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장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마음, 가정, 교회를 지키는 비결이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슬기로운 가정 생활 혹은 슬기로운 교회 생활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가 악해서 보이지 않는 사단 마귀는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 가정과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기 위해 오늘도 호시탐탐 미혹하고 있는 그 실체를 정확하게 직시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가지의 영적 전쟁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언하는데 첫 번째는 바로 나의 육신에 대한 영지 주의의 도전입니다.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기를 강고하는 것을 통해 그 당시 자기 육체를 미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의 영향에 젖어 육체를 하찮게 여기고 육체를 어쩔 수 없이 걸치고 있는 옷 정도로 여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영적 생활과 영이 주도하는 삶을 강조하다가 한쪽만 선택하게 되면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는 자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죠. 육신을 미워하고, 몸을 챙기지 않고,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하는 것이 영적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영과 육의 본질적 이원론으로,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영적 삶을 산다는 명목으로 자기의 육체를 죄악시 하고 미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둘 중에 한쪽에 극단에 빠지게 됩니다. 육체 혐오주의에 빠져서 육신을 학대하고 미워하고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하게 되거나 아니면 육체의 방종주의로 가게 됩니다. 내 몸으로 지은 죄는 영적인 구원과는 상관이 없다는 거죠. 나는 영적 생활만 하면 되기 때문에 영적인 영역에만 존재하면 되니까 육신이 더러워지고 육으로 짓는 모든 죄는 영과 상관이 없다고 여기면서 마음대로 살면서도 자신은 문제 없다고 착각하는 방종으로 빠지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영지주의를 타고 들어오는 사단의 미혹임을, 영적 전쟁의 현장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단이 영지주의 탈을 쓰고 오는 미혹임을 강하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냥 내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삶에 빠지거나 아예 육신을 혐오해서 하찮게 여기고 학대하는 이 둘 중의 하나의 극단에 빠지기 쉬운데 여러분 매일매일 우리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 몸에 거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성경은 몸 챙김과 마음의 챙김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영적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자기 몸을 챙기고 자기 몸을 다스리고 깨끗하게 준비시키는 것이 영적 삶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 몸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나를 놀랍게 쓰시기 위해 나는 금 그릇이나 은 그릇이 될 필요도 없고, 오직 깨끗한 그릇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로 내 거룩한 몸을 씻으며 그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매일 경주해야 하는 영적 삶입니다. 두 번째 영적 전쟁은 온전한 떠남과 온전한 하나됨입니다. 남녀의 결혼의 원리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적 원리로 풀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가 그리스도와 하나되는 원리가 가정에서 결혼의 원리로 체득하도록 배우신 신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그냥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해서 함께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밀이 녹아 있는 신비의 현장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이 남편, 아내 자녀의 모습으로, 본체상 동일 본질이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하는 그 모습을 가정을 통해 체득하고 경험하기 원하는 신비가 녹아 있는 현장이 가정이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을 통해 가정은 결혼의 성경적 원리를 통해 성도됨의 삶을 경험하는 체득의 현장입니다. 세 단어가 결혼의 성경적 원리로 강조되는데, 떠나…합하여…한 육체…입니다. 결혼이란 바로 남편과 아내 될 사람이 부모에게서 온전히 떠나는 겁니다. 부모에게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모든 것을 떠나는 겁니다. 온전히 부모에게서 떠나야 그 아내와 남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래서 한 육체가 되는 신비를 가정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세상에서 온전히 떠나 출세상을 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되어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신 교회에 소속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세울 때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부모에게서 온전히 떠나는 게 원리입니다. 그 부모에게 떠나지 못하고 부모에게 기웃 거리고 의존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남편과 아내가 온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는 불상사를 만든다는 거예요. 성도가 여전히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본질적 문제는 성도라 그러는데 세상을 온전히 못 떠나는 겁니다 세상을 여전히 의존하고 기대고 기웃 기웃거리는 거예요. 부모에게 온전히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성도들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못 떠나게 되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 할 때, 이 세상에서 온전히 단절하여 세상을 떠나게 되는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우리의 마음과 가정과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깨어 근신하고 기도하며 성경적 원리를 붙들고 지키며, 세우는 일에 전쟁에 임하는 마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부모에게서 온전히 떠나 합하여 한육체가 되는 것은 단순히 슬기로운 결혼 생활을 위한 원리만이 아니라, 슬기로운 신앙 생활의 원리이나 더 나아가 영적 전쟁에서 치열하게 지켜 생명 걸고 싸워야 할 원리인 것입니다. 교회도 가정도 나의 마음도 바로 온전한 단절과 떠남이 있어야 온전히 그리스도와 하나되고 그 분과 한 몸 되는 놀라운 역사가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생활은 장난이 아니고 신앙생활은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전쟁이고 엄숙한 주님의 신비 가운데 거하는 하늘의 축복입니다. 주님 내가 세상에서 온전히 단절하여 떠나가게 도와 주옵소서. 세상에서 완전히 떠남을 통해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와 한 몸되는 신비의 비밀을 누리게 도와 주옵소서. 이것이 바로 성도로서 우리가 경험해야 될 놀라운 삶의 비결이고 신비입니다. 바라기는 영적 전쟁이 현장인 내 몸을 미워하거나 함부로 대하거나 학대하거나 내 몸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내 몸을 깨끗하고 거룩하고 보호하며 몸을 챙기며 내 몸에 이 시간 거하시는 거룩한 성령 하나님이 놀랍게 역사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현재형으로 경험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5장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거룩한 영적 생활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는 대부분 가정 교회였기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었고 가정이 교회였습니다. 가정의 질서를 제대로 세우는 것이 교회의 영적 질서를 세우는 것이었고, 가정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 교회의 어려움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그냥 가정 생활을 어떻게 잘할까 성도로서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잘 지낼까를 알려 주는 게 아니라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고 승리해야 하는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사단 마귀는 계속해서 영적 전투의 현상으로서 세 곳의 천국 맛보기를 하는 나의 마음, 가정과 교회를 끊임없이 흔들고 무너뜨리려고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 영적 전쟁 현장에서 무너지지 않고 든든히 하나님이 주신 은혜 가운데 거하는 가정을 세운다는 것이 치열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배우는 현장이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신비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본체상 동등되신 한 하나님,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로, 성자 예수님은 자녀로서 가정을 통하여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실체로 경험하는 현장이 되는지 배웠습니다. 그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신비 가운데 아내는 그리스도에게 하듯 남편에게 자발적인 순종을 하는 것을 통해 이 영적 질서가 세워지고 하늘의 복이 담기는 신비를 배웠습니다. 오늘은 남편에게 주시는 아내를 향한 명령으로, 3가지 사랑의 모습으로 아내에게 피차 복종해야 함을 증언합니다. 첫번째,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하시듯이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할 것을 명령하셨는데 그 사랑이란 아가페 사랑으로 자기를 던지고 버리면서 주는 일방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자신을 주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일반적인 남편들은 아내에게 일방적으로나 희생적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한문에도 나와있듯 하늘 천보다 위에 있는 자가 지아비, 부 아니겠습니까? 하늘보다 위에 있는 분이 남편이라고 여기며 오랫동안 살아왔기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하거나 이런 내어주는 사랑 같은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가정을 세우고 지키는 생각보다 소홀했고요 그냥 가정은 저절로 지켜지고, 저절로 세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아니라고 선명하게 증언합니다. 절대 저절로 지켜지거나 저절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비결은 아내를 예수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겁니다. 가정을 지키고 세우기 위해 남편이 해야 될 첫 번째는 아내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이 그 몸을 다 바쳐서 사랑하라는 겁니다. 교회를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하고 그 고백 위에 세우셨고요. 그 교회를 사랑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쏟으시며 피를 쏟고 몸이 찢기시기 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남편들에게 아내를 위해 피 흘리는 사랑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피 흘리는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이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군림하고 강요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주는 희생과 섬김, 돌봄과 책임으로 아내를 사랑할 때 그게 가정을 세우는 비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 같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아내를 사랑하며 그 아내를 향한 책임과 섬김과 돌봄과 책임을 통하여 그 가정이 지켜지며 든든히 세워지는 하늘의 복을 경험하시기 원합니다. 두 번째, 아내를 예수님의 마음으로 덮어주는 사랑을 하라는 겁니다. 남편들이 아내를 덮어주는 사랑을 한다는 게 무엇인가….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냐 하면 성도들 사이에 티나 주름이나 흠 같은 게 있어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넉넉한 은혜로 다 덮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아내에게 보이는 티나 주름이나 흠을 지적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덮어주고, 마치 없는 것처럼 녹여주는 사랑이 바로 아내를 향한 남편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은 사랑이라는 것이죠. 부부 사이에 오랫동안 가까이 있다 보면 상대편의 티나 주름이나 흠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외적으로도 티나 주름이나 흠이 이곳저곳에 생기기도 하지만 내면에도 티나 주름이나 흠이 계속 생기게 마련입니다.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것들이 잘 보이게 됩니다. 그때 남편이 아내의 티나 주름이나 흠을 계속 부각하고 지적하고 그것을 가지고 흔들게 되면 가정이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신을 버리는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는 건 그렇게 티나 주름이나 흠이 보일 때 그것을 잘 덮어줄 수 있는 사랑입니다. 아내에게 티나 주름이나 흠이 보일 때마다 그것을 잘 씻고 덮어서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아내로 세워 주는 것, 이것이 아내에게 해야 될 남편의 사랑입니다. 아내의 티나 주름이나 흠이 보일 때마다 그것을 예수님 마음으로 품고 녹이며 영광스럽게 아내를 세워줄 수 있는 사랑을 하게 도와 주옵소서…이것이 바로 남편이 해야 될 간절한 중보기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하여 가정이 든든히 세워지고 지켜지는 비결입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사랑하듯이 남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이죠.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면 결국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거라는 거예요. 아내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하면 그게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편은 복종과 사랑 중에 사랑을 통하여 복종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아내는 복종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핵심은 항상 그리스도에게 하듯 복종하고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가정의 위기는 결국 서로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고집하고 이것 만이 사랑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출발 자체가 나의 희생을 통하여 상대방의 부족을 채워 주겠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부족한 것을 상대를 통해 채움 받겠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가정이 흔들리고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도 아내도 부부관계에 있어서 아내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나에게 복종하는가를 묻기보다는, 남편이 그리스도처럼 나를 사랑하는가를 묻기보다 내 자신에게 먼저 그 부부 관계 가운데 예수님이 나에게 주인이신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도 부부 사이에 예수님이 온전히 주인이신가를 물어볼 때 그 가정이 지켜지고 든든히 세워질 수 있습니다. 많은 가정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고, 교회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흔들기를 좋아하며 무너뜨리기를 사모하는 악한 세력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단은 끊임없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 갈등 관계를 조장하고 투쟁의 현장으로 싸움과 갈등이 현장이 되 버리게 만듭니다. 가정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흔들고 미혹합니다. 가정이 저절로 세워지는 것처럼 착각하지 말고, 영적 전쟁의 심정으로 깨어 근신 하고 기도하며 가정을 세우고 지키는데 영적 책임을 다하십시오. 가정을 지키고 세워 나갈 일차적 책임이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아내를 예수님의 내어 주심으로 희생하는 사랑, 덮어주고 품어주는 사랑, 그게 바로 가정을 세우는 남편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주심 같이 희생함으로 사랑하십시오. 흠과 티와 주름이 보일 때마다 그것을 다 품어주고 덮어주며 영광스러운 아내로 세워주십시오. 자기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랑함을 통해 내 마음이 지켜지고, 우리 가정이 지켜지고 든든히 세워지며 주님 앞에 영광 돌리는 귀하고 복된 가정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베소서 5장 전체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영적 생활이 무엇인가를 실제적이자 매우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하고 구별되게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과 어둠을 거절하고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 살아야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며 그 어둠 가운데 헤매는 자가 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그 연장 선상에서 오늘 말씀은 지혜 없는 자 같이 살지 말고 지혜 있는 자로 사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영적 생활임을 증언합니다.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가 좀 스마트하고 내가 이것저것을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되는 겁니다.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이시기에 지혜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예수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는 자 같이 살라는 것입니다. 잠언의 주제도 뭐냐면 전체가 다 지혜입니다. 지혜롭게 살아가는 자, 지혜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감정대로 살고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는데, 죄로 말미암아 우리 감정과 생각이 타락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감정과 생각이 타락했는데 내 감정대로 살고 내 마음대로 살면 결국 그게 망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 감정과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나를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 있는 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 있는 자들은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사는 대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가지고 내 삶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삶인지를 늘 반성하며 조심하며, 함부로 미련하게 살지 않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혜가 없으면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살아가는 것을 넘어 나의 뜻만 붙드는 인생이 됩니다. 지혜가 없는 삶은 오직 자신의 뜻이 무엇인가만 헤아리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항상 내 계획과 내 뜻만 중요합니다. 내 생각과 내 감정에 사로잡혀 오직 내 뜻과 내 계획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요. 그저 내 기쁨만 찾아가는 자입니다. 내 기쁨을 위해 내 모든 방탕과 방종을 다 쏟아 넣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반면에 지혜 있는 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늘 의식하며 분별하며 살아갑니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뭡니까? 내가 지금 주님 뜻 가운데 조율 받고 있는가…이것을 늘 의식하며 내 삶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바로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녹아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자는 결국 내가 하나님께 기쁨 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아는 인생이 복된 인생이자 지혜로운 인생입니다. 험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성도로서 나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살아가는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성도의 영적 생활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생활은 세월을 아끼는 자입니다. 이 세월이 천년만년 나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정말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도 나이가 어느 정도 차게 되면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거 정도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돈을 조금 번다고 시간을 마음대로 팔아버리고 낭비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돈을 가지고 시간을 삽니다.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을 살 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 맺고 영광 돌리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대가 악할 수록 세월을 아끼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낀다는 말이 영어로는 redeem, 건져낸다 혹은 구원한다…입니다. 세월을 아낀다는 말이 그냥 시간을 잘 활용하고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미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는 건 이 세상에 있는 시간은 구원을 받아야 되는 시간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세월을 아낀다, 즉 시간을 구원한다는 말이 뭐냐면 내 흘러가는 시간에 하나님의 나라와 통치가 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그 시간이 하늘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시간이 되는 것, 그게 시간을 건지고 시간을 redeem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이 새벽 기도를 나온 여러분들의 마음과 눈과 귀가 하늘을 향하여 열려서 주님의 뜻을 구하면 이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 우리가 맞닿아 있는 시간, 구원하는 시간이 되는 겁니다. 하늘과 땅이 맞닿아 있게 되어 하늘의 시간이 땅의 시간에 침투하는 놀라운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열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 마음에 임하는 시간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세월을 아끼고 시간을 건지는 것입니다. 이 악한 시대 정신에 젖어 살게 되면 그냥 시간을 흘러가게 놔두고 모든 게 다 내 시간인 줄 알고 내 뜻만 구하다 내가 원하는 것만 추구하다가, 모든 보물을 이 세상에 쌓아 두고 살다 그냥 죽어버리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시간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자꾸 망각하게 되며 한정된 시간을 살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하는 시간이 오고 있음을 망각하는 겁니다. 늘 우리는 흘러가는 시간을 그냥 두지 않고 그것을 건져서 하늘을 향하여 들려 하나님과 우리가 맞닿는 시간으로,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이 성도의 영적 생활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생활은 성령 충만함을 받는 인생입니다. 왜 에베소서에서 굳이 술 취하지 말라는 얘기를 방탕함과 연결하면서 이렇게 강조했을까요? 그 당시 에베소라는 항구도시에서는 술 취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것 발견하게 되고, 교회를 나오면서도, 변화됬다고 말하는 성도들 가운데도 술 문제로 어려운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는 것을 반추해 볼 수 있습니다. 술에 취해 떡이 되고 인간이 하지 못할 방탕하고 악한 일들이 일어났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삥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술 취하지 말라” 고 권면하는 겁니다. 또한 술취함을 성령 충만의 대조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술 취함과 성령 충만의 공통점은 지배를 당한다는 것입니다. 술 취하게 되면 사람들이 정신없이 막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걸 술기운에 했다…그럽니다. 술기운으로 말미암아 평소에는 하지 못하는 이상한 행동들을 하는게 술이 취하는 겁니다. 술에 취하면 단순히 술에 지배를 받는게 아니라, 방탕을 통하여 사단에게 사로잡히는 먹잇감이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성령 충만하면 성령님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 하나님의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술기운과는 비교되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기운으로 주님의 힘이 내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술 취해서 술기운에 방탕하고 사단의 기쁨 되는 삶 살지 말고 성령 충만하여 하늘의 기운을 받아 하나님의 힘이 내 힘이 되는 삶으로 주님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생활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이자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생활의 큰 결론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우리는 그리스도 사랑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우린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답게 살 수 있고 지혜로운 자로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이 악한 시대에 시간을 구원하며 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고 주님의 힘이 내 힘이 될 때 우리는 그런 놀라운 삶을 살 줄 믿습니다.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임하는 시간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는 내가 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며 늘 말씀 가운데 머물며, 나를 붙이며 말씀으로 내가 변화받는 놀라운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영적 생활을 통하여 주님의 기쁨 되는 삶을 살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삶을 살기를 사모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어떻게 행할지를 주님의 뜻 가운데 자세히 주의하며 늘 말씀 가운데 내 인생을 비추며 주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은혜 받는데 가시와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편하기도 하고 오랫동안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에 역행하는 단어와 가르침이 들어있다고 여겨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드는 편견을 가진 부분이기도 합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뒤로 하고라도 복종이라는 말 자체가 이 시대를 역행하는 단어로 여겨집니다. 복종을 강조하는 곳은 교회와 군대 밖에 없다고 우스갯소리로 얘기할 정도로 이 시대에 인기 없는 단어가 바로 복종입니다. 복종이라는 말도 마음에 부딪치는데 복종을 남편에게 하라고 하니, 이 말씀을 그냥 생선 가시와 같이 넘어가려 한다거나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말씀으로 취급해 버리기도 하고 목회자들도 강단에서 이 부분을 설교하는 부분을 즐겨 하지 않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에 두 가지의 큰 오해가 있습니다. 첫번째 오해는 이 말씀을 그냥 크리스찬 가정에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라는 그냥 부부생활 정도의 가이드로 바라보는 오해입니다. 가정 생활 지침서 정도로, 남편과 아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를 알려주는 말씀이라 생각하는 겁니다. 두번째 오해는 그냥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을 하고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오해입니다. 그렇기에 가정 안에서 복종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영적인 관점에서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말씀 기억하시겠지만 이 말씀은 영적 전쟁을 치르듯이 시대가 악한 때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갈까를 강조하고 있는 그 컨텍스트에서 이 말씀이 주어졌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가정은 단순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그냥 사랑해서 함께 가정을 이루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비한 하나님의 영적 질서와 은혜가 담기는데 남편과 아내가 하나 되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심으로 한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가정의 머리가 된다고 얘기하는 본질은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의 머리 되는 가정에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고는 남편과 아내가 절대 한 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삼위일체의 신비를 경험하는 하나님의 디자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신비로 고백하는 삼위일체의 고백이 뭡니까? 고백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세 하나님이 본체로 동등하시고 동질이신 한 분이시지만 역할이 다르다는 거예요.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역사 하시는 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하나님과 본체상 동등하신데 그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인간이 되시고 아들이 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에서 남편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을, 자녀들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을, 아내를 통하여 그것을 매개하는 그 놀라운 은혜로 성령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현장으로 세워 주신 곳이 가정이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가정에 녹아 있게 하신 것입니다. 때가 악하고 시대가 악하면서 사단 마귀는 계속 가정을 흔들고 교회를 흔듭니다. 하늘의 복과 능력이 담기는 통로인 가정을 깨고 해체하려는 미혹이 끊이질 않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가정의 모습이 어떻냐면 결혼을 지옥이라 그러고 가정을 권력투쟁의 현장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를, 부모와 자녀 사이를 갈등과 분열하게 조장하고 마치 원수라도 되는 듯이 이간질합니다. 가정을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아요. 가정하면 모두 부정적 정서와 부정적인 이미지를 계속 떠올리게 만들어 가정의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다 무너뜨리는 악한 시대를 살고 있고, 그렇게 무너뜨리기 원하는 사단 마귀의 역사가 있음을 잊지 말고 이것을 영적 전쟁에서 가정을 지키고 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바라보면서 이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당시에 가정은 교회였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이렇게 우리와 같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는 교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그 당시 큰 집에서 모이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에서는 가정은 교회였고 교회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가정의 영적 질서를 세우는 것은 교회의 영적 질서를 세우는 거와 동일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질서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가정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가정이 교회였다는 이 컨텍스트 안에서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것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될 게 있습니다. 이 세상과 다른 거룩하고 구별된 성도들의 삶을 얘기한다면 그 당시에는 이미 문화적으로 남편에게 아내가 다 복종하는 문화였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심한 거의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는 게 당연했던 시대였습니다. 그 당시에 남편은 아내에게 군림했고 아내를 함부로 해도 상관없었고 심지어 아내를 버리고 싶으면 이혼증서를 마음대로 써도 상관없는게 그 당시 보편적 문화였습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복종하는 것은 세상에 당연하고도 보편적 문화였는데 왜 오늘 말씀은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을 강조하는가…하면 뒷부분의 핵심이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거예요. 이게 단순히 원웨이로 한 사람만 복종하는게 아니라 영적 큰 그림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는 큰 명령 가운데 남편에게 주께하 듯 복종하라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라 오직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겁니다. 남성과 여성의 주종 관계라던지 서열을 얘기하는게 아니라 아내들은 그 한 특별한 남자인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종이라는 말이 성경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강요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는 복종이 아니라 이 말씀에서 복종은 스스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지도자의 명령을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기쁨을 동력으로 자신을 자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등한데 동등함을 취하지 않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원하는 복종을 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하신 자발적 복종,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한 자발적 복종과 같은 마음으로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 있어서 복종은 영적인 삶으로써 예수님 같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자발적 순종입니다. 겉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는 복종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과 능력이 없으면 절대 불가능한 겁니다. 동등한데 동등함을 자발적으로 내어 맡기며 이 영적인 질서가 우리 가정에 흘러가기를 소망하며 내 마음에 기쁨으로 하는 복종입니다. 그 당시 세상에서의 복종은 뭡니까? 억압과 군림과 누름에 복종이었습니다. 너는 나에게 무조건 엎드려…강요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는 복종이었어요.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되시며 그리스도에게 하는 복종은 억압과 군림의 복종이 아니라 가정을 돌보고 책임지는 대표자로서 남편을 인정하는 복종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군림하시려고 목을 꼿꼿이 세우면서 너희는 다 나에게 엎드려…그렇게 강요하며 누르시면서 머리 되신게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회 머리 되심은 돌보는 책임과 대표자로서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을 근거로 하게 되는 복종이라는 것입니다. John Stott라는 유명한 사람은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의 머리 되심과 같이 복종한다는 것은 권위를 통하여 억압과 군림을 통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돌보는 것이며 책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됨과 같이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님께 하듯이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남편이 남편의 권위를 계속 주장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게 없습니다. 남편의 권위는 스스로 주장하면서 세워지는 게 아닙니다. 남편의 권위는 누가 세워 주냐면 부인이 세워 주는 겁니다. 동등하지만 동등됨을 내려 맡기며 남편을 세워주는 그 아내에 대한 모습을 통하여 영적 질서가 세워지고 하늘의 축복과 은혜가 가정에 임하게 되는 것이죠. 더 나아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할 명령하신 또 다른 배경이 있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에는 홀로 신앙 생활 하는 부인들, 즉 남편들이 불신자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남편 아내가 다 같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었지만 대다수는 혼자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박해와 핍박을 이겨내며 몰래 혼자 신앙 생활하는 부인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거예요. 한국에서도 초기 기독교를 보면 남편과 가정의 핍박을 이기며 혼자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많은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남편 하면 떠올리는 게 그들의 영혼 구원 이었습니다. 불신자인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 간절히 부르짖는 부인들이 많았습니다. 그 남편의 변화와 구원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했던 게 그 남편을 그리스도에게 하듯 자발적으로 마음을 다해 남편을 세워주고 복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복종하면서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죠. 그때 남편이 뒤집어지며 완전히 복음으로 세 사람 된 수많은 간증거리들이 그 초대교회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 신비를 맛보아 아는 현장입니다. 창조의 놀라운 역사와 질서를 배우는 현장이자 하늘의 복을 경험하는 현장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습니다.영적인 질서와 순종을 배워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그 순종의 은혜를 통하여 영적 질서가 가정 안에 세워지기 위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하듯 피차 복종하되, 아내는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동등한데 동등함을 취하지 않고 내어 맡기며 남편을 세워주며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며 그것을 통하여 하늘의 축복이 담기는 가정 되기를 사모하십시오. 피차 복종하고 피차 사랑한다는 큰 그림 가운데 오늘 말씀이 있기에 항상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이 서로에게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악한 시대에 계속해서 영적인 질서와 축복을 무너뜨리며 가정 무너뜨리며 해체하려 하는 사단 마귀의 미혹에서 승리하며 우리 가정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며 성령 하나님에게 충만함을 받아 든든히 가정이 세워 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년 새해 처음으로 새벽 기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 빛의 자녀들처럼 살고 행하라는 말씀이라는 것 참으로 중요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5장은 우리가 성도로써 어떻게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는가에 대한 첫 번째 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 살아가는 삶, 두번째 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사랑을 나의 움직이는 힘으로 살아가는 삶과 어둠이 아닌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자녀로 성도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임을 증언합니다. 성경 말씀에는 생명과 빛과 진리와 힘이 있는 주님의 말숨입니다. 그 말씀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어떻게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가?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비결은 우리가 스스로 빛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겁니다. 내가 스스로 빛이 되려 하면 안되고, 내가 선하려 하면 안되고, 내가 진리인 것처럼 내가 생명인 것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는 발광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내는 반사체입니다. 우리는 해가 아니라 해의 빛을 반사하는 달이라는 것이죠. 내 스스로 생명이 없고 내 스스로 빛과 진리와 능력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고 늘 주님과 연결되어 주 안에서 살아갈 때 주 안에서 빛의 자녀처럼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자녀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예수님에게 선명히 붙어 있고 연결되어 예수님 안에 머물 때 나타나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빛이 나에게 비추며 그 빛이 내 일상에 연결되는 것이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 답게 살아가는 삶 첫번째는 주 안에서 빛의 자녀가 인생을 살면서 맺는 빛의 열매를 맺길 사모하는 것입니다. 삥 돌리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우리에게 증언합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빛을 받아 살아가는 빛의 자녀로 살게 되면 우리 인생의 끝에 남게 되는 열매가 모든 착함, 의로움, 진실함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꼭 붙어 있어 그분이 주시는 은혜와 빛 가운데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사도하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는 말씀을 통하여 혼돈과 어둠이 다 물러가게 됨을 봅니다. 빛이신 하나님 앞에 모든 혼란과 어둠이 물러가고 무질서 가운데 질서가 잡히게 되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빛이 우리 가운데 들어가게 되면 모든 어둠과 죄가 밀려나며 모든 선한 것이 회복되며 모든 무질서가 질서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그리스도 밖에서 어둠이었습니다. 우리가 죄의 진흙탕에서 뒹굴고 살았기에 어둠이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 없이 예수님 없이 내가 빛되려 하고, 생명과 진리가 되려 하고, 힘과 능력 되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이 어둠이었고, 선과 악을 구별할 능력조차 사라진 그 삶이 어둠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되며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가 어둠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스스로 빛 되려는 모든 시도를 내려 놓고, 예수님 안에 꼭 머물러 그 안에서 빛의 자녀같이 살아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 빛의 자녀로 산다는 것은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 믿고 새 사람 되었는데 여전히 어둠과 죄의 진흙탕에서 구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빛의 열매의 반대겠죠. 모든 착함의 반대인 모든 악함, 의로움의 반대인 불의 진실함의 반대인 거짓이겠죠. 결국 열매없는 어둠의 일은 모든 악한 것과 불의와 거짓입니다. 당시 항구도시였던 에베소에 교회가 세워진 게 에베소 교회아니겠습니까? 에베소라는 도시는 고린도와 마찬가지로 악이 관영했던 곳이었습니다. 모든 악함과 불의와 거짓이 판치고 있었습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냥 어둠과 진흙탕에 구르는 것이 일상화 되었던 것이 그 시대에 에베소라는 도시의 삶이었습니다. 그런 어둠의 도시 한 복판에서 빛의 자녀같이 행한다는 것은 이런 모든 악함과 불의와 거짓의 일에 참여하지 않고 그것을 거절하고 단절하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악하게 행하고 불의하고 거짓을 행한다고 똑같이 살아가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기준을 붙들고 다름과 차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이 나쁜 것임을 말하고 선포하는 것을 통해 이렇게 악하고 불의하고 거짓된 것들에 동참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와 다른 빛의 자녀임을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어둠의 일을 책망하는 겁니다. 어둠의 일을 책망하는 것은 주님이 주신 빛의 권세를 가지고 이것은 어둠의 일입니다…라고 선포하면서 그 가운데 내가 동참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번째,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빛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마음에 두고 열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나와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내 마음에 알게 도와주옵소서…간구하는 그게 빛의 자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어둠에 있을 때 우리는 늘 무엇만 고민하며 살았겠습니까? 늘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거예요 나를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만을 고민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나를 기쁘게 하고 나를 신바람 나게 하는게 잘못된 게 없어 보이지만 그것이 나의 모든 고민의 전부라면 모든 관심의 전부라면 나만을 기쁘게 하고 나만을 신바람 나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어둠에 있는 사단을 기쁘게 하고 신바람 나게 하는 먹잇거리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악함과 불의와 거짓이 나를 기쁘게 하고 사단만 신바람 나게 하는 잘못된 삶의 열매라는 것을, 더 나아가 그런 삶은 은밀히 행하는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만을 기쁘게 하고 사단 마귀를 신바람 나게 하는 은밀하게 행하는 것들이 뭡니까? 음란, 방탕, 탐심입니다. 겉으로는 나를 기쁘게 하고 즐기는 것 같지만 결국 사단을 기쁘게 하고 신바람 나게 하는 악한 일, 어두움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청산하는 비결이, 나를 기뻐하는 삶을 넘어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늘 마음에 새기며 사는 삶입니다. 빛의 자녀와 같이 빛의 자녀 답게 살라는 권면을 마음에 깊게 새기기 원합니다. 전에 어둠이었으나 이제 주 안에서 빛이 된 빛의 자녀들입니다. 그렇기에 빛의 자녀처럼 행하며 살아가기를 열망하십시오.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열망하십시오.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인 모든 악함과 불의와 거짓을 거절하고 동참하지 마십시오.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몰두하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하며 내 인생을 통하여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게 하는 것 이것이 빛의 자녀로서 우리 인생의 목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나온 자리가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이 새벽에 나오신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시고 기뻐하심을 확신하기에, 이 새벽기도 시간이 빛의 자녀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이 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 주님의 빛이 드러나며 잠자는 자들이 깨어나 주님의 선명한 빛이 임하는 삶,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 선명히 비춰지는 반사체로의 삶을 선명하게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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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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