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28장 말씀은 남유다의 가장 악한 왕 중의 하나인 아하스 왕의 대한 이야기를 증언합니다. 역대기를 통하여 증언되는 남유다 왕들의 역사와 평가들은 왕 개인의 역사라기보다는 남유다 공동체 전체 역사이자 국가 역사입니다. 한 왕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바라보시고 평가하는 걸 보여주시는 큰 그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아하스 왕에 대한 거의 최악에 가까운 하나님의 평가는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할아버지 웃시야 왕도 아버지 요담왕도 그래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평가 받았는데, 할아버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거의 망나니 같은 아들이 바로 이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사실 역대기 말씀은 남유다 왕들에 대해 되도록이면 긍정적인 모습을 많이 부각하는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아하스 왕에 대한 평가는 아주 최악입니다. 가장 악독하고 영적으로 타락한 왕 중의 하나로 등장합니다.
아하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얼마나 악독하고 나쁜 왕이었는지에 대한 예가 5가지나 등장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길로 행했다는 것은 영적 타락과 변질의 대표인 북이스라엘의 열왕의 길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알을 우상으로 부어 만들었습니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나무를 숭배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워싱턴 주에는 나무들이 워낙 우거져서 푸른 나무에 대해 별로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역에는 사막과 황무지이기 때문에 푸른 나무가 거의 없다 그래요. 그러니까 푸른 나무만 보이면 기가 좋고 하늘의 복이 임해 이 나무가 푸르다고 믿는 겁니다. 그래서 나무 신을 섬기고 그 나무 안에 풍요로움이 있다고 믿어서 자신의 소원들을 그 나무 아래서 빌고 제사 드리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과거에서 이 정도로 무너졌던 안 좋은 왕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하스는 상상을 초월하며 최악의 삶, 영적으로 타락하고 나라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는데, 바로 우상숭배를 넘어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녀들을 불살라 제물로 드린 것입니다. 몰렉이라는 우상에 빠져 가장 악독하고 최악의 모습으로 자녀를 불살라 드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넘어서 거의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최악의 모습을 보이는게 아하스 왕이었습니다. 그 결과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철저하게 무너진 아하스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징계하십니다. 첫째로 전쟁에서 12만명의 군사가 하루아침에 전사하게 되고, 둘째로, 20만명의 사람들이 전쟁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대량 살상 무기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군대가 많아도 12만 명을 하루에 죽이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하루아침에 군인 12만 명이 죽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싸운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징계하신 결과라는 것을 엄중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셔서 남유다 군대 12만명이 죽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악행과 영적 타락으로 20만명이 포로로 사로잡혀가는 이런 끔찍한 일을 백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하스의 영적 타락과 악행의 모습이 인과론적으로 모두 아버지 때문이다…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요담왕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고 예배에서 완전히 멀어진 상태로 지낸 왕이었습니다. 예배를 멀리하고 성전을 멀리한 영적 결과가 그 아들 아하스가 이렇게 무너지게 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한 삶의 영적 결과가 시간이 지나 그 아들을 통해 이렇게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긴 코로나 기간 가운데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성전으로부터, 예배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가는 삶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재편과 변화의 시기에 다시 한번 신앙의 벨트를 조이며 다시 한번 예배를 사모하며 부어 주시는 은혜를 회복하고 나아가는 새벽기도의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특별히 몰렉에게 자녀를 불태워 죽이는 이 악행은 끔찍하고 말도 안되는 악행이라고 분노합니다. 어떻게 인간으로서 자녀를 불사르고 가증한 일을 본받아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아무런 영적 준비 없이 세상에 무방비로 그냥 보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게 어찌 보면 영적 시각으로 바라볼 때 불 가운데 우리 자녀들을 그냥 지나가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악하며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지 않은 세상으로 변해 가는 것을 안다면 영적 준비 없이 이 세상에 내보내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다 커서 성인이 된 자녀들을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밖에 없구요. 결국 그 기도를 통하여 우리 자녀들이 이 세상에 빼앗기지 않고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주님의 기준을 붙들기를 간구하며 매달려야 합니다. 아하스 왕이 이렇게 영적으로 타락하고 무너지는 모습은 단지 왕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영적으로 이렇게 타락하고 무너졌음을 이 아픈 말씀을 통하여 반면 교사를 삼기 원합니다. 오늘 하루 내 자녀들을 결코 세상에 빼앗기지 않겠다는 영적인 결단과 간절한 기도를 붙들고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27장을 통하여 요담왕에 대해서 오늘 말씀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요담 왕은 25살에 왕이 올라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왕으로 치리한 남유다의 왕입니다. 그 왕에 대한 평가는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정도를 행 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다고 평가합니다. 전반적으로 요담은 좋은 왕이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으며 말씀의 정도를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정도를 행하며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신 증거가 몇 가지 나오는데 벽까지 나오는데 첫 번째는 그가 여호와 성전의 윗문과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담왕을 통하여 놀라운 승리를 주시는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암몬 자손과 싸워 이기고, 많은 조공을 받게 되는 큰 승리와 강성함을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시고 강성 해지고 나서 그 아버지와 같이 교만하며 무너지지 않았고, 후반전이 나빴던 얘기가 등장하지도 않죠. 아버지보다 어떻게 보면 나은 왕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긍정적인 요소에도 불구하고 요담왕에 대한 딱 한 부분의 큰 문제를 오늘 말씀에 정확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지 않은 겁니다. 왜 요담왕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 가지 않았는가? 그 아버지 웃시야 왕이 성전에서 한 큰 실수를 본 겁니다. 후반전에 영적 교만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 이유는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해야 될 일을 분별없이 본인이 하면서, 향로를 만지고 막아선 제사장에게 화를 내서 나병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아들인 요담은 아버지가 평생 나병으로 혼자 지내는 것도, 모든 뒷수습을 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담이 왕이 되고 나니까 완전히 오버하고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아예 여호와의 성전 자체를 가지 않는 거예요. 물론 그 아버지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좋은 다짐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아버지와 같이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이 두려워서 였는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에 이유가 됐든 간에 왕으로서 여호와의 성전 자체를 오지 않는 것은 교만 일 뿐 아니라 온 백성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문제였다 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남유다의 왕은 한 개인이 아니라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대표 선수입니다. 그 대표 선수가 여호와의 성전에 와서 예배 자체를 아예 드리지 않기 시작한 겁니다. 아버지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아버지가 하는 거에 대한 그 오버 리액션을 하면서… 성경은 이것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는 것이죠. 아버지 웃시야 왕은 성전에 자주 와서 제사 드리고 예배 드리다가 바운더리를 잃어버리고 무너진 것이고, 그 아들 요담왕 정반대의 극단에 서서 아예 여호와의 전에 얼굴도 비치지 않은 겁니다. 자기를 보호하고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그런데 그것이 보호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무너뜨리게 만든 거예요. 아버지와 같이 저렇게 선을 막 넘으면서 무너지는 왕 되지 않겠다…정확하게 바운더리를 지키겠다는 좋은 의도로 성전에 안 왔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왕이 하나님과의 예배에서 멀어진 것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에게서 고스란히 영적 문제로 드러난 것입니다. 요담왕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영적 결과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방자하게 행하고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악을 행하고 자기 스스로 산당에서 우상 숭배하며 무너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다음 왕은 완전히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 등장하게 되는 초석을 만들게 된 게 바로 예배를 멀리한 왕 요담왕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긴 코로나의 광야를 2년 째 지나가면서 타인의 건강을 위해서 대면 예배에서 멀어지는 것이, 현장 예배를 자제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됐습니다. 우리가 대면 예배를 못 드릴 수 있는 사항이 있었고, 정말 위험한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지병이 있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올 수 없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 드릴 수 밖에 없는 분들을 모두 축복하고 온라인 예배 가운데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주님께서 정말 다 아십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 케이스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이 내가 예배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인가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이 요담 왕과 같이 내 상황과 환경을 정당하며 올 수 있는 상황인데도 여호와의 성전을 들어가지 않고 성전을 멀리 떠나는 것이 고착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다른 이유가 있다면, 나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혹시 요담왕과 같이 예배 자체를 멀리하게 되고 떠나게 되는 영적 문제로 나아가는 것은 아닌가 깊이 고민해봐야 합니다. 요담 왕은 왕으로서 여러 좋은 평가들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약점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코로나가 우리에게 주는 안 좋은 영적 해악은 예배를 오지 않는 것이, 예배를 멀리하는 것이 고착화 되는 거예요. 그 영적 결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이 코로나 가운데 예배에서 멈춰지고 예배에서 멀어지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여호와성전에 들어가지도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결과적으로 내 영적인 삶도 무뎌지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영적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예배와 말씀보다 중요한 게 없습니다. 지금은 아무리 어려워도 예배를 가까이 하고 성전을 가까이하는 이 영적 본질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요담왕을 통하여 반면교사를 삼아 이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더 본질을 붙들고 여호와의 성전에 은혜를 붙들고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웃시야 왕은 귀한 어머니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아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왕이자 말씀 가운데 거하는 왕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밝은 스가랴를 가까이 두어 하나님에게 합하고 정직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높이 세워 주시고 형통하고 강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아간 웃시야 왕은 결국 높아졌고 강성 해졌습니다. 제가 알기로 대한민국의 군인 전체가 60만명이 안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보다 훨씬 작은 남 유다에 군인이 30만명이나 있었으니, 그 군사력을 보면서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을까 …상상해봅니다. 그리고 그 나라가 강성해져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도 생기고 유명해지고 왕도 높아지고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웃시야 왕이 형통하고 강성해진 비결을 오늘 말씀은 정확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강성함임을 증언합니다. 강성 해졌는데 그 이유는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지략 때문이 아니라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영적 결과죠.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심에 대한 결과였습니다.
문제는 높아지고 강성해지는 그 자리에서 웃시야 왕은 결국 무너지고 실패하며 영적인 하향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오늘 말씀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형통하고 강성할 때 웃시야 왕이 무릎 꿇고 하나님을 더 구하고 매달려 쓰면 더 크게 하나님이 사용 하시는데 안타깝게 여기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무너지는 겁니다. 웃시야가 강성하여짐에 따라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똑같은 패턴으로 웃시야 왕이 무너질 수 있을까요? 그 아버지 아마샤와 할아버지 요아스와 마찬가지로 거의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전반전은 참 좋았는데 후반전이 너무나 좋지 않은 왕, 전반전에 하나님께 정직하고 쓰임 받았던 왕 후반전에는 영적 하향곡선을 그리며 무너지는 왕, 자기 아버지도 그랬고 자기 할아버지 도 그랬고 결국 본인도 똑같은 그 패턴에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성하게 해 주시고 세워 주셨는데 어떻게 3대가 똑같이 무너질 수 있습니까? 똑같이 후반전에 변질될 수 있습니까?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동일한 패턴의 무너짐을 우리에게 경고하며 알려주고 있는 겁니다. 강성해졌을 때 웃시야 왕의 마음이 교만 해져서 악을 행한 대표적인 예로 등장하는게 바로 예배 드리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넘보는 겁니다. 왕으로서 여호와의 전을 찾아 예배하는 것은 참 귀한 일인데 본인이 향단에 스스로 분향하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웃시야는 자기가 왕이 됐고 강성해지고 나니까 제사장이 우스운 겁니다. 제사장이 우습게 보여서 이런 일 꼭 제사장만 해야 하나…나도 할 수 있지…그러면서 바운더리가 무너지는 겁니다. 오직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신의 교만과 착각이 하지 말아야 될 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거예요. 세상에서 사장인 사람이 교회 와서도 사장 역할을 하려 하고, 세상에서 국회의원이 사람이 교회 와서도 국회의원 노릇을 하려고 하려 하면서 교회에서 영적 질서와 바운더리가 무너지는 겁니다. 교회 와서는 밖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겸손하게 말씀을 듣는자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자로 서야 합니다. 아무리 왕이어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성전에 왔을때는 은혜를 구하는 죄인으로 두손 들고 서야 하는 거예요. 자신이 나가지 말아야 될 것은 나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세상에서의 자기 역할을 교회 안에 와서도 하려는 것은 본분을 잃어버리는 교만한 증거이며 하나님 앞에 범죄 않은 일이라는 것을 성경은 정확하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왕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이 거기 목숨을 걸고 막는 겁니다. 그 당시 왕의 명령 이면 제사장들을 단칼에 그냥 없앨 수 있죠. 그러니까 지금 목숨 걸고 막아서는 거에요. 아무리 왕이셔도 지금 여기서 이 일은 왕이 하실 수 없습니다. 그냥 물러가 주시옵소서 …그러니까 웃시야 왕이 너희들이 뭐라고 나에게 지금 분향하지 말라 그러냐며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제사장을 향하여 노를 발하는 겁니다. 그 순간,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제사장에게 화를 내는 순간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고 증언합니다. 모세 오경에 보면 성전에 불을 잘못 만져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 지정하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분향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웃시야 왕이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며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는 찰라에 나병이 든 것은, 하나님이 정확하게 치신 사건임을 증언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이 웃시야 왕을 치신 거예요. 그런데 왜 많은 병 중에 특별히 나병이 걸렸을까요? 성경에서 나병이라는 것은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병이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몸의 감각이 없어지는 겁니다 지금 이 왕은 영적 감각이 완전히 다 사라진 거예요. 먹어야 될거 먹지 말아야 될 걸 구분 못하고, 찬밥 더운밥 못 가리고, 나가야 될 것 나가지 말아야 될 걸 모르고 영적 교만 덩어리로 지금 자신의 본분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성전에 들어가 향로를 손으로 잡고 제사장들에게 노를 발하다 이렇게 나병에 걸리게 된 겁니다. 결국 이 나병이 평생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고 웃시야 왕은 사람들에게서 평생 격리되어 홀로 고립되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후반전 인생이 좋지 않게 마무리 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지금 코로나로 오랜 시간 신앙 생활에 제약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앙 생활이 어렵고 힘든 시기라 그러지만 사실 이 때야 말로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번 진리에 비추어보고 제자리 찾기에 가장 좋은 때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똑같이 하나님이 세워 주시고 하나님이 높여 주시고 강성 하게 해 주시는 일이 있습니다. 높아지고 강성해진 것 자체가 분명히 복이지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 강성함과 높은 자리가 나를 무너뜨리는 화가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높아지고 무조건 잘 되고 강성 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올라 갔을 때 하나님을 잊어 버리지 않고 놓치지 않으며 하나님을 붙드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지혜를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인생의 전반전에 은혜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것을 실패하고 무너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패턴에서 돌아봐야 합니다. 나에게 반추해 보고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적용해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영적 교만을 상징하는 나병에 걸려 모든 감각이 사라져 본분을 잃어버린 채 인생 끝에 비참해지지 않도록, 우리는 늘 반성하고 영적 긴장감을 잃지 않은 채 지겹도록 반복되는 이 패턴에서 벗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끝까지 신실하게 영적 겸손함과 민감함을 붙들고, 주님이 세워 주시는 강성 함이 나에게 복으로 끝까지 남아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26장은 웃시야 왕에 대한 행적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마샤를 대신해서 웃시아가 왕으로 올라가게 되는데요. 16살에 왕이 되서 무려 52년 동안 치리한 대단한 왕입니다. 또한 웃시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선한 왕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 배경에 어머니가 있음을 주목합니다. 역대기에서는 남유다 왕을 평가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했는가를 통해 평가하고 있고, 동시에 그 왕의 어머니자 누구였는지를 지속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왜 어머니 이름이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왕의 신앙 형성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어머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의 가슴 속에 생겨 주는 존재라는 것이죠. 그 어머니가 영적으로 그런 역할을 감당했을 때 자녀들의 가슴 속에 말씀을 새겨 흐르게 만드는 것이죠. 반대로 아합의 딸과 같은 악한 어머니가 잘못 들어와 왕 3대가 영적으로 완전히 무너지고 어려움을 겪었던 남유다의 깊은 암흑기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웃시야 왕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 그 집안이 북쪽의 우상숭배에 피가 흐르고 하나님을 떠난 아합왕의 딸과 같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 넉넉한 마음과 안정감을 가지고 자녀를 키운 예루살렘 사람 어머니로 말미암아 웃시야 왕이 이렇게 52년이나 왕으로 치리할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 바르고 정직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영향력과 함께 또 다른 영적 스승으로 말미암아 웃시아 왕은 좋은 왕으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또한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는 스가랴가 가까이에서 웃시야가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왔다는 말씀을 주목해봅니다. 선지자 스가랴를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자…라고 증언하는데,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에 민감하다는 의미도 있고요. 또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식하는 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보고 계시고 함께 하심을 늘 믿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민감하게 밝히 바라보는 자가 바로 스가랴 선지자였습니다. 이런 선지자가 가까이에서 영적 영향력과 선한 영향력을 왕에게 주게 되니까 그 나라가 평안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산 하나님의 선지자 스가랴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구하고 붙들고 살아가는 동안 형통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형통함의 은혜는 강대국 중 하나인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 왕에게 조공을 바칠 정도로 심히 강성해진 겁니다. 그 유다 땅이 얼마나 강해졌으면 압몬과 같이 조공을 바치는 나라들이 생겼고 애굽에까지 정말 이 나라는 강해졌다고 소문이 나게 된 겁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이 도와 주신 것이며 하나님이 열매를 맺게 해주신 형통의 은혜였음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웃시야 왕에게 어머니가 그렇게 중요했던 것같이 저와 여러분들 에게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중요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적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마음에 심기운 것이 복입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지금 나에게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분들은 꼭 혈연적 관계가 아니더라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어미 영적인 아비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가슴 속에 새겨 주는 이 존재를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또한 말씀을 밝히 아는 선지자를 가까이 하며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깨닫는 게 복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에서 말씀을 제대로 배우고 먹는다는 것은 말씀을 붙들고 말씀을 구하여 말씀을 통해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말씀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것이죠. 말씀은 결국 말씀 자체에 능력이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며 말씀을 밝히 알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형통함의 은혜를 주신다는 겁니다. 웃시야 왕에게 이런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과 같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함의 은혜가 임하기를 간구하고 소망하기 원합니다. 내 주번에 이런 영적인 어머니, 영적인 아버지를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선지자를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구하며 말씀 앞에서 삶을 살아가 하나님의 형통이 우리 가운데 머물기를 소망하십시오. 동시에 내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영적 영향력을 미치는 영적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시기를 사모하십시오.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슴에 새기는 것을 사명으로 살아가며, 내가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말씀에 대한 민감하고도 바른 태도로 살아갈 때,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 형통의 은혜가 그들에게 전해지며 그들에게 축복의 통로로 쓰임 받게 되는 것을 꿈꾸십시오. 내 자녀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가슴에 새겨 주는 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말씀을 그의 가슴에 흐르게 하게 도와 주옵소서.. 그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마음에 흐르게 하옵소서…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고 교회의 부르심임을 깨닫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기 말씀은 모두 남유다 왕들에 대해서, 왕들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했는가를 통해 모든 왕들을 평가하고 있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우리는 우리 인생이 동일하게 하나님께 평가 받고 있다는 것을 늘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평가가 아니라 내 자신이 나를 보는 평가가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내 인생의 평가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루 하루 살기에 바쁘기 때문에 내 인생의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분주해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바라보고 평가 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며, 그렇게 살아도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이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엄중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은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지혜 중의 하나 입니다. 그래서 이 역대기 말씀을 통해 왕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이 정확하게 평가하고 계신다는 진리 앞에서,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서서 평가 받아야 되는 인생을 분명히 알 때 엄중한 현실이라는 것을 붙들고 살 때 내 인생의 가치가 새롭게 재 구성되며 하나님 앞에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죠.
그럼 오늘 말씀에서 아마샤 왕에 대한 평가는 무엇인가를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정직히 행하기는 했는데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이 평가가 어떻게 보면 많은 성도들의 현재 영적 상태일 수도 있는 듯 합니다. 신앙 생활은 잘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긴 하는데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않는 겁니다. 전심으로 하지 않는 것이죠. 아마샤 왕에게 온전한 마음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인생의 전반부에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정직하게 행했는데 인생 후반부에는 그 정직한 마음이 다 사라지고 변질되고 탈락했다 라는 것이 엄중한 평가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삶의 증거를 두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첫번째 하나님 앞에서 아마샤 왕이 바로 선 것은 자기 감정대로 보복하지 않고 말씀을 붙들었다는 것입니다. 부왕, 즉 아버지 왕인 요아스가 전쟁터에서 중상을 입었는데 해봤는데 신복들에게 암살을 당했습니다. 왕이 된 후 아버지를 죽인 심복들은 처단합니다. 당연한 일인데, 그 사람들만 죽이고 나머지 가족들은 죽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왕에게 죄를 짓는 자는 삼족을 멸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게 너무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왕이 조금 혈기가 많고 감정이 많은 사람이라면 씨를 말린다는 명목으로 배반한 자 주변에 수십 명, 수백 명을 한 번에 죽이는 것도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아마샤왕, 아버지를 죽인 자들은 원수인데, 그들에게 감정대로 보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말씀이 허락하는 한해서만, 자녀들도 아내들도 그 외에 어떤 사람도 연좌죄를 적용하지 않고 당사자들만 딱 처단하는 겁니다. 되로 준 것을 말로 갚아야 하는 나의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감정에 따라 보복한 게 아니라 말씀이 멈추라 하시는 곳에서 멈춘 것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한 자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 힘이 주어질 때 권한이 주어진 데 우리의 그 힘과 권한을 다른 사람을 보복하고 억누르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영적인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번째, 아마샤 왕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한 건 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마샤 왕이 전쟁 준비를 하는데 남유다 군사력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것 같지 않은 겁니다. 군사력이 너무 작아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북 이스라엘에서 용병을 은 백달란트 돈을 주고 십만명의 용병을 사오는 겁니다. 한 달란트, 다섯 달란트도 엄청난 돈임을 기억하면 은 일백 달란트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큰돈 들여 사온 10만 용병의 힘을 빌려 전쟁을 벌이려고 하는 데 하나님의 사람이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 용병들 데리고 가면 안됩니다…그 용병들을 앞세우는 전쟁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큰 돈을 다 냈어요. 십만 용병은 이미 다 와 있습니다. 이 용병이 없이 전쟁에 나가면 질 거 같은 겁니다. 첫 단추가 잘못 껴진 걸 알아도 되돌리기에는 손해가 너무 크니까 그냥 전쟁에 나가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아마샤 왕이 고민 가운데 어떤 결정을 하는가 하면 용병들을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겁니다. 은 백달란트를 날리며 큰 손해를 감수하는 겁니다. 달란트를 포기하는 걸 넘어 자기의 군사력이 확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하나님 말씀을 따라 가기로 결정 한 거예요. 이것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고 귀하게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가기로 결정하고 나에게 손해가 없을 때는 따라가는 것이 그래도 좀 쉬울 수도 있고 그게 가능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길을 따라가고 말씀을 붙드는 것에 대가가 필요하다면 많은 사람들은 주저하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따르기 위해 내가 재정적인, 시간적인, 감정적인 손실을 크게 받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은 물어보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큰 손해를 보고 욕을 먹으면서도 결정을 번복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마샤 왕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바른 왕으로서 평가를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계기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귀하게 보신 결과 11절 말씀 보면 아마샤 왕이 그 10만 용병이 돌아갔는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담력을 얻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담력이었고, 그 하나님의 힘을 붙들고 아마샤의 군대가 큰 승리를 얻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율 받아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기에, 하나님께 다른 기준과 우선 순위로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말씀에 반응하기 위해 이렇게 손해를 보고 포기하면서 내려 놓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포기와 손해를 절대 지나치는 법이 없다 라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포기하는 손해, 포기한 시간, 그 어떤 것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신다는 거예요.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 평가를 받는 인생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인생길 가고 있는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을 사십시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따라가기 위해 내가 손해 보는 물질과 시간,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은혜와 놀라운 축복을 부어 주심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아마샤 왕과 같이 순종함으로 주시는 놀라운 담력과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승리를 경험하시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아스 왕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7살에 왕위에 올라 기적적으로 40년 동안 왕으로 치리했습니다. 그의 전반전은생명의 은인이자 멘토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가르침과 뜻을 따라 하나님께 정말 잘 쓰임 받았습니다. 그 모습이 끝까지 갔으면 참 좋은데 여호야다가 죽고 나니까 그의 후반전은 완전히 변질되고 타락하는 내리막길을 가게 됩니다. 그게 바로 오늘 말씀 역대기 24장 후반부 말씀입니다.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이후 요아스 왕은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며 타락과 변질되어버렸습니다. 이게 참 안타까운 일인 것이 요아스의 가장 중요한 치적 중의 하나가 바로 여호와의 성을 중수하고 재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성전은 그냥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이상의 의미가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손에 건짐을 받아 그 성전에서 숨겨 지내며 7살까지 살았기 때문입니다. 요아스 왕에게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곳은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곳 뿐만 아니라 건짐과 보호하심을 받은 곳이자, 수많은 추억과 애틋한 감정이 있는 것이 바로 성전이었죠. 그래서 아마 왕이 되고 나서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고 재건하는데 그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인생 후반전에 중수하고 재건 했던 곳, 신앙의 중심이었던 여호와의 전을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은혜 가운데 내가 왕이 되었구나…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왕이 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착각하며 자신이 뭔가 대단한 줄 알고 자신이 뭔가 해보려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변질과 타락을 고착과 시키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하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아스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선지자를 통해 교정하고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려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요아스가 들을 귀가 없는 것이죠. 요아스의 안타까움은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것도 문제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의 말씀 듣기 거절하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문제는 타락과 변질 되며 첫사랑을 자꾸 잊어버린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럴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우리에게 돌아오게 하기 위해 여러 선지자들의 경고와 말씀을 들려 주시는데 우리가 들을 귀가 없다는 것이죠. 들을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게 더 큰 문제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시려고 보내시는 경고의 말씀, 이것을 듣고 얼른 돌아오면 승산이 있고 소망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안되는 겁니다. 말씀을 더 깊이 들어가보면 요아스는 듣지 않고 거절하는 것 정도가 아니라 정말 말도 안 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자신의 은인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가 와서 지금 경고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너희가 여호와를 버린 거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실 것이다…정신 차리고 얼른 하나님께 돌아 오십시오…생명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요아스의 반응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자기 은인의 아들이자 선지자 스가랴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여호야다의 은혜를 통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1살짜리 아기를 건져서 살리고 성전에 숨겨서 키웠는데, 배신의 칼을 꽂은 겁니다. 영적인 쿠테타를 일으켜 아달랴를 죽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7살짜리 왕이 제 구실 할 때까지 모든 수발을 다 들어준 은인이 여호야다 아니겠습니까? 그 여호야다를 기억하고 갚지는 못할 망정 그 은혜의 아들을 이렇게 돌로 쳐 죽인다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아주 악한 일인 것이죠. 이게 하나님을 떠난 배은망덕한 인간, 악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배신하고 배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린 채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일을 하는 이런 존재라는 겁니다.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끝까지 거절하고 충돌하고 부딪치며 결국 예수님을 죽이고 마는 유대인들과 이 요아스 왕의 모습이 똑같습니다. 그 마음이 영적 어둠을 붙들고 하나님의 빛을 거절하고 거부하고 충돌하며 진리를 선포하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를 돌로 쳐죽이는 그 안타까운 왕…그래서 요아스 왕의 결말은 굉장히 비극적으로 끝납니다. 전쟁에서도 크게 패하고 침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그리고 다윗성에 장사 지내지 못하는, 왕으로서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며 박한 평가를 받고 끝난 왕이 바로 요아스 왕입니다. 역대기 말씀을 통해서 봐도 전반기와 후반기가 너무나 다른, 용두사미의 왕이 벌써 몇 번째 입니까? 이정도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이정도면 이제 반복하지 말아야 되겠다… 생각하면 좋은데 똑같은 패턴의 똑같이 무너지는 것이 이제는 지겹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 반복적 패턴이 과거 이스라엘의 왕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자, 사실 저와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기도합니다. 한결 같음을 가지고 첫사랑의 그 은혜를 끝까지 붙들고 가는 게 그게 잘 안되는 겁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죠.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그 아들을 죽인, 말씀을 거절한 결과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대표적인 왕이 되어버렸습니다. 요아스 왕의 안타까운 후반전을 보면서 우리도 신앙이 이렇게 정신차리지 않으면 변질되고 무너질 수 있음을 늘 염두하며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기 원합니다. 항상 우리는 이렇게 무너질 수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 끝에 가서 어떻게 인생이 끝나는지가 내 인생에 결론임을 잊지 말고 늘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첫사랑을 기억하며 그 신앙을 붙들고 끝까지 가는 것이 목적 되시기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며, 날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않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평생의 주님을 붙드는 삶의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하 24장은 요아스 왕에 대해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요아스 왕은 악한 여인 아합의 딸인 아달랴로 말미암아 찾아온 영적인 깊은 암흑기를 단절하고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여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준 유명한 왕입니다. 요아스가 왕위에 오른 나이는 7세였는데, 7살에 왕이 됐다는 것은 정말 말이 안되는 일입니다. 아달랴는 죽었고 새시대가 열렸지만 그 후에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다윗의 씨,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바로 7살인 요아스였습니다. 요아스의 인생은 태어나자 마자 아달랴의 손에 거의 죽는 인생이었는데, 거의 모세와 같이 구출 작전을 통해 성전에 숨겨 6년 동안 자랐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어둠의 시기에 용기를 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다윗 가문에서 왕이 이어지도록 영적인 쿠테타를 벌여 아달랴를 제거하고 드디어 세운 왕이 바로 오늘 요아스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자기를 스스로 보호할 수 없는 나이에 왕이 된 것입니다. 7살에 왕위에 올랐으니 얼마나 위태 위태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7세에 왕이 된 요아스는 제거되지 않고 잘 자라 40년동안이나 왕으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비결은 요아스가 대단해서 라기 보다는, 본인이 잘 준비해서도 아닌,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고 보호해주고 지킬 수 있도록 힘을 주었기 때문에 요아스가 이렇게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어떻게 보면 요아스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아달랴 같은 세상의 문화와 흐름이 너무 강력해서 이들은 칼과 창의 힘에 우리는 짓밟히고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내 스스로는 지킬 수 있는 힘조차 없었는데, 그런 절망 가운데 나를 이렇게 구하시는 분이 계시고 건지시는 분이 계셔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동일한 마음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고 버틸 수 없는 나를 이렇게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셔서 놀랍게 쓰임 받도록 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요아스를 통해 보게 됩니다. 요아스 왕에 대한 역대기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왕이었다 평가합니다. 그런데 사족과 같이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정직했다고 말하는 것을 통해 나중에 그러지 못한 때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정직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왕이 된 두 가지 대표적 예를 오늘 말씀은 증언하는데 첫 번째는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고 재건하는 것, 두번째는 항상 번제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고 재건하는데 많은 돈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별로 참여가 하지도 않고 헌금도 많지 않은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악한 여인 아달랴가 백성들에게서 성전세를 걷어서 오히려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바알을 위해 사용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헌금을 드리는 것이 도네이션 같이 여겨지고 정말 하나님께 드린다는 생각이 사람들에게 다 사라지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백성들이 내는 헌금이, “여호와께 드리는 헌금,” 즉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문제임을 바로 세우며 신앙을 재건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성전만 중수하고 재건한 것이 아니라 아달랴로 말미암아 철저히 세속화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종교 생활로 무뎌진 신앙을 영적으로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너희가 드리는 헌금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한 겁니다. 헌금의 정신이 회복되고 나니까 백성들이 기뻐하며 자원하여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생기니까 기쁨으로 내기 시작한 겁니다. 두번째 요아스는 여호야다의 가르침 아래 여호와의 전에서 항상 예배와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항상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 아니라 중수된 여호와의 전에서 모든 것이 예배와 연결되는 최우선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원하여 드리는 헌신의 헌금으로 여호와의 전을 중수하고, 그 곳에서 항상 번제를 드리며 예배 중심의 신앙이 회복된 것이 요아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으며, 이 모습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우리가 정말 예배를 최우선 순위로 두고 살 때,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가 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합한 자가 될 줄 믿습니다. 보이는 성전을 수리하고 중수한 것도 중요하고 그것을 통하여 예배가 회복되며 보이지 않는 신앙을 다시 한번 세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내가 드리는 기도, 헌금,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을 우리가 갖지 못하는 것이 영적 문제임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분명한 믿음과 그 은혜를 붙들고 나아갈 때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며 바른 신앙 생활을 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 회복된 예배를 통하여 주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줄 믿습니다. 나의 무너진 신앙을 재건하고 중수하며, 내가 드리는 기도와 헌금, 예배가 모두 하나님을 향한 것이 되는 영적인 일이 되게 여러분들의 마음을 두십시오. 또한 항상 예배를 최우선 순위에 두며 하나님에게 합한 성도, 예배로부터 모든 일이 풀리는 이 풍성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이 현재형으로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역대기에는 3가지 중심에 대한 회복이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언약 중심, 다윗 왕 중심, 그리고 성전 중심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향한 신앙으로 재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다윗왕의 계보로 돌아오는 것이며성전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을 강조하며 이 역대기가 씌여 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지금 이 세 가지가 모두 무너져 있는 현실 가운데 남 유다가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음을 가슴 아파하며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합의 딸 아달랴가 스스로 왕에 오른지 6년이 지났습니다. 이 아달랴라는 여인 하나가 얼마나 남유다 전체를 영적으로 파괴하고 황폐하게 만들었는가 한번 생각해 보면 여호람의 부인으로서 8년을 살았죠. 이 여인으로 말미암아 여호람이 하나님 앞에 악한 왕이 되고 왕자들을 모두 죽이고 본인은 병을 얻어서 창자가 다 튀어나와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왕이 된 지 1년만에 객사하도록 뒤에서 악한 일을 조장한 자가 이 여인입니다. 그렇게 자기 남편이 비극적으로 죽었고 아들마저 1년만에 죽으니까, 슬퍼하고 죄를 뒤집어 쓴게 아니라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나머지 왕족의 씨를 다 말려서 스스로 왕위에 올라서 6년의 시간을 보낸 겁니다. 정통성도 없는 북이스라엘 아합왕의 딸이, 왕비로, 왕의 어머니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주저앉아 남유다를 완전히 영적으로 황무하게, 풍지 박산을 내 놓은 것입니다. 남유다는 모든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신실함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 언약 중심, 성전 중심, 다윗 왕 중심을 모두 잃어버린채 이 암흑기와 같은 6년을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이정도 망가지면 남 유다는 거의 희망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이 없어 보이는 때, 제 7년에 제사장 여호야다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펼쳐집니다. 6년 동안 왕위에 앉아 있는 이 아합의 딸, 아달랴를 어느 누구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 전체가 등을 돌린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과 권력 앞에 아무런 얘기를 하지 못하고 눌려 있고 꿀먹은 벙어리마냥 있는 그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다윗의 자손 중에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선언을 하는 겁니다. 거의 목을 내놓고 하는 얘기입니다. 독재 시대에 그 독재의 쿠데타가 옳지 않고 사람을 그렇게 죽이고 학대하면서 잘못된 권력을 휘두를 때 속으로는 투덜거리고 뭐라 그러고 사람들끼리 모여서 욕은 하지만 용기를 가지고 그것이 잘못됐다고 얘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온전한 왕 되신 삶을 회복하기 위해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그 깊은 어둠의 시대, 암흑의 시대 가 계속될 때에는 이렇게 용기를 내야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용기를 내서 말하는 것이 나에게 불이익이 올지라도 용기를 내서 하나님에게 돌아가고 용기를 내서 성전 중심의 신앙을 다시 한 번 부르짖고 용기를 내서 사람들에게 말씀 안에서 해야 될 것을 말 해야 한다는 것이죠. 제사장 여호야다의 용기로 말미암아 소위 말하는 거룩한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이 쿠데타는 성공으로 끝이 나고 바알의 제사장들을 죽이고, 아달랴를 처단하면서 끝이 납니다. 죄악된 여인 아달랴, 온 나라를 그렇게 대대로 풍지 박산으로 만든 그 아합의 딸 아달랴가 죽고 나니까, 그 결과는 바로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가 위태롭고 어려울 때 믿음은 이렇게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 시대가 어찌보면 아합의 딸이 득세하는 어둠과 타락의 시대입니다. 이 타락과 어둠이 고착화 되어 이것이 문제인걸 알지만 이것을 고치려 하지 못하고 그냥 거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용기를 내기 원하십니다. 돈이 득세하고 성공이 득세하고 아달랴라는 여인에게 줄 서 가지고 거기서 순응하는 것이 고착화된 타락의 시대에 한 사람이 이렇게 목숨을 걸고 용기를 내는 것을 통하여 이 역사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회복하기 위해, 성전 중심의 신앙을 위해 내가 무엇을 붙들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함께 묵상하고 고민하기 원합니다. 이 시간 제사장 여호야다와 같이 암흑과 어둠의 시대에 믿음의 용기를 내며 하나님께 돌아오며 그 대가를 지불하여 온 국민이 평안과 영적 질서를 회복하는 은혜를 꿈꾸며 오늘도 주님 앞에서 담대하게 살아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아하시아 왕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호람 왕이라는 아버지가 있었죠. 그 아버지는 왕이 되자마자 정권욕에 눈이 멀어서 본인을 제외한 모든 형제 왕자들을 다 칼로 죽여 버렸습니다. 자신의 정권에 미쳐서 자기의 형제들을 모두 죽여야 될 대상으로 믿으며 씨를 말려 버렸습니다. 모든 왕자들이 다 죽음을 당하고 자기 하나 남았습니다. 또한 자신에게서 나온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 자녀들은 아라비아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또 다 죽여 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나서 유일하게 하나 남은 막내가 바로 오늘 왕으로 오른 아하시아입니다. 그 아버지 여호람은 창자가 터져 나오는 고통의 병을 얻을 채 비참하게 그 인생을 끝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형제들이 다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죽어 나가는 걸 다 본 유일하게 남은 아들…거의 다윗 가문이 바람 앞에 촛불과 같이 전멸에 전멸을 거듭하는 위태한 상황에 왕에 오른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왕이 예루살렘에서 1년 왕위에 오르고 죽었습니다 . 그러니까 아버지로부터 이어진 그 비극이 아들에게서 계속 되서 끝나지 않은 것이죠. 왜 이 유일하게 남은 막내 아하시아 왕은 1년만에 비극적으로 죽게 되는가? 유일하게 남은 아들 아하시아가 하나님에게 악한 왕이 된 이유에 놀랍게도 그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모친이 꿰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그게 이유였습니다. 이 여인이 누구입니까? 그 마지막 하나 남은 아들 막내 아들, 아하시아…나머진 다 아라비아 사람들의 손에 죽었지요. 그 유일하게 남은 아들을 사랑하고 애지 중지 키우지는 못할 망정 1년 만에 비극적으로 죽도록 그 어머니가 꿰어 악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엄마가 꿰었다는 것은 굉장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이 아들을 그 길로 몰아가는 것이죠. 그런 악을 행하도록, 아합의 망하는 길,그 잘못된 타락과 변질의 길을 가도록 이 아들을 앞세운 무시무시한 엄마가 바로 아합의 딸이자 여호람의 아내였던 엄마입니다. 이 아하시아 왕이 1년만에 비극적으로 죽게 되는 이유도 결국 이 엄마의 동생, 삼촌인 요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객사하는 겁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이 전쟁 중에 다쳐서 그 병문안을 갔다 오다가 결국 비극적으로 죽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 길을 통하여 해를 받도록 모든 것을 만들어 버리신 것이죠. 이 말은 아합의 아들이자 아하시아 왕의 삼촌인 요람에게는 가지 말아야 될 곳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결국 누가 거기를 가라고 뒤에서 밀고 그 악한 길을 가게 만든 겁니까? 그 엄마이지요. 하나밖에 남지 않은 아들을 완전히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거예요. 결국 예후 라는 자의 손에 비극적으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 남편 여호람도 아합의 집의 우상숭배와 타락으로 하나님에게 악한 왕으로 남은 이유, 그렇게 창자가 튀어나오면서 죽게 될 병을 얻은 이유, 그리고 자기 형제들을 다 그렇게 죽이게 되는 그 모든 배후에 이 여인이 있었다는 이 섬뜩한 이유를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 여인이 결국 두 남자를, 남편과 하나 남은 아들까지 완전히 다 풍지박산 내게 만드는 원흉이고요. 우리가 내일 말씀을 통해 함께 더 깊이 배우겠지만, 이 아합의 딸은 악한 사단의 역사를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는 악한 여인의 전형입니다. 자기 남편도 그렇게 패가망신 하며 무너지고 병으로 죽게 만드는 실체인 것입니다. 다윗 가문이 씨가 말라가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그 아버지 여호람이 아내의 말에 미혹되고 꾀임을 당해 여러 왕자들을 다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여호람 자신의 아들 딸들도 아라비아 사람들 손에 한 사람 빼고 다 죽게 됩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아들 아하시야도 이렇게 1년만에 객사해서 죽는 것입니다. 이 여인 때문에 그 집안의 모든 영적인 질서가 다 무너지는 겁니다. 하나님이신 축복이다 무너지고 풍지박산 나는 거예요. 오늘 말씀은 결혼 잘못해서 패가망신 하고 있는 남유다의 두 왕들의 비극적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마지막에 결론이 뭡니까? 아시아의 집이 약하여 왕위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언약을 붙든 왕족으로서의 씨앗이 다 말라버리는, 왕위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처한 비극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의 원인이 바로 이 왕궁에 잘못 들어온 여인, 아합의 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로 행하게 만들며 악한 일을 하도록 미혹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마십시오. 악한 사단 마귀의 미혹에 빠지지 않고 근신하고 깨어 기도하는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오늘 하루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여호람 왕의 대한 실정과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악한 일들에 대해서 배우고 있습니다. 여호람 왕이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며 무너지게 되는 본질은 아합의 딸과 결혼으로 연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가 북이스라엘의 길로 행하며 우상숭배로 물들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 곳에 산당을 지었는데 산당을 짓는 것 자체가 하나님만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는 우상숭배였습니다. 산당 이라는 것은 “하나님만”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도” 믿겠다는 신앙의 변질과 타락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 영적 타락한 모습의 절정을 “음행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였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도 오직 한 분에게 나의 사랑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남편도 하나, 아내도 하나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남편을 여러 명 두고, 아내를 여러 명 두는 그런 삶 자체가 기본적으로 음란하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을 음행하듯 섬긴다는 것은 양다리를 걸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겠다는 변질과 타락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수백명의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 전쟁을 벌이던 장면 기억나십니까? 응답이 안되니까 그들은 자신의 몸을 학대하고 피를 내 자해하면서 자기기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우상을 섬기는 그 모습, 그게 바로 뭐냐면 음란 하듯 우상을 섬기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예배 대상을 하나님 한분 외에 여러 대상들을 붙들고 예배 하는 것, 마음을 이곳 저곳에 쏟아내는 것이 바로 음란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는 신앙을 벗어난 타락한 모습에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삶을 정상적인 삶,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도록 유다 백성들을 미혹한 왕이 바로 여호람이었습니다. 이게 바로 여호람이 온 백성의 영적인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엘리야를 통하여 비극적으로 여호람의 인생이 마무리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음란 하듯 우상을 섬긴 죄, 형제들을 죽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셔서 유다를 공격하게 하시고, 쳐들어 와서 여호람 왕궁의 모든 재물, 아들들과 아내들을 다 납치해 가 버린 것입니다. 모든 가족이 포로로 끌려가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막내 아들 하나 남겨놓은 것입니다. 형제들을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다 죽여버리고 다윗 가문의 씨를 말려버린 것에 대한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람 인생에 마무리는 불치병에 걸려 신음하다 죽습니다. 창자가 밖으로 빠져 나오는 빠져나오는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면서 비극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왕이 그렇게 아프다가 죽었는데도, 백성들이 슬퍼하기는 커녕 하나도 아쉬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백성들 마음이 완전히 돌아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왕의 묘실에 두지 않았습니다.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못하는, 왕실을 먹칠한 왕으로 남겨진 것입니다. 그게 여호람 왕에 대한 냉정한 평가였습니다. 여호람 왕의 인생 평가는 그 왕이 죽었을 때 진실한 평가가 내려지는 겁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인생의 끝자락에 서서 그 사람이 진짜 누구고 무엇이었는가가 정확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타락과 인생의 타락은 신앙의 타락과 연결되어 있음을 역대기는 지속적으로 강조합니다. 한 나라의 영적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린 여호람 왕, 우상숭배를 음란하게 하고 모든 백성들을 미혹하게 만든 그 왕, 그 지도자에 대한 영적인 책임을 하나님께서는 엄중하게 묻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죽음 앞에서 내 인생이 가장 정직하게 평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평가 받는 것이 인생의 진실한 평가 임을 잊지 마십시오. 죽음 앞에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어떤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을 엄중하게 생각하며 배우자도 하나님도 오직 한분만 사랑하고 섬기는 주님 앞에 순전한 성도로 끝까지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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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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