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불순종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솔로몬 이후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겉으로는 열 지파가 북 이스라엘이고 두 지파가 남 유다니 크기로 봤을 때 비교되지 않았습니다. 겉보기에는 북 이스라엘이 훨씬 강성하고 사람들도 많고 땅도 넓은 모든 것이 우월한 조건과 같이 보였고, 반면에 남유다는 너무나 작고 연약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북 이스라엘은 점점 영적인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북 이스라엘이 강성하고 땅도 넓어 모든 조건들이 우세해 보였으나, 속으로는 보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그들은 점점 망해가는 악한 백성이 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이 열왕기 상하 말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남유다의 아사왕은 40년 넘게 한 왕으로서 섬기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영적으로 안정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죠. 반면에 북 이스라엘은 땅덩이가 그렇게 넓고 열 지파가 있었지만 계속해서 정치적 불안정에 왕이 바뀌게 되는 것을 증언합니다. 오늘 말씀만 보게 되도 북 이스라엘에 두 왕이 세워지는 것을 증언하는데, 그 과정도 아름답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피바람이 치는 쿠테타를 통해 왕이 비정상적으로 바뀌는 불순종과 반역이 계속 반복되는 악한 나라의 대표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냥 군사적,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영적 문제라는 것을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엄중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첫번째 왕은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이라는 왕이고요 그 다음에 세워진 왕은 바아사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하나님한테 아버지와 별반 다를게 없는 악한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악했던 아버지의 길로 행하고, 북 이스라엘은 계속 어둠의 길로 나아가게 한 왕이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어떤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왕이었다는 것이죠. 우리 인생의 평가도 겉보기에 어떠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속의 중심이 어떠했는가가 중요하고요, 사람들 보기에 어떠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어땠는가가 가장 중요한 평가라는 것을 아는 게 지혜입니다. 그는 왕으로서 북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아버지의 길을 가게 하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 그 아버지의 길을 계속 갔다는 건 뭐냐면 북 이스라엘이 죄 중에 헤매게 만든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는 쉽고 편하고 부담 없는 신앙으로 타락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 여로보암의 길에서 단절하여 새로운 길로 갔어야 하는데, 아버지의 길을 답습하며 아버지가 가는 그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의 길을 계속 걸어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게 그 사람 개인으로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이 죄에 뒹굴게 만든 영적 책임을 왕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왕의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이시고 세우시는 자리이기에 거기에는 훨씬 더 무거운 영적인 책임이 그에게 요구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하게 증언하는 것이죠. 그 결과가 뭐냐면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은 2년 밖에 왕으로서 자리에 있지 못하고 결국 살해당하면서 그 왕위를 빼앗기게 됩니다. 신하에게 배반으로 살해당하므로 그의 짧은 왕위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나답만 그렇게 살해당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 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멸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도 왕위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여로보암의 집에 모든 사람들을 다 멸하고 씨를 말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의 보복은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의 아내가 변장하고 찾아왔을 때 주신 그 선지자의 예언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이 아파서 그 아들을 혹시 고칠 수 있을까 해서 변장해서 그 부인을 아이에게 보냈는데 선지자가 했던 경고의 말씀은 이렇게 죽어가는 아이가 오히려 가장 복된 아들일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아들들은 무덤도 없이 평범하게 죽지 않고 모두 멸하게 될 거라는 것을 이미 예언한 것이죠. 그리고 그 말씀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 나라를 향하여 주시는 경고의 예언은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는 선지자의 안타까운 마음이 묻어납니다. 지금이라도 그 말씀이 현실화 되기 전에는 얼른 정신 차리고 돌아와 북 이스라엘을 제대로 통치하며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초심을 지켜라…그 나쁜 일이 열매로 맺어지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돌아오길 원하셨고 정신차리기 원하셨는데, 악한 여로보암과 그 모든 집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 여기며 무시하고 계속해서 악한 길로 행하며 결코 그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쿠테타를 통해 온 여로보암의 집안 씨를 말린 후 왕이 된 바아사는 어떠했을까요? 죄악으로 가득한 여로보암의 집안을 멸하고 왕위에 오른 바아사는 다르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모든 우상을 무너뜨리고 새 출발하는 왕이었는가? 안타깝게도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여로보암의 집안을 다 단절하고 북 이스라엘이 새로운 출발을 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과 간절한 마음이 있으셨는데 바아사는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불순종과 우상숭배의 길을 동일하게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북 이스라엘이 다시 한번 영적으로 타락하고 하향 곡선을 걷게 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만 타락하고 불순종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바아사 왕은 한 백성, 한 형제자매인 남유다와 일생동안 전쟁을 했습니다. 일생동안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며 칼부림을 하는 겁니다. 내부 총질을 하면서 원수되어 서로 싸우니까 양쪽 다 영적으로 무너지고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짜 주적을 알지 못하고 서로가 무너지며 서로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 안타까운 상황 이것이 바로 북 이스라엘이 처한 영적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둔감해지며, 좋지 않은 쪽으로 계속 흘러가는 죄성을 가진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안 좋은 것은 끊어내고 단절해야 하는데 그 단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그래서 북 이스라엘과 같이 악한 것은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따라가게 되는 패턴이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엄중하게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원하시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상을 섬기며 불순종하고 등을 돌리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서로 내부 총질을 하며 싸우고 원수되는 이런 일들이 반복하게 되면 얼마나 하나님 마음이 아프실까를 마음 속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우리가 정말 싸워야 될 대상은 바로 보이지 않는 사단 마귀이며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순종하는 순명의 길임을 잊지 않고 말씀을 붙들기 원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늘 민감하게 깨닫고, 겉보기에 어떠함이 아닌 속으로는 어떠한지를 늘 점검하며 살아가는 삶,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평가를 생각하며 살아갈 때 이 안타까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반복되지 않을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순명으로 하나님 뜻 가운데 거하는 백성,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말씀이 이루어지는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오늘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 왕에 대한 이야기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여로보암, 아비아 세 명의 왕은 하나같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우상 숭배하며 불순종으로 무너진 왕이었습니다. 이런 왕들 밑에서 남유다의 역사는 계속 영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고 불이 점점 꺼지는 어두운 상황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사왕은 그 세명의 왕들과 달리 하나님 앞에 다른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이런 평가를 정말 얼마만에 보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호와 앞에 보시기에 정직하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된 왕이 드디어 나온 겁니다. 세 명의 선대 왕들은 모두 그렇게 불순종하고 죄짓고 우상숭배로 무너졌지만 아사왕을 통해 빛과 같이 등불과 같이 남유다를 새롭게 세울 왕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다윗의 언약을 기억하며 보내주신 아사왕이 모든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걸어가는 왕이 된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순전했던 아사왕은 남유다에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41년 동안 왕국을 다스리는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3년 밖에 왕위에 있지 못했던 거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겁니다
아사왕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직하게 행하고 순전한 왕이었는가….첫째로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앴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영적 반응이었죠. 남색하는 자가 바로 가증한 일에 대표인데, 그 가증한 일을 하는 자들을 그 땅에서 다 쫓아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을 우상들을 다 없앤 거죠 그게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이었다는 것이죠. 왕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해야 될 일을 제일 먼저 한 자가 바로 아사왕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는 그 꺼져가는 불길을 다시 태우며 여호와를 바라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기준을 붙들고 그 불순물과 그 가증한 것들을 다 제하여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대한 수용적인 태도가 아사왕을 이렇게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말씀을 대하는 아사 왕의 놀라운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친어머니와 충돌하면서도 우상을 무너뜨리는 아사 왕의 결단이 증언되고 있습니다. 아사왕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얼마나 믿음의 반응을 강하게 보이고 결단했는가 하면 자신의 친어머니와 충돌하고 부딪히는 겁니다. 자기를 낳아주신 사랑하는 어머니이지만 그 어머니가 혐오스러운 아세라상을 만들고 계속 우상을 숭배하는 겁니다. 자신의 친어머님에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가 우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니까 왕의 어머니로서의 자리를 폐위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서 모든 아세라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 불사르는 겁니다. 신앙을 결단할 때 가족이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가족이 가장 걸림돌이 될 수 있고 장애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식에게 어머니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고 뗄 수 없는 귀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바른 신앙과 친어머니가 충돌했을 때 아사왕은 어머님 대신에 하나님을 선택해서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어머니가 좋아하는 모든 우상들을 다 찍어 불살라 버릴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결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믿음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친어머니를 폐위하면서라도 그 마음의 가지고 있던 말씀의 반응, 소위 말하는 종교개혁을 이렇게 대담하게 시행한 왕이 바로 아사왕이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아사 왕이 하나도 흠이 없고 문제가 없었느냐… 그건 아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산당은 없애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흠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산당을 없애지 않은 것은 아사왕에게 있어서 과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께 온전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큰 과오는 아사 왕이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실수와 실패입니다. 지금 한 형제 자매인 남과 북이 지금 서로 원수가 되어 싸우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을 이기기 위해 아람 왕이라는 외세에 선물과 은금을 보내서 친선 조약을 맺고 북 이스라엘을 침략해 달라고 부탁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동족이 싸우는 것도 지금 말도 안 되는데 그 동족이 싸우는 전쟁판에 외세를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심각한 영적 문제가 되었고, 그 결과 인생의 마지막에 그는 발에 병이 나서 죽었습니다. 아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버리고 가는 왕이 얼마 못가서 발병나 죽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넓은 마음으로 은혜의 마음으로 아사왕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것이죠.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 그만큼 그 시대가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바라보고 은혜로 바라보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마음도 동시에 드러나 있는 것이죠. 이 시간 우리가 이 세상에 등불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세상이 그만큼 어둡고 희미하며 점점 그 등불이 꺼져가며 완전한 어둠을 향해 달려가는 시대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우리는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 앞에 삶을 살아가면서 그 땅에 모든 우상들과 가증한 것들을 없애며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일평생 온전한 복된 평가를 받기를 사모하며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앞에 일평생 마음이 온전했다는 평가, 우리 모두가 정말 듣고 싶어하는 평가가 되기 원합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대하는 태도인 순종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 앞에 온전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평가할 때 무서운 몽둥이들고 떨어뜨리려고 우리를 혼내려고만 서 계시는 무서운 심판관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들여 보내려고 어떻게 하든지 천국에 들어가게 하려고 가능한 팔을 쫙 펴시며 되도록 많은 사람이 들어오도록 갈망하시고 열망하시는 그 은혜의 눈빛에 하나님이 우리의 믿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사왕은 실패와 무너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했다고 평가하는 놀라운 평가를 듣는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작은 등불 하나가 어두움을 모두 물러가게 하며 그 자금 등불 하나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때 이런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경험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연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품어주시고 사랑하시는 은혜의 눈 가운데 나의 인생을 두고, 하늘의 평가가 있음을 잊지 않으며, 나의 신앙을 결단하며 오늘도 충성하며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며 나아가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 두 번째 왕인 아비얌 왕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서 구조가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유다의 왕국이 계속 교차되면서 그 연대를 비교하면서 두 왕조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자꾸 왕조가 바뀌고 무너지는 속도가 좀 빠르고 남유다는 좀 덜 바뀌고 무너지는 속도가 느리다는 차이가 있지만 중요한 것은 두 나라 모두 계속해서 더 좋지 않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공통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르호보암 왕 이후에 세워진 아비얌은 어떤 왕이었는가 하면 예루살렘에서 3년동안 왕으로 다스리고 그의 어머니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 살롬의 딸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왕이 어떠했는가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그 왕의 어머니가 누구였는가를 주목하며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왕에게 있어서 어머니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왕이 하나님 앞에 선한 왕인가 악한 왕인가를 판가름할 정도로 그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게 결국 어머니의 영향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유다왕 아비얌은 하나님께 받은 평가가 좋지 않은 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행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길지도 않는 3년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지었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면 그 짧은 시간 동안 계속 전쟁했다…이렇게 평가된 왕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아비얌에게 하나님이 놀라운 소망을 하나 주신 등불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을 통해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하시는 등불을 주셨습니다. 현재 남유다의 영적 상황이 등불이 꺼지는 빛을 잃어가는 영적 하향 곡선을 계속 그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잘못했죠 그 아들 로호보암이 잘못했죠. 그 아들인 아비얌도 잘 못했죠. 3대가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는데 영적 상황이 좋을 수가 없습니다. 점점 빛을 잃어가는 남 유다,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남유다의 꺼져가는 빛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전적인 은혜로 소망의 등불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남유다가 망하지 않도록 다윗을 위해 등불을 보내신다는 겁니다. 등불이라는게 누구냐 하면 망하지 않도록 등불과 같은 사람을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등불과 같은 아들을 세워 그를 통해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할 것을 약속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에 등불과 같은 사람을 보내 주셔서 예루살렘을 견고하게 한 사건이 바로 남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 가운데 있었던 간증이었습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그 아들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계속 전쟁이 있었습니다. 동족인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원수가 되어 물어 뜯으며 계속 전쟁을 한 겁니다. 이 전쟁을 하나님은 계속 하지 말라고 피하라고 명령하셨는데 불순종하는 두 왕은 계속해서 서로가 원수가 되어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에는 증언되지 않는 이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역대기에는 등장 하는데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싸울 때 숫자적으로 봤을 때는 북 이스라엘이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앞뒤 좌우에서 포위해서 남유다는 거의 독 안에 든 쥐같이 됐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아비암과 백성들은 그 극도의 두려움과 불안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제사장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절체 절명의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하지 않으며 주님 앞에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손이 개입하셔서 패배가 유력했던 남유다 앞에 북 이스라엘을 쳐서 패하게 하셨습니다. 북 이스라엘 중에 엎드린 자가 50만 명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주신 등불과 같은 사람을 통해 주신 놀라운 승리입니다. 그게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놀라운 승리를 경험하고 하나님이 주신 등불로 그런 놀라운 전쟁의 승리를 경험하고도 아비얌 왕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 죄짓고 불순종해서 하나님께 악한 왕으로 그 짧은 3년의 시간을 보내고 끝났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서의 관점은 왕에 대해서 아무래도 비판적이고 어떻게 보면 왕을 평가하는 것이 좀 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서의 관점에서 왕을 바라보니, 나라가 그렇게 영적 하향 곡선을 그리며 결구 망하게 되는 데 왕이 가장 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의 관점에서 왕을 바라보니까 왕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 문제 있는 자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왕기서는 목적 자체가 왕을 찌르고 깨워서 그가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돌아와야만 백성들이 산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아비얌은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 거라곤 동족과 전쟁이고, 하나님께 죄짓고 불순종한거 밖에 없다는 평가로 마무리 됩니다. 왕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짓고 불순종한 왕, 동족인 북 이스라엘과 계속 전쟁한 왕, 이게 아비얌에 대한 성경의 평가이고 어떻게 보면 그것이 우리 인생의 평가일 수 있음을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평가를 받느냐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하나님 앞에 죄짓고 무너지고 불순종하는 인생을 살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주님의 눈에 합한 자로 살 것인가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평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를 늘 민감하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늘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한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 눈에는 이 세상에 악인이 판치는 것 같고 악인을 앞서는 거 같고 주도하는 것 같은 그런 세상을 살고 있을 때, 적들은 늘 우리보다 많아 보이고 그 세상에 악한 것과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없는 꽉 막혀 있는 상황에 직면한 것 같이 보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등불과 같은 사람들을 보여주시며 하나님이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이루며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며 지키시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 가운데 경험되는 것이 바로 성도의 특징이라 믿습니다. 우리 자신이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나아가는가 나아가지 않는가에 따라 우리 삶에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시는가 역사하시지 않는가 판가름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바라기는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늘 하나님의 평가에 민감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등불과 같은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일하시고 승리를 주시는 은혜를 구체적으로 체험하며 주님과 함께 승리의 삶, 순종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상하 말씀의 구조는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의 왕을 교차하며 비교 대조하며 하나님 앞에 어떠했는지를 증언합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타락하고 불순종했으면 남유다라도 좀 괜찮고 순종하면 좋은데 둘 다 하나님께 타락하고 불순종해서 누가 덜 무너지고 있는가를 계속 보고 있으니 하나님의 안타깝고 답답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너무나 짧은 시간에 변질되고 불순종하며 무너졌는데 그렇다면 남유다의 상황은 어떤가…그들도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그게 오늘 말씀에 큰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솔로몬의 그 불순종을 청산하고 백성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자 여로보암에게 떼어서 열나라 열 지파가 북 이스라엘을 세웠는데 북이스라엘도 변질되어 무너지고, 남아있는 르호보암과 남유다도 하나님을 마음 아프게 하고 불순종하며 노엽게 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된 때가 41세 인데, 그때 본인의 섣부른 판단과 잘못된 결정으로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습니다. 12지파 중에 10지파를 잃어버리고 남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 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큰 어려움을 당하고 분단의 아픔이 딱 찾아오니까 르호보암 왕이 한 3년 정도는 정신 바짝 차리고 하나님께 꼭 붙어서 순종하고 살았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뭐냐면 북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가려 했는데 하나님이 가시는 길을 막았을 때 순종하며 전쟁하지 않고 되돌아 온 것이 바로 하나님께 순종한 신실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정도 지나고 나니까 르호보암이 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17년을 왕으로 있었는데 처음 3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생을 이렇게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며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불순종으로 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며 노엽게 한 그 불순종의 모습은 우상숭배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모두 주일 되면 예배드렸고 때 되면 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과 겸하여 우상과 금송아지도 섬겼다는 것입니다. 요즘 시대로 얘기하면 하나님도 섬기고 돈 신도 섬기고 권력신도 섬기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며 섬기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불순종이었습니다. 남유다의 영적 타락은 우상숭배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을 보게 되면 남색하는 자들과 가증한 일들이 나오게 됩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지 말아야 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이 타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똑같습니다. 타락하는 순서와 타락하는 범위와 타락하는 내용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 들을 하면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가면서도 그게 문제인지 모르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로 무너지게 되는 원인 하나를 성경은 지적하는데 바로 어머니의 영향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데 있어서 아버지가 아무리 유대인이어도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면 유대인이라고 고려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모계, 어머니를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어떻게 하느냐가 자식의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의 어머니가 암몬 사람, 즉 밀곰 우상을 섬기는 암몬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밀곰신이라는 암몬의 우상에 젖어 있는 어머니 밑에서 아들이 하나님만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우상을 섬기는 그 어머니의 영향을 르호보암은 철저하게 받고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며 우상숭배와 가증한 일을 한 결과 애굽으로부터 침략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남유다를 치러 오는 애굽이 솔로몬이 정략결혼했던 나라였다는데 있습니다. 솔로몬은 바로 왕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면서 그 강대국을 의지하면 우리는 안전하고 우리는 군사적으로 문제가 없고 든든할 거라고 착각했었죠. 그런데 한 세대 만에 믿었던 강대국 애굽으로부터 직접적인 공격을 당하는 겁니다. 사람의 힘과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여 내 안전과 보호를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또한 여호와의 성전의 보물과 왕국의 보물을 모두 빼앗깁니다. 솔로몬 시대에 금을 이렇게 많이 쌓아두며 내가 이렇게 대단하고 이렇게 잘 산다고 착각하며 살았던 그 모든 것, 성전을 금으로 다 채우고 왕궁을 금으로 다 채운 것을 한 세대 만에 다 빼앗기고 털리는 것입니다. 돈을 붙들고 금을 붙들고 여기에 나의 모든 것을 걸며 나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두려는 마음이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를 성경은 엄중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모래성과 같은 착각의 허무함이라는 것이죠 외부로부터 애굽의 침략으로 어려움이 끝나지 않고 내적으로도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애굽으로부터의 침략과 함께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끊임없는 전쟁이 계속됩니다. 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 형제 자매가 서로 물고 뜯으며 원수가 되어 전쟁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모습을 누가 제일 좋아하겠습니까? 사단 마귀가 제일 좋아하겠죠. 서로 함께 가야 될 한 백성, 한 사명을 향해 움직여야 될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움닭이 되어 물고 뜯으며 매일같이 전쟁하는 모습이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였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며 원수가 되고 있으면, 교회 안에서 목회자와 평신도가 서로 물고 뜯으며 서로 전쟁하고 있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성경은 이것이 불순종의 결과 나타나는 영적 타락임을 엄중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특별히 세우신 곳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고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성전됨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예배하는 곳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의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그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고, 신앙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노엽게 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교회가 되는 비결은 예수님의 이름을 두실 수 있는 곳, 예수님의 눈과 마음이 향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두실 수 없는 곳이 되면 본질에서 벗어난 하나님 앞에 악한 교회, 타락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여러분들에게 전달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남쪽에 있는 나라도 북쪽에 있는 나라도 하나같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보시기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며 우상숭배하고 무너지고 있는 저 안타까운 모습들, 하나님을 붙들고 의지하는 대신 여전히 세상을 의지하고 세상 힘과 권력을 의지하고 세상의 금과 돈을 의지하고 무너지는 모습들, 함께 하나되어야 할 하나님 백성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움닭과 같이 서로 물고 뜯으며 싸워 사단에게 박수치게 하는 모습들, 그 안 좋은 일들을 계속 반복하며 하나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들이 이 시대에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반성하기 원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교회를 돌아보며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우리가 정말 붙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고 내가 믿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밖에 없음을 마음으로 고백하기 원합니다.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며 우상을 무너뜨리고 주님만 예배드리며, 주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결단으로 주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에게 여러번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셨습니다. 근데 그는 내미신 하나님의 손을 붙들지 않고 돌아오지 않았고 새 출발하는 기회를 다 날려버렸습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의 손이 마르는 것을 경험하고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목도하면서도 지금 내가 잘못 가고 있구나… 하나님께서 돌아오라는 회개의 사인이구나… 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여로보암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를 증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아들이 아픈 것입니다. 아무리 왕이고 모든 것을 가졌어도 아들이 아픈데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는 한계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아들이 병들어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면서, 그 어려운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기억했으면 여로보암에게 회복의 문이 열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마지막 은혜로 주신 기회를 붙들고 돌아올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여로보암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안타까운 결말로 끝나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여로보암을 통해 가짜들의 이중성과 모순을 세 가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이중성은 정작 자기 아들이 아프니 유다로 내려가는 이중성입니다. 지금 아들이 심히 아픕니다. 왕으로서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했던 행동이 뭐냐면 유다에 선지자를 찾아 내려가는 것입니다. 백성들에게는 유다로 내려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금송아지를 세워서 그들을 편하고 싶고 부담 없는 신앙으로 변질되고 왜곡되게 만들었습니다. 근데 정작 왕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고 자기 아들이 아프니까 유다에 있는 선지자를 것입니다. 이게 가짜들의 모순이고 이중성이라는 것이죠. 자기 자식이 아플 때 그냥 세워진 금송아지한테 절하고 기도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자식이 아프면 본인은 진짜를 찾아가는 겁니다. 금송아지가 가짜인 걸 아니까, 금송아지는 아무런 고칠 수 있는 힘이 없고 변화시킬 힘이 없다라는 걸 아니까 자신은 본인 문제를 풀기 위해서 남유다 선지자를 찾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가짜의 이중성이고 모순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이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하는 미혹이라는 것이 바로 쉽고 편하고 부담없는 신앙 생활을 통해 가짜의 이중성에 빠지게 만듭니다. 신앙생활 뭐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 없다고…얼굴도장 찍고 쉽고 편하고 부담 없이 드리면 되지…그렇게 계속 기준을 낮추면서 우리에게 신앙을 하나의 악세사리 같이 만들어 버립니다. 동시에 결정적으로 문제가 있고 결정적으로 내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할 땐 그런 신앙이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절감하고 절망하게 만듭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었던 것은 가짜구나… 우리는 이 가짜의 이중성에 속으면 안 됩니다. 두번째 가짜의 이중성은 뭐냐면 선지자에게 변장해서 찾아가는 이중성입니다. 아들 문제로 다급하니까 선지자를 만나러 유다로 찾아가는데 자기 부인을 보내지 않습니까? 예전에 이 선지자가 여로보암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해 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찾아가 자기 아들 문제를 얘기하면 분명 좋은 얘기를 해 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보내는 것입니다. 근데 자기 부인을 어떻게 보내냐면 변장해서 보내는 것입니다. 변장해서 보낸다는 말은 본인이 사람들한테 한 말이 있으니까 너무 부끄럽다는 의미도 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변장해서 나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그 멀리 남유다까지 가는데 변장을 하고 가는 그 행위 자체가 바로 가짜의 이중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일날 예배에 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배에 진짜 나다움을 숨긴 채 변장하고 가짜로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늘 사람들을 속이는 이중성에 익숙했기 때문이죠. 늘 사람들 앞에 가짜의 모습을 보이는게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내가 변장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모르실 거라는 착각하고 나오고, 그러고도 나는 예배 잘 드렸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변장하고 나온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속일 수 있고 하나님에게 눈가림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가짜의 이중성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는 자들의 불법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번 째 가짜의 이중성은 사명을 잊은 채 내 문제와 필요에만 몰두하는 이중성입니다. 하나님이 내 자리를 세워 주신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에게 돌아와 회개해서 북이스라엘을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 마지막 기회에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목적을 망각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의 손이 마비되었을 때도 여로보암은 자기 손을 고쳐 달라는 문제만 매몰되고 지금도 자기 아들 문제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왕으로 세우신 이유를 묵상하고 하나님 뜻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는 기회로 삼았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전혀 살지 않고 있으니까 눈에 보이는 문제 외에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도전과 어려움이 지금 내가 영적으로 풀어가야 될 문제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겁니다. 여로보암의 아내는 왕의 명령을 받아 변장해서 선지자를 찾아가 바로 들통나고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인 체 하느냐…책망을 듣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다른 사람이 체하느냐… 왜 가짜로 가면 쓰고 변장해서 오느냐…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진정성 있게 서지 않고 가면 쓰고 변장한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가짜로 가면 쓰고 찾아온 여로보암의 아내는 원하는 좋은 소식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나쁜 소식을 듣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운 이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특별히 뽑아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임명하여 다윗 왕국을 쪼개서 주셨는데, 솔로몬과 그의 아들 로보암과 달리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고 순종해서 하나님을 따르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라를 주어 왕을 세웠는데, 여로보암은 너무나 짧은 시간 내에 변질되었고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아들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고 당장 하나님 앞에서 풀어야 할 문제임을 선지자는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회개해서 돌아오지 않으니, 본인도 망하고 본인이 다스리는 백성들도 망하게 만들어 버린다는 경고를 하십니다. 하나님께 등돌리고 죄를 지은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왕으로서 여로보암이 한 불순종과 반역, 우상숭배에 대한 결과는 여로보암의 집을 완전히 쓸어버린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 아픈 아들은 곧 죽을 텐데 이 아이가 오히려 복되게 죽는 것임을 예언합니다. 남은 아들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어 시신을 개가 먹고 공중의 새들이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은 가짜입니까 아니면 진짜입니까? 가짜 이중성에 우리의 눈과 마음이 홀리면 안 됩니다. 여로보암을 통해 드러나는 가짜의 이중성이 나를 깨우로 찌르시는 말씀이 되어 진정으로 진짜로 돌아야 될 이유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하게 원하시는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진짜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은 진짜가 되어야 하고 진심과 진정이 되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신앙이 진짜 신앙, 진실된 신앙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이 되기 원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들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충성 다하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유다로부터 보냄받은 참 선지자와 북 이스라엘의 가짜 선지자를 우리에게 대비시켜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이 참 선지자가 그렇게 끔찍하게 사자밥이 되어 죽어야만 했는지, 죽어야 할 사람은 속여서 식사 대접을 한 북이스라엘의 가짜 선지자가 아닌지…우리에게는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난해한 말씀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한 늙은 선지자는 소위 말하는 가짜 선지자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타락한 선지자라고 보여지기도 합니다. 먼저 북쪽 이스라엘 한 늙은 선지자는 단순히 한 사람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선수였다는 것을 우리가 바라봐야 합니다. 어제 말씀은 여로보암 왕의 영적 타락에 대해서 보여줬다면 오늘 말씀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영적 타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은 이렇게 왕과 선지자의 타락을 통하여 보여지듯 이만큼 심각한 지경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북 이스라엘의 늙은 선지자를 통해 타락한 가짜 선지자 세 가지 특징이 오늘 말씀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징은 가짜는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본인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짜가 나타나면 진짜를 열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에 있는 늙은 선지자가 남유다에서 온 진짜 선지자가 했던 놀라운 일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선지자가 왕에게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왕의 손이 마비되고 제단이 무너지고 재가 떨어진 그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역사를 들었던 것이죠. 늘 왕에게 듣기 좋은 소리들만 했던 타락한 가짜 선지자가 그 소식을 듣고 아 나는 저 선지자를 만나봐야 되겠다…는 열망을 가지고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뒤쫓아가는 것이죠. 진짜 선지자를 만나보고 싶고 따라가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가짜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진짜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가짜 선지자의 그 진짜를 향한 열망을 바라보며 우리 신앙을 비추어 보기 원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적절하게 부담없이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 스스로도 알 때가 있지 않습니까….야 이건 진짜가 아니구나….이거는 가짜구나…근데 어떤 사람이 진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저분의 신앙 생활의 비결이 궁금해지고 가까이 가고 싶고 따라가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우리는 가짜로 사는 많은 다수들 가운데 헤매다가 진짜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게 되면 항상 가짜들은 진짜를 궁금해하고 진짜를 쫓아가며 진짜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가짜 선지자의 특징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라는 거예요. 이 타락한 가짜 선지자는 진짜 선지자를 만나 시간을 보내고 싶고 집에 초대해 함께 식사하길 간절히 원했습니다. 이 사람을 찾아간 이유는 진짜 선지자를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밥 먹으면서 진짜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환대도 받으며 뭐 여러 가지 얘기를 하고 싶었겠죠. 근데 문제는 이 선지자가 사용한 방법이 하나님의 이름을 건 거짓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를 하나님을 끌어들인 거짓말까지 동원해서 굳이 초대해서 자기 집에서 밥 먹고 싶어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참 선지자의 거절 이유는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 내게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오던 길로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거절 앞에 가짜 선지자가 했던 놀라운 행동이 바로 자신도 선지자….라는 감언이설과 하나님을 끌어들인 거짓말입니다. 자신도 선지자….라 말하면서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와서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타락하고 가짜 선지자인 이유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 걸고 속이고 거짓말 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다라는 것입니다. 물론 악한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했다고 할 순 없고, 참 선지자와 시간 보내고 함께 식사하고 싶은 열망이 그렇게 컸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그는 거짓말했고 자기와 사람들을 속인 것이죠. 이게 바로 그 당시에 북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짜 선지자의 특징은 자신의 거짓과 속임수로 다른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는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건 뭐냐면 유다로부터 왔던 참 선지자가 이 타락한 가짜 선지자 이야기를 분별하지 않고 그냥 곧이 곧대로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도 당신과 같은 선지자…라는 감언 이설에 별로 경계를 가지지 않았던 겁니다. 사실 이 선지자는 여로보암 왕이 초대하는 식사도 거절했던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느라 왕의 초대도 단호하게 거절하도 나왔던 선지자였는데 나도 같은 선지자라는 말에 거기서 마음이 확 풀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거짓말한 그 타락한 가짜 선지자 말을 하나도 의심 없이 그냥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참 선지자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속임을 당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속임수를 당한 결과는 참담했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결과를 그 참 선지자가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대가로 사자에게 물려 죽임 당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현실을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억울한 죽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사명 잘 감당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고 돌아가는 길에 속임수에 당해 떡하고 물을 먹어서 사자한테 찢어 죽임을 당하는 선지자…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려운 생선 가시와 같은 말씀입니다. 이 끔찍한 일이 왜 이 참 선지자에게 일어났을까…라는 질문은 잠시 내려놓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는 북 이스라엘의 영적 현실이 무엇인가를 깊이 묵상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가 그렇게 끔찍하게 사자에게 물려 죽임을 당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가? 이것을 통해 그 당시 북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말씀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가짜들인가…를 선명히 드러내시는 겁니다. 바로 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완전히 이탈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진짜라는 것입니다. 이 유다에서 온 참 선지자를 통하여 두 가지의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로보암 왕에게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도 말고 그곳에 머물지도 말고 되돌아가지도 말라고 하신 그 말씀을 거역하자 말씀 그대로 참담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의 정반대는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죠.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 심지어 제사장도 마음대로 세우고, 왕도 마음대로 살아가는 속임수과 거짓의 삶,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해도 아무렇지도하는 삶 그 모든 영적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게 이 참 선지자의 억울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런 인생의 끝은 멸망의 길이고 그런 왕국의 끝은 멸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최우선으로 꼭 붙들고 살아가는 삶으로 주님이 부르셨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고 민감하게 그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본질은 말씀은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삶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타락의 시대를 겪고 있는 우리가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이 보편화 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믿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그 본질을 붙들고 말씀 가운데 늘 굴복하여 살아가는 귀하고 복된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축복과 지혜를 부어 주셨던 왕인 솔로몬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며 이방여인들을 품고 우상숭배를 하는 나라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12지파중 10지파를 떼어주시며 다윗의 씨앗도 아닌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이유는 자격이나 조건은 하나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에게 은혜로 왕을 세워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지키면 너의 나라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자랑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고 하나님 앞에 바짝 엎드려야 사는 왕인 여로보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짧은 시간에 변질되고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나 빨리 잃어버리고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떠난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 중심으로 세워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무시하며,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금송아지 우상숭배로 대체해서, 예루살렘에 내려갈 필요 없이 가까이에서 쉽고 편하며 부담없이 드리는 종교행사로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사장을 레위인이 아닌 아무나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입맛에 맞는 권력의 아부하고 길들여진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절기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때가 아닌 자기 마음대로 편한때로 바꾸게 됩니다.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쉽고 편하고 간편하게, 부담없이 때우듯이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제사를 왜곡 시키고 변질시켰습니다. 이렇게 여로보암은 하나님에게서 돌아섰고 백성들은 우상숭배로 끌려가게 영적 기초를 다 무너뜨리는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말씀은 왜곡과 변질로 무너진 제사와 예배를 드리는 여로보암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 말씀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대신 편하고 싶고 간편하게 금송아지로 예배를 드리면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라고 착각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를 지속하고 있는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늘은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유다로부터 보내서 이런 왜곡되고 변질된 예배와 제사를 경고 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누구인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도 있지만 더 본질은 누가 전하고 누가 말하는가는 중요한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한다는데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 주목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에 주목해야 산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 사람의 이름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 무명의 선지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유다에서부터 벧엘에 와서 여로보암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무명의 선지자가 여로보암 왕에게 외치며 경고합니다. 지금 여로보암이 제단 앞에서 드리는 제사와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제사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제단 하나님을 멸시하는 제단을 치시는데, 제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재가 쏟아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모든 내용이 지금 당장 정신 차리고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하나님의 찌르시고 깨우시는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말씀 앞에 엎드리어 회개하고 정신차리면 사는 겁니다. 나를 찔러주시고 깨워주시는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고 정신 차리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새 출발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은 여로보암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붙잡는 대신 그 말을 하는 선지자를 붙잡으라 명령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깨지고 정신 차리는 대신, 그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그 선지자를 붙잡으로 명령합니다. 지금 감히 왕 앞에 왕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여로보암을 통하여 세워진 수많은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다 왕의 권력에 길들여져 듣기 싫은 얘기는 하지 않는 겁니다 진짜 들어야 될 말은 하지 않고, 왕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진짜 마음을 찌르고 흔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화가 나고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선지자를 잡아 입을 막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시는데 바로 여로보암의 손을 마비시키시는 겁니다. 그 선지자를 잡으라고 명령한 여로보암의 손이 갑자기 마비가 되어 꼼짝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그 제단에 쏟아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그 현장을 지금 여로보암이 목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그 가운데 회개하고 엎드리고 하나님 말씀 아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왜곡되고 변질된 예배로 말미암아 깨지고 무너진 제단, 하늘에서 재가 쏟아지는 제단을 바라보면서도 무너진 예배,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멸시한 예배에 대한 회개나 자복이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내 마비된 손만 회복시켜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자신의 상황과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며 그저 나의 필요 나의 어려움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여로보암의 모습을 통하여 북 이스라엘의 전체적인 영적 상태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로보암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쉽고 편하고 간편하게 부담없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가 점점 더 간편하게, 부담없이 드리는 예배에 길들여지고, 내가 와서 예배 드려 주면 하나님은 그냥 나에게 고마워하셔야 할 분으로 착각하는데, 그런 예배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예배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타락한다는 것은 겉모습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과 상관 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드는 대신 세상의 금송아지를 바라보고 붙들고, 금송아지를 위한 도구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배드리고 있는데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의 예배가 아니라, 그저 금송아지를 위한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예배, 쉽고 간편하게 부담없이 드리면서 나는 예배를 잘 드리고 있다 착각하는 모습을 통해 여로보암을 통하여 인본주의에 길들여진 왜곡되고 변질된 신앙생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예배 제단은 결국은 무너져야 되는 곳이 되어 제단이 갈라지고 제단 위에 재가 쏟아지는 무너져야 되는 예배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이 하나님 되시며, 말씀되며 성전되는 은혜를 꼭 붙들고 예배 회복에 나의 마음을 쏟기 원합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싶을 말만 듣고 들어야 될 말을 듣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이 바로 망하는 징조입니다. 말씀 앞에 굴복하여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들어야 될 말을 붙들고 내 인생의 주님 앞에 조율되기 원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고 회개하는 대신 말씀에 귀를 막고 듣기를 거절하는 태도가 바로 나를 죽이는 행동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고 영광 돌리는 예배, 하나의 눈과 마음이 머무는 예배를 드리기를 사모하십시오. 왜곡과 변질이 가득한 이 시대에 제대로 드리는 그 예배자 한 사람, 제대로 서 있는 예배 제단 한 곳이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귀한 통로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며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분명한 믿음을 붙들고 주시는 말씀 앞에 엎드리고 순종하는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갈라져 그들이 이제 다른 길을 가게 되는데 그 다른 길을 남유다의 순종과 북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대비하여 우리에게 영적 지혜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열 지파가 갈라져 북이스라엘로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남아있는 남유다 사람들은 마음에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지금 당장 올라가서 저 배신자들을 처단하고 나라를 회복해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군대를 모았는데 보니까 18만명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18만 명이면 굉장히 많이 군대를 모은 것입니다. 그만큼 북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이 전쟁은 정당성이 있었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임하는데 올라가지 말고 싸우지 말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원수가 되어 버렸지만 저들은 우리의 형제이고 같은 팀으로 있었던 백성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에는 당장 저 배신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쳐야 될 것 같은데 하나님이 가지 말라 막으시는 겁니다. 놀라운 것은 남유다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전쟁하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의 결과로 결국 열지파를 치러 올라가지 않았고 동족이 피흘리며 싸우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유다가 힘이 약해서 위축돼서 못 올라간 것이 아니라 싸움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이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내 뜻을 내려놓고 순종한 것입니다.
남유다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보면서 두 가지의 마음이 듭니다. 르호보암이 조금 일찍 하나님께 더 순종했으면 어떨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라가 이렇게 분단되기 전에 일찍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내가 들어야 될 말을 먼저 들으며 하나님에게 먼저 나아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이번에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멈추는 지혜가 그에게 있어서 남유다가 저렇게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나의 생각과 뜻이 100% 옳고 정당한 거 같은데 그것을 막아서실 때가 있습니다.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될 것만 같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멈추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형제 자매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인 교회 안에서도 생각과 뜻이 달라 서로 싸우며 원수가 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분노와 복수의 칼을 들고 서로를 죽여야 되는 사람들이 생기면 사단만 기뻐하는 일이 되며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팀이며 같은 민족이며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멈추는 지혜가 있기 원합니다.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될 때 쓰임받는 신실한 종이 되는 줄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듣고 내 뜻을 멈추고 순종하는 지혜가 있을 때 하나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며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백성 되는 줄 믿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불순종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불순종의 근거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대해 무거운 멍에이며 고역으로만 생각하는 인본주의 생각에서 기인합니다. 그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가볍게 하는 것이 나에게 복이라 생각하는 착각이 그들을 불순종으로 이끕니다. 하나님이 뜻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의 뜻, 사람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 중요한 신앙의 기준들이 왜곡되고 변질됩니다. 먼저 여로보암 왕은 머리를 굴려 세겜 지역에 금송아지 신상을 세워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하려 합니다. 여로보암 스스로 머리를 굴려 보니까 백성들이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계속 왔다 갔다 하게 되면 마음이 누구에게로 쏠린다는 겁니까? 남유다 왕에게 쏠릴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자기 자리가 위태로울까봐 스스로 머리를 굴려 예루살렘에 갈 필요 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편하고 쉽게 예배드리라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왜 세우셨냐 하면 성전 중심의 신앙을 통해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게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의 신앙을 무너뜨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금송아지로 바꾸어버리는 겁니다. 어깨에 무거운 멍에와 고역도 없이 편하고 쉽게 예배 드리도록 해준다는 명목으로 성전 중심의 신앙을 다 버리는 겁니다. 오랜 코로나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인터넷 켜고 누워서 예배를 드렸다 그래요. 그렇게 눕방으로 온라인 예배 드리면서 주일 성수 잘했다고…예배 잘 드렸다고 면죄부를 주는게 바로 북이스라엘에서 행한 일들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 죄가 되었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게 북 이스라엘의 직면한 인본주의적 리더십이 가져오는 영적 타락의 본질이라는 것이죠 더 나아가 그들의 타락은 제사장의 타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구별된 레위 자손을 통하여 세워져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에 상관없이 아무나 백성 가운데 제사장을 삼는 것입니다. 왕 말을 잘 듣고 권력에 길들여진 자 아무나 그냥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제사장 되고 싶다…그러면 가서 제사장 하는 것입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을 무너뜨리며 마음대로 편하고 쉽게, 말씀의 기준과 가치를 다 흔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 모든게 영적인 기준이나 분별력 없이 사람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마음대로 결정하는 왜곡을, 하나님 믿는 신앙이 자기를 위한 도구가 되어 버리는 변질을 보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굳이 안식일에 주일날 뭐 예배드리냐는 거예요. 절기도 편한 때 사람들 스케쥴이 잘 맞을 때 아무 때나 편할 때 와서 드리라는 거죠. 자기 마음대로 정해 내 편한 시간에 와서 마음대로 제사하고 예배 드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는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겉으로는 백성들을 위하고 백성들의 민감한 소리를 듣고 민심을 민감하게 챙긴다는 말 아래 인본주의적 리더십을 통하여 신앙의 기준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게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편하게 해준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타락과 변질입니다. 성경은 그런 의미에서 남과 북의 분열을 단순히 영토의 분열이 아니라 신앙의 분열과 가치관의 분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숫자로 봐서도 영토로 봐서도 북쪽에 있는 대다수가 남유다에서 이탈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이 갈라진 나라를 통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영토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순전하게 남아 하늘의 기준을 붙들고 버티는 진짜 남은자가 있느냐로 하나님의 경륜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순전하게 남은 자들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두며 하나님의 역사가 계속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그곳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과 성전 중심의 신앙을 다 버려 버리며 아무나 제사장을 세우고 자기 마음대로 정한 날에 와서 예배드리고 제사 드리는 영적 타락이 신앙의 기초와 기본을 다 잃어버려 백성들을 다 무너지게 만들어 버렸음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겉으로 봐서는 우리를 위하고 백성의 소리를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지만 인본주의적 리더십과 신앙은 결국 나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인본주의적 타락 신앙의 왜곡을 바라보며 순전히 주님을 구하고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남은 자가 되기를 열망하며 십자가를 꼭 붙들기 원합니다. 신앙생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 중심과 성전 중심, 말씀과 예배 중심의 삶을 회복하여 타락과 변질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말씀의 기준을 붙드는 순전한 남은 자로 선명하게 살아가는 복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르호보암 왕이 얼마나 하나님의 지혜와 멀어져 있는 무지한 왕이었는가, 하나님의 지혜가 결핍된 무지한 결정으로 말미암아 분단의 단초를 제공하는 왕이 되었는가를 증언합니다. 여로보암이 백성들의 민심을 담아 전달한 요구는 물론 백성의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한 표현이었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사명을 그저 고역이나 무거운 멍에로만 여긴 잘못된 가치관이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그만큼 힘들고 어렵다는 호소임을 알고 그 백성의 소리를 귀 기울일 수 있는 왕이 됐어야 하는데 르호보암은 백성의 소리에도 귀를 닫고 하나님의 소리에도 귀를 닫는 영적 무지로 나라를 분열과 분단의 아픔에 빠뜨리게 됩니다. 그렇게 백성들의 민심을 듣고 나서 르호보암의 세 가지 지혜 없는 세 가지 모습을 말씀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의 지혜 없음은 하나님에 묻지 않는 어리석음입니다. 민심의 소리라고 말하는 요구에 르호보암왕이 고민이 됐겠죠. 그 고민을 가지고 제일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대신 생전에 아버지가 모셨던 원로들에게 먼저 찾아갔습니다. 결국 르호보암의 영적 무지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나아가지 않는 무지입니다. 이 문제가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았으면 제일 먼저 해야 되는게 하나님께 자문을 구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물었어야 하는데, 르호보암에게는 그런 지혜가 사라졌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는 고백이 르호보암 왕의 삶 속에 드러났어야 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등한시 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을 건너 뛰고 먼저 사람들에게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에서 벗어난다는 증거는 그저 사람의 소리에 집중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견은 전혀 듣지 않고 사람들의 의견을 추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의견과 충고가 중요하지 않다는게 아니라 나에게 절대적인 우선순위와 먼저 만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의 지혜 없는 행동은 들어야 할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무지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르호보암왕이 먼저 원로들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원로들이 왕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라고 조언합니다. 왕에게 이 원로들은 왕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한게 아니라 왕이 들어야 될 말을 한 것입니다. 내가 듣기 좋은 말과 내가 들어야 될 말이 비슷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결정적인 결정의 순간에는 그게 다를 수가 있어요. 내가 들어야 될 말이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원로들은 왕이 들어야 될 말을 정확하게 얘기해 주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르호보와 왕은 들어야 할 말인 그 얘기를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는가 하면 “왕이 노인들이 자문하는 것을 버리고…”에서 알 수 있습니다. 르호보암이 양쪽 의견을 다 들어보고 고민하면서 최종적으로 원로들의 의견을 버린 게 아닙니다. 먼저 원로 그룹의 충고를 들었는데, 그 말이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젊은 그룹의 얘기를 듣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그 원로들의 말을 버린 겁니다. 이미 원로들의 말을 들으면서 이건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생각하며 르호보암의 마음은 닫혀 버린 겁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도 이 시간 하나님께서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주시기 듣겠다는 태도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듣겠다는 태도는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나를 살리는 게 아니라 들어야 할 말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비극은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귀를 막아 버린 무지에서 오는 겁니다. 세번째, 그의 지혜 없는 행동은 듣고 싶은 말에만 귀 기울이는 무지입니다. 함께 자라난 소년들 소위 말하는 젊은 리더들이 조언하는데, 그들의 말은 왕이 들어야 될 말을 하는게 아니라 왕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겁니다.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다…이 말이 굉장히 아부성 발언이라는 걸 딱 아시겠습니까? 아버지 솔로몬 왕은 천천이요 르호보암은 만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 들으면 사람들은 기분이 좋죠. 문제는 이게 사실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사람들의 말을 분별할 수 있으면 지혜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무지한 자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 없이 그저 기분이 좋고 나에게 듣기 좋은 소리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내 귀에 듣기 좋고 내 입맛에 맞는 이야기만 취하는 것입니다. 본인이 듣고 싶은 말에만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내가 들어야 될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감언이설에 다 이미 마음이 넘어간 거예요. 그러고 나서 뭐라 그럽니까? 아버지는 무겁게 했는데 나는 더 무겁게 하고 아버지는 채찍으로 했는데 나는 전갈채찍으로 하겠다는 얘기가 나오는 거 아닙니까? 결국 이것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나라가 분열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신다고 증언합니다. 이 얘기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루기 위해 르호보암이 어쩔 수 없이 불순종했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으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들이 말하는 예언은 특별히 잘못된 일이 벌어지는 예언은 그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너네가 불순종을 계속하면 너희들 망한다는 말씀이 너희 망하면 좋겠다는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제발 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원하시는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면 통곡을 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그렇게 원하고 바라면서 백성들에게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는데, 결국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르호보암은 여러번 돌아올 기회가 있었는데, 그 돌아올 기회를 날려버리고 불순종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이 부분을 성경은 매우 안타까운 증언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12 지파들 중 10 지파가 떨어져 나가 르호보암의 왕권을 거부하며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워 북이스라엘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냥 분열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불순종과 배반으로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나라의 분열은 백성들의 불순종과 불신앙, 거기에 르호보암의 영적 무지가 결합된 합작품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스라엘 나라가 무너지게 되고 나라가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르호보암의 영적 무지와 백성의 불신앙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르호보암의 비극은 하나님께 질문하지 않은 것도 잘못이고요. 들어야 할 말 대신 자신의 귀에 듣기 좋은 얘기만 취한 것도 잘못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듣겠다는 태도, 결국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무지와 잘못된 태도는 결정적으로 나라와 백성을 파탄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성도의 특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풀 수 없는 일들을 먼저 하나님에게 나아가 자문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성도됨의 특권입니다. 인생의 고민을 하나님께 먼저 구하고 아뢰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제일 먼저 사람들의 소리와 충고를 들으려고 따라가십니까?사람들보다 하나님이 앞서며 사람들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앞서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 지혜가 내 삶을 이끌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사람들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물어보고 사람의 의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중을 먼저 물어보며 하나님을 먼저 붙드는 자가 되십시오. 듣고 싶은 말에만 귀 기울이는 대신 내가 들어야 할 말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뜻이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귀하고 복된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11장까지 말씀은 솔로몬 왕에 대한 증언들이고 오늘 12장 말씀부터는 솔로몬 왕의 아들인 르호보암 왕에 대한 증언들이 시작됩니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이름이 비슷해서 늘 헷갈릴 때가 있는데 둘은 형제 지간이 아닌 사이로 르호보암은 솔로몬 왕의 아들이고 여로보암은 나중에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부터 안타깝게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분단의 역사를 결국 맞이하게 된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르호보암 왕이 결국 남과 북이 갈라지는데 있어서 방아쇠를 당긴 원인 제공자로서의 악한 왕임을 강조하게 됩니다. 사실 솔로몬 때부터 모든 문제는 쌓여져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에게 금하게 하신 은과 금을 쌓지 말고 말과 병거를 의지하지 말고 여자를 많이 두지 말라는 이 모든 것들을 솔로몬은 지키지 않으면서 타락과 변질로 나아가게 됐고 그의 영적 하향 곡선은 결국 아들 르호보암에게 와서 결정적으로 일이 터지게 되는 것이죠. 남과 북이 분단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11장 말씀입니다. 특별히 겉에 보이는 표면적인 의미와 해석에 머물지 마시고 그 표면적인 의미와 해석을 넘어 깊은 영적 의미와 해석이 오늘 말씀에서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갈라지고 서로가 원수가 되어가는 그 분단에 있어서 표현적인 의미를 넘어 깊은 영적 문제를 발견하기 원합니다.
첫번째 영적 문제는 왕을 백성이 세운다는 착각과 불신앙입니다. 르호보암을 세겜으로 불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지와 추대를 받아 왕이 되었다고 증언하는데, 이것은 성전과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불신앙을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먼저 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르호보암을 세겜으로 불러냈습니다. 솔로몬에게 성전을 만드심으로써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움직이도록 재편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중심, 예루살렘 성전 중심, 하나님이 세우신 왕 중심으로 모든 질서를 재편 하셨는데, 백성들이 그 질서를 거절하고 예루살렘 중심의 성전에서 왕을 세겜으로 불러내는 겁니다.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라 그랬는데 이 온 이스라엘을 주도하는 세력은 결국 나중에 북 이스라엘이 되는 열 지파들입니다. 르호보암을 세겜으로 불러내서 하려는게 뭐냐면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그러니까 백성들이 왕을 세우고 삼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왕이 되려면 적어도 우리 동네에 와서 인증받고 approve사인 받아야 왕 될 수 있다는 자기들 만의 질서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하나님이 세우신다라는 본질에서 벗어나 마치 백성들이 왕을 인준하고 세우듯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 대신 백성들이 결정권을 가지고 스스로 세우는 왕이라는 이 착각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백성들의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민심은 중요하고 우리 성도들의 의견과 백성들의 의견은 중요합니다만 결정적으로 왕을 세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는 이 기준, 절대 가치를 놓쳐 버리게 되면 결국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가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두번 째 영적 문제는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지혜를 피해 애굽으로 도망한 자라는데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한 이유는 솔로몬 왕이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왕이 죽이려 하니 여로보암이 당연히 애굽으로 피하게 된 것이다…로 끝나면 표면적 의미 해석에 멈추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깊은 영적 의미로 오늘 말씀이 증언하는 것은 여로보암이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고 애굽으로 도망간 자라는 의미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가 가득한 왕이었고 나중에 솔로몬이 사모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림자처럼 보여주는 예표입니다.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피하는 거며 하나님의 지혜를 피하는 거며 하나님이 재편하신 성전 중심의 신앙을 피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망간 곳이 애굽인데, 애굽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세상 가치와 문화로 상징되는 곳입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애굽으로 돌아가 도망간 탕자나 똑같은 자이고 백성들은 그런 여로보암을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백성들이 결국 이 모든 영적인 문제를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은 증언하는 것입니다. 세번째, 영적 문제는 주신 사명을 저버리는 불신앙의 태도입니다. 여로보암이 르호보암왕에게 백성들의 민심의 소리니까 왕은 이 소리를 잘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민심의 소리란 아버지 솔로몬 때에 백성들에게 무거운 멍에와 고역을 너무 많이 지워 힘들었으니, 지금 그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우리가 왕을 잘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표면적으로 읽으면 당연히 이해되는 말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백성들이 너무 힘들었고 백성들의 멍에가 너무 무거웠으니까 이제 좀 쉬게 해주고 가볍게 해주는게 당연하다 생각합니다. 이게 뭐가 잘못된 거냐 이럴 수 있는데 그건 표면적인 의미고 그 밑에 깔린 깊은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그들의 불신앙입니다. 기본적으로 솔로몬이 세웠던 성전과 성전 중심의 신앙을 세우는 그 일을 벗어버리고 내려놔야 편한 고역과 무거운 멍에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불신앙의 태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성전 건축은 물론 굉장히 힘들고 되고 어려운 일이었고 온 몸과 마음을 쏟아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 사명, 맡기신 일이 단순히 고역과 무거운 멍에로만 여겨졌다면 이건 영적 문제라는 것이죠. 그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고역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만 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 따르겠다는 겁니다. 교회에도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든든하게 하는 맡기신 사명과 사역이 있습니다. 그 맡기신 사명에 결코 쉽지 않고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들어가야 하는 일들인데, 그 맡기신 사명이 단순히 고역과 무거운 멍에로만 여겨져 그런 거 다 내려 놓고 가벼워지면 내가 부담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 잘 하겠다 말하는게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명의 짐 없이 그러 부담 없이 편하게 신앙 생활하게 하면 그러면 교회 잘 나오겠다는 겁니다. 그게 결국 하나님을 바라보는 태도이며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태도, 즉 불순종이고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통하여 이루시는 사명들이 있죠 그것이 고역과 무거운 멍에만 되어 그걸 가볍게 해야 할 짐만 된다면 그게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시고 내 가정을 주님이 세우셨다라는 걸 정말 믿는다면 일상에서 감당하는 그 맡기신 사명이 고역과 무거운 멍에만 되는 것, 그저 가볍게만 하면 된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는게 불신앙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모든 일들이 사명이 아니고 그저 고역과 무거운 멍에만 된다면 비참한 인생이자 불신앙으로 나아가는 첩경임을 잊지 마십시오. 신앙생활은 하나님 중심 성전 중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그 영적 질서를 순종하며 살아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거절하고 거부하는 모습이 바로 왕을 세겜으로 불렀고 백성이 왕을 세우는 주체가 백성이 되는것, 이것이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는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하나님 중심으로, 말씀 중심, 성전 중심으로 모든 영적 질서가 재편되며 그 영적 질서에 순종하며 살아가기를 열망하십시오. 불신앙이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세상으로 도망가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더 가까이 가는 자인지,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며 애굽으로 도망하는 불신앙의 모습인지 점검하기 원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얼굴을 더 가까이 가며 그 은혜 가운데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새벽에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를 비추어 보고 반성하며,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성전 중심으로 내 신앙 생활이 재편되며, 주님의 영적 질서에 순종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들이 그저 고역과 무거운 멍에가 되는 것은 넘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기쁨의 사명이 되는 놀라운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카이브
12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