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각지에서 온 40만 명의 사람들이 지금 분노와 보복에 들끓어 레위인에게 어찌된 일인지 직접 사건 보고를 듣습니다. 그들은 큰 문제를 객관적으로 본다거나 그것을 지혜롭게 잘 해결하려는 논리가 있는 게 아니라 시체 조각을 보고 가슴에 흥분과 분노를 일으킨 거죠. 그리고 분노를 통해 지금 과장된 사실로 왜곡하며 사람들이 막 흥분하고 일치 단결하고 지금 모여들고 있는 겁니다. 그런 분노하는 대중들에게 레위인이 일어난 일들을 보고 하는데 반쪽 진리를 이야기하며 지금 감정과 분노를 자극하며 선동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첫번째로 베냐민 지파의 불량배들이 이 사건을 저질렀는데 마치 베냐민 지파 모두가 그런 것처럼 프레임을 씌웁니다. 또 하나 마치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자신의 첩이 자신은 보호하고 싶었는데 저 원수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것처럼 포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잘못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첩이었다면 왜 본인이 그 첩을 밖에 내 주었습니까? 억지로 끌어내서 그렇게 욕 보이게 만들고 비참한 성폭행을 당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굽니까? 날이 새도록 밖에 한번 나와보지 않은 사람은이 누굽니까? 바로 레위인 자신인데 이렇게 대중의 분노와 흥분과 가운데 있을 때 자기는 100% 피해자 의식에 빠지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잘못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가 마치 전적인 피해자인양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나는 내 첩을 너무 너무 사랑했는데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을 바라보며 가슴을 찢고 눈물을 흘린 것처럼 지금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내 아내가 저 원수들에 의해서 능욕을 당하며 죽게 되었다…감정만을 자극하며 본인의 잘못을 쏙 빼놓는 겁니다
심지어 이런 프레임 씌우기를 통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도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지금 레위인은 무엇보다도 회개해야 할 사람입니다. 첩을 두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영적 지도자의 수치를, 세상 기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삶을 회개 했어야 합니다. 죄를 훈계하거나 돌이키지 않고 죄를 품고 쌓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삶을 회개 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협박과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의 첩을 물건과 같이 밖으로 내버리고 끌어내서 대신 성폭행을 당하게 만들었던 그 중죄를 회개 했어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회개해야 될 자가 바로 레위인인데 이 모든 죄에 대해서 아무런 말도 없어요. 아무런 안타까움도 아무런 돌이킴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는 피해자고 그저 자기는 억울한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100%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잘못 없이 100% 억울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40만명의 사람들이 분노와 흥분에 기름을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얘기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분노와 흥분에 사로 잡히며 두가지를 결론 내리죠. 동족이자 함께 영적 싸움을 벌여야 하는 베냐민 지파 사람들은 모두 죽여야 하는 원수들, 이 레위인은 아무 잘못이 없는 순수한 피해자 불쌍한 사람…많은 대중들에게 흥분하며 사람들을 자극하는 자들의 특징, 그래서 자기의 복수를 위해 사람들을 선동하는 자들의 특징은 항상 자신의 잘못을 쏙 빼놓고 반쪽 진리로 사건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대중을 이용하고 자신을 과장하며 자신이 100% 피해자인 것처럼 성급한 일반화를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이게 바로 세상 사람들을 선동하는 원리이고, 세상 사람들을 분노로 자극하는 원리입니다. 분노로 나의 적을 일방적으로 프레임 씌워 버리는 원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내가 분노로 지나치게 자극되어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움직이고 사람들이 지금 열을 내고 있다면 그 때가 조심해야 될 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선동하고 누군가 나의 분노를 자극하며 그 분노를 통해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무언가를 보지 못하면 영적 어둠의 길을 가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분노가 이끄는 삶을 통해 쉽게 어떤 사람과 어떤 그룹을 우리는 프레임 화시키며 그 사람들을 원수로 죽여야 될 사람으로 몰아세우며 분노로 아우성치는 그 모습이 영적 타락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자기를 위해 대중을 이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호도하며 분노로 하나 되게 만드는 나쁜 방법을 쓰는 수많은 사람들을 지도자들을 역사를 통해 반복되어 옴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중을 분노를 통해 선동하여 분노를 통해 하나되게 만들며 분노가 일하게 만드는,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악한 지도자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있음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분노로 쉽게 프레임을 씌우며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는 이 시대에, 분노가 나를 이끌고 우리 공동체를 이끌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하며 분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레위인이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이스라엘 지파의 보내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격 받고 분노로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 군인만 40만명이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자기 동족인 베냐민을 향한 분노와 보복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일치 단결 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적 전쟁을 하기를 명령하셨습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하나님이 앞서 싸우시는 영적 전쟁을 통해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땅을 취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힘을 하나로 모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싸우러 갈 때 기껏해야 몇 만명이 정도 밖에 모이지 못했고, 단 지파 같은데는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을 아예 포기했죠. 하나님이 이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약속하신 땅을 믿음으로 취하지 못하고, 그 땅을 들어가지 않고 싸우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는 눈에 보기에 쉬운 땅,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시지 않은 땅에 올라가서 억지로 무단 점령하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취하지 못한 땅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가나안 족속과의 영적 전쟁에는 이토록 소극적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전역에서 40만 명의 군인이 모였습니다. 지금 자기 동족에게 보복과 분노를 퍼붓기 위해서 이렇게 일치 단결하며 온 백성이 하나되게 한 것이지요. 어려운 영적 싸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되는 영적 전쟁에는 나서지 않다가 내부 지파의 문제의 이렇게 흥분하고 분노하며 인기 일치 단결하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우리는 씁쓸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부족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 되라는 사명, 영적 전쟁과 선교를 위해 열심을 내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호명하시고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호명 하시고 부르신 이 사명에는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 되며 올인 하지 않습니다. 사명에 그다지 열심이 없고 마지못해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보면 어떤 일에 열심이 있냐 하면 교회 안에 A 라는 분이 어떤 문제가 있다 그러면 그 문제를 드러내고 정의라는 이름으로 처단하는 데는 밤새 사람들이 회의하고 밤새 사람들이 열을 내는 겁니다. 교회가 분노로 일치 단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이게 교회 안에서의 저와 여러분들의 부끄러운 영적 자화상이 될 수 있음을 성경은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가나안 영적 전쟁에 이렇게 열심을 내고 이렇게 일치 단결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근데 성경은 그 영적 전쟁과 가나안 땅에 정복에는 그렇게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렇게 열심을 내지 않고 그렇게 일치 단결 하지 않다가, 내부 문제인 베냐민 족속에게 그렇게 분노를 퍼붓고 하나되는 것이 씁쓸하기만 합니다. 특별히 베냐민은 여러분 공동체에 막둥이 아닙니까? 막둥이 지파를 지금 징계하고 그 분노로 보복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40만 명의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모여서 하나되는 내부 칼부림을 우리는 이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안타까운 우리의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며 내부 문제에 그렇게 흥분하고 분노하고 일치 단결 하면서 실제 내가 싸워야 되는 본질의 싸움, 영적 전쟁은 포기해버리고 잊어버리는 영적 하향곡선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영적 전쟁과 사명에 나의 시선을 고정하고, 말씀의 가치와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경험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설교하기도, 이 말씀을 읽는 자체도 너무 거북하고 불편한 말씀입니다. 너무 끔찍하고 잔혹해서 말씀으로 읽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타락의 끝판왕,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추악한 모습의 끝이 어디인가를 이렇게 잔인하고도 끔찍하게 보여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 하시는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어제 말씀을 통해 레위인과 그 첩은 베냐민 지파 성읍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그들을 맞아 주지 않고 환대하지 않았던 모습은 하나님의 율법과 뜻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정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적 타락의 모습임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들이 무정한 모습을 넘어 레위인을 협박하며 목숨을 담보하며 분노와 성적 타락의 도구로 그를 끌어내려고 하는 극악무도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머물고 있는 집에 갑자기 들이닥친 것이죠. 불량배들이 그 손님을 끌어내라고 문을 쾅쾅 두들기는 겁니다. “우리가 그를 상관하리라..” 그들의 극도의 성적 타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창세기에 등장하는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롯이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곳에 찾아와서 그 하나님의 사자를 끌어내라 협박한 모습,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자와 상관하겠다고 아우성 친 모습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창세기 말씀에서 소돔과 고모라는 이방인의 땅이자 멸망의 땅이었는데, 오늘 이 끔찍한 사건이 벌어지는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인 배냐민 지파가 살고 있는 땅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나 일어날 일들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시대 죄로 완전히 무너지며 인간이 갈 때까지 간 모습을 안타깝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의 반응이에요. 레위인을 끌어내서 상관하겠다는 협박 가운데 레위인과 함께한 노인의 반응이 다 이해되지 않습니다. 노인은 이들이 하는 일들이 망령된 일이자 악을 행하는 일임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악하고 망령된 일에 대한 노인의 반응이 또 다른 악하고 망령된 일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죠. 지금 불량배들이 악하고 망령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그 문제를 풀려는 방법이 또한 악하고 망령된 일이었다는 거예요. 레위 사람한테만 하지 말고 여기 내 딸이 있고 레위인의 첩이 있으니 그 여자들은 마음대로 너희들이 욕 보여도 된다는 거예요. 이게 굉장히 잘못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레위인 대신에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을 대신 하라는 것이죠. 이런 반응은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던 롯이 했던 반응이기도 합니다. 나의 손님인 레위사람을 위해 나머지는 다 희생 해도 된다는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영적으로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악하고 망령된 일에 대한 반응과 방법이 또한 악하고 망령된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죠.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 레위인의 반응이에요. 밖에 있는 불량배들이 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계속 문을 부술 듯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위인이 자기 첩을 무리에게 붙들어 내매….”자기 첩을 무리에게 붙들어 맸다 라는 것은 강제로 밖으로 나가게 했다는 겁니다. 자기와 상관하자고 지금 문을 두들기고 부수려 하는 그 불량배들에게 자기가 살겠다고 레위인은 자기 첩을 끌어서 그 불량배들에게 내 주는 겁니다. 그 레위인의 첩은 자기가 선택하지 않은 그 안타까운 강제적으로 끌려나가, 밤새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불량배들을 통해 말씀을 읽기도 부끄러운 말씀이 실제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갑자기 개입해서 그들의 눈이 멀어서 실제로 그런 끔찍한 일이나 정말 부끄러운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초자연적으로 천사가 개입하지 않고 실제로 이 말도 안되고 부끄러운 일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 하면 바로 레위 사람이에요.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데 레위 사람이 자기 첩을 그렇게 강제로 밖으로 내면 밤새 잠도 못자고 어떻게 찾든 문제를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다음날 까지 문 밖에 나가보지도 않은 겁니다…자기가 살려고. 그렇게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 첩이 문밖에 엎드려 죽을 때까지, 해가 뜰 때까지 찾아 보지도 않은 겁니다. 언제까지 찾아 보지 않았냐 하면 죽을 때까지 찾아보지 않은 거예요. 마지막으로 더 이해가 되지 않는 레위인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첩이 밤새 욕보이다 시체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거죠. 그랬더니 레위인이 갑자기 그 반응을 분노로 표출 합니다. 레위인이 말도 안 되는 끔찍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그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잘라 열두 지파에게 다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노의 불을 질러 버리게 만드는 거죠. 본인은 아무런 회개도 하지 않고 아무런 눈물 돌리지 않고 통회함도 없이 그 분노를 자극하며 끔찍한 방법으로 지금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첩을 파멸로 이끈 극도의 이기주의이자, 이게 영적 타락과 어둠의 결론, 죄의 끝판왕 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정말 막장으로 나아가는 구나… 막장의 그 최악의 상황을 우리에게 가감없이 보여주는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는 죄를 쌓아 두고 죄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고 영적으로 타락하면 백성들이나 지도자나 이렇게 끔찍한 일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사람들을 이렇게 구렁텅이로 몰게 되는 끔찍한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발생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인생이 막장까지 가도록 방치하지 마시고, 오늘 이 시간 돌이키고 회개하여 주님 앞에 돌아서며 주님의 경고에 바른 길로 나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사기는 레위인과 첩을 향한 환대와 멸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장인어른과 그 집에서 이 두 사람을 지극히 환대하는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두 사람을 극도로 멸시하는 모습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그 처갓집에 삼일을 머물다 나흘째 되는 날 떠나려고 하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간청하며 조금만 더 먹고 쉬다 가라고 손목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이틀 더 그 집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다가 6일째 되는 날에는 그 청을 뿌리치고 떠나가게 됩니다. 지극한 환대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렇게 지극한 환대를 받은 후 6일 만에 레위인은 종과 그 첩과 함께 집을 향해 가게 되는데, 거리상으로 가는 중간에 숙소로 딱 좋았던 곳은 바로 여부스, 지금의 예루살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방인인 여부스 족속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종이 여기서 짐을 푸는게 좋다는 제안을 함에도 거절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이 사는 땅이 니까 그곳에서 자게 되면 우리가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해가 질 때까지 우린 계속 전진해서 이방인이 아닌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기브아까지 가게 됩니다. 그 기브아라는 땅은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동네입니다. 무리해서라도 기브아에서 자는 게 훨씬 더 마음 편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종의 제안을 거절하고 계속 무리해서 걸어가서 늦은 시간에 기브아의 땅에 도달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리해서 더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생각한 동족이 거하는 동네, 기브아에 도착했는데 거리에서 그들을 집으로 영접해 유숙하게 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무정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족이 나그네로 왔을 때 기쁨으로 그들을 맞고 환대하는 것을 율법으로 주셨습니다. 동족인 나그네가 집에 왔을 때 그를 환대해야 되며 특별히 3일 동안은 잘 먹고 마시게 쉬도록 해야 한다 라는 그런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정체성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레위인이 성읍 거리에 앉아 있는데 아무도 환대하고 맞아주는 사람이 없는 모습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명령으로 주신 나그네 환대법을 전혀 지키지 않고 그 마음이 완전히 메말라 버린 영적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있는지 모르지만 한참이 지나서야 한 노인이 이 레위인 일행을 거두어 집으로 초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노인도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장기로 머무는 나그네였습니다. 베냐민 사람들이 아니라 나그네가 나그네를 맞는 것이지요. 이런 베냐민 지파 사람들의 모습은 가려는 사람을 붙들고 며칠 더 있으라고 강권했던 첩의 친정에서의 지극한 환대와 완전히 대조되고 있습니다. 레위인 생각에는 동족의 땅으로 가는게 여부스 라는 이방 족속에 사는 동네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우리를 환대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는데 결과는 정반대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환대 하고 있지 않은 그 모습…이게 영적 타락 의 모습으로 지금 사사기 에서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담기 원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이 말씀이 증언하는 중요한 영적 진리는 남에 대해서 특별히 나와 별로 상관 없는 사람에 대해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게 영적인 타락과 하향 곡선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나와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나와 직접 상관이 없고 나에게 별로 이득도 되지 않는 그 사람, 그 사람을 내가 어떻게 대하고 생각하는가가 나의 영적인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가깝고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하는 것은 예수님 믿지 않는 자들도 다 잘 한다는 거예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하늘 소속으로 살아갈 때 이 나그네와 같이, 나와 상관없고, 도움도 안되는 그 사람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환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게 나의 영성이고 영적 수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그네 환대법을 율법으로 주신 영적 이유입니다. 지금 인도에서 매일 40만명의 확진 자가 생기고 수천 명이 죽어가고 모든 의료 시스템이 마비 되었습니다. 또 얼마전에는 인도네시아의 군인들이 오래된 잠수함을 타고 훈련 하다가 그 잠수함이 동강 나서 모두 죽었습니다. 우리와 개인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나라들이고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의 아픔을 안타까워하고 공감하며 그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마음이 있다면 저와 여러분들의 영성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남의 일로만 여겨지며 나에게 아무런 상관도 없는 단신 뉴스와 같이 여겨진다면, 내 마음이 하나도 아프지 않고 그냥 닭 쫓는 개처럼 그런 비극을 그냥 무덤덤하게 보고 있다면 지금 나는 영적 하향곡선과 암흑기를 지나가고 있는 사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고 나에게 아주 먼 저 나그네들을 향하여 나의 마음을 열고 품으며 환대하는 태도가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명령이자 저와 여러분들이 하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특징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들에 대한 태도가 나의 영적 수준임을 잊지 말고, 그들을 향하여 나의 마음을 열고 같이 아파하며 같이 기뻐할 수 있는 이 환대의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영적 타락의 끝, 그 결론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있습니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진 자인데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허수아비와 같이 고용된 직원이 되어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하나님의 뜻과 길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그냥 해 주는 도구가 되어 버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안타깝게도 모세의 손자가 그런 타락한 레위인의 대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첫 번째 이야기인 미가의 집과 신상을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19장부터는 두 번째 결론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 이야기에도 주인공으로 레위사람이 등장합니다. 레위인, 영적 지도자가 타락하는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체적인 영적인 분위기와 영적 타락의 끝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는 레위인의 결혼, 첩을 두는 비정상적인 결혼으로 시작됩니다. 레위인은 백성들 중에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백성들 보다는 다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사람들이 바로 레위인인데, 그 레위인이 첩을 취하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겁니다. 첩을 취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죠. 그 당시에는 첩을 가지는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혹은 아들이 없기 때문에 첩을 취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첩을 취할 수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첩을 취하여 여러 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에서는 첩을 취하는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문제가 되는데 그 당시 사회의 보편 기준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일인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 여기서 세상 기준을 붙들고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레위인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첩을 취하는 레위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봤을 때는 별 문제가 아니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큰 죄악이었고, 세상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잘못된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와 죄가 등장하는데 그렇게 첩을 데리고 왔는데 그 첩이 행음을 하고 남편을 떠나 처가집으로 갔습니다. 이 행음이 무엇이었는지 성경에는 정확하게 증언하지 않지만 그 여자는 어찌됐던 간에 남편에게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죄를 돌이킴 없이 그냥 자기 친정 집에 가게 된거죠. 이게 마치 첫번째 이야기인 미가의 엄마가 아들이 큰 돈을 훔쳤는데도 그 아들을 혼내거나 책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회개와 돌이킴 없이 아들을 축복하고 그 돈을 통해 아들을 위해서 신상을 만드는 모습과 매우 유사합니다. 레위지파, 거룩하게 구별된 영적 지도자가 첩을 취하면서 아무렇지도 않고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문제고요. 동시에 그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친정집으로 넉 달이나 가고 있는 것도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겁니다. 죄가 얼마나 무감각해지는지를,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가 관영 한데도 그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죄와 그냥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죄를 아파하거나 회개하거나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죄와 함께 쌓아가며 살아가는 겁니다. 마치 똥을 싸 않고 똥을 치우지 않고 그 냄새와 함께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거죠. 죄가 돌이키고 하나님께 회개할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삶, 하나님 기준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삶, 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레위 집안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세상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는 것이에요. 죄를 죄로 더 이상 여기지 않는 시대를 묵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이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 땅의 것들에 기준을 붙들고 죄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 세상, 그냥 나에게 피해만 주지 않으면 죄는 품고 살아도 냄새가 나도 상관없는 삶 그것이 바로 영적 타락의 끝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에게 맞춰 살아가는 거룩하고 구별된 하늘 소속의 백성이 될 것인지 아니면, 이 땅의 것에, 세상 기준을 붙들고 사람들이 문제 없다 그러면 문제 없는 거고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이 세상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가…이게 나의 소속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거룩한 백성이다 말해도 실제로 내 삶이 드러내는 기준은 하나님 기준이 아니라, 말씀 기준이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 땅의 것들이 내 삶의 기준이라면 나는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이 없을 때 나타난 결론에 모습은 결국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 눈에 보이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죠. 그게 바로 영적인 타락과 암흑기를 지나는 우리들의 자화상 이라는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백성인걸 정말 믿고 고백한다면 내 삶의 기준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넘어서야 합니다. 내 삶의 기준은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그것이 늘 첫번째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사람들의 기준에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는 것을 포기한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 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 시간 땅에 것으로 땅에 속한 것으로 나의 기준을 붙들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의 기준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기준입니다. 그 기준이 무너지는 순간 우리는 결국 타락하고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변해가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키며 주님 앞에 살아가시는 주님의 백성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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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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