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 다윗의 왕권을 빼앗고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과 극단적인 일을 통하여 멸망과 파멸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여정을 증언합니다. 압살롬은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는 육의 사람으로, 아버지 다윗은 눈에 보이는 현실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붙드는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으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인 현실에 압도당하는 육의 사람 압살롬과 그의 군대가 어떻게 파멸과 멸망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를 말씀은 계속해서 증언합니다. 세상 사람이라는 것이 꼭 나쁜 사람, 타락한 사람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봐서 착하고 좋을 수 있지만 그들이 바라보고 붙들고 결정 내리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영의 사람이 된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로운 사람이 된다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눈과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 바라봐야 될 것은 보이는 현실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고 붙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보이는 현실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예가 세 가지 이상 등장합니다. 압살롬이 갑자기 후세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냥 즉흥적으로 압살롬의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은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거기다가 분명히 각주를 달아놨는데, 하나님이 압살롬에게 그 생각을 하도록 이끄셨다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후새가 다윗왕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령을 보내는데 그 전령이 들키지 않고 다윗왕에게 소식을 전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그 전령을 돕고 인도하셨음을 선명히 증언합니다. 다윗왕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에 몰래 출발한 전령이 있다는 것을 압살롬의 종이 눈치 챕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빨리 잡으려고 막 추격을 하는데 의외의 사람을 만나서 이 두 전령을 우물 속에 숨겨주고 곡식으로 덮어서 목숨을 건져 줍니다. 그 과정이 마치 뭐와 비슷한가 하면 여리고성에 들어간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기생 라합의 모습과 너무 비슷합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그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전령이 다윗왕에게 소식을 전하러 가는 길에 목숨을 잃을 위기 가운데 우물 안에 숨김을 받고 보호함을 받아 목숨을 건지고 다윗왕에게 소식을 전하게 되는 모든 과정이 바로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봐서는 운이 좋았다…이걸로 끝납니다. 그런데 영적 현실은 뭐냐면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손길로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것을 정확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또 하나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이 등장하는데, 다윗왕이 너무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전혀 의외의 사람들을 통해 보호함을 받고, 음식을 제공해주는 것을 증언합니다. 저보다 다 오래 사신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여러분들 다 경험하셨을 겁니다. 내 삶의 고난과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내가 기대하고 내가 예상한 사람들은 대부분 떠나가고 안 도와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 내가 어려울 때 저 사람은 나를 도와주겠지…나를 건져주겠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대부분 다 떠나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실망하는데, 반면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도움의 손길을 받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는 사람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보호하심과 먹이여주심을 고백하게 하시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때로는 기다리게 하시며 인내하고 웅크리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때를 민감하게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가 바로 다윗이었고 광야로 쫓겨가서 그동안 무뎌졌던 이 영적인 감각과 영적인 시야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는데 사단 마귀 또한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증언합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그렇게 극단적인 결정을 하도록 이끈 아주 악한 신하인데, 압살롬이 지금 자기의 모략 대신에 후세의 모략을 선택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을 매 인생을 마무리 하게 됩니다. 아히도벨이 악한 자이며 사단의 심부름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눈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것을 우리에게 증언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계획이 실행되지 못한 것은 그냥 단순히 계획이 실행되지 않은 것 뿐만이 아니라 사단 마귀의 궤계가 실행되지 않는 거라는 것을 발견했고 그 끝에 가면 악인인 압살롬이 죽게 된다는 그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이 미리 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게 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제일 먼저 발견한 자는 사단 마귀입니다.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는데 사단 마귀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고 사단 마귀도 속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깨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붙들지 아니하면 눈에 보이는 현실에 매몰되며 눈에 보이는 현실만 붙들고 살다 육의 사람과 같이 세상 사람과 같이 살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매몰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눈에 보인 현실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고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과 보호하심을 체험하고 붙드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만 바라보고 이것의 압도당하여 살아가는 삶을 넘어서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도와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으셨구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는구나…이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을 바라보는 기적이 임하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며 살아가는 삶, 언제 어디서나 보이지 않는 천국과 영적 현실을 실체로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쿠테타는 다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버지 다윗 왕이 먼저 피난을 걷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무혈 입성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큰 저항 없이 새로운 왕으로 세워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다윗왕은 떠나가고 압살롬이 새로운 왕으로 세워지며 모든 것이 정리되고 끝나 보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사람의 뜻으로 압살롬의 쿠데타가 성공하며, 마치 악인이 판치는 거 같고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절망하고 낙담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은 피난을 가고 압살롬 같은 사람은 쿠테타로 왕이 되는 말도 안되는 역사 가운데,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현장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 역사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선명히 보여주시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성도로서 우리는 보이는 상황과 환경, 보이는 역사 뒤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신앙 생활임을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지금 압살롬은 모든 쿠테타를 정리하고 피난가고 있는 아버지 군대를 쫓아가서 죽이고 모두 처단하는 일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그동안 압살롬과 함께 했던 모략의 달인인 아히도벨이 다시 한번 압살롬에게 조언합니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얼른 다윗의 뒤를 따라가서 그 남은 군대와 다윗을 처단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고 이제 이 나라는 당신의 나라 된다는 겁니다. 압살롬 당신은 여기 계시고 나에게 12,000명만 주면 내가 지금 당장 가서 다윗의 질을 쫓아가서 다윗 왕을 쳐죽이면 모든 백성은 다 돌아오게 될 거니까 얼른 지체하지 말고 뒤쫓아갑시다…라고 계략을 내는 것입니다.
놀라운 건 이 계획을 듣고 나서 압살롬과 모든 장로들이 옳게 여겼다는 반응입니다. 그래도 자기 아버지 아닙니까? 아기 아버지를 뒤쫓아 가서 처죽이자고 말하는데, 그걸 옳게 여기고 좋게 여기는 사람이 인간입니까? 더군다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끝까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름부음 왕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기준이 전혀 없는 패륜아였습니다. 하나님께 기름 부은 받은 왕을 쳐죽이자 하는데 그것을 그냥 옳게 여기고 좋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압살롬 주변에 장로 중에는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께 기름 부은 왕은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겁니다. 압살롬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권력의 사로잡힌 짐승이 된 것이고요 그 짐승이 된 압살롬에게 바른 얘기를 하는 신하가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그가 속히 망하는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어떤 모습인가 바로이 압살롬과 같은 짐승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이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시는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시선은 아예 무시한 채, 아버지를 쳐 죽이자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고,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쳐죽이는 것도 옳게 여기는 심판을 자초하는 인간, 영의 눈이 어두워진 권력에 사로잡힌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압살롬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추악한 모습임을 발견합니다. 압살롬이 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그냥 듣고 갔으면 아마 다윗 왕은 곧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왕은 정신 없이 피난 가는 중이었고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이었기에, 12,000명이 뒤쫓아 추격을 하게 되면 다윗왕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게 되는게 갑자기 안하던 생각을 압살롬이 하게 됩니다. 지금 당장 사람을 모아 다윗을 뒤쫓아 가면 되는데, 갑자기 다윗의 친구인 후새 생각이 나서 후새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이렇게 된 겁니다. 왜 갑자기 압살롬에게 후새가 생각나게 된 것일까….압살롬 생각에는 자기에게 갑자기 떠오르게 된 즉흥적인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그 생각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갑자기 압살롬에게 그 생각이 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고 그 생각을 집어넣어 주신 것입니다. 모든게 완벽해 보이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뒤로하고 후새의 계획에 귀를 기울이도록 압살롬의 마음을 흔드셨던 것입니다. 후새는 지금 겉으로는 다윗을 버리고 압살롬에게 충성을 다하는 충신과 같이 보이지만 그 속마음은 다윗을 위해 그 자리에 머무는 첩자였습니다. 그러니 후새의 계략이란 결국 다윗을 돕고 시간을 벌게 해주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윗왕은 지금 혼자 딴데 굴 같은데 숨어 있을 것이고, 도망의 달인이니 지금 가도 찾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좀 시간을 좀 두고 전국에서 전쟁의 도구들과 군인들을 충분히 모으고 중요한 건 압살롬 자신이 친히 전장에 나가야 된다고 조언합니다. 지금 다윗왕은 독 안에 든 쥐니까 좀 시간을 좀 두고 내버려 두고, 왕이 스스로 나가서 전쟁터에 승리의 공을 쌓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놀라운 건 압살롬이 누구의 말을 따르냐 하면 아히도벨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후세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압살롬의 결정이 결국 그의 인생을 나중에 무너지게 만드는 치명적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개입하신 결과임을 말씀은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 상황에는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많고, 하나님이 정말 일하시는가에 대한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늘도 일하고 계시며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른 손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입니다 하나님의 왼손은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입니다. 우리의 처한 상황이 다윗과 같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며 피신하고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절망 가운데 있을 수가 있습니다. 기도 할 때에 오른손을 들어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시고, 왼손을 들려 주님의 보호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그 가운데 주님의 보이지 않는 손을 바라보며 역사하시는 손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붙들게 하옵소서. 지금은 악인이 승리하는 거 같고 하나님을 떠난 짐승들이 승리하는 것 같지만 최후에는 하나님께 승리가 있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손길, 하나님의 보호하신 손길이 저와 여러분들을 풍성히 덮는 역사가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드디어 압살롬과 반란군이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스스로 왕이 되는 모습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자마자 마치 새로운 왕을 기다렸다는 듯이 추켜 세우는 것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마져 듭니다. 압살롬이 그렇게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차지할 때, 다윗의 친구였던 후세가 압살롬에게 나아와 고개를 숙입니다.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들어간 압살롬과 군대를 향하여 후새가 만세 왕이요 만세… 아부를 하였습니다.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압살롬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로 아부를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봐서는 다윗을 배신하고 새로운 왕인 압살롬에게 충성하기 위해 나아온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왕은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자기에게 선대하는 사람을 그냥 받지 않고 그 도움을 받지 않으며 그 깊은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이 광야에서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반면에 압살롬은 다윗의 친구였던 후세가 압살롬에게 나왔을 때, 마음 속에 숨겨진 뜻을 분별하지 못한 채 그를 그냥 받아들이는 영적 둔감함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아부하고 고개를 숙이고 온 후새가 그 가슴에는 칼을 품고 위장으로 전향했다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 채 압살롬은 귀에 듣기 좋은 소리에 마음이 넘어가고 후새를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결국 그가 망하게 되는 비결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둔감하게 되면 인생이 잘 될 때는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 분별력을 상실하고, 인생이 어려울 때 눈 앞이 캄캄해져서 분별력을 상실하면서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이익을 위해 찾아오고 떠나는 존재라는 것을 분별하지 못한 채,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 하는 사람들도 나의 주변을 채우면 결국 그 인생은 망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말씀은 선명히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주변에 어떤 사람을 두느냐가 결국 내가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있는가를 판가름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영향력이 있는 자리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 칭찬하는 소리만 듣게 아니라 바른 소리, 분명한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한쪽 소리만 듣게 되면 결국 그 자리는 위태하고 곧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v이런 후새의 위장 잠입과 전향은 결국 다윗왕을 돌아오게 하지만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결국 칭찬과 눈에 마음이 가려져서 영적 분별력을 상실한 채 무너지게 되는 시발점을 만든 것입니다. 압살롬에게는 이런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에게만 쌓여있는 것이 결국 압살롬을 그렇게 빠르게 무너지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분별하고 깨어있다는 것, 영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이 듣기 원하시는 말씀을 순종하며 듣는 것입니다. 내 귀에 듣기 좋던 듣기 싫던 상관 없이 들어야 할 진리를 듣고 열린 마음으로 내 마음에 새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귀가 듣기 좋은 소리에 가려지지 않으며, 상황이나 환경에 가려지지 않으며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갖는 것,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성도로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비결입니다. 더 나아가 압살롬 주변에는 단순히 압살롬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사람들만 가득한게 아니라 압살롬의 마음의 상처에 불을 질러 극단적인 일을 서슴치 않게 하는 간신배들이 가득했다는 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압살롬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려하는 그 마음에 불을 질러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왕이 되었다고 대관식을 하든지 파티를 하든지, 긍정적으로 자신이 왕 되었음을 표현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반대로 끔찍하고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이 아버지 다윗보다 더 힘이 있는 왕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간신배들인 측근들이 압살롬의 마음에 불을 지르며 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 후궁들을 백주 대낮에 겁탈하는 것으로 끔찍하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후궁들을 대놓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강제로 겁탈하는 겁니다. 자식으로 아버지의 여인을 백주 대낮에 사람들 앞에서 건드리는 것을 통하여 이제 더 이상 이 나라는 아버지 다윗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다… 나는 아버지보다 힘이 더 세다… 아버지에게 이렇게 미운 일을 해도 아버지는 나에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또 한번의 극단적 초강수를 보이는 것이죠. 자식으로서도 할 수 없고,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대역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입니다. 측근들을 통하여 압살롬이 계속 휘둘리고 말도 안 되는 패륜의 일을 하면서 선을 넘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 다 보는 곳에서 하는 그 압살롬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의 모습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분노를 일으키는 죄라는 것을 망각한 채, 이게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짐승과 같은 일이라는 것 망각한 채 압살롬은 그런 끔찍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짐승과 같은 사람들이 힘을 잡게 되고 권력을 잡게 되면 이렇게 끔찍한 일 극단적인 일 말도 안 되는 폐륜과 같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들이 내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면 나를 무너지게 할 수 있음을 분별하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내 귀가 듣기 좋은 얘기로만 가득하고 녹아져 있으면 결국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독이 됨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깨지고 마음에 불이 있으면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마음의 불이 있는 자들은 힘이 있고 권력이 생길 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초강수를 두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어두워지지 않은 채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힘을 얻는 것을 열망하기 전, 내가 먼저 하나님께 겸손하게 쓰임 받으며 하나님 두려운 줄 알고 영적으로 민감해지는 것이 최우선임을 깨달으며 늘 주님 앞에 순전하게 쓰임 받는 거룩하고 복된 주님의 종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예루살렘을 버리고 도망해 피난 길에 오르는 상황을 계속 증언합니다. 겉으로 봐서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처지이며 위기와 어려움이 가득한 도망자의 신세였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왕이 그동안 무뎌졌던 영적 감각을 회복하며 광야 정신으로 민감해지는 축복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광야 길을 다시 나아가면서 다윗을 믿음의 자리로 회복되며 영적인 반응으로 그 위기가 기회로 변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처한 다윗 왕이 보이는 영적인 두 가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데 첫 번째는 어제 배운 나의 어려움과 위기 속에 나를 찾아와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영적 반응입니다. 므비보셋의 하인이었던 시바를 통하여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상황과 환경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상황과 환경을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우리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가 절대절명의 위기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상황이라도 도움이라고 무조건 받지 않고 그 도움을 주고 호의를 줄 때 그 뜻이 무엇이고 그 동기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며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영적으로 깨어 바른 반응을 보이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또 하나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나를 모욕하고 저주하고 등 돌리는 사람들을 향한 영적 반응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영적 반응을 보이며 살아야 할지를 깊게 말씀으로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나에게 회복되는 영적 민감함과 영적 반응이 나를 살리는 은혜로 다가오기를 원합니다.
내가 위기와 어려움에 처할 때 나를 대놓고 저주하고 모욕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시므이입니다. 내 처한 상황이 너무 큰 위기이고 어려움인데, 더 힘들게 하는게 누구냐 하면 바로 시므이와 같은 이런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이런 시므이와 같은 존재가 있습니다. 내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돌을 던지며 저주하고 나를 비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이익을 취하기 위해 오면서 도움을 주는 척, 찾아오는 사람들도 힘들고, 아예 나를 대놓고 저주하고 욕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너무 힘듭니다. 시므이가 다윗왕을 대놓고 저주하고 욕하는 내용은 아들이 등 돌려 배신하고 너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다윗이 사울왕가를 배신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저주하는 겁니다.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와서 다윗왕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힘이 없어지고 도망자 신세가 되니까 이렇게 벌떼와 같이 몰려와서 저주하고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내가 좀 힘이 있고 가진게 많을 땐 옆에서 좋은 말만 하다가 내가 힘을 잃어버리고 위기와 어려움에 처하면 갑자기 썰물과 같이 빠져나가는게 인간입니다. 떠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아주 애매한 말로 억울한 말로 나를 생채기 나게 하고 있는 말 없는 말 섞어서 나를 저주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시므이가 저주하고 모욕할 때 다윗왕은 소위 말하는 리액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신하 한 사람이 당장 가서 저 놈의 목을 베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그 모습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하려는 반응입니다. 안 그래도 힘들고 어려운데,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데 사람들이 와서 이렇게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 거기에 단칼에 죽여버리고 싶은 억울함을 폭발시키고 싶어하는 열망을 누구나 갖는 것입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운데 나를 건드려? 그러니까 너 죽고 나 죽자..그러면서 폭발시키는 것,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단칼에 죽이고 싶고 억울함을 폭발시키고 싶은 그 열망을 억누르면서 이것을 어떤 시선으로 보냐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 깨우게 하시는 찌르는 말씀, 하나님의 채찍질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을 통하여 감정이 상하고 리액션을 하는 대신, 내가 성장하고 변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더 민감하게 듣는 기회로 삼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복하지 않고 참으면서 다윗이 주님께 구했던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이고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하나님께 주시는 그 은혜로 시므이에게 반응하기 때문에 당장 보복할 수 있음에도 보복을 하지 않고 비난과 저주를 다 감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와 욕을 통해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죄인이고, 얼마나 긍휼을 받아야 될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고 해석하며 보복하지 않는 영적 반응을 보이는 것, 이게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비판하고 비난하는 거 좀 쓴소리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것을 들으면 당장 리액션을 하려 하고 힘이 있으면 보복하려고 합니다. 교회에서도 사역하고 일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이 안 좋은 얘기 한마디 하면 다 그냥 내려놓고 안한다고 미련없이 떠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칭찬을 듣지 못할 망정 안 좋은 소리 들으려고 하는 거 아니라며 바로 감정적 반응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들, 특별히 말로 나를 저주하고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보복하고 부딪치고 폭발하고 싶은 그런 열망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런데 보복하지 않고 감정적 반응으로 부딪치지 않고 인내하고 웅크려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는 시간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도구로 삼는 반응이 기적입니다. 영적으로 깊어진다는 건 좋은 일과 선한 일을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특별히 나에게 비판하고 비난하고 나에게 돌을 던지고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감정적 리액션이나 보복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영적으로 깊어지는 사람은 그 비판과 비난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떤 변화를 이끄시기를 원하시는가 바라보며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고 변화시키는 도구로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 영적 반응이 우리를 내면이 깊고 단단한 인생으로 세워주시고, 위기가 기회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도의 위대함은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나타나는 영적 반응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깊어진다는 것, 믿음이 강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위기와 두려움 가운데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에 매몰되지 않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중심, 이익 중심, 이 세상 중심을 넘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으며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하나님 때문에 존재한다는 하나님 우선 중심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초를 통하여 풍랑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로 나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나를 비난하고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해 분노로 폭발하며 부딪치는 대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나의 채찍으로 믿으며 하나님이 나를 변화시키시는 도구로 삼는 영적 반응입니다. 비판과 비난에 폭발하는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건져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 같이 저와 여러분들을 건져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에 직면한 어려움과 위기는 결국 내가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시고 탈출시켜 주시는 영적 사건이 될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위기와 고난 가운데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통하여 실망하지 마시고, 사람들을 붙드는 대신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의 선으로 갚아 주심을 신뢰하며 나아가는 귀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윗 왕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아버지의 등에 칼을 꽂고 반역함으로 지금 왕궁을 버리고 피난 길을 가고 있는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처한 다윗 왕을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허겁지겁 예루살렘을 피해 도망 길을 오르는 다윗 왕, 겉으로 봤을 때는 큰 위기와 어려움이었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 눈으로 봤을 때는 그동안 그가 왕궁에서 나태해지고 무뎌진 그의 영적인 감각을 깨게 하는 소위 말하는 찌르는 축복이 되었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위기이자 어려움이고 아들을 피해 피난을 가는 부끄러운 상황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예전 다윗의 광야 영성을 회복하는 정신이 확 들게 하는 축복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왕궁에 있었던 영적인 나태함의 상황이었다면 그냥 얼씨구나 좋다… 그러면서 나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하나님의 궤가 나와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영적으로 다시 깨어난 다윗왕이 하나님의 법궤가 같이 따라가는 것을 막고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는 영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분이며 나는 어떤 상황에도 하나님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고백을 가진 채 그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 보내는 것입니다. 왕궁에서는 겉으로는 행복했고 평탄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영적으로 나태해졌고 둔감해졌습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가지 말아야 될 곳에 가면서 간음죄와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그걸로 말미암아 그의 집안에 큰 우환이 찾아오고 동일한 죄가 자녀들을 통하여 반복되는 끔찍한 역사가 지속되었고 아들이 자신을 배신하여 왕궁을 버리고 도망가는 피난 길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어려움이 닥치니까 그 예전 광야 영성이 회복되면서 정신이 확 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그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처한 다윗 왕이 보이는 영적인 두 가지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나의 어려움과 위기 속에 나를 찾아와서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을 향한 영적 반응이고, 또 하나는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나를 모욕하고 저주하고 등 돌리는 사람들을 향한 영적 반응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위기와 어려운 가운데 영적 반응을 보이며 살아야 할지를 깊게 말씀으로 새기기 원합니다. 첫 번째 사건은 나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도움의 손길을 주는 척하면서 이용하기 위해 오는 자들을 직면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피난 길을 가고 있는데 뜻밖의 사람이 찾아오는데 그가 바로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절뚝발이 므비보셋의 종이었던 시바였습니다. 종 시바가 피난 길의 다윗 왕에게 음식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와서 맞이하는 겁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얼마나 그게 귀합니까? 지금 힘들고 어려운 피난 길에 상당히 많은 음식물을 가지고 와서 호의를 베풀고 선의를 베푸는 거 같으니까 얼른 그것을 받고 그것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리 자기가 힘들고 어려웠고 위기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넙죽 받지 않았다는 거예요.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정확하게 묻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모든 재산의 가로채려했던 시바를 므비보셋의 종으로 주었던 옛날 사건을 떠올리며 시바라는 종의 히스토리를 봤을 때 이 사람은 그냥 나를 순수하게 그냥 호의를 가지고 음식을 베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분별하는 것입니다. 위기 가운데 눈앞이 캄캄해지고 막히면 나에게 도움 주고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이 주는 것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덥석덥석 물게 되는게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려울 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많은 경우는 나에게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오는 사람들일 수 있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다윗은 그것을 분별한 겁니다 네가 무슨 뜻으로 이 많은 음식들을 가지고 왔는가…묻는 것입니다. 더 수상한 건 뭐냐면 종이 지금 왔는데 주인 므비보셋은 보이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안장을 해 가지고 온 것도 수상한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 음식을 받기 전에 무슨 뜻으로이 많은 음식을 가져왔고 왜 주인은 오지 않았느냐…그 속마음과 의도를 묻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이 지금 예루살렘에 도망 오지 않은 이유가 뭐냐면 다윗이 그렇게 아들에게 배신당하여 피난 길을 가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의 나라 사울의 왕가를 다시 회복되고 므비보셋이 그 왕위에 올라갈 거라고 기대하며 안 왔다고 고발하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나중에 19장을 통해 배우겠지만 종 시바가 다윗왕과 므비보셋의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기의 이득을 취하려는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자기 주인인 므비보셋을 깎아내리고 관계를 멀어지게 하고 이간질을 하는 것을 통해 자기 이익을 얻으려는 흑심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나에게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고 이렇게 호의를 베푸는 음식이 정말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덥석 받지 않고 덥석 물지 않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위기와 어려움에 있으면 우리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에 나에게 좀 도움 준다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붙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나를 더 힘들게 만드는 많은 경우가 많이 있는 겁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이 이렇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나를 이용하려고 나를 혼란하게 만들고 나를 흔드는 것이 나를 더 어렵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었고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밖에도 있다라는 것을 잊지 않고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영적으로 민감하고 깨어있는 자의 특징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윗의 위기 상황 가운데 이 놀라운 영적 분별력과 영적인 반응을 우리가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피난 길과 광야길 가운데 환경과 상황은 어렵고 위기 상황이었지만 영적으로는 그에게 축복이고 영적으로 광야 영성을 회복하는 축복의 길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중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우리 인생의 광야로 나아가는 것이 겉으로 봐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영적으로는 우리를 깨워주며 우리를 다시 한번 살리는 영적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예전에 다윗이 사울왕을 피해 광야 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심을 구체적으로 체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광야의 길로 들어가는 다윗왕은 예전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현재화하며 영적으로 민감해지며 내면이 든든해지고 단단해지는 기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그 어려움과 위기 가운데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의 어려움 가운데 도움을 주는 척 하면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렵고 힘들고 외통수에 걸려있는데 그 사람을 도와주기는 커녕 그 사람의 눈물과 위기와 어려움을 이득으로 취하려는 이런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올 수 있다라는 것을 분별하는게 바로 영적 능력입니다. 그 가운데 뜻이 무엇이고 이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분별하여 내가 휘말리지 않는 지혜를 갖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분별해야 될 영적 지혜인 줄 믿습니다.도움을 무조건 받는 것이 아니라 덥석 무는 것이 아니라 이 도움과 호의 뒤에 숨겨진 뜻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분별하여 그것에 이용당하지 않고 더 큰 상처받지 않는 것이 영적 분별력임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고 타락했으며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존재임을 잊지 말고 그들을 사랑하되 지나치게 신뢰하지 말고,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라는 것 잊지 마음에 새기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사람들의 도움과 호의에 지나치게 기대지 말고, 하나님의 도움과 호의에만 기대며, 하나님의 음성에만 충실하며 하나님만 믿고 신뢰하며 영적으로 분별하여 나아가십시오. 위기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우리가 무너지지 않고 눈앞이 캄캄해지지 않고 바른 영적인 분별력과 결정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나를 살리는 도구로, 바른 영적 반응을 통해 도약으로 나아가고 승리로 나아가는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다윗왕은 고개를 들 수 없고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은 상황입니다. 왕으로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었던 다윗왕 이었지만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당하여 피난길에 오르는 그의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이 자기를 배신하고 칼을 꼽는 거는 그래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 배신하고 등의 칼을 꼽는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아픔과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피난 가는 모습은 지금 다윗의 심정이 어떤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서 당하는 위기와 어려움, 참담한 상황 가운데 다윗왕이 보여주는 영적 반응을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이 캄캄해져서 눈에 보이는 것에 압도당하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합니다. 나의 도움과 필요가 된다면 옳고 그름은 따지지 않고 붙들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이 압살롬을 피해 피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다가 왕과 함께 피난 가려고 올라왔습니다. 누가 봐도 압살롬이 아버지에게 잘못한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했다는 것이 명확하기에, 우리는 피난 가는 다윗왕을 따라 하나님의 언약궤가 같이 가야 되겠다며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궤가 자신과 함께 간다는 것은 이 절박한 위기 상황에 다윗에게는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같이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힘입니다. 자기 아들에게도 배신당하여 도망가는 피난 길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나와 함께 같이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신하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장악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궤가 다윗 왕과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며 정통성과 정당성이 다윗에게 쏠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왕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궤가 피난을 같이 간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힘과 위로이자, 지푸라기라를 붙드는 심정을 넘어 재기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궤가 자기를 따라오려고 제사장들이 기다리고 있을 때 당연한 반응은 덥석 그 기회를 물고 잡는 것입니다. 나를 버리지 않고 같이 따라와서 함께 한다니까 얼마나 내가 힘이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와 하나님은 당연히 함께 가야지요….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고 당연한 반응입니다. 그런데 이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다윗은 나만을 바라보고 눈에 보이는 상황만 바라보는 뻔한 반응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일 먼저 바라보는 영적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위해 가장 귀한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가를 제일 먼저 생각하고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위기 상황 가운데이 눈앞이 캄캄해 지는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서도 내 상황의 어떠함에 모든 것이 쏠리는 대신, 하나님의 어떠하심…그게 결정에 최우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너무나 중요한 도움과 힘이 되는 상황이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궤는 나를 따라오면 안 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셔야 한다는 것을 결정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궤가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이 어려워지고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나 때문에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나에게 도움을 주시기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은 하나님이 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합니다…라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믿기에, 아무리 큰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하나님을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분명한 영적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목숨이 사라지고 위험해지는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나는 하나님을 수단이나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고백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영적 반응의 이유는, 지금 나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언약궤 나와 함께 피난 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궤가 있는 것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중요하다는 것이죠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중요하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이 더 중요한 본질임을 바라본 것입니다. 나 중심 나의 필요와 원함 중심을 넘어서 왕으로서 백성들의 필요와 보호를 먼저 바라보는 분명한 우선순위를 붙드는 왕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 다윗이 도망자 신세로 사울왕에 쫓겨다닐 때, 사울 왕을 죽일 수 있었던 두 번의 절호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눈 딱 감고 그 사울왕을 죽이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눈앞에 사울왕을 한 번에 처단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그냥 흘려보냅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에서 내 필요와 원함을 넘어 하나님이 어떠하신가를 먼저 붙들고 하나님의 기준을 먼저 붙드는 영적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영적 반응을 붙드는 위대함이 다윗왕을 이렇게 놀랍게, 지속적으로 쓰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흠이 많고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 계속 쓰임 받으며 왕으로서 설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면,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그는 오히려 영적으로 더 민감했었고 영적인 반응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계기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온전한 믿음의 자리를 회복한다는 것은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내 상황 중심과 필요 중심을 넘어 영적 반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나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떠하심을 먼저 붙들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인가를 먼저 바라보는 기적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나의 필요와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너무 귀합니다. 나를 지켜 주시는 하나님 너무나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런데 나를 지켜 주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면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구이고, 주님이 내 삶의 목적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 필요가 이만큼 중요하고 급박함에도 불구하고, 나의 필요와 나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수단화 하거나 도구화하지 않겠습니다…는 고백을 철저히 붙드는 것입니다. 나는 끝까지 어려움과 아픔과 위기 가운데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가 존재합니다…라는 것을 분명히 고백하는 영적 반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위기와 어려움 가운데 나에게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간절한 필요와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넘어서야 되는 큰 위기와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의 기도 제목도 내 위기도 내 어려움도 너무나 긴급하고 중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목적으로 두는 뻔한 반응을 넘어서며 하나님을 내 삶의 목적으로 두는 영적 반응으로 나아가십시오. 위기와 여러움 속에서도 나 중심, 상황과 이익 중심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수단화 하고 도구화 하는 뻔한 결정을 넘어서십시오.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온전히 내 삶의 목적이고, 내가 하나님 때문에 존재한다는 이 분명한 기준을 정확하게 붙들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내 힘으로 이 영적 반응으로 나아갈 수 없기에 하늘로부터 능력과 힘을 구하며 성령 충만을 사모하십시오. 그럴 때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눈앞이 캄캄해지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위해 내가 존재함을 끊임없이 고백하며 나의 상황을 주님께서 풀어 주심을 믿으며 나아 가는 이 영적 결정이 나를 변화시키고 세우고 지켜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늘 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선명히 고백하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으며 오늘도 영적 반응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에 유언으로 주셨던 일곱 마디, 가상 칠언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가상 칠언으로 바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거의 유언과 같이 말씀하시는 중에 왜 “나는 목마르다..”를 말씀 하셨는가…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통 가운데 내가 목마르다 말씀하신 진정한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그리고 나는 무엇에 그렇게 목마르며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목마르다…는 십자가에서의 절규는 당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6시간이 넘게 지금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고 계시니까 그 고통은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목이 너무 타서 내가 목마르니까 나에게 마실 물 좀 달라…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가시면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시면 나는 목마르다….소리치실까, 지금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고 묵상하는 것도 참 중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적인 갈증과 목마름을 위해서만 이 말씀을 하신 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선언은 육신의 갈증을 넘어서 더 깊고 본질적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한 주님의 선포였다는 것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첫 번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목마름은 다가올 지옥의 실체에 대한 예수님의 경험입니다. 사도신경을 보게 되면 영어와 한글의 사도신경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글에는 없는데 영어에는 분명히 있는 것이 바로 descended into hell…죽으신 후 지옥으로 가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지내시고 지옥에 가신 후에 3일 후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사도신경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죄를 짓고 그냥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죽으시고 장사 지내시고 지옥을 3일 통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큰 고통 가운데 죽으셨고, 영원 형벌이 있는 지옥을 3일동안 통과 하신 후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부자가 죽음 후 음부에 던져졌는데, 그 음부의 고통을 지옥불로 인해 지옥 불꽃 가운데 괴로움과 고통이 너무 크기에,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래서 지옥에 던져진 사람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지옥불 때문에 겪는 타는 목마름이라는 것입니다. 한 방울 물이라도 내 혀에 닿으면 좋겠을 죽음의 고통이 찾아오는 목마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시는 이 목마름은 지옥의 고통을 경험하기 시작하시는 목마름인 것입니다. 음부의 초입에서 지옥의 타는 목마름, 그 고통을 주님이 느끼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가장 큰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었고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배신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죽어 지옥을 통과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으셨는데 인류의 모든 죄값을 대속하고 치루시기 위해 죽으시고 그 지옥을 향하여 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가 목마르다…는 진정한 영적 의미입니다 두번 째 더 중요한 나는 목마르다…는 영적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그 지옥의 고통 가운데 목마름을 넘어 부활을 통하여 구원의 선물을 완성하실 그 영광에 목마름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드디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여 온 인류를 향하여 구원의 선물을 다 이루시는 역사에 내가 목마르다…선언하시는 겁니다. 물론 지옥을 통과하시고 모든 것을 고통 가운데 경험하시지만 3일 후에 다시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의 첫 열매가 되시는 것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모든 인류를 위한 죄의 값을 다 치르시고 열방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예전에 히딩크 감독이 했던 유명한 말 있지 않습니까? 나는 여전히 승리에 목마르다…그런 사명에 대한 목마름이었어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패배자와 같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나는 목마르다.. 말씀하신 게 아니라 승리의 선포를 향한 주님의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완성되어 놀랍게 부활하실 그 승리에 그렇게 목마르신 것입니다. 십자가 가운데 그렇게 고통을 당하지만 지금 예수님은 그 사명의 완성에 목마르신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죽어 가시면서 우리를 대속하사 하나님의 자녀 만드실, 구원의 선물을 완성하실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며 목마르신 겁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께서는 물어보고 계십니다. 나는 과연 무엇에 그렇게 목마르고 살아가는가? 내 인생의 타는 목마름이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성공을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여전히 목마르고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뜻과 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여전히 예수님을 수단과 도구로, 필요한 존재로 예수님에게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근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나는 목마르다 선포하시면서 정말 승리하고 성공한 인생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인생이며, 내 이름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인생임을 선포하십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인생,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매인 자들이 풀어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사단의 계획을 결박시키는 이 영적인 승리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포되며 성취되는 것이 정말 성공한 인생이고 승리한 인생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타는 목마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으며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건지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뿐만 아니라 그 지옥에 불을 통과하셨다는 것을 나는 정말 믿는가? 나는 그 예수 공로 아니면 내가 영원한 형벌을 받을 존재라는 것을 정말 믿는가? 주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물어보고 계십니다. 죽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영원히 죽지 않는 죽음을 두려워하십시오. 그 영원 형벌에서 나를 건지신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타는 목마름으로 갈증을 느끼며 나아가야 될 방향은 바로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지며,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영광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통하여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목말라 하십시오.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합니다. 내 인생을 통하여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어지면 하늘에서도 풀어지는 역사를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합니다. 그것이 나의 타는 목마름이 될 때 진정으로 승리한 인생,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 결박 되고 매인 것이 풀어지고 사단의 미혹과 궤계를 결박 하는 놀라운 역사로 쓰임 받는 거룩한 주님의 종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일곱 마디, 가상 칠언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네 번째 말씀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강도 중에 한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두 행악자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게 함으로서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행악자의 한 사람 같이 몰아넣는 프레임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예수님을 달지 않고 두 강도와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상 칠언 네번째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그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에 강도와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이 두 강도는 어떻게 보면 모든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를 보여주는 모든 인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두 강도, 죽어가면서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이 두 강도의 모습은 우리가 선택해야 되는 영원한 선택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게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진 않지만 이렇게 시한부의 인생을 통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인데 그 죽음 앞에서의 마지막 선택과 결단이 우리가 영원히 거할 처소를 결정하게 된다는 이 우주적인 사건의 모습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왼쪽에 달린 강도의 선택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네가 지금 그리스도면 지금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우리를 살리라는 것이죠. 예수님과 함께 죽어가면서도 강도 하나는 예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너의 능력을 보이는 게 구원하는 거라고 예수님을 흔들고 있는 모습은 끝까지 강도로 이용하여 사단 마귀가 예수님을 흔드는 모습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바로 앞두고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도록 흔드는 사단의 미혹입니다. 이 강도와 같이 죽음을 앞두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면서 죽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끝까지 남 탓하면서, 하나님 탓하면서 원망과 분노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착각하며 살았는데 죽음을 앞두고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데 그 다음에 답이 없는 인생으로 예수님을 거절하고 영접하지 않은 채 이렇게 원망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며 탓하고 끝나는 인생이 많이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십자가 오른쪽에 달린 강도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냐면서 예수님을 저주하고 원망하는 강도를 꾸짖습니다. 결국 많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하여 그렇게 비방하며 조롱하고 멸시하고 저주했던 이유가 하나님 두려운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런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이 강도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자각하며, 하나님 앞에 자기 인생을 두면서 죽게 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이 강도는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의 죄 값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각했습니다. 그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땠는지 전혀 알지 못하나 십자가의 형에서 죽을 정도면 중범죄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에게 돌아왔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존재로 서며 내 죄값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거절합니까? 나는 나름 착각에 살았다는 겁니다. 나는 나름 선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지 않기에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게 있냐고 늘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그 빛 가운데 서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빛 가운데 내가 얼마나 어둠이었는지를 깨닫고, 나는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자각하고 발견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복해야 그 은혜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세번째, 마지막 강도 입술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주님 나 천국 데려가 주세요… 이렇게도 못했고 그냥 기억해 달라…한마디 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침투하고 임하는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의 나라가 나에게 임하며 그의 다스림과 통치가 지금 나에게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는 것은 결국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천국 확신은 내가 죽어 예수님 앞에 섰을 때 나를 무관한자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나를 알고 기억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더라도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시고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녀야…여기 생명책에 너 이름 기록되어 있어…라고 말씀하시는 그 예수님을 확신하는 게 천국 확신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는 건 그냥 내 기도 제목을 아뢰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 기도 제목을 응답 받고/ 받지 않고 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기억하신다는 분명한 믿음 가운데 주님과 사귐의 소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를 기억하심을 분명히 믿기에 내 기도 제목도 주님은 분명히 들으시고 기억하심을 믿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 죄값으로 죽어 마땅한 인생, 주님께 기억되기를 소망하는 인생으로 놀라운 고백을 이 강도가 하고 있는 겁니다. 그 강도를 향하여 예수님이 놀라운 말씀을 선포하십니다…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오늘…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 그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영생을 좌우한 것입니다. 내 인생이 이 땅에서 끝나서 예수님이 왕이신 그 천국에, 주님의 손에 이끌려 나아가는 존재, 나는 주님께 선명히 기억된 존재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인생을 끝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고백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거할 처소가 천국으로 결정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억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으며 주님과 함께 그분의 손에 이끌려 가는 곳이 천국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시한부 인생으로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인데 이 시간 내가 예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지 아니하면 그 십자가 은혜가 나에게 생명과 능력 되지 못함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십자가 은혜가 절실하지 않은데 그 십자가 사랑이 감격으로 나에게 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인생, 예수님에게 기억되는 인생, 죄로 죽어 마땅한 죄임을 발견하는 인생이 되어야 십자가 사랑을 은혜와 감격으로 받아들이며 바른 선택과 고백으로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될 줄 믿습니다. 그게 저주가 떠나간 인생이며 죽음이 떠나간 인생이며 모든 결박이 떠나간 인생이며, 참 자유 누리는 인생입니다. 모든 인류가 예수님 앞에 지금 죽어가는 두 강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하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존재가 있고 예수님을 부정하고 부인하고 거절하며 심판과 죽음으로 끝나는 그 멸망의 인생이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죽음 앞에서 둘 중에 하나의 선택과 결단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도 없는 인생으로 영원한 사망으로 끝나든지,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든지… 죽음 앞에서 예수님에게 내 영혼을 부탁하는 인생이 있고 예수님 앞에 거절하고 거부하고 비방하고 탓하며 허무하게 끝나는 인생이 있습니다. 순간의 선택으로 영원히 거할 처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하고 영원을 좌우한다는 이 깊은 진리를 말씀으로 깨닫기 원합니다. 우리 인생은 결국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두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 없이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가로 결정됩니다. 신앙의 무감각을 깨고 회복한다는 것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 서서 내가 이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고 나의 죄값은 죽음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기억되는 인생이 되면 여러분들은 승리하는 겁니다. 예수님과 무관하지 않고 그분의 자녀로 바른 관계 속에서 있는 게 여러분 승리하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약속으로 주신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놀라운 생명의 말씀으로 품고 감격으로 받아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그 은혜 가운데 거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가상 칠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유언과 같이 남기셨던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을 함께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말씀으로써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유명한 탄식은 시편 22편에 등장하는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당하시는 예수님의 참담하고 아픈 몸과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 육시부터 구시, 즉 오후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가장 밝아야 될 대낮에 가장 어두워짐을 통해 이 어두움은 하나님이 보내신 어두움임을 알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 것인데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등을 보이시고 버리시는 단절을 그대로 보여주는 흑암과 어둠입니다. 대낮에 갑자기 찾아온 흑암과 어둠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냥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으로 하나님에게 버림받고 저주 받으심을 증언합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시는 십자가의 고통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거의 6시간 가까이 십자가에 매달려 계셨으니까 그 고통과 아픔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지 지옥의 경험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은 예수님이 당하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하는 배신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가고 숨어서 철저히 제자들에게 버림받고 외면 당하시는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육체적 고통, 가까운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고통을 넘어, 큰 가장 큰 고통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는 고통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외아들이 인류의 우리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지시고 거룩한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나무에 달려 저주 받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은 절규하며 소리치실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으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절규를 마음속 깊이 담아보기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는 것은 단순히 온 인류의 죄값을 지고 사망하신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저주도 다 받으시며 버림받으시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에게서 온전히 버려지는 경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는 저주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고난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나무에 달리신 것은 저주 아래 있게 되셨음을, 우리가 당해야 될 저주를 받으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 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될 죄의 저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끊어지는 죄의 저주를 예수님이 친히 감당 하시면서 이렇게 절규하시는 것을 내 마음에 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시간 예수님께서 부르짖는 절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이 안타까운 절규를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무거운 것인지 깨닫기 원하십니다. 그냥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죄 용서하셨다… 이걸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감당해야 할 죄의 저주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내가 치루어야 할 죄 값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말입니다. 죄에는 너무나 무거운 무게와 죄값이 있다는 것, 죄에는 끔찍한 권세가 있다는 것, 죄에는 치루어야 될 저주가 있다는 것을 예수님의 절규와 고통을 통해 깨닫기 원하십니다. 내가 죄값으로 정말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고백, 만년 동안의 연봉보다도 무거운 것이 죄 값의 무게라는 것을 선명하게 아는 것, 그 무겁고 값을 길 없는 죄값을 대신 치러 주시고 탕감해주신 놀라운 십자가 사랑이 나에게 부어졌다는 것을 선명히 아는 것이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는 신앙입니다. 죄값을 넘어 죄의 저주도 다 감당하시며 내가 당해야 할 저주를 풀어주심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나에게 풍성하게 담기는 것입니다. 죄의 끔찍한 대가에 대해 망각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 사랑을 망각하지 않는 길이고, 죄의 엄청난 저주를 마음에 새기는 것이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새기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저주를 당하신 그 끔찍하고도 심각한 죄의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잊지 않고 살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죄의 참담한 결과를 망각하지 않는 것이 고난 주간에 십자가를 현재형으로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는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죄 값 탕감과 저주를 풀어 주시기 위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며 버리셔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임을 온몸으로 깨달을 때, 십자가 사랑에 철저하게 빚진 자로 감격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며 나를 살리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지금 나를 여기 있게 한다는 깨닫고 살아가십시오. 그 주신 복을 깨달으며 십자가 은혜 가운데 내 신앙을 분명히 세우십시오. 십자가에서 주님의 절규를 내 마음에 새기기 주님의 그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나에게 자랑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인 신앙의 그 깊은 본질로 나아가는 고난 주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난 주간 동안 십자가 상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유언과 같은 가상 칠언을 통해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십자가에서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하는 말씀이 두 번째 말씀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힘들고 아픈 거 하나를 꼽는다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당하는 배신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시는 그 고통은 일차적으로 말할 수 없는 육체적 고통입니다. 그 십자가 형이 주는 말할 수 없는 물과 피를 다 쏟는 고통이 예수님에게 상상할 수 없게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 두 번째 어떻게 보면 더 큰 고통이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고통입니다.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지시고 모든 죄 무게를 지금 가시 면류관에 쓰고 지금 견디고 계신 거죠. 거기에 삼중적 고통 하나가 더 추가 되시는데, 가장 믿었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예수님의 12 제자들이 거기서 목숨을 내놓은 결단으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으면 그나마 덜 힘드셨을 수 있는데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현장에 제자들은 배신하거나 도망가거나 숨은 자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3년을 먹고 마시고 목숨 걸고 주님과 함께 하겠다고 호언 장담했던 그 제자들이 십자가상에서는 배신하고 다 사라져 버린 것이죠. 그리고 누구만 남아 있는가 하면 여인들과 제자 요한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은 남자들은 다 도망가고 남아있는 여인들이 결국 십자가를 지켰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배신의 아픔과 쓰라린 가운데 유일하게 목숨 걸고 그 십자가 자리에 있었던 제자가 요한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가상 칠언은 그 요한과 자기의 친어머니인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모에게 자식이 하는 제일 큰 불효 중에 하나가 자식이 먼저 죽는 거라고 합니다. 그것도 병들어서 죽는 게 아니라 가장 끔찍한 처형을 받아 죽는 현장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성령에 잉태되어 이 세상에 온 아들이 발가 벗겨져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있고, 온몸에 피와 물을 다 쏟고 있는 아들을 보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말할 수 없는 절망이었을 겁니다. 그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 마음을 헤아리며 십자가에서 유언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 함께 남아있는 제자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부탁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끝까지 자기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는 것을 통해 두 가지를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는 예수님께서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끝까지 효도하며, 십계명에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마지막까지 지키는가에 대한 아들로서 효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정말 효심이 대단하고 끝까지 어머니를 부탁한 착한 아들, 대단한 아들, 귀한 아들, 이게 첫 번째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게 두번째 의미로서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의 개념이 무엇인가를 선언하시며 유언으로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에서 얘기하는 가족의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가족이고, 사명으로 맡겨진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한테 친어머니를 부탁할 때, 단순히 내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보라, 너의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인데 이제 너의 어머니라는 겁니다. 스승의 어머니이니 당연히 제자 요한의 어머니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천국에서 재정의되는 가족의 의미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가족은 혈연을 넘어서, 누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어머니이며 형제 자매임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서 예수님을 머리로 모신 한 가족이라고 얘기할 때, 그냥 상징적으로만 영적 가족이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실제적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모인 자들로 가족의 정의가 재편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가 나의 어머니일 뿐만이 아니라 너의 어머니다…라고 유언과 같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요한이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음을 의도적으로 증언합니다. 이걸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가족이라는 건 뭐냐면 맡겨진 사람들을 믿음으로 품는 게 가족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영적 가족이란 혈연을 넘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가족이고, 맡겨진 자들을 품는 게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부탁 때문에 어떻게 보면 요한은 12제자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순교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같이 모시며 끝까지 함께 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호불호가 있고 좋은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가족의 본질은 맡겨진 자를 내가 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기에 힘들고, 사랑 받을 만하지 않은 거 같고, 용서 받을 만 하지 않은 거 같은 이런 어려운 성도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바로 천국 가족이지…. 맡겨진 자를 품는 게 가족이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믿음으로 고백하는 곳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의 가족에도, 영적인 가족인 교회 공동체에도 이 두 가지를 늘 기억하는 것이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 그 가치를 붙들고 모여 있습니까? 또한 우리는 맡겨진 자들을 내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십니까? 그게 새롭게 재편되는 천국에서 영적 가족의 본질임을 잊지 마십시오. 가정에서 아버지에게 맡겨진 일과 사명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맡겨진 일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맡기셨군요…하고 품고 가는 게 십자가를 지는 겁니다. 맡겨진 일과 맡겨진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감당하는 것이 영적 가정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교회에 구경꾼이나 손님 같이 오는 분들은 맡겨진 사명과 사람들을 외면하는 사람들이고, 제자들은 맡겨진 사명과 사람들을 십자가를 지듯이 책임을 감당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그 사명을 지키고, 그 사람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맡겨진 사람들, 맡겨진 사명들, 맡겨진 자리를 충실하게 지킬 때 주님이 주실 빛난 면류관이 기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예수님이 그 길을 걸어 가셨듯이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람들, 주님이 맡기신 사명, 주님이 맡기신 자리를 외면하지 않고, 충실히 끝까지 지키는 충성의 제자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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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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