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이스라엘이 지금 아람 군대와 전쟁으로 대치 중인데 사마리아 성이 완전히 포위당 해 온 백성들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얼마 정도로 심각한 기근이 성 안에 찾아 왔냐면 그 안에서 모든 동물들을 다 잡아먹고 그것도 안 돼서 자식을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극한의 기근 가운데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최악의 기근과 어려움으로 포위당한 사마리아 성 안에 모든 사람이 몰살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그런 극도의 기근 상태에 엘리사가 무슨 예언을 하는가 하면 내일 이맘 때에 보리를 매매하고 밀가루를 매매하는 역사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역사가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 안에서 극도의 기근과 몰살 앞에 떨고 있는 백성들은 보이는 현실과 상황에 압도당하여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속된 불순종에 대한 경고에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고 자식을 잡아먹을 정도로 극도의 위기 가운데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카드는 다 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예언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 외에게는 소망 없습니다…저희를 도와 주시고 하늘의 문을 열고 기적으로 우리를 건져 주옵소서 기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엘리야의 예언을 들으면서, 눈에 보이는 상황과 현실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마치 엘리사의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농담과 같이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로 엘리사의 예언에 콧방귀도 안 뀌었는가 하면 왕의 최측근 중에 한 사람인 장관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께서 하늘문을 열고 창문으로 모든 걸 쏟아부으셔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말도 안되는 가짜, 엘리사는 말도 안 되는 예언을 통해 백성들을 혼돈하게 하고 있다고 몰아 세우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의지하지 않는 왕의 측근인 장관에게 엘리사가 이야기합니다. 네가 이 말도 안되는 기적의 모습을 보기는 하는데 그거 먹지는 못할 거야… 즉 너는 그날에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예고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백성들을 놀라게 하시며 하늘의 기적으로 먹이실 텐데 너는 그걸 보기만하고 그 기적 안에 참여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 3절부터는 그 믿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신 엘리사의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고, 누구를 통해 말씀이 풀어지는가 하면 성 밖에 있던 네 명의 나병 환자들을 통해서 입니다. 사마리아 성 안에서 포위 되어 모든 사람들이 기근과 몰살 당하기 일보직전으로 벌벌 떨고 있었지만, 그들보다 더 비참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부정하기 때문에 성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맨 앞에서 죽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병에 걸려서 부정하기 때문에 그나마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성읍 안에 들어가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성읍 밖에서 아람 군대가 쳐들어오면 제일 먼저 몰살당하는, 소위 말하는 총알받이로 성문 밖에서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문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성문 밖에서 제일 먼저 죽을 1번 타자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어떠한 기대도 소망도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 네 명의 나병 환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성문 밖에서도 소문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성읍 안에서 얼마나 비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심지어 자식을 잡아먹으면서까지 버티고 있는 것을 들으면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죽게 되는 절망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나병 환자들이 무슨 결단을 하는가 하면 성문에 들어가도 죽고 여기 앉아 있어도 죽으니까, 기왕 죽을 거면 아람 군대로 가서 항복하고 죽자고 결단합니다. 그들이 우리를 기적으로 살려주면 살려주는 거고 그들이 죽이면 죽겠다…는 마음으로 결단합니다. 마치 에스더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며 왕 앞에 나아가던 그 비장한 마음과 거의 결이 비슷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도 죽고 가만히 있어도 죽는데 차라리 아람 군대에 가서 죽으면 죽으리라…그 마음으로 투항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마음으로 나아간 나병환자들에게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그들 앞에 펼쳐집니다. 사마리아를 포위하고 전쟁에 들어갈 모든 준비를 하고 있어야 될 아람 군대가 하나도 없는 겁니다. 모든 군수품과 무기들을 버려 두고 아람의 군인들이 다 사라지고 하나도 없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인가? 아람 군대가 모두 도망간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소리를 듣게 하신 겁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아람 군대는 이스라엘이 연합군을 데려와서 우리를 죽이려 한다는 환상에 빠지게 하셔서 혼비백산하며 모든 것을 놔두고 36계로 다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계획과 이해와 머리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나병 환자들 눈 앞에서 벌어진 겁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0% 인 그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북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워 주시며 승리로 건져 주시는 역사를 다시 한번 보이시는 겁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고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께 이쁨 받을 만해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건지시고 구원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불순종하고 하나님 마음에 못을 박고, 하나님에게 큰 어려움을 주는 나쁜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긍휼하심과 불쌍함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친히 싸우시고 친히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신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일하심은 어려운 일을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을 해결하시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선 오랫동안 배가 너무 고프니까 나병환자들은 먼저 굶주린 배를 허겁지겁 채웠습니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 나니까 그들이 깨달은 게 있습니다. 저 성 안에 자식을 삶아 먹을 정도로 극한의 기근과 몰살 직전에 있는 자기 백성들이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그들을 향하여 지금 지체하지 않고 이 복된 소식을 속히 전해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져오시는 놀라운 소식, 복된 소식은 이처럼 우리를 살리는 복음이고, 몸과 마음이 너무 피곤하고 지치지만 내일 아침까지 기다린다면 안될 정도로 긴급한 복된 소식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죽음에서 헤매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리는 아름답고 복된 소식이 누구를 통해 긴급하게 전해지는가 하면, 세상과 공동체에서 소외 받고 버림받으며 총알 받이로 성문 안에도 들어가지 못했던 가장 낮은 자들, 나병환자들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입니다. 성 안에서 가장 최측근이고 힘과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장관은 엘리사의 예언을 무시하고 농담으로 알고 말을 믿지 않았던 것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던 나병환자 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만을 구하며 믿을 수 없는 말씀이 성취되는 광경을 목도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승리를 목도하고, 그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나누는 자들로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백성들에게 이렇게 불가능한 상황과 현실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건지시고 구원하시는 생명의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승리가 우리의 삶의 한 복판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십니다. 모든 음식들과 군사 장비들을 다 놔두고 군인들이 다 빠져나간 기적의 현장, 그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 직면한 나병환자들이 내 삶이 펼쳐 지기를 원합니다.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 베푸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친히 움직이심으로 기적의 승리를 주셨고,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통하여 말씀해 주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일하시는 하나님만의 승리입니다. 내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며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말씀이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내 삶에서 펼쳐지기를 열망하고, 그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나누기를 열망하는 소망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드리는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내 주변에 친한 다섯 사람이 누군가를 보면 내가 누군가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면 내가 가까이 교제권에 있는 그 사람들이 결국 나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좋은 영향이든 안 좋은 영향이든 그 가까운 주변의 친한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그 영향력을 주고 받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다니엘의 세 친구라고 부르는데, 이 세사람과 다니엘이 함께 친한 교제권에 있었다는 것을 통해 다니엘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보여주는 신앙의 수준이자 영적 현주소라는 것을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드리는 기도는 아주 본질적인 원초적인 도전 앞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만을 절하며 섬길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우상에도 절하며 섬길 것인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도전에 그들이 직면했고 그들은 그 원초적 도전 앞에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느브갓네살이 세운 신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먼저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그 금신상이 어느 정도냐 하면 30m 이상 된다고 합니다. 당시에 30m 높이로 세운 신상이란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 금으로 얼굴만 입힌 게 아니라 30m 되는 신상 전체를 금으로 다 입힌 게 느브갓네살이 세운 신상입니다. 그 화려하고 높이 세워진 신상을 통해 누가 신이라는 겁니까? 왕 자신이 신이라는 겁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이랑 왕자신을 신격화 시켜 만들어 놓은 신상이자, 자신을 높이고 높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 놓은 교만의 끝판왕입니다. 이 금신상은 하늘 끝까지 닿으려고 높이 세운 바벨탑의 교만과 똑같습니다. 인간의 죄성은 늘 하늘까지 올라가 내가 신이 되려고 하는 열망입니다. 내가 신과 같이 유사 전능성을 가지고 신과 같이 모든 권력과 지위를 가진 왕이기에 사람들은 그 앞에 절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도 힘 있는 사람에게는 가서 굽신거리고 아쉬운 소리하고 그 앞에 절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인간을 신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기에,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문제일 뿐 아니라, 그 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인다는 강요와 협박입니다. 느브갓네살 왕 앞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끌려왔는데, 끌려온 이유는 왕에 세운 금신상에 절 하지 않았다는 죄목입니다. 왕의 금신상에 사람들에게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강요와 협박으로 죽이고 파괴하는 게 바로 인간이 세운 금신상의 한계입니다. 비인격적인 대상화가 되어 거기에 절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사람을 신격화 하고 우상화 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면 반드시 강요와 협박을 통해 사람들을 파괴하고 죽이게 됩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진행하는 우상화가 정확하게 느브갓네살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으면 죽는다고 강요하고 협박하는 것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겁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모든 우상은, 자신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고 신상을 세운 모든 형상은, 이렇게 강요와 협박으로 파괴하고 죽이는 데로 나아갑니다. 지금 다니엘의 세 친구는 죽느냐 사느냐의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가짜 우상, 신격화된 왕의 금신상 앞에 강요와 협박으로 절하라는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절 하지 아니하면 너희는 죽는다는 협박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런 도전이 우리 삶에 일상으로 다가오는 도전은 아니나, 때로는 이런 도전을 직면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게 되면 늘 평화롭게 자유를 가지고 신앙 생활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다니엘의 세 친구와 마찬가지로 위험을 감수하고 목숨을 걸어야 되는 때가 훨씬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을 담보로 하는 도전 앞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담대하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나의 대답은, 우리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확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맹렬히 타는 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이게 그들의 분명한 신앙이요 고백의 기도입니다. 인간이 세운 느브갓네살의 금신상은 강요와 협박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허상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그 죽음 가운데, 풀무불 가운데 우리를 구원하시고 건지시고 살리시는 생명 주시는 분이라는 것은 기도로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리시는 하나님, 건지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도로 선포하는 겁니다. 더 귀한 고백은 18절에 등장하는데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절하지고 아니할 것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고 나를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고백, 그 능력의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지 않아도 나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겠다….이게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의 소위 말하는 마지노선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가 서 있기에 그렇지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그 우상을 섬기지도 절하지도 아니할 것이라는 놀라운 고백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의 죽음을 뛰어 넘는 기도입니다. 그러지 아니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떠나지 않겠다는 믿음의 선포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선포의 기도를 누구 앞에서 하느냐 하면 스스로 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금신상을 세운 세운 느브갓네살 왕에게 선포하는 기도라는 겁니다. 스스로 왕이 신이라고 착각하는 왕 앞에 죽으면 죽으리라는 생명을 거는 기도를 통해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은 내 목숨을 연장하는 수단 정도가 아니라 내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되는 본질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참 하나님이고 참신이시라는 그들의 고백에, 느부갓네살 왕은 얼굴이 변하여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의 분명한 믿음의 고백, 그 결과는 그들이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풀무불의 세기를 7배나 더 세게 해서 그 풀무불에 던져 넣게 됩니다. 우리는 이 뒷부분을 아니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개입하셔서 세 사람이 아니라 네 사람이 되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전혀 타지 않는 모습으로 살리시고 건지시고 구원하여 주셨다는 게 큰 감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신 게 아니라 그러지 아니하실 지라도…의 결과가 훨씬 많았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신앙을 지키는 가운데 풀무불에서 죽었고, 목 베임을 당해 순교하며 죽었습니다. 이름도 없이 빛고 없이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피를 흘렸습니다. 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죽음을 뛰어넘는 기도를 통해 대다수는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지키는 대가로 순종의 희생을 기꺼이 치른 자들입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수가 가득한 세상, 우상과 금신상이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강요하고 협박하며 파괴하며 죽이는 우상들이 이곳저곳에 가득합니다. 그 속임수와 거짓, 우상과 금신상의 홍수 속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고 고백하기 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능히 건져내시는 분, 능히 살리시는 분, 능히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분명한 믿음의 고백위에 서서 그 고백을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에스더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이 말씀이 과연 성경에 들어가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 끝까지 의심과 꼬리표가 붙었던 성경이 몇 개 있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성경이 바로 에스더서 입니다. 에스더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있었던 이유는 에스더 전체에 하나님 혹은 주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데 어떻게 에스더가 하나님 말씀이 될 수 있냐는 논리인데, 사실 에스더서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직접적으로 명시되지 않지만,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심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에스더의 기도 특징 세 가지를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그 세 가지는 뜻을 정한 기도, 금식 기도, 생명을 건 기도입니다. 첫 번째, 에스더의 기도는 뜻을 정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에스더 기도의 특징이기도 하고 에스더서 전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뜻을 정한다는 건 나와 내 가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에 내 인생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내 가족과 나만 잘된다고 끝이 아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뜻을 정하는 겁니다. 기복 신앙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몰두하고 절대적 가치를 두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착각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 괜찮으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도 상관없다는 착각이 기복주의 한계입니다. 에스더의 뜻을 정한 기도는 내 가족과 나만 잘된다고 끝이 아님을 인식하며 하늘의 뜻에 나를 조율하는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존재 이유는 그저 나 잘되고 우리 가족 잘되는 것으로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기 위한 도구임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하만이라는 사람이 계략을 꾸며 유다 민족 전체를 말살하고자 않은 음모가 진행 중인 상황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지금 유대인 전체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위기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이 위기 상황 속에 에스더에게 이 민족적 문제를 간청하기를 구했더니 에스더가 왕이 부르지 않으시니 나아갈 수 없다는 답신을 보냈습니다. 왕에 대한 주도권 싸움과 암살 시도가 늘 있어 왔기에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에게 먼저 나아가면 죽는 겁니다. 그 때에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깨우고 각성하게 하는데, 그게 바로 뜻을 정하는 기도를 하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에스더는 왕비로서 궁에서 편안히 잘 지내고 평생 안정이 보장되어 있을지 모르나 나 혼자 잘되고 문제 없는 것,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가 없고 잘 지낸다고 끝이 아니고 민족의 운명이 달린 문제들이 있는 것을 방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는 잘 지내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때 그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내 고통으로 끌어안고 기도하는게 뜻을 정하는 기도입니다. 나 혼자 괜찮으면 상관없지만 내 존재는 나 만을 위해 머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기 위해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임을 깨달으면 뜻을 정하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총기 문제도 있고, 전쟁과 테러 문제, 자연 재해, 교통사고, 질병의 문제 등등…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이런 문제들에 대부분 무감각합니다. 언제까지요? 이런 문제들이 내 문제가 되기 전까지….우리가 깨어서 뜻을 정한 기도를 하게 되면 세상에 산적한 이 많은 문제들이 나와 무관한 문제들이 아님을 인식하고, 문제들로 끌어안고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가 없고 괜찮게 잘 지낸다고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품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 사람을 바라보면 해야 할 기도로 가득한 것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자신의 안전지대를 나와서 백성의 고통을 끌어안고 그의 인생을 던지는 기도, 이게 뜻을 정한 기도입니다. 두 번째 에스더 기도의 특징은 금식 기도입니다. 기도라는 말이 등장하지 않지만 오늘 말씀에도 등장하지만 금식한다 말이 등장합니다. 그냥 살 빼려고 금식하는 게 아니라 오늘 말씀에서 금식은 반드시 금식 기도를 의미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이란 금식기도를 의미하는 겁니다. 기도라는 말이 없다고 기도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듯이, 하나님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쓰신 말씀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겁니다. 이 모든 사건 중에 보이지 않는 데서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명히 알게 하는 말씀입니다.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어떤 기도가 필요하냐 하면 힘쓰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 힘쓰는 기도가 뭐냐면 먹지 않고 기도하는 금식 기도입니다. 먹지 않고 기도한다는 건 나의 힘이 되는 음식물을 다 끊어버리고 나의 힘이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고백하며 전심으로 힘쓰는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많은 분들이 금식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기도가 이만큼 나에게 중요한 일입니다…라는 것을 고백하며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에서 금식 기도를 할 때는 특별한 기도 제목인 것과 함께 극한적인 슬픔과 애통을 나타낼 때 금식 기도를 합니다. 에스더와 함께 온 백성들이 함께하는 금식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는 힘쓰는 기도로 나아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뜻을 정하여 기도할 때 많은 경우 금식 기도로 나아가게 됩니다. 세번째 에스더의 기도는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라…에스더서 전체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생명을 걸고 결단하며 기도할 때가 인생에는 몇 번씩 있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이루시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때 보면 이 생명을 거는 기도가 늘 있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기도할 때에 내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생명을 거는 기도를 합니다. 야곱의 기도는 얍복강에서 밤새 씨름하며, 환도뼈 부상을 당하면서도 그 은혜의 끈을 놓지 않는 간절한 기도는 생명을 거는 기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에스더의 기도도 허락 없이 왕 앞에 나아가 죽게 되면 죽겠다는 생명을 거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내 목숨을 잃을 지언정 주님이 주시는 영생과 축복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에스더는 죽음을 각오하며 온 민족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네가 왕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왕후의 자리를 얻었다고 고백하는 데 주목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뜻을 정한 기도를 하면 깨닫는 놀라운 진리는 내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것이 뭐라는 겁니까? 얻은 것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물론 겉보기 봐선 이 모든 게 나의 열심의 산물처럼, 노력의 결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라는 고백,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고백이 뜻을 정한 기도를 통해 주시는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그 모든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은 뭐를 위한 것입니까? 이때를 위함…허락하신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이 때를 위해 하나님께 얻은 것들이 쓰임 받을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뜻을 정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나만 잘 된다고 끝이 아님을 깨닫게 하십니다. 내 삶을 넘어 주변 사람들과 백성들을 붙들고 뜻을 정한 기도를 하기 원하십니다. 나만 잘된다고 내 가족만 문제 없다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벗어나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것이며, 그 모든 얻은 것들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는 뜻을 정한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다 쓰임받을 때가 있라는 것을 깨닫고 뜻을 정한 기도에 내 인생을 던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모든 힘을 끊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며 나아가는 금식 기도로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함께 생명을 걸고 결단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며 뜻을 정하여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생명 걸고 결단하는 기도를 통하여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기를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을 잃어버릴 지언정 천국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생명을 건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역사를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인생에 에스더의 기도가 마음에 새겨지며 이 놀라운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반전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선명히 쓰여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하박국의 이름은 “두 손을 모으다…껴안다…붙들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그 이름대로 그 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어둠과 문제를 마음에 품고 씨름하며 그것을 놓고 눈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던 선지자입니다. 하박국 말씀을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탄식으로 부르짖는 선지자, 아무 외쳐도 주님께서 함께하지 않는 것 같은 절망 속에 탄식하며 부르짖는 기도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비슷해 보이는데 결이 전혀 다른 개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불가능한 상황과 어려운 상황입니다. 어려운 상황과 불가능한 상황은 비슷해 보이지만 결이 굉장히 다른 의미입니다. 하박국 3장이 증언하는 상황은, 탄식하며 부르짖고 떨림으로 주님께 매달리는 상황은, 단순히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오늘 말씀 3장에 등장하는 삶의 자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는 상황, 우리에 양도 소도 없는 상황은 불가능한 상황과 현실 속에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는 상황, 심은 나무들에 열매가 없는 상황은 뒤뜰에 취미로 심은 유실수에 열매가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나무들을 심어 이걸로 1년을 먹고 살아야 되는 사람들의 처절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냥 쉽게 읽어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1년의 농사와 비즈니스가 흉년이고, 삶의 모든 상황이 내 기대와는 정반대로 펼쳐지고 있는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삶의 자리입니다. 나름대로 노력했고 땀 흘리며 최선을 다한 거 같은데 손에 남은 게 하나도 없는 텅빈 인생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포도나무가 열매가 적음이 아니라 포도나무에 열매가 아예 없는 겁니다. 밭에 소출이 적은 게 아니라 소출이 아예 없는 겁니다. 우리의 양과 소가 적은게 아니라 아예 없는 겁니다. 17절이 보여주는 삶의 자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넘어 있을 수 없는 일어난 듯한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박국의 탄식은 표면적으로는 개개인의 삶에 처한 인생에 처한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로의 불가능한 상황을 의미하긴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개인을 넘어 남유다 전체에 임한 공동체적 불가능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개개인이 직면하는 불가능한 상황을 넘어 공동체 전체, 남유다 전체가 직면하는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가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대적하고 불순종할 수 있는가…도데체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 놓인 남유다를 탄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인 남유다의 부조리와 불합리와 불순종과 반역을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방법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법이었는데, 바로 남유다보다 훨씬 더 악하고 나쁜 바벨론을 들어 남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락하고 반역하고 불순종한 남유다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그럴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심판하시는 도구가 우리보다 훨씬 더 악하고 나쁜 바벨론이냐는 겁니다. 바로 잡으시려면 우리보다 좀 낫고 괜찮은 민족을 들어 쓰셔서 남유다를 치시면 회개하기도 돌아오기도 수월할거 같은데, 왜 하필 우리보다 훨씬 못하고 악한 바벨론을 들어 심판하시냐는 겁니다. 하박국 선지자로서는 이걸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겁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창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떨리고 그 썩는 것처럼 내가 뼈마디가 쑤시며 내 처소에서 내 몸이 벌벌 떨리는 겁니다. 거예요 단순히 무섭고 두려워서가 아니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 불가능한 상황 가운데 하박국 선지자가 온몸으로 탄식하는 겁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이렇게 개인적으로도, 공동체적으로 단순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넘어, 도저히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숨쉬기가 어렵고 가슴이 턱 막혀 정말 아무런 답도 없는 상황,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남유다 공동체가 직면하는 바벨론을 통해 치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환난의 예고, 이 고통스럽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하박국은 탄식으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도를 하는가 하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한다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한다는 기도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적의 힘으로 하나님만을 붙들겠다는 하박국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런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주목하고 바라보는 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때 하박국의 기도는 내가 주목하고 집중하는 것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되도록 나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달라는 선포 기도입니다. 삶의 고통과 어려움 속에 당연히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주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고 그 처한 상황과 환경이 내 기쁨과 즐거움도 내 슬픔과 눈물도 모두 지배하는 삶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불가능한 상황에서 불가능할 것 같은 하나님을 주목하고 붙들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절대 가치로 붙들고 왔다 갔다 하는 인생이 아니라 그 가운데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너무나 고통스러운 현실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바라보고 주목하는 것은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기를 지금 하박국은 처절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처한 상황이나 환경은 다 상대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 가운데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것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합니다…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상황이 잘 펼쳐지고 계획대로 되어서 내 처한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너무 즐거워하고 기뻐하지 않기를, 상황이 꼬이고 계획대로 되지 않아 내 처한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너무 낙담하고 슬퍼하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상황과 환경은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악하고 나쁜 바벨론을 통하여 남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가고 받아들이기가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에 담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완벽하신 뜻을 믿고 순종으로 나아가겠다는 고백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해서라도 당신의 나라 유다를 바르게 세우겠다는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언제나 옳습니다…고백하며 순종으로 나아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그 현실 가운데 절망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대신, 그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바라보며 살기를 결단하는 기도입니다.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 이 처한 상황과 환경이 아닌 하나님을 먼저 주목하고 바라보는 기적, 그 기적의 삶을 간구하며 선포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인생을 넘어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인생으로 나아가길 기도합니다.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절망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인생을 넘어, 어떤 상황과 환경에도 하늘에서 주신 기쁨과 즐거움을 뺴앗기지 않는 인생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먼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 그 하나님이 주신 기쁨과 즐거움을 처한 상황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빼앗기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 펼쳐지는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아갈 때, 받아들이기 불가능한 상황과 환경이 펼쳐 질 때,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이 고백의 기도는 절대 쉽게 할 수 없는 고백이며 절대 가볍게 할 수 없는 고백이며 나의 인생을 담아 고민하고 고민하며 참으며 마침내 눈물과 함께 드리는 고백이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에게는 여호와는 나의 힘이라는 이 놀라운 고백이 내 삶에 체득되고 내 삶에 내면화되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 하나님에게 주목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과 기쁨으로 내 삶이 인도함 받는 복된 삶으로 나아갈 줄 믿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너무 즐거워하거나 너무 너무 기뻐 지 않는 겁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무엇 때문에, 어떤 사람 때문에 너무 절망하거나 너무 좌절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다 상대적이고 다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내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될 본질은 내 안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하고 절대적인 은혜가 내 안에 담기는 것임을 선명히 믿고 고백할 때 이 하박국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될 줄 믿습니다.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불가능한 것 같은 현실을 버티며 주님을 바라보는 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하박국의 기도를 마음에 새겨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직면하는 불가능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늘의 것을 주목하고 하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며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과 기쁨이 머무는 선포의 기도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에 대해서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호세아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합니다. 호세아는 마음을 담은 두 가지의 큰 기도 제목이 등장하는데 여호와께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입니다.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담는 기도가 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믿으며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기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첫째로,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하나님께 돌아가고 하나님께 맞추어지고 조율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가 좋은 것은 매일매일 그걸 조율하는 것이고,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주일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 돌아가고 조율되는 것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나의 삶을 주님의 기준으로 주님의 은혜 가운데로 계속 맞춰지고 돌아가는 겁니다.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호세아의 기도를 통하여 깨닫는 건 지금 나의 현재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떠나 있으며 그 기준에서 지금 떠나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이 이끄시는 궤도에서 이탈해 떠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 돌아가자는 기도는 회개를 촉구하는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내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가 궤도를 이탈했는가? 호세야 전체를 통하여 중요한 이유를 드는데 바로 음란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야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아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 창녀와 결혼한 상태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라는 것을 선명히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드러내시는 놀라운 진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돌아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난 이유는 이 음란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음란하고 교만하다는 것을 단순히 외적인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이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려는 마음이 음란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을 세상과 겸하여 섬기려 하는 음란한 마음이 있고, 하나님에게 철저히 의존해서 살아야 되는데 하나님께 독립하려는 교만한 마음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붙들고 살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이 마음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떠나가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궤도에서 자꾸 벗어나서 살아가는데도 상관 없고, 눈에 보이는 문제만 잘 풀리면 하나님에게서 독립해도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붙들어도 상관 없다고 착각하는데 이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일이 잘 풀리는 거는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서 점점 돌아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죄를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과녁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내가 죄인됨을 고백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에게서 떠나왔고 하나님에게서 궤도가 이탈된 인생입니다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에게서 떠나왔다는 것은 단순히 위치의 개념이나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 그만큼 떠나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다는 것은 물론 눈에 보이는 위치의 개념이기도 하지만 위치의 개념을 넘어 마음이 그만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떠나왔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실존이 삶의 자리라는 것을 깨닫고 지금 내 마음이 주님 앞에 돌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란 단순히 후회나 뉘우침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궤도에서 이탈해 벗어난 상태인 것을 깨닫고 죄인됨의 인정과 뉘우침이 필요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되고 여호와께 돌아가는 게 회개입니다. 또한 여호와께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났기 때문에 내가 지금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지 않은 사람처럼 사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향력 아래 사는 삶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의 영향력 아래 사는 삶에서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로 돌아가는 게 회개입니다. 두 번째 기도는 여호와를 힘써 알자…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새벽 빛과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한결같이 우리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힘써 아는 것이 우리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맛보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내가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맛보아 알수록,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회개하는 이유는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 하나님의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에게 돌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모르면 모를수록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시는 말씀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제물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입니다. 그냥 예배와 제사 드렸다는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사와 예배에 나의 순종과 인애의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겁니다. 그 예배와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나는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맛보아 알게 되는 것, 이걸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시는 겁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맛보며 그분의 마음을 알게 될때, 늘 주님의 마음으로 조율되어 그분께 돌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새벽 기도를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과 인애의 마음이 담긴 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맛보아 아는 통로가 될 때, 큰 은혜가 임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자라나며 하나님 뜻과 영향력 아래 머물며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를 향한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놓지 않으시는 사랑 이자,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놓지 않으시는 사랑입니다. 호세아에게 고멜이라는 음녀와 결혼하여 그 가운데 자녀를 나면서도 포기하지 않게 하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정말 구체적인 나의 힘과 능력이 되어 내 삶을 적실 때 나는 주님께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붙들고 계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지금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발견할 때, 여호와를 힘써 알게 되는 것이고 여호와께 기쁨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여호와를 힘써 알자…는 호세아의 간절한 기도와 외침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을 적시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왜 하나님에게서 자꾸 마음이 떠나가고 궤도를 이탈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교만한 마음이며 하나님과 세상을 계속 같이 붙들려 하는 음란한 마음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마음이 주님 앞에 조율되어 나의 음란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내려 놓고 회개하며 궤도를 수정해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도록 부르셨는데 우리는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세상과 닮아가며 동화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그들의 음란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상과 달라져야 되고 구별돼야 되는데 달라지지 않고 닮아가고 동화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영향력 대신에 자꾸 세상의 영향력과 눈에 보이는 것들의 영향력 아래 살아가는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영향력 아래 돌아오라 외치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여호와께 돌아올 때 주시는 회복의 축복의 네 단어를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낫게 하실 것이며, 싸매어 주실 것이며 살려 주시며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세상 가운데 찢어지고 힘들고 무너진 우리에게 돌아오라 말씀하시고 여호와를 힘써 알라 말씀하시는 초대에 응답하여 낫게 하시고, 싸매어 주시고, 살려 주시며,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역사가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선조들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 나누고 있는데 오늘은 요나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사실 요나라는 선지자와 요나서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예언서들과 선지자들 가운데 매우 특이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보통 선지자들과 예언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변화시키거나 남유다 백성을 변화시키는 그들을 향한 메시지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포커스가 변화해야 할 대상이 백성들이고, 너희가 순종하고 주님께 돌아와야만 산다는 메신저로서 선지자들이 등장합니다. 반면에 요나서는 백성들에게 전해야 되는 메시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요나 선지자 자신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큰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요나 선지자 자신이 변화해야 할 대상이고, 순종하고 돌아와야만 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전하는 메시지가 중요한 것도 있지만 요나 자신이 하나님께 돌아와야만 사는 그 간절함을 알려주는 말씀이 요나의 기도인 2장 말씀입니다. 오늘 요나 2장 말씀은 요나가 죽음의 한복판에서,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주님께 은혜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속에 들어온 것은 어쩌다 운이 나빠서 불가항력적으로 들어온 게 아니라, 그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분명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 있었고 하나님이 가라 하신 곳이 있었는데 요나는 불순종하여 내가 원하는 대로 행하고 나아간 결과가 바로 물고기 뱃속이었습니다. 더 내려갈 곳이 없는 가장 낮은 곳, 가장 절박한 상황이 바로 물고기 뱃속 아니겠습니까?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이자 스올의 뱃속이 바로 요나가 처한 물고기 뱃속입니다. 고난이 찾아오니까 그곳에서 요나가 마침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오기 전에 기도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요나가 고난이 오기 전에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순종하고 주님께서 가라 명하신 그 길을 갔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어리석어서 내 뜻대로 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불순종하며 나아가다가 결국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더 이상 내려갈 것이 없는 그 밑바닥의 고난에 가서야만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의 이 이중적인 의미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도 매우 귀합니다. 안타깝게도 그게 고난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렇게 바닥으로 내려가기 전에 물고기 뱃속에 빠지기 전에 먼저 순종으로 기도하기 원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요나를 귀히 여기셨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요나는 기도하면 탄식할 때 물고기 뱃속을 스올의 뱃속으로 묘사합니다. 스올이란 죽은 자만 가는 음부를 의미합니다. 본인이 처한 물고기 뱃속은 저 깊음의 바다인 음부의 뱃속이 똑같다는 것이죠. 지금 죽음의 상황에 던져져 있음을 기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절히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느냐 들어가지 않느냐는 우리 선택이 아닌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나와 같이 불순종의 결과로 이런 깊음의 고난에 빠져드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잘못한 게 없는 거 같은데 불가항력적으로 물고기 속에 들어가는 때도 있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기에 요나의 기도를 통해 발견하는 소망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직면한 삶의 가장 밑바닥의 자리에서 상황이나 처한 환경에 주목하고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과 주의 성전을 주목하며 집중한데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생각했다는데 요나의 소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나와 마찬가지로 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주목하고 집중하는 대신, 내가 어떤 상황과 위치에 있더라도 내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고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 여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절박한 상황 그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밑바닥 물고기 뱃속에서, 상황과 환경 대신,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겠습니다…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결단하며 믿음의 저항으로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나의 믿음의 기도 그 피크는 바로 구원은 여호와께 속했다는 고백입니다. 더 이상 내려갈 데 없는 물고기 뱃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생명 의탁의 고백입니다. 주님이 살리시면 살고, 죽이시면 죽겠다는 고백, 나의 살고 죽는 모든 것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주 뜻대로 하옵소서…고백하며 모든 것을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요나의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놀라운 진리는 우리 인생의 자리나 위치보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상황과 위치와 상관없이, 내 자리와 위치와 상관 없이,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리나 위치에서도 상황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다는 요나의 믿음의 고백이자 믿음의 저항이었습니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일이며 나의 가능성이 끊어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요나의 기도입니다. 이 믿음의 기도가 결국 요나를 살리는 길이 되었고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내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나의 위치가 어딘가, 내 자리가 어딘가를 주목하며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리와 위치가 마치 나의 인생 성적표인 것과 같이 그것을 붙들고 사는 것에 올인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가 어느 자리에 있고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자리나 위치에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생각하는가 싸움을 벌이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저항이 결국 나를 살리고 나를 주님의 은혜의 자리로 이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기도를 통해 나의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조율되어 가며 나의 삶이 주님의 뜻 가운데 있음을 고백하며 주님께 철저히 맡기는 인생, 모든 것이 주님 손에 있음을 고백하며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내 위치와 자리를 넘어, 내 처한 상황과 환경을 넘어, 주님을 바라보고 주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순종으로 드리는 믿음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은혜 받기 원하는 말씀은 이사야의 소명장으로도 유명한 이사야의 기도입니다. 이사야의 기도는 소망이 사라지고 무너지는 절망 가운데,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온 삶의 자리에서 집중하고 주목하여 바라보는 것이 내 무너진 소망이나 절망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약속이 무엇인가를 붙들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내 삶의 질서가 없어지며 내가 기대하는 소망이 무너지면서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 무너진 상황과 무너진 소망, 어려움 자체에 주목하고 집중하기 쉬운데 그렇게 되면 거기서 놓치는 게 바로 하나님이 누구인가…라는 것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상황과 어려움 자체에 몰두하고 주목하는 우리들에게, 이사야의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놓치지 않고 붙드는 게 살 길임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선지자 이사야가 가지고 있었던 소망이 철저히 무너진 현장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웃시아 왕과 이사야 선지자는 사촌 지간으로 알려져 있고,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 왕족 출신으로 남유다 왕들에 대한 친밀감과 특별한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웃시야 왕은 18세에 왕이 되어 50년을 넘게 왕으로 있었으니 참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이사야 왕은 웃시야 왕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이 왕이야 말로 남 유다를 위해 특별하게 세워 줄 소망으로 여겼습니다. 이 왕이야 말로 남 유다의 소망이고 하나님이 이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거라는 기대와 소망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인생 후반전에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궤도에서 벗어나게 되고 결국 한센병에 걸려 죽게 됩니다. 오늘 이사야의 기도는 그렇게 웃시아 왕이 죽던 때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가지고 있던 소망이 사라지던 해, 이 왕을 통하여 하나님이 놀랍게 일하시겠다는 기대가 무너진 해였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모든 소망이 사라진 것과 같은 절망스러운 그때에 문제와 상황에 집중하는 것이 당연한 데, 놀랍게 누구를 집중하게 하시는가 하면 하나님을 집중하게 하시는 겁니다. 무너진 소망이나 상황에 집중하는 대신 하나님에게 집중하며 그분이 무엇을 행하였고 그분이 어떤 약속을 주셨는가를 주목하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와 영광입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은 주님을 보게 하셨고, 그 안에 놀라운 주의 영광들을 보게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무엇을 알려 주시는 겁니까? 너가 기대고 의지한 웃시야 왕이 너의 소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주목하게 하심으로, 이 땅의 왕들이 무슨 대단한 존재며 이 땅의 왕들에게 무슨 소망을 걸 수 있느냐…이사야를 깨워 주시고 찔러 주시는 겁니다. 집중하고 주목해 바라 봐야 할건 무너진 소망이나 상황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그게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선지자의 삶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기도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무너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니까 그의 입술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이 세번이나 반복되는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세 번이나 거룩함을 얘기하는 것은 온전한 찬양으로 그의 마음을 드린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 바라보며 모든 무너진 소망과 삶의 어려움은 다 상대화 되며 단 한 가지,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이 절대화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 임재 가운데 이사야는 자신의 거룩하지 못한 죄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보이면 보일수록 나의 죄됨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진짜 알았을 때 그 앞에 무릎 꿇고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한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바라보게 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함께 거룩하지 않은 나의 모습이 동시에 보여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나에게 다가오면 다가 올수록 내가 얼마나 어두운 존재이며 죄 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죄됨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입술에 숯을 대서 그 입에 모든 악을 제하며 사해 주시는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자 그의 죄가 태워지며 정결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더러운 것과 더럽지 않은 것이 닿으면 부정 타고 더러워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우리의 거룩하지 않는 삶에 닿으면 하나님이 부정해지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쌓아지고 우리의 허물이 녹아지며 거룩해지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예수님에게 닿으면 예수님의 거룩함이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게 하시며 죄를 용서해주시는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놀라운 복음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치유를 경험한 이사야의 반응이 바로 이사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내가 되기 원합니다…그의 기도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되는 소명 응답의 기도였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왕이 소망되지 못하고 무너진 그 현장에서 주목할 것은 상황과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보여주셨고 그 하나님의 거룩함이 놀랍게 이사야에게 임하면서 치유 받고, 기도 중에 그가 사명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찾아오셔서 그 가운데 소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의 거룩함을 맛보게 하시며 그에게 치유의 역사를 보여주시며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내 자신이 누군가를 알게 되며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을 통해 나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로 나의 인생이 새롭게 조율되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기도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삶의 질서가 무너지고 삶의 소망이 무너져 어려움과 문제가 생길 때, 눈에 보이는 문제와 상황과 사람들에게 집중하면 계속 포커스가 빗나가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주목하고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살 길입니다. 그 때에 우리 시선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집중할 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놀라운 이사의 기도가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드리는 복된 기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야베스는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 브루스 윌킨슨의 야베스 기도라는 책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기도하면 떠오르는 사람으로 이제 유명해지게 됐습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이 책이 많이 팔렸는데그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야베스의 기도 밑에 달린 부제 때문입니다. 그 부제가 뭐냐면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 입니다. 그래서 그 부제 때문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야베스의 기도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자리로 돌아왔고, 자신의 삶에 하늘의 은혜를 붙드는 야베스의 기도를 드리는 성도들이 많아진 것은 긍정적인 역할이라 생각됩니다. 야베스의 기도를 마음에 새기기 위해 첫번째, 야베스라는 인물 자체와 그가 처한 삶의 자리, 두번째는 그 기도 내용 네 가지를 주목하기 원합니다. 먼저 야베스의 의미와 삶의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데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상황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배울 때 그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의 상황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도가 은혜가 되고 내 마음에 담긴다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알고 기도하는 상황을 알 때 그 기도가 내 마음에 담겨 그 처한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야베스 이름은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의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두 단어인데 바로 “수고”와 “고통” 입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엄청 고생하고 고통스럽게 난 아들이 야베스이고, 이 아들을 통하여 인생의 고통과 수고가 뭔지를 알았다는 의미도 됩니다. 단순히 태어나면서 고통스럽게 태어난 것만이 아니라 피 눈물과 땀을 다 쏟으면 수고롭게 키우는 아들 딸들이 바로 야베스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수고와 고통을 체득하게 한 아들 야베스를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고 고백합니다. 귀중하다는 것은 더 존귀하다는 의미도 있고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다른 형제보다 뛰어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태어나서 자랄 때는 그렇게 수고와 고통이었는데 지나고 나니까 야베스가 다른 형제보다 너무나 존귀하고 귀한자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 말씀을 통해 주목해야 될 건 그의 어머니가 야베스의 이름을 지었다는 부분입니다. 이건 그 당시 이스라엘의 배경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식의 이름을 엄마가 짓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말씀은 의도적으로 야베스라는 이름을 어머니가 지었다고 증언하는 겁니다. 어머니가 자식 이름을 지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인데, 추측건데 아버지가 이미 죽고 없었던 유복자였던 것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야베스가 태어날 때 고통과 수고롭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야베스가 태어난 그 현실 자체가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이 유복자로 키운다는 것은 지금도 어려운데 그 당시에는 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어려움이 그와 그 가정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면 가진 것도 없고, 기댈 것도 없고 비빌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스펙도 없고 빽도 없고 정말 삶의 가시밭길이 펼쳐 있는 인생이 뭐냐면 야베스의 삶의 자리였던 것입니다. 이런 삶의 자리는 단순히 야베스 개인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야베스와 같이 마치 하나님 아버지가 안 계신 분처럼 사는 겁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안 계신 분처럼 살아가는 유복자처럼, 영적인 고아 같은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영적 현실일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야베스의 삶의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그 수고와 고통이 내 마음에 전달되면서 이 기도를 배울 때 야베스의 기도가 나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인 야베스와 그의 기도하는 상황이 마음에 담기면 그의 기도가 더 구체적으로 나의 마음에 담기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에 야베스의 부르짖는 네 가지 기도가 등장합니다. 이 네 가지 기도를 마음에 품고 돌아가시기 원합니다. 첫번째,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복을 나는 놓칠 수 없고 하늘의 복이 없으면 나는 죽는 인생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겠습니까? 복을 주시면 좋고 안 주시면 할 수 없고요… 이게 아니라 주님 하나님의 복 저 없으면 죽습니다. 그 간절함과 벼랑 끝에서 하는 절박함으로 부르짖는 기도였다는 것을 우리가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이 간절함과 절박함이 묻어나는 삶의 자리와 삶의 상황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우리가 간절하고 절박하게 기도하고 절박하게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거면 가서 하면 되는데, 우리 기도의 많은 부분은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야베스의 절박하고 간절한 삶의 자리에서 부르짖음과 같이, 우리의 수고와 고통이 가득한 삶의 자리에서 하늘의 복을 구하며 기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부르짖을 수 있는 이름이 있으며 붙들 수 있는 이름이 있으며 비빌 언덕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으며 절박함과 간절함 가운데 하늘의 의를 구할 때 우리 삶에 기적으로 채워지는 기도가 담길 줄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나의 지경을 넓히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것은 나에게 살 땅을 좀 더 많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다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지경이라는 건 내가 하늘의 복을 받으며 구할 때 부어 주시는 기도로 품는 영향력을 넓혀 달라는 기도입니다. 처음에 초신자로 신앙 생활할 때는 나의 지경이 나와 나의 가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의 모든 감사와 기쁨도 슬픔도 눈물도 기도 제목도 다 나를 위한 거고 내 가족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의 지경이 넓어지면 내가 기도하는 영향력과 품는 범위가 넓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단순히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회 성도들을 품고, 이 도시를 품고, 선교지와 온 열방을 위해 내가 존재하고 있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냥 나 먹고 살기 위해서만 돈을 버는 게 아니라 지경을 넓히기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재물을 주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상황은 수고과 고통이었고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순히 자신의 삶의 어려움을 풀어 달라고만 기도한 게 아니게 그 수고와 고통을 넘어 나의 지경이 넓어지기 원한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왕 한 번 살아가는 삶, 나 만을 위해 그냥 아둥바둥 사는 삶을 넘어 하나님의 비전과 시각으로 영광스럽게 살기 원합니다…말씀 가운데 제대로 살기 원합니다… 그 마음으로 야베스가 지경을 넓혀 달라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주님의 손은 주님의 인도하심과 주님의 보호하심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으로 임하시는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구하며 기도하는 겁니다. 이 험한 세상, 죄로 물든 세상, 사단 마귀의 권세가 자꾸 흔드는 세상에서 내가 승리하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기도로 하늘의 복을 붙들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의 손 아래 머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주님 손 아래 머물며 나의 삶에 주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나에게 함께하심을 믿으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내 삶의 수고와 고통을 당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환란을 벗어나게 하시며 근심이 없는 삶으로 나를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수고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내 절대 가치가 되지 않아야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고통과 아픈 삶 가운데 머물기를 원하시는 분이 아님을 믿고 내 상황과 삶의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 수고와 고통의 삶의 자리에서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그만 아프자… 여러분들을 붙드시고 건지시고 근심이 없는 삶으로 인도하시며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그 은혜가 나에게 있음을 믿음으로 기도하며 선포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야베스의 기도가 내 삶의 자리에서 동일하게 풀어지며 역사하는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내 삶 속에 기적의 기도의 원리가 되는 이유는 단순히 기도가 열심이었다는 것을 넘어 그의 기도가 이처럼 처절함과 간절함, 절박함이 녹아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고통과 수고가 가득하며 야베스 같이 기대고 비빌 곳이 아무것도 없는 삶, 가진 것도 스펙도 빽도 없는 나의 삶 가운데 하늘을 향해 간절하고 절박하게 부르짖기 원합니다. 주님 하늘의 복을 부어 주시옵소서. 나의 지경을 넓혀 주시옵소서. 주님의 손으로 나를 도와 주시옵소서.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이 네 가지를 마음에 품고 오늘 이 시간 간절히 기도하기 합니다. 주여 나에게 하늘의 복을 부어 주셔서 이제는 그만 아프고 이제는 나에게 근심이 없는 삶으로 인도하여 주소서…간절히 부르짖기 원합니다. 동시에 고통과 수고를 넘어 나의 기도 제목이 넓어지기 원하고, 나의 영향력이 넓어지기 원하고, 나의 지경이 넓어지기 원합니다. 나의 기도의 지경이 넓어지며, 선교의 지경이 넓어지며 내가 품고 영향력을 주는 지경이 넓혀지는 특별한 인생으로 부름 받기를 사모하며 주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주님께서 주시는 그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를 붙들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 야베스의 간절하고 절박하게 구하는 기도가 응답되어 내 삶이 기적으로 채워지는 그 야베스의 기도 축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풍성히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여호수아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복해야 하는 땅 중의 하나이나, 거짓과 속임수로 화친을 맺게 된 기브온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치 멀리 사는 백성인 것처럼 꾸미고 거짓말해서 화친 조약을 맺고 보니 근처에 사는 백성들이어서, 찜찜한 마음 가득했던 백성이 기브온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주변 나라들이 침공으로 어려움에 처하니까 그 화친 조약을 근거로 도와 달라고 부탁의 손을 내민 것입니다. 구해주고 도와달라고 급하게 카톡 메시지를 보낸 것입니다. 이 기브온 백성들을 도와주고 목숨 걸고 전쟁에 나가 싸워줘야 하는가에 대해서 백성들과 이스라엘 지도자들 사이에 반대 의견들이 많이 있었을 것을 쉽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왜 그렇게까지 목숨 걸고 기브온 사람들을 도와야 되느냐? 그들은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거짓과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정복하지 않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속이고 거짓으로 와서 화친한 것도 그냥 넘어갔는데, 정복 안 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지 그 이상을 바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우리에게 거짓말로 속여서 화친 조약을 맺은 저 백성들을 위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전쟁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까? 반대하는 의견들이 굉장히 많았을 것이라는 게 어찌보면 당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화친 조약이었기에 기브온 백성들을 지켜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믿은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것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신 응답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이 전쟁에서 함께하시고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님은 우리 기도를 응답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며 승리를 주신다…로 끝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를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그렇게 거짓과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화친 조약과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하나님께서는 지켜 주시는 겁니다. 그 이유는 기브온 사람들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기브온 백성들은 율법의 기준으로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는 게 당연한 소망 없는 백성이었습니다. 이렇게 거짓과 속임수로 약속한 언약에 목숨 걸지 않아야 될 이유가 수백가지가 되는 이 백성들조차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에 얼마나 신실하신 우리에게 보여 주심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이 언약의 성취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를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건진 받은 주의 백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언약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가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이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깨닫고 사는 것이 성도의 능력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을 붙들고 하는 기도가 얼마나 놀라운 능력이 되는지를 깨닫고 사는 것이 성도의 능력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브온 백성들입니다. 나를 봤을 땐 죽을 수밖에 없고 죽는 게 당연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계속해서 사단의 미혹의 소리가 들어옵니다. 너 같은 사람은 구제해줄 필요도 없고 구원받을 자격도 이유도 하나도 없다…너를 봐라 하나님이 뭘 봐서 너를 구원해주고 사랑해 주시겠냐…라는 미혹의 소리가 계속 들어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제껏 살게 된 것도, 천국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부어 주시는 언약의 성취라는 것을 철저히 붙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그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며 그 전쟁에 친히 개입하시며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을 내리셔서 전쟁 중에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으로 죽은 자가 더 많게 하시면서 적국인 아모리 사람들을 패하게 하십니다. 이 우박은 하나님이 개입하신 초자연적인 역사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전쟁에 참여했고 최선을 다해 전쟁에서 싸웠지만 그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바로 그 유명한 여호수아의 기도인데, 여호수아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을 멈추시 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여호수아의 전무 후무한 믿음 기도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태양과 달에게 멈추라 선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수아의 기도를 그냥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자연법칙을 거슬러 태양과 달을 멈추게 하셨다는 데에만 머물면 안됩니다. 여호수아가 놀라운 기도는 태양와 달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적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선포기도 입니다. 그들에게 해와 달을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선포라는 것을 믿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멈추게 하신 건 그들이 믿는 해와 달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일 뿐이며, 그것을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이 기적을 통해 선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태양과 달은 섬기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놀라운 기도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승리를 믿었고 그 승리를 위해 해와 달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언약을 붙든 기도를 우리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여호수아는 그 건져줄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기브온 사람들을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아모리 족속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그 약속의 신실함을 지키기 위해….나를 바라보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상황을 바라보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함을 믿고 고백하는 기도로 나아가기 원합니다. 나를 바라봤을 때,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바라봤을 때는 죽을 수밖에 없고 죽는 게 당연한 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함,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가를 붙들고 하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반한 약속의 기도를 하십시오. 그 약속의 신실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도우시며 보호하시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이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바라기는 2024년 한해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신실함 가운데 내가 서 있음을 믿으며 나의 부족함과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언약의 신실하심을 분명히 믿으며 힘있고 선명하게 살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요게벳의 기도에 대해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요게벳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 요게벳은 출애굽의 영웅이자 하나님께 쓰임받은 놀라운 지도자 모세의 친모, 어머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으며 아이에게 이름도 지어줄 수 없었던 눈물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요게벳의 기도를 기초로 유명한 찬양 하나가 알려졌는데 바로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입니다. 이 찬양이 제가 알기로는 유튜브에 한글로 된 찬양 중에 가장 조회수가 많은 찬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5 M, 즉 1500만 명 이상 유투브에서 시청을 찬양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찬양이 유명한 이유 중 하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요게벳과 같은 사람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 동영상 밑에 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요게벳과 같은 엄마와 아빠의 절박한 눈물의 기도 제목들이 댓글로 달려 있는데 읽어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뭉클한 지 모릅니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누군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이 시대에 요게벳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눈물과 아픔이 그 찬양과 함께 깊이 녹아 있어 요게벳의 노래라는 찬양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기도를 통하여 도전하는 세 가지의 믿음의 기도 특징을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첫 번째 요게벳의 기도 특징은 왕명을 거절하면서도 목숨 걸고 아기 모세를 지켜내려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애굽 전역에 바로의 명이 떨어졌는데, 히브리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는 명령입니다. 그 당시에 바로왕의 명은 왕의 명령이자 동시에 신의 명령입니다. 신의 명령을 거절한다는 것은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그 어느 누구도 왕명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의 명령과 같은 왕명을 목숨 걸고 거절하고 저항하여 이 아이를 지키려는 몸부림이 바로 요게벳의 기도였습니다. 왕명을 거절하는 대가는 목숨이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놔야 되는 그 절박한 상황이었는데 세 달 동안 그 왕명을 목숨을 걸고 거절하는 겁니다 세 달 동안이 이 아이를 숨기며 목숨걸고 지켜내려는 어머니의 눈물이 요게벳의 기도입니다. 그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달 동안 그를 숨겼다고 증언하는데, 잘 생겼다는 것은 신생아의 외모가 잘 생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를 하신 후에 이 세상이 보기 좋았다 말씀하시는 그 말씀과 동의어입니다. 왕명에 따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그 창조의 섭리를 그 가족은 보았기에 목숨 걸고 대가를 치르며 지켜내려 하는 겁니다. 바로 왕으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명령이라는 것, 이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흐름 속에서 자녀들을 지켜내는 것,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세상의 명령을 거역하면서도 우리 아이를 지켜내는 것은 목숨 거는 대가를 치르고 지켜내는 큰 일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저항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그게 바른 길이 아니고 망하는 길이고,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고 선포하며 저항하는 것, 그것이 요게벳의 기도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요게벳의 기도의 특징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기도입니다. 세 달이 지나자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시점이 그들에게 찾아왔습니다. 더 이상은 숨길 수도, 더 이상은 내 힘으로 지켜낼 수도 없는 상황이 찾아왔을 때, 요게벳은 믿음으로 결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죽음과 동일한 그 나일강의 물에 이 어린 아이를 떠나 보내야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요게벳은 떠나 보낼 때 아기 모세를 위해 갈대 상자를 만들고 역청으로 칠합니다. 역청으로 칠하는 것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칠했던 것과 동일한 것으로, 역청이란 세상으로부터의 죽음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갈대상자에 아무리 역청을 잘 칠했다고 뭐가 분가 되겠습니까? 그 어머니의 마음은 더 이상 숨길 수 없기에 신생아를 거의 죽음의 현장에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겉으로 봐서는 갈대상자에 역청을 칠해 그 아이를 나일강에 떠나 보내는 것은 마치 아이를 포기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겁니다. 그러나 요게벳의 단장의 마음으로 고백하는 기도는 이 아이를 포기하는 게 아니고 강에 떠나 보내면서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 주인이고 참 부모이신 하나님 그 손에 너의 삶을 드린다…는 눈물의 고백으로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로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그 절박한 상황, 더 이상 숨길 수 없고 더 이상 해 줄 수 없는 그 벼랑 끝에서, 요게벳의 기도는 포기의 기도가 아니라 나의 할 수 없음을 철저히 인정하며, 갈대 상자 안에 아기를 떠나 보내면서 하나님의 손에 이 아이를 맡기는 것입니다. 세번째, 요게벳의 기도의 특징은 내 한계와 소원을 넘어서는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 맡긴 요게벳의 간절한 기도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사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요게벳의 기도를 들어 사용하셨고 죽음의 강 나일에 어린아이를 보내는 그 어머니의 눈물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아이를 기적과 같이 건져 주셨습니다. 이 아이는 바로왕의 공주의 손에 건짐을 받게 됩니다. 율법의 기준과 애굽의 기준으로는 이 아이는 당연히 죽어야만 되는 아기입니다. 바로왕의 공주는 이 아기가 죽어야 하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인 것을 알았습니다.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서 이 아이는 죽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아들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기준과 율법의 기준이 아닌 불쌍히 여김으로, 은혜의 기준으로 그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게 되는 겁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아이가 오직 은혜로, 오직 불쌍히 여김으로 건짐을 받게 되는 겁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 모두는 다 물에서 건짐 받은 모세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기준으로는 예외 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죽음에서 건짐은 받은 자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요게벳의 상상을 뛰어 넘는 일로 역사하셨는데, 그게 바로 모세의 유모가 되게 하시는 것이죠. 갈대상자를 떠나 보내면서 이 아들 맡겨 드리니 목숨만 살려주세요…그게 그 어머니의 유일한 기도였지 이것을 놓고 요게벳은 한 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 엄마가 유모가 되어 그 아이를 위해 계속 기도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도록 인도하신 것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가 장성해서 갈대 상자에 보내기도 하고요, 여러 가지 다른 이유로 자녀들을 보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자녀들은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요게벳의 심정으로 그 아이를 떠나 보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우리 자녀들을, 손자 손녀들을 내손으로 어찌할 수 없어 떠나 보내야 하는 요게벳의 심정으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갈대상자에 만들어 나일 강에 떠나 보내는 요게벳의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심정이라 믿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내가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그 상황 가운데 이 아이를 참 부모이시고 참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심정으로 요게벳과 같이 눈물로 기도하며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그 상황 속에서, 눈물 뿌리며 주님 앞에 기도로 아기를 보내며, 참 주인이시고 참 부모이신 주님의 손에 맡기는 그 요게벳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게벳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 사용하셨듯이 저와 여러분들의 간절한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죽음의 강에 어린아이를 보내는 그 어머니의 눈물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아이를 기적과 같이 건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 어둠과 죽음의 나일 강 한 복판에서 은혜로 불쌍히 여김을 받아 죽음에서 건짐을 받고 주님의 놀라운 손에 맡겨지는 그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며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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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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