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새 사람 된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식, 실천적인 삶의 방식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모신 성도들은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실천적 강령입니다. 첫 번째로 성도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의 마음을 주장하게 해야 한다고 증언합니다. 먼저 마음을 주장하고 이끄는 것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 인생의 나를 이끄는 것은 내 마음의 주장하는 어떤 것들이죠. 영어로는 dominant thinking pattern이라고 하는데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고 내가 가장 많이 묵상하고 반복하는 것, 그것이 결국 내 마음과 내 인생을 이끄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오며 이렇게 내 마음을 이끌고 주장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다는 것은 외적인 변화 전에, 먼저 내적인 변화, 즉 내 마음을 주님의 평강이 주장하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고 이끄는 자가 성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주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고 세상이 주는 평안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절대 줄 수 없는 평강이라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어 주시는 평안은 내가 환경과 상황이 나아지고 개선되는 평안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임하는 평안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실체로 있음을 믿고 이것을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삶의 마음에 주장하는 원동력이 되도록 하는 것이 이 땅에 소속되지 않은 자인 성도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이 지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 안에서 불평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가 지금 그 삶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지금 경험하고 체험하고 누리고 있는 겁니다. 감옥 안에서 평강을 누리고 감옥 안에서 감사하고 심지어 감옥 안에서 기뻐 할 수도 있으며 감옥 안에서 중보 기도할 수 있는 그 열정도 사도 바울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안이 사도 바울을 주장하기에….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것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을 붙들고 하늘 위해서 임하는 평강 가운데 내 마음이 주장되기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초대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가?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비결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겁니다. 말씀이 내 속에 거하는다는 것, 말씀이 육신이 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 삶의 실체로 흐르게 되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내 안에 거하는 것 그게 지금 사도 바울의 동일한 말이죠.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안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내면화 되어 그 말씀이 실체로 거하는 겁니다. 매일매일 주시는 말씀을 통해 주님이 나를 찾아 오시며 그 말씀을 통해 그 말씀이 내 속에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은혜를 붙들기 원해서 이 말씀을 사모하며 새벽을 깨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을 그리스도의 평안이 주장하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십시오. 말씀을 계속 드셔야 되요. 아무리 배불리 부페를 먹었어도 그 다음날 또 먹는게 우리의 당연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부페를 많이 먹어도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는 사람은 없죠. 성경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임을 진짜 믿으며,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내 마음의 심기우고 그것을 내 마르지 않고 찔끔찔끔 하지 않고 풍성히 거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비결이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소속이 달라졌고 우리가 바라보는 것이 달라졌으며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가 완전히 변하게 된 하늘을 바라고 살아가는 마음을 하늘의 두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이 부어 주시는 그리스도의 평강과 기쁨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십시오. 그 그리스도의 평강이 내 마음을 주장하게 하는 유일한 비결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하게 나타나는 결과로 내 마음을 담은 신령한 노래를 부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겁니다. 또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에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되는 인생이 되는 것이죠. 한해가 마무리 되는 이 때에 우리는 결국 내 마음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이 하늘로부터 부어어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이 평강과 기쁨이 되어야 한다라는 것을 잊지 않고 늘 나의 눈과 마음을 하늘로 들어 주님이 부어 주시는 평강, 예수님으로 인해 부어지는 평강이 내 삶을 주장하는 그 역사가 있기 원합니다. 그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해 하나님께 영광을 누리며 사람들에게 기쁨 되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강력한 권고를 합니다. 그 권고는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바로 인생을 예수님 안에 뿌리 박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뿌리를 박는다는 것은 인생의 기초를 그 곳에 세운다는 의미이고, 또한 그 속에서 공급 받는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인생의 기초를 세우며 그분을 꼭 붙들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이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바로 예수님 안에 뿌리 박는 인생입니다. 입술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인생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뿌리 박아 내 인생이 예수님의 기초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생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 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입술의 고백을 넘어 나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고 의탁하여 인생의 기초가 그리스도 위에 세워져야 하며 그 분 안에 뿌리내려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분에게 뿌리 바가 살아가는 인생 그게 예수님을 진짜 믿는 인생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아 살아가면 반드시 열매가 드러나는데 감사함이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면 상황과 환경을 넘어서는 감사와 공급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 자신이 지금 감옥 안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놓치지 않는 비결은 그가 대단해서도 아니고 그가 특별한 수양을 많이 해서도 아니고 그 안에 예수님의 뿌리 박음 있었기 때문임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뿌리박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인생이고 예수님에게 그 인생을 전적으로 의탁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감옥 안에서도 그는 감사함이 메마르지 않는 인생, 감사가 넘치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예수님 앞에 살지 않고 예수님 안에 뿌리 밝지 않은 인생은 내 삶의 감사가 메말라 가며 만사가 당연한 인생이 되어갑니다. 믿음이 굳게 서지 못한 채 갈대와 같이 흔들리게 되는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은 그리스도 안에 뿌리 밝지 못한 인생이라는 겁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연결해보면 돌 짝 밭에 심기운 자들이 같은 인생인 것입니다. 뿌리가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메마르고 타버리는 것입니다. 조그만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막 뿌리 채 흔들리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예수님 안에서 뿌리내려야 골로새 교인들이 직면하는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결국 미혹 당하는 근본 원인은 뭐냐면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꾸 세상에 뿌리내리고 사람들에게 뿌리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 안에 뿌리내려야만 주변에 미혹들이 넘쳐나는 이 세상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 말씀에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 잡을까 유의하라 경고합니다. 사로잡는다는 건 뭐냐면 내 마음이 쏠린다는 것이죠. 내가 돈을 지나치게 사랑하게 되면 내가 돈에 내 마음을 다 빼앗기며 결국 돈에 노예가 되어 사로잡히게 되죠. 돈에 사로잡히는 인생이 됩니다. 결국 이 사로잡힌 다는 것은 내 마음과 열망을 주는 것에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변에 그런 미혹들, 다신론적 신비주의에 근거한 영지주의로 교회의 성도들이 자꾸 마음을 빼앗기는 겁니다 미혹 당하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지며 본질을 벗어나는 거예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몸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육신을 천시하고 몸을 부정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하고 거절하는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물론 영이 주도해야 되며 영을 방점이 두고 살아야 되지만 육신을 천시하고 육신을 버리는 인생을 살지 말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린 비슷한 곳에 똑같이 빠지며 비슷한 미혹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는 몸을 귀하게 어기고 몸을 하나님의 선물로 알아 그 영이 거하시는 곳으로 거룩하게 잘 관리하고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받은 성도들의 삶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통치자와 권세이자 머리이심을 고백하는 것이지요. 예수님 그 분 만이 유일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오직 그리스도라는 고백, 예수님만이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이고 그리스도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의탁하는 그것만이 미혹와 타락에서 벗어나는 걸입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미혹과 속임수가 가득하고 십자가 복음만을 믿는 신앙에서 자꾸 이탈하게 만들고 왜곡하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예수님 안에 뿌리내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자가 되기 위해 예수님 안에만 뿌리 박으며 내 체험과 지식을 상대화하고 절대 하지 않으며 복음의 조건을 달지 않고 십자가 복음 하나로 충만한 인생이 되는 것 이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 뿌리 박은 인생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또한 감사함을 통해 내 신앙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점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황을 넘어 감사함을 잊지 않고 메마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 안에 뿌리를 깊게 박은 것을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이 예수님 안에 뿌리내려 내 인생의 기초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시오. 기왕 신앙생활 하고 제대로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 안에 뿌리박아 감사가 흘러넘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감옥 안에서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증언합니다. 사실 지금 위로 받아야 되고 중보기도를 받아야 되는 자가 감옥 안에 있는 사도 바울입니다. 가장 힘들고 어렵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더 감사하고 기뻐하며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그렇게 힘쓰는 전천후 신앙, 신비의 신앙 생활을 한 자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상황과 환경이 자기를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정의하는 인생, 그분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따라 내 인생이 정의되는 그 놀랍고 선명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서 그 힘들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중보 기도를 하는데 육신의 얼굴을 보지 않은 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관계성이 없고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지체로 있는 자들 그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것도 참으로 귀합니다. 그런데 더 귀한 것은 나를 넘어서는 기도, 내가 잘 아는 사람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넘어서는 기도의 삶입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 내가 개인적으로 가보지도 않은 땅 선교지를 놓고 간절히 중보 기도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겁니다. 이런 놀라운 중보기도의 신비는 바로 육신으로는 떠나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영으로는 함께 있다는 것이죠. 나의 육신은 너희와 떨어져 있으나 시공을 초월하여 영적으로 우리가 함께 하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것을 실체로 고백하기 때문에 내가 감옥에 있지만 심지어 한 번도 보지 못한 너희를 위해 간절히 애쓰고 기도하며 힘쓴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지만 수많은 교회들을 품고 기도할 수 있으며 그들과 육신은 떨어져 있으면 영적으로 심령으로 함께 하는 것을 믿으며 그렇게 놀랍게 중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기도할 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놀라운 이 역사와 신비를 믿을 때 우리는 그 중보 기도의 지경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죠. 나는 육신으로는 떨어져 있으나 심령으로는 함께한다는 이 분명한 고백을 가지고 기도할 때 우리가 선교지를 향한 기도와 선교사님들을 위한 기도가 놀라운 폭발력을 가지는 것이죠 그렇게 영적으로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그렇게 힘쓰고 간절히 기도했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마음의 위안을 받는 거예요. 여기서 마음의 위안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위안이고 그 결과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겁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인들은 마음의 위안이 없었고 사랑 안에서 연합한 대신 분열하고 깨지는 일이 많았다는 것이죠. 내가 마음에 위안을 받지 못하고 메말라 가며 내가 자꾸 분열하며 내가 풍성한 대신에 그런 메마르고 빈약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신비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분의 사랑 안에 연 합하며 인생의 풍성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위안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연합하는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는 거예요. 또한 성도들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이 임하며 그리스도를 깨닫는 자가 되기를 중보 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계속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깨달아 그 깊은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그런 삶이 될 수 있도록 기도 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그 예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부활을 누리게 누리게 됨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진리를 보거나 바로 이해하려는 힘이고 지혜라는 것은 진리를 굳게 간직하고 계속 파악하려는 힘입니다. 그 당시의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영지주의였는데, 그들은 자신들만의 어떤 주관적인 지식, 자신들이 체험한 어떤 경험들을 절대화 하는 거예요 자신들만 가지는 특별한 지식과 자신들만 경험한 특별한 경험이 절대화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대화 시키는 게 모든 이단의 공통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닫지 않게 되면 내가 경험한 어떤 특별한 경험과 어떤 지식을 절대화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대하며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교묘한 말로 그들이 속임을 받고 미혹을 받아 말씀 위에 내 생각과 내 경험과 내 지식을 우위에 두며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그 당시에 골로새 교회가 직면한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렇게 교묘한 말로 속임을 당하지 않고 미혹 당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하는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그 분 안에 인생을 세우는 것이죠. 그래서 미혹이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붙드는 삶을 멈추게 만드는 모든 게 미혹이라는 거예요. 영적 미혹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 바라보고 붙드는 것을 멈추게 만드는 거라는 거예요. 그게 상황이 됐든 환경이 됐든 나의 지식이 했던 경험이 됐던 내 삶을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붙드는 것을 멈추게 한다면 그게 바로 교묘한 말로 우리를 속이는 미혹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게 너무 신비해 가지고 찾기 어려워서 우리가 하루 종일 찾아야 된다는 게 아니라 라면으로 얘기하면 동결건조 스프 같다는 것입니다. 라면 동결 건조 스프는 그 상태로 먹으면 아무런 맛도 잘 나지 않죠. 그 스프는 라면과 함께 끓는 물에 끓여서 익혀야 되는 것이죠. 물에 넣어서 부풀려 익혔을 때 그 본연의 맛이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마음에 담기며 품었을 때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실체와 되는 것을 경험할 때 그 진리를 깨닫는 거예요. 그게 바로 보화가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내 마음의 품었을 때 나타나는 놀라운 지혜와 지식의 보화들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말씀 그냥 글씨가 아니라 생명이며 실체이며 그것이 육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품어 내 마음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실체로 흐를 때,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그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나에게 풍성한 역사로 임하게 된다는 것이죠.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으로 회복되며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교회가 어느 때보다 간절한 중보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맞닥뜨리는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말씀 가운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깨달아 풍성해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되며 마음의 위안을 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도록 간절히 간구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내가 육신으로 떠나 있을 지라도 심령으로 함께하는 그 영적인 비밀을 믿고, 중보기도를 위해 애쓰고 힘쓰는 자가 되십시오. 중보 기도의 지경을 넓혀가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또한 성도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의 위안을 받고 그 사랑 안에 연합하며 풍성함을 누리고 그리스도를 깨닫고 살아가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도, 우리가 연합을 하게 되는 것도, 풍성하게 되는 것도, 미혹에 빠지지 않는 것도 모두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데서 온다는 사도 바울의 분명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그분의 지혜이신 말씀에 내 인생 모든 것을 걸며 의탁하여 살았을 때 무질서한 인생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리스도의 믿음의 굳건한 삶으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성도들이 경험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비가 어떻게 전파되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하는 사도 바울의 간증과 고백이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이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그 비밀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언약과 예언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한 모든 약속들입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 그 모든 약속들은 이 비밀로 말미암아 감추어져 있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비밀이 우리에게 드러났고 그 성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언약이 성취되어 우리 안에 현재형으로 역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를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죠. 초대교회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를 성도 되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거룩함과 구별됨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성도 되게 하는 유일한 비결은 내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죠.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분명히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능이 너희에게 임하여 너희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을 명령하시고 떠나셨습니다. 근데 성령이 임하셨고 그 다음에 놀라운 오순절의 역사가 있었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바운더리를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에만 머물러 복음을 증거하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 복음의 비밀이 전세계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 되는 것을 원하셨는데 성령 하나님이 이 믿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만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그들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무엇을 통해 흩으셨는가 하면 바로 핍박과 박해를 통해 그들을 비자발적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를 떠나게 만드시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핍박을 통해 흩어졌지만 여전히 이방 땅에 가서도 그 곳의 유대인들을 향해서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소수의 몇몇 사람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고, 이방인들이 놀랍게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받아 들이며 새사람되고,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죠. 그러면서 그 그리스도의 비밀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 나가 유대인들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놀랍게 역사하는 복음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이죠. 그 선두주자에서 있는 자가 바로 누구냐면 사도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 비밀이 이방인에게까지 넘어가는 역사로 쓰임 받도록 하나님이 사도바울 자신을 부르셨슴을 선명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보내심을 받은 자, 하나님께 사명을 받은 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권하고 가르치는 것이 사명자의 삶임을 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 그리스도를 권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를 전파하고 복음을 권하고 복음을 가르치는 자로 힘써 일하는 자 그것으로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것이죠. 그게 바로 주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그냥 불특정 다수에게가 아니라 “각 사람에게”입니다. 각 사람을 권하고, 각 사람을 가르치고,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받아 변화되는 것을 초점에 두고 살아가도록 세움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복음을 배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을 고백할 수 있을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어 주시는 힘,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심을 믿으면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힘을 통하여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죠. 나의 힘을 의지하는 삶은 결국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요. 결국 그것은 장기적으로 롱런 할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해 우리에게 부어 주신 권능과 하늘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역사 하시는 힘, 그 능력을 붙들고 내가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열심과 힘의 능력이 내 속에서 역사 하시는 힘이어야 된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상황과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뜻 가운데 펼쳐져 나아 가기를 원하시는 놀라운 증거로써 주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보내심을 받은 삶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선택해서 온 게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셔서 그 부르심 가운데 왔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영광의 소망을 붙들고 주님의 그 놀라운 복음을 선포하며 전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열심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통해 오랫동안 약속하시고 마침내 성취된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구원하여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이 시간 나와 함께 하시며 내 안에 살아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영광,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심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예수님의 사랑을 붙들고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잊지 마십시오. 항상 내가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에 힘을 다하는 삶이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한사람 한사람이 온전한 자로 세워지는 것에 내가 집중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사명을 위해 내 스스로 힘을 다하고 수고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 속에서 능력으로 일 하시는 그분의 힘을 권능을 붙들고 힘을 다하여 수고하여 나를 통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풍성하게 드러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의 사명자로서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증언해 주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 하며 중보하는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감옥 안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전천후 신앙의 기적을 우리에게 가감없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바울이 감옥 안에서 어떤 태도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감옥 안에서 받은 괴로움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와있지 않지만 지금 감옥 안에 있는 것 자체가 괴로운데 그 가운데 받은 괴로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기뻐하지 않는 데 속으로 기뻐하는 척하는 게 아니라 정말 마음으로부터 기뻐하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통의 반응은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을 내가 받게 되면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괴로움 받는 것도 어떨 때는 못 참고요,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당해야 되는 그 고통을 내가 괴로움으로 당하게 될 때는 기뻐할 수가 없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되는 고난을 내가 받게 되면 그것을 억울해 하고 분하게 여기는 게 일반적이고 당연합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을 보복하려고 하고 앙갚음을 해주려 합니다. 그런게 뭐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의 당연한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 사도 바울은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하여 그는 무엇이 퍼져 나가고 전파되는 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통을 바울이 대신 받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명히 전파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남이 당해야 하는 고통과 괴로움을 대신 받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그가 철저히 예수님 안에 있었고 예수님 안에 거하면서 예수님이 주시는 그 영적인 실체와 보이지 않는 천국의 실체를 삶의 현실로 경험하며 살았기 때문에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인성이 좋고 훈련을 잘 받고 수양을 해서 괴로운 가운데 기뻐하는 게 아니라 그 삶이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으며 그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통하여 괴로움을 넘어서는 하늘로부터 주시는 기쁨을 그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더 놀랍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이죠. 남을 위해 대신 받는 고난을 기뻐하는 것을 넘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이죠.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고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가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운다는 것이죠. 이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삶 그 삶을 통해 내 안에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그 흔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체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이 받은 그 고난을 함께 짊어지며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는 삶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것이 가장 영광 된 일이라는 것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죠. 사실 사도 바울의 옥살이도 솔직히 억울하게 하는 옥살이었습니다. 뭔 큰 잘못을 해서 받은 옥살이가 아니라 억울하게 누명 쓰고 가지 않아도 될 그 감옥 억울하게 가는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그럼에도 지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는 마음으로 그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에 함께 지고 갈 멍에가 있습니다,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을 내 육체에 채우며 살아가는 자들을 뭐라 그러냐 하면 예수님의 제자, 보내심을 받은 사명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런 삶을 교회의 일꾼 되는 삶, 너희를 위해 직분을 따라가는 삶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받은 괴로움을 기뻐하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몸 된 교회를 위해 육체 치우는 자들 그게 바로 교회의 일꾼인데, 그렇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자와 그냥 교회를 왔다 갔다는 구경꾼의 차이는 뭐냐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멍에와 고난을 함께 채우고 지고 가는 자인지 아닌지의 차이입니다. 교회도 보면 교회를 그냥 방문객으로는 손님으로 오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를 내가 섬겨야 될 대상과 장소로 오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죠. 어떤 분들은 쓰레기를 버리는 분들이 있고 어떤 문제는 쓰레기를 줍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교회를 단장하는 분들이 있고 어떤 분들은 교회의 어려움을 나의 어려움을 안고 함께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함께 멍에와 고난을 함께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주님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며 전혀 잘못된 디렉션으로 가는 깨지고 상한 곳입니다. 세상에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다고 분명히 우리에게 선언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머리 되신 교회가 세상과 모든 것이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부딪치고 충돌하며 방향성이 달라지며 가치관이 달라져 부대 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니 세상에서 그 교회가 당하는 직면하는 멍에와 고난과 어려움, 그 가치관의 충돌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며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자가 되기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사도 바울과 같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주님이 부어 주시는 기뻐 함과 그리고 평안함과 감사함이 내가 처한 상황을 통해 빼앗기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 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그 말씀을 이루는 자로 주님의 교회에서 그 괴로움을 기뻐하며 남은 멍에와 짐, 고난을 함께 지며 그것을 내 육체에 채우는 이 놀라운 기적의 삶을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기왕 신앙 생활 하는 것, 예수님을 정말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여러분들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그 고난과 그 멍에를 함께 채우고 함께 지고 가서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영광이 함께 누리는 제자와 사명자로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기적이 저의 삶을 통하여 우리 개인을 넘어 우리 교회 공동체의 삶을 통하여 풍성히 경험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겉모습과 껍데기만 보는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적 상태와 영적 상태가 어떤 지를 정확하게 직시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과 지금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나의 보이지 않는 내적 상태와 영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고백하는 것이 성도의 특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 전과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나의 삶이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at that time)…이제는 (from now on)…의 구별, 즉 예수님을 믿기 전 과거에는 내가 영적으로 내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예수님과 동행 하기 시작한 후부터 이제는 (from now on)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하고 붙들고 살라는 것이죠.
그러면 내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at that time에는 내가 어떤 상태였는가?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삶은 악한 행실로 탕자와 같이 주님을 멀리 떠나 있었다는 겁니다. 특별히 골로새 교회 교인들은 대부분 이방인이었고, 완전히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쩔어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문화와 가치관에 그냥 접촉한 정도가 아니라 그게 정상인 줄 알았던 삶, 바로 악한 행실로 그리스도와 멀리 떠났던 상태라는 것이죠. 마음으로 원수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과의 관계가 완전히 깨졌고 그리스도와 완전히 등을 돌리고 살았던,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겁니다. 흑암과 어둠의 권세 가운데 결박되어 그리스도와 원수 되어 마음으로 멀리 떠나 어둠과 흑암에서 헤매던 자가 바로 우리의 영적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원수 되었던 모습이, 예수님을 믿기 전 영적 상태였다는 것을 직시하는 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키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원수 되며 진노의 대상이며 흑암과 죄의 결박된 우리가 이제는 (from now on) 그리스도의 육체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의 육체 죽음이란 십자가를 얘기하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그의 피를 다 쏟으시고 몸이 다 찢기심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다 사하여 주시고, 깨지고 무너진 관계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의 관계를 화목하게 해 주신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징이 아닌 실체로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우주의 창조자 이자 교회 머리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화해시켜 주시며, 모든 죄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의 값을 다 치러 주시며, 하나님 보좌에 담대하게 나가며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자로 회복 시켜 주시며,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보혈로 덮어주시는 이 선물, 이걸 우리는 복된 소식, 복음이라 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보혈에 덮여 구원의 선물을 받아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백성 된 것, 그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지금 영적 현주소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예수님 은혜 뿐이고, 내가 천국가는 것을 확신하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가 붙들고 강조할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임을 철저하게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변해서 이 자리에서 있는지를 정확하게 직시하여 복음의 감격 가운데 천국으로 올라갈 때까지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믿음에 거하고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게 서며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겁니다. 믿음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믿음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게 믿음의 대상입니다. 난 누구를 향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나를 믿는 게 아니라 돈을 믿는 게 아니라 힘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태어난 자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굳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주저앉아 있을 존재가 아니라 여러분들은 쓰러져서 가만히 있는 존재가 아니라 굳게 서는 존재, 힘 있게 일어서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고 넘어져도 다시 오뚜기 같이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이죠.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소망이 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에 쌓아 두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 천국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자, 이게 바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보혈로 새 사람 된 자로써 진리의 기준을 잘 붙들고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뿌리내리고 든든히 서는 것이 변화된 성도로서의 사명입니다.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이 있는 겁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인데, 내가 죄인인 것을 인지하는 죄인과 내가 죄인인 걸 모르는 죄인이 있다는 거예요. 죄인인 걸 모르고 의인인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죄인이 있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는 영의 눈이 닫힌 어두움에서 살아가는 자들인데, 내가 지금 영적 소경인 것을 알고 사는 소경이 있으며, 영적으로 어두워진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소경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에게 복은 내 영적 현주소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내가 그리스도 앞에 죄인이구나… 그리스도 앞에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진 인생이구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 가운데 나아가지 하냐면 나는 멸망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깨닫는 게 복입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나의 영적인 상태를 분명히 직시하는 것이 복임을 깨달으십시오. 하나님 앞에 나의 영적 현주소를 발견하는 것이 복임을 붙들고 늘 십자가 앞에 나를 비춰 보며 살아가십시오. 모든 것이 예수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안에 거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게 바로 변화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사람으로서 여러분들이 죽을 때까지 해야 될 사명임을 잊지 않고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며 영광스러운 구원과 천국을 바라보고 그 하늘의 보이지 않는 천국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로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골로새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기독론의 고백과 선언을 배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예수 하나님만을 분명히 믿는 신앙을 강조하며 흔들림 없이 그 분만을 믿고 고백하기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 즉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천국으로 옮겨 가신 그 놀라운 사건과 죄사함의 속량 사건을 마음에 새기고, 예수님은 만물을 창조 하시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창조자로 이 세상에 만물과 함께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 아들 되심을 강조하면서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예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게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교회의 신비 속에서 발견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심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들로서 교회의 머리 되신 분입니다. 교회가 몸이고 그리스도는 그 몸에 머리 시라는 것이죠.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데, 중요한 특징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계라면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잘라 가지고 새 part를 사서 그냥 붙이면 되고, 손가락이 아프면 손가락 잘라서 새 손가락 붙이면 되는 것이죠. 그것을 하지 못하는 건 뭐냐면 바로 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기계는 다리가 아프다고 온 몸이 아플 필요가 없죠. 그런데 몸이라는 건 다리가 아프면 온 몸이 그 아픔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손가락이 아파도 손가락만 아픈 게 아니라 온몸이 다 아픈 겁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특징은 radical connectedness…모두가 함께 하는 겁니다. 기쁨도 슬픔도 아픔도 함께 하는 그 끈끈한 연결 점이 있는 게 몸이란 특징이죠. 한 지체와 한 부분이 아플 때 모든 몸이 함께 아프고 한 부분이 기뻐할 때 모두 기뻐하는 것이 바로 몸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교회라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기계가 아니라 교회가 건물과 조직이 아니라 교회가 몸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몸으로서의 교회를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교회가 바로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 몸으로서 존재한다는 유기적인 신비를 붙들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교회에 세상의 논리가 들어와 마치 기계나 조직과 같이 주도하게 되지 않도록 몸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그 갱신하고 회복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모습이라고 믿습니다 또 하나 교회는 그냥 몸이 아니라 머리가 그리스도 되신 몸, 그리스도를 머리에 둔 몸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것은 그리스도가 중심, 각자의 모든 파트와 지체가 누구의 명령과 방향성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방향성과 지배를 따라 가는 것이죠. 다리가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게 아니라 머리가 명령하는 곳을 다리가 가는 게 바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손이 하고 싶은 거를 잡는 게 아니라 머리가 명령한 것을 손가락이 잡는 것이죠.입이 원하는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머리가 얘기하고 방향을 준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 몸의 방향성과 생각 하는 것, 나아갈 길 모두 누구의 지배와 통치 아래 있는 것인가 하면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된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주님보다 앞서지 않는 교회, 주님의 인도하심과 다스리심에 따라 움직이고 멈추는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망각하고 놓쳐 버리게 되면 머리와 상관없이 손발이 움직이고, 입이 말을 하면서 몸이 말을 안 듣는 아픈 몸, 생명력을 잃어버리는 몸이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조직이 교회가 아니라,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분의 지배와 다스림 아래 있기에 교회가 존재함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의 문제는 내가 머리 쓴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머리 쓰는 싸움이 아니라 머리 써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머리 되신 예수님을 붙들 때 해결되고 승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은 머리 쓰는 싸움이 아니라 머리 붙드는 싸움입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싸움이지 내 머리를 쓰는 것을 내려놓는 싸움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몸으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온전히 붙들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바로 모든 충만으로 거하게 되시는 겁니다. 교회가 주님을 중심으로 머리로 그분만을 붙들고 그분의 다스림과 인도 아래 살아갈 때 우리에게 경험 되는 게 뭡니까?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성도인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에게 내 삶의 초점이 과 무게 중심을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복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으로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머리로 붙들고 예수님의 머리 되심을 고백하며 우리가 살아갈 때 충만함과 함께 부어 주시는 게 바로 화평입니다. 우리는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하고 관계가 깨져 불화 하죠. 화목이 아니라 불화…관계가 깨져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충만한 가운데 거하게 되며 십자가의 사랑에 은혜로 덮여 막힌 담이 헐어 지며 십자가의 피로 깨진 관계가 화평의 관계로 회복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가 죄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불화가 회복되어 화평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화목하게 되심을 기뻐하신다 그랬어요. 우리가 주님 앞에 돌아오며 주님 앞에 회복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붙들고 화목을 누리는 그 십자가 사랑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는 거죠. 그게 바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가장 놀라운 신비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몸으로서 맛보아 알도록 몸된 교회를 세우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에 두고 모시는 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 본질을 늘 깨닫고 보이는 것에 방점을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방점을 두고 살아가는 자가 되도록 끊임 없이 주님 앞에 조율 받아야 합니다. 내 삶의 머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내 삶의 초점과 무게 중심을 예수님께 두어야 되고 머리이신 예수 님의 통제를 받고 예수님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살아 갈 때 우리 가운데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는 그 신비가 주님이 주시는 화평이 부어지는 은혜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머리 되심을 붙들고 그분 안에 우리는 변화 받고 건짐을 받아, 주님이 주시는 그 충만함으로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신앙 생활의 진수이며 예수님을 붙드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 주고 사신 교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저와 여러분들이 지체됨을 잊지 마시고 우리가 몸으로서 하나 되어 연결되어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주님의 지시와 방향성, 다스리심만 따라가는 생명 공동체가 되기를 예수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다신론적 신비주의와 율법 주의가 스며들며 예수 그리스도만 붙드는 순전한 믿음과 충분한 구원의 고백 신앙이 점점 흐려지고 약해지고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이고 그걸 통하여 예수 하나님 그분 만을 분명히 믿는 그 믿음을 다시 세우기 원했습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 what Jesus has done에 대해 배웠고 오늘 말씀은 좀 더 본질적으로 예수님 그분 자체가 누구신가를 선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과 같이 우리에게 나타나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형상 같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 주신 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 주신 본체이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한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되심을 통해 지금 반복적으로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뭐냐면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자 라는 것을 마음에 깊이 담아 봅니다. 영어로 하면 creature가 아니라 creator라는 것입니다. 당시에 많은 이단들과 잘못된 가르침들이 골로새 교회에 스며들었는데 바로 예수님을 그냥 하나의 피조물과 같이 생각하거나 여러 신들 중에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열등한 어떤 특별한 피조물 정도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상이 지금 팽배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이 희미해지며,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 얕아지는 겁니다. 또 하나 그 당시에 골로새 교회에 스며든 이단 사상은 그리스철학 철학의 전형적인 이원론을 바탕으로 한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란 육적으로 나온 모든 것이 악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육신은 버려야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피조물이라고 지금 말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을 넘어 육을 가진 아주 천박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처럼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거절하며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예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며, 예수님을 피조물로 보려 하는 모든 것들은 다 이단이고 잘못된 것이며 배격해야 될 것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어떤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는 창조자 그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고백을 붙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공생애의 삶을 배우고 따라가고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만 그 공생애 기간 중 진짜로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예수님만 붙들고 신앙 생활하는 것은 이단이라는 겁니다. 그건 치우친 변질된 종교라는 겁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예수 하나님의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죠. 많은 이단들과 잘못된 가르침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거절하는 게 아니에요. 겉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은 거 같아요. 그런데 예수님만 믿지 않고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이단과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보다 낮은 하나의 피조물로 바라보거나, 본받을 좋은 삶의 모델 정도로 얘기는 모든 것들을 배격하고 유일하고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기초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삶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유지되는 것을 믿으십니까? 나의 삶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삶이 지금 이때까지 살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창조 세계가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육과 영을 이거 아니면 저것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육신이 영에 굴복해서 길들여 져야 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만물이 예수님과 함께 창조된 걸 오늘 말씀은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속하고 존재가 유지된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창조된 만물에 예수님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세계와 육신을 더럽게 생각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하며 육체와 만물은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유지되고 있음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가 유지된다는 이것을 붙들고 우리는 매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삶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삶이 하찮지 않고 내 삶이 그냥 살다 없어지는데 먼지가 아니라 존귀한 이유는 내 안에 예수님이 함께하시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유지되고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지금이 시대의 많은 교회들도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 같이 착하게 살고 이웃을 돌보며 예수님 같이 친절한 마음을 가지고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이런 모습은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데 불편함이 없고 다 수용합니다. 심지어 불신자나 타 종교 사람들도 그런 예수님 만을 바라보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좋게 생각하죠. 그런데 예수님이 The way…the salvation이라고 선언하는 순간,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선언하는 순간 다들 불편해 합니다. 그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그건 머리에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대의 문화가 뭐냐면 예수님을 상대화 시키는 것입니다. 상대화된 예수, 여러 종교 중에 한 창시자로서의 예수, 피조물로서의 예수만 강조하는 것이 이 시대가 원하는 종교상인 것이지요. 예수님만 하나님의 아들이고 예수님만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게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것을 싫어하는 겁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은 단순한 인간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아닙니다. 그냥 다른 신들을 다른 창시자들 중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유일하고 절대적인 예수 하나님을 고백하십시오. 예수 하나님만이 내 삶의 구원이시며 생명 이시며 부활 되심을 믿고 선포하십시오. 그래야 그 예수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자 하나님 되신 예수님을 나의 믿음의 대상으로 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통하여 나의 인생이 존재하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존재가 유지함을 믿으며 매일 삶이 예수 하나님 앞에 꼭 붙어 있어 그 분의 은혜를 공급 받으며 나의 유일한 절대자 구원자인 그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충성된 믿음 가운데 많은 열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분명히 아는 것을 통해 전해 주고 싶어서 이 골로새서를 쓰게 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 당시 골로새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즉 예수 하나님의 대한 분명한 고백과 신앙이 약해서 흔들리게 되었구요. 골로새라는 도시에 만연한 왜곡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을 믿기 믿는데, 예수님만 믿는 게 아니라 다신론적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을 여러 신들 중에 하나로 여기는 잘못된 가르침으로 왜곡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신비주의를 따라가며 내 경험이나 체험을 절대화하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상대화하는, 복음이 흔들리는 이런 위기와 왜곡 가운데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예수 하나님만이 구원의 진리임을 믿는 그 절대적이고 확고한 신앙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믿는 게 신앙의 처음과 마지막 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소위 말하는 기독론을 아주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은 그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 What Jesus has done…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하신 놀라운 구원 사역,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셨던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신 가장 중요한 우주적인 사건이 바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 이게 가장 중요한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말이 바로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서 예수 그리스를 영접 하기 전, 우리의 영적 상태를 흑암의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자들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 우리는 어둠의 권세 가운데 흑암의 권세 가운데 멸망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과 같은 자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과 물질 가치를 절대화하며 살게 되면 내가 건짐을 받아야 되는 존재이고, 내가 예수님 없이는 파산과 멸망을 향해 가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살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흑암의 권세 아래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이런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아 되는 자, 예수님이 없으며 파산 되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복입니다. 내가 예수님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더 주목해야 될 것은 그냥 흑암에서…가 아니라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결박하고 누르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진공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은 어둠의 중력과 눌림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는 우리를 누르는 힘이 있고 중력이 있으며 우리를 압박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의 힘에서, 깊은 어둠의 중력에서 우리가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내 스스로 나를 구원 시키는 것 내 스스로 나를 어둠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건 불가능 하다는 거예요. 그거 좀 어려운 말로 뭐라 자력구원이 불가하다…선언합니다. 스스로 나를 구원 시킬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없다는 겁니다. 절대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그 능력과 눌림에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 종교들은 자력 종교를 강조합니다. 내 스스로 구원 받을 만하게 나를 변화 시키는 거죠. 수행을 통해 도를 닦는 것을 통해 내 스스로 구원 받게 하는 자력 구원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자력구원을 부정하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타력구원을 진리로 붙듭니다. 외부로부터 구원의 힘 건져 주는 힘이 와야 내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이라는 고백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 천국으로 우리를 옮겨 주신 겁니다. 이사 하게 하시고 신분을 변하게 하신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죠. 부활을 통해 승리를 선포하신 일이죠. 그 권세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이시며 그분이 하신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순간 그 이름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게 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분의 보혈로 덮이게 되는 것이죠. 그분의 보혈로 덮인다는 말이 바로 뭐냐면 오늘 말씀의 속량입니다. 영어로 redeem…이라고 하는데, 기프트 카드 같은 거 받으면 그걸 쓸 때 redeem이라고 하는데, 이미 누가 돈을 다 지불한 카드인 것이지요. 그게 바로 무엇에 대한 값을 다 치루었다…redeem..속량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에 대한 삯, 값을 다 치르신 겁니다. 그리고 그 redemption code를 우리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걸 우리는 믿음으로 취하고 그 구원의 선물을 아멘으로 받으면 되는 거예요. 이 속량과 이 죄사함의 은혜에 대한 그림자와 같은 이미지가 구약 성경에 여러 번 등장합니다. 출애굽 사건인 유월절에 어린 양 사건, 그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은 저주와 심판이 넘어가는 사건, 라합의 집이 붙들고 있었던 붉은 줄이 그 여리고 성이 모두 멸망하는데 그 집만 구원 받는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여 우리가 속량, 즉 죄 사함을 받는다는 모든 그림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이 놀라운 우주적 사건을 기억하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최고의 자리에 올려 드리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구원자 되시며 예수님을 초점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만이 내 믿음의 대상임을 절대화 하며 오직 예수님만 구원자라고 우리는 고백하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일이 감격으로 다가오고 계십니까? 나는 예수님 없으면 흑암의 권세에 눌려 죄와 사망의 권세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절망스러운 우리 인생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타력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천국으로 옮겨 가게 된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절대화하며 내경험과 체험을 상대화 하고 계십니까? 절대 변하지 않는 절대 가치는 내 지식이 아니고 내 경험이나 체험이 아니라고 예수 그리스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에게 예수님은 여럿인 중에 하나가 아니라 오직 한 분, 나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아들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만을 우리는 구주로 고백하며 예수님만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예수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며 오늘 하루도 예수님 한 분으로 충분한 인생, 예수님을 삶의 최고로 올려드리는 인생, 예수님 에게만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인생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 안에 있는 수감자입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복음의 충격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기도를 어느 정도 하겠다고 약속하는가 하면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중보기도 한다는 것을 약속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가져다 주는 충격이고 놀라운 하늘의 부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환경을 뛰어넘는 것이고요. 기도는 결국 나의 초점과 관심과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땅이 아닌 하늘의 향한 기도, 내가 쌓는 소망이 하늘이고 땅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들의 중보 기도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감옥 안에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간절히 간구하는 골로새 교인들을 향한 기도 제목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은 세상이 결코 품을 수 없고 따라올 수 없는 거룩한 목적을 위해 간절히 중보 기도 합니다. 첫번째,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내 삶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으로 채우는 것이죠. 왜냐하면 내 인생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의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무의미하게 어쩌다가 나온 인생이 하나님이 내 인생에 매뉴얼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며, 그 보내신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반대로 사단은 성도들과 이 세상만 바라보도록 미혹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하게 여기고 거기에 시간과 재물과 능력을 다 쏟아 버리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는 것은 소홀히 여기게 만드는 겁니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있어야 내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고,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에 나의 인생에 중점을 두고 초점을 두고 살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게 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 라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 마음에 채워지는 앎이고 친밀한 관계성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는 범사에 기쁘게 되고 합당하게 행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결국 나의 인생 속에 하나님을 아는 것을 진지하게 열망하며 살아가며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그 배운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 우리의 어떻게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며 내 인생을 묵직하게 살아가는 힘을 주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되는 놀라운 비결입니다. 우리가 평생 신앙생활 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나는 것, 내 인생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을 끊이지 않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 되기 원합니다 세번째, 그의 영광과 영광의 힘을 따라 살아가기를 간구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살아가는 자입니다. 이 세상은 나의 영광을 구하며 나의 힘을 따라 살기를 원하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런 삶을 추종합니다. 그렇게 나의 영광을 따라가며 나의 힘을 따라가고 추종하는 이 세상에서 사도 바울은 기도하는 것이죠. 성도들은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하나님 영광의 힘을 따라가게 도와 주옵소서…하나님의 영광에는 놀라운 힘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 영광을 구할 때 말로 할 수 없는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부어 주신다는 겁니다. 그 영광을 보며 그 영광의 힘을 따라갈 때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는 겁니다. 내 힘을 넘어서는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주에 영광의 힘을 따라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힘을 따라 그냥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힘을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부어 주시는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을 경험하는 자들이 바로 천국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힘이 아니라 부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주님이 주시는 뜻을 행하며 주님의 기쁨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 영광의 힘을 따라 견딤과 오래 참음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겁니다. 우리 인생에는 복음을 위해 견디고 오래 참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 을 하게 되는 자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가고 있습니까? 그 영광이 힘이 여러분들을 지금 이시간 이끌고 계십니까? 사도 바울과 같이 중보기도 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게 하옵소서…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고 하나님 영광이 힘을 따라 살게 도와 주옵소서. 이 기도가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기도 제목이 될 때 매일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내 인생이 채워지며 중요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지혜를 가지고 주님의 뜻이 내 삶에 채워질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과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 지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라나며 하나님의 영광의 힘을 따라 살아가는 놀라운 은혜가 경험 될 줄 믿습니다. 계속 하나님이 나를 채우시면 변화시키며 조율시키셔서 나의 인생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 조율 되는 인생, 그래서 주님 아는 것이 자라나는 그 끊임없이 성장과 성숙을 지속해 나가는 주의 백성이 되어 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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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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