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난해하고 어려워 신비롭기까지 한 욥기의 기도에 대해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욥기가 왜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는 성경이라 생각하는데 사실 욥기에서는 왜 욥이 그렇게 이유없는 까닭없는 고난을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설명이나 해석은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을 빈 공간으로 만들어 앞으로 계속 두고두고 우리가 고민해야 될 숙제임을 증언합니다. 잠언과 전도서는 결이 굉장히 다른 성경 말씀입니다. 잠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놀라운 진리는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 난다는 conditional blessings의 원리입니다. 매일매일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진실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응답으로 이 세상에서 축복 많이 주신다…는 이 원인과 결과로서의 삶의 원리가 잠언을 통해 우리에게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과 달리 전도서는 소위 말하는 콩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난다는 인과응보의 일반적인 삶의 원리로는 해결되지 않고 담을 수 없는 수많은 모순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예외적으로 계속 일어난다는 것을 지혜로 알려줍니다. 분명히 콩을 심었는데 콩이 안 나고 이상한 게 나오고 나는 씨만 심었는데 가라지만 무성하게 나오고 나는 열심히 산 거 같은데 계속 내 삶에는 쓴뿌리만 계속 올라오는 이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로는 설명되지 않는 깊은 고뇌와 갈등 속에 욥과 같이 탄식하는 마음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욥은 의인이고 거룩하고 온전한 사람, 하나님과 사람에게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온전한 욥의 인생은 탄탄대로가 열려야 하고 뻥뻥 뚫리는 인생이 되야 당연할 거 같은데 욥의 인생에 이해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며 죽음의 고비가 한꺼번에 그에게 닥쳐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갑자기 모든 재산이 사라지고, 한꺼번에 자녀들이 한 사람도 아니고 모두 몰살 당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욥 자신도 병에 걸려서 끔찍하고도 혐오스러운 병에 신음하게 됩니다. 욥의 인생에 찾아온 이런 말도 안 되고 이해가 되지 않고 까닭이 없어 보이는 이런 고난을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이유는 욥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성도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아무런 이유와 원인 없이 겪은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을 실제로 경험하고 직면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게 우리의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욥이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이 설명을 한다고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욥의 부인인데, 욥의 부인은 하나님 저주하고 죽으라고 소리칩니다. 그게 까닭없이 당하는 고난 가운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택하는 선택지입니다. 설명되지 않는 고난 속에 힘들면 그냥 하나님 저주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을 원망하다 안 되면 하나님 저주하고 죽음을 도피처로 삼아 죽어버리는 겁니다. 죽음을 내가 선택하면 그 고통이 끝나는 것처럼 착각하도록 이 욥의 부인과 같은 선택지를 계속 내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번째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인데 끝까지 욥의 설명될 수 없는 고난을 인과응보라는 자기들의 논리로 계속 설명하려는 겁니다. 까닭없이 욥이 고난을 당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네가 뭔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이 벌을 내리신 거지… 그러면서 계속 너에게 죄를 고백하라고 집요하게 파고들며 압박합니다. 이 두 가지가 설명되지 않는 고난 가운데 우리가 직면하는 대표적인 반응들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든지 아니면 끝까지 나에게서 원인을 찾아 그 원인과 결과를 가지고 계속 나를 힘들고 하던지…. 그런 가운데 오늘 말씀에서 욥이 마음을 쏟아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간절히 기도하는데 첫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앞으로 가도 하나님이 안 계시고, 뒤로가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토해내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계신다면 이렇게 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우리 인생에 이런 기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시애틀에는 비가 많이 옵니다. 비가 많이 오면 해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아무도 해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해는 여전히 같은 위치에 있는데 그 사이에 먹구름이 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럴 때 해가 숨어있고 가려져 있다고 느끼는 해의 부재….그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욥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 걸 분명히 아는데 하나님과 나 사이에 가려진 환경과 고난의 먹구름으로 말미암아 비로 말미암아 그 한결같으신 해와 같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 가운데 찾아올 때 원인/결과로 설명되지 않는 고난이 우리를 엄습할 때 우리눈 앞을 캄캄하게 만들어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거와 같이 착각하게 만들며 이런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신 거예요…하나님 계시다며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성경은 그렇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토하는 것을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평을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는 하나님 외에는 도움이 없다고 고백하는 마음으로 품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욥의 기도는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기도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한 같은 그 갈길 몰라 헤메는 때, 내 논리와 생각으로는 담기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지금 자신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삶이 너무 힘들면 내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내 인생길을 나도 모르고 헤멜 때, 고난과 역경 가운데 숨쉬기도 어려운 때에 나는 갈 길을 모르나 하나님은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고 고백하는게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거 같은데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하시고 나의 길을 아신다는 것을 기도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번 째 욥의 기도는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같이 되어 나온다는 기도입니다. 순금이란 불순물이 모두 제거된 상태의 금입니다. 내 삶이 단련되어 순금과 같이 내 삶에 찌거기들과 불순물이 다 제거되는 것입니다. 선명하고도 분명하게 하나님하고 나와의 관계만 남는 것입니다. 그 불순물이 제거되며 순금과 같이 나아오게 될 때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직면하게 하십니다. 이 창조의 신비를 욥이 직면하게 되면서 욥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냥 받아들이는 거 외에 아무런 원인과 결과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왜 시작됐는지 내 인생이 왜 시작됐는지 원인과 결과가 나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거 외에는 이 세상이 시작된 것도, 내 인생이 시작된 것도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응보로 설명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을 전적으로 받아들임으로 내 인생이 존재함을 믿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게 하신 이 세상은 하나님이 책임지시듯이, 내 인생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심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 가운데 여전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고 하나님에게 다가오는 도구가 되느냐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을 끝까지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이것에 제일 중요한 것임을 깨닫는게 내가 정금같이 되는 겁니다. 내 인생의 불순물이 제거된다는 것은 나에게 원인을 찾으려는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겁니다 그리고 오직 나와 하나님만 남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욥이 결론적으로 나는 주에 대해서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제는 눈으로 주를 본다 고백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고 그걸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갑절로 회복하여 주신다는 것이 욥기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것들이 원인과 이유가 없이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답이 없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좋은 일들도 마찬가지고 나쁜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에 이유와 원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가 없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거면 하나님이 책임진다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느냐…물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의 자녀가 길을 가다가 넘어졌습니다. 어렸을 때는 얼른 뛰어가서 일으켜 세워주며 괜찮냐고 묻는게 부모입니다. 근데 아이가 커서 열살이 넘었는데 애가 넘어졌다면 달려 가서 부모가 세워주지 않고 더 큰 사랑을 줍니다. 그건 바로 아이가 넘어졌을 때 기다려 주고 지켜봐 주는 겁니다. 스스로 일어나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이렇게 컸습니다 얘기할 수 있을 때 까지 지켜 봐주기만 하는 겁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넘어지자마자 얼른 오셔서 우리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 주시고 괜찮냐고 물어보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더 큰 사랑을 주실 때가 있어서 내가 넘어졌는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반응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안계신게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으로 지켜보시고 바라보시는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스스로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시며 박수 쳐주시는 그 큰 사랑이 나에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전히 우리의 삶은 해답이 없는 미궁의 수많은 일들을 우리가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슬픔이 찾아오는지 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오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계시며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고 나의 가는 길을 주님이 아심을 고백하며 내가 순금과 같이 나오는 이 욥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 are closed.
|
아카이브
5월 2024
카테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