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은 능력자 우선 주의, 힘 우선주의, 강함을 미덕으로 가지고 살아갑니다. 근육을 잘 만든 강해 보이고, 힘이 좋은 사람을 능력자라 부르고, 재물이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능력자라 부릅니다. 우리는 그런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능력자와 같은 강함이 없으면 약해서 짓밟히고 먹히고 빼앗기는 초식동물과 같아서 우리는 반드시 강해야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본능에 가까운 생각이 우리 마음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동기에도 내 자신이 이렇게 강한 자가 되기를 추구하고 사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강함이 아닌 약함의 대표인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에게 내가 약함을 철저히 인정하며 전적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두 손 들고 나와야 예수님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고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실망하고 걸림돌이 되고 심지어 예수님과 충돌하고 부딪히고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분명한 복음, 예수님의 은혜를 받는 비결은 예수님을 의지하고 시인하며 동시에 나의 약함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나의 소망 없음을 철저히 시인해야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을 붙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시고 나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번도 아니라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수제자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었는가… 곰공히 생각해보면 베드로는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시인 대신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이나 베드로에게 미리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가 약하다고 시인해야 산다고…그래서 네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할 거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신 이유는 너는 약하니까 미리 대비하고 준비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펄쩍펄쩍 뛰면서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주님 걱정하지 마시라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을 지언정 절대 부인할 사람이 아니라고 자신의 강함을 확신했습니다. 베드로는 거짓말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기 생각에 분명히 자기는 예수님을 위해 죽을 준비가 되었고 절대 부인할 사람이 아니라는 자기 확신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자신의 약함을 시인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한번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이 기도할 때니까 나랑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자. 주님 나 약합니다…주님 능력 부어 주시 옵소서…절박하게 기도해야 될 때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될 정도로 기도하셨는데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다 자고 있었습니다. 물론 피곤하니까 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그들이 잔 이유는 뭐냐면 내가 그 정도로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약함을 인정하고 시인했다면 절박하게 그 저녁에 기도했을 텐데 베드로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 확신을 붙들고 살아가다 결정적인 순간에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자기 확신 대신 자신의 약함을 시인했어야 사는 겁니다. 그런데 그가 붙들었던 것은 그의 의지였으며 그의 결단이었으며 그의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을 부인했고 자기의 강함을 확신하며 살았고 죽음 앞에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모습이 사실 저와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영적 현주소입니다. 우린 베드로보다 약하면 더 약했지 절대 강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해 주시고요. 오늘 말씀 8절에 보게 되면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같이 내가 나의 약함을 알지 못하고 나의 약함을 시인하지 못하면 기도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며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능력을 부인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약하다…몸도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사람들의 말에도 약하고, 돈에도 약하고 사람들의 미혹에도, 사단의 미혹에도 약한 존재임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시인하기에 주님의 은혜를 구하고 기도하러 이 새벽에 나왔습니다.약함을 시인하는 자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약함을 시인하는 자는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들입니다. 약할 때 강함되시는 주님을 실체로 믿고 고백하며 그 분의 이름을 철저하게 붙드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의 약함을 너무 잘 아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진리를 위해 살아가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도해 가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도가 무엇입니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내가 어떤 능력과 은사가 있으며 내가 무엇을 잘하는가에 달린 게 아닙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한데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내 약함 대신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십자가 안에서 강함을 경험하게 됨을 실체로 고백하는 것이 제자도 입니다. 주님 아니면 하루도 살 수 없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 아니면 이렇게 베드로와 같이 철저히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약한 존재임을 시인하고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끌려 가시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나의 약함을 주님 앞에 인정하십시오. 능력자가 되어야 산다고 믿으며 조바심 내고 머리를 쓰고 걱정하는 나의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 가운데 성령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도로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주님이 부르시면 그날 떠나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 시간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인생이 되며 기도로 공급 받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함을 시인하는 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첩경이고, 나의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예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능력 있는 삶인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나는 진리를 위해 살아가는 자임을 고백하며, 나의 약함을 시인하고 십자가를 붙드는 제자도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에는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기회가 있기도 하고 결정적인 위기의 상황이 있기도 합니다. 사울왕에게도 다윗에게도 두번씩의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었는데 결정적인 기회와 위기가 하나님의 테스트였습니다. 사울 왕은 그 두 번의 테스트에서 불순종의 결정으로 무너졌고 다윗은 그 두 번의 테스트에서 순종했습니다. 사울왕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번제를 드리며 인생의 최고 위기 가운데 불순종의 결정으로 무너졌고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 이후 모든 것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며 귀하고 중한 것들은 남겨두기를 선택함으로서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게 됩니다. 반면에 다윗은 결정적인 기회, 거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던 용변을 혼자 보러 왔던 사울왕을 자기 분노에 휩싸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에서도 부하에게 명령만 하면 단칼에 모든 것을 끝낼 수 있었는데 그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물병과 창만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내 마음으로 100번도 더 죽일 수 있었던 사울왕인데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끝까지 붙들고 그 말씀을 내 생각과 내 느낌보다 더 중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붙든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다윗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두 번 절호의 기회에서, 놀라운 영적인 결단과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순종을 한 이후에 사울왕이 다윗에게 자신의 범죄를 깨달으면서 오늘 고백하는 것이 오늘 말씀에 핵심입니다. 자신이 잘못했고 자기가 어리석은 일을 했고 범죄했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이 사울왕의 고백은 회개가 아니라 후회입니다. 회개하면 돌아올 수 있는데 사울왕은 계속 회개 대신 후회를 합니다. 후회를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도 예수님을 팔고 나서 그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냥 후회만 하다 스스로 자책하고 끝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울왕은 범죄했고 잘못했고 어리석은 일을 했다고 말은 하는데 그냥 후회만 하는 겁니다. 회개를 해야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이지 후회하는 삶을 살게 되면 다 무너지게 된다는 겁니다. 또한 사울왕의 입술에서 후회와 함께 지키지도 못할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을 또 한번 “ 내 아들아” 부르며 돌아오라는 겁니다. 내가 다시는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겁니다. 이 말을 믿고 다윗이 그냥 사울에게 갈 수 있겠습니까? 이 말 믿고 이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니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사울왕이 어떤 말을 해도 그 말은 이미 지킬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다윗도 알고 주변 모든 사람들도 아는 것이죠. 저는 여기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이 그렇게 말을 해도 사울은 그 말을 지킬 능력이 이미 그 자신에게 없었던 자입니다. 왕임에도 불구하고 왕이 한 말을 지킬 능력과 힘이 없고, 주변 사람들도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비참한 현실, 그게 사울왕의 현주소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의 이 말을 듣고 죽이지 않을 테니 돌아오라는 말을 거절하고 한 소년을 보내서 사울왕의 창만 가져 가게 합니다. 저 말을 그냥 곧이 곧대로 믿으면 큰일 나는구나…라는 것을 분별한 것입니다. 그 말을 믿고 덥석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내서 창만 가져가게 시킨 겁니다. 내가 말을 잘하고, 아무리 좋은 미사 여구를 말할지라도 내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합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한 말도 지킬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의 이런 영적 분별력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과 순종에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누가 봐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고 하나님이 왕을 붙이신 것 같았는데 중요하게 여긴 결정 기준은 하나님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기 “원하지 않으심”이었습니다. 그 말은 다윗 자신이 원하는 건 뭐였다는 겁니까? 나는 당장 사울 왕을 치고 싶었다는 거죠. 단칼에 그냥 명령해서 모든 도망자의 삶을 끝내고 싶었던 것이 자기의 원함이었어요. 그런데 자기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하심이 부딪혔을 때 그는 뭐를 결정한 겁니까? 나의 원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붙들고 결정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더 중하게 여겼다는 그의 고백입니다. 내 원함과 소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기준을 더 중하게 여긴 것입니다. 그가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며 끝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자가 되는 그 마음의 중심이 드러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은사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은사자들이 처음에는 좋다가 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사들을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도구로 선물로 써야 되는 공적인 용도로만 사용해야 되는데 그 은사들을 사적 용도인 나를 위해 쓰면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닌 은사 받은 자가 더 드러나게 되고, 예수님이 아닌 은사 받은 자를 더 추종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 변질과 왜곡이 시작되며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가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합니까? 저 사람들이 내 편인가 아닌가…저 상황이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내가 정말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이런 것들이 선택 기준이고 거기다가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산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원함과 하나님의 원하심이 충돌할 때 나의 원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을 선택하며 붙드는 겁니다. 나에게 유익한가 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유익한가, 교회 공동체에 유익한가를 선택하며 붙드는 겁니다. 그런 영적 결정은 반드시 성도들의 삶을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고, 예수님을 더 바라보게 만들고, 예수님의 이름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결정의 요소이고 분별의 요소가 되며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favor와 은혜가 지속적으로 부어지게 됩니다.내 인생에 진정한 승리는 그 승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나의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기 원하며 하나님을 더 가까이 붙드는 시간이 되기 사모하십시오. 그런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은혜를 놀랍게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지적하는 삶에 있어서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흔드는 것이 무엇인가를 증언합니다. 첫 번째 나를 지키는 것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심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잠들게 했던 사울왕과 군대들…다윗이 들어가서 사울왕을 죽이는 대신에 잠자고 있는 사울왕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나 잠에서 깬 사울왕의 호위무사, 가장 가까이 있는 경호실장 같은 사람인 아브넬에게 다윗은 지금 사울왕이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것을 일러 줍니다. 대통령 경호실장인 아브넬에게 너는 지금 왕을 어떻게 지키고 있느냐… 최측근이 왕도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느냐….사울왕은 자기 생각에 자기의 안위는 걱정이 없고 오로지 다윗을 죽이려는데 혈안이 되어 찾고 사실 사울왕의 목숨이 위태로울 뻔 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최정예부대가 출동했고, 그것도 3000명의 군대가 한 사람 잡으려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왕 한 사람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겁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는 놀라운 진리는 결국 내 인생에서 나를 보호하고 지키는 힘이 내가 가진 재물이나 돈, 혹은 인맥이나 권력이 나를 지키고 보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좀 있으면 심리적으로 안정이 있고 내가 인맥이 좋거나 권력이 있으면 안전하다 착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돈과 인맥과 권력에 그렇게 올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유익하고 필요할 수는 있으나 결국 내 인생을 보호하지는 못한다는 것이 삶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생명을 내 스스로도 지키지 못하고, 돈과 인맥과 권력이 지켜주지도 못합니다. 나의 가장 최측근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나를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생명을 지켜 주시며 나의 인생을 지켜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다윗의 입술을 통하여 고백한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험한 세상에서 지킬 수 없는 것들을 가지고 붙들지 말며 오직 나를 지키고 보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며 믿음으로 살아는 삶, 그게 신앙 생활의 본질입니다. 두 번째, 우리를 힘들게 하고 속이는 자가 있다는 고백입니다. 사울왕을 바라보는 다윗의 마음은 실망과 안타까움을 넘어서는 참담한 심정입니다. 이미 한번 절호의 기회에서 살려 줬는데, 울며 돌아서는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 군대를 동원해서 추격하는 사울왕…다윗이 이번에도 사울왕을 두 번째 살려주면서 그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안타까움을 담은 말이 바로 제발 내 말 좀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죄없는 나를 이유 없이 죽이려 하고, 나를 죽이려고 군대를 동원해 추격하는 사울왕의 모습이 바로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온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 왕이 가진 수많은 권력과 힘과 능력을 가지고 지금 벼룩 같은 나를 수색하러 왔냐는 것입니다. 왕이 군대를 동원해서 해야 할 일은 벼룩을 잡고 수색하는게 아니라, 주적인 블레셋과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는 일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겁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말을 듣지 않고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사울왕을 흐리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죽이지 않아도 될 다윗을 평생 원수가 되게 만들고, 벼룩과 같은 다윗을 수색하며 죽이게 올인하게 만드는 미혹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라 하고 여호와의 기업을 붙지 못하게 하며 사울 왕의 눈과 마음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 주변의 간신배들이고, 보이지 않기에는 악한 영에 미혹에 사로잡힌 자들이기도 합니다. 나발의 사건을 통하여 다윗은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확 찾아올 때 사울왕과 같이 단칼에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순간적으로 하나님을 놓치고 보복하려고 했던 나의 흔들리는 마음이 있음을….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붙들지 않으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나도 분별력을 잃고 무너지는 사울왕과 같이 될 수 있음을 말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평생 원수로 추격하는 사울왕을 향하여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평생 원수로 삼고 있는데 다윗은 사울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가 있었는데 두 번이나 그 기회를 내려놓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아 주시고 내 억울함을 풀어 주심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험하고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나를 보호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눈에 보이고 의지할 만한 모든 것들이 내 생명과 삶을 지키지도 보호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단 마귀의 미혹에 사로잡힌 사울왕은 결국 사단이 기뻐하는 간신배와 같은 말들만 마음에 새기며 그 삶의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왕이 하면 안되는 일에 빠지고, 왕이 할 필요가 없는 일에 올인하며 그 인생을 탕진하고 망한 인생이 되어간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또한 나를 힘들게 하고 미혹해 눈과 귀를 가리고 분별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악한 자가 있음을 기억하고, 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내면화 하여 말씀으로 내 삶이 조율되어 주님과 동행하기를 소망하십시오.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나의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심을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고 붙드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절호의 찬스가 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동굴에 혼자 용변을 볼 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는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며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그 이후 사울왕이 다윗을 향하였던 놀라운 고백들이 기억나실 겁니다. 잠깐 정신 차리고 다윗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불렀고 울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윗에 대한 놀라운 고백을 했던 사울왕, 그 때는 놀라운 변화가 있었던 것처럼 보였지만 정신 차리고 울고 통곡했어도 여전히 변화하지 않았고, 잠시 정신 차린 거 같았는데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죠. 사울왕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지금 다윗을 찾아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또 데리고 내려가는 겁니다. 악한 영에 다시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 했던 그 분노와 질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울왕으로 돌아갔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변하지 않는 사울왕, 사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다윗은 아마 마음에 엄청난 실망감이 더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칠 수 있는 두 번째의 기회, 절호의 찬스를 다윗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은 3000명의 군대로도 어디 있는지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인데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은 사울이 정확하게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고, 사울왕이 있는 곳으로 몰래 잠입해 들어갑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울왕부터 주변에 호위대장들까지 다 잠에 들어 누워 자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야외에서 그렇게 왕이 잠을 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다 누워 자고 있었고 사울 왕의 장은 땅에 꽂혀 있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절호의 찬스가 또 한번 다윗에게 찾아온 겁니다. 그 사울왕의 창은 다윗을 두 번이나 죽이려고 했던 창이었죠. 그 창이 지금 사울왕의 머리 곁에 땅에 꽂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로 쏠 수가 없는 상황, 땅에 꽂혀 있기 때문에 손에 무기를 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사울을 바라보며 다윗의 마음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확 올라왔을 겁니다. 내가 절호의 찬스에서 죽이지 않고 살려 드렸는데 또 나를 죽이려고 3000명을 데리고 와? 그 배신감과 분노가 다윗을 사로잡았을 수 있어요. 내가 절호의 기회에 살려줬는데 하나도 변하지 않고 나를 죽이려 하는 모습이 그대로네….괜히 살려줬다는 마음이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마음의 결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다윗의 마음에 부채질을 한 사람이 누구냐면 함께 간 아비새였습니다. 다윗의 심복 아비새가 대신하고 싶은 말을 해주는 겁니다. 이건 하나님이 당신의 원수 사울왕을 손에 붙인 주신 절호의 찬스라는 겁니다. 다윗 자신이 손에 피를 뭍이며 보복하는 것을 걱정하니까, 당신이 손 내 피 묻히지 않도록 내가 가서 친히 죽여주겠다는 겁니다. 두 번 찌를 필요도 없으니까 명령만 하시라는 거예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막 설득하는 거죠. 그때 다윗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입니다. 어기서 사울왕 눈 질끈 감고 죽이면 도망자 생활이 끝나고 어쩌면 다윗은 편하게 왕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한번 살려줬으면 됬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울왕 더이상은 안된다…그리고 내가 죽이는 것도 아니고 내 부하가 죽이는 것이니…여러 합리적인 이유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번에도 또다시 내 마음에 끌리는 결정이 아닌, 하나님 말씀을 붙드는 영적 결단을 다윗이 한다는 겁니다. 죽이지 말라…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말라는 거죠. 그 이유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치는 것을 하나님 앞에 죄가 되기에….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왕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왕이 되어야 되는 것을 믿으며, 내 뜻을 꺽고 내려 놓는 겁니다. 나발의 사건에서 배운 것 같이 내 원수를 갚고 내 억울함을 풀고 심판하는 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이 친히 일하실 거라는 것을 철저히 믿는 거예요. 이게 다윗의 위대한 영적인 결단입니다. 아비새를 포함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로 봤는데 다윗은 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던지 이게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시험으로 여긴 겁니다. 절호의 기회가 아니라 시험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말씀을 통해 분별한 겁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보게 되면 이것이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시험, 테스트였다는 것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음으로….사울왕과 그 주변 군사들이 너무 피곤해서 잔 게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잠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두 잠들게 하셔서 하나님의 방법과 때를 철저히 신뢰하며 왕이 되는 그 길을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시험, 테스트를 내신 거라는 것이죠.결과만 좋다고 모든게 다 용서되는 게 아니라 그 결과가 있다면 방법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죠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 혹은 절호의 찬스와 같이 보이는 그때에 우리는 모두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그 상황과 환경이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그 사람이 내 편인가 아닌가 이걸 가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라고 여기는데, 다윗은 철저하게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하나님의 바른 기준인가를 붙들고 나아가는 다윗을 마음 속에 새기기 원합니다. 변함없는 일관성 있는 다윗의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우리도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절호의 기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회인지 시험인지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영적 능력입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절호의 기회일지 모르나 그것이 나에게 시험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반대로 겉으로 보이기에는 큰 위기일지 모르나, 그거이 나에게 큰 기회일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를 묻지 말고, 정말 중요한 것은 교회 공동체 하나님의 나라에 그 뜻에 이게 정말 유익한 일인가를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하고 결정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붙들고 신뢰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은 놀랍게 일하시고 역사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때와 시간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나발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발은 사울의 때가 가고 다윗의 때가 오고 있음에도 전혀 알지 못하고 하대하고 조소하고 다윗을 모함하는 자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발은 지금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닌데 만취하도록 정신을 놓으며 잔치를 벌이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의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자기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잔치를 그 집에서 열었다는 겁니다. 나발은 다윗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고 선을 악으로 갚은 자였습니다. 그것에 대한 대가로 다윗의 군대가 저 앞에까지 달려왔는데, 그것을 아내 아비가일이 겨우 막고 돌려 보냈는데, 상황 파악하기 전혀 되지 않는 것이죠. 다윗과 그의 군대가 와서 나발과 그 모든 소유를 다 몰살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그 절박한 위기 상황 가운데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냥 지금 잔치를 벌이며 만취해서 거의 정신줄을 놓고 있는 나발의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을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왕과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만취하고 있는 이 나발의 모습은 마치 신약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를 떠올리게 합니다. 당장 다음 주에 죽을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부르시면 오늘도 떠나야 하는 데, 돈돈 하면서 계속 곳간은 늘리고 늘려서 내 것을 움켜쥐고, 그 쌓인 제물을 바라보며 만족하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와 똑같은 겁니다. 오늘 밤 부르시면 그거 다 놓고 떠나가야 하는데 이 세상 것에 올인하고 목숨 거는 자를 어리석은 부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기와 때를 분별하지 못하고 목숨이 위기 상황 대해서도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잔치를 베풀고 있는 나발 또한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나발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내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안개와 같은 이 세상에 올인하며, 큰 위기 상황에 술에 취하고 잔치에 취해서 그냥 정신줄을 놓으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도전과 경고가 되는 것입니다. 더 큰 나발의 어리석음이 등장하는데 바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때에 근심하는 것입니다. 만취한 술이 깬 다음날 아비가일이 남편 나발에서 어제 그렇게 만취해 잔치를 벌이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줍니다. 다윗과 다윗의 군대가 은혜를 원수로 갖고 선으로 악으로 갚은 당신 때문에 지금 우리를 치려고 거의 집 앞까지 다 왔었고 그것을 내가 지혜를 발휘해서 음식을 먹이고 하나님이 지혜 주셔서 돌아가고 그 위기가 다 해결됐다고 설명을 해준 거겠죠. 우리가 다 죽을 수 있었는데 죽지 않았다는 얘기를 해줬을 겁니다. 그러면 당연한 반응은…야 정말 그 위기 가운데 큰일 날 뻔했구나…당신 정말 고맙고 수고 많이 했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었어야 되죠. 그런데 어이없게도 나발은 그 얘기를 듣고 반응이 낙담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아내 때문에 큰 위기를 넘겼는데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때에 낙심하는 겁니다. 나발의 어리석음은 진짜 기뻐하고 감사할 때는 낙담하고, 심판하고 경고할 때는 잔치를 벌이고 술에 취해 기뻐하는 어리석음 입니다. 영적으로 철저히 무감각하고 둔감하여 하나님이 심판이 다가오는 위기 상황에 술 먹고 흥청망청 잔치를 벌이고, 감사로 피리를 부를 때에 낙담하고 있는 모습인 겁니다. 그리고 나서 얼마 있다가 하나님께서 나발을 치시니까 죽게 되는, 이게 바로 어리석은 나발의 인생의 결말이었습니다. 그 나발이 죽은 소식을 듣고 나서 다윗의 반응이 등장하는데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 나발의 죽음을 놓고 다윗이 찬송하고 감사의 고백을 했냐면 다윗이 거의 넘어질 뻔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발이 다윗의 신하들과 사람들을 하대하고 모욕하고 돌려보냈을 때 그는 감정이 막 올라와서 하나님께 상의하지 않고 자기가 모든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들을 몰고 나발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죠.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서 사울왕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에 그 기회를 살리지 않고 자기가 원수를 갚는 것을 포기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반면에 다윗은 나발이 그렇게 자신을 모욕했을 때는 참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고 사람들을 모아 달려갔습니다. 아비가일의 지혜를 통해 마음을 풀고 돌아감으로 다윗이 원수 갚는 일을 스스로 하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고백하는 악한 일이라는 건 내가 내 원수를 스스로 갚겠다고 한 생각 자체가 악한 일이라는 겁니다. 나를 억울하게 하고 나에게 모욕을 주고 힘들게 한 사람들을 내가 원수 갚고 처단하겠다고 생각한 그 악한 일을 하지 않도록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손으로 피를 묻히고 자기 스스로 원수를 갚으려 하는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대신 하나님께서 대신 심판하심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지금이 술에 취해서 놀고 기뻐할 때인지 재를 쓰고 회개하며 정신차리고 근신할 때인지를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웃고 기뻐할 때인지, 울며 회개해야 할 때 인지를 아는 지혜와 영적 민감함을 갖고 살아가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피를 묻혀 악한 일을 하며 보복의 사이클을 계속 반복하며 이어가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시겠다 약속하신 일은 우리가 끼어들 필요가 없음을 아는 자입니다. 특별히 나에게 억울하게 하고 힘들게 한 사람의 원수를 갚는데 내 손의 피를 묻히며 우리 스스로 할 필요가 없음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바로 원수를 갚고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믿는 겁니다. 심판하는 것도 원수를 갚는 일도 철저히 하나님이 스스로 하실 것을 믿고, 대신 갚아 주실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는 어리석은 남편 나발과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에 대해서 대조하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의 현숙한 지혜를 계속 묵상하며 마음에 새기고 있는데, 첫 번째로 시의적절한 때와 타이밍을 정확하게 아는 지혜입니다. 남편 나발이 큰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급히 음식을 준비하고 나귀에 싣어 다윗과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순종하며 나아갈 때라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었던 겁니다. 또 하나, 아비가일은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성난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누그러뜨리기 위해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먼저 보내고 극 존칭으로 바짝 엎드려 다윗의 마음을 높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멸시하고 깔아뭉개는 어리석은 태도를 보였는데, 아내인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바짝 엎드려 극존칭으로 세워지면서 다윗의 마음을 터치하고 그 마음을 읽은 지혜로운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세 번째 아비가엘의 지혜는 흥분하고 분노한 다윗에게 하나님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상황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사실 지금 다윗은 조금 흥분해 있고 분노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왜 이렇게 화가 많이 났냐 하면 나발이 자기를 모욕한 것뿐 아니라 자기 사람들을 모욕했기 때문에 자존심과 체면도 구겨졌고요. 또한 600명이나 되는 자기 공동체가 지금 배가 고파 가지고 먹을게 없는데 그 먹을 것을 거절하는 것도 화가 나고, 선을 악으로 갚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그 나발에 대해서 가만 둘 수 없다는 마음이 올라와 분노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망각할 정도로….당장 가서 나발과 그 모든 남자들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막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죠
그때 보복을 위해 달려오는 다윗에게 아비가일이 딱 영접하고 나와 엎드려 얘기하는 것이죠. 지금이 보복하는 일을 막으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다윗은 지금 그냥 하찮은 싸움 하려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분이 아니라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기 위해 부름 받은 분이라는 것을 왜 잊어버리십니까? 라고 얘기하죠. 다윗의 억울함과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이 원수 갚아 주실 건데 왜 이렇게 흥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분이 당신입니다… 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다윗 당신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인데 이렇게 감정이 휘둘려서 스스로 복수하려고 하고 스스로 원수 갚으려고 하시면 어떻 하십니까? 당신 같은 존귀한 사람이 어리석은 바보 남자 같은 나발 하나 죽임으로 피를 묻히면 당신이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라는 걸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 거룩하고 귀한 손으로 피를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닌 걸 왜 모르십니까? 라며 지금 아비가일이 바른 태도로 탄원하며 다윗에게 모든 상황과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이죠. 분노하고 흥분한 다윗에게, 지금 당장 복수해야 겠다고 달려오는 다윗에게,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꼭 기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하나님 앞에서 이 상황이 어떻게 해결되어야 되는지 바라보면 좋겠습니다…라는 시선을 열게 해준 지혜가 아비가일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을 통하여 우리가 배우는 지혜는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문제와 어려움, 내 자신을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지혜입니다. 그 흥분하고 분노하며 화가 나서 눈이 가려진 다윗에게 그 하나님의 시각으로 상황을 바라보고 자신을 바라보도록 도와주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늘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지혜로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 지혜란 공부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붙들려 있느냐 붙들려 있지 않느냐의 문제라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이 새벽에 나와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말씀을 내면화하여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자들의 놀라운 축복이 뭐냐하면 내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영적인 눈과 시각을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면서 다윗과 같이 분노하고 열 받으면 그 시각이 가려지며 땅만 바라보고 살다 보면 그 시각이 가려지고 망각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하루의 시작을 기도로 시작하면서, 성전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면서 이 하나님이 주신 시각,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하며 그 지혜를 경험하는 것이 새벽기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 아비가일에 놀라운 지혜를 들으며 다윗이 했던 반응 또한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할 귀한 진리입니다. 분노에 사로 잡혀 있기에, 뭐 이런 여인이 있어…나의 길에서 썩 나오거라…그러며 복수하러 계속 질주했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화가 너무 많이 나서 당장 내가 처단하고 당장 지금 다 죽여야 될 거 같아서 막 달려가고 있는데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여인 아비가엘의 지혜로운 말을 듣고 딱 멈춘 겁니다. 다윗은 분노 가운데서 아비가일의 지혜의 말을 하나님이 주신 음성으로 들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아비가일을 칭찬 했습니다. 그리고는 너 아니었으면 내가 지금 피를 흘리게 됐고 내 스스로 보복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실수를 범할 뻔 했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진정한 지도자라는 건 이렇게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분노해 가지고 지금 까딱하면 하나님 앞에서 큰 실수 할 뻔 했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막으시는 거구나…그 실수를 인정한 겁니다. 그 실수를 알고 실수에서 돌이킨 자가 바로 지도자 다윗이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다윗의 위대한 점이에요. 복수하려 가는 길을 거두고 자기의 실수를 인정하고 그 여인을 평안하게 돌려보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비가일도 잘 됐고 다윗도 복을 받는 그 놀라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갈 때 우리도 이렇게 아비가일과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내 자신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혜, 내가 처한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아비가일과 같이 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게 도와 주시고 이 시간 내 자신을, 내가 청한 상황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도와 주옵소서. 그 영적인 눈이 열리게 해달라고 꼭 기도하십시오. 동시에 지도자 다윗의 하나님의 앞에서 솔직함과 진실함, 실수로 인정하는 태도를 배우기 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이며 내가 상황 앞에서 어떻게 봐야 되는지 알려주시고 있음을 잊지 말고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하여 내 실수를 인정하고 돌이키며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바라기는 이 새벽에 나의 눈이 열려 하나님의 시각으로 내 자신과 상황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나의 실수를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을 인정하며 돌이켜 실수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의 대표선수 입니다. 나발은 거부, 아주 굉장한 부자였는데 그 모든 부요함이 다 자기 노력의 소산인 줄 착각했고, 다 자기 것인 줄 착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소산임을 망각했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도와주고 보호해 준 은혜의 소산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발은 다윗의 사람들을 하대하고 멸시하고 모욕했습니다. 다윗이 마치 사울에게서 주인에게서 떠나간 종과 같이 폄하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새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전혀 없었기에 나발은 사고를 친 것입니다. 그렇게 은혜를 원수로 갚고, 선을 악으로 갚은 나발에 대해 다윗은 그의 사람들을 몰고 나발을 치러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사고를 수습할 자가 누구냐 하면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현숙한 아내 아비가일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왜 나발의 하인들이 주인 나발 대신 아내 아비가일에게 가서 상의하는가…하는 것입니다. 나발의 하인들이 주인 나발이 한 일들이 크게 사고 친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지금 하인들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눈치챘습니다. 어리석은 주인인 나발이 다윗과 그의 소년들을 하대하고 모욕한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눈치 챘습니다. 어리석음에 빠져 주인이 은혜를 원수로 갚고 선을 악으로 갚았으니 다윗이 가만있을 리 없다는 것을 다 알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다윗이 우리를 쳐들어 오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다 눈치챘습니다. 그런데 그 위기의 소식을 당연히 주인에게 먼저 고해야 하는데 주인 나발에게 말하는 대신 하인들은 왜 아비가엘에게 말할 수밖에 없는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하인들은 냉정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주인 나발과 의논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불량하다.”는 말의 원어 의미가 뭐냐면 성격이 불 같아서…이고 “더불어 말할 수 없다”는 “대화가 안 된다….말을 붙일 수 없다” 는 의미입니다. 나발은 성격이 불 같아서 대화가 좀체 안되는 주인….말을 붙일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성격이 불 같아서도 그렇고 말을 붙일 수 있는 여력이나 마음조차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나발의 인생에 치명적 어리석음 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는 반드시 캐비닛, 바로 대통령을 보좌하는 보좌진들이 있습니다. 그 보좌진들은 듣기 좋은 얘기만 하는게 아니라 직언과 진실을 대면하게 할 수 있게 도와서 대통령이 국정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케비넷의 역할이죠. 그런데 케비넷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는 대통령은 보좌관들이 소신 있게 자신의 진실한 말과 소식을 대통령에게 전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발과 같이 성격이 불 같아서 대화가 안 되고 말을 붙일 수 없는 지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아니겠습니까? 푸틴 대통령이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푸틴 주변에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자가 거의 없는 것입니다. 푸틴 성격이 불과 같아 가지고 말을 붙일 수가 없는 겁니다. 푸틴 주변에 늘 간신들만 있고 늘 푸틴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니까 이런 뼈아픈 진실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 사람 앞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결국 사람들이 다 떠나가는 겁니다. 자기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하고 특별히 밑의 사람들의 얘기를 듣지 않는 사람들이 어리석은 지도자가 되는 첩경입니다. 이렇게 사고 친 어리석은 남편과 대비되는 여인이 바로 현숙한 여인 아비가일입니다. 어리석은 나발과 달리 아비가일은 종들에게 들은 남편이 크게 사고 친 이 문제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말씀은 증언합니다. 아비가일의 현숙한 지혜 첫 번째는 시의 적절한 때와 타이밍을 정확하게 알았다는 거예요. 아비가일은 그 이야기를 듣자 마자 급히 음식들을 준비해서 나귀에 싣고 다윗과 그 사람들을 만나러 떠나갑니다. 즉시 바로 움직여서 순종하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나아가는 것이죠. 모든 일에는 때와 타이밍이 있습니다. 기다려야 할 때가 있고 즉시 순종하며 뛰어 나아갈 때가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이 문제가 시급하다는 것을 알고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실행에 옮기는 순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만히 머물러 있고 침묵하며 고민할 때가 아니라 즉시 뛰어가 순종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될 때라는 것을 안 겁니다. 그렇게 시의 적절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분별력이 바로 아비가일의 지혜였습니다. 또 하나 아비가일의 지혜는 상대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지혜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과 그 부하들의 성난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정성 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먼저 앞에 보내는 것이죠. 나발로 인해서 자존심이 상한 다윗 모욕감을 다윗에게 그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진심이 담긴 음식을 먼저 보내는 거예요. 모양과 시늉만 한 게 아니라, 진심을 담은 음식을 만들어 보내어 그 마음을 누그러 뜨리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다윗을 딱 만나니까 그 앞에 바짝 엎드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다윗에게 내 주여….말하며 극존칭을 씁니다. 그에게 깍듯이 예를 쫓으며 다윗을 세워주는 것이죠 나발은 다윗을 모욕하고 깔아뭉개는 어리석음을 가졌는데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바짝 엎드리며 극존칭으로 세워주는 것이죠. 그리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며 모든 것을 용서해 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그렇게 다윗의 마음을 터치하며 그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지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나발의 어리석음과 아비가엘의 지혜로운 가운데 나발의 어리석음은 피하시고 아비가일의 지혜로움은 취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십시오. 이 시대에 우리가 나발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내가 윗 사람의 말도 잘 귀를 기울여야 되고 낮은 지위의 사람들, 나와 함께 일하는 사라들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밑의 사람들이 내 주변에 와서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내가 복되고 그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사람들이 말을 붙일 수 없는 자입니다 저 사람하고는 말해야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시의 적절하게 내가 즉시 순종하며 나아갈 때가 언제인지 멈추며 기다려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그 영적인 때를 분별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터치하며 그 사람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진정성 있게 마음을 다해 대함으로 그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지혜롭게 모든 일을 풀어가는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를 사모하며 나발과 같은 삶, 그 어리석음을 넘어 지혜로움으로 나아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어리석은 남편 나발과 현숙한 아내 아비가일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어리석은 남자의 대표로 나발에 대해서 증언하는데 나발의 우매함과 어리석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통해 배우면서 우리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같이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나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바보 어리석음 혹은 우매함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이름을 그렇게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자기 아들을 바보라고 이름 짓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발은 그의 별명일 수 있는데, 오늘 말씀은 대표적으로 나발의 세 가지의 어리석음에 대해 증언합니다. 첫 번째, 나발의 어리석음은 어리석은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부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가 모두 자기 노력의 소산이자 자기 것인냥 착각하며 어리석게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죠. 나발은 조금 부자가 아니라 그 당시 부의 상징인 양이 3000마리가 있을 정도로 굉장히 부자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거부였습니다. 양들과 염소들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고 또한 다윗의 사람들이 잘 지켜주고 보호한 것이 큰 도움이었음을 말씀은 선명히 증언합니다.근데 나발은 그 어마어마한 부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인 것을 망각한 채 모든 것이 내 노력의 소산이자 모두 내가 열심히 일해서 생긴 거라고만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것이 다 내 것으로만 생각하니 그것을 나눌 줄 모르는 것이 나발의 어리석음 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윗이 자신의 소년들을 보내어 나발을 만나게 하는 배경이 양털깎는 시기였습니다. 목축업자들에게 양털을 깎는 시기는 농사로 얘기하면 추수하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소위 말하면 1년 중에 가장 풍성한 시기, 그나마 먹을 때가 많은 때입니다. 그렇게 양털 깎는 시기는 추수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모여 잔치를 하는 때입니다. 양털을 깎는 시기가 됐으니까 같이 축제도 하고 먹을 것도 좀 같이 나누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소년들을 보낸 겁니다. 그 당시는 크고 작은 전쟁들과 문제가 가득했던 시대 아닙니까? 늘 외적이 침입하는 시대 아닙니까? 그런데 양 3천 마리 이상을 방목하면서 키우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그렇게 보호해지고 지켜주고 상하지 않도록 함께 해준 큰 은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도움 준 것을 알기에 풍성한 양털을 깎는 시기니까 우리 사람들에게 같이 좀 나누고 축제와 같이 함께 즐기면 좋겠다고 얘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런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이죠. 단칼에 거절하면서 나발이 했던 말은 모두 my…my…my…입니다. 모두 다 내 거라는 것이죠.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해 잡은 고기…그렇게 거부가 된 것이 모두 자기 노력 때문이라고만 생각한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도 다윗의 사람들이 준 은혜도 망각한 것입니다. 내 돈과 재산이 다 내 것이고, 모두다 내가 잘해서 된 줄로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비를 주시고 좋은 날씨를 주시고 은혜 부어 주셔서 받은 선물임을 망각하고, 여러 사람들이 보호해 주고 지켜 준 도움이었음을 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가진 부가 자기 것인 줄만 알고 그걸 나눌 줄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꼭 신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똑같은 어리석은 자가 나발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발의 어리석음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태도입니다. 도움과 은혜를 준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을 하대하는 겁니다. 그냥 거절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하대하고 깍아 내리며, 무례하게 내보내는 겁니다. 나발이 다윗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다윗은 전국구 스타였고요 다윗이 한 모든 일들을 모든 백성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조소하고 비꼬는 겁니다. 그 다음 부분이 더 비꼬는 결정타인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다윗에게 사울왕을 떠나게 된 나쁜 사람, 사울왕을 배신하고 억지로 떠난 사람이라 비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윗을 왜곡하고 음해하는 소문들이죠.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평생의 원수로 지명수배를 내렸는데 지금 나발은 다윗에게 모든 것을 덮어 씌우는 겁니다. 그렇게 지금 모욕하고 하대하며, 무시하고 깎아 내리는 겁니다. 세 번째 나발의 어리석음은 시대가 변하는 것을 알지 못한 영적 무감각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은1절에 사무엘이 죽는 이야기로 시작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나발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그 짧은 한절 말씀이 알려주는 놀라운 영적 진리는 뭐냐면 사무엘이 죽음으로써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어떤 시대로 바뀌었냐면 이제 사무엘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곧 다윗의 시대가 열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조금만 있으면 사울왕의 시대에서 다윗의 시대가 재편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바로 사무엘의 죽음입니다. 시대가 이렇게 곧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을 영적으로 깨고 분별하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는데 어리석은 나발은 지금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던 것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있고 곧 다윗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조만간 왕이 될 다윗을 향하여 그렇게 하대하고 모욕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나발에 대한 반응이 뭐냐면 다윗과 다윗의 사람들이 칼을 차고 나발과 나발이 가진 모든 것을 향하여 공격하려고 다 달려들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발과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나발의 어리석음은 내가 가진 소유가 다 내 거며 내가 잘해서 된 거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게 재물이며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것만이 축복이라는 것이 잊어버리지 말고 주변 사람들에게 복된 인생을 사십시오. 다 내 것이 아니라 다 하나님 것이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쓰임 받는 재물만이 복된 재물인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십시오.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거나 사람들을 하대하는 어리석음을 갖지 마십시오.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는 영적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이 시대는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시각으로 이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인 변화를 민감하게 바라보십시오. 내 눈이 열려 영적인 시대와 영적 큰 그림을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지만 사실 죽는다는 것을 나에게 찾아오는 분명한 현실로 아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인생의 진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언젠가는 우리가 결정하지 않은 순간에 주님이 부르시면 누구도 예외 없이 떠나야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인 것이죠. 사무엘이라는 굵직한 영적 거장이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사건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언젠가는 죽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 즉 우리가 쓰임 받고 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 시한부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귀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저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사무엘이 단순히 하나님의 때가 되어 죽었다는 이 사실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사무엘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을 주목하여 보기 원합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이 훨씬 일찍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너무 나이가 많아 늙었기에 곧 죽을것 같이 보였고 백성의 장로들은 당장 왕이 있어야 될 것처럼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했던 것이 사무엘상 8장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 것을 망각하고 다른 나라와 똑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야 우리를 잘 다스리고 우리를 잘 보호하고 우리를 잘 세워줄 것으로 여겨서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나이 많아 사무엘상 8장에서 곧 천국 갈 줄 알았던 사무엘이 이렇게 오래 살아 사무엘상 25장이 되서야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무엘서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은 그렇게 조급하게 백성들이 자신의 왕을 세워 달라고 그렇게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조급증이었으며 그들의 원함을 관철하기 위한 그들의 핑계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을 진득히 기다렸 어야 되는데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눈에 보이는 왕을 다른 나라 사람들과 같이 세워 달라는 요청 자체도 불신앙 이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계획에는 사무엘이 이렇게 살 날이 많이 있었는데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당장 왕을 세우면 안 된다고 요구한 그들의 조급증 또한 그들의 불신앙이었다는 것이죠. 그렇게 백성들이 요구한 다른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운 결과가 뭡니까?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고 악한 영이 그를 사로잡아 지금 백성을 돌보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왕의 현주소를 보고 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자신이 설정한 원수인 다윗을 죽이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왕, 자기 스스로도 통제를 못하는 왕,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나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하는 왕, 자신의 주적이 블레셋이나 아말렉 이라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그런 왕을 지금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결국 그들의 요구, 다른 나라와 같은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워 달라는 그들의 요구가 결국 처절한 결과로 사울왕을 통해 그대로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지 못한 그들의 불신앙은 사울왕이라는 눈에 보이는 왕을 세움으로써 그의 영적 하향 곡선과 타락과 변질이 그 백성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나의 때와 방법을 붙들고 관철하려 하지 말고, 내가 원하는 그림을 하나님께 협박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심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기본이자 영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생각에는 자기가 아들 없이 자녀 없이 무지하게 있는 것이 너무나 조급했고 불안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며 그는 조바심을 냈으며 그리고 결국 그가 원하는 plan b를 만들어서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약속의 이삭을 완벽히 허락하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뒤에도 아브라함은 후처를 통하여 훨씬 더 많은 자녀들을 낳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나중에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흔 살 때에 아브라함의 조급증은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봤을 때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길었고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컸던 것입니다. 이삭의 축복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눈이 어두워 곧 죽을 거 같았는지 갑자기 에서를 불러 장자의 축복을 하려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리브가가 듣고 야곱을 변장 시켜 대신 축복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 되면 그렇게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이후에도 한참 후에 있어서야 죽게 된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도 없었고 그렇게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 그렇게 사무엘이 죽은 후에 그 다음 다윗의 신변에 대해서 짧게 증언합니다. 사무엘이 죽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다윗의 신변은 더욱 위험해 졌다는 것을 그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사울 왕이 마음껏 다윗을 죽이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 사무엘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죽었으니까 사울왕 에게는 확실히 이제 모든 걸림돌이 제거되었고 다윗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돼 버린 것입니다. 마치 에서가 아버지 이삭이 죽기를 기다리며 그 후에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벼르며 칼을 갈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죠. 다윗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보호하고 함께 했던 보호막인 사무엘이 없어진 거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더욱 사울에게서 멀리 도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죽자 분명히 다윗은 바로 바란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사무엘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다윗, 그렇게 도망자가 된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를 사울왕의 손에서 보호하시고 건지시며 끝까지 주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이야기를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획되어 우리의 선택이 아닌 주님의 선택으로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살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모두 순종하며 이 세상을 떠나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중요하며 어떻게 사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입니다. 삶과 죽음은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으며 우리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것 만큼 살다 떠난다는 것을 믿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꾹꾹 눌러 살며 하나님에게 모든 주권을 맡기며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이 우리에게 피부에 느껴지는 지혜가 됨을 잊지 말고, 꼭 죽지 않을 것처럼 살지 마시고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여 내 죽음이 하나님 앞에 잘 준비되어 하늘을 바라보며 다가올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분명히 믿으며 살아가십시오. 나의 중심과 우선순위를 보이지 않는 천국에 두고,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에 두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며 주님과 함께 오늘도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의 영적인 결정을 한 후 놀라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울 왕의 반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마음 속에서는 백 번도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는데 그가 그 절호의 찬스에서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자기의 감정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결정하게 하는 영적인 결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고요. 그것을 통하여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은 큰 소리로 자신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친히 갚아 주시고 나를 풀어 주시고 나를 건져 주신다는 것을 선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말씀에서 다윗을 향한 사울왕의 세 가지 놀라운 반응이 등장하게 되는데 첫 번째는 다윗에 대한 호칭이 바뀌었고, 두 번째는 소리 내서 울고, 세 번째는 그 입술에서 놀라운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첫 번째 사울의 반응은 다윗에 대한 호칭이 “내 아들 다윗아..”로 바뀐 것입니다. 사울왕은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눈과 마음에는 다윗은 자기가 죽여야 되는 평생 원수였기 때문이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설정해서 거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에서 자기를 살려주고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고백을 듣고 나서 그의 입술에서 놀랍게도 자기 원수인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게 참 안타깝고도 슬픈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다윗은 사울에게 사위니까 아들이 맞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뭐 법적인 아들일 수도 있고 데려온 아들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아들이 맞죠. 그리고 다윗은 사울 왕에게 충신이자 호위무사 였습니다. 자기가 귀신이 들렸을 때 악기를 연주해서 자신의 마음을 상쾌하게 했던 자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 왕은 그렇게 다윗을 미워하고 평생 원수로 만들게 되었는가…. 그가 악한 영의 사로잡혔기 때문이며 그가 분노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선대를 직면하면서 지금 잠시 정신이 번쩍 든 거죠. 죽여야 될 평생 원수에서 내 아들로 호칭이 바뀐 겁니다.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비슷한 것에서 훨씬 큰 차이를 많이 느낀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고양이와 컴퓨터 그리고 고양이와 개 그러면 당연히 고양이와 컴퓨터가 큰 차이가 많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종이를 주고 고양이와 컴퓨터의 차이를 쓰고 고양이와 개의 차이를 쓰라고 문제를 주면 놀랍게도 고양이와 컴퓨터에는 별로 차이점을 못 쓴다는 것이죠. 대부분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을 훨씬 더 많이 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과 심리는 생각보다 가깝고 비슷하게 여기는 것에서 더 많은 차이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는 고양이와 컴퓨터가 훨씬 큰 차이가 많은데 갈대와 같은 우리 마음은 고양이가 개가 고양이와 개가 훨씬 차이가 많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사울왕에게 다윗은 좋은 일이 훨씬 많고 잘한 일이 훨씬 많고 귀하게 쓰임 받는게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차이점과 문제점과 죽여야 될 이유만 그동안 계속 묵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원수가 된 건데 지금 잠시 정신이 돌아와서 다윗이 내 아들이었지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두 번째 사울 왕에 놀라운 반응은 그가 소리 내어 울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다윗 앞에서 소리를 높여 통곡했다는 겁니다. 미안해서 후회해서 소리 내어 울었는지 모르지만, 이 통곡은 안타깝게도 회개의 눈물과 통곡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자기 감정에 북받친 통곡이었습니다. 만약 이게 회개의 눈물이었고 회개의 통곡이었으면 이 말씀 이후에 사울의 인생이 변화되었어야 되고 더 이상 다윗을 쫓지 말았어야 되는데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이 통곡과 눈물 뒤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울 왕은 그 눈물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도 거론합니다. “ 여호와께서 나를 내 손에 붙이셨으나 내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사울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과 통곡은 회개의 눈물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이때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사울의 인생이 그렇게 비참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또 날리는 겁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울 때가 있고 어떤 분은 기도하다가 소리를 높여 통곡하며 울 때가 있습니다. 기도 중에 소리를 높여 통곡하는 것이 귀하고 진실한 마음을 쏟아내는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의 정화가 되긴 하지만 운다는 것이 꼭 회개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기도하다 통곡하고 울면 회개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리 높여 통곡한 후 사울왕의 입술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내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내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고백하는 겁니다. 사울왕의 고백은 정신이 확 들어서 그의 말에 움직이는 것이 제정신이 박힌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동안은 정말 정신줄을 놓고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그가 하는 생각도 그가 하는 말도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제정신이 돌아와 하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네가 그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선으로 갚기 원하신다…그 후에 이런 놀라운 고백을 하는 겁니다. 다윗을 통하여 반드시 왕이 되고 이스라엘 나라가 견고히 서게 된다는 것을 놀랍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통해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가는가, 우리가 누구를/무엇을 묵상하고 살아가는가…이것이 결국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한 질문 중에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울 왕은 무엇에 붙들려 있습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혀 붙들려 있었습니다. 누구를 묵상하고 있습니까? 분노와 열등감과 비교의식이 사로잡혀서 다윗을 죽여야 될 평생 원수로 계속 묵상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그렇게 망가지고 결국 파멸의 인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사울왕의 이 모습을 통하여 내 인생의 반면교사를 삼아 내가이 시간 미워하지 말아야 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오히려 나와 가까웠게 느끼지 못하고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의 연약하고 갈대와 같은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 원합니다. 이 새벽에 성도들이 성전에 나와 하루의 첫 시간에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이유가 뭡니까? 말씀과 기도를 사모하며 엎드리는 이유가 뭡니까? 내 생각을 묵상하고 내 감정을 묵상하고 내 분노를 묵상하면 우리는 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단에게 가장 좋은 미혹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내 억울함을 묵상하지 않고 내 분노를 묵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산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오직 말씀에 붙들려 있어야 산다는 것을 믿고 말씀에 뿌리 박으십시오. 나의 억울함과 내 주변의 사람들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나에게 덮혀 내가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붙들려 살아 나의 입술이 내 생각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아버지 은혜가 내 입술을 통하여 나오며 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마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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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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