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말씀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하여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것을 권면하며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벗어나 성령의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것을 증언하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삶의 끝은 육체 일을 맺게 되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의 끝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으로 육체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으면 성령의 소욕이 주도권을 잡을 수가 없고 성령의 소욕이 활성화 되면 육체의 소욕이 비활성화됩니다. 동시에 육체의 일도 성령의 열매도 헷갈리거나 애매 모호한 것이 아니라 분명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 삶에 맺어지는 일과 열매를 통해 내가 성령을 따르고 있는지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는지가 아주 명확하고 분명해진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육체의 일 15가지 가운데 두번째 시간으로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와 분냄입니다.
첫 번째 원수 맺는 것이란 영어로는 hatred, 즉 미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원수 맺는 것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무엇과 연결되어 있냐면 내 마음속 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 운동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서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가?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면 나를 움직이는 힘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인 미움이는 겁니다. 특별히 미움이 원수 맺는 것이라고 돼 있다는 말은, 미움이 관계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나면서 내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는 겁니다. 미워 하는 마음이 나를 움직이고 나를 깨우는 힘이 되는 인생이기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늘 파괴적이고 부정적이 되는 것이 바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사람이 가면 늘 관계가 깨지고 무너지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야기하면 늘 부정적이고 파괴적이며 미움 가득한 말들만 쏟아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게 원수 맺는 일에 길들여진 인생이며 육체의 소욕에 이끌림을 받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나를 움직이는 힘이 사랑인지 미움인지에 따라 내 인생의 다른 사람들을 세우는 인생인지, 무너뜨리는 인생인지가 분별되고, 더 본질적으로는 이것이 우리 삶에 있어서 육신의 일을 분별하는 매우 명확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원수 맺지 말고 무너뜨리지 말고 세워주는 인생, 미움이 내 삶을 이끄는 힘이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육체의 일은 분쟁입니다. 분쟁이라는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나눠져서 시끄러운 다툼을 한다는 겁니다. 독도 분쟁 그러면 일본과 대한민국이 계속 독도를 가지고 싸우는 거 아닙니까 감정적으로 그리고 실제로 타격이 동반된 싸움을 벌이는 겁니다. 그런 일본을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하는 게 당연하고 그 대상과 원수를 맺고 다툼을 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미움을 삶의 동력으로 사는 인생 주변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일어납니다. 분쟁하는 인생 가운데에는 육체의 일을 주렁주렁 맺으며 다툼과 싸움이 끊이지 않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와 함께 사랑했던 고린도 교회는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분쟁에서 그냥 서로 조금 세력과 파가 나눠진 거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심각하게 다투고 싸웠습니다. 요즘에도 분쟁하는 교회를 가보시면 서로 얼굴을 안 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정말 대놓고 다투고 싸우며 경찰까지 부르는 겁니다. 내가 미움을 먹으며 미움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고, 계속 나누어지고 싸우게 되는 것을 심각한 영적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특별히 사단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은 항상 divide and fight….나눠지게 해서 싸우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같은 팀인데 다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주의 백성들인데 우리 안에서 원수 되게 만들고, 안에서 나눠져 싸우고 분쟁하게 만들어 힘을 안으로 싸우는데 다 소진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단의 성도들을 향한 교회를 향한 미혹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원수 맺는 것과 분쟁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분쟁하는 것이 성령을 탄식하게 하는 것이며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육체의 일은 시기입니다. 시기란 타인과 비교하여 내가 가지지 못함으로 지니는 부러움입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기를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춰 이웃이 지닌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해서 슬퍼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나는 어떤 존재냐 하면 늘 결핍의 존재, 늘 부족하고 없는 존재인 겁니다. 이미 주신 게 많은데 늘 초점이 어디 있냐면 없는 거에 있고 부족한데 있고 결핍에 있는 겁니다. 그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시기와 질투가 찾아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자꾸 타인과 비교해서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면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란 미워하는 마음과 결이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특별히 비교를 통해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 없는 것 부족 한 것을 과장하며 살아가는 육체의 일입니다. 부족한 것, 없는 것, 결핍에 초점을 맞추어 살게 되면 결국 육체 소욕이 이끄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반대로 성령의 사람은 없는 것과 부족한 것과 결핍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이미 주신 것, 받은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나를 남과 비교함으로 통해 나의 존재감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둠으로 나를 찾는 인생이 되는 입니다. 네번째 육체의 일은 분냄입니다. 영어로는 anger가 아니라 훨씬 강한 단어인 rage입니다. 운전 중에 정신없이 막 화를 분출하면서 가는 차들을 road rage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rage는 분노 폭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를 터트려서 그 인생을 움직이는 힘, 운동력을 삼는 인생이 분냄입니다. 시도때도 없이 화를 내고, 특별히 나름대로의 정의와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분을 내고 살아가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 와서 주님의 일을 한다 그럴 때도 화를 내고 분을 내면서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겁니다. 그 근원에는 바로 영적 교만이 있는 것이고 육체의 소욕이 있는 것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미움도 분쟁도 시기도 분냄도 다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힘이고 그게 바로 육체의 일이라는 겁니다. 내 마음이 미움을, 나누고 싸우는 분쟁을, 없는 것에 집중하는 시기를, 분노로 폭발하는 분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게 바로 육체의 일임을 잊지 말고, 이런 것들을 허용하지 말고 마음에 머무르게 하지 마십시오. 이 네 가지가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손님과 같이 왔다가 떠나가게 만들어야지 이것을 내가 확 붙들고 나를 움직이는 운동력이 되게 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육체의 일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삼는 대신, 주님이 주시는 하늘의 힘과 능력을 운동력으로 삼아 주님의 은혜 가운데 늘 성령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자유함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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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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