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브라함의 중보 기도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중요하게 붙들어야 되는 삶이 찬송과 감사의 삶입니다. 그 찬송과 감사의 삶은 바로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나의 인생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으로 인하여 찬송하고 감사하는 삶입니다. 잠시 살아가는 나의 인생을 그냥 흘러가게 두지 아니하고 그 인생의 마디를 끊어서 감사와 찬송으로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두며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역사하시는 마디를 만들어 끊어야 높이 올라가고 멀리 가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도에게는 여러 가지 특권과 의무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중보기도입니다 특별히 나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넘어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이 세상을 축복하는 중보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중보기도를 통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를 깨달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보기도를 통해 주변 사람들과 이 세상을 품고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나아가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중보기도를 통해 그렇게 나의 신앙이 자라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천사들을 통해 아브라함은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goods news와 bad news를 동시에 듣게 됩니다. 내년에 약속의 아들이 태어난다는 좋은 소식과 함께 죄로 말미암아 소돔과 고모라가 곧 멸망할 것이라는 것도 알려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의 일을 남의 일과 같이 생각하고 그냥 자신의 개인적인 축복, 내년에 태어날 약속의 아들의 좋은 얘기만 붙들고 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의 좋은 소식을 붙들고 좋아하는데 머문 것이 아니라,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심판이 임박한 소돔과 고모라를 앞에 두고 아브라함은 간절히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좋은 일들이 있고 축복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 주변에 사람들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위해 정말 이렇게 간절히 매달릴 수 있는가? 아브라함이 바로 그랬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도의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오늘 말씀의 대부분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향하여 이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중보기도입니다. 아브라함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99%의 사람들이 악인인 그곳에 1%의 의인이 있다면 그 의인으로 인하여 용서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간청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이 중보기도 중에 등장하는 남은 의인들과 악인을 정확하게 성경적으로 정의하는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의인이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악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의인과 악인을 계속 그 사람의 행동이나 삶을 통해 나누기 쉬운데 그게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절대적인 가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성경은 강조합니다. 성경적으로 정의하는 의인은 누구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는 자들 입니다. 악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 보혈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 의인과 악인의 정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씀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진멸되는 사건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지고 그 성 안에 모든 사람들이 죽었는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한 가정은 누구냐 하면 어린 양의 보혈 아래 있었던 라합의 가족들 이었습니다. 그 한 가정만이 의인이었고 나머진 다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보혈 아래 있었기 때문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의인인 것은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내가 새벽기도하고 헌신하고 주님께 내가 이 정도면 잘 살아서 내가 의인인게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것을 항시도 잊지 않는게 복음에 충실한 믿음입니다. 내가 의인 되는 것은, 내가 천국 백성 된 것은 나로 말미암아가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은혜의 사건이며, 내가 그리스도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있기에 받게 된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의인 50명이 있으면 그 의인들로 말미암아, 그 의인들을 위하여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않으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와 같이 멸망을 향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멸망하지 않고 잘 살아남아 있는가….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전히 남아 있는 의인들로 말미암아 그들을 위하여 멸망을 미루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하는 멸망을 미루시는 이유는 그 의인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눈에 보이는 99%는 이렇게 문제가 많고 타락과 멸망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것을 미루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이 남은 자들, 이 의인들을 바라보시고 용서하시고 심판을 미루고 계신 것입니다. 의인을 우리가 배웠던 열왕기서에서는 남은 자라고 말합니다. 남은 자들이란 이 세상 가치관에, 바알 우상에 무릎 꿇지 않고 절하지 않고 입맞추지 않은 자들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함께 교제하며 천국을 분명히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바로 의인이라는 것이죠. 그들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아지가 멸망하지 않고 그들로 말미암아 여전히 기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 이 시간 주님께 환영받는 이유도 정확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의롭다 칭함을 받아 의인으로 여겨지면 천국가는 이유도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 솔직히 저와 여러분들이 천국 갈 만한 자격과 조건이 정말 있으십니까? 우리는 그런 자격과 조건이 정말 하나도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같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과 조건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 내가 어떻게 천국 가는 것을 그렇게 확신합니까? 왜냐하면 천국은 나로 말미암아 나의 어떠함으로 가는 곳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으로 가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닏.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을 보시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 던지지 아니하시고 멸하지 아니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이유의 본질은 나 때문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붙들고 살아갈 때 우리는 은혜의 믿음의 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자랑할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밖에 없구나… 이것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가 은혜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아브라함의 간절한 중보기도는 50명에서 시작해 숫자가 줄어갑니다. 근데 아브라함이 열 명만 있어도 내가 소돔과 고모라 멸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10명에서 기도를 멈추게 됩니다. 왜 아브라함이 10명의 기도해서 멈추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브라함 생각에 소돔과 고모라가 이렇게 멸망으로 달려가도 적어도 내가 자식같이 키웠던 롯과 그 가족들은 의인이고 남은 자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롯과 그 가족들 때문에 이 도시는 멸망하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이 정도면 됐다 생각하고 의인 10명에서 멈췄다는 것입니다. 근데 아시겠지만 그 아브라함의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것이죠. 자기와 함께 먹고 지냈던 롯과 가족이 믿음의 가족이고 다 의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틀렸다는 것이죠.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교인이기 때문에 모두 의인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의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분별해야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함께 신앙생활했던 모든 성도들을 천국에서 100% 다 만나볼 자신이 있으십니까? 내 생각에 분명히 그럴 거 같은데 다 천국에서 만나볼 거야라고 우리는 생각하고 확신하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은 무겁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착각했듯이 그게 우리 착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천국가는 문제, 구원받는 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되고, 당연히 교회 나오면 가는 거라 생각하면 안되고, 예수님 앞에 단독자로 서서 거듭나야 하고 분명한 믿음의 고백으로 그 이름을 붙들어야 합니다. 간절히 구원을 놓고 기도해야 되며 내가 남은 자로 언제나 주님 앞에 서서 가는 이 신앙생활을 경주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며 주님 앞에 바 로서는 이 삶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이유도,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유도 동일하게 이 의인이 없어서라고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가 죄가 너무 많아서도 멸망했지만 그것을 막아설 의인들이 없기 때문에 중보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멸망시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놓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는 그 중보기도의 열망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회복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넘어 내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며 특별히 죄가 관영하여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이 세상을 향하여 간절히 기도하고 부르짖는 기도 소리가 우리 안에 채워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냥 나만 잘 먹고 잘 지내고 우리 가족은 문제없는 그런 삶을 넘어서서 나를 통하여 이 세상이 망하지 않고 이 세상에 죄를 막아서는 사람으로 중보기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명히 붙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이름을 붙들고 간절히 중보기도하는 것을 통해 여전히 이 세상이 돌아올 기회를 얻고, 내 주변 사람들이 돌아올 기회를 얻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실제로 믿고 살아가는 것, 그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내 삶을 넘어 내 주변 사람들과 우리 교회가, 이 세상이 나로 말미암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기도로 부터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지탱하고 지키는 힘, 내 주변사람들을 지탱하고 지키는 힘이 하늘로부터 오는 힘이며, 그 부어 주시는 힘은 중보 기도의 힘임을 믿기에 우리는 중보기도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가 기도가 나를 살리고 우리 가정을 살리고 우리 교회를 살리며 이 세상을 살리는 비결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주님 앞에서 선명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50편 중에 2/3 이상이 탄식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과 어려움과 환란 가운데 주님 그리고 부르짖고 살려달라고 간구하는 기도가 시편의 2/3이라는 것이죠. 특별히 오늘 107편 말씀은 힘들거나 어려울 때, 주님 앞에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자주 찾아서 읽는 시편중 하나입니다. 시편 107편의 큰 주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드리는 예배 본질이 감사와 찬송이고요. 일상생활에서 성도가 사라가는 방식이 바로 감사와 찬송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뭐냐면 살아가는데 있어 그냥 살아가는 삶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입니다. 살아가면서 나에게 집중하는 삶과 하나님께 집중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감사와 찬송은 우리가 성도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자 특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감사하고 찬양하는 삶을 사는데, 그 감사와 찬양의 본질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두 가지로 아주 명확하게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본질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송의 본질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 고백은 여러분들이 이번 특별 새벽 기도회 가운데 꼭 마음에 담아 새기면 좋겠습니다. 나의 감사 첫번째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함을 감사합니다. 나의 찬송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내 인생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찬송합니다.우리가 성도로써 이 두 고백을 붙들고 정말 감사하고 정말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때 이 말씀이 실체로 우리 삶에 풀어지고 역사할 줄 믿습니다.
오늘 107편 시편에 감사와 찬송 가운데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호와의 인자하심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찬송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내 인생을 돌아보고 내 인생의 현주소를 직시해보면 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히 나에게 부어지고 그 인자하심이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으로 나에게 찾아올 수 있는가? 그건 나의 어떠함으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부어진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감사하고 우리는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삶의 여러 굴곡과 어려움 가운데, 고통과 고난 가운데, 나의 인생이 나의 어떠함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 같이 보이는 나의 인생 가운데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어떠함에 따라 내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좌지 우지 되면,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의해 좌지 우지 된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나의 어떠함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백할 때 주님 앞에 나와 감사드리고 주님 앞에 찬송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여러분들을 깨우시는 세미한 음성일 줄 믿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것은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나의 인생이 달려 있음을 믿으며 그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인생을 맡기고 의탁할 때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기적을 베푸시고, 놀라운 역사를 풀어내실 줄 믿습니다. 오늘 시편 107편에는 여러 가지의 삶의 탄식 사이사이에 이 고백들이 마디와 같이 반복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이 말씀이 계속 반복됩니다. 8절에도, 15절에도, 21절과 31절에도 마디와 같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나의 인생에서 이 시편을 적용한다는 건 내 인생을 그냥 흘러가도록 두는게 아니라 반복되는 선언과 같이 내 인생의 마디를 두고 매는 겁니다. 마디를 매서 나의 인생에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내 인생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는 마디를 두고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행하시는 기적에 가장 중요한 첫번 째는 바로 2절에 등장하듯 여호와의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값을 주고 구원받았다는 의미로,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속량 받은 자들입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에 행하신 기적의 첫 번째입니다. 내 인생의 가장 놀라운 기적의 첫 번째 뭡니까? 예수 보혈로 내가 천국 백성되고 구원받은 것이죠. 그것이 내 인생에 첫번 째 기적 됨을 고백할 때 구원받음이 내 첫번째 감사와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꼬이고 안 되고 막혀 있을 때 첫 번째로 돌아오는 본질이 뭡니까?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 받은자…주님께서 핏값 주고 사신 존귀한 존재야… 여기서부터 여러분들의 기적이 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것을 붙들고 늘 시작점으로 돌아와서 다시 새 출발하는 겁니다. 그 속량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은 대적의 손에서 나를 건지시고, 사단 마귀의 손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이 세상의 거센 흐름에서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붙들 때 이 시간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서 마치 광야 사막길을 지나듯 방황하고 헤메게 됩니다. 광야 사막길에서 헤메고 방황하는 인생 그게 우리 인생길이죠. 사막을 가보시면 사막에는 길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을 가다보면 바람이 막 불어서 내가 온 길이 다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있는 거 같은데 실제로 길이 없는게 사막의 광야 길이고 그게 우리 인생길입니다. 가긴 가야 되는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고 길이 보이지 않는게 사막과 같은 저와 여러분들의 인생길이라는 겁니다. 갈길을 몰라 헤메고 방황하니 목이 마르고 영혼이 피곤하고 지치는 겁니다. 정답이 딱딱 떨어지면 좋은데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이 계속 반복되고, 나의 인생을 혼자 가는 것 같고 어디로 가야 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게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인생길이라는 거예요. 인생이 이 시간 너무 피곤한 거예요. 육신도 피곤하고 정신도 피곤하고 그냥 다 놔버리고 싶은 그 고통과 어려움이 우리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인자하심과 내 인생에 행하시는 기적으로 건져 주시고 속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근심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을때…내 인생의 고통과 근심 중에 주님께 부르짖을 때… 그 고통과 근심을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건져 주시는 기적이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의 근심 중에 부르짖고, 고통 중에 부르짖고, 환란 중에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그 고통 가운데 우리를 건져 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매인 결박에서 끊음을 받는 기적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주님의 바른 길로 인도함받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펼쳐진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고백하며 나아가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깨달아야 될게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으로 내 인생에 행하시는 기적이 내 때에 내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 믿음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기도 하면서도 우리가 답답한 이유는 그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이 내가 원하는 때에 나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는 점진적으로 일이 하나하나씩 풀려서 이렇게까지 간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때에 이르는 일들은 99도까지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하나님의 때가 딱 임하면 불이 물이 끓듯이 임계점이 되면 확 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99도까지는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그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게 아니라 내적으로는 계속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계속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끝까지 기도하는 것이 우리 신앙 생활의 인내입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역사들이 하나님의 때가 임하기 전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 전까지는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아무런 가능성도 없어 보이고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입니다. 어떤 징조가 있고 어떤 사인이 있어서 이게 올라가는게 보이면 기도가 힘을 받는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나의 인생이 하시는 기적은 많은 경우에 99도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냥 내 기도 안 들으시나 보다… 하나님은 내 기도 잃어버리셨나 보다… 그냥 포기하기 십상인데 그것을 넘어서야 된다는 것이죠. 겉으로 봐선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게 아니라는 것을 믿고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여호와의 인자하심과 내 인생에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어다…두 믿음의 고백을 내 인생에 선포하며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이 시간 믿고 부르짖으며 그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이 시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때, 때가 차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나의 인생에 행하시는 기적이 풀어질 걸 믿습니다. 환란 중에 부르짖을 때, 근심과 고난 중에 부르짖을 때, 내 삶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건짐 받고, 내 대적으로부터 건짐 받고, 주님께 찬송과 감사로 나아가는 그 역사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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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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