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일은 15가지이고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가 오늘 말씀에 증언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면 필연적으로 육체 일을 만들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이거 아니면 저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마치 자동차 악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을 수 없듯이 내 인생에 성령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성령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게 되면, 반드시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주도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이지만 아홉가지 다른 열매가 아닌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본질적으로 하나인데 그 안에 아홉 가지의 다른 맛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인내와 자비와 양선의 열매를 함께 말씀의 은혜로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인내, 오래참음의 열매입니다. 참을 인…이라는 단어는 제가 군생활 할 때 연병장 큰 돌에 새겨진 한문이었습니다. 칼 도에 마음 심…이 합쳐진 단어가 참을 인…아니겠습니까? 참는다는 건 내 마음에 칼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칼을 품고 참으니 그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칼을 품고 있으니 피가 나기도 하고 때로는 마음이 너무 힘들어 그것이 결국 병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고 참다가 불이 너무 많고 그게 쌓이고 쌓여서 병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인내, 오래참음…이라고 하면 좋지 않은 것이라는 부정적인 정서가 강하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수동적인 정서, 되도록 피해야 된다는 생각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바로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라는 것이죠. 왜 참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닌데 잘못 참으면 화병도 생기는데 참다가 마음에 칼을 품는 것처럼 아프고 힘이 드는데, 왜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가 오래 참음의 열매일까요? 사실 성도로서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구하고 사모하지만, 사랑의 열매나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맺도록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성령의 열매로서 인내의 열매를 매우 강조한다는 것이죠. 성령의 열매로서 인내라는 것은 내가 주먹 쥐고 일방적으로 참고 견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와 소망을 붙들고 기다리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내가 마음에 칼을 품고 억지로 마지 못해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며 소망을 붙들고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인내입니다. 그래서 소극적인 기다림, 마지 못해 견디는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디며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 인내이기에 오직 내 힘이 아니라 하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맺어지는 겁니다. 구약 성경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자주 사용하셨던 훈련 방법이 바로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한 훈련이었습니다. 나의 때와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하는 기다림의 훈련이었습니다. 이 오래참음의 훈련에 물론 모든 사람이 패스한 건 아니지만 예외없이 하나님은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인내와 기다림의 시간을 지나가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인내와 오래참음의 열매를 맺기 위해 하나님은 그들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해서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랬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훈련을 계속 시키셨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인내와 오래 참음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인내와 오래 참으심이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전까지 그동안 오래 기다리셨고,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기 전까지 길이 참으셨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까지 계속 회개를 촉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은 여전히 재림하시기 전 길이 오래 참고 계신 겁니다.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끝까지 기다리시며 한 사람이라도 돌아오기 원하시는 주님의 그 오래 참으심이 결국 저와 여러분들을 이렇게 살린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인내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막연하게 오래 참는 게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이기며 모든 것을 견디는 놀라운 인내의 열매를 맺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오래 참으심의 사랑이 내 인생 가운데 부어져 있다는 것을 믿으며 하늘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는 인내의 열매,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기를 사모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내가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환경과 상황이 있을 때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며 나를 놓지 않으셨던 주님의 오래 참으신 사랑을 기억하고 붙들며 놀라운 인내의 열매를 맺기 소망합니다. 두 번째는 자비의 열매란 친절하고 온유함의 열매입니다. 식당에 가도 맛있는 음식도 중요하지만 식당도 동시에 그 식당이 친절해야 자주 가게 됩니다.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불친절한 데는 한 번 가지만 그 다음에는 잘 안 가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음식과 친절한 서비스가 항상 콤비네이션이 돼서 유명한 식당이 되는 겁니다. 자비의 성경적 정의는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도움이 되게끔 쓸모 있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자비의 열매를 맺은 성도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온유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로 인도하고 품어 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비의 열매는 예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법대로 하고 정의대로 했으면 여기 살아남 자가 아무도 없는데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하심의 마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용서하시고 건져 주셔서 지금까지 잘 살게 된 겁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예수님이 나를 향해 바라보시는 마음이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기에 우리가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불쌍한 마음인 자비함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친절하고 자비한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불신자들에게 다른 삶의 향기와 열매를 보여주었습니다.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성도들의 삶이 그렇게 친절하고 자비롭고 온유함이 넘쳐났다는 것을 알있기에 예수쟁이라고 놀림을 당했을 지언정 그들의 구별되고 다른 삶은 불신자들과 그 지역을 놀랍게 변화시켰습니다. 점점 세상이 무자비해지고, 무관용의 시대가 되어 가는 이 때에 예수님이 부어 주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비의 열매를 풍성이 맺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양선의 열매인데, 양선이라 말은 요즘에 잘 쓰지 않는 단어입니다. 어질 양, 착할 선…이 양선인데 어질고 착한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God is good, all the time…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에게 언제나 좋다는 것을 고백할 때 바로 이 양선이란 말입니다. 좋다는 것이 내 생각에 좋다는 게 아니라 말씀에 비추어서 좋고 하나님 뜻에 좋은 것이 양선입니다. 내 상황이 언제나 좋은 일로 계속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나에게 하나님의 빛이 비추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하늘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면 두 가지가 발생하는데,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어둠이 빛으로 말미암아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빛이신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나의 자격 없음과 소망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 이게 좋은 것, 양선의 열매입니다. 또한 나에 대한 철저한 자격 없음, 소망 없음을 고백할 때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둠이 물러가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실 때 나는 내가 어둠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망 없고 자격 없는 나를 사랑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붙들 때 내 삶에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임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양선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전에 어둠이었다 것을 철저히 고백하는 겁니다. 동시에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이 시간 빛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었음을 철저히 고백하는 겁니다. 인내의 열매도, 자비의 열매도 양선의 열매도 결국 나는 이 세상에서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임을 고백하며 사는 삶입니다. 내 스스로 빛이 없고 선이 없음을 철저히 고백할 때, 발광체인 예수님의 빛을 받아 반사체로 빛을 내는 존재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고 언제나 빛 되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빛을 담아 반사하는 삶, 그 삶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육체의 소욕으로 맺는 15가지 육체의 일을 구체적으로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 대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됨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가슴으로 뜨겁게 믿고 머리로 바로 알고 온몸으로 힘차게 살아가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그 결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건강하고도 건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의 마음이 나에게 채워지며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육체의 일은 15 가지였는데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가지로,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열매가 복수가 아닌 단수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복수가 아니라 단수라는 것은 아홉 가지의 다른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지만 아이스크림 맛이 다르듯 아홉 가지의 다른 맛과 향이라고 생각 하면 됩니다. 첫 세 가지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성령의 열매, 인내와 자비와 양선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통해 나오는 성령의 열매,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내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나오는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처음 세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열매를 말씀의 은혜로 나눠 보기 원합니다.
첫번째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차원이 있고 사랑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견해가 있는데 오늘 말씀에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은 아가페 사랑, 즉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주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 열매로 맺는 것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이고 일방적인 사랑이고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주는 사랑으로 맺는 열매이기에, 사랑의 열매는 오직 성령의 힘과 능력으로 맺게 되는 것이지, 내 힘과 능력으로는 절대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중심적으로 자기의 사랑받는 것을 항상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런 인간이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를 사랑할 때 부족하지만 부분적으로 자녀들에게 이 아가페 사랑을 부어주며 살아갑니다. 자녀들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0세에서 3세 사이 그때 모든 것을 부모들은 조건 없이, 일방적으로 퍼부어주는 사랑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정의된 사랑은 뜨겁거나 마음이 흔들린다거나, 매력적이거나, 이런 게 아니라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 첫 번째 사랑의 정의인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기다려 주는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조건적이거나 주고 받는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부어주는 사랑입니다. 어떻게 보면 매력 없다 말할지 모르나 그런 조건 없는 사랑, 일방적이고 부어주는 사랑이 우리 인생을 바꾸게 되는 것이며 그 사랑을 먹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 사랑이 나를 놀랍게 변화시킨 사랑이고, 우리의 삶 속에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 때 그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먼저 돌아가심으로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여전히 죄에 뒹굴고 있던 나, 사랑받을 가치나 이유가 하나도 없는 나에게 먼저 예수님이 죽으셔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 일방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뒤집고 그 십자가 사랑이 바로 우리가 맺는 성령의 열매 첫 번째인 사랑의 열매입니다. 자격도 조건도 안되는 나를 일방적으로 조건없이 부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가 모두 변화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사랑 가운데 거하며 살기에 그 성령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붙들고 살아가면서 우리 삶에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로서 우리가 사랑의 열매는 열매를 맺자는 것은 구호도 아니고 맺어야 된다는 당위성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우리가 그 반응으로 결과로서 그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마음에 담아, 내 삶에 하늘의 양식으로 취하고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살아갈 때, 내 삶 속에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희락의 열매는 기쁨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 가운데 거하면 우리의 삶에 기쁨이 흘러나오고 찾아오는 신비를 경험합니다. 이 기쁨은 세상과 환경이 주지 못하는 기쁨입니다.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될수록 점점 웃을 일이 별로 없어져서, 그 기쁨과 감탄을 찾기 위해 그렇게 여행도 다니고 특별한 데를 가보고 멀리까지 가서 한번 감탄사 내 보려고 그렇게 노력합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잠시 느끼는 어떤 행복한 감정을 넘어서 내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을 정도로 감탄사가 나오는 기쁨입니다. 뻔한 인생, 메마른 인생, 딱딱한 인생에 성령의 소욕으로 살아갈 때 하늘의 기쁨이 임하게 되며, 그 끝에 희락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기 좋으셨다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기 좋다는 말이 히브리어로는 ‘토브’인데, 이건 그냥 좋다 정도가 아니라 요즘 말로 하면 “따봉”입니다. 정말 대단해, 정말 멋지다…라는 감탄사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내셨던 기쁨이고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의 열매로 맺게 되는 희락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의 표적의 첫 번째가 혼인 잔치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신앙생활은 본질적으로 기쁨이 넘치는 잔치라는 겁니다. 일주일 내내 파티가 열릴 정도로 기쁜 것이 바로 신앙생활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 감탄사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묵상할 수록, 하나님의 속성을 묵상하며 묵상할수록 내 인생에 감탄사인 따봉! 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깨달으면 깨닫을수록 우리는 이 기쁨과 희락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희락의 열매를 온몸으로 체험하며 맺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 희락은 하늘의 기뻐함이고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는 기뻐함 이었습니다. 환경이 바뀌고 살만해져서 기뻐하는게 아니라, 감옥 안에 있어도 주 안에서 그냥 기뻐하는 겁니다. 더 나아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상황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기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 때문에 기뻐하는 게 아니라 모든 상황 안에서 기뻐하는 겁니다. 위에 있을 때나 아래에 있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in all circumstances 모든 상황 안에서 우리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물 나고 가슴 치고 힘든 감옥에 있을 지언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 안에서 더 큰 예수님의 기쁨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기적을 누리는 겁니다. 억지로 하는 기쁨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쁨이 흘러나오는 기적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그렇게 따봉을 외치셨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그렇게 기뻤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모든 상황 가운데 기뻐하는 그 놀라운 역사인 희락의 열매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맺으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뻔하고 딱딱하고 메마른 그런 일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속성인이 기뻐하심 희락의 열매, 감탄사가 나오는 기쁨의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사모하는 겁니다. 세 번째 화평의 열매는 바로 평화의 열매입니다. 화평이라는 말은 평화라는 말보다는 좀 더 관계 중심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관계의 평화로, 특별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해 흘러 나오는 모든 관계의 축복을 화평의 열매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평이란 것 단순히 문제가 없어지고 전쟁이 없어지는 absence of problems이 아니라, 그 문제 가운데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게, presence of Jesus in the problem이 화평인 겁니다. 내가 직면한 어려움과 문제 한복판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샬롬, 화평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신 그 놀라운 역사가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게 되는 화평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화평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부어지고 흘러나오는 화평이고,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화평이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화평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통하여 예수님의 평안을 누리게 되며 그 평안이 나를 지배하며 흘러 넘쳐 그 평안이 삶의 밖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바른 관계 가운데에서만 맺어지며, 성령의 공급하심을 통해서만 맺어지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을 맺든 성령의 열매를 맺든 둘 중에 하나를 맺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우리가 살아가면 그 인생의 결과물로 나오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기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꼭 붙어 하늘의 공급을 받아 살아가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 사랑의 열매 희락의 열매 화평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기를 사모하십시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며 성령 하나님을 통해 공급받으며 주님이 부어 주시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이 내 삶에 깊이 자리잡으며, 뿌리내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사는 삶과 육체의 소욕대로 사는 삶을 대조하는 말씀 가운데, 육체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15가지 육체의 일에 대한 마지막 시간입니다. 육체의 일은 애매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기에 우리가 분별할 수 있고 이것을 경계할 수 있음을 사도 바울은 명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애매하지 않고 분명한 육체의 일 15가지중 마지막은 바로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입니다.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과 이단은 하나의 큰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의 정의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당을 짓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하는 대신, 끼리끼리 모이는 것이고, 그 결과 나누어 지고 찢어지는 것이 분열입니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당 짓는 것과 분열하는 것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하나되는 것보다 나눠지고 소위 말하는 끼리끼리의 문화를 두려고 합니다. 그렇게 나눠지게 되면 주님의 몸된 공동체는 분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렇게 당 짓는 것과 분열을 중요한 육체의 일로 언급한 이유는 완벽한 모델이라고 여겨지는 초대교회에서 조차도 이 부분이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게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도바울의 다른 서신인 고린도 전서를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의 문제이기도 했음을 발견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도 계파 별로 교회 안에 나눠지는 당 짓는 일이 큰 문제였습니다. 게바 파가 있었고 아볼로 파가 있었고, 사도바울 파도, 심지어 예수 파도 있을 정도로 당 짓는 것과 분열함이 큰 도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모인 가장 완벽한 공동체라고 여겨지는 초대 교회 조차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력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육체의 일로서 이단의 문제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사 복음 다른 복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을 이단은 그 뿌리가 당을 지어 분열하게 하는 악한 일이라는 겁니다. 이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다른 게 아니라 얼핏 봐서는 비슷한데 끝이 다른 게 이단입니다. 유사품, 소위 말하는 가짜는 얼핏 보면 비슷한데 자세히 보면 틀린 겁니다. 그래서 유사품을 주의해야 되는데 유사 복음에 주의하지 않고 빠져 큰 어려움을 당하는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순전한 복음에 물타기 해서 만드는 유사품인 이단의 본질은 결국 당 짓는 것과 분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인간의 죄성을 활성화시켜서 우리가 본능과 본성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그게 바로 육체의 일인 당 짓는 일과 분열입니다. 당 짓고 분열하기 위해서는 할 게 별로 없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자연적으로 나눠지고 분열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면 당을 짓고 분열하기 때문에 그 공동체가 힘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을 사단은 너무나 잘 아는 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면 사단 마귀가 꼼짝을 못하는데, 당 짓고 분열하게 하는 사단의 미혹 너무 쉽게 길들여지고 너무 쉽게 활성화되어 살아갑니다. 당을 짓고 분열하는 것도 이단의 문제도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죄 된 본성이 활성화된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다름을 넘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영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육체의 일은 투기인데, 영어로는 envy로 이것은 그냥 부러워하는 것을 넘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악으로 행동하게 하는 투기입니다. 그래서 질투와 시기가 감정에만 머무는 미워하는 감정이라면 투기는 그 악한 감정이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투하고 시기하는 감정을 넘어 실제로 악한 일을 행하고 도모하는 게 투기이기에 매우 심각한 육체의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투기의 대표적인 예는 야곱의 아내들이었던 레아와 라헬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서로가 자매임에도 불구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을 넘어 자녀를 낳는 일로 주도권을 가지려고 악한 일들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었던 라헬은 언니 레아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것을 넘어 자기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녀를 얻겠다고 무리수를 두며 일이 들불같이 커졌습니다. 또 레아도 질 세라 자기의 몸종을 통해서 자녀를 계속해서 태어나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통해 교만해지고 열등감을 가지고 그걸 가지고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을 행동으로 넘어가는 투기는 반드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지 못하고 서로를 헐뜯고 분열하는 것도, 투기에 빠져 미움에 사로잡혀 행동하는 삶도 성령 없는 자들의 특징이며 육체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단의 미혹에 빠지는 문제를 심각하게 여겨 이 육체의 일을 단절하고 잘라내며 벗어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술취함과 방탕함도 심각한 육체의 일로 지적합니다. 술취함이라는 술에 취해 술이 나를 먹는 상태이고, 방탕함이란 사전적 의미가 내가 하나님을 향해 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두 손을 들고 길을 바로 걸어가지 못하죠. 본인은 바로 간다고 주장하는데 비틀비틀 걸어가는 게 술 취함의 특징입니다. 마찬가지로 방탕함은 절제하지 못해서 옳지 않은 낭비로 하나님에게 바로 걸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본인은 바로 간다고 주장하는데 흔들흔들 걸리며 넘어지는 게 방탕함입니다. 그러니까 술취함도 방탕함도 본질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을 가지고 주님께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술취함과 방탕함은 서로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걸 통해 그 당시 갈라디아 지역에서는 술취함과 방탕함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시대였음을 반증합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을 유흥이나 여흥 정도로 관대하게 여기고 당연하게 여기는 문화, 그래서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시대에 이 일을 육체의 일로 경계하며 그것에 대한 분명한 경고를 하는 겁니다. 사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도 술취함과 방탕함에 대해 관대하고 심지어 법적 문제가 발생하는 범죄에도 술기운에 했다고 하거나,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면 그런 부분을 참작할 정도로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술취함과 방탕함이 이만큼 심각한 영적 문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은 하나님 앞에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말씀으로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들어 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이 세상에 취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낭비하고 탕진하는 인생으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 시대가 점점 악해져서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만 당연히 여기에 포함되어 가는 여러 일들이 계속 등장하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예를 들면 도박이나 마약, 혹은 인터넷 보이스 피싱, 사이버 폭력 같은 문제들입니다. 성경엔 도박을 하라 하지 말라, 마약을 하지 말라, 인터넷 보이스 피싱 하지 말라는 경고가 없는 게 그 당시에는 유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있음을 성경은 미리 알고 사전에 이렇게 울타리를 쳐 주신 겁니다. 우리 스스로 분별할 수 있는 분명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육체의 일들이 성경에 언급되지 않지만 계속해서 등장하게 될 거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것을 이미 다 예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기 원하시는 것이죠. 이렇게 성경이 열거하는 육체의 일들 15 가지는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며 우리의 삶과 매우 가까이에 있는 심각한 것들입니다. 이런 육체의 일에 우리가 빠져 살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심각한 결과가 찾아옵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가만히 있으면 나눠지고 깨지고 분열하는 일이 계속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당 짓고 분열하는 것, 투기하고 술취하고 방탕한 것이 육체의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 우리의 본성이 성령의 소욕에 정확하게 통제 받고 지배 받아야만 합니다. 이 부분을 심각하게 생각하며 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육체의 열매인지 성령의 열매인지 육체의 일인지 성령의 일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며 육체의 일을 멀리하고 벗어나며 주님 앞에 뚜벅뚜벅 바로 걸어가는 인생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앞에 똑바로 걸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것들을 벗어버리고 잘라내며 오직 순전 하게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말씀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을 권면하며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벗어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끝은 육체 일을 맺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의 끝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으면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 되면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됩니다. 동시에 육체의 일도 성령의 열매도 헷갈리거나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 삶에 맺어지는 일과 열매를 통해 내가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는지가 아주 명확하고 분명해진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육체의 일 15가지 가운데 두번째 시간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와 분냄입니다.
첫 번째 원수 맺는 것이란 영어로는 hatred, 즉 미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 맺는 것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무엇과 연결되어 있냐면 내 마음속 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 운동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인 미움이는 겁니다. 특별히 미움이 원수 맺는 것이라고 돼 있다는 말은, 미움이 관계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나면서 내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미워 하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깨우는 힘이 되는 인생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늘 파괴적이고 부정적이 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가면 늘 관계가 깨지고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미움 가득한 말들만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원수 맺는 일에 길들여진 인생이며 육체의 소욕에 이끌림을 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사랑인지 미움인지에 따라 내 인생의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인생인지, 무너뜨리는 인생인지가 분별되고, 더 본질적으로는 이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육신의 일을 분별하는 매우 명확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원수 맺지 말고 무너뜨리지 말고 세워주는 인생, 미움이 내 삶을 이끄는 힘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일은 분쟁입니다. 분쟁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나눠져서 시끄러운 다툼을 한다는 겁니다. 독도 분쟁 그러면 일본과 대한민국이 계속 독도를 가지고 싸우는 거 아닙니까 감정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타격이 동반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그런 일본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게 당연하고 그 대상과 원수를 맺고 다툼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미움을 삶의 동력으로 사는 인생 주변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분쟁하는 인생 가운데에는 육체의 일을 주렁주렁 맺으며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와 함께 사랑했던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분쟁에서 그냥 서로 조금 세력과 파가 나눠진 거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심각하게 다투고 싸웠습니다. 요즘에도 분쟁하는 교회를 가보시면 서로 얼굴을 안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정말 대놓고 다투고 싸우며 경찰까지 부르는 겁니다. 내가 미움을 먹으며 미움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고, 계속 나누어지고 싸우게 되는 것을 심각한 영적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특별히 사단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은 항상 divide and fight….나눠지게 해서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같은 팀인데 다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인데 우리 안에서 원수 되게 만들고, 안에서 나눠져 싸우고 분쟁하게 만들어 힘을 안으로 싸우는데 다 소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성도들을 향한 교회를 향한 미혹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원수 맺는 것과 분쟁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분쟁하는 것이 성령을 탄식하게 하는 것이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육체의 일은 시기입니다. 시기란 타인과 비교하여 내가 가지지 못함으로 지니는 부러움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를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이웃이 지닌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늘 결핍의 존재, 늘 부족하고 없는 존재인 겁니다. 이미 주신 게 많은데 늘 초점이 어디 있냐면 없는 거에 있고 부족한데 있고 결핍에 있는 겁니다. 그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시기와 질투가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꾸 타인과 비교해서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란 미워하는 마음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특별히 비교를 통해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 없는 것 부족 한 것을 과장하며 살아가는 육체의 일입니다. 부족한 것, 없는 것, 결핍에 초점을 맞추어 살게 되면 결국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반대로 성령의 사람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과 결핍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미 주신 것,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를 남과 비교함으로 통해 나의 존재감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둠으로 나를 찾는 인생이 되는 입니다. 네번째 육체의 일은 분냄입니다. 영어로는 anger가 아니라 훨씬 강한 단어인 rage입니다. 운전 중에 정신없이 막 화를 분출하면서 가는 차들을 road rage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rage는 분노 폭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터트려서 그 인생을 움직이는 힘, 운동력을 삼는 인생이 분냄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고, 특별히 나름대로의 정의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분을 내고 살아가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럴 때도 화를 내고 분을 내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근원에는 바로 영적 교만이 있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이 있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움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고 그게 바로 육체의 일이라는 겁니다. 내 마음이 미움을, 나누고 싸우는 분쟁을, 없는 것에 집중하는 시기를, 분노로 폭발하는 분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게 바로 육체의 일임을 잊지 말고, 이런 것들을 허용하지 말고 마음에 머무르게 하지 마십시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손님과 같이 왔다가 떠나가게 만들어야지 이것을 내가 확 붙들고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육체의 일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는 대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힘과 능력을 운동력으로 삼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늘 성령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 것을 권면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육체의 소욕으로 맺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소욕으로 맺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이 있다는 것을 대조합니다. 하는 부분이죠 특별히 오늘 말씀은 육체의 소욕에 대해서 우리에게 강조하는 15 가지 육체의 일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15가지의 육체의 일들을 들어가기 전에 육체의 소욕과 그 일들을 직면하는 성도들의 두 가지 착각에 대해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 첫 번째 착각은 성도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신앙 생활의 연수가 길어지면 내가 저절로 괜찮아지고 좋아져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으로 여기는 것이 착각이라는 겁니다. 신앙의 연수에 따라 우리가 저절로 좋아지고 저절로 괜찮아져서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안 좋아질 확률이 훨씬 큽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이스마엘과 같은 육체 일에 빠져 오히려 스멀스멀 옛적으로 돌아가기 쉽습니다. 죄성을 가진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질서에서 무질서로, 좋은 쪽에서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로서 연수가 차면 가만히 저절로 좋아진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두 번째 착각은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맺게 되는 육체의 일은 애매모호 할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육체의 소욕이란 타락한 사람의 부패하고 악한 심성을 말하는데,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나오는 육체의 일들은 애매하고 모호하지 않고 매우 분명하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분명한 선언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이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일일까 아닐까 고민하지 않을 정도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과 육체의 일은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고 분명하다는 겁니다
오늘부터 우리가 세 번에 나눠서 15 가지 육체의 일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육체의 일들 가운데 처음에 나오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 이 다섯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처음 세 가지는 음행, 더러운 것, 호색은 다 성적 타락과 연결되어 있는 육체의 일입니다. 사실이 육체의 일 중에 제일 심각한 거 하나를 들자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데 우상숭배 전에 이 세가지 성적 타락에 연결되어 있는 죄악들이 먼저 등장하는 겁니다. 이 15 가지 중에 심지어 우상숭배보다도 앞서 이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의 죄를 먼저 지적한 것은 성적 타락으로부터 나오는 이 세가지 문제가 다른 것들 보다 가장 심각한 범죄이자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여러 육체의 일들 가운데 교회 안에서 자주 일어나는 심각한 문제들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을 축복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울타리 안에 머물렀을 때만 그것이 하늘의 복이 임하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본래의 목적과 용도를 오용하고 하나님의 질서와 울타리를 넘어가게 되면 음행의 죄, sexual immorality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음행의 죄를 몸 안에서 범하는 죄로 경고하였음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서 짓는데 음행은 자기 몸 안에서 짓는 죄라는 겁니다. 음행의 죄가 육체 소욕이 이끄는 육체의 일이라는 것도 잘못되었고, 하나님이 만드신 우리의 몸,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몸 안에다 짓는 죄라는데 더 심각함이 있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울타리와 질서를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육체의 소욕에 휘둘려서 나의 삶이 이런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에 휩싸이게 될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는 겁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일 중에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의 끝에는 성적 범죄와 관련된 더러운 것이 있는 겁니다. 성경에서 더럽다는 것은 위생의 문제를 넘어 영적 문제임을 분명히 합니다. 특별히 사단 마귀를 복음서에서 묘사할 때 더러운 영이라, 더러운 귀신이라 명합니다. 더럽다는 것은 영적으로 타락하고 오염된 것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겁니다. 하나님은 성적 타락과 죄에 대해서 분명한 기준을 말씀해 주셨는데 더러운 일들은 여기에 다른 말들을 계속 섞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이 세상에서 성은 마치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이 사람과 저 사람과 여러 관계를 맺는 것을 마치 이 음식이나 저 음식을 먹는 것처럼 가볍게 하루 지내는 것 정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이게 다 더러운 영인 사단에게서 온 더러운 일들이 되는 겁니다. 이런 더러운 일들은 필연적으로 세번째 육체의 일인 호색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호색으로 색을 밝히고 색을 좋아한다는 의미입니다. 색은 성적 욕망이 투영된 남색이나 여색을 좋아하고 탐하는 것을 말하는 방탕한 생활을 말합니다. 성은 거룩한 것이고 깨끗한 것이고 하늘의 축복인데, 이것을 더러운 것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이 다 육체의 일이라는 겁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가 피해야 될 육체의 일의 첫 번째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 부분을 우리가 늘 명심하고 마음에 새겨 멀리해야 하겠습니다. 네 번째가 우상숭배인데, 우상숭배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잘못되고 죄인 것을 분명한데 왜 우상 숭배를 육체의 일로 강조하고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우상숭배를 성적 타락과 범죄인 음행과 연관시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것은 영적인 음행이라는 거예요. 우상숭배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지 않는 영적인 음행라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의 핵심은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두지 않는 것이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두지 않는 겁니다. 남편 외에 다른 남자를 두고, 아내 외에 다른 여자를 겸하여 사랑하는 것을 불륜이라고 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나는 부인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다른 남자와 여자를 겸하여 사랑하는 게 무슨 문제냐…정당화되지 않는 겁니다. 건강하고 거룩한 결혼 생활은 남편만 그리고 아내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겸하여 동시에 붙드는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본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했는데 하나님은 그들이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버렸다고 계속 경고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정확하게 드러내라고 명령하신 겁니다. 하나님을 안 섬기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만 섬기지 않는 게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라는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죄악이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으로서 충분한 인생이 되지 않고 계속 우상에 기웃거리고 우상을 동시에 섬기려 하는 것이 영적 음행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육체의 일은 주술입니다. 사실 우리는 주술이나 무당에 굉장히 관대한 문화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과거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여기저기에이 주술의 삶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종교 행위를 통해 주술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냥 오락이나 가볍게 일상 생활에도 이 주술 행위가 굉장히 깊게 파고들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주 팔자 운명 같은 거는 뭐 가볍게 보고, 타로점을 보는 거는 괜찮고, 무당에게 찾아가 샤머니즘의 푸닥거리를 하는 것들에 대해 익숙하고 친근하며, 가볍게 여기며 심각한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성령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주술에 관련된 것을 육체의 소욕으로부터 온 육체의 일로 여기기에 아주 강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각 하냐면 우상숭배나 다름 없는 굉장한 잘못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라는 것입니다. 주술 또한 영적 음행인 이유는 주술을 통해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대로 통제하고 사용하려는 악한 생각을 기초로 하기 때문입니다. 주술이 육체의 일인 본질은 하나님을 이용해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악한 마음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수단과 도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나의 결핍된 존재를 주술을 통해 채우려 하고, 하나님을 나의 욕망의 도구로 투사하는 겁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우상숭배, 주술...이 다섯 가지 육체의 일들은 애매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합니다.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은 분명하기에 우리가 피해야 되고 멀리해야 합니다. 육체의 소욕을 통해 맺게 되는 육체의 일을 직면하는데, 그리고 그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는데 중요하다는 겁니다. 이 분명하고도 확실한 경고인 육체의 15가지 일들을 배우며 현저한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 이런 육체의 일들에서 벗어나 멀리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비결인 줄 믿습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도 다 성적인 범죄이고 우상숭배와 주술 또한 영적인 성적 범죄입니다. 나의 욕망을 하나님에게 이름으로 투사하는 우상 숭배도, 주술도 영적 음행임을 잊지 마시고 주님 은혜 가운데 성령으로만 사로잡혀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성령을 따라 행할 것을 권면하면서 피해야 할 육체의 소욕과 갈망해야 할 성령의 소욕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실체로 존재하는 두 가지 힘이 있는데 하나는 권세이고 또 하나는 소욕입니다. 중력, 위로부터 아래로 누르는 힘이 존재하는데 그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중력의 힘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우리가 피부로 감각으로 느끼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느끼지 못하지만 실체로 존재하는 강력한 힘이 있는데 그건 바로 권세라는 겁니다.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인 권세, 그래서 죄 아래 있을 때 죄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이고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 아래 있을 때 율법이 위에서 아래로 누르는 힘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소욕이라는 것은 갈망, desire라고 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ask, seek and knock,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바로 소욕입니다. 갈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이끌고 우리를 지배하는 매우 강력한 힘입니다. 나의 원함은 결국 나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고,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은 내 인생이 나아가는 방향성을 알려주는 겁니다. 나를 움직이게 하는 운동력이 물론 음식을 통하여 우리가 육신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영양소를 공급받음으로 오지만, 동시에 그 운동력은 우리의 갈망과 열망에서 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우리의 삶이 성령을 따라서 행하든지 육체를 따라 행하든지, 이 두 가지가 결정된다는 겁니다. 육체의 desire가 있고 성령의 desire가 있다는 겁니다. 율법 아래 있을 때는 율법의 권세가 나를 누리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 아래 있을 때는 성령의 권세가 나를 누르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을 원하면 내 안에 갈망은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인생이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을 가지면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따라 성령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데 내 갈망이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에 욕심이 있고 하늘의 것에 마음을 두며 하늘의 내 삶에 그 갈망을 두고 살아가는 게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통해 이루어지는 육체의 일이 15개로 요약하여 등장하고, 성령의 소욕을 통하여 맺어지는 열매가 그 뒤에 나오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게 바로 권세와 소욕이 합쳐져 우리 인생에 맺게 되는 결과물임을 강조하는 겁니다. 결국 나의 인생에 내 삶을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권세와 갈망이 합쳐진 육체의 소욕 성령의 소욕,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지고 내 인생이 나아가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함께할 수 없고 서로 반대되고 충돌하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우리는 이것을 둘 다 붙들고 살고 싶어 하는데 두 가지를 동시에 붙들고 사는 삶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중심에는 한 소욕만 앉을 수 있고 운전대는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내 삶을 인도하고 주도하면 육체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하고 반대로 육체의 소욕이 키를 잡고 있으면 성령의 소욕이 힘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육체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성령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된다는 거예요. 둘이 서로 대적해서 서로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상호 배타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호 보안적으로 둘 다 붙들고 살아가려고 발버둥 치지만, 성경은 절대 아니라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 둘 다 붙드는 걸 성경은 불순종, 불신앙이라 그러고 우상숭배라 말합니다. 육체란 타락한 몸, 인간 존재를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산다는 것은 땅으로만 사는 거며 율법으로만 사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땅의 것에 나의 갈망과 욕심을 모두 쏟아 부으며 사는 겁니다 그런 삶이 이끄는 힘과 운동력은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활성화되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사는 삶입니다. 결국 육체의 지배를 받고 율법 아래 결박되어 육신으로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로마서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육신의 생각이란 육신의 열망을 통해 육신의 욕심을 이루려는 생각입니다. 그런 인생의 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소욕이 활성화되어 주도하는 인생은 결국 사망이라는 겁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열망으로부터 나왔기에 하나님과 당연히 원수가 되는 겁니다 육신대로 살면 죽을 것이요 성령으로 살면 산다고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거듭났다는 것은 바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땅만 바라보고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 육체의 욕심만을 구하며 땅땅….거리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에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서 나의 인생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며 육체의 소욕 가운데 살아가는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내 안에 아들의 영이 찾아오셔서 내 삶이 성령의 소욕을 통해 하늘의 것을 욕심 내며 하늘의 것을 갈망하고 살아가는 성령을 따라 행하며 성령의 소욕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육체의 소욕은 비활성화되고 육체 소욕은 주도권을 잃어버리며 더 이상 우리가 육체 아래 율법 아래 있지 않게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이자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뭡니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게 바로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사는 것이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겁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기에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육체의 일들이 열매로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고 활성화되면 결과적으로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되는 겁니다. 성령 아래 살던 율법 아래 살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육체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던, 둘 중의 하나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저와 여러분들을 향하여 육체로 살래?, 성령으로 살래? 이것을 도전하는 겁니다. 이 둘 중에 성령의 소욕이 이끌고 주도하는 삶,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성령 하나님이 내 삶에 주도권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셔서 그분의 지배와 다스림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육신의 소욕이 나를 주도할 수 없고 활성화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의 소욕이 나를 주도하고 내 인생에 활성화되는 겁니다.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되면 활성화될수록 육체의 소욕은 힘을 잃어버립니다. 육체의 소욕이 시시 때때로 찾아 오긴 하지만 손님 같이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이죠.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을 거스름을 삶으로 체득하며 성령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을 열망하십시오. 내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신 바가 되며 율법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는 삶, 성령의 소욕이 나를 이끌고 주도하는 삶을 현재형으로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여전히 버리지 않으며 두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자꾸 순전한 복음에서 이탈하여 두 마음을 품으며 다른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꾸 율법과 할례를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미혹에 잠시 혼란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영혼을 파는 그런 일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왜곡과 변질로 찬 다른 복음에 그들이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결국 돌아와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라 믿음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갈라디아 교인들을 미혹하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한 강력한 경고를 합니다. 너희를 요동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아주 강력한 말이죠. 너희에게 잘못된 미혹된 복음을 전하여 다른 복음으로 다른 마음을 품게 하는 자 마음을 요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는다는 겁니다. 또한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결단을 촉구합니다. 스스로 배어 버리기를 원한다는 것을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배어 버린다…는 강력한 표현은 할례를 떠오르게 합니다. 피부의 포피를 스스로 자름으로 구별된 유대인이 된다고 믿었고, 구별된 아브라함 자손이 된다고 믿었던 그 외적 증거, 이방인들에게도 할례를 통해서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잘못 가르쳤던 스스로 베어버리는 예식이 할례였습니다. 스스로 포피를 베어 버리는 행위를 통해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만들었던 그 다른 복음을 향하여, 너의 포피를 베어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 만들려 하지 말고 순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불순물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할례를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 이렇게 자꾸 두려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들은 십자가에 걸림돌이 되며 내가 지금 이렇게 박해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참 자유함이 나에게 생명으로 전해졌기 때문임을 증언합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 상황도 사도바울이 처한 상황도 평탄한 시대가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박해를 견디는 시대였습니다. 그 박해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평화와 감사를 놓치지 않은 이유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데 인생을 던진 이유는 하늘로부터 주신 그리스도의 참 자유함이 사도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주시는 순전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이 분명했고, 그 순전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사명이 분명했던 것입니다. 그게 순전한 복음에 덧칠하고 페인트칠하여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에 대해, 성도들이 그런 다른 복음에 미혹되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참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기 원한다, 스스로 베어 버리기 원한다… 둘 다 굉장히 강력한 표현을 사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 마음을 품게 하는 다른 복음의 불순물들을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베어버리라… 그렇게 버리고 그 모든 미혹에서 과감하게 잘라내고 거절하여 나아가는 것만이 너희들이 살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어떤 모습으로만 남아 있어야 되는가?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라는 겁니다. 율법의 정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할까 라는 그 정신을 붙들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도구만 되게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을 누리면서 복음 안에서 율법의 정신이 구현되는 것을 보는 기쁨입니다. 율법을 통하여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을 이루려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베어내고,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에 확고히 서 있는 겁니다. 동시에 앞으로 나의 삶은 율법의 정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 가운데 구현되는 도구로서 잘 선용되는 겁니다. 그 정신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율법을 폐기하는 게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대표적인 삶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주신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면 그 자유가 육체의 기회를 삼지 않는 것이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내 삶에 구현되는 겁니다. 나의 자유가 육체의 기회를 삼으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내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자유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세상이 말하는 자유는 내 마음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죠. 근데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대로 내가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한 가지가 주님의 기쁨 되는 것으로,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주님을 바라보며 스스로 복음에 메여 사는 겁니다. 내 자유를 남용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삶을 거절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예수님 마음대로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몸이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에, 그 자유를 통하여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예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삶을 살아가기에, 서로 기쁨으로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으로 순종하는 자유이고, 예수님을 자원하는 마음으로 갈망으로 섬기는 자유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않는 자유이자, 죄를 내 마음대로 지어 결박 당하는 자유가 아니라 죄를 스스로 짓지 않도록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너희는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된 거로 충분하다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자유를 누리며 그 할례에 대한 모든 조건들을 스스로 베어 버리기 원한다는 사도바울의 강력한 경고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단이나 사이비에 대해서 우리가 분명한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한 이유는 조금 다른 게 아니라 그 다름이 복음의 본질을 흔들게 되어 예수님을 향해 두 마음을 품게 하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것은 겸하여 섬기는 것이고, 그건 결국 불순종과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표피를 베어내듯, 순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불순물들을, 두 마음을 품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을 스스로 잘라내고 제거하여 그것에 대한 분명한 거부를 표현하는 것이 교회의 거룩함과 본질을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어지럽게 하고 요동치게 하는 다른 복음을 스스로 베어 버리며 분명한 선을 긋는 거룩한 결단이 갈라디아 교회에도 그리고 저희 교회 성도들에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음을 선명히 믿으며, 우리는 더 이상 초등교사 아래 율법 아래 있는 자가 아님을 분명히 믿으며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자격과 조건이 되지 않음을 선명히 믿으며 살아가기 원합니다. 두 마음을 품도록 미혹하는 다른 복음을 거절하고 스스로 배어 버리는 결단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있기 원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이 남용하여 육체를 망가뜨리는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서로 사랑하며 종노릇하는 순종의 자유함으로 선용되어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함입니다. 특별히 오늘 5장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가 다시 멍에를 매려고 하는 안타까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다시는” 율법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권고하는 부분입니다. “다시는…” 이라는 강조를 통해, 이렇게 율법의 멍에를 매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너무 답답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린다는 것은 적어도 세가지 멍에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죄 짐으로부터의 자유,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심판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끊임없이 죄와 죄책감으로부터 매어 있고 거기에 끌려 다니는 인생이고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계속 매어 살아가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박되어 매어 있는 인생, 끌려 다니는 삶은 부자연스럽고 나 다움을 잃어버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해방 시키셔서 참자유를 주셨습니다. 또한 약속의 아들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아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에 방법으로 태어난 아들 이삭만이 천국의 유업을 얻는 상속권을 갖습니다. 그런데 약속의 아들 이삭이 온전한 자유함과 천국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율법의 종노릇 하도록 계속 방해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주신 자유를 잃어버린 채 율법의 멍에를 매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종노릇하게 하는 이스마엘이 계속 우리를 협박하고 핍박해서 우리를 계속 막아서는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는 영적 현실이라는 것이죠.
그러면 왜 자꾸 사람들은 종의 멍에를 메려고 하는가? 다시 종의 멍에를 맨다는 것은 구원에 자꾸 나의 자격과 조건을 찾으려는 것이 나에게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자유인 복음은 세 단어가 핵심인데 바로 자격 없는, 하늘로부터, 값없이…입니다. 그러니까 은혜라는 것은 나의 익숙함과 어색함을 넘어 철저하게 나에게 자격 없음을 고백하는 영적 겸손, 오직 하늘로부터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값없이 주시는 선물임을 고백하는 영적 겸손이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가 모두 우리에게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는 겁니다. 나는 내 스스로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훨씬 익숙한 것입니다. 내가 나름 착하고, 나름 괜찮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자격이 없다는 무자격자에 대해서 우리는 그냥 천성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격 없음에 대해서 반발하고 내 스스로 자격 있음을 찾으려는 나의 익숙함이 바로 종의 멍에를 다시 메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어색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내가 한 행위의 결과로 나오는 것을 좋아하고, 내가 돈을 내로 내가 일한 대가나 공로로 받는 것이 익숙한 것입니다. 예전 익숙한 습관인 구원과 자격과 조건을 나로부터 찾는 대표적 예를 할례라는 종의 멍에를 들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는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자격과 조건으로서 할례를 자꾸 요구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건 맞는데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을 지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야 구원이 완성된다고 다른 복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특별히 할례를 통해 눈에 보이는 구원의 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겁니다. 구원받은 증거에 대해 끊임없이 내적 증거를 가지고 나와야 되는데 우리의 익숙한 율법주의와 종의 멍에는 무엇을 요구합니까? 내적 증거 대신 외적 증거를 자꾸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 외적 증거를 내가 한 행위인 할례를 통해 찾으려는 것이 바로 율법의 멍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율법이나 행위를 외적인 증거로 삼아, 내가 한 행위로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을 만드려는 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복음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인생이어야 하는데, 자꾸 종의 멍에가 누룩과 같이 퍼져 우리는 막아 서며, 종의 아들 이스마엘의 노예근성이 잡아 당기며 십자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네가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으로서 이방인 회심자들에게 할례를 강요하여 구원의 자격이나 조건을 이루려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꾸 우리를 막아 서고 종노릇 하도록 방해하는 종의 아들 이스마엘과 하갈을 우리 마음 속에서 쫓아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력하게 경고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 스스로 율법 안에서 의로워 지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 다니고 내가 헌금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선교하는 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해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이 예전 익숙한 방법, 종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렇게 율법의 멍에를 메려는 자, 율법 아래 머물러 있으려는 자,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지 않는 자들은 누구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멀어지는 자임을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 진리에 선명히 순종하며 복음의 길로 달음질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한 삶을 사모하십시오. 예수님만 의지하고 나의 자격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며, 십자가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 구원임을 철저히 고백하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율법의 멍에를 계속 지려고 하는 익숙함을 벗어버리고, 옛사람의 누룩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면서,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을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삶,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삶으로 나아가십시오. 자격 없는 나에 대한 철저한 인정, 하늘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은혜만을 붙들고 그 소망 가운데 달음질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 아래 머무는 사람들과 복음 아래 있는 사람들을 이스마엘과 이삭의 대조를 통해 증언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인데 계속해서 율법 아래 남으려 하고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주신 구원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 예수 안에서 참자유를 누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 천국의 상속자로 살아야 되는데 갈라디아 성도들은 안타깝게도 이스마엘과 같이 율법의 종과 같이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야 되는데 그들이 약속의 자녀로 살지 못하고 율법 아래 여전히 결박되어 살아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너희의 변화된 신분과 존재가 무엇인지를 잊지 말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는 말씀이 오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죠. 약속의 자녀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완성하신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자녀,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참 자유를 주신 약속의 아들 이삭과 같은 자녀라는 겁니다. 그러면 약속의 자녀와 반대의 말은 뭐겠습니까? 이스마엘과 같이 육체를 따라 난 자녀도 되겠고, 율법 아래 종노릇 하는 자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이스마엘 같이 율법의 종과 같이 사는 것이죠.
그러면 갈라디아 성도들은 왜 자꾸 이스마엘과 같은 율법의 종노릇하는 과거로 회귀하며, 율법 아래 머물려 그러는가? 그 이유를 아주 기막히게 재밌는 묘사로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이스마엘이 이삭을 학대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창세기에서 보면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인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학대하고 놀리고 왕따 시키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부분을 육체를 따라 난 자인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자인 이삭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영적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종의 아들이었던 이스마엘이 주인의 아들이었던 이삭을 핍박하고 박해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난 아들 이스마엘이 자유로 난 아들 이삭을 괴롭히는 겁니다. 이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자꾸 옛날 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자꾸 핍박해서 예전 모습으로 끌고 가 율법주의에 종노릇을 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이후에 광야에서 방황하고 헤매여 치열하게 싸웠던 40년의 싸움은 뭐냐면 옛날에 있었던 그들의 노예 근성을 벗어버리는 겁니다. 몸은 빠져나왔는데 마음이 빠져나오지 못했죠. 그래서 틈만 나면 그들은 애굽을 그리워하고 애굽의 노예의 삶에 방식에 길들여지고 했습니다. 이미 신분적으로 참 자유함을 누리는 자가 되었고 애굽을 빠져나왔는데 여전히 내 안에 그 종의 아들이었던 종노릇하는 아들이었던 이스마엘과 같은 율법주의가 계속 우리를 끌어당기는 겁니다 그게 옳아서가 아니라 그게 익숙해서,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아왔다 보니까 익숙한 옛날 방식으로 나를 자꾸 끌어가는 겁니다. 그게 정확하게 오늘 말씀에서 증언하는 우리 안에 치열한 내적 싸움이라는 겁니다. 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계속해서 영향력을 미치는 거예요. 율법주의가 계속해서 나를 핍박하고 박해하며 예전 모습으로 끌고 가는 겁니다. 나를 중심으로 행위를 중심으로 내가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얻어야만 되는 것처럼 만드는 옛날에 종노릇 하던 방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미혹한다는 겁니다. 내 마음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는 약속의 아들 이삭이 왕성하게 영적 자녀로 살아가지 못하고 옛날의 율법에 길들어진 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계속 걸림돌이 되어 계속 내 삶을 잡아 당기는 것입니다. 이게 갈라디아 성도들의 영적 상황이고 지금 이 시대에도 성도들의 영적 상황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우리 삶에 솔루션이 뭡니까?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결론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종인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쫓으라는 겁니다. 종의 아들이 주인의 아들을 계속 박해하는 이 율법주의를 내쫓으라 겁니다. 지금 너희는 율법에 종노릇 하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약속의 아들 이삭이다. 육체로 따라 난 자들이 하늘로 태어난 자들을 방해하고, 이스마엘이 이삭을 방해하고 종으로 태어난 아들이 주인으로 태어난 아들을 핍박하는 것이 영적 현실임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약속의 아들이며 주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종의 아들과 같이 자유를 잃어버린 채, 이 세상에 결박되고 율법에 결박되어 옛날의 방식을 벗어버리지 못하게 만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는 겁니다. 율법 아래 머물게 하는 그 박해와 핍박에서 벗어나려면, 나를 종노릇하고 만들고 나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종의 아들 이스마엘을 내 쫓으라는 겁니다. 제대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방해하고 걸림돌 되게 하는 율법주의, 율법 아래 머물게 만드는 이스마엘을 다 내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 있는 노예의 근성 애굽을 바라보려는 그 마음 애굽의 그 종노릇 하는 삶의 패턴을 박박 긁어서 씻어내는 것이고 내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 된 자들이 해야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주의를 내 쫓아야 오직 우리는 순전한 복음을 붙들고 자유함 가운데 거하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아들임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의 나의 삶에 대한 분명한 태도입니다.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종의 아들인 이스마엘은 상속자가 아니고 주인인 사라의 아들 이삭만이 상속자라는 겁니다.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는 상속자는 오직 약속의 아들 이삭 뿐이라는 겁니다.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얻은 약속의 자녀들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는 자들만이 상속자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한 이 경고의 말씀을 마음에 담아 저와 여러분들도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르시고 우리의 저주를 다 대신 감당하며 하나님에게 버림 받음을 기꺼이 감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며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위함임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자유인이고, 종의 자녀가 아니라 주인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약속의 자녀로서 나의 존재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를 통하여 현재 갈라디아 성도들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으며, 약속의 아들로서 나의 변화된 신분을 정확하게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다른 복음에 미혹되지 않고 참 복음 가운데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율법의 종노릇하는 아들인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과 같이 종의 자녀로 결박되어 살아가지 마십시오. 종의 자녀로 결박되게 만드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 마음에서 몰아내고 쫓아내십시오. 오직 약속의 자녀로 언약의 백성이고 천국의 상속자임을 잊지 않으며,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모든 것을 몰아내고 복음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창세기의 하갈과 사라를 통해 얻은 두 아들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복음 아래 있는 자와 율법 아래 있는 자를 대조하는 비유입니다. 자유인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아들 이삭, 몸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삭,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비유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참 자유를 얻은 자들인데 지금은 안타깝게도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 율법 아래 종 노릇하는 자들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을 얻은 자유를 누리지 못한 채, 율법 아래 종 노릇하는 자들과 같이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이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었던 이스마엘과 이삭의 이야기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율법 아래 있는 자냐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은 자냐…선명히 대조하는 것을 통해 갈라디아 성도들을 깨워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 라는 말은 내가 율법을 지켜 내가 의로워지려 하는 결국 자력 구원과 같이 내 스스로 무언가을 행함을 통해 구원받을 자격과 조건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것, 이게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입니다. 즉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자기 의라는 겁니다. 내가 뿌린 대로 내가 거둔다는 받아들이기 쉽고 계산에도 맞는 삶의 방식, 내 머리와 논리의 틀 안에 딱딱 들어오는 나 중심의 삶의 방식을 구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하려 하는 겁니다.
이렇게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이 바로 이스마엘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을 통해 나온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아들을 주실 것을 언약으로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리고 신뢰하지 못한 채, 조급한 마음에 아내 사라의 여종 하갈과 동침해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얻게 됩니다. 먼저 나오긴 했는데 하나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한 채 하나님의 뜻과는 반하고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자유인이 아닌 여종을 통해 나온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신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적인 방법으로 나온 아들, 자유인인 사라를 통해서가 아니라 종인 하갈를 통해서 태어난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한 채 내 계획과 내 뜻을 따라 스스로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서 무언가를 얻으려는 부산물, 이게 바로 여종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로 대표되는 것입니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을 대표하는 비유로서, 한 어머니는 하갈인 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 또 다른 어머니는 자유인인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이삭입니다. 어머니의 태가 종인 이스마엘은 태어나도 신분이 종인 것이고, 어머니의 태가 자유인인 이삭은 자유인인 것입니다. 율법 아래 머무려는 자들은 바로 하갈이라는 몸종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과 똑같기에 여전히 종노릇하며 종의 신분에 머물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았음을 믿는 자들은 약속 가운데 태어난 자유인 사라의 아들이었던 이삭과 똑같다는 거예요. 복음 아래 자유한 자들은 자유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과 똑같기에 상속자의 신분으로 자유를 누리고 살아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기를 하나님의 약속은 누구를 통해 계승 되는가? 이스마엘이 태어난 후 한참 지나 태어난 이삭을 통해서 계승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뜻과 방법으로 주신 약속의 아들 이삭이 태어납니다. 불가능한 사라의 태를 통해 이삭이 태어나는 것을 통해 약속의 아들은 100% 하나님이 은혜로 마침내 주신 아들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하시며 자유인이 사라를 통해 태어난 이삭에게만 모든 상속권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늦게 태어났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자유인인 진짜 부인 사라를 통해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먼저 태어났어도 이스마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나중에 태어난 아들 이삭에게 있는 것입니다. 먼저 태어났음에도 그 상속권이 이스마엘에게는 하나도 없는 이유는 종의 몸을 통하여 태어난 아들이자, 하나님의 언약이 아닌 인간적인 계획과 방법에 따라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 이삭은 나의 의를 믿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믿는 고백이고, 나의 때와 방법을 믿는 대신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믿는 고백이고,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참된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게 되면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를 통해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 됨과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을 비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브라함 자손 됨은 육신을 입고 혈통을 통해 자동적으로 이어지는 육적 아브라함 자녀됨입니다. 그런데 구원에 있어서는 이런 육적 아브라함의 자손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 따라 주시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 영적 아브라함 자손됨은 혈통으로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자손 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접함으로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인이던 종이던, 유대인이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고백하느냐는 이 믿음에 따라 그들이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되는 은혜를 주신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그 당시 예루살렘은 로마의 식민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마치 예루살렘이 로마에 식민지로 종노릇 하듯, 율법에 머무려 하는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통하여 구원의 자격과 조건을 얻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는 모든 자들은 율법 아래 식민지로 종노릇한다는 겁니다. 내 스스로 율법을 지켜 내가 구원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종 하갈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과 똑같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매어 살고 율법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노예의 길 종이의 길로 들어가게 만드는 인간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서 율법 아래 머물려 한다면, 마치 종이었던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되어 종의 신분이 되고 종노릇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몸종인 하갈을 통해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과 같은 율법 아래 머무려는 자들은 하갈과 함께 모든 자녀들이 더불어 종 노릇 한다는 겁니다. 율법에 계속 매여 종노릇 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종노릇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내 스스로의 약속을 믿으며,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믿지 않고 내 스스로 인간적인 때와 방법을 만들어가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믿지 아니하고 자기 의를 믿고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삶이며 결국 그게 불신앙이라는 겁니다. 사라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신 이삭만이 참 상속자이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영적 아브라함 자손의 모형라는 겁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란 바로 하늘 위에 있는 예루살렘 즉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우리는 육적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사모하는 자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예루살렘을 사모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은 영적 이스라엘 자손 되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율법의 종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로워지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복음 안에서 참 자유함을 누리며 천국 소망과 영생은 선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십자가 은혜안의 성도들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더 이상 보이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배 드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라고 믿고 고백하느냐는 이 중심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겁니다. 율법 아래 머물기 원하는 삶을 이끄는 율법 아래 결박된 예배, 종노릇 하는 예배에서 참 자유가 있는 영과 진리를 드리는 예배로 우리를 부르시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셨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삭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믿음으로 태어난 영적 아브라함 자손임을 잊지 마십시오. 여종인 하갈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은 여전히 종노릇에 결박되어 살아가고 아무런 상속권이 없었습니다. 주인인 사라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삭만이, 약속의 아들로 참 자유를 우리며 상속자가 되는 법적 권한을 갖는 아들이었습니다. 결국 어떤 언약을 따라 가느냐가 그 인생이 종노릇 하느냐 자유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 상속자가 되느냐를 가른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래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본질의 사명, 온 백성들을 위한 복의 통로와 복의 근원이 되어, 땅끝까지 이 복을 전하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이게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자유인 사라를 통해 태어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의 영적 의미이자, 영적 아브라함 자손으로 붙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복음에 대한 이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는 구원 받아 새 사람 되었으며, 영적 아브라함 자손이 되어 복음 안에 참 자유를 누리며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사모는 자가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복음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선명히 붙들고, 나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임을, 하갈의 종노릇하는 언약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언약 가운데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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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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