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눈에 보이는 왕을 요구한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깨우고 있습니다. 보여 주신 사인인 우레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사인을 보고 백성들은 깨달았고, 깨닫고 나자 모두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 죽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무엘은 권면합니다. 첫번째, 버림받을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불순종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시니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을까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그 불순종에 대한 죄는 미워하시지만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을 믿는게 신앙입니다. 사랑 가운데 너희를 세우시고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죠. 여호와께서는 너희로 자기 백성 삼으신 것을 기뻐하신 고로 그 크신 이름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너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걸 믿어…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있는 자들이 너희들이야…분명히 확신하고 믿으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너희를 향한 사랑을 정확하게 붙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근거로 맺어진 언약 관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이란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부어주신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내가 서 있음을 확실히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며 사랑의 관계로 자녀 삼으신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이 나를 살리는 것입니다. 자녀가 지은 죄는 책망하고 교정하시지만, 그 잘못을 통해 자녀를 내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고아의 영성이 있게 되면 잘못할 때마다 막연한 두려움이 나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내가 이걸 잘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실 것 같고, 내가 실패하고 무너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버리실 거라는 두려움이 찾아오는 겁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고 붙든다는 것은, 하나님은 내 잘못과 실수와 죄를 혼내시고 징계하실 지언정, 하나님의 자녀됨 자체를 결코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그럼에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앞에서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사무엘이 여호와만을 섬기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여호와를 쫓는 데서 돌이키지 말고 오직 너희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섬기라고 명령합니다. 너의 존재감은 분명하니까, 하나님의 자녀됨이 확실하니까, 하나님에게 내가 버림 받을까봐, 끊어질 까봐 고민하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분명하게 하나님의 백성 다움의 삶, 하나님의 좇는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여호와를 쫓는 데서 돌이키기 말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쫓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들어 마음에 새기고 그 말씀을 쫓아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무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순종의 삶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껍데기만이 아니라 형식만이 아니라 마음을 담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 하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가 드려야 할 삶의 태도이며 삶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겁니다. 세상에 헛된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좇아가지 말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은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 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살면서, 시간만 나면 호시 탐탐 그들의 눈이 여호와를 쫓는 데서 돌이켜 지금 헛된 것을 쫓아가는 데 눈과 마음이 쏠리고 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좋아 보이고 매력적으로 보이고 거기에 내 인생의 확신을 두어야 할 것 같은 본능이 꿈틀 거리는 겁니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고 가만히 있게 되면, 죄에 만성화된 출애굽 전에 애굽을 동경하든지, 들어간 가나안 땅을 동경하며 거기에 젖어 들고 동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유익하지 도 못하고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에 그들의 눈과 마음이 쫓아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과 마음이 세상을 향하여 쫓아 가고 품게 되면, 하나님을 동시에 쫓아갈 수 없으며 하나님 말씀을 쫓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보이게 좋아 보이고 매력적인 세상이 주는 것은 어떤 거라는 겁니까? 반짝…잠시라는 거예요. 잠깐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 유익하지 못한 것이며 반짝 좋아 보이지만 결국 안개와 같이 헛된 것이고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상을 얘기할 때 꼭 앞에 붙는 단어가 헛된 우상입니다. 항상 변하고 없어지고 다 헛되고 무익한 것이 바로 세상이 주는 것들임을 잊지 말고 이런 것에 인생 걸고 쫓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적 선택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듣고 무엇을 마음을 담아 쫓아가는 인생인가, 그게 우리가 정말 마음에 두는 넘버원 이라는 것이죠. 사무엘은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와 살려달라고 간구한다면, 하나님 백성됨을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함을 두려운 마음으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답지 않게 세상에 질질 끌려 다니며 세상에 젖어 들며 살고 있는 삶을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들은 두 손 들고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말씀을 향하여 진심과 전심으로 좇으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삶으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다하여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삶, 하나님의 경외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서 살 길임을, 하나님의 복 가운데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우리 에게도 동일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 자녀들을 버리지 않는다는 분명한 약속을 붙들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철저히 붙들고 두려워하지 말고 살아가십시오. 동시에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가는 순종의 길에서 돌이키지 마십시오. 우리를 미혹하고 젖어 들게 하는 세상에서 돌이키고 오직 마음을 다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그 은혜를 붙들고 오늘도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을 좇아가는 귀하고 복된 성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 하나님께 간구하고 구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다 들어 주셔야 된다는 착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모두 다 주셔야 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여러 번 반복해서 구하고 강청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내가 구하는 것이 응답되는 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될 수 있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심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우리가 구하는 것이 귀한 일이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구하는 기도 제목이어야 그것이 우리에게 화가 아니라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했던 것, 반복하며 거의 압박 하듯이 하나님께 구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을 위한 왕을 구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그 기도 제목이 응답된 것이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결국 화가 될 것임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차라리 그 구한 기도제목이 응답되지 않는게 복이었는데, 그걸 모르고 그들은 끝까지 구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구한 왕이 너희 앞에 있고 그 왕이 결국은 너희를 멸망으로 그리고 불순종의 결과에 직면하게 될 거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반복되는 말씀은 “너희’ 라는 말입니다. 너희의 구한 왕, 너희의 택한 왕, 여호와께서 너희 위해 왕을 세우셨다…너희가 그렇게 요구하고 간절히 구한 왕이 여기 있다는 것이죠. “너희”가 강조되는 사무엘의 말을 통해 마치 사사기 시대 백성들을 다시 보는 듯 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만 행하는 삶, 자기만을 위한 삶,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너희가 그렇게 원했던 너희가 그렇게 구했던 왕이 여기 있고 너희를 위해 세워진 왕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 가운데 숨긴 뜻은, 그렇게 왕을 구한 동기와 그 왕이 세워지는 과정과 그 왕이 세워진 결과에 직면하게 될 모든 것이 너희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언하고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전하는 겁니다…그렇게 너희가 강력하게 구했지만 그렇게 왕이 세워진 동기, 왕이 세워진 과정, 왕이 세워진 결과가 모두 너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라고 강조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요악할 수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담아 듣는 거예요. 말씀을 듣고 순종할 목적으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과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마음으로 들고, 하나님 말씀을 쫓아가는 삶입니다. 너희와 너희의 다스리는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복이 너희 가운데 임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화가 너희 가운데 임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삶, 듣긴 들었는데 순종할 마음 하나 없이 듣는 태도를 불순종이라고 합니다. 그런 불순종의 태도는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말씀을 쫓아 가지 않는 거역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런 불순종의 삶에 대한 결과를 직면 된다 라는 것이죠. 사무엘이 이 두가지의 선택지를 주면서 나는 이제 역사의 뒤쪽으로 물러 가니까 너희가 그렇게 원한 왕이 여기 세워졌으니,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던지,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망하는 삶을 살든지 너희가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속 마음은 무엇입니까? 제발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며 복가운데 거하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뉘앙스가 어떠냐 하면 답이 이미 결정된 거와 같이 기울어진 시소 와 같이 얘기하고 있는 거에요. 너희와 너희를 다스릴 왕이 결국은 불순종의 길, 화의 길로 간다는 겁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쫓지 아니면서 불순종의 결과를 직면하게 될 거라는 것을 안타깝게 얘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너희가 구한 왕은 그 동기와 과정과 그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위 두가지의 선택지가 있지만 결국 안타깝게도 너희가 불순종의 인생으로 결과를 직면하게 될 거라는 것을 그림 언어를 보여준 게 바로 16-18절의 건기에 밀 베는 때에 우레와 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건기와 우기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밀을 베는 때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 건기였는데, 하나님께서 우뢰와 비를 보내신다는 거죠. 우레와 비를 보여 주심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임박한 불순종입니다. 그것을 밝히 알게 하시기 위해, 선명하게 알게 하시기 위해 이런 사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 사인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았고 그들이 구하고 요구했던 기도제목이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것이었으며 그 왕을 통해 세워진 것이 결국 그들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될 것임을 선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간절한 기도 제목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구함이 있고 공동체의 간구함이 있습니다. 내가 매달리면서 간절히 구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조율 되고 맞춰져 있는 것인지 우리는 말씀 가운데 비춰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 되는 구함 인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구함인지, 결국 응답되는 것이 나에게 화가 되는 것을 나는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씀 앞에 진지하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에 뜻 안에서 구하는 기도가 되기 위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사모하며 나아가기 원합니다. 말씀을 순종을 위해 들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삶, 그 삶이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러 있는 삶임을 잊지 마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듣지 아니하고 거역하며 불순종의 결과 에 직면하는 안타까운 길을 반복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 신실하고 주님 뜻 가운데 거하시는 복 된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무엘의 고별 설교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고 동시에 조상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정확하게 기억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지금 멈춰 서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모든 의로운 일을 망각하지 않고 곱씹고 현재형으로 다시 한번 새겨 보기 원하는 사무엘의 간절한 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우시고 구원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다 못해 망각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사무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만히 서서 마음에 생각해보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서 너희 조상을 인도하여 내시고 구원하신 분은 우리 왕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하나님이 하셨던 놀라운 공의로운 일들을 마음에 새기는 데 패턴이 뭡니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와 아론을 보내셨고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셔서 출애굽으로 구원하셨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셔서 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모든 공의로운 일에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엇을 고백해야 됩니까?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선명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그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도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놀라우신 일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잊어버리고 망각했음을, 그것이 모든 불순종과 반역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큰 영적 문제라는 것을 그 머리가 하얀 노인인 사무엘이 마지막 고별 설교 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희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돈 문제도 아니고 자녀 문제도 아니고 관계 문제도 아니고 너의 삶에 어떤 문제가 아니라 너희가 지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거라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가장 큰 문제가 여호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거라는 걸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고 이 땅에서 이렇게 놀랍게 살게 하시며 천국의 길을 다 인도하셨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우리를 세우셨음을 망각하는 것입니다. 과거 이 안타까운 패턴이 오늘의 시간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성경은 우리에게 선명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하시고 인내하시는 분이신지, 진작에 손을 놔 버리고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사사시대에 불순종했던 그들에게 또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범죄하면서 직면한 어려움 가운데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했다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건져 낼 사사들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셔서 그들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 내시고 안전하게 거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반짝 고백합니다. 반짝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문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동일하게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왕 되심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망각하고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면 너희 조상들이 했던 여호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불순종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 불순종의 패턴을 어쩌면 이렇게 다시 한 번 반복하고 실패 했는데도 불구하고 똑같은 실패를 계속 반복하느냐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무엘의 입술을 통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잊은 지라… 이것이 지금 사무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셨으며 한결같이 신실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짖기만 하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그들을 건져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안전한 땅으로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든 구원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확실히 믿으며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모시고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도 풍요로움을 누리며 감사한 가운데 축복 받으며 살 수 있는데 그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하나님이 누구 시고 하나님이 하신 이 무엇인가를 잃어 버리고 잊어버리고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길에서 자꾸 이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왕 되심을 잊어버린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왕 눈에 보이는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된다고 요구하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는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불순종 하냐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에게 진노를 받을 만한 일만 골라 하느냐고 몰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모습일 수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삶에 말씀을 비추어 봐야 합니다. 신앙 생활 잘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늘 깨닫고 잊어버리지 않은 겁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들을 사망과 심판에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함께 하시며 인도 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분처럼 왕이 없는 백성처럼 살아가며 또 다른 실패와 불순종으로 자빠지고 넘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잊지 마십시오. 딱 멈추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마음에 새기고 현재형으로 붙들 수 만 있다면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이탈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고 망각하지 않고 살아가면 저와 여러분들은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끝까지 쓰임 받기를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의 고별 설교이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마지막 당부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백성들에게 세워지며 승리 이후에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 있고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 나의 소임은 여기까지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그 백성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고별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고별 설교에서 증언 되는 사무엘의 위대한 점은 어렸을 때부터 은퇴할 때 까지 한결같이 주님 앞에 쓰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쓰임 받는 사람들은 정말 적은 것 같습니다. 한 때 쓰임 받고 사라지는 자들이 대부분인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보게 됩니다. 한결같이 그 마음을 놓지 않고 주님 앞에 처음부터 끝까지 쓰임 받는 자가 정말 드뭅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은퇴 직전인 오늘날까지 하나님 앞에 출입했으며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었음을, 늘 하나님 앞에서 살았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은 바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한결 같이 서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서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자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신실했다는 것을 상기 시키면서, 백성들을 속이거나 압제하거나 뇌물 받은 게 있었으면 말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런 사무엘의 신실함을 말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다 아는 거에요. 은퇴 직전까지 한결같이 백성들을 속이지도 않았고, 압제하지도 않았고 뇌물 받지도 않았던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아는 겁니다. 사무엘이 이렇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친 영적 지도자였음을, 백성들도 사무엘의 뒤를 쫓아가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지금 은퇴할 때까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이렇게 신실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을 또 다른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사모하고 요구했던 왕, 너희가 그렇게 세우게 해 달라는 왕은 나 사무엘과 다를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세워 달라는 왕은 결국 어떤 존재로 오는가 하면, 너희를 취하고 압제하고, 너희에게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받을 것이며 힘들게 할 것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원하는 왕은 너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넘어 결국 너희를 망하게 할 결과를 보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장차 오게 될 일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사울을 통하여 나라가 새로워지고 이제 탄탄대로를 갈 것 같은 기쁨에 휩싸여 있는데 찬 물을 확 끼얹지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내게 한 말을 잘 듣고 정신 잘 차리라는 겁니다. 지금 너희가 기뻐하며 사울을 통해 나라가 잘 세워져 갈 것 같지만, 결국 왕이라는 존재는 나와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있지 않고 결국 변질되고 타락해서 너희를 이렇게 힘들게 할 것이고, 너희가 고통당하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라는 겁니다. 화려하게 너희가 원하는 왕이 세워졌지만 그 왕을 통해 너희가 겪게 될 고통과 어려움과 눈물과 아픔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라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자 불순종이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도 사람들에게 박수 받고 환호 받으며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넘어가는 대신, 사무엘은 끝까지 백성들이 듣기 싫은 소리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은 하나님께 부름 받아 하나님이 그들의 귀에 듣기 원하시는 말을 해야 되는 책무를 끝까지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서부터 늙어 천국에 입성하기 전까지 사무엘과 같이 우리 신앙이 늘 한결 같을 수 있기를, 끝까지 주님을 바라보고 붙들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무엘을 바라보며 우리도 반짝 쓰임 받는게 아니라 끝까지 쓰임 받기를 사모하며 나아가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우리의 삶이 끝까지 신실하고 한결같았던 사무엘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원합니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에는 결과가 있듯이, 우리의 불순종에는 결과가 있음을 깨달으며 이 사무엘의 경고를 우리의 마음에 새기기 원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있다면 천국 가기 전 까지 주님을 향한 믿음과 신실함이 한결 같기를 기도하며, 끝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며 쓰임 받는 삶을 뚜벅뚜벅 가는 자가 되게 기도하는 게 우리 모두의 기도 제목이 될 줄 믿습니다. 매일 매일 주님 그 길을 따라 가기를 사모하며, 그 신실하고도 바른 길, 십자가의 길을 주님과 함께 동행 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한마음이 되어 열두 지파가 똘똘 뭉쳤습니다. 사사기 시대에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뭉쳐서 한나라 같이 이렇게 일한 적이 없었습니다. 사울에게 부어 주신 하나님의 영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갖게 했고 결국 온 나라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오는 암몬을 치기 위해 한 나라 같이 모인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마음으로 모인 얼마나 많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30만, 유다 사람이 3만, 도합 33만명이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스라엘을 암몬 모욕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그 가운데 좌절하고 무너져 있는 길르앗 야베스를 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붙들고 나가 한 마음으로 싸울 준비를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30 만, 유다 사람이 3만이라고 증언하는 것을 통해, 지금은 하나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한마음으로 모여 있지만 결국 언젠가는 남과 북으로 분리 되듯이 그렇게 나눠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복선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붙들리어 드디어 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갈라져 있는 이스라엘을 지금 하나로 묶고 한 마음으로 전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사울은 그 33만의 대군을 이끌고 나가 암몬 군대와 싸우게 되고, 그 결과, 암몬 사람들을 쳐서 남은 자가 다 흘어질 정도로 완전하게 쳐서 완전한 승리를 경험하게 됩니다. 새 마음과 새 힘을 부여 받고 드디어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위기에서 백성들을 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모아 한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암몬 군대를 놀랍게 쳐서 이기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승리는 사울이 대단해서도, 백성들이 하나됨의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사울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욕하는 그 암몬 군대를 하나님이 앞서 싸워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왕의 승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 되신 하나님의 승리였고, 사람들이 잘 싸우고 이긴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기게 해 주신 승리였던 것입니다. 암몬 군대를 이렇게 놀랍게 치고 나니까, 기대하지 않던 대승을 거두고 나니까, 백성들이 주도권이 사울에게 넘어왔고 사울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일하심이 딱 보이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울이 주도하는 시대가 왔구나…라는 것을 백성들이 다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들이 생겼는가 하면 사울에게 붙으려는 사람들, 사울에게 아부하려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전쟁 승리 직후 사울에게 듣기 좋은 얘기를 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 후, 그들이 사무엘에게 나아가 그동안 사울이 왕 되는 것에 대해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사울을 멸시했던 사람들을 끌어내어 처단하자고 제안합니다. 사울에 삐딱하던 사람들을 다 색출해서 죽이겠다고 분위기를 확 몰아가는 것입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명분도 좋고 그렇게 반대자들을 제거하는 것이 나쁜 게 없습니다. 사실 마음에는 자기를 그렇게 힘들게 하고 자기에게 삐딱하게 보고 멸시한 사람들을 다 없애고 싶었을 겁니다. 지금 백성들은 승리 직후 자신의 말 한마디면 일사천리로 모든 게 진행될 것 같고, 이 때 강한 리더십을 세우기 위해 숟가락 딱 올려 멸시하고 반대하던 자들을 없애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큰 승리 이후 초심을 잃지 않는 사울의 겸손하고도 놀라운 고백, 자기의 본성을 쳐서 주님의 뜻에 철저하게 조율시키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전쟁은 내가 잘해서 이긴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전쟁임을 선명하게 고백합니다. 이 승리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분명하니, 하나님이 주신 이 영적 승리의 날에 사람 죽이지 말라는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전쟁의 승리의 원인이 사울의 놀라운 리더십 때문이라고 믿고 말하고 열광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주가는 막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렇게 높아질 때 바짝 엎드렸습니다. 그 승리 가운데 자아도취 되지 않았습니다. 이 승리를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신 날이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면서 나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전쟁의 승리의 원인이 나에게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울의 그런 고백을 듣고 사무엘이 얼마나 마음이 흐뭇했던지…이 때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시간임을 알고 이렇게 백성들에게 선언합니다. “오라 우리가 길 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그동안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느라 사분 오열 돼 있고 사명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서로 싸우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그 영적 암흑시기를 종결하고, 이게 나라를 한 마음으로 새롭게 할 시기가 온 것입니다. 한 나라로 통합되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왕 사울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붙들고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갈에서 모든 백성이 모여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했습니다. 사울은 이미 왕으로서 기름 부어진 상태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모두 그를 이스라엘의 백성의 왕으로 인정하며, 진짜 백성들에게 신임을 얻는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이보다 더 좋은 해피엔딩이 없어 보입니다. 사울은 큰 승리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겸손히 엎드림으로 자기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왕이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를 왕으로 삼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엎드리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니 하나님께서 사울을 통하여 일을 안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어 주신 승리가 있습니다. 암몬과 같이 우리가 싸워 이길 수 없는 적들을 이기게 하시는 승리를 주실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감사를 올려야 될 때 라는 걸 정확하게 깨달으십시오. 주변 사람들도 그 승리가 나 때문이라고 말할 때,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 들 때 그 본성을 거절하고 사울과 같이 말씀 앞에 엎드려 승리를 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철저하게 믿고 고백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이루시고 더 큰 능력을 부으시며 더 큰 사명을 맡기실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쓰임 받음이, 주님 앞에 내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고 초심을 승리 주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이 초심을 잃지 않고 승리 이후에 모든 승리를 주신 주님 앞에 철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이 약하다는 것, 힘이 약한 백성으로 사는 비애라는 것이 얼마나 크고 눈물나는 일인지 우리 한민족은 오랫동안 경험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밑에서 일본이 쳐들어오고 위에서 중국이 쳐들어와서 온 땅이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가는 눈물의 역사를 우리는 실제로 경험했던 민족입니다. 오늘 말씀에 길르앗 야베스가 바로 힘이 약한 백성으로서 비애를 처절하게 경험한 백성입니다. 암몬이 쳐들어오겠다고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에 입다에게 크게 패했던 민족이기에, 이스라엘에 대해 좋지 않은 악감정을 가지고 복수를 하려 벼르던 터라, 힘을 키운 다음에 지금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오는 것입니다. 근데 그 당시 길르앗 야베스는 얼마나 힘이 없었으면, 싸우기도 전에 화친을 하자고, 우리가 종이 되어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암몬과 싸울 능력도 힘도 없으니 먼저 화친 조약을 제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개 숙이고 나와서 잘 섬기겠다는 제의를 암몬 백성이 거절하며, 오른쪽 눈을 다 뽑고 나서야 화친 조약을 맺겠다고 말합니다. 오른 눈을 뽑는다는 것은 말의 힘줄을 끊는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오른쪽 눈을 뽑게 되면 모든 것이 사실 무력화 되는 것이죠. 평화 협상 같은 것 관심 없고 너희를 다 쓸어버리고 철저하게 무너뜨리겠다고 협박하는 겁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우리가 너의 종이 되겠다고 얘기한 것도 힘이 없는 자들의 비애인데, 너희 모든 사람들의 오른쪽 눈을 다 뽑아버리겠다는 모욕까지 들으면서 지금 몰살당하기 일보직전인 것입니다.
이런 암몬 자손의 모욕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욕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욕과 수모를 당했지만, 힘이 없으니 대항하지도 못하고, 일주일 동안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일주일 동안 우리를 구원해줄 자가 없으면 두 손 들고 투항하겠다는 겁니다. 암몬에게 모든 사람들이 눈 뽑히러 나아가겠다는 것이지요. 힘없는 백성으로 그들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런 절망스러운 소식을 백성들이 듣고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일주일의 말미를 달라 말했지만, 암몬의 공격과 멸시에 대항해서 특별히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을 백성들도 다 안 겁니다. 적이 너무 강하고 컸기에 혼자서는 쌓을 수 없고, 도움을 구하려고 이스라엘 전 지역에 다 전령을 보냈지만 도와 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이스라엘 12 지파가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싸우고 갈등하고 분열했던 영적 암흑기였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적인 가나안 민족들과 싸우는 대신 내부에서 서로 원수가 되고 치고 싸우는 부끄러운 흑역사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백성이 어렵다고 열 두 지파가 한마음이 돼서 달려와 함께 싸워줄 거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싸울 힘과 능력은 없고, 도와 줄 사람들은 없으니, 일주일 후에 우리는 모두 죽는구나 생각하며 온 백성이 울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마침 그렇게 온 백성이 울고 있는 자리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지금 무엇을 하다 나왔는가 하면 밭에서 소들을 몰다가 나왔습니다. 왕으로 이미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지만, 실제로 모든 지파들을 통해 서포트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왕으로서 실질적인 왕권이 확립되지 않았을 때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연히, 마침… 이런 말들은 우리 눈에 보기에는 우연히 일어났고 마침 만나게 됐지만 그것이 우연을 가장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하심인 것입니다. 그렇게 마침 지나가게 된 자리에서 그 백성들이 우는 이유를 듣게 됩니다. 사울이 그렇게 땅을 치며 통곡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그 통곡하는 이유를 듣고 나서 그가 하나님의 신의 크게 감동 되어 거룩한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사울은 관심사가 어디에만 한정되었는가 하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안입니다. 그의 모든 관심사는 자기 집안이고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집에 암나귀들을 잃어버린 게 가장 인생의 큰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되어 그의 영적 열리면서 자신의 집안 문제와는 비교되지 않는 큰 문제가 눈과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백성들을 잃어버리는 문제, 백성들이 눈물로 통곡하는 문제, 그것이 사울의 마음과 삶의 새로운 관심사로 부어 주시면서 왕으로서 진짜 백성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마음을 쏟아야 되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주신 마음 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 절망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여 사울은 거룩한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거룩한 분노는 성경 여러 곳에서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보면서 그가 가졌던 마음은 개인적인 분노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 가셨는데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오는게 아니라, 장사하고 이득을 취하기 위해 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는 채찍을 들게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울에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분노가 임한 것입니다. 길르앗 야베스 백성이 힘없이 멸시당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죽겠다고 울고 있는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고 모욕하고 있는데 하나님 백성들이 아무 것도 못하고 나서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바라보면서 거룩한 분노가 임한 겁니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울은 이스라엘 전 지역에 메세지를 보냅니다. 누구든지 지금 사울과 사무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소들을 각을 뜨게 될 것이라는 강력 메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사울의 메세지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에 여호와의 두려움이 임한 겁니다. 그동안 사사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멀리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던 백성들입니다. 사분오열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 당해도 아무런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지 못하던 백성이었는데 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된 사울의 메시지를 통해 백성들에게 그동안 잊혀졌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임한 것입니다.그렇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회복되니까 백성들이 정신차리고 한마음으로 다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전역에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왕인 사울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사건으로 변화시켜 주심을,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왕으로 완전히 자리 매김하는 디딤돌이 되게 해 주심을 마음에 깊이 새기기 원합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불만족, 거룩한 분노가 있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힘없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고 있는데 아무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돕지 못하며 갈등하고 반복하며 사분 오열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고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거룩한 불만족과 거룩한 분노가 임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내 집안에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보다, 내가 돈을 좀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큰 문제임을 바라보기 원합니다.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정말 두려워해야 될 분을 두려워하며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정말 두려워하며 살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열려 내 인생에 직면한 인생의 큰 문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바라보며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인 미스바에서 소개하며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임을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라는 것을 끝까지 강조하시며 경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렇게 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며 그들을 어렵게 하고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분명히 경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용해 주셨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위 불순종이고 반역이라 경고하셨지만, 그것이 잘못됨 에도 불구하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들의 요구가 하나님의 뜻에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게 아님을 분명하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하는 게 그 일이 일어난 것이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기에 일어났다고 착각하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를 프로그램 하지 않으시고,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 모든 재산 중 반을 갈라 나갈 때, 아버지의 뜻과 반하지만 나가도록 그냥 놓아 두신 것과 똑같습니다. 아버지가 허용한 것이지 아버지 뜻이기 때문에 기뻐서 나가도록 길 열어 주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잘못된 길을 허용하시는 것, 그게 바로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하게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허용하심을 통해 과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었고 이끄시는 길이었는지를 깨닫고 돌아오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이게 잘못된 길이고 하나님을 반역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기름 부어진 왕 사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소개하기 전 제비 뽑을 과정을 통과하고 있지만 사실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사무엘을 통해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 상태였고 하나님 부어 주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이 크게 사울에게 임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겉으로 보기에 제비 뽑기를 하고 있지만 모든 것은 섭리 가운데 이미 사울이 뽑히게 될 것을 다 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 예정된 대로 사울이 왕으로 뽑혔는데 정작 사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사울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사울이 숨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사울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통해 새 마음과 새 능력도 부음 받았고 그 자리는 자기를 왕으로 추대하는 자리라는 걸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울은 행구 사이에 그렇게 숨어 있었을까요? 물론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숨어 있던 사울의 모습을 통해 사울이 하나님과 백성 앞에 여전히 겸손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왕이 될 자격이 없고 나는 부끄럽고 나설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린 사울의 초기에 본질에 모습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 해석이 일정부분 옳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의 숨은 행동이 그런 긍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면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사울이 지금 백성들과 하나님 앞에 왕으로 세워지는 장소에서 숨은 것은 그가 여전히 두려워 하는 마음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워하는 마음은 사울이 사람들에 대해 지나치게 신경쓰고, 사람들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약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름 부어 왕이 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더 중요하게 바라보고 서 있는 겁니다. 사울은 이미 영적으로 풍성한 경험도 있고 하나님이 새로운 마음과 새 힘도 주셨는데 여전히 마음속에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사울에게 가장 큰 약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하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훨씬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데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백성들 앞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라고 소개할 때 대부분의 백성들을 환영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멸시하며 예물을 드리지 않는자들도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의 만세를 올리며 사울을 환영하고 기뻐했지만 그 중에 몇 명이었는지는 모르나 소수의 어떤 사람들이 있었냐 하면 사울을 멸시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왕으로서 인정하지도 않고 왕을 멸시하며 예물도 들이지 않는 이런 사람들이 분명히 있었던 것입니다. 95% 가 사울을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며 만세를 부르는데, 5%가 지금 사울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사울을 멸시하고 팔짱 끼고 있는 겁니다. 근데 사울은 어디에 지금 모든 정신과 모든 이 스트레스가 쏠려 있는 겁니까? 95%의 대다수가 아닌 자기를 반대하는 5% 의 사람들, 그 사람들의 평가와 멸시와 그들의 삐딱한 시선에 모든 신경이 다 쓰이는 겁니다. 그것이 사울의 마음에 두려움으로 찾아오고 그게 자기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함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동일한 도전에 직면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평가에 마음을 쏟고 집중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사람의 평가와 사람들의 기준에 자꾸 흔들립니다 거기에 늘 마음이 쏠리고 그것 때문에 힘듭니다. 그것도 대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말들과 평가에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5%-10% 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멸시하고 나에 대해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멸시하는 것들을 꼭 붙들고 마음에 담아 두려워하며 불안해하고 평안함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울과 같이 이렇게 뒤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에게 새로운 마음을 받았고 새로운 권능을 풍성하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서 여전한 약점을 가지고 끝까지 그게 그의 발목을 붙드는 약점이 되 버립니다. 사울의 이 모습을 바라보며 나의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점검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평가보다 사람의 평가가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시선보다 사람의 시선이 더 중요하며 사람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민감한 이 모습, 저와 여러분들이 이런 모습을 넘어서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붙들고 주님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평가에만 집중하며 마음을 쏟고 살아가는 기적입니다. 나의 힘을 붙들고 내 노력을 가지고만 살게 되면 자꾸 사람의 평가와 시선에 내 신경과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고 민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 생활이란 하나님의 기준과 평가만을 집중하며 사람들의 평가와 멸시에 마음 두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기적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하늘의 힘을 붙들고 살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위해 하나님을 붙들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그 힘을 붙들고 살아가서 오직 주님만이 나의 평가 기준이며 주님의 시선에 집중하여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모습을 증언하는데, 특별히 이 짧은 말씀을 통해 예배 본질이 무엇인가를 함께 발견하기 원합니다. 첫번째, 예배는 하나님이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서 백성들이 모인 것과 같이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내가 그냥 원해서 내 마음대로 정해서 드리는 게 예배가 아니라 예배의 시작은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예배 자리로 부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를 통해 나의 인생의 모든 것의 주도권과 시작을 주님이 가지고 계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내가 이 세상에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부모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먼저 나를 계획하시고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일거수일투족을 바라보시며 나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시작은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내 인생의 시작도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시는 소리에 우리가 응답하여 예배당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새벽에 나와 기도를 하게 된 겁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께서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사명의 자리로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내 신앙 생활이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믿음으로 반응하기 원합니다.
두번째, 예배는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셨고 성도들이 여호와 앞에 모이는 겁니다. 주일 예배는 우리 끼리 그냥 교회 예배당에 모이는 게 아니라, 일주일 동안 외로웠다가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려고만 모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만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이는 겁니다. 주일 예배가 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부르셨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인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에 대한 분명한 영적 시각을 가지고 깨어, 내 인생이 주님 앞에서의 삶을 살고, 주님 앞에 모이게 되면 그 예배가 살아있는 예배 이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러 와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 하나님 앞에 나의 마음을 진실로 드리면서 예배를 드리게 될 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예배가 회복되고 우리 예배가 갱신된다는 건 뭐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우리는 그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주님 앞에 모여 주님을 진심으로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 하나님 앞에 내가 서있다는 분명한 의식이 바로 저와 여러분들에게 영과 진리의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로 회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여호와 앞에 모이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번째, 예배는 받은 은혜를 현재화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추억을 곱씹으며 망각하지 않고 오늘 주시는 은혜로 마음에 새기는 게 예배입니다. 이 미스바라는 장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회개와 부흥의 장소입니다. 다시 세워지는 장소였고,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이 친히 물리쳐 주신 영적 승리의 장소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 예배드릴 때 이런 영적 추억들이 하나 하나씩 쌓여 가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예배당이 귀한 이유는 그 장소가 멋있고 좋고 편해서가 아니라, 그 예배당에 우리의 영적 고백이 담긴 은혜와 하나님 만남의 추억이 녹아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과 우리 교회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은혜들이 추억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되는 것이 예배입니다. 우리에게 미스바와 같은 공간이 우리 교회 예배당이 되기를 사모하셔야 합니다. 이 예배당을 선물로 주시면서 우리에게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일, 우리 성도들 가운데 아픔과 연약함을 놓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주님께서 고쳐 주심을 찬양한 추억들, 우리의 주님을 붙들면서 쏟는 땀과 눈물들, 이 모든 것들이 예배당에 녹아있는 영적 미스바가 되기를 소망하기 원합니다. 예배당이 나에게 회복과 치유, 다시 세워주심을 경험한 곳, 영적 승리가 경험된 곳이 되기를 사모하기 원합니다. 지친 나의 손을 일으켜 주시는 주님의 손길, 쓰러져 놔 버리고 싶은 인생이 주님 앞에 위로 받은 손길, 아이들이 기도로 은혜 받은 손길들이 경험되는 미스바가 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기 원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임재가 경험되는 예배가 되기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서 부르심이 예배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의 시작은 항상 하나님의 부르심이고 내 인생의 시작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계획하심이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이는 성도들임을 기억하십시오. 예배당에 모여 우리가 함께 드리는 예배가 그 하나님 은혜의 흔적을 맛보고 현재화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미스바의 장소가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 내가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망각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을 잊어버리고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았음을 회개하고 자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그 예배가 저를 살리고 여러분들을 살리며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에게는 기쁨 되는 귀한 예배가 될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하루의 첫 시간을 구별해 드리는 새벽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이 시간 예배와 기도의 자리로 부르셨다, 내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서 깨우도록 나를 부르셨다는 고백이 선명히 드려 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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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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