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군생활을 5사단 연천에 휴전선 부분에서 했었습니다. 사단에서 정기적으로 하는 게 뭐가 있는가 하면 대북 방송 심리전이었습니다. 휴전선 근방에 정말 큰 스피커를 30-40개 놓고 휴전선에서 북쪽으로 대북 방송을 하는 겁니다. 아침 저녁으로 무슨 방송을 하는가 하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살기 좋은 지 광고하는 겁니다. 그렇게 아침 저녁으로 듣는 게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그렇게 밤낮으로 똑같은 것을 반복해 듣게 되면 거기에 선동이 되고 마음이 끌리고 반응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군사적인 전략으로 심리전을 전략적으로 하는 것을 경험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지금 이스라엘 군대 앞에 심리전으로 압박하고 완전히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면 골리앗은 40일 동안 아침 저녁으로 반복적으로 나와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거룩한 의분이 일어나지도 못한 채, 전의를 상실하고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그 골리앗의 심리전에 완전히 말려들어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놀라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전의를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 되지 않는 최근에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에서 큰 승리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을 바라보며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는데 사울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믿음으로 나아가 영적 전쟁을 선포하며 그 인생을 하나님께 의탁하며 나아갔었습니다. 그런 요나단의 믿음을 들어 쓰시며 하나님의 이름만을 의지하며 나아간 요나단을 들어 쓰시며 하나님께서는 큰 승리를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전투를 이기는 방법을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상황과 환경, 사람에 집중하지 말고 하나님에게 집중하라…군사력을 통해 이기는 전쟁이 아니니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아가라….그렇게 블레셋과의 영적 전쟁에서 영적 원리를 알려주셨습니다. 지금 똑같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 내려왔습니다. 아무리 큰 골리앗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블레셋을 바라보지 말고 그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영적 원리를 붙들고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일한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고 있는 것을 증언합니다. 예전과 다름없이 똑같이 무너지며 똑같이 놀라며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반응하여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승리하는데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집중하며 압도 당하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에게 압도 당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골리앗에게 압도 당해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반복되는 영적인 도전임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하나님을 바라봄을 실패하며 무너지는 어리석음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우리도 동일하게 이 실수와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 있음을 성경 말씀은 일깨워 주신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 전투를 직면했을 때 그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지 않고 거기에 집중하지 않고 그 가운데 여전히 현존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집중해야 승리하며, 그 이름을 붙들어야 승리한다는 것을 영적 원리로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딱 닥치면, 일이 딱 터지면 여전히 우리는 일 중심 상황 중심 문제 중심으로 돌아가며 문제와 상황만 바라보고 집중하며 놀라 크게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을 반복하고 있음을 우리는 마음에 늘 새겨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본성으로 자연스럽게 내 눈이 집중하게 되는 골리앗, 위기 상황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들어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붙들어야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별히 40일이라는 시간은 성경에서 준비의 시간이라는 영적 의미를 가집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을 준비한 후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기도하시고 그 다음에 시험을 받으셨고, 부활 후 40일을 이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 하셨습니다. 모두 40일의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골리앗은 40일동안 밤낮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리전으로 무너뜨렸지만, 그 기간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소년 다윗을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왕은 완전히 골리앗의 게 압도 당하며 무너지고 있는 그 때, 40일동안 하나님은 한 사람을 준비하신 겁니다. 혈육의 아버지 이새가 봤을 때 다윗은 막내 아들에 소년이었기에 큰 형 세명은 전쟁에 나가 싸웠지만 다윗은 집에서 양 치도록 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보기에도 전쟁에 나갈 자격과 조건이 안되었던 다윗,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무서운 골리앗과 싸워 이길 용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질 용사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을 때 사울왕과 모든 이스라엘 군대가 아무런 저항과 대응도 하지 못하고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음부음 받은 어린 소년 다윗을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을 40일 동안 준비하고 계셨다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마음에 새기고 은혜를 구해야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상황과 환경 가운데 압도 당하는 위기 상황 가운데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 해메지만, 하나님은 방법이 아닌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연약하며 자격 미달같이 보이며 뭔가 내세울 것이 없는 그런 부족한 사람들이고, 부족한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 붙들려 있다면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다면, 작고 연약한 나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쓰시고 일하시는 성도,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 혼란하고 어려운 때에 답이 없어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어둠의 때에, 주님의 진리의 빛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선명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상황과 환경에 압도 당하여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대다수가 아니라 십자가에 매여 상황과 환경 너머에 계신 주님을 집중하며 나아가는 주님 앞에 준비된 자로 쓰임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7장 말씀은 블레셋 군대가 다시 한번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오는 사건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의 전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언제나 두렵고 위협적이었으며 군사력과 힘에 있어서 이스라엘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늘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블레셋과 싸워 이긴 경험,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싸워 이기게 하신 경험이 이미 있습니다. 그것도 오래 전이 아니라 얼마전에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에 압도 당하여 벌벌 떨고 있을 때 요나단과 그 무기 든 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을 향하여 영적 전쟁을 선포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요나단의 믿음을 불쏘시개로 사용하셔서 블레셋 군대를 물리쳐 주신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영적 전쟁으로 전쟁의 성패가 군사력이나 사람 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블레셋 사람들이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 쳐 들어 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싸움을 원하지 않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저번 패배를 만회하고자 다시 왔겠지요. 전열을 다지고 더 큰 모습으로 지금 싸우러 온 겁니다
그러면 이미 그런 승리를 경험했고 영적 전쟁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다 알고 체득하고 깨달았던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군대를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이름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의탁하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것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도 블레셋이란 위기 앞에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하는 대신, 블레셋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껍데기와 군사 규모를 바라보며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중하고 압도당한 것은 특별히 거인 골리앗의 위대함과 두려움입니다. 골리앗은 거의 3m가 되는 거인이었고, 60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 거인이 무기를 들고 딱 서 있으니까 골리앗을 바라보며 이미 벌벌 떨고 압도당하고 있는 것이죠. 골리앗을 바라보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왕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두려움에 사로잡힌 겁니다. 골리앗이 한 말이 뭐냐면 일대일로 나와 나랑 싸우자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나를 죽이면 우리 백성이 너희의 종이 되고 내가 너를 이기면 너의 모든 우리의 종이 되라는 겁니다. 그 거인 골리앗 앞에 나가 싸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거의 협박과 같은 말로 들린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금 골리앗의 말은 단순히 사람과 사람과의 싸움을 붙이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있다고 정확하게 묘사합니다. 즉 골리앗이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은 바로 그 군대의 대장 되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분노하거나 싸우려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왕은 서로 일심동체가 되어 동일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놀라 크게 두려워 하니라…” 이 전쟁은 이미 끝났구나…완전히 골리앗 앞에 압도당한 겁니다. 요나단이 혈혈 단신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향해 했던 말 기억나십니까? 저 할례 받지 않은 자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바라보며 참을 수 없었던 그 거룩한 분노….영적 전쟁을 선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나아갔던 그 전쟁….그 영적 기개와 원리를 다 잊어버리고 망각한 겁니다. 똑같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는데, 아무리 대장 골리앗이 3m 로 커도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영적 전쟁 앞에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 보지 못했고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고 하나님이 주신 영적 전쟁의 승리 원칙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고 그들이 붙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은 영적 전쟁인데, 이미 그런 영적 전쟁의 승리를 맛본 경험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사울왕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이 여전히 승패를 결정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눈에 보이는 거인 골리앗 앞에 벌벌 떨고 압도 당하며 서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을까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고,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의 모습이며, 우리들이 영적인 눈이 어두워 질 때 늘 이런 실수와 실패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기 앞에서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며 무너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해야 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어야 사는데, 상황과 환경에 집중하고 사람들과 힘에 압도당하며 벌벌 떨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말씀은 그렇게 승리를 경험하고 나서도 그것이 나의 믿음의 고백으로 승리를 경험한 것이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진 놀라운 역사를 구경한 승리라면,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며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선명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죠. 똑같은 블레셋 사람들이 왔는데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아니라 거대한 골리앗이었습니다. 그의 외모와 그의 힘과 그가 가지는 능력에 압도 당하며 두려워하며 벌벌 떨고 있는 이 모습, 이 초라한 실수의 반복이 혹시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주소는 아닙니까? 만약 그 모습이 우리의 부끄러운 영적 자화상 이라면 이 시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주님의 은혜를 망각하지 않고 영적 전쟁의 승리 원리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내 인생의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특별히 내 삶의 영적인 전쟁에 현장 가운데 서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승리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자연스럽게 쏠리는 골리앗을 바라보는 눈을 돌려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붙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넘어 내 눈을 하나님께 집중하며 주님의 은혜를 붙들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으로 다윗과 사울 왕이 처음으로 만남을 갖게 되는 장면입니다. 이 역사적인 만남의 배경은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왕이 악령에 사로잡혀 늘 번뇌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번뇌하는 왕을 위로하고자 수금 잘 타는 사람인 다윗이 추천받아 오는 것입니다. 수금을 잘 타는 사람들 중에 다윗을 추천하는데, 그 추천의 이유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사실 다윗은 그저 양치는 목동 중의 한 사람이었고 왕의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는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양치는 목동의 만남, 그 겉보기에는 비교할 수 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영적으로 보았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하고 이끄는 사람과 하나님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는 사람과의 만남으로 구별됨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역사 추는 하나님의 영광이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모든 것이 넘어왔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사울이 왕의 지위에 앉아 있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이끄심은 다윗에게 모든 것이 넘어간 상태인 것이죠. 아무리 위치가 높고 지위가 높은 왕 이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왕은 하나님이 함께하는 목동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나의 지위와 세상에서의 나의 위치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아닌가에 비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미천한 자리와 비교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영적인 비교와 차이를 오늘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깊은 영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다윗과 사울왕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사울왕은 다윗을 바라보면서 굉장히 좋았고 마음이 열렸습니다. 다윗에게 칼과 방패를 맡기는 자, 왕 앞에서 무기를 들고 있는 존재라는 것은 그만큼 신임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다윗을 향한 마음은 이정도로 열려 있었고 이 정도로 좋아했으며 이 정도로 신임했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울이 왜 그렇게 다윗을 크게 사랑했고 엄청 신임했는가? 말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 즉 사울이 상쾌 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 사울왕이 그렇게 악신으로 번뇌하고 힘들 때 다윗이 수금으로 연주하면 영적으로 상쾌해지는 것을 경험한 거예요. 그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이 다윗을 그렇게 사랑하고 신임하고 은총을 얻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다윗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는 놀라운 능력과 예배하는 놀라운 능력을 구체적으로 고백하게 됩니다. 다윗이 수금을 잘 타기 때문에 연주를 화려하게 됐기 때문에 사울이 이렇게 상쾌해진 게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수금은 온전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죠. 그에게 온전한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온전한 찬양과 예배 속에 마음 속 어두움과 번뇌가 떠나가며 악한 영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능력이자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치유의 능력 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찬양은 마음속 두려움과 어둠을 물러가게 하며, 악한 영이 떠나가게 만드는 영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영이 떠나가며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상쾌해지는 역사가 있음을 믿으며 우리가 간절함으로 주님을 붙들고 찬양하기 원합니다 이 놀라운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경험하는 예배와 찬양을 사모하십시오. 다윗과 같이 내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며 마음 한복판에 주님을 붙들고 하나님이 함께 한 자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목소리나 악기에 화려한 연주가 하늘을 울리는 예배와 찬양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의 붙들린 자가 마음 다해 드리는 찬양과 예배가 하늘 문을 열게 하심을 믿으십시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영육 간에 상쾌하게 만들며 번 번뇌와 두려움이 떠나가게 만들며 악한 영이 떠나가게 만드는 역사가 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때, 마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시고 내 마음 한 복판에 주님을 모시면서 그분을 향하여 두 손 들고 예배 드릴 때 거기에 이런 치유와 회복의 역사를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버림 받고 있는 사울왕의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바뀐 게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현직 왕으로 사울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왕을 중심으로 모든 나라가 지금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겉보기엔 그렇게 사울이 왕의 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사울에게서 이미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안에서부터 무너져 결국 껍데기가 다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것이죠. 더 이상 사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과 영광이 떠난 것이죠. 엔진 없이 달리는 차가 언젠가는 멈춰서는 거와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부터 영적 하향 곡선을 그리며 하나님 은혜가 떠난 껍데기 인생의 사울왕이 멈춰서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왕의 자리는 앉아 있지만 그 가운데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점점 침몰할 수 밖에 없는 영적 하향 곡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는 지위와 자리와 능력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그런 사람들을 중요하다고 만납니다. 그런데 성도인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자리나 지위 뒤에 보이지 않는 기초와 뿌리를 볼 수 있는 눈,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가 함께 하지 않는가를 분별하며 교제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 왕에게 대신 악한 영,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번뇌하게 했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남으로써 사울 왕에게 생긴 현상은 악한 영, 악신에게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번뇌했다”는 말의 히브리어의 의미는 “두렵게 하다 공포를 느끼게 한다.”는 것입니다. 껍데기로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울왕은 텅빈 강정과 같이 악한 영의 시달려 두렵게 하고 공포를 느끼게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사울을 그렇게 괴롭히라고 직접 명령하신 것처럼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 그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히도록 하나님이 놓아 두셨다는 것입니다. 주 은혜가 떠나가면 하루 아침에 무너질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나가면 이렇게 악한 영이 직접 거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사울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게 되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가게 되면 악한 영이 비집고 들어가 괴롭히며 공포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 그러고 점점 편리해지고 모든 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내면은 점점 텅 비고 메말라가며, 수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고통 가운데 신음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언제나 온전히 함께 하시며 떠나가지 않는 것이며, 주님의 은혜 꼭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이 없이 무엇을 해 보려고 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신경 가운데 놀라운 고백이 바로 성령 안에 거룩한 공회와, 성령 안에 성도가 서로가 교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통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교류하는 것이죠. 성령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따라 그 은혜를 들고 성도로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 왕에게 사라진 것이 뭡니까? 바로 영적인 교통이 없는 것이죠. 그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떠나 갔기 때문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가 없는 겁니다. 로마서 8장을 통해 우리는 육의 생각과 영의 생각을 정확하게 구별해서 배웠습니다. 육의 생각은 죄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입니다. 사울 왕이 악신에 시달리는 게 바로 악한 영이 던져 주는 생각을 붙들고 죄와 사망의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움과 불안에 살아가는 겁니다. 죄와 사망의 생각, 어둠의 생각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인생이 번뇌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단이 던져 주는 육의 생각을 붙들게 되면 우리에게 늘 마음에 걱정과 번민과 고통으로 이 죽음과 사망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붙들고 영적인 교통 가운데 살아야 함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울왕이 이렇게 악한 영이 던져 주는 생각에 사로잡혀 번뇌하고 있는 것을 신하들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울의 신하들은 다 알았습니다.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더 이상 함께 하지 않고 이제는 악한 영이 그의 생각을 지배하며 번뇌케 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에는 숨길 수 있지만 이렇게 주변 사람들이 다 알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수금 잘 탈 줄 아는 사람을 왕 앞에 데려오자고 말합니다.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악기를 잘 다루는 사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수금은 바로 찬양의 도구이지요. 수금을 통해 영적인 교류와 함께 하나님께 찬양하는 자를 사울 왕 앞에 데려오자 말하는 겁니다. 찬양하는 수금으로 사울왕의 번뇌 하는 마음, 사로잡혀 있는 어둠과 사망의 생각이 물러 가게 될 것 같다고 조언하는 것입니다. 이 신하들의 조언이 역사적인 만남, 사울왕과 다윗이 만나게 되는 접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번뇌하고 죄와 사망의 생각에 나를 누를 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찬양하며 죄와 사망의 생각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찬양을 영적으로 하며 영적인 교통 가운데 찬양함을 통해, 번뇌와 두려움이 떠나가는 역사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지위와 자리를 유지하기만 하면, 여전히 돈을 벌 수 있기만 하면,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있기만 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이 나와 떠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사단이 주는 미혹임을 분별하기 원합니다. 아무리 지위와 자리가 높아도, 아무리 재산과 권세가 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자들의 끝은 결국 파멸과 무너짐의 허상이라는 것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 없이, 하나님 은혜 없이 붙드는 지위와 자리가 결국 우리를 파멸로 나아가게 하는 저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왕의 비극은 하나님의 영이 떠났는데도 그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또한 이렇게 십자가의 은혜 매이지 아니라면 주님의 영광을 붙들지 아니하면 내가 어떤 자리와 직을 유지하고 있건 어떤 일을 하던 이렇게 내 마음의 괴롭힘과 두려움 가운데 곧 멈춰서는 엔진 없는 차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직분과 지위를 유지해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돈을 벌어야 내가 산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떠난 나는 죽음이다…라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 십자가 앞에 단단히 매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역할과 아버지의 역할이 다 중요하고 다릅니다. 아버지의 역할 중에 중요한 것이 자녀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끄집어 내주고, 잘 했을 때 칭찬해주고 인정해주며, 특별히 넘지 말아야 하는 선과 기준을 설정해주는 것이 아버지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입니다. 아버지로 부터 “아…재는 안된다..” 여겨지는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어려움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자기 아버지에게도 초대받지 못한 아들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무엘로부터 아버지 이새가 그 집안 아들 중에 왕이 나올 거라고 이야기를 듣고 모든 아들을 초대해서 사무엘 앞에 소개해야 되는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눈에 보기에 얘는 100%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아들, 거기에 초대받아야 올 필요가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한 자가 누구냐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아버지 이새가 보기에 불합격인 아들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나머지 아들들이 다 사무엘 앞에 선을 보이고 있을 때 다윗은 혼자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눈에도 합격되지 않는 아들, 아버지 눈에도 차지 않고 가능성 없다고 생각하는 그 아들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초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아버지 이새에게는 왜 다윗이 그렇게 불합격이었을까? 왜 아버지로서 다윗은 왕으로 될 확률이 0%라고, 초대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을까? 물론 막내아들이니까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특별히 서열이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아버지 눈으로 바라보는 막내아들 다윗은, 외모가 좀 뛰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머리가 좀 좋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성적표에 맨날 바닥에서 기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유던 간에 외적 조건이 너무 부족해 보이는 아들, 제쳐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소개할 필요도 없으니 오지 말고 밖에서 양이나 잘 치고 있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사무엘 앞에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갔는데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OK 사인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없는 아들이 있냐는 물음에 아버지 이새가 하는 대답을 주목해야 합니다. “아직 말재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뉘앙스가 뭐냐 하면, 집에 막둥이가 있는데 그 막내는 여기 초대할 필요도 없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여기 오지 말고 양을 지키라고 그랬습니다…이 말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가능성을 꺼내주고 발견해주기는 커녕 아들의 가능성을 닫아버리고 딱 안된다고 규정해버리는 겁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함께 배웠지만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은 영적으로 그렇게 민감한 사무엘의 눈에도 합격이었을 정도로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았고 완벽해 보였습니다. 이 사람 정도면 거의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사람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눈에는 불합격,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눈에도 사무엘의 눈에도 ok였는데 하나님의 눈에는 ok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따끔하게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은 외모를 알아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바라본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하셨습니다. 껍데기와 외모, 가진 조건에 좌지우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이 하나님의 따끔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할 사람은 사무엘 뿐만 아니라 아버지 이새였습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우리 또한 연약해서 눈에 보이는 것에 좌지우지되고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우리 눈이 가려질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볼 때 이렇게 아버지 이새와 같은 눈으로 자녀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아버지에게도 초대받지 못한 그 막내아들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 아들 데려오지 않으면 우리 밥 먹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기다리는 것이죠. 마침내 그 아들을 데려오는데 그 막내 아들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실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에도 불합격이고 가능성이 없다고 제쳐 둔 아들, 아버지가 포기한 아들이 하나님의 눈에는 기름 부음을 받아야 할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 다윗이 사무엘 앞에 등장하는 장면은 영화로 하면 반드시 슬로우 모션이었을 것입니다. 다윗과 사무엘의 역사적인 만남…그 다윗의 모습을 “빛이 불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증언합니다. 이 모든 말이 아버지 이새는 보지 못했던 다윗의 내면 중심을 묘사하는 말들입니다. 반면에 사무엘에게는 그 하나님께서 주시는 중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은 사무엘의 시선에서 봤을 때 다윗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가능성 없어 제쳐 둔 아들, 초대할 필요도 없는 아들이었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기름부음을 받아야 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생각에는 왕이 될 가능성이 0%였던 아들이 사실 하나님 생각에는 왕이 될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람들을 그리고 사건들을 정확하게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원합니다.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쉽게 판단하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는 몇 가지로, 심지어 잠깐 바라본 첫 인상으로 그 사람을 규정하고 판단하려 하는 우매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사람들과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영적 겸손이 있어야 주님의 마음으로 사람들과 사건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반대의 인생이 바로 사사기의 인생이죠. 내 소견에 내 눈에 옳은 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해 버리고 심지어 하나님도 내 눈으로 판단해 버리는 그 영적 교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가게 되는 첩경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내가 잘 판단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 저에게 사람들을 제대로 바라보고 사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영의 눈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간절히 주님께 기도하며 바라보기 원합니다. 이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뭐냐면 영적 겸손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는 비결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녀들이 있습니다. 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이 뭐라 그러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내 자신은 내 자식들을 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는 달라고 주님 앞에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내 자녀들을 바라보고 껍데기나 가진 것이 아닌 내면을 바라보고 중심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귀한 삶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중심을 바라보는 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경륜을 바라보는 영적인 눈에 대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사울왕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기에는 여전히 사울이 왕위에 있고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모습 뒤에 그 중심에는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떠난 것입니다. 하늘의 힘으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왕이 아니라 껍데기로 자리를 유지하는 왕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간파하지 못하지만 이미 하나님께 버려졌고, 시간이 지나면 영적 하향 곡선을 사람들도 알게 되며 결국 무너지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영적 심장이 없이 그 자리만 지키고 있는 왕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지금 자리를 지키고 있고 지키고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꽃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미 생명은 끝난 것처럼, 며칠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곧 그 결과를 볼 것은 명약관화한 겁니다. 그 꽃이 나무에서 떨어진 순간, 이미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일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쓰임 받고 하나님께 공급받지 아니하면, 그 자리를 껍데기로 유지하고 있을지 모르나, 심장없이 앉아 있는 자리는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영광이 나타나는 삶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급하시는 하늘의 힘이 더 이상 그에게는 있지 않은 왕, 영적으로는 죽은 왕이자 그렇게 왕을 껍데기로 유지하다가 끝나게 될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붙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자리는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고 세워주신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임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고 문제 없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는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함께하심을 누리고 있는지, 실제적으로 그 영적 영향력과 그 은혜 가운데 있는지를 늘 점검하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보이는 자리와 위치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중심과 영적인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껍데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바라보는 영적 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하심이 위치나 자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영적 지혜입니다. 그렇게 사울왕은 버림을 받고 껍데기만 유지하고 자리만 유지하는 왕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음 사람을 준비하신다고 사무엘에게 명하셨습니다. 사울왕이 다음 왕을 세우려는 것을 알면 사무엘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집에 제사를 드리러 가는 모습을 취하며 그 이새의 아들 중에 한 사람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것임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모두 스스로 성결케 하고 지금 한 사람씩 사무엘 앞에 나와서 선을 보는 겁니다. 첫 번째 아들 엘리압이 딱 나왔는데 사무엘의 눈에 쏙 들었습니다. 마음에 저 정도면 왕으로 충분한 자격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무엘의 눈에 좋아 보였다는 것입니다. 엘리압을 봤을 때 사무엘은 이미 그의 눈에는 이 사람은 합격 이라는 마음이 들었다는 것이죠. 이 정도면 하나님이 분명히 기름 부을 자로 낙점할거야…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이 사무엘의 눈에 봤을 때 합격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무엘이 마음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 뭐라고 하십니까? 엘리압은 불합격, 아니라는 겁니다. 용모와 신장, 겉보기에는 좋아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이 이미 버렸다는 겁니다. 그 위대한 사무엘조차 그 껍데기에, 보이는 것에 이미 마음이 쏠려서 휘둘릴 수 있음을 따끔하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무엘은 저와 여러분들 같이 영적으로 둔감한 자가 아니라 굉장히 영적으로 민감하며 하나님과 대면하며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받았던 놀라운 선지자였습니다. 분명히 사무엘은 영적 분별을 달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엘리압을 봤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아무리 그렇게 영적으로 깨어 있고 민감한 사무엘이라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눈에 보이는 것에 좌지우지되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대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에, 첫 인상이 중요하고 외모가 중요하고 우리는 외모와 껍데기를 꾸미는데 그렇게 시간과 돈을 많이 쓰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것에 좌우되며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껍데기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이지 않는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압은 겉으로 보이는 모든 조건들이 완벽해 보였고 좋은 이미지와 스펙, 모든 외적 조건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심지어 영적으로 민감했던 선지자 사무엘의 눈에도 합격 도장을 받았지만, 그 중심은 하나님에게 온전히 합하지 않은 자였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중심을 봤을 때 엘리압은 불합격이었던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울왕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왕으로서 역할을 감당 하지만 보이지 않는 중심을 바라본 하나님의 영적 시각에서는 사울왕은 이미 버림을 받은 왕이자,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지고 영광이 끝난 왕이었습니다. 보이는 자리에, 껍데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역사가 지금 어디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가를 민감하게 바라보는 영적인 눈이 있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엘리압 같은 사람이면 모든 조건이 완벽해서 합격인 것 같은데, 심지어 사무엘 조차도 외모와 껍데기에 휘둘리고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나는 얼마나 더 눈에 보이는 것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인지를 정확하게 직시하기 원합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은혜를 구하며 사람의 중심을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껍데기에 휘둘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조건에 좌지우지 되지 않으며 주님이 바라 보시는 대로 내 주변의 사람들을 중심을 바라보며 그 속을 먼저 바라보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늘 보이지 않는 내면을 먼저 신경 쓰고 속 사람을 중심으로 두고 살아가는 영적으로 민감하고 영적으로 회복되어 살아가는 성도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5장은 사울왕이 완전히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며 이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면서도 여전히 정신 차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증언합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경고했고 그의 나라가 찢어 질 것이며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듣고 나서도 하나님에게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말로는 내가 범죄 하였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했다며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사울왕의 중심은 여전히 주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면 사무엘에게 돌아가서 제사를 드리자고 요청하는 목적이 사람들 앞에 나를 높이기 위해서 였습니다. 끝까지 사울왕은 그의 제사와 예배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 자기를 높이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울왕의 끝까지 무너지는 모습과 아각이라는 아말렉 왕을 쳐 죽이는 사무엘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극명하게 대조 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말렉 왕 아각을 불러오라는 사무엘의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각이 두려워하면서 온 게 아니라 즐거워하면서 오고 나는 이제 죽음에서 풀려날 거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착각의 배경은그건 사울의 의중이기도 했고 백성들의 말에 민감했던 민심의 뜻이 반영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사로잡아 왔는데 꼭 왕까지 죽일 필요는 있겠느냐…라는 민심의 뜻을 사울왕은 다 간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둔감하고 오로지 민심에 민감했던 사울왕은 아각 왕에게 아마 너는 곧 풀려날 거야…조금만 기다려…언지를 분명히 준 겁니다. 그래서 지금 사무엘에게 끌려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각은 두려워 하는 기색은 전혀 없이 즐겁게 오는 거예요. 내가 풀려나는 시간이라고 착각하면서 그 자리로 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돌아오지 못한 강을 건너는 결정적인 모습인 것이죠 그런데 아말렉 왕 아각의 착각과는 달리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무엘은 이를 접근하는 것입니다. 먼저 사무엘이 지금 이 아말렉 왕 아각을 죽이라고 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뜻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아말렉 민족이 출애굽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음으로 친 민족이었고, 그것도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가장 약하게 뒤따라오는 노약자들, 여인들, 어린이들을 친 거죠. 힘없는 백성들을 뒤에서 몰래 친 악한 백성,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방해하고 박해한 악한 백성이 바로 아말렉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아말렉의 왕 아각은 아말렉을 대표하는 지도자로, 하나님께서는 그 왕이 반드시 처단해야 된다고 명령하신 것을 상기시킵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 아말렉이 살아 있으면 이스라엘에 얼마나 영적으로 해악이 되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아니 알았어도 하나님의 경고에 둔감해서, 사울왕은 백성의 민심을 따라간다는 명분으로 아말렉왕 아각을 살려 두려고 했던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불순종이었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사무엘의 손으로 아주 무섭고도 섬뜩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말렉 왕을 칼을 뽑아 처단하는데 그냥 죽이는게 찍어서 쪼개 죽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말렉 왕을 “여호와 앞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단절하고 그 거짓과 변절을 단절 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고 박해하는 세력, 여호와 앞에서 악을 찍어 쪼개는 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사울왕에게 제사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쓰는 도구였는데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아말렉 왕 아각을 찍어 쪼개 죽이는 겁니다. 결국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아말렉과의 전투에서의 진멸이란 이렇게 여호와 앞에서 아각 왕을 찍어 쪼개듯이 아말렉이 더 이상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방해하는 것을 철저하게 진멸하라는 명령이자, 하나님의 백성들이 전염되지 않도록, 물들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강한 처방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지금 사울왕 앞에서 이게 하나님이 원하는 순종이었음을 정확하게 가르치시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찍어 쪼개며, 아말렉과의 영적 전투를 마무리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무엘과 사울왕의 결정적인 차이는 누구 앞에서의 삶을 살고 있으며 누구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느냐…입니다. 사울왕은 처음에는 small, humble, faithful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점점 하나님 앞에서 삶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삶을 살며 심지어 예배도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기 위한 도구가 돼 버렸습니다. 그런 사울왕을 경고하며 사무엘은 진짜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예배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위대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변질되지 않고 꾸준히 한결같이 나아가겠다는 것이고 사울왕은 비극은 변질되어 하나님 앞에서의 삶에서 등을 돌리고 떠나 갔다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무엘과 사울왕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얼굴 볼 일이 없는 사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아각왕을 찍어 쪼개고 돌아온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왕을 위해서 슬퍼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심을 바라보며 마음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사울왕은 이제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떠난 자로, 사무엘의 영적 지도력에 보호를 받지 않는 자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영적 내리막길 과 파멸을 향하여 달려가는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립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시간 누구 앞에서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정말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계십니까? 사울왕과 같이 겉으로 멋지게 포장을 하지만 진심은 언제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높이기 위한 예배 입니까? 아니면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 말씀에 토달지 않고 철저하게 순종하며 여호와 앞에서 드리는 예배입니까? 여호와 앞에서 주님을 붙드는 예배자가 되어야 끝까지 쓰임 받음을 잊지 마십시오. 사울왕의 변질과 무너짐의 길이 아니라, 사무엘의 끝까지 주님 앞에 쓰임 받는 길로 선명하게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왕은 그 인생이 높아지고 큰 승리 가운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며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마지막으로 준 돌아올 기회를 핑계와 탓, 자기 변명으로 일관하며 돌아올 길을 또 한번 놓쳐 버리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제는 사울왕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것을 직감하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나서야 사울왕의 입술에서 내가 범죄하였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 말에 청종하였음이라.” 사울왕은 스스로 불순종의 원인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끝까지 하나님과 사무엘 앞에서 숨겼고 아닌 척 포장했던 것이죠. 시치미를 뚝 떼고 승리 앞에 자기는 여호와의 말씀을 잘 청종한 것처럼 그럴 듯이 포장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면 하나님 말씀을 청종했을 텐데, 사울왕은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더 두려워했고, 하나님 말씀보다 백성들의 말에 더 민감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과 백성들의 민심이 충돌할 때 백성들을 두려워 하여 백성들의 말을 청종하고 따른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과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반쪽 순종의 원인도,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려는 대신 자신의 흔적을 남겼던 기념비를 세우는 모습도 결국 하나님께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는 왕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리고 나서 너무 늦게, 결국 모든 버스가 떠난 뒤에야 내가 범죄하였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울왕의 여러가지 실수와 실패, 무너짐의 행동과 증상들이 있었지만 그 원인은 늘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마음속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사울왕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대신에 백성들을 의식하며, 하나님을 붙드는 대신 백성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 이것이 바로 사울의 어리석음 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울왕을 하나님이 버리셨다…즉 더 이상 쓰실 수 없음을 사무엘은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붙들지 않는 인생,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인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 하지 않는 인생은 왕으로서 더 이상 쓰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린 왕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왕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결국 사울왕과 그 나라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찢어진 옷을 통해 알려줍니다. 잡은 옷자락이 찢어지듯 하나님에게서 찢어져 버리는 불쌍한 인생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사울의 영적 현주소가 거짓과 변절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직시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전혀 없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사울왕을 향한 마음과 기준은 언제나 거짓이 없었고 변함이 없었는데, 거짓과 변절로 돌아선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울왕 자신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사무엘은 이렇게 정확하게 사올 왕에게 너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이며 너의 왕국이 어떻게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에게 나는 범죄했고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다고 고백하면서도 사울왕은 끝까지 온전한 돌이킴으로 나아오지 못합니다. 벼랑 끝에서도 사울왕은 하나님 대신 여전히 사람과 자기 자신을 붙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내가 범죄 했을 지라도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돌아가서 사무엘과 함께 여호와를 경배하기를 예배하기를 원했습니다. 회개와 자복함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백성들 앞에서 나를 높이사…”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에요. 내 백성들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서…즉 사람들을 앞에서 예배와 제사 드리는 겁니다. 그 예배를 통해 누굴 높이려 합니까? 나를 높이사…자기 면상 떨어지지 않게 나를 높일 수 있는 기회로 백성들의 장로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예배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는 여전히 이 예배와 제사를 자신을 높이는 도구로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드리는 제사로 여기고 있는 겁니다. 사울 왕에게 예배는 뭡니까? 사울 왕에게 제사는 뭡니까? 여전히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도구이자 수단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제사가 아니라, 예배와 제사를 이용해 사람들 앞에 자기를 높이려는 그 모습, 그러니까 예배에서 조차도 끊임없이 누구를 의식하겠습니까?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하며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하고 좌지우지 되는 예배가 되는 것이죠 예배 좋고 나쁨이 다 사람들의 평가에 달린 거예요. 그렇게 거짓되고 변절된 사울왕은 끝까지 예배와 제사에서 조차도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도구로 변절 시키고 왜곡 시키는 불쌍한 인생, 하나님께 버림 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생이 되 버리는 겁니다. 이게 사울왕의 비극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진짜 두려워 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입니까? 내가 정말 청종하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의 말입니까? 인간은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누구 앞에서 누구를 높이기 위해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드리는 예배 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뭐라고 포장을 하든 간에 그 진심은 사람들 앞에 나를 높이기 위한 예배 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십니다. 항상 거짓과 변개함으로 주님을 떠나가며 이탈하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임을 잊지 마시고 사울왕의 실수와 무너짐을 반복하지 않는 지혜롭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왕은 두 가지의 똑같은 범죄를 반복적으로 범하고 있습니다. 13장 말씀인 인생의 가장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했고, 그 불순종의 자리에서 즉시 회개하는 대신에 핑계를 대며 남을 탓하고 자신을 포장하며 무너졌는데 15장 말씀에서도 그 동일한 패턴으로 무너졌습니다. 아말렉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아말렉과의 전쟁은 영적 전쟁이자 언약의 성취였습니다. 큰 승리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반쪽 순종했고 그 불순종의 자리에서 사무엘이 직언하며 이 들려오는 소리가 뭐냐고 하고 얘기했을 때 “제가 잘못했습니다,” “정신 못 차렸습니다.” 바로 엎드리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대신에 백성들 핑계를 대며 하나님 핑계를 대며 자기를 포장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얘기를 듣다 못해 사무엘이 “stop! 제발 그만 하세요! 정신차리세요!” 딱 잘라 말합니다. Small, humble, faithful…스스로 작게 여기던 올챙이 시절, 그 초심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느냐고 상기 시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 하나님은 높아지시고 나는 낮아지고, 늘 엎드리는 겸손한 영적 겸손의 태도를 가지고 살았던 자, 그 사울왕을 하나님을 들어 쓰시고 높이셔서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게 하신 것을 잊었느냐고 직언합니다. 사울왕의 자리는 스스로 탁월해서 올라간 자리가 아니라, 노력해서 성취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였음을 왜 잊어버리고 망각했느냐고 안타깝게 직언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 때 나타나는 놀라운 삶의 태도는 스스로 작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크게 여기고 내 스스로는 작은 자로 여깁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기도 시간을 통해 조율 되는 진리, 내가 있는 자리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 내가 하고 있는 일과 사업들이 내가 일군 노력과 땀의 결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분명한 의식입니다. 물론 노력과 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중요했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 하나님이 주신 재물, 하나님이 주신 사업과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스스로 작게 여길 때 하나님이 더 크게 맡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갈 때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계속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고 계속 갔으면 사울왕은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쓰임 받는 인생이 됐을텐데,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 작게 여기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높이신 왕의 자리를 내가 올라간 자리라고 착각하고 있고, 하나님이 주신 승리는 내가 싸워 이긴 승리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는 게 아니라, 내 흔적을 남기며 내 기념비를 세우는 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악하시게 여기시는 것을 행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직언이 벌써 두번째입니다. 한번 자신이 그렇게 핑계 댔는데 선지자 사무엘에 저렇게 강하게 말하면 “아 내가 뭔가 잘 못했구나….제가 지금 뭔가 착각하고 망각하고 있구나…” 깨닫게 돌아왔으면 마지막 기회를 잡고 회복되는 인생이 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의 상황 파악 못하는 어리석은 태도는 또 다시 자기를 포장하고 핑계를 대면서 기회를 완전히 날려버립니다. 자기는 하나님 말씀 순종했다는 것입니다…잘못한 것 없다는 것입니다…대화가 안되는 사람들은 상대편 얘기를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얘기를 계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말렉 왕을 진멸하지 않고 사로잡아왔으면서도 순종했다고 착각하고, 동물을 끌고 왔으면서 제사를 위해 남겨둔 것이라며 순종했다 착각하고, 지도자인 왕이 책임 인데도 백성들에게 탓을 하면 이 동물들을 끌어온 것을 백성이라며 책임회피 하면서도 순종했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기를 거절하며 마지막 남은 기회, 버림받음에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닫아버립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목소리이며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태도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태도이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라는 것을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예배 드리러 왔는데 제사 드리러 왔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태도 없이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태도 없이 오는 예배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왕의 회복 불가능한 영적 교만과 영적 어두움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고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작아지지 않는 영적 교만, 더 이상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려 하지 않고 자신이 높아지는 영적 교만을 바라봅니다. 그의 영적 어두움은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비추고 계신데, 그 빛을 깨닫지 못하고 그 빛을 거절하며 그 빛을 싫어하고 있는 사울왕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불순종과 교만이 죄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어느 정도 큰 죄인가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 죄의 무게는 우상숭배의 죄의 무게와 똑같은 그만큼 심각한 중죄라는 것입니다.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불순종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게 만들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 중범죄인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무엇을 책망 하시는지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지 들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탓하고 자기합리화로 포장하며 변명을 일삼는 사울왕의 영적 교만과 영적 어두움은 결국 더 이상 돌아올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비극의 왕, 하나님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건너가는 왕이 되어버립니다. 신앙 생활이란 내가 내 힘으로 내 열심으로 내가 헌신하는 삶을 넘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공급받으며 하나님께 기대며 의지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머물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내가 무엇을 하기 전에 먼저 주님 앞에 엎드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며 내가 주님 앞에서 스스로 작은 자가 되어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이 영적 기본을 완전히 잃어버리며 영적 교만과 영적 어두움으로 무너진 사울왕, 그 무너짐의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대신에 그는 계속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다고 착각하며 하나님께 버림받는 사울왕, 이 비극이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반복되지 않기 원합니다. 이 비극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경고의 말씀으로 마음에 새겨, 불순종의 길에서 교만의 길에서 돌아서서 주님 앞에서의 삶을 살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사랑만 붙들고 끝까지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울을 버리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 파악 못하고 정신 못 차리는 사울왕의 모습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리에 앉아있는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이기에 거기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이루기 위해 있어야 되는 자리인데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망각하고 돌이켜 하나님을 쫓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지 않는 자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의식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더 의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반쪽 순종을 하며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리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왕이 되어가는 그 안타까운 변질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사무엘의 반응을 마음에 새겨야 하는데 사무엘은 근심하여 밤새 철야 기도 하면서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살려 주시옵소서…사울왕 버리지 마시고 한번만 기회를 더 주셔서 어떻게 좀 살려 볼 수 있는 기회가 없겠습니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울왕을 위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눈물을 쏟으며 가슴을 치며 철야기도 하는 자가 바로 사무엘 선지자였습니다. 우리가 이 사무엘의 안타까운 마음을 품고 이 세상을 향하여 내 주변 사람을 향하여 중보기도 하며 살아갈 때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가지는 것이죠.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는 그 간절한 마음을 사무엘이 가졌던 것 같이 저와 여러분들 또한 눈물을 쏟으며 가슴을 치며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 이 시대와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을 원하십니다.
그런 사무엘의 부르짖는 모습과 대조되는 사울왕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을 위해 기념비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후회하시고 사울을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밤새 부르짖는 사무엘의 모습과, 영적 전쟁인 아말렉과의 전쟁 승리한 이후에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있는 사울왕의 모습, 전혀 상황파악 못하는 모습이 선명히 대조되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싸움은 분명한 영적 전쟁이었고 하나님이 앞서 싸우신 그 승리는 하나님의 흔적이 남겨져야 하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무슨 착각을 하고 상황 파악을 못하는 겁니까? 아말렉과의 전쟁 승리 이후 하나님의 흔적 대신 자기 자신의 흔적을 남기여 하는 겁니다. 전쟁 승리 공로가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며 자기를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우는 겁니다. 나 때문에 내가 잘나서 내가 가진 군사력 때문에 아멜렉과의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기의 흔적을 세우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기념비를 세운 겁니다. 지금은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며 근심하여 온 밤을 부르짖어야 하는 때이고 돌이켜야 하는 때인데 지금 영적 촛대가 자신에게서 떠나고 있는데 기도하고 부르짖기는 커녕 전혀 상황 파악하지 못하는 영적 무지함과 안타까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왕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아마 말문이 막혔을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후회하셨는지, 내가 밤새 그렇게 부르짖어도 왜 사울왕은 더 이상 안되는 자인지를 분명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무너지는 마음을 가지고 사무엘이 사울왕을 찾아 갔는데 무슨 착각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워 놓고,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흔적을 남겨 놓고선, 반쪽 순종해놓고선 하나님께 나는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럴듯하게 자신을 포장하며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사무엘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여기 들려오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고 질문합니다. 몰라서 물어 본게 아니라 회개할 때인 것 모르냐며 지금 마지막으로 사울왕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돌이키라고 권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울왕은 회개 대신 13장에서 무너졌던 패턴과 동일하게 핑계와 탓의 논리를 자기를 방어하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에 오지 않아서, 블레셋 사람들은 곧 쳐들어 올 것 같아서 부득이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고 핑계 대며 백성들 탓과 사무엘 탓을 했던 사울, 아말렉과의 큰 승리 후에 동일하게 같은 패턴으로 무너집니다. 무리가 아말렉에서 동물들을 끌고 왔고 백성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끌고 왔다는 겁니다. 왕인 자신을 쏙 빠진 채 지금 누구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무리들 핑계와 백성들 핑계, 그리고 제사 핑계를 대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불순종했고 내가 왕이니까 내 책임입니다…이랬으면 좀 모양이라도 안 빠지는데 계속 핑계 대고 탓을 하면서 자기는 잘못 없다고 발뺌하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만약 사울왕이 즉각적으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제가 죽을 사람입니다…엎드렸으면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그 실패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똑같이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탓하고 백성들을 타고 자기는 잘못이 없다는 핑계 논리로 일관하며 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잘 행했다고 자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져서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완전히 하나님께 버림받고 촛대가 옮겨지는 비참한 왕이 되고 맙니다. 우리 인생에서 내 흔적을 남기려하고 내 이름을 높이려 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흔적은 지워짐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이름을 자꾸내며 나의 흔적을 남길 수록, 하나님의 흔적은 점점 흐려지고 사라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아침에 물어보십니다. 반쪽 순종을 하고서도 나는 잘 순종했다고 착각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그 반쪽 순종의 부족함을 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온 밤을 부르짖는 자입니까? 하나님께 부어주신 축복, 하나님의 부어 주신 영적 승리와 높아짐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흔적을 남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는 자입니까? 아니면 자기를 위해서 내 기념비를 세우며 나의 흔적을 남기려는 자입니까? 이 시간 하나님의 경고가 이 강단의 말씀을 통하여, 내 주변 상황을 통하여, 내 마음 속 양심을 통하여 나에게 들려올 때 바로 엎드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나를 용서해 주시고 기회를 주시옵소서… 하고 주님께 매달리기 원합니다. 이 엄중한 말씀을 통하여 사울왕의 무너짐을 반면교사로 삼아 내 흔적을 남기려 하며 하나님의 흔적을 지우려 하는 어리석은 길에서 돌아서십시오. 이 똑같은 패턴으로 무너지는 것을 끊어 버리며 주님의 은혜 가운데 주님의 흔적을 선명히 남기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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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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