에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왔는데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무너져 있는 그 황무지와 바닥가운데 서 있는 그들에게 결국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새겨 보며 족보를 말씀으로 주시는 겁니다. 선조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시작하는 것이 역대상 의 시작이라는 것이죠. 우리에게는 지루해 보이는 이 족보들을 이름을 통해 그들의 뿌리부터 다시 다지는 겁니다. 그것을 통하여 지금 눈에 보이기에는 나라도 없고 정체성 도없고 가진 것도 없고 황무지 위에 서 있지만 너희는 지금 고아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으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선언 하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전히 버려진 고아입니다. 뿌리도 없이 정체성도 없이 버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는 절대 어려움과 황무지 가운데 서있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 족보를 통하여 너는 고아가 아니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중심으로 신앙 고백으로 이 말씀을 보고 상황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더 풍성하게 흐르고 있으며 하나님이 여전히 이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는가를 바라보기 원하는 그 역대기서의 간절한 시각을 가지고 오늘 말씀은 아담으로부터 그 족보를 비장한 마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긴 코로나의 광야 한복판에서 오늘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삶의 자리는 역대상의 삶의 자리와 정확하게 맞닿아 있다 생각합니다. 많은 것이 무너져 있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삶도 무너져 있고 내면도 무너져 있고 가정도 무너져 있고 직장도 무너져 있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것들이 무너져 있습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많이 무너져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무너진 광야 한 복판에서, 이 칠흑 같은 긴 코로나의 터널 가운데 모든 것이 아직도 어두컴컴하고 앞으로 삶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이 혼돈의 시대에,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그 소망을 붙들고 시작할 수 있다는 역대기서의 소망을 붙들고 우리는 새롭게 신앙을 재건하기 원합니다. 새롭게 나의 삶 속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다시 세우기 원하는 열망으로 이 역대상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서 있는 우리들에게 역대상 말씀이 주시는 소망의 메세지를 붙들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역대상 말씀을 나눌 때 하나님이 주실 소망을 붙들고 나의 현재 상황을 재 해석 할 수 있는 눈을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내 눈에 보이기에는 상황은 무너지고 폐허이며, 나는 버려진 것 같고 나는 고아 같이 아무런 소망 없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영적인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주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여전히 나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죠. 이제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시작할 수 있으며, 다시 일어서는 힘, 하나님 안에 다시 새 출발 하는 힘을 얻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소망을 붙들고 다시 한번 일어서는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이 되기를 사모하며 말씀으로 들어간다면 여러분들에게 큰 은혜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붙들고 다시 시작하고, 다시 한 번 새 출발하는 영적 밑그림을 새벽기도의 시간을 통하여 그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 후에 문제, 그 문제를 잘못된 방법으로 푸는 어리석음을 발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았던 전쟁, 동족이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싸우는 전쟁을 분노로 벌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께 물어보는 척 했지만 답을 다 정해놓고 하나님의 이름만 도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냐민 지파가 끊겨질 처참한 결과를 직면했지요. 그런데 회개하는 대신 하나님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냐 원망하였습니다. 본인들이 다 잘못해서 문제를 만들어 놓고는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를 사라지게 하신 것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위기를 다 하나님에게 탓으로 돌리며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제인 걸 망각하고 적인 줄 알고 그렇게 모두 진멸하고 나서 갑자기 부랴부랴 문제 뒷수습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뒷수습이 쉽지 않은 이유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급한 맹세가 있었습니다. 베냐민에게 자신들의 딸을 절대 아내로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신 게 아니라 본인들이 분노에 차서 이렇게 스스로 맹세한 것이죠. 또 하나의 맹세는 총회로 모였을 때 거기에 오지 않는 사람들은 다 죽여버리겠다고 맹세한 것이죠. 입다를 통하여 맹세의 위험성을 그렇게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다시 실수하며 성급하게 맹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베냐민 사람들을 지파가 사라지지 않고 아내를 구해줄까를 갑자기 고민하다가 첫번째 맹세 때문에 자신들의 딸들을 아내로 줄 수는 없고, 이 두 번째 맹세를 악용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가 있으면 하나님께 다시 한번 손 들고 회개해야 되며 하나님께 방법을 물어 봐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또 다시 자신들의 생각대로 자신들의 방법대로 해결책을 찾는 거예요 그 해결책이란 뭐냐? 또 한번 길르앗 거민들을 죽여 버리는 겁니다. 잘 보니까 회중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 야베스 길르앗 거민들이 참석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맹세를 빙자해 베냐민 지파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아내를 주기 위해 또다시 잔인한 피흘림의 보복을 벌입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와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자신들이 분노로 만들어 놓은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또 다른 칼부림과 피흘림을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는 거예요. 만 이천 명을 보내서 400명의 처녀를 구해 오고 나머지를 다 잔인하게 죽여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문제 해결책이라고 가져온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큰 문제를 가져오는 영적인 어두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 지금 영적 암흑기에 결론과 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아픈 역사라는 것이죠. 문제가 있으면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그 문제와 죄를 덮어 버리려는 것, 이것이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이 행하던 일반적인 방법들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묻는 대신 내 스스로 뒷감당 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가나안 땅의 방식이었고 세상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철저히 동화되어 가나안 땅에 방식으로 싸우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무정한 삶을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문제가 있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원망이나 하고, 뒷감당이 안될 때 스스로 해결책이라고 가지고 와서 더 큰 문제를 만들고….마치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살아가는 거예요. 철저하게 세상적으로 철저하게 세상 방법으로 끊임없이 타락하고 있는 거예요. 문제를 해결한다고 뛰어다니지만 항상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영적 타락의 결론이라고 사사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타락의 현주소를 우리의 삶에 적용해 보기 원합니다. 나의 일상에 가장 큰 죄는 내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뒷감당이 안되는데도 내 인생의 어려움과 지혜를 주님께 묻지 않는 거예요. 그리고 불순종의 대가로 찾아온 그 결과 앞에 하나님께 원망만 하고, 문제를 해결한다고 뛰어다니지만 항상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문제 해결책 이라고 가져온 것이 또 다른 피 흘림 과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올 수 없는 가져볼 수 밖에 없는 그 연약한 인간임을 깨닫고 뒷감당이 안될 때는 모든 것을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물어보며 주님을 붙들기 원합니다. 끊임없는 타락 가운데 세상적으로 세상의 방법으로 길들여지며 무너지기 쉬운 우리 삶 속에 인생을 결단하고 돌아서며, 주님의 사랑 앞에 돌아가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어 idiom에 Anger pays the price라는 말이 있습니다. 분노로 일하면 그 분노에 대한 대가를 심하게 치른다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만명이 한마음이 되어 같은 동족이자 막둥이 지파였던 베냐민 지파를 원수로 싸워 전쟁에서 완전히 이겼습니다. 승리를 한 이후에도 그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아주 처절하게 진멸하였습니다. 그들은 정의를 심판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하고 분노로 베냐민 지파를 모두 몰살시키는 화풀이었습니다. 그렇게 끔찍한 내부 총질이 끝난 후, 정신줄을 놓고 분노가 주도하여 자신의 동족을 그렇게 죽이고 나서 그 지파를 완전히 멸절시키고 나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 한 거지…라는 정신이 확 되는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나서 대성 통곡을 하며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베냐민 지파가 우리들의 형제였음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전쟁 중에 분노로 내부 총질을 할 때는 베냐민 지파가 형제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죠. 그냥 죽여야 할 원수로만 여겨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분노에서 깨고 나니까 알게 되는 거죠. 끔찍한 일이 지나간 후에야 정신이 돌아오는 거예요. 내 형제였고 한 핏줄이었는데 분노가 주도하며 눈이 가려져 버리는 거예요. 형제인지 모르고 자매인지 모르고 서로 가서 막 죽이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어리석음이요 분노로 일하는 자들의 처절한 대가 입니다. 두번째로는 베냐민 지파가 완전히 몰살되서 역사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죠. 그들은 겉으로 봐서는 승리한 것 같은데 형제이고 한 핏줄인 것을 놓치고 잃어버린 댓가는 전쟁을 통해 한 지파가 끊어질 위기에 처해진 것입니다. 이게 바로 그들이 한 전쟁의 결과, 내부 총질로 동족끼리 서로 피 흘리고 싸운 처절한 결과는 승리는 없고 서로가 서로에게 패배자일 뿐이었습니다. 승리가 승리가 아니라 둘다 패자인 것입니다. 항상 내부 총질의 결과는 이렇다는 것입니다. 한 몸인 가정에 싸움이 있을때, 한 배를 교회 안에 싸움이 있을 때 우리는 눈이 가려져서 서로가 서로에게 죽일듯이 적으로 생각하며 지금 칼질을 하고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싸움에는 승자가 없다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가 원수되어 싸웠을 때 결국 승자가 없이 모두 가정을 무너뜨리는 패자가 될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성도끼리 서로 원수되어 싸울 때 결국 승자가 없이 모두 교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패자가 될 뿐입니다. 주적을 잃어버린 채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고 싸우며 형제 자매인 걸 잃어버리고 그렇게 피 터지고 싸우다가 승리한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 보니까 후애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팀에서, 한 몸에서 서로 피흘리며 싸우다 결국 모두 무너지는 결과를 사단이 제일 좋아하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 역사적으로 벌어진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영적인 암흑기에 끝판왕이며 영적 타락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신 차리고 나서 발견한 문제들을 가지고 갑자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베냐민 지파가 사라지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본인들이 다 죽여놓고 지금 갑자기 남아있는 그 베냐민 사람들에게 아내를 구해줘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분노로 베냐민을 적으로 원수로 만들어버리며 분노 가운데 그 누구도 베냐민 사람에게 딸을 주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성급한 맹세였고 분노가 주도한 맹세였습니다. 그러니 원해도 이제는 베냐민 지파에게 아내를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 차려보니 자신들이 형제 자매인 베냐민 지파를 결혼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몰살해 버린 것입니다. 더 어이 없는 것은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 원망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다 그렇게 해 놓고, 분노로 서로에게 적인 줄 알고 착각하며 그렇게 싸우다가 베냐민 지파가 그렇게 사라질 위기에 처했는데 갑자기 하나님에게 모든 탓을 돌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내부 총질로 한 핏줄이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죽이며 원수로 죽도록 싸우더니, 결국 참담한 결과에 직면하고 나니까 회개하며 주님께 살려 달라고 오는게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나왔습니까? 어찌해야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답은 분명하죠. 본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확한 것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형적인 패턴은 하나님께 묻지 않음과 원망, 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는 것, 즉 답을 다 정해 놓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시늉만 하는 것이 영적 타락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결과가 나왔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영적 타락입니다. 항상 죄악된 본성과 분노가 만나 주도하게 되면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일을 그르치게 되고 그 일로 항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어두워지지 않기 위해 나의 일상에 길을 주님께 물어보며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길을 겸손하게 따라가는 그 순종의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탓하지 말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회개하며 돌이키는 영적으로 깨어 있는 백성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가 그렇게 미워하고 내가 분노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나의 형제 이며 나의 자매 이며 나의 아내이며 나의 남편인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나의 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사명으로 무장하여 주님 앞에 끝까지 쓰인 받으며 나아가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과 베냐민 지파 사이에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칼부림 전쟁을 계속 보고 있습니다. 지금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야 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 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한 기브아 사람들을 자기 사람들이라고 비호하며, 그 죄를 품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스라엘 전체와 대항해서 싸움을 걸어오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에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셨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위험과 멸망으로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돌아올 기회를 주시는 것인데, 자기가 잘나서, 힘이 세서 싸움에서 이긴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기회는 사라지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시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베냐민 지파 사이에 그 전쟁에서 베냐민 지파의 어리석음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냐민 사람은 화가 자기에게 미친 줄 알지 못하였더라…” 이게 영적으로 어두운 자들의 특징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그를 떠나신 걸 삼손이 알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베냐민 지파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화가 미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베냐민이 패배하는 그 전쟁의 모습은 흡사 아이성의 전쟁 지략과 비슷합니다. 한번 승리했던 아이성 백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번째 전쟁에서 후퇴 하니까 또 전쟁에서 지는 줄 알고 성을 버리고 다 나왔죠. 그러다가 매복한 사람과 그 사람들이 합쳐서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를 이루었던 그 전략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마찬가지로 베냐민 사람들이 도망가는 사람들을 보며 교만해서 자신들에게 패하는 줄 알고 그 사람들을 또 쫓아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성 사람들과 같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추격해서 나오다가 매복해 있는 사람들에게 기습을 당하며 베냐민 백성들이 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무너지며 결국 모두 죽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자신들에게 화가 미친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자기에게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 너무 늦은 것입니다. 그게 바로 베냐민 지파의 어리석음 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회를 주시고 돌아오고 돌이켜 회개하라…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다 차버리고 하나님의 화가 자기에게 미친 지도 모르고 교만하다 결국 심판을 직면하는 안타까운 베냐민 지파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베냐민 지파가 하나님께서 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합군에게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과 돌이키지 않는 자들을 이렇게 하나님이 스스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죠. 기브아 사람들이 했던 범죄와 그런 사람들을 비호하는 베냐민 지파의 행동은 결코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지금 이 말씀이 끝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베냐민 지파를 지금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하신 도구로만 사용되고 멈춰야 되는데 그 뒤에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구로써 이 전쟁을 마무리 짓는게 아니라 그들의 분노를 폭발하며 그들의 화풀이 대상으로 베냐민 지파를 진멸하고 철저히 무너뜨리고 짓밟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대로 불살랐습니다. 군인들만 죽인게 아니라 만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가축도 다 죽여 버리며 진멸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방법으로 지금 이 전쟁을 마무리 하고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하나가 되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위해 똘똘 뭉쳐 한마음으로 영적 전쟁을 벌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 땅을 믿음으로 싸워 이기는 믿음의 백성이 되어야 되는데 영적인 암흑기와 타락을 경험 하니까 사명은 잃어버린 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잃어버린 채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적이 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겠다고 분을 내며 결국 그 전쟁을 통해 화풀이의 대상으로 끔찍한 방법으로 죽이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여과없이 지원하는 것을 통해 우리가 영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영적으로 타락하고 영적 암흑기를 들어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될 본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에게 화가 미치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둔감함에서 벗어나기 원합니다. 어리석게도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는데도 분별하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원합니다. 또한 내 주변에 있는 같이 신앙 생활하는 어떤 교회와 성도들이 나에게 분노를 자극하며 나에게 분노를 통해 일하게 만들며 쉽게 적으로 만듭니까? 그것이 영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집중해야 할 기업과 사명 무엇이며, 내가 싸워야 할 주적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아 나의 시선과 나의 모든 에너지를 진짜 싸워야 될 대상인 사단 마귀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두기 원합니다. 그렇게 주님께 조율되지 아니하면 이렇게 한 팀이어야 할 한 백성들끼리 원수가 되어 싸우는, 분노로 서로 화풀이 대상으로 삼아버리는 영적 암흑기를 지나 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조율 되는 하루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참 비극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이겨 약속의 땅을 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영적 전쟁을 위해 애굽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싸워야 할 주적을 잃어버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서로 서로의 적이 되어 죽이게 되는 비참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죠. 베냐민 지파의 잘못된 결정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분노의 불을 질렀습니다. 레인인의 첩에게 행한 끔찍한 일은 분명히 잘못한 일이고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나, 하나님은 결코 같은 형제 자매가 칼을 겨누고 전쟁을 벌이시기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 전체가 이스라엘의 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연합군과 죄를 범한 사람들을 지키려 하는 베냐민 지파 사이에 동족끼리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영적 전쟁을 위해 40만명의 이스라엘 연합군이 이렇게 서로가 똘똘 뭉쳐 한마음으로 전쟁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나안에서의 영적 전쟁에는 그렇게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올라가지도 못하더만, 막둥이 지파인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고 바로잡기 위해 40만 명이 한 마음으로 모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 베냐민 지파와 싸우냐고 묻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의지해 나아가는 전쟁 같습니다. 그런데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이 전쟁은 하나님이 계획하고 준비하신 영적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들고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피흘리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데려오신 게 아닙니다. 그들의 주적은 여전히 가난안 사람들이고 아직도 취해야 할 땅이 많은 이 시점에 이스라엘은 한마음으로 그 싸움을 여전히 완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서로가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내부 총질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오는 것이죠. 두번째 문제는 그들은 이미 답을 정해놓고 하나님께 물어 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 진짜 물어보고 의지하려면 심각하게 하나님이 전쟁을 꼭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걸 물었어야 합니다. 우리 베냐민 지파는 그래도 우리 같은 민족인데 그들이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저렇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주시옵소서. 정말 나가서 우리가 꼭 싸워서 그들을 심판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물어봤어야 되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고 분노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대중 심리와 함께 분노가 주도하며 베냐민과 전쟁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가 된거예요. 하나님께 물어보지만 답은 정해져 있습니다. 같은 동족인 베냐민은 우리의 원수, 우리가 죽여야 되는 원수, 이미 다 정해 놓고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 자문을 구하고 하나님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 자기 생각과 자기 뜻이 다 정해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만 들고 나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을 차용하고 도용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을 사사기에서는 영적전쟁의 타락이라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적을 잃어버린 채 서로가 죽이려고 분노로 일하고 있는 모습, 답은 다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질문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척하는 이 모습이 영적 타락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유다가 먼저 올라가라고 말씀 하셨으면도 불구하고 결과는 뭡니까? 베냐민에게 두 번이나 지금 전쟁에서 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신 전쟁이라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가서 그렇게 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두 번이나 베냐민과 싸워서 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동족과 싸우면서 40만명이라는 수적인 우월함에도 불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두 번이나 지는 것이죠. 그들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 같지만 자기 생각과 뜻을 관철하며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있는 악한 행동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을 그렇게 패하고 나니까 그제서야 정신이 듭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 26절 말씀이죠. 그러고 나서야 여호와 앞에 울고 금식하고 제사 드리며 진짜로 여호와 앞에 묻는 것입니다. 나가서 내 형제 베냐민과 싸우러 나가는게 옳습니까? 안 올라가는게 옳습니까? 전쟁 하는 게 맞습니까? 안하는 게 맞습니까?…를 여쭤보는 거예요. 이걸 맨 처음부터 물어 봤어야 합니다. 두번 패하고 나서야 울며 금식하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면서, 답을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물어보는 시늉만 한 교만함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을 관철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그제서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짜 답을 대답해 주시는 겁니다. 내일은 내가 그들을 내 손에 넘겨 주리라…답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 성도들이 서로 칼을 겨누고 분노하는 일을 쉽게 바라보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들이 다른 교회를 서로 원수로 적으로 여기며 싸우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주적이 무엇이며 누구이며 우리가 싸워야 될 대상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다시한번 회개하며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40만명이 한마음이 되어 죽이려고 하는 그 싸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슴을 치며 근심하며 안타까워 하시는 내부 총질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칼부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타락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분노가 이끌게 되면 모든 것을 분노로 처리하면 나의 영적 교만과 더해져 완전히 무너지는 삶을 향해 달려 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답을 다 정해놓고 하나님께 묻는 시늉만 하는게 영적 타락이자 교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뜻을 다 정해 놓고 하나님 이름만 가져와서 하나님의 뜻을 내 뜻으로 포장하는 것, 이것이 영적 타락의 모습임을 잊지 말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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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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