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사사기 18장을 통하여 드러나는 단 지파의 영적 타락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17장 말씀은 미가 집안의 예배 타락이었다면 18장은 단 지파의 영적 타락인 사명의 타락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시고 기업으로 주신 땅에 영적 전투를 통해 얻는 것을 포기한 채 하나님이 주시지도 않은 땅, 눈에 보이기 쉽고 편한 땅을 향해 지금 구걸하며 쫓아다니는 단 지파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잃어버린 영적 타락 이었다는 것입니다. 본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없이 하나님께 형통함을 구하고 기업으로 주시지도 않은 땅을 점령하고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땅을 주셨다는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잘못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단 지파는 계속해서 잘못된 결정을 지속합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줬던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도둑질을 하는 겁니다. 도둑질을 하는 이유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가면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을까…라는 그런 잘못된 미신과 우상숭배에 근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 시점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이 도둑질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십계명을 범하여 훔쳐가면서 너희가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힘으로 억지로 그것을 훔쳐내는 겁니다. 그게 필요하니까…이게 바로 타락한 단 지파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단 지파는 처음부터 모든 게 잘못되어 꼬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의 땅을 들어 가야지 주시지도 않은 기업, 손쉽게 얻는 땅을 들어가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길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길을 가면서 하나님의 도우심 많은 바라는 것 그것을 통해 자기의 이익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하는 악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지파의 타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그리고는 미가의 집에서 허수아비로 섬기고 있는 레위인에게 제안을 합니다. 미가의 집에 연봉받고 집을 축복해주는 제사장이 된 레위인, 그에게 더 솔깃한 제안을 단 지파에서 하는 겁니다. 한 집안의 제사장이 되는 것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그러니까 우리를 따라 오라 거죠. 단 지파를 축복하고 단 지파를 중심으로 나아가는 제사장이 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레위인은 정신 못차리고 마음에 기뻐하며 단 지파를 따라갔다고 증언합니다. 그 신상을 함께 훔쳐서 같이 그 단 지파에게로 들어 갔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으로 나가면서도 회개하고 자기의 길을 돌이키기는 커녕 신상을 도둑질 하고 그 우상 붙들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을 도구와 수단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길에 자신이 맞춰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반대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전혀 따르지 않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하는 이 영적 암흑기, 이게 단지파의 영적 현주소이고 우리들의 영적 현주소일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기업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피흘려 싸워 여호와의 이름을 붙들고 영적 전쟁을 벌여야 되는데 그 기업을 포기한 채 단지파와 같이 눈에 보기에 손쉬운 곳을 내 마음대로 찾아가는 불순종을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불순종 하면서도 여호와의 형통을 구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고 아무렇지도 이야기하는 타락의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까? 내 뜻을 주장하고 내 길을 주장하면서도 그게 하나님의 길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며 그 불순종의 길을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단 지파의 영적 타락을 바라보며 우리의 영적 현주소를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이렇게 주객이 전도되며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나아가 면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내 눈에 옳은가, 어느 것이 나은가…이게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사기 17장은 미가라는 개인의 집과 예배의 타락을 보여주었다면 18장은 개인을 넘어 단지파라는 한 지파 전체가 타락하며 사명과 부르심에 대한 타락이 무엇인가를 증언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한 왕으로 모시기를 거절하며 눈에 보이는 왕을 쫓아 살려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드러냅니다. 왕이 없었던 게 아니라 왕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거절하고 있었던 불순종의 백성들로 산 대표가 바로 단 지파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정착할 땅, 기업을 찾아 헤메고 있는데, 얼핏 보면 단지파가 지금 땅을 분배받은 못해서 스스로 찾아 헤매는 불쌍한 백성같이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단 지파 에게도 분명히 땅을 기업으로 배분했습니다. 문제는 그 땅이 싸워 이겨야 되는 영적인 싸움을 벌였어야만 얻을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모리 족속을 두려워한 나머지 단 지파는 그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영적 전쟁을 통해 빼앗지 못했습니다. 몇 번 해보다 안되니까 그냥 포기해버린 겁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영적 전쟁을 통해 얻었어야 하는데 단 지파는 하나님이 맡기신 땅 하나님이 가서 취하라고 주신 땅을 얻지 못하고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금 뭐 하는 중입니까? 그들이 거할 기업의 땅을 스스로 구하는 중입니다. 눈에 보이기 좋은 땅, 스스로 그냥 살만 한 곳을 지금 찾으러 돌아다니는 것이요.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의 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그 하나님이 주신 기업과 사명을 포기한 채 본인들이 눈에 보기에 편한 땅을 지금 찾아 헤매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맡기신 땅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저버리고 내 눈에 보기 쉬운 곳, 내가 보기에 좋은 것을 기웃기웃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정탐꾼들을 보냅니다. 다섯 사람을 보내어 땅을 탐지하고 살피게 하는데, 이 땅이 하나님의 뜻에 맞나 아닌가를 따지러 온 게 아니라 그 땅이 눈에 보기 좋은가, 아닌가를 찾으러 온 거죠. 그렇게 정탐하는 중에 미가에 집에 머물고 있는 허수아비 레위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레위 사람에게 단지파 정탐군들이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 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 부탁합니다. 이게 말도 안되는 일이죠.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을 거절하고 자기들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찾아 다니면서 그렇게 불순종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에게 형통의 축복을 달라는게 말이 안되는 겁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 내 가는 길을 그냥 형통하다고 말해주고 축복해 달라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미가의 집에 있던 레위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평안히 가라 너희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 축복기도 해주는 겁니다. 불순종을 해서 지금 하나님이 맡기신 기업이 아닌 눈에 보이는 자기가 좋은 땅을 헤매고 다니는데 그 곳에 여호와의 형통함이 있을 수가 없죠, 여호와의 축복이 있을 수가 없지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한다고 그냥 말해주는 거예요. 완전 거짓말 인데도 이렇게 타락한 제사장은 그냥 그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 축복의 이야기를 해주는 겁니다. 그것을 요청하는 자들이나 그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레위인이나 다 영적인 타락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죠. 더 나아가 단 지파는 그들이 눈에 보기에 좋은 땅을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붙이셨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찾기를 포기하고 영적 전쟁을 멈춰섰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불순종으로 나아간 그 땅, 하나님이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신 적도 없고, 약속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 합니까? 그곳을 하나님이 너희에게 붙이셨다는 겁니다. 이 짧은 말씀 가운데 단 지파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하향 곡선이며 무너져 내리고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겉으로 열심히 줄어든다는 의미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내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겁니다. 나는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용과 이용의 대상으로 두는 겁니다. 불순종하는 길을 가면서도 회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마음대로 사용하고 도용하고, 내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차용하는 이런 악한 행동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경계해야 하는 영적 타락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가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을 나의 도구로 위해 사용하는 그 단 지파의 모습, 이게 영적 타락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경계하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로 왕으로 모시지 않는 백성들은 결국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나 중심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다른 민족들과 비교하며 왜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왕이 없냐며 우리는 왕이 없기 때문에 결국 내 눈에 옳은 대로 행할 수밖에 없다 라는 자기 정당화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과 기업이 있는데, 무서워서 싸우지 못하고 차지하지 못하고 결국은 분배 받은 땅이 아닌 사명으로 주신 땅이 아닌 다른 땅을 기웃거리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현주소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속으로 주신 사명 약속을 뚫어 주신 땅을 버리고 다른 땅을 찾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증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각심을 가지고 내 자신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 시간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그 중심에 아버지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따라 가겠습니다. 이 거룩한 기준을 붙은 싸움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아니하면 내가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이용하고 사용하며 내 것을 밀어붙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 포장하고 도용하는 영적 타락이 임하게 됩니다. 이 말씀은 말씀을 붙드시고 나의 매일의 삶이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께 붙들리며 주님 앞에 조율 되는 주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교회가 있습니다. LA에 있는 그 교회는 한 장로님이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는 담임 목사님이 그 장로님에게 잘못 보이면 찍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그 장로님이 툭하면 그냥 목사를 쉽게 갈아버리는 교회로 유명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회 건물주가 바로 그 장로님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장로님에게 잘 보여야만 그 교회는 목회자가 버틸 수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되니 늘 그 교회는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있으며 목회자는 버티지 못해 떠나던지 아니면 있는 동안 철저히 그 건물주 장로님의 허수아비가 되는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미가의 집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엄마의 큰 돈을 훔친 아들인 미가, 회개와 돌이킴 없이 그냥 여호와께 내가 원하는 복받기 원하는 엄마, 그리고 그런 아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신상, 이렇게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이 모든 것들이 타락한 예배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는지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운 건 영 모양이 좋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마치 장로님이 교회 건물을 소유하고 자기 개인 교회에 허수아비 목회자를 세우려 하는 것과 동일한 생각으로 자기 아들 대신에 그 신상을 섬길 레위인을 찾습니다. 자기 집에 찾아온 레위인에게 연봉을 제시하고, 우리 집안에 있는 신상을 위해 제사장으로 섬겨달라 제안을 합니다. 은 열과 의복과 먹는 것을 다 해결해준다는 연봉을 제시하며 나를 위한 제사장이 되달라는 겁니다. 레위인과 일종의 거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의 논리와 육신의 욕망이 합쳐져서, 연봉 줄테니 우리 집안을 축복하고 내 자식들을 축복하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제사장이 되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 레위인은 그렇게 개인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게 옳은지, 허수아비로 있는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냥 넉넉한 연봉 준다니까 들어가 섬겼습니다. 돈 주니까 그 집안을 위해 존재하는 그 신당에서, 원하는 대로 적절하게 축복하면서 그 집안에서 잘 지내면 되겠다 생각을 한 거예요. 그 집안 신당에서 허수아비 목회자,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 집안의 충성된 애완견 같이 된 겁니다. 그냥 미가의 말 잘 듣고 원하는대로 졸졸 따라다니는 제사장이 됐다는 거예요. 더 안타까운 말씀이 등장합니다.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 아느니라.” 레위인이 내 제사장,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복을 내가 정해 받기 위해 누구를 지금 사용합니까? 말 잘 듣고 개념없는 제사장을 세우는 거에요. 하나님을 나를 위해 조종하고 제사장을 나를 위해 조종하는 겁니다. 나를 위해 충성하고 나 위에 복 빌어 주고 내 말 잘 듣고 나에게 그냥 굽신굽신 거리는 그런 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그걸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내가 원하는 복을 주실 줄 믿는다고 착각합니다. 그게 지금 이 미가의 집에 세워진 신상을 섬기는 허수아비 레위인을 둔 타락한 예배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회자를 내가 낸 돈으로 내가 고용해 월급받는 직원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목회자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졸졸 따라오는 애완견 같은 목사를 좋은 목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의 길에 내가 도구로 쓰임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을 수단으로 만드는 겁니다. 계속 우리는 하나님에게 내 길을 주장하고,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되고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복을 부어 줘야 되고 그리고 그것을 위한 매개체로 그냥 허수아비 같은 목회자를 세운다는 겁니다. 그렇고는 거기서 그냥 우리는 예배 잘 드리고 신앙생활 잘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적절하게 나를 위해 축복하고 적절하게 나를 위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는 목사, 그 가운데 나를 위한 예배당을 세우는 이 미가의 모습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타락한 예배의 전형적인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예배드린다 말하며 그 안에서 회개 없는 신상을 세우고는 그 앞에서 예배드리는 이 모습이 영적 타락의 부끄러운 자화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타락한 예배의 본질이고 타락한 예배의 핵심이었다고 사사기는 증언하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께 도구 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지 아니하면 미가 와 같이 자기가 원하는 신상을 만들어놓고 회개와 돌이킬 없이 내가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조정하려고 하나님의 복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타락한 예배의 주범이 뵐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의 본질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하나님 이끄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이지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을 만들거나, 나를 위해 존재하는 허수아비 제사장을 만드는 게 결국 타락한 예배를 만들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부족한 하나님의 종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쪼개시고 변화시키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로 무릎 꿇지 않으면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 하심이 절대 경험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지는 회개와 돌이킴이며, 내가 하나님께 도구로 엎드리는 것이며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내가 변하고 내가 맞춰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내가 예배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내가 변하며,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며, 내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이 본질을 붙드는 싸움을 지속하십시오.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하여 모든 영적 타락의 끝에는 이렇게 하나님을 수단과 도구로 만드는 우상숭배가 있음을 잊지 마시며 본질을 향해 깨어지고 변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삼손을 마지막으로 사사기 16장까지 열 두명의 사사 이야기를 배웠습니다. 12명의 사사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하향곡선을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17장 부터는 사사기의 결론 말씀이 두 가지 큰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첫번째는 미가에 대한 이야기, 두번째는 레위인의 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두 이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막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그들이 심각하게 신앙이 붕괴되어 있으며 영적으로 암흑기를 지나가고 있는가? 종교적 타락과 하나님 앞에서 행한 악의 끝판왕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결론 말씀으로 증언하면서 사사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결론의 첫 번째로 에브라임 지파 사람인 미가를 등장시킵니다. 오늘 이야기는 돈 얘기로 시작을 합니다. 돈 문제가 불거진 것이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집안에 큰 돈 문제가 생겼는데 집에서 엄마가 은 1100냥을 잃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 당시 노동자의 100년 월급이라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돈을 잃어버린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은 1100이라는 액수가 삼손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던 액수와 똑같습니다. 엄마가 그 큰 돈을 잃어 버리고 나니까 입술로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각한 말들이 입에서 나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더 큰 문제는 실제로 돈을 훔쳐간 자는 멀리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집안의 있었던 자기 자식, 미가였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저주를 듣고 실제로 그 돈을 훔쳐간 자인 아들 미가가 자백을 하게 됩니다. 하여간 그 엄마가 얼마나 저주를 강하게 했던지 아들이 버티지 못하고 그것을 고백한 거에요. 엄마라면 아들이 그렇게 돈을 훔쳐 갔다고 자백하고 돈을 가져오면 어떻게 하는게 정상입니까? 훈계하고 그 아들 정신 차리게 혼을 내야죠. 도적질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어긴 아들, 그것도 그 큰 돈을 슬쩍한 그 아들을 분명히 사랑으로 반드시 훈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집안의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엄마는 이 아들 미가에게 아무런 훈계로 혼내는 것도 없이, 그냥 “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이러는 겁니다. 잃어버릴뻔 한 그 큰돈, 큰 손해 날 뻔 했는데 그 돈 찾게 되었으니 그걸로 오케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돌려준 아들에게 여호와께 복 받기 원한다는 거예요. 그 아들이 정말 여호와께 복 받기 원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해야죠. 그 아들이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범한 그 죄를 토설하고 주님 앞에, 어머니 앞에 용서를 구해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죄에 대한 돌이킴 없이, 그냥 여호와께 복 받기 원한다는 거예요. 돈만 찾았으면 장땡, 손해 볼 큰 돈 찾았으니까 이 아들은 여호와께 복 받을 아들이라는 것이죠. 그 어머니가 그 큰 돈을 잃어버린 게 문제가 아니라 그 큰 돈을 그 아들이 슬쩍 한 게 문제가 아니라 그 아들이 그 돈을 가지고 왔을 때 아무런 훈계나 바른 길을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게 그 막장 집안의 특징이고 더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아요. 아들이 훔쳐가지고 엄마한테 돌려준 은 1100냥을 자기가 다시 갖게 되는게 찜찜했는지 그걸 가지고 신상을 세워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는 거예요.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기 위해서는 그 아들이 주님 앞에서 회개하고 다시 한 번 새 출발 해야 되는데 회개나 돌이킴 없이, 그냥 그 은을 가지고 신상을 만들어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면서 하나님께 거룩히 드린다고 철썩같이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신상, 그것을 예배하는 것이 영적 타락입니다. 결국 우상 이라는 게 뭡니까? 내가 하나님을 조정하고 하나님이 나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게 우상이에요. 입술로는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하지만, 그 은신상은 아들 미가를 위해 존재하는 껍데기 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진짜 원하는 것인 순종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회개와 돌이킴 없이 나를 위해 와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착각하는 것이 예배의 타락입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을 위해 세운 은신상을 위해 제사장 하나를 세웁니다. 무자격 목사, 자격도 없고 훈련도 안받고 바른 가치관을 가지지도 않은 사람을 세워 허수아비 목사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타락한 예배의 모습을 하나의 이야기로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복 받기 원한다고 우리는 기도하고 간구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들이 진짜 복 받기 원하는지 자문 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그냥 세상 복, 땅에 속한 복만 받으면 ok라고 생각하지, 실제로 여호와께 복 받기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거예요. 이 엄마는 지금 입술로는 여호와께 복 받기 원한다 그러지만 전혀 하나님 하고 상관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 복 받기 원한다 말하지만 세상의 복이면 ok, 회개와 돌이킴이 없어도 ok, 라고 말하는 이 모습이 바로 영적인 하향곡선을 그리는 아주 잘못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신앙 타락이란 결국 하나님이 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에게 수단과 도구로 드려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내 수단과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킴 없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내 눈에 보기에 옳은 대로 그냥 신앙을 왜곡시키고 예배를 왜곡시키는 겁니다. 회개와 돌이킴 없이 그 아들을 위해 신상을 세우고,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 그것을 예배라고 착각하는 미가 집안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반면교사 되기 원합니다. 그 타락한 신앙과 예배를 성경은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 예배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주님 앞에 무릎 꿇기 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두고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로서 나의 예배와 신앙이 회복되며, 늘 주님 앞에 돌이켜 주님 이끄시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귀한 은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삼손의 고꾸라지고 무너진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손은 눈이 뽑혔고, 결박되었으며, 블레셋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에 환호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이죠. 자기 신을 찬송하며 삼손이 무너지고 고꾸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삼손만 욕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삼손과 함께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고꾸러짐과 무너짐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철저히 이방 사람들에 의해 모욕당하고 짖밟히고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정신차리고 세상에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되는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고꾸라지고 자빠지면 그냥 내 이름만 먹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고 욕먹게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조롱한 방법은 서커스에 나오는 동물 같이 재주를 넘게 한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시켜서 이거 하라며 이거 하고 엎드려 구르라면 구르고, 사람들 앞에 구경거리가 되버린 겁니다. 영적 능력을 다 상실하고 눈이 뽑힌 삼손, 조롱 거리로 전락하며 세상 사람들 앞에 재주를 넘고 있는 그 삼손의 모습을 깊이 묵상해 보면, 그 모습이 많은 성도들의 모습, 이 세상에서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보게 됩니다. 본질과 영적 능력을 상실한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 받고, 재주를 넘고 사람들의 기분과 눈치를 보는 동네북으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떠난 성도들과 교회는 이렇게 조롱거리가 되고 세상과 사람들을 향하여 재주를 넘는 동물원의 곰 같은 모습이 돼 버리는 것이죠. 우리가 제대로 주님 앞에 서지 못해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 놀림감이 되며 조롱을 받으며 땅에 떨어지는 이 안타까운 일을 우리가 목도하게 되며 주님께 회개하며 부르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삼손은 이제서야 정신을 차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능욕과 비웃음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재주를 넘으며 욕먹고 나서야 드디어 정신을 차리게 된다 라는 거예요. 두 눈이 뽑히고 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겁니다. 그 눈이 있을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사명이 아닌 눈에 보이는 대로 여자와 세상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그 눈이 다 뽑히고 나서야 하나님의 은혜와 사명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 눈이 뽑히기 전에 이렇게 능멸을 당하기 전에, 블레셋 사람들에게 재주를 넘기 전에 먼저 깨닫고 먼저 돌이켰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모든 것이 다 무너지고 나서야 회개하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렇게 산 처참한 결과를 직면하고 나서야 정신 차리게 되는 이 삼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동시에 그렇게 정신 차린 삼손에게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서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는 지혜를 주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마지막에 기회를 주시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삼손의 모습은 동시에 내가 시간을 되돌릴 순 없고 눈이 뽑힌 이 처참한 불순종의 결과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 무너지고 깨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그 두 눈이 뽑힌 상황에서도 내가 재주를 넣으며 모욕을 향한 상황에서도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전히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머리가 조금씩 자라며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삼손을 포기하지 않고 계심을 바라보는 마지막 기회를 붙들고 실패를 딛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죠 이 삼손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이 시대의 성도들과 교회의 모습을 반추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버리고 망각하며 이 세상 무릎에 기대어 잠을 자다 이렇게 완전히 무너지고 고꾸라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세상 앞에 재주를 넘고 있는 이 고꾸라진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합니다. 이 삼손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이 시간 주님의 은혜로 돌아오십시오. 주님 은혜 가운데 회복 되십시오. 우리에게 이 시간 다시 한번 은혜를 주셔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본질을 붙들고 다시 일어나게 하시며 삼손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기도 하기 원합니다. 아직 경고 사인만 있을 때, 아직 두 눈이 뽑히기 전에,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에, 내 인생이 완전히 고꾸라지고 무너지기 전에 먼저 멈추고 돌이켜 주님의 은혜 가운데 나아가 변화 받고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넘지 말아야 되는 선을 결국 넘어 돌이키지 못하고 고꾸라짐과 무너짐을 직면하는 삼손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고꾸라지 직전, 무너지기 직전에 삼손은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여인의 무릎에 잠을 자면서 자기 머리가 밀리는데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는 그 삼손의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사실 이 어리석고 안타까운 삼손의 모습이, 어찌보면 고꾸라지기 일보직전의 위기 앞에서 이 세상의 무릎에 천하태평 잠을 자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모습일 지 모르겠습니다. 삼손과 같이 이 세상이 주는 미혹에 철저히 길들여지며 그 세상이 주는 무릎을 배고 잠을 자면서 내 영적인 능력이 모두 잘려 나가는 데도 알지 못하는 영적 나태함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이렇게 될 때까지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멈추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한 삼손,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경고 사인을 무시한 채 결국 들릴라라는 블레셋 여인의 무릎에서 머리가 밀리우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삼손이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삼손의 결정적인 비극입니다. 눈에 보이는 머리카락이 자신의 힘의 원천이라 믿는 것, 이게 교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여전히 힘이 있다고 착각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 때문에 그가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에 그에게 하늘에서 주시는 특별한 힘과 능력이 있었다는 것을 삼손은 망각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힘의 원천과 능력은 그의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힘의 원천과 능력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 이었습니다. 넘지 말아야 될 선을 넘어가 버린 삼손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떠나셨는데 삼손은 그 여호와의 영광이 자신에게 떠난 것을 알지 못한 겁니다. 자기가 잘나서 자기가 머리가 있어서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줄 알고 착각했던 삼손은 그만 하나님의 사명을 다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향하여 여자를 향하여 모든 에너지의 힘을 낭비하고 이렇게 철저히 무너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떠나신 것을 알지 못하며…이것이 그의 정말 비참한 비극인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의 능력이 떠난, 삼손 그것을 바라본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처절하게 짖밟습니다. 먼저 그를 잡아 결박했습니다. 그 다음에 눈을 뽑았습니다. 삼손의 눈이 뽑혔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어요. 그동안 삼손은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하고 자기 눈에 좋은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눈에 좋은 대로 행하며 끌러 간 그 삼손의 눈이 블레셋에 의해 뽑혀 버린 거예요. 그리고 맷돌을 돌리게 하는 노예가 되는 처참한 인생이 되 버린 겁니다. 이런 비극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절체절명의 위기가 삼손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비극 가운데에 실낱과 같은 희망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삼손의 잘려나간 머리털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는 말로 끝내고 있습니다. 완전히 무너진 그 폐허 가운데 완전히 그의 머리가 밀리고 결박되어 눈이 뽑혀 있는 삼손, 모든 소망을 잃어버린 그 삼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여전히 비추고 있으며, 마지막에 기회가 그에게 찾아 오고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눈 뽑히기 전에 정신차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삼손과 같이 내 눈이 뽑히며 결박되며, 내 인생이 유혹으로 인하여 멈추게 되는 비참한 상황을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는 심판의 때가 오고 언젠가는 찾아오는 그 때가 있음을 잊지 말고 멈추고 돌아서야 합니다. 삼손과 같이 지금 세상이 주는 그 미혹과 유혹에 무릎을 베고 누워 평안하게 잠을 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정신 차리고 깨어 분별해야 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삼손과 같이 고꾸라지고 무너지는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그 눈이 뽑히기 전에 일어나 결단하고 돌이키며 하나님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음이 가장 비참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힘과 능력의 원천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 분이 나를 떠나지 않고 함께함이 나에게 가장 큰 복임을 붙들고 하나님과 함께 함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삶에는 선을 넘어가면 돌아오지 못하는 결정적인 선이 있습니다. 그 선을 넘어가면 결코 돌이키지 못하는 그런 선이 있는 것이죠. 삼손은 그 선을 넘어 가기 전에 들릴라를 떠나야 됐으며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들릴라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박차고 나오지 못하고 결국 그 선을 넘어가 버리고 맙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꾀어서 결정타를 날리는데, 나에게 마음을 주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 말한다는 것이지요. 사랑은 마음을 주고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는 사랑의 정의를 들고 나와 삼손에게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들릴라 자신은 삼손에게 마음이 없고, 마음을 줄 생각도 없다는데 있습니다. 본인은 지금 삼손을 이용하고 있는 여인인데, 니가 지금 나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너는 나에게 마음이 없는 거고 너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말하며 삼손의 양심을 흔들고 마음을 흔드는 겁니다. 들릴라 자신이 삼손을 이용하고 있으면서 명분론을 들고 나와 삼손에게 비밀을 실토 하도록 압박하는 겁니다. 그 압박이 얼마나 강했으면 삼손의 마음이 죽을 지경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삼손은 얼른 정신차리고 나왔어야 되죠. 멈추고 그 자리를 빠져나와 써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결국 돌아오지 못하는 선을 넘어 버리는 겁니다. 자기 눈에 이렇게 잘못된 것에 꽂히게 되면 자기를 이용하고 있는 여자에게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기서 자기의 사랑을 잘못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 결정적인 한방으로 인해 내 마음이 너에게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결국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말하지 말아야 될 비밀을 토해내고 맙니다.
안타까운 것은 삼손이 들릴라에게 진실을 토하면서 자신이 나실인임을 고백합니다. 이 말은 삼손 자신이 나실인이 되었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있었다는 거예요. 망각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게 아니라 머리에 기억하고 있었고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로만 알고 있고 내 몸은 내 생각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지금 끌려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인 삼손이 들릴라가 원하는 방향으로 지금 결박되어 이미 생각과 몸이 끌려가고 있는 거예요. 본인이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블레셋을 적군으로 삼아 싸워야 되는 사명을 부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들릴라가 쳐 놓은 덫에 걸려 결박당한 채 그의 생각과 몸이 끌려 가고 있는 거에요. 질질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려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게 안타까운 일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 쫓아 가게 되면 결국 우리를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그 곳에 결박되어 끌려가고 있는 것이죠 더 안타까운 사실은 머리를 자르지 않았으니 않아 본인은 신실한 나실인이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임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시체도 만지고 독주에 손대고 여자에게 빠져 그의 인생을 방탕하게 허비했습니다. 그 주신 힘을 본래 목적대로 쓰지 않으며 삼손은 방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나실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자기는 머리는 안 자르고 있었기 때문에….그러니까 그 중에 하나 지키고 있으면서 내 삶은 엉망이 되었어도, 머리 하나 안 자르고 지키면 난 나실인이야…착각하며 지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령하신 대부분을 무시하면서 단지 머리 하나 안 밀고 있으면서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삼손 자신은 여전히 나실인으로 잘 살고 있다고 믿는 거예요. 왜냐하면 난 머리를 자르고 있지 않기 때문에…그리고 그 착각 속에 들릴라에게 머리가 밀리울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이 돌아오지 못할 선을 넘어가 버리는 결정적인 이유가 돼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내일 말씀을 통해 삼손이 완전히 무너지고 완전히 나락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손의 착각을 마음 속 깊이 담아 기도하면서, 우리도 이럴 수 있음을 발견합니다. 삼손이 머리를 자르지 않은 것 하나 지키면서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것과 같이 주일 예배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외에 나머지는 전혀 차별이 없으면서, 거룩하고 구별된 자로써 살아야 하는 가치를 대부분 무시하면서 우리는 교회에 주일예배 한번 딱 나오는 것으로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겁니다. 나는 내 삶이 엉망이어도 일상이 무너져도 나는 주일 예배만 드리면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고 똑같이 무너지고 똑같이 죄 속에 헤매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성도로 잘 살고 있다 믿는 거에요. 왜냐하면 난 주일 예배 드리니까….세상적으로 살아가며 세상 중심으로 물질 중심으로 살아가고, 이 세상에서 엉망으로 살아가는데 주일 예배만 한번 드리면 상관없다 착각하는 겁니다. 언젠가는 그 선을 넘어가면 돌아오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지는 임계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 전에 우리는 단절하고 거기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세상 유혹과 미혹이 있는 곳에 점점 늪과 같이 빠지기 전, 선을 넘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면 삼손같이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삶에 돌아서야 될 때 돌아서고 떠나야 될 때 떠나며 그 자리를 나와야 될 때 나오는 그 결단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또한 삼손과 같이 나는 머리 하나 자르지 않았다고, 주일 예배 한번 드린다고, 나의 일상의 삶이 전혀 하나님과 맞춰져 있지 않음에도 나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지금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으로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뜻에 주님의 길에 맞춰줘 살아가야 되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은혜를 붙드시고 오늘 하루 주님의 조율하심 가운데 승리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을 살다 보면 경고 신호등이 있는데 그 경고 신호등을 한 번은 지나칠 수 있지만, 경고 신호를 반복적으로 무시하게 될 때 결국 그걸 통하여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인생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삼손은 지금 경고 신호를 반복적으로 무시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으며 들릴라를 통해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기 일보 직전 입니다. 딤나의 여인도, 들릴라도 삼손은 자기 눈에 사랑을 빠지게 한 여자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여자들은 삼손을 사랑한 게 아니라 삼손을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딤나의 여인은 협박 때문에, 삼손을 꾀어 이용하는 거고 오늘 말씀의 들릴라는 돈 때문에 지금 삼손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본인은 지금 들릴라를 사랑한다고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라고 착각하지만 그 여자는 지금 삼손을 이용하고 있는 이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내 눈에 좋은 대로 따라가는 삼손이 지금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경고 신호를 무시하며 똑같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말씀을 보면 들릴라가 세 번이나 지금 삼손에게 너의 힘의 근원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알려 달라고 얘기합니다. 반복적으로 꾀어, 속이며 삼손에게 빙 돌려서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직설적으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네 힘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는 것이죠. 삼손을 결박해서 풀 수 없게 하는 그 비밀이 무엇인가를 계속 지금 캐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포장된 사단의 미혹으로 대표되는 이 블레셋 여인은 삼손에게 힘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끊임없이 접근하고 미혹하고 깨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삼손이 이것을 영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못하고 빙 돌려서 하는 것도 아닌 직접적인 요청에 대해서 경계 하거나 끊어 내지 않고 농담 하듯이 주고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위험한 장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죠. 반복되는 들릴라의 꾀임과 요청은 갈수록 강도가 세지고 압박이 세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희롱하는 거라고 막 몰아세우며 삼손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지금 농담하는 것 같아요 너무너무 아슬아슬하게 지금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집안에 지금 블레셋 사람들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인을 결박했습니다. 삼손 본인이 한번 그걸 끊었으면 들릴라에게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고 정확하게 그에 대해서 선을 그으며 더이상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정확한 바운더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삼손은 그런 들릴라의 꾀임에 전혀 심각성이 없습니다. 본인을 결박하고 있는데도, 결박되는 게 뭔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심지어 마지막에는 정말 줄타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당신을 결박 할 수 있는지를 내게 말하라고 할 때, 자기의 진짜 비밀인 머리털 얘기를 꺼내면서 지금 줄타기를 하는 거예요.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을 듯 말 듯 하면서도 삼손은 전혀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그것을 그냥 즐기듯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결국 내일 말씀을 통해 선을 넘어가고 완전히 무너지고 고꾸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선을 넘어가서 그 처절한 대가를 삼손이 치르게 되는데 그 전에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은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경고 신호를 무시한 테 그 경고로 가까이 오는 이 모든 압박을 장난으로 농담으로 생각하며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았던 겁니다. 이는 마치 롯의 예비 사위들이 롯의 경고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완전히 멸망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삼손은 여전히 내 힘을 충분히 강하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더 나아가 그게 하나님이 주신 힘이 아니라 나의 힘이라고 착각한 것이죠. 내가 싸워야 할 주적이 누군지 모르고 적군과 아군을 구별 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적군에 여인에게 이렇게 똑같은 패턴으로 계속 당하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본인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데 본인의 영적인 상황을 전혀 깨우치지 못하는 영적인 어두움 가운데 삼손은 헤매는 것입니다. 삼손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호명하셔서, 이름을 불러서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으로 이 세상에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호명하시고 주신 사명에 집중하지 않고 이렇게 다른데 시선을 돌리게 되면 미혹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세상이 우리를 속이고 세상이 우리를 이용하고 있는데 그 이용하는 것에 당하며 그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그 똑같은 팬은 패턴의 무너지고 있지 않습니까? 내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뜻을 잃어버린 채 그저 눈에 보이는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을 쫓아가는 삼촌과 같이 이 세상이 던져주는 미끼를 덥석 물으며 무너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결박 하려고 이렇게 모든 것을 동원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혈안 인데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하태평으로 삼손과 같이 농담으로 생각하고 장난으로 생각하며 이렇게 영적 벼랑 끝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사명을 붙들고 유혹의 자리는 만들지도 말고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지 말고, 나를 결박 하려고 하는 그런 조짐들이 있을 때 바로 끊어내며 가까이 가지도 말고 우리는 늘 영적으로 깨어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손과 같이 넘어지기 쉬우며 무너지기 쉬우며 똑같은 패턴의 당하기 쉽상인 연약한 존재임을 깨달아 주님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백성 되기 원합니다. 세상이 주는 협박과 압박을 농담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깨어 기도하여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선명한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사 삼손은 나실인으로 블레셋과 싸워 이겨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부어졌는데 그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힘과 능력을 사명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자신의 욕구를 위해 모든 것을 탕진하고 낭비한 자가 바로 삼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블레셋 여인을 한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그 여인과 결혼하려 하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습니다. 내 눈에 보기에 좋았던 여자가 결국은 잘못된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여인이 아니었고 결국 결혼도 파탄을 경험했습니다. 그 대가는 정말 어마어마 해서 장인과 그 결혼할 여인이 모두 불타 죽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분노가 이끄는 잘못된 결정과 보복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 정도 큰 일을 경험하고 직면했으면, 삼손은 이제 내가 잘못했고 이제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을 향해 올인 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돌이켰어야 하는데, 삼손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심에 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는 삼손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힘과 능력을 반복적으로 여자들에게 다 쏟아 버리는 그 안타까운 모습으로 완전히 고꾸라지고 무너지는 삼손의 모습을 16장 말씀을 통해 보게 됩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삼손이 가사에 있는 기생에게도 들어갑니다.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 나실인, 사명을 위해 부름받은 특별한 나실인이 창녀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말씀은 의도적으로 “한 기생을 보고”를 강조합니다. 기생을 보고 그에게 하룻밤 지내려고 들어간 겁니다. 그런 잘못된 결정, 눈에 보이는 대로 이끄는 결정을 삼손은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잘못된 길을 계속 반복하여 가는 것입니다. 여전히 돌이키지 않은 삼손의 어리석음, 자기 눈에 그냥 마음에 들면 그냥 직진하는 이 악순환을 끊어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삼손이 기생에게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근심하게 하는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쓰임 받아야 되는 그의 특별한 힘과 능력이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낭비되고 탕진 되는 그 모습, 결국 잘못된 삶의 패턴을 끊어버리지 못하고 그 죄의 패턴에 끌려 다니는 안타까운 삼손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삼손 개인의 모습이자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향곡선을 그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기생 집에 들어가 하루밤을 보내고 있는 삼손의 대한 이야기가 블레셋 사람들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모두 지금 에워싸고 그렇게 기생과 놀다가 나오는 삼손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인과 기생과 밤새 놀다가 나와서는 성 문짝과 뒷장을 다 빼서 어깨에 매고 산꼭대기로 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무서워서 삼손을 죽이기는 고사하고 공격할 수도 없는 겁니다. 이 두가지의 말도 안되는 조합이 여전히 지금 삼손에게 있는거예요. 그에게는 이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힘과 능력이 여전히 부어져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특별한 힘과 능력이 사명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 거죠. 밤새 눈에 홀려 창녀에게 가서 힘 쓰고, 나와서는 성문짝 들고 산에 올라가는, 사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냥 자기 힘 자랑 밖에 되지 않는 겁니다. 그 말은 여전히 하나님은 삼손에게 돌아올 기회를 주시려 하는데, 삼손이 결국 그 기회를 완전히 날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두번째 여인의 이야기인 들릴라, 삼손의 금사빠, 금새 사랑에 빠지는 이 패턴이 완전히 무너지게 만드는 여인입니다. 유일하게 이름이 등장하는 여인인 들릴라, 이 여인으로 인해 삼손은 완전히 고꾸라지고 무너집니다. 들릴라라는 블레셋 여인이 겉모습은 매력적이 있을지 모르나 그의 속은 블랙셋 사람들의 첩자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은 1100에 매수당해 삼손의 놀라운 힘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접근하는 간첩이었던 것입니다. 지금 삼손은 금사빠가 되어 자기 눈만 믿고 사랑에 빠져서 사랑한다고 들릴라에게 나아가고 있는데, 들릴라는 이미 돈으로 매수되서 삼손을 사랑을 빙자해 이용하려고 나아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삼손의 어리석음입니다. 특별히 말씀은 삼손을 “꾀서,” “결박하려” 라는 말을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본인은 자기 눈에 좋아 사랑한다고 이것을 사랑이라고 믿으며 나아가 지만 그 여인은 전혀 딴 마음으로 지금 삼손에게 가고 있는 겁니다. 이 두 단어가 사단 마귀가 성도들이 하는 전형적인 방법입니다. 꼬셔 가지고 미혹해서 계속 죄로 결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꾀어 결박시키는 것, 그래서 결박 당한채로 질질 끌려 다니게 만드는 것, 이게 패턴임을 바라보는 영적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들릴라와 같이 겉으로는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아오는 사단의 미혹을 경계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속이고 결박하게 하는 이런 잘못된 모습으로 오는 것들을 거절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런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도 없었고 자기 눈만 믿고 사랑에 빠져 이 들릴라의 미끼에 그냥 된통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버린 것입니다. 성경에서 “방탕 하다”는 것은 주신 목적과 달리 이것을 낭비하고 허비하는 데 있습니다. 삼손이야 말로 이 방탕한 인생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능력과 힘을 사명과 관계없는 일에, 힘 자랑 하는데 다 쏟아 버리고, 여자한테 다 쏟아 버리는 이 어리석은 자, 미끼에 물려 속고 있고 결박되고 있으면서도 영적 시야가 닫혀 완전히 무너지고 자빠지는 삼손의 모습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많은 능력과 많은 힘과 많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마십시오. 내가 특별히 잘 살고, 특별히 잘 나가고, 특별한 재능이 있고, 특별히 자녀들이 잘 되고 있다면, 그것에는 우리를 통해 이유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맞춰 그것이 사용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 복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삼손과 같이 이렇게 화가 오며 결국 자기를 무너뜨리는 안타까운 결과가 찾아옴을 잊지 마십시오. 이 삼손의 실패를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와 놀라운 재물과 놀라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안에서 사명에 맞춰서 사용되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통하여 블레셋 사람과 유다 사람들에게서 드러나는 이중성을 배웠습니다. 직접 대면해야 될 적군과 원수와 싸우는 대신 약하고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하고 희생양을 삼으려는 이중성의 모습이 악한 죄의 본성입니다. 유다 사람 3000명이 블레셋이라는 적, 원수와 싸우는 대신 삼손을 결박해 갖다 바치기 위해 왔습니다. 삼손은 감사하게도 그 동족인 유다 사람들과 싸우는 것을 포기합니다. 왜냐하면 삼손이 싸워야 되는 것은 동족이 아니라 주적인 블레셋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유다 사람들이 자신을 결박해서 블레셋 사람들에게 내어주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결박되어오는 삼손을 바라보며 블레셋 사람들은 거의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1년치 모든 양식을 태워버린 삼손이 결박되어 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축제 분위기로 기뻐하는 찰나에 삼손에게 묶여 있던 모든 결박들이 다 풀어졌습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그에게 임해 결박된 것이 그의 손에서 다 풀려 버리는 겁니다. 나를 묶은 결박이 다 풀려버리는 기적, 이게 하나님의 역사속에 저와 여러분들이 경험하는 놀라운 일이에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일이 뭡니까?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의 결박을 이렇게 다 풀어 버리시고 끊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참 자유 죄의 끌려 다지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유와 해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손은 묶였던 결박이 모두 풀어지며 여호와의 영에 붙들려 나귀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1000명을 한번에 제압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라봐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삼손을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턱뼈가 대단한 게 아니라, 삼손이 대단한 게 아니라, 삼손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 큰 승리 이후에 자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착각이 찾아옵니다. 안타깝게도 놀라운 승리를 주시고 나서 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 자기 자랑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주님께 영광 돌립니다…이런 말은 고사하고 주님의 이름 조차 나오지 않아요. 삼손이 내세운 건 뭐냐면 모든 사람 내가 죽였다는 거죠. 이 싸움의 승리 원인은 내가 대단해서 이겼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힘을 블레셋 여인에게 낭비하고 사명과 관계 없이 살아가는 삼손, 잘못된 결정으로 계속 무너지는 삼손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사용하셔서 큰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 커녕, 자기 자랑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고마움을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삼손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오늘도 사용하시고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내 힘을 넘어서는 놀라운 승리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내 스스로는 알잖아요… 이 승리가 내 힘으로 나올 수 없는 결과라는 것…그 때는 바짝 엎드려 모든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께만 영광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고마움을 알고 은혜에 고마움을 알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되요. 그러면 더 좋은 영적 선순환으로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시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승리 앞에서 자기 자랑하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하나님의 고마움을 모르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이 착각를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무너지게 되고 승리 후에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죠 내가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것은 바로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진짜 고마워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의 하나님께 쓰임 받는 교회,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목회자가 하나님께 고마워하고요, 목회자가 성도에게 고마워하는 마음 가득한 것입니다. 성도들도 하나님께 고마워하고 목회자한테 고마워하는 겁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교회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목회자가 성도에게 고마워 하는 걸 모릅니다. 성도들은 늘 목회자에게 불평하고 고마 하고 감사하는게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도 고마움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고마움을 잊어버리고 감사를 잃어버리는 게 영적 악순환 이라는 거예요. 영적으로 건강한 가정, 영적 선순환이 있는 가정이란, 남편이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워 하는 겁니다. 이런 아내를 나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마워 하는 거에요. 아내는 남편에 대해서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겁니다. 이런 남편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사는 거예요. 안 되는 가정에서는 남편이 아내 고마움을 모르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 고마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서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결국 삼손 같이 고마움을 모르고 내 자랑 하다가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바르고 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산다는 것은 뭐냐면 바로 이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거예요. 고마움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갈 때 그 삶에 있어서 은혜가 덮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고마운 게 많은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이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나를 통해 역사하시며 나에게 큰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고마움이 흘러 넘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고마움과 감사가 흘러 넘치고, 늘 하나님의 영광 보다 앞서지 않는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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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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